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 넝쿨째 굴러온 히든카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이연은 걷다 말고 문득 멈춰 섰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골목길 사이에 무언가 널브러져 있었다. 가로등이 비추는 범위에 간신히 든 형체는 아주 희미한 빛만을 반사했지만, 이연은 한눈에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사람이었다.
“……웬 집채만 한 게…….”
쓰러져 있네. 중얼거림은 따갑게 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묻혔다. 잠깐 고민하던 이연은 걸음을 옮겼다. 새까만 우산이 유독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좁았다. 주변의 쓰레기 봉지를 헤치고 금세 덩어리 앞에 선 이연이 허리를 숙여 쭈그려 앉았다. 골목 벽에 간신히 기대앉아 있는 남자는 머리꼭지가 보일 정도의 바닥에서도 크기만으로 위압감이 풍겼다. 아마 완전히 일어선다면 이연의 눈높이를 훌쩍 넘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사지가 꼭 쓸모를 다해 버려진 목각인형 같았다. 그러나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의 신원을 알면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터였다.
제산오.
국내 랭킹 1위, 초능력자였다.
삐빅. 인고의 시간 끝에 문이 열렸다. 그토록 원하던 귀가임에도 이연은 문 앞에서 낑낑대느라 바로 현관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부득불 끌고 온 짐 덩어리 때문이었다.
의식 없이 축 늘어진 신체도 천 근 같은데, 물에 젖어 무겁게 늘어지는 옷가지까지 피로를 가중했다. 이게 비인지 땀인지 알 수가 없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이연이 투덜댔다. 급작스러운 봉사활동 덕분에 우산은 길바닥에 기부한 지 오래였다.
두툼한 흉통을 봤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의식을 잃고 늘어진 거대한 몸뚱어리의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근력 운동은커녕 하루에 오천 걸음도 걸을까 말까 한 이연이 이런 걸 근 500m 가까이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정신력과 근성의 승리였다.
‘이제 어쩐다.’
이연은 현관에 다 구겨지지도 않아 집 안쪽으로 삐죽 머리를 들이밀 정도로 커다란 덩치를 흘끗 바라보았다. 신경이 쓰여서 데려오긴 했지만, 하고 보니 괜한 짓을 했나 싶은 후회가 얕게 밀려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산오였다.
“……우리 집에 제산오가 다 오네.”
멍하니 중얼거린 이연이 현관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제산오에 대한 기본 신상 정보는 이 도시, 초호시의 시민이라면 전부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제산오는 국가 영웅 대우를 받는 초능력자 최고 등급인 무궁화 5단이었으므로.
초호시.
수도권보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 이 지역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예외자치시다.
어느 날, 대한민국의 저공에 크고 붉은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블랙홀과 비슷하게 생긴 구멍은 세로로 길게 서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어떤 통로 같았다.
재앙의 시작은 새빨간 구멍을 벌리며 짐승의 손 같은 것이 튀어나왔을 때였다.
그것은 지구의 어떤 생물도 아니었지만, 동시에 여러 생물을 닮아 있었다. 강하고, 빠르고, 단단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키메라라고 불렀다. 학술적으로는 맞지 않는 호칭이었으나 미디어 매체에서 그간 상상한 ‘괴물’의 모습과 부합한다는 것은 명확했다.
인류 최초의 변이종 등장이었다.
순식간에 구멍이 있던 곳은 난장판이 되었다. 울고, 소리 지르고, 도망치는 사람들로 거리는 황폐해졌다. 그나마 변이종의 개체 수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변이종 중에는 건드리지 않으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종류도 있었지만, 먼저 사람을 공격하는 종도 분명히 있었다. 근방의 경찰들이 전부 동원된 끝에 호전적인 것들을 간신히 가두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들을 어떻게 죽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변이종은 웬만한 타격으로는 다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일부 종은 재생 능력이 있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재난 상황에 군대를 동원하니 마니 하는 논의가 긴급하게 오갈 때였다.
젊은 여자가 간헐적으로 변이종을 토해 내는 구멍 앞에 섰다.
급하게 다가오는 경찰들을 무시한 여자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별안간 주변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기묘한 상황에 사람들이 멈칫한 틈을 타 거대한 양의 얼음이 지표면에서 튀어나왔다.
얼음은 섬세한 문양을 그리며 구멍 주변을 감쌌다. 하얗게 얼어붙은 서리가 구멍 근처를 맴돌던 변이종에게 향했다. 순식간에 변이종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압도적인 고요 앞에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건 임시방편이다.’
단호한 말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곧 나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 모일 거야.’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인간의 한계 물리력을 벗어난 어떤 것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힘의 종류와 세기는 다양했고, 랜덤으로 발현되었다. 현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상임에도 모든 사람이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영화나 만화, 소설에서 흔하디흔하게 나오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초능력.
판타지는 현실이 되었다. 그것은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강력한 초능력을 가진 자들은 혼자서도 변이종을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고, 특히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은 변이종을 죽일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발 빠르게 국내에 등장한 초능력자 전원을 특별 소집 해 협조를 부탁했다. 이때 차출된 초능력자는 모두 무공 훈장을 받았다.
구멍을 아예 없애는 방법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긴급 연구 결과 구멍은 일종의 구심점이라고 판명되었다. 단순히 구멍을 봉쇄하는 걸로는 변이종의 출현을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적합한 힘을 가진 자가 책임을 지고 대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정부는 구멍의 어느 지역까지 경계를 치고, 새로운 지명과 권한, 그리고 의무를 부여했으며, 그 안에 초능력 관리청이라는 기구를 세웠다.
초능력자의 도시, 초호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사건 사고를 수십 년간 거친 후, 초호시는 자잘한 소동만 생기는 정도로 그럭저럭 안정되었다. 대한민국은 빠르게 초능력자의 존재를 수용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초능력자에게 최초의 붉은 구멍, 적공이 있는 초호시로 이주하기를 권장했다. 초호시에 거주하는 초능력자에게는 다양한 혜택이 있었고, 초능력자가 아닌 국민과 다른 의무는 딱 하나였다.
국가와 인류에게 위협을 끼치는 변이종을 간과하지 말 것.
초능력자들의 주 업무는 도시 안팎에서 날뛰는 변이종 처치다.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눈에 많이 띌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초능력자는 친근한 영웅이라는 인식으로 자리잡았고, 많은 사람들이 동경의 대상으로서 초능력자들을 선망하기 시작했다.
강하거나 개성적인 초능력자들은 많은 인기가 생겼다. 유명한 초능력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 이내 목록을 만들어야 할 만큼 많아졌다. 그들이 소속된 회사, 능력, SNS 계정, 심지어 입은 옷이나 걸치는 액세서리까지 대중들의 관심이 폭발했다. 초능력자가 일종의 엔터테이너 역할을 겸하게 된 것이다.
그런 현상이 심해질수록 누가 더 강한지에 대한 갑론을박도 치열해졌다.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으니 사는 데 하등 도움도 안 되는 것으로 매일매일 열을 올렸고, 걔는 뭐 때문에 안 될 것이니 네가 뭘 아느니에 대한 싸움은 일상이 되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모 대형 포털 사이트에 슬그머니 초능력자 랭킹 카테고리가 생겼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부여하는 단을 기반으로, 국내 개인 순위를 10만 위까지 정렬한 페이지였다.
랭킹은 업무 성과나 능력 평가 결과에 따라 매일매일 갱신되었다. 순위가 높다고 누가 보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초능력자의 능력 세기나 효용성을 설파하며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안달이었다.
실제 초능력자들 중에도 랭킹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이가 점점 많아졌다. 사실 대놓고 대형 사이트에 걸려 있는 자신의 순위를 신경 쓰지 않기란 참 어렵다. 그것이 자신의 업무 능력에 관련된 것이면 더 그렇다.
그러나 약 4년 전부터, 1위는 내내 부동이었다.
그게 제산오였다. 광물 변형 및 운용, 동기화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 1단에서 5단까지 있는 국가 초능력자 전용 계급 중 가장 꼭대기에 올라 있는 무궁화 다섯 송이짜리 단.
현재 시점에서 무궁화 5단은 제산오를 포함하여 9명뿐이었다. 국가에 등록된 초능력자는 100만 명 안팎. 그중 1단이 80만 명, 2단이 18만 명 이상이다. 3단 이상의 능력자는 고작 2만 명 안쪽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시무시하게 가파른 피라미드 구조였다.
제산오는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 업무 수행 활동을 먼발치에서 발견한 일반인이 짧은 영상으로 찍어 올릴 때가 있었다. 흐릿한 화질로 보기에도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에 가까워 보였고, 그 압도적인 무위 앞에서 감히 이견을 달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흉흉한 소문도 많고…….’
문득 불안해진 이연이 영 미덥잖은 눈길로 다시 쓰러진 남자를 흘깃 살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기본적인 정보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어 다른 초능력자들보다 훨씬 소문이 무성했다.
인격 파탄자라느니, 재력이 엄청나 전용기도 가지고 있다느니, 불로불사라서 삼백 살이 다 됐다느니, 재벌 가의 사생아라느니, 국가가 만들어 낸 인공 능력자라느니…….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극적인 소문에 관심이 가기 마련이라,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루머들도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제산오 본인이 딱히 대응하지 않아 더 그랬다.
그래도 크게 별일 있겠어. 오늘만 재워 주고 내일 아침에 바로 내보내면 되지. 이연은 가볍게 생각하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땀과 빗물로 범벅되어 고생한 자신의 신체에게도 이제 그만 자비를 내려 줘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