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33화 (33/250)

#33

실험 대상이 된 초능력자들은 모두 무궁화 1단이었다. 초호시에 널리고 널린 초능력자 중 가장 약하고,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어쩌면 일반인에 가까운 그런 사람들.

그렇다고 해도 과하게 많은 수였다.

“이렇게 많다고?”

아무리 약해도 초능력자는 초능력자. 이 정도로 대규모라면 조직적인 힘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연의 낯이 심각하게 변했다.

며칠에 한 번꼴로 기력이 강제로 추출되었다는 내용이 그 후로 쭉 이어졌다. 이연이 보고서를 제일 뒤로 넘겼다. 연구 현황. 진행 경과. 연구자 소견.

팔락. 한동안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이어졌다. 바쁘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문득 멈췄다.

「초능력을 변이종에게 주입했을 경우 강한 고통을 동반하며 일시적으로 온순해진다.」

……주입? 뭘 주입해?

그제야 이연은 이 실험의 정체를 깨달았다. 초능력자에게서 기력을 왜 추출했는지, 변이종에게 무엇을 매칭했는지. 흔들리는 시선이 종이를 읽어 나갔다.

「이후 초능력을 변이종이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여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일부 변이종에게 호전성이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초능력 강제 주입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며, 호전성을 보이는 대상은…….」

“초능력자…….”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빠르게 문서 위 활자를 훑었다.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변이종들은 자신에게 고문 같은 초능력을 나눠 준 초능력자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신체에 초능력이 존재하는 상대를 무차별 공격한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백화점 직원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다가 이연을 보자마자 공격한 연기여우.

초능력 강제 추출 및 주입 실험이라니.

이런 실험은 당연히 불법 중의 불법이다. 예전에 초능력 관리청에서 대대적으로 소탕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다시…….

“이연 씨, 왜 그래?”

“아, 그게…….”

서류를 보여 주자, 종이를 신중하게 뒤적이던 재경이 잠시 생각하는 듯 이연의 발치를 따라다니던 뭉치를 흘끔였다.

“초능력 주입으로 초능력 보유자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고…….”

연구원이라 그런가, 재경은 금세 문제의 핵심을 파악해 냈다.

“그럼 변이종에게 초능력을 강제로 쓰게 해서 주입된 기력을 전부 소진시켜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기력을 넣을 수 있다는 건 뺄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그렇다면…….”

중얼중얼거리며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재경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이연은 몸을 돌렸다. 컴퓨터 쪽으로 다가간 이연이 고글을 집어 들었다.

“멀었어?”

- 좀 걸려.

꽤 애를 먹는 모양인지 대답이 건성이었다. 다들 집중하는 시간이군. 이연이 다른 정보나 찾기 위해 막 고글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쿵.

산오가 있는 쪽에서 거대한 충격음이 들렸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벽 앞에 서 있던 산오가 달려오는 이연과 뭉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산오가 서 있는 곳은 벽이 아니라 작은 문이었다. ……아니 아니, 저기가 원래 벽이었나? 서랍장이 있지 않았나?

“여기겠군.”

무덤덤하게 중얼거린 산오가 문에 다가갔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갔다.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다.

어두울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내부는 희미한 빛이 돌고 있었다. 시야가 간신히 확보되는 수준의 광량이었지만, 안의 광경을 확인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아주 작은 침대와 변기통이 가구의 다인 한 평 반짜리 공간들이 마치 감옥처럼 줄지어 놓여 있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해 주는 곳이 아니었다. 참혹한 환경을 목도한 이연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재경이 본 사람 역시 여기 갇혀 있다는 데에 사무실 명패를 걸 수도 있었다.

학대 같은 공간에 빈방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 둘, 셋……. 기다란 복도에 늘어선 방들을 세어 보던 이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보고서에 있던 목록과 수가 맞았다. 다행히도 모두 살아 있었다.

“다 데리고 나가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글쎄.”

시큰둥하게 대답한 산오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곧 통화가 연결되었다.

“거기 비워 놔. 어. 열 명 넘어. 그건 알아서 해. 귀찮게 하지 말고.”

……아마도 도움을 요청하는 중인 것 같았다. 헬프라기보다는 시비를 거는 것에 가깝게 대화하는 산오를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이연은 감옥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에 귀를 쫑긋했다. 축 늘어져 있길래 다들 기절했나 했는데, 의식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감옥에 얼굴을 바짝 대고 묻자 침대 구석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희미한 빛에 비추어 살펴보니 보고서에서 본 사람이었다. 강제 실험에 동원되느라 사진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이 이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살려, 주세……”

“꺼내 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와 동시에, 침대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놀랐는지 움찔하는 인영을 향해 이연이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안전해요.”

재경이 그들을 쫓아 들어왔을 때는 침대 하나가 땅 안쪽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을 때쯤이었다.

“다들 여기 있었, 헉.”

재경 역시 처참한 환경에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역시 변이종 오타쿠라고 해도 기본적인 인정은 있는……

“저거 불, 언제부터 들어와 있었어?”

그가 가리킨 것은 문 옆에 있던 작은 램프였다. 처음부터 저랬던 것 같은데. 이연이 붉은 등을 보며 그렇게 대답하자, 재경의 낯이 창백해졌다.

“이거 침입자 경보등이야. 이거 켜지면 바로 연구 자료 인멸 작업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다고!”

대번 아는 것을 보니 근무지 기본 수칙인 모양이었다. 이연이 아직 사람이 많이 남아 있는 방을 둘러보았다.

“연구 자료 인멸이라면?”

산오가 여기 있으니 사람들이 다칠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남는 건.

“변이종도 포함이야.”

재경의 낯이 초조해졌다. 이연이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난 뭉치 데리고 재경 씨랑 변이종 구하러 갈게.”

“거긴 왜.”

산오는 뻔히 이야기를 다 들어 놓고도 이상하게 날을 세웠다. 평소라면 어딜 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녀석이……. 이연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면서도 성실히 대답했다.

“변이종이 그렇게 적대적이던 이유를 알았어. 재경 씨 혼자 가면 위험하잖아.”

산오는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이연을 훑어보았다. 그가 그러는 동안에도 침대들은 쉬지 않고 안전하게 운반되는 중이었다.

“느낌이 이상한데.”

“뭐가? 넌 사람들 옮겨야 하니까 다 하고 와.”

이 정도 인원을 옮기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산오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이연을 굳이 막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산오의 얼굴로 팔을 뻗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말랑한 귓가를 스쳤다. 산오의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전에 손을 거둔 이연이 장난스레 눈을 찡긋였다.

“이거 잠깐만 빌리자.”

날씬한 손가락에는 통신기가 걸려 있었다.

이연과 재경, 그리고 뭉치는 연구실을 빠져나와 변이종 보관실로 향했다. 재경이 시간이 없다고 재촉해 대는 통에 얼결에 뛰기까지 했더니 금방 도착했다.

“혜강아. 저쪽 연구실 문단속 좀 해 줘.”

- 오케이.

물론 제산오가 사람 열댓 온다고 하던 일을 못 하진 않는다. 인류 보호적 관점을 생각해서 격리해 두는 거였다.

보관실 입장 역시 혜강의 도움을 받았다. 능력 있는 직원들을 두면 몸이 편하다. 이연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부에 입장했다.

보관실 내부 역시 상당히 넓었다. 재경이 근무하던 연구실의 다섯 배는 되는 듯했다. 연구원 하나가 보관실을 지키고 있다가 이연의 새장에 얌전히 포획되었다.

“변이종은 어디 있는 거예요?”

“어, 그게…….”

이연이 내부에 입장해서 연구원을 잡아 가둘 때까지도 바쁘게 돌아다니던 재경이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분명히 여기가 보관실이거든. 변이종이 여기로 들어가는 것도 다 봤고……. 어디 숨겨져 있나?”

이연이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공간이라 숨겨진 공간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초능력자 보관실처럼 비밀 장치가 되어 있는 모양이다.

아까처럼 일일이 찾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연이 난감하게 볼을 긁적일 때였다.

으릉.

저 멀리 있던 뭉치가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몸을 낮추고 인상을 쓴 채로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뭉치가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끼긱,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의 전구가 켜졌다. 이연이 고개를 휙 돌려 재경을 바라보았다.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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