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커플만 받는다잖아.”
“임시 커플 하면 되지. 이제부터 사귀자. 됐지?”
“미친 건가?”
성인 돼지의 의사는 전에 본 적 없이 강경했다. 정말로 참가할 것 같아 어떻게든 이연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소리 죽여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눈에 띄었는지 진행자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와! 여기는 남성 두 분이 신청하셨는데요, 커플 이벤트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나는……”
“네. 저희 커플 맞아요. 엄청 오래됐고요, 이쪽은 저희 애. 입양했습니다.”
태연하게 구라를 치는 이연의 옆에는 누가 봐도 봉변당한 얼굴인 산오가 있었기 때문에, 진행자는 야유했다.
[에이, 믿기지 않는데요?]
“증명 가능합니다.”
……뭘?
산오가 그런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연이 몸을 틀어 산오의 어깨를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칠 멈칫한 틈을 타 하얀 얼굴이 한없이 가까워졌다. 지금 뭘 하는……. 그렇게 말할 새도 없이 코가 닿았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춘 이연이 산오와 눈을 마주했다. 달싹이는 입술이 로맨틱하지 않은 헛소리를 지껄였다.
“은혜 갚는다며. 많이 탕감해 줄게.”
은혜는 지랄…….
[오오! 엄청 화끈한데요?]
사기극에 그대로 속은 진행자가 환호하며 두 사람을 참가시켰다. 이연이 산오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섰다.
“가자. 미래야, 응원하고 있어.”
“웅!”
꼭 쥔 손이 강하게 끌어당겼다. 산오가 얼결에 끌려가며 조그만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대체 뭐 하는 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임은 별거 없었다. 파스타 버전 빼빼로 게임이라고나 할까.
“이걸 물라고?”
산오가 개소리하지 말라는 얼굴로 묻자, 이연이 듬직하게 대답했다.
“넌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준비 시, 작!]
게임 시작과 동시에 떠들썩한 환호성이 주변을 채웠다.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었다. 쾌속 전진하는 머리가 성큼성큼 파스타를 씹어 삼켰다. 최대한 가까이 가야겠지? 이연이 거리를 가늠하며 면을 우물대는데 정면에 있는 산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는 뚱한 표정인 것과 달리 얌전한 자세가 정말 의외로 협조적이다. 산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연이 알 길은 없었지만, 놀다가 기분이 좋아지니 이런 것도 순순히 따라 주는구나 싶긴 했다. 눈이 마주치자 짙은 초록색 눈이 무심하게 그를 노려보았으나 하얀 면발을 물고 있는 꼬락서니 덕에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잘생기긴 정말로 잘생겼구나, 뭐 이런 생각이나 들었다.
서늘한 눈매나 매끈한 콧대, 그리고 도톰한 입술이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파스타 면을 물고 있는 입술로 고정되었다. 면발을 걸치고 있는 아랫입술이 유독 부드러워 보였다.
“…….”
이거 좀 뭔가 이상한데. 반값 이벤트에 잠식된 이성이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연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는 것과 동시에 다가가는 속도가 급속도로 느려졌다. 손가락 한 마디는 더 남은 거리에서 제동이 걸리자 관객들의 웅성임이 커졌다.
대치가 길어지자 산오의 시선이 이연을 훑었다. 빨리 끝을 내라는 사인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한번 멈칫한 마음은 쉽게 다시 돌진하지 못했다.
‘그냥 여기서 끝낼까?’
어차피 면발을 끊기만 하면 되는 게임이다. 이 정도 길이면 우승이야 물 건너가겠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뒤늦게 현실을 직시한 이연이 입을 살짝 벌려 치아에 힘을 주었다. 그 꼴을 빤히 바라보던 산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만히 앉아 있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환호 소리로 가게 안이 떠들썩해졌지만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이연이 멍하니 눈앞의 산오를 바라보았다. 속눈썹까지 한 올 한 올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온기는 한순간에 떨어졌다. 아래를 받치고 있던 산오의 손바닥에 아주 조그만 면발 조각이 안착했다. 사면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것을 흘깃 바라본 산오가 중얼거렸다.
“은혜가 하해 같아서 도무지 줄지가 않는군.”
초점이 사라진 이연의 시선이 심술맞게 달싹이는 입술로 향했다. 그냥 게임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아는데. 촉감이.
……닿지 않았나? 진짜 닿았나? 닿았다고?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면발이 아니라 면발 부스러기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작은 조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연은 원하던 대로 반값 할인권을 쥐었지만 정작 주문하는 내내 정신이 딴 세상에 가 있었다. 보다 못한 산오가 대신 주문했다. 음식은 곧 나왔고, 이연은 여전히 넋을 놓은 채로 음식을 한 입 떠 넣었다.
“…….”
맛있네? 금세 정신을 차린 이연은 평소대로 흡입을 시작했다. 덕분에 2차 주문을 할 때쯤에는 완전히 기운을 차려 평소대로 생기가 가득 차 있었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니 벌써 어둠이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벤트 때문에 시간을 좀 지체했다. 빨리 데려다줘야겠네. 이연이 미래를 안아 들며 빙긋 웃었다.
“미래야, 이제 진짜 엄마한테 가자.”
“응!”
그때였다.
“정이연, 제산오.”
갑작스러운 호명에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멈췄다.
차분하게 떨어진 목소리는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동시에 어째 좀 귀에 익었다. 누구지? 이연이야 그렇다 쳐도, 언론 노출이 거의 되지 않은 산오를 안다고?
언제든 능력을 쓸 수 있게 전투태세로 돌입한 두 사람의 눈에 짙은 경계심이 어렸다. 이연이 미래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산오가 대응하는 동안 미래를 대피시킬 요량이었다.
저벅.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어둠이 자욱한 곳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곧 그들의 앞에 한 남자가 등장했다.
가로등 빛에 드러난 매끈한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이연이 멈칫했다. 저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이 도시에 없었다. 제산오와 비슷한 의미인 동시에 다른 의미였다.
“두 사람을 유아 납치 및 유괴 혐의로 체포한다.”
초능력 관리청 변이종대응국장 진희수. 초호시를 대표하는 초능력자. 국내 랭킹 4위.
그리고 산오와 같은 무궁화 5단인 용해 능력자.
싸늘한 얼굴은 TV에서 보던 것과 똑같았다. 실제 본인이었다.
같은 5단이어도 진희수는 언론에 얼굴을 자주 내비치는 편이었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도 유명했다. 초대 초능력 관리청장이자 가장 처음 구멍을 막았던 얼음 능력자, 최희원의 손자인 덕에 초능력 수저 물고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유력한 차기 초능력 관리청장. 진희수의 가장 대표적인 평가였다.
뒤지게 바쁘기로 유명한 진희수가 갑자기 놀이공원엔 왜, 그것보다 방금 나한테 뭐라고…….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연이 눈만 느리게 깜빡이는 동안, 품에 안겨 있던 미래가 와락 외쳤다.
“삼촌!”
……삼촌? 진짜 삼촌?
“감히 우리 애를.”
정신을 차린 이연이 다급히 변명했다.
“저……. 유괴는 아니거든요. 베이비시터에 가까운데요.”
“그런 건 경찰서에서 말하고. 그 애를 내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래를 내려놓는 순간 진희수가 그를 공격할 것이다.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요.”
“증인이 있는데도 그런 소릴 지껄일 셈인가?”
증인까지 있다고? 사실이 아닌데 어떻게 증인이 있어? 이연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진희수를 바라보자, 그가 뒤를 향해 작게 눈짓했다. 곧 한 쌍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아까 음료수를 샀던 매점의 직원과…….
“맞아요. 저분이 자기는 이 애를 처음 봤다고 했어요!”
레스토랑 이벤트의 진행자.
“저한테는 자기네가 부부고, 입양한 아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맞긴 한데 그게 아니라고!
“애를 인질로 잡을 셈인가?”
진희수가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자세히 보니 눈알이 반쯤 뒤집혀 있었다. 아무렇게나 씨부리고 다닌 업보 폭탄을 맞은 이연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은 수두룩빽빽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말을 해도 알아들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연이 억울한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대자, 화살은 다른 곳을 향했다.
“제산오. 그동안 두문불출한다 했더니 범죄자로 길을 전향했군.”
진희수는 초능력 관리청 소속의 고위 공무원이었으니 산오의 얼굴을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직접 마주친 적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 이연의 말은 믿지 않아도 산오의 말이라면……. 이연이 희망을 담아 산오와 희수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산오가 빈정거리는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곧이어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호가 목적이라면…… 나에게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될 텐데.”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건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