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슨 능력?”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은 이연의 질문에 산오 근처의 가시들이 꿈틀대며 자기주장을 했다. 묘하게 경쾌해 보이는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연의 뇌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니까…… 제산오가 은혜를 갚을 겸 자기 능력을 써서 날 도와주겠다고.
……제산오가 초능력 알바를 지원했다고?
문장을 구성하는 모든 단어의 현실감이 떨어졌다. 물론 그의 능력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 효율이 말도 못 하게 좋겠지만, 효율의 범위에 정신 건강이 들어간다면 차라리 돈을 주는 게 백 배 이로울 것이다.
애초에 제산오 정도의 인력을 이연이 부려 먹는 것 자체가 낭비였다. 제산오는 변이종 관련 임무 중에서도 위험하다고 소문난 최상급 임무를 주로 처리하고 있었고, 도시와 시민의 안보 차원에서도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너 하던 일은?”
“사람은 많아.”
변이종 출현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사고다.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이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책임하게 굴지 마.”
내내 소심하게 굴던 그치고는 강경한 말이었다. 질책에 산오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회사가 바쁜가?”
“…….”
대부분 한가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 24시간 내내 사람을 부려 먹지 않는 이상 산오는 비는 시간에 제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였다. 뒤늦게 깨달은 이연이 머쓱하게 극단적인 본인의 사고방식을 반성했다.
악덕 고용주가 조용해지자 산오는 집을 원상 복구 시켰다. 거실을 빽빽하게 채운 가시들이 스르륵 가라앉는 광경은 영화 같았다. 이를테면 카운트다운 1초를 남기고 핵폭탄을 막는 데에 성공하는 장면이라든가. 정말 테러를 막은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 들긴 했다.
‘아니지. 제멋대로 집에다 가시를 박은 놈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잖아.’
분위기에 취해 상황을 대강 왜곡해서 넘어갈 뻔한 이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집주인이 본인의 정신머리를 재단장하는 동안 말끔해진 집 안을 가볍게 둘러본 산오가 이내 총평을 내렸다.
“집이 누추하군.”
“…….”
이연의 집은 엄청나게 크지는 않지만 그다지 작은 편도 아니었다. 혼자 사는 남자가 투룸이면 괜찮은 거 아닌가? 아무래도 제산오가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소문은 진짜인 것 같았다. 무려 무궁화 5단이니 몸값이야 부르는 게 값이긴 하겠지만…….
이연이 억울하고 기가 막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동안 아무렇지 않게 남의 보금자리를 입으로 공격한 남자는 훌쩍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손짓으로 자연스럽게 찬장이나 서랍 등을 열어 보는 것이 제집인 양 자연스러웠다. 객관적인 상황은 웬 놈이 집을 뒤지는 건데 이상하게 부모님이 불시에 자택 검사를 하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뭐 찾는 거라도?”
이제는 대답도 없었다. 진짜 랭킹 1위만 아니었어도……. 이연이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한참 집을 휘젓고 다니던 산오는 드디어 탐색을 끝냈는지 거실 소파로 다시 돌아왔다.
“혼자 사나?”
눈 뜬 제산오와 함께 있기 시작한 지 10분째, 이연은 근본 없는 질문에도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되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연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그런 것치고는 식량이 넉넉한데.”
“……많이 먹어서?”
진짜인데 별로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연이 먹는 것에 비해 마른 것은 맞긴 했지만,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뭐에 쓴다고? 억울했으나 난데없이 위장 자랑을 할 순 없었으므로 화제를 돌리는 것으로 타협했다. 진정성을 보여 줄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후일을 기약한 이연이 시간을 확인했다. 일어나자마자 가시가 온 집 안에 깔리며 그를 붙잡은 덕에 출근 시간이 촉박해졌다. 마침 산오가 아르바이트를 자원했으니 데리고 가면 될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봐. 출근 준비하고 올게.”
“아침은.”
이연이 멈칫하며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친놈인가? 정상적으로 은혜를 갚는 것까지는 기대도 안 했지만 처음 와 보는 집에서 아침을 요구하다니. 강철로 변할 수 있다고 낯짝을 강철로 만들 필요까진 없는데…….
“난 아침 안 먹어. 속이 더부룩해서.”
아침 차려 줄 만한 실력도 없었다. 이연의 단호한 의사에 한참 침묵이 흘렀다. 강렬한 미련이 느껴지는 구간이었다. 길고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산오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배워.”
“…….”
험난한 생활이 벌써 예상되기 시작했다. 이연은 불길한 예감을 억지로 외면하며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 흐르는 물소리가 경쾌했다. 따뜻한 물이 온몸에 닿으니 긴장으로 지쳤던 심신은 물론이고 어제 과도한 운동으로 생겼던 근육통까지 사르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 따뜻하고 포근한 곳에서 천년만년 있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나가기 싫어 최대한 미적거리다가 욕실을 나오는데,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던 산오와 대뜸 눈이 마주쳤다.
“…….”
이연은 혼자 살았다. 혼자 사는 사람은 욕실에 굳이 챙겨입을 옷가지를 들고 가지 않는다.
“…….”
산오의 시선이 이연이 대충 닦아 내리고 있던 배 부분으로 향했다. 조그만 수건은 아랫배와 그 아래를 아주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눈치도 없는 물방울이 명치를 타고 내려가다가 수건에 흡수되었다.
“…….”
“…….”
노곤하게 풀어지던 정신머리가 갑자기 번쩍 들었다. 가시 천국이던 조금 전보다 지금이 더 가시방석 같았다. 지옥 같은 정적을 체험한 이연이 조용히 백스텝을 밟고 욕실로 회귀했다. 잠시 후 다시 나온 이연은 수건으로 아래를 단단히 감은 채였다.
“……너도 씻어. 비 때문에 찝찝하잖아.”
산오는 금방이라도 화장실에 다시 처박힐 것 같은 이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곧 일어섰다. 산오가 화장실 쪽으로 다가가자 이연이 잽싸게 안방 쪽으로 도망쳤다. 후다닥 달려가는 하얀 다리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이 잠깐 들러붙었다. 곧 문소리가 들렸다.
안방으로 들어와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은 이연에게는 또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망연해 보일 정도로 공허한 눈빛이 옷장을 훑었다. 맨몸으로 비를 쫄딱 맞은 산오가 여분 옷이 있을 리가 없으니 씻고 나서 입을 다른 옷을 마련해 주려고 했는데.
“…….”
아까 잠깐 위협당하느라 가까이 서 본 바로 산오와 저의 크기 차이가 상당했다는 점이 걸렸다. 신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어깨나 허리도 굉장한 차이가 날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이연이 큰 사이즈의 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상의 정도야 어찌어찌 해결이 되겠으나, 하의는 어림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 큰 남자를 팬티 보이게 하의 실종 패션으로 다니게 할 수도 없고, 아니, 잠깐만.
……팬티는 어떡해?
갈수록 태산이었다. 이연은 옷장을 샅샅이 뒤졌으나, 새 속옷이 갑자기 어디서 운 좋게 나타날 리가 없었다. 아까 보니까 코트 기장이 길던데, 좀 찝찝하겠지만 그걸로 어떻게…… 하라고 하면 내 집이 다시 가시밭이 되겠지? 현명하게 판단한 이연이 냉큼 바바리맨 권유 생각을 접었다.
그래도 팬티 걱정 하면서 구석구석 뒤진 결과 허리가 늘어난 조거 팬츠를 하나 발견했다. 전에 놀러 온 손님이 집에서 입다가 버리고 간 옷인 것 같았다. ……세탁했던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옷장에 처박혀 있던 옷이 비에 젖었다 그대로 마른 바지보다는 나을 터였다.
사이즈를 재 보니 이연이 입고도 허리에 주먹 한 개는 더 들어갈 만큼 컸다. 이 정도라면 산오에게 얼추 맞을 것 같았다.
이거면 됐어. 팬티는…… 그냥 오늘만 노팬티 하라고 하자. 내가 입던 걸 줄 순 없잖아. 본인도 싫을 거라고. 이연은 떨떠름하게 합리화하며 찾은 옷을 화장실 앞에 두고 다시 안방으로 도망갔다. 방금 전 같은 민망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배려였다.
자신의 집에서 갇힌 기분을 느끼며 하릴없이 휴대폰이나 만지작대던 이연은 얇은 벽 건너편에서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부스럭대는 소리—두 소리 사이에는 다소 시간 차가 있었으나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걸어가 소파에 털썩 앉는 소리까지 확인하고 벌떡 일어섰다. 경쾌하게 문밖을 나서자 소파에 태만한 자세로 앉아 휴대폰을 하는 산오가 보였다.
원래 목적은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이제 슬슬 나가자는 말을 하는 거였는데, 산오를 보자마자 이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노팬티 구역으로 향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에 거만하게 올려다보던 짙은 눈썹이 슬쩍 들렸다.
“…….”
그러든 말든 이연은 충격적인 정황에 눈을 깜빡였다. 물론 눕듯이 앉아 있는 산오의 자세 탓도 있겠지만, 얇은 천이 중력의 저항을 이기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바지가 회색인 탓도 있겠지만.
……인간인가?
문화 충격 수준이었다. 순간적으로 능력을 썼나 싶었지만, 이딴 데에 능력을 쓸 정도로 제산오가 이상한 놈은 아닐 것이다.
사정없이 떨리는 홍채를 갈무리하는 데에 실패한 이연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어두운 녹색 눈과 딱 마주쳤다. 심드렁한 시선은 이연의 눈을 향해 정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얌전히 다물려 있던 잘생긴 입술이 빈정거렸다.
“변태.”
“…….”
현행범이었다. 이연은 순순히 눈을 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