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소파에는 클럽남의 친구들이 이미 앉아 있었다. 클럽남의 지휘에 따라 빈자리를 넓히자, 두 사람이 들어가 앉을 공간이 간신히 나왔다. 산오와 허벅지를 딱 붙이고 앉아야 할 정도로 좁은 자리였다.
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가까웠다. 맞닿은 청바지 사이로 다리 근육이 선명하게 느껴져 이연은 괜히 헛기침을 삼켰다.
척 봐도 이연보다 한 배 반은 더 굵은 허벅지는 별 미동도 없었다. 그래, 이런 거에 신경 쓰는 게 더 이상하지.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괜스레 뭉치 머리나 쓰다듬었다. 소파 밑에 앉은 뭉치가 기분이 좋은지 꼬리를 이연의 발목에 비볐다.
“이 친구는 누구? 고글 뭐야? 너무 귀엽다.”
말을 건 것은 이연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였다. 가슴 아래의 천을 삭제시킨 크롭 톱을 입은 긴 머리의 여자는 찰랑거리는 술잔을 쥔 채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미 반쯤 취한 듯했다.
별생각 없이 눈을 마주친 이연이 눈알을 도르르 굴렸다. 어째 인상에서 기시감이 드는데. 전에 스친 적이라도 있나?
“바에 있길래 내가 잡아 왔지.”
대답한 것은 산오의 옆에 있던 클럽남이었다. 거들먹거리는 말에 여자는 물론이고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를 보냈다. 보아하니 이런 식의 헌팅을 한두 번 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야? 몇 살?”
“정이연. 스물네 살이요.”
“난 한수빈이야. 몇 살 같아?”
“글쎄요……. 저보다 연하인가?”
“어머, 사회생활 좀 했나 봐?”
수빈이 재밌다며 이연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아팠다.
“스물다섯이야. 말 편하게 해!”
단순한 취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래 사교성이 좋은 성격인지 수빈은 그 후로도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잘됐다. 옆자리의 산오를 의식하기 싫었던 이연이 몸까지 틀어 가며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했다.
몇 마디를 나누어 보며 이연은 수빈이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술병 라벨들을 보면 클럽남 역시 평범한 회사원은 아닐 터였다. 여기가 부잣집 자제들의 놀이터라는 것이 새삼 실감이 되었다.
“뭐, 거기 산다고? 우리 언니돈데!”
얼결에 시작한 신변잡기 수다에서 이연의 거주지를 들은 수빈이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않은 우연에 신기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히려 신기한 건 이연이다. 초호시의 집값이 대체적으로 비싸기는 했지만, 초호시 남구에 있는 이연의 동네는 그중에서도 낮은 지역 중 하나에 속했다. 적어도 이런 곳에 초대받을 수 있는 집안이 고를 만한 곳은 아니었다.
“정말요? 부자 동네는 아닌데.”
“언니가 좀 괴짜라서~.”
부자라는 말을 부정도 안 하는 거 봐라. 이연은 그녀가 진짜 부자라는 확신을 얻었다.
“네 건 교육을 이미 받았나 보네. 부럽다.”
수빈이 뭉치를 바라보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난 아직 차례가 한참 남았거든.”
듣자 하니 교육이라는 게 단순히 반려동물 훈련 같은 개념이 아닌 모양이다. 궁금했으나 그걸 물어보면 수상한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연은 대강 맞장구를 치며 술잔을 맞댔다.
“기다리다 보면 금방이죠.”
“맞아. 추첨에 당첨될 수도 있는 거고!”
수빈은 금세 표정을 풀며 와하하 웃었다. 단번에 술을 삼킨 수빈은 이연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귀여운 동생이 생겨서 좋다고 재잘거렸다.
대화가 그럭저럭 재미있는 것과는 별개로, 수빈이 크롭 톱 위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탓에 맨 팔은 물론이고 가슴까지 바싹 밀착되었다. 다소 부담스러운 자세였다. 이연은 티 나지 않게 몸을 비틀었으나, 워낙 옹기종기 모여앉은 자리였다 보니 피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때,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이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누군가 이연의 어깨를 감싸다 못해 제 어깨까지 슬쩍슬쩍 닿는 수빈의 손등을 쳐 낸 것이다. 놀란 눈으로 돌아본 이연과 수빈의 시선 끝에는 얼굴에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산오가 있었다.
그것조차 잘생겼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라고나 할까.
“와, 뭐야? 나 이연이만 보느라 이 친구 얼굴을 이제 봤네. 뭐가 이렇게 잘생겼어? 둘이 친구?”
속사포 같은 수다였다. 이연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수빈이 눈을 반짝이며 상체를 산오 쪽으로 기울였다.
“잘 부탁해! 난 한수빈이야.”
덕분에 수빈에게 거의 파묻힌 꼴이 된 이연이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어야 했다. 숨 크게 쉬면 가슴 닿겠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숨도 크게 못 쉬었다.
산오의 얼굴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왜 저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하면 사람 치겠다. 요즘 퍽 순해졌다고는 해도 알맹이가 제산오다 보니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혹시 아나, 술이라도 먹으면 감당 안 되게 난폭해질지……. 이연이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것을 알았는지, 산오는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비켜.”
“응?”
산오가 이연 쪽에 있는 술병을 쥐었다. 어리둥절해하던 수빈이 술잔을 들자, 산오가 바로 병 주둥이를 갖다 댔다. 콸콸 소리가 날 정도로 과격한 작주였다.
“워, 이만큼이나?”
표면 장력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따른 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산오가 따라 준 것은 소주가 아니라 위스키다. 누가 클럽 처음 온 놈 아니랄까 봐. 술 저렇게 먹으면 골로 가기 딱 좋았다.
그러나 수빈은 태평하게 눈을 찡긋였다.
“사랑이 넘치네? 원샷하면 이름 알려 줄래?”
“어림없어.”
뚱한 대답에 깔깔 웃은 수빈이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녀가 술을 마시느라 허리를 편 덕분에 이연은 드디어 해방될 수 있었다.
아니, 가만. 이거 혹시 도와준 건가? 이 녀석이 그런 눈치도 있고……. 기특하다는 눈길로 산오를 바라보는데 정작 산오의 얼굴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좋냐?”
“뭐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야? 어리둥절하게 바라봐도 고집스레 입을 다문 산오는 이내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출했다. 성질 한번 까탈스럽다. 영문도 모르고 짜증 내는 제산오를 마주한 이연만 혼란에 빠졌다.
“야, 술이나 먹어. 술 먹으면 기분 좋아져.”
“치워.”
“그러지 말고…….”
시답잖은 실랑이나 하던 이연이 눈을 깜박이며 말끝을 흐렸다. 저 멀리 벽에 붙어 서 있는 남자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탓이다.
여기 들어올 만큼 할 일 없는 부자인 사람을 이연이 알 리가 없는데, 묘하게 어디서 본 얼굴이다. 뭐가 이렇게 다 낯이 익지? 나 사실 전생이 부잣집 도련님이었나?
심지어 차림새 역시 한번 봤다면 쉽게 잊히지 않을 정도로 특색 있었다. 공작새처럼 한껏 차려입은 장발 남자. 대체 어디서…… 아.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이연이 불쑥 통보하며 빠르게 일어섰다. 힘겹게 테이블을 빠져나오는 사이 남자는 홀의 외곽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꿈인지 뭔지 모를 기묘한 상황이었기에 깜빡 잊고 있었다.
아침에 공원에서 본 피투성이 남자였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남자를 따라가는 건 쉽지 않았다. 몸을 흔드는 인파에 얼결에 갇힌 이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혜강아. 좀 전에 내 시야에 있었던 보라색 슈트에 긴 머리 남자, 봤어?”
- 잠깐만.
혜강이 고글의 카메라를 돌려 보는 사이, 귓가 근처에 목소리가 떨어졌다. 서늘하고 느릿한 음성이었다.
- 어디 가.
흠칫한 이연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산오는 없었다. 테이블 쪽을 보자 산오가 바로 눈을 맞춰왔다. 귀를 톡톡 두드리는 손짓이 선명했다.
그러고 보니 통신기를 줬지. 진짜 귀에 대고 속삭인 줄 알았다. 이연이 귀 아래에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빠르게 설명했다.
“아는 얼굴을 봐서, 잠깐 갔다 올게. 뭉치 데리고 있어.”
- 자꾸 혼자 나도는군.
낮은 목소리가 귀로 바로 전달되는 느낌이 오싹했다. 혜강이랑 통신할 때는 이런 기분 안 들었는데……. 이연이 잡생각을 털어 내려고 머리를 약하게 흔들었다.
“그냥 대화만 하려는 거야.”
산오의 눈이 대번 가늘어지는 게 멀리서도 훤히 보였다. 잠깐의 침묵 후, 심통 맞은 지령이 떨어졌다.
- 중간에 통신 끊으면 죽인다.
진심을 담은 전언을 끝낸 산오가 조용해지자 혜강이 마이크를 잡았다.
- 형. 스테이지 옆에 작은 문이 있거든? 아마 스태프를 위한 공간 같은데. 그쪽으로 빠졌어.
“오케이.”
- 갑자기 웬 스토킹이야? 저 사람이 누군데?
“우연히 만난 사람인데…….”
말끝을 흐린 이연이 스테이지 쪽을 흘끗거렸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 남자가 여기서 일하는 사람일 수도, 직원과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냥 평범한 경우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굳이 이연이 따라가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남자의 배를 물들였던 짙은 핏자국이 이곳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이연이 다시 발걸음을 놀렸다. 혜강이 알려 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 홀을 통째로 가로질러야 했다. 전조도 없이 뛰어든 이연은 귀신 들린 춤사위를 뽐내며 자연스럽게 홀을 빠져나왔다.
- 형 춤신춤왕 같은 거야?
“대체 언제적 표현을 쓰는 거야?”
어설픈 수준이어도 일단은 잠입이니 남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고 행동하는 게 좋았다. 정도가 조금 과했는지 조금만 더 추고 가라며 붙잡는 사람들에게 화장실이 급하다는 구라를 치며 스테이지 옆으로 숨어들었다. 흥에 취한 사람들은 곧 이연을 잊어버리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노는 데에 집중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작게 쓰인 문은 눈에 띄지 않게 벽과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슬쩍 문고리를 돌려 보자 쉽게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직원 휴게실이 나왔지만 텅 비어 있었다. 휴게실은 작았기 때문에 성인 남자가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은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이연은 주변을 조금 살펴보다 소파 뒤에서 ‘출입금지’라고 작게 쓰인 문을 발견했다.
그 문을 열어 보니 기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새하얗게 벽을 칠한 공간은 적막했다. 단순히 음악이 없어진 수준을 넘은 묘한 고요였다.
클럽의 내부 공간이라고 보기에는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마 위에 줄곧 얹어 두기만 한 고글을 제대로 당겨 쓴 이연이 혜강에게 속삭였다.
“길 좀 찾아 줘.”
- 잠깐만.
복도가 조용했기 때문에, 이연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천천히 걸었다. 맞은편에서 스태프와 마주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걸어도 스태프는커녕 나가는 문조차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멀었어?”
혜강의 완벽한 서포트 덕에 이연은 이제 지도 없이 걸을 수 없는 나약한 몸이 되어 버렸다. 금세 지친 이연이 혜강에게 칭얼대자, 혜강이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거기 통신 회선이 없는 것 같아.
“뭐?”
그 순간, 벽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 형, 옆에!
혜강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제대로 된 반항 한번 하지 못한 이연은 그대로 벽에 삼켜졌다.
복도는 다시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