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백화점에서의 소동이 마무리된 지 며칠 후, 드디어 주문한 침대가 오는 날이다. 아침 일찍 연락을 받은 이연이 집을 치운다며 부산을 떨었다. 옆에서 청, 아니, 뭉치가 덩달아 좋다고 펄쩍펄쩍 뛰며 꼬리를 비볐다.
털 뭉치는 결국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하고 뭉치가 되었다. 칠칠이보다는 나았으니 뭉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혜강과의 논의 끝에 뭉치는 이연이 키우기로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2급 변이종이다. 변이종 대응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혜강에게 맡기기엔 너무 위험했다. 2급 변이종이 날뛰면 집만 박살 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 분양을 할 수도 없고, 놔주면 지나가는 다른 사람한테 붙을까 봐 무섭고, 뭘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초능력 관리청에 데려가기도 그렇고……. 이 집은 그래도 제산오가 있으니까 걔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안이한 생각 끝에 생긴 새 식구는 의외로 잘 섞여 들었다. 기본적으로 이연을 엄청나게 따랐지만, 산오와도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혼자서 산 게 몇 년인데 순식간에 군식구가 둘이나 붙었다. 북적거리는 집 안이 새삼 신기했다. 인생 참 알 수 없네…….
그때, 거실에서 요란한 인터폰 알림이 울렸다. 영감처럼 중얼거리던 이연이 초인종 소리에 냉큼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식구를 위한 새로운 가구를 들일 시간이었다.
여기서 이연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새로 산 침대는 라지킹으로, 기성으로 판매하는 침대 사이즈 중에 가장 큰 종류였다. 덩치가 큰 산오에게 특별히 맞춘 사이즈였으나.
“침대 하나 놓으면 방이 꽉 차겠군.”
작은 방에는 안 맞았다.
산오의 말마따나 어찌어찌 구겨 넣을 수는 있겠지만, 넣고 나서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방에 침대만 덜렁 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예상외의 애로 사항에 당황한 이연이 멀뚱하게 가로로 선 침대와 방 안만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망설임이 길어지자 기사가 물어 왔다. 이연이 어, 하고 더듬거리는 틈을 타 산오가 앞으로 나섰다.
“이쪽으로.”
산오가 향한 곳은 안방이었다.
“응?”
그렇다. 이연의 방이다.
“여기도 자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기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연의 소중한 침대가 생분해되어 바닥 속에 감춰졌다. 덕분에 널찍한 공간이 텅 비었다.
“…….”
순식간에 진행된 무료 인테리어 공사에 이연의 얼이 빠졌다. 이연이 산오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런다고 단단한 몸이 하찮은 힘에 끌려오지는 않았지만, 시선 정도는 돌아왔다.
“야, 뭐 하는 거야?”
“큰 가구를 대책 없이 사 놓고도 할 말이 더 남았나?”
엄중한 눈빛에 이연의 기가 약간 쪼그라들었다.
“아니, 거실에라도 일단 놓고…….”
“침대를 거실에 놓는 사람도 있나 보지.”
여기서 제일 비상식적인 놈이 상식도 없는 사람을 보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발끈한 이연이 마지막 공격처럼 물었다.
“그럼 넌 어디서 자게?”
산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게 내 침대잖아.”
“……?”
산오의 말을 이연이 수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뇌가 물음표로 뒤덮인 동안 기사들은 빠르게 침대 설치를 마치고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마저도 꿈결 같았다.
두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되자 집구석 어딘가에서 놀고 있던 뭉치가 튀어나와 새 침대 위로 풀쩍 올라왔다. 사람 종아리만 한 짐승이 좋다고 펄쩍펄쩍 뛰는데도 매트리스는 크게 출렁이지 않았다. 과연 비싼 값을 했다.
“예쁘게 굴면 자리 한편 정도는 내줄 수도 있고.”
침대 주인 역시 심술궂은 얼굴로 지껄이고는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이연이 예상했던 대로, 어두운색 프레임은 산오에게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함께 있으니 좀 저승 풍경 같아 보인다는 면에서 더더욱…….
“…….”
부지불식간에 동거남이 생긴 것도 모자라 침대도 공유하게 생긴 이연만 얼이 빠졌다. 뭐지? 이게 아닌데? 그런 생각만 맴돌았으나 안타깝게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래서 가구를 살 때에는 방의 실측정을 선행해야 하는 것이다.
*
[최근 변이종 동향에 대하여 브리핑하는 <오늘의 변이종>. 오늘은 특별히 초능력 관리청 변이종대응국장 진희수 국장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진희수입니다.]
[국장님은 실물로 보실 때가 더 훤칠하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최근 변이종의 움직임에 관해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이전과 크게 다른 점은 없으나, 변이종 출현 빈도가 잦은 도시이다 보니 시민들이 경각심을…….]
“에비비~.”
뉴스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연이 기다란 막대를 성의 없이 흔들었다. 끝에 달려 있는 깃털이 팔랑거릴 때마다 뭉치의 귀가 쫑긋 섰다.
몸을 한껏 낮추다가 달려들 만한 타이밍에 막대를 반대쪽으로 옮기자 뭉치가 깃털을 쥐기 위해 펄쩍펄쩍 뛰었다. 꽤 재미있는 놀이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허공에 휘두르는 앞발이 퍽 귀여웠다.
파직!
[또한, 변이종은 겉모습만으로는 위험도를 쉽게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번개가 깃털을 작살 냈다.
[시민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 변이종을 발견하면 주의를 기울여 대응해 주시길 바랍니다.]
“…….”
순식간에 까맣게 타다 못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장난감을 물끄러미 바라본 이연이 조용히 쓰레기통에 잔해를 넣었다. 반쯤 찬 쓰레기통 안에는 비슷하게 생긴 잿더미들이 이미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안 되겠어.”
다시 놀아 달라며 몸을 뒤집어 애교를 부리는 뭉치의 배를 슬슬 쓰다듬어 주던 이연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이연의 주변에는 번갯불에 탄 자국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언제나처럼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산오가 대답 없이 이연을 흘끗 보았다.
“주문 제작을 하자.”
모두가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이 시대에서 이렇게 덧없는 쓰레기를 한없이 양산할 수는 없었다. 저놈의 번개에도 끄떡하지 않는 아주 튼튼한 장난감을 만들어 줘야겠다. 결심한 이연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마침 딱 적격인 사람이 있었다.
초호시는 초능력을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초능력과 관련된 직업들 역시 굉장히 많았다. 오로지 초능력자의 수요가 있는 초호시에서만 할 수 있는 직업들이라고나 할까.
그중에 하나로 엔지니어가 있다. 헌터가 전투에 사용하는 보조 도구를 만드는 기계 기술자들.
그들이 만드는 것은 기본적인 통신 기기에서부터 전투 보조 도구나 비행 장치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이연의 고글 역시 그런 종류였다.
초능력 관련 기술은 최첨단에 가장 근접하게 닿아 있는 분야였다. 따라서 엔지니어들 역시 평범한 지식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전문 과정을 수료하는 데에만 천문학적인 돈과 시간이 들었고, 다른 도시와 기묘하게 차이가 벌어진 과학 발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본인의 피나는 노력 역시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지니어는 초호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 중 하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오지게 많은 헌터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수입이 매우 짭짤한 전문 기술직이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일하는 헌터들은 자신의 힘이 제대로 써지지 않는 상황을 아주 갑갑해했고, 전투에 도움이 되는 물건을 맞추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헌터라면 대부분 전투 시 사용하는 도구들을 주문 제작해서 한두 개씩 가지고 다니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엔지니어의 수 자체는 적지 않았으나, 비율적으로 어중이떠중이 역시 많아졌다. 괜찮다 싶은 엔지니어면 아예 대형 회사에서 전속으로 스카우트해서 데려갔다. 전투적으로 스카우트 경쟁을 하느라 사이가 나빠진 회사도 부지기수였다.
엔지니어 전속 계약을 할 여유가 없는 차금 같은 소규모 사업장에게는 아주 좋지 않은 여건이었다.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 후 남은 엔지니어들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능하거나, 괴팍하거나.
차금과 거래하는 개인 엔지니어, D.S는 후자였다.
본명도 밝히지 않고 장사하는 이 수상쩍은 프리랜서는 허름한 동네 구석탱이에 꽤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있었다.
제대로 된 간판조차 없는 공방에는 광원이라곤 테이블에 스탠드를 켜 놓은 것이 전부였다. 금속 조각과 나사들이 사방에 나뒹굴고 벽은 녹이 슬어 있는 고요하고 어둑한 공간은 어떤 시간대든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D.S 씨, 있어요?”
이연이 성큼 걸어 들어가며 주인을 불렀다. 산오가 마뜩잖은 눈으로 지저분한 내부를 노려보다가 한발 늦게 뒤를 따랐다.
“D.S 씨?”
낡은 곳에 이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야…….”
곧 짜증스러운 대답과 함께 한 여자가 등장했다.
제멋대로 기른 부스스한 머리는 어깨에 닿을락 말락 했고, 퀭하게 들어간 눈매와 달리 눈알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구부정하게 숙인 허리가 크고 깡마른 몸을 더욱더 볼품없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상하의 일체형 작업복은 걸치다 말아 안에 입은 기름때가 잔뜩 묻은 티셔츠가 얼핏 보였다.
며칠 안 씻은 것 같은 모양새에 산오의 걸음이 공방 문 어귀에서 우뚝 멈췄다. 다가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연은 익숙한 듯 D.S에게 타박했다.
“왜 전화를 안 받아요?”
D.S가 하품을 쩍 하며 대답했다.
“무슨 일로 왔는데?”
대답도 안 하는 거 봐라. 하는 짓이 이연의 뒤에 있는 누구와 비슷했다.
D.S는 게으르고 불친절한 데다 사교성도 제로였다. 그 많던 스카우터들을 제 발로 도망가게 만든 별난 성격은 그녀를 떠돌고 떠돌다 뒷골목까지 밀려나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그녀가 관심 있는 건 기계와 기술 정도. 나머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를 찾아오는 건 이연처럼 무던하고 어딘지 쪼들리는 인간들뿐이었다.
“부탁이 있어서요.”
그러나 그녀의 작품인 고글을 써 본 입장에서 이연은 단언할 수 있었다. 실력만큼은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