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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2화 (12/250)

#12

그때, 갑자기 이연이 벌떡 일어났다.

“밥.”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얼굴에는 허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잠깐 누워 있었다고 그새 부스스해진 머리가 뒤늦게 흩날렸다. 난데없는 잠꼬대를 직관하게 된 산오가 자연스럽게 허리를 펴자, 곧 아까와 다름없는 바른 자세가 되었다.

“배고파 죽을 것 같아.”

“불새 잡고 저녁 먹었잖아.”

“그건 밥이 아니야. 입가심이지.”

둘은 순댓국 한 그릇에 밥 두 공기씩 싹싹 비웠다.

“그래.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 다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이연이 과장되게 엎어지며 이건 말도 안 되는 노동 착취라고 투덜거렸으나, 본인을 본인이 부려 먹은 관계로 책임 소재를 물을 수 없었다. 산오가 타박하는 부모님처럼 엄중하게 빈정거렸다.

“아침 먹으라고 했지.”

“그거랑 달라!”

고개를 흔든 이연이 이내 산오를 휙 쳐다보았다. 결연한 각오가 눈에 반짝였다.

“안 되겠다. 뭐라도 먹자.”

그렇게 되어 두 사람은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사무실에서 한 블록 떨어진 꼬치집, <밤꼬치>에 방문하게 된 것이다.

“어, 이연 씨! 어서 오세요. 혜강이는 어디 가고?”

“자요. 안 일어나서 버리고 왔어요.”

잠깐 곯아떨어진 혜강에게는 사실 이제부터가 하루의 시작이었다. 젊은 간이 알코올을 해독하는 대로 알아서 귀가해 남은 하루를 즐길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밤꼬치의 사장, 수아가 웃으며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낡은 메뉴판에는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주문하는 데에는 지장 없었다.

작고 허름해서 세 테이블 받으면 가게가 가득 차 버리는 밤꼬치는 이연의 단골집이다. 싸고, 맛있고, 주인이 친절한 것이 장점이었다. 영업시간이 가끔 제멋대로 바뀌긴 했지만, 대체로 이용하는 데에는 큰 문제 없었다.

닭 꼬치 열 개와 어묵탕을 단숨에 주문한 이연이 물을 한 컵 마셨다. 맥주만 내내 차오르던 배에 정수가 들어가니 갈증이 조금 가셨다.

“이제 좀 살겠네.”

“이연 씨, 이 청년은 누구?”

단골 장사로 운영되는 조그만 술집에 새로운 얼굴이 보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관심을 가지지 않기가 어려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기도 했다.

“임시 알바생이에요.”

“오, 알바 구했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두 사람이 잡담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산오는 감흥 없다는 듯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싸늘한 반응에 수아가 어머머, 하고 해맑게 물었다.

“알바분이 혹시 귀에 문제가 있으신 그런 체질?”

그녀는 활달하고 친절했지만 눈치가 별로였다.

“…….”

산오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방금 본인의 생사가 걸린 갈등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수아 대신 이연이 해명했다.

“낯을 좀 가려요.”

“아아, 어쩐지 눈을 못 마주치더라.”

놀랍게도 납득한 수아가 앞으로 차차 친해지자며 눈을 찡긋거리고는 본격적으로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바 너머에서 들리는 지글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메꾸는 동안 지긋한 시선이 하얀 뺨에 꽂혔다. 이연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할 말 있어?”

“네 이름.”

“응?”

“이름 다시 말해 봐.”

빨리도 물어본다.

“어어……. 정이연…….”

아니, 아침에 말했는데 까먹은 거야? 그럼 내 이름도 모르는 채로 그냥 다닌 거냐고? 생각해 보니까 이름을 불린 적이 없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 같이 있었는데, 무심함에 소름이 다 돋았다.

앞사람이 몸서리를 치든 말든 산오는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정이연.

“알겠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테이블 가득 차려진 한 상에 이연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야식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산오가 닭 꼬치 두어 개를 먹을 동안 남은 꼬치를 싹 비워 버린 이연은 모듬 꼬치를 새로 시키고는 꼬치가 나올 동안 어묵탕의 어묵을 건져 먹는 체계적 먹부림을 선보였다. 산오는 직감적으로 이 가게에서 나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 가?”

별안간 슥 일어서는 산오를 이연이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본 척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제멋대로 가게를 나서는 커다란 덩치의 의중을 짐작한 이연이 친절하게 외쳤다.

“화장실은 왼쪽으로 나가서 2층이야!”

건물 오른쪽 옆의 골목으로 들어간 산오는 휴대폰을 꺼냈다. 망설임 없이 화면을 톡톡 누른 손가락이 곧장 전화를 걸었다.

“말해.”

나직한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휴대폰 너머의 상대 말을 한참 듣고 있던 산오가 벽에 등을 기댔다. 온갖 먼지를 묻히고서도 잘생긴 얼굴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기대 안 했는데.”

날이 흐려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은 새까맸다. 좁은 골목에는 바로 옆에 있는 가게가 환히 불을 켜고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도 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늘 속에서 무심한 눈이 실컷 꼬치를 우물거리고 있을 벽 너머의 사람을 찾듯이 움직였다.

“지켜볼 필요성은 있어.”

어둠에 가려진 녹색 눈이 희미한 빛을 내며 타올랐다.

*

“…….”

침대에 누운 이연이 심각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제산오를 만난 지도 벌써 사흘 정도 되었다.

의외로 첫날 이후 산오는 제 능력으로 이연이나 혜강을 위협하지 않았다. 말로야 죽이니 마니 으르렁댔지만, 실제로 힘으로 다치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난폭한 인간은 아닌 모양이다.

덕분에 그가 조금 편해진 이연은 평소의 뻔뻔한 성격을 점점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농담도 곧잘 치기 시작했다. 산오가 그것을 받아 주었느냐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뭐, 바꿔서 생각하면 처음 만났을 때 이연을 공격했던 게 정말 진심이었다는 소리기도 하겠지만……. 잘도 살았다. 되살아나는 당시의 기억에 이연이 푹신한 이불 안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튼 산오는 그럭저럭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

이연과 함께 출근해서 이연이 분기 임무나 의뢰에 관해 혜강과 상의하는 동안 소파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연이 퇴근할 때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가끔 몇 시간 정도 밖에 혼자 나갔다 올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퇴근 시간 내에 돌아왔다.

이연이 변이종 임무를 위해 외근하면 순순히 도와주었고, 산오의 활약으로 임무 수행 기간은 비약적으로 줄었다. 덕분에 이연은 근래 끝내주는 워라밸을 즐길 수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

“정이연.”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문 쪽을 바라보자 편한 차림새의 산오가 서 있었다. 팔을 대강 걷어 올린 소매가 둘둘 접혀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팔뚝이 얼핏 보였다.

“아침.”

“괜찮아.”

산오의 눈빛이 대번에 스산해졌다.

“아침 먹는 것도 괜찮다고…….”

살벌하게 번뜩이는 시선을 피하며 이연이 웅얼거렸다.

“꾸물거리지 마라.”

툭 내뱉은 산오는 다시 몸을 돌려 부엌으로 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이연이 생각했다.

‘왜…… 제산오는 집에 안 가지?’

오늘의 아침은 베이컨 일곱 장에 달걀 프라이 다섯 장, 식빵 다섯 장이었다. 간단하고 푸짐한 미국식 아침은 맛있었다. 놀랍게도 제산오는 요리에 소질이 있었던 것이다.

이연이 우물대며 접시를 깨끗이 비우는 동안 산오는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향했다. 몸이 워낙 탄탄해서 그런지 하얀 티셔츠와 검은 트레이닝팬츠가 참 잘 어울렸다.

‘아니, 저 옷은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건데?’

이연의 집에서 산오의 사이즈에 맞는 바지는 산오가 첫날 입었던 출처 모를 회색 조거 팬츠뿐이었다.—다음 날 이연이 세탁해 주었지만 산오는 그 바지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실내복을 입고 화장실 앞에 도달한 산오는 마치 제집인 것처럼 훌렁훌렁 탈의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스트립쇼에 화들짝 놀란 이연이 재빨리 접시로 시선을 처박았다. 스친 시야로 본 잘 짜인 등 근육의 잔재를 노른자가 탱글한 계란 프라이로 지우기 위해 꼭꼭 씹어 삼키다 보니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곧 샤워기 소리가 쏴아, 하고 들렸다.

‘왜 저렇게 자연스러운 거냐고.’

빗물에 절었던 산오의 옷은 이연이 근처 세탁소에 맡겼다. 검은 가죽 코트, 어두운색의 목 티, 검은 진. 간단한 조합이었는데 그렇게 비싼 세탁비는 생전 처음 내 봤다. 옷을 금으로 만든 거야 뭐야…….

세탁소 주인은 왜 이렇게 좋은 옷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놨냐며 이연을 타박했지만—억울했다.— 다행히도 무사히 복원되었다. 캐주얼하면서도 묘하게 위압감이 드는 차림새는 산오에게 잘 어울렸다. 새까만 머리에 온통 어두운 옷들이라 얼핏 보면 저승사자처럼 보이긴 했지만…….

이연 역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걸쳐 입었다. 색이 연한 청바지에 쇄골이 훤히 보일 정도로 품이 큰 브이넥을 걸친 모습은 이연을 실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게 했다.

“가자.”

이연이 먼저 현관으로 향하자 산오가 성큼성큼 따라갔다. 신발을 신는 이연보다 훨씬 더 위에 자리한 시선이 목선이 깊게 파인 가슴 부근에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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