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다급한 손길이 가방을 정면으로 끌어 내렸다. 그러나 한참을 뒤져도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어제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인이 필요해서 사무실에서 잠깐 꺼냈다가, 어디 뒀지? ……넣긴 넣었던가?
“꾸물대긴.”
거의 주저앉다시피 하며 가방을 붙들고 있는 이연을 한심하다는 듯이 흘긴 산오가 걸음을 뗐다. 시멘트 바닥이 꿀렁이듯이 파도치더니, 커다란 인영은 마치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매장 사이를 헤치고 달려갔다.
“야, 잠깐…….”
이연이 급하게 고개를 들었지만 한발 늦었다. 산오는 이미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진 상태였다.
“흑, 흑연 하나만 만들어 주고 가아…….”
쓸쓸한 외침만 허공에 공허하게 울렸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딱 한 가지 도구만 있으면 된다. 펜.
바꿔 말하면 그 도구가 없으면 못 그린다는 소리다.
그런 의미에서 펜이 없는 현재의 이연은 일반인과 다름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기세 좋게 9층에 올라올 것이 아니라 당장 대피를 해야 하는 인원이었다.
‘아냐, 침착하자.’
이연이 집 나간 정신을 데려오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산오가 변이종을 먼저 찾으러 갔으니 저는 펜을 어떻게든 구해서 산오와 합류하면 된다. 그럼 이연은 다시 초능력자가 되어 산오와 함께 싸울 수 있었다. 언제 산오가 올지 모르니 서두르는 게 좋았다.
아마 매장 계산대에 가면 직원들이 쓰는 펜이 있을 것이다. 잠깐 쓰고 다시 가져다 놓자. 이연이 비장하게 고개를 돌려 가장 가까운 매장으로 향했다. 타다닥, 바닥에 발소리가 초조하게 울렸다.
그리고 계산대에 앉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변이종과 마주쳤다.
그르릉…….
형태가 안개처럼 부스러지는 검은 짐승은 이연의 머리통보다 조금 더 컸는데, 목울음을 흘리며 자세를 낮춘 채로 정확하게 이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물어뜯을 것 같은 사나운 기세가 흘러나왔다.
숨죽인 상태에서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니 짐승의 발치에 펜을 담아 둔 통이 보였다. 최악이었다.
펜을 잡기 위해 손을 뻗으면 변이종은 이연을 바로 공격할 테고, 임시 일반인인 이연은 방어할 만한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장비라고 해 봐야 고글 정도였는데, 통신 기능만 빵빵했지 공격 기능은 달려 있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는 고글도 의미가 없었다. 기껏 혜강하고 연락해서 하는 말이 펜이 없다는 거라니. 쪽팔림에도 정도가 있다. 이연이 능력을 쓰지 못하면 혜강이 할 수 있는 일도 한계가 있었다.
망부석처럼 서 있던 이연이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양손을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주신 붉은 잉크(리필 가능)가 살가죽 밑에서 흐르는 것이 보였다.
“…….”
깨물어서 피를 내려면…… 많이 아프겠지?
아직 거기까지 각오가 서지 않았던 이연이 급한 대로 다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산오가 대치 상황을 알아서 눈치채고 와 주면 좋을 텐데. 사실 생각하면서도 요원한 가정이었다. 대체 어딜 수색하고 있는 건지 인기척조차 안 들렸다.
여기서 신호를 보내지 않는 이상 산오가 흔적을 찾으면서 이연에게 도달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산오한테도 통신기 하나 쥐여 줄걸. 후회는 언제 해도 늦었다.
“자……. 착하지.”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이연이 속삭이며 아주 조심스레 몸을 낮추었다. 천천히 움직이자 변이종은 커다란 위협을 느끼지 못했는지 경계하듯 간헐적으로 으르렁대기만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호흡도 멈추고 집중한 이연이 옆으로 느리게 이동했다. 팽팽한 긴장이 아슬아슬하게 분위기를 조였다. 이연의 몸이 옆 매장의 벽에 절반 정도 가려졌을 즈음이었다.
캬악!
계산대를 박차고 뛰어오른 변이종이 이연에게 달려들었다.
이연이 몸을 잽싸게 빼지 않았다면 변이종의 발톱에 크게 다쳤을 터였다. 몸을 굴려 간신히 공격을 피한 이연은 옆의 침구점으로 들어가 매대 뒤로 달렸다. 휘청이는 몸에서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거리에 발톱이 박혔다. 귓가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설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연이 본능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 세찬 바람이 지나갔다. 뒤늦게 휘날린 이연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 흩날렸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틈도 없이 짐승의 공격이 이어졌다. 단단한 매대와 진열대 여기저기에 발톱 자국이 깊게 패고, 진열되어 있던 포근한 이불과 부드러운 시트가 엉망으로 조각났다. 덩치는 조그마한데 파괴력이 엄청났다.
쾅! 쉬익! 쾅!
파열음과 파공음이 연이어서 났다. 이마에 땀이 배었지만 닦을 틈도 없었다. 거칠어진 호흡으로 몸이 들썩였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맞지 않았지만, 공격을 영원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직원들을 이렇게 공격하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뭐에 화가 났는지 모르겠네. 불공평한 현실을 투덜대도 변이종이 봐줄 리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숙여 변이종의 돌진을 피한 이연이 헐떡이며 몸을 굴렸다. 발을 막 옮긴 자리에 콰직, 하고 발톱이 박혔다.
그때, 정신없이 달리던 시야에 기적적으로 무언가 눈에 띄었다.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이연은 볼 것 없이 돌진했다. 뒤에서 달려오는 바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손을 뻗어 그대로 움켜쥔 이연이 몸을 옆으로 굴렀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짐승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몸체를 카운터에 갖다 박았다.
쾅!
사정없이 처박힌 몸체 위로 먼지와 뜯어진 천쪼가리가 풀풀 날렸다. 타격이 컸는지 짐승이 잠깐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 조그마한 철창이 솟아올랐다. 둥근 아치형으로 이어지는 철창은 매끈했으나 조금은 삐뚜름한 모양이었다. 먼지 사이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짜 죽을 뻔했네…….”
하얀 손은 길쭉한 네임펜을 쥐고 있었다.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준 손가락 사이에서 닫히다 만 까만 뚜껑이 얼핏 보였다.
캬악!
변이종은 철창에 달라붙어 이연을 공격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초능력으로 만들어진 감옥을 쉽게 부술 수는 없었다.
“이걸 어쩐다.”
격한 운동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삭신을 간신히 챙기며 일어선 이연이 중얼거렸다. 일단 제산오를 데려와야겠다. 같이 초능력 관리청에 가서 얘를 반환하고…….
“…….”
문득 손끝이 서늘했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이 변이종, 얼룩으로 변해 벽을 타고 다닌다고…….
“정이연!”
커다란 고함을 듣는 순간, 이연은 변이종의 울음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캬악, 섬뜩한 울음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철창이 있던 방향은 확실하게 아니었다. 이연이 다가올 충격을 대비하며 눈을 감았다.
크르릉…… 크헝!
그때, 커다란 포효 소리가 들렸다. 9층 전체를 뒤흔드는 괴성이었다. 아주 거대하고, 묵직한 존재가 내뿜는 듯한.
익숙한 울음소리.
“어?”
눈을 반짝 뜬 이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장이라도 이연을 반으로 갈라 놓을 것 같던 짐승은 놀랍게도 얌전히 서서 매장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살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어째 좀 기가 죽은 것 같기도 했다.
짐승의 주변이 멀쩡한 것을 보니 산오가 능력으로 조용히 시킨 건 아니었다. 이연의 발치에 올라오다 만 철 방패가 얼핏 보였다. 그럼 대체 어떻게……. 혼란에 찬 시선이 짐승의 시선을 따라 매장 바깥으로 향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제산오와…….
“털 뭉치?”
매장 앞 복도, 산오의 옆에 늠름하게 선 털 뭉치는 고작 산오의 무릎에 닿을락 말락 한 크기였는데도 기운이 대단했다. 새까만 털가죽 사이에서 노란 눈만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방금…….”
묘한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를 깬 것은 요란한 전화 소리였다. 우렁찬 소리가 공간을 채우자 이연이 일단 하려던 말을 삼키고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혜강이었다.
상황도 일단락되었고, 짐승이 이제 와서 갑자기 공격 시도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통화를 연결하자 드물게 흥분한 혜강의 목소리가 기계 밖으로 터져 나왔다.
“어, 왜.”
[형! 역시 맞았어!]
“뭐가?”
[어제 내가 맡긴 강아지, 역시 변이종인 것 같아.]
“응?”
이연의 시선이 털 뭉치로 향했다. 짐승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잔뜩 곤두섰던 검은 털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그 녀석을 데리고 온 후로 이상하게 내 능력을 쓰기가 힘든 거야. 뭐 하려고만 하면 인터넷이 자꾸 끊겨서 고치겠다고 엄청 고생했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계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가설을 세워 봤는데 맞는 것 같아.]
“……어엉?”
얼빠진 얼굴로 대답하면서도 이연의 머릿속으로 퍼즐이 조금씩 맞춰졌다. 제산오의 살기에도 아랑곳 않던 강아지. 묘하게 말을 알아듣는 것 같던 강아지. 강아지보다는 고양잇과 동물 같던 강아지. 짐승형 변이종을 울음 한 번으로 제압한 강아지.
‘최근에 인터넷에서 퍼지고 있는 변이종 가설인데, 변이종 사이에서도 최상급 변이종을 위시해서 파벌이나 세력이 나뉜다는 이론이야.’
‘논문에 따르면 파벌은 변이종 기본 형태에 따라 나뉜대. 포유류는 포유류대로, 무슨 말인지 알지?’
전파 간섭 초능력을 방해할 수 있는 뇌전계 변이종.
“……진짜야?”
맹한 혼잣말에 대한 대답은 산오에게서 나왔다.
“느려 터졌군.”
알고 있었으면 말을 하라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은 뒤죽박죽으로 표출되었다. 아니, 어떻, 왜, 언, 무슨, 어? 온갖 의문사들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얘가 왜 여기 있는 건데? 현실을 믿을 수가 없어 이연은 털 뭉치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심란한 마음도 모르고 사뿐사뿐 다가온 털 뭉치는 칭찬해 달라는 듯 머리를 들이밀었다. 떨떠름하게 물러서 봐도 계속 다리에 몸을 비비적대며 애교를 부리는 통에 얼결에 부드러운 가죽을 잔뜩 쓰다듬어 주었다. 짐승이 찢어발겨 바닥에 흩날린 천 조각이 꼬물대는 청호의 몸에 닿아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참 후, 이연에게서 나온 말은 고작 이런 거였다.
“침구도…… 몇 채 사 갈까?”
이 집 촉감이 괜찮은 것 같은데……. 난데없는 제안에 산오가 삐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마음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