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보트를 내리자마자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이연은 미래와 함께 출구 쪽에 마련된 온풍기에서 몸을 말리며 산오를 흘깃 훔쳐보았다.
이연의 큰 희생 덕에 거의 멀쩡하게 나온 산오는 근처 기둥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거리 구경을 하고 있었다. 매끈한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 무감했다.
괜히 쓸데없는 거에 긴장을 해서. 이연이 떨쳐 버리듯 일부러 몸을 부르르 떨었다.
“따뜻해~.”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돼.”
꼬물대며 열심히 몸을 말리던 미래가 불이라도 쬐듯 두 팔을 쭉 뻗었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뺨이 온기를 쬐니 발갛게 데워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 이연이 고민도 제쳐두고 흐뭇하게 웃었다.
“재미있어?”
“웅!”
차에 붙이는 달랑거리는 인형처럼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 미래는 이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엄마랑도 오고 싶었는데.”
보아하니 이렇게 약속을 어기고 도망간 게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른이면서. 쪼그려 앉아 미래와 시선을 맞추자 힘 빠진 얼굴이 이연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엄마랑도 오면 되지.”
“엄마는 안 와. 미래 별로 안 좋아해.”
봐라. 애한테 신뢰 다 잃었다. 양치기 소년은 이렇게 되는 거라고요. 이연이 멀리 있는 D.S에게 원거리로 투덜대며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슬슬 감겼다. 아직 머리뼈조차 단단하게 여물지 못한 아이가 당연스레 입 밖으로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삼촌이 엄마 등짝을 밀어서라도 같이 가라고 할게.”
“진짜?”
“당연하지.”
“그치만…… 그치만. 그래도 엄마가 안 오면 어떡해?”
“음…….”
본인은 한껏 심각하다는 걸 알아도 우물쭈물대는 모습이 귀여운 건 귀여운 거다. 일부러 고민하듯 말끝을 늘인 이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럼 삼촌이 또 같이 가 줄게.”
“삼춘이?”
“그럼. 오늘 놀았으니까 우리 이제 친구야.”
“친구야?”
“우리 친하잖아.”
미래가 환하게 웃었다. 조막만 한 얼굴에 용케 들어가 있는 큰 눈이 한껏 휘었다.
“친구!”
“응, 친구.”
그 모습이 빛나는 것처럼 예뻐서, 이연도 덩달아 웃었다.
“앗, 삼춘. 여기 덜 말랐어!”
“어디?”
미래의 말에 따라 몸을 이리저리 돌리자 물기는 금방 말랐다. 강한 열을 쬐니 산오의 체온 같은 것은 쉽사리 잊혔다.
세 사람은 온갖 놀이기구를 같이 탔다. 그다음은 롤러코스터, 그다음은 회전 목마, 그다음은 범퍼카.
롤러코스터에서 무표정으로 낙하하는 제산오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린 미래, 바람에 치이느라 핼쑥해진 이연의 얼굴이 선명히 찍힌 사진도 기념으로 샀고, 회전목마 안 커다란 백마 위에서 뒤를 향해 손을 열심히 흔드는 미래를 조랑말을 탄 이연이 웃으며 마주 반겨 주기도 했다. 그 옆에는 마차에 탄 산오가 시큰둥한 얼굴로 황제처럼 앉아 있었다. 범퍼카에서는 수상할 정도로 날아다니는 제산오에게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냐는 합리적 의혹을 제기했으나 장렬히 무시당했다.
기념품 숍에 들러 오만가지 색깔로 경박하게 반짝거리는 마법봉도 미래의 손에 들려 주고, 이연은 하트 모양 렌즈 선글라스를 낀 채로 입으로 부는 장난감을 물고 산오를 향해 불다가 장난감이 동강 났다. 박살 난 장난감을 버리며 네가 뭉치냐고 투덜댔지만 산오는 가볍게 흘려넘기고 다음 놀이기구로 향했다.
그 모습이 아닌 척해도 제법 재미있어하는 것 같아서, 이연은 뒤에서 뿌듯하게 웃었다.
“다음은 이거 타자!”
놀이 기구를 꽤 많이 탔는데도 미래는 지칠 줄을 몰랐다. 그래도 처음에 만났을 때 시무룩한 얼굴보다는 훨씬 낫긴 했다. 방방 뛰어다니는 미래의 얼굴에 그늘이라곤 없었다.
“같, 같이 가아…….”
문제는 어른이었다. 준비된 체력을 거의 소진한 이연이 허름한 걸음걸이로 미래를 쫓았다. 산오가 한심하다는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어린아이보다 못한 체력이군.”
“야, 어린이 이기기가 쉬운 줄 알아? 나도 어릴 때는 날아다녔어…….”
산오가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대찬 비웃음은 처음 들었으나 울컥할 힘도 없었다.
셋의 모습이 어딘가 오해를 받을 만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런 식으로 놀이공원을 휘젓고 다닌 지 한참 지났을 때였다.
시작은 음료수를 사기 위해 들른 매점의 직원에게서였다.
“따님이 정말 예쁘네요.”
“예? 그런 거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게 뭐 흠인가요.”
사고방식이 편견 없는 대신 착각의 늪에 빠져 있었다.
난데없는 부부 취급을 받게 된 두 사람의 얼굴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그러졌다. 강한 부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직원이 해맑게 웃으며 미래에게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자, 여기. 아빠들이 멋있어서 좋겠네~.”
예쁜 색깔의 음료수에 정신이 팔린 미래가 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웅. 사노 멋있어!”
맹랑한 꼬맹이가 오해할 만한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아까는 제산오 얼굴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척했으면서 다 보고 있었다니. 신난 아이의 장단을 맞춰 주듯 직원은 계산하는 내내 미래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빠 이름이 사노야? 왜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사노는 사노라고 했어. 근데 이연 삼춘은 삼춘이라고 부르랬어.”
“앗…….”
순식간에 서먹한 공기가 네 사람 사이를 휩쓸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친 직원의 눈빛 온도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그런 거 아닙니다. 미래야. 난 정말 삼촌이잖아.”
이연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분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삼촌…… 분이랑 재밌게 놀고.”
“진짜라고요. 전 오늘 얘 처음 봤다고요. 부탁받고 놀아 주는 거예요.”
“네…….”
급기야 직원은 떨떠름하게 시선을 피했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더 이상의 대화가 무용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연이 성큼성큼 매점을 나서는 산오와 미래를 터덜거리며 쫓았다. 게이 오해는 같이 받았는데 왜 나만 되게 손해 본 것 같지? 알 수 없는 결과였다.
한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나자,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서서히 이연의 시야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훈훈한 눈빛, 친절한 태도, 고생이 많다는 위로까지……. 찝찝하기 짝이 없는 온기였다.
난 그게 다 제산오가 잘생겨서 그러는 줄 알았지. 그런 이유도 영 없는 건 아니겠지만. 졸지에 남편과 아이가 생긴 이연이 뚱하게 팔짱을 꼈다.
근본 없는 오해가 달갑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나일 특급 타다가…… 묘해지지 않았는가. 미래랑 중간에 눈이 마주치지 않았으면 덫에 걸린 새처럼 내내 그러고 있을 뻔했다. 애를 앞에 두고 잘하는 짓이었다. 특별히 뭐 한 것도 없으면서 이연은 죄를 지은 사람마냥 끊임없이 당시 상황을 외면했다.
“슬슬 출출하네.”
하도 끌려다니느라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난 것도 몰랐다. 배고프다는 생각을 한번 하고 나니 급속도로 허기가 지기 시작해, 세 사람은 근처에 있던 양식당에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대강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으니 다리가 뻐근했다. 하루 종일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그제야 조금 실감이 됐다.
“저녁 먹고 공방에 가면 되겠다. 미래, 밥 먹고 엄마한테 가자?”
“웅!”
이 정도면 오래도 놀았다. D.S도 양심이 있다면 뭐라 못할 것이다. 가격을 좀 깎아 달라고 해 볼까? 세속적인 계산을 하며 메뉴판을 집어 드는데, 별안간 부엌에서 요란한 음악과 함께 확성기를 든 직원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즐거운 저녁 되시고 계신가요? 지금부터 저녁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이벤트고 나발이고 배가 고파 죽겠다. 이연은 신경도 쓰지 않고 메뉴판을 펼쳤다.
[이벤트는 간단한 팀 게임으로 진행될 텐데요, 특별히! 커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벤트 우승자에게는…… 바로바로, 오늘 드시는 저녁을 전부 반값으로 제공합니다!]
미래는 흘끔거리긴 했으나 큰 관심은 없었고, 산오는 원래 그런 데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럼 참가하실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식당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며 하나둘 손을 드는 것이 보였다. 시끄럽군. 산오가 슬며시 인상을 쓰며 소란스러운 좌중을 노려보는데, 근처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요.”
어째 익숙한 목소리였다. 옆을 돌아보니 이연이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너도 빨리 손 들어.”
재촉하는 이연의 눈에는 어째 영혼이 반절쯤 빠져 있었다. 왜 이러는 거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산오가 살벌하게 뇌까렸다.
“미쳤나?”
“미친 건 여기 가격이야.”
그렇게 읊조리는 이연의 다른 손에는 채 한 장 넘겨 보지도 못한 메뉴판이 애처롭게 들려 있었다.
놀이공원 안에서 장사하는 가게들 가격이야 사악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지만, 그중에서도 이 식당의 가격 책정은 양심이 증발한 수준이었다. 이 돈을 주고 밥을 사 먹는 행위는 이연의 인생관에 있을 수 없었다. 결연한 얼굴만큼 번쩍 들고 있는 팔도 굳건했다.
“내가 사는 걸로 해.”
“너 돈 있어?”
산오는 지갑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공수해 올 수 있다.”
평화로운 어감은 아니었다.
“산오야, 생각해 봐. 평화로운 절약법이 있는데 굳이 낭비를 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이연의 눈에는 일종의 광기가 서려 있었다. 반드시 저기에 참가해 식비를 아끼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놀이공원 왔으면 이런 경험도 한 번쯤 해 보는 거야. 다 즐거운 추억이 되는 거라고.”
놀이공원 처음 온다고 별별 사기를 다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