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헉.”
숨을 크게 들이 삼키기도 전에, 커다란 굉음과 함께 책상이 쓰러졌다. 쭈그려 앉은 자세로 마주하게 된 이연과 경호원들 사이에 일순 침묵이 흘렀다.
이연이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와, 숨바꼭질에 재능이 있으시네요.”
- 형…….
혜강의 애달픈 음성과 동시에 경호원들의 다리가 공이라도 차는 것처럼 뒤로 한껏 당겨졌다. 망했다. 이연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콰릉.
주저앉은 이연의 주변으로 푸른 번개가 내리꽂혔다. 파지직 튀는 스파크가 선명했다.
경호원들이 놀라 주춤하는 사이 뭉치가 달려들었다. 작은 벼락을 떨어트릴 때마다 온통 까만 몸체가 군데군데 푸르게 빛났다. 털이 조금씩 곤두설 때마다 희미한 빛이 함께 일렁였다.
잔뜩 구겨진 콧잔등이 믿음직스러웠다. 이연이 흐뭇하게 뭉치의 활약상을 지켜보는데, 그사이 김 박사가 슬그머니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잡혔다.
그렇게는 못 놔두지.
“뭉치, 혼자서도 할 수 있지?”
뭉치는 씩씩하게도 대답했다. 듬직한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이연은 냅다 달렸다. 꿈틀거리며 달려드는 경호원들을 요리조리 피해 연구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혜강에게 외쳤다.
“김철재 씨 어디 있는지 카메라 확인 좀 해 줘.”
- 오케이.
그 후로는 혜강이 불러 주는 안내 음성에 따라 복도를 달리기만 하면 됐다. 연구소 복도는 아주 복잡한 미로 같았지만, 길을 알고 있다면 큰 문제는 없었다.
- 아, 여기 구조가 왜 이래?
“왜?”
- 아니, 이게 숨겨진 방인지 연구실인지 그냥 빈공간인지 뭔지 알 수가 없네.
문이 죄다 숨겨져 있으니 헷갈릴 만했다.
“놓칠 것 같아?”
- 김철재는 아직 복도니까 문제없어.
이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박사를 아예 놓쳐 버리기 전에 잡아야 했다.
바로 뒤쫓은 덕에 김 박사는 멀리 가지 못했다. 이연은 곧 코너를 돌아 빠져나가는 흰 가운 자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평생 의자에 앉아서 연구만 한 인간이 다 그렇지. 그거 좀 뛰었다고 벌써 체력이 다한 이연이 반쯤 헐떡이며 사돈 남 말했다.
- 형, 괜찮아?
“안 괜찮아…….”
쉽게 발견했던 초기와 달리, 금방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김 박사와의 술래잡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는 뒤통수는 잠깐 보인다 싶으면 금세 코너 너머로 사라졌고, 아무리 이혜강이라는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제집 드나들 듯 다니던 인간과 속도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이연의 체력이 너무 허접해서 49세의 달리기 속도와 비슷해졌다는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체력이 거의 한계였다. 뇌에 산소가 안 돌아가는 것 같은데……. 멍하게 생각한 이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된 이상 강경 진압이다.
맵을 확인한 이연이 마지막 힘을 짜내 속도를 높였다. 앞에서 무언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자식. 놓치지 않겠다. 이연이 숨을 몰아쉬며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길에 김 박사가 선 것이 보였다.
“뭐야, 여기 왜 벽이…….”
“꼼짝 마세요.”
이연이 김 박사에게 다가가자, 이를 악문 김 박사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예리하게 날이 갈려 있는 단검이었다.
날에 묻은 희미한 얼룩을 확인한 이연이 슬그머니 등 뒤로 양손을 감추었다. 꼼질거리는 손에는 어느새 펜이 쥐여 있었다. 이연이 느긋한 척 입을 뗐다.
“재경 씨를 찌른 것도 김철재 씨였군요.”
“당재경이 참 걸리적거려.”
김 박사가 이죽거렸다.
“어제 아예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십 분에 한 번꼴로 누구 죽인다는 소리나 하고, 삭막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다.
쥐는 자세로 봐서 김 박사는 칼과 그다지 친해 보이지 않았지만, 대중없이 휘두르는 무기가 가장 위험했다. 이연과 김 박사는 잠깐 멈춰 선 채로 대치했다.
“그냥 항복하시면 좋겠는데요.”
김 박사가 반 발자국 다가서는 만큼 반 발자국 물러선 이연이 대화를 이어 갔다. 김 박사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펜이 느리게 팔 위를 유영했다.
“항복?”
김 박사가 코웃음 쳤다.
“넌 지금 네가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믿고 있겠군.”
“…….”
“하지만 맹세하지. 내가 옳아. 이건 모두 인류 발전을 위한 일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김 박사의 눈동자에는 미약한 광기마저 깃들어 있었다. 이연이 아주 오래전에 봤던 눈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에도 김철재 씨랑 비슷한 소리 하던 분 있었어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을 전혀 거리끼지 않는 사람. 목표에 눈이 멀어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 삐뚤어진 사고방식을 인생의 진리인 양 포장하는 사람.
“그렇게 멋있는 일이면 자기가 할 것이지.”
세상에는 개소리를 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김철재 씨. 인간은 욕심으로 성장한다고 했죠.”
이연이 피식 웃었다.
“눈이 멀었는데 성장한지 아닌지 보이기는 해요?”
“이게 어디서 훈계질이야……!”
김 박사가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다시 반 발자국 다가섰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뒷짐을 푼 이연이 빙긋 웃었다. 곧이어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 손에는 조그마한 막대기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철컥. 무언가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펑!
김 박사가 눈을 질끈 감고는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커다란 발사음과 함께 발사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엥?”
이연이 어리둥절하게 불발된 막대기와 김 박사를 번갈아 보았다.
- 그게 뭔데?
“그물총.”
- 철수세미 아니고?
“그물총이야!”
눈 뜨고 보면서도 제대로 못 그리는데, 안 보고 그리는 그림이 멀쩡할 거라고 생각한 자신감이 대단했다.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이연을 보는 김 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너어? 아까부터 왜 자꾸 반말이에요?”
회심의 공격을 실패한 이연이 쪽팔림에 못 이긴 나머지 평소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실체화 능력이군.”
김 박사의 시선이 이연의 팔에 고정되었다.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눈이 팔에 남은 펜 자국을 훑고 있었다.
“흔치 않은 건데.”
“초능력자는 원래 안 흔해요.”
“재미있는 우연이야.”
상대가 말을 하든 말든 김 박사는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재경도 그렇고 김 박사도 그렇고, 연구원이란 족속은 다 이런 모양이다.
“모르포가 좋아하겠어.”
“모르포?”
생소한 단어에 이연이 되물었지만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끝내주는 단방향 통신이었다.
한참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김 박사는 갑자기 칼을 거두었다.
“이 정도 수확이면 괜찮군.”
무슨 속셈이지? 이연이 경계를 돋우며 반 발짝 물러서자, 혜강이 문득 중얼거렸다.
- 어? 형, 더 이상 물러나지 말아 봐.
“응?”
- 잠깐만, 저게 뭐지? 옆에 빈공간이…….
혜강이 말을 마치기도 전 김 박사가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옆으로 돌진한 김 박사가 출입증을 냅다 벽에 찍자, 벽이 휙 하고 돌아갔다.
- ……숨겨진 방이네. 아, 여기 진짜 구조 개같아.
떨떠름하게 이어진 혜강의 짜증을 달래 줄 새도 없었다. 이연은 김 박사를 쫓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크지 않았고, 놓여 있는 가구도 몇 개 없었다. 일인용 소파와 협탁.
그리고 포탈.
이연의 시선이 빠르게 포탈로 달리는 김 박사를 훑었다.
방은 매우 좁았기 때문에 김 박사를 따라잡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리가 단숨에 좁아지자 김 박사의 인상이 구겨졌다.
“끈질기기는!”
“아니, 설명을 해 주고 가야죠. 왜 사람을 궁금하게 해요?”
- 지금 산오 형 거기로 가고 있어. 잠시 후면 와.
아쉽게도 태평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연이 앞뒤 재지 않고 포탈에 막 올라타려는 박사에게 달려들었다. 눈이 반쯤 뒤집힌 박사가 다시 칼을 고쳐 잡았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팔에 무식한 힘이 담겨 있었다.
“비켜!”
섬뜩한 날은 아무렇게나 흔들리다 어느 순간 명확한 각도로 파고들었다. 이거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미간을 조금 찌푸리던 이연의 초점이 순간적으로 김 박사 뒤의 배경으로 옮겨 갔다. 미세하게 꿀렁이는 바닥을 발견한 것은 초인적인 직감이었다.
배를 향해 날아드는 칼날 아래로, 바닥에서 김 박사의 몸을 뚫어 버릴 기세로 튀어나오는 가시가 보였다.
“죽이면 안 돼!”
버럭 외친 고함에 가시가 저도 모르게 멈칫한 찰나, 옆구리에 화끈한 감각이 고여 들었다. 살다 살다 칼에도 다 찔리네……. 태평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몸은 정직해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래다. 야멸차게 박아 넣은 칼의 주인을 잡은 이연이 흐릿하게 웃었다.
“잡았다.”
- 형!
다음 순간, 박사가 이연을 발로 걷어찼다. 휘청이며 뒤로 넘어지려는 이연을 받친 것은 단단한 가슴이었다. 비틀거리는 어깨를 쥔 두꺼운 팔의 주인이 칼자루에 손을 대자, 배 속에 박힌 금속이 물처럼 흘러나와 상처 부위를 막았다. 그제야 이연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산오가 눈동자만 굴려 포탈에 올라타는 박사를 바라보았다. 앞머리에 가려 짙은 그늘이 진 얼굴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홍채 주변에 푸른 빛이 일렁이려는 찰나.
“놔 줘.”
기운 빠진 중얼거림에 산오가 이연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저 정도 눈빛은 가렵지도 않았다.
“아프다.”
이연이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울컥, 배에서 뭔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불쾌했다. 인상을 찌푸린 산오가 이연의 옷을 마음대로 찢어 상처를 막은 쇳조각을 덮어 고정했다.
품이 넉넉한 옷이라 조금 찢어도 큰 티는 나지 않았으나 다시 입을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리폼은 아니었다. 몇 번 안 입었는데. 그 와중에도 그런 걸 투덜거린 주둥아리는 닥치라는 욕만 먹었다.
“다 끝났어?”
태평한 질문에 산오의 얼굴이 조금 더 구겨졌다.
“틈만 나면 지랄 중이군.”
싸늘한 타박에 이연이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핫핑크색 낚싯대에 달려 있던 깃털이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이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