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집에서 사무실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설렁설렁 걷던 이연의 몸이 멈칫했다. 시선을 돌려 뒤쪽을 바라본 이연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왜.”
“방금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어?”
산오가 이연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텅 빈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없는데.”
“기분 탓인가?”
이연이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면서도 발을 옮겼다. 후방을 한 번 더 둘러본 산오 역시 별말 없이 뒤를 따랐다.
사무실은 언제나 그렇듯 비어 있었다. 혜강은 점심때나 되어서야 출근할 테니, 그전까지는 사실상 쉬는 시간이다. 이연이 산오가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에 드러누웠다.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간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햇빛이 따뜻했다.
‘어디 의뢰 안 들어오나…….’
대부분의 다른 회사들은 분기 임무와 동시에 사설 의뢰를 받았지만, 차금의 경우 인지도가 밑바닥이라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다. 랭킹 페이지에 발이라도 걸쳐 놓아야 좀 자체 홍보가 될 텐데, 이연의 능력으로는 10만 위는커녕 50만 위에도 들 수는 있을지 미지수였다.
이연이 생각해도 으리으리한 변이종 전담 회사가 그렇게 많은데 무궁화 2단이 사장인 사무실에 굳이, 싶긴 했다. 이런 곳에 들어오는 의뢰라고 해 봤자 알음알음 동네 주민이 찾아오는 정도였는데, 심지어 의뢰 내용이 변이종과 전혀 관련이 없을 때도 있었다. 당연히 큰 벌이는 안 됐다.
그러나 이쪽은 티끌이라도 아쉬운 형편이다. 이연에 혜강까지 월급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소소한 사설 의뢰라도 하는 게 이득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산오의 식비까지 계산해야 했다. 이연만큼은 아니었지만 산오도 덩치만큼 먹는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만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제산오는 입맛도 까다로웠다.
‘그러니까 왜 제산오가 내 집에 뭉개고 있는 거냐고?’
제산오도 집은 있을 것 아닌가. 돈을 그렇게 벌면서 집을 안 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번거롭게 집을 살 필요도 없이, 그냥 어디 땅만 사다가 자기가 능력 써서 집 올려도 되는 거 아니야?
그렇다고 산오더러 대놓고 집 없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계약서도 안 쓰고 무급 노동 하는데 그렇게 눈치 주기도 양심상 찔리지 않은가. 아침도 해 줬는데…….
아니, 잠깐만. 그러면 제산오가 ……를 찾을 때까지 쌩으로 내가 먹여 살려야 한다는 뜻? 이 녀석 정말 우리 집에 눌러앉을 작정인가?
“…….”
이연의 아연한 시선이 맞은편을 향하자 기민하게 기척을 알아챈 산오가 의미도 모르고 마주 노려보았다. 살벌한 눈빛에 움찔한 이연이 주의를 돌렸다.
“나 카페 갈 건데 뭐 마실래?”
“아메리카노.”
막 출근을 했으니 카페인 수혈도 좋은 선택이다. 식비 아낄 생각 하다가 돈 쓰게 된 상황을 합리화하며 이연이 떨떠름하게 일어섰다.
1층에 있는 카페는 사무실과 같은 건물인데도 퀄리티가 전혀 달랐다. 뭐, 옥탑을 같은 건물이라고 칭하는 건 다소 적절치 않기는 했다.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의 카페는 바리스타의 훌륭한 솜씨로 동네 주민들은 물론 주변 회사원들의 원픽을 차지한 덕에 늘 손님이 많았다. 서너 명은 기다리고 있는 줄의 끄트머리에 선 이연이 하품을 했다. 답지 않게 아침을 먹었더니 식곤증이 오는 것 같았다.
줄을 기다리는 동안 삐딱하게 돌아서서 벽에 걸린 액자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산오한테 사무실 지키라 하고 집에 가서 한숨만 자고 올까? 졸린 건 아침을 먹어서 그런 거니까 따지자면 아침을 차린 제산오의 책임도……. 절찬리 딴생각으로 턱도 없는 땡땡이 계획이나 세우고 있는데, 시야 끄트머리에 무언가 들어왔다. 위화감을 느낀 이연이 의아하게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뭐지?’
카페 안의 풍경은 아까와 비슷했다. 낮게 흐르는 음악 소리, 커피를 내리고 주문을 받는 분주한 손놀림, 가지런히 줄을 선 손님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이연의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맨투맨을 입고 있던 청년이었지, 반듯한 양복을 입고 있는 회사원이 아니었다. 이연이 얼빠진 얼굴로 동그란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새치기한 건가?
너무 태연하게 슥 나타나서 원래 여기 있던 사람인데 이연이 못 보던 것은 아닌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앞 사람의 행색이 흔치 않았다.
이연보다 조금 더 작은 새치기남은 머리를 왁스로 단정하게 올리고 경호원이나 입을 법한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반지르르한 광택을 보니 꽤 값나가는 물건인 것 같았다.
이 근방은 적당한 상가와 적당한 주택, 그리고 적당한 꼬마빌딩들이 섞여 있어 모든 조건이 애매한 지역이었다. 저렇게 각 잡고 출근해야 하는 회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봐도 수상하게 생긴 몰골로 새치기까지 하다니. 얼결에 순서가 밀린 이연이 인상을 설핏 찌푸렸지만 이내 마음을 풀었다. 바쁜 일이라도 있나 보지. 어이가 없긴 했지만 크게 실랑이할 일도 아니었다. 차림새를 보니 회사원인데, 시켜 봤자 아메리카노 아니겠는가.
“그린티 카푸치노에 샷 추가, 초코칩 추가, 에스프레소 휘핑 추가, 모카 드리즐 추가해서 여덟 잔 주세요.”
“…….”
뭔 소린지도 모르겠는 외계어를 남발한 새치기남은 모든 사람을 번거롭게 만들며 한참 후에야 음료수를 전부 받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취향이 까다롭기도 하네. 이연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오랜 시간 끝에 커피를 받아서 사무실로 올라가려는데, 시야 아래로 무언가 나부꼈다. 고개를 내리니 새하얀 하이탑에서 빠져나온 새하얀 끈이 풀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새로 맨 지 얼마 안 되어서 매듭을 단단하게 짓는 것을 깜빡했다. 이연이 커피 캐리어를 바닥에 놓고 쭈그려 앉으려는데,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스쳤다.
그리고 윤기 나는 구두가 신발 끈을 콰직 밟았다.
“실례.”
가벼운 말과 함께 떨어진 발아래에는 구둣발 자국대로 검은 얼룩이 생긴 흰색 끈이 처량하게 구겨져 있었다.
“…….”
이…… 뭔…… 뭐지? 순식간에 봉변을 당한 이연이 허망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양복. 조금 전 받은 음료수는 어디로 간 건지 온데간데없었지만, 틀림없는 새치기남이었다.
짙은 선글라스를 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리 미안해하고 있지 않은 표정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 가능했다. 커다란 선글라스 렌즈에 얼빠진 이연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운동화 끈은 일부러 밟기도 힘든 각도였다. 심지어 새치기남은 새치기를 했기 때문에 이연보다 먼저 가게를 나갔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로 발을 뗀 새치기남은 자신의 구두와 운동화 끈을 번갈아 보더니 별다른 사과도 없이 훌쩍 등을 돌려 멀어졌다.
“아니, 저기요.”
황당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이연이 소리 높여 새치기남을 불렀으나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새치기남은 순식간에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아메리카노가 두 잔 든 캐리어와 조금 더러워진 운동화 끈만 이연과 함께 남았다.
“이거 무슨…… 실험 카메라?”
억울한 중얼거림에 대답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탁. 조금 거칠다 싶은 손길로 탁자에 커피가 놓였다. 산오의 시선이 출렁거리는 컵에 잠깐 닿았다.
“왜 그렇게 퉁퉁대는 거지?”
“아니, 아래에서 어떤 이상한 사람이…….”
사연을 피력하려던 이연이 멀뚱하게 바라보는 잘생긴 얼굴을 보고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제산오한테 이런 말을 해서 뭐 하겠냐. 민첩한 하루 되라는 말이나 하겠지. 안 그래도 열 받는데 그런 말이나 들으면 평화주의자 정이연의 자아는 산새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람이 뭐.”
이연이 산오의 공감 능력을 개무시하며 빨대를 쭉 빨았다. 카페인이 안에 들어오니 화가 좀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뭐냐고.”
이연은 새치기남을 속으로 욕하는 데에 심력 소모를 한 나머지 아메리카노 값을 산오에게 청구하려던 계획을 까먹었다. 산오에게는 다행이고, 이연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정오 즈음이 되자 혜강이 어슬렁 출근했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모니터에서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하던 혜강은 이내 이연에게 부탁했다.
“형. 초관청에 좀 가 줄 수 있어?”
“초관청은 왜?”
“서류가 한 장 누락됐나 봐.”
사무실에서 초능력 관리청까지는 멀었다. 귀찮은 길이었지만 제산오와 함께라면 괜찮았다. 미적대던 이연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인간 엘리베이터를 바라…… 아니, 어디 갔어? 이연이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혜강이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산오 형 방금 전화 받으러 나갔어.”
“…….”
그간의 경험상 산오에게 걸려 오는 통화는 일이십 분으로 안 끝났다. 이연은 혼자서 길을 나서야 했다.
먼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에 벌써 힘이 쭉 빠졌다. 길을 걷는데 검은 먼지로 얼룩진 운동화 끈이 얼핏 보였다. 조금 더 우울해졌다.
터덜대며 지하철 역사로 내려와 개찰구에 카드를 찍던 이연이 멈칫했다. 또 이 느낌이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둥그런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미행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봐도 짚이는 게 없었다. 혜강이한테 물어볼까? 목에 걸린 고글을 만지작대던 손은 이내 얌전히 떨어졌다. 아니, 아직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이연은 눈치채지 못한 척 천천히 가던 길을 걸었다. 태평함을 가장한 시선이 열차 정보 화면을 훑었다. 마침 지하철이 막 들어오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이연은 타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느긋한 걸음을 유지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확연하게 느린 속도였다. 주변으로 서두르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연의 움직임이 달라진 것은 열차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얼추 탔을 때 즈음이었다.
순식간에 빨라진 걸음걸이가 길을 날듯이 달렸다. 문이 닫힙니다, 하는 방송이 스치듯이 들렸다. 거의 다 내려온 계단에서는 몇 걸음 만에 지하철에 닿을 수 있었다. 이연이 들어오자마자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지하철 문이 닫혔다.
덜컹, 하는 진동과 함께 지하철이 천천히 출발했다.
드디어 시선이 사라졌다. 이연이 조그마한 지하철 창문 너머로 플랫폼에서 지켜보고 있을 스토커를 향해 장난스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