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2. 언제나 구매는 신중히
“뭐가 좋아?”
이연이 산오에게 태블릿을 들이댔다. 네모난 화면에 떠 있는 것은 각종 가구들이었다.
휴대폰을 만지작대던 산오가 흘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머무른 시간이 1초도 안 될 정도로 성의 없는 눈짓이었다. 대답 역시 없었다.
덕분에 애가 타는 건 이연이었다.
“야, 보지만 말고. 너 좋아하는 걸로 골라 봐.”
벌써 며칠째였다. 종희가 준 카드로 산오의 세간살이를 책임져 주기로 했는데 정작 당사자가 도통 관심을 보이질 않는 것이다. 아니,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사 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튕기는 거지? 엄밀히 따지면 이연이 사 주는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종찬과 종희가 이연의 집에 쳐들어올 것도 아닌데 까짓거 안 사 줘도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만, 그래도 상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한데 카드 받고 입만 닦으려니 괜한 부채감이 들었다. 산오가 이연의 거실 바닥에서 대강 널브러져 잘까 봐 걱정해 준 것 아닌가. 실제로 내내 소파에 구겨져 자는 중이기도 했다.
“하나만 골라 보라고.”
포기하려던 마음을 다잡고 다시 슬슬 어른 지 3분, 산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태블릿.”
“응?”
“원래 가지고 있었던가?”
종용하던 동작이 멈추었다. 석상처럼 굳은 이연과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는 산오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싫음 말아! 그냥 소파에서 평생 자든가!”
누가 봐도 수상한 태도로 태블릿을 집어 던진 이연이 빽 소리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기계가 시원하게 날아갔다.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은 채로 꿈을 꾸듯 먼 곳을 더듬는 시선은 맞은편의 산오를 절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야.”
“이혜강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시간이 몇 신데. 요즘 계속 늦게 오네?”
“정이연.”
“안 되겠다. 큰 변을 당했을 수도 있어. 나 주변 순찰이나 좀 하고 올게.”
“대낮에?”
“범죄에 낮밤이 어디 있어!”
“경찰도 아니잖아.”
“그런 꿈을 꾸던 시절도 있었지……. 인생에 늦은 시기란 없으니까 지금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무 말이나 내뱉는 주둥이를 산오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태블릿은 전면이 화면이야.”
“아, 태블릿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함부로 던지면 액정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
이연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뻣뻣하게 돌아갔다. 서랍장에 맞고 바닥에 나뒹군 은빛 태블릿은 뒷판을 보이고 엎어져 있었지만, 묘하게 불길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죽음의 기운이었다.
“내…… 내 태블릿! 산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얼결에 자백하며 후다닥 달려간 이연이 태블릿 앞에 털썩 엎드렸다. 차마 뒤집어 액정의 상태를 확인해 보지 못하고 애처롭게 이리저리 고개만 기웃대는 머리통 뒤에서 끼익, 하는 낡은 마찰음이 들렸다. 문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얌전한 고동색 머리에 형광색으로 깔맞춤한 트레이닝복 세트. 혜강이었다.
“야! 너 요즘 출근이 늦……”
못난 상사 이연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혜강으로 돌리려고 고개를 막 들었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기세등등하던 말끝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이제 겨우 스물둘인 혜강은 어린 나이를 감안해도 유독 귀여운 얼굴이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새하얀 피부—이연의 창백한 얼굴과는 때깔이 조금 다르다.—, 그리고 섬세한 조형은 성별 구분이 한 번에 되지 않는 중성적인 매력을 뽐냈다.
어디서나 예쁨받는 얼굴이라고나 할까. 덕분에 혜강과 같이 다니면 지름길로 가기가 수월한 편이다. 현장 인력이 아니라 자주 쓰지는 못하지만…….
그러던 판에 산오까지 생겼으니 차금은 무적의 얼굴 군단이라고 해도 손색없었다. 아예 이쪽으로 홍보를 좀 해 봐? 그새 딴생각으로 빠져 머리를 굴리던 이연이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말랑하고 뽀얗던 혜강의 얼굴이 하룻밤 사이에 반쪽이 되어 있었다. 초췌한 안색에 눈 아래는 판다처럼 거무죽죽했고, 홀쭉한 볼은 혼이라도 빨린 것 같았다.
“너 왜 그래?”
보통 일은 아니었다. 이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괜찮아. 이것저것 일이 겹쳐서 잠을 못 자서 그래.”
혜강은 그림자가 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마저도 화사한 형광 연두색 의상과는 맞지 않는 칙칙하고 흐물텅한 움직임이었다.
보아하니 순순히 말할 기색은 아니어서, 이연은 혜강을 잠깐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도움 필요하면 말해.”
혜강은 솜사탕 같은 생김새와 달리 자립심이 엄청나서 곤란한 일이 생겨도 실제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적었다. 궁금하기야 했지만……. 이연이 호기심을 삼키고 등을 돌리려는데, 혜강이 문득 중얼거리듯 물었다.
“형 혹시……. 동물 알레르기 같은 거 있어?”
뜬금없는 물음에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 동물 알레르기?”
“없으면 동물 한 마리만 잠깐 맡아 줘.”
그렇게 말하는 혜강의 얼굴은 늘상 여유롭고 느긋하던 평소와 다르게 퍽 심각해서, 이연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퇴근 후 바로 혜강의 집에 들렀다. 산오도 같이 가겠냐고 물으려고 했으나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산오의 갑작스러운 외출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이연은 굳이 찾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얘야.”
이연은 현관에 서서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시선의 끝에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검은 털 뭉치가 있었다.
혜강의 반려동물을 처음 본 감상은…… 무슨 동물인지 모르겠다.
“강아지야?”
“그런 것 같아.”
윤기 흐르는 새까만 털에 호박색 눈을 가진 생명체는 중형견 정도 되어 보이는 크기였는데, 동그랗고 작은 귀에 기다랗고 탐스러운 꼬리가 강아지 같기도 하고, 아기 흑표범 같기도 하고, 까만 재규어 같기도 했다. 그러나 강아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도시에서 개인이 기르기엔 굉장히 위화감이 느껴지는 동물이었으므로, 그냥 강아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름은?”
“없어.”
주인 맞아? 미심쩍어하는 눈길에 혜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얼마 전에 우연히 주운 거야.”
“……나한테 유기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잠깐 볼 게 있어서.”
뭘 보겠다는 거지? 반려동물이 없는 자신의 삶?
“아무튼 잠깐만 부탁해.”
애매하게 얼버무린 혜강은 이내 까만 털 뭉치를 위한 이런저런 짐을 가져다주었다. 푹신한 방석이나 장난감 같은 자잘한 물건들이었다. 얼마 전에 주운 것치고는 정성스레 마련한 소품들을 보니 나쁜 마음은 아닌 것 같은데…….
바리바리 싸 주는 짐과 함께 이연은 혜강의 집을 나왔다. 떨떠름하게 내린 시선 끝에는 까만 털 뭉치가 있었다.
목줄도 따로 없는데 털 뭉치는 눈치 빠르게 이연을 졸졸 따라왔다. 낯을 가리지 않는 살가운 성격인 것 같았다.
뭐, 며칠 정도는 괜찮겠지. 이연은 가볍게 흘려넘기며 걸음을 옮겼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온 이연이 여느 때와 같이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산오에게 인사했다. 저놈의 소파. 빨리 침대를 사 줘야 했다. 그래야 태블릿을 양심의 가책 없이 수리하러 갈 수 있었다.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조그맣고 까만 생명체를 본 산오의 눈썹 한쪽이 삐딱하게 들렸다. 쓰레기라도 들고 온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별걸 다 줍는군.”
“너도 수혜…… 야! 발바닥은 씻고 들어가야지.”
빨빨거리며 거실을 향하려는 털 뭉치를 잽싸게 잡아챈 이연이 녀석을 번쩍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조금 무거웠다. 기다란 꼬리가 이연의 팔 아래로 삐져나와 팔랑이는 것을 본 산오의 눈매가 슬그머니 가늘어졌다.
털 뭉치는 굉장히 얌전했다. 안아 드는 것도 발바닥을 씻기는 것도 전혀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태도가 묘하게 거만했다. 마치 참아 주겠다는 것 같은……. 아무튼 다행이긴 했다. 무게가 만만찮다 보니 만약 털 뭉치가 반항했다면 이연은 씻기는 내내 다소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을 터였다.
수건으로 발을 조물거리며 닦아 주는 것까지 끝낸 이연이 털 뭉치를 풀어 주자, 털 뭉치는 그제야 신나게 거실을 돌아다녔다. 소파나 탁자의 냄새를 맡는 것을 보던 이연이 중얼거렸다.
“쟤 이름이 없대.”
그래도 얼마간 같이 지내야 하는데 계속 털 뭉치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슨 이름이 좋을까. 고민하는 얼굴이 진지했다. 산오는 미묘한 얼굴로 이연을 바라보았다.
“개새끼 취급이군.”
“엉?”
아니, 그럼 개한테 개 취급을 하지 뭘…….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산오는 심기가 상했다는 티를 있는 대로 냈다.
방금 전에는 벌레 보듯 봤으면서 갑자기 왜 홍길동 아버지 같은 행태를 보인단 말인가. 당최 성질을 종잡을 수가 없다. 온갖 눈치를 받는 와중에도 굴하지 않고 괜찮은 이름을 생각해 내려고 끙끙대던 이연의 얼굴이 별안간 밝아졌다.
“칠칠이 어때?”
“진심인가?”
산오의 얼굴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이연은 야심차게 공개했던 이름의 유래를 우물거렸다.
“칠은 행운의 숫자잖아.”
“칠칠맞은 이유로군.”
의미상으로는 칭찬인데 이상하게 욕 같았다.
“아, 알았어. 다른 이름 고민해 볼게.”
이연이 투덜대며 주저앉자 여기저기 탐색하던 털 뭉치가 재빠르게 다가와 책상다리를 한 이연의 다리에 파고들었다.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이라 더 친밀감을 갖는 듯했다.
자연스럽게 털 뭉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털 뭉치는 몇 번 몸을 움직이며 편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알게 된 지 한 시간도 안 된 주제에 대단한 사교성이었다.
산오가 이연의 허벅지 사이에 위치한 털 뭉치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눈빛이 닿았는데도 털 뭉치는 신경도 안 썼다. 꼬리를 팔랑거리는 몸짓까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감이 발달한 동물이면 더더욱 제산오의 기세를 감히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음.”
이연이 손을 멈추자 털 뭉치는 끼잉거리는 소리를 내며 더 쓰다듬어 달라는 듯 머리를 비볐다. 다시 달래 주니 털 뭉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졌다. 산오의 기색을 살폈지만 평소처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덤덤한 얼굴만 이연을 마주 보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아니겠지? 그제야 그런 걱정이 덜컥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