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빠르게 멀어지는 이연을 향해 청호의 주의가 쏠리자, 산오가 청호가 밟고 있는 옥상 바닥을 부수어 청호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끼기긱. 발톱이 벽을 긁으며 떨어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비행기 속도를 올리니 전투 광경이 훅 멀어졌다. 부서지는 건물의 외벽에서 가시가 돋아나며 청호를 위협하는 것이 얼핏 보였다. 청호가 꼬리를 휘두르며 가시를 부수는 사이, 날리는 먼지들 사이로 산오가 튀어나와 옆구리를 후려쳤다.
쿵쾅대는 전투 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이연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리불새들은 여전히 전투 구역 위 하늘을 빙빙 맴돌고 있었다.
- 무리불새한테 보주가 있는 것 같다는 거지?
이연과 한두 번 합을 맞춰 본 게 아닌 혜강은 척 하면 척이었다. 무리불새 근처에서 일단 멈춰 선 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청호가 다짜고짜 그들을 공격한 것은 그저 보주의 기운만을 따라왔을 뿐,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알지 못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도착한 후 마주한 산오의 기운이 너무 강했던 것도 착각에 박차를 가했을 거고. 이연이 청호였더라도 보주를 빼앗아간 범인으로 무리불새보다는 제산오를 지목했을 터였다.
- 보주는 어떻게 찾게? 형 혼자서는 잡기도 까다로울 텐데.
혜강의 말은 옳았다. 실제로 조금 전에 무리불새 한 마리 잡을 때에도 시간이 꽤 걸리지 않았는가. 여섯 마리 전부를 잡아 일일이 수색할 수 있는 시간을 산오가 벌어 줄지는 미지수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혜강의 염려에 이연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부산스레 날아다니는 새들을 향해 고정한 채였다.
“잡는 법은 찾았어.”
- 응?
표본이 적긴 했지만 무리불새의 사고담들을 종합하면 무리불새가 노렸던 것은 번듯한 특징이 있었다. 모아 보면 꽤 그럴듯한 공통점이다.
“그냥 예쁜 까마귀잖아.”
반짝이는 것.
모든 광석과 광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산오라면 단번에 지하에 묻혀 있는 온갖 화려한 돌들을 끌어 올릴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매우 바쁜 상태였다.
여기부턴 이연의 몫이었다.
이연이 가방을 뒤져 새 종이를 꺼냈다. 무리불새의 주목을 끌 수 있을 만큼 반짝이면서도 그의 허접한 실력으로 충분히 그려 낼 수 있는 것.
마침 날씨가 화창했다.
날씬한 펜이 가볍게 움직였다. 곧 종이에서 장난감 같은 물건이 튀어나왔다. 이연이 실체화한 것을 손에 쥐고 흔들자, 각도에 따라 표면에서 반짝이는 빛이 반사되었다.
- 아, 거울? 형 똑똑하네.
“별말씀을.”
쉴 새 없이 빛나는 물체를 발견한 무리불새 몇 마리의 머리가 이연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쾅!
두터운 꼬리가 채찍처럼 바닥을 때렸다. 난장판이 된 도로에서 다시 부서진 파편이 튀었다.
파편들은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산오의 몸을 비켜 갔다. 산오는 상처 하나 생기지 않은 깨끗한 몸으로 흙투성이가 된 손만 가볍게 털었다. 능력을 강하게 쓸 때만 피부에 비늘처럼 돋아나는 금속은 점점 범위가 퍼져 손등까지 덮여 있었다.
슬슬 한계였다.
‘많은 걸 기대했나.’
그간 참은 만큼의 소득은 없었다. 산오의 눈에 짙은 그늘이 졌다. 푸르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음산하게 빛났다.
청호의 정면에 버티고 선 산오가 양옆의 폐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돌로 이루어진 건물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청호를 향했다.
당장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은 기세에 청호가 으르렁대며 몸을 낮췄다. 청호의 몸 주변에서 파직거리는 전류가 산발적으로 튀었다.
둘 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것이 마지막 공격이었다.
“청호!”
그때, 굉음 사이로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산오와 청호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멀지 않은 저공, 종이비행기에 서서 고글을 이마 위로 올린 이연이 붉은 확성기를 쥐고 있었다. 낙서처럼 구겨진 기계를 입에 갖다 댄 이연이 장난스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거 찾고 있었지?”
하얀 손에 들려 있는 구슬을 확인한 청호가 커다란 포효 소리와 함께 펄쩍 뛰었다. 산오가 제멋대로 뒤틀어 버린 건물을 날래게 밟고 뛰어오른 거대한 호랑이는 곧바로 이연에게 달려들었다.
“분기 실적 채우려다가 별일을 다 겪네.”
설정한 지형 옵션이 모두 사라지고 구역 방어벽이 스르륵 내려가는 장면은 후련함을 동반했다. 이연이 투덜거림에 산오가 흘끗 내려다보았다. 오랜 전투로 옷도 얼굴도 죄다 꼬질꼬질해져 있었다.
“그런 것치곤 즐기던데.”
“무슨 소리야. 난 엄청나게 진지했다고.”
괜찮지 않았어?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진지했다.
이연이 무리불새에게서 얻어 낸 청호의 보주를 흔들자, 청호는 이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연은 장난감을 가지고 고양이를 놀아 주는 것마냥 몇 번 어르는 것으로 청호를 얌전히 잠재운 후 보주를 건네주었다.
자신의 보주를 되찾은 청호는 두 사람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높은 방어벽을 훌쩍 기어올라 사라졌다.
“보주를 부쉈으면 청호를 죽일 수 있었을걸.”
“걔도 피해자잖아.”
8급 변이종에게 보주를 빼앗기다니, 2급 변이종으로서 부끄럽지 않았겠어? 이연이 평탄하게 덧붙이며 웃었다. 그런 이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오가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빌딩 숲 너머,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는데…….”
“응?”
“그럭저럭이군.”
그렇게 말하는 산오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까마득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신경이 쓰여서, 이연은 안 그런 척하면서도 그 옆모습을 흘끔 훔쳐보았다.
*
“고생하셨습니다~.”
짠, 하고 부딪히는 캔 소리가 경쾌했다. 노을 지는 하늘 아래 사무실 앞 평상에 걸터앉은 혜강은 몇 모금 만에 맥주 한 캔을 비웠다. 가공할 만한 속도였다.
“왜 나란히 이걸 먹고 있는 건데?”
떨떠름하게 캔을 쥔 이연이 중얼거렸다. 그 옆에 거리를 조금 두고 앉은 산오는 제 앞에 놓인 맥주 캔을 따지도 않았다. 비협조적인 현장에도 혜강은 의연했다.
“신입 기념 회식이라고나 할까?”
“신입…….”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이렇게 위화감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거기, 제산오 씨! 이혜강이에요. 잘 부탁합니다.”
산오는 흘끗 쳐다만 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을 하든 말든 별 상관 없었는지 혜강은 신경 쓰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벌써 다음 캔을 따고 있는 그의 관심사는 아주 분명했다.
“그냥 네가 먹고 싶어서 사 온 거 아니냐?”
“어허! 회식인데. 경비 처리 하는 거지?”
“…….”
구성원이라곤 꼴랑 둘밖에 없는 회사를 잘도 벗겨 먹는다.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벌써 회사 카드를 쓴 것 같았다.
혜강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본 이연이 제가 쥔 캔을 입에 갖다 댔다. 하루 종일 굴러서 그런지 꿀꺽꿀꺽 들이켜는 맥주가 유독 달달했다. ……아니? 진짜 단 맥주잖아?
“야, 너 수입 맥주 샀어?”
“네 개 단위로 샀으니까 이득이야. 괜찮아.”
네 개 단위로 한 트럭을 사 놓고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맥주 맛이 기가 막히네~.”
이미 혜강은 등을 돌리고 도시 풍경을 바라보며 풍류를 혼자 즐기고 앉았다. 회식의 뜻을 모르는 것 같았다.
“술 안 마셔?”
순식간에 혜강에게 덜렁 소외된 이연이 산오를 흘끗 바라보았다. 등을 펴고 곧게 앉은 자세 덕일까, 그림자를 먹은 커다란 덩치는 낮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캔으로는 가장 커다란 사이즈인 500mL였는데도 산오와 함께 두니 미니어처 같아 보이는 맥주는 여전히 처음 놓인 그대로 서 있었다.
어딘가를 보며 생각하는 듯하던 산오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머쓱해지는 기분에 이연이 캔을 입에 댄 채로 웅얼거렸다.
“아니, 뭐. 강요할 생각은 없고…….”
요즘 세상이 또 그러면 안 되는 세상 아니냐. 내가 또 열린 사장이긴 하지. 그렇고말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삐뚜름해졌다. 한심한 것을 보는 눈빛이었다.
“이제까지 회사를 유지한 게 용하군.”
“또 뭐가.”
이제 제산오의 막말은 간지럽지도 않았다. 심드렁하게 되물으며 이연이 남은 맥주를 털어 넣었다. 혜강이 워낙 술을 빨리 마셔서 그렇지, 이연 역시 어디 가서 먹는 걸로는 지지 않았다. 분주하게 새 캔을 따는데 산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무리불새들을 죽이고 살펴보지 않았지?”
“넌 대체 어떤 잔혹한 세계에서 살아온 거니?”
“효율을 말하는 거다.”
이연은 거울을 이용해 무리불새를 유인한 다음 한 마리씩 뒤지고 보주가 없다면 다시 놓아주었다. 이연의 운이 좋은 편은 아니어서, 다섯 마리쯤에야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무리불새가 가까이 왔을 때 하나씩 처치하고 찾는 게 훨씬 빨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만큼 꼬질꼬질해지지도 않았겠지.
“안 죽여도 목적은 달성했잖아.”
“내 목숨으로 벌어 준 시간을 써서 말이야.”
“안 죽을 거 알았어. ……그래도 미안.”
산오가 고생한 건 사실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처음에 생각한 전투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래도 너도 노력했잖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청호의 등에 창을 꽂을 때 확신했다. 산오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보주가 있어도 무궁화 5단이 2급 변이종에게 그 정도로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면 초호시는 진작에 초토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청호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다.
“노력한 게 아니다.”
“그럼 뭔데?”
그 물음에 산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연은 더 물어보지 않고 맥주 캔을 들었다.
“자.”
어둠이 덮여 까맣게 보이는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연이 실없이 웃었다.
“고생했어.”
툭. 이연의 캔이 얌전히 놓여 있는 산오의 캔을 가볍게 쳤다. 둔한 소리가 났다.
산오에게 예의상 놓아준 맥주 한 캔을 제외한 스물일곱 캔 중에서 혜강이 열일곱 캔, 이연이 열 캔을 마셨다. 두 술고래는 얼굴조차 붉어지지 않고 이야기를 가장한 집단 독백을 한참 하다가 어느 순간 평상에 드러누웠다.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완연히 어두워진 옥탑 울타리 너머로 건물 불빛과 자동차의 라이트가 조그만 전구들처럼 줄을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랜드마크, 적공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희미한 소음이 끊임없이 흐르는 옥상 안에서, 주정뱅이들을 구경하며 내내 묵묵히 앉아 있던 산오가 몸을 일으켰다.
짙은 그림자는 이연의 허리께쯤에서 멈췄다.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얼굴은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산오의 눈이 서늘해졌다. 상체가 누워 있는 남자에게로 천천히 기울었다.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느린 움직임이 정확하게 목표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