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30화 (30/250)

#30

“넌 뭐야.”

요즘 툭 하면 목숨을 위협받아서 이제 위기감이 들지도 않는다. 이연은 속으로 투덜댔으나, 순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누가 칼을 들이대면 보통은 얌전해지기 마련이니까. 목에 닿는 예기가 유독 서늘했다.

난데없이 복도에서 사람을 납치하고 위협한 불한당은 등 뒤에 있어 모습 확인도 불가능했다. 클럽 사람인가? 적인지 아군인지 정체를 알 수가 없으니 섣불리 말을 하기도 애매했다. 눈동자를 굴린 이연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여기 손님?”

- 그게 최선이야?

혜강의 한숨과 함께 칼을 대는 손놀림이 한층 더 예리하게 변했다. 좋은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기에 무슨 볼일이지?”

“저기, 이 칼은 놓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목 부근이 작게 따끔거리는 게, 이미 상처가 난 것 같았다. 이거 진짜로 위험하겠는데. 혀를 찬 이연이 상황을 확인했다.

현재 이연은 벽을 보고 뒤를 잡혀 있는 상태. 당연히 하얀 벽 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고, 고글로 시야를 공유하는 혜강 역시 동일했다. 산오와 뭉치는 홀에 있으니 이 상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이연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렇다면.

끼잉…….

……아니, 이런 되도 않는 동정심 유발 작전을 펼칠 셈은 아니었다.

“뭐야?”

내, 내가 말한 거 아닌데. 그 와중에도 그게 억울했던 이연이 변명하기 위해 입을 뻐끔거리는데, 험악하게 굴던 등 뒤의 불한당에게서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넌 어디서…….”

서늘한 음색이 닿은 것은 그와 동시였다.

“손 떼.”

동시에 툭,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을 위협하던 압박감이 깨끗이 사라졌다.

“대화만 한다더니.”

멀쩡하던 날붙이가 난데없이 모래알 크기로 분해되어 흩날리는 기현상에 불한당은 넋이 나간 듯했다. 덕분에 자유로워진 이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가 이랬는지는 안 봐도 훤했다.

하여튼 가만있으라고 해도 5분을 못 간다.

“국어 공부 다시 해.”

팔짱을 낀 제산오가 음산한 시선으로 이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울음소리의 주인, 뭉치가 자박자박 걸어 나왔다.

“어떻게 왔어?”

평범하게 문으로 온 것도 아닌데 용케 잘 찾아왔다. 이연의 물음에 산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여기 벽은 뭘로 만들었을 것 같아?”

보면 볼수록 정말 편리한 능력이다. 나도 저런 능력이 있으면 좋았을걸. 아쉬운 눈길로 바라본 이연이 곧 불한당의 정체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아니, 공원기절남!”

살려 줬는데 칼로 위협하기나 하고, 이래서 착한 일 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

“배는 괜찮아요?”

“배는 무슨, 어. 너…….”

공원남 역시 사경을 헤매면서도 이연의 목소리를 용케 기억했던 모양이다. 화려한 인상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조금 순해졌다.

“아침엔 신세 졌어.”

“뭐, 크게 한 것도 없는데요.”

갑자기 변한 안부 인사 분위기에 산오만 소외되었다.

“뭐야.”

이연이 아침의 일을 대강 설명하자, 산오의 눈썹이 삐딱하게 들렸다.

“아침도 안 먹고 태평하게 놀았군.”

“아니, 먹긴 먹었잖아…….”

그러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아침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어서 오늘도 포식했다. 시리얼 같은 걸로 대충 때우는 이연의 아침 당번과 달리 산오는 철저한 호화 식단을 고수했다.

어쩐지 아침밥 먹는 표정이 좋지 않더라니, 도망간 줄 알았던 모양이다. 밥을 안 주는 것도 아니고 꼬박꼬박 내주는데 도망갈 리가 있나……. 이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려도 산오는 기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아침 운동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불길한 울림이었다. 이연이 정색했다.

“아니, 절대. 그냥 오늘은 충동이었어. 충동으로 나갔다가 어떻게 됐지? 피바다를 봤다고. 바로 후회했지. 다시는 그러지 않겠어.”

줄줄 나오는 변명에 공원남이 피바다까지는, 하고 소심하게 중얼거렸으나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넌 운동이 필요해. 뼈와 가죽밖에 없는 건 시체 예비군에 가까워.”

“전국에 있는 마른 사람에게 사과해. 이것도 체질이거든?”

“아침도 안 먹고, 운동도 안 하고. 언제 쓰러져도 놀랍지 않군.”

“혜강아, 내가 얼마나 먹는지 쟤한테 말해 줘.”

- 산오 형. 이연이 형 졸라 많이 먹어요. 완전 돼지예요.

이연이 발끈했다.

“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 말하라며?

“돼지 무시하지 마라. 돼지의 체지방률은 인간보다 낮다.”

“저기…….”

손을 들어 영양가 없는 대화를 끊은 공원남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너흰 누구야?”

세 사람과 한 마리는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공원남의 이름은 당재경. 이 클럽에서 잠깐 일하던 직원이고, 그들이 있는 곳은 재경이 일하던 곳이라고 했다.

과거형인 이유는 어제 클럽에서 잘렸기 때문이다.

“어제라고요?”

이연이 재경을 구해줬을 당시에 이미 실직했었다는 이야기였다.

“어. 정확히 말하면 오늘 새벽?”

상황에 맞지 않게 가볍게 웃은 재경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뭉치였다.

“얜 누구야? 변이종?”

“네. 뭉치예요.”

“그래? 종이 뭔데?”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이연은 클럽남과 수빈에게 했던 것처럼 대충 넘어가려고 했으나, 재경은 만만치 않았다.

“이런 변이종은 본 적이 없는데. 뭐지?”

“재경 씨가 모든 변이종을 아는 건 아니잖아요.”

“모든 건 몰라도 대부분은 알지. 특히 여기 드나들 만한 하급 변이종이면 거의 다 알걸.”

재경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내가 ‘교육’ 담당자 중 하나니까.”

당재경은 이 클럽의 핵심 인력 소속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핵심 인력의 어시스턴트 정도. 변이종 학과를 나온 재경은 마땅한 연구소에 취직하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실력은 차고 넘쳤으나, 그의 이상과 맞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변이종 연구는 변이종 구조 분석을 중점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특정 변이종의 약점이라든가, 공략법 같은 것.

그렇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모든 연구가 변이종을 처치하는 데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류에게 변이종 사태는 일종의 재난으로 여겨졌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재난.

지금이야 변이종 연구가 진척이 된 덕에 호전성이 없는 중·하급 변이종은 사살보다 포획을 우선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최희원 등이 활약하던 1세대 초능력자 시절엔 눈에 보이는 변이종은 죄다 잡아 죽이고 봤다. 사회가 안정될수록 변이종에 대한 적대감은 옅어졌으나—그러니까 이런 클럽 같은 게 성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전 시절을 기억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변이종이 위험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고.

변이종 연구 자체가 아직 미완성인 판이었으니, 변이종 친화 정책을 정부에서 제대로 지원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재경이 원하는 게 안타깝게도 바로 그것이었다.

단순히 그들에 대해 관찰하고 실험하는 것을 넘어, 변이종은 무엇을 먹는지, 뭘로 살아가는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변이종도 심리가 있는지, 타 변이종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지, 가정을 이루는지 등등.

쉽게 말해 변이종 오타쿠였다.

“변이종이 좋다고요?”

떨떠름하게 대답한 이연이 변이종과 최전선에서 싸우는 게 직업인 산오의 눈치를 흘끔 봤다. 산오는 웃기지도 않는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변이종은 음식을 먹지도, 대기로 숨 쉬지도 않아. 지구의 환경은 변이종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궁금하지 않아?”

별로 안 궁금했다.

“말 그대로 어느 순간 나타났잖아. 어디서 왔는지도 몰라. 그런데 지구의 동물들과 닮은 부분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 않아?”

재경은 오타쿠들이 흔히 그러듯 상대의 반응에 굴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줄줄이 늘어놓았다. 아, 예……. 이연이 성의 없이 맞장구를 치며 언제쯤 적절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떨어질까 고민하는데, 타이밍 좋게 혜강의 통신이 들려왔다.

- 형.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

“응?”

- 거기 연구소 데이터베이스가 아무것도 안 떠. 아무래도 내부 인트라넷만 쓰는 것 같아.

“인트라넷?”

이연이 혜강과 대화하든 말든 재경은 변이종 수다를 혼자 진행하느라 눈치도 못 챘다.

- 응. 거기서 통신 회선이 잡히는 게 없네.

그러고 보니 아까도 비슷한 소릴 했는데. 컴퓨터 무지렁이 이연은 뒤늦게 의미를 알아들었다.

“재경 씨, 여기 무선 통신이 안 돼요?”

이연이 놀라 묻자, 그때까지도 뭘 열심히 주절거리던 재경이 그제야 자신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어, 그건 어떻게 알았어?”

클럽 주인이 타인에 의한 해킹을 가장 경계한 모양이었다. 우리 쪽에 죽여주는 해커가 있을 거라고 예상한 건 아니겠지만, 일이 귀찮게 됐다.

- 거기 컴퓨터 없어?

그들이 있는 곳의 내부는 평범한 사무실처럼 보였다. 책상과 컴퓨터, 작은 서랍장과 예쁘게 쌓여 있는 서류철. 이연이 곧장 컴퓨터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컴퓨터라고는 기본적인 조작밖에 할 줄 몰랐지만, 혜강이 시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뭐 하면 되는데?”

- 거기에 고글 좀 연결해 줘.

“응? 어떻게?”

- 고글 옆에 누르면 연결잭이 나오거든.

내…… 고글에? 생전 처음 듣는 기능이었다.

- 내부 컴퓨터랑 연결만 되면 정보 빼내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묘하게 오싹한 혜강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어어……. 근데 왜 난 내 고글에 이런 게 있는지 몰랐지?”

- 그건 날 위한 기능이니까.

그렇군. 이연은 얌전히 걸어 다니는 고글 거치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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