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관계의 정의 (15/16)

박래현은 옷장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서 내가 넥타이 매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그를 힐끗 보았다가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려 내 모습을 점검했다.

“요즘 윤준영이 왜 이렇게 멋을 낼까?”

박래현이 일어서 곁으로 다가오자 거울 속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연구 센터로 출근하면서부터 그는 바이어를 만난다거나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할 때 빼고는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단추를 한두 개 풀고 소매를 걷어붙인 캐주얼한 드레스 셔츠에 긴 다리가 돋보이는 팬츠를 즐겨 입었다. 정장을 입으면 냉철한 사업가처럼 보이는데 노타이 차림은 자유분방하고 여유 있게 보였다.

“향수는 누굴 유혹하려고 뿌린 거야?”

그는 내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크게 심호흡했다. 목으로 쏟아지는 숨결이 간지러워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단정한 외모와 세련된 옷차림은 영업 사원의 기본 에티켓이야.”

작년부터 다른 부서는 옷차림에 규제가 없어졌지만 내가 속한 영업 지원 팀은 사람을 자주 만나러 다녀야 해서 암묵적으로 정장을 입었다.

“네가 현장에서 뛰는 것도 아니잖아. 요즘 외모에 부쩍 신경 쓰는 게 수상해. 내가 모르는 애인이라도 생겼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박래현은 신중하게 넥타이핀을 골라서 내 넥타이에 꽂았다. 박래현이 넥타이를 하지 않아서 그가 쓰던 액세서리는 다 내 차지가 되었다. 고급스러운 옷에 세련된 장식품을 하고 다녀서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회사에서 패셔니스타가 되어 있었다.

“오늘 본부장님과 사람 좀 만나기로 했거든.”

“누구?”

“내가 말 안 했어? 제약 영업의 달인 선우진 MR1) 만난다고.”

“아, 오늘이었지?”

“어, 본부장님 왈, 내가 제안한 거라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대.”

“윤준영 눈 반짝이는 거 보니까 괜히 질투 나는데? 너 딴 맘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매일 듣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박래현과 나란히 침실을 나왔다. 문밖에서 별이와 쌍둥이들이 우릴 배웅하려고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별이는 올해로 다섯 살이 되어 조수아가 추천한 유치원에 서류를 넣어 둔 상태였다. 말썽꾸러기 쌍둥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서 곧 세 살이 된다. 두 아이는 성격과 체격이 영 딴판이어서 도저히 쌍둥이로 보이지 않았다.

박래현은 쌍둥이 둘을 한 팔에 안고 다른 팔에는 별이를 안았다. 내가 영업 지원 팀으로 부서를 이동한 후부터 박래현이 육아를 전담하다시피 해서 쌍둥이는 나보다 박래현을 더 따랐다. 거름을 주고 공을 들인 사람이 과실을 따 먹는 건 당연하지만 거의 1년을 배에 담고 다닌 내 공은 다 사라져 버린 듯했다. 다행히 별이는 어렸을 때 나와 함께한 시간이 많아서 아빠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서경아, 서현아. 준영 아빠한테도 뽀뽀해 줘야지.”

나는 박래현의 볼과 머리카락에 입술을 문지르는 쌍둥이들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볼에 보드랍고 축축한 입술이 닿았다. 엎드려 절 받기지만 이거라도 감지덕지 받아들였다.

“저희 다녀올게요. 오늘도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조 여사와 오 여사에게 쌍둥이를 맡기고 우리는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랐다. 앞 좌석에 앉아 있던 정우가 고개를 돌려 인사를 건네고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 차 뒤로 오승현이 따라붙었다.

오승현은 2년 전에 나와 같이 마케팅 리서치 팀으로 발령 났다가 영업 지원 3팀으로 함께 옮겨 갔다. 회사에 들어와서 일을 해 보니 제약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신제품 개발과 영업이었다. 현장 돌아가는 분위기와 사람들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려면 영업 지원 팀에서 일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대표에게 부서를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영업 지원 팀은 다른 부서보다 일이 많고 고되서 직원들이 노골적으로 피하는 부서였다. 반면 마케팅 리서치 팀은 지원자가 많아서 대표는 흔쾌히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선우진은 몇 시에 만나기로 했어?”

박래현이 오른쪽 다리를 포개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갈색 눈동자가 햇빛을 머금어 금색으로 반짝였다. 그의 눈이 보석처럼 아름다워서 나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 사람 일 끝나는 시간에 보기로 했어. 여덟 시쯤 될 거야.”

“오늘은 좀 늦겠네?”

“어, 그럴 거 같아. 많이 늦으면 전화할게.”

“꼬실 자신은 있고?”

“난 분위기만 띄우는 들러리야. 꼬시는 건 본부장님이 하실 거야.”

“그런 사람이 김 비서한테 선우진 뒷조사를 부탁해?”

“그래도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고 나가야 할 거 아냐.”

정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능력이 뛰어난 친구였다. 다년간 박래현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는 지금 JS제약 대표인 지승현에게 훌륭한 비서가 될 수 있는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그중 하나가 다른 사람 뒷조사를 완벽하게 하는 거였다. 나는 정우에게 선우진의 자료를 부탁했고 정우는 선우진에 관한 온갖 정보를 물어다 주었다.

“나도 꼬신 실력인데 누군들 못 꼬시겠어.”

박래현은 웃으면서 내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회사에 피어싱을 하고 다닐 수 없어서 피어싱은 주말에 집에서만 했다. 한번은 월요일 아침에 깜박 잊고 그대로 출근했다가 직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2주일 뒤면 우리 만난 지 딱 5년 되는 거 알아?”

“…응.”

“혹시 다른 알파 페로몬 맡게 되면 나한테 즉시 보고해. 그냥 넘겼다가는 너도 가만 안 둬.”

“알았어. 대신 형도 나한테 알려 줘야 해?”

5년을 꽉 채우도록 자기 페로몬에만 반응하는 날 보면서도 박래현은 불안한 심경을 종종 내비쳤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우리 둘 중에 나만 흔들릴 사람으로 여겨졌다. 되레 유혹은 나보다 박래현이 더 많이 받을 것이다. 수려한 외모에 독보적인 재력을 갖춘 박래현은 오메가들의 시선을 끌 모든 조건을 지니고 있다. 그가 유부남이란 사실은 야망이 큰 오메가들에게 그다지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박래현이 한 오메가의 구속에서 풀려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점이다.

반면에 나는 오메가보다는 알파나 베타에 가까운 외모를 하고 있어서 내가 페로몬을 내보내며 먼저 유혹하지 않는 이상 나를 오메가로 봐 줄 알파는 거의 없었다. 내가 다른 알파를 유혹할 일은 없을 테니 박래현의 걱정은 쓸모없었다. 나는 각인 때문이 아니라 박래현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각인이 풀리더라도 영원히 박래현에게만 속해 있을 것이다.

“일 끝날 무렵에 전화해. 내가 데리러 갈게.”

“뭐 하러 그래? 오승현 씨 차 몰고 왔잖아.”

박래현은 팔을 뻗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그는 아침에 헤어질 때 늘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귀걸이가 없어서 허전해. 대신 이거라도 하고 있어, 절대 풀면 안 돼.”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이 달린 펜던트를 꺼낸 박래현이 나를 안듯이 두 팔을 뻗어 내 목에 펜던트를 걸어 주었다. 그는 펜던트가 보이지 않게 드레스 셔츠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박래현의 손목을 잡아 그의 손바닥 오목한 곳에 입술을 묻었다.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박래현이 고개를 숙여 입술에 키스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

“응. 형 집에 들어갈 때 문자 해.”

“알았어.”

정우는 사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나를 내려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나와 박래현 관계를 들키지 않으려는 내 의지의 반영이었다. 나는 사옥에 들어가기 전에 사옥 옆에 웅장하게 서 있는 연구 센터로 눈을 돌렸다. 바이언스 연구 센터는 이 세계와 단절된 다른 세상 같았다. 건물 구조와 생김새가 독특할 뿐만 아니라 워낙에 보안이 철저한 곳이어서 주차장부터 연구실까지 겹겹이 경비가 삼엄했다.

정우 말에 따르면 연구소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천재들이 우글거렸다. 그들은 외계인 같아서 자기들끼리나 말이 통하지 평범한 자신과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고 했다. 연구원들과 섞여 있으면 박래현이 그나마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인다는 게 정우 의견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파일을 정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인사를 받아 주었다.

“준영 님도 좋은 아침입니다.”

처음 계획 대로 나는 박래현과 결혼한 사실을 숨긴 채 회사에 입사했다. 대표의 도움을 받아 해외 유학파로 신분 세탁을 했더니 누구도 혈연과 지연을 이용해 내 과거를 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생소한 대학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학부 사람들에겐 당분간 육아에 전념한다고 얘기해 두었다. 이제 박래현의 배우자 이름이 밝혀져도 사람들은 나를 동명이인으로 생각하지 같은 인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직원들에게 거짓말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며 일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험한 일이 많은 영업 지원 팀 특성 상 내 정체가 발각되면 특혜를 받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르면서 일을 배우고 싶지 편하게 탁상공론을 즐길 마음은 없었다. 신분을 세탁한 부작용으로 이따금 프러포즈를 받아 곤란한 상황에 처하긴 했지만 미국에 애인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단호하게 거절했다.

“준영 님,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완전 멋진데요?”

나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영업 지원 2팀 정혜주가 환하게 웃으며 내 옷차림을 칭찬했다.

“오늘 중요한 분과 미팅이 있어서요.”

“아, 선우진 MR 만난다고 했죠?”

“네.”

정혜주가 내 쪽으로 상체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일이 성사되면 우리 팀 상사들 열 좀 받겠는데요? 요즘 들어 계속 지원 3팀한테 밀리고 있잖아요.”

영업 지원 팀은 타 부서와는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같은 목표로 일하고 있지만 일별, 월별 실적이 바로 눈에 보이는 부서이다 보니 실적을 올리려고 물 밑에서 경쟁이 치열했다.

총 열 팀으로 구성된 영업 지원 팀은 본사 건물 7층을 통째로 사용했다.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여섯 팀이었는데 사세를 확장하면서 인원이 가장 많이 늘어난 곳이 영업 지원 팀이었다. 내가 속한 지원 3팀은 서울의 두 구역을 관리하고 있다. 대형 종합 병원이 세 곳이나 밀집해 있어서 영업 지원 팀 중에서도 일이 제일 많았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지원 2팀 팀장이 출근하자 나와 정혜주는 입을 다물고 자기 일로 돌아갔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려온 나는 컴퓨터를 켜 어제 각 지점에서 올라온 계약 상황과 특이점들을 점검했다. 영업 지원 팀은 비수기엔 성수기를 준비하느라 바쁘고 성수기는 성수기라서 바빴다. 그래서 아홉 시 출근 다섯 시 반 퇴근은 다른 부서에만 해당하는 정책이었다.

회사는 영업 지원 팀 직원들이 무리하지 않도록 팀을 늘리고 직원을 충원했으나 이상하게 그만큼 일이 늘어나 야근이 잦았다. 처음 부서를 이동했을 땐 하루에 적어도 다섯 번은 후회했다.

그러나 남이 등 떠밀어서 옮긴 게 아니라 내가 원해서 옮겼기 때문에 정우를 제외하면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박래현한테 말하면 부서를 옮기라고 할 게 뻔해서 조금만 더 참아 보자며 나를 다독였더니 이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나는 담당하는 지점에서 보내온 자료를 확인하면서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점장님, 본사 윤준영입니다.”

- 준영 님, 좋은 아침입니다. 보낸 자료는 다 확인했어요?

“네, 어제 실적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요즘 비염 치료제랑 기관지염 치료제가 잘나가네요? 물들어 올 때 노 젓는다고, 더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겠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지원 요청하세요.”

- 우리 회사 제품이 워낙 뛰어나잖아요. 의사들이 우스갯소리로 이러다간 병원 문 닫을지 모른다고 처방 안 해 주겠답니다.

비염 치료제와 기관지염 치료제는 박래현이 5년 전부터 심혈을 기울인 작품으로 작년 봄에 출시한 오리지널 신약이었다. 제네릭 제품이 쏟아지고 있지만 현재 국내에서는 점유율 43.7%로 그 분야에서 1분기 처방실적 1위를 질주 중이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기관지염과 폐암 발병률이 높은 중국에서도 메가 히트를 치고 있어서 매출이 어마어마했다.

박래현이 여사님들에게 별이와 쌍둥이를 완전히 맡기고 연구하는 시간을 늘렸다면 그는 더 많은 제품을 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10대였을 때부터 연구실에서 살았던 박래현은 연구와 육아를 병행하는 지금 생활이 무척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런데 제가 요청한 자료는 아직 안 들어 왔네요. 더 기다려야 하나요?”

- 그건 이번 주 안에 작성해서 보내드릴게요. 요즘 바빠서 일이 밀려요.

“제품 피드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시잖아요. 제가 내일 다섯 시에 지점 찾아갈 테니까 그때까지 정리해 주세요.”

- 하여튼 성질 급한 건 알아 줘야 해. 알았어요, 내일까지 준비해 놓을게요.

“고맙습니다.”

- 참! 오늘 선우진 MR 만나기로 했다면서요? 본부장님이 나서신다니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그분만 영입하면 제가 원이 없겠어요. 작년 일 생각하면 분해서 아직도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요.

작년에 지원 3팀으로 옮기기 전에 지금 내가 맡은 지역구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 우리 회사 최고의 MR로 손꼽히며 대형 종합 병원인 수림병원을 관리하던 신재호가 경쟁사인 대성제약의 회유에 넘어가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 준영 님 의견대로 신재호 그 개자식을 누를 사람은 선우진 MR밖에 없어요.

일반 의약품과 달리 전문 의약품은 병의원의 처방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므로 제약 회사들은 병의원 영업에 목숨을 건다. 특히 약을 대량 구매하는 종합 병원은 영향력이 커서 대형 병원에 신약을 사입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의원과 약국은 원장이나 약사가 약의 구매를 결정하지만 종합 병원은 신약심의 위원회를 통과한 약만 처방할 수 있다. 제약 회사들이 서로 자기 제품을 랜딩2)시키고자 경쟁이 극심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고도의 정치질이 필요하다. 약을 심의 위원회에 상정시키고 핵심 인물을 만나 설득하는 모든 과정을 MR이 담당하므로 제약 회사는 자기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MR을 대형 병원에 배치한다.

- 지금도 오가다 마주치면 아주 죽여 버리고 싶다니까요.

“최선을 다해 설득해 보겠습니다.”

지점장을 비롯한 누구도 신재호의 변심을 눈치채지 못했다. 신약이 본 심의에 무리 없이 상정되어서 신재호만 믿고 있었는데 믿는 도끼에 거하게 발등을 찍혔다. 신재호는 우리 제품을 상정시켜서 우리를 안심시킨 다음 신약 심의 위원회가 열리기 전까지 경쟁사 제품이 본 심의에 통과하게끔 핵심 인물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그 결과 우리 제품이 수림병원 랜딩에 실패했고 그 일로 지점장이 사표를 제출했으나 회사는 그의 사표를 반려했다.

- 준영 씨, 제가 나름대로 선우진 MR에 대해 알아봤는데 그분이 예쁜 오메가한테 약하답니다.

“지점장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한테 지금 성 접대를 하라는 말씀입니까?”

- 아, 아니에요. 미인계를 이용하면 협상에 더 유리할 거 같아서요.

“제 귀에는 똑같은 소리로 들립니다만….”

싸늘해진 내 목소리에 지점장은 할 말을 잃었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 마음이 급해서 제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네요.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그런 말씀 한 번만 더 하시면 조용히 안 넘어갈 겁니다. 팀장님 오셨네요. 보고서 이대로 올리겠습니다.”

- 네. 오늘 행운을 빕니다.

나는 올해 초부터 맞불 작전을 펼쳐 대성제약의 간판급 MR인 선우진을 영입해 11월에 있을 신약 심의 위원회를 준비하자고 주장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선우진 영입은 불가능하다며 내 의견을 묵살한 팀장은 제안서를 상부에 올리지도 않았다. 나는 박래현 찬스를 쓰는 대신에 직원들이 상부 기관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시스템을 활용해 본부장에게 직접 내 생각을 건의했다. 신재호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본부장은 흥미를 보이며 그 일을 추진해 보자고 했다.

먼저 우리 팀 팀장과 영업 지원 팀 부장이 혹할 조건을 들고 가서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선우진은 몸담고 있는 회사에 의리를 지키겠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몸값을 높이려는 작전인지 선우진 말고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촉박해서 이번엔 본부장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시도를 안 했다면 모를까 상대의 대표 MR을 건드려놓고 맥없이 물러서는 행위는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대표를 찾아가 본부장이 선우진과 만나는 자리에 나도 동석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뒷조사를 통해 선우진을 꿰뚫고 있는 내가 그를 직접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본부장은 나를 불러 결자해지라며 같이 선우진을 꼬드겨 보자고 했다.

본부장과 나는 함께 저녁을 먹고 약속 시간보다 15분 먼저 호텔 커피숍에 도착했다. 본부장은 재킷 단추를 풀며 의자에 앉았다.

“대성제약 그 싸가지들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여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선우진 MR 무조건 영입해야죠. 오늘 안면을 트고 제가 선우진 MR을 쫓아다니면서 설득해 보겠습니다.”

“준영 님, 정말 그래 줄 겁니까?”

우리 회사는 직급에 상관없이 상대에게 존댓말을 써야 한다. 예의바르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임원들, 본부장, 부장, 팀장을 제외하고는 직급을 없앴고 이름에 님자를 붙여 상대를 부른다.

“네. 우리 회사 자존심이 걸린 문젠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재윤은 영 가망 없어요. 지금도 봐요, 신재호 기세에 눌려서 완전 헤매고 있잖아. 오죽하면 내가 나서겠습니까. 신재호 누를 사람은 선우진밖에 없어요.”

선우진이 올 시간이 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호텔 뷔페에서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는 커플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 중 유독 짙은 눈빛을 주고받는 커플이 있었다. 좋을 때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어디선가 짙은 허브 향이 풍겨 왔다. 상큼하지만 유혹이 깃든 냄새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커피숍의 방향제와는 다른 냄새였다.

나는 그 향기가 오메가를 유혹하는 알파의 페로몬 향이란 걸 깨달았다. 알파는 페로몬을 조금씩 흘리며 맞은편에 있는 오메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박래현에게 각인하고 나서 5년 동안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박래현이 아닌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감지하는 건 각인이 깨졌다는 증거였다. 제일 먼저 박래현의 서늘한 얼굴이 떠올랐다. 박래현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각인이 깨졌다고 하면 박래현 성격에 노발대발 난리가 날 텐데….

“혹시 바이언스제약 영업 본부장님 되십니까?”

부드럽고 정중한 음성에 나는 충격을 뒤로한 채 눈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진으로 접해 익숙하지만 실제로는 처음 본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으며 선한 인상을 한 30대 중반의 남자는 본부장에게 공손하게 질문을 던졌다. 외모, 옷차림, 경계심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표정과 목소리까지. 선우진은 MR이란 직업에 적합한 아주 훌륭한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맞습니다. 바이언스제약 영업 본부장 김민수입니다.”

“대성제약 선우진 MR입니다.”

본부장과 나는 일어나 선우진과 차례로 악수를 하였다. 처세술이 뛰어나지만 자존심이 강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외모와 말투는 서글서글했다.

“바이언스제약 영업 지원 3팀 윤준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는 두 사람이 마실 음료를 주문받아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마쳤다. 허브 향을 풍기던 알파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오메가와 내 옆을 지나갔다. 두 사람은 호텔 객실을 이용할 모양인지 손을 꽉 맞잡고서 페로몬을 더 짙게 뿌리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박래현을 너무 사랑해서 5년 차 징크스를 비켜갈지 모른다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그런데 각인이 풀리다니. 내 사랑의 깊이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나 싶어서 박래현에게 미안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게 실망이 컸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나는 주문한 음료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서로에 대한 탐색전이 끝났는지 본부장은 본격적으로 그에게 이직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는 본부장과 선우진 앞으로 아이스 라테를 내려놓고 자몽 에이드는 내 앞으로 당겼다. 선우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며 본부장의 말을 경청했다.

자몽 에이드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심란한 속을 달래던 나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지금은 본부장을 지원 사격 해서 선우진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저는 조건 따라 움직이는 철새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MR에게 중요한 건 신뢰와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다음부터 이런 만남을 요청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본부장이 대표에게 컨펌 받은 조건을 다 말하고 난 후 선우진이 한 말이었다. 선우진은 파격적인 대우를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본부장은 속이 타는지 연신 냉커피를 마셨다. 생각 같아서는 얼음이라도 씹어 먹고 싶을 것이다.

“저를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선우진 MR도 알고 계시겠지만….”

나는 일어서는 선우진을 붙잡으려고 입을 뗐다. 지금껏 파악한 바로 선우진은 MR로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직 조건도 중요하지만 그가 하는 일에 긍지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나는 우리 회사의 우월함을 중점적으로 알릴 작정을 하고 이 자리에 나왔다.

“철새 짓은 의리라고는 개뿔도 없는 대성제약에서 먼저 했습니다. 회사가 의리가 없는데 무슨 의리 타령이십니까?”

“그 일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어하지 못한 귀사 측에도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전쟁에서 진 다음에 무기 탓 해 봐야 패자의 넋두리밖에 더 되겠습니까?”

선우진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뼈 있는 소리를 했다.

“굳이 싸울 필요 없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거래였습니다.”

“윤준영 씨,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참 순진하네요. 대성에서 왜 귀사 제품을 떨어뜨리려고 용 썼는지 모르세요? 우리 회사보다 제품이 좋다는 거 알고 있어서입니다. 무사히 제품을 랜딩시켰다고 칩시다. 의사들이 어디 제품을 더 많이 쓸지 불 보듯 환하거든요.”

“알고 계시다니 긴말 않겠습니다. 선우진 MR은 제약 영업에서 손꼽히는 분이시죠. 그러면 자신에게 걸맞은 물에서 노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략이 먹혀들어 갔는지 일어나겠다던 선우진은 커피를 마시며 나를 마주보았다. 물론 프로답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성제약은 작년에 매출의 5%만 R&D에 투자했습니다. 전문 의약품이 아니라 일반 의약품이나 음료 시장을 강화하는 추세고 지금 잘나가는 제품도 대부분 상품 매출3)에 의존하고 있어요. 반면에 바이언스는 작년에 매출의 24%를 R&D에 투자했습니다. 우리나라 제약 회사 중 가장 높은 수치죠.”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다른 회사들처럼 상품 매출에 의존하면 좀 더 쉽게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라고 그런 유혹이 없겠습니까?”

대부분의 제약 회사들이 사업 다각화를 꿈꾸며 화장품과 건강 보조 식품 등으로 눈을 돌리는 추세였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자며 박래현을 꼬드긴 적이 있었는데 박래현은 오로지 의약품으로만 승부를 보겠다며 내 제안을 거절했다. 그땐 융통성이 없다고 박래현을 구박한 주제에 나는 그 융통성 없음을 미덕으로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다. 선우진의 눈빛에서 묘한 변화를 감지한 나는 더 열을 올려 회사를 선전했다.

“그런 유혹에도 불구하고 바이언스는 엄청난 투자를 통해 자체 개발 의약품을 생산해 세계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현재 서른 개의 신약 파이프라인을 구성하고 있고 곧 2상과 3상에 들어가는 제품들도 있어요.”

“…….”

“3년 후에는 글로벌 제약 회사 10위 안에 드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번 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창립자의 확고한 의지에 따라 현재 소아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 전문 병원을 짓고 있습니다. 병원이 완공되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선별해 무료로 수술과 치료를 받게 해 줄 계획입니다.”

“그래요? 그것까진 몰랐네요.”

“규모를 떠나서 회사가 이 정도 비전은 갖고 있어야 선우진 MR의 명성에 맞지 않을까요? 본부장님 말씀처럼 다른 조건도 최고로 맞춰 드리겠지만 제약 회사 MR로 자부심을 느끼면서 일할 곳이 어딘지 한 번만 더 고려해 주세요. 의사들도 복제약보다는 오리지널 신약을 더 높이 쳐주잖습니까. 고객에게 상품 디테일링4) 할 때 자긍심을 느끼실 겁니다.”

“윤준영 씨는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네요.”

“네, 본업에 충실한 아주 좋은 회사입니다.”

내가 지나치게 회사 편을 들어 거부감을 느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나는 남아 있는 자몽 에이드를 다 마셨다.

“여기 우리 회사에 관한 자료입니다. 보기 편하게 제가 정리해 왔습니다.”

나는 우리 회사 연혁과 회사에서 개발한 제품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를 선우진에게 건넸다. 선우진 취향에 꼭 맞게 정성껏 작성한 자료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선우진은 이번 주 안에 연락을 주겠다며 자료를 챙겨서 일어섰다. 나와 본부장은 그를 커피숍 입구까지 배웅한 다음 자리로 돌아왔다.

“우리 준영 님, 본사에 둘 게 아니라 현장으로 보내야겠습니다. 준영 님이 영업하면 의사들 다 홀리고도 남겠는데요?”

“그럴까요? MR이 힘들어서 그렇지, 회사에서 연봉은 제일 많이 가져가잖아요.”

본사 직원과 직급에 따른 연봉은 같지만, 그들에겐 활동비와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가 따로 주어지기 때문에 안정된 거래처를 뚫어 놓은 MR은 본사에 들어오라고 해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부장과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박래현에게 온 전화였다. 본부장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그의 전화를 받았다.

“형, 나야.”

- 아직 호텔이네? 지금 누구랑 있어?

“본부장님이랑.”

- MR 영입은 잘됐어?

“이번 주 안에 확답 준대. 나 지금 들어갈게.”

- 조심해서 들어 와.

본부장은 급한 일이 있으면 어서 가자며 일어섰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각인이 풀렸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5년 된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각인이 풀리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내게 40일 만에 한 번씩 히트 사이클이 찾아오는 것처럼.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나와 박래현만은 예외이길 바랐던 만큼 상실감이 정비례했다. 각인이 깨지기 전까지 우린 정말 특별해서 절대 각인이 풀리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어쩌면 나는 박래현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와 페로몬 상성이 잘 맞아서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게 아닐까. 씨발, 그래도 그건 절대 아니었다. 차라리 박래현에게 이실직고한 뒤 그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고 싶어졌다.

“준영 씨, 가신 일은 잘 해결했습니까?”

본부장을 먼저 차에 태워 보내고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 나를 보며 오승현이 물었다.

“생각해 보고 이번 주 안에 연락 준대요.”

“표정이 안 좋아서 영입에 실패한 줄 알았어요.”

“그럴 가능성이 커요. 생각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더라고요.”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충격이 가시자 각인이 풀린 걸 박래현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는 각인이 풀리면 즉시 그에게 얘기하라고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박래현은 어떤 생각이 들까. 그는 내 사랑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박래현이 실망하는 모습을 볼 용기가 없었다. 더구나 나는 그가 했던 말을 조사 하나 빼지 않고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각인 풀지 마. 각인 풀린 순간, 넌 감금돼서 나랑 섹스만 할 거야.’

그의 말에 기꺼이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박래현에게 각인이 풀렸다고 말한 순간 나는 다시 각인할 때까지 그에게 갇혀서 섹스만 하게 될 것이다. 섹스가 싫은 게 아니라 신제품 피드백을 수집해 마케팅 리서치 팀에 올려야 하고 다음 달에 있을 MR 워크숍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감금당해 섹스만 하고 살 순 없었다. 그리고 밑밥을 깔았으니 선우진 영입에도 더 공을 들여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그에게 다시 각인하는 날까지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다. 히트 사이클이 찾아오면 박래현과 풀면 될 테고 혹시 일하는 도중 히트 사이클이 찾아오면 억제제를 먹으면 된다. 이렇게 두세 달 정도 버티다 보면 다시 각인하지 않을까. 각인이 풀렸다는 사실은 박래현에게 평생 비밀로 할 것이다.

***

이른 더위가 찾아왔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은 음식 냄새와 웃음소리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이 별이 유치원 등교 기념 및 쌍둥이들 생일 파티를 준비하느라 바쁜 탓이었다. 엄마와 나는 쌍둥이 방에서 그들이 밖에 나가 못하게 몸으로 놀아 주고 있었다. 쌍둥이들이 벌써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다니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그저 감탄이 나왔다.

서현인 15개월이 지나자 스스로 기저귀를 뗐다. 서경인 요즘 배변 연습을 하고 있는데 기저귀 없이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서현이가 부러운 듯했다. 조 여사는 서경이가 너무 늦된 건 아닐까 걱정하는 내게 별이와 서현이가 빠른 거라면서 서경이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했다. 순간 속이 뜨끔해졌다. 나부터 아이들을 비교하면서 서경이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지금은 어려서 모르겠지만 나중에 서경이는 똑똑한 쌍둥이 동생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나는 절대 아이들을 비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준영아, 너 밥은 제대로 먹고 일하니? 얼굴이 반쪽이 됐어.”

엄마는 서경이 기저귀를 갈아 주는 날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 진짜 잘 먹고 다녀. 지금이 한창 바쁠 때라 그래. 7, 8월이 비수기라 이달에 판매량을 올려놔야 하거든. 이달만 지나면 좀 나아질 거야.”

오늘 아침엔 태어나서 처음으로 코피를 흘렸다. 다행히 샤워할 때 코피가 났기에 망정이지 박래현 앞에서 코피를 흘렸으면 박래현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아, 네 몸 네가 챙겨. 내가 너랑 서윤 아빠 먹으라고 녹용 넣고 보약 좀 지었다. 두 달분이니까 네가 서윤 아빠 챙겨 주면서 같이 먹어.”

“엄마! 보약을 왜 지어 와. 나 죽일 일 있어?”

“널 죽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아무 말도 아니야.”

박래현이 눈치채기 전에 각인하고 싶어서 지난 3주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박래현과 격렬한 정사를 벌였다. 내가 열정적으로 덤벼서인지 히트 사이클에만 노팅을 하던 박래현이 이틀 걸러 한 번씩 노팅을 했다.

노팅은 엄청난 에너지와 지구력을 필요로 했다. 그 후폭풍 또한 강렬해서 다음 날 오전까지 절정의 여운이 남아 아랫도리 전체가 열을 품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체력이 좋아서 보통 때라면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일을 너무 많이 했다. 계속해서 선우진을 쫓아다니며 그를 설득하느라 퇴근 후 늦게까지 일했다. 나는 의사들에게 영업하듯 우리 제품 디테일링을 실행해서 선우진의 명예욕과 승부근성을 자극했다. 목 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어쩔 땐 내가 MR로 뛰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긴 설득 끝에 선우진은 우리 회사로 이직을 결심했다. 그는 신약 심의 위원회가 열릴 때까지 본사에서 자신을 서포트해 줄 사람으로 나를 지목했다. 지점을 거치지 않고 바로 본사와 연락을 취해 필요한 도움을 받겠다는 전략이었다. 본부장이 내 의견을 물었을 때 나는 기꺼이 선우진의 요구를 받아 들이겠다고 했다. 유능한 MR을 영입하려면 더한 요구도 수용할 수 있었다. 본부장은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수림병원과 관련된 일은 직접 관리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지원 3팀 조회가 끝나면 본부장을 찾아가 매일 수림병원 디테일링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11월에 열릴 신약 심의 위원회는 정말로 중요했다. 수림병원은 지방에 계열 병원도 여러 개 있어서 모든 제약 회사가 사활을 걸고 달려드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제약 회사간의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나는 기선을 제압해 우리 신약이 무사히 랜딩을 마칠 때까지 선우진을 서포트하면서 동시에 뒤통수를 맞는 일이 없도록 그를 감시하기로 했다.

지난 주에는 춘천에서 1박 2일로 개최된 우수 MR 2분기 워크숍도 완벽하게 끝냈다. 영업 지원 팀 일은 그대로인데 현장을 서포트하다 보니 퇴근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제멋대로였다. 그런 상황에서 매일 새벽까지 박래현과 강행군을 한 결과 결국 아침에 코피가 터지고 말았다. 내 안위를 위해, 연구와 육아를 병행하면서 섹스도 열정적으로 하는 박래현에게 보약을 먹일 수는 없었다. 나는 체력이 고갈되기 직전이라 당분간 보약은 나만 먹기로 결심했다.

“엄마, 마침 기력이 달렸는데 약 잘 먹을게. 챙겨 줘서 고마워. 역시 엄마가 최고야!”

“챙겨 주다니 내가 뭘. 다 서윤 아빠 주머니에서 나온 돈인데…. 남 밑에서 일만 하던 내가 말년에 이렇게 호사를 누릴 줄 알았겠니. 매달 보내 주는 돈에, 정원 딸린 집에, 일해 주는 사람까지 두고 살다니 말이다.”

“형은 엄마가 너무 고맙대, 나 낳아 주셔서.”

엄마는 내 손을 잡아 손등을 토닥였다.

“너나 나한테 정말 고마운 사람이야. 일만 하지 말고 서윤 아빠한테 잘해.”

“걱정하지 마. 잘하고 있어.”

박래현에게 얼른 각인했으면 좋겠는데 매일 밤 섹스를 해도 그에게 각인되지 않았다. 오늘도 영업 5팀의 장이혁이 정혜주를 꼬드기기 위해 은근슬쩍 페로몬을 흘렸다. 그 냄새를 맡으며 나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너 해준이는 영영 안 만나고 살 거니? 그 일 때문이라면 해준이도 많이 뉘우치고 있더라.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만나 봐.”

내가 해준이 얘길 싫어하기 때문에 엄마는 무척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는 내가 해준을 멀리하는 진짜 이유를 모르고 계셨다. 아픈 엄마를 내게 맡기고 무책임하게 집을 나간 것 때문에 그러리라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엄마, 미안한데 난 평생 해준이 안 보고 살 거야. 절대 용서할 수 없으니까 내 앞에서 걔 얘기 꺼내지도 마.”

“준영아, 너 엄마 마음 아프게 한 적 없잖아. 엄마 소원 좀 들어줘.”

“다른 건 다 들어줄게. 근데 그건 안 되겠어.”

엄마는 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무셨다. 박래현은 내가 해준을 만나도 괜찮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해준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박래현은 1년 내내 잔병치레 한번 없다가도 박수현 기일 즈음이 되면 끙끙 앓곤 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낙타가 되어 함께 건너 주겠다던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을 가슴에 묻고 박래현은 박수현을 속여 죽음을 선택하게 했던 윤해준의 형과 결혼해서 살고 있다. 박래현의 마음에 담긴 상처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지만 나는 그때마다 박래현이 외롭지 않게 더 많이, 더 깊게 그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빠, 나 바께 나가고 시퍼요.”

자동차를 타고 방을 돌아다니던 서현이가 통통한 손으로 문손잡이를 내렸다. 준비가 끝나면 박래현이 데리러 온다고 했기에 나는 울적한 기분을 털어 버리고 재빨리 서현일 안아 들었다. 내가 기력이 없어서인지 서현이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구석에서 입체 그림책을 보고 있던 서경이가 날 보더니 자기도 안아 달라고 팔을 뻗었다.

“준영아, 서경인 내가 안아 줄까?”

“아니. 엄만 무거운 거 들면 안 돼. 나 힘세서 둘 정도는 아무 문제 없어.”

나는 서경이도 안아서 두 녀석을 마주 보게 했다. 둘이 나란히 안고 보니 몸집이 커서 아무리 봐도 서현이가 형으로 보였다.

“형아가 세상에서 젤 이뻐요.”

서현이가 서경이 볼을 붙잡더니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서현이 눈에 서경이가 굉장히 예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서경인 서현이가 귀찮은지 고개를 돌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준영아, 준비 다 됐어. 어머니, 거실로 나오세요.”

박래현이 들어와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너 어디 아파?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

“아니, 괜찮아. 요즘 무리해서 그래.”

“내 신랑 공진단 좀 사다 먹여야겠네. 회사에서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

엄마가 보약을 지어 왔다는 말을 하려다가 나만 먹기 미안해서 보약 얘긴 건너뛰었다. 박래현은 내게서 두 아이를 받아 품에 안았다. 아이들이 편안해하는 걸 보니 육아 전문가는 아이를 안는 자세부터 남달랐다.

“지금 DC 위원들 명단 열심히 파악하고 있거든? 명단 나오면 그때 도와줘.”

원래는 정원에서 파티를 열 계획이었는데 날이 너무 더워서 장소를 거실로 옮겼다. 케이터링 서비스에서 가져온, 흰 테이블보가 덮인 기다란 직사각형 테이블 위에는 예쁜 꽃장식과 샐러드, 음료가 세팅되어 있었다. 나는 엄마를 먼저 의자에 앉힌 다음 그 옆에 앉았다. 나와 박래현 사이에 별이와 서경이, 서현이가 나란히 앉았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오늘 우리 서경이랑 서현이가 두 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윤이는 다음 주부터 유치원에 나갈 예정이고요. 아이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박래현이 내게도 한마디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일어서 목을 가다듬었다. 다 커서 혼자 샐러드를 집어 먹는 쌍둥이들을 보면서도 벌써 2년이 흘렀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게다가 별이가 유치원에 입학하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 엄마, 정 차장님과 이 차장님, 조 여사님과 오 여사님, 내 친구 정우와 오승현 씨, 이진주 씨, 다들 정말 고마웠어요. 저와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래현 형과 건강하게 자라 준 우리 아이들도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한 마음과 소중한 순간들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인사말이 끝나자 준비된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다. 조 여사와 오 여사는 밥을 먹이겠다며 쌍둥이들을 자기 옆자리로 데려갔다. 박래현은 랍스터 살을 정성스럽게 발라 엄마 앞으로 내밀었다.

“어머니, 많이 드세요.”

“응, 잘 먹겠네. 서윤 아빠도 많이 먹어.”

엄마는 박래현이 발라 준 랍스터를 맛있게 드셨다. 별이는 오른손으로 랍스터 꼬리를 잡고서 포크로 열심히 살을 파먹었다. 반면 쌍둥이들은 살 발라 주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양손에 랍스터 다리를 들고 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이어서 나온 갈비와 후식까지 다 먹고서 우리는 소파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이 있는 쪽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곳곳에 각양각색의 풍선이 묶여 있었다. 안에 반짝이가 든 풍선도 있고 색색의 하트가 그려진 풍선도 있었다. 특히 하트가 그려진 풍선엔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2단 초콜릿 케이크 위에 초 두 개를 꽂고서 초에 불을 붙였다. 쌍둥이들이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서 ‘후’ 하고 촛불을 불자 박수와 생일 축하 노래가 이어졌다. 오승현은 안에 반짝이가 든 풍선을 들고 아이들에게 다가왔다. 풍선 터지는 소리에 놀라지 않도록 나와 박래현은 쌍둥이들 귀를 가려 주었다.

정우가 작은 송곳으로 풍선을 터트리자 뻥 소리와 함께 아이들에게 반짝이가 쏟아졌다. 별이와 쌍둥이들은 반짝이를 잡으려고 짧은 다리를 팔짝거렸다. 정우는 풍선을 계속해서 터트렸고 아이들은 그때마다 궁둥이를 덩실거리며 손에 반짝이를 모았다.

“서현아, 서경아, 생일 축하해. 앞으로도 늘 건강해야 해.”

나는 반짝이를 묻힌 아이들이 예뻐서 그들의 볼에 쪽쪽 입을 맞췄다.

“서현아, 서경아, 생일 축하해!”

우스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다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우가 풍선에 든 헬륨을 마시고 축하 인사를 건네자 아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별이 공주님! 유치원 입학을 축하합니다! 키도 쑥쑥 크고 건강하세요.”

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정우는 계속 재롱을 부렸다. 오두방정을 떠는 목소리는 들을수록 정우에게 어울렸다.

“참! 우리 서윤이랑 손주들 선물 줘야지.”

엄마는 쌍둥이들 방에 들어가서 종이 가방을 갖고 나왔다. 그녀는 커다란 상자를 꺼내 별이에게 건넸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 별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포장지를 풀었다. 안에는 별이가 요즘 푹 빠져 지내는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의 인형이 들어 있었다. 엄마가 별이 선물을 고민하자 내가 미국 출장 가는 직원에게 부탁해 엄마 대신 구매해 엄마에게 전달한 선물이었다.

좋아하는 인형을 발견한 별이는 상자째 품에 안고 팔짝팔짝 뛰었다. 그의 방에는 헤어스타일과 복장만 다른 인형들이 이미 여러 개 있었다.

“별아, 마음에 들어?”

“네! 할머니, 고맙습니다!”

별이는 거실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인형을 꺼내는 데 집중했다. 엄마는 이번엔 작은 상자를 꺼내 박래현에게 건넸다. 서현이와 서경이 선물은 박래현과 내 전화번호가 적힌 금 목걸이였다. 박래현은 반짝이를 온몸에 묻힌 채 풍선을 갖고 노는 쌍둥이를 품으로 끌어당겨 엄마가 보는 앞에서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목걸이를 잡아 뜯던 아이들은 금세 다른 선물에 마음을 뺏겼다.

정 차장이 테이블 아래서 커다란 상자와 가이드북을 꺼내 서경이에게 건넸다. 한번 상자를 열면 아이들이 못 빠져나온다는 입체 자석 교구였다. 상자에는 교구로 만든 행성 탐사차, 행성 탐사 로봇, 크레인, 놀이 기구 등의 사진이 붙어 있어서 단박에 쌍둥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내년부터는 선물하지 마세요. 이러면 생일 그냥 지나갈 거예요.”

“에이, 우리가 조금씩 보태서 샀으니까 그런 말 말아요. 전혀 부담 안 돼요.”

“고맙씁니다!”

두 손을 배꼽에 모으고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쌍둥이의 시선은 상자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서경이는 깐깐한 성격답게 상자 겉면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나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은 각양각색의 도형과 액세서리로 가득했다. 쌍둥이들은 좋아하는 케이크도 마다하고 온통 장난감에만 정신을 쏟았다.

“애들이 부족한 게 없어서 선물 고르기 힘들었어요.”

박래현은 아이들이 원하는 건 전부 사 주었다. 별이가 한창 자동차에 빠져서 차를 사다 나를 땐 집에 별이 전용 주차장만 다섯 개가 만들어졌다. 공룡에 빠졌을 땐 별이 방을 아예 쥐라기로 꾸며 공룡들을 배치했고 관심 있는 분야가 바뀔 때마다 관련 책들이 수도 없이 늘어났다. 쌍둥이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아이들은 평생 풍족하게 살겠지만 만에 하나 그들에게 결핍이 찾아오면 잘 버틸 수 있을지 이따금 걱정되었다.

“그리고 이건 서윤이 거.”

조 여사가 별이에게 예쁜 가방과 운동화를 건넸다. 별이는 감사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인형을 안고 자기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별이의 태도에 민망해져서 내가 대신 가방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안에는 필기도구와 색연필이 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아빠! 나 이거 만들고 시퍼요!”

상자를 들고 박래현에게 다가간 서현이가 그의 다리 사이에 엉겨 붙었다. 서경이도 뭘 만들고 싶은지 박래현 팔을 붙잡고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그러면 아빠랑 우주 탐사선 만들까?”

“응, 우듀 탐샤선 얼는 만드러요!”

서현이의 말에 서경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박래현은 아이들을 양쪽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쌍둥이들 침실로 들어갔다. 엄마가 교구를 챙겨 박래현을 따라 들어갔다. 당분간 아이들은 저 장난감에 푹 빠져서 다른 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정우와 오승현이 빗자루와 청소기를 찾아와 바닥에 깔린 반짝이를 쓸어 담았다. 반짝이는 얇아서 그들이 잘 쓴다고 쓰는 데도 요리조리 날아다녔다.

“김정우, 너 바보냐? 서너 개만 터트리지 그랬어.”

“애들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서너 개만 터트려?”

“야, 청소 그만 하고 너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파티 마무리는 이 차장에게 맡기고 나는 정우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갔다. 유월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우리는 커다란 계수나무 아래 벤치로 가서 앉았다. 그늘이 있는 곳은 그나마 덜 더웠다.

“왜 나를 불러내? 무슨 일 있어?”

“요새 래현 형 어떻게 지내는지 통 보고가 없잖아. 궁금해서.”

“야, 네 코빼기도 보기 힘든데 보고는 무슨 보고냐. 그리고 부센터장님 일과는 늘 똑같지 뭐. 연구소하고 집만 왔다 갔다 하시는 거.”

“혹시… 형한테 어떤 변화 같은 거 안 생겼어?”

“변화라니?”

“음, 예를 들어 신경 쓰는 사람이 생겼다거나….”

정우가 벤치 등받이에 팔꿈치를 기대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찬찬히 관찰했다.

“우리 이제 6년 차 들어갔잖아. 대부분 5년이면 각인이 풀린다고 해서 좀 걱정스러워.”

“이번에 루이스 사와 임상 시험 진행하려고 제휴한 건 알고 있지?”

박래현에게 지나가는 소리로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에 대해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고 양사가 전임상 단계의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루이스 사 부대표와 자주 만나다 보니까 그쪽에서 부센터장님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 같아.”

“그 사람 오메가야?”

“어? 어.”

“어떤 스타일인데? 솔직하게 말해 봐.”

“그게….”

정우는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각인이 깨졌다면 박래현이라고 사정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지금 나만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갑자기 초조해져서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

“너 왜 대답 못 해?”

의도치 않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우는 내 추궁에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오래 된 친구이다 보니 그는 내 표정 만으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금발에 짙은 파란색 눈을 한 대단한 미인이야. 제 딴엔 자신 있으니까 부센터장님한테 들이대겠지.”

금발에 파란색 눈을 가진 미인이라니. 정우 설명만 듣고도 눈앞에 그려지는 게 있었다. 나는 왠지 기분이 울적해졌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부센터장님은 너 말고는 관심 없잖아. 걱정하지 마.”

“너 형한테 작은 변화라도 생기면 무조건 나한테 보고해. 넌 형 비서이기 전에 내 친구란 거 절대 잊지 마.”

“알았어. 보고할 일도 없다, 솔직히. 그런데 오늘따라 너 좀 이상하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전엔 웃어넘겼잖아.”

“정우야, 사실 왜 불안하냐면….”

정우에게 비밀을 얘기할까 말까 고민하던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조언을 듣고 싶어서 그에게 내 상황을 말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너만 알고 있어. 절대 형한테 얘기해서는 안 돼.”

“…뭔데 그래? 너 좀 심각해 보인다?”

“나, 아무래도 각인이 풀린 거 같아.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맡았어.”

“뭐라고? 너 진짜야? 야, 어떡하냐. 부센터장님이 아시면 난리 날 텐데.”

박래현 성격을 잘 알기에 정우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다시금 박래현에겐 비밀로 해야겠다는 각오가 새록새록 돋아났다.

“그러니까 비밀로 하라는 거야. 야, 이제 어떡하면 좋냐?”

“뭘 어떡해? 다시 각인할 때까지 억제제 잘 챙겨서 다녀야지.”

“씨발, 그래서 매일 밤 존나 해 대는데 각인이 안 돼. 돌아 버리겠다.”

“야, 조급하게 굴지 마. 마음이 급하면 더 안 될 수도 있어. 언젠간 될 거라고 차분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해.”

나는 벤치에 두 팔을 걸고 고개를 뒤로 젖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언제 각인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정우 말대로 마음을 편하게 먹는 편이 나을 것이다. 긴장하면 될 일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선우진 MR은 어때? 부센터장님이 신경 쓰시는 눈치던데….”

“형이 선 MR한테 신경 쓴다고? 왜?”

“왜긴. 직장 동료 포함해서 네가 자주 만나거나 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다 요주의 인물이라니까.”

“야, 그 사람은 나를 맘대로 부려 먹을 수 있는 자기 부하 직원쯤으로 여겨. 나한테 성적인 관심은 손톱만큼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뭐 어쩌겠어, 부센터장님 눈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인다는데.”

영업에 최적화된 단정한 외모와 달리 선우진은 바람둥이였다. 보는 눈 또한 까다로워서 초기에 발현한 예쁜 오메가가 아니면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우진은 처음부터 나를 알파로 여겨서 자기 개인 비서로 부려 먹을 뿐 내게 딴마음을 품지는 않았다. 같이 일하기엔 그게 편해서 나는 그의 착각을 정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근데 우리 형 진짜 바쁜 사람이야. 연구하랴 육아하랴 나 감시하랴.”

“그러게. 상대가 아무리 좋아도 난 그렇게는 못 해.”

“거기다 나 재우고 새벽까지 공부한다? 잠은 언제 자나 몰라. 알파 중에서도 체력 좋기론 최고일 거야,”

말해 놓고 보니 박래현이 너무 무리하고 있었다. 엄마가 지어 준 보약은 엄마 뜻대로 박래현과 같이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나 아니면 박래현 체력을 관리해 줄 사람이 없었다. 밤에 좀 힘들더라도 내 알파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들어가자. 엄마가 나 찾겠다.”

정우와 나는 천천히 산책하듯 정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거실은 그사이에 말끔하게 치워져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곧장 쌍둥이들 방으로 들어갔다. 별이는 엄마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엄마에게 자기 인형들을 자랑 중이었고 소파 아래 러그 위에서는 박래현이 쌍둥이들과 열심히 뭔가를 조립하고 있었다. 그는 조립만 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호기심을 느낄 수 있게끔 태양계와 행성에 관한 설명을 곁들였다. 서현이는 눈을 반짝이며 언젠가 자기가 만든 우주선을 타고 저 멀리 떠 있는 별에 가 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나는 박래현 옆에 앉아서 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압빠, 이거 내가 만드러써요.”

서현이가 나를 보더니 자신이 만든 작품을 자랑했다. 러그 위에는 서현이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행성 탐사차와 박래현과 서경이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탐사 로봇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탐사차 밑에는 바퀴가 있어서 갖고 놀기에 아주 좋아 보였다.

“와, 진짜 잘 만들었다. 우리 쌍둥이들 나중에 우주 갈 때 아빠도 데려가.”

“아빠랑 가치 갈래요.”

나는 서현이가 기특해서 그의 궁둥이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엄마가 흐뭇한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올해부턴 저희가 어머니 모시고 싶은데 저희랑 같이 사는 게 어떻겠어요?”

박래현의 제안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박래현은 올해 초부터 엄마를 모시고 살겠다는 의사를 자주 피력했다.

“내가 서윤 아빠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해준이 혼자 두고 오면 내 속이 안 편할 거 같아서 그래.”

엄마는 매번 같은 이유를 들어 박래현의 제안을 거절했다. 우리와 사는 것보다는 해준과 사는 게 더 좋은 모양이었다. 나에겐 엄마 마음이 편한 게 최고였으므로 더 강요하지는 않았다.

“알았어. 엄마 편할 대로 해. 대신 우리가 더 자주 찾아갈게.”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너 직장 생활도 바쁜데 나 찾아올 시간에 애들하고 놀아 줘. 나는 너 안 봐도 되지만 애들은 그게 아니잖니.”

“그럼 엄마가 자주 오면 되겠네.”

나는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리고 논란을 종결지었다. 박래현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우리 준영이는 영업 팀으로 옮기더니 협상의 귀재가 됐네.”

나는 달콤한 치자꽃 향기를 맡으며 박래현 무릎을 베고 누웠다. 박래현과 쌍둥이들은 다시 뭔가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엄마 옆에서 조잘거리던 별이가 인형을 안고 와서 내 옆에 누웠다.

“아빠, 나 얼른 유치원 가고 싶어요.”

“왜?”

“친구들이 많아요.”

“이제 두 밤만 자면 되겠네. 유치원에서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해.”

나는 사랑스러운 별이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영원히 내 품에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한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별이가 다 커서 허전한 마음이 드는 한편 잘 키웠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뿌듯하기도 했다.

***

영업 지원 3팀 직원들은 오전부터 회의 준비에 바빴다. 나는 본부장에게 수림병원 신약 사입 프로젝트에 간부들의 지원 사격을 요청했다. 본부장은 임시 임원 회의를 제안했고 대표가 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수림병원 같은 대형 병원에 제품을 랜딩시키기 위해 회사 대표를 비롯해서 모든 임직원이 동원되곤 했다.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해서 나는 미리 소회의실에 도착해 장비를 점검했다. 회사 로비에서 선우진을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돼서 기기 점검을 마친 나는 부리나케 1층으로 내려갔다.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선우진이 본사 로비에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선우진 앞에 섰다.

“선우진 MR님!”

“준영 씨, 좋은 아침입니다.”

선우진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오늘 발표한다고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었습니까?”

“저 원래 회사에서 알아주는 멋쟁인데요?”

“오늘따라 특별해 보여서요. 준영 씨한테 청색이 정말 잘 어울려요.”

오늘 발표한다고 했더니 박래현이 고심해서 고른 옷이었다. 선우진은 베테랑답게 첫 대화를 기분 좋게 이끌었다.

“본사는 오늘로 두 번째시죠?”

“네. MR들은 본사 건물과는 안 친합니다. 교육받을 때 빼고는 올 일이 없거든요.”

이직을 결심한 다음 날 선우진은 본사에서 대표와 미팅을 가졌다. 그때도 내가 안내를 맡았었다. 그가 본사 구조를 잘 몰라서 나는 13층에 있는 소회의실로 그를 데리고 갔다.

“참, MR님. 우리 회사 신제품 프로모션에 참여하실 닥터들 명단, 그대로 제출하면 되죠?”

“물론입니다. 거기에 두 분 정도 추가될 거 같습니다.”

“와, 그럼 열세 분 정도 되겠네요? 팸플릿 더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지점에 아직 남아 있어요. 준영 씨, 잠깐만요. 넥타이핀이 비뚤어졌어요.”

행동이 빠른 선우진은 내가 핀을 살피기도 전에 직접 넥타이핀을 바로잡아 주었다. 회의실에 들어선 나는 왠지 모를 서늘한 시선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간부들은 직원들이 준비한 차와 간식을 먹으며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내게 날아오는 날카로운 시선의 근원지를 곧장 찾아냈다. 회의실 한가운데 떡 버티고 앉은 박래현이 나를 주시하면서 대표와 얘길 나누고 있었다. 그는 선우진이 넥타이핀을 정리해 주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냉정하고 예리한 눈빛에 가슴이 서늘해져서 나는 선우진에게 한 발 떨어져 그가 앉을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아침에 박래현에게 오늘 임시 회의에 관해 얘기를 꺼냈을 때 그가 참석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원래 계획엔 없었는데 내가 발표한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와 본 것 같았다.

본부장은 사람들에게 선우진을 소개하면서 회의 시작을 알렸다.

“안녕하십니까, 바이언스에 지난달에 입사한 선우진 MR입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일반인의 시선에서 본 영업 사원과 제약 회사 직원들의 시선에서 본 영업 사원은 그 지위가 매우 달랐다. 특히 선우진처럼 유능한 MR 앞에서는 이사들도 절절맸다. 선우진은 간단하게 자신의 이력을 소개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나는 수림병원에 우리 제품을 랜딩하기 위해 그동안 영업 지원 3팀과 선우진이 해 왔던 일을 정리해서 발표하고는 수림병원 신약 심의 위원회 위원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병원장이 재단 이사장 장남에서 차남으로 바뀌면서 심의 위원들도 대대적으로 물갈이가 되어 파악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수림병원은 한 진료과에서 두세 개의 제품만 상정 가능하도록 제품 개수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병원보다 주임 과장이나 주임 교수의 영향력이 큰 곳입니다. 선우진 MR이 그분들께 개별적으로 접근하고는 있으나 시간이 많이 부족한 데다 타 제약 회사의 방해가 극심합니다. 그래서 소개로 안면을 트는 쪽이 더 빨리 신뢰를 쌓는 길이란 판단하에 여러분께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신약 상정 기간까지 4개월이 남아 있어서 병원은 지금 제약 회사 간에, 그리고 병원에 상주하는 MR 간에 피 튀기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발표를 마치고 내 자리로 돌아가자 영업 본부장이 바통을 이었다.

“DC5)명단이 새나가면 안 된다는 건 다 아실 겁니다. 그래서 먼저 임원들 중심으로 인맥을 형성할 계획입니다. 이번에도 신약 사입에 실패하면 영업 이익 손실뿐만 아니라 신약 명가로서 바이언스의 위상에 금이 갈 수 있습니다. 이번엔 기필코 신약 랜딩에 성공해야 합니다!”

본부장은 자신의 열변이 마음에 드는지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DC위원이면 금상첨화고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봅시다.”

“수림병원 약제 팀장은 동문이라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노트북에서 얼굴을 들어 박래현을 보았다. 심의 위원회에서 약제 팀장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이다.

“저는 연구 센터 부센터장 박래현입니다. 선우진 MR만 괜찮다면 선배한테 연락해서 조만간 미팅을 잡겠습니다.”

수림병원 약제 팀장은 제약 회사 사람들을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주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약제 팀장 성격을 잘 모르는 박래현이 괜히 망신만 당할 것 같아서 초조해졌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정말 고맙죠. 그런데 그분이 미팅에 응하실지 모르겠네요. MR들과 사적인 만남은 안 갖기로 유명한 분이라서요.”

“그건 내가 해결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선우진의 우려 섞인 말에 박래현이 자신감 있는 대답으로 응수했다. 선우진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저분 말이 사실이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겠어요. 미팅 정해지면 준영 씨도 같이 만납시다.”

나도 당연히 그 자리에 나갈 생각이었다. 선우진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사람이어서 중요한 사람은 내가 관리하는 게 맞았다. 본부장을 비롯해 지역구 소장도 신재호가 한순간에 돌아서서 스파이짓을 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최선이었다.

“알았어요. 저도 같이 만날게요.”

박래현의 솔선수범에 이사와 임원들은 자신이 친분 있는 의사들의 이름을 댔다. 진료과의 교수나 과장, 주임 과장과 주임 교수, 약제 팀장, 구매 팀장이 공략 대상이었다. 나중에 스케줄을 잡기 위해 나는 사람들 간의 연관 관계를 노트북에 열심히 정리했다.

회의가 끝나자 선우진은 담당 교수와 점심 약속이 있다면서 바쁘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내게 박래현이 다가왔다.

“윤준영, 점심은 나랑 먹어.”

“안 돼. 우리 팀 직원들이랑 점심 먹으면서 회의 내용 공유하기로 했어.”

내 팔을 틀어쥔 박래현이 나를 엘리베이터 앞으로 끌고 가 하강 버튼을 눌렀다. 나는 사람들이 볼까 봐 재빨리 박래현 손을 털어 내며 낮게 속삭였다.

“형, 나 점심 약속 있다고.”

“팀장도 회의 들어왔잖아. 너 빠져도 팀장이 정리하면 돼.”

오늘은 박래현이 고집을 꺾을 것 같지 않아서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알았어. 노트북 정리하고 사람들한테 말하고 나올게.”

“노트북은 네 책상에 갖다 놨고 팀장한테는 너 점심 약속 있다고 얘기해 놨어.”

선우진을 배웅하고 돌아온 지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두 가지 일을 처리한 박래현을 보며 그가 연구와 육아를 병행하는 비법을 엿보았다. 그는 작은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햄버거 먹을까?”

“햄버거는 별로고 요 앞 카페 가서 샌드위치 먹자. 너 거기 샌드위치 좋아하잖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지나 거리로 나갔다. 발밑에서 올라오는 7월 중순의 더위에 숨이 턱턱 막혔다. 박래현은 시원해 보이는 복장인데 나는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있어서 더 더웠다.

“근데 형, 수림병원 약제 팀장이랑 친해?”

“그냥 대학 선후배 사이야.”

“그런데 형 마음대로 약속 잡아도 돼?”

“그게 그렇게 걱정 돼? 같은 과 선밴데 후배 부탁 정도는 들어주겠지.”

“만나달라고 청탁 넣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그래.”

“준영아, 형이 해 준다고 했다가 못 해 준 거 있어?”

내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박래현이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닐 텐데 약속 잡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라는 듯 박래현 목소리는 태평했다. 나보다 5년은 더 살았으면서 이럴 때 보면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밑져야 본전이라고 박래현이 자리 마련에 성공하길 바랐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회사 맞은편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나는 박래현에게 주문을 맡기고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았다. 점심시간이라 창가 자리는 다 찼고 안쪽에 두 자리만 비어 있었다. 박래현은 기다렸다가 아예 샌드위치와 음료를 받아서 내가 있는 자리로 왔다.

카페에는 낯익은 직원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나와 박래현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가 이내 그들의 대화에 몰두했다. 본사와 연구소가 다른 조직처럼 운영되지만 박래현이 이쪽 계통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본사 직원 중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까 선우진이랑 사이좋게 무슨 이야기 했어?”

박래현이 맞은편에 앉아서 쟁반을 내려놓고 긴 다리를 포갰다.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입을 크게 벌리던 나는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딸기 주스를 마셨다.

“약제 팀장님 만날 때 같이 만나재. 약제 팀장이면 정말 중요한 분이잖아. 나도 안면 터놓는 게 좋을 거 같아.”

“그 남자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너 사람들이 싱글로 알고 있다고 정말 싱글로 착각하며 사는 건 아니지?”

“…나한테 저언혀 관심 없는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마.”

박래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틀고서 내 표정을 관찰했다. 선우진은 나를 알파로 알고 있어서 박래현이 우려하는 관심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마 내 나이가 몇인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선우진 알파라면서?”

“…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너한테 페로몬이라도 흘렸어?”

“내가 뒷조사 다 끝냈잖아. 그리고 형한테 각인했는데 내가 어떻게 다른 알파 페로몬을 맡아?”

나는 제법 태연한 목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바늘방석에 앉은 것 처럼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지난번엔 다행히 주말에 히트 사이클이 찾아와서 박래현을 계속 속일 수 있었다. 나는 이 달에 있을 히트 사이클도 주말에 찾아오길 바라고 있다.

“추파 던진 적은 없단 말이지? 너한테 관심이 없다니 더 수상한데….”

“그 사람은 날 알파로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의심하지 마!”

“준영아, 형 지금 엄청 참고 있는 거 알지? 내 인내심 바닥 보이게 하지 마. 수틀리면 우리 관계 회사에 다 폭로해 버릴 테니까.”

“어디 그러기만 해 봐. 몇 달간 형하고 말도 안 하고 지낼 거야.”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박래현이 원망스러워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나는 화를 삭이려고 차가운 딸기 주스를 남김없이 다 마셨다. 그걸로 부족해 얼음까지 와그작 씹어 먹었다. 내쪽으로 상체를 구부린 박래현은 달래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무감한 눈빛에 박래현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 서러워졌다. 그때 박래현은 이렇게 무서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너 요즘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시선에 잠시 눈동자가 흔들렸을지 모르겠다. 박래현은 감이 뛰어나고 예민한 사람이라 동요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각인이 풀렸다고 솔직하게 얘기할까? 나는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회의 중이라 다른 남자와 잠깐 귓속말한 걸로 이렇게 생트집을 잡는데 각인이 풀렸다는 사실을 알면 당분간 회사에 발도 못 붙이게 할 인간이었다. 나는 11월에 우리 제품을 수림병원에 랜딩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박래현과 연구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이 기왕이면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으면 했다.

“없어. 내가 형한테 뭘 숨겨.”

“정말 없어?”

“응, 얼른 샌드위치나 먹어.”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박래현 앞으로 샌드위치를 내밀었으나 박래현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혹시 각인이 풀린 걸 알고 있을까? 잠시 정우를 의심하던 나는 아닐 거라고 결론 내렸다. 정우가 내 말을 박래현에게 옮겼다면 그는 미안해서라도 내게 그 사실을 말했을 것이다.

“형, 내가 열심히 해서 우리 회사 제품 꼭 수림병원에 랜딩시킬게.”

“…….”

“형이 고생해서 개발한 제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사용하면 좋겠어. 그러려고 나 진짜 열심히 뛰고 있어.”

그제야 박래현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에 상체를 숙였더니 박래현이 내 입에 샌드위치를 넣어 주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 피곤해 보여 마음이 안 좋았다.

오늘 새벽, 잠결에 몸을 뒤척이다가 옆자리가 텅 빈 걸 발견하고 잠에서 깼다. 박래현은 책상 앞에 앉아 내게 방해가 되지 않게 스탠드를 켜고서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를 침대로 불러들인 나는 피곤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박래현을 엎어놓고 굳은 어깨를 열심히 주물렀다.

‘형,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쌍둥이 여사님들한테 더 맡겨. 나도 최대한 시간 빼서 애들 돌볼게.’

‘그럴 필요 없어. 우리 팀이 암 전이를 막을 획기적인 방법을 연구 중인데 흥미로워서 계속 보게 되네? 이번 실험 성공하면 너한테 보고할게.’

한참을 주물렀더니 굳어 있던 근육이 낭창하게 풀렸다. 이제 그만 해도 된다면서 박래현은 내 팔을 잡아당겨 나를 품에 안았다.

‘형은 연구가 좋아, 애들 키우는 게 좋아?’

‘음, 둘 다 좋아.’

‘그럼 연구가 좋아, 내가 좋아?’

‘그걸 질문이라고 해? 당연히 윤준영은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지. 넌 내 인생인데.’

박래현은 내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각인이 풀리면 박래현에게 무감해질 줄 알고 걱정했는데 내 심장은 여전히 박래현에게만 반응했다.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서 돌이켜보니 각인하기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각인이 풀리고 나서 애틋한 마음이 강해져 박래현이 더 좋아졌다. 각인이 풀린 나를 박래현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다면 각인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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