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살짝 밝힐 정도로만 켜 놓은 무드 등에서 오렌지색 불빛이 새어 나와 방 안을 아늑하게 비추고 있다. 홀로 잠들어 있던 남자는 잠결에 문득 긴 팔을 휘저어 옆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듯 침대 위를 더듬었다. 몇 번 비어 있는 곳을 더듬다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방을 비추고 있는 불빛만으로 부족했는지 그는 리모컨을 찾아 전등을 켜고 빛이 구석구석 스며든 방을 두리번거렸다. 반듯하고 정갈한 미간을 구기며 남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침대에서 내려와 윤준영을 불렀다.
“윤준영, 준영아, 어디 있어? 윤준영!”
윤준영이 저를 버리고 사라졌던 전적 때문에 박래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욕실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혀 안을 살폈다. 세수를 마친 윤준영이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하는 걸 보고서야 박래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윤준영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는 듯 크게 떠진 눈동자 안에는 박래현을 향한 걱정과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박래현은 그에게 성큼 다가가 윤준영의 어깨를 안고서 정수리 언저리에 입술을 문질렀다. 보드라운 머리칼이 입술과 코를 간질이면서 살랑살랑 움직였다. 임신 17주에 접어들면서 윤준영은 자주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그걸 알면서도 윤준영이 시야에서 벗어나면 박래현은 초조해지고 가슴부터 덜컹거렸다.
“새벽부터 웬 호들갑이에요?”
“자다가 너 안 보여서 놀랐어.”
“형 귀에 대고 화장실 간다고 말했어요. 자기가 못 들어 놓고….”
박래현은 수건을 꺼내서 윤준영의 얼굴과 젖은 손을 닦아 준 뒤 어깨를 끌어안고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물기가 스며들어 촉촉해진 뺨에 입 맞추며 유리 다루듯 조심스럽게 윤준영을 침대에 눕혔다.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배가 부풀어 올라 윤준영은 잘 때 답답하다며 파자마 하의는 벗어 던지고 상의만 입고 잠들었다. 덕분에 탄탄한 허벅지와 기다란 종아리가 조명을 받아 희게 빛났다.
누르면 누른 대로 손가락 모양이 찍힐 것처럼 깨끗하고 부드러운 살갗이었다. 박래현은 윤준영의 무릎을 잡아 좌우로 크게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왼손으로 매트리스를 짚어 몸무게를 지탱하고서 상체를 수그려 짧아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말간 얼굴과 대조되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삐죽삐죽 빠져나왔다.
윤준영은 사랑스럽게 웃으며 두 손으로 박래현 목과 뒤통수를 감싸서 제 입술 가까이 끌어당겼다. 윤준영이 적극적으로 마음을 보여 주는 게 좋아서 박래현은 이끄는 대로 따라가 입술을 겹쳤다. 막 이를 닦았는지 차갑고 상큼한 혀가 박래현 입술을 벌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두 개의 혓바닥이 어느 한구석 빠진 데 없이 서로를 핥고 문질렀다. 금세 깊어지는 키스에 당황스러우리만큼 빠르게 피가 아래로 몰렸다.
박은수는 어제 박래현에게 전화해서 이제 유산 위험이 사라졌으니 마음 놓고 섹스해도 된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전에도 가벼운 페팅이나 유사 섹스는 계속해 왔지만 윤준영이 유산한 경험이 있어서 두 사람은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서로 애정을 확인하는 선에서 멈추곤 했다.
연애다운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눈만 마주치면 아래가 꼿꼿하게 일어서는 부부에게 섹스가 없는 생활은 고역이었다. 욕구 불만이 쌓이면서 작은 접촉에도 쉽게 달아올라 나중엔 키스마저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원래 예정에 없는 임신이었다. 초롱일 덧없이 보내고 걷잡을 수 없이 비탄에 빠졌던 박래현은 윤준영이 대학을 졸업하고 두 사람이 충격에서 벗어날 때까지 임신은 뒤로 미룰 생각이었다.
윤준영과 자신의 시작이 보통의 연인들처럼 순탄하게 이루어진 게 아니어서 서로를 알아 갈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도망갔다가 잡힌 윤준영 배에 선물처럼 아기가 들어 있었다.
배가 부풀어 오르는 걸 보고 있는데도 윤준영 배에 자신의 아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늘 경이로운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초롱일 가졌을 때도 신기했지만 별이는 박래현 계획에 없었던 아이라 더 놀랍고 먹먹했다. 필리핀까지 도망가 몰래 숨어 살면서도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 윤준영이 참으로 고마웠다.
“형, 이 민망한 자세는 뭘 의미하는 거죠?”
“준영아, 기뻐해. 은수 누나가 이제 마음대로 섹스해도 된대.”
“그래요?”
“응, 너 오늘만 기다렸지.”
“기다린 건 형이겠죠.”
박은수 말에 기뻐하며 파자마 단추를 풀 줄 알았던 윤준영이 영 시원치 않게 반응해서 당황스러웠다. 윤준영은 그동안 유사 섹스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허리를 흔들어서 박래현은 매번 아슬아슬하게 이성을 붙잡아야 했다. 아무리 자제력 강한 알파라 해도 자신이 각인한 오메가가 살이 오른 엉덩이를 흔들며 노골적으로 유혹하는데 참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형, 선생님 허락이 떨어지면 형이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요.’
윤준영은 측은한 얼굴로 박래현을 달래며 박래현이 잘 견딜 수 있게 사탕을 먹였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박래현보다 더 애타게 오늘을 기다려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막상 박은수의 승낙이 떨어진 상황에서 윤준영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형, 이 생각 없이 자라난 물건은 뭐예요? 이게 자지야, 몽둥이야?”
옹골차게 발기한 성기가 윤준영의 아랫배를 꽉 누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박래현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속옷을 입지 않아서 얇은 파자마 바지를 따라 장대한 성기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윤준영은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장막 뒤에서 조용히 포복해 있다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성기를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손안에서 자지가 꿈틀꿈틀 반응을 보이자 윤준영은 기둥과 귀두를 손바닥으로 압박하며 능란하게 문질렀다. 프리컴으로 질척해진 천이 얇은 표피에 비벼지면서 예민한 성감을 부추겼다.
자지에 직접 와 닿는 자극도 자극이지만, 박래현은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홀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반짝거리는 눈은 귓바퀴에서 빛나는 보석보다 영롱했고, 분홍색으로 물든 양쪽 뺨은 화사한 살구꽃을 연상케 했으며 시원시원하게 벌어진 입술은 담장을 타고 오르는 덩굴장미를 닮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남자답고 야무지지만, 신기하게 입술과 뺨은 고운 꽃의 질감을 떠오르게 했다.
박래현은 보드라운 감촉을 다시 느끼고자 허리를 숙여 윗입술을 혀로 문질렀다. 자신의 혓바닥에서 살살 녹아내리는 입술을 형체도 남기지 않고 다 빨아 먹고 싶어서 욕심껏 윤준영 입술을 집어삼켰다.
입술이 열리길 기다릴 틈도 없다는 듯 탐욕스러운 혀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박하 향이 밴 혀에 붉은 살덩이가 비벼지면서 퇴폐적이고 색정적인 신음이 이어졌다. 끝까지 박래현을 응시하던 고동색 눈동자가 짙은 속눈썹에 가려지면서 맞붙은 입술 사이로 가쁜 호흡이 새어 나왔다. 박래현은 뒤로 물러서려는 혀를 재빠르게 잡아 물면서 보들보들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볐다. 더운 호흡이 섞이며 젖은 살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에 박래현 귀가 움찔거렸다. 청각뿐만 아니라 희미하게 풍겨 오는 레몬 향에 후각과 촉각마저 완전히 젖어 들었다.
“으, 으읍…!”
입술을 벌려 상대를 받아들이던 윤준영이 박래현 어깨를 세게 틀어쥔 다음 뒤로 밀어냈다. 그는 뭔가 심통이 난 얼굴로 몸을 홱 돌려 옆에 널브러져 있던 토끼 인형을 품에 안았다. 자세 때문에 완만하게 부풀어 오른 배가 눈에 띄었다. 둥그런 배는 날씬한 팔다리와 대조를 이뤄 박래현의 심장을 빠른 속도로 뛰게 했다. 박래현은 윤준영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비비면서 그의 머리를 들어 팔베개를 해 줬다.
“청개구리야, 뭐야. 하지 말라고 할 땐 열심히 했으면서 하라고 하니까 왜 거부하는 거지?”
자신이 윤준영에게 잘못한 게 있는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면서 박래현은 파자마 위로 손을 올려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윤준영이 토끼를 쓰다듬고 있어서 꽃무늬 천을 덧댄 토끼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있으면 말해 봐.”
붉어진 귓바퀴 사이에서 다이아몬드가 색색으로 빛났다. 박래현은 상대의 귀를 핥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며 혀로 자신의 입술을 적셨다. 윤준영은 배 위에 올라와 있는 커다란 손에 자신의 손을 깍지 끼더니 힘을 줘서 허벅지 쪽으로 내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파자마 자락을 들쳐 꿋꿋하게 들어간 손이 두 번째로 거부당했다.
“앞으로 제가 허락할 때까지 저 만지지 말아요! 성관계는 저만 요구할 수 있다고 결혼 계약서에 명시돼 있는 거, 안 잊었죠?”
갑자기 결혼 계약서를 들먹이는 건 둘째 치고, 자신을 만지지 말라니 아닌 밤중의 날벼락이었다. 12월 초에 윤준영이 같은 침대에서 자도 된다고 허락한 이후로 그는 박래현이 만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하기는커녕 되레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유도하기까지 해서 결혼 계약서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지라 박래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곰곰 생각해 보니 최근 들어 윤준영은 박래현이 배 만지는 걸 은근히 피하는 눈치였다.
“다른 목적이 아니라 우리 별이 잘 크고 있나 만져 보는 거야.”
“속으론 딴생각하고 있으면서… 제가 모를 줄 알아요?”
“내 애인 배 좀 만져 보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해? 그동안 별말 없다가 왜 갑자기 예민하게 구는 건데?”
박래현은 아예 깍지를 풀고는 동그랗게 둔덕을 이룬 배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듯 쥐었다. 살이 붙어서 부풀어 오른 배가 못 견디게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배 나와서 저 보기 흉하잖아요. 배불러서 우스운 모습으로 형하고 섹스하고 싶지 않아요. 형 머릿속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건데….”
“윤준영, 그게 웬 개소리야? 내가 늘 예쁘다고 칭찬했잖아.”
“그래도 섹스는 싫어요. 만지면 하고 싶어질 테니까 만지는 것도 금지예요.”
어서 마음대로 섹스하고 싶다며 노래를 하던 윤준영이 며칠 새에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심경에 변화가 생긴 이유를 짐작하느라 박래현 머릿속이 수런거리는 동안 윤준영은 토끼 귀를 만지작거리며 잠들 준비를 했다. 당장 구멍을 살살 빨면서 상대의 성욕을 끌어낼 수는 있지만 윤준영을 달래는 게 먼저란 생각에 박래현은 그를 품에 안고 따끈따끈한 뺨에 자신의 뺨을 갖다 댔다. 이성과 본능이 서로 반응하는 속도가 달라서 폭신한 엉덩이 골에 비벼지는 자지는 여전히 그 위용을 줄이지 않은 채였다. 윤준영을 두고 자위하는 것은 내키지 않아서 박래현은 자지 크기가 줄어들기만 기다렸다.
“겨우 이 정도 나온 걸로 난리 피우는 거 보면, 별이 낳기 전까진 섹스 안 할 기세다?”
“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참을 수 있겠어요?”
“준영아, 나 말려 죽일 생각이야? 그리고 너도 오랫동안 참아서 힘들잖아.”
“28년간 섹스 없이 잘 사셨던 분이잖아요. 6~7개월은 금방 지나가요.”
“6~7개월 물론 참을 수 있지. 그런데 부부가 애정 표현을 잘하고 섹스를 자주 해야 애 정서에도 좋대. 별이한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 주고 싶어.”
“별이 핑계 대지 마세요. 아무튼, 섹스는 애 낳고 다시 근육 자리 잡으면 그때 할 겁니다.”
애 낳고 다시 근육을 키우려면 추가로 3~4개월은 걸릴 텐데 윤준영을 보며 그때까지 성욕을 눌러야 한다니 암담했다. 심란해진 마음을 달래려고 박래현은 손을 뻗어 윤준영 뺨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머리칼에 가려져 있던 둥그런 귓바퀴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자 윤준영이 토끼를 안은 채로 몸을 돌렸다. 별이 주려고 산 애착 인형은 아무래도 윤준영의 애착 인형이 된 것 같았다. 토끼는 부드러운 털을 가졌고 표정이 사랑스러워서 윤준영은 토끼 얼굴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고 했다.
“형, 저 필리핀에 있을 때 어떻게 찾았는지 얘기해 줘요.”
“그건 갑자기 왜?”
“계속 궁금했는데 형이 바빠서 못 물어봤어요.”
길고 갸름한 엄지가 무심하게 윤준영의 뺨과 입술 가장자리를 더듬어 갔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고동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박래현은 윤준영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를 찾기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를 떠올렸다. 두 번 다시는 상기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뇌를 싹 도려내 지워 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때 일 떠올리기 싫은데?”
“그래도 듣고 싶어요. 해 줘요.”
윤준영에게 얘기해서 한 번은 털어야 할 감정이었다. 자신이 어떤 심정으로 윤준영을 찾아 헤맸는지 알게 된다면 앞으로 제 곁을 떠날 생각을 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배에 자신의 아이를 배고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자신을 웃으며 맞이해 주지만, 같은 침대에서 잠들며 함께 체온을 나누지만, 박래현은 이따금 윤준영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얘기해 줄 테니까 배 한 번만 만지게 해 줘.”
“알았어요. 대신 살살 만져요.”
허락이 떨어지자 배를 반쯤 덮을 만큼 커다란 손이 파자마 자락을 들치고 조심스럽게 복부를 더듬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 윤준영 얼굴로 만개한 햇살이 비쳐 들었다.
***
“래현아, 그만 자고 일어나.”
박영범이 깨우는 소리에 박래현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초롱일 유산한 뒤로 다시 수면제에 의지해 왔던 그가 오랜만에 수면제를 먹지 않고도 숙면을 취한 덕에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고 기분이 상쾌했다. 박래현은 검은 안대를 벗고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 몇 시야? 공항 도착했어?”
“운 좋게 우리 비행기는 착륙했다.”
“운 좋게 착륙하다니?”
“말도 마라. 지금 미국 동부 지역이 물에 잠겨서 난리가 났나 봐. 이후에 항공기 운항이 전면 취소됐대.”
“우리 출발할 때만 해도 그런 얘기 없었잖아.”
“그러게 말이다. 세 시간 전부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지금 비상사태까지 선포됐다나 봐. 우리 하마터면 착륙 못 하고 다른 공항으로 갈 뻔했어.”
“그래? 다행이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바깥 날씨를 살피려고 했으나 유리창이 부서질 듯 몰아치는 비바람에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이렇게 세상을 다 침수시킬 기세로 몰아치는 폭우는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연착 때문에 시간이 촉박해서 바로 협상 들어가야 할 거 같아. 옷 갖다 놨으니까 갈아입어.”
“고마워, 형.”
오늘은 박래현이 머물게 될 호텔에서 그린스 측 마케팅 이사와 미리 만나 계약 조건을 조율하기로 했다. 비행기가 연착한 관계로 객실에 들러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부족해서 박영범이 서두르는 듯했다. 박래현은 욕실로 들어가 양치와 세수를 한 뒤 머리 모양을 바로잡았다. 약간 곱슬기가 있는 숱 많은 머리카락은 늘 원하는 대로 모양이 잡혀 관리하기에 편했다.
그는 침실로 나와 슬랙스와 니트를 벗고 침대 위에 단정하게 놓인 드레스 셔츠를 집어 들었다. 몸에 꼭 맞는 검은색 드레스 셔츠에 붉은 기가 도는 넥타이를 매고서 검은색 정장을 갖춰 입었다. 거울 앞에서 옷차림 점검을 끝낸 뒤 박래현은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로퍼에 발을 꿰고서 꺼 두었던 핸드폰 전원을 켰다.
난폭하게 다룬 흔적들을 몸에 가둔 채 침대에 누워 처량한 얼굴로 자신을 배웅하던 윤준영이 눈에 밟혔다. 출장 다녀와서 안았어야 했는데 며칠을 참지 못하고 윤준영 도발에 넘어간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윤준영이 젊고 건강하다지만 유산한 지 겨우 3주 지난 시점이었다.
자책하면서 핸드폰을 켜던 박래현은 핸드폰 화면에 뜬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서 왠지 모를 불안함에 침을 삼켰다. 그가 문자 메시지를 누르기도 전에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박영범이 뛰쳐 들어왔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박영범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 들어온 데서 박래현은 상서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래현아, 정 차장님이 보낸 문자 봤어?”
“지금, 확인하려는 중이야. 무슨 일 있어?”
문자를 확인하던 박래현 얼굴이 낭패로 물들어 갔다. 그는 문자를 끝까지 확인하지도 않고 윤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응답만 되풀이될 뿐 윤준영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어딜 가든 전화기를 들고 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떠났는데 그는 몇 번을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단 가면서 통화하자. 밖에 차 대기시켜 놔서 얼른 가 봐야 해.”
미팅 시간이 30여 분밖에 남지 않아서 박래현은 돌처럼 굳은 얼굴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남자의 옆과 뒤로 경호원들과 마케팅 1팀 부장, 차장, 대리가 따라붙었다. 박래현은 황망한 손길로 정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간 뒤에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 상무님. 정 차장입니다.
“정 차장님, 이게 대체 어떻게 일입니까?”
낮게 깔린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쥐고 있는 핸드폰을 부숴 버릴 것처럼 박래현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상대가 앞에 있다면 시선을 뚫고 나오는 선명한 분노에 숨이 막혀서 입도 벙긋하지 못할 기세였다.
- 그게… 장 보고 온 사이에 준영 씨가 사라졌습니다. 저희도 놀라서 계속 전화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요. 침실에 들어가 살펴봤더니 거북 인형들이 다 사라진 것이 아무래도….
“거북 인형들이 다 사라졌어요?”
- 네.
윤준영은 거북 인형들이 좋은 향이 나고 귀엽다면서 좋아했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거북 인형들이 사라졌다는 말에 박래현은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칼을 몇 번이나 쥐어뜯었다. 인형이 없어졌다는 건 윤준영이 그걸 가지고 도망갔다는 뜻이었다. 박영범도 박래현에게서 한 발 떨어져 걸으며 경호 팀으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정 차장님. 당신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윤준영 지키라고 경호원 둘을 더 세워 놨는데 그 많은 사람이 윤준영 하나를 못 지켜요?”
박래현의 서늘하고 차가운 일갈에 경호원들과 일행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살폈다. 비행기에서 점심을 먹을 때만 해도 내일 협상을 성공시킨 뒤 축하 파티를 할 생각에 들떠 있던 사람들이었다.
- 상무님, 정말 죄송합니다.
“CCTV와 정원에 있던 차는 확인했습니까?”
- 네, CCTV에는 안 잡혔고 차는 여섯 대 다 그대로 있습니다.
“윤준영이 날개가 달려서 하늘로 날아가지 않은 이상, 집 밖으로 나갈 경로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 그러게요.
박래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 박래현은 윤준영 귀에서 박수현의 흔적을 떼어 내 쓰레기통에 버리고 자신이 산 피어싱을 박아 넣었다. 개중 하나는 GPS가 심어진 피어싱이어서 윤준영이 움직였다면 경호 팀에서 벌써 발견했을 것이다.
“정 차장님 아까 장 보러 간다고 하셨죠? 차량 블랙박스 확인해 보고 전화 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드레스 룸에 들어가서 콘솔 위에 보석으로 된 피어싱 있나 확인하시고.”
- 경호 팀에서 이미 확인했습니다. 피어싱은 콘솔 위에 있었어요.
걸음을 멈춘 박래현이 사나운 손길로 넥타이 매듭을 풀고는 드레스 셔츠 첫 단추를 열었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흉곽은 그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 폭발 직전임을 보여 주었다.
“진짜 사라진 게 확실해요? 김정우랑… 아니, 경호원들에게 핸드폰 위치 추적 시작하라고 하세요.”
- 그러잖아도 이미 시작했는데,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나서 핸드폰을 껐는지 위치 추적이 안 된다고 합니다.
“일단 블랙박스 먼저 확인하고 전화 주세요.”
공항 밖은 비바람이 몰아닥쳐 박래현은 통화를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박영범의 연락을 받고 그린스 측에서 준비한 의전 차량 세 대가 공항 입구로 다가와 멈췄다. 박래현이 먼저 차에 탄 뒤에 조수석에 경호원이 앉고, 트렁크에 짐을 실은 박영범이 박래현 옆으로 올라왔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갈색 머리 남자가 몸을 돌려 박래현과 마주 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박. 의전 팀 팀장 마크 스미스입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래현입니다.]
[갑자기 허리케인이 강타해서 뉴욕시와 미국 동부가 완전히 물바다가 됐습니다. 다행히 미스터 박이 머무는 곳은 고지대라 침수 위험은 없다고 합니다.]
[다행이네요.]
[미스터 마틴이 오늘 모임을 저녁 식사 시간으로 옮겨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직접 통화해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남자는 인사를 마치고서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린스 측 마케팅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새로 잡는 동안에도 박래현 머릿속은 윤준영 때문에 복잡했다.
“경호 팀에서 뭐래?”
“GPS상 준영 씨가 계속 집에 있다고 나와서 이 차장 부부가 발견하기 전까진 경호 팀에서도 모르고 있었대. 핸드폰 위치 추적은 안 되고, 계좌 추적해 봤더니 어제 3시 20분쯤에 은행에서 현금 1,200만 원을 인출했대. 통장에 잔고가 20억이 넘는데 더 찾지 왜 1,200만 원만 찾았을까? 오래 숨어 있을 생각이면 안전하게 현금으로 확보했을 텐데.”
“음… 1,200만 원 찾은 덴 이유가 있겠지.”
박래현은 허탈한 심정이 되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래현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사납게 차체를 뒤흔들었다. 거리엔 사람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쓰러진 나무의 푸른 이파리들만 빗물에 쓸려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형, 기장한테 전화해서 비행기 언제 뜰 수 있는지부터 확인하라고 해.”
“뭐야, 여기까지 와서 협상도 안 하고 바로 돌아가겠다고?”
“이 기세면 어차피 내일 오후에나 비행기 뜰 거야. 그린스 측은 내가 직접 계약할 거고, 시비티 측은 내가 잘 말해 놓을 테니까 형과 이 부장님이 계약서에 사인해.”
“박래현, 이게 얼마나 공들인 프로젝튼데 여기서 틀겠다는 거야?”
“형 능력 발휘해 보란 소리지, 틀겠다는 말이 아니야.”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계약은 끝내고 가자, 응?”
“형이 내 마음을 이해한다고? 그러면 나 말릴 수 없을 텐데?”
지금 박래현 눈과 귀에 다른 사안은 들어오지 않았다. 윤준영 소재를 파악해서 그를 데려오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으리란 것만 확실했다. 다른 일을 하느라 지체해서 어느 눈먼 알파가 주인 없는 제 오메가를 채 가 버리면 자신은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하며 지옥에서 살아갈 것이다. 폭우를 뚫고 당장 비행기를 띄우고 싶은데 씨발 좆같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제가 매일 전화할게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
불과 열 몇 시간 전에 윤준영이 웃으며 박래현을 안심시켰지만, 그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믿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해 왔던 짓이 있어서였다. 유산하고서 마음 둘 곳 없어진 윤준영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자고 결심했을 거라고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뒤엎고 앙큼하게 도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박래현은 눈을 감고 어제 벌어졌던 일을 상기했다. 얌전히 잠자리에 들었던 윤준영은 박영범을 두고 가겠다는 농담을 한 뒤에 갑자기 박래현을 유혹했다. 사랑한다는 말로 부족해 온몸을 바쳐 가며 윤준영은 탈출에 성공했다.
대체 왜? 질문을 던지자마자 계약을 맺은 후에 윤준영에게 했던 비열한 언행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에게 막말을 쏟아 내면서 함부로 굴 때 윤준영은 어울리지 않게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머니와 초롱이 때문에 억울함과 분노를 억눌러 왔다가 초롱이가 사라진 지금에야 울분을 터뜨린 것 같았다.
어머닐 위해 몸까지 팔았던 효자가 어머닐 버리고 달아난 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래현은 그 이유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생각했던 이상으로 윤준영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깨닫고서 박래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가슴이 찢기는 고통에 심장 박동이 느려지면서 몸에 미열이 올라왔다.
윤준영.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어디에 있든 다치지 말고, 다른 알파 새끼 만나지 말고, 그냥 얌전히 숨어만 있어. 내가 금방 찾으러 갈 테니까.
박래현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싸 눈두덩과 관자놀이 부근을 지압했다. 어제 자신을 다정하게 품어 주었던 윤준영이 눈앞에서 어른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다정한 미소와 따뜻한 눈빛이 자기를 속이기 위한 연극이었을망정 윤준영이 돌아와 주기만 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낼 수 있다.
“래현아, 내일은 비행기 뜨기 어려울 것 같대. 목요일도 그날 돼 봐야 알겠다는데….”
“씨발, 돌겠네. 일단 기장과 승무원은 목요일부터 대기하라고 해.”
“알았어.”
“그리고 인천 공항에 연락해서 입출국자 명단 확인해. 어제 4시 이후 비행기 탑승자 명단 일일이 다 확인하고. 1,200만 원 찾았다는 걸 보니 외국으로 튄 거 같아.”
“형한테 연락 취해 놓을게.”
“김정우랑 윤해준한테 사람 붙이고 핸드폰 추적해. 윤준영이 가까이 지냈다던 레스토랑 알바생들도 다 확인하고. 시간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박영범은 검찰청 부장 검사인 사촌 형에게 전화를 걸어 입출국자 명단에서 윤준영을 확인해 줄 것을 부탁한 뒤 경호 팀에 전화를 넣어 박래현의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세게 쏟아지는 폭우는 기름이 되어 박래현의 조급함에 불을 질렀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예민한 성격에 갑작스럽게 충격을 받은 그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박래현이 정 차장 전화를 받은 건 호텔에 들어가 객실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도저히 그칠 것 같지 않은 비를 원망하면서 윤준영 소식을 기다리던 그는 정 차장에게서 온 전화를 바로 받았다.
- 상무님, 준영 씨가 저희 차를 타고 집을 나갔어요. 저흰 준영 씨가 탄 줄도 모르고… 정말 죄송합니다.
“당장 내 핸드폰으로 영상 보내요.”
얼마 안 있어 윤준영이 이 차장 차에 몰래 타고 있는 영상을 전송받았다. 큰 배낭을 등에 메고 작은 백팩을 품에 끌어안고서 모자를 깊숙이 눌러 얼굴을 가린 윤준영이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탑승해 뒷좌석 공간에 몸을 숨겼다. 숨을 죽인 채 뒷좌석에 웅크리고 있던 그는 마트 주차장에 도착해 정 차장 부부가 사라진 후에 다리를 절뚝이며 차에서 내렸다. 앞뒤로 가방을 메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은 누가 봐도 멀리 떠나는 모양새였다.
난폭하게 진행된 노팅을 받아 내느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윤준영을 떠올리며 박래현은 입술을 떨었다. 저 몸을 하고도 포기 못 할 정도로 윤준영에게 도망은 절실해 보였다. 박래현은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 보다가 윤해준과 김정우에게 전화를 걸어 윤준영의 행방을 물었다. 둘 다 태평하게 잠이나 처자다가 깬 목소리로 윤준영을 보지 못했다고 시치미를 뗐다. 윤해준은 몰라도 김정우는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윤준영이 자기 어머니를 맡길 만큼 김정우를 신뢰했으니 이번 도망에 김정우가 연루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출국하기 전날 새벽까지 품에 안겨 사랑을 나눴던 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박래현이 돌아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겠다던 윤준영이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것이다. 매사에 여유 있는 박래현이지만 윤준영과 관련된 일엔 절대 느긋해지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눈을 내린 박래현은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는 걸 뒤늦게야 확인하고 메시지 함을 눌렀다. 윤준영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이걸 왜 이제야 발견했는지 의아해하면서 박래현은 문자를 눌렀다.
***
태평양 위를 건너려고 온갖 방법을 찾아봤지만 기상 악화는 수요일에도 계속되었다. 허리케인은 최대 풍속 시속 130km의 바람과 폭우를 동반한 채 뉴욕을 강타했고, 강풍으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뉴욕시에서만 100만 가구 이상에게 전기 공급이 중단됐다.
별수 없이 발이 묶인 박래현은 수요일에 계획대로 그린스 측과 협상을 마무리 짓고 그날 저녁엔 그린스 측에서 준비한 만찬에 참여해 대표와 간부들을 만났다. 만찬이 끝나고 실무진들을 먼저 호텔에 들여보낸 뒤 박영범을 대동하고서 그린스 측 공동 대표와 따로 만났다. 박래현과 입점 문제로 계속 협상을 진행했던 그린스 측 마케팅 이사가 박래현에게 눈독을 들여 공동 대표에게 만나 보라고 권한 자리였다. 병원 체인에 관심을 쏟고 있던 그들은 박래현의 다음 프로젝트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박래현의 신경은 온통 다른 데 쏠려 있었다. 이틀을 덧없이 보내면서 박래현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윤준영이 화요일 오후 6시 55분에 마닐라행 비행기를 탔고 10시 40분에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는 여전히 뉴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속수무책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린스 측과 앞으로도 상호 협력해 서로 발전을 도모하자는 말로 얘기를 끝내고 박래현은 박영범과 호텔로 돌아와 곧장 룸서비스를 시켰다. 수면제가 없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오늘 밤도 어제처럼 뜬눈으로 지새울 게 뻔했다. 박래현은 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쳐 놓고 소파에 앉아 기다란 다리를 포갰다. 윤준영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완전히 식욕을 잃어버린 그는 어제 오후부터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그린스 측에서 신경 써 준비한 만찬을 무시할 수 없어 고기를 몇 점 먹었다가 체하는 바람에 화장실에 가서 다 게워 내야 했다. 박영범은 이틀 새 지나치게 살이 빠져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박래현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윤준영은 지금 필리핀 어디에 있을까?”
“글쎄다. 어딘가에 꽁꽁 숨어 있겠지.”
“내가 깊숙이 가둬 놨더니 자꾸 빠져나갈 궁리만 해. 자유를 주면서도 떠나지 못하게 방법을 바꿔야겠어.”
“어떻게 바꿀 건데?”
“지금 고민하고 있어. 준영이가 날 좋아할 린 없을 테고, 아이를 셋 정도 낳게 해서 옆에 묶어 두면 어떨까 생각 중이야.”
“박래현, 준영 씨가 왜 도망갔는지 알 것 같다.”
“바이언스 지분 반을 증여받고, 내 아이를 셋 낳으면 준영이도 나한테 정착하지 않을까?”
“야, 너 미쳤어? 바이언스 지분을 준영 씨한테 넘긴다고? 아주 도망가라고 날개를 달아 줘라, 응?”
“날개가 아니라 족쇄지.”
“그래도 바이언스 지분은 안 돼. 네가 어떻게 키운 회산데… 정 주고 싶으면 한 5% 선에서 생각해 봐.”
“우리 아이를 낳아 주고 나랑 평생 같이 살 남편한테 그 정도 해 줄 수도 있지, 그게 문젠가?”
박래현에게 지분이나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아직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은 신약 프로젝트가 무궁무진했고 그 프로젝트는 돈으로 다 환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돈에 욕심이 없다고 해서 일에도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바이언스를 세계적인 제약 회사로 키우면서 내로라하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꿈은 있었다. 게다가 아픈 사람을 대상으로 돈을 벌다 보니 사회적 환원은 기본이어서, 10년 안에 소아 급성림프모구 백혈병 전문 병원을 지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무료로 치료할 계획 또한 갖고 있었다.
“박래현, 넌 지금 지나치게 감정적이야. 머리 식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그런가? 한국에서 새로 연락 온 건 없어?”
“지금 확인해 볼게.”
박영범이 한국으로 전화해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박래현은 룸서비스로 들어온 와인을 잔에 따랐다. 그는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윤준영이 자신을 떠난 이유를 되짚어 보았다.
제일 먼저 파자마 윗도리만 입혀서 집을 돌아다니게 했던 일과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하면 바닥에 무릎을 꿇리고는 귓바퀴에 피어싱을 박아 넣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의 어머니를 못 만나게 했던 건 기본이고 싫다는 사람에게 펠라티오와 성교를 강요했다. 윤준영은 예상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어서 그를 남창 취급하고 괴롭히면 볼을 붉히거나 노여움을 삼키며 일일이 반응하곤 했는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더 짓궂게 그를 놀렸었다. 자신이 상상했던 윤준영과 실제 윤준영 사이엔 메우기 힘든 커다란 괴리가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윤준영과 결혼 계약서를 작성한 이후론 그를 괴롭힌 기억이 없었다. 넘치도록 풍족한 삶을 제공했고 그가 원하는 건 다 이룰 수 있게 돕겠다고 했다. 서툴지만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면서 그와 연애를 시작해 볼 참이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걸 버리고, 심지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어머니마저 버리고 도망을 선택하다니 윤준영은 참 무모하면서 용감했다.
안락한 미래와 오메가의 본능을 충족해 줄 알파가 있는데 그는 무엇을 얻고자 도망을 갔을까. 박래현은 윤준영이 마지막에 보낸 문자를 열어서 글자를 전부 눈에 넣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거두절미하고 저는 형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서 도주를 결심했습니다.
형과 보낸 시간은 너무 끔찍하고 비참해서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설령 절 찾아 가둔다 해도 형 아이를 낳지는 않을 겁니다.」
윤준영이 옆에서 또박또박 읽어 주는 것처럼 문자는 목소리로 변환되어 박래현 귀를 괴롭혔다. 초롱일 유산하고 나서 윤준영은 아이를 갖는 게 두려웠던 걸까. 아이는 천천히 갖자고 했던 제 말을 그는 믿지 않은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윤준영은 제 아이를 갖기 싫어서 도망간 것 같았다. 오메가로서 본능 때문에 알파와 섹스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는 박래현이 제시한 화려한 부에 눈이 멀어 미워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질 만큼 속물은 아니었다. 그렇게 올곧은 사람이 자신의 동생 박수현에겐 왜 모질게 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차이를 인정할 수 없어서 어쩔 땐 윤준영 안에 두 개의 인격체가 공존하는 건 아닌지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박영범에게 재조사를 시켰지만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이제 윤준영이 어떤 사람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윤준영은 박래현 심장에 너무 깊게 뿌리를 내려서 그를 뽑아내고 정상적인 삶을 살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이제 박래현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내일 날씨는 확인해 봤어? 내일도 비행기 못 뜬대?”
“현재 상황으론 금요일 오후에나 가능할 거래. 금요일 오전에 협상 끝내고 바로 출발하면 될 거 같아.”
“…왜 날씨마저 나를 안 도와주지? 내 오메가가 날 버리고 도망갔는데, 당장 뒤를 쫓아야 하는데, 아직도 뉴욕이라니….”
박래현이 와인을 단숨에 비우는 것을 보고 박영범은 말릴 듯 손을 뻗었다가 뒤로 거둬들였다. 박래현을 하늘이 내린 강골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속이 텅 빈 상태에서 저렇게 술을 마셔 대다간 조만간 큰일이 생길 것 같아서 불안했다. 박영범은 와인을 따르는 박래현 손을 노려보다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참, 준영 씨 통장은 어떻게 할래? 그냥 내버려 둘 거야?”
“내가 준영이한테 준 돈이야. 건들지 말고 그냥 둬.”
박영범이 통장에 가압류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박래현은 통장에 손대지 않았다. 윤준영이 어디서 지내든 그가 생활고에 시달리며 전전긍긍하는 건 싫었다. 자신이 그를 찾아 집에 데려올 때까지 조용히 숨어서 편하게 지내길 바랐다.
박래현은 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술을 보며 자지를 삼키다가 찢어진 붉은 입술을 상기했다. 자신을 피하다가 생긴, 사라지지 않는 이마의 흉터도 생각났다. 옆으로 길게 찢어져 섹시한 눈이, 높다란 콧대가 보고 싶어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박래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 와인을 마셨다. 속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저녁에 먹은 음식을 다 토했는데 술맛마저 맹탕이었다.
윤준영을 사랑하지만 그가 제 삶을 이다지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줄은 몰랐다. 물론 사랑을 고백한 순간에도 윤준영이 쉽게 마음을 열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윤준영이 동생에게 한 짓과 별개로 박래현은 자신이 윤준영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윤준영이 저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어쩔 땐 혹시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착각하기도 했다. 자신을 몰래 훔쳐보다가 들키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돌린다거나, 섹스할 때 무방비한 상태에서 보여 주는 사랑스러운 표정 등에서 윤준영 감정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여겼다.
마지막 섹스에서는 저 아닌 다른 알파와는 관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기다리고 있겠단 말을 믿고 뉴욕으로 향했는데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윤준영의 훌륭한 연기에 맥없이 속아 넘어갔다. 동생은 윤준영의 본 모습을 모르니까 그랬다 쳐도, 자신은 윤준영의 영악한 이면을 다 파악하고 만났으면서도 그를 사랑해서 눈과 귀를 닫아 버렸다. 그래서 윤준영의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그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박래현은 뉴욕으로 떠나기 전날 밤 귀신에 홀린 듯 윤준영을 안았다. 그날 윤준영은 온몸을 던져 박래현과 사랑을 나눴다. 그저 욕구를 충족할 요량이었다면 적당히 구멍을 벌려 자지만 받아들여도 됐을 텐데 윤준영은 어느 때보다 열정을 다해 박래현을 현혹했다. 마지막 섹스는 윤준영이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잊지 말라고 던져 주고 간 달콤한 저주였다. 윤준영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박래현에게 가장 통쾌한 복수를 하고 떠난 것이다.
그러나 윤준영이 간과한 게 있었다. 박래현은 박수현과 달리 울면서 혼자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윤준영과 지옥에서 뒹구는 한이 있어도 그를 찾아내 손아귀에 쥐고 놓아주지 않을 사람이었다. 윤준영은 박래현이 유일하게 애정을 주었던 동생을 버리고 택한 이였다. 쉽게 잊고 버릴 사람이라면 애초에 흔들리지도, 동생을 배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래현아. 이리 와서 김정우 통화 기록 좀 볼래?”
“왜?”
“최근에 네 핸드폰 번호가 새벽마다 찍혀 있다.”
남자가 쥐고 있던 잔이 흔들려 붉은 와인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박래현은 테이블에 술잔을 내려놓고 박영범 옆으로 가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새벽 2~3시쯤 김정우 통화 기록에 자신의 전화번호가 간간이 찍혀 있었다. 자신이 잠든 틈을 이용해 윤준영이 한 짓을 떠올리며 박래현은 낭패감에 젖어 신음을 냈다.
제 품에 안겨 곤히 잠든 줄 알았던 윤준영이 감쪽같이 절 속이고 김정우와 몰래 도망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에도 불구하고 박래현은 윤준영의 착한 눈매에 속아 넘어갔다.
답답한 마음에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서 윤준영에게 물려 벌겋게 상처가 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덜 아문 상처가 손에 닿아서 긁힌 곳이 따끔거렸다. 박래현은 일어서 객실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빗물에 잠겨 흐릿한 뉴욕 거리를 내다보았다.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박래현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장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이 도착할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온 윤준영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저를 맞이해 줄 것만 같았다. 아직 윤준영을 만지고 빨았던 감촉이 살갗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윤준영만 없었다. 박래현은 윤준영의 푹신푹신한 입술에 닿았던 제 입술을 손등으로 눌러 보기도 하고 분홍색 젖꼭지를 만졌던 손바닥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준영 씨, 생각할수록 당돌하네. 어떻게 네 전화로 김정우한테 연락할 생각을 다 했지? 너 핸드폰에 보안 걸어 놨잖아.”
“윤준영 원래 발칙한 새끼지. 배우가 딱 맞는데, 진로를 잘못 택했어.”
박영범은 보스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뭐가 웃긴지 혼자 키들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결코 웃을 분위기가 아닌데 박래현도 왠지 웃음이 터져 박영범을 따라 웃었다. 잠들어 있는 자신의 코 밑에 손을 대 보고 심장이 느리게 뛰나 귀를 대서 확인해 본 뒤 핸드폰을 찾아 지문으로 화면을 열고 욕실로 몰래 들어가 낮은 목소리로 김정우에게 전화했을 윤준영을 상상해 보니 귀엽긴 했다.
“필리핀 쪽에선 아직 소식 없어?”
“공항 CCTV 이제 확인 들어갔대.”
“돈을 그렇게 먹였는데도 대체 왜 이렇게 느리지? 그 정도론 부족하단 소린가?”
“박래현. 필리핀이 우리나란 줄 알아? 지금도 아주 초스피드로 진행하는 거야. 그날 필리핀도 폭풍으로 난리가 났었나 봐. 공항 주변 나무들이 몇 개 넘어져서 공항 바깥쪽 CCTV는 다 먹통이래.”
“제일 중요한 자료를 놓치겠네.”
들려오는 소식마다 좆같아서 박래현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납치나 실종은 이른바 골든 타임이 중요해서 초기 대응을 일사불란하게 해야 하는데 박래현은 기상 악화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고, 필리핀 경찰들도 폭풍 때문에 그날 자료 확보가 어려운 듯했다.
“서울 도착하면 바로 필리핀으로 넘어갈 거야. 윤준영 찾을 때까지 내가 직접 팀 꾸릴 테니까 수사국장한테도 미리 언급해 놔.”
“알았다. 그런데 너 술 그만 마셔. 밥도 제대로 안 먹으면서 술만 마시면 속 버려. 그 몸으로 준영 씨 어떻게 찾으려고 그래?”
“알았어. 딱 한 잔만 마시고 그만 마실게. 수면제가 없어서 이걸 마셔야 잘 수 있어.”
“난 졸려서 자야겠다. 어차피 내일도 여기 있을 텐데 우리 갤러리나 가 볼까? 네가 호텔에 처박혀 있다고 준영 씨가 네 앞에 나타날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어디 돌아다닐 기분이겠어? 난 여기서 협상 준비할 테니까 형이 실무진들 데리고 갔다 와. 그 사람들 저녁도 사 주고.”
“그래. 술은 내가 가져간다.”
박영범은 거의 바닥 난 술병과 잔을 챙겨 자기 방으로 건너갔다. 박래현은 소파 등받이에 뒷머리를 대고서 라이터를 꺼내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원래 두통이 자주 찾아오는 데다가 신경이 예민한 편이어서 박래현은 동생이 죽은 뒤로 수면제를 처방받아 먹고 있었다. 수면제를 먹으면 다음 날 오전을 거의 다 버리는데도 잠을 못 자는 고통보다는 나아서 어쩔 수 없이 수면제에 의지했다.
지독하게 따라붙어 뇌를 죄다 파먹던 불면이 자취를 감춘 건, 윤준영과 섹스한 뒤부터였다. 윤준영과 처음 섹스했던 날 박래현은 수면제 없이 아침까지 깊이 잠들었다. 아침엔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해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는데 그날은 시야에 모든 상이 또렷하게 잡혔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여겼지만 몇 번 실험을 통해 확인한 결과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 윤준영은 소량의 페로몬을 흘리곤 했다. 매우 작은 양이라 본인도 잘 모르는 듯했는데 그 연한 페로몬은 약을 두세 알씩 먹어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두통을 쉽게 가라앉혀 주었다. 섹스할 때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저 윤준영을 안고만 있어도 불면과 두통이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한 이후로 박래현은 매일 밤 윤준영 방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런데 윤준영이 사라졌다는 소식과 함께 두통과 불면이 동시에 찾아왔다. 처음엔 머리가 빠개질 것처럼 아프더니 이젠 눈알이 빠져나갈 것처럼 뜨거웠다. 박래현은 1/3가량 남은 술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협상을 끝내고 병원에 들러 수면제를 처방받았어야 했는데 깜박 잊어버렸다. 내일 오전엔 병원에 들러 수면제부터 처방받으리라 결심하면서 박래현은 유리창 너머 바깥세상을 내다보았다. 저를 보며 웃어 주던 말간 얼굴이 유리창에 나타났다가 빗물에 쓸려 사라졌다.
“수현아. 난 윤준영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어떡하냐.”
가족이라고 여겼던 이들에게 배신당해 한국으로 보내진 박래현이 우물을 파서 그 안에 자신을 가두었을 때 박수현만 유일하게 우물 안까지 찾아와서 박래현을 위로하고 사랑해 주었다. 오동통한 손을 내밀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던, 자신에게 숨통이 되어 준 작고 귀엽고 착한 동생을 사랑했다. 그때부터 박래현은 동생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게 해 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아꼈던 동생은 박래현이 미국에 건너간 사이 연애를 했고 그 남자에게 배신당해 죽음을 택했다.
박래현이 겪은 상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희망이라곤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성이 돌아올 때까지 몇 주를 틀어박혀 지냈다. 그리움이 깊어져 가슴에 멍이 커져 갈 무렵 박래현은 동생의 냉동 정자를 이용해 조카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박수현에게 해 주지 못했던 것들을 아이를 잘 키워 그 아이에게 전부 주고 싶었다. 귀국하자마자 인공수정할 대상을 물색하던 중 박래현은 박수현이 남긴 핸드폰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보게 되었다.
문득 어떤 인간이 동생의 마음을 짓밟고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박래현은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서 박영범에게 윤준영 뒷조사와 미행을 지시했다. 그 남자, 윤준영은 동생을 가장 비참하게 배신해 죽음으로 몰아가 놓고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 뻔뻔한 남자에게 빠져 자살까지 한 동생이 가여웠고 윤준영이 몇 배로 가증스러웠다. 자신이 동영상을 보낸 날 박수현이 죽었는데 윤준영은 죄책감 따위 느끼지 않는 듯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청초한 얼굴을 무기로 동생을 꼬셔 놓고서 윤준영은 걸레짝보다 더러운 영상을 이별 문자와 함께 동생에게 보냈다. 영상 속에서 윤준영은 남자들 세 명에게 둘러싸여 즐거운 듯 성기를 빨면서 자지 두 개를 구멍에 박은 채로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영상은 흐리고 짧았지만 윤준영 얼굴이 틀림없었다. 경호원들이 보내온 사진만 보면 그 남자는 학교와 아르바이트, 집만 오가는 잘생기고 단정한 모범생이었다. 손님이나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대할 때 늘 웃는 얼굴이었고 친절했다. 몇 번을 봐도 영상 속에서 남자들을 홀리고 있는 인물과 동일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순진한 수현이 홀라당 넘어갔을 거라고 추측했다.
- 형,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나한텐 형이 제일 우선순윈 거 알지?
‘왜 반대로 들리지? 윤준영이 그렇게 좋아?’
- 어. 갈수록 좋아져서 미치겠어. 근데 형, 그 사람은 내가 처음이래. 우리 만남이 정말 기적 같지 않아?
‘잘됐네. 너도 처음이잖아.’
- 그러게. 형 미국에서 돌아오면 준영이 형 소개해 줄게. 근데 형은 정말 연애 안 할래?
‘난 결혼 생각 없어. 네가 아이 낳으면 내가 예뻐해 줄게.’
- 굳이 오메가 안 만나도 되잖아. 난 형이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받았으면 좋겠어.
박래현은 박수현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 그의 말을 들어 주는 쪽을 택했지만 두 사람 앞날이 순탄치 않을 거란 생각에 괴로워했다. 자신은 부모 뜻을 거스를 수 있지만 박수현은 그러지 못했다. 계부는 박수현을 박래현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그의 자존심을 깎아내렸다. 비범하게 태어난 박래현을 평범한 박수현이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계부를 더 분노케 했으니 어떻게 보면 박수현에겐 잘난 형이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사람을 바꿀 수 없어서 계부는 외적 조건을 바꾸는 쪽으로 전략을 틀었다. 그는 박수현이 졸업하면 바로 약혼시킬 생각으로 눈에 불을 켜고 그에게 어울리는 대상을 찾고 있었다. 박수현이 쥐뿔도 없는 오메가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몰아칠 테고 박수현은 계부에게 반항 한 번 못 해 보고 꺾일 터였다. 그 과정을 거치며 동생이 마음을 다칠 게 분명해서 박래현은 동생이 행복해질 수 있는 해결책을 고민했다. 장고 끝에 해결책을 찾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박수현이 죽어 버렸다.
박래현은 윤준영이 동생을 갖고 놀았다고 확신했다. 그가 개방적이라 여러 알파를 사귀며 난교를 한 것까진 그의 성적 취향이라 여기며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이 아니면서 처음이라고 박수현을 속여 잠자리를 같이했고, 헤어지는 방법 역시 최악이어서 박래현은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윤준영의 밝고 천진한 얼굴이 눈물과 절망으로 가득 차 찌그러질 때까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죽음을 선택한 일차적 책임이 박수현에게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박래현에겐 상실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제 박래현의 관심은 윤준영을 파멸하는 데 쏠렸고 그가 인지하지 못한 새에 무중력의 늪에서 몇 걸음 빠져나왔다.
윤준영은 덫을 놓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쌍둥이 동생은 아픈 어머니를 윤준영한테 맡긴 채 오래전에 가출했고, 윤준영 모친은 급성심부전 말기로 심장 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몇 개월도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윤준영 모친을 이용해 윤준영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박래현은 윤준영 모친을 재단 병원으로 옮기고 심장 공여자를 구해서 미끼를 던졌다. 빈털터리가 된 윤준영은 자신이 던진 고기에 독이 든 걸 알면서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박래현은 다른 사람을 구할 필요 없이 윤준영에게 박수현의 냉동 정자를 수정시킬 계획을 세웠다. 생각해 보면 동생 아이를 낳는 데 윤준영을 버금가는 적임자가 없었다. 박래현은 이번 계획으로 골치 아픈 몇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생각이었다.
첫째는 자신이 일궈 놓은 것들을 물려줄 후계자였다. 박래현은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 아이를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걸 수현이나 수현이가 낳은 아이에게 줄 계획이었으나 죽은 사람을 살릴 재주는 없으니 부득이하게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둘째는 정치헌이었다. 릴리프와 누시티로 돌풍을 일으킨 뒤 JS 제약 상무이사로 들어간 그에게 정치헌은 다시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경영권을 포기한 게 표면상 이유였지만 정치헌은 박래현이 조만간 전 재산을 날리고 비렁뱅이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박래현을 떠났다. 그는 자신을 배신한 정치헌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았다.
셋째는 어머니와 계부였다. 윤준영이 아이를 낳으면 제 아이를 낳은 이가 박수현과 어떤 관계였는지 폭로하고 그 아이를 후계자로 키워서 그들을 끝까지 괴롭힐 작정이었다.
마지막 이유는 윤준영이었다. 아이를 낳게 한 뒤에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워서 그가 평생 좆 빠지게 굴러 빚을 다 갚고 나면 그를 위해 아주 비참하고 특별한 인생을 마련해 줄 작정이었다.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윤준영과 첫날밤을 보내기 전까진.
박래현은 처음 몸을 섞을 때부터 윤준영에게 거부감을 덜 느낀 이유를 생각해 봤다. 윤준영도 페로몬을 가진 오메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모든 알파를 천박한 페로몬과 더러운 구멍으로 굴복시키고자 하는 오메가의 도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쓰디쓴 패배를 느끼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박래현은 도리어 윤준영이 내뿜는 페로몬에 굴복하고 말았다.
윤준영이 그동안 박래현이 겪었던 오메가들과 여러 면에서 달랐기 때문이었다. 계부 박서훈이 박래현 방에 집어넣었던 오메가들은 하나같이 일찍 발현해 골격이 작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박서훈은 알파에게 인기 있는 유형의 오메가 중에서도 눈에 띄게 고운 이들을 심사숙고해서 골랐다. 박서훈의 취향이 반영된 오메가들은 박래현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되레 특정한 타입의 오메가들을 멀리하게 했다. 정치헌이 들이댔을 때 지독한 거부 반응을 보였던 이유가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던 오메가들과 닮아서였다.
그런데 윤준영은 오메가보다는 알파나 베타처럼 생겨서 시각적 자극에 약한 박래현에게 크게 거부감을 주지 않았다.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서 서툴게 자지를 빨고 있는 윤준영이 오메가란 사실을 깨달았을 땐 알파로서 본능이 완전히 깨어난 뒤라 몸을 빼기엔 늦어 버렸다.
윤준영과 몸을 섞으면서 박래현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몸에 자신의 정액을 뿌리는 쾌락을 맛봤다. 얼굴을 시트에 파묻은 채 절정에 몸을 떠는 오메가를 증오했지만 따뜻하고 안락하고 촉촉한 오메가의 안은 박래현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섹스가 끝난 뒤 오메가를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코를 박고서 살결에 남은 잔향을 들이켜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고 편안한 상태가 되었다. 지긋지긋하게 박래현을 괴롭히던 두통과 불면이 사라지면서 박래현은 자신이 이 오메가를 놓지 못할 것 같다는 자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박래현 씨는 제 알파니까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박래현은 윤준영에게 처음 마음이 기울었던 때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정치헌 앞에서 가감 없이 소유욕을 드러내는 윤준영을 보며 일순 마음이 흔들렸다. 윤준영은 애인 역할을 해 달라는 부탁에 맞춰 연기했을 테지만 박래현은 누군가의 소유가 되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이성과 감정 사이에 지독한 불균형이 찾아왔다. 매일 밤 윤준영을 안으면서 몸과 마음은 그에게 기우는데 머리는 그게 아니라고 박래현을 말렸다. 윤준영이 영상을 보냈어도 동생이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라고 설득해 봐도 가슴에 걸린 마지막 조각을 없애진 못했다. 윤준영의 거짓말과 윤준영이 보낸 영상 때문에 동생이 죽은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윤준영에게 빠져들지 않으려고 박수현이 산 피어싱을 그의 귓바퀴에 박아 넣으며 복수를 다짐했다. 꽃 모양의 전등에 흐린 초점을 맞추고서 동생이 윤준영과 섹스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처음엔 분노로 느릿하게 뛰던 심장이 나중엔 점점 속도를 빨리했다. 가슴을 끊임없이 할퀴었던 그 감정은 질투가 명백했다.
동생의 냉동 정자를 윤준영에게 수정시켜 조카를 보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이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오메가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게 하고 싶었다. 성욕을 죽이면서 아이를 갖겠다는 욕구도 사라졌는지 박래현은 자신의 아이를 갖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윤준영 안에 씨를 뿌리면서 이 오메가에게 자신의 아이를 임신시키겠다는 의지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극단적인 감정의 변화를 겪으면서 박래현은 자신이 변해 가는 이유가 윤준영이 주는 쾌락과 평온함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가 예측했던 윤준영과 실제 윤준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어서 그가 예상 밖으로 벗어나면 박래현은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하곤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착하고 성실한 청년을 괴롭히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윤준영이 고동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저를 쳐다보면 모든 걸 잊고 윤준영을 지켜 주고 싶었다. 심지어 그가 영상을 보낸 데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고 합리화하며 자신의 변화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처음에는 육체관계를 맺은 오메가에게 느끼는 소유욕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폄하했다. 박래현이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깨달은 건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내면서 윤준영의 페로몬에 반응해 러트 사이클이 오고 나서였다. 윤준영에게 알파로서 모든 걸 쏟아부으면서 박래현은 윤준영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때부터 윤준영이 없는 삶은 상상하지 않았다.
박래현은 윤준영이 저를 사랑하진 않더라도 저만 보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 해서는 안 될 짓들을 많이 했지만 최선을 다해 윤준영을 사랑하고 아끼면 윤준영도 언젠가는 제게 마음을 열 거라고 믿었다. 목적지가 얼마 안 남았다고 판단한 이유는 섹스할 때 윤준영이 보여 주는 태도 때문이었다. 성 경험이 없다고 해서 윤준영이 정말로 느끼고 있는지 연극을 하고 있는지 분간 못 할 바보는 아니었다. 모든 신경이 윤준영에게 향해 있어서 박래현은 그가 보내는 미세한 신호까지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었다니 공허하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남편과 돈과 가족을 버리고 윤준영이 무엇을 찾아 필리핀으로 날아갔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만들어 준 그늘에 있으면 안락한 생활과 든든한 미래가 보장되는데 윤준영은 불안정한 미래와 자유를 선택했다.
당장 필리핀으로 날아가 나라 전체를 뒤져 윤준영을 찾아내고 싶은데 내일도 비행기를 이륙시킬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박래현은 넥타이 매듭을 풀어 아무렇게나 탁자 위에 던져두고 드레스 셔츠 단추를 풀었다. 도망간 윤준영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몸은 건강할까, 입술 상처에 약은 제대로 바르고 있을까, 억제제는 때맞춰 먹고 있을까,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배회했다.
마지막에는 자유분방한 제 오메가가 욕정에 못 이겨 다른 알파 품에 파고들지 모른다는 상상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무한테나 몸을 허락하는 헤픈 남자는 아닌 것 같지만 박래현은 윤준영의 진짜 모습을 확신할 수 없었다. 윤준영이 자신과 함께했을 때는 거액의 위약금이 걸려 있어서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다. 영상 속 윤준영을 생각해 보면 그가 예전 생활로 돌아가 멋대로 살 가능성은 꽤 컸다.
「설령 절 찾아 가둔다 해도 형 아이를 낳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윤준영은 초롱일 유산한 뒤 충격이 커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도망갔을 확률이 제일 높았다. 아이는 나중에 천천히 갖자고 했던 말이 전혀 신뢰받지 못했다는 자각에 절박해진 마음이 들들 끓어올랐다. 그에게 당분간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각서라도 써서 보여 줬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는 어떤 일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이성을 잠식해 상황을 더 어렵고 처참하게 할 뿐이었다.
윤준영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김정우와 통화를 주고받았다. 김정우와 자주 통화했다는 건 윤준영이 오랜 고민 끝에 탈출 계획을 세웠다는 뜻이었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비행기가 뜨자마자 어서 일을 마치고 돌아갈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돌아가면 윤준영을 위해서만 살겠다는 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윤준영은 저를 버리고 유유히 자취를 감췄다.
박래현은 상체를 숙여 담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케이스를 열고 얇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고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검은색 가죽으로 만든 담배 케이스가 소파 옆으로 굴러떨어지면서 붉은 입술 사이로 회색 연기가 길게 피어올랐다. 늘어진 속눈썹 안에서 나른하게 퍼진 갈색 눈동자가 초점 없이 움직이다가 한곳에 머물렀다. 놀랍게도 윤준영이 박래현의 무릎을 양쪽으로 잡아 벌린 뒤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윤준영?”
보드라운 머리칼을 감아쥐려고 허공을 몇 번 더듬던 손이 이내 허벅지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박래현은 피곤한 듯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께를 문질렀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박래현 얼굴이 환영을 본 뒤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윤준영이 도망가서 몇 명의 알파와 몸을 섞든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이 찾을 때까지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 윤준영을 잃고 혼자서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술기운이 돌아 붉어진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났더니 화려한 조명을 등진 윤준영이 나타나서 박래현 무릎에 올라탔다. 가로로 길게 찢어진 시원한 눈이 한없이 다정해 보였다. 박래현은 손을 뻗어서 이번엔 그가 도망갈 수 없게 어깨를 꽉 붙들었다.
“윤준영, 어디 갔다가 이제야 와.”
크림처럼 녹아드는 뺨을 한 손으로 감아쥐며 박래현은 윤준영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윤준영은 나뭇가지에 엎드린 표범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박래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준영아, 사랑해. 이제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박래현은 대답 없는 윤준영을 힘껏 부둥켜안고서 그의 머리칼에 뺨을 비볐다. 윤준영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부터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이젠 원점으로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메가에게 느끼는 생리적인 현상이라고 치부하며 가볍게 넘겼던 감정들이 모양 그대로 심장에 새겨져 자국을 남겼다.
박래현은 동생이 살아서 돌아온다 해도 윤준영을 돌려보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윤준영과 결혼을 결심하면서 윤준영이 동생과의 관계를 숨기고자 한다면 기꺼이 그에 응하기로 결심했었다. 윤준영 과거는 덮으면 그만이지만, 그가 없는 미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
금요일 오전에 시비티 측과 협상을 마치고 공항이 정비될 동안 기다렸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비행기에 올랐다. 박래현 일행이 허리케인에 발이 묶여 꼼짝 못 하는 사이에 윤해준은 특이한 움직임 없이 모친 병원만 드나들었고 김정우는 수업 시간 외엔 매일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윤준영 도망에 김정우가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의 뒷조사를 집중적으로 시켰지만 이렇다 할 물증이 나오진 않았다. 제일 답답한 것은 느려 터진 필리핀 경찰이었다. 원하는 대로 돈을 지급했는데도 그들은 아직 공항 CCTV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박래현을 화나게 했다.
“상무님, 준영 씨 일 정말 죄송합니다.”
일요일 새벽 4시에 박래현이 침실에 들어섰을 때, 분주하게 침대를 정리하던 정 차장이 박래현을 발견하고는 창백한 얼굴로 인사했다. 야위고 어두운 정 차장 얼굴만 봐도 그동안 제대로 먹고 자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 차장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박래현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청소는 그만해도 되니까 나가 보세요.”
“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비행기에서 먹었습니다.”
“그러면 간식이라도 준비할까요?”
“아니요, 됐습니다. 이 차장님이랑 가서 쉬세요.”
정 차장은 침대 정리만 마치고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작은 단서라도 발견할 욕심에 붉게 충혈돼 피로해 보이는 눈이 평소와 다름없는 방 안을 샅샅이 관찰했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여기에 꼭 있어야 할 사람과 거북 인형들이 보이지 않았다. 박래현은 성큼성큼 드레스 룸으로 걸어가 옷장 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그는 윤준영이 챙겨 간 옷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여름옷은 그대로 있는데 가을 옷만 줄줄이 사라진 게 수상쩍었다.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박래현이 카탈로그를 보고 직접 주문하거나 매장에서 고른 옷들이라 틀림없었다.
필리핀은 열대권에 속하는 나라였다. 인터넷으로 검색만 해도 주르륵 뜨는 정보를 윤준영이나 김정우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여름옷이 아니라 가을 옷을 챙겨 간 이유가 뭘까? 필리핀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갈 생각이었나? 윤준영은 박래현이 뉴욕에 도착해 소식을 받은 즉시 뒤를 캐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다른 나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면 마닐라에 도착한 다음 날 지체 없이 비행기를 탔지, 아직도 필리핀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박래현은 핸드폰을 꺼내 필리핀 기후를 검색했다.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윤준영은 외국인들이 많은 대도시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컸다. 사람들 속에 숨고 싶은 건 도망 다니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리였다. 대도시에 속하면서 날씨가 서늘한 곳은 바기오였다. 공부하기에 좋은 장소라 어학원들이 모여 있다는 설명을 읽고서 박래현은 생각에 잠겼다. 윤준영이 공인회계사 준비를 한다는 가정하에 바기오가 윤준영이 숨어 있을 장소로 제일 유력했다.
그는 무비자로 출국했기 때문에 한 달 후면 비자를 연장해야 한다. 한 달을 기다리면 윤준영이 흘린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만 박래현은 한 달을 기다릴 수 없었다. 제 오메가는 알파 가슴에 불을 지르고도 남을 좋은 페로몬을 가지고 있다. 정갈하고 빼어난 외모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성교할 때 적극적인 타입이라 마음에 드는 알파가 나타나면 거침없이 잠자리를 함께할 것이다.
건강만 유지하면 다른 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만큼 박래현은 이를 으드득 갈며 콘솔 위 피어싱으로 눈을 내렸다. 반지도 두고 갔는지 궁금해서 옷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 결혼반지와 시계는 급할 때 팔아먹을 생각으로 챙겨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옷을 뒤적이던 박래현은 속옷 사이에서 처음 본 상자를 발견하고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힌 화려한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박래현은 그 옆에서 작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박래현 씨.
늘 받기만 해서 저도 선물 하나 샀어요.
반지를 선물해 주고 싶었는데 박래현 씨가 싫다고 해서 대신 라이터를 샀습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