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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4화 (14/250)

#14

초능력 관리청에서 혜강이 부탁한 것을 처리하고 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이연이 경쾌한 몸짓으로 일어섰다. 오늘은 이상한 일이 많았으니까 점심은 특별히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

자주 다니는 지역의 맛집을 줄줄이 꿰고 다니는 이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았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주먹밥 가게를 골랐다.

주먹밥의 장점은 포장을 위주로 장사한다는 점이었다. 먹고 들어가도 상관없었지만, 모처럼 사무실의 신입이 된 산오에게도 초능력 관리청의 맛집을 소개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주먹밥 집은 규모는 작았으나 주변 먹짱들에게 잘 알려진 가게였다. 조금만 늦어도 재료가 똑 떨어져 주문도 넣지 못하곤 했으므로, 이연은 걸음을 서둘렀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주문을 받고 있었다. 못 먹는 일은 없겠다.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이 행복하게 물들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줄을 서 있는 가장 마지막 사람이 아까 그 새치기남이었다.

“…….”

사무실 근처와 달리 이곳은 초능력 관리청 근처였으므로 대형 회사가 포진한 동네다. 양복을 입은 사람이 많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저 얄미운 뒤통수를 보니 확실했다.

아까만 해도 사무실 근처에 있던 새치기남이 언제 여기로 온 거지? 이연은 의아한 동시에 문득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설마…….

“종류별로 오십 개씩 주세요.”

“손님, 죄송한데 그 정도 수량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준비해 줄 수 있는 수량만큼 전부 주세요.”

“알겠습니다.”

“…….”

순식간에 모든 메뉴에 매진 딱지가 붙었다. 재앙 같은 대량 주문에 갈 곳 잃은 이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새치기남은 주문을 마친 후 뒤를 흘끗 돌아보며 이연의 얼굴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이연은 새치기남의 선글라스 너머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약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이연의 이성은 거기까지였다.

“감사합니다.”

오늘 점심 장사를 몽땅 털어 버린 대형 주먹밥 봉투를 품에 안은 새치기남이 주인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가게를 나왔다. 무거운 짐을 들었는데도 거리를 걷는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조금 전의 그 얼굴을 생각하면 밥을 안 먹었는데도 배가 불렀다.

그 발에 뭐가 걸렸다.

툭. 의아하게 아래를 바라본 새치기남은 자신의 발목에 이상하게 생긴 끈이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대로 건물 사이의 골목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뭐, 뭐야!”

휘청이는 몸을 가누던 새치기남은 자신이 거대한 새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골목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못생기고 찌그러진 새장은 제법 단단하고 촘촘해 혼자서 빠져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저씨.”

골목의 가장 안쪽,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산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의 주인은 새치기남이 잡힌 것을 확인하고 빛이 보이는 곳까지 저벅저벅 걸어 걸어 나왔다.

빛이 바랜 듯한 머리, 목에 아무렇게나 건 고글, 품이 큰 니트, 밝은색의 청바지에 한쪽 발에는 얼룩진 운동화 끈을 매고 있는 청년. 익숙한 인물이다.

“혹시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 알아요?”

철창 너머에서 이연이 빙긋 웃었다. 손에서는 얇은 펜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세 번 참았으면 살인을 한 번 해도 된다는 뜻이죠…….”

아니다.

“숫, 숫자를 잘못 셌잖아! 세 번 참지 않았어.”

다급해진 새치기남이 외쳤다.

“아……. 그렇긴 하죠.”

이연이 서늘하게 선글라스 너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먹밥을 가져갈 때마다 한 번씩 참았으니 백 번도 넘게 참은 게 되는군요. 그럼 서른 번 정도 살인해도 되겠네요.”

“갑자기 무슨 계산을 그렇게 꼼꼼하게 해? 왜 주먹밥은 개수대로 세는 건데? 음료수 여덟 잔은 하나로 퉁쳐 줬잖아.”

“팍팍한 현대 사회와 다르게 제가 인심이 좀 후하거든요.”

고맙지 않냐는 듯 웃어 보이는 낯짝은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제대로 계산하면 죽이는 것도 원래는 서른 번이 넘는데 할인해 드린 거예요. 고맙죠?”

“누가 목숨을 서른 개나 가지고 다니냐?”

거기까지 말한 새치기남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영양가 없는 기 싸움에 얼결에 말려들어 가고 있었다.

“아니, 이게 아니야! 내 말은 댁이 두 번밖에 안 참았다는 말이었어!”

“오…….”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밝은색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기억하고 있네요. 역시 고의였죠?”

“…….”

무덤 팠다. 새치기남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찌할 바 모르고 바들대던 손이 주먹밥 봉투를 꼭 쥐었다. 이연이 온화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사람마다 사정이 있을 테니까 이유는 묻지 않을게요.”

너만 묻어 버리겠다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당, 당신이!”

새치기남의 입이 다급하게 열렸다. 이연이 동작을 멈추고 멀뚱하게 바라보자 용기를 얻은 듯 목소리가 커졌다.

“댁 같은 게 괜히 곁에 붙어 있어서 그렇잖아!”

“……예?”

“격에 떨어진다고!”

드라마에서나 들을 법한 대사였다. 상황 파악이 안 된 이연이 어리둥절해하기도 잠시, 골목 어귀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거기까지.”

이연과 새치기남의 고개가 돌아갔다. 등 뒤에서 빛을 받는 역광으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훤칠하고 늘씬한 몸에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는 인물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졌다.

갑자기 등장한 미지의 인물은 두 사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그 발에 뭐가 걸렸다.

“아.”

삐뚤빼뚤한 철사 같은 밧줄이 발목을 감싸고 있었다. 줄이 당겨지고, 미지의 인물은 순식간에 거꾸로 매달렸다. 옷자락이 뒤집히고 긴 생머리가 찰랑대며 땅을 향해 흘러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포박된 미지의 인물을 본 새치기남이 울부짖었다. 격렬한 난동에 철창이 쇳소리를 내며 삐걱댔다.

“누나! 이 자식, 누나를 놔줘!”

난장판이었다. 새치기남과 미지의 인물을 번갈아 바라본 이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미행은 대체 왜 한 거예요?”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지. 역시 한 패였다.

“안녕하십니까, 정이연 씨.”

미지의 인물은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도 태연하게 명함첩을 뒤적여 명함을 내밀었다. 새치기남과 똑같이 생긴 선글라스는 이 난리통에도 용케 떨어지지 않았다. 기예 같은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하던 이연이 명함을 받아 들었다.

명함에 써 있는 글자는 지나치게 간결했다. 비서 실장 김종희. 그리고.

“제산 소속?”

“이렇게 뵙게 되어 면구합니다.”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에서도 침착한 얼굴이 뒤늦은 인사를 건네 왔다.

“제산오 님의 직속 비서, 김종희라고 합니다.”

이연이 명함과 종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심쩍은 기색이 역력한 손가락이 새장 안의 남자를 가리켰다.

“저 사람은?”

“알려 줄까 보냐!”

“저쪽도 마찬가지로 제산오 님의 직속 비서, 김종찬입니다.”

“누나! 알려 주면 어떡해!”

콩트가 따로 없었다.

“제산오가 시킨 거예요?”

그 자식, 오늘 유난히 시큰둥하다 했더니 이런 속셈이었나……. 이연이 한숨을 삼키며 묻자 종희가 대답했다.

“아뇨. 산오 님은 모르십니다.”

산오의 비협조성은 선천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럼 왜?”

비서들이 독자적으로 하는 일이란 게 상사 구한 사람 괴롭히기라니. 혹시 제산오를 많이 싫어하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얼마나 악독하게 굴었으면……. 이연이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뒤에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그거야 당신이 산오 님께 도움이 안 되니까!”

종찬이 씩씩댔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금방이라도 방방 뛸 것 같은 기세였다.

“우리 산오 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아니, 잠깐만.”

뭐라 쏘아붙이려는 종찬의 말을 이연이 잘랐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이해가 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연 역시 할 말이 있었다.

“제가 원한 게 아니거든요? 제산오랑 이야기는 해 본 겁니까?”

이연의 소재까지 알고 있는데 산오와 연락이 안 될 리는 없고, 그냥 당사자와 이야기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논리적인 반박에 종찬이 입을 잠깐 다물었다가 이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산오 님은…… 줏대가 강하셔.”

그 와중에 상사를 포장하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본인이 설득에 실패해 놓고 주변인을 괴롭히는 꼴이라니, 아침 드라마에서도 한물 갔다고 안 나올 전개였다. 조용해진 종찬 대신 종희가 대화를 이었다.

“종찬이가 산오 님을 과하게 따라서 감정이 격해진 것뿐, 나쁜 뜻은 없었습니다.”

“나쁜 뜻이 없었다고요?”

이연이 불량배처럼 서서 지저분해진 신발과 바닥에 쓰러진 주먹밥 봉투를 턱짓했다.

“그 부분은 죄송합니다.”

“아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연이 팔짱을 꼈다. 과정이 조금 지저분했지만 마침 좋은 기회다.

“제산오가 혹시 집이 없나요?”

“여러 채 있으십니다.”

이 부동산 부자, 그럴 줄 알았다!

“근데 왜 제집에서 나갈 생각을 안 하는 겁니까? 오늘은 얼결에 제산오한테 아침까지 얻어먹었어요.”

저 멀리서 종찬이 조그맣게 잘 살고 있네, 하고 중얼거렸다.

“꼼짝없이 내일 아침 당번을 하게 생겼다고요. 저는 원래 아침도 안 먹는데……. 왜 자연스럽게 동거하게 된 겁니까? 저희 집엔 옷도 없는데 어디서 났는지 실내복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어요. 댁들이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산오 님께는 여쭤보셨습니까?”

버들가지처럼 팔랑거리던 이연의 입이 조가비처럼 다물렸다. 한참 만에 개미만 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제산오는…… 줏대가 강하죠.”

종희가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이해였다.

“산오 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 그분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제 보금자리거든요.”

“저희도 산오 님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종희는 그렇게 말하며 품을 뒤적였다.

“산오 님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그녀가 내민 것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새까만 카드였다. 전광석화처럼 네모난 몸체를 훑은 이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다고는 하지만, 다짜고짜 이런 거나 내밀다니.

“저기요. 고작 이런 걸로 사람을…….”

“한도 없습니다.”

너무나 좋은 조건이었다. 이연이 공손히 받아 품에 챙기며 물었다.

“아무거나 사도 됩니까?”

종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단 침대부터 사 드리세요.”

두 사람은 결연한 얼굴로 악수했다. 거래는 빠르게 성사되었다.

딸랑.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이연이 들어왔다. 시선만 돌려 방문자를 확인한 산오가 툭 내뱉었다.

“빨리도 오는군.”

“제산오.”

심드렁한 얼굴이 바라보자, 이연이 빙긋 웃었다. 품에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껴안은 채였다.

“주먹밥 좋아해?”

그렇게 이연에게 임시 룸메이트가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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