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음 날 일어난 이연은 사무실로 바로 출근하는 대신 산오와 털 뭉치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직접 보여 주면 되지.’
이제는 미룰 수 없었다. 산오가 끝까지 안 고르면 이연이라도 고를 참이었다. 출근을 위해 챙긴 가방 안에 곱게 들어가 있는 태블릿을 보고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진 이연은 강해졌다.
산오의 가재도구를 사는 김에 털 뭉치를 위한 용품도 몇 가지 살 계획을 세웠다. 평소 이연의 재정 상황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결정이었겠으나, 현재의 그에게는 자본주의 사회를 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돈, 돈 하는구나. 마음의 여유부터 달라졌다.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침대를 사려고 하는데요.”
따라오기는 했으나 귀찮은 기색이 가득한 산오는 매장 안에 들어가는 대신 복도의 벤치에 털썩 앉았다. 이연은 놀라지도 않고 털 뭉치를 산오 옆에 내려놓았다. 마침 잘 됐다.
“안 들어올 거면 거기서 보고 있어.”
반려견 동반 입장이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털 뭉치가 새까만 강아지다 보니 하얀 침구에 털이 묻으면 곤란할 터였다. 얼결에 털 뭉치와 남게 된 산오의 인상이 불만스레 구겨졌지만 이연은 신경 쓰지 않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기는 어떤 것으로 찾고 계시나요?”
“제일 큰 걸로요.”
제산오의 덩치는 얼핏 봐도 슈퍼 싱글이나 더블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마 현재 이연이 쓰고 있는 침대인 퀸 사이즈로도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가볍게 말한 이연이 온화하게 웃었다.
“가격대는 상관없어요.”
마법의 주문에 직원의 눈이 반짝 빛났다.
고민 끝에 서랍장과 협탁까지 침대와 맞춰서 샀다. 산오에게 어울릴 법한 모던하고 어두운 색의 가구였다. 최대한 빠른 출고로 해 달라고 부탁하니 공장과 연락해 보겠다고 비장하게 약속해 주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카드를 받아든 이연이 몸을 돌리자 그에게 붙어 영업하던 매장 직원 여럿이 뒤에서 배웅했다. 마치 개선 행렬 같은 광경이었다. 다가오는 이연을 잽싸게 발견한 털 뭉치가 냉큼 다가와 발목에 머리를 비볐다.
“이제 점심 먹으러 갈까?”
허리를 숙여 털 뭉치를 두어 번 쓰다듬어 준 이연이 경쾌하게 물었다. 털 뭉치가 좋다는 듯 펄쩍펄쩍 뛰었다. 산오는 그 꼴을 마뜩잖은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얌전히 뒤를 따랐다.
그와 동시에 매장의 구석, 뒤에 있는 벽에서 희미한 얼룩 같은 것이 스르륵 움직였다.
무광 대리석으로 마감된 벽의 무늬라기에는 상당히 이질적이었으나, 늠름하게 매장을 나서는 이연에게 모두의 시선이 주목되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식당가에 들어서니 이곳은 반려견 출입이 안 된다며 백화점 측에서 잠시 맡아 주겠다고 했다. 괜찮을까? 조금 고민하던 이연이 털 뭉치 앞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얌전히 있을 수 있겠어?”
털 뭉치는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얌전히 꼬리만 흔들었다. 정체가 뭐든 간에, 똑똑한 생물이라는 건 확실했다.
“사고 나니까 진짜 속이 다 시원하다.”
푸드코트의 테이블에 막 앉은 이연이 만족스레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앞에는 마침 옆에 있던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가 한 잔씩 놓여 있었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산오가 빈정댔다.
“네 맘대로 샀으니까 그렇겠지.”
“야, 내가 얼마나 너랑 어울리는 가구를 고심했는지 알아? 너도 마음에 들걸. 아기방 꾸미듯이 골랐다고. 애 낳아도 이만큼 신중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연의 피력에도 산오는 코웃음만 쳤다.
“난 밝은색이 좋다.”
“……네가?”
이연의 시선이 산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검은 머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의상 전체가 한 폭의 저승사자에 가까웠다. 누가 봐도 완벽하게 검은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연의 눈빛을 알아챈 산오가 설명했다.
“지저분한 게 훤히 보이면 귀찮아.”
“…….”
흙먼지 말하는 거겠지?
“야,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이연이 방금 들은 말을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며 괜히 투덜댔다. 의견 하나 내지도 않다가 사고 난 후에 이러는 건 반칙이지. 그럼 살 때 말하든가.
그러나.
“나도 밝은색을 좋아해.”
심드렁하게 중얼대는 산오의 낯이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안 어울리는 것 같나?”
답지 않게도 조금 시무룩해 보여서.
“……바꿔 줘? 주문 바꾸고 올까?”
결국 이연이 슬그머니 물었다. 뭔지는 몰라도 밝은색에 대한 엄청난 갈망이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넘기기도 찝찝했다. 그러나 이연의 제안에 산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뭐가 괜찮아? 원하면 새하얗게 꾸며 줄 수도 있어. 하얀색이 좋아? 그거면 되냐?”
“이미 골랐으니 됐어.”
말투가 묘하게 사람 죄책감 자극했다.
“넌 가만히 있어, 내가 바꾸고 올게! 제발 바꾸게 해 주세요.”
“됐다니까.”
“야! 내가 네 방을 설원처럼 꾸며 주겠다니……”
쾅!
애걸하던 이연의 말은 난데없이 울린 굉음에 묻혔다. 무슨 일이지? 두 사람의 눈빛이 금세 변하며 동시에 일어섰다.
이 정도로 커다란 폭발음이 나는 상황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사고나 테러.
“위쪽이다.”
“알고 있어.”
그리고 변이종 습격.
큰 소리가 들린 지 얼마 안 되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변이종 출현. 변이종 출현. 현재 건물 내에 계신 헌터는 모두 9층으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일반 고객분들은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임시 대피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9층이면 제일 처음 들렀던 가구 매장이 있는 층이다.
대피 안내 방송에 백화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나마 시민들이 변이종 출현에 익숙해 패닉에 빠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달리며 행동했다면 아비규환이 펼쳐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안내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산오가 고개를 까딱였다.
“가자.”
“능력 안 쓰고?”
그냥 몸을 돌리는 것이 걸어갈 심산인 것 같았다. 제산오 능력으로 바닥 뚫고 올라가면 되는 거 아닌가? 의아한 질문에 산오가 작은 소리가 조금씩 들리는 위층을 흘끗거렸다.
“비효율적이다.”
바닥을 뚫고 가면 빠르겠지만, 이 건물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대형 건물이다. 자칫 잘못 뚫었다가 건물이 붕괴되거나 일반인을 다치게 하면 골치 아팠다.
모두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옆줄에서 우두커니 위로 올라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웅성이며 내려가던 사람들이 흘깃흘깃 바라보았지만, 둘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9층에 도착하자 근처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백화점 직원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헌터분들이 계셨군요. 잘 오셨습니다.”
“저희 말고 아무도 안 왔나요?”
이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백화점의 푸드코트는 지하에 있었고, 두 사람은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했다. 다른 층에 초능력자가 있었다면 이미 오고도 남아야 했는데 9층은 텅 비어 있었다.
이 도시에 2단 이상 초능력자는 무려 20만 명에 육박한다. 백화점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그중에 헌터가 이연과 산오 둘밖에 없다고? 너무 수상한…….
“예, 아무래도 평일 점심이다 보니…….”
“…….”
도시의 변이종 대응 가능한 초능력자는 절대다수가 직장인. 즉, 모두 출근을 했을 시간이다. 이 시간에 백화점에서 노닥거릴 수 있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얼결에 불량한 근무 태도가 드러나 버린 이연이 괜히 변명했다.
“저, 저희도 유연근무제라서요. 오늘은 늦게 출근하는 날이거든요.”
“네에……. 좋은 직장이네요.”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상황을 설명해라.”
내내 조용하던 산오가 물었다. 서비스 업종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백화점 소속답게, 초면의 상대에게도 다짜고짜 반말하는 범상치 않은 싸가지를 대면하고도 직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 제일 처음 발견한 게 저였습니다.”
직원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시찰 및 관리 감독 직무를 수행하던 직원은 매장을 돌아다니다 벽에서 검은 얼룩을 발견했다. 얼룩의 크기는 꽤 컸다. 지어진 지 몇 년 되지 않은 건물인 데다가 청소도 신경 써서 하는데 이상하다 싶어 얼룩에 손을 댄 순간, 얼룩이 손길을 피하듯 움직인 것이다.
처음에는 변이종이 아니라 단이 낮은 초능력자의 장난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능력을 과시하듯 이런 식의 장난을 치는 것은 종종 있는 사례였다. 그래서 직원들을 불러 얼룩을 잡아 닦을 것을 지시했는데, 본격적으로 얼룩에 달려드니…….
“뭔가 튀어나와서 공격을 했다, 그거죠.”
“네.”
뭔지도 모를 걸 일반인들이 처리하려고 하다니, 용감하기도 하다. 이연이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다친 분은 없고요?”
“타박상 정도라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공격하지 않고 도망치려던 것도 그렇고, 반격이 세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특별히 호전성이 높은 변이종은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호전적인 변이종이 튀어나왔으면 큰 곤혹을 치를 뻔했다.
“어떻게 생겼나요?”
“정확히 보지는 못했는데…….”
직원이 난처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벽에서 튀어나오고도 묘하게 얼룩처럼 희미해서 정확한 형체를 갖추지는 않았다는 듯했다.
“확실한 건 네발 달린 짐승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만하면 들을 정보는 대충 들었다. 이연은 직원을 대피 층으로 내려보냈다. 직원은 백화점 재산을 최대한 보호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사라졌다. 온전히 둘만 남게 되자, 이연이 산오를 돌아보았다.
“뭔지 알겠어?”
“아니.”
벽의 얼룩으로 변하는 짐승이라니, 이연이 주로 상대하는 하급 변이종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산오가 모르니 상급도 아닐 거고, 중급 정도인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군. 이연이 끙 소리를 내며 등에 맨 슬링백에 손을 집어넣어 뒤적였다. 넘칠 정도로 쓸어 담은 종이와, 그리고…….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