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쓰잘데기없는 기능을 최첨단으로 장착해 놓고 앉았다. 이연이 투덜대며 막대기를 거칠게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별안간 깃털 부분이 끈에서 떨어져 날아올랐다. 깃털을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가볍게 날아간 목적지는 이연의 옷이었다.
“……이건 뭐죠?”
품이 큰 후드에 가볍게 달라붙은 깃털 조각은 탈탈 털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D.S는 언제 집어 들었는지 이연의 태블릿 화면을 보고 있었다.
“위치추적기. 네 태블릿에 연동해 놓았으니 이걸로 확인할 수 있어. 이렇게 조작하면…….”
D.S가 손을 움직여 화면을 조작하자 깃털이 아주 작고 동그란 칩으로 바뀌었다.
“작게 만들어 숨길 수도 있지.”
D.S는 의기양양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개떡 같은 살상 무기를 만들어 놓고 칭찬을 바라고 있는 폼이 어이가 없었다.
“이걸 누구한테 붙이는데요?”
“도망갈 수도 있잖아.”
“장난감에서 레이저가 나오는데 그럼 가만히 있겠어요?”
놀아 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적으로 인식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판이다. 엔지니어들이 신기술을 어떻게든 접목하고 싶어서 환장한 족속들이라는 점을 깜빡했다. 한껏 경계하며 낚싯대를 테이블에 도로 내려놓은 이연이 D.S 곁으로 다가갔다.
“이건 일단 됐고, 태블릿은 괜찮아요?”
“그거야 액정이 좀 망가진 것뿐이니까. 고치는 건 금방이지.”
박살 난 액정이 멀쩡해진 것도 그렇고, 조작하는 것을 보니 문제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이제 소중히 다뤄야지. 이연이 흐뭇하게 태블릿을 건네받으려고 손을 뻗을 때였다.
“이건 서비스야.”
지잉. 익숙한 음파와 함께 태블릿 후면 카메라 부분에서 붉은빛이 쏘아졌다. D.S가 가볍게 손목을 움직이자 레이저에 닿은 테이블 위 빈 캔들이 정확하게 절반으로 서걱 잘렸다. 명사수가 따로 없었다.
“……레이저가 왜 거기서도 나오는데요?”
“멋있지?”
멋있기는 개뿔…….
“왜 오만가지에 전부 레이저를 단 거예요? 레이저 장사해요?”
“부품 개수를 잘못 주문했거든. 레이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무서워서 말하겠냐?
“통신기는요? 통신기도 하나 만들어 달랬잖아요.”
“아, 그거.”
D.S가 태블릿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삐릭,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연의 얼굴만 했던 태블릿이 뭉쳐지고 변형되어 귀에 걸 수 있는 조그마한 통신기로 변했다.
“……엥?”
“네 고글이랑도 연동되게 해 놨어. 혜강이가 보면 알 거다.”
“잠깐, 잠깐만요.”
“어이. 착용해 봐.”
D.S의 부름에 어느새 다가온 산오가 태블릿이었던 통신기를 귀에 냅다 걸었다. 이연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몇 번 만지작거리며 위치를 맞춘 산오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군.”
아니, 내 태블릿이……. 졸지에 제산오에게 신형 태블릿을 상납하게 생긴 이연의 낯이 거무죽죽해졌다.
“가격은 이 정도.”
뒷주머니에서 계산기를 꺼낸 D.S가 버튼을 툭툭 두드리더니 이연에게 내밀었다. 이연이 어, 하고 물었다.
“고글은요?”
장난감과 태블릿에도 온갖 공격적인 기능들을 달아 놨으니 고글은 거의 비밀 요원 무기가 되어 있을 터였다. 고글은 실제 전투 도구였으니 오히려 좋았다. 이연이 마지막 희망을 품고 테이블에 얌전히 놓여 있던 고글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D.S가 문득 물었다.
“너 계산 뭘로 할 건데?”
“그거야 물론 카드로…….”
이때를 위해 저녁도 이연의 카드로 계산했다. 그러나 빛나는 제산오 카드를 꺼내 든 이연의 자신만만한 목소리는 엄격한 얼굴의 D.S와 마주한 순간 급격하게 흐려졌다.
“난 현금만 받아.”
사촌이 공무원인데 이래도 되는 거야?
“고글은 그대로야. 안 그래도 네 예산이 안 될 것 같아서.”
온갖 최첨단 장비들로 도배를 해 놓은 장난감과 태블릿 덕에 작업 가격은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미래를 돌봐 줬다고 나름대로 할인을 해 준 가격임에도 지불하고 나니 이연의 재정은 한순간에 파탄 났다. 심지어 일부는 외상했다. 불쌍하게 산오를 돌아보았으나, 카드도 없는 놈이 현금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현금 영수증은 되나요?”
“아니.”
이 탈세범, 내가 언젠가 국세청에 신고할 거다.
급격히 정신이 피곤해졌다. 영혼까지 털린 이연이 장난감과 고글을 가방에 비척비척 쓸어 담았다. 옆에서 D.S가 외상값을 갚고 나면 고글도 업그레이드해 주겠다는 공수표를 날렸다. 퍽이나 믿음이 갔다.
“갈게요.”
“잠깐.”
시무룩하게 공방을 나서는데, D.S가 조용히 불렀다. 또 뭔데? 이연이 지친 얼굴로 돌아보자 D.S가 간격을 두고 물었다.
“좋아했냐?”
심드렁한 척하는 질문의 주어를 파악하는 것은 쉬웠다.
“네.”
가방을 추어올린 이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도 엄마랑 갔으면 더 좋아했을걸요.”
3.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태양이 있다
“음…….”
주변이 이상하게 추웠다. 이연이 잠결에 몸을 뒤척이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곧 주변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손을 뻗어 끌어안자 말랑하면서도 매끈한 것이 팔에 감겨들었다. 품에 가득 차게 들어 넣고서야 조금 따뜻해져, 이연은 따끈한 온기에 만족스레 뺨을 비볐다.
그런데 우리 집에 이런 게 있었던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훤해진 시야에 살색이 보였다. 이연의 것보다 훨씬 두껍기는 했으나, 어쨌든 사람의 팔뚝이었다.
남의 허리에 딱 달라붙어서 잔 꼴을 확인한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침대 머리맡에서 허리를 내준 산오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도 자더군.”
그렇게 말한 산오는 고개를 숙였다. 잘생긴 얼굴이 점점 이연에게 가까워지고 부드러운 입술이…….
“헉.”
이연은 눈을 떴다. 아침 햇살로 환한 천장이 보였다.
정자세로 놓인 손은 얌전히 본인의 배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뭉치가 이연의 허리춤 옆에 누워 자고 있었다.
‘별 개꿈을 다 꾸네…….’
팔에 소름이 다 돋았다. 이연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꿈의 잔상을 물리치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인상을 썼다. 침대에서 일어나며 무심코 옆을 바라보는데 원흉은 곱게도 자고 있었다.
바짝 날이 서 있던 눈매는 부드럽게 힘이 풀려 있었고, 고르게 숨을 쉬는 가슴이 조금씩 오르락내리락댔다. 남이 옆에서 악몽을 꾸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숙면이었다.
쇼핑을 잘못한 죄로 제산오와 침대를 합친 후, 둘은 내내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종종 뭉치가 올라와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산오는 의외로 침대에 뭐가 올라오든 제 자리만 확보된다면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긴, 예민했으면 이연과 한 침대에 자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침대가 운동장만 했고, 이연도 산오도 잠버릇이 심한 편이 아니었으므로 같이 잔다고 해도 두 사람의 몸이 닿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암묵적인 서로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둘은 한 번도, 잠결로도 그 구역을 침범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때 그 일 탓인 거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잊히지가 않았다. 제산오의 입술이 나, 나, 나한테…….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연의 눈이 질끈 감겼다. 이제는 이런 걸 자꾸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가 몰려올 지경이었다.
괜히 이벤트 같은 걸 참여하자고 해 가지고. 아니, 그래도 반값 할인이면 욕심나지 않나. 반값이나 할인해 준다잖아. 그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합리화를 일삼던 이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별 의미도 없는 해프닝이야.’
이연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신경이 쓰이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 일 이후로, 평소처럼 생활하다가도 가끔씩 삐걱거릴 때가 있었다. 용건도 없으면서 흘끔 보게 되었다. 일상적인 말에도 대답을 고민하게 되었다. 산오가 빤히 바라보면 뭔지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갔다. 겉으로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손톱 밑의 거스러미처럼 희미한 관심이 꺼지지가 않았다.
어차피 자기 볼일 끝나면 사라질 녀석인데.
잠이 든 산오의 얼굴을 습관처럼 슥 훑어보던 이연이 제 풀에 놀라 후다닥 일어섰다. 또 이러지, 또. 몸서리치며 방을 나간 이연은 번뇌를 지우기 위해 팔자에도 없던 아침 산책을 강행했다. 탁. 희미하게 들리는 문소리에 자고 있던 뭉치의 귀가 쫑긋 섰으나 이내 다시 늘어졌다.
이른 오전의 공기는 쌀쌀했다. 집 근처 공원이었지만 이연이 이곳에 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워낙 운동과 연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탓이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네. 이연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걸음을 옮겼다. 새벽바람이 제법 기분이 좋았다. 키가 큰 나무들과 회양목이 풍성하게 조경된 길을 슬슬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사람이 하나 보였다. 저 사람도 산책 나왔나 보다. 세상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참 많았다.
이연이 흐뭇하게 생각하며 눈길을 주는데, 미묘한 위화감이 일었다. 움직임이 조금 이상했던 것이다. 걷는다기보다는 비틀거리는 것 같은…….
어디 아픈가? 이연이 또렷하게 보기 위해 눈매를 찌푸렸다. 그러나 곧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인영은 몇 걸음을 나아가나 싶더니 그대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