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전기에 안 타는 고양이 낚싯대를 만들어 달라고?”
간단한 설명을 들은 D.S가 노망이 났나 싶은 얼굴로 이연을 훑어보았다. 이연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고충을 토로했다.
“저 진짜 미치겠어요. 혹시나 싶어서 열 개들이로 샀는데 전부 개박살이 났다니까요. 이러다간 장난감 때문에 파산이에요.”
“파산하는 건 네 머리통이야. 왜 변이종을 반려동물로 들이고 난리야? 뉴스 안 봐? 변이종이 만만해?”
“변이종 공생이 요즘 핫하잖아요. 시국에 발맞춰서…….”
“전기 뿜는 변이종을 집 안에서 기르면서 무슨 공생이야? 이웃한테 허락은 맡았어?”
“기르다뇨.”
이연이 돌연 정색했다.
“걔는 다 큰 상태로 저한테 왔어요. 제가 처음부터 길렀으면 장난감 개박살 내는 친구로는 안 키웁니다. 제 육아관을 얕보지 마세요.”
“넌 진짜 문제가 뭐냐?”
그러나 그렇게 말해 놓고 D.S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침묵에 잠겼다. 잠시 후, D.S가 팔짱을 끼고 이연을 바라보았다.
“좋아. 조건이 있어.”
“뭔데요?”
“곧 우리 애 초등학교 하교 시간이다.”
“예?”
“나 대신 데려와.”
“워킹맘이었어요?”
이연은 D.S와 몇 년 동안 거래했지만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생전 처음 들었다. 예상외의 부탁이었지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이연이 공방을 나서며 가볍게 덧붙였다.
“아, 저 태블릿이 고장 났는데 그것도 고쳐 주세요.”
“그래.”
순순한 수락에 이연이 잽싸게 가방을 주섬주섬 뒤적여 액정이 박살 난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고글에 공격 기능도 몇 가지 추가해 주시고요. 아, 하는 김에 통신기도 하나만…….”
“이게 봐주니까 끝이 없네. 당장 안 가?”
D.S의 자식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의외로 부촌에 있었다. 아무리 허름하다고 해도 엔지니어 수입이 무시 못 할 정도긴 하지만…… 교육열이 대단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이연이 떨떠름하게 휘황찬란한 초등학교 외관을 바라보았다. D.S의 말대로 하교할 시간인지 아이들이 삼삼오오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이연은 D.S에게 받은 사진을 눈알 빠지게 대조한 끝에 그녀의 딸을 찾아냈다. 시무룩한 얼굴이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 네가 미래니?”
상냥한 물음에 조막만 한 머리가 들렸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아이의 이름은 강미래. 여덟 살인데도 벌써 마르고 길쭉한 태가 나는 여자아이였다 D.S가 발 빠르게 연락했는지 미래는 낯선 남자들을 보고 놀라지도 않았다.
“엄마가 말한 사람이 아저씨들이에요?”
“응. 금방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초면인 여자애를 데려가려니 어째 찝찝한 기분이라, 이연은 부러 더 친절하게 굴었다. 그러나 과도한 호의에도 미래는 큰 흥미가 없는 듯 금방 고개를 떨구었다. 산오의 잘생긴 면상에도 시선을 거의 주지 않는 것을 보니 눈에 뵈는 게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삼촌 이름은 정이연이야.”
“네에.”
“저쪽은 제산오.”
“네에…….”
호칭을 생략당한 산오는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릴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미래와 보폭을 맞춘 두 사람은 초등학교를 곧 빠져나왔다. 여기서 공방은 거리가 꽤 됐다.
“얼른 가자.”
“엄마 어디 있어요?”
“응? 공방에…….”
“엄마 나랑 약속했는데.”
“응?”
“미래랑 놀아 주기로, 했는데.”
“……응?”
아이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뺨이 파들파들 떨렸다. 아니, 아니. 울면 안 되지! 당황한 이연이 저도 모르게 미래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천만다행으로 얌전히 안겨 있었지만, 그렁그렁거리는 눈동자는 여전했다.
“놀이공원 가자구, 엄마랑 새끼손가락, 도장 찍었는데.”
“어, 어. 그랬어? 삼촌이 빨리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엄마랑 놀이공원 가자.”
“학교 끝나자마자, 놀이공원…….”
어찌나 기대했는지 미래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잔뜩 처져 있었다. 이연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느라 뒷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산오가 슥 손을 뻗어 대신 확인했다.
“착하지. 우리가 곧 데려다줄게.”
“야.”
낮은 목소리가 어깨를 두드리자 미래를 달래던 이연이 산오를 돌아보았다. 산오가 새로 온 메시지창을 들이댔다.
[D.S] 나 작업하는 동안 걔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줘
[D.S] 육아관 잘 실천하고
이연이 뒤통수 맞은 얼굴로 휴대폰과 미래를 번갈아 보았다. 그제야 D.S의 속셈을 깨달았다.
이 인간……. 우리한테 떠넘겼구나……!
그리하여 세 사람은 울며 겨자 먹기로 놀이공원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갔다 와.”
산오가 냉큼 근처 벤치에 앉아 있으려는 것을 이연이 잡아챘다. 살벌한 시선이 이연에게로 꽂혔다.
“같이 가야지, 산오야.”
살기를 받으면서도 방긋 웃는 얼굴은 무너지지 않았다. 절대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강한 질척거림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사노, 사노.”
절체절명으로 치닫는 눈싸움을 멈춘 것은 미래였다. 산오의 코트 자락을 잡아당긴 미래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 저거.”
손가락 끝이 가리킨 것은 아이를 목말 태우고 나무에 걸린 풍선을 잡게 해 주는 아빠였다.
지금 제산오한테…… 목말을 태워 달라고 하는 건가? 엄청난 포부였다. 제가 랭킹 1위의 어깨 위에 올라타겠다는 야망을 표출했다는 것도 모르는 꼬맹이는 까치발까지 뻗어 가며 계속 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산오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싸늘한 시선이 미래를 향했다. 당장이라도 해를 끼칠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다. 위험한데. 찔끔한 이연이 한발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풍선으로 만족해.”
산오는 서늘한 목소리를 툭 내뱉고는 걷기 시작했다. 풍선을 파는 매대 방향이었다. 큰 보폭으로 저 혼자 멀리 가 버리는 산오를 미래가 종종걸음으로 뒤쫓았다.
‘……의외네.’
뒤에 남겨진 이연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조금 늦게 따랐다.
허공을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헬륨 풍선을 하나 쥔 미래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미니 바이킹이었다.
“혼자 탈 수 있어?”
“응!”
조그마한 배 모양으로 꾸며진 놀이기구에 앉은 미래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놀이기구가 운행을 시작했다.
산오와 이연은 근처 벤치에 멀뚱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연이 잠깐 맡아 주기로 한 미래의 풍선이 바람이 불 때마다 이따금 펄럭였다.
제산오와 놀이공원이라니, 같이 놓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해 보지 못한 두 단어의 조합이었다. 묘한 기분에 이연은 산오를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칼 같은 각도의 옆태는 언제나 그렇듯 서늘하고 무표정했지만, 다시 보니 이 자리와 영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만 봐.”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이연이 안 그런 척 후다닥 시선을 돌리며 미래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늘하늘 휘날리는 미래의 머리카락 사이로 환한 웃음이 대답해 주었다.
얼결에 시작된 놀이공원 나들이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날씨도 화창했고, 알록달록하고 행복한 분위기가 주변에 가득 떠다니고 있었으며, 미래는 신난 얼굴로 뛰어다니며 자주 환하게 웃었다.
이연이 그 모습을 몇 장 사진으로 찍어 D.S에게 보냈다. D.S는 별다른 답장이 없었지만, 확인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빠른 것을 보니 잘 받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산오가 금방 가 버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협조적이었다는 점이다. 미래가 멋모르고 산오를 끌고 다니는 것도 짜증 내지 않고 얌전히 따랐고, 평소라면 저 혼자 성큼성큼 걸었을 넓은 보폭도 미래에 맞추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마음을 말랑하게 만들어 주는 구석이 있어서, 이연은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왜 그따위로 웃지?”
아쉽게도 이연에게까지 맞춰 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사나운 말투에도 이연은 놀리듯이 말했다.
“천하의 제산오가 어린애한테 약한 줄은 몰랐네.”
산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칼 같은 반박이 뒤따랐다.
“약하지 않아.”
본 게 있는데 발뺌은. 이연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줍어하는 산오를 못 본 척해 주기로 했다.
“놀이공원에서 뭘 제일 좋아해?”
누가 봐도 화제를 대강 돌려 주겠다는 말투였다. 의도를 단박에 알아챈 산오의 눈썹이 불만스레 들렸지만, 별다른 트집을 잡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처음이라 모르겠는데.”
“뭐?”
되레 놀란 것은 이연이었다. 아니, 그동안 놀이공원도 안 다니고 뭘 하고 산 거야?
“넌 많이 가 봤나 보지.”
“나야 어릴 때 갔었지!”
어딘지 불퉁한 대꾸에 기함이 돌아왔다. 저 앞에서 뛰어가던 미래가 큰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잽싸게 표정 관리를 한 이연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자 미래는 다시 풍선을 흔들며 저 혼자 놀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한 거야?”
“바빴다.”
간결한 단답이었다. 제산오가 놀이공원이 처음이라니……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연이 결연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즐겨야지.”
“뭐?”
“뭐부터 탈래?”
비장한 표정에는 어떤 사명감마저 깃들어 있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눈알이 재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명백하게 그 핑계로 본인도 같이 놀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됐어.”
“되긴 뭐가 돼? 롤러코스터도 못 타 봤으면서!”
“태워 줘?”
고개만 끄덕이면 당장에라도 맞춤형 지옥행 레일을 건설해 줄 것 같았다. 이연이 찔끔하며 슬슬 구슬렸다.
“한번 타 보는 것도 좋아. 재밌어.”
“…….”
“기껏 왔는데 아깝잖아.”
이연이 능청스레 웃으며 산오의 팔을 끌어당겼다. 금방이라도 사람을 파묻을 것처럼 서늘한 눈이 마뜩잖게 빛났으나, 커다란 몸은 빈약한 힘에 저항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