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이봐요!”
놀라서 한달음에 달려간 이연이 주저앉아 쓰러진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무늬와 색감이 화려한 티셔츠 위에 흰 가운을 걸친 남자였다. 귀에는 피어싱이 주렁주렁했고 손목 위로는 희미한 문신이 보이는 데다가 갈색 머리 역시 길게 길러 멋을 냈는데, 전체적으로 너무 요란해서 뭐 하는 사람인지 추측이 불가능했다. 의사는 확실히 아닌 것 같은데…….
남자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지 작게 경련하기만 했다. 억눌린 신음이 간혹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어디 다친 건가? 이연이 약하게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괜찮아요? 구급차 부를까요?”
그 말에 남자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집으로 데려가서……. 부축하기 위해 남자의 팔을 들어 올리던 이연의 눈이 커졌다.
남자의 배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는 꽤 컸다. 아무런 처치 없이 이곳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응급 처치를 어떻게 하더라? 허둥대던 이연이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삐뚤삐뚤 선을 그렸다. 곧 핑킹가위로 자른 듯한 붕대 더미가 바닥에서 튀어나왔다.
그런데 붕대를 감으려고 보니 남자의 몸이 온통 꼬질꼬질했다. 이대로 감아도 되는 거야? 감염되는 거 아냐? 급하게 고개를 두리번대자 저쪽 길 너머에 자판기가 있는 것이 보였다. 이연이 남자를 조심스레 눕히고 빠르게 속삭였다.
“여기 잠시만 있어요. 물 가져올게요.”
물을 한 통 뽑고 다시 돌아오는 길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 이연이 잠깐 시선을 뗀 그사이.
남자가 누워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하암…….”
사무실 소파에 깊게 몸을 파묻은 이연이 길게 하품했다. 오늘따라 날이 따뜻했다. 아침에 그런 일을 겪은 것치고는 과하게 평화로운 오후였다.
다시 생각해도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갑자기 피투성이 남자가 동네 공원에 등장하다니,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이연의 동네는 변이종 전투가 잦은 지역도 아니었고……. 바닥에 핏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이연도 꿈인지 뭔지 헷갈렸을 것이다.
산오도 그렇고 그 남자도 그렇고, 요즘 이 동네에 널브러지는 게 유행인 모양이었다.
‘그나마 붕대는 가져가서 다행이지…….’
비록 초능력으로 만들어 낸 거라 몇 시간 후에는 사라지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이연이 가물가물한 눈을 비비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뭉치 밥을 안 주고 온 것 같아.”
변이종은 음식 섭취로 영양분을 얻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집에 가서 한번 확인을…….”
“개수작 부리지 마라.”
땡땡이 시도는 5초 만에 무산되었다.
그렇게 안 생긴 주제에 산오는 제법 성실했다. 출근도 꼬박꼬박 따라왔고, 별일이 없어도 퇴근 시간까지 사무실을 지키곤 했다.
물론 시간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지만……. 수틀리면 앞뒤 재지 않고 사무실을 뭉개 버릴 것 같았던 첫인상과 다르게 부지런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금세 다시 심심해진 이연이 이번엔 혜강이 앉아 있는 책상 쪽을 기웃댔다. 혜강은 사무실 전체를 떠도는 한가로움 가운데서도 부지런히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기세가 사뭇 전투적이기까지 했다.
“혜강아, 뭐 해?”
대답은 한참 돌아오지 않았다. 가만 살펴보니 혜강은 귀에 뭘 끼고 있었다.
혜강의 모니터 세 대에는 오늘도 여러 개의 알 수 없는 페이지들이 떠 있었다. 얼핏 보이는 바탕화면에서는 온갖 아이콘이 제멋대로 널려 있었고, 별별 프로그램 창이 겹쳐진 상태로 실행되고 있는 데에서 쓰는 사람의 성격을 대강 짐작케 했다.
“어, 형. 왜?”
이연이 혜강의 바로 뒤에 서고 나서야 혜강은 그를 발견했는지 귀에서 이어폰을 떼고 돌아보았다. 음악을 어찌나 크게 틀고 있었는지 이어폰 안에서 요란한 비트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그냥 심심해서……. 뭐 재미있는 거 없나?”
“재미있는 거? 불법? 아니면 합법?”
“…….”
더 이상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머리통을 내리쳤다. 이연이 입을 다물었다.
임무 시에 보여 주는 혜강의 능력은 보통 불법의 영역이었고, 이연도 공범에 가깝기 때문에 이제 와서 준법 시민이니 뭐니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재미로 범죄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혜강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고, 아니, 이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똑똑.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변명을 읊조리고 있는 이연의 주의를 돌린 것은 작은 노크 소리였다. 이연이 냉큼 문 쪽으로 다가섰다.
차금에는 외부인이 올 일이 극히 적었다. 소속 인원이 모두 출근한 이 시간에 방문할 만한 사람이면 정체가 빤했다.
사설 의뢰인이다.
이번 달에는 신기할 정도로 사설 의뢰가 가뭄이었다. 차금에게는 분기 임무가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긴 하지만, 분기 임무만으로는 이 인플레이션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에 무리가 있었다.
사설 의뢰가 달에 최소 몇 번은 들어와야 사무실 유지비가 겨우 충당되는데 벌써 이번 달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음에도 들어온 사설 의뢰가 단 한 건도 없었다. 이전 추이로 계산해 보면 위험한 수위다.
그렇다고 제산오 카드로 혜강의 월급을 결제할 수는…… 가만, 이것도 좋은 방편인데. 이연이 번개처럼 떠오른 보험을 소중히 기억해 두었다.
아무튼 그러던 판에 온 손님이다. 이연이 신나서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
“안녕하십니까.”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남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얼결에 같이 고개를 숙인 이연이 떨떠름한 얼굴로 흘끔 바라보았다. 아는 얼굴인 거야 그렇다 쳐도, 방문자의 직위가 문제다.
“국장님이 여긴 왜…….”
초능력 관리청의 변이종대응국장, 진희수였다.
그는 공무원이니 사설 의뢰가 아니라 공무로 왔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심지어 불시 검문이라니. 무슨 용건이든 간에 큰 기대는 안 됐다. 순식간에 의욕이 떨어진 이연이 설렁설렁 자리를 안내했다. 명백하게 성의 없어진 태도에 희수가 의아하게 목적을 말했다.
“의뢰를 하나 맡기려고 왔습니다만.”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
이연의 눈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고위직 초능력자는 얼마나 벌까? 모르긴 몰라도 개부자일 것이다. 그가 맡기는 사설 의뢰라니, 오늘 고기 먹자고 해야겠다. 야망에 부푼 이연이 뭐든 말해 보라는 듬직한 얼굴로 대답을 독촉했다.
널뛰는 감정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희수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으나, 곧 서류 가방에 손을 넣었다. 잠깐 뒤적거리는 사이 앞에 앉은 두 사람이 투닥댔다.
“좀 점잖게 있어.”
“야, 내가 얼마나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많은지 알아? 너랑, 혜강이랑, 뭉치랑…….”
“입은 하나 정도 줄어도 될 것 같은데.”
“뭐? 누구 입 줄일 건데? 너?”
“너.”
“…….”
희수는 산오와 이연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역시 산오와 꽤 오랜 시간을 알았지만, 저렇게 격 없이 구는 것은 처음 보았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국장님?”
“아.”
정신을 차린 희수가 가방에서 손을 빼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류철이 하나 딸려 나왔다.
“연기여우, 기억합니까?”
“네.”
얼마 전 산오와 이연이 백화점에서 잡은 짐승형 변이종.
무려 위험도가 중급에 속하는 5급 변이종이다. 뭔지도 모르고 잡은 것치고는 꽤 높은 등급이었는데, 원래라면 이연 하나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옛말이 딱 맞았다.
“정이연 씨의 변이종 대응 기록 보고서를 읽어 보았습니다.”
희수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가 의뢰할 내용은 모두 이 연기여우 제압 보고서로부터 비롯되었다.
“연기여우가 얼룩으로 변해 벽과 바닥을 타고 돌아다녔다고 하셨지요.”
“네.”
“몸체가 얼룩으로 변하는 것은 연기여우의 특성이 아닙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