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6/16)

02.

목이 말라 몸을 뒤척이던 나는 박래현에게 물심부름을 시키려고 내 옆자리를 더듬었다. 허공을 배회하던 손끝에 빈 베개가 잡혔다. 이 늦은 시간에 대체 어딜 간 걸까. 내 몸을 깨끗하게 씻긴 뒤 박래현은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화장실에 간 줄 알았는데 기다려도 그가 들어오지 않았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 밖에 나간 듯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박래현과 조심스럽게 관계했지만 큰 물건이 구석구석 찔러 댄 통에 허리께가 저릿저릿했다. 두 발을 바닥에 딛고 천천히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유리컵에 차가운 물을 가득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거실에 박래현이 없어서 아기방과 TV가 있는 방문을 차례로 열어 보았지만 박래현은 보이지 않았다. 2층 거실 불이 켜진 거로 보아 2층 서재에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자기 싫어서 박래현을 데리고 내려올 생각에 2층으로 올라갔다. 작게 열린 문틈에서 박영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박영범 방에서 둘이 술을 마시는 것 같아서 돌아서려던 나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걸음을 멈추고 벽에 바짝 몸을 붙였다.

“래현아, 우리 둘이서만 마시니까 수현이가 더 보고 싶다.”

“그러게.”

“사업 얘긴 그만하고, 오늘은 제발 네 속내 좀 들어 보자. 명색이 비선데 네 속을 몰라 답답해 죽겠다. 너 혹시 준영 씨한테 각인했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려고 해?”

“각인 안 했어. 오늘도 오메가 둘이 노골적으로 날 유혹하더라.”

내게 각인했냐고 자신만만하게 물었던 과거가 떠올라 얼굴이 뜨거워졌다. 당연히 각인해서 내게 청혼했으리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면 왜 나와 결혼을 한 걸까. 나도 박영범과 똑같은 의문을 가지고 두 사람 대화를 엿들었다.

“각인이 아니라면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인공수정으로 애만 낳게 하고 계약 위반으로 몰아갈 생각이었잖아. 빚더미에 앉혀서 준영 씨를 불행하게 만드는 게 네 목표였어.”

난데없는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말에 다리가 휘청거려서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주어야 했다. 방금 내가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얘기가 이어졌다.

“넌 준영 씨 영상을 보고도 준영 씨 안고 싶은 욕구가 들던? 내가 한 명하고 했으면 말을 안 해. 너한테 들러붙은 남창들 더럽다고 치를 떨었잖아.”

재벌들은 잇속에 훤한 사람들이니 흠 잡히지 않게 조심하라고 충고해 줬던 박영범 목소리였다. 뒷얘기를 듣는 게 두려워서 자리를 뜨고 싶지만 바닥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분명 내 얘기를 하고 있는데 대화 속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기억 상실증에 걸려 과거를 잊었다면 모를까 나는 다른 사람과 난교한 적도, 영상을 찍은 적도 없었다.

“나도 준영 씨가 싫진 않아. 오히려 안쓰러울 때가 많은데, 수현이가 네 동생인 거 알고서 눈 하나 깜짝 않는 거 보고,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느꼈어.”

술을 마시는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을 삼키면 내 존재를 들킬 것 같아서 나는 입에 가득 고인 침을 삼키지 못한 채 벽을 짚고 서 있었다.

“형, 준영이가 수현이 모른 척하는 거… 그 느낌이 뭐냐면…”

듣고만 있던 박래현이 그답지 않게 술에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래현 입에서 박수현과 내 이름이 동시에 나오는 걸 듣고서 뭔가가 틀어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토기가 몰려왔다.

“수현이는 정말 윤준영한테 씹다 버린 껌만도 못한 존재 같다는 거야. 그래서 미워 죽겠는데, 윤준영이 무심한 게 또 싫지가 않아. 씨발, 그 사기꾼 새끼한테 넘어간 내가 등신이지.”

미워 죽겠다는 박래현 목소리에는 자조와 체념이 서려 있었다.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순 없지만, 당장이라도 문 옆에 토사물을 쏟을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흐려졌다.

“수현이가 준영 씨를 정말 사랑하긴 했나 봐. 둘이 한 달 반을 사귀면서 흔적 하나 안 남긴 걸 보면. 뭐, 부회장님한테 준영 씨 노출시키기 싫어서 그랬겠지만.”

“양부는 수현이한테 손 뗀 상태였어. 자기 지분을 걸고 맹세했는데 그깟 2~3년을 못 기다리겠어?”

“그래도 수현이는 두려웠겠지. 걔가 부회장님한테 웬만큼 당했어야지. 수현이 머리 좋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이번에 보니까 확실히 네 동생이 맞는 거 같아.”

두 사람은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첫 히트 사이클 때 도움을 받은 뒤로 나는 박수현과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그를 피해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는데 우리가 한 달 반을 사귀었다고? 나는 그와 사귄 적이 없는데 대체 박수현이 사귄 윤준영은 누구란 말인가?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짚이는 데가 있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게 닥쳐 올 불행을 예측하면서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지난 2개월 동안 불행에 익숙해졌다고 자부했는데 가슴이 와장창 깨지는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래현아, 준영 씨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은 네 심정은 알겠는데, 그래도 결혼을 이용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아이만 낳게 하고 내 보내자. 준영 씨 보다보니까 너무 불쌍해. 아직 혼인 신고서 제출 안 했으면….”

“술 다 떨어졌네. 가서 술 가져와.”

“그만 마셔. 너 취했어.”

“아니, 와인 한 병만 더 마셔. 형하고 상의할 일이 있어.”

“후, 그래. 오늘 기분도 그런데 제대로 한번 마셔 보자. 잠깐 기다려.”

박영범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서재로 몸을 숨겼다. 어둠 속에서 덜덜 떨며 시간을 보낸 뒤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워 몸을 웅크릴 때는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두 사람 대화를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해야 하는데 사고가 멈춰서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갔다. 나를 보호하고자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 올리고서 공처럼 몸을 말았다가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여기서 한가하게 뭘 하고 있는 건가. 멍청하게 누워 있을 게 아니라 당장 박래현에게 달려가서 사실을 얘기하고 오해를 풀어야 한다. 나는 박수현과 사귄 적이 없다고, 이상한 영상 같은 것도 찍은 적이 없다고, 당신을 속이지 않았다고 얘기해야 한다. 나는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한달음에 2층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계단을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 주저앉아 달아오른 머리를 식혔다. 이 일에는 윤해준이 연루되어 있으므로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들기보다는 박래현이 나를 오해하는 이유부터 파악하고 행동하는 게 옳을 것이다. 나는 푸드덕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침실로 돌아와 도로 침대에 누웠다.

‘래현아, 준영 씨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은 네 생각은 알겠는데, 그래도 결혼을 이용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아이만 낳게 하고 내보내자.’

박래현의 최종 목표는 아이를 낳게 한 뒤에 나를 빚더미에 앉혀서 불행하게 만드는 거라고 했다. 그는 내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뒤에도 목표를 바꾸지 않았다. 나를 사랑해서 고백한 게 아니라 나를 빚쟁이로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박래현이 내 감정까지 농락하며 갖고 논 것이다. 그의 감정이 가짜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현실을 부정했다. 어둠 속에서 같은 말을 끝없이 재생하는 쓸모없는 귀를 도려내고 싶어서 손으로 귀를 잡아 뜯었다. 시간이 지나도 혈관을 흐르는 공포와 몸을 흔드는 경련이 진정되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거로 치부하고 싶지만 두 사람 목소리가 귓구멍에 알알이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박래현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행복의 정점까지 나를 끌어 올린 뒤 아이와 돈을 몰수해서 나를 무너지게 할 작정이었다. 나는 박래현에게 푹 빠져서 누가 봐도 이상한 행복에 도취해 있었다. 지독한 배신감에 몸을 떨며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베개에 문질렀다. 차분하게 생각해서 대책을 세우라고 이성이 나를 설득했지만 그 말을 도저히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내 감정은 격해 있었다. 나는 새어 나오려는 울음을 힘겹게 삼켰다. 아니 삼킨 것은 핏물이 밴 묵직한 덩어리였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 희망, 따뜻함, 애정과 같은 빛들이 눈물과 함께 스러져 갔다. 나는 어리석게 박래현에게 속아 넘어갔다. 박래현을 사랑해서 그가 보여 준 행동과 말을 내가 믿고 싶은 대로 해석해 버렸다.

한참을 울고 나서 막심한 공황 상태에서 빠져나온 나는 힘겹게 머릿속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박래현은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기 위해 가짜 결혼을 추진했다. 귀뺨을 붉혀 가며 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남자가 떠올라 또다시 거센 분노가 치밀었다. 그가 나를 증오하면서 불행하게 만들고자 하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그가 지금까지 나와 초롱일 기만해 왔다는 점이다. 윤해준이 박수현과 어떤 관계였든지 간에 박래현이 나를 속이고 내 감정을 조롱한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는 노여움과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손등을 물어뜯었다.

박래현은 미치광이였다. 그가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미워하는 사람과 몸을 섞어 가며 아이를 가질 생각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지를 벌벌 떨던 나는 우리가 속궁합이 잘 맞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박래현이 날 증오해도 우린 좆같은 본능에 따라 몸을 섞을 수 있는 사이였다.

다시 끓어오르려는 감정을 가라앉히고서 박래현이 나를 미워하는 원인에 눈을 돌렸다. 박수현, 영상, 혼인 신고서, 박수현, 남창, 증거, 결혼. 내가 들었던 단어를 하나씩 기억해 냈지만 아직 논리적 사고를 하기엔 충격이 커서 두서없이 휘몰아치는 생각을 멈췄다.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니까 자고 일어나서 생각을 이어 가자고 결론 내렸다.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나는 축축한 베개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몸이 검은 잠에 빨려들어 가면서 감은 눈두덩 안쪽에 바늘이 돋아 의식을 깨웠다. 몸은 잠들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정신은 어슴푸레한 어둠 속을 홀로 떠돌아다녔다. 박래현이 들어온 소리를 듣고서도 몸이 마비돼서 꼼짝할 수 없었다.

욕실에서 이를 닦고 돌아온 박래현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내 옆에 누웠다. 허리에 팔이 감기고 목덜미 뒤에 도톰하고 탄력 있는 입술이 내려앉았다. 나를 우습게 보고 농간하는 행위에 이가 갈렸지만 조용히 잠든 척했다. 내 불행을 찬양하던 남자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초롱이가 들어 있는 배를 쓰다듬다가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었다.

호흡이 불규칙해서 평소라면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박래현은 술을 꽤 마셨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짙은 술 냄새를 머금은 날숨이 뺨 위로 흩어졌다. 단단하게 감겨 있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자 나는 어둠 속에서 박래현을 마주 보았다.

자기 관리가 철저해서 이 남자가 술에 취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잠들어 무방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까 들었던 말을 환청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박래현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로 겨우 마음을 굳혔는데 씨발, 박래현은 날 망가뜨리고 싶어서 결혼이라는 족쇄로 날 묶어 둔 거였다.

‘빚더미에 앉혀서 준영 씨를 불행하게 만드는 게 네 목표였어.’

‘둘이 한 달 반을 사귀면서….’

곤죽이 된 머릿속에 아까 들었던 말이 산만하게 뒤섞였다. 이 상태로는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없어서 나는 머리를 비우고 들었던 말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박래현은 애초에 인공수정으로 나를 임신시킨 뒤 내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조용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지나치게 큰 액수로 판단력을 흐리게 해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했고 내가 계약을 어기게 유도했으며 그걸 핑계 삼아 원금과 위약금을 갚게 할 생각이었다. 형태가 진화해서 결혼으로 계약이 바뀌었지만, 그가 목표한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나를 산허리에서 밀어뜨리느냐 산 정상에서 밀어뜨리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윤준영이 수현이를 모르는 척하는 거….’

박래현이 내게 모질게 구는 건 박수현이 나랑 사귀었기 때문이다. 나와 박수현이 깊은 관계였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앞에서 나는 박수현을 모른 척했고 알파도 박래현이 처음이라고 했다. 박래현은 내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박수현과 사귄 적이 없으므로 박수현이 사귄 사람은 윤해준일 것이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윤해준 대신에 이곳에 끌려와 박래현에게 벌을 받고 있었다.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박래현 어깨를 잡아서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에게 다 털어놓고 오해를 풀어 주고 싶었다. 이제야 내 마음을 깨달았는데 허무하게 날려 버릴 순 없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박래현 씨. 잠깐 일어나요.”

“으, 응… 준영아, 나 머리가 아파….”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술과 잠에 취해 웅얼거리던 박래현이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의식 중에 몇 번 등을 토닥이던 손이 시트 위로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내가 박래현에게 사실대로 얘기한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박래현이 준 상처를 고스란히 끌어안고서 나는 첫사랑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이다. 일이 그렇게 마무리된다면 억울해도 견딜 수 있지만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박래현은 집요하고 치밀해서 내가 사실대로 말해도 조용히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행동할 게 아니라 박래현에게 사실을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진실을 알아야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사에 관심 없는 박래현이 윤해준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려고 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박수현과 윤해준이 사귀었더라도 연애와 이별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겨우 그 정도 사유로 윤해준과 계약을 맺어 윤해준을 파멸시킬 계획을 세운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자존감을 짓부수고 그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데에는 명분이 뚜렷한 원한과 분노가 있어야 마땅했다.

‘넌 준영 씨 영상을 보고도 박고 싶은 욕구가 들던? 내가 한 명하고만 했으면 말을 안 해.’

나를 찍은 영상을 박래현과 박영범이 봤다는 소리였다. 불현듯 소름 끼치는 가정이 떠올랐다. 박래현이 영상을 봤다면 그건 나랑 똑같이 생긴 윤해준 영상일 것이다. 해준이 섹스하는 영상이 어떤 경로를 통해 박래현 손에 들어갔단 말인가.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에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박래현 핸드폰이 들어왔다. 남의 물건을 뒤져서는 안 되지만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단서를 찾아서 조용조용 몸을 일으킨 나는 박래현 핸드폰을 집어 들어 그의 엄지를 지문인식 센서에 갖다 댔다. 움직임을 감지한 박래현이 잠결에 내 허리를 끌어당겨서 나는 숨죽인 채 엎드려 있다가 조용히 핸드폰을 열었다. 핸드폰 빛 때문에 박래현이 깰까 봐 조마조마했다.

핸드폰에는 내가 보고자 하는 영상이 들어 있지 않았다. 다음 단계로 나는 메시지 함에 들어가 박수현 이름을 찾아보았다. 박래현이 나와 박수현 관계를 의심한다면 근거가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박수현 이름을 누르자 둘 사이에 주고받은 문자가 핸드폰 창에 주르륵 떴다. 박래현이 잠에서 깨어나 금방이라도 내 목을 조를 것 같아서 나는 박래현이 미국에 있을 때를 중심으로 재빨리 문자를 살펴봤다. 시차 때문에 서로 답장하고 싶을 때 한 모양인지 대화의 간격은 띄엄띄엄했다.

20xx 12월 12일 화요일

「기말 준비는 잘하고 있어?」

「어. 형 오늘 하루 잘 보냈어? 형 미국 가 있으니까 나 되게 외롭다 보고싶어.」

「오늘 어떤 선배랑 같이 밥 먹었어 우리 사귈 거 같아」

「누군데?」

「우리 과 멋진 선배」

「괜히 발목 잡히지 말고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해. 너한테 주어진 자유 이제 2년밖에 안 남았어」

「형이 더 연장해 주면 안 돼? 형이 나 지켜 줘」

20xx 12월 23일 금요일

「수현아, 피임 제대로 해. 각인하면 안 돼.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마.」

20xx 1월 1일 일요일

「형 해피 뉴이어!! 되게 보고 싶다 형 귀국하면 준영 선배 소개해 줄게」

「오늘도 연구실? 연애도 하고 인생 좀 즐겁게 살아봐 연애 시작하니까 정말 좋다」

20xx 1월 14일 토요일

「형 잘 지내? 나중에 들어올 때 내가 부탁한 목걸이랑 피어싱 꼭 사와 선배한테 선물해 주고 싶어」

「나 들어갈 때까지 언제 기다려. 내가 이번 주에 사서 보내 줄게. 각인 안 되게 꼭 피임해.」

20xx 1월 17일 화요일

「형 자? 전화 안 받네 준영 선배 꿈이 뭔 줄 알아?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따는 거래 나중에 우리 회사 회계 팀에 넣어야겠어 나 열심히 노력해서 진짜 괜찮은 경영인이 될 거야 살아 있길 잘했어」

20xx 1월 26일 목요일

「형 보고 싶어 나 강원도 별장에 간다」

마음이 급해서 중간중간 건너뛰며 중요한 부분만 읽었다. 올해 1월 26일 이후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는 없었다. 아마 박수현이 사고로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자는 빙산의 일각일 테고 두 사람은 통화하면서 나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핸드폰을 제자리에 두고 도저히 박래현 곁에 누울 수 없어서 정원으로 나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어렵게 옮겨 가며 테라스에서 멀찍이 떨어진 벤치를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박래현은 박수현이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자살이라고 했는데, 나를 향한 박래현의 날 선 증오는 박수현 죽음이 나와 관련 있다는 걸 암시했다. 박영범은 박래현에게 내 영상이 있다고 했다. 윤해준과 사귀고 있던 박수현이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운전을 했다면? 의지할 형이 멀리 있어서 박수현은 순간 이성을 잃고 극단에 가까운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박수현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에 그럴 가능성은 컸다.

윤해준이 박수현을 사귀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허탈해지면서 몸에 힘이 풀렸다. 차라리 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야, 솔직히 말해 봐. 아까 걔랑 잤냐?’

‘박수현 그런 애 아냐. 사실 내가 페로몬 때문에 흥분해서 같이 자자고 사정했거든?’

‘그런데?’

‘섹스하고 싶으면 나중에 맨정신으로 찾아오래.’

‘와아, 씨발 개 멋지네. 발정기 오메가가 꼬셨는데 그걸 참는단 말이야? 합격! 야, 걔 물어. 척 봐도 괜찮은 애야.’

‘할 일 존나 많은데 연애가 웬 말이냐. 내년 1년 더 휴학할까 고민 중인데 그럴 여유 없다.’

첫 히트 사이클이 찾아왔을 때 병원에서 집으로 향하던 중 해준과 나눈 대화였다.

그 후에 윤해준과 박수현을 만나게 해 준 사람은 나였다. 기말고사를 한 주 앞두고 알바하는 곳 매니저가 부친상을 당했다. 사장은 그때 새 레스토랑을 오픈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서 내게 사흘만 오전부터 출근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말시험이 코앞이었지만 그녀에게 빚을 많이 져서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침 놀고 있던 해준에게 사흘 동안 대리출석을 부탁했다. 내가 너무 피곤하거나 일이 생기면 가끔 해준을 학교에 보내곤 했기 때문에 그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

해준은 그때 박수현이 내게 관심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박수현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해준과 내가 작정하고 역할을 바꾸면 엄마도 헷갈려할 정도인데 생판 남인 박수현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기말 끝나고 바로 방학에 돌입해서 시기도 딱 맞아 떨어졌다. 내가 박수현과 학교에서 마주칠 일이 없으니 얼마든지 나로 위장해서 박수현과 사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씨발, 미친 개새끼. 씨발 좆같은 새끼. 너 나한테 왜 이래?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넌 네 손으로 네 형을 갈기갈기 찢어 파멸시켰다는 것만 알아 둬. 너 절대 용서 못 해 이 씨발놈아. 내 손에 잡히기만 해 봐.

한계치까지 치솟은 노기에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하필이면 손목이 귓바퀴에 꽂힌 피어싱을 내리눌렀다. 내 귀에 박힌 피어싱과 서랍 속에 든 목걸이는 원래 해준이 받을 물건이었다. 박래현은 박수현이 주문한 보석들을 내 귀에 하나씩 꽂아 넣으면서 복수심에 연료로 사용했을 것이다. 처음이라고 속이며 자신을 유혹하는 내가 미웠을 테고 동생이 안았던 오메가를 안아 버린 자신이 혐오스러웠을 것이다. 보석이 박힌 귓바퀴는 뜨겁게 타오르는데 손끝은 한없이 차가워졌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그 새끼가 잠깐의 유희로 시작한 일은 수습할 수 없는 비극을 초래했다. 박수현은 죽었고 박래현은 그의 죽음으로 세상을 잃었다. 박래현의 상실과 분노는 내게 향했고 윤해준은 자신의 잘못을 고스란히 내게 떠넘긴 채 사라져 버렸다.

‘야, 너 그 핸드폰 처음 본 거다? 핸드폰 바꿀 돈 있으면 씨발, 생활비에 좀 보태라, 개새끼야.’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커피 생각에 일어선 나는 배를 깔고 엎드린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해준이 얄미워서 엉덩이를 걷어찼다. 해준은 12월 초에 바텐더로 일하던 바를 그만두고 한 달 넘게 빈둥거리고 있었다. 해준에게 각인한 손님 중 하나가 해준을 감시하며 독점하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준은 새 직장을 알아보기 전에 조금만 쉬겠다며 핸드폰을 꺼 두고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 한 달에 10일을 외박하던 녀석이 웬일로 남자들을 만나지 않고 집에만 붙어 있어서 신기했다.

‘내 돈 들어가는 거 아니야. 너 러브 대포폰이라고 들어봤냐? 새로 사귄 남친하고만 쓰는 폰이야.’

‘대포폰? 그 새끼 어디 이상한 조직에 있는 애냐? 야, 제발 사람 좀 가려가면서 사귀어.’

‘아니. 그냥 재미로 만들어 봤대. 생긴 건 완전 순둥인데 하는 짓 보면 애 어른이야.’

‘걔랑은 오래 갈 거냐? 너한테 각인했다는 미치광이 알파는 어쩌고.’

‘2월 15일까지만 사귀고 헤어질 거야.’

‘헤어질 거면서 핸드폰은 왜 받아? 그리고 왜 하필 2월? 넌 연애하는 기간 정해 두고 사귀냐?’

‘걔 개강하면 공부하라고 보내 줘야지.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나한텐 과분해.’

주로 연상의 직장인들과 연애해 왔던 해준이기에 의아했지만 잘생긴 대학생인가보다 하고 더 캐묻지 않았다. 워낙 헤프게 연애하는 애라 상대가 궁금하지 않았다.

과거를 짚어 보던 나는 냉정을 되찾고서 머릿속에 대강의 윤곽을 그려보았다. 해준은 내가 1년 더 휴학한다는 말을 듣고 방학 동안만 내 행세를 하며 박수현을 만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한 달 반 동안 연애한 뒤에 헤어지자고 했는데 박수현이 거부하니까 자신의 섹스 동영상을 보냈고, 그걸 본 박수현은 우울증이 도져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다.

5월에 귀국해서 박수현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영상을 보게 된 박래현은 내가 박수현과 사귀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복수를 계획했을 것이다. 그는 내 가족을 조사하다가 쌍둥이 동생을 조사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내가 곧이곧대로 해준이 사라진 날에 맞춰 실종신고를 했다면 박수현이 죽은 시점과 맞물려 잠깐 의심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해준이 바를 그만둔 12월 초에 맞춰서 그가 실종된 것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성인 남자는 사라진 지 한두 달 안에 신고하면 단순 가출로 처리돼서 수사에 착수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미리 들었던 터라 나름대로 편법을 써서 실종 기간을 늘린 거였다. 박수현에게 나랑 사귄다는 말을 직접 들었던 박래현이 시기가 맞지 않는 윤해준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이 붙어 산 나도 몰랐던 일을 멀리 미국에서 살다가 귀국한 박래현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생각이 흘러 흘러 결론에 이르자 후덥지근한 늦여름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 씨발 윤해준! 너 이 새끼 만나기만 해 봐, 내가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씨발 새끼, 너 대체 박수현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너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건데? 아니 수습할 방법이 있기나 하겠냐고.

분노에 차서 씨근덕거리다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해바라기가 줄지어 핀 담장을 큰 보폭으로 따라 걸었다. 박래현은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간 내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엄마 병원비를 미끼로 나와 계약을 맺은 뒤 나를 개 취급하며 복수를 감행했다.

그런데 왜 하필 내게서 아이를 보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를 빼앗은 뒤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려고? 여기에는 박래현이 내가 낳은 아이를 평생 봐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박래현을 괴롭혀 왔던 계부가 있었다. 박수현을 죽음으로 몰고 간 방탕한 애인이 박래현의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JS 제약 후계자가 된다면 박래현 계부는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이다. 자신을 괴롭혔던 계부와 자신을 버렸다가 뻔뻔하게 다시 결혼하자고 나타난 정치헌, 박수현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모르쇠로 일관한 나까지 한 번에 세 명을 골로 보낼 수 있으니 박래현에게 그다지 나쁜 패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박래현이 숨겨둔 다른 목적이 있든가.

‘이 새끼 저 새끼 다 박아 댄 더러운 구멍에 내 자지를 박을 순 없잖습니까.’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박래현은 비꼬듯 말했었다. 영상 속에서 대체 어떤 모습을 봤길래 박래현은 그런 말을 했을까? 해준이 적어도 두 명 이상과 관계했을 거란 생각이 들자 무릎이 꺾여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반질반질한 돌에 무릎과 배를 세게 부딪히면서 아랫배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몸을 웅크린 채로 아랫배를 살살 쓸었더니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가라앉아서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박수현에게 동영상을 보낸 사람이 정말로 윤해준일까? 해준이 1월 26일에 사라졌으니 질투에 눈이 먼 알파 새끼가 기어코 해준을 납치해 박수현에게 동영상을 보내고 해준을 감금했다는 게 내가 세운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내 추측이 맞다면 해준의 신변이 위험했다. 사람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우선 해준을 찾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결론을 내리자 뻔뻔하게 박수현과 문자를 주고받던 윤해준이 생각나 속이 발칵 뒤집혔다.

그 새끼 때문에 나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났고 사랑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따위 좆같은 일에 휘말리게 된 내가 불쌍해서 멈췄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박수현과 연애라도 하고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그래도 덜 억울했을 것이다. 박수현과 윤해준의 관계를 몰랐던 나는 어느 날 박래현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온 뒤에 윤해준 대신으로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박수현에게 말 한 번 걸지 않았는데… 아랫배에 따끔한 통증이 생겨 배를 쓰다듬으며 나는 더 섧게 울었다. 부모의 사랑 속에서 축복받으며 태어나야 할 아이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한 명은 복수의 도구로, 한 명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아이를 이용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초롱이와 엄마를 위해 박래현과 그대로 지내고 싶지만, 박래현 본심을 알고도 그에게 맞춰 줄 자신이 없었다. 어렵게 그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을 깨달았던 만큼 배신감이 커서 박래현이 꼴도 보기 싫었다. 낯짝이 얼마나 두꺼우면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거짓 사랑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위조한 감정으로 나를 농락한 박래현을 용서할 수 없듯 박래현 역시 박수현을 죽음으로 몰고 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가슴에 열이 부글거려서 나는 바닥에 누운 채 우두커니 어둠 속을 응시했다.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에 여름이 벗겨지면서 새로운 계절이 내 목을 조르러 다가오고 있었다.

***

“으, 으응….”

모기에 물린 곳이 따끔따끔 아파서 잠결에 무릎을 좌우로 흔들었다. 손바닥으로 쳐서 당장 때려죽이고 싶은데 몸 움직이는 게 귀찮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얼굴은 왜 퉁퉁 부어 있고, 무릎은 왜 찍혀 있어. 나 자는 동안 혼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응?”

우렁우렁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까지 울다가 잠들었더니 눈두덩이 부어서 손등으로 몇 번 지압한 후에야 눈이 반쯤 떠졌다. 완벽한 성장 차림의 박래현이 종아리를 바투 잡아 다리를 고정한 채로 무릎에 난 상처를 소독하고 있었다.

“잠이 안 와서 산책하다가 넘어졌어요.”

“어두운데 산책을 왜 나가? 모기도 있고 아직 날이 더운데. 건강해도 임신해서는 조심해야지.”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무사히 낳아 드릴 테니까.”

어제 박래현 말이 떠올라 자제심을 잃은 내게서 벌컥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동작을 멈춘 박래현이 미간을 찌푸리고서 나를 유심히 건너다보았다. 냉정한 척하고 있지만 내가 말을 듣지 않아서 박래현 눈에 짜증이 서렸다.

“무릎 말고 다친 데 있어?”

“없어요.”

박래현은 소독한 상처에 연고를 넓게 펴 바르고서 그 위에 얇은 밴드를 붙였다. 무릎과 허벅지를 스치는 손이 소름 끼치게 싫어서 나는 급하게 무릎을 오므렸다. 이어서 아무렇지 않게 파자마 단추를 여는 손을 있는 힘껏 뒤로 쳐냈다.

“윤준영, 가만있어.”

박래현은 몸부림치는 나를 제압한 뒤 파자마 윗도리를 벗겨 가슴팍과 겨드랑이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박래현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천장의 무늬만 하염없이 쏘아 보았다. 남자가 날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데 거기엔 억울하면서도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

“다친 데가 없긴, 손바닥도 다쳤잖아.”

그는 소독약으로 손바닥을 닦은 뒤 손바닥 상처에도 연고를 펴 발랐다. 겉으론 날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박래현이 날 보살피는 이유는 오로지 아이 때문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얼굴 안쪽은 나를 향한 증오로 가득해 손 쓸 수도 없이 무참하게 박살 나 있을 것이다.

“윤준영. 준영아, 나 봐.”

나는 힘겹게 박래현에게 시선을 맞췄다. 박래현은 내 몸 어딘가에 자신을 새겨 넣으려는 듯 집요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길쭉한 손가락이 머리카락 안으로 파고들며 엄지가 느릿느릿 뺨을 쓰다듬었다.

“내겐 윤준영도 아이도 다 소중해. 그러니까 절대 다치지 마. 알겠어?”

“…….”

“내가 이 차장님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아침은 천천히 먹어.”

박래현은 상체를 수그려 내 입술에 입 맞췄다. 기계적으로 입을 벌려 주며 나는 박래현의 완벽한 연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박래현 말을 믿었던 건 박래현이 좆같이 연기를 잘해서였다. 지금도 박수현이 사귄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말하면 박래현이 나를 조금은 좋아해 주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아직 확인해야 할 게 남아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일 끝나고 바로 들어올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박래현은 쪽 소리를 내며 가볍게 입 맞추고서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어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나는 헤벌쭉 웃으며 그를 배웅해 주러 나갔을 것이다.

나는 한 시간 정도 더 뭉그적거리며 침대에 누워 있다가 아침을 먹고 2층 서재로 향했다. 지옥의 문을 여는 것처럼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는 손이 떨렸다. 박래현이 내 방으로 짐을 내리면서 그의 방에 있던 책장 두 개 중 하나가 서재로 옮겨졌다. 나는 서재에 있는 책상이나 책장 어딘가에 영상이 숨겨져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책 냄새가 아늑하게 밴 서가를 둘러보다가 먼저 육중하고 커다란 갈색 책상으로 향했다. 서랍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열어 보던 나는 책상 서랍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책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책장에 달린 서랍을 일일이 열어서 안을 뒤졌다. 드디어 책장 맨 아래 서랍에서 상자를 발견했고 그 안에서 박수현 것으로 추정되는 핸드폰을 찾아냈다. 해준이 썼던 차명폰과 같은 기종이었다. 전원을 켜고 9% 정도 남은 배터리를 확인했다. 충전을 시킬까 고민하다가 빨리 훑어보는 쪽을 택했다.

핸드폰엔 생판 처음 보는 번호로 내 이름이 저장되어 있었다. 박수현이 해준에게 사 준 핸드폰 번호일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를 훑어봤다.

20xx 1월 16일 월요일

「형 보고 싶다.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세법 공부 중인데 머리에 쥐 날 거 같아」

「세법 어려우면 회계사 되기 힘들 텐데.」

「그래서 걱정이야 난 특히 계산에 약하거든」

「방학인데 저랑 좀 놀아 주면 안 돼요? 알바에 공부에, 형 너무 바빠요」

씨발, 기가 막혔다. 세법이 뭔지도 모르는 새끼가 옆에서 주워 들은 걸 이용해 아주 제대로 사기를 치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내 동생이어서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박수현이 이런 새끼 때문에 자살했다면 그는 억울해서 아직 눈도 못 감고 있을 것이다. 문자 몇 개를 더 훑어보다가 분노로 까무러칠 것 같아서 맨 마지막으로 내렸다.

20xx 1월 25일 수요일

「박수현 생각해 봤는데 역시 안 되겠어 우리 그만 만나자」

「형, 만나서 얘기해요. 제발 나 좀 만나줘요.」

「여기서 조용히 끝내자 난 학비도 마련해야 하고 엄마도 아프셔서 너랑 연애할 여력이 안 돼 그동안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미안」

해준이 사라질 무렵에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였다. 박수현의 감정이 깊어지자 해준은 급하게 박수현을 정리하려고 이별 문자를 보낸 듯했다. 1월 26일에 보낸 마지막 문자에는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20xx 1월 26일 목요일

「이게 내 본 모습이야. 존나 재미없어서 너랑 이제 그만 만날래」

1월 26일이면 박수현이 사고로 죽은 날이었다. 그가 해준의 영상을 받고 집을 나간 건 확실해 보였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동영상을 재생했다. 30초 남짓한 화질이 구린 영상 속에서 해준은 영상을 찍고 있는 남자를 포함해 세 명의 남자와 섹스를 즐기고 있었다. 몇 초도 안 돼 동영상을 끄고서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마구 때렸다.

엎드린 해준에게 카메라 초점이 맞춰진 영상에서 남자들은 하반신만 슬쩍 찍혀 있었다. 내 동생이 아무리 막 나가는 새끼여도 자발적으로 이런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얼핏 쾌락에 젖어 신음을 내뱉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놈들이 해준에게 술을 먹이거나 약을 썼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 확신에 점점 자신이 사라졌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남을 속이는 새끼가 난교라고 마다할 리 있을까.

핸드폰 전원을 꺼 제자리에 두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아서 높다란 의자 등받이에 뒷머리를 기댔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며 속이 울렁거렸다. 어제가 내 인생 최악의 날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어제보다 더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내가 약에 취해 윤간당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고 분노가 들끓었다. 더는 앉아 있을 기력이 없어서 나는 소파에 축 늘어진 몸을 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잔뜩 긴장했는지 아랫배와 몸 근육이 결리고 쑤셨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상은 해준이 보낸 게 아니었다. 박수현이 홧김에 영상을 풀어 버리면, 애꿎은 나만 좆 되는 상황인데 미쳤다고 영상을 보내겠는가. 처음 예측대로 해준을 납치한 새끼가 해준을 독점하려고 영상을 보냈다는 게 더 타당해 보였다. 윤해준이 어디서든 잘 지내길 바랐는데 그 희망을 접어야 할 때가 되었다. 내가 윤해준을 찾을 때까지 그 미치광이 알파가 해준에게 심한 짓을 하지 않기만 바랐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 아까 봤던 영상이 재생되었다. 내가 동영상 속의 해준이 된 것처럼 구역질이 났고 그 영상을 박래현이 봤다고 생각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박래현이 나를 일관되게 남창 취급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명백한 증거를 쥐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처음이라고 입을 털었으니 그의 눈에는 내가 퍽 가소롭게 보였을 것이다. 박수현이 같은 과 후배일 뿐이라고 잡아떼는 날 보며 그가 얼마나 분했을지 짐작이 갔다.

솔직하게 자초지종을 얘기해서 문제를 풀어야지 이대로 박래현에게 오해받으면서 살 수는 없었다. 영상을 해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냈다면 그가 해준을 용서해 줄 여지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래현이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해준은 영상을 보내기 전에 박수현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 영상이 해준의 차명폰으로 보내졌으니 박래현은 내가 싫다는 박수현을 떼어 낼 목적으로 일부러 영상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설령 동영상을 해준이 보내지 않았다 쳐도 박수현을 속이고 만났던 사실은 그대로이다. 그 애가 박수현을 속이지 않았다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박래현의 복수심은 처음부터 동영상 속 인물을 정조준 했기 때문에 내가 그 인물이 아니라면 박래현이 나를 붙잡을 이유가 사라진다. 그는 내게 애정이 없어서 나와 수없이 몸을 섞으면서도 각인하지 않았다. 그에게 윤준영은 정액받이용 섹스 토이 이상은 아니란 소리였다.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나와 초롱일 버리고 엄마를 미끼로 해서 해준에게 새로운 덫을 놓으려 들 것이다.

박래현은 무자비해서 박수현을 속인 윤해준을 그냥 둘 사람이 아니다. 박수현 일이라면 눈이 뒤집히는 그에게 윤해준이 자신의 아이를 밴 오메가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중요할 리가 없다. 내게 썼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해준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해준은 나와 얼굴, 체격, 페로몬 향까지 똑같아서 박래현이 그를 안는 데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아, 그건 안 돼, 싫어!”

가장 끔찍한 결론이었다. 박래현이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몸을 섞는 것도 떠올리기 싫은데 하물며 내 동생이라니.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내 동생이 갖는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배 속에서 쑥쑥 자라나는 초롱이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박래현이 초롱일 사랑한다고 여겨 왔지만 그의 민낯을 확인하고 난 뒤라 확신이 사라졌다. 그가 나를 강제로 끌고 가서 아이를 지우는 상상을 하다가 너무 끔찍해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저 상상일 뿐인데 심장이 정지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미친 연극을 계속하는 한이 있어도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나는 초롱일 지우는 것도, 해준이 박래현 아이를 가지는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엄마와 초롱일 두고 되돌아갈 수는 없다. 첫 시작부터 비틀어져 섣불리 바로 잡으려 할수록 상황은 어긋나 참혹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지금 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나와 초롱일 지키기 위해 차분하게 방안을 모색해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로 했다.

***

속옷에 피가 비쳐 박은수 선생에게 진료를 받았다. 박은수 선생은 내게 운동을 심하게 했거나 신경 쓰는 일이 있는지 물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계속 성관계를 피하고 있어서 출혈의 원인은 스트레스가 맞았다. 박래현과 박영범의 대화를 들은 이후로 내내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고민을 심하게 하다 보니 혓바늘이 돋고 입맛이 없어져 자연히 먹는 일도 소홀히 했다. 정 차장은 임신 초기 입덧 증상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박래현은 내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용을 썼다. 내가 맛있게 먹었던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사 와서 매일 떠먹여 주어도 내 눈엔 그저 위선으로 보였다.

“박래현! 혹시 네가 준영 씨한테 스트레스 준 거 아냐?”

“선생님, 형이 저 스트레스 준 적 없어요.”

“진짜야? 그런데 왜 피가 비쳤을까? 착상도 잘됐고 준영 씨 몸도 되게 건강한데.”

박은수는 의심쩍은 눈으로 박래현을 힐긋 노려본 뒤 내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겠다고 했다. 박래현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누나, 준영이 많이 안 좋아?”

“임신 초기에 유산 방지 주사 많이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 예방 차원에 놓는 거야. 준영 씨, 이번 주는 많이 움직이지 말고 휴식을 취하세요. 될 수 있으면 침대에 누워 있어요.”

“네.”

“마음 편하게 갖고 스트레스 받을 상황을 멀리하세요. 주사 놓을 테니까 안으로 들어갑시다.”

스트레스 받을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나는 초롱이와 나를 위해서 연극을 계속하기로 했다. 진료실 안쪽으로 들어가 엉덩이에 주사를 맞았다. 박래현이 언제 따라 들어왔는지 얼얼한 곳을 솜뭉치로 꾹 눌렀다. 입덧도 없이 순한 아이인데 내가 박래현을 미워하고 나쁜 생각만 해서 화가 났을 것이다. 적어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박래현은 친절한 가면을 쓰고 나를 대할 테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에 응해 주기로 했다. 박래현에게 사랑받는 오메가인 척 아이를 속이는 것이다.

박은수와 병원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박래현과 나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호를 받아 정지선 앞에 차를 세운 박래현이 오른손을 뻗어 내 손에 깍지 끼었다.

“요즘 무슨 일 있지. 솔직하게 말해 봐.”

“동생이 걱정돼서 잠이 안 와요.”

“집 나간 동생? 어디서 잘살고 있겠지.”

“작년 12월에 집을 나갔는데 연락이 안 돼서…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 마음이 편할 거 같아요.”

박래현은 검지와 중지로 미간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사뭇 두려워 나는 그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신경 쓰이면 내가 찾아 줄게.”

“사람 고용해서 제가 직접 찾으러 다니면 안 될까요?”

“안 돼. 누나가 너는 누워 있으라고 했어. 내가 금방 찾아서 대령할 테니까 기다려.”

“제가 찾아볼게요. 부탁입니다.”

박수현을 감쪽같이 속였던 윤해준을 박래현에게 찾아 달라고 할 순 없었다. 박래현이 박수현을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기에 박래현 앞에서 윤해준 얘길 하는 것 자체가 미안했다. 그렇다고 8개월째 안 나타나는 동생을 모른 척할 수도 없어서 내가 직접 찾고 싶었다.

“내가 찾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내가 찾아야 훨씬 빠를 텐데.”

“형은 바쁘잖아요. 회사 일도 있고, 연구실 일도 있고….”

“내가 직접 찾으러 다니진 않아. 넌 신경 쓰지 말고 집에서 편히 쉬고 있어.”

내 몸이 안 좋은 상황에서 박래현 고집을 꺾기는 힘들었다. 해준을 찾아도 뒷일이 걱정이지만 그래도 사람 목숨이 먼저였다. 이후의 일은 찾으면서 해결해 나가면 될 것이다.

“동생 찾으면 어머닌 동생한테 맡기고, 넌 이제 나랑 아기한테만 신경 써.”

“네, 그럴게요.”

나는 좋은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박래현은 해준이 한 짓을 모르기 때문에 그가 해준을 찾는다고 해서 해준에게 관심을 기울일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얼른 찾아 줄게. 걱정하지 마.”

“고마워요.”

해준이 박수현의 죽음에 연관된 것도 모르고 동생을 찾아 준다는 박래현에게 미안했다. 박래현은 타깃을 잘못 잡아 거의 석 달을 삽질만 하다가 정작 복수해야 할 대상을 위험에서 구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박래현과 나는 윤해준이 저지른 사기에 희생된 피해자였다. 그래도 동생 대신 잡혀 와 벌을 받다가 알파의 거짓말에 속아서 마음까지 줘 버린 나보다 가엾고 원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부부 사이니까 형 말고 자기는 어때? 자기라고 한번 불러 봐.”

“그건 좀 닭살이 돋네요. 전 형이 좋아요.”

“난 여보도 괜찮은데.”

뻔뻔하게도 박래현 입에서 부부라는 말이 거리낌 없이 나왔다. 결혼식을 한 것도 아니고 혼인 신고서를 낸 것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부부냐고 되물으려다가 참았다. 박래현은 왼손으로 운전하면서 집에 도착해 시동을 끄고 나서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잠깐 기다려.”

차에서 내려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연 박래현이 나를 번쩍 안아 들고서 집으로 들어갔다. 걷는 게 훨씬 편하다는 주장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목에 팔을 둘렀다. 박래현은 침대에 나를 내려놓고 내 운동화를 벗긴 뒤 전화기를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 성질 급한 남자는 벌써 윤해준을 찾게 지시를 내리는 듯했다. 한참 만에 욕실에서 나온 박래현이 내 티셔츠 자락을 잡아 위로 올렸다.

“졸려? 내가 씻겨 줄 테니까 얼른 씻고 자자.”

주사 때문에 졸음이 몰려와 만사가 귀찮아졌다. 비몽사몽간에 옷이 벗겨지고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따뜻한 물에 나를 담근 박래현이 정성껏 나를 씻기고 머리를 감겼다. 나는 박래현에게 몸을 맡긴 채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기댔다.

박래현은 뭐든 서툰 법이 없었다. 남의 목욕 시중은 들어 본 적이 없을 텐데 나를 씻기는 손길이 능숙하고 민첩했다. 나는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물기가 가득한 팔뚝이 절도 있게 움직이는 걸 멀거니 쳐다보았다. 드레스 셔츠는 군데군데 물에 젖어서 그 부분만 살이 비쳐 보였다.

박래현은 넉넉한 수건으로 몸과 머리칼을 닦아 준 뒤 나를 안아서 침대에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나를 씻기는 내내 발기해 있던 욕구를 혼자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을 갖고 논 박래현이 밉고 원망스러운데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면 마음이 흔들렸다. 박수현과 내 사이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박래현과 원점에서 시작하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기에 아이를 건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몸을 뒤척이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가방을 발견했다. 저 안에 과연 혼인 신고서가 들어 있을지 안 들어 있을지 궁금해서 소파 쪽으로 걸어가다가 욕실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드레스 룸 안쪽에 욕실이 있어서 여기까지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거짓말을 할 게 뻔해서 박래현에게 혼인 신고서에 관해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나 스스로 단서를 찾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나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 든 서류봉투에는 내 운전면허증과 아직 제출하지 않은 혼인 신고서가 들어 있었다. 혼인 신고서에 내 인적 사항을 써 내려가며 새로운 시작에 설던 내가 한심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덜덜 떨면서 서류와 가방을 제자리에 놓아두고 침대로 돌아가는데 현기증이 나서 걸음이 갈지자로 휘청거렸다. 그래도 혹시나 했던 마지막 기대가 무너져 내리면서 마음이 무참하게 찢어졌다.

모든 게 끝났다. 사랑도 결혼도 안온한 가정도 다 풍비박산났다. 박래현과의 관계에서 눈꼽 만큼의 가망도 발견할 수 없기에 모든 걸 까발리고 끝내고 싶었다. 더는 박래현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 남자 집에서 머물고 싶지도 않았다. 박수현을 속여 나를 이 지경에 처하게 한 윤해준이 미웠고 자기 아이까지 배게 했으면서 나를 기만한 박래현이 증오스러웠다.

결혼하자는 말에 속아 넘어가서 심장을 홀랑 빼다 바친 나를 보며 박래현은 짜릿하고 통쾌했을 것이다. 좌절감에 빠져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 되어갈 무렵 나를 벌하려는 듯 아랫배에서 따끔따끔한 통증이 번져 갔다. 깜짝 놀라서 몸을 웅크린 채로 가만히 있었더니 다행히 통증이 가라앉았다. 씨발, 초롱이를 배고서 죽을 생각을 하다니 나는 미친 새끼였다.

통증 덕에 패닉 상태에서 벗어난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남자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나를 파멸시키는 거였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박래현은 다른 함정을 파서 내가 걸려들길 기다렸을 것이다. 엄마에게 나에 관해 물어봤다는 걸 보니 보나 마나 손기호도 박래현 작품이었다. 이제 보니 박래현에게 오게 된 모든 경로가 의심스러웠다.

다른 병원에 다녔던 엄마에게 박래현 병원을 소개해 준 게 손기호였다. 진료를 받아 본 엄마는 주치의가 친절하고 능력 있다며 당장 병원을 바꿨다. 학업과 돈 버는 데 바쁜 나를 대신해 엄마에게 친구가 되어 준 사기꾼을 고맙게 생각하며 경계하지 않았다. 남자의 도움이 필요해서 엄마는 호의를 완전히 거절하지 못했다. 계획대로 우리 전 재산을 들고 튄 손기호 때문에 나는 박래현이 쳐 놓은 그물에 몸을 던졌다.

예상보다 거부 반응이 심해서 모아 놓았던 돈이 수술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을 테지만 그 돈이 있었으면 몸을 파는 일 말고 다른 방안을 모색했을 것이다. 나는 젊고 튼튼해서 잠 잘 시간을 줄여 가며 알바와 막일을 뛸 수 있었다. 손기호는 개호로 자식이고 그를 조종해서 돈을 빼돌린 박래현은 구제 불능이었다.

저야 복수라는 대의명분이 있겠지만 아무 잘못 없이 당한 나와 엄마와 초롱이 입장에서는 악마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도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떠밀려 갈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나를 무력하게 했다.

“안 피곤해? 왜 아직 안 자고 있어?”

박래현이 파자마 하의만 골반에 걸치고서 샴푸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수중에 넣고자 이 남자는 대기자 순서에서 한참 밀려 있던 엄마에게 심장 공여자를 구해줬을 것이다.

박래현은 내게 아이를 얻은 다음 나를 빚쟁이로 만들어서 내칠 계획을 세웠다가 내가 박수현을 부인하자 화가 나서 나를 완전히 밀어 버리기로 작정한 듯했다. 내게 원하는 걸 쥐여 주면서 엉뚱한 환상에 젖게 한 뒤에 행복이 극에 달했을 때 모든 걸 박탈해 날 미치게 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잘못도 없이 이런 끔찍한 벌을 받을 까닭이 없어서 분해 죽을 것만 같았다. 내 잘못이라고 해 봐야 윤해준에게 대리 출석을 부탁한 일 말고는 없었다. 그 대가로 나는 박래현에게 개 취급을 당했고 저급한 남창으로 여겨져 온갖 수모를 겪었다. 임신한 뒤에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좀 나아졌나 했더니 웬걸, 달콤한 꿀로 유인해서 나를 똥통에 처박으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오늘은 주사 맞았으니까 일찍 자자.”

비누 냄새를 풍기며 내 옆으로 올라온 박래현이 몸을 돌려 나를 안으려는 순간 구역질이 치밀면서 배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나는 통증을 참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윤준영, 준영아! 어디 아파? 얼굴이 왜 이래?”

“배가 아파요.”

“배가 아파? 언제부터 아팠어!”

“지, 지금…”

박래현은 급하게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거실에 있던 박영범을 불러들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왜 그래? 무슨 급한 일 있어?”

“형, 얼른 차 대기 시켜. 준영이가 배가 아프대. 병원에 가 봐야겠어.”

생각이 얽히고설키는 와중에 아랫배에 아픔이 더 심해졌다. 둔탁하던 통증의 끝이 날카롭게 변질되는 게 불길해서 나는 박래현을 소리쳐 불렀다. 불안으로 흐릿해진 눈 앞에 핏기가 사라진 박래현 얼굴이 다가왔다.

“박래현 씨, 형, 흐으, 나 배 아파요. 어, 어떡하지?”

“지금 바로 병원에 갈 거야. 걱정하지 마.”

박래현은 나를 번쩍 안아 들고서 한달음에 주차장으로 달려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우리가 타자마자 차는 곧장 출발했다. 초롱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불안해서 심장이 아프게 뛰고 눈이 핑핑 돌았다. 박래현은 나를 품으로 끌어당기고는 등과 머리를 쓸어내리면서 페로몬을 풀었다. 심호흡을 해서 페로몬을 들이마셨더니 통증이 가라앉고 두근거리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흐렸던 눈이 점차 맑아지면서 파자마 바지 밑으로 드러난 박래현의 맨발이 보였다.

“곧 병원 도착해. 걱정하지 마.”

알파의 강력한 페로몬 덕분에 일시적으로 멈췄던 통증이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마지막엔 상당히 심하게 찾아와 허리를 펼 수 없었다.

“흐, 흐윽! 배, 배가, 배가 아파요….”

“윤준영, 병원 곧 도착하니까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어.”

시트가 흥건하게 젖어서 나는 고개를 들어 차체를 올려다보았다. 뚜껑이 열리는 차도 아니었고 어디에서 비가 새고 있지도 않았다. 아랫배가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나는 신음하며 배를 움켜쥐었다. 뭔가가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려워서 박래현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는데 그의 셔츠에 붉은 손자국이 찍혔다.

“아, 아아악! 피! 피가… 흐, 흐윽, 피가….”

“준영아, 내 눈 보고 숨 쉬어. 괜찮으니까 진정해.”

아래에서 울컥울컥 쏟아지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서 박래현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를 안고서 박래현이 끊임없이 뭔가를 말했지만 내 귀에는 커다란 아이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대기하고 있던 의사들이 나를 간이침대로 옮겨 침대를 끌고 들어갔다.

나는 아이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몸을 웅크리고서 아랫배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내 옆을 의사와 간호사들이 스쳐 지나가고 잔인한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박은수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완전히 탈진 상태였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얼굴에 핏물을 잔뜩 묻힌 채 나를 보는 박래현 눈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흰 셔츠에 찍힌 손자국보다 더 빨갛게 물들어서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핏물에 흥건히 젖은 남자의 맨발을 보면서 나는 의식을 잃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나를 꺼내려고 입술에 부드러운 살갗이 와 닿았다. 퍽 익숙한 입술이었다. 잠결에 습관처럼 입을 열어 안으로 들어온 혀를 휘어 감았다. 뜨겁고 촉촉한 살덩이가 실제로 입 안을 휘젓는 느낌에 굉장히 길고 생생하고 끔찍한 악몽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초롱이가 내 곁을 떠나는 무서운 꿈을 꾸고 있었다.

“잘 잤어?”

“네, 왜 면도 안 했어요? 턱이 까끌까끌해서 아파요.”

“너 일어났으니까 이제 하면 되겠네.”

“저 무서운 꿈을 꿨어요. 너무 생생해서 꿈같지가 않아요.”

박래현은 오늘 출근을 안 할 모양인지 크림색 니트에 가벼운 팬츠 차림이었다. 그런데 박래현 등 너머로 응당 보여야 할 정원이 보이지 않아서 몸을 일으켰다.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을 느껴 눈살을 찌푸린 순간 온갖 기억이 갑작스럽게 몰려들었다. 복통과 하혈, 핏덩어리 그리고 흰 드레스 셔츠에 찍혔던 붉은 손자국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박래현을 보았다. 창백한 낯빛과 핏발 선 흰자위 때문에 박래현은 몹시 초췌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아이는, 초롱이는 어떻게 됐어요?”

“아이는 유산됐어.”

“거짓말.”

“완전 유산이라 네 몸엔 지장 없대. 아이가 착해서 너 고생 안 시키려고 그랬나 봐.”

“거짓말하지 말아요!”

나는 박래현 말을 듣지 않으려고 양쪽 귀를 손으로 가리고서 고개를 저었다. 눈앞이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 없어요. 우리 아이가 얼마나 튼튼한데… 형이 잘못 안 거죠?”

침대에 걸터앉은 박래현이 나를 가볍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박래현 말을 믿을 수 없어서 나는 환자복 밑으로 손을 넣어 내 배를 더듬었다. 찾아온 줄도 모르게 이 안에 자리 잡았던 아이가 왔던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내가 맨날 못된 생각만 하고 몸을 함부로 굴리고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아이가 날 떠나 버린 것이다.

“형, 초롱이 데려와요! 우리 초롱이 데려오라고!”

나는 텅 빈 배를 붙잡고 오열했다.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온갖 부정적인 생각만 해 왔던 터라 아이에게 더 미안하고 서러웠다. 예뻐했던 시간보다 불안하고 초조했던 시간이 더 길었지만, 아이가 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몸과 정신이 다 무너진 채로 나는 그저 눈물만 흘렸다.

“준영아, 그만 울어. 이러다 너 큰일 나.”

“씨발, 닥쳐!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개같이 굴어서 초롱이가 날 떠났어. 살려 내. 우리 아기 살려 내!”

나는 주먹을 쥐고 닥치는 대로 박래현을 두들겨 팼다. 진심으로 박래현이 밉고 원망스러워서 어깨와 가슴, 팔뚝에 수없이 주먹을 날렸다. 초롱이가 죽은 이유는 박래현이 사악한 목적으로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들어선 안 될 얘기를 듣고 초롱인 슬퍼서 먼저 가 버린 것이다. 이 개새끼가 잔인한 말로 초롱이와 날 죽인 것이다. 씨발, 우릴 강제로 헤어지게 만든 박래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박래현이 피를 토하며 오늘 일을 후회하게 해 줄 것이다. 나는 나와 초롱일 배신한 박래현을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내가 제풀에 지쳐 주먹질을 그만둘 때까지 맞고만 있던 박래현이 나를 품에 안았다.

“그래, 내가 잘못했으니까 준영아, 그만 울어.”

박래현 목소리가 눈물에 젖어 떨렸다. 울음을 참는지 그의 목울대가 눈앞에서 크게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려 했으나 눈물을 들키기 싫은 사람처럼 그는 내 뒤통수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준영아, 미안해. 내가 더 세심하게 돌봤어야 했어.”

“그래, 다 당신 때문이야. 똑바로 알고 있어. 내 잘못은 하나도 없어!”

노크 소리와 함께 박은수가 들어왔다. 박래현은 나를 안은 채로 고개만 돌려 박은수를 쳐다봤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좌우로 꺾으며 박은수는 주먹 쥔 손으로 목덜미 뒤를 툭툭 때렸다.

“준영 씨,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

“…….”

“유산된 건 유감이지만, 완전 유산이라 몸은 일주일 안에 회복할 겁니다. 검사 결과 아기집은 매우 깨끗한 상태라 걱정할 일은 없어요.”

“…….”

“두 사람 다 아직 창창한 20대니까 아이는 언제든지 가질 수 있어요. 준영 씨. 너무 낙담하지 말아요.”

“…….”

“준영 씨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아이는 좋은 데로 갔을 테니까 죄책감 느끼지 말아요.”

의사가 환자에게 으레 하는 말이겠지만 권위 있는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으니 내 죄가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인자한 웃음을 띠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제야 박래현에게 계속 안겨 있다는 걸 깨닫고 나는 박래현을 뒤로 밀어냈다.

“저 퇴원하고 싶은데… 병원엔 언제까지 있어야 하나요?”

“별 이상 없으니까 내일 오전에 퇴원해도 좋아요. 래현아, 잠깐 나 좀 볼까?”

박래현은 내 머리칼을 건성으로 한번 쓰다듬고서 박은수와 병실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눌 대화를 추측하며 박래현이 사라진 문을 멀거니 보다가 베개에 머리를 내려놓았다.

긴 잠을 자는 내내 잠에서 몇 번 깨어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지켜보는 박래현에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도로 눈을 감았다. 아이와 관련해 들을 말이 두려워 의도적으로 깊은 잠에 몸을 숨겼다.

나는 밝은 불빛이 싫어서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어떤 상황에서든 초롱일 지켜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했다. 멈췄던 눈물이 도로 흘러내려 시트를 적셨다.

“초롱아. 나 두고 혼자서 어디 갔어.”

몸이 무거워지고 아래가 젖어 가는 느낌에 손을 내려 허벅지 사이를 더듬었다. 끈끈한 피와 뭉클한 핏덩이가 손에 잡히는데 눈으로 확인할 용기가 없어 몸을 잔뜩 웅크리고서 벌벌 떨기만 했다. 이불 밖에서 박래현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에게 피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이불 끝을 잡고 몸을 더 둥글게 말았다.

“준영아, 왜 그래?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혀, 형…. 피, 피가 나요. 밑에서 핏덩이가… 흐, 흐윽, 나 무서워요.”

“어디 보자, 어디서 피가 흐르는지.”

박래현은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다가 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을 깍지 끼었다. 이불을 조금씩 아래로 내린 그가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손을 눈앞에 보여 주었다.

“여기 봐, 피 안 나네?”

“피 났어요. 핏덩이가 뚝뚝 떨어졌어요, 흐, 흐윽….”

박래현은 이불을 아예 걷어 젖히고서 환자복 안에 손을 넣어 내 살갗을 더듬었다. 커다랗고 묵직한 손이 다리 사이를 만지다가 빠져나갔다. 그는 눈앞에서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 보였다. 안심돼서 나는 깨끗한 박래현 손을 붙들어 손등에 뺨을 비볐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박래현이 옆으로 올라와 내게 한쪽 어깨를 내어 주었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그의 팔뚝을 베고 눕자 눈두덩으로 보푼 입술이 내려앉았다. 탄력 있고 보드랍던 입술이 며칠 새 갈라져 까슬까슬해졌다. 박래현이 증오스러운데 초롱일 잃은 슬픔을 나눌 사람이 박래현밖에 없어서 괴로웠다.

“아이 빨리 갖고 싶어요?”

“아이는 천천히, 몇 년 있다가 가져도 돼. 당분간 우리 관계에 집중하고 싶어.”

박래현은 내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 올린 뒤 이불 째 나를 안고서 등을 토닥였다. 박래현 말은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어디서부터 버려야 할지 경계가 모호했다. 남자의 다정한 태도에 판단이 흐려져서 그날 내가 엿들었던 대화가 환청은 아니었는지 되짚어 봤다. 내가 봤던 문자와 영상은? 가방 안에 든 혼인 신고서는? 모두 환상으로 치부하기엔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박래현을 보았다. 그는 계속 잠을 못 자서 피곤했는지 벌써 잠들어 있었다. 팔꿈치를 버팀목 삼아 상체를 들어 올리고서 수척해진 박래현을 내려다보았다. 속눈썹 그림자에 갇힌 눈 아래가 어두웠고 매끄럽던 뺨은 거칠어서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박래현처럼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박래현 뺨을 감쌌다. 두 체온이 맞닿아 차갑던 내 손과 서늘하던 뺨이 온기를 띠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박래현을 향한 욕심이 커져서 나는 박래현의 전부가 되고 싶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믿었고 초롱이와 함께할 행복한 가정을 꿈꿨다. 그러나 이 남자가 어떤 목적으로 내게 접근했는지 알게 됐고 초롱이마저 사라진 지금, 박래현과 내 관계는 완전히 끝나 버렸다. 우리는 상대를 죽이는 독 같은 존재였다.

박래현은 잠결에 내 허리를 더듬어 팔을 감았다. 내가 도망갈 수 없게끔 품에 나를 가두고서 그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청량한 비누 향과 더운 숨결이 나를 감싸면서 몸이 금방 따뜻해졌다. 의미 없이 눈을 깜박이며 창틀에 놓인 가습기에서 흰색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지켜보았다. 햇살 속으로 흩어지는 작은 물 분자들이 존재감 없이 사라지는 내 처지와 비슷해 보였다.

***

텅 비어 버린 일상으로 돌아와서 나는 습관처럼 배를 만졌다. 배가 부르지 않은 상태에서 초롱일 유산해서인지 아직도 배 속엔 초롱이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초롱인 죽었고 내 곁엔 박래현만 남았다. 박래현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전보다 다정하게 굴었다.

“준영아, 얼른 마셔. 너 약 마시는 거 봐야 출근하지.”

박래현은 내가 퇴원하자마자 한의사를 불러 녹용이 든 한약을 두 재 짓고서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였다. 비릿한 맛이 도는 한약을 다 삼키고 나면 상으로 사탕 하나를 까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오늘도 약 마신 걸 확인한 후에 막대가 달린 오렌지 맛 사탕을 내 입에 넣었다. 나는 혀에 남은 쓴맛을 제거하고자 사탕을 빨아 먹었다.

“오늘은 뭐 하고 지낼 거야? 심심하면 영화라도 봐.”

“엄마부터 보고 올게요.”

“몇 시에 갈 거야? 퇴근 시간에 맞추면 내가 데리러 가고.”

“오전에 갔다가 바로 올 생각이에요.”

나는 박래현을 배웅하러 주차장까지 따라 나갔다. 차에 오른 박래현은 유리창 문을 내리고서 내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박래현 쪽으로 허리를 숙이자 박래현이 오른팔을 쭉 뻗어 내 뒤통수를 감쌌다. 시선이 뒤엉키면서 박래현은 입에서 사탕을 꺼낸 뒤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볐다.

“일 끝나고 바로 퇴근할게.”

박래현은 아쉬운 듯 입술을 떼고 쥐고 있던 사탕을 도로 입에 넣어 주었다. 정원을 지나 대문 쪽으로 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열이 오르는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연인들 사이에서나 어울리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였다. 박래현 본심을 알고도 흔들리는 나를 질책하면서 산책하는 척 돌아다니며 저택에 설치된 CCTV 위치를 살폈다. 담장을 따라 설치된 CCTV는 드나드는 사람을 확인할 용도이지 사생활을 감시할 용도는 아닌 듯했다. 현관이 아니라 테라스로 나가 벽에 딱 붙어서 움직이면 CCTV에 걸리지 않고 주차장까지 갈 수 있었다.

박래현은 내가 도망갈 궁리를 하는 줄도 모르고 지극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키워서 잡아 먹으려는 심보일 텐데 내가 사라지면 그가 무슨 낙으로 살아갈지 의구심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박래현을 향한 격렬한 증오는 조금 희석됐지만 그를 용서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초롱이처럼 불쌍한 아이를 또 만들고 싶지 않아서 나는 고민 끝에 도주를 결심했다.

박래현은 고집이 세서 나를 임신시킬 계획을 수정하지 않았다. 정 차장은 내게 따뜻한 보약을 가져다 주며 녹용의 약효를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다. 녹용은 아기집을 튼튼하게 만들어 임신을 수월하게 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아이가 잘 안 들어서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보약이라고 했다. 박래현은 나를 달래기 위해 몇 년 있다가 아이를 가질 것처럼 말했지만 건강한 내게 보약을 먹이는 걸 보면 얼른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인 듯했다. 아무 잘못 없는 아이를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다. 첫 번째 임신은 불가피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임신은 무조건 피할 생각이었다.

도망은 나를 속인 박래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이자 배려였다. 광기와 오기만 남은 남자가 평온해지는 길은 순수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만나서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를 갖는 것이다. 당장은 화가 나서 미친 듯 나를 찾아다니겠지만 언젠간 허무한 복수심에서 빠져나와 나를 잊고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찾을 것이다. 박래현을 떠나는 일은 내가 태어나서 내린 결정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한 결정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같이 있어 봤자 악순환은 이어질 것이다.

나는 다음 히트 사이클이 오기 전에 기필코 여길 떠나기로 했다. 예전 같으면 노예 계약서 때문에 꿈도 꾸지 못할 생각이었다. 이제 박래현과 작성했던 계약서는 다 찢어서 없애 버렸으니 나는 박래현에게 갚아야 할 빚이 없고 내 통장에는 엄마 병원비를 충당할 액수의 돈이 들어있다.

도망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아직 건강을 회복하지 않은 엄마였다. 겨우 안정기에 접어든 단계라서 엄마에게 충격을 주긴 싫었다. 그래서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해준이 필요했다. 정우에게 더 폐를 끼칠 순 없고 해준을 찾아서 엄마를 돌보게 할 생각이었다. 박래현이 나를 찾으려 든다면 마지막 보루인 엄마를 건들지 못할 테고 나를 찾을 생각이 없다면 굳이 엄마에게 해코지할 이유 또한 없을 것이다. 여태 살펴본 바로는 박래현이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은 윤준영이지 윤준영 가족이 아니었다.

만일 박래현이 내 의사를 무시하고 최악의 수를 둔다면 그때 가서 돌아오면 된다. 시도도 안 해 보고 무력하게 끌려다녔다가는 비겁한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피할 수 있는데 포기하는 것과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나는 산수유나무 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우리 사이에 남은 게 없으니 차라리 박래현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고 나와 해준을 놓아 달라고 사정해 볼까. 이 사건에서 완벽한 피해자는 나였다. 잘못했다고 빌며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박래현과 윤해준이었다. 박래현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아픈 엄마를 두고 모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답답해서 머리칼을 거칠게 쥐어뜯었다. 잘못이 없는 데도 도망가야 할 사람은 나였다. 지금까지 억울하게 당해 놓고 죄지은 사람처럼 달아날 생각을 하면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려서부터 박래현에게 유일하게 빛이 돼 준 이가 박수현이라고 했다. 박래현이 복수를 포기할 인간은 아니므로 진실을 알게 되면 해준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박래현은 나를 미워하면서도 배 속에 든 아이 때문에 나를 소중하게 대했다. 내 존재 이유였던 아이가 사라져서 박래현은 아무 거리낌 없이 복수의 대상을 해준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끔찍한 결과를 수용할 자신이 없었기에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선을 파악한 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침대에 누워서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고민했다. 인터넷이 없고 핸드폰을 감시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고를 선택지는 명확하게 한계가 있었다. 여러 목적지를 생각하던 중 정우 엄마 아는 사람 아들이 필리핀에서 어학원을 차렸는데 돈을 쓸어 담는다는 말이 기억났다. 필리핀은 무비자로 출국할 수 있어서 당장 도망가야 할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이번 도망은 정우에게 도움 받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정우 도움이 필요했다. 당장 전화해서 상담하고 싶었지만 들키지 않으려면 박래현이 퇴근하길 기다렸다가 그의 폰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고민 한 가지를 해결했는데 그래도 마음이 가벼워지진 않았다. 나는 침대 헤드에서 거북 인형들을 꺼내 등딱지를 쓰다듬으며 사라져 버린 과거를 더듬어 갔다. 배 속엔 초롱이가 자라고 박래현이 날 사랑한다고 믿었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 씨발 새끼가 만들어 준 가짜 행복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그와 끝까지 가 보고 싶은 내 바람을 무시하고 박래현은 철저하게 나를 속였다. 힘들게 가라앉혔던 감정의 앙금이 수면 아래서 거칠게 소용돌이쳤다.

아이가 빠져나간 자리에 파란색 가시가 뾰족하게 돋아났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한 작은 가시는 무시무시하게 굵은 덩굴을 이루며 아기집을 찢고 밖으로 뻗어 나갔다. 살점이 떨어져 너덜너덜해진 곳에 핏물이 고였다. 몸을 뚫고 나온 파란색 가시 끝에 새빨간 피 꽃이 방울방울 맺혔다. 피를 토하며 네발로 기어 다니다가 박래현을 발견하고 그의 다리를 붙들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나를 물끄러미 주시하던 박래현이 내 뒤통수를 잡아서 뒤로 꺾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제가 잘못했어요! 아이 낳을게요! 낳으면 되잖아요!’

박래현 발밑에 엎드려서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윤준영, 닥쳐. 수현이뿐만 아니라 초롱이 몫까지 넌 고통 받아야 해.’

박래현 입가에 냉소가 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기나긴 악몽에서 깨어났다. 머리칼과 몸이 식은땀에 젖어 축축해진 상태로 나는 박래현이 내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꿈속에 나타난 박래현은 다정함으로 위장하지 않고 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겉으로는 다정하게 굴지만 박래현은 아이를 지키지 못한 나를 끝없이 증오하고 관망하면서 나를 골로 보낼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다.

생각을 돌리고자 침대 맡에 놓아둔 책을 펼쳐도 초롱이로 머릿속이 꽉 차서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유리문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짙푸른 잔디에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이가 보였다. 넘어질까 봐 뒤를 따라다니다가 아이를 안아서 높게 치켜드는 박래현과 두 사람을 지켜보며 웃는 내가 보였다.

내가 부질없는 꿈을 꿔서 다 어그러져 버린 걸까? 침대 위에 흩어져 있는 거북들을 보자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복받쳤다. 한꺼번에 터져 나온 열에 속이 메스껍고 식은땀이 나서 눈을 감고 속을 진정시켰다.

나는 방에서 나와 아기방으로 들어갔다. 동화처럼 아기자기한 공간을 두고 주인공은 사라져 버렸다. 허무해진 나는 코끼리 인형을 안고서 바닥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박래현이 근본 원인을 제공했지만 내가 좋은 생각만 하고 잘 먹고 푹 쉬었더라면 아이는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셔츠 자락을 꺼내 메마른 뱃가죽을 더듬었다. 화석에 새겨진 공룡 발자국처럼 아이가 내 몸 어딘가에 작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남겼을 것만 같았다. 나는 코끼리 인형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고 혼자 울음을 삼켰다.

***

박래현에게 해준을 찾아 달라 부탁한 지 9일 만에 경찰은 해준을 찾아 주었다. 없는 시간 쪼개 가며 경찰서를 들락거릴 땐 단순 가출로 일관하던 경찰이 이렇게 빨리 해준을 찾아 줄 줄은 몰랐다. 심지어 내가 실종된 날짜를 틀리게 신고한 것도 경찰 수사에 별다른 지장을 주진 않았다.

해준에게 각인했던 알파는 페이 닥터였다. 알파는 낯선 남자들이 벨을 누르자 이별을 직감했는지 해준 앞에서 경동맥을 끊어 자살했다. 알파가 내뿜은 피로 범벅이 된 해준은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 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이며 자신이 겪은 사건을 떠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

나는 의사 소견을 토대로 해준이 경찰 조사를 받을 상황이 아니라며 피해자 진술을 거부했다. 어차피 피의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경찰은 자체 조사 결과 관련인이나 공범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피의자 사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알파가 자살하면서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는 바람에 박수현과 관련된 윤해준의 알리바이는 완벽하게 증명되었다. 박래현에게 사실을 들킬까 봐 불안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해준을 만나면 쥐 잡듯 잡을 작정이었는데 아픈 동생을 보니 그럴 수 없었다. 계속 침묵과 환상에 갇혀 있던 해준은 병원에 입원한 지 7일째가 되면서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형, 엄마는 어디 계셔?”

해준이 내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탁자에 내려 두고 해준 곁으로 다가가서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좌우로 흔들리던 눈동자가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해준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의자를 끌어와서 해준 앞에 앉았다. 이 새끼가 나랑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여서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니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윤준영, 엄마는 어디 계시냐니까.”

그래도 엄마는 걱정됐는지 녀석은 엄마 안부부터 물었다. 윤해준이 납치될 무렵 엄마에게 심장 공여자가 나타났는데 엄마는 심장 이식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쉽게 찾아올 기회가 아니어서 나와 해준은 어떻게든 해 보자고 엄마를 설득했다. 엄마는 우리 앞에서는 그러겠다고 해놓고 의사에게 수술을 포기하겠다고 말해서 해준과 나를 발칵 뒤집어 놓으셨다. 한번 기증자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해서 나와 해준은 엄마 몰래 서럽게 울었었다.

“엄마는 6월 말에 수술받으셨어. 지금 요양 병원에 계셔.”

해준은 내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깜박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 잘 끝났어? 비용은 어떻게 해결했어? 엄마 수술비 걱정하느라 수술 포기하셨잖아.”

“나중에 얘기해 줄게.”

“형, 나 엄마 보고 싶어. 만나게 해 줘.”

녀석 때문에 당했던 일들이 생각나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사정 때문에 녀석에게 엄마를 맡길 계획만 없었다면 적어도 몇 년은 녀석과 의절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녀석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힘들었다.

“안 돼. 여기서 며칠 더 집중 치료받고 퇴원하면 엄마 보게 해 줄게.”

“나 이제 괜찮아. 내가 그런 미친 새끼들 한두 명 상대해 봐?”

“씨발, 자랑이다, 새끼야.”

내가 버럭 화를 내자 해준이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화를 억누르려고 일어나 병실을 돌아다녔다. 내 동생이랍시고 박래현은 1인실을 잡아 해준이 혼자 병실을 쓰게 해 주었다. 박수현과 사귀었던 사람이 내가 아니라 해준이란 걸 알면 박래현은 분노해서 발작을 일으킬 것이다.

해준은 그 뒤로 4일간 더 집중 치료를 받은 뒤 통원 치료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의사는 해준이 같은 유형의 환자보다 회복 속도가 빠르다면서 추이를 지켜보자고 했다.

나는 해준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해준은 으리으리한 박래현 집에 기가 질린 표정이었으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질문을 던지진 않았다. 그는 집을 얻을 동안 박래현이 쓰던 방을 쓰기로 했다. 박래현과 마주치게 하기 싫어서 빨리 해준이 살 집을 알아볼 작정이었다.

해준이 집에서 안정을 취하는 동안 우린 TV를 보거나 정원을 산책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나는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해준이 납치되어 있던 동안의 일을 하나씩 캐 갔다. 집 안에서 얘기하긴 찝찝해서 주로 정원 산책 시간을 이용했다. 해준은 처음엔 거부 반응을 보였다가 나중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줄줄이 얘기했다.

해준은 자신을 독점하려는 알파를 피해 12월 초에 바를 그만두었다. 병원에 사표를 낸 미치광이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뒤 해준을 납치해서 감금했다. 그는 해준의 물건을 전부 없애고 거의 온종일 해준에게 붙어 지냈다. 엄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며 보내 달라고 사정했지만 절대 들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철두철미하게 숨어 지내던 알파는 해준을 찾는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느슨해졌다가 경찰에 덜미가 잡힌 듯했다.

이 일의 원흉인 미친 알파 새끼는 각인한 알파의 광기와 집착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도 모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사이코 새끼는 해준과 헤어지느니 죽음을 택한 것으로 보였다.

미치광이 알파의 결말을 보면서 박래현이 내게 각인하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지금도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데 박래현이 내게 각인까지 했다면 그 새끼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겪었던 일을 다 털어놓은 뒤 해준은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어서 엄마를 만나게 해 달라며 나를 졸랐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나도 마냥 한가할 수는 없었다. 이제 엄마와 해준을 만나게 해도 될 것 같았다.

“엄마한테 먼저 전화부터 넣자.”

나는 해준이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산과 해준의 일이 겹쳐서 요즘 통 엄마를 뵈러 가지 못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자 엄마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계속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다.

“엄마, 몸은 좀 어때.”

- 난 괜찮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오늘 기쁜 소식 하나 알려 줄까?”

- 기쁜 소식이라니? 궁금하니까 어서 말해 봐.

“엄마, 드디어 해준이 찾았어.”

- 진짜? 해준이를 찾았다고? 진짜?

“그렇다니까. 지금 내 옆에 있어.”

- 얼른, 얼른 좀 바꿔 봐.

“잠깐만.”

나는 해준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해준은 엄마와 통화하는 내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보다 못한 내가 전화기를 뺏어 들었다. 예상대로 전화기 너머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 해준이랑 지금 병원 갈 테니까 기다려. 40분 정도 걸릴 거야.”

- 그래, 준영아. 엄마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울지 마. 금방 갈게.”

나는 전화를 끊고 내 담당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 가겠다고 하자 그는 바로 차를 대기시키겠다고 했다.

“가자, 엄마 보고 싶다면서.”

“어? 어.”

“엄마 충격 받으면 안 되니까 엄마한테 너 납치됐다는 얘긴 절대 하지 마. 그냥 심란해서 집 나갔다가 들어왔다고만 해.”

“알았어.”

“그리고 병원 가는 길에 입 열지 마. 우리 대화, 경호원 귀에 안 들어갔으면 좋겠어.”

“왜?”

“나중에 얘기해 줄게.”

해준을 데리고 현관 밖으로 나와서 밖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차에 오르고 나서도 해준은 엄마를 만난다는 생각에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스치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준영아, 너랑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 둘이 성격도 비슷해?’

해준을 처음 본 날 나를 품에 안고서 박래현이 했던 질문이었다. 우린 생긴 것만 똑같지 성격은 완전 달랐다. 일란성 쌍둥이들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데 우리에게 비슷한 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굳이 한 가지를 꼽자면 둘 다 차림새를 수수하게 하고 다닌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박수현은 첫 만남에서 나와 해준을 구별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가 병원 입구에 들어서자 멀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차가 멈춤과 동시에 해준은 문을 벌컥 열고 나가 엄마에게 달려갔다. 서로 죽은 줄 알았던 해준과 엄마는 상대를 껴안고 눈물의 상봉을 했다. 두 사람은 연신 상대의 얼굴과 몸을 만지면서 서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초롱이가 살아 돌아온다면… 나도 엄마처럼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것이다. 엄마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박래현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네 시간에 걸친 재회를 마치고 나와 해준은 병실을 나왔다. 더 있고 싶었는데 엄마가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피로해서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형, 엄마 살려 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부터 나도 열심히 엄마 보살필게. 근데 박래현 씨 부잔 줄은 알았는데 엄마 병실 완전 최고네.”

“해준아, 앞으론 네가 엄마 잘 모셔야 해.”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같이 잘 모시면 되지.”

“당분간 네가 엄마 보살펴야 해. 자세한 얘긴 집에 가서 해 줄 테니까 차에서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해준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는지 그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좌불안석이었다. 해준이 완전히 회복한 상태가 아니라 불안했지만 내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더 미룰 순 없었다. 박래현이 뉴욕에 갈 때 달아나지 못한다면 나는 다음 달에 임신하게 된다. 도망은 물거품이 될 테고 새로운 불행이 시작될 것이다.

집에 들어가서 거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다음 나는 해준에게 몸을 돌렸다.

“해준아, 올라가서 씻고 내 방으로 찾아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심각한 얘기야?”

“어.”

해준을 2층으로 올려 보내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해준에게 엄마를 맡길 수 있을까. 도망을 포기하고 내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박래현 옆에 얌전히 머무르면 아이를 낳아 주는 대신 돈은 손에 쥘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사랑만 받고 태어나도 부족할 아이에게 또 죄를 짓고 싶진 않았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나를 배신하고 거짓으로 속인 박래현과 몸을 섞어 가며 아이를 만들 마음은 추호도 생기지 않았다. 임신을 피할 수 있는데 주저앉는 건 내 양심을 저 버리는 일이다.

도주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충격을 받더라도 해준에게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 내가 사라지면 박래현은 해준에게 먼저 내 행방을 물을 것이다. 해준은 엄마를 돌봐야 하므로 미리 입을 맞춰 놔야 한다.

샤워를 마치고 서랍 안에서 속옷을 꺼내다가 며칠 전에 샀던 라이터를 발견했다. 그에게 정성껏 카드까지 써 가며 선물하려고 했는데 다 필요 없어졌다.

“형, 나 왔어. 할 얘기가 있다면서.”

“안에서 얘기하긴 좀 그렇고 정원에 나가서 얘기하자.”

옷을 마저 입고서 해준과 테라스를 통해 여름 흔적이 남아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날씨가 서늘해졌다곤 하지만 아직 백양꽃이 화사하게 핀 정원을 느리게 산책했다.

“그 피어싱 박래현 씨 취향이냐? 우리 몸에 뭐 달고 있는 거 귀찮아하잖아.”

이 피어싱은 해준에게 주려고 박수현이 주문한 거였다. 박래현은 내가 말을 안 듣거나 거짓말을 할 때 귀에 피어싱을 박아 넣었다. 나는 해준이 아니라서 내가 한 말이 박래현 귀에는 다 거짓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가 피어싱을 박아 넣을 때마다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윤해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너 아픈 거 알아서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사정이 좀 급해.”

“무슨 말인데 그래.”

“쉿! 목소리 낮춰. 내가 왜 여기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그리고 엄마가 어떻게 수술을 마쳤는지도.”

“…….”

“너 영리해서 눈치챘겠지만, 엄마 수술비 마련하려고 박래현한테 나를 팔았어.”

내가 이 집에 들어와서 겪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반대로 해준의 얼굴은 희게 경직되었다.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

“형,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이를 낳아 주면 40억을 준다고 해서 그러겠다고 계약서에 사인했지.”

“40억? 어떤 사람이 아이 낳아 준다고 40억을 줘?”

“너 씨발 귓구멍 확 열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그리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너 무섭게 왜 이래?”

“여기 잠깐 앉자.”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는 해준과 마주 앉았다. 건듯 부는 바람에 해준의 머리칼이 위태롭게 휘날렸다. 나는 해준을 응시하면서 해준이 사라지고 난 후에 벌어진 일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박수현의 자살과 박래현이 박수현 형이라는 사실, 박래현이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손기호를 필두로 박래현과 엄마 병원비를 두고 계약서를 작성한 일, 내가 박래현과 있으면서 겪었던 일, 아이를 갖게 되었고 박래현과 결혼까지 할 뻔했던 일, 아이를 유산한 일 등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감상에 젖기 싫어서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 채 오로지 사실만 간단하게 나열했다. 충격적인 얘기가 계속되면서 해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내가 마지막으로 박수현 얘기를 꺼냈을 때 해준은 차마 나랑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내가 어떻게 박래현과 엮이게 됐는지 감이 와? 네가 보낸 영상 때문에 박수현이 자살했어. 박래현은 박수현이 죽은 연유를 알아내고서 나에게 복수하려고 접근한 거고.”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박수현이 자살한 게 나 때문이라고?”

“그래. 박래현은 그 짓을 한 게 나라고 생각해서 나한테 덫을 놓은 거고.”

“씨발, 그 영상 때문에 박수현이 자살했다고? 그따위 이유로 자살하다니 박수현 미친 거 아냐?”

그따위 이유란 말에 화가 치솟았다. 박수현에게 이성을 앗아 갈 정도로 충격을 준 영상이 윤해준에겐 고작 그따위 정도의 영상이었다. 하기는 이 새끼가 사람 관계를 진지하게 여겼다면 나로 위장해서 박수현을 만나는 일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씨발 미련한 새끼. 그런다고 죽냐고!”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던 해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서 괴로운 표정을 감췄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넓은 어깨가 참혹하게 떨렸다. 나는 그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 영상 네가 보낸 거 아니지.”

“납치당한 순간 핸드폰이고 뭐고 다 뺏겼지. 박수현한테 영상 보냈다고 그 새끼한테 말은 들었어. 난 어차피 박수현과 끝낼 생각이어서 포기한 상태였고.”

혈관이 터진 것처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서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내 예상대로 영상은 해준을 납치한 새끼가 보낸 거였다. 그래 놓고 그 씨발 새끼는 제대로 벌도 받지 않고 혼자서 뒈져 버렸다.

“영상은 박수현 만나기 전에 찍은 거야. 수현이는 방학 동안만 잠깐 만날 생각이었어.”

아직도 이런 말이나 하고 있는 해준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아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윤해준에게 다가가 있는 힘껏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살끼리 부딪치는 커다란 소음에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놀라서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쉬지 않고 몇 대를 더 후려갈긴 뒤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짚었다. 양쪽 뺨을 연이어 얻어맞으면서도 해준은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가슴 한쪽이 분노에 그을려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윤해준 낯짝을 보면 화만 날 게 뻔해서 백양꽃에 눈을 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왜 일찍 헤어지자고 했어? 너 2월까지는 만난다고 했잖아.”

“내가 너무 좋다면서 갑자기 자기 아버지한테 들켜 찢어지기 전에 애부터 낳자는 거야. 각인하고 애를 낳으면 형은 자기편을 들어줄 거고, 자기 부모들도 나를 받아들일 거라면서….”

“그래서?”

“그 말을 들을 당시엔 내가 술에 취한 상태라, 네가 원하면 그러자고 했지. 그냥 드라마 한편 찍는 기분이었거든.”

“미치겠네.”

“근데 뭐라더라? 애가 좀 웃긴 게 지금은 자기가 약을 먹고 있으니까 냉동 정자로 뭐 어쩌고저쩌고 하자던데….”

박래현 계부의 성질을 고려했을 때 박수현이 애 낳고 각인하자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정략결혼을 해야 할 처지였을 테니까. 박래현은 자신이 귀국할 때까지 조용히 지내 달라고 박수현을 설득했을 테고 그사이에 사고가 났을 것이다.

“냉동 정자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 봐.”

“자기가 약 안 먹고 가장 건강했을 때 얼려 놓은 정자가 있다더라? 아는 누나가 산부인과 의산데,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면서 실험용으로 박수현 정자를 채취해서 얼렸대. 신기하지? 별 기술이 다 있어.”

윤해준은 그때를 상기하는 듯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박수현이 이런 씨발놈을 나로 착각해서 사랑을 바쳤다고 생각하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윤해준이 대체 어떤 정신으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근데 난 윤준영이 아니잖아. 박수현이 너무 진심인 거 같아서 다음 날 당장 헤어지자는 문자를 보냈어.”

“…….”

“만나 달라고 사정해서 약속 잡고 만나러 가다가 그 의사 새끼한테 납치당한 거야.”

나는 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늘 비어 있다고 생각했던 마지막 퍼즐 조각은 냉동 정자였다. 박래현은 동생 대신 동생의 아이라도 보고 싶어서 내게 박수현 정자를 수정시킬 계획을 세운 것 같았다. 박래현이 내게서 아이를 볼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히트 사이클을 노려서 쉽게 임신할 계획을 세우지 성공률이 낮고 과정이 복잡한 인공수정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두려움에 머리털이 쭈뼛쭈뼛 곤두섰다. 박래현은 내가 박수현 아이를 낳으면 사실을 폭로해서 날 충격으로 몰아넣은 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내게 빚을 씌울 작정이었나 보다. 성욕이 없고 결혼에도 관심 없는 사람이라서 조카는 직접 키워 후계자로 만들 생각을 했을 테고. 1-2억이면 충분했을 계약금을 40억으로 부풀린 것도, 선급금으로 25억이나 지급한 것도 내게 더 많은 빚을 씌우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런데 왜 마음이 변한 걸까? 나와 몸을 섞으면서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박래현은 방법을 수정한 듯했다. 그는 빚을 탕감해 주었고, 초롱이 임신 선물로 25억을 주었고, 9월 1일에 내 통장으로 5억을 입금했다. 결혼 계약서에는 위약금 조항이 없기 때문에 내가 계약 내용을 위반한다고 해서 물어내야 할 돈은 없었다. 박래현 계획이 내가 들은 바와 같다면 그는 중간에 내게 유한 방향으로 계약을 바꿔서는 안 됐다.

직접 오메가를 안아 보니 동생 아이보다는 자기 아이가 더 갖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결혼 계약서 이면에 내가 파악하지 못한 함정이 숨어 있는 걸까. 나는 현기증이 나서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넌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데 그따위 짓을 하고 다녔냐? 박수현이 마음에 들었으면 처음부터 내 동생이라고 밝히고 사귀었어야지, 왜 나로 사칭해? 씨발, 네가 박수현을 속이지만 않았어도 다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야!”

나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서 낮은 목소리로 해준을 꾸짖었다. 내가 그동안 감내해야 했던 슬픔과 아픔이 한꺼번에 몰아닥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걷잡을 수 없게 증오가 치솟아 더 몰아치려다가 바지를 쥔 해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고 간신히 입술을 깨물었다.

“형, 진짜 미안해.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잔뜩 주눅이 들어서 해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나중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미안해. 처음엔 진짜 장난으로 시작했어. 내가 만났던 새끼들이랑 달라서 적당히 즐긴 뒤 끝내려고 했는데 일이 뜻대로 안 된 거야.”

“재미? 그게 재밌어? 치졸한 변명 듣기 싫으니까 닥쳐라. 지금 너 반 죽여 놓고 싶은데 겨우 참고 있는 거 안 보이냐?”

“…….”

“너 때문에 씨발 지금 몇 사람 인생이 좆 된 줄 알아? 이 씹새끼야!”

내게서 시선을 돌린 해준이 애꿎은 허벅지만 손가락으로 북북 문질렀다. 눈물에 젖어 파리해진 볼을 노려보던 나는 분노로 요동치는 가슴을 죽이기 위해 심호흡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깨물며 울고 있는 해준을 보자 나중엔 분노보다는 짜증이 치밀었다. 감금에서 풀려났더니 엄마는 수술했고, 형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저 때문에 자살했으니, 해준의 마음도 말이 아닐 것이다.

내 원망의 화살은 미치광이 알파에게 향했다. 그 씹새끼는 자살할 게 아니라 감방에서 썩다가 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어 갔어야 했다. 그런 알파 새끼랑 좋다고 붙어먹었을 해준이 미워졌다가 마지막엔 죽어 버린 박수현을 원망했다. 해준이 보낸 영상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겠지만 그래도 살아서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왜 죽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괴롭힌단 말인가. 자신이 죽었을 때 혼자 남겨진 박래현이 얼마나 힘들어할지, 자살의 원인을 알고 해준이 얼마나 괴로워할지 그가 조금만 깊게 고민했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불같은 충동을 참아 낼 사람이라면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해준이 그를 속이지 않았더라면, 박수현이 죽지 않았더라면, 박래현이 핸드폰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발견하고도 지나간 일이라 여기고 그냥 넘어가 주었더라면. 온갖 부질없는 가정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랬다면 내가 박래현을 만날 일은 없었을 테고 아이를 유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 진짜 후회 많이 했어. 미안해, 형.”

“너 이 새끼 앞으로 조심해. 사람 함부로 갖고 놀지도 말고.”

“나도 갇혀 있으면서 생각 많이 했어. 알파라면 이제 치가 떨려. 다시는 그렇게 안 살아. 수현이 일은… 형한테도 수현이한테도 정말 미안해.”

해준의 흐느낌이 침묵을 적셔 나갔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정수리를 노려보다가 눈알이 빠질 것 같아서 시선을 돌렸다. 담벼락을 타고 오른 담쟁이덩굴이 바람에 힘없이 펄럭였다.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계절이라 푸른 이파리들 사이에 몇몇은 적갈색을 띠고 있었다.

“윤해준,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다음 주에 래현 형이 미국으로 출장 가. 나는 그 틈을 이용해서 이 집을 빠져나갈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랑 날 두고 형이 어디로 갈 건데.”

“씨발 뻔뻔하게 그런 말이 나와? 난 여기 살아도 당분간 네 얼굴 안 볼 생각이야.”

“내가 취직해서 돈 벌 테니까 여기서 나가자. 우리 둘이 열심히 일해서 박래현 씨한테 빚 갚자.”

“지금껏 내 얘기 발로 들었냐? 형한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고. 여기 계속 있으면 난 또 임신해야 돼. 아이 둘 낳고 영혼까지 탈탈 털려서 내쫓길 거야. 래현 형 복수심이 잠잠해질 때까지 도망가는 거 말고 방법이 없어.”

“내가, 내가 그랬다고 얘기할게. 그러니까 형….”

“씨발, 닥쳐 개새끼야.”

해준은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입을 다물었다. 박래현이 해준을 용서하고 나를 놓아준다면 좋겠지만 반대 경우를 가정하면 위험한 도박이었다. 다 묻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는데 박래현이 사실을 알게 되면 탈출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랬다간 너 정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박래현이 너랑 뒹구는 꼴, 나 죽어도 못 봐.”

“그게 말이 돼? 형이랑 깊은 관계까지 갔다면서 어떻게 나랑 뒹굴어.”

“그 인간이 얼마나 집요한지 네가 몰라서 그래. 박수현하곤 아예 다른 인종이야.”

해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박래현이 내게 다정한 모습만 보여 줘서 강경하게 말해도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내가 도망가면 형이 너 감시 들어갈 거야. 나랑 계속 형제로 남고 싶으면 형한테 절대 사실대로 말하지 마. 그랬다간 두 번 다시 너 안 봐.”

“그 영상 내가 보낸 거 아니라니까? 사실대로 말하면 믿어 주겠지.”

“그러면, 네가 박수현 속인 게 없던 일이 되냐? 네 파렴치한 속임수에서 모든 사건이 시작됐어. 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여기서 나갈 계획인데, 괜히 입 잘못 놀렸다가는 죽도 밥도 안 돼.”

나는 박래현과 박영범이 나눈 대화를 상기했다. 해준이 박수현을 속여서 만난 건 사실이라 분명 괘씸죄가 적용될 것이다. 그는 박수현과 관련해서는 이성이 적용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디로 갈 건데? 부산? 인천? 대도시면 숨기에 더 좋을 거 아냐.”

“어디로 갈지 아무한테도 말 안 해. 1, 2년은 나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살아.”

“엄마한테는 뭐라고 할 건데.”

“박래현이 미국 지사로 발령 나서 한동안 나가서 산다고 할 거야.”

1, 2년 정도 나가 살다가 박래현과 성격이 안 맞아서 이혼했다고 할 작정이었다. 엄마에게 자꾸 거짓말을 해서 미안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절대 엄마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박래현 씨가 병원으로 찾아오면 어떡해.”

어색해하면서도 다정하게 대화하던 엄마와 박래현이 눈에 선했다. 엄마는 박래현이 날 사랑한다고 확신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부드러운 행동과 눈빛은 박래현에겐 의무적으로 치러야 할 연극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해. 내가 네 통장으로 5억 부쳐 놓을 테니까 그걸로 엄마 병원비 해.”

“5억? 어디서 그런 돈이 나와.”

“박래현한테 받았어. 엄마는 내년 8월까지 병원에 계실 거야. 병원비가 꽤 센 곳인데 옮기지 말고 계속 그 병원에 계시게 해. 엄마 퇴원하시면 나머지 돈으로 전세 얻어서 네가 엄마 모시고 있어. 그 돈은 전부 엄마 거니까 넌 거기서 한 푼도 쓰지 마.”

“박래현 씨가 순순히 5억을 넘길까?”

“자기가 설계해서 벌린 일이니까 엄마를 위험하게 하진 않을 거야.”

박래현이 처음부터 일관되게 엄마에게는 최상의 것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무의식 기저에 그가 엄마에게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그랬을 테지만 그가 앞으로도 엄마를 건들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그가 엄마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면 그땐 돌아와서 박래현과 끝이 없는 전쟁을 치를 것이다.

“알았어. 엄마가 너랑 통화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

“너 임기응변 뛰어나잖아. 네가 요령껏 해결해.”

“꼭 그 방법밖에 없어? 다른 방법은….”

“없어.”

해준은 울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거짓말이 내 삶을 철저히 망가뜨렸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하는 듯했다.

“윤해준 씨. 왜 울고 있어요?”

갑자기 등장한 박래현 때문에 간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다행히 우리 대화를 엿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큰 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손을 잡아서 나를 일으켰다. 들어오자마자 나를 찾았는지 그는 아침에 출근할 때 모습 그대로 정장 차림이었다.

“윤준영, 왜 동생을 울리고 그래?”

“엄마 수술 얘길 해 줬더니 슬픈가 봐요.”

목덜미를 쓸어 올린 손길이 머리칼 안으로 파고들어 두피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물기가 남은 머리칼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던 그가 귀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빤히 보고 있는 해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귀 끝을 붉히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배고픈데 가서 밥 먹을까? 저녁 준비됐으니까 해준 씨도 같이 갑시다.”

팔로 내 어깨를 감싼 박래현 때문에 나는 그에게 몸을 붙이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향수 냄새와 박래현 특유의 향이 섞여서 후각을 자극했다.

“너 동생 때렸어? 해준 씨 뺨에 손자국 비슷한 게 있던데.”

“말을 안 들어서 몇 대 쥐어박았어요.”

“윤준영 완전 무서운 인간이네. 그런다고 동생을 때려?”

“…….”

“어머니한텐 잘 갔다 왔어?”

“네.”

“오늘 어머니랑 통화 했어. 해준 씨 찾아 줘서 고맙다고 하시던데.”

“그러잖아도 형한테 그 말 꼭 전해 주라고 했어요. 형은 회사에서 별일 없었어요?”

“별일 없긴. 오늘 이사회에서 바이오 의약품 분야 독립시키고 2공장 짓기로 했어. 연간 19만 리터 이상 생산할 수 있는, 단일공장 기준 세계 최대 규모가 될 거야.”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미안해. 너 혼자 두면 안 되는데 일이 좀 꼬여서 복잡했어.”

박래현은 일곱 시면 꼬박꼬박 집에 들어와서 나를 위로하며 나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그가 바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앞으로 바빠지겠네요.”

“너랑 보낼 시간은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박래현은 주방으로 가는 대신 드레스 룸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화장대 위에 앉혔다. 그는 팔을 벌려 허벅지 옆의 화장대를 짚고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둘 사이를 떠도는 어색한 공기에 눌려 숨 쉬는 것마저 조심스러웠다. 지난 3개월 동안 질리도록 봤던 얼굴이 요즘 들어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를 이어 주던 끈이 사라져 완전히 남이 된 데다가 나는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원래 계획대로 뉴욕 같이 갈까? 우리 신혼여행도 안 갔잖아.”

“출장은 혼자 다녀오세요.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싶어요. 해준이도 더 돌봐 줘야 할 것 같고.”

건강은 완전히 회복된 지 오래였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로 이 차장은 끼니마다 다양한 보양식을 올렸다. 나는 도망가서 잘 버티기 위해 없는 입맛에 꾸역꾸역 음식을 다 먹어 치웠다. 2주간 꾸준히 보약을 먹었고 다리에 힘을 키우기 위해 토요일부터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체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하루 세끼 인스턴트만 먹었을 때도 워낙 건강했던 몸이라 회복이 안 되면 이상한 수준이었다.

“건강해 보이는데 어디가 안 좋다는 거지?”

“가끔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아파요. 장거리 비행은 아직 무리예요.”

나는 박래현이 내 상태를 의심하지 않게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뉴욕에 같이 가면 도망갈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돼서 나는 필사적이 되었다.

“뉴욕 갔다 와서 가까운 데로 신혼여행 가자. 연가는 빼놨으니까.”

달콤한 목소리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고 가방에서 발견했던 혼인 신고서를 기억해 냈다.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초롱이를 잃은 상실감을 박래현에게 위로받으며 달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속내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참, 동생 살 집은 사람 시켜서 알아보고 있어. 아파트가 좋을까, 오피스텔이 좋을까.”

“해준이 집은 제가 얻어 줄 겁니다. 형이 왜 제 동생 일까지 간섭하세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말이 거칠게 나갔다. 나는 박래현이 해준에게 관심 보이는 게 싫고 무서웠다.

“너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나는 너한테 줄곧 찬밥 신세였어.”

“그래서요?”

박래현은 고개를 어슷하게 기울여 내 윗입술을 입술 사이에 넣고 빨며 잇몸과 치아를 혀로 훑었다. 나는 뒤로 넘어가지 않게 팔꿈치로 화장대를 짚어 상체를 지탱했다. 입술 사이를 파고든 혀가 혓바닥 정중앙을 문지르며 깊숙하게 들어왔다. 키스하기 전부터 알파가 내뿜는 체향에 홀딱 빠져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한쪽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아 내게 끌어당겼다. 오랜만에 맞붙은 두 개의 살덩이가 격렬하게 엉겨 붙었다. 혀가 얼얼해지고 침이 말라붙어 쩍쩍 소리가 날 때까지 입술은 서로 비벼지고 문질러지며 떨어질 줄 몰랐다.

“으, 으으응, 하, 하읏….”

치솟는 열기에 박래현 목덜미를 쥔 손에 땀이 맺혔다. 티셔츠 자락을 걷어 올리며 박래현은 내 아랫배에 입을 맞추고서 얼굴을 움직여 젖꼭지를 할짝거렸다. 습한 혓바닥에 희롱당한 젖꼭지가 박래현 혀 밑에서 발딱 일어섰다.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내려와 아랫도리가 화끈거렸다. 젖꼭지 안쪽을 작은 깃털이 긁어 대는 느낌에 나는 화장대를 짚은 팔꿈치에 힘을 주어야 했다. 유두와 유륜이 동시에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박래현 숨소리가 드물게 거칠어졌다. 잔뜩 달아오른 몸을 가누기 어려워 나는 두 다리로 박래현 하반신을 감고서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으윽, 하, 하아….”

젖꼭지가 이에 긁혀지자 나는 놀라서 허리를 들썩였다. 반응을 즐기듯 젖꼭지 끝의 오목한 홈으로 혀가 들어와 위아래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저릿한 감각에 금방이라도 밑이 젖을 것 같아서 나는 구멍에 잔뜩 힘을 주고서 박래현 머리칼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흐, 흐읏…. 우리 밥 먹으러 가야죠. 다, 하윽, 우리 오기만….”

젖꼭지에서 입술을 뗀 박래현이 고개를 들었다. 욕망이 일렁이는 눈이 얼굴 곳곳을 헤매다가 두 눈에 정착했다. 한여름 햇볕처럼 뜨거워 내 눈이 바싹 말라 버릴 것 같은 시선이었다.

“준영아, 내가 이따가 구멍 빨아 줄까?”

괜한 의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 나는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들어도 수치스럽게 밑이 움찔거렸다. 귀 끝을 붉게 물들인 박래현이 내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뜨리고서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나를 화장대에서 내려놓았다.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여전히 박래현에게 자극받는 내가 부끄러웠다. 우린 오랫동안 몸을 섞어 왔던 알파와 오메가니까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다. 이제 3일만 지나면 다 끝날 일이라 내가 박래현에게 성적으로 끌린다고 해서 날 비난하고 싶진 않았다.

박래현은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주방으로 갔다. 해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박영범은 핸드폰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박래현은 의자를 꺼내 내가 앉는 걸 확인하고서 개수대로 가 손을 씻고 왔다. 박래현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던 해준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달아오른 얼굴이나 키스로 붉어진 입술을 보며 해준이 무슨 상상을 할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동생의 시선을 피해 숟가락을 들었다.

“윤준영, 많이 먹어. 너 비쩍 말라서 뼈다귀밖에 없어.”

박래현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꽃게 다리를 앞 접시로 옮긴 뒤 하얀 살을 파내 내 밥그릇 위에 올렸다. 몸은 유산하기 전으로 돌아왔는데 박래현에겐 아직 부족한 듯했다. 나는 숟가락 가득 밥을 퍼 꽃게 살과 함께 입에 넣었다. 박래현은 계속 살을 발라 수저 위에 올려 주었고 고루 먹어야 한다면서 시금치와 송이버섯구이를 번갈아 가며 권했다. 나는 의무감으로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해준 씨, 저녁 먹고 술 한잔할까요?”

“네? 아, 네….”

박래현의 질문에 해준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윤해준 밥그릇엔 손도 대지 않은 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박래현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불안했지만 그를 말릴 근거가 없었다. 박영범은 2공장 준공 때문에 검토할 서류가 많다면서 2층으로 올라갔고 박래현이 술과 안주를 준비하기로 해서 나와 해준은 먼저 거실로 나갔다. 나는 해준이 앉을 자리를 정해준 다음 내 자리에 앉았다.

“너 내가 했던 말 단단히 기억해. 넌 박수현을 아예 모르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근데 둘이 닮은 구석이 없네. 친형제 맞아?”

“이부형제야. 그 얘긴 이제 그만해. 저기 형 온다, 입 다물어.”

박래현이 나타나자마자 우리 대화가 뚝 끊겼다. 테이블에 와인과 안주를 내려놓은 박래현이 내 옆에 앉아 다리를 꼬고서 잔에 와인을 따랐다. 튤립처럼 예쁘게 생긴 잔에 붉은 와인이 찰랑거렸다. 해준에게 잔을 건넨 뒤 박래현은 내 잔과 자신의 잔을 챙겨 허리를 반듯이 폈다. 나는 건배하는 시늉을 하고서 술을 한 입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달콤하고 깔끔해서 가볍게 마시기에 좋았다.

“둘이 내 얘기했어? 갑자기 대화가 멈춘 걸 보니 수상한데?”

“해준이가 형 잘생겼다고 칭찬했어요.”

“너는?”

“제가 뭐요?”

“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냐고.”

“형은 외모 빼고는 봐줄 만한 데가 없어요.”

내 대답에 불만을 표하며 박래현은 내 오른쪽 뺨을 꼬집더니 잡힌 살을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잔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박래현 손목을 잡아 손을 뒤로 떼어 내려고 했다. 생선 살을 발라 준다거나 맛있는 간식을 챙겨 줄 때, 지금처럼 아무 생각 없이 다정하게 대할 때 나는 쉽게 동요했다.

“외모 빼고는 정말 볼 데가 없어?”

“인격은 훌륭한 편이 아니잖아요. 본인이 더 잘 알면서.”

“윤준영, 형한테 혼 좀 나야겠네.”

박래현은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며 와인을 마셨다.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에 입이 말라서 나는 남은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남자의 입술에 입 맞추며 아까 하던 일을 이어 가고 싶은 욕심이 부풀어 올랐다. 매일 보는 나도 박래현 진심이 헷갈리는데 엄마가 박래현 마음을 오해하는 건 당연했다. 박래현은 내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운 뒤 자세를 바꿔 해준을 마주 보았다.

“윤해준 씨 집은 내가 알아서 구하겠습니다. 아파트를 구해 줄까 하는데, 살고 싶은 지역 있어요?”

“해준이 살 곳은 해준이가 알아서 구해요. 우리 일은 우리가 해결하게 해 주세요.”

“우린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인데 왜 남처럼 굴어? 네 동생 집은 내가 좋은 곳으로 알아봐 줄게.”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은근한 강압이 들어 있었다. 이별을 앞두고 박래현 성질을 건들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를 설득하는 쪽을 택했다.

“형한테 도움만 받아 미안해서 그래요. 엄마는 나이 들고 아프셔서 어쩔 수 없지만 해준인 젊고 영리하니까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요. 형 말대로 우린 부분데 저만 일방적으로 도움받는 관계는 싫어요.”

“형 말이 맞아요. 형 신경 쓰지 않게 집은 제가 알아서 구할게요.”

우리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해준이 안 되겠는지 내 말을 거들었다. 박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회사 일로 바쁜 사람이 해준에게 신경 쓰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다가 해준을 얼른 내보내고 싶어 그런다는 결론을 내렸다. 해준이 나랑 똑같이 생겨서 박래현의 증오심을 두 배로 부추기는 듯했다.

“네 말을 들어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 넌 집에서 쉬고 윤해준 씨가 살 집은 알아서 구하도록 해.”

박수현이 살아 있다면 자기는 그를 머리에 이고 다닐 거면서 내가 동생을 챙기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그럴 거면서 해준은 왜 찾아 준 걸까. 몇 달을 겪어 봐도 박래현 속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박래현 씨, 집은 제가 알아서 구할게요.”

“그래요. 운전기사 붙여 줄 테니까 천천히 집 알아보도록 해요.”

“네, 고맙습니다.”

해준은 눈치 빠르게 즉각 대답했다. 박래현은 나긋하게 말했지만 내 귀엔 권유가 아니라 통보로 들렸다. 그래도 박래현이 더 질질 끌지 않고 마음을 돌려 다행이었다. 내가 술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박래현이 허리에 팔을 감고서 들어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해준아, 우리 먼저 들어갈게. 집 얻으려면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너도 올라가서 쉬어.”

“형, 잘 자. 박래현 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요, 윤해준 씨.”

박래현은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어 나를 일으켰다. 해준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는 거로 보아 그는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했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뉴욕에서 돌아올 때 사다 줄게.”

박래현은 나를 드레스 룸까지 데리고 가서 허리에 감은 팔을 풀었다. 입술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필요한 건 다 사 주셨어요.”

“가방 사 줄까? 내년에 복학해서 메고 다니게.”

박래현은 검지를 매듭 사이에 넣고서 간단하게 넥타이를 풀어 내게 건넸다. 넥타이를 둘둘 말아 옷장 한쪽에 정리한 뒤 화장대에 비스듬히 기대고서 박래현이 드레스 셔츠 벗는 모습을 구경했다. 단추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조금씩 드러나는 속살에 눈을 빼앗겨 그의 몸을 훑어 내렸다. 곧게 뻗은 빗장뼈와 적당히 근육 잡힌 가슴을, 보기 좋게 골이 팬 복근을 눈으로 먹어 치웠다.

셔츠 단추를 다 풀고 나서 박래현은 루비가 박힌 커프스 링크를 풀어서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투명 사물함에 커프스 링크를 넣고 나는 도로 박래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박래현은 내 시선이 의식되지 않는지 자연스럽게 바지 훅으로 손을 내렸다. 지퍼 내리는 소리에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돌리자 박래현이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붙였다. 갈색 눈동자가 장난기를 띠며 반짝반짝 빛났다.

“왜 제일 중요한 데서 눈을 돌리지? 설마 부끄러워서 그래?”

“내가 계속 봐줬으면 좋겠어요? 완전 변태네요.”

“자지 주인이 너라서 반응하는데, 그게 왜 변태야?”

박래현은 내 손을 잡아 드로어즈 위로 가져갔다. 크게 굴곡을 이루며 우람하게 솟은 자지가 손바닥 밑에서 꿈틀거렸다. 박래현과 삽입 섹스를 안 한 지 오래돼서 감촉은 퍽 외설적이었다. 드로어즈 안에 손을 넣어 튼실한 살덩이를 주무르고 싶은 욕구가 폭발했다. 갑자기 나를 번쩍 안아 든 박래현이 침실로 가서 침대에 나를 내려놓았다.

“나 씻고 나올 테니까 쉬고 있어. 섹스는 뉴욕 갔다 와서 해야겠어.”

“왜요?”

“몸 안 좋다면서. 섹스야 나중에 실컷 해도 되니까… 얼른 씻고 나올게.”

박래현은 결단을 내리고 돌아서 욕실로 사라졌다. 발기한 좆이 가라앉지 않아서 나는 바지를 벗고 엎드린 자세로 베개에 좆을 문질렀다. 박래현 성기를 만졌던 손으로 내 좆을 잡고 흔들다가 내 자세가 수치스러워서 움직임을 멈췄다. 박래현을 떠나면 그와 섹스하고 싶어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해졌다. 그 전엔 억제제로 잘 버텼는데 알파 맛을 알아 버린 몸이 억제제로 만족할지 의문이었다. 박래현도 나와 사정이 비슷해서 이젠 성욕을 억제하긴 힘들 것이다. 섹스야 나중에 해도 된다는 박래현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이봐요, 박래현 씨. 우리 얼굴 볼 날이 며칠 안 남았어요. 나는 곧 여길 뜰 테니까.

박래현은 자기 의도대로 복수를 마무리한 게 아니어서 처음 1년은 미친 듯이 날 찾아다닐 것이다. 저 남자는 뒤끝이 지저분하고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었다. 공격 상대를 찾으면 뼈까지 다 바르지 않는 이상 놔주지 않았다. 내게 하는 짓만 봐도 그의 바닥이 얼마나 마르고 부서졌는지 알 수 있었다.

도망갔다가 잡혀 들어오는 날에는 그에게 완벽하게 감금될 것이다. 박래현이 나를 포기하기 전까진 꼭꼭 숨어 있어야 한다. 운 좋게 그가 일찍 결혼해서 배우자와 아이가 생기면 그쪽으로 신경 쓰느라 내겐 무관심해지지 않을까. 박래현이 다른 오메가와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한 순간 뒷골이 서늘해지고 몸이 떨렸다. 내 안에서 생기가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었다.

“입이 왜 오리 주둥이처럼 나와 있어? 동생 일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화났어?”

목덜미에 미지근한 손이 닿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박래현이 젖은 머리칼을 수건에 닦으며 발치에 있는 이불을 위로 당겼다. 막 씻어서 촉촉해 보이는 입술이 이마와 눈두덩을 눌러 나는 눈을 감았다.

“형,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어느새 침대 위로 올라온 박래현이 오른팔을 세워 턱을 괴고서 피어싱이 덕지덕지 붙은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박수현이 해준에게 주려고 부탁한 피어싱을 보며 박래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첫 오메가이고 자기 아이를 가졌던 사람이라서 이 남자도 가끔은 내게 흔들리지 않았을까. 증오가 무뎌질 때마다 박래현은 자신이 박아 넣은 피어싱을 보며 복수의 날을 갈았을 것이다.

“내가 피어싱 안 하면 나랑 해준이 구별할 수 있어요?”

“당연히 구별할 수 있지. 네 동생이 너랑 똑같이 하고 있어도 너 골라낼 수 있어.”

“자신만만하네요. 우리 엄마도 가끔 헷갈리시는데.”

“자지가 너한테만 서거든. 그보다 확실한 방법이 있어?”

“참 원초적이네요.”

박래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낯부끄러운 소리를 했다. 나한테 각인했다면 모를까 그런 방법으로 날 알아내긴 힘들 것이다. 나는 기분이 좋은 척 박래현 허리에 팔을 두르고 맨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탄력 있는 살갗이 볼에 비벼지면서 박래현에게서만 나는 특이한 냄새가 났다.

“뉴욕에 갔다가 언제 돌아와요?”

“계약만 끝내고 바로 들어올 거야. 너 보고 싶어서 오래 못 있어.”

“그러지 말고 여유 있게 다녀와요.”

“네가 안 가는데 무슨 재미로 오래 있어? 전용기 가져가니까 늦어도 일요일엔 들어올 거야. 넌 내가 뉴욕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요. 저도 형이 보고 싶을 겁니다.”

연극은 박래현만 하는 게 아니었다. 뉴욕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선 남자에게 확실한 믿음을 줘야 했다. 박래현은 활짝 웃으며 나를 안아서 품으로 끌어당겼다. 굵디굵은 물건이 허벅지를 압박하더니 매끈한 귀두가 가랑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동시에 허리를 지나 드로어즈 안으로 파고든 손이 엉덩이를 주물렀다.

“형은 언제부터 제가 좋아진 건데요?”

“내가 네 알파라며.”

소름 끼치게 서늘한 손이 내 팔뚝을 천천히 쓸어내리다가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손바닥을 간질였다. 정치헌에게 자극받아서 처음으로 박래현을 내 알파로 인식했던 날을 말하는 듯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흔들렸는데 애써 외면한 거야.”

“꽤 오래전이네요.”

“맞아. 난 평생 윤준영 소속이야.”

지나치게 적극적인 고백에 비웃음이 올라왔다. 속을 다 알고 있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완전히 속아 넘어갈 연기력이었다. 더 깊이 파고들었다간 위선 떨지 말라며 쌍욕을 퍼부을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아이는 왜 빨리 낳으려고 했어요? 원래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 게 순서잖아요.”

“결혼은 싫은데 아이는 갖고 싶었어. 마음을 주면서 후계자로 키울 아이가 필요해서.”

“인공수정은 임신 확률이 낮잖아요. 왜 그 방법을 선택했어요?”

박래현 입에서 진실을 들으려면 내 패를 까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숨겨야 할 패가 많아서 우리에게 솔직한 대화는 불가능했다.

“나 지금 머리가 아파서 먼저 자야겠어. 너도 어서 자.”

박래현은 어리광을 부리듯 내 품으로 기어와 내 팔을 베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가 유산된 뒤로 박래현은 두통과 불면에 시달려 약을 처방받아 먹는 중이었다. 눈 아래가 퀭해질 정도로 힘들어 보이는 날도 있었지만 내 페로몬이 박래현에게 진정제 역할을 한다던 박영범 말이 떠올라 나는 일절 페로몬을 풀지 않았다. 내 슬픔과 고통이 깊어서 나는 박래현을 달래 주고 싶지 않았다.

“머리 많이 아파요?”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그래.”

마지막 위로라는 생각에 나는 덩치 큰 남자의 어깻죽지와 팔을 쓰다듬으며 페로몬을 조금 풀었다. 페로몬을 푼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좁혀졌던 미간이 풀리면서 박래현 표정이 평온해졌다. 이 순간만큼은 누구의 잘잘못도 따지고 싶지 않았다. 우린 둘 다 초롱이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준영아.”

“네.”

“초롱이 보고 싶지.”

“네.”

“나도 그래.”

“…….”

“그동안 너한테 미안한 게 많아. 어디서부터 바로잡아 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

“믿을 수가 없네요. 형 입에서 이런 소릴 다 듣고.”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어. 지금 뉴욕 가는 것도,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저도 형 사랑해요.”

박래현이 나를 속이기 위해 사랑을 속삭이는데 나라고 못 할 것 없었다. 그래서 나도 담담하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아껴 두었다가 나중에 할 생각이었는데 이별 선물로 이 정도는 던져 주고 가도 될 것 같았다. 박래현은 잠시 얼어붙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흔한 인사 같은 건가?”

“아니요. 세상에 단 한 사람에게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에요.”

“거짓말이라도 듣기엔 좋네.”

미움과 증오, 애정과 욕망이 뒤섞인 입체적인 감정은 언제나 엎치락뒤치락하며 나를 조이고 뒤흔들었다. 혼탁한 감정 속에서 맨 밑바닥에 숨어 있던 무거운 마음을 인정했는데 위로 떠오르기도 전에 도로 가라앉혀야 했다. 영원히 꺼내 보지 못하고 안에 묵혀 두어야 할 감정이었다. 첫사랑을 요란하게 치르면서 나는 배우지 말아야 할 감정들을 배웠다.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증오와 애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감고 있는 팔다리가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박래현이 더 깊이 잠들 수 있도록 계속해서 페로몬을 풀었다. 맞닿은 살갗으로 남자의 체온이 흘러들어와 내 안을 채웠다. 이 따뜻한 온기가 마모되어 완전히 사라질 무렵 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박래현이 내 삶에 끼어든 지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내 삶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박영범 말이 사실인 듯 박래현은 수면제 없이도 깊게 잠들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박래현에게 베개를 받쳐 준 뒤 지문 인식으로 박래현 핸드폰을 열었다.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발뒤꿈치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 물을 틀어 놓고 나는 정우 번호를 찾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전에 처음으로 박래현 핸드폰에 정우 번호를 입력했을 때 그의 번호가 떠서 깜짝 놀랐었다.

- 어, 준영아. 박래현은 자냐? 확인 잘했어?

“형 완전히 잠들었어. 학원은 어떻게 됐어?”

- 야, 말도 마라. 그 형이 싫다고 해서 엄마랑 나랑 그 형 엄마 만나서 겨우 설득했어. 대신 돈은 더 얹어 주기로 했다. 뭐 불법이니까 그 정돈 각오해야지.

“미안하다, 맨날 너만 괴롭혀서. 그런데 우리나라에 있으면 박래현이 백 프로 찾아내. 도망갔다가 잡히면 나 박래현한테 감금당할 거야.”

- 형이 너 필리핀 도착하면 다른 사람 명의로 학원 등록해 준대. 요즘 비수기라 항공권은 당일 가서 끊으면 될 거고. 다 잘될 거야, 걱정하지 마. 경준 형이 너 특별히 신경 써 준다고 했어.

어학원이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공부까지 할 수 있어서 그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다. 하지만 신분을 드러내고 어학원에 들어갈 수는 없으므로 내 신분을 감춰 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 그 형은 네가 악랄한 스토커한테 쫓겨서 6개월에서 1년 정도 한국을 떠나는 거로 알아. 내가 그렇게 말해 놨거든.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래현 형은 화요일에 출국할 거야. 그날 4시에 인천공항에서 만나.”

- 그래, 인천공항 3층 M 카운터에서 만나자. 근데 집에서 탈출하는 건 가능해?

“어. 운 좋으면 성공할 거야. 나 이제 전화 끊어야 돼.”

- 윤준영, 탈출 꼭 성공해라. 그때 보자.

박래현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폰을 쥔 손에 땀이 가득했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 기록을 삭제하고서 나는 침실로 돌아가 핸드폰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박래현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전등을 끄고 침대로 올라가 박래현을 품에 안았다. 박래현에게 내 폰을 감시당하고 있어서 역으로 박래현 핸드폰을 이용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박래현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박래현은 무방비 상태로 내게 안겨서 따뜻한 호흡과 체온을 나눠 주었다. 잠든 박래현은 거짓말로 나를 속이지 않아서 좋았다.

***

나는 해준이 머무는 방으로 들어가서 오늘 집을 나가겠다며 일찍부터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마친 해준을 소파에 앉혔다.

“여기다 네 통장 번호 찍어.”

나는 뱅킹 서비스를 실행한 뒤 해준에게 내 핸드폰을 건넸다. 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핸드폰에 자신의 계좌번호를 찍었다. 그에게서 핸드폰을 돌려받은 나는 해준의 통장에 돈을 입금했다. 박래현에게 알림이 가더라도 그는 해준이 집을 얻는 데 쓰이는 돈으로 여길 것이다.

“나가자.”

나는 해준이 볼 수 있게 검지를 세워 입술을 눌렀다. 만에 하나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낭패를 볼 것이다. 해준과 나는 말없이 2층에서 내려왔다. 거실 청소를 하고 있던 정 차장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지나갔다.

“준영 씨, 일찍부터 어딜 가려고?”

“아, 제 동생 배웅해 주려고요.”

“배웅? 몸도 안 좋다면서 왜, 며칠 더 지내다 가지.”

“아주머니,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저 이제 괜찮아요.”

해준은 정 차장에게 꾸벅 인사한 뒤 서둘러 현관으로 갔다. 나는 신발장에서 내 운동화 중에 한 켤레를 꺼내 해준 앞에 내려놓고 옆에 놓인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따사로운 9월 햇살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형, 박래현 씨가 돈 돌려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계속 걱정되네.”

“내 통장에서 꺼낸 내 돈이니까 걱정하지 마.”

박래현이 초롱이를 임신했다고 선물로 준 돈이었다. 박래현 자존심에 생활비로 지급한 5억을 가져갈 순 있지만 임신 선물로 준 돈을 멋대로 가져가진 않을 것이다. 내 예상과 달리 박래현이 돈을 달라고 우기면 나는 엄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와야 할 것이다. 그가 덜 비겁한 방법으로 나를 찾다가 포기하는 게 내가 바라는 바였다.

“박래현 씨가 그 돈을 돌려 달라거나 손대려 한다면 정우한테 얘기해. 그땐 다른 방법을 알아볼게.”

“정우는 너랑 연락돼?”

“정우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마지막으로 네 사생활 간섭하긴 싫은데, 사람 좀 가려가면서 만나.”

“형, 나도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야.”

사람 본성이 쉽게 바뀌는 게 아니어서 나는 해준이 새 알파를 구하는 데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다만 저도 이번 일로 배운 게 있을 테니 사람을 신중하게 고르길 바랐다.

“통장에 보낸 돈으로 엄마랑 살 집 마련해. 그 돈 절대 개인적으로 쓰지 마. 그건 오로지 엄마를 위해서만 써.”

“어떤 돈인지 다 아는데 내가 왜 그 돈을 써. 걱정하지 마.”

“나 사라지고 래현 형 만나더라도 너랑 박수현 사이에 있었던 일은 절대 말하지 마. 하더라도 내가 해.”

“알았어. 나 이제 가 볼게.”

“엄마 잘 부탁하고, 너도 병원 치료 잘 받아. 몸 건강하고.”

“형, 힘들게 해서 정말 미안해. 엄만 내가 형 몫까지 부지런히 보살필게.”

해준은 울면서 집을 나갔다. 나는 해준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걸 다 지켜보고 나서 집으로 발을 돌렸다. 해준이 못 미더웠지만 이 상황에서 엄마를 돌볼 사람은 해준밖에 없었다. 해준뿐만 아니라 내 앞에 펼쳐진 모든 일은 결과가 불확실했다. 박래현이 나를 찾아 길을 막고 서 있을지 아니면 자유가 기다리고 있을지 끝까지 가 봐야 알 수 있었다.

당장 내일 오후에 내가 도망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박래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예측한 이상으로 폭주할지도 모르겠다. 박래현은 나를 지옥에 내동댕이치는 것을 목표로 살아왔다. 박래현을 지탱해 주던 대상이 사라져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박래현이 눈을 부릅뜨고 필리핀까지 쫓아와 머리채를 휘어잡는 상상에 눈알이 빠질 것처럼 두통이 몰려왔다. 박래현이라면 지구 끝까지 나를 찾아와 내 인생을 조질 것 같았다. 그러나 박래현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내 의지는 확고했다.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뒤로하고 나는 차분하게 도망을 준비했다. 토요일엔 박래현이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서 함께 엄마를 찾아갔다. 그가 병원 근처 한식집을 예약해 둬서 우린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박래현이 싱겁게 해 달라고 미리 얘기해 놨는지 이 차장이 만든 음식만큼 싱거운 음식이 나왔다. 박래현은 엄마 얘기를 들어 주면서 음식이 나오면 엄마 앞 접시에 먼저 덜어 드렸다. 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박래현이 뻔뻔하게 굴어줘서 되레 고마웠다. 이대로 엄마 행복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지만 나를 미워하는 사람 아이를 배서 나와 아이를 불행에 빠트리고 싶진 않았다.

출장 준비로 바쁜 박래현이 일요일에도 출근해서 나는 해준과 엄마를 찾아갔다. 엄마는 이틀 연이어 찾아온 나더러 가정에 충실해지라며 제법 따끔하게 충고했다. 나는 준비해 간 대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갑자기 뉴욕 지사로 발령이 난 박래현을 따라 나도 뉴욕으로 가야 한다면서 만일 일이 바쁘면 명절에 못 올 수도 있다고 선수를 쳤다. 엄마는 해준을 찾아서인지 담담하게 반응했다.

‘그래, 나 이제 건강해졌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갔다가 와. 박 상무 일할 때 넌 공부하면 되겠다.’

‘미안해, 엄마. 그러지 말고 형만 내보낼까?’

‘너 미쳤어? 무슨 일 있어도 같이 나가.’

엄마 반응을 예측했기 때문에 나는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자꾸 거짓말을 해서 엄마에게 미안했지만 1~2년만 버티면 자유의 몸이 돼서 엄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고 나를 위로했다.

‘엄마, 모레 떠나야 해서 이제 못 들를 거 같아.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해야 해.’

‘건강하게 잘 지내서 네 아이도 볼 거야.’

환하게 웃던 엄마 얼굴이 생각나서 코끝이 시큰거렸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앞으로 거짓말로 엄마를 속일 일은 없을 것이다.

이별을 하루 앞두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온종일 초롱이 방에 있었다.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초롱이를 조용히 보내 주고 싶었다. 뎅그러니 바닥을 뒹구는 코끼리 인형을 안아 들고 나는 아이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초롱아, 난 내일 떠날 거야.”

3주 전만 해도 배 속에 초롱이가 있었다. 아이 외모와 성격은 어떨지, 아이가 뭘 좋아할지, 아이가 자라면 무슨 일을 할지 혼자 상상해 보곤 했다. 박래현과 나의 좋은 점만 물려받길 간절히 바랐었는데 소망은 다 증발해 버렸다.

“모든 게 잘될 거라고 말해 줘.”

불행을 피해 행복한 환상 속을 유영하며 나는 코끼리 인형을 꽉 끌어안고서 3주 전으로 시간을 돌렸다. 이 동화 속에 갇혀서 영원히 나가고 싶지 않았다.

“준영아, 바닥이 찬데 왜 여기서 자고 있어?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박래현 목소리에 나는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박래현은 내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는 귓바퀴와 귀뺨에 입을 맞추고서 입술 가장자리에 쪽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방에 없어서 깜짝 놀랐잖아. 동생은?”

“해준이는 집 구해서 나갔어요.”

“벌써? 뭐가 이렇게 급해.”

“형한테만 신경 쓰고 싶어서 얼른 내쫓았어요.”

“나 뉴욕 가면 혼자 심심할 텐데, 며칠 더 있다가 보내지 그랬어.”

“여기가 불편하대요.”

나는 박래현과 주방으로 갔다. 이 차장이 꽤 신경 써서 준비하더니 식탁 위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이제야 싱거운 요리에 익숙해졌는데 여길 떠나야 해서 못내 아쉬웠다. 서로를 끌어안고서 눈꼴 시린 모습으로 등장한 우리를 보고 박영범이 놀리듯 휘파람을 불었다.

“남들이 보면 부부가 아니라 애인인 줄 알겠어. 준영 씨, 래현이가 그렇게 좋아요?”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뒤 박래현이 꺼내 준 의자에 앉으며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미움인지 애정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박래현만 보면 뜨거운 피가 콸콸 쏟아졌다. 언젠가부터 참 일관되게 유지해 온 감정이었다. 어느 한쪽으로 추가 기울지 않는 팽팽한 양가감정은 박래현과 이별하고 나서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결론 날 것이다.

“이 차장님, 나 없는 동안 준영이 식사 꼭 챙겨 주세요. 요새 너무 말라서 뼈만 보여요.”

“상무님,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저녁은 불고기 쌈밥이었다. 커다란 유리그릇에서 물기 맺힌 상추와 겨자를 꺼낸 나는 채소를 겹쳐서 불고기를 얹었다.

“준영 씨 보약 다 먹은 거 같던데 제가 한 재 더 지어 올까요?”

“아니요. 뉴욕 갔다 와서 직접 챙기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박래현과 정 차장의 대화가 끝나자 나는 채소에 불고기를 싸서 박래현 입 앞으로 쌈을 내밀었다. 박래현이 시원스럽게 입을 벌려서 쌈을 받아먹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애인 타령을 하며 솔로의 고충을 토로하던 박영범은 식사가 끝난 즉시 짐을 싸야겠다며 2층으로 올라갔고 나와 박래현은 침실로 들어갔다.

“형은 짐 안 싸요?”

“이제 싸야지. 금방 오니까 간단하게 옷가지만 챙기면 돼.”

“그럼 저 씻고 나올 동안 얼른 짐 싸세요. 오늘은 일찍 자야죠.”

“그래. 씻고 나와.”

옷장에서 여행 가방을 꺼내는 박래현을 뒤로하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박래현이 떠나고 나면 다음 차례는 나였다. 일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야 할 텐데 도망갈 걱정에 가슴이 쩍쩍 갈라졌다. 샤워를 마치고서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밖으로 나갔다. 마침 짐을 다 챙긴 박래현이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나를 보았다. 내 몸을 훑어 내리는 갈색 눈동자가 야릇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나는 박래현 옆을 지나쳐 화장대 거울 앞에서 드라이어로 머리칼을 말렸다. 옆구리와 엉덩이로 흘러내리는 시선이 거울에 비쳤다. 박래현은 내게 다가와서 거울 속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귓바퀴에 꽂힌 피어싱을 하나씩 빼서 전부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박래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박래현은 목걸이까지 찾아서 버리고 난 뒤 작은 상자에서 피어싱을 꺼내 내 귀에 하나씩 꽂아 넣었다.

“너한텐 이게 더 어울릴 거 같아서 새로 샀어.”

박래현은 안 어울리게 수줍은 표정으로 새 피어싱이 박힌 귓바퀴를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작게 열꽃이 피어났다. 귓바퀴를 몇 번 깨물다가 박래현은 샤워를 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박수현 취향과 달리 박래현이 고른 피어싱은 단순하고 고급스러웠다. 피어싱을 보면서 복수심을 불태웠을 텐데 내게서 박수현 흔적을 지워 나가려는 의도가 궁금했다.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천장 무늬를 노려보고 있자니 박래현이 파자마 하의만 걸친 채로 나를 지나쳐 철봉으로 향했다. 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어느 때보다 빠르고 힘차게 움직여서 조금 전에 먹은 불고기를 다 소화할 기세로 철봉운동을 하는 박래현을 지켜봤다. 믿기지 않게도 오늘이 박래현과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지금은 실감나지 않지만 내일 박래현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될 것이다. 한참을 움직이던 남자가 동작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영범 형을 두고 가야겠어.”

“왜, 왜요?”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긴장해서 나는 말을 더듬었다. 박영범을 두고 가다니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는 소리였다.

“너 혼자 두고 가는 거 불안해서 그래. 요즘 계속 금욕했는데, 나 없는 새에 발정이라도 나서 집을 나가 버리면 어떡해.”

“전 형 말고 다른 알파한테는 발정 안 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래도 만일이란 게 있잖아. 나중에 수습하는 것보다 예방이 최선이야.”

“박 실장님 알파라면서요. 그런데 저한테 붙여 놓겠다고요?”

“형이 겁도 없이 내 오메가를 넘보겠어?”

예상치 못한 장벽에 부딪혀 나는 박래현 몰래 혀를 찼다. 내 계획은 박래현이 비행기 타는 시간에 맞춰 모든 통신 장비가 끊어졌을 때 안전하게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는 거였다. 그런데 박영범이 남게 되면 그는 수시로 나를 감시할 테고 운 좋게 내가 이 집에서 빠져나가더라도 박영범이 그 사실을 알아챈 순간 공항으로 사람을 보내 내 계획을 박살 낼 것이다. 박래현을 안심시켜서 박영범을 데려가게 해야 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박래현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면 형이 저 안아 주면 되겠네요. 일주일 동안 발정 안 하게 형 자지로 자근자근 박아 주세요.”

단단한 몸이 철봉 위로 쑥 올라간 틈을 타서 나는 파자마 바지를 벗기고 무작정 그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었다. 밖으로 튀어 오른 성기가 내 뺨을 스치고 귓바퀴 뒤로 지나갔다. 나는 무성한 음모에 코끝을 박고서 박래현 특유의 체향을 깊게 들이켰다.

“나 운동하는 거 안 보여?”

“보여요. 형은 운동하세요. 저는 제 할 일 할 테니까.”

“나 열심히 참고 있으니까, 좋은 말 할 때 그만둬. 오늘 하면 나 못 참을 거야.”

“섹스보다 운동이 더 좋으면 참아 보든가.”

혓바닥을 귀두에 대고 문지르자 희고 곧은 기둥에 푸릇한 핏대가 불거지면서 복숭아 모양으로 끝이 갈라진 귀두에 맑은 물방울이 맺혔다. 자지 특유의 냄새에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흐, 그만둬. 너 몸도 안 좋다면서….”

“어제부터 괜찮아졌어요. 또 좀 안 좋으면 어때요, 형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 지내면 되죠.”

나는 젖은 입을 크게 벌려 귀두와 기둥 앞부분을 입에 넣었다. 찝찔하면서 역한 맛이 나는 쿠퍼액을 침과 삼키면서 입 안이 진공 상태가 되도록 성기를 빨았다. 박래현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풀업 동작을 이어 갔다. 박래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의 움직임에 따라 엉덩이를 들었다가 내리며 좆을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빨아들였더니 성기가 힘을 받아 순식간에 입천장과 점막에 압박을 가했다.

한 손으로는 혈관이 튀어나온 성기 기둥을 잡고 다른 손으론 힘이 잔뜩 들어간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철봉 위로 올라갈 때면 긴장으로 단단해진 근육이 철봉 아래로 내려올 때면 부드럽게 이완되는 변화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나는 성기를 최대한 깊이 집어삼켰다.

“너, 나중에 후회할 텐데….”

입으로 들어온 성기가 갑자기 부피를 키우는 바람에 숨이 막혀 움직임을 멈췄다. 거뭇한 음모와 불두덩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끝까지 다 삼키고 싶은데 그랬다간 성기가 뒤통수를 뚫고 나오게 생겨서 중간에 멈췄다.

내 입이 상당히 큰 편인데도 자지는 입천장과 혓바닥에 빼곡하게 들어찼다. 호흡을 고른 뒤 자지 껍질을 벗길 기세로 입술에 힘을 주면서 얼굴을 뒤로 뺐다. 분홍색으로 물든 살 기둥이 느릿느릿 입에서 빠져나왔다. 귀두 끝 벌어진 부분에서 이번엔 희부연 액이 뚝뚝 떨어져 입술과 턱을 적셨다. 박래현을 올려다보며 나는 혀를 내밀어 입가에 흐른 쿠퍼액을 핥아 먹었다.

목 뒤에 철봉 바를 두고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박래현과 눈이 마주쳤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귀 끝이며 혀가 보이게 벌어진 입술에서 남자의 흥분을 읽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자극하면 박래현은 한계에 도달해 철봉에서 내려올 기세였다.

입 안에 가득 고인 침을 성기에 묻히고서 나는 양손으로 살 기둥을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세게 쥐고 압박했다가 부드럽게 문지르면서 위아래로 흔들었다. 미끌미끌한 귀두에 볼에 대고 비벼 대다가 끝에 고인 쿠퍼액을 혓바닥으로 쓸어 올리기도 했다. 박래현은 손 하나 까딱 않고 가만있는데 발기한 좆 때문에 열이 오르고 욕정이 들끓었다.

나는 잘 벗겨진 자지 끝을 입에 물고 얼굴을 움직여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정수리로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입에 가득 들어찬 성기를 정신없이 빨아당겼다. 음란한 냄새를 풍기며 침과 체액으로 범벅된 성기가 유독 흉흉하게 느껴졌다.

“너 완전, 미치게 야한 거 알아?”

철봉에서 내려온 박래현이 내 뒤통수를 잡아 얼굴을 뒤로 꺾었다. 그는 짙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욕망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참으려고 했어. 그런데 나를 이렇게 자극하면, 내가 견딜 수 있겠어?”

성기를 입에 물고 있어서 나는 박래현을 향해 참지 말라고 눈을 깜박거렸다. 박래현 입가가 묘하게 비틀어지더니 그는 성기를 입에 물린 채로 나를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양쪽 어깨가 닿았다. 누워서 올려다본 성기가 평소보다 육중하고 거대해 보여 섬섬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파자마 바지를 바닥과 뒤통수 사이에 밀어 넣고서 박래현은 한 손으로 내 정수리를 잡고 다른 손으론 바닥을 짚었다. 그는 엉덩이를 들어 올려 입에서 자지를 꺼냈다. 턱이 얼얼해서 벌어진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윤준영, 입 벌려. 최대한 크게, 예쁘게 벌려봐. 네가 좋아하는 자지, 실컷 먹여 줄 테니까.”

나는 양팔로 박래현의 허벅지를 꽉 끌어안고서 그가 원하는 대로 입을 크게 벌려 주었다. 그는 성기를 넣기 전에 어금니 안쪽으로 엄지와 검지를 넣어 입 안을 휘저었다. 신음을 내뱉으며 혀로 남자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작은 성기가 내 혀를 문지르는 느낌에 울컥울컥 애액이 쏟아져 파자마가 축축해졌다. 몸이 젖어가면서 내 주위에 레몬향이 옅게 떠돌았다.

“으, 으으응, 형….”

박래현 표정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잘생긴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불룩 솟은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더니 내 이마와 눈썹, 눈두덩과 양 볼에 굵다란 기둥이 문질러졌다. 볼살이 위로 밀려 올라가면서 검붉은 귀두가 끈끈한 액을 떨어트리며 내 눈을 사선으로 비껴갔다. 퍼렇게 핏줄 선 살 기둥이 방향을 틀어 입 속으로 들어오더니 혓바닥과 입천장을 지나서 더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왔다. 내가 빨 땐 겨우 반 정도 들어왔던 자지가 박래현이 힘으로 밀어붙이니 어느새 뿌리 근처까지 입술에 닿았다.

좁은 목구멍이 활짝 벌어지면서 자지가 목젖과 목구멍 안에 깊게 쑤셔 박혔다. 그는 허리를 움직여 안쪽 점막에 자지 끝을 비벼대면서 낮게 신음했다.

“준영아, 여기 살이 얼마나 야들야들한 줄 알아?”

목구멍 안쪽 제일 깊은 곳에 귀두를 쓱쓱 갈면서 박래현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고는 내가 적응할 수 있게 시간을 주었다. 밑구멍 안쪽 깊은 곳에 극점이 있듯 목 안에도 성감대가 있는지 자지 끝이 목구멍 어딘가를 파헤치자 눈앞이 까마득해지며 쾌감이 상승했다.

“흐, 준영아, 괜찮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고서 박래현은 내 머리칼을 움켜쥐더니 허리를 뭉근하게 움직였다.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간 자지가 파닥이는 혀를 짓누르고 목구멍 깊숙한 곳에 다시 처박혔다. 푹푹 찍는 속도가 올라가면서 뜨거워진 불기둥에 혀와 점막이 온통 데일 것처럼 화끈거렸다. 눈에 눈물이 맺혀 코가 막힌 상태라 점차 호흡이 가빠졌다.

박래현은 봐주지 않고 입천장과 점막을 찍어 누르며 점액질의 액체를 흘려보냈다. 입 안을 꽉 메운 성기가 두근두근 맥동하면서 점막과 혓바닥, 입천장이 같이 울려 골이 흔들렸다. 입술이 헐고 혓바닥에 상처가 났는지 아팠지만 나는 멈추지 말라는 의미로 자지 빠는 힘을 늦추지 않았다.

“흐, 흐읏… 준영아, 이로 깨물지 마.”

깨물고 싶어서 깨문 게 아니었다. 입을 드나들며 부피가 늘어난 좆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왼손으로 정수리를 휘어잡고서 박래현은 엄지로 불룩 솟아오른 내 볼을 문질렀다. 그는 자지를 꺼냈다가 느린 속도로 밀어 넣은 뒤 허리를 움직였다. 입이 찢어지는 고통보다는 박래현을 흥분시키겠다는 욕심이 더 커서 나는 그의 움직임에 맞춰 고개를 흔들었다.

“흐, 흐읍, 네 몸에 뚫린 구멍은, 하나 같이 다 예쁘고 음탕해.”

“으, 으읍!”

“늘 젖어 있어서 따뜻하고 물렁물렁해.”

“흐, 흐읍….”

“볼 때마다 자지를 넣어서 내 정액으로 꽉 채워 주고 싶어. 벌어진 구멍 모두.”

박래현은 팽팽하게 부푼 성기를 꺼내 내 볼에 문질렀다. 뜨뜻한 액체가 특유의 비린 냄새를 풍기며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준영아, 입 더 벌려야지.”

박래현이 검지와 중지로 혓바닥을 긁어내리더니 기둥을 잡고 자지를 혓바닥에 비스듬히 비벼 댔다. 자지 끝에서 흰색 액체가 나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고 내 머리칼이나 눈썹에 묻기도 했다.

“남기지 말고 다 삼켜.”

박래현은 신음을 짓씹으며 내 혓바닥 위에 정액을 쏟아 냈다. 입을 벌리고 있어서 찢어진 입술 가장자리로 정액이 흘러내렸다. 다 삼키라고 했던 말이 나중에야 생각나서 나는 박래현이 보는 앞에서 혀를 거둬들인 뒤 정액을 꿀꺽 삼켰다. 분위기에 취한 탓에 역한 향이 견딜 만했다.

순간 박래현 눈동자가 짙은 고동색으로 흐려졌다. 그는 상체를 숙여서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문질렀다. 맞붙은 입술을 게걸스럽게 빨면서 혀를 뭉개듯 이리저리 들춰냈다. 나는 박래현의 뒷덜미를 잡아서 끌어당기며 혀를 더 깊게 섞었다.

성난 성기가 파자마에 감춰진 내 좆을 문질렀다. 얇은 파자마를 사이에 두고 단단한 기둥과 탱탱한 불알이 서로 부딪치며 마찰했다. 자극 받은 밑으로 뜨거운 피가 몰리면서 자지가 단단하게 발기했다. 혈관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에 나는 무작정 허리를 움직였다. 앞뒤로 다 젖어 버린 파자마가 몸에 달라붙어 살 기둥이 마찰할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입술을 붙일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입술을 뗀 박래현이 나를 번쩍 안아서 침대로 옮겼다. 침대 가장자리에 허리가 걸치게 머리부터 조심스럽게 내려놓고서 그는 내 파자마 바지를 한 손으로 쉽게 벗겼다. 여름이 지나간 후라 살갗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발치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남자가 양쪽 허벅지를 눌러 내 다리를 활짝 벌렸다. 애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입구가 불빛에 훤히 드러났으리라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박래현을 눈에 담고자 팔꿈치를 짚어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 세운 나는 한 손으로 박래현 귀를 감싸고서 엄지로 얼굴을 문질렀다. 상대를 사로잡는 요령을 본능으로 터득한 듯 박래현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로 수려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봄바람에 살랑이는 이파리가 되어 하염없이 나부꼈다. 두고두고 이 모습이 생각날 텐데 오늘 박래현이 평소보다 덜 아름다웠다면 좋을 뻔했다. 넋 놓고 얼굴을 보고 있는데 내 몸에 정통한 손가락이 밑을 벌리고 들어와 주름 주변에 분포한 성감대를 문질렀다. 낯선 감각에 구멍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으, 으응….”

“오늘따라 더 천박하게 구네. 오랫동안 참아서 그래?”

“하, 아윽! 으, 으으응, 거, 거기!”

“윤준영, 그거 알아? 이 예쁜 구멍 안쪽에 작은 돌기들이 있는데….”

속살을 젖히고 들어온 엄지가 내벽을 진득하게 문지르자 아찔한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허벅지를 오므렸다. 늘어난 손가락이 물에 젖어 눅눅한 안을 쥐듯이 파고들었다.

“살짝만 문질러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움찔거려. 어디 그뿐인 줄 알아?”

그가 말한 돌기를 문질렀는지 내벽에 파드득 전율이 일었다. 박래현과 삽입 섹스를 안 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어 가므로 내 몸은 박래현 자지가 고파 돌기 직전이었다.

“좋다고 물을 질질 흘려.”

“으, 으으읏, 아앗! 거기 좋아요….”

“이렇게 해 주면 더 좋겠지?”

박래현은 고개를 숙여 내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가락과는 다른 습한 살덩이가 회음부터 시작해 주름을 핥고 그 위를 기어 다니다가 잔뜩 벌어진 구멍 안으로 들어와 안의 돌기를 문질렀다.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 매트리스를 눌러 몸을 지탱하던 발뒤꿈치에 힘이 빠져서 다리 한쪽이 침대 밑으로 툭 떨어졌다. 내 자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캉말캉한 살덩이가 벌어진 틈새를 더 벌리며 안을 채웠다.

오랜만이라 예민해진 속살을 손가락으로 쑤시고 혀로 핥아 대는 통에 아랫배가 당기고 요의가 느껴졌다. 날렵한 손가락이 어느 지점을 건드리자 울컥 물이 쏟아지면서 하반신이 벌벌 떨렸다. 손가락과 혀를 따라 벌어졌던 속살이 오므라들면서 공기를 찢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놀랍게도 그 쨍한 소리는 내가 내지른 비명이었다.

박래현 어깨 뒤에서 두 다리를 교차해 힘을 준 채로 나는 가랑이 사이에 완전히 파묻힌 박래현 머리칼을 틀어쥐었다. 파고든 혀와 손가락이 내가 느끼는 곳을 정확하게 긁어내릴 때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흐, 아으으… 흐윽, 아!”

파자마 자락을 들치고 안으로 불쑥 들어온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눈이 달린 것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남자는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옆으로 눕혔다. 발가락까지 전해지는 아찔한 자극에 숨을 헐떡거리며 나는 엉덩이를 들썩여 박래현 얼굴에 내 성기를 들이밀었다. 손가락도 좋고 혓바닥도 좋지만 한참 부족했다. 이 행위 뒤에 박래현 가랑이 사이에 매달린 굵다란 물건이 빈 곳을 채우고 쑤셔 줄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내 몸은 위험하리만큼 열이 올랐다. 안달이 났다.

나는 첫 알파와 마지막 섹스를 기념하는 의미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오늘 밤 질주하기로 마음먹었다.

“형, 흐으, 그러지 말고, 흣, 얼른 박아요!”

속살을 휘젓던 혀와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박래현이 팔을 벌려 내 양쪽 허리 옆을 짚었다. 끈적한 점액질로 뒤덮인 속눈썹을 깜박이던 박래현이 내 잠옷 상의에 얼굴을 닦았다.

“어린 게 밝히긴. 섹스가 그렇게 좋아?”

“형이 좋아서 그래요.”

“정말 내가 좋아?”

박래현은 귀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되물었다. 박래현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하고 떠난다 해서 박래현은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거나 상처받진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말로 주고 되로 받고 있을 뿐이었다.

“콘돔 사용할까?”

“히트 사이클 아직 멀었어요. 그냥 해도 돼요.”

발정기에 맞춰 노팅을 해야만 임신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 외에는 굳이 피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준영아, 두 손으로 구멍 잡아서 활짝 벌려 봐.”

나는 순순히 두 다리를 위로 들어 올리고 손을 엉덩이골 사이에 넣었다. 젖어서 뜨거워진 구멍을 잡아 양쪽으로 벌린 순간 박래현 성기가 먹고 싶어 환장한 아래가 벌름벌름 움직였다. 내 갈증을 채워 주려는 듯 주름 입구에 뭉툭한 성기 끝이 닿았다. 너무 좋아서 나는 귀두에 내 밑을 애타게 문질렀다. 박래현은 무릎을 잡아 벌리며 흠뻑 젖은 몸 안으로 좆을 쑤셔 박았다. 살아 있는 거대한 생물체가 맞물린 내벽을 좌우로 벌리고 침입하는 느낌에 나는 헉!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몸을 한계까지 벌리며 단번에 밀고 들어온 성기가 예민해진 점막을 짓누르자 무자비한 삽입에 밑이 저절로 조여들었다가 풀어졌다. 우리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상대가 주는 쾌감을 만끽했다. 내가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나른하게 풀린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등 뒤로 전등이 빛났고, 음영이 져서 윤곽이 또렷해진 얼굴은 오로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눈빛만으로 그에게 박제당해서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렇게 연결된 채 계속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할 무렵 박래현은 성기를 뒤로 꺼냈다가 도로 깊숙하게 삽입했다.

굵다란 자지가 안으로 휘어 들어와 가장 깊은 곳에 박힐 수 있도록 허리를 틀었다. 귀두가 퍽퍽 소리를 내며 성감대를 들쑤시는가 싶더니 눅진해진 속살에 단단한 기둥이 비벼졌다. 부풀어 오른 내벽에 밀착된 성기가 스스로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내가 좋아하는 곳을 끈질기게 파헤쳤다. 성기가 비벼지는 곳에 극도의 쾌락이 찾아와 나는 박래현 팔뚝을 쥐고서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생 자지에 파먹힌 곳에서 진득한 물이 흘러내려 엉덩이를 적셨다.

“아, 아아… 흐, 으응….”

머릿속이 텅 비고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이대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아서 눈을 부릅뜨고 박래현을 노려봤더니 흐릿하던 잔상이 점점 뚜렷해졌다. 고개를 숙인 탓에 박래현의 앞 머리칼이 흔들렸고 근육질로 구성된 탄탄한 가슴팍이 눈에 띄게 오르내렸다. 그리고 가파른 허리선과 골이 팬 복근이 성적 긴장감으로 꿈틀거렸다. 그가 흥분한 모습에 더 흥분해서 나는 두 다리로 박래현 허리를 감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쪽 팔로 매트리스를 짚은 박래현이 다른 손으로 잠옷 단추를 풀었다. 두 손으로 푸는 것처럼 단추를 여는 손이 능숙했다. 내가 처음이라면서 뭐든 잘하는 걸 보면 이 남자는 섹스 기술을 타고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내 가설을 증명하듯 관능적인 입술이 젖꼭지를 물었다. 까슬까슬한 혓바닥이 젖꼭지를 푹 내리누르고서 집요하게 굴리며 괴롭혔다. 온몸이 저릿해지는 쾌감에 몸부림치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나는 앞뒤로 물을 질질 흘렸다. 마치 내 젖꼭지에 모든 쾌락의 근원이 있는 것처럼 박래현은 왼쪽 젖꼭지를 물어뜯고 핥고 혀로 비볐다. 그러면서 허리를 힘껏 쳐올려 자지를 더 깊은 곳에 처박았다.

“헉, 흐으윽, 흐, 으, 으으응!”

허리를 부르르 떨면서 나는 팔꿈치를 짚어 상체를 세웠다. 남자의 머리칼에 턱을 비비며 가슴을 빨고 있는 얼굴을 두 팔 안에 가뒀다. 쪽쪽 젖꼭지 빠는 소리와 맞물린 성기에서 철벅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는 박래현을 꽉 안은 채로 허리를 돌렸다.

“흐, 흐으, 윤준영, 준영아….”

박래현이 성기를 뒤로 빼자 빈틈없이 쑤셔 박혔던 내벽에서 물이 흘러내려 시트를 흥건하게 적셨다. 왈칵 쏟아지는 애액에서 짙고 향긋한 레몬 냄새가 났다. 열이 오르는지 박래현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자지가 주름을 누르며 속을 문지르는 동안 입술은 유륜을 훑고 올라와 연약한 목덜미 살을 빨아 당겼다. 하필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 흔적을 남기려 들다니 저질이었다.

“흐, 준영이 너, 나 미국에서 돌아올 동안 집에만 있어.”

“으, 으응….”

“다른 사람 만나러 돌아다녔다간 돌아와서, 후, 가만 안 둘 테니까.”

“네, 집에만 있을게요.”

오므라진 구멍을 다시 벌리며 성기가 푹푹 밀려들었다. 기둥에 비벼진 살이 양쪽으로 벌어지면서 점막과 근육이 동시에 수축해 자지를 꽉 조이며 안으로 빨아 당겼다. 박래현이 흘리는 나지막한 신음에 반응하듯 속살이 움찔거리며 기둥을 압박했다. 성기 기둥을 휘감은 뜨거운 피와 거친 맥박이 예민한 속살에 그대로 새겨졌다. 성기를 감싼 점막을 들여다보면 핏대 모양을 따라 흠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좆 대가리는 아기집이라고 추정되는 곳 안쪽을 깊게 찌른 뒤 뭉근하게 벽을 문질렀다. 말초신경이 다 죽은 것처럼 잠시 감각이 사라졌다가 히트 사이클 때 처음 경험했던, 깊이를 알 수 없는 희열이 몸 전체로 번져 나갔다.

“아, 아아악! 흐, 혀, 형! 흐, 저 죽을 거 같아요!”

박래현 아랫배를 찌르고 있는 내 성기에서 미지근한 액이 쏟아져 나왔다. 박래현은 손을 아래로 내려 자신의 배에 눌려 있는 내 자지 기둥을 잡고서 엄지로 귀두를 문질렀다. 절정을 맞아 축 늘어진 안을 박래현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거칠게 드나들었다. 오늘은 박래현에게 맞춰 천천히 오르가슴을 느끼려 했는데 나만 혼자 가 버린 게 못내 속상했다.

“윤준영, 대단해. 흐, 자지로도 느끼고, 구멍으로도 느끼고, 아까 입으로도 느꼈지?”

허리를 움직여 박래현 손에 내 성기를 비벼 대며 나는 남자의 어깨에 이를 박았다. 매끄러운 살갗에 이 개수대로 자국이 남을 때까지 두꺼운 살을 깨물었다. 목덜미를 아프게 깨무는데도 박래현은 피하지 않고 성기를 주물럭거렸다. 그는 기둥을 쥔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잊지 않고 허리를 털어서 속살을 콱콱 짓눌렀다.

절정이 지나간 자리에 야릇한 감각이 새로 자라났다. 늦게 타오르는 박래현 특성상 섹스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오랫동안 일과 고된 운동으로 성욕을 해결해 왔던 남자는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안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성기와 내 자지를 만지는 손이 불덩이보다 더 뜨거운 게 그 증거였다.

좀처럼 흥분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은 그대로지만 침대를 짚은 팔뚝에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핏대가 도드라졌다. 박래현 몸 곳곳에 성적 흥분이 배어 있어서 몸을 흔들면 그 편린들이 내게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발악하는 사람처럼 나는 박래현 어깨를 틀어쥔 손에 힘을 주었다.

“형이 전화하면 언제든 받을 수 있게, 집에서도 핸드폰 갖고 다녀.”

“네. 전화, 자주 할 거예요?”

“틈나는 대로 할게. 너도 나 보고 싶으면 전화해. 네가 먼저 한 적, 한 번도 없었어.”

투정 섞인 목소리와 표정에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나와 함께 지내면서 이 사람은 의도치 않게 내가 좋아진 걸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해 봤다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털어 냈다. 진실을 들은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흔들리는 내가 등신 같았다.

“제가 매일 전화할게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

“믿어도 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래현 입가로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예쁜 말을 들었으니까 보답을 해야지.”

약속을 지키려는 듯 박래현은 역동적으로 자지를 박아 댔다. 단단하고 뜨거운 몽둥이로 성감을 짓이기면서 그는 나를 침대 끝으로 밀어 올렸다. 내 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귓가에 더운 숨과 함께 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털이 없으니까, 자지가 커도 깨끗하고 귀여워.”

뭐라고 대답해 주고 싶은데 입에서 나가는 말이 다 신음으로 바뀌어 버렸다. 계부가 박래현 침실에 밀어 넣었던 오메가들도 나처럼 털이 없었을 것이다. 박래현은 그들과 싸우느라고 그들의 몸은 관심 있게 보지 않은 듯했다.

“골고루 다 예뻐. 벗겨 놓으면 특히 더.”

입술 끝에 박래현 입술이 닿았다. 나는 손을 벌려 박래현 턱을 쥐고서 그냥 지나가려는 그의 입술을 열었다. 혀를 내밀어 턱과 입술을 핥다가 혓바닥을 집어삼켰다. 열이 잔뜩 오른 혀에선 애액 냄새에 변질된 박하 향이 났다.

입술을 뗀 박래현이 내 눈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점막에 묵직한 성기를 비볐다. 그늘진 눈동자가 파드득 떨리면서 속살에 파묻힌 기둥 혈관이 툭툭 불거지자 자지에 밀착한 내벽이 같이 박동했다. 이미 절정을 맛본 안은 더 큰 자극을 원하며 애타게 박래현 성기를 따라 움직였다. 내 쾌락보다는 박래현이 나한테 환장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길 원했다. 음욕에 일그러진 얼굴로 내 살과 뼈와 영혼을 갈구하고 게걸스럽게 취하는 박래현이 보고 싶었다.

“아, 아흐윽… 형, 더, 더 빨리 박아 줘요. 으, 으응, 얼른!”

“보채지 마. 비행기 타기 전까지 너 안 재울 건데 체력 아껴야지. 거기다 뼈만 남아서, 세게 안았다간 어디 한군데 부서질 거 같아.”

“하, 하읏! 저 괜찮아요, 이제.”

“아파서 뉴욕 가기 힘들다면서. 그거 다 꾀병이었어?”

“아뇨! 원래 제 나이 땐 아프다가도 금방 나아요.”

엉덩이를 쑥 잡아 뺀 나는 발꿈치로 매트리스를 밀어 위로 올라갔다. 안을 틀어막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면서 공기 방울 터지는 소리가 났다.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엉덩이를 위로 치켜들어 엎드린 자세를 취한 다음 왼쪽 귀를 시트에 대고 박래현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무릎으로 선 박래현이 내 뒤에서 더 해 보라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래현은 드디어 내가 본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야한 신음을 흘리면서 자위하듯 내 성기를 잡고 흔들다가 가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손바닥으로 주름을 문질렀다. 잔뜩 젖어서 부드럽게 풀린 점막이 손바닥 아래서 꾸물꾸물 움직였다. 두 손을 이용해 주름을 세로로 잡아 벌린 다음 손가락 네 개를 주름 안으로 넣어 직접 돌기를 확인했다. 오돌토돌 돋아난 돌기 몇 개가 손가락에 눕혀지면서 희열이 몰려와 엉덩이가 발발 떨렸다. 더 깊숙이 들어가려는데 억센 손이 손목을 잡아 진입을 방해했다.

“이 안을 만지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네 손도 안 돼. 넌 잡아서 벌리기나 해.”

“사람 일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확신해요.”

“지금 내 말이 틀렸다는 거야? 오늘 밤, 잠자기 싫다 이거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낮고 살벌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나 되짚어 보려 했으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전, 흐, 흐읏….”

“고집부려 봐. 구멍 헐 때까지 계속 처박아 줄 테니까.”

박래현은 엉덩이골 사이에 얼굴을 묻고 혀를 날름날름 움직였다. 높이 치켜든 엉덩이 사이에서 반듯한 이마와 그린 듯 휜 눈썹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아까보다 새빨개진 귓바퀴가 조금 귀여워 보였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무릎과 왼쪽 어깨에 힘을 주고서 오른손을 뒤로 뻗어 박래현 뒤통수를 살갑게 쓰다듬었다. 주름을 질척하게 비벼 대던 혀와 손가락이 기어코 비집고 들어와 속살을 쓸고 지나갔다. 혀가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나는 본능에 따라 허리를 뒤틀었다.

“으, 으으응, 흐, 흐응, 흡!”

힘을 준 혀에 속살이 엉켜서 한 덩어리로 움직였다. 혀는 느릿느릿 돌기를 건드리고 혓바닥 전체로 주름을 덮었다. 안이 멋대로 수축하며 매트리스를 누르고 있는 자지에서 또 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아래로 내렸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내 자지 뒤에서 흔들리고 있는 거대한 성기가 보였다. 원래 가까이 있는 물건이 더 커 보이기 마련인데 박래현 성기와 내 성기를 비교하자니 부끄러웠다. 저게 어서 들어와 나를 엉망으로 휘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머리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형, 얼른, 흐윽, 얼른 넣어요.”

갈라진 틈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박래현이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서 아래로 툭 떨어진 내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 맞췄다. 물에 젖은 머리칼이 그의 이마에 달라붙었다. 코끝도 젖어 불빛에 물기가 반짝거렸다.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팔뚝으로 이어지는 남자다운 선을 보고 있자니 눈이 부셨다.

“윤준영, 넣기 전에 대답해. 이 구멍에 다른 새끼 자지 받을 거야, 안 받을 거야.”

“안 받아요! 형 자지만 허락할게요. 그러니까, 얼른!”

“넌 내 오메가고, 난 네 알파야. 내 말 맞지.”

나는 마구잡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소리가 들리고 대번에 허벅지가 잡혀 양쪽으로 벌려졌다. 퍽퍽 살 박히는 소리가 나더니 굵직하고 딴딴한 성기가 흠뻑 젖은 안에 깊숙이 처박혔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눈물과 침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내벽이 자지를 물고 오므라들면서 허리 부근으로 농밀한 쾌감이 번져 나갔다.

“아, 아아악! 흐, 흐, 흐으응, 흐, 흐읍….”

무너지지 않으려고 팔꿈치와 두 무릎에 힘을 주었다. 박래현은 벌린 허벅지를 닫지 못하게 틀어쥐고서 허리를 느릿느릿 돌렸다. 안을 완벽하게 채운 자지가 살을 헤집고 더 깊은 곳을 긁어내리자 무릎에 힘이 빠져 상체가 무너져 내렸다. 나는 시트에 볼을 비비며 황홀한 감각에 잠겨 들었다.

박래현은 쉴 틈을 주지 않고 허리를 잡아서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적당한 속도로 내벽을 빠져나간 성기가 각도를 바꿔 다른 쪽에 콱 쑤셔 박혔다. 이번엔 사정하지 않고 오르가슴이 찾아왔다. 극도의 쾌락에 휩쓸려 부들부들 떨며 절정을 느끼는 동안에도 성기는 거침없이 밑을 드나들었다. 속살을 눌러 비비고 성감대를 문지르며 나를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정신을 차리고서 나는 다시 상체를 틀어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해진 시야에 남자의 윤곽이 쉽게 잡히지 않아서 나는 여러 번 눈을 깜박여야 했다.

“준영아, 그렇게 좋아? 아주 정신을 못 차리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 박래현이 내 목을 감아쥔 다음 입술에 입 맞췄다. 혓바닥이 뒤엉키며 오랫동안 키스가 이어졌다. 섹스도 좋고 키스도 좋았다. 박래현과 하는 짓은 다 설레고 좋았다.

“근데 왜, 사정 안 해요? 흐, 으으, 저만 혼자 흥분한 거 같아서, 으응….”

“너 몇 번 더 울려야지. 너 우는 모습 보면 계속 울리고 싶어.”

“벌써 두 번이나 갔어요. 더 기다렸다간, 저 기절할지 몰라요.”

그가 깊숙이 들어올 수 있도록 목을 감아 매달리고 싶은데 엎드린 자세라 손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흐, 준영아, 잠깐 힘 좀 풀어 봐, 너무 세게 조여서, 흣, 자지가 떨어져 나가겠어.”

“흐, 흐윽, 저 힘 안 주고 있어요. 형 자지가 미친 돌연변이라 그래요.”

한쪽 무릎으로 매트리스를 짚고 다른 쪽 무릎은 세워서 편하게 자세를 바꾼 뒤 박래현은 내 허리를 두 손으로 꽉 잡고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퍽퍽 박아 대던 그는 점차 속도를 올려 맹렬하게 내 안을 들쑤셨다.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상체가 허물어져 가슴팍이 매트리스에 닿았다. 허리를 잡혀 엉덩이는 여전히 위로 들린 채 박히고 있어서 매트리스와 상체가 같이 들썩거렸다.

몸 중심이 아래로 향하자 성기를 받아들이는 게 한결 수월해진 반면 자지가 위에서 아래로 찍듯이 들어와 쾌감은 더 커졌다.

“흐, 흐윽, 좀, 살살… 흐, 저 죽겠어요.”

안에서 펄떡이던 자지가 어느 한쪽을 할퀴고 지나간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몸을 틀어서 허리를 쥐고 있는 팔뚝을 붙잡았다. 여기서 더했다가는 박래현이 가기 전까지 제대로 버틸 자신이 없었다.

“후, 하아, 아깐 더 세게 박아 달라면서, 흐, 겨우 이 정도야?”

“으, 으응… 박힌 자리가 너무, 흐윽, 아, 아아!”

“왜, 더 깊이도 하, 으읏,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 안에 싸고 싶어, 흐읏, 준영아.”

내벽을 가르고 나갔던 자지가 더 들어올 수 없을 데까지 벌리고 들어와 뒤를 짓눌렀다. 두 번이나 사정해 놓고 다시 발기한 성기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정액보다 많은 양의 물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 시트를 적셨다. 오줌은 아닌 것 같은데 정액도 아닌 정체불명의 물이 콸콸 쏟아져 가슴팍까지 흘러들어왔다.

“여기에 다른 새끼 자지, 드나들게 하지 마. 그랬다간 흐, 흐으, 그 새끼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릴 테니까.”

거침없는 말에 좋아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박래현이 나를 포기해야 엄마를 만나러 돌아올 텐데 지금 봐서는 평생 내 뒤를 추적할 기세였다.

“내 오메가는, 평생 너 하나뿐이야. 난 죽을 때까지 너 쥐고 안 놔.”

형, 그러지 않아도 돼요! 하마터면 입 밖으로 소리 지를 뻔했다. 박래현은 내 속도 모른 채 벌어진 틈에 성기를 쑤셔 박으며 허리를 크게 움직였다.

“아, 아흑! 으으응.”

마음은 심란한데 몸은 오로지 쾌락만 좇으며 박래현을 따라갔다. 섹스 습관이 처음부터 잘못 들어서 거칠게 섹스하는 편이었지만 금욕 기간이 길어서인지 오늘은 유독 자극이 심했다.

“나, 사정시키고 싶으면, 네가 움직여 봐.”

박래현은 허리에 두 손을 짚고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를 돌아본 채로 엉덩이를 움직였다. 둥글게 돌리고 위아래로 흔들면서 박래현이 덜 박아 넣은 성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박래현은 손바닥으로 내 허리를 문지르며 성기가 결합 된 곳으로 눈을 내렸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무는 통에 긴장한 턱 근육이 가파르게 움직였다. 작은 변화에도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허리를 크게 흔들며 엉덩이 전체를 털었다. 살 기둥에 돋아난 핏대를 터트릴 기세로 내벽에 힘을 주었다가 슬그머니 힘을 풀어 주기도 했다.

안으로 삼키는 낮은 신음과 더불어 허리와 엉덩이가 뜨거운 손아귀에 붙들렸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오르가슴이 찾아와 구멍과 성기에서 물이 흘러 내렸다. 쏟아 낸 양이 많아서 샤워하고 닦지 않은 사람처럼 온몸이 흠뻑 젖어 버렸다. 절정을 맞아 허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박래현은 내 목덜미를 깨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하체까지 허물어진 나는 박래현에게 눌려서 침대에 납작 엎드리게 되었다.

“흐, 흐읍, 흑!”

속살에 파묻힌 자지가 맥동하더니 이내 내벽에 뜨거운 액체가 사출되었다. 미끈하고 물컹한 액체는 박래현 자지에 틀어막혀서 한 방울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박래현은 뜨겁게 열이 오른 몸으로 나를 덮어 누른 채 귓가에 거친 숨결을 쏟아 내더니 이내 혓바닥으로 새로 박힌 피어싱을 하나하나 집요하게 할짝거렸다. 귓바퀴에 솜털이 흔들리면서 뺨으로 소름이 내려왔다. 절대 나를 놓지 않겠다는 듯 나를 옥죈 사지에 힘이 들어간 채였다.

“그, 그만….”

몇 번의 절정을 거치면서 기력을 다 써 버린 탓에 나는 천천히 무기력 상태에 접어들었다. 만사가 귀찮아져서 이대로 잠들고 싶은 바람만 간절했다. 좀처럼 줄어들지 않아서 나를 귀찮게 하던 성기가 한참 후에야 빠져나갔다. 성기가 나간 궤적을 따라 구멍이 수축을 풀 때마다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정액이 흘러내려 부끄러웠다. 박래현은 내게 키스한 채로 어깨를 잡아 나를 반듯하게 눕혔다. 어둑하게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가 나를 향하자 마음 한구석이 야릇한 감정으로 타들어 갔다. 모든 시름을 젖혀 두고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박래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완전히 젖어 버린 침대 주변을 살폈다.

“이게 뭐지?”

“뭐가요?”

“너 섹스하다가 오줌 쌌어?”

“아니요.”

“아니긴. 우리 준영이 아직 애네. 한참 더 커야겠어.”

“오줌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볼을 붉히며 부인했다. 오줌은 아닌 것 같은데 오줌이 아니라면 저 물의 정체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섹스하며 오줌까지 쌌다는 건 너무 수치스러워서 끝까지 부인하기로 했다.

“와, 얼마나 좋으면 오줌까지 싸. 넌 나한테 평생 약점 잡혔어.”

“씨발, 오줌 아니라니까요!”

“아니면 뭐야. 이 백자지에서 오줌과 정액 말고 달리 나올 게 있어?”

힘없이 늘어진 성기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는 박래현의 입가엔 얄미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나 보는 데서 한 번 더 싸 봐. 그러면 오줌 아니라고 믿어 줄게.”

박래현은 발목을 잡아 다리를 양쪽으로 찢어지게 벌리고서 내 자지의 변화를 관측했다. 세 번이나 사정한 자지는 풀이 죽어 다리 사이에 늘어져 있었다. 작은 편은 아니지만, 터무니없이 굵은 박래현 자지와 비교하면 보잘것없어서 다리를 오므리고 싶었다.

“준영아, 한 번 더 해도 돼?”

“네….”

어차피 마지막이라 박래현이 지칠 때까지 좆대로 박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박래현은 목 뒤로 한쪽 팔을 넣어 어깨를 감싸고서 모로 누워 내 오른쪽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벌어질 대로 벌어진 구멍에 성기는 쉽게 삽입되었다. 허리를 격렬하게 움직이며 박래현은 볼을 잡아 옆으로 얼굴을 꺾었다. 입술이 다가오기 전에 먼저 혀를 내밀어 그의 코끝을 핥았다. 박래현은 혀 아래 갈라진 틈을 혀로 간질이다가 열이 올라 붉어졌을 내 볼에 자신의 볼에 비볐다.

이제야 풀어 준 치자꽃 향기가 쾌락에 지친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오랫동안 이 향을 잊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코를 벌름거리며 향을 깊게 들이쉬었다. 페로몬 향이 점점 짙어지면서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몸이 달아올랐다. 박래현은 팔뚝으로 안쪽 허벅지를 누른 채 손을 뻗어 내 가슴을 쓰다듬었다. 처음엔 부드럽게 움직이다가 이내 거칠게 쥐고서 엄지로 젖꼭지를 문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욕이 사라졌던 몸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박래현 머리칼을 움켜쥐고서 그의 입술에 깊게 입 맞췄다. 혀 섞이는 소리, 살 박히는 소리, 헐떡이는 숨소리와 시트 구겨지는 소리가 외설스럽게 귀에 박혔다. 페로몬 때문에 아까보다 더 활짝 열린 몸에 굵다란 성기가 숨 가쁘게 드나들었다.

“허, 허억! 흐, 흐윽!”

나는 발뒤꿈치로 매트리스를 짓치며 쾌락에 몸부림쳤다. 어느새 박래현은 발목을 잡아 벌리고 내 위로 올라와 있었다. 반짝반짝 윤기 나는 뺨을 만지고 싶어서 얼굴을 쥐었더니 박래현이 고개를 돌려 손가락을 입에 물고 혀로 감았다. 내 손가락을 빨며 야하게 움직이는 입술을 보느라 나는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박래현의 비현실적인 외모 때문에 나는 이 남자와 보낸 여름을 꿈으로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박래현은 내게 눈을 맞춘 채로 박아 대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성기를 꺼냈다. 눅진하게 풀린 안을 쓸고 나갔다가 쿵 소리를 내며 내밀한 곳에 자지가 박혔다. 지독한 오르가슴과 함께 내 자지에서 투명한 물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넓게 벌어진 가슴팍과 복근에도 물이 튀어 푸른 바다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박래현 몸이 젖어 갔다. 나는 미끄러운 팔뚝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물을 흘렸다.

“우리 준영이는, 역시 질질 쌀 때가 제일 예뻐.”

박래현은 자지를 꺼냈다가 틈을 주지 않고 쑤셔 넣는 동작을 반복했다. 육중한 살 기둥이 녹신한 속살을 누르고 들어온 순간 나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숨을 헐떡였다. 감당 못할 쾌락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에 더럭 겁이 나서 박래현 어깨를 잡으려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내 발작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래현은 한 손으로 침대 헤드를 짚고 다른 손으로 내 허벅지 안쪽을 눌러 다리를 잡아 벌린 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거침없이 삽입해 내벽에 비벼 댔다. 몸 안팎이 펄펄 끓어올라서 모든 혈관과 신경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아, 아악! 흐, 으응….”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리다가 어느 순간 팔다리가 매트리스 위에 축 늘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 기억이 사라졌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파도 위를 떠다니는 돛단배처럼 몸이 계속 출렁거렸다. 밑에서 짜릿짜릿한 전기가 흘러 흐린 눈을 몇 번 깜박였더니 젖어서 축축한 시트가 보였다. 파도가 출렁거리는 게 아니라 매트리스와 내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뼈마저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은 쾌감에 눈앞에 하얗게 빛이 번졌다. 내게 긴 그늘을 드리운 채로 박래현은 발목을 우악스럽게 잡아 벌리고 성성한 자지를 내 가랑이 사이에 퍽퍽 박아 대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 너 기절해서도 좋다고 오줌 싸더라.”

“씨발, 내가 미쳐….”

허리를 움직이는 박래현을 본 순간 어이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박래현은 양쪽 팔꿈치를 내 귓가에 괴고 상체를 숙인 뒤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상체가 밀착되면서 땀에 젖어 매끈한 얼굴이 내게 기울자 화는 사라지고 별안간 서러움이 찾아왔다. 1년 후에, 혹은 6개월 후에 내가 아닌 다른 오메가가 박래현에게 다리를 벌려 주면서 그의 아름다움과 지구력을 찬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이 뜨거워지고 코끝이 매웠다. 박래현에게 자유를 얻는 대신 내가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 생각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울적한 기분을 털어 내며 두 다리로 박래현 허리를 감았다.

“대체 언제 끝내요? 이러다 비행기 탈 시간 되겠어요.”

“너 눈 뜨면 끝낼 참이었어. 기절한 사람 상대로 사정하고 싶진 않았어.”

박래현의 뜨거운 혀가 귓바퀴를 따라 돌다가 귓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매트리스에 파묻을 기세로 내리누르던 박래현이 허리를 돌려 내벽을 골고루 문질렀다. 안을 꽉 채운 살 기둥이 펄떡펄떡 움직이며 민감한 부분에 비벼졌다. 방금 정신을 차렸음에도 나는 미칠 듯한 희열을 느끼며 허리를 움직였다.

“으, 으응!”

잔뜩 예민해진 점막이 성기 기둥에 달라붙어 성기를 움직이지 못하게 옭아맸다. 밑이 벌벌 떨리면서 레몬 수십 개를 통째로 갈아엎은 것처럼 짙은 향이 몸에서 새어 나왔다. 나조차 질식할 것처럼 향이 짙었다.

“흐, 흐윽! 아, 아, 이런 씨발….”

박래현이 욕설을 내뱉으며 내게서 몸을 빼려고 했다. 본능에 이끌려 발꿈치로 박래현 엉덩이를 힘껏 내리눌러서 그가 빠져나가는 걸 막았다. 이 상태로 박래현이 밤새 내 안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 안 돼, 준영아… 흐, 흐읏!”

나는 박래현 엉덩이를 꽉 누른 채 내 안을 막고 있는 성기를 힘껏 조여 물었다. 박래현 성기가 고통스러울 만큼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내벽이 한계치까지 벌어지면서 아랫배로 극심한 통증이 찾아온 순간 퍼뜩 제정신이 돌아왔다. 박래현은 허리를 움직여 성기를 꺼내려다 포기하고 내 얼굴에 입맞춤으로 대신했다.

“아, 아아악! 흐, 흐으윽! 아, 아파요. 좆 빼! 얼른, 흐윽!”

고통이 심해져서 이성을 잃고 소리 질렀다. 한참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박래현이 쾌락에 잠겨 흐릿해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색 동공은 확장되었고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으며 절정에 몸부림치느라 몸의 골격이 더욱 선명해졌다.

“지금 못 빼. 잘못하다간, 너 심하게 다쳐.”

나는 주먹을 말아 쥐고 박래현 옆구리와 허벅지를 세차게 쥐어박았다. 박래현은 내가 때리는 대로 맞으며 내게 무리가 가지 않게 두 팔로 매트리스를 짚어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했다. 그가 달래듯 내 입술에 키스하려 했으나 뒤엉킨 아래가 아파서 다가온 입술을 피해 고개를 홱 돌렸다. 히트 사이클이 아니라 임신이 되진 않겠지만 내일 헤어질 알파를 꼬드겨 노팅까지 한 내가 한심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했어.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

입맞춤을 거부하자 이번엔 이마와 귓바퀴, 귀뺨으로 입술이 내려왔다. 박래현 말대로 통증은 조금씩 사라졌지만 성기 크기는 줄어들지 않아 박래현은 내게서 자지를 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옆구리 양쪽으로 벌어진 무릎과 허벅지에 입을 맞추더니 내 몸을 돌려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피곤하면 자. 노팅 끝나고 내가 씻겨 줄 테니까.”

박래현은 나를 안고서 시트가 젖지 않은 곳으로 조심조심 몸을 움직였다. 박래현이 먼저 잠들길 기다렸지만 지쳐서 나른해진 몸에 졸음이 몰려왔다.

“우리 어디로 여행갈까? 출장 다녀올 동안 생각해 놔.”

“프랑스나 로마 가 보고 싶어요.”

“그쪽은 다음에 가고 이번엔 휴양지 가서 푹 쉬다 오자.”

아랫배를 나긋하게 문지르던 손이 위로 올라와 젖꼭지와 유륜을 만지작거렸다. 박래현이 나를 꽉 끌어안은 탓에 등의 굴곡을 따라 상대의 가슴과 복부가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성기를 결합한 채 다리마저 얽혀 있어서 멀리서 보면 우리가 한 몸으로 보일 것이다. 문득 몸을 섞어 봤자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열렬하게 섹스해도 딴마음을 품으면 가치가 없어지는 게 성교였다.

“준영아, 자?”

나직한 질문에 잠든 척 대답하지 않았다. 두려움에 가득 차서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가 떠올랐다. 그땐 박래현이 두려워서 얼른 아이를 낳아 주고 이 집을 떠날 생각만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론은 같은데 그사이에 지나치게 복잡한 감정이 생겨 버렸다. 무성하게 자라난 감정을 수습하고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려면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박래현은 내 손가락 사이에 기다란 손가락을 끼워 넣더니 다시는 풀어 주지 않을 것처럼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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