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격의 없이 건네는 말투로 보아 무려 사적인 친분이 있어 보였다. 제산오 성격으로 권력에 줄을 댈 것 같지는 않았는데, 조금 의외긴 했다. 일단 딱 봐도 성격적으로 맞지 않아 보일 것 같지 않은가. 제산오하고 성격이 맞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숨기고 있는 것을 찾아낼 기세로 산오의 얼굴을 뜯어보았지만 뭘 꼬나보냐는 시선이나 받을 뿐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에서 레이저가 뿜어나올 것 같아 이연은 시선을 피하며 슬그머니 떠봤다.
“진 국장님하고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간단하게 무시하고 제 할 일에 마저 집중할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다르게, 산오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꽤 오래됐지.”
여느 때와 비슷하게 심드렁한 시선인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눈빛이 뾰족뾰족했다.
“팔 년 전쯤,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만났다.”
“……그랬어?”
이연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살기로 뺨이 따가웠다. 아무래도 엄청나게 안 좋은 기억인 것 같았다.
“그 녀석이 초능력자 등록을 도와줬어.”
띠동갑에게 파격적인 호칭을 쓰는 유교파괴보이의 행태를 이연이 뭐라 지적할 틈도 없이 산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도시에 정착했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꼬질꼬질한 때가 잔뜩 묻은 상태로 뒷골목에 흘러들어 갈 뻔한 꼬마를 건져 낸 남자는 따뜻한 말도 상냥한 손길도 건네지 않았지만, 배불리 먹이고 깨끗이 씻겨 초능력 관리청에 데려갔다.
무소불위의 초능력을 가진 아이는 그때부터 최강의 초능력자로 자라났다.
“너는?”
느릿하게 깜빡이며 이연을 응시하는 녹색 눈동자는 짙은 그림자가 져 까만색처럼 보였다. 심층을 샅샅이 헤치려는 것 같은 눈을 빤히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긴장이 돼서, 이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버벅였다.
“나? 난 국장님 모르는데?”
“…….”
산오의 눈이 스산해졌다. 말귀 못 알아듣는 멍청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이연이 찔끔했다.
“나도 너랑 비슷하지, 뭐…….”
이연의 첫 기억은 보육원이었다. 영아 시기에 선택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방치당하다시피 컸고, 쥐똥만 한 지원금과 함께 방출당하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연 역시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부터 미래를 고민해야 했다. 나이를 무시하고 찾아오는 막막함이 이연의 숨통을 서서히 조이던 그 시절.
그를 원하는 ‘부모님’이 생겼다.
“어느 정도 커도 당신들과 외양이 비슷한 자식이 필요하셨던 모양이야. 정말 운이 좋았지.”
단점밖에 없었던 하얗고 마른 체형이 눈에 띄어 무려 초등학생 때 입양되었다. 그야말로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새로운 경험이었어.”
처음 안겨 본 부모님의 품은 푹신하고 다정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온기는 심장을 따뜻하게 데웠다. 퍼부어지는 애정은 마음을 단단하게 해 주었다. 부모님은 이연을 사랑했고, 이연 역시 그들을 사랑했다.
뭐든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면서 맹목적이지 않게 되기가 참 어렵더라고.”
한숨처럼 중얼거린 이연은 곧 평소 같은 가벼운 얼굴로 돌아와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 케어가 이렇게 중요하다, 이 말씀이야. 미래한테 엄마의 온기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겠지? 그게 내가 기본급만 받으면서 일하는 이유야. 이런 게 이웃의 정이라는 거란다, 제산오야.”
밑도 끝도 없는 이연의 잔소리에 산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꼬맹이를 너무 좋아하는군.”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라는 말도 몰라?”
“나라의 미래는 나다.”
“…….”
“알았으면 받들어 모셔.”
거만하게 빈정거린 랭킹 1위가 다리를 뻗어 테이블에 걸쳤다. 하체가 어찌나 긴지 다리가 테이블을 덮고도 남았다. 제 쪽의 소파로 침범할락 말락 하는 산오의 발끝을 흘겨본 이연이 엉덩이를 슬금슬금 움직여 멀어졌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혜강이 손을 멈춘 것은 두 사람의 자세가 태만해질 대로 태만해져 소파에 드러누운 지경이 되었을 때였다. 블라인드 밖으로 보이는 날씨가 어둑어둑했다. 오늘은 얄짤 없이 연장 근무네. 혀를 찬 이연이 몸을 일으켰다.
“어때? 뭐 좀 찾았어?”
책상으로 가는 이연을 따라 산오 역시 다가왔다. 마우스 포인터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기 좋게 정리한 혜강이 브리핑했다.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일반 사이트에서는 정보가 없어.”
평범한 사람이 이게 원래 변이종인지 변이된 변이종인지 한눈에 보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헌터들 중에서도 이상함을 느낀 사람은 몇 없었을 것이다. 당장 이연만 해도 희수가 보고서를 건네기 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지 않았는가.
원하는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오로지 아날로그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크웹에 개인 회선까지 빠짐없이 털었어. 그중에 좀 수상한 곳이 하나 있거든.”
디지털로 자료를 변환하는 순간, 그곳은 혜강의 권역 내였다.
“작년에 문을 연 회원제 클럽이 하나 있어.”
“클럽? 갑자기 웬 클럽?”
뚱딴지같은 소리에 이연이 물었으나, 혜강은 대답 없이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런데 거기 부지는 엄청 넓은데, 실제 클럽 면적은 그렇게 크지 않아. 클럽이 아닌 부지의 설계도는 교묘하게 빠져 있고.”
“그래도 돼?”
“당연히 안 되지.”
혜강은 설계도를 숨기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문제인지, 숨기면 무엇이 문제인지에 관해 짤막하게 말해 주었지만 부동산 무지렁이 이연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튼 수상하다는 거군. 대강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자, 혜강이 이어 설명했다.
“뭐, 사실 여기까지야 그렇다 쳐. 불법 부동산이긴 하지만 우리랑 상관있지는 않으니까.”
“그렇지.”
“근데 이거 봐. 여기 클럽에서 발송하는 거거든?”
혜강이 파일 하나를 띄웠다. 유려한 금빛 가지 문양 아래에 ‘귀하를 초대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모바일 초대장에는, 한 가지 묘한 문구가 덧붙여져 있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변이종과 친구가 되고 싶은 분들을 위하여?”
“의미심장하지?”
세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동물도 아니고 변이종 관련 클럽이라니. 물론 변이종 암시장이라는 것도 있다고 하고, 변이종을 기르면 안 된다는 법 같은 건 없지만…… 보통 기르려고 하지는 않지 않는가.
“그래서 영 이상하다 싶어서 소유주랑 손님 목록을 캐 봤는데, 걸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고급 회원제 클럽이면 회원 자격 요건이 까다로울 터였다. 그 정도 요건을 만족하는 자산이나 명성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인터넷에 기록이 있다. 크게는 포털 사이트의 인물 정보에서부터, 작게는 SNS의 활동 기록이나 개인 목격담까지.
아무런 흔적이 없다면 한 가지 가정이 유력하다.
“죄다 대리인을 세운 거야.”
비밀스럽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클럽을 개장하기 전에 물품을 들이잖아? 그 짐을 나르다가 실수로 덮개가 잠깐 뒤집히는 일이 있었나 봐. 근데 그 안에 들어 있던 게 뭔지 알아?”
“뭐였는데?”
“빈 케이지 여러 대였대.”
일반 클럽에서 흔히 쓰는 물품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변이종이 들어갈 만한?”
“크기가 얼만 한 건지는 몰라. 어쩌면 그냥 인테리어용일 수도 있고. 그 후로는 그냥 연애 이야기라 껐거든.”
개인 채팅 기록을 긁은 거라, 하고 태연하게 덧붙이는 게 더 무서웠다. 정보통신보호법…… 미안합니다.
“초능력 변이종이 진짜 이런 곳에 있을까?”
이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적공 근처에서 발견된 것도 아니고, 도심 내 클럽이라니. 헌터들 사이에서도 돈 적 없던 정보가 이런 뜬금없는 곳에서 공유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밑져야 본전이잖아.”
당장은 이거 외에 큰 단서도 없어. 혜강이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까지 들으니 별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마침 개장 시간이 곧이야. 초대장 복사해 줄 테니까 뭉치랑 같이 가면 될 것 같아.”
곧 이연의 핸드폰으로 초대장과 위치가 전송되었다. 겉옷을 챙겨 입은 산오와 이연이 사무실 밖을 나서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으로 가서 뭉치를 데리고 나오자 완연한 밤이었다.
클럽이 있는 거리까지는 멀었기 때문에, 산오가 능력을 썼다. 지하 엘리베이터와 함께라면 도시 건너편의 동네에 도착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이동 방식에 뭉치가 경계하기는 했으나, 이연이 필사적으로 도닥여 준 탓에 별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거리는 번쩍거리는 간판들 덕에 한밤인데도 훤했다.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 커다란 웃음소리를 터트리는 사람,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커다란 음악 소리와 배기음이 무시무시한 차 소리……. 전형적인 취객 거리였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사이에서 그들만 고요했다. 이연의 눈길이 흘끔흘끔 산오를 향했다.
뭉치가 있어서 살았다. 둘만 있었다면 최근에 내내 그랬던 것처럼 산오의 기척을 확인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사무실에서는 혜강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둘만 남으니 또 이렇다. 이연이 제게 몸을 딱 붙이고 걷는 뭉치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하며 애써 시선을 주변 거리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