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37화 (37/250)

#37

04. 취미는 적어도 세 가지는 있어야 해

“죽겠다…….”

밤꼬치에 비척비척 입장한 이연이 바 테이블에 털썩 앉아 엎드렸다. 살갑게 인사한 수아가 메뉴판을 건네주며 물었다.

“어딜 갔다 오길래 그렇게 지쳤어요?”

“요즘 병원을 좀 다니고 있어서요.”

“어머, 어디 다치셨어요?”

“지금은 거의 다 나았어요.”

연구소를 폭파한 이후, 산오는 이연을 응급실로 끌고 가 당장 치료시켰다. 김 박사가 죽일 생각은 아니었는지 상처도 그리 깊지 않았고, 어떻게 찾은 건지 치유계 초능력자까지 수배한 덕에 이연의 상처는 금세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초능력자가 일반인보다 대체적으로 신체 능력이 좋은 편이라는 연구 결과를 생각하면 걱정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산오가 보기엔 좀 달랐던 모양이다.

하얗게 질려 있던 안색이 괜찮아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침대 밖을 나오는 것을 허락한 산오의 엄격함 하에 이연은 그 후로도 꼬박꼬박 병원에 들러 경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의사조차 이제 내원 필요 없이 당분간 푹 보양하면 괜찮다고 했는데도 산오는 영 믿지 않는 눈치였다. 덕분에 제산오가 평소의 이연을 얼마나 허접하게 보고 있었는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도 미루고 미루다가 퇴근 직전에 결국 산오가 병원에 끌고 갔다. 실컷 잔소리해서 기껏 병원까지 갔는데 정작 산오는 이연이 진료를 마치고 나오자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훌쩍 사라졌다. 얼결에 혼자 남겨진 이연은 터덜터덜 혼자 퇴근하다 꼬치가 먹고 싶어 들른 참이었다.

“부상이니 술은 드시면 안 되겠네.”

“거의 나았는데요?”

“에이, 혹시 모르잖아요.”

“아아아…….”

이연이 징징거리며 다시 테이블에 엎어졌다. 산오의 눈치를 보는 건지 문제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 혜강도 도통 술 먹자는 제의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연이 나서서 먹자고 해도 바쁘다며 고사하는 판이었다.

대체 뭐가 바쁘다는 거야? 혜강이 집과 사무실만 오가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이연에게는 턱도 없는 변명이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다른 사람이 아닐 거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제가 제산오도 아니고…….

혜강 아니면 술친구도 없었다. 덕분에 이연은 꽤 오랫동안 강제 금주 중이었다.

“대신에 서비스 좀 드릴게요. 많이 드시고 가세요.”

“사장님이 최곱니다.”

금세 회복한 이연이 눈을 반짝이며 메뉴판을 돌려주었다. 수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본전은 칠까 싶은 조그마한 가게인데도 수아는 유독 서비스에 넉넉했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염통과 곱창을 예쁘게 끼운 꼬치가 가지런히 담긴 접시가 두 개 놓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기를 입 안에 넣자마자 짭조름한 맛이 퍼졌다.

가게 안의 손님이라곤 이연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아는 자연스럽게 그 앞에 앉았다. 열심히 우물대던 이연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수아가 물었다.

“혜강이랑 그 잘생긴 알바생은 오늘 안 왔네요?”

“둘 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도망갔어요.”

다들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이연의 웅얼거림을 용케 알아들은 수아가 방긋 웃었다.

“그렇구나. 잘생긴 알바생이 없어져서 힘이 없는 거구나?”

갑자기요?

“예?”

“혜강이는 늘 그랬잖아요. 그때는 이연 씨 표정이 이 정도로 우중충하지는 않았는걸요.”

“……사장님은 왜 혜강이한테는 말 놔요?”

수아 역시 이연처럼, 대부분의 사람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직업의 영향도 있지만 성격이 큰 것 같았다.

나이라고 하면 이연과 혜강 모두 수아보다 연하고, 친분이라고 하면 이연이 훨씬 더 자주 오는데 수아가 반말을 하는 건 혜강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수아는 유독 혜강에게 더 후하곤 했다. 술을 더 준다든지……. 그렇다고 이연에게 막 대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지만.

“혜강이는 귀엽잖아요. 제가 꼬시고 있거든요.”

“…….”

이연이 조금 물러났다. 그게 다 흑심이 담긴 서비스였다니? 혜강이에게 알려야 하나?

“농담이에요. 귀여워하는 건 맞지만.”

수아가 웃으며 그래서 잘생긴 알바생이 어떻게 했는데요, 하고 화제를 되돌렸다. 안 통하네. 이연이 우울하게 새로운 꼬치를 집어 들었다.

수아는 가끔 이렇게 영 헛다리인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까지 헛다리는 아닌 소리를 하곤 했다. 이연이 땅이 꺼질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근래에 제산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동 반사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표정 관리가 안 된 모양이다.

피를 한 바가지 쏟아서 헤롱거리느라 산오가 저를 들쳐 멨는지 엎어 쳤는지도 모를 당시에는 크게 신경을 안 썼는데, 그, 사람이 사람을 안아 든다는 게 그래도 좀 긴밀한 자세가 아닌가. 어느 정도의 호감이 없으면 천하의 제산오가 사람이 죽든 말든 그런 걸 하겠느냔 말이다.

그런 점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꽤 갸륵했던 것이다. 어쩌면, 하는 의심이 몽글몽글 피어 나오게 할 만큼 다정한 행동이었다.

그 와중에 벌레 같다고 한 게 문제지.

‘아니, 왜 하필 벌레냐고.’

작고 귀여운 생물을 말하고 싶었으면 많은 게 있잖아. 햄스터라든가, 달팽이라든가, 병아리라든가! 물론 이연 자신이 본인을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다. 그냥 보편적인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이야기였다.

심지어 작고 귀엽다는 것도 이연의 자의적 해석이 들어갔다. 산오가 날파리를 말한 건지 애벌레를 말한 건지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발언의 진의는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왜, 무슨 일 있구나?”

“아니, 사장님.”

제산오의 행동 양식은 이연에게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수밖에. 이연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 사람보고 벌레라고 하면, 보통 무슨 의미예요?”

수아는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선에서 이 청년에게 상처주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이연이 머쓱하게 변명했다.

“아니, 뭐. 꼬물거리는 게 볼 만하다거나.”

“그렇게까지?”

“…….”

마음의 소리가 튀어 나간 수아가 뒤늦게 어머, 하고 제 입을 가렸지만 늦었다. 이연의 얼굴이 조금 더 우울하게 변했다.

“역시 욕이겠죠?”

“아니…….”

눈치를 보던 수아가 음료수를 따서 건네주었다. 슬픈 건 슬픈 거고 서비스는 좋았다. 이연이 냉큼 받아 마셨다.

“왜요, 좋아하는 상대한테 그런 말을 들은 거예요?”

“좋, 아하다뇨? 누가? 누굴요? 아닙니다.”

이연이 대뜸 정색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벌레라는 소리를 들어도 상처받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일반적인 이야기를 그런 특별한 감정으로 끌고 가는 건 옳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반응은 너무 극적이었기 때문에 수아에게 털끝만큼의 신뢰도 주지 못했다.

“우와, 이연 씨한테 연애 상담 해 줄 날도 오네요.”

“아니, 연애 상담이 아니라…….”

“편하게 말해 봐요. 저 상담 엄청 잘하거든요.”

……그래도 물어보는 것 정도는……. 금세 귀가 팔랑인 이연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연애 상담 같은 건 절대, 아니지만.”

“네, 네.”

“……상대 행동이 좀 헷갈려서요. 이게 제가 이상한 건지, 그쪽이 이상한 건지…….”

이연의 두서없는 중얼거림에 수아가 흠, 하고 눈을 굴렸다. 제법 진지하게 생각해 주는 듯했다.

“어떤 게 헷갈리는 건데요?”

“그냥 뭐, 같이 다니니까 얼떨결에 몸이 닿을 때도 있잖아요. 그런 거라든가.”

“몸이 닿아요? ……희롱?”

수아가 조금 주저하며 묻자, 이연이 펄쩍 뛰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리고 다쳤을 때 병원으로 데려다준 적도 있고, 위험하다 싶으면 잡아당기고 그러거든요.”

안타깝게도 그 구구절절한 피력을 수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음……. 이연 씨. 제가 보기엔 상식선의 행동이거든요.”

너무 정상적인 설명이었다.

“그건…….”

그러네? 이연이 멈칫했다.

“이연 씨가 친한 사람은 많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 배려에 익숙하지 않은 거 아닐까요?”

낯을 가리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이연은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타입이었다. 만났을 때에는 반짝 잘 놀긴 했지만 연락에 크게 열성을 다하지도 않았고. 그러다보니 일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흐지부지 끝나곤 했다.

“이연 씨, 취미 있어요?”

“네?”

뜬금없는 질문에 이연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취미랑 지금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지? 그런 의문이 얼굴에 드러나기라도 했는지, 수아가 설명했다.

“사람의 뇌가 의외로 엄청 단순하거든요. 무언가에 몰입하면 그 전의 고민거리 같은 건 금세 잊어버려요. 물론 나중에 다시 떠오르긴 하지만, 훨씬 흐려지죠. 원래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더 생각을 많이 하기 마련이거든요.”

인간이 그렇게 멍청하다고?

“그리고 취미 생활 하다 보면 다른 사람 만날 일도 많아지잖아요. 동호회 같은 것도 있고요.”

“그러니까 다른 일에 시간을 쓰면 잡생각이 덜 나고, 배려받는 상황에도 좀 익숙해질 거다?”

“그렇죠! 똑똑한 학생이네요.”

정답을 맞힌 것이 대견하다며 수아가 닭 꼬치 하나를 더 얹어 주었다.

“한번 시작하면 몇 시간은 몰입할 수 있는 취미가 있으면 좋죠. 원래 취미는 세 가지 이상 있어야 해요. 그래야 다른 거 질리면 또 다른 거 하면서 뇌를 리프레시하거든요.”

가만 듣다 보니 그럴 듯했다. 이연이 조금 혹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 효과가 있나요?”

“당연하죠. 그러니까 잠깐 접어 뒀던 취미가 있다면 이 기회에 다시 생각해 봐요.”

“아, 저는…….”

그렇게 입을 떼고 나서야, 이연은 자신에게 딱히 그럴듯한 취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이 있으면 일을 했고, 없으면 사무실에서 빈둥거렸다. 휴일엔 소파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거나 휴대폰으로 변이종 관련 정보를 찾아보는 게 고작이었다. 뭉치와 놀아 주거나 산오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걸 취미라고 보기엔 어려울 테니, 그나마 꼽을 만한 건…… 먹기?

“먹기? 맛집 같은 걸 찾으러 다니는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이연은 맛집을 꿰고 있긴 했지만 미식가라기보다는 대식가에 가까웠다. 식성이 무던해 상한 것만 아니면 대부분 다 잘 먹는다. 그 말에 수아가 엄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취미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으음…….”

이렇다 할 취미가 없다는 것은 이연에게도 제법 충격이었다.

그간 그런 것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연의 인생은 대부분 필요성에 의해 보낸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필요했거나, 필요하거나, 필요할 것 같거나. 순수하게 좋아서 한 일은…… 없었다.

취미가, 그러네. 취미가 없네. 멍하니 중얼거리는 이연에게 수아가 닭 꼬치를 하나 더 얹어 주었다.

“괜찮아요. 없으면 이제부터 만들면 되죠.”

방긋 웃는 얼굴이 다정하게 응원했다.

“뭐, 혼자서 찾기 어려우면 시험 삼아 다른 사람의 취미를 같이 즐겨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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