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20화 (20/250)

#20

그래, 경험이 힘이라니까. 이런 경험을 어디다 쓰지? 투닥대는 대화가 떠들썩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섞였다. 동화 속에 나올 법한 꿈같은 풍경이었다.

미래가 키 제한에 걸리지 않으면서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 기구는 꽤 많았다. 이연은 미래와 놀이공원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쑥덕였다.

“이건 어때?”

“그건 쫌 무서운데.”

“내가 손잡아 줄게.”

변이종 잡을 때에도 저렇게 진지한 얼굴은 아니었다. 산오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두 사람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삼춘이 내 옆에 못 앉으면 어떡해?”

“그럼 산오가 잡아 줄 거야.”

두 쌍의 동그란 눈동자가 산오에게로 모였다. 산오가 어림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꼬마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의사 표현이었다. 시무룩해진 미래의 등을 토닥여 준 이연은 미래의 옆에 꼭 앉아 주기로 다섯 번쯤 약속한 후에야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럼 가 볼까?”

제산오에게 생애 첫 놀이 기구 경험을 시켜 줄 시간이었다.

물에 뜨는 동그란 보트 모양의 기구를 타고 물길을 한 바퀴 도는 <나일 특급>은 이 놀이공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놀이 기구 중 하나였다. 다행히 평일이었던 덕에 줄은 길지 않았고, 세 사람은 금방 탑승할 수 있었다.

4인승 보트 기구에 옹기종기 올라탄 세 사람이 물에 많이 젖지 않게 하는 비닐 시트를 덮자, 직원이 보트를 물에 흘려보냈다. 빠르지 않은 물살을 따라 보트가 둥글게 돌아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직선으로 얌전히 흘러가나 싶던 보트는 이내 지그재그로 구부러져 있는 구간에 돌입했다.

물을 막아 주는 비닐 시트가 있다는 말은 물이 많이 튄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비닐 시트는 물을 완벽하게 막아 주지 못했다.

삐뚤어진 코스를 물살에 떠밀려 나아가느라 보트는 쉴 새 없이 흔들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벽에 정통으로 부딪힌 순간, 시원한 물줄기가 분수처럼 보트 안으로 쏟아져 내려……야 하는데.

물 대신 어둠이 그들의 시야를 덮었다.

“……?”

물이 튈 것을 예상하고 몸을 움츠리고 있던 이연이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는 없었던 웬 벽이 돔처럼 둥글게 보트를 감싸며 물을 막아 주고 있었다.

“제산오! 초능력 쓰는 건 반칙이지!”

“젖는 건 질색이야.”

뚱한 얼굴이 왕처럼 거만하게 앉아 보트 외곽에서 튀어나온 쇠 벽의 철통같은 엄호를 받고 있었다. 보트가 아니라 요새 같았다. 이제 보니 출발할 땐 얌전히 덮여 있던 비닐 시트도 내팽개쳐져 있었다.

“비닐은 왜 뗐어?”

“갑갑해.”

가지가지 한다.

설상가상으로 철 무게 때문에 보트의 속도가 느려졌다. 아니, 느린 건 둘째치고…… 수면이 이렇게 높았나?

“야! 보트 가라앉고 있잖아!”

“삼춘, 이거 잠수함이야?”

이 사태가 놀이 기구의 연장선인 줄 아는 미래가 해맑게 물었다.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보트가 가라앉고 있다는 뜻이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가 봐. 재밌다. 그렇지?”

“웅!”

그러나 어린 미래에게 겁을 줄 수는 없었으므로, 이연이 로봇처럼 대답하며 산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모스 부호라도 보내는 것처럼 광속으로 깜빡이는 눈이 당장 원상태로 복구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산오야. 이게 이런 체험이 아니야. 우린 물을 맞아야 한다고.”

“옷 입고 샤워하는 게 취미인가?”

“이대로면 진짜 그렇게 되거든? 그냥 물에 빠진 사람이 될 거거든?”

철판으로 가려진 등 뒤에서 출렁이는 물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이연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놀이공원 놀러 와서 난데없이 수장되다니? 꿈이라면 깨고 싶었다.

“야! 제산오!”

“삼춘, 울어? 사노가 뭐 했어?”

“산오가 너무 예뻐서 눈물이 다 나네. 삼촌 마음 이해하지? 미래도 친구를 잘 둬야 한다.”

“우웅…….”

미래는 어리둥절하게 산오와 이연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를 못 해도 대충 장단을 맞춰 주려는 배려가 기특했다.

이연이 미래의 눈치를 보며 주변을 확인했다. 코스의 벽이 아까보다 훨씬 높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연이 산오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잇새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아무튼 초능력은 안 돼. 주의 사항 못 봤어?”

줄을 서는 곳곳에 세워져 있던 탑승 시 주의 사항 팻말의 가장 첫 번째 항목이 ‘초능력을 쓰지 마시오.’였다. 이연의 간절한 잔소리에 그제야 산오가 못마땅한 얼굴로 초능력을 거두었다.

요새처럼 보트를 감싼 철판들이 스르륵 사라지고 그 자리를 햇살이 비추었다. 보트는 다시 수면에 떠올라 본연의 모습으로 복귀했다.

“…….”

이연이 급격히 초췌해진 얼굴로 드디어 마주한 파란 하늘을 감격스레 바라보았다. 기구 탄 지 1분도 안 됐는데 한 30분은 지난 것 같았다. 언제 끝나냐? 이연이 반쯤 해탈해 염불이나 외고 있을 때였다.

정면에 가파르게 꺾어지는 길이 있었다. 부딪혀서 물세례를 크게 맞는 구간이었다. 전방을 확인한 산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의 난리통으로 신경이 예민해진 이연은 아주 명확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능력을 다시 쓸까 말까 고민하는 낯짝이었다.

좀 전의 사태를 또 겪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이연이 비닐 시트를 헤치고 벌떡 일어섰다.

“삼춘! 이거 탈 때 움직이면 안 돼!”

미래의 야무진 외침을 흘려들은 이연이 냅다 산오에게 달려들었다. 물살 때문에 중간에 균형을 잃고 잠깐 비틀거리긴 했으나 무사히 산오의 자리에 안착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산오를 등에 깔고 자리에 앉은 이연이 비닐 시트를 휙 들어 둘의 몸을 전부 덮었다. 난데없이 덮쳐든 몸에 산오가 멈칫한 틈을 타 버럭 소리 질렀다. 절박하게까지 느껴지는 고함이었다.

“내가 막아 줄 테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어!”

이어서 벽에 부딪힌 보트가 철썩, 하고 물보라를 쳤다. 보트 안으로 침범한 물이 이연의 어깨와 얼굴에 그대로 튀었다. 맞은 편에서 홀딱 젖은 미래가 꺄르르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이른바 인간 방패였다. 이연이 온몸으로 막은 덕분에 수말을 피한 산오는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몸에 힘을 뺐다. 일차적 재앙을 막았다. 이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시한폭탄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하고 나니 출렁이는 물살까지 평화로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삼춘 왜 거기 있어? 나도 자리 바꿔도 돼?”

“삼촌은 어른이라 괜찮아. 미래는 거기서 균형을 맞춰 주자.”

당당하게 거짓말을 씨부린 이연이 인사하듯 손을 흔들자 미래가 마주 흔들었다. 어린아이를 속여먹었다는 죄책감은 놀이공원의 평화에 기여한다는 비장함에 밀렸다.

그 후로는 한 자리에 두 명이 억지로 낑겨 앉은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운행이 이어졌다. 가끔씩 튀는 물보라와 적당한 속도감이 기분을 좋게 했다. 신이 난 미래가 자리에서 들썩거리며 물이 튈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이연이 예상하고 바라던 평화로운 즐거움이었다.

등 뒤로 체온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어느 순간이었다.

이연은 그제야 제가 민망할 정도로 산오와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연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몸은 탄탄하고 따뜻했다. 얇은 목 티는 딱 달라붙은 신체에게 천 너머의 굴곡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었다. 단단한 팔이 가볍게 이연을 감싸는 자세처럼 팔걸이에 걸쳐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의도도 상황도 아니었지만, 모양만 보면 백 허그나 다름없었다.

“…….”

기이할 정도로 얌전히 숨만 쉬고 있는 산오의 반응이 급작스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조금 빨라진 것 같은 맥박을 무시하며 이연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재밌냐?”

뒤통수에서부터 등 아래까지 모두 밀착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고개가 조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것도 잠시, 보트가 높게 출렁이는 물살을 맞고 크게 휘청였다. 이연의 몸도 강한 반동에 덩달아 비틀대며 크게 튀어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종이인형처럼 팔랑이는 어깨를 산오가 가만히 잡아 쥐었다.

커다란 손이 단단히 잡아 자신의 몸으로 이연을 가두었다. 부드러운 압박감에 이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온기가 손을 타고 온몸으로 전염되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몸이 맞닿아 있어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 소리가 울렸다. 미래가 꺄악, 하고 즐겁게 지르는 환호가 조금 멀게 들렸다. 보트의 출렁임이 잦아들자 산오는 손을 떼었지만, 심장을 느릿하게 쥐어 짜내는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포 때문일 것이다. 제산오에게서는 일전에 한 번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지 않았는가. 그때의 긴장을 기억해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군.”

길쭉하고 단단한 손가락이 이연의 앞머리를 스쳤다.

물을 대신 맞은 덕에 잔뜩 젖어 피부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투명한 물기는 산오의 손을 타고 흘러 비닐 시트 아래로 감춰졌다.

이연의 호흡이 느려진 사이,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상하게 그 심술궂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러붙어 오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럭저럭 괜찮아.”

분명히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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