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연기여우는 몸체에서 연기 같은 까만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아지랑이는 만져도 묻지 않고, 진짜 연기처럼 바람의 영향을 받았다. 만진다고 해서 어떤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으나, 아지랑이 자체가 연기여우의 보호막이었기 때문에 강한 바람 등으로 아지랑이를 모두 날려 보내고 드러나는 몸체를 공격하는 것이 정석공략법이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보고된 연기여우 발견 사례 중 얼룩으로 변해 벽을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런 특성까지 있었다면 대응이 훨씬 까다로웠을 테니 등급이 최소 한 단계는 올랐을 것이다.
“이건 분석 보고서입니다.”
희수가 건넨 것을 찬찬히 읽어 보던 이연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보고서 최하단의 분석 담당자 소견 부분에 믿을 수 없는 문구가 적혀져 있었다.
변이종 내부에 기력 반응이 검출됨.
“분석 담당자의 말로는 연기여우가 얼룩으로 변할 때마다 기력 반응이 감지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지금부터 말하려는 사항은 초능력 관리청 내에서도 극비 중의 극비였다.
변이종의 초월적 능력과 초능력자의 초능력은 대응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변이종은 얼핏 보면 초능력자와 비슷하게 능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을 ‘초능력’이라고 칭하기는 애매했다.
변이종은 말 그대로 그냥 ‘그렇게’ 태어난 생물이었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기력이라는 공통된 에너지로 초능력을 사용하는 초능력자와 달리, 변이종에게 능력이란 팔다리를 하나 더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자신에게 달린 꼬리를 휘두르듯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변이종에게 기력이라는 개념이 발견된 사례 역시 당연히 없었다.
“그렇다면…….”
“네.”
무거운 얼굴의 희수가 말을 맺었다.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변이종인 것 같습니다.”
사무실 내부에 침묵이 깔렸다. 만약 이게 진짜라면 변이종 학계에서 당장 난리가 날 정도로 커다란 발견이었다.
“저희한테 오실 게 아니라, 초관청 긴급 회의를 소집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떨떠름한 이연의 물음에 희수가 머쓱하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제가 생각보다 힘이 없습니다.”
초호시가 건립되고, 시내 최고 공공 기구가 된 초능력 관리청은 많은 권한을 쥐었다. 국내 초능력자들의 초능력자 정보 등록이 의무화되고, 그들의 분류와 관리를 맡으면서 규모는 점점 커졌다.
거대한 배에 사공이 여러 명 타는 거야 놀라울 일도 아니다.
초대 초능력 관리청장의 손자라는 이름은 영광인 동시에 껍데기였다. 많은 사람이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휘둘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희수가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씀은 드렸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저 초능력을 쓸 줄 아는 변이종이 등장한 것뿐인데, 크게 다른 점이 뭐가 있냐는 거였다. 겉으로 보기엔 변이종의 기본 능력이나 초능력이나 큰 차이는 없었기 때문에 따지자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종적으로 내려진 지시는 시민들의 혼란을 막기 위한 침묵.
“하지만 아무래도 찝찝해서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가 더 필요했다. 그러나 위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공권력은 사용할 수 없었고, 결국 남은 건 사설 의뢰뿐이었다.
희수가 이연의 옆에서 얌전히 이야기를 듣는 산오를 흘끔 바라보았다. 의뢰를 맡기기에 이 정도로 제격인 곳은 없었다.
제산오 정도의 고위 초능력자를 진희수 정도의 고위 공무원이 쓸 수 있는 일은 사실 많지 않았다.
초능력자는 힘이 강할수록 큰 회사의 핵심 인사인 경우가 많았고, 국장급인 희수가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정치적 알력 싸움으로 뻗어 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공개적으로 의뢰해도 그럴진대, 지금처럼 비밀스럽게 맡겨야 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수많은 고위 초능력자 중에서도 제산오는 드물디드문 무소속이었다. 산오는 그가 만든 회사인 제산에서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았다. 회사의 발전을 특별히 신경 쓰지도 않았고,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고작 파견 형태로 비서를 두 명 고용했을 뿐이다. 그는 행정 기록상으로 완전히 깨끗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산오에게 의뢰를 맡기는 것 또한 쉽지는 않다. 일단 본인의 성격이 너무 독선적이고 비협조적이었다.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자신의 소재를 명확히 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초능력 관리청 사람들 사이에서도 산오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절대다수였다. 은둔자가 따로 없었다.
평소였다면 산오를 찾지도 못해 의뢰는 꿈도 못 꿨겠지만 아주 우연한 기회로, 희수는 최근에 그를 마주쳤다. 조카를 데리고 있던 수상한 2인조 중 한 명이 제산오였다니.
2인조 중 나머지 한 명이 연기여우를 포획한 당사자라는 사실은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차금이라는 작은 회사의 대표. 이연이 타 회사의 소속이었다면 다소 곤란했겠으나—대부분의 변이종 전담 회사는 회사를 통하지 않은 사설 의뢰를 금지하고 있다.— 천만다행으로 개인 사업자에 가까운 신분이었다.
무궁화 2단이면서 회사를 차린 것을 보면 별다른 야망이 있지는 않은 듯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정치적으로 휘말리게 될 확률은 적을 것이다.
역시 여기가 최선이었다.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대답을 한 것은 산오였다.
“알았다.”
웬일로 저렇게 적극적이지? 이연과 혜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산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에 산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수락할 거 아닌가.”
“제산오……. 고맙다.”
희수의 안색이 환해졌다. 산오가 돕겠다는 의사를 표했으니 일은 반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이연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렀다. 제산오가 큰 전력인 거야 맞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면 또 떨떠름하단 말이지. 우리한테는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가는 특급 해커 이혜강도 있는데.
“국장님, 저희 인력비가 참 비싸거든요.”
굳이 이런 말을 덧붙인 것은 그런 심술의 발로였다. 제산오 인력비가 아니라 차금의 인력비. 그 속뜻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 희수의 얼굴이 곧 진중해졌다.
“죄송합니다. 지원은 부족함 없이 하겠습니다.”
그토록 결연하게 주먹을 쥐며 약속해 버리면 또 심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여차하면 사재를 전부 털어 낼 기세에 이연이 흠, 하고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산뜻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D.S 씨한테 외상이 있어요.”
“……예?”
“미래랑 그것 좀 대신 내주러 가세요.”
생각도 못한 말에 희수가 멍하니 이연을 바라보았다. 이연이 빙긋 웃었다.
“꼭 직접 가셔야 해요. 그거 해 주시면 기본급만 받겠습니다.”
“형, 이러니까 우리가 돈을 못 버는 거야.”
혜강이 투덜댔다. 컴퓨터를 조작하는 손길은 멈추지 않는 채였다. 커다란 모니터 세 개의 화면이 바쁘게 넘어갔다. 쉴 새 없이 페이지를 열었다 닫는 혜강의 시선이 분주했다.
“무슨 소리야, 기본급은 받는다니까. 외상도 해결했고.”
“그거 얼마나 된다고.”
얼빠진 얼굴로 한참 이연을 바라보던 희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무실을 나갔다. 극비 보고서를 챙기지도 않았지만 명함을 남기고 갔으니 나중에 결과 보고하면서 전해 주면 될 것이다.
“새로 사귄 친구가 있는데, 애가 웃는 게 예쁘더라고.”
“친구?”
“계속 웃으면 좋을 것 같아서.”
혜강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돌아보았다.
“뭐야?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야. 걔 여덟 살이야.”
“뭐?”
정색한 혜강은 급기야 손까지 멈췄다. 얼굴에 경멸이 담겨 있었다.
“형, 범죄 같은 거 저지를 계획 있으면 미리 말해. 그간 정을 생각해서 연락 끊을 틈은 줘야지.”
“어떤 입이 선의를 범죄로 해석하지?”
이연이 혜강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야야, 하고 가볍게 엄살을 부린 혜강이 곧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오지랖이 대단하군.”
다음은 산오였다. 하여튼 다들 포용력이 부족하다. 이연이 입을 삐죽이며 투덜댔다.
“넌 좋은 아빠가 되긴 글렀다.”
“말 다 했나?”
왜 화난 건데? 가족 계획이 있었던 거야?
혜강의 인터넷 수색은 꽤 오래 걸렸다. 단편적인 정보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불분명한 정보가 필요하다 보니 난항이 있는 듯했다.
처음 얼마간은 의자 뒤에서 혜강을 지켜보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슬금 이동해 소파에 다시 앉았다. 도움도 안 되는데 옆에서 얼쩡거리면서 방해할 필요는 없지. 이연이 변명하듯 중얼댔다. 푹신한 소파에 가니 절로 몸이 늘어졌다. 역시 앉는 게 짱이다. 혜강이 타자를 치는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들려왔다. 산오는 어느새 태블릿을 꺼내 들고 두드리고 있었다.
이연의 태블릿을 가지게 된 이후, 산오는 휴대폰 대신 태블릿을 자주 만졌다. 지나가다 슬쩍 본 바로는 무슨 문서를 검토하는 것 같았다.
은혜를 갚니 마니 해도 차금에 일이 거의 들어오지 않다 보니 산오가 할 만한 일도 자연스럽게 별로 없었다. 출근해서 한 대다수의 일이 소파에 드러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게 다일 정도였다.
어쩐지 밤낮으로 틈만 나면 휴대폰을 집어 든다 싶더니, 그전까지는 휴대폰으로 사무를 받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산오가 휴대폰 중독인 줄 알았던 지난 편견을 반성했다. 역시 한가한 인간은 아니라니까.
태블릿으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고 이연과 관련이 없어 보여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기 눌러앉은 목표랑 관련이 있는 건가?
‘진희수 국장……. 제산오랑 아는 사이인 것 같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