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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8화 (8/250)

#8

대형 변이종이 도시 사정 봐 가며 얌전히 움직일 리가 만무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주택가가 난장판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연이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획도시인 초호시는 지금처럼 예기치 못한 대형 변이종과의 전투를 대비하여 도시 곳곳에 초능력자들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거대한 전투 구역을 만들었다. 이 근방에도 틀림없이 전투 구역이 존재할 것이다.

다행히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텅 빈 회색 터가 얼핏 보였다. 바닥에 커다랗고 두껍게 32라고 쓰여 있었다.

“저기 보여? 32구역.”

이연의 말에 따라 시선을 돌린 산오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청호를 저기로 몰아넣는 게 우선이다. 산오의 신형이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 청호에게로 향했다.

청호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조그마한 생물을 인식하기도 전에 퍽, 하는 소리가 나고, 곧이어 으르렁거리는 포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퍼졌다. 주의 하나는 확실하게 끈 것 같았다.

혼자 남은 이연은 옥상 아래로 달려 빠르게 건물을 벗어났다. 산오가 청호를 유인할 동안 이연 역시 놀고 있을 틈은 없었다.

32구역에 이연이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어젯밤부터 운동 한번 제대로 한다. 헐떡대며 비실비실 전투 구역으로 다가간 이연이 휴대폰을 꺼내 초능력자 등록증 페이지를 열었다. 구역 입구에 있는 패드에 갖다 대자 낭랑한 안내 음성이 들렸다.

[무궁화 2단 정이연, 초능력자 확인되었습니다. 이곳은 32 전투 구역입니다. 별도 허가 없이 변이종 전투 외의 용도로 전투 구역을 사용하는 것은 강력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네.”

대답과 동시에 입구 바로 안쪽에 투명한 부스가 땅에서 솟아났다. 투명하고 단단한 벽에 음각으로 <상황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연은 곧장 상황실 안으로 입장했다.

전투 구역의 기본 형태는 회색 아스팔트 바닥뿐인 공터였다. 그나마 외곽 바닥에 경계를 표시하는 선 정도는 있었지만, 내외부를 구분하는 울타리나 벽 같은 것은 쳐져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빈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 구역이야말로 초호시 과학 기술의 정수였다.

본인 인증을 한 초능력자가 전투 구역에 입장하면 상황실이 생성된다. 상황실에서는 외부 격리, 지원 요청, 출입구 봉쇄 등의 다양한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실상 하나였다.

지형 설정.

모든 초능력자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어떤 초능력자는 적절한 지물을 필요로 했고, 어떤 초능력자는 산이나 강 등의 지형이 있을 때 거대한 시너지를 냈다.

전투에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는 것이 승률이 높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지형 설정 기능 개발자는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었다. 전투 구역 전체를 일종의 가상 공간으로 설정한 후, 본인에게 유리한 맵을 직접 만들어 변이종과 전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원하는 지형지물을 자유롭게 선택하면 구역 전체에 적용되어 생성되었다. 마치 게임 같은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형지물은 이연과 같은 계열인 실체화 능력의 일종으로, 홀로그램 따위가 아닌 진짜였다. 아쉽게도 이것을 만든 개발자는 현재 종적을 감추었지만……. 괜히 위원회 영감들이 이연의 등장에 열광한 게 아니었다.

‘활용도가 하늘과 땅 차이긴 하지.’

빈 종이 뭉치가 들어 있는 슬링백을 다소 시무룩하게 바라본 이연이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는 것을 언제까지고 징징거릴 시간은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제산오는 어떤 형태의 필드여도 관계없을 것이다. 금속과 광물은 인간이 발을 밟고 선 땅이라면 어디든 넘쳐났으니까.

그러나 이연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즉각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물리적 수단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긴박한 전투에 적합한 인재는 아니었다. 원래였다면 2급 변이종 전투에 이연이 동원될 일은 영원히 없었다.

산오의 전투를 돕……는 것까지는 무리라고 쳐도, 최소한 짐은 되지 말아야 했다.

2급 변이종부터는 최소 무궁화 4단이 여섯 이상은 달려들어야 대응이 가능하다. 처치가 아니라 대응이었다.

산오가 이연까지 보호하면서 싸울 여력은 안 될 것이다. 사실 그가 보호라는 걸 해 줄지도 미지수였다.

그래서 이연은 자신에게 유리한 지형지물을 설정하기로 했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애물이 많고 시야 확보가 편하도록 높은 폐건물이 늘어서 있는 블록. 추가로 산오가 대형 변이종과 편하게 전투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도로.

[지형 설정을 완료하시겠습니까? 한번 설정한 지형은 퇴장 전까지 변경이 어렵습니다.]

이연이 알아서 제 살길을 찾는 게 당연했다. 겸사겸사 전투에 도움이 되면 더 좋고.

“네.”

우웅, 하는 진동음과 함께 지축이 얕게 흔들렸다. 투명한 벽 너머로 이연은 전투 구역에 높고 듬성듬성한 건물이 올라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반대편을 바라보니 두꺼운 철 밧줄과 싸우는 거대한 푸른 짐승이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타이밍이 적절했다.

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산오가 전투 구역에 생성된 도로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땅이 깊이 패긴 했지만 별다른 상처는 없어 보였다.

산오는 전투 구역에 들어오자마자 상황실에 있는 이연을 확인했다. 이연의 반응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게 전부였지만, 그에게는 확실히 보였을 것이다.

청호가 산오를 쫓아 뛰어들어 오는 것 역시 금방이었다. 뒤따라온 무리불새들이 응원하듯 상공을 빙빙 돌았다. 청호가 완전히 구역에 입장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연이 설정 패드를 건드렸다.

[보호벽을 가동합니다. 한번 발동하면 해제 전까지는 출입구가 봉쇄되니 유의 바랍니다.]

경고와 함께 구역의 외곽에 벽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웬만한 충격으로는 부서지지 않을 테니 시민 안전은 확보된 셈이다. 이연이 상황실을 나와 가까운 건축물 쪽으로 뛰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경계가 세워진 것을 보자마자 산오의 기세가 달라졌다. 이연의 집을 공격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굵기의 커다란 가시들이 바닥을 뚫고 자라났다. 그것들은 번개 같은 속도로 청호의 다리를 공격했으나, 청호가 세차게 앞발을 휘두르자 힘없이 부러졌다. 산오의 가시가 단순한 나무 쪼가리로 만들어진 건 아니었을 텐데 굉장한 위력이었다.

산오는 공격이 막혔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청호에게 별다른 타격이 없을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던 것 같았다. 순식간에 산오의 주변에 긴 창이 여러 개 생겨났다. 몸체가 길고 가늘어 마치 커다란 이쑤시개같이 보이는 창은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몰라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정체를 가늠할 새도 없이 창들은 뒤로 조금 당겨지나 싶더니 폭발적인 기세로 일제히 발사되었다. 멀리 떨어진 이연에게조차 창들이 나아가며 공기를 찢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살벌했다.

콰앙! 쾅!

커다란 충돌음이 연이어 들렸다. 탁한 먼지 사이로 반짝거리는 창들이 방향을 잃고 바닥에 처박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산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짙은 눈썹이 내려오며 눈매에 음산한 그늘이 졌다.

놀랍게도 청호는 펄쩍펄쩍 뛰고 발을 휘두르는 정도로 그 많은 창을 전부 막아 냈다. 이 변이종이 버스만 한 덩치라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신묘할 정도로 날랜 움직임이었다.

최상급 변이종이 괜히 최상급인 것이 아니다. 상식을 넘어서는 신체 능력이었다. 건물로 막 진입한 이연이 훤히 뚫려 있는 창문 자리에 서서 전투를 살폈다.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청호가 별안간 펄쩍 뛰었다. 거친 움직임에 서 있던 자리의 바닥이 움푹 패고, 종잇장처럼 구겨진 바닥에 울퉁불퉁한 물결이 졌다. 뛰어오르는 청호의 발톱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이연은 금세 상황을 눈치챘다. 산오가 땅에 청호의 발을 파묻어 움직임을 봉쇄하려고 한 것이다.

수작을 알아챈 청호도 상당한 판단력이었다. 산오의 권역에서 벗어난 호랑이는 하늘을 날듯이 체공했다. 짐승의 탈을 쓴 주제에 우아하게까지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정확히 계획한 대로였다.

산오의 머리 위를 약한 바람이 휘감나 싶더니 주변의 바닥이 들려 일어났다. 아스팔트와 그 아래 무언가까지 몽땅 끌어모아 만들어진 것은 거대한 투창이었다. 중세 마상 시합에서 쓰던 것처럼 뒤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모양의 창은 산오의 세 배도 훨씬 넘을 정도로 컸으나, 공중에 떠 있는 집채만 한 호랑이를 잡기엔 딱 제격이었다.

상체가 뒤로 한껏 젖혀지고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얼굴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초록색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눈이 깜빡인 순간, 그대로 투창이 날아갔다.

청호가 이 흉악한 무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무시무시한 파열음이 구역 전체에 메아리쳤다. 공중에 있던 변이종은 투창의 기세에 밀려 함께 날아가 처박혔다. 거리에 일렬로 서 있던 폐건물 중 하나가 무너지며 크고 작은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낙하지점에서는 엄청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후로는 정적이었다.

“…….”

됐나? 이연이 조심스레 산오에게로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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