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몰디브의 연인 (12/16)

“준영아,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자. 조식 오기 전에 씻어야지.”

가까이서 들려오는 박래현 목소리에 그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단잠을 방해하는 이는 달갑지 않았다. 박래현은 등 뒤로 올라와서 나를 끌어안고 내 머리칼에 입술을 문질렀다. 부지런한 그에게선 상큼한 비누 냄새가 났다.

잠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파자마 밑으로 들어와 은근하게 배를 문질렀다. 배 속의 아이들이 아빠의 손길을 느꼈는지 아침부터 발차기를 시작했다.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이 배를 차 대니 속이 시끄러워 잠에서 깨어났다.

귓가에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본 적 없는 생경한 소리에 불현듯 이곳이 서울이 아니라 몰디브라는 자각이 들었다. 열한 시간의 비행 끝에 몰디브에 도착해, 수상비행기를 타고 이 섬에 들어와 맛있게 저녁을 먹은 것까지 기억났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서 잠깐 쉰 찰나에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내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먼 곳까지 왔는데 한가하게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박래현은 목 뒤에 손을 넣어 어깨를 안고서 나를 반듯하게 눕혔다. 다른 손은 계속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준영아, 배 안 고파? 랑이들 시끄러운 거 보니 배고픈가 본데?”

엄마의 태몽에 따라 아이들 태명은 노랑이와 흰랑이로 지었다. 태어나서 피부가 더 하얀 아이가 흰랑이가 될 것이다.

“형, 얼른 씻고 밥 먹고 별이랑 바닷가 가자. 여기 와서 이렇게 늦잠을 자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잠깐! 서두르지 마.”

박래현은 급하게 움직이는 나를 저지하고 먼저 침대를 내려갔다. 나를 침대에 앉힌 그는 내 파자마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별이 임신했을 때도 가슴이 부어올라 곤란했는데 이번엔 쌍둥이들이라 호르몬 분비가 더 활발한 탓에 그때보다 가슴이 더 솟아올랐다. 박래현은 감촉이 남다르다면서 말랑말랑해진 가슴을 좋아하지만 나는 그런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별이 낳고 열심히 가꿨던 몸이 임신으로 다시 동글동글해져서 슬펐다. 나는 이따금 핸드폰에서 근육질 몸이 찍힌 과거의 사진을 불러내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씻기려고 물 받아 놨어. 얼른 씻고 아침 먹어야지.”

괜히 박래현이 미워져서 내 옷을 벗기고 있는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알파도 임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래현은 나보다 체력이 좋아서 세쌍둥이도 거뜬하게 배에 담고 다니다가 힘 몇 번 줘서 아이들을 순산할 것이다.

“우리 준영이 아침부터 왜 심통이 났어? 너 몰디브 온다고 엄청 좋아했잖아.”

파자마 바지와 속옷을 벗긴 박래현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완만하게 부풀었고 배는 22주 들어서면서 눈에 띄게 불룩해졌다. 배에 아이 둘이 들어 있으니 별이 때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안 무거워? 나 살쪄서 무거울 텐데.”

박래현이 힘센 건 알고 있지만 만일을 대비해 드넓은 어깨를 꽉 잡았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 박래현이 피식 웃었다.

“너 하나도 안 무거워. 배가 안 부르면 한 팔로 들 수도 있어.”

“쌍둥이라 그런지 배 나온 게 꼭 7개월은 된 거 같아.”

“우리 쌍둥이들은 누구 닮았을지 궁금해. 별이는 나 닮았으니까 애들은 너 닮으려나?”

박래현은 내게 입 맞추고는 침실과 연결된 뒤쪽 정원으로 향했다. 에어컨이 틀어진 침실에서 벗어나자 더운 날씨가 피부로 느껴졌다. 서울은 초봄이라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녔는데 이곳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밝은 햇살과 담장에 우거진 초록색 나무 이파리들이 우울했던 기분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박은수 선생이 임신 우울증을 예방하기 위해 매일 햇볕을 쬐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형, 저 야자수 나무를 보니까 몰디브 와 있는 거 실감 난다.”

침실 뒤뜰엔 널따란 야외 욕실이 있었다. 커다란 지붕 아래 세면대와 거울이, 담 옆에는 샤워기가, 모래를 가로지른 곳엔 서너 사람이 들어가도 넉넉할 원형 욕조와 선베드가 놓여 있었다. 나무로 만든 얕은 담과 야자수 이파리 사이로 에메랄드색 바다가 언뜻언뜻 보였다. 빌라 앞바다는 우리 가족만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다.

박래현은 물이 반쯤 차 있는 동그란 월풀 욕조에 나를 내려놓고 옷이 젖든 말든 내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물은 내 배꼽 근처에서 가볍게 찰랑거렸다.

나는 욕조에 등을 기대고 박래현을 마주 보았다. 푸른 물을 한껏 머금은 하늘을 배경으로 박래현은 수려한 외모를 자랑했다. 이마에서 부드럽게 살랑이는 갈색 머리칼과 햇볕에 녹아 옅은 호박색으로 변한 눈동자가 붉은 입술과 조화를 이뤄 눈을 황홀하게 했다. 예쁜 얼굴과 대조되게 근육으로 꽉 짜인 매끈한 몸은 언제 봐도 근사했다.

“내가 씻겨 줄게.”

욕조 옆에 세워 둔 나무 테이블에서 샤워 젤을 집어 든 박래현이 젤을 스펀지에 덜어 거품을 냈다. 거품에서 상큼한 레몬 향기가 났다. 그는 내 오른발을 자신의 허벅지에 얹고서 발부터 씻기기 시작했다. 능숙한 손이 거품을 일으키며 발가락 사이사이로 움직였다. 그의 손길에 기분이 나른해져서 욕조에 등을 기댄 채 눈으로 박래현을 더듬었다. 박래현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어서 기다란 속눈썹과 날카롭게 솟은 콧대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서른한 살인 그는 예전보다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여전히 세 아이의 아빠로는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생긴 얼굴 탓에 결혼은커녕 연애에도 관심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정우 말에 따르면 박래현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과 호기심은 여전하다고 했다. 박래현 성격을 잘 아는 회사 사람들은 주로 동경의 시선을 보내는 데 그치지만 박래현을 잘 모르는 바이어나 클라이언트들은 다르게 반응했다.

그들은 박래현이 유부남인 줄 알면서도 은근히 들이댄다는 거였다. 각인으로 맺어진 알파와 오메가 커플이라 해도 대부분 5년 차에 접어들면서 위기를 맞이하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알파나 오메가를 만나면 일단 접근하고 보는 부류가 꽤 있었다.

박래현의 오른손 약지에서 번쩍이는 반지가 박래현 매력에 묻혀 내 생각만큼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했다. 박래현과 4년째 되어 가는 나도 그를 보면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처음 본 사람들은 오죽하랴 싶었다. 누구에게든 다 통하는 얼굴을 가진 박래현의 죄였다. 잘생긴 사람과 사는 건 참 좋은데 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양날의 검이었다.

“윤준영, 무슨 생각을 이렇게 열심히 해?”

“형 꼬시려는 오메가가 아주 많다면서.”

“그러든 말든, 내 눈에 윤준영밖에 안 보이는데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긴. 자꾸 유혹에 노출되다 보면 그럴 마음이 생길 수도 있잖아.”

“그래도 내가 너 학교 다닐 때 속 끓인 거 생각하면 네 맘고생은 아무것도 아닐걸? 내 오메가한테 눈독 들인 사람이 한둘이었어야지.”

박래현이 웃으며 눈을 맞춰 왔다. 달콤한 눈웃음에 뼈와 살과 심장이 살살 녹아내렸다. 박래현의 미소 때문인지 아니면 쨍한 햇빛 때문인지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그런데 김정우가 그래? 내가 비서를 둔 건지 윤준영 스파이를 둔 건지 구별이 안 되네.”

“…….”

“이참에 김 비서 확 잘라 버릴까?”

“그러기만 해 봐.”

나는 발바닥으로 박래현 가슴팍을 가볍게 걷어찼다. 정우를 자른다는 말은 농담이었다. 정우의 스파이 짓이 눈에 거슬렸으면 정우는 3년 전에 잘려서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키스 허락해주면 네 친구는 계속 옆에 둘게.”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박래현의 코끝이 내 뺨을 누르더니 이내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나는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우리 가서 아침 먹어야지. 오늘 스노클링 가기로 했잖아.”

“으음, 다른 건 안 하고 키스만 할게. 얼른 입 벌려.”

“진짜 키스만 하고 끝내야 해.”

쌍둥이들은 조산 위험이 있어서 성관계할 때 조심해야 한다고 박은수 선생이 경고했다. 내가 건강하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부터 박래현과 나는 쌍둥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몸을 사리기로 했다.

“…알았어.”

긴 속눈썹에 그늘진 갈색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그는 벌려 준 입 속으로 뭉클한 살덩어리를 넣어 혓바닥을 깊게 문질렀다. 작은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밀착한 혓바닥이 농염하게 움직였다. 몸을 씻기던 손은 관능을 실어 은밀하게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다. 나는 팔을 뻗어 박래현 목을 끌어안았다.

박래현은 입을 맞추면서 두 손으로 가슴을 감아쥐고서 살살 주물렀다. 부풀어 오른 가슴이 박래현 손아귀에 가득 잡혔다. 가슴을 감싼 손을 리듬감 있게 움직이면서 박래현은 엄지로 젖꼭지를 비볐다. 아랫배에 힘이 바짝 들어가면서 머리가 아찔해졌다. 호르몬 분비가 활발한 탓에 젖꼭지는 슬쩍 만지기만 해도 곤두서곤 했다.

“여기서 젖 나오면 다 내 거야.”

입만 맞춘다는 약속을 잊고 박래현이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일주일 전에 정기검진을 받을 때 쌍둥이를 낳고 나서 모유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남성 오메가도 호르몬 변화가 심할 땐 모유가 나올 수 있다는데, 별이 때와 달리 내 호르몬 수치가 정상보다 높아서 그럴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뒤로 박래현은 계속 모유가 자기 거라는 둥, 나오면 자기가 먹겠다는 둥 헛소리를 했다.

“모유가 나오면 랑이들 먹여야지 왜 형이 먹는다고 그래?”

“너 모유 수유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하는 말이야? 시도 때도 없이 애들 젖 먹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애들 안고 먹여야 하니까 어깨와 골반이 다 망가진다고. 네가 아무리 튼튼해도 그건 안 돼.”

박래현은 내가 이유를 물으면 늘 논리적으로 근거를 댔다. 귀가 얇은 편이어서 나는 그럴 때마다 줏대 없이 그의 주장에 마음이 팔랑거렸다.

“지금도 배불러서 고생하는데 애 낳으면 편하게 쉬어야지. 너 여기서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거기다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을 어떻게 먹여.”

“둘을 먹이는 건 힘들까? 그럼 둘 중 한 놈만 골라서 먹여야 하나?”

임신한 뒤로 박래현에게는 나를 약골 취급하는 버릇이 생겼다. 배가 나왔다뿐이지 나는 누구보다 건강하고 힘이 넘쳤다.

“그건 차별이야.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부당한 차별을 받으면 성격이 비뚤어질 가능성이 커.”

“그런가?”

“애들은 분유 먹일 거야. 젖은… 너 편하게 눕혀 놓고 안 나올 때까지 내가 빨아 줄게. 네 몸에서 나오는 거 버리긴 아까우니까.”

쌍둥이를 낳고 3개월 정도 쉰 다음 출근할 계획이어서 모유 수유를 길게 할 생각은 없었다. 분유만 먹고 자란 별이가 건강한 걸 보면 분유를 먹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애들 먹으라고 생긴 젖을 박래현에게 주고 싶진 않았다. 나는 박래현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젖을 빨아 먹는 상상을 하다가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너무 기괴한 그림이었다.

“형, 정말로 그럴 생각은 아니지? 농담이지?”

박래현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젖을 빨듯 정성껏 젖꼭지를 빨아들였다. 젖꽃판과 꼭지가 박래현의 붉은색 입술에 완전히 덮였다. 그는 내게 눈을 맞춘 채 혀끝으로 젖꼭지의 우묵한 부분을 진득하게 눌렀다. 그 부분으로 야릇한 기운이 돌아서 나는 박래현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스펀지가 내 허벅지 사이로 툭 떨어지더니 그의 손이 포동포동해진 가슴을 감싸듯 움켜쥐었다. 박래현은 가슴을 쥔 손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워서 손끝으로 민감한 살을 자극했다. 비누 거품 때문에 미끌미끌한 손바닥에 젖꼭지가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단순히 몸을 씻기는 행위에 불과했던 손놀림이 느려지고 끈적해졌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태로 몇 개월을 더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으, 으응…. 그마안…, 언제는 키스만 한다며….”

내 얼굴을 본 박래현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계속했다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지 그는 한 발 물러섰다.

“형은 씻었지? 저리 비켜. 나 혼자 씻고 나갈래. 형은 있어 봤자 걸리적거리기만 해.”

“아냐. 내가 씻겨 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박래현은 내 뒤로 와서 욕조에 기대고 앉아 허벅지 사이에 나를 가뒀다. 그의 손이 내 턱을 잡아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머리카락 사이로 미지근한 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샴푸를 손바닥에 짜서 거품을 내고는 내 두피를 구석구석 문질렀다. 열대의 날씨에 어울리는 향긋하고 단 냄새가 코끝을 스쳐 갔다. 늘 해 왔던 일이라 박래현은 능숙한 손길로 머리를 감기고 샴푸를 헹궈 냈다.

“준영아, 눈 감고 있어. 이제 얼굴 씻을 차례야.”

박래현은 얼굴을 씻긴 다음 스펀지에 샤워 젤을 가득 짜서 풍성하게 거품을 냈다. 경추부터 시작해서 어깨와 죽지뼈로 스펀지가 미끄러졌다. 등 전체를 문지른 박래현이 나를 품에 안은 자세로 팔을 앞으로 둘러 빗장뼈와 가슴팍을 비누 거품으로 칠했다.

“못 참겠으면 우리 저녁에 한 번 할까?”

“아냐, 참을 수 있어. 우리 쌍둥이들 너무 일찍 나오면 안 되잖아.”

박래현은 물에 깨끗하게 씻은 스펀지에 새로 샤워 젤을 짜서 내 복부를 씻겼다. 이번엔 나를 욕조에 기대게 하고서 박래현이 마주 보는 자세로 내 무릎을 잡아 벌렸다. 그는 성기와 허벅지, 무릎과 종아리까지 세세하게 스펀지로 문지르고 닦아 냈다.

나는 나를 씻기는 데 심취한 박래현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회사 사람들이나 바이어들은 이렇게 다정한 박래현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두 회사의 대표나 마찬가지인 박래현은 사교성이 없고 인간성 또한 좋지 않은 편이었다. 굳이 장점을 찾자면 정에 휘둘리지 않아서 능력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해 준다는 점 정도가 있을 것이다.

“형 이런 모습 보면 회사 사람들이 놀라겠다. 자기들한텐 차갑게 굴면서….”

“너한테만 잘해 주면 되지, 내가 다른 사람까지 챙겨야 해?”

“…그래도 사람들하고 두루두루 잘 지내면 좋잖아.”

“뭐 못 지내는 것도 없어.”

박래현은 샤워기를 틀어 내 몸에 묻은 비눗물을 씻어 내렸다. 겨드랑이와 팔다리가 접힌 곳, 특히 성기와 구멍 주변은 손으로 직접 문질러 비눗물을 제거했다. 배가 나오고부터 매일 저녁 내 몸을 씻기고 말리는 건 박래현 몫이었다.

“다 됐다.”

새하얀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아 주며 박래현이 피어싱이 박힌 귓바퀴에 쪽쪽 소리를 내어 입 맞췄다. 박래현은 기념할 일이 있을 때면 피어싱을 사서 내 귀를 장식했다. 이번엔 꽃과 나비 모양의 피어싱을 귀에 꽂아 주고는 매우 만족한 얼굴로 내 귀를 들여다보곤 했다.

박래현을 닮은 별이도 피어싱이 박힌 내 귀를 좋아했다. 어느 날은 보석이 예뻐 보였는지 자기도 피어싱을 하고 싶다고 졸랐다. 박래현은 당장 탈부착할 수 있는 귀걸이를 사다가 별이 귀에 달아 줬다. 무겁다면서 별이는 하루도 못 가 귀걸이를 빼 버렸다.

“얼른 들어가. 별이가 우리 찾겠어!”

“알았어, 가서 머리 말리고 옷 입자.”

내 재촉에 박래현은 무릎과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나를 들어 올렸다. 박래현의 젖은 셔츠가 살갗에 닿았다.

“선생님이 나 많이 걸어 다니라고 하셨어. 형이 계속 이러면 운동 부족으로 문제가 생겨.”

“나 없을 땐 걸어 다니잖아. 오후에 별이랑 정원 산책한다며.”

침실로 이어진 입구에서 발을 헹구고 안으로 들어간 박래현이 나를 침대에 앉혔다. 말리지 않아도 물기가 금방 사라질 텐데 굳이 드라이어로 머리칼을 말려 준 그가 허리를 죄지 않는 반바지와 커다란 셔츠를 찾아와 내게 입혔다.

“형도 다 젖었으니까 옷 갈아입어.”

“그럴게.”

박래현이 갈아입은 셔츠에는 추상적인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휴양지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옷은 박래현에게 잘 어울렸다. 그의 옷차림에 놀러 온 기분이 살아나 마음이 들떴다.

“압빠, 저 벼린데, 일어나써?”

문밖에서 씩씩한 별이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박래현은 별이에게 부모님 방에 들어갈 땐 반드시 허락을 받고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빠들 사이에서 자기가 소외당한다고 느꼈는지 별이는 박래현 말에 반항했다. 별이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박래현이지만 그의 단호한 성격이 어디로 가지는 않았다. 별이가 허락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그는 별이를 앞에 앉혀 놓고 그래선 안 되는 이유를 반복해서 알려 줬다.

끈질긴 설득에 별이는 부모만의 사생활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제는 허락을 받고 방으로 들어왔다. 대신 문이 열려 있을 땐 아무 때고 들어와도 좋다는 표시로 알아들었다.

박래현은 문을 열고 나가 침실 입구에 서 있는 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곧 24개월이 될 별이는 또래 애들보다 발육 상태가 좋고 말을 또렷하게 했다. 별이를 처음 본 사람들은 전부 별이가 네 살 정도는 되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아빠들과 있을 땐 여전히 작은 아기였다. 나는 박래현 옆으로 다가가 별이 얼굴을 잡고 찐빵처럼 토실토실한 뺨에 입 맞췄다.

“별이 잘 잤어?”

“네. 오느른 바다 나가서 물꼬기 볼 꺼야.”

“그래. 우리 책에서 봤던 물고기 많이 보고 오자.”

우리는 아침 식사가 차려진 주방으로 향했다. 룸서비스 특성상 전채와 메인 요리, 디저트가 한꺼번에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다.

“다들 잘 주무셨어요?”

“어서 와요. 준영 씨가 제일 피곤했을 텐데 편하게 잘 잤어요?”

“네. 소파에 앉자마자 바로 잠들어 버렸어요.”

주방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웃으며 맞이했다. 집에서 늘 보던 얼굴들이라 특이한 구조의 거실이나 주방 뒷면 유리창으로 보이는 야자수 나무가 아니었다면 잠시 휴가 나왔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한 팔로 별이를 안고서 의자를 뒤로 뺀 박래현은 내가 앉는 걸 확인한 뒤에 별이를 아이용 의자에 앉혔다. 맛있는 냄새에 쌍둥이들이 나보다 더 기뻐하며 배를 빵빵 차기 시작했다.

별이는 호기심이 강하고 활달한 성격인데 배 속 아이들도 별이한테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성격은 나를 닮아야 키우기 편할 텐데 박래현 유전자가 워낙 형질이 강해서 이번 아이들도 박래현을 닮을 확률이 높았다. 이 집에 박래현이 넷으로 불어난다고 생각하니 조금 피곤해졌다.

“든든하게 먹어 둬. 물속에서 놀면 금방 피곤해져.”

박래현은 별이가 먹을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서 별이 앞에 놓아준 다음 내 접시를 앞으로 끌어당겨 고기를 썰었다. 그사이에 나는 바싹 구워진 빵을 수프에 찍어 먹었다. 빵은 고소하고 맛있었다.

“대표님, 준영 씨 스노클링 할 수 있을까요? 쌍둥이면 조심해야 하잖아요.”

조 여사 말에 박래현이 갑자기 마음을 바꿀까 봐 조마조마했다. 몰디브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부터 스노클링을 제일 해 보고 싶었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 밑을 못 보고 돌아가면 너무 억울할 것이다.

“의사한테 허락받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준영이 튼튼해서 너무 오래 놀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조 여사는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박래현 말에 입을 다물었다. 박래현은 3인분 분량의 스테이크를 썰어서 내 앞으로 밀었다. 나는 스테이크 조각에 소스를 묻혀 입에 넣었다. 고기는 부드럽고 연해서 별이가 먹기에도 괜찮았다.

“우리 바다에 들어갔다 나올 동안 김 비서랑 오승현 씨는 별이 투명 보트 태워 주고 있어.”

아침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스노클링을 나가기로 했다. 몰디브에 오기 전에 박래현과 스노클링 강습을 받으며 잠수하는 법을 여러 번 연습했다. 장비 사용법만 터득하면 어렵지 않아서 따로 연습할 필요가 없었지만 박래현은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원래 운동 신경이 뛰어난 나는 몇 번 연습 끝에 스노클링을 완벽하게 익혔다. 수영장이 아니라 직접 바닷속으로 들어가 영상에서만 봤던 아름다운 세상을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별이 보트는 제가 태워 주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김 비서랑 오 팀장도 같이 데리고 들어가세요.”

이 차장의 의견에 정 차장과 조 여사가 동조하고 나섰다. 그들은 스노클링을 하겠다는 나와 박래현이 몹시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평화롭고 잔잔해 보여도 광막한 바다가 100% 안전한 곳은 아니라 그들의 걱정은 일견 타당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진주 씨가 같이 들어가기로 했어요. 두 사람은 내 말대로 별이 데리고 놀아. 우리 나오면 바통 터치하자고.”

“네, 그러겠습니다.”

자기 이름이 오가자 별이가 오동통한 손으로 박래현의 팔을 잡았다. 아이의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압빠, 벼리는 고래 보러 갈네. 고래 보고 시포.”

“오늘은 물고기 보고, 고래는 세 밤 더 자고 보러 갈 거야.”

“고래 내 틴구야. 벼리는 고래가 조아.”

고래 얘기에 초롱이가 생각났다. 박래현은 초롱이 태몽으로 범고래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고 배 속엔 아이 둘이 들어 있지만 나는 이따금 우리의 잘못으로 잃어버린 초롱일 생각했다. 초롱이가 태어났다면 별이와 함께 고래를 보며 기뻐했을 것이다.

“별아, 주스 마시면서 천천히 먹어. 고기는 어떻게 먹어야 하지?”

“꼭꼭 찝어서!”

“그래. 꼭꼭 씹어서 먹자.”

별이에게 갓 짠 오렌지 주스를 먹인 박래현이 내 접시에 과일과 야채를 옮긴 뒤 많이 먹으라는 듯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울적한 기분을 털어 내고 과일과 야채를 고기와 섞어 먹었다. 쌍둥이들은 활달한 만큼 가리는 게 없어서 입덧도 짧게 지나갔다. 박은수 선생 말로는 내가 너무 잘 먹어서 8~9개월이 되면 아이들이 커서 힘들어질 거라고 했다.

“별이 제가 볼 테니까, 대표님 얼른 식사하세요.”

식사를 마친 조수아가 별이 옆으로 와서 별이를 챙길 무렵에야 박래현은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바닷가에 나가 놀 준비를 하는 사이에 나는 턱을 괴고 앉아서 박래현이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박래현은 나와 다르게 소식해서 식사 시간이 짧았다. 적게 먹는데도 에너지가 넘치는 걸 보면 타고난 체력이 제일 중요한 것 같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그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일어서 내 손을 잡았다. 거실로 나간 박래현은 오른쪽 옆구리에 별이를 끼우고서 우리 침실에 이어진 야외 욕실로 나갔다.

세면대 칫솔 걸이에는 박래현과 나, 별이의 칫솔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우리 셋은 나란히 서서 거울을 보며 이를 닦았다. 양치를 마친 박래현은 별이 얼굴까지 깨끗이 씻기고서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 별이를 눕혔다.

바다에서 눈에 확 띄도록 별이에겐 짙은 주황색과 청색이 섞인 래쉬가드를 입히고 커다란 선캡을 씌웠다. 나는 배를 넉넉하게 감싼 임산부용 래쉬가드를 입었고 박래현은 팔 부근에 꽃무늬가 화려한,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래쉬가드로 갈아입었다. 신축성이 좋은 천인데도 민트색 래쉬가드는 박래현의 넓은 어깨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로로 팽팽한 줄을 남겼다.

박래현은 래쉬가드 밖으로 노출된 별이 얼굴과 손등, 발등에 선크림을 발라 준 다음 샌들을 신겼다. 별이를 해결한 그는 나를 별이 옆에 눕혀 놓고 내 얼굴과 목덜미에도 선크림을 발랐다.

“아빠, 언는 나가. 물꼬기 보고 시퍼.”

“잠깐만 기다려. 아빠 다리에 이거 바르고.”

내 손과 발에 선크림을 꼼꼼하게 바른 박래현이 나를 안아서 일으켜 세우고는 챙이 커다란 모자를 씌워 주었다. 별이는 박래현이 안아 주기 전에 침대를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

다른 사람들은 전부 해변에서 놀 준비를 마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이는 자기 과자가 든 배낭을 등에 메고 토끼 인형을 끌어안았다. 정우와 오승현에게 장비를 챙겨 오게 지시한 박래현이 아이스박스와 별이를 들고 빌라를 나섰다. 빌라 바로 앞에는 우리 가족만 쓸 수 있는 바닷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잠시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풍광에 넋을 잃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눈을 멀리 둘수록 에메랄드 색에서 옅은 하늘색으로, 하늘색에서 짙은 파란색으로 변해 갔다. 하늘과 닿는 수평선 쪽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떠다녔다. 몰디브가 지상 낙원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와, 와아!”

바다를 본 별이는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어서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서 다리를 흔들었다.

“별아, 구명조끼 입었어도 절대 깊은 곳에 들어가면 안 돼. 바다는 위험하다고 했지? 삼촌들하고 꼭 붙어서 놀아.”

“네!”

박래현은 확답을 듣고 나서야 별이에게 마스크를 씌우고 스노클을 연결했다. 별이는 아빠에게 배운 대로 입 모양을 만들어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었다. 욕조에 물을 받아 여러 번 연습했기 때문에 아이는 자연스럽게 스노클을 착용했다. 마지막으로 구명조끼를 입혀주자마자 별이는 안고 있던 토끼 인형을 선베드에 팽개치고 신이 나서 바닷가로 달려갔다. 박래현은 미처 신기지 못한 오리발을 들고 별이를 따라갔다.

선베드에서 바다까지의 거리는 3m도 안 돼서 별이의 짧은 다리로도 금방 물에 도착했다. 수중 카메라를 목에 걸고 큰 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간 박래현은 별이에게 오리발을 신기고 그가 바닷속을 관찰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나는 야자수 나무 아래 놓인 선베드에 다리를 펴고 누웠다. 푹신한 침구가 깔린 선베드 위로 야자수 이파리가 그늘져 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둥그스름한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정 차장, 바다 색 좀 봐. 완전 그림이네, 그림.”

“그러게.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별이랑 놀자.”

정 차장과 절친이 된 조 여사와 이진주는 테이블에 가져온 물건을 풀어 놓았다. 멀리서 스노클링 장비를 잔뜩 챙겨서 이쪽으로 오는 정우가 보였다. 정우 얼굴이 밝아 보여서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어머니 약값과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매일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전전긍긍했을 때, 그래도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기만 했을 때, 내게 위로가 되어 준 유일한 친구였다.

그땐 하루하루 사는 게 고역이었다. 몸이 부서지게 일을 해도 월급을 받는 날 돈이 전부 사라졌다. 이렇게 멋진 휴양지에서 열흘씩 머물며 여유를 즐기는 내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때였다. 좋은 데 취직해서 신혼여행으로 일주일간 유럽 여행을 다녀오는 게 그나마 내가 소망했던 가장 화려한 꿈이었다.

박래현이 해마다 천문학적인 수치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만 그때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박래현이 돈 쓰는 것을 보면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야, 오늘 스노클링 하기에 아주 최고의 날씨래.”

장비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정우가 내 것과 나란히 놓인 선베드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신혼부부와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혼자 온 정우가 쓸쓸해 보였다.

“근데 넌 왜 연애 안 해? 오지랖 넓어서 주변에 사람도 많을 거 아냐. 오승현 씨 봐. 일하면서 연애도 하고, 두 마리 토끼 다 잡았잖아.”

오승현과 이진주는 경호를 서다가 눈이 맞아 지금 열애 중이다. 식구들은 그들이 연애한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그들은 사람들이 모르는 줄 알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난 내년에나 생각해 볼게. 대표님이 바이언스로 넘어가면 일이 또 달라질 거라서 여유가 없다.”

박래현은 JS제약을 지 실장에게 맡기고 조만간 바이언스 생명 공학 연구 센터 부센터장을 맡을 계획이었다. 원래 경영보다는 연구를 더 좋아해서 연구 센터 복귀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가 센터장이 아니라 부센터장으로 가는 이유는 연구와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서였다. 박래현은 내가 마음 놓고 회사에 다닐 수 있도록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을 확보하고자 했다. 날 때부터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그는 자신이 겪었던 상실을 아이들이 느끼지 않게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쌍둥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가 일을 줄이고 아이들에게 공을 더 들이기로 했다.

“너 형이 센터장도 아니고 부센터장으로 들어가서 실망이 크겠다?”

“…자고로 제약 회사의 꽃은 신약 개발과 영업 아니겠니? 연구소 근무는 내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정우야, 나도 얼른 출근해서 일하고 싶다. 대기업에 취직해 월급 받는 게 내 오랜 꿈이잖냐.”

“야, 지금이 좋을 때야. 직장이 아무리 좋아도 직장은 직장이다, 너? 일주일도 안 돼 쌍욕 나올걸?”

“그래도 놀라고 하면 일할 거면서….”

“인마, 돈을 벌어야 먹고살 거 아냐. 근데 사람들이 너랑 대표님 관계 알면 다들 너한테 잘 보이려고 줄 서겠다.”

“숨길 수 있을 때까진 숨겨 봐야지. 내가 지금 방법을 연구 중이야.”

회사에서 박래현과 내 관계를 아는 사람은 내게 영어를 가르쳤던 제니퍼 강이 유일한데 그녀는 작년에 미국 지사로 발령 났다. 그동안 박래현이 바이언스보다는 JS제약에 주력했기 때문에 바이언스에 박래현 배우자가 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 나는 사실을 숨긴 채 입사할 예정이었다.

“오승현 씨는?”

“별이 태워 준다고 투명 보트 빌리러 갔어. 얕은 데도 물고기가 있으려나?”

“이쪽은 수중 환경이 발달한 곳이라 물고기가 많대. 별이 호기심이 강해서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절대 눈 떼면 안 돼.”

“알았어. 영리한 애라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안 할 거야.”

“사진이랑 영상도 많이 찍어 줘. 지금 너무 예쁠 때라 다 기록해 두고 싶어.”

“그 말 어째 작년에도 그대로 들었던 거 같다?”

“너무너무 이쁜 걸 어떡해.”

“으휴, 딸 바보가 둘이나 있으니 별이 나중에 연애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

“그러게. 웬만한 놈은 도저히 눈에 안 찰 거 같아.”

내 시선은 물에 둥둥 떠서 바닷속을 관찰하는 별이와 옆에서 별이를 지켜보는 박래현에게 향했다. 물이 얕은지 해변에서 상당히 들어갔는데도 물은 박래현의 종아리 부근에서 찰랑거렸다. 아이들이 놀기에는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참! 준영아, 내가 쌍둥이들 선물로 물고기 인형 사 줄까? 여기 가게에서 파는데 다 이쁘더라?”

“너 그걸로 입 씻으려는 거 아니지? 형이 이번에 너 아파트도 사 줬잖아.”

박래현은 돈을 아끼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겐 물량 공세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2년 동안 자신을 잘 보필한 정우에게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사 주었고 나는 인테리어 전문가를 고용해 아파트 내부를 완벽하게 꾸며 주었다. 정우의 아파트는 우리가 이사할 집과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에이 인형은 덤이지. 내가 애들 태어나면 유아차 사 줄 거야. 아주 좋은 거로.”

“오케이, 유아차 접수. 쌍둥이 유아차는 더 비싼데 괜찮겠어?”

“쌍둥이 유아차는 몇 억 하나? 내 아파트 담보로 잡지 뭐.”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정우가 계속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웠다.

“근데 인형은 지금 말고 우리나라 들어가서 사 줘.”

“왜?”

“애착 인형은 애들이 물고 빠는 거라 유기농 면으로 만든 걸 사야 하거든.”

“오올! 우리 준영이 세심한 구석도 있네?”

“애 아빠 되면 어쩔 수 없어. 이거 저거 다 따지게 돼.”

“아무튼 너 대단해. 스물여섯에 세 아이 아빠라니. 처음에 대표님 만나러 갈 때만 해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아서 마음 아팠는데.”

“…맞아, 그랬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나 형 보고 깜짝 놀랐어. 대리모 찾는다길래 적어도 40대 중반은 됐을 줄 알았거든.”

그때 정우가 엄마를 돌봐 주면서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박래현에게서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박래현의 분노를 사 그에게 평생 위약금을 물어줘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다.

“야, 너 필리핀 도망갔을 때 대표님이 학교로 찾아와서 나 협박했거든? 완전 무서워서 오줌 지릴 뻔했어.”

“그때 너 형 무섭다고 했었지? 왜, 뭐라고 했는데?”

“어? 어, 그냥 평범한 협박이었어.”

자신에게 연봉을 주는 사람이 누군지 깨달은 사람처럼 정우가 말을 얼버무렸다. 박래현이 무난하게 협박할 사람이 아니어서 내용이 더 궁금해졌다.

“야, 너 빨리 얘기해. 세상에서 제일 비겁한 행동이 그렇게 운만 띄우는 거야.”

“후, 알았어. 대신… 대표님한테는 비밀로 해야 해. 비서의 가장 큰 덕목이 입 무거운 거잖아.”

정우는 내 스파이 노릇을 해 왔던 과거를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린 모양이었다.

“비밀로 할 테니까 얼른 얘기해 봐.”

“내가 윤준영 찾는 사이에 준영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네 목부터 날아갈 거야. 가을 하늘이 얼마나 맑은지 실컷 봐 둬.”

정우는 목소리를 낮춰서 박래현이 했던 말을 흉내 냈다. 그런 협박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그 사람은 실제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내가 필리핀으로 도주하게 도와준 정우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너 또라이 상대하느라 마음고생 많았겠다?”

“그러게. 어? 저기 오승현 씨 온다. 별이 잘 보고 있을 테니까 재밌게 놀다 와.”

“알았어.”

“투명 보트 빌렸으니까 두 분도 같이 타고 노세요.”

정우의 권유에 정 차장과 조 여사가 별이 물을 챙겨서 정우와 바다로 향했다. 박래현은 사람들에게 별이를 맡기고 내게 다가왔다. 래쉬가드가 물에 젖어 남자의 몸에 딱 달라붙었다. 사람을 홀리는 청순하고 수려한 외모와 달리 그의 몸은 전체가 근육질이었다. 특히 허벅지의 갈라진 부분이나 무릎뼈, 기다란 종아리 근육이 걸음에 따라 불끈거려서 눈을 사로잡았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그는 내 옆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슬슬 출발해 볼까? 시간 얼추 된 거 같은데.”

박래현이 편하게 누워 있던 나를 안아서 일으켰다. 목이 말랐는데 마침 리조트 직원이 딸기 셰이크와 샌드위치를 들고 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는 박래현에게 딸기 셰이크가 든 컵을 건넸다.

“물속에서 놀면 금방 배고파져. 샌드위치도 먹어.”

“나 배불러. 스테이크 먹은 게 아직 소화 안 됐어.”

나는 이진주에게도 딸기 셰이크를 건넨 뒤 남은 셰이크를 마셨다. 셰이크는 차고 달아서 더운 날씨에 먹기 좋았다. 셰이크를 단숨에 들이켠 박래현은 장비가 든 배낭 두 개를 양쪽 어깨에 하나씩 메고 내 손을 잡아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진주도 자신의 배낭을 메고 우리를 따라 왔다.

스노클링 장비뿐만 아니라 바닷속에 오래 머물도록 도와줄 공기 압축기가 들어 있어서 가방은 꽤 묵직했다. 우리는 산호 절벽에 나갈 수 있는 채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우리가 채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바다로 들어가고 있었다.

“힘 안 들어? 화장실 들렀다가 갈까?”

“응.”

요즘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는 날 생각해서 박래현은 입수하기 전에 화장실부터 갔다. 볼일을 보고 내 손을 씻겨 준 다음 그는 종이 타월로 내 손과 자신의 손을 닦았다. 아이는 배 속에 들어 있는데 그는 나도 아이 취급을 했다.

박래현은 허리에 긴 팔을 두르고서 이진주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나를 선베드에 앉힌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신고 있던 샌들을 벗기고는 노란색 오리발을 신겼다. 나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갈색 머리칼에 손을 넣어 가만히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바다에 들어가서 절대 혼자 다니면 안 돼. 내 옆에 붙어 다녀.”

“넵!”

내 얼굴에 마스크를 씌운 박래현이 공기 압축기에 연결된 스노클을 마스크에 고정했다. 공기 압축기에 스노클을 연결해 잠수하면 한 번에 4~50분 정도 물 밖에 나오지 않고도 바닷속을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마지막에 장갑을 끼워서 나를 준비시킨 그는 자신도 준비를 마치고 이진주에게 들어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바다에 한 발을 내디뎠다. 발목에 따뜻한 물이 찰랑찰랑 감겨 와 기분이 좋아졌다. 무릎 깊이까지 들어간 박래현은 공기 압축기를 바다에 내려놓고 내게 왼손을 내밀었다.

바다는 평온하고 맑았다. 우기라서 파도가 심할까 봐 걱정했는데 날씨가 좋아 다행이었다. 바닷물이 허벅지에 닿을 무렵 나는 몸을 숙여 바다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산호가 보였고 그 사이를 요리조리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를 발견했다. 신기해서 잠시 숨 쉬는 것도 잊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박래현은 수중 카메라로 나와 바닷속을 찍으면서 나를 데리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작은 물고기 떼들이 내 옆을 살랑살랑 지나갔다. 한참 들어갔더니 책과 영상으로 미리 학습한 산호 절벽이 나타났다. 산호가 있는 곳은 물 색깔이 밝은 파란색인데 산호를 경계로 절벽 너머에는 검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산호와 절벽의 경계가 굉장히 뚜렷해서 신기하고 무서웠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은색 홀이 금방이라도 나를 끌어당겨 집어삼킬 것 같아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바다 풍경에 익숙해져 두려움이 가시자 저 깊은 바다엔 뭐가 있을지 호기심이 생겼다. 다음엔 잠수하는 법을 배워서 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었다. 내가 넋 놓고 심해를 보고 있자 박래현이 앞을 가로질러 나와 마주 보았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산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호 위를 기어가는 거북이를 보여 주었다. 나는 거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거북은 경계하지 않고 제 갈 길을 엉금엉금 기어갔다. 배 속에 아이들이 거북이를 보고 반가웠는지 배를 차기 시작했다. 나는 장갑 낀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요것들아, 방정 떨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너희한테 물고기 보여 줄 테니까.’

쌍둥이들은 내 말을 듣지 않고 배 속에서 난동을 부렸다. 약간 신경 쓰였으나 곧 눈앞에 화려한 물고기 떼가 나타나 내 마음을 앗아 갔다. 여기 오기 전에 별이와 미리 공부해 두었던 물고기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예쁜 물고기들을 별이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지금은 얕은 물에서 첨벙거리고 있지만 2~3년 후에는 별이도 이 물고기들을 볼 수 있을 만큼 자랄 것이다. 물론 박래현과 내가 5년 만에 찾아온다는 권태기를 잘 이겨 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물고기보다 나를 더 열심히 찍고 있는 박래현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박래현에게 싫증 난다거나 박래현이 나를 버리는 경우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내 옆으로 노란 물고기 떼가 지나갔다. 지느러미와 꼬리까지 온통 샛노란 색인데 형광이 나는 파란색 줄무늬가 가로로 길게 그려진 물고기들이었다. 거의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움직이며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노란 물결을 이뤘다. 그들은 떼로 지나가며 다리와 배, 팔뚝을 간질였다. 내가 모르는 바다 밑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살고 있었다. 박래현은 물고기 틈으로 나를 찾아와서 나와 자신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준영아, 멋지다. 그치?’

‘어. 진짜 멋있어. 나중에 우리 애들한테도 보여 주고 싶어.’

우린 눈으로 대화를 나누며 물고기 떼와 어우러져 함께 바닷속을 유영했다. 바닷속에서 숨 쉬며 그 무리와 어울리다 보니 내가 물고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바다에 완전히 적응한 나는 오리발을 움직여서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움직였다. 나보다는 바닷속에 신기한 게 더 많을 텐데 박래현은 내 왼쪽에 꼭 붙어서 내가 수중 절벽 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참 촬영을 하던 그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이제 나가야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더 놀고 싶었지만 쌍둥이 때문에 무리할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조트에서 설치해 놓은 로프를 따라 헤엄쳐 가는 도중 우리 앞에 상어가 나타났다. 박래현은 놀라서 나를 와락 끌어안고 산호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

리조트 직원 말로는 산호가 있는 쪽은 물이 얕아서 상어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종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어 놓고도 박래현은 겁먹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상어는 절벽 바깥쪽 깊은 바다에서 유유히 놀다가 사라졌다.

산호를 지나 바닥에 밝은 모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일어선 박래현이 나를 안아서 일으켜 세웠다. 장갑을 벗은 그는 내 입에서 마우스피스를 꺼내고 마스크를 벗긴 다음 손바닥으로 입과 눈 주변을 마사지해 주었다.

“형, 아까 상어 나타나니까 무서웠어? 막 벌벌 떨더라.”

박래현도 마우스피스와 마스크를 벗었다. 그는 공기 압축기를 양손에 들고 내 보폭에 맞춰 바닷가로 걸어갔다.

“너 놀랄까 봐 걱정해서 그랬지. 넌 어떻게 된 게 상어를 보고도 겁을 안 먹어.”

“직원이 상어 나타나도 겁먹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

“안 놀랐으면 다행이고. 근데 너 힘 안 들어?”

“어, 괜찮아. 진짜 재밌었어.”

“오늘은 그만하고 내일 또 하자.”

한 시간을 물속에서 놀았더니 지치고 허기가 졌다. 우리는 원래 입수했던 지점을 찾아 배낭에 짐을 넣고 카페에 들러 오렌지 에이드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신선한 오렌지 주스와 채소가 가득 든 샌드위치가 맛있어서 나는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이진주도 배가 고팠는지 접시 위의 샌드위치가 금방 사라졌다.

허기를 달랜 우리는 짐을 챙겨 들고 빌라로 향했다. 커다란 야자수 나무와 이름 모를 꽃이 우거진 길을 박래현과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고개를 돌리면 파란 물이 뭉텅이로 쏟아질 것 같은 하늘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형 덕분에 이런 데도 와 보고… 정말 고마워.”

“그게 왜 내 덕이야. 다 네 덕이지.”

“내 덕이라고?”

“너 안 만났으면 오늘도 연구실에나 처박혀 있지 이런 데 올 생각 전혀 안 했을 거야. 너랑 별이가 있어서 온 거야.”

박래현은 내 어깨를 팔로 감싸서 내게 가볍게 입 맞췄다. 그는 별이가 있는 바닷가로 가는 대신 나를 이끌고 빌라로 들어왔다.

“왜, 가서 별이랑 놀아 줘야지.”

“거기 사람들 많잖아. 너 피곤하니까 씻고 좀 쉬었다가 점심 먹을 때나 움직이자.”

“그럴까?”

쉬고 싶었으므로 박래현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배낭과 오리발을 거실에 던져두고 우리는 몸부터 씻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가 나를 침대에 눕히고 막 키스하려는 찰나에 밖에서 웅성웅성 사람 소리가 들렸다. 곧 점심시간이라 물놀이 나갔던 사람들이 씻으려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쌍둥이 낳고 다음엔 우리 둘만 오자. 방해 세력이 너무 많아.”

“그래.”

“옷 챙겨 올 테니까 가만히 누워 있어.”

얇은 이불을 끌어서 내 몸을 덮어 준 박래현이 옷장 문을 열고 내가 입을 옷을 골랐다.

통계적으로 알파와 오메가의 각인은 4년 차에 정점을 찍었다가 서서히 꺾이기 시작해 5년 차가 되면 풀리는 게 일반적인 공식이었다. 각인이 풀린 뒤에 노력해서 서로에게 다시 각인하는 커플도 있지만, 이 시기에 다른 알파나 오메가를 만나 이별을 선택하는 커플도 많다고 들었다. 그런 얘기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들렸다. 내가 박래현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각인은 절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

점심은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다. 중간에 간식을 먹었는데도 다들 배가 고팠는지 먹는 양이 평소의 두 배는 되는 듯했다. 별이도 제 아빠가 고기를 발라 주는 족족 오물오물 잘 받아먹었다. 점심을 먹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바다에 나가기로 하고 모두 빌라로 돌아왔다.

“별아, 아빠가 책 읽어 줄까?”

“응, 일거됴.”

“그럼 별이가 읽고 싶은 책으로 골라 와.”

별이에게 책 심부름을 시킨 박래현이 침실로 들어와 나를 침대에 눕혔다. 스노클링과 산책으로 온몸이 나른해진 나는 반듯하게 누워 두 다리를 쭉 뻗었다. 박래현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내 팔과 다리를 부지런히 주물렀다. 저리던 곳이 시원하긴 한데 악력이 세서 누르는 곳이 아팠다.

“피곤할 텐데 얼른 자.”

“형 책 읽는 소리 들으면 금방 잠 와.”

별이가 열려 있는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의 양팔에는 욕심껏 책이 들려 있었다. 박래현은 별이를 안아서 침대 위에 눕히고 별이 옆으로 올라왔다. 별이 통통한 손으로 내 배를 만지작거렸다.

“아빠, 아가들 물꼬기 마니 바써?”

“응. 물고기 진짜 많더라. 별이는 수영도 많이 하고 물고기도 많이 봤어?”

“응. 커다란 가오니랑 나비고기 바써.”

여기에 오기 전에 별이와 몰디브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공부하고 왔다. 나는 물고기 이름을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똑똑한 별이는 물고기 생김새와 물고기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가오니 이러케 커써. 아가들도 보여 주고 시퍼.”

별이는 손과 손 사이를 벌려 가오리의 크기를 알려 주었다. 별이 눈에는 가오리가 꽤 커 보였는지 팔이 점점 바깥으로 벌어졌다. 그 와중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챙겨 주는 별이가 기특해서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별이는 내 품에 안겨 박래현 쪽으로 몸을 틀었다. 빨간 방울을 이용해 양 갈래로 머리를 묶고 있어서 공처럼 둥근 뒤통수가 훤히 보였다. 나는 별이와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려 책장을 펼치고 있는 박래현을 보았다.

“어디 보자. 오늘은 꼬마 요정 이야기네?”

박래현이 글을 읽어 내려가자 별이의 시선이 책으로 향했다. 별이는 이제 글을 읽을 줄 알아서 아빠나 조 여사가 책을 읽어 주지 않아도 혼자서 곧잘 책을 읽곤 했다. 그러나 박래현은 별이에게 책을 읽어 주면 배 속 아이들까지 듣게 돼 일거양득이라며 책 읽어 주는 시간을 줄이지 않았다. 차분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책 읽어 주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슬슬 졸음이 몰려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는 책장 넘어가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쌍둥이들이 움직여 달콤하고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와 같은 방향을 보며 잠든 박래현이 커다란 손으로 내 가슴을 쥔 채 고른 숨을 내뱉고 있었다. 별이에게 책을 읽어 주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곤히 잠들어 있는 딸의 등을 가만히 다독여 주었다. 별이의 낮잠 시간은 길어야 30분인데 오늘은 피곤한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움직여 쥐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기지개를 켰다. 아까 바다 밑에서 보았던 산호와 물고기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푸른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가 돼서 아직도 물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음… 일어났어? 왜, 더 자지.”

“난 많이 잤어. 형은 더 자.”

작게 속삭였는데도 별이가 그 소리를 듣고 눈을 반짝 떴다. 그는 귀여운 입술을 오물거리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압빠~ 나 바다 나가고 시퍼. 가오니 또 볼내.”

“그래. 쉬었으면 가오리 보러 나갈까? 별이 이모한테 가서 수영복 입혀달라고 해.”

“응~ 옷 가라입꼬 오께.”

별이가 총총걸음으로 침실에서 나가자 박래현이 셔츠 앞 단추를 벌리고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말랑말랑한 돌기가 모양 좋은 입술 안으로 힘없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작게 신음하며 박래현 뺨을 양손으로 잡아 그의 얼굴을 젖꼭지에서 뜯어냈다.

“남들이 보면 한 1년은 섹스도 안 하고 산 줄 알겠어!”

“섹스 안 한지 한 10년은 된 거 같아. 너 보면 다 빨아 주고 싶은데….”

박래현은 나를 꽉 끌어안고서 깊게 키스했다. 나는 적당히 키스에 응해 주다가 그의 어깨를 뒤로 밀어냈다. 박래현도 이쯤에서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일으켰다. 먼저 침대에서 내려간 그는 챙이 커다란 밀짚모자와 선글라스를 가져와 내게 씌웠다. 작열하는 태양에 살이 타지 않게끔 얇은 비치가운도 준비해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우리가 늑장 부리며 거실로 나갔을 때 사람들은 소파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정우야, 더 늦기 전에 스노클링 나가. 아까 이진주 씨 제대로 못 봤으니까 같이 가.”

“알았어. 바다는 볼만하든?”

“야, 말로 설명할 수 없어. 직접 눈으로 확인해.”

“이거 기대되는데? 너랑 대표님은 뭐 할 거야?”

“우리? 우린 별이 데리고 놀 거야. 참! 세 분은 리조트에서 스노클링 강의 있던데 가서 들어 보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도 들어갔다 나오셔야죠. 스노클링 되게 쉬워요.”

내 말에 정 차장과 조 여사가 관심을 보였다. 두 사람은 잠시 어떻게 할지 논의하더니 스클링 수업을 들어 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다섯 사람은 리조트 쪽으로 가고 나와 박래현은 간식과 물, 구명조끼를 챙겨서 별이를 데리고 바닷가로 나갔다. 오후는 오전보다 훨씬 더웠다. 햇빛이 너무 강해서 다들 낮잠을 즐기는지 오전만큼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넌 여기서 쉬어.”

“그럼 나 해먹에 누워서 쉴래.”

야자나무 사이에 커다란 해먹이 달려 있었다. 해먹에 누워서 오후의 여유를 만끽하려는데 박래현이 위험하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해먹이 뒤집혀 땅에 떨어질까 봐 지레 겁먹은 표정이었다. 수중 절벽까지 날 데려간 사람이 땅에서 1m도 안 되는 높이에 있는 해먹을 무서워했다.

“그럼 나도 투명 보트 타고 놀래.”

“그게 낫겠다.”

우리는 오전에 별이와 정우가 타고 놀던 투명 보트에 올라탔다. 별이를 제일 앞에 앉히고 그다음이 나, 맨 뒤에 박래현이 앉았다. 나는 보트 옆에 달린 노를 잡고 열심히 노를 저었다.

“준영아, 나 혼자 저을 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

“나도 운동해야지. 별이 낳기 전에 확 커 버려서 마지막에 힘들었던 거 기억 안 나? 형이 맨날 먹고 쉬라고 해서 그렇게 됐잖아.”

내 말에 박래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압빠! 조기 가오니 이써!”

별이는 검지로 바다 밑을 가리키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나는 별이 장단에 맞춰 주려고 가오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가오리는 바닥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천천히 물속을 노닐고 있었다. 한참 노를 젓던 박래현은 보트에서 내려 바다 깊이를 쟀다. 꽤 들어온다고 들어왔는데도 물은 박래현의 엉덩이 부근에서 찰랑거렸다.

“별이 여기다 풀어놔도 될 거 같아. 별아, 바닷속 더 관찰할래?”

“응! 나 오니발 할래.”

별이가 토실토실 살찐 두 발을 박래현 앞으로 내밀었다. 박래현은 별이 발에서 샌들을 벗기고 노란색 오리발을 끼워 주었다. 별이에게 구명조끼를 입히고 마스크를 씌운 박래현이 그에게 마우스피스를 물게 하고는 별이를 바다에 내려놓았다. 별이는 물 위에 둥둥 떠서 바닷속을 관찰했다.

박래현은 구명조끼에 달린 줄을 자기 손목에 친친 감고서 카메라로 별이를 촬영했다. 편한 반바지에 긴팔 셔츠를 팔뚝까지 걷어붙인 박래현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화보 촬영차 이곳에 온 배우 같았다. 핸드폰을 두고 와 박래현의 멋진 모습을 찍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10분 정도 별이를 찍어 준 박래현은 보트로 다가와 이번엔 나를 찍었다.

“형, 카메라 줘 봐. 형도 찍어 줄게.”

“재미없게 나를 왜 찍어?”

박래현은 보트에 올라타지 않고 내게 눈을 맞춘 채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았다. 내가 그의 입술에 입술을 갖다 댄 순간 별이가 오리발로 물장구를 만들어 우리는 물을 뒤집어썼다. 다행히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에 바닷물이 튀지는 않았다. 물이 깨끗하고 맑아 보여도 염분이 있어 닿으면 끈적거렸다. 박래현은 내 배에 귀를 대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여기서 아까 바다에서 들었던 소리가 들려. 우리 애들이 네 배 속에서 헤엄치고 있나 봐.”

“무슨 소리가 나는데? 나도 들어 보고 싶다.”

“아까 바다에서 들었던 소리와 똑같다니까? 내일 바다 들어가서 잘 들어 봐.”

“응… 근데 나 쌍둥이 낳고 언제부터 회사에 나갈까?”

“…6개월 정도 쉬었다가? 11월 쯤에 들어가면 딱 맞겠다.”

“6개월은 너무 길어. 그냥 3개월만 쉴래.”

“너 잘 생각해. 일단 회사에 들어가면 여유 있게 쉬기 힘들 거야.”

“괜찮아. 그동안 너무 놀았어. 근데 나 회사 들어가면 회사에서는 알은체하지 마. 사람들한테 형 배우자란 거 숨길 생각이니까.”

내 배에서 얼굴을 뗀 박래현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왜 밝히면 안 되는데?”

“난 회사 들어가서 말단부터 시작할 건데 형이랑 결혼한 거 알면 상사나 동료들이 내 눈치 보느라 바쁘지.”

“세상에 비밀은 없어. 우리가 지킨다고 지켜질 비밀이 아니야.”

작년 가을에 박래현이 별이를 데리고 학교 도서관에 찾아오는 바람에 나는 학창 시절 막판에 구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벌가 알파들은 대부분 재벌가 오메가나 재벌가 베타 여성과 결혼하는 게 관례였다. 나처럼 가난한 오메가가 시가 총액 1~2위를 다투는 기업의 대표와 결혼하기까지 여러 얘깃거리가 없다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시기가 맞아 금방 겨울방학이 되었고 그 뒤로 소문은 잠잠해졌다.

“내가 지금 좋은 방법을 고민 중이야.”

“글쎄, 생각 좀 해 보고.”

“뭘 또 생각해?”

“4~5년 차에 오메가들이 바람 많이 난다잖아. 너 바람나면 나 빡 돌아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미리 예방해야지.”

“형보다 잘생긴 사람이 있다면 또 모르겠다. 근데 그런 사람이 있겠어?”

“…더 잘생긴 사람이 나타나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소리로 들리네?”

나는 박래현을 내려다보며 그의 입술 선을 따라 검지를 움직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를 두고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가.

보트 밑으로 별이가 지나갔다. 구명조끼에 보트 밑바닥이 닿아 보트가 흔들렸다. 별이는 노란색 오리발로 물장구를 튀기며 신나서 나비고기를 쫓고 있었다. 요령을 터득한 그는 오랫동안 잠수했다가 물 위로 나오길 반복했다.

“난 죽을 때까지 박래현밖에 없으니까 형이나 지조 지켜. 맨날 사람들 홀리고 다닌다며.”

박래현은 늘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라 각인이 깨질 걱정 따위는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의 고민을 엿본 나는 우리 관계를 걱정하는 박래현이 더 애틋해졌다. 동시에 우리가 페로몬에 지배받는 인간이란 사실에 짜증이 났다.

“홀리고 다니다니? 말본새 하고는.”

“걱정돼서 그러지. 형이 다른 오메가한테 눈 돌릴까 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왜애?”

“내가 널 만나기 전에 몇 명의 오메가가 날 유혹했을 거 같아?”

“아주 많았겠지.”

“그래, 셀 수도 없이 많았지. 그런데도 꿈쩍 안 했잖아. 28년 만에 내 오메가를 만났는데 다른 오메가가 눈에 들어올 리 없잖아. 네가 날 버려도 난 평생 너한테 묶여 있을 거야.”

나는 박래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색이 옅은 눈동자는 선글라스에 가려져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았지만 박래현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주변을 맴돌던 별이가 물장구를 치며 우리 곁을 지나갔다. 박래현이 그의 계부가 밀어 넣은 오메가에게, 혹은 정치헌이나 그를 유혹했던 다른 오메가에게 각인했다면 우리 이쁜 딸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끔찍하고 무서운 상상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형이 그때 넘어갔다면 나랑 별이는 형 얼굴도 못 봤겠네.”

“장담하는데 준영이 너 안 만났으면 난 아직도 혼자였을 거야.”

“…….”

“그런데 넌 나 아니었으면 다른 알파를 만났을 거 같단 말이지? 우리 준영이는 알파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을까?”

“…알아. 그래서 학교까지 쫓아와 소문 다 냈잖아.”

“아아, 그건 빙산의 일각이야. 내가 우리 아기들 때문에 말을 삼가지만… 너 각인 풀리고 바람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상대를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리겠다고 했던가? 등골이 오싹해져서 박래현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박래현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지 말로만 겁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고기를 보다가 지친 별이가 박래현 등에 매달렸다. 나는 아이스박스에서 시원한 우유를 꺼내 빨대를 꽂아서 마우스피스를 뺀 별이 입에 물려 주었다. 별이는 순식간에 우유를 다 빨아 먹었다.

“별아, 보트에 올라와서 좀 쉴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몇 개 더 받아먹고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도로 물속에 잠수했다.

“쟤는 누구 닮아 저렇게 체력이 좋아?”

“누구 닮긴. 운동 좋아하는 윤준영 닮아 저러지.”

우린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내가 고개를 숙여 박래현 입술에 키스하자 선글라스 두 개가 서로 부딪혔다. 나는 입술을 떼고서 박래현 뺨에 입 맞췄다.

“형은 내가 변할까 봐 걱정돼?”

“지금 보면 절대 안 변할 거 같지만 그게 네 마음대로 될까?”

“각인 풀리면 또 각인하면 되지. 형 자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잖아.”

“…그렇긴 해. 넌 내 자지 아니면 만족 못 할 테니까. 누가 그 깊은 곳까지 쑤셔 주겠어.”

물속에 잠겨 있던 별이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박래현에게 와 보라고 손짓했다.

“카메라 줘. 둘이 노는 거 내가 찍어 줄게.”

내게 카메라를 건넨 박래현이 별이에게 다가가 그 옆에서 같이 잠수했다. 나는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며 두 사람의 모습을 부지런히 영상에 담았다. 두 사람 다 오전 내내 질리게 물에서 놀았으면서 지금도 쉼 없이 바다를 탐험하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 행복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미래에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각인이 풀린다 해도 박래현에 대한 내 마음을 그대로 간직할 자신이 있었다.

***

오늘도 어제와 비슷하게 일정이 흘러갔다. 오전, 오후 팀으로 나눠 스노클링을 했고 스노클링을 하지 않은 팀이 별이와 놀아 주었다. 어제는 피곤해서 저녁을 룸서비스로 시켜 먹었는데 오늘은 예약해 둔 카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카페가 일몰로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진탕 놀고 난 뒤 휴식을 취하고 있던 우리는 여섯 시 조금 넘어서 빌라를 나섰다. 별이를 목에 태운 박래현은 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카페에 도착한 우리는 일몰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로 안내되었다.

별이를 자리에 앉힌 박래현은 내가 앉을 수 있게 난간 바로 옆에 있는 의자를 꺼냈다. 우리 테이블에는 나와 박래현, 별이와 정우가 앉았고 다른 사람들은 두 테이블에 나눠 앉았다. 박래현은 메뉴판을 펼쳐 보이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준영아, 뭐 먹을래? 나시고랭하고 치킨 커리 시켜 줄까? 피자는 어때?”

“나 치킨하고 나시고랭 먹을래. 음료는 망고 주스.”

내 의견을 접수한 박래현이 사진이 나온 것도 아니고 이름과 가격만 적혀 있는 메뉴판을 별이가 볼 수 있게 내밀었다.

“별이는 뭐 먹을 거야? 치킨, 파스타, 치킨 커리 중에 골라봐.”

“벼리 치킨이랑 파슷타 머글래.”

박래현이 우리가 먹을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정우도 자기가 먹을 음식을 골랐다. 그는 알리올리 파스타와 햄버거를 주문했다.

“대표님, 우리 시원하게 맥주 한 잔씩 어때요?”

정우의 제안에 박래현이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임신한 뒤로 박래현은 내 앞에서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았다. 내 허락을 받고서야 박래현은 맥주를 추가해 주문했다. 주문이 끝날 무렵 해가 지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꺼내 든 박래현이 석양을 등진 나와 별이를 영상에 담았다. 박래현은 나와 별이 덕분에 사진과 영상을 찍는 실력이 수준급이 되었다.

“별아, 저기 바다 좀 봐. 와! 진짜 멋있다.”

어젯밤엔 나오지 않아서 몰랐는데 리조트에 온 사람들이 다 모여든 것처럼 카페와 바닷가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셀카를 찍고 사진을 찍고 해 지는 모습을 영상에 담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나는 별이를 안아서 바다를 볼 수 있게 난간 끝에 앉혔다. 박래현이 무거운 별이를 들었다고 옆에서 잔소리를 했지만 별이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압빠, 예뽀!”

“그러게. 저기 저건 무슨 색이지?”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는 수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짙붉은 석양은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순식간에 없애면서 넓게 퍼져 나갔다.

“듀항색.”

“맞다! 주황색이네. 노란색도 보이고 붉은색도 보인다, 그치.”

나는 말랑말랑한 별이 볼에 입을 맞췄다. 우리를 찍다가 언제 다가왔는지 박래현이 나와 별이를 두 팔로 안았다. 나는 일몰의 화려한 모습에 푹 빠져서 박래현이 가까이 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주황색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바다 너머로 떨어지자 다채롭게 변해 가던 풍광도 단조로운 색으로 변했다.

일몰을 보려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흩어졌다. 바닥에 붙박인 커다란 공 모양의 조명에 불이 들어와 은은하게 어둠을 밝혔다. 우리는 의자로 돌아가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배가 고파서 나시고랭과 치킨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달콤한 망고 주스도 맛있었다.

중간에 간식을 먹는데도 식사 때가 되면 늘 허기져서 걱정이었다. 별이 낳고는 몸이 금방 예전 상태로 돌아갔는데 쌍둥이를 낳고는 살이 쉽게 안 빠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준영아, 여기 마음에 들어?”

“어, 진짜 좋은데?”

“내년엔 비행기 타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볼까? 올핸 너 힘들어서 가까운 데 왔으니까.”

“그땐 별이도 스노클링 할 수 있겠다. 오늘 봤더니 아주 물개야, 물개.”

“아빠, 벼리는 여기 됴아! 여기서 사라!”

별이는 망고 주스를 마시다 말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박래현을 보았다. 이틀 동안 바다에서 신나게 놀더니 계속 여기서 지내고 싶은 듯했다. 하얗던 아이의 살이 점점 까매지고 있었다.

“별아, 그건 아빠가 더 생각해 볼게. 우리 별 보러 갈까?”

별이를 안은 박래현이 내가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카페 앞에는 원형의 커다란 데이베드가 있어서 편하게 누워 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정우는 오승현, 이진주와 카페에서 술을 더 주문해서 마시기로 했고 다른 사람들은 빌라에서 영화를 보겠다며 먼저 들어갔다.

우리 가족은 데이베드에 눕기 전에 소화를 시킬 겸 바닷가를 한 바퀴 돌고 왔다. 박래현은 별이를 먼저 베드에 내려놓고 내가 베드에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나를 도왔다. 커다란 쿠션 두 개가 등받이 부근에 놓여 있어서 자세 잡기에 편했다. 내가 자리를 잡자 박래현은 별이를 안고서 내 옆에 누웠다.

데이베드가 여러 개 있지만 이용하는 커플은 우리 둘밖에 없었다. 신혼부부와 연인들은 다들 침실로 돌아가 밤을 불사르는 데 힘을 쓰는 듯했다.

“별아, 저기 하늘에 별 많은 거 봐.”

박래현 가슴팍에 누워서 발을 높이 들어 올린 별이가 두 손으로 발목을 잡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아, 우리 별자리 찾기 놀이할까?”

“응! 별짜리 찾고 시퍼.”

“여기 봐. 이게 북두칠성이거든? 어디 있는지 한번 찾아보자.”

박래현은 핸드폰을 꺼내 북두칠성 사진을 별이에게 보여 주었다. 핸드폰에서 별자리 모양을 확인한 별이는 수많은 별들 중에 북두칠성을 금방 찾아냈다. 북두칠성에 관해 간략하게 얘기해 준 박래현은 두번째로 오리온 자리를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은 별자리 찾는 재미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별자리를 찾아다녔다. 나는 박래현과 별이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아름다운 밤하늘을 즐겼다. 화려하게 생긴 별들이 새까만 장막에 촘촘하게 박혀 무겁게 반짝였다. 자칫 뾰족한 모서리에 얼굴이 찔릴 것처럼 별은 가까이에 있었다.

“와, 저기 별똥별 좀 봐!”

내가 흥분해서 내지르는 소리에 별이가 몸을 발딱 일으켰다. 하늘에 빛줄기 하나가 길게 꼬리를 그리며 오른쪽 바다로 사라졌다.

“형, 별아, 우리 얼른 소원 빌자. 빨리!”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소원을 떠올렸다. 빌고 싶은 많은 소원 중에 박래현과 내가 오래오래 서로에게 각인해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빌었다. 눈을 떴을 때 긴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소원을 비는 별이가 보였다.

“별이 무슨 소원 빌었어?”

나는 별이 쪽으로 몸을 돌려 아이의 눈을 응시했다. 별이가 작은 손으로 내 배를 만졌다.

“아가들 언는 나오라고 비러써.”

“정말? 우리 별이는 좋은 누나 되겠다. 벌써 동생들 이렇게 생각해 주고.”

별이가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 공룡을 보러 가자는 소원을 빌 거라고 여겼던 나는 별이 소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박래현도 별이가 기특했는지 별이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박래현과 내가 배를 만져 주자 별이가 길게 하품을 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아이는 금방 잠이 들었다. 박래현은 별이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는 별이를 뒤집어 편하게 안았다.

“형은 무슨 소원 빌었어?”

“그런 거 다 미신이야. 유성은 혜성이나 소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가 대기 안으로 들어오면서 마찰이 일어나 불타는 과학적 현상이야. 과학에 대고 무슨 소원을 빌어?”

“누가, 누가 그걸 모른대? 알면서도 기분 좋아지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런 데다 빌지 말고 네 소원은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나한테 빌어.”

나는 기가 막혀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로맨틱한 외모에 시를 좋아하게 생겼는데 그의 내면에서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별과 별똥별을 보며 과학을 찾고 있다니.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별똥별이 하나 더 지나갔다. 나는 얼른 눈을 감고 엄마와 내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박래현은 이번에도 소원을 안 빌었는지 나만 고집스럽게 보고 있었다. 소원 두 개를 공으로 날린 박래현이 괘씸해서 나는 박래현의 볼을 아프게 꼬집었다.

우리는 그 뒤로도 매일 밤 별 구경을 하며 낮에는 숙소 근처에서 유유자적 스노클링과 해수욕을 즐겼다. 그리고 닷새째 되는 날 별이가 고대하는 돌고래 투어를 준비했다. 요트를 타러 가기 전에 우리는 엄마와 영상 통화를 했다. 건강 말고는 걱정할 일이 없어서 엄마 얼굴은 밝아 보였다. 그러나 심장 이식 수술은 수술이 끝났다고 완치되는 병이 아니었다. 남의 장기와 공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엄마는 늘 면역 억제제를 드셔야 했고 다른 합병증 때문에 약을 달고 사셨다. 그래도 나와 별이를 볼 수 있어서 수술하길 잘했다고 하셨다.

박래현은 별이와 카메라를 챙겨 거실로 나갔다. 나는 우리 세 사람이 쓸 모자와 선글라스를 찾아서 그들을 따라갔다. 자유롭게 오전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거실로 모여들었다. 한적한 몰디브의 풍광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에도 여유가 넘쳤다. 여기서 살면 서두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빌라 밖에는 우리 식구들을 선착장까지 데려갈 전동차 두 대가 서 있었다. 어제 비가 내린 탓에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맑고 대기가 청량했다. 나는 심호흡하며 셔츠의 벌어진 부분에 걸어 둔 선글라스를 꼈다.

전동차에 나를 태운 다음 별이를 안고 내 옆으로 올라탄 박래현이 내게서 모자를 받아 내 머리에 씌웠다. 기다랗고 날렵한 손이 바람에 모자가 날리지 않도록 모자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형, 고래 꼬리 보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 들어 봤어?”

나는 별이랑 고래를 검색하다가 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둘이서 고래를 보면 무슨 소원을 빌까 고민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아니. 넌 도대체 그런 소릴 어디서 주워들어?”

“내가 원래 상식이 풍부하잖아. 근데 돌고래 꼬리도 해당되려나?”

“돌고래도 고래니까 해당되겠지. 너는 별똥별 보고 빌어 놓고 아직도 빌 소원이 남았어?”

“으응….”

“내가 너한테 잘 못해 주나 보다. 빌 소원이 많은 걸 보니.”

“…그건 아냐. 그래도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영역이 있잖아. 그런 걸 비는 거지.”

박래현이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설득하는 말투가 되어 버렸다. 한마디 더 덧붙이려다가 소원이 있으면 자기한테 빌라던 말이 생각나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말이 안 통할 것이다.

전동차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박래현은 별이를 정우에게 넘기고 먼저 내려서 내가 안전하게 내릴 수 있게 손을 잡아 주었다. 선착장에는 2층에 공간이 있는 대형 요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저희 블루버드에 승선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놀랍게도 가이드가 한국 사람이었다. 반갑게 우리를 환영한 남자가 우리를 요트 1층으로 안내했다. 요트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들어가서 식사하세요. 돌고래 출몰 지역은 식사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겁니다. 그때 갑판이나 2층에 올라가셔서 돌고래 구경하시면 돼요.”

아침을 먹고 간식을 안 먹었더니 음식 냄새에 입에 침이 고였다. 원래도 잘 먹는 편인데 쌍둥이 녀석들이 먹는 걸 좋아해서 양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써 오쎄요. 판갑씁니다.”

머리에 흰 모자를 쓰고 흰색 옷에 흰색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테이블 세팅을 지시하다 말고 우리에게 밝게 인사를 건넸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셰프인 듯했다. 우리에게 인사하고 나서 그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점심의 주메뉴는 소스를 바른 랍스터와 양고기 요리였다. 셰프와 종업원들이 옆에서 지켜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때에 제공했다. 특히 셰프가 나와 별이의 양고기를 직접 정리해 주고 음식이 입에 맞는지 계속 신경 써 준 덕분에 한결 맛있게 느껴졌다. 음식도 괜찮았고 후식으로 나온 망고 셔벳도 달콤해서 좋았다.

“식사 끝났으면 갑판으로 나가시죠. 이제 곧 돌고래들이 올 시간이에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정우는 별이에게 선글라스를 끼우고 구명조끼를 입혔다. 사람들은 돌고래를 가까이서 보려고 요트 갑판으로 나갔고 나와 박래현은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차양이 설치된 원형의 데이베드가 마련되어 있어서 편하게 돌고래를 구경할 수 있다고 했다. 나를 데이베드에 앉히고 가져온 물을 컵홀더에 내려놓은 박래현이 등에 쿠션을 대 주고는 내 발치에 앉았다. 그쪽은 차양에 가려지지 않아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어디 뭉치거나 아픈 데 없지?”

“응, 근데 왜 거기 앉아? 더운데 옆으로 와.”

내 발에서 샌들을 벗긴 박래현이 발목을 잡아서 발바닥을 지압했다. 움푹 팬 곳을 주먹으로 문지른 후에 발가락을 뒤로 눕혀 긴장을 풀어 준 다음 발을 주물렀다. 발을 다 주무르고 나서 종아리와 허벅지도 열심히 마사지했다. 나는 쿠션에 등을 기대고 반쯤 누운 자세로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파란 하늘과 짙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형, 우리 별이가 곧 두 돌이라니 믿어져? 막 태어났을 때 이게 언제 클까, 그런 생각 했었는데.”

“그러게. 우리 쌍둥이들도 낳으면 금방 클 거야.”

물티슈에 손을 닦은 박래현이 내 옆으로 누우며 습관처럼 배를 쓰다듬었다. 태동 때문에 그의 손이 움찔움찔 움직였다. 꽤 깊게 잠드는 편인데도 애들이 심하게 놀 땐 놀라서 자다가 깨곤 했다.

“앞으로 너랑 CC 될 생각 하니까 기대돼.”

나는 본사로, 박래현은 연구 센터로 출근할 텐데 박래현과 회사에서 마주칠 일이 얼마나 있을까. 건물이 달라서 같이 출퇴근하는 시간 빼고는 회사에서 얼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형 상사라고 나한테 갑질하고 그러면 안 돼.”

“왜 안 돼? 심심하면 너 불러서 구멍 빨아 줄 건데.”

“집에서 하면 안 돼?”

“아예 연구소로 발령 낼까? 옆에다 달고 다니게.”

“싫어. 나 전공 살려서 마케팅 리서치 팀으로 갈 거야. 연구소로 발령 내면 가만 안 둬.”

장단을 맞춰 주고 있지만 박래현은 내게 실무 경험을 쌓게 한 뒤 나중에 나를 바이언스 대표 자리에 앉힐 궁리를 하고 있었다. 고로 나를 연구소로 발령 낼 일은 아예 없었다.

“어쭈. 너 내가 연구소로 발령 안 낼 거 같아? 나한테 각인해 있을 동안은 본사에서 일해도 돼. 하지만 각인 풀린 순간, 넌 연구소로 직행이야.”

박래현은 왼쪽 손에 턱을 괴고서 손끝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다가 선글라스를 벗겼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얼굴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각인이 풀린다고 사랑이 식겠어? 풀릴 일도 없겠지만 풀린다고 내 마음이 변하진 않아.”

“나 미치는 꼴 안 보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박래현은 고개를 숙여 내게 입 맞췄다. 어느새 셔츠 단추를 풀고 들어온 손이 가슴을 한 움큼 쥐고 주물렀다. 어젯밤에도 자기 전에 실컷 빨고 만졌으면서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달궈진 혀가 질척하게 섞일 무렵 아래 갑판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고래가 보고 싶어서 나는 박래현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이 낳고 둘이서만 여행을 가자고 했는데 고려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식구들이 있어서 관광을 다니지 박래현과 둘만 오면 도착한 날부터 출발할 날까지 호텔에만 처박혀 있을 게 뻔했다.

“준영아, 잠깐만! 내가 손잡아 줄 테니까 가만있어.”

박래현 말을 무시하고 샌들에 발을 꿴 나는 요트 가장자리로 가서 안전바를 잡았다. 돌고래보다 구명조끼를 입고서 요트 맨 앞에 앉아 고래를 지켜보는 별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별이는 신이 나서 돌고래 무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환호하고 있었다.

“형, 별이는 바다가 무섭지도 않나 봐.”

“너도 스노클링 할 때 겁 없이 깊은 데로 들어갔잖아.”

박래현이 옆으로 와서 내 어깨를 팔로 감쌌다. 짙푸른 바다 표면 밑에서 유유히 돌아다니는 돌고래 무리를 발견했다. 돌고래가 나타나자 그 주변으로 요트와 배들이 떼 지어 몰려들었다.

“형, 저기! 돌고래 나타났어!”

돌고래 몇 마리가 물에서 뛰어나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 등과 살진 흰 배를 골고루 보여 주며 공중회전을 하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고래들의 멋진 쇼에 사방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정우에게 안겨 있는 별이도 좋아서 몸을 들썩거렸다. 아이들은 공룡과 돌고래를 좋아한다더니 배 속에 든 쌍둥이들도 고래가 반가워 소란을 피웠다. 배 속이 쿵쿵 울려 대자 나는 박래현에게 몸을 기댔다.

“형, 애들 고래 되게 좋아하나 봐. 난리가 났어.”

“네가 더 좋아하는 거 같은데?”

“…사실 나도 좋아.”

2층이라 시야가 넓어서 돌고래 무리가 한눈에 다 보였다. 그들 중 몇 마리는 아치 모양을 그리면서 백스핀을 하기도 했다. 오늘 돌고래 여러 마리의 꼬리를 보았으니 소원을 열 개 정도는 빌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당장은 빌 소원이 없으므로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소원 빌 일이 생기면 하나씩 꺼내 돌고래 꼬리 찬스를 쓰기로 했다.

“준영아, 고래 보니까 우리 초롱이 생각난다.”

나는 박래현의 옆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 자신이 꾸었던 태몽을 상기하듯 그는 돌고래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유산했을 때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던 박래현이 생각났다. 차디찬 아이 방에서 웅크린 채 자던 모습도.

“그때 더 일찍 내 감정을 인정하고 너에게 솔직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따금 생각하곤 해. 그랬다면 초롱이가 우리 곁을 떠나진 않았을 테니까.”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멍처럼 남아도 나는 초롱이를 잊으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별이를 초롱이가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별이를 낳을 결심을 했었다.

박래현이 뒤에서 나를 안은 채 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나는 바위처럼 버티고 선 그에게 등을 기대면서 파도가 너울대는 짙푸른 바다를 응시했다. 아까보다 더 많은 돌고래 떼들이 몰려와 우리 주변을 맴돌다가 먼 바다로 유유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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