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5화 (5/250)

#5

빠르게 로딩이 끝난 페이지에 이연의 시선이 박혔다. 차금의 분기 실적란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마우스 휠을 내리던 이연은 페이지 끝에 가서 잠깐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올려서 정독했다.

몇 번이나 스크롤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나서야 현실이 서서히 인식되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색소가 옅은 눈동자가 초점을 반쯤 잃었다.

임무 중에 하나가 완료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임무 하나가 신청해 놓고 기한이 지나 자동 포기 신청이 되어 다른 회사에게 넘어간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똑똑히 기억하는데, 이건 이연이 이미 완료한 임무였다. 이거 전산 오류 아니야? 심지어 내용까지 정확하게 생각난다. 8급 변이종을 포획해서 넘겨주는 거였고, 붙잡은 후에 혜강에게 인계만 부탁했…….

“…….”

걔가 그럴 애는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연이 조용히 휴대폰을 들었다. 주소록 최상단에 위치한 동업자의 번호는 오래 찾을 것도 없었다. 적막한 사무실에 통화 연결음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잠시 후, 경쾌한 목소리가 등장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

두 번, 세 번 걸어도 결과는 같았다. 원래 자다 깨서 전화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예민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전화 거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번 분기 실적 마감은 모레. 아무리 최하등급이어도 일주일 이상 걸리는 임무가 간혹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오늘 신청하는 것도 빠듯했다. 전산 오류면 정말 좋겠지만, 아니면 실적 미달이다. 손 놓고 자는 인간 연락만 기다렸는데 이쪽 실수로 임무 완료가 되지 않은 거면 그냥 페널티만 누적되는 거였다.

그럴 바에야 아예 전산 오류가 아니라는 가정을 하고 당장이라도 임무를 하나 하러 가는 게 합리적이다. 기간 내에 하면 좋은 거고, 못해도 다음 분기 실적으로 넘어가긴 하니까.

알긴 아는데.

‘추가 업무를?’

그 정도로 성실하게 임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모레 시작해도 되는 일을 지금 또 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이연이 액정을 바쁘게 터치할수록 질척거리는 연락 기록이 쌓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이러다 얘가 지금 일어나면 금상첨화고……. 실낱같은 희망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안타깝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둘러야겠군.”

부정과 분노, 타협을 거쳐 우울 단계에 다다른 이연의 정신을 산오가 깨웠다.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은 남자는 팔짱을 끼고 놀리듯이 중얼거렸지만, 추가 업무라는 거대한 시련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어서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얼굴로 망연히 서 있던 이연이 드디어 현실을 수용했다. 미적거리며 공고 페이지에 접속하자 아니나 다를까, 쥐뿔같은 임무만 몇 개 남아 있었다.

보람도 없고, 과정은 귀찮고, 보수도 거의 없는 일이 대다수였다. 평소의 이연이었다면 쳐다도 안 봤을 목록이다. 당연했다. 이연은 늘 여유롭게 분기 임무를 마쳤으니까!

“아무거나 빨리 골라.”

임무는 한번 신청하면 취소해도 기록이 그대로 남아 되도록 신중하게 고르는 게 좋았다. 남은 고만고만한 쓰레기 임무 중 그나마 제일 괜찮은 걸 고르려고 애를 쓰는데, 옆에서는 사람 마음도 모르고 성화였다. 기다려 봐, 나도 생각할 시간이……. 그렇게 중얼거리던 이연은 문득 깨달았다.

지금 그의 옆에는 무급 노동자 제산오가 있었다.

무려 랭킹 1위의 치트키가.

뭘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초능력으로 도와주겠다는 무궁화 5단을 두고 오래도록 고민하는 건 사치다. 뇌를 멈춘 이연이 아무거나 클릭했다. 곧 휴대폰으로 임무 신청 절차가 끝났다는 알림이 왔다. 언제 어디서든 변이종 대응을 가장 높은 순위로 치는 동네다 보니 관련 행정 업무만큼은 빠릿빠릿했다.

“가자.”

장소 안내를 훑은 이연이 일어서서 행거에 걸어 두었던 커다란 슬링백을 집어 들었다. 고글을 목에 걸며 고갯짓하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산오가 느릿하게 일어섰다.

임무 위치는 내용을 보지도 않고 신청한 것치고는 꽤 가까운 지역이었다. 주택가 근처였는데, 이연이 맡을 수 있는 변이종 관련 임무라고 해 봤자 위험도가 극히 낮았으므로 인명 피해 걱정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근처 지하철역으로 향하는데, 묵묵히 따라오는 듯하던 산오가 금세 짜증을 냈다.

“어디까지 가는 거냐.”

하여튼 인내심이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놈이다.

“아니. 지하철…….”

당연한 듯 말하던 이연의 말꼬리가 급격히 흐려졌다.

“……타려고 했는데.”

이 녀석……. 지하철이 뭔지는 알겠지?

집과 사무실이 가까운 관계로 이연은 차를 따로 사지 않았다. 임무야 뭐, 대중교통 타고 갔다가 많이 피곤하면 택시 타면 되는 거고……. 그게 돈도 덜 들었다. 도시 시설이야 튼튼하고 안전하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초호시는 시민의 안전에 대비해 건물이나 시설 설계 허가가 다른 지역의 몇 배로 까다로웠다. 그중 가장 돈을 들이는 곳이 대중교통 시설이었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역사야 말할 것도 없고 시내의 모든 버스 정류장이 투명한 박스 형태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방식이었다.

변이종 출현 알림 시스템도 잘되어 있고, 시설 외장재 역시 타 지역과 비교도 안 되게 비싸고 튼튼한 재료를 쓴다고 한다. 재난 대피 훈련 시 대피 권장 구역을 지하철 역사나 버스 정류장으로 지정할 정도였다. 시설 분포 중요도도 높은 탓에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의 거리 간격 및 배차 간격은 수도권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안전하고 편리한 시설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만큼이나 대중교통이 무시무시하게 발달되어 있는 도시에서 세금을 그만큼 내면서—초호시는 초능력자 소득 세금을 타 지역보다 낮게 걷는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많이 뜯긴다! 인구는 수도권 절반도 안 되면서 수도권만큼 시설을 많이 지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공영 시설 이용도 안 하는 건 소득의 낭비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연 같은 낮은 등급의 초능력자, 혹은 일반인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본인의 안전에 자신 있는 고등급의 초능력자들은 승용차를 선호했다. 당연하다. 아무리 빨라도 대중교통이 자차보다 편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맨몸으로 혼자 전쟁터에 떨어져도 이겨서 살아 돌아올 제산오는 아예 대중교통이란 것의 존재 자체를 모를 수도 있었다. 산오의 상식 능력을 얕본 이연이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그…… 지하철이라고 있거든.”

짙은 개무시의 기운을 알아차린 산오의 시선이 스산해졌다. 그러나 산오는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행동으로 실행했다.

두꺼운 팔이 이연의 허리를 휘감았다. 힘이 어찌나 세던지 단순히 잡아당기는 데에도 마른 몸이 크게 휘청였다.

“헉, 뭐……”

이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두 사람의 발밑에 있던 보도블록이 주변으로 흩어지는가 싶더니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갑자기 느껴지는 중력에 저도 모르게 산오의 팔을 부여잡은 이연이 놀란 눈으로 두리번대자 그들이 밟고 있는 동그란 바닥이 땅 아래로 파고들며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이런 표현이 바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지하로 다니는 엘리베이터 같았다.

얼추 아래로 내려갔다 싶자 바닥은 방향을 자유롭게 바꾸어 전진하기 시작했다. 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땅굴 엘리베이터는 마치 투명한 막이라도 쳐져 있는 것처럼 흙이 튀는 일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지나간 곳은 언제 뚫려 있었냐는 듯 다시 매끈하게 메꿔지고 있었다. 난데없는 지층 탐험에 이연이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자 산오가 뻐기듯 말했다.

“광물이 없는 곳은 없지.”

제산오가 왜 이렇게 재수 없이 컸는지 알겠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뭔들 꿀리겠는가. 이연의 집에서 사무실까지 걸어올 때 얌전히 따라온 것도 기적이다.

“와…….”

그러나 산오가 거만하고 나발이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연이 자신을 잡고 있는 거대한 꿀단지를 한번 바라보았다. 비록 힘이 무식하게 세서 허리가 짜부라질 정도였지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이건 자차와는 차원이 달랐다.

개인 지하철이라니.

“산오야.”

한층 친근해진 호칭에 산오가 눈알만 돌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절대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눈빛이었다. 이연이 재빨리 정정했다.

“제산오야.”

어차피 당분간은 좋든 싫든 제산오와 함께 행동해야 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인 건 확실한데, 이쪽에서는 그걸 물어보지도 못할 정도로 위계 차이가 명확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앞으로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혹시 아는가. 친해지면 이연만의 엘리베이터 보이가 되어 줄지. 꿈은 크게 가져야 했다.

이연의 강점은 어떤 상황에서든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불규칙 변수가 특히 많은 이 도시에서 살아가기에 퍽 괜찮은 성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

“사장님이라고 부를래?”

대신 눈치는 조금 없었다. 눈동자에 살기가 모이는 걸 발견하고서야 별로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연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우리 근로 계약서를 쓸까?”

“필요 없어.”

4대 보험은 괜찮은가 보다. 이연은 확인차 한 번 더 물었다.

“은혜는 언제까지 갚는 건데?”

산오는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어딘가로 나아가던 엘리베이터가 방향을 바꾸어 위를 향해 올라갈 때쯤에야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인분이 필요해.”

“……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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