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야! 그럼 협박이 되잖아. 우리가 진짜 범죄자 같잖아!”
“역시 납치였나.”
이연이 펄쩍 뛰는 것과 동시에 진희수의 손이 뻗어 나왔다.
진희수의 초능력인 용해는 말 그대로 무엇이든 녹여 버린다. 그가 능력을 사용한 현장은 늘 개판인 것만 봐도 전투 스타일을 훤하게 알 수 있었다.
다른 건 둘째치고 여긴 놀이공원이다. 애도 있고, 일반인도 있다고! 이 인간들이 제정신인가? 기함한 이연이 미래를 안은 손에 힘을 주고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 직원들 쪽으로 향할 때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식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달이 떠 있는 밤에도 꿋꿋이 검은 선글라스를 고수하는 양복 인간 둘. 그중에 키가 큰 여성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산오 님을 국장님이 습격하시는 행위는 문제의 소지가 큽니다. 괜찮으십니까?”
산오의 비서, 종찬과 종희였다.
이 인간들이 스토킹을 야무지게 하고 있었잖아? 이연의 얼굴에도 덩달아 황당함이 떠올랐다.
“감히 산오 님을 습격하다니! 이 일은 초능력 관리청에 정식으로 항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종찬의 말에 진희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중후한 얼굴에 짜증이 번졌다.
“너희 산오 님이 내 조카를 데려간 사실은 어떻게 책임질 거지? 의도가 있는 행동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그 질문에는 종찬 역시 입이 꾹 다물렸다. 놀이공원까지 쫓아와서 보고 있었던 주제에 일이 어떻게 된지는 정확히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시 살벌해지는 분위기를 중재한 것은 종희였다.
“그러니까,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산오 님이 그러실 분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명백한 현장을 잡았는데도 그 말을 믿으란 말이지.”
“이야기를 하고 판단하시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대화로 푸시죠.”
그 말에 산오를 한참 꼬나보던 진희수가 미래와, 아이를 안고 있는 이연과, 매점 직원, 그리고 종찬과 종희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화를 가라앉히듯 깊게 심호흡을 한 진희수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애부터 보내.”
눈꺼풀에 한번 감춰진 눈은 여전히 사나웠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이연이 조심스레 미래를 내려놓았다. 경직된 분위기에 주춤거리던 미래가 이연을 연신 돌아보더니 진희수에게 안겼다.
“삼춘.”
“괜찮아?”
“웅! 재미있었어.”
다정한 목소리로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진희수는 미래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아 올렸다. 멀뚱히 선 산오와 이연을 확인한 진희수가 턱짓했다.
“앉아서 이야기하죠.”
놀란 직원들을 진정시켜서 보내는 사이 종찬과 종희는 알아서 사라졌다. 남은 네 사람은 놀이공원 변두리에 마련되어 있는 야외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이연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 진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자초지종이랄 것도 없었다. D.S의 부탁을 받아 그의 딸과 놀아 준 게 다니까.
“……그렇게 돼서 미래와 놀아 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누나가…….”
진희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황을 보니 D.S가 모르는 아이를 냅다 납치하라고 사주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진희수와 D.S가…….
“오해를 했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이연이 고개를 저었다. 학교 간 조카가 집에 안 돌아와서 혼비백산 찾으러 다녔을 것을 생각하면 진희수도 오늘 마음고생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누나와 아이가 만나기로 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데리고 있던 적이 없어서요.”
“저희가 작업을 부탁드려서 그동안 최대한 데리고 있으려다 보니…….”
연락이라고 해 봤자 D.S가 작업 끝났으니 빨리 오라고 호통칠 줄만 알았지, 갑자기 랭킹 4위 삼촌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미래는 제 5촌 조카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제가 보호자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연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렀다. 5촌 조카면 미래에게 희수는 당숙이었다. 보통 엄마가 살아 있는데 이렇게까지 먼 친척이 보호자 역할을 하나?
“미래가 D.S 씨와 같이 사는 게 아니에요?”
“집안 사정이라.”
진희수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부처에 가까웠으나, 선을 긋는 목소리만큼은 단호했다. 이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러났다. 초면에 캐물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누나는 괜찮습니까?”
“뭐가요?”
진희수가 조금 머뭇거렸다.
“상황이나, 생활이나,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초면에 물을 만한 말은 아닌데. 이연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그냥 손님이라 그런 건 잘 몰라요.”
“그렇군. 그냥 손님에게 딸을 맡겼다는 이야기입니까.”
“…….”
대하기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다시 의심이 도지기 시작했는지 진희수의 눈에 경계가 어렸다. 천하의 불한당처럼 보는 눈빛에 이연이 허허 웃었다.
“사촌 동생보다 손님이 더 믿을 만했나 보죠.”
“…….”
뼈가 담긴 말에 진희수의 안색이 시무룩해졌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에야 진희수는 우울하게 말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본 지가 오래되어서요.”
“저희 지금 D.S 씨한테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나름대로 선심이 담긴 제안이었으나, 그는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래는 벌써 당숙에게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곤히 자는 모습이 천사처럼 귀여웠다. 아이의 등을 도닥이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옅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미래가 잠결에 뒤척이다 당숙을 흘깃 확인하고는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든 아이를 안고 일어선 진희수가 가볍게 목례하고는 멀어졌다. 이연과 산오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최종 목적지에 갈 시간이었다.
“늦게도 오네.”
“이게 누구 탓인데요.”
D.S의 공방에 다시 도착했을 때에는 한밤중이었다. 삐딱하게 벽에 기대 있던 D.S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두 사람을 확인하고 공방 안쪽으로 등을 돌렸다.
“다 만들었으니 가져가.”
“미래는 어디 있는지 안 물어봐요?”
이연의 물음에 D.S는 뒷모습을 보인 그대로 멈춰 섰다. 잠깐의 침묵 후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희수가 어련히 데려갔겠지.”
진희수에게는 묻지 못했지만, D.S라면 괜찮았다. 이연이 냉큼 물었다.
“집안이랑 싸우기라도 했어요? 왜 미래랑 같이 안 살아요?”
“안 싸웠어. 그냥 의견 충돌이 있어서 따로 살고 있는 거야.”
그게 싸운 거다.
“글쎄,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못 미더웠나 보지.”
가족에게 쓰기에는 퍽 낯선 어휘다.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D.S 씨가요? 왜요?”
허름해 보이긴 하지만 D.S는 유망직종 중 하나인 엔지니어고, 커리어도 괜찮다. 아무리 자랑스러워해도 모자랄 능력인데,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다 못해 배 아파 낳은 아이도 빼앗아 버릴 정도라니.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정도가 심했다.
“난 실패작이거든.”
D.S는 의미 모를 말과 함께 인상을 짧게 쓰고는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실패작이라니,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제가 의뢰 맡길 만큼 능력 좋거든요. 이연이 조잘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여튼 다들 부끄러움만 많아서는. 입을 삐죽인 이연이 D.S를 따라 공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방의 커다란 작업 테이블 위에 이연의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뭉치의 장난감은 겉으로 보기에 기성 제품과 큰 차이가 없었다. 기다란 막대기 끝에 깃털이 달려 있는 끈을 붙여 놓은 형태. 색색깔의 깃털과 장식 구슬이 손짓에 따라 화려하게 흔들렸다. 아무렇게나 놔둬도 아무도 엔지니어가 만든 도구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위장이 완벽했다.
“일부러 시중에 파는 거랑 비슷하게 했어. 어차피 변이종 놀아 주는 용도로 쓸 거라며.”
그러나 겉보기에나 그렇지, 뭉치의 낚싯대는 손에 감겨드는 촉감도 탄력도 좋았다. 과연 도구 전문가가 만든 작품다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기능을 좀 추가했어. 막대나 끈 길이 조정 같은 거.”
“오.”
D.S의 말대로 조작하니 늘어나는 범위가 상당했다. 이 정도면 밖에서 놀아 주는 것도 걱정 없겠다. 만족한 이연이 막대기를 지휘봉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리저리 휘두르며 낚싯대를 팔랑거렸다.
그러자 별안간 막대기 끝에서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지이잉.
“……?”
붉은색 직선 레이저가 우연히 닿은 협탁은 섬찟한 파열음과 함께 두 동강 났다. 이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막대기와 협탁의 잔해를 번갈아 보았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서랍에 들어 있던 종이들이 팔랑이고 있었다. D.S가 태연한 낯짝으로 설명을 마무리했다.
“그걸 특정 모양대로 휘두르면 레이저가 발사돼. 웬만한 건 전부 자를 수 있을 거야.”
“고양이 낚싯대에 왜 자르는 기능이 필요한 거죠? 놀아 주는 용도라면서요?”
“외부 전기 충격에도 강해. 몇 겹으로 보호를 해 놨으니까 전기를 직빵으로 맞아도 망가지지 않고 처치할 수 있을 거야.”
“처치? 남의 집 반려동물을 처치하시겠다?”
“혹시 모르잖아.”
“모르긴 뭘 몰라요? 댁의 음모는 확실히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