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러나 오래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4단 여섯이 달려들어도 가볍게 도주했다는 변이종이다. 이연이 생각하기에도 산오는 놀랍도록 잘 버티고 있긴 했지만…… 무한정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연이 시선을 들어 전방을 노려보았다. 산오와 청호 위, 창공에 원을 그리며 날고 있는 무리불새들이 보였다.
- 제산오? 초능력자 중에 동명이인 없는데?
“걔 맞아.”
- 짱이다. 어떻게 안 거야? 아니, 아무리 5단이어도 2급을 혼자 상대할 수가 있어?
“혜강아, 집중.”
청호가 등장한 것은 무리불새와 반드시 관련이 있다.
- 뭐가 필요한데?
“무리불새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얘네가 빛나더니 청호가 나타났어. 아무래도 무리불새가 원인인 것 같으니까 얘네 정보 좀 정리해서 알려 줘.”
그러니 그쪽을 공략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통신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희미한 타자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작업에 착수한 모양이었다.
이연은 옆에 있는 폐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산오와 청호의 전투에 여기저기가 부서져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다행히 곧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이연은 곧장 임시 계단을 타고 위로 향했다. 무리불새를 잡으려면 최대한 하늘 근처에 있는 게 좋았다.
건물 옥상으로 나오니 구역 전체가 훤히 보였다. 산오와 청호가 싸우는 곳은 건물 세 채 정도 떨어져 있는 장소. 산오가 일부러 방향을 돌리지 않는 이상 안전한 위치였다.
휑한 옥상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이연이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내가 제산오랑 같이 싸울 것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도움 정도는……. 바쁘게 끄적이는 펜의 선은 여전히 삐뚤빼뚤했지만 본인의 얼굴만큼은 퍽 진지했다.
- 형. 듣고 있어?
혜강이 다시 말을 건 것은 이연이 종이 한 장을 전부 채웠을 때였다. 펜을 집어넣고 종이를 탁탁 편 이연이 대답했다.
“말해.”
곧 빠르고 정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연에게 쏟아졌다.
- 결론적으로 무리불새랑 청호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정보는 못 찾았어.
이연에게 있는 단서라곤 그거 하나뿐이었다. 연관이 없다니. 막막함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 하급이랑 상급이라 ‘주종론’이랑 영향이 있는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주종론?”
- 최근에 인터넷에서 퍼지고 있는 변이종 가설인데, 변이종 사이에서도 최상급 변이종을 위시해서 파벌이나 세력이 나뉜다는 이론이야. 보주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최상급 변이종들이 우두머리가 된다는 모양이고.
‘보주’는 1급과 2급, 그리고 소수의 3급 변이종만이 지니는 일종의 에너지 원천이다. 빛나는 구슬 형태라 보주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보주가 있는 변이종과 없는 변이종은 힘 차이가 월등히 나기 때문에 최상급 변이종과 싸울 때에는 보주를 먼저 공략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 근데 너무 믿지는 마. 논문도 하나밖에 없고, 학계에서도 큰 반응은 없는 주제거든.
그런 걸 연구한 인간도 있다니, 어지간히 할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연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두머리라…….”
- 게다가 논문에 따르면 파벌은 변이종 기본 형태에 따라 나뉜대. 포유류는 포유류대로,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았어. 고마워.”
호랑이와 새는 분류부터 달랐다. 무리불새에 포유류 형태가 명확하게 섞여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지금 현상은 주종론과는 관련 없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청호가 있는 곳에서는 번쩍거리는 빛과 커다란 굉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제멋대로 헤집어진 땅은 흙구름이 자욱했지만, 유능한 엔지니어가 만들어 준 고글은 망원 기능과 열 감지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막 청호가 휘두르는 발톱을 피한 산오가 날렵하게 바닥을 구르며 청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철 밧줄들이 수족처럼 산오의 곁을 따라 솟아났다.
덩굴처럼 커다랗고 북슬한 몸에 얽혀 들던 밧줄은 강한 뿌리침에 스러졌지만, 애초에 청호를 묶어 두려는 목적이 아니었는지 무감한 얼굴엔 별 변화가 없었다. 청호가 이어 꼬리를 휘둘렀고, 산오가 크게 뛰며 피했다. 검은 워커에 자잘한 철가루들이 들러붙다 나부끼는 게 보였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하던 산오가 자세를 낮추고 크게 뛰어올랐다. 그의 양손에 만들어진 것은 아까와 같은 거대한 투창이었다.
가속도를 싣고 떨어지는 공격은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기세였다. 마치 쓰러트릴 것을 확신한 듯한 몸짓. 섬광 같은 줄기가 청호의 등 한가운데에 내리꽂혔다.
커헝!
커다란 포효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가죽을 뚫고 들어간 창이 깊숙이 꽂혔다. 그러나 뿔처럼 보이는 창을 달고도 청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산오가 청호의 등에 매달린 채로 멈칫했다. 뭔가 이상했다. 여기엔 분명히 있어야…….
그 순간이었다.
거대한 벼락이 청호의 몸체, 그중에서도 등을 정조준해 떨어졌다.
콰앙!
일순간 온 시야가 하얗게 빛났다. 그림자가 제자리를 찾고 나서야 슬금슬금 시력이 제 할 일을 했다. 괜찮은 건가? 이연이 렌즈를 확대하며 산오를 찾았다. 늠름하게 선 청호의 등 언저리에서 산오의 머리가 슬쩍 들리는 것이 보였다. 청호의 등에 꽂혀 있던 창은 어느새 사라졌고, 그 옆에 길쭉한 무언가가 서 있었다.
거대한 피뢰침이었다.
청호에게 꽂힌 창을 정조준하고 떨어지던 벼락은 청호의 양옆에 세워진 두 개의 피뢰침으로 갈라져 지면에 흡수되었다. 순간적인 판단력이 기가 막혔다.
이연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젓는 동안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포효하는 것으로 창의 잔해를 털어 낸 청호가 펄쩍 뛰어 산오를 떨쳐 냈다. 푸른 가죽에 퍼지던 붉은 피는 금세 멈췄다.
그때였다. 산오의 등 뒤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보지도 않고 철 방패를 만들어 막은 산오가 눈동자만 슬쩍 굴려 바닥에 나뒹군 것을 뒤늦게 확인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은 종이비행기였다. 아까만큼 큰 건 아니지만, 성인 남성 한 명이 올라타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못생긴 형태를 보니 누가 했는지는 금세 파악이 가능했다. 산오의 시선이 곧장 건물 위에 선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연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땅에만 있는 것보다는 땅과 하늘을 둘 다 쓸 수 있는 사람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종이비행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오가 이내 비행기에 올라탔다. 다행히 조금 구겨지긴 했어도 작동에는 문제없었다.
가볍게 몸을 비트는 것으로 쉽게 방향을 잡은 산오가 그대로 이연에게 날아왔다. 단번에 멀어져 버리는 산오를 향해 청호가 컹컹 짖었다.
- 와, 제산오 개잘생겼네.
이연에게 도착한 산오를 보자마자 혜강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통신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산오가 무뚝뚝하게 전달했다.
“저 녀석. 보주를 꺼내지 않아.”
“뭐?”
- 보주가 없다고?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산오를 바라보았다. 인상을 조금 찡그린 산오의 목 아래와 뺨으로 이어지는 턱에는 광택이 나는 금속이 비늘처럼 돋아 있었다. 과도한 능력 사용의 부작용인 듯했다.
“어쩐지 공격이 약하더군. 전투하는 내내 전부 뒤졌는데 아무 데도 없어.”
2급 변이종이랑 혼자 싸운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산오의 상처는 가벼운 타박상 정도에 그쳤다. 산오의 능력이 공방 밸런스가 적절하다는 것을 감안해도 과하게 멀쩡한 상태였다.
“보주가 이미 깨졌나?”
“아니.”
산오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러기엔 너무 단단해.”
산오가 찢었던 청호의 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하게 아물어 있었다. 애초부터 보주가 없는 상태였으면 아무리 2급이어도 이런 방어력은 말도 안 됐다. 부서진 건 아니지만 몸에 지니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어?’
이연의 눈이 깜빡였다. 이거, 뭔가……. 그간 모았던 짧디짧은 실마리들이 하나씩 엮이기 시작했다. 청호, 보주, 무리불새, 소환.
「가방 물어뜯고 귀걸이 잡아당기고 난리도 아니었어 가지고」
……사고뭉치.
“반대였어.”
이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무리불새가 청호를 불러낸 게 아니었다.
청호가 무리불새를 쫓아온 거였다.
“확인할 게 있어.”
뜬금없는 말에 산오가 이연을 흘끗 바라보았다. 옅은 색소의 눈이 햇빛을 받아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오가 문득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작게 까득,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찬 바람이 불었다.
뭐지, 라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이연의 앞에 거대한 철벽이 솟았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달아 들렸다. 제 몫을 마치고 땅으로 숨은 철벽 너머에서는 공격을 막고 부서진 잔해들이 부스스 떨어졌다.
그 너머로 건물 벽을 타고 옥상까지 올라온 청호가 자세를 낮추고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푸르게 빛나는 털이 위협적으로 곤두서 있었다. 가까이서 대형 변이종을 마주하니 숨 막힐 정도의 위세가 느껴졌다.
“정신 빼놓지 마.”
“어, 어어…….”
참고로 이연은 평소보다 정신을 더 똑바로 차리고 있던 상태였다. 보고도 못 피하는 공격이라니, 하마터면 그대로 죽을 뻔했다. 툭 치면 바로 넘어질 것 같은 몸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본 산오가 청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래 걸리면 재미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산오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세가 풍겨 나왔다. 별 감흥 없이 이성적으로 전투하던 초반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갈수록 힘을 많이 쓰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제 몫의 종이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