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두 집을 오가느라 바쁜지 박래현은 주말에 집을 비웠다. 희한하게 그가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박영범도 같이 외박을 했다. 그 틈에 애인을 만나나? 박래현이 안 보이는 데다 엄마가 가볍게 운동을 시작했다는 정우 문자에 하루를 상쾌한 기분으로 시작했다. 오전엔 체력 단련실에서 운동하고 오후엔 정원에 나가 나무와 꽃에 물을 주었다. 스프링클러가 때 되면 알아서 작동하기 때문에 물은 조금씩만 주었다.
어제 집을 뛰어다니다가 정 차장 부부가 사는 별관 뒤뜰에서 조그마한 텃밭을 발견했다. 나는 그곳을 찾아가 잡초를 뽑고 상추와 무, 오이가 잘 크는지 관찰했다. 이틀에 한 번씩 싱싱한 상추와 연한 무 이파리가 식탁에 올라오는데 여기가 출처였다. 과거엔 틈만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명과 담쌓은 지금의 난 정원에 심어진 나무와 꽃을 돌보며 기계가 줄 수 없는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했다. 매일 쑥쑥 자라는 식물들을 보는 게 단조로운 내 일상에 소소한 행복이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초록색 상추는 활짝 핀 장미꽃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끝이 레이스처럼 화사하게 구불거리는 상추가 있었다. 나는 상추 앞에 쭈그리고 앉아 푸릇푸릇한 이파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황금 비율로 제조한 소맥과 함께 상추에 누릇누릇 구워진 삼겹살을 싸 먹고 싶어서 군침이 돌았다. 파와 피망을 잔뜩 썰어 넣은, 서비스로 주는 계란찜, 온갖 헛소문과 뒷담으로 점철된 술 취한 대화들. 사소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그리워질 날이 올 줄이야.
나는 물뿌리개를 제자리에 갖다 두고 테라스로 향했다. 오후가 되어도 7월의 더위는 수그러들지 않아 팔뚝에 닿는 햇볕이 따가웠다. 테라스에서 거실로 향하는 유리문을 연 순간 서늘한 바람이 얼굴에 부딪혔다. 벽에 손을 짚은 채 한 발씩 들어 발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서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뜨거운 열기에 데었던 발바닥을 슬리퍼가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준영 씨. 포도 좀 먹어 봐요. 오늘 사 온 건데 진짜 달고 맛있어요.”
“네, 얼른 씻고 와서 먹을게요. 고맙습니다.”
내가 들어오길 기다렸는지 정 차장이 접시 가득 포도를 담아 거실 탁자에 내려놓았다. 나를 그림자 취급하는 이 차장과 달리 그녀는 내가 퇴원한 뒤부터 이 차장이 없는 곳에선 사근사근 말을 걸어왔다. 온순하고 다정한 성품이라서 막 퇴원한 나를 가엾게 여기는 듯했다.
“오늘 저녁은 상무님이 좋아하는 랍스터 요리를 준비했어요. 기대하세요, 이 차장이 제일 잘하는 요리거든요.”
“상무님 집에서 드신대요?”
“네, 일곱 시에 저녁 식사하기로 했어요.”
드물게 기분이 좋았는데 박래현과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급격히 침울해졌다. 그 미친 작자가 멀쩡해진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그는 저녁을 먹고 내게 술을 권한 다음 은밀하게 페로몬을 흘려 날 유혹할 것이다. 그다음 쏟아질 막말과 경멸에 찬 시선을 상상하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고 어질어질해졌다.
“준영 씨, 괜찮아요? 어디 안 좋아요?”
“아니요,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이 차장님 요리 다 맛있는데 제일 잘하시는 요리라니, 벌써 군침이 돌아요.”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말을 걸어 주는 게 고마워서 약간 과장해서 반응했다. 사실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서 이 차장이 만든 요리는 내 입에 싱거웠다. 그래도 랍스터면 기본적으로 맛이 있을 테니 괜찮을 것이다.
샤워를 마친 나는 새 파자마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가 포도를 먹었다. 탱글탱글한 포도알을 입에 굴리면서 어떻게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까 고민하다가 문득 내가 고민하는 방향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무사히 오늘 밤을 넘길 방안을 고민할 게 아니라 박래현을 유혹할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루를 그럭저럭 넘긴다 해도 똑같은 내일 밤, 모레 밤이 날 기다릴 것이다.
내가 박래현과 섹스하는 걸 두려워하고 머뭇거릴수록 탈출은 요원해진다.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박래현과 히트 사이클에 몸을 섞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내 페로몬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박래현을 미리 유혹한 다음 결전의 날에 무조건 그를 쓰러트려야 한다. 몸 하나 달랑 들고 여기 들어왔으므로 몸으로 부딪치는 거 말고 다른 해결책은 찾기 어려웠다. 언제 망가질지 몰라 불안에 떨면서 지내느니 들이대는 게 옳다는 판단이 섰다. 용기를 낸 김에 뒤로 미루지 않고 오늘 밤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했다. 비장하게 각오를 다지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충직한 개를 연기하는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준영 씨가 출퇴근할 때마다 반겨 줘서 기분이 좋네요.”
박영범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마주 보며 웃어 주자 박래현이 내 턱을 잡아 얼굴을 돌렸다. 내게 이마를 기울이던 남자가 한 뼘 정도 거리를 남겨 두고 내 얼굴을 살폈다.
“단 냄새가 나는데, 뭐 먹었어요?”
“포도 먹었어요.”
냄새를 잘 맡는 걸 보니 나보다는 박래현이 개에 가까웠다. 다듬어지지 않은 성질로 따지자면 개보다는 늑대에 비유하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나를 관찰하던 남자는 흘러내린 앞 머리칼을 들춰 상처 부근으로 눈길을 보냈다. 나는 냉기를 띠면서 가늘어지는 눈을 초조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분명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이었다.
“밴드는 왜 안 붙였어요?”
“…….”
아픈 데가 없어 먹는 약은 다 버렸고 이마의 상처는 머리칼로 가려져 신경 쓰지 않았다. 내 판단에 문제가 있는지 남자의 손에 악력이 가해져 턱뼈가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래현아, 얼른 씻고 밥 먹자. 나 배고파.”
박래현 눈빛으로 보아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았는데 그는 나를 놓아주고 2층으로 올라갔다. 얼얼한 턱을 손바닥으로 살살 쓸고 있는 내게 박영범이 조용히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내 방보다 작은 박영범 방은 모든 게 사각형으로 각이 잡혀 있어서 어디에 뭘 뒀는지 절대 헷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박영범은 내게 방을 더 둘러볼 겨를도 주지 않고 불편한 표정으로 재킷과 넥타이를 벗었다.
“준영 씨, 왜 래현이 말 안 들어요? 또 병원에 입원하고 싶어요?”
“밴드 말씀이세요? 죄송해요. 다 나은 것 같아서 안 붙였어요.”
“아프든 안 아프든 래현이 말 들어요. 여기 올 때 계약서 쓴 거 생각 안 나요? 래현이 지시와 통제에 따른다고 했잖아요. 하나하나 물고 늘어지면 불리한 건 준영 씹니다.”
“불리하다뇨?”
“내 경고 새겨들어요. 래현이가 위약금을 물리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끝까지 받아 낼 겁니다. 그러면 준영 씨 인생은 그 길로 끝장이에요.”
다리에 힘이 풀려 나는 책상 모퉁이를 꽉 그러쥐었다. 박영범은 내가 의심했던 일들이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고는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박래현 씨가 저한테 위약금을 물리고 싶어 환장했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아이가 목적이 아니라 저 가지고 놀다가 궁지에 빠트리려고 계약한 거 맞죠? 아니면 가난한 오메가만 골라 등쳐먹는 악질 취미라도 가졌답니까? 어디 뒷골목 양아치도 아니고 대기업 상무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니요, 아이 낳아 달라고 계약한 건 맞습니다. 애 낳아 주고 나머지 인생마저 저당 잡히지 말고 현명하게 처신하란 말입니다.”
“여기서 얼마나 더 현명하게 처신해야 해요? 개같이 굴라고 해서 개같이 굴고 있습니다. 비겁하게 페로몬을 풀어서 절 공격하지만 않으면, 제가 먼저 달려들 일도 없었고요.”
“그러니까 그 고생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라 이겁니다. 래현이 내려오면 난리 날 테니까 먼저 나가 있어요.”
박영범을 노려보던 나는 무력해진 발을 질질 끌며 거실로 나갔다. 박래현은 40억을 지급하고서 아이와 52억을 받아 갈 계획을 세웠나 보다. 있는 놈들이 더 하다더니 씨발, 나를 뒤집어 탈탈 털어 봤자 먼지밖에 안 나올 텐데. 박래현 회사에 취직해 평생 영업 사원으로 뛰어도 다 갚을 수 없는 돈이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박래현을 기다렸다. 박영범의 경고는 어서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했다. 만일 끝까지 트집을 잡아서 위약금을 뒤집어씌우려고 한다면, 어차피 52억이란 돈을 갚을 수 없으니 이판사판이 되어 다시는 이따위 계약을 입에 올리지 못하게끔 박래현 좆을 잘라 고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저녁을 먹고 박래현과 나는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박영범은 작업할 게 있다며 거실 작업대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박래현은 원서로 쓰인 학술지 비슷한 것을 읽었고 나는 박래현 발치에 앉아 복숭아와 포도를 먹었다. 둘 다 바빠서인지 내가 원했던 술판이 벌어지진 않았다. 술을 마신 뒤 호기롭게 박래현을 덮칠 계획이었는데 내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길고 지루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노트북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와 테라스 창문에 들이치는 빗소리만 드문드문 정적을 균열시켰다. 저녁부터 날씨가 흐려지더니 조금 전부터 비가 쏟아졌다. 정겨운 빗소리는 옛 추억의 단면을 들려 주었다. 언젠가 카페 창가에 앉아서 조별 과제 팀원들을 기다리다가 노란색 우산을 쓰고 내 앞을 지나가는 동기를 보았다. 얼마 안 있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접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기들을 찾았다. 빗물에 젖은 머리칼과 얼굴이 참 해맑고 예뻤다.
‘준영아, 아직 애들 안 왔어?’
그녀가 손을 내밀어 내 볼을 쓰다듬었다. 볼에 닿는 따뜻한 감촉이 좋아서 나는 볼을 비비며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음, 이건 좀 이상한데?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지만 친밀한 스킨십을 나눌 사이는 아니었다. 이상한 예감에 퍼뜩 고개를 들기 전에 뒤통수가 잡혀 얼굴이 위로 향했다. 손등으로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뭉개진 잔상이 뚜렷해질 때까지 눈을 깜박거렸다.
이런 미친! 나는 박래현 허벅지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자고 있었다. 밤에 잠이 안 와서 낮때 몸을 심하게 움직였더니 나도 모르게 졸음이 찾아온 것 같았다. 나를 노려보는 매서운 눈초리에 한 대 맞을 것 같아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손바닥이 날아오지 않아 슬그머니 눈을 떴다. 박래현은 내 뒤통수를 놓고는 물티슈를 꺼내 바지에 묻은 침을 벅벅 닦았다.
“이마에 붙일 밴드는 어디에 뒀어요?”
집요한 남자였다.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기어이 물고 늘어졌다. 오늘 나를 괴롭힐 좋은 핑계를 찾아 퍽 기쁠 것이다.
“버렸습니다.”
“내가 당신한테 흠집 남는 거, 싫다고 말했을 텐데요?”
“잘못했어요. 앞머리에 가려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아서 그랬습니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지는 작은 상처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남자가 이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일 줄은 몰랐다. 내 사과를 한 귀로 흘려보내며 박래현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쓰레기통에 버린 밴드를 이 차장 부부가 청소하면서 발견해 박래현에게 건넸을 것이다. 그는 지금 밴드를 붙이라는 듯 내 이마로 시선을 보냈다. 사흘을 안 붙이고 흘려보내서 별 효과가 없을 테지만 나는 밴드를 꺼내 포장을 벗겼다. 거울이 없어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내 손을 잡아 박래현이 직접 상처에 갖다 댔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에 가려져 짙은 그늘이 졌다. 이 풍성한 속눈썹의 개수만큼 많은 사람이 신비로운 눈에 홀려 몸을 던졌을 것 같다. 남자의 포악한 본질을 파악하기 전에 낯가죽에 홀렸다면 나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히트 사이클이 언제라고 했죠?”
“3주 정도 남았습니다. 아이는 인공수정으로 가지실 건가요?”
대답을 기다리며 밴드 상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지난번에는 홧김에 한 말일 테고 남자는 나를 싫어하기 때문에 인공수정을 통해 아이를 가지려 할 것이다. 인공수정이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걸 알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원하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성공률 10% 미만은 내가 감내하기에 지나치게 낮은 수치였다.
“윤준영 씨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나랑 섹스해서 아이를 낳고 싶어요?”
“네.”
지체 없는 대답에 박래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가죽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스스로 노예를 자청한 나는 재빨리 라이터를 찾아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다리를 포갠 남자가 오른팔을 소파 등받이 쪽으로 길게 뻗고서 담배를 빨아들인 뒤 천천히 연기를 내뱉었다. 회색 연기에서 마른풀 비슷한 향내가 났다. 뜸을 들였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경솔하게 대답한 게 마음에 걸렸다.
“하긴 남자 자지가 고플 때가 됐죠. 이 집에 갇힌 지 2주가 넘어가니까.”
남자의 비꼬기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어떤 설검으로 내 자존심을 난도질할지 벌써 겁이 났다.
“그래서 이 허연 다리를 내놓고 개망나니처럼 정원을 뛰어다닙니까? 경호원들이라도 꼬셔 보려고?”
보트 같은 발이 허벅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툭 치는 바람에 나는 다리를 한쪽으로 모은 채 옆으로 넘어졌다. 다리에 쥐가 나서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수치심만 남았다. 엄마 생명을 구해 준 건 고마운데 지금 심정으로는 이 인간이 내 앞에서 사라진다면 평생 운을 다 끌어다가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여기서 벗어나려는 결의를 다지면서 나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로 페로몬을 조금씩 내보냈다. 어제부터 계속 연습했는데 알파가 어떻게 반응할지 미지수였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알파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어서 나는 필사적으로 페로몬을 방출했다. 내 페로몬을 음미하는 듯 남자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주인님이 제게 입을 옷을 안 주셨잖아요. 저도 이러고 다니는 거 쪽팔려요. 박 실장님이랑 이 차장님 부부 보기에도 민망하고.”
“나한텐 안 부끄러워요?”
“…….”
“그렇게 수치스러우면 정원 안 뛰어다니고 집 안에 있으면 되잖습니까. 개 취급하니까 정말 개가 됐어요?”
억울해서 말대꾸하고 싶어 간질거리는 입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내 대거리에 남자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허벅지에서 발을 뗀 남자는 담배를 멋스럽게 빨아 내 얼굴에 연기를 내뿜었다. 담배 연기에 눈이 매워도 나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윤준영 씨한텐 유감이겠지만 아이는 인공수정으로 가질 겁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해요.”
박래현은 내가 보내는 페로몬에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아서 나를 절망케 했다. 이번 히트 사이클을 허무하게 보내고 나면 40일을 기다려야 한다. 마음이 급해져서 나는 박래현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내려서라도 그의 결심을 뒤집고자 했다.
“왜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혹시 조루세요? 아니면 발기부전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좆이 10cm도 안 돼 어디 쑤셔 박을 처지가 아닌가 보죠? 알고 보니 고자여서 평범한 방법으론 아일 가질 수 없나 봅니다?”
더러운 말로 내 자존심을 짓뭉갤 줄 알았는데 남자는 되레 즐거운 얼굴이었다. 재떨이를 앞으로 당겨 담배를 비벼 끈 박래현이 얼굴을 갸웃하게 기울여 나를 주시했다. 이쯤이면 반응이 와야 하는데 남자는 저를 살살 긁는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다지며 모욕의 강도를 높였다.
“예쁜 오메가를 봐도, 예쁜 여자를 봐도 그 좆 절대 안 서죠? 멀쩡하게 생겨서 몰랐는데 좆 병신이었어.”
“윤준영 씨. 입에 재갈 물고 싶어서 이래요?”
“구멍 벌려 줄 테니까 한번 넣어 봐요. 아, 무서워서 못 넣겠어요? 넣자마자 줄줄 싸서….”
“경박하게 굴면 내가 자지를 넣어 줄 거 같습니까? 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참고 있는데 이쯤에서 입 다무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증명해 봐요.”
“섹스에 미쳐 눈에 뵈는 게 없습니까, 지금? 발정기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들었는데.”
“고자 맞네요. 그때 저한테 안 설 때부터 알아봤어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제게 열등감을 표출하신 거죠?”
“내가 고자라 치고, 그러면 윤준영 씨가 내 자지를 세울 수 있어요?”
“네. 그 정도야….”
가소롭다는 듯 날 보는 눈빛에 무의식중에 말꼬리가 흐려졌다. 잔뜩 긴장한 탓에 귓가에 맥박 뛰는 소리가 쿵쿵 울려 퍼졌다. 남자 표정이 험악해지는 걸 보면서 기쁨과 걱정이 동시에 자라났다. 박래현은 별다른 말 없이 내 오른 팔뚝을 틀어쥐어 날 일으켜 세웠다. 그는 다리가 저려 비틀거리는 나를 질질 끌고서 내 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서 펼쳐질 일이 두려워 아찔아찔 현기증이 났다.
“래현아, 은수 누나 말 안 들었어? 준영 씨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잖아. 들어가 쉬게 하고 너는 나랑 얘기 좀 해.”
박영범이 문까지 따라와서 박래현을 말렸다. 내 결심을 흔들리게 하는 그의 개입이 오늘따라 달갑지 않았다.
“형, 윤준영이 나 도발한 거 안 들었어? 자기 구멍에 자지 좀 박아 달라잖아. 얼마나 잘 벌어져서 이렇게 자신만만한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육중한 문을 열어 나를 방으로 밀어 넣고서 박래현은 문을 세게 닫아 박영범의 간섭을 차단했다. 아군이 사라져서 지금부터는 나 혼자 이 남자와 맞서 싸워야 한다. 남자는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켜고는 내 팔뚝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영원히 침대에 닿지 않길 바라면서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했다. 내 처절한 바람은 종아리에 침대 모서리가 닿은 순간 무너져 내렸다.
한여름 햇볕에 버석하게 마른 눈을 내게 붙인 채 남자는 어깨를 거칠게 꺾어 나를 침대에 내던졌다. 시트와 이불, 베개가 눈에 덮인 것처럼 온통 희었다. 박래현 향수 냄새가 가까운 곳에서 희미하게 올라와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배꼽까지 말려 올라간 파자마 자락을 뒤늦게 내리려다가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박래현을 침실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박래현이 내 페로몬에 녹아내려 나를 원하게 만들 일만 남았다.
여기까지 와 놓고 인공수정으로 알고 있을 박래현 배우자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박래현이 나를 궁지에 몰아넣지만 않았어도 이 남자와 섹스할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양해야 할 엄마가 있어서 나는 섹스를 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대며 내 행위를 정당화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남자를 유혹하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오늘 실패하면 이 남자는 두 번 다시 자신을 무너뜨릴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머릿속에서 내 마지막 양심을 지우고 오로지 본능에 충실한 오메가가 되어 알파를 유혹하기로 했다.
마음을 굳히고서 나는 대담하게 몸을 뒤집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남자를 응시했다. 내가 누워 있어서 전등을 등지고 선 남자가 유난히 장대하고 위압적으로 보였다. 내 시선은 화려한 얼굴에서 넓게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로 내려갔다. 남자의 어깨를 감당하지 못해 얇은 니트에 가로로 팽팽하게 줄이 섰다. 남자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그래서 양질의 페로몬을 풀 수 있게끔, 니트 안에 감춰진 탄탄한 몸을 상상했다. 하지만 공포에 얼어붙어 연습했던 만큼 많은 양이 흘러나오진 않았다.
“당신 구멍에 박고 싶은 욕구가 생기도록 한번 유혹해 봐요. 만일 실패하면 이 방에서 걸어 나가지 못할 겁니다.”
나긋나긋한 표정과 목소리에는 내가 금방 나가떨어질 거란 확신이 서려 있었다. 여기서 더 흥분해 페로몬을 풀려면 박래현의 페로몬이 필요한데 남자는 페로몬을 꽁꽁 감춰두고 풀지 않았다.
“다른 알파들 꼬실 때도 이렇게 수동적입니까? 아니면 순진한 척하는 게 이번 콘셉트인가?”
처음이란 말은 믿어 주지 않을 테고 남자가 원하는 대로 그의 기대에 맞춰서 싸구려 남창이 되기로 했다. 나는 부자연스럽게 드로어즈를 벗어 베개 아래 감추고서 박래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허리끈을 풀었다. 강렬한 시선이 빗장뼈에서 젖꼭지 부근으로 내려갔다. 남자 앞에서 옷을 처음 벗어보는 것도 아닌데 불구덩이에 던져진 것처럼 온몸이 불타올랐다. 미동 없이 내 사타구니로 눈을 돌린 박래현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가랑이 오므리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벌려요.”
어쭙잖은 유혹은 통하지 않을 거라는 매서운 경고였다. 명령에 따라 무릎을 잡아 다리를 벌리자 파자마 자락이 옆구리를 지나서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불두덩에서 성기로 이어지는 부분을 눈으로 더듬던 남자가 낮게 웃었다.
“듣던 대로 오메가는 정말 털이 없네. 여기도 없어요?”
그는 내 팔뚝을 잡아 거침없이 위로 들어 올리고서 밋밋한 겨드랑이를 살폈다. 마치 그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는 듯 신기해하는 남자를 보며 난 잠시 혼란에 빠졌다. 여러 오메가를 사귀면서 잠자리를 같이했을 텐데 이런 반응을 보여 당황스러웠다.
이 남자의 배우자는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 여성인 걸까? 사타구니를 주시하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나는 계획한 대로 성기부터 공략하기로 했다. 박래현이 정상적인 남자라면 자극에 가장 민감하고 절제에 취약한 부분이 성기일 것이다.
여기서 더 머뭇거렸다가는 의지가 물러질 것 같아서 곧장 상체를 일으켜 거치적거리는 파자마를 벗어 던졌다. 남자의 허리를 두 팔로 안아서 그를 침대에 앉히고 바닥으로 내려가 남자의 무릎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심호흡하면서 바지 훅과 지퍼를 여는 동안 남자에게 뒤통수를 잡혔지만 나는 무작정 파란색 드로어즈 위에 고개를 처박았다. 말랑말랑한 근육에 볼을 비비며 이로 살살 성기 부분을 긁어내렸다.
“이렇게 저속하게 굴면, 알파들이 다 넘어갔습니까? 30분 줄 테니까 그 안에 세워요. 못 세우면 아까 내뱉은 말은 고스란히 벌로 되돌려 받을 겁니다.”
두 팔로 남자의 허리를 꽉 껴안은 채 속옷째 성기를 입에 넣고 필사적으로 빨아 당겼다. 침에 젖은 드로어즈 위로 웅크린 성기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압도적인 크기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얇디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험난한 굴곡을 따라 코를 비비며 냄새가 나는 곳으로 입술을 옮겨 무작정 빨았다. 박래현 자지가 미동도 하지 않아서 나는 허리를 감은 손과 성기를 빠는 입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상황만 나빠질 것이다. 박래현은 나를 지금보다 함부로 대할 테고 나는 절망에 휩싸여 얼마 버티지 못하고 스러질 것이다. 내가 살 방법은 내가 쓰러지기 전에 어떻게든 남자를 쓰러트리는 것 말고는 없었다. 여전히 말랑말랑한 박래현의 좆을 빨며 죽을힘을 다해 페로몬을 개방했다.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내뱉은 호흡이 달아나지 못하고 주변에 갇혀 남자의 속옷은 내 침과 젖은 호흡으로 질척해졌다.
나는 드로어즈 안으로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성기를 꺼냈다. 늘어져 있는데도 엄청난 크기에 놀라며 두 손으로 성기 기둥을 잡고 쓱쓱 문질렀다. 30분 안에 끝내야 해서 수치심이고 나발이고 그저 좆을 세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성기를 입에 물었다. 꾸역꾸역 집어삼키다가 삼분의 일 지점에 멈춰서 성기를 빨았다. 무식하게 빨아 젖히느라 몸에 열이 오르는 데다가 내가 내쉰 더운 숨을 다시 들이켜다 보니 얼굴까지 벌겋게 물든 듯했다.
체감상 한 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 아무리 물고 빨아도 박래현 좆에 변화가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한껏 벌어진 입술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혀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경련을 일으켰고, 턱관절은 한계에 부딪힌 듯했다.
더 해 봤자 좆이 안 설 느낌에 무성한 음모 위로 깊은 한숨이 퍼졌다. 박래현이 인공수정을 하려는 이유는 고자여서인가 보다. 페로몬을 왕창 흘리며 이렇게 노력해도 좆이 서지 않는 이유가 그것 말고 또 있겠는가. 내 머리칼과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이 박래현 드로어즈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제 뭘 더 해야 할지 암담해져서 나는 성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들어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몸부림치는 날 지켜보고 있었는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늘 고요하게 가라앉았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고서 용기를 내 검붉은 귀두를 혀로 핥았다.
사람들은 늘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포기한다고 했다. 그곳에 가장 크고 위험한 고난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지금이어서 정상이 멀지 않았다는 말로 나를 다독였다. 입술을 오므려가며 서툴게 기둥을 빨면서 나는 요도 구멍을 찾아 혀를 움직였다. 작은 구멍 안으로 혀끝을 밀어 넣은 순간 비릿하고 짭짤한 액이 혀에 묻어났다. 알파가 반응을 보였다는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더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육중한 손이 내 목을 쥐어 왔다.
“겨우 이 실력으로 큰소리쳤습니까? 내가 허락한 시간은 지났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말이 머리 위에서 뚝 떨어졌다. 입에 문 성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는 남자의 사타구니 쪽으로 더 깊게 얼굴을 처박았다. 내 숨결에 젖어 물이 맺혀 있던 음모가 코끝을 간질였다. 내가 얼굴을 떼지 않고 성기를 더 깊게 삼키자 목을 조르는 손에 점점 악력이 가해졌다.
“무슨 벌을 내릴까? 내일부턴 아예 발가벗겨 놔야겠어.”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목을 뒤틀어 봐도 나를 옥죄는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입은 굵직한 성기로 가득 차 있고 목은 커다란 손에 졸리고 있어서 숨 쉬는 게 버거워졌다. 어쩔 수 없이 성기를 내뱉은 나는 남자의 왼쪽 손목을 양손으로 움켜쥐고서 정신이 아뜩해진 상태로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목을 조르는 힘을 줄이기는커녕 박래현은 표독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이전의 오메가들이 이렇게 망가졌겠구나, 그런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제발, 제발 살려 달라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손목을 쥔 손을 다 놓아 버렸다. 그제야 박래현은 깊은 한숨을 터트리더니 목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백기를 들고 물러나려던 나는 병에 맞서 싸우는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가 나를 만나기 위해 매일 한주먹씩 약을 먹으면서 감내하는 고통에 비하면 내 고통은 그다지 큰 게 아닐 것이다. 몇 번 밭은기침을 하고서 나는 곧장 박래현 성기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을 헐떡이며 필사적으로 빨아 댔더니 늘어져 있던 좆에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엄청난 부피의 좆이 내 입에서 부풀어 올랐다. 길기도 존나 길면서 두께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드디어 좆을 세웠다는 성취감도 잠시, 이 장대한 물건이 내 안에 들어오면 구멍이고 내장이고 남아날 것 같지 않다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올해 내 운수는 안 좋은 쪽으로만 가지를 뻗어 나갔다. 박래현은 성격만 더러운 게 아니라 달고 있는 물건은 살상 무기 수준이었다.
그러나 힘들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흐릿해진 정신을 가다듬은 뒤 이슬이 맺힌 귀두 끝을 입에 넣고 혀를 굴렸다. 짭짜름한 쿠퍼액을 맛있다는 듯 쪽쪽 빨며 눈을 들어 박래현을 쳐다봤다. 그의 성기가 불시에 볼을 찔러 알사탕을 입에 문 사람처럼 오른쪽 볼이 밖으로 쭉 늘어났다.
박래현은 콧물과 열로 엉망이 되어 있을 내게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에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채 남자 자지를 물고 있어서 꽤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부끄러웠지만 박래현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성기 끝을 빨았다.
귀두에 맺혀 있던 액이 혓바닥에 닿으면서 짭짤하고 시큼한 맛이 입에 번졌다. 싫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혀를 굴리며 성기를 더 깊이 머금었다. 곱실곱실한 음모와 눈까지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성기가 목구멍 깊은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윤기가 흐르는 털에선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야릇하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비누 냄새가 섞여 향긋하면서 동시에 거부하고 싶은 비릿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음모를 손가락으로 칭칭 감으며 불두덩을 쓰다듬었다. 입 안을 진공 상태로 만들어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더니 식스팩이 새겨진 복근이 안으로 움푹 꺼졌다. 박래현이 보여 주는 변화에 기운을 얻어서 나는 더 거칠게 성기를 빨아들였다. 침으로 가득 찬 입 안에서 살갗끼리 마찰하며 빚어낸 소리가 야하게 끈적거렸다.
나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서 가빠진 호흡을 골랐다. 살 기둥에 거미줄처럼 퍼진 핏줄이 펄떡이면서 입천장과 점막을 간질이는데 남자를 흥분시켰다는 성취감이 커서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이어서 성기를 삼 분의 이까지 삼킨 나는 부스스 일어선 털에 코끝을 비비며 목구멍에 힘을 주었다.
박래현이 낮은 신음을 낸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하진 않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넘어올 텐데 이다음에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박래현이 움직여서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치자꽃 향기를 노골적으로 풍기며 박래현은 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나를 침대로 끌어 올린 뒤 반듯하게 눕혔다.
허벅지에 걸려 있던 바지와 드로어즈를 벗어 던진 그가 위로 올라타 허벅지 사이에 내 허리를 가뒀다. 박래현은 손으로 매트리스를 짚고서 상체를 숙여 내 눈을 들여다봤다. 새하얀 얼굴엔 흥분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굵어진 좆이 내 아랫배를 무겁게 눌러 왔다. 그 작은 접촉에 밑이 기분 나쁘게 젖어 가면서 날것의 욕구가 정체를 드러냈다.
“박아 줘요. 하고 싶어요, 제발.”
“섹스에 미친 사람같이 굴지 말고, 입 닥쳐요.”
진실과 거짓이 반씩 혼합된 말을 남자는 대놓고 비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손을 아래로 내려 팽팽하게 일어선 성기를 감아쥐고서 위아래로 흔들었다. 정상까지 두 걸음 남았는데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좆 구멍에서 미지근한 액체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알파가 흥분해서 내뿜는 페로몬에 내 향기도 점점 짙어졌다. 이렇게 짙은 향은 첫 발정기 때 말곤 맡아 보지 못했다. 페로몬 유혹이 효과가 있는지 내 몸을 보는 박래현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박래현 성기에 입술이 닿을 때까지 발뒤꿈치로 매트리스를 밀어 아래로 내려갔다.
길고 곧은 기둥을 오른손으로 잡아 흔들며 둥근 음낭을 입 속으로 깊게 빨아들였다. 우둘투둘한 표면을 혀로 핥고 핏대를 이로 슬쩍 깨물다가 다른 쪽 불알을 집어삼켰다. 내 머리통을 잡아 옆으로 돌리려는 힘에 맞서 남자의 허리와 엉덩이를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혓바닥을 놀렸다.
백 미터를 전력으로 달려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머리칼을 쥐어뜯는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기둥을 입에 물고 새파란 핏줄이 굽이진 길을 따라 꾸역꾸역 성기를 삼켰다. 나를 밀어내던 손끝이 어느새 내 머리칼을 감아쥐었다.
“하, 씨발….”
우리 사이를 가볍게 부유하던 공기가 남자의 신음에 눌려 무게를 띠었다. 이어서 서늘한 손이 내 양쪽 귀를 붙들고 목구멍 깊이 성기를 밀어 넣었다. 남자가 작정하고 삽입을 시도하자 귀두 끝이 목에 걸려 갈고리처럼 안을 긁었다.
숨이 막혀 헐떡이면서도 경련이 이는 입술을 힘껏 오므렸다. 나를 감싼 치자꽃 향기에 흥분이 고조되면서 남자 좆을 빠는 일이 아까처럼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다. 덩달아 내 향도 농밀해지면서 시원하던 주변이 뜨뜻하게 달궈졌다.
“윤준영 씨, 나이도 어리면서 대체 얼마나 굴러먹었습니까?”
목구멍 안을 치고 들어온 성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며 내 시선을 강탈했다. 압력을 받아 분홍색으로 변한 기둥 표면에 뿌리처럼 퍼진 핏줄이 툭툭 뛰고 있었다. 반투명한 점액으로 번들거리는 귀두에서는 야릇한 냄새가 나 거부하기 힘든 흥분감이 몰려왔다.
남자는 한쪽 팔로 매트리스를 짚고 다른 손으로 자기 성기를 잡아서 내 얼굴에 두서없이 문질렀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물건이 마치 살갗을 음미하듯 눈두덩과 눈꼬리, 뺨과 입술에 차례로 비벼졌다.
페로몬과 비누 냄새, 남자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나를 이상한 기분이 들게 몰아갔다. 특히 알파 페로몬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해서 알파의 성기를 빠는 동안 나도 모르게 아래가 다 젖어서 축축해졌다. 남자 좆을 입에 물고 알아서 젖는 몸이라니. 이론으로 주워들었을 땐 설마설마했던 일들이 실제로 내게 일어나고 있었다.
“윤준영 씨, 입에다 쌀 겁니다. 버리지 말고 다 삼켜요.”
박래현은 내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가 얻을 게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이지만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박래현이 나와의 접촉을 거부하지 않은 것만으로 큰 수확이라고 애써 자위했다.
얼굴 위를 느긋하게 산책하던 좆이 내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턱이 아파서 잘 벌어지지 않는 입을 크게 벌리고 좆이 들어올 수 있게 길을 열었다. 박래현은 내 귀와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고서 입에 성기를 삽입함과 동시에 내 머리통을 사타구니 쪽으로 잡아당겼다. 남자가 잠깐 멈춰서 입안과 목구멍 점막을 두꺼운 귀두로 음미한 뒤 성기를 빼서 다시 박아 넣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썼다. 같은 동작이 빨라지면서 입 안과 목구멍에 불이 붙은 것처럼 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고통스러워서 몸에 신열이 들끓었다. 남자 좆을 구멍에 박고 싶어서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귀두 끝을 입에 걸치게끔 뒤로 물러선 박래현은 내 얼굴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서 성기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거대한 좆을 입에 틀어박은 채 그는 내 얼굴이 사타구니와 매트리스 사이에 눌려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힘으로 밀어붙였다.
기둥이 입천장을 긁고 귀두 끝이 목 안으로 넘어왔다. 고환이 턱을 내리눌러 내 얼굴은 남자의 사타구니 안에 완전히 파묻혔다. 거친 음모에 입가가 쓸리고 얼굴로 피가 몰렸다. 입 안 어느 곳에도 빈틈이라곤 없이 성기가 꽉 들어찼다. 눈앞이 하얗게 변해 갈 무렵 박래현은 정액이 뚝뚝 흐르는 성기를 입에서 꺼냈다. 얼른 사정시키고자 성기를 따라 올라가는 내 얼굴을 남자가 두 손으로 붙들었다.
움푹 팬 구멍 속에서 희고 끈끈한 액체가 떨어져 눈썹과 뺨을 적셨다. 눈으로 떨어질까 질끈 감은 눈두덩 위로 질퍽하고 뜨뜻한 액이 뚝뚝 떨어져 진저리가 났다. 미처 다물지 못한 입 안으로도 비릿하고 미지근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속눈썹에 정액을 매단 채로 더럽게 남자 정액이나 받아먹는 내 처지에 구역질이 났다. 나는 평범한 연애를 꿈꾸며 성실하게 살아왔던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남자 밑에 깔려서….
“윤준영 씨, 눈 떠요.”
감상에 젖을 틈을 주지 않고 박래현은 명령을 내렸다. 내가 인상을 쓰며 겨우 눈을 뜨자 박래현은 정액으로 너절해진 내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 전등이 달린 높다란 천장이 사라지면서 새하얀 베갯잇이 내 시야를 채웠다. 뒤통수를 잡아 눌러 내가 돌아보는 걸 막은 뒤 박래현은 내 허벅지를 쥐고 이리저리 모양을 잡아 보다가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로 나를 고정했다.
나는 뒤를 들어 올리고서 상체는 납작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다정하지 못한 손이 볼기를 한쪽씩 잡아서 거칠게 밖으로 벌렸다. 움직임을 멈춘 박래현이 구멍 한가운데를 쏘아보는 듯 그곳이 따가웠다. 둔덕에 갇혀 남들 눈에는 한 번도 띄지 않았던 곳이 모조리 노출된 느낌에 베개에 묻은 뺨이 아프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젖어 있는 주름 끝에 아무런 전희 없이 뭉툭한 귀두가 닿았다. 해준의 알파들은 삽입하기 전에 아래를 충분히 넓히기 위해 젤을 이용해 구멍을 풀어 준다고 했다. 아래가 젖더라도 안이 비좁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치는 수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를 배려해 줄 턱이 없는 박래현에게 구멍을 풀어 달란 말을 할 수 없어서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길 기도하며 양손으로 시트를 움켜잡았다.
주름을 헤집고 두툼한 끝이 안을 벌리고 침입하다가 뒤로 밀렸다. 갑작스러운 이물감에 내 몸은 거부 반응을 보이며 남자 좆을 밀어냈다. 후퇴한 박래현은 두 번은 봐주지 않았다. 그가 허리를 두 손으로 붙드는가 싶더니 단번에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 다물려 있던 내벽이 쩍 벌어지면서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매트리스 위로 고꾸라졌다. 장기가 찢어지고 뼈가 사선으로 어긋나는 아픔에 감은 눈 위로 붉은 불씨들이 어른어른 날아다녔다.
“흐, 흐읍…!”
뒤늦게 잇새를 비집고 나온 신음은 베개에 묻혀 사라졌다. 내 안에서 양심 없이 부풀어 오르는 성기를 빼내고자 엉금엉금 침대를 기어가다 두 무릎도 못 가서 허리를 붙들렸다. 언제 상의를 벗어 던졌는지 등 뒤에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이 밀착되었다. 시트를 놓친 손을 뒤로 돌려 남자를 밀어내려 했으나 손은 허공만 휘저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짓을 사람들은 왜 하고 싶어서 안달 낼까. 처음엔 다 이런 걸까, 머릿속에 의문이 맴돌았다.
“못하겠어요? 여기서 끝낼까요?”
구멍에 성기를 틀어박고서 남자는 무척 예의 바르게 내 의사를 물었다. 말과는 달리 주름을 찢고 들어와 속살에 파묻힌 의뭉스러운 살 기둥은 꿈틀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주장했다.
“아, 아니요! 끝내지 말아요. 대신, 흐, 흐읍, 조금만 살살 해 주세요.”
시간이 지나면서 잔뜩 늘어난 점막이 성기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틀처럼 기둥에 철썩 들러붙었다. 내 몸이 맞는가 싶게 내벽은 저절로 움직여 낯선 침입자를 뭉근하게 감쌌다. 아픔이 어느 정도 가시자 이성이 돌아왔다.
“살살 해 달라면서 구멍은 왜 이렇게 벌름거려요? 남자 자지면 그저 좋아서 질질 흘립니까?”
아르바이트하면서 온갖 무례한 손님들을 다 겪었던지라 나는 인신공격에 대한 대처법을 알고 있었다. 입으론 잘못했다고 빌면서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게 속으로 더 심한 욕을 해 주는 거였다.
그러는 당신은! 당신도 남창이라고 무시하는 오메가 구멍에 좋다고 자지 처박고 있잖아, 이 개자식아! 더구나 당신은 배우자까지 있으니 나보다 더 쓰레기야. 욕을 퍼부은 다음엔 상대방이 또 찾아올 수 있도록 어쨌든 기분 좋은 말을 날려 줘야 한다.
“주인님 좆이, 너무 크고 훌륭해서 그래요.”
“구멍이 헐거워서 자지 두 개는 들어가고도 남겠는데, 왜 엄살입니까?”
헐겁다고 타박받은 구멍에 성기가 빠듯하게 들어찼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박래현은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 낮은 말을 내뱉었다.
“순진한 척해서 과거를 세탁할 이유라도 있어요?”
“아니요. 저 완전히 닳고 닳은 남창이니까 그냥 좆대로 박으세요.”
깨끗한 몸에 웬 말뚝 같은 걸 쑤셔 박고서 나를 걸레 취급하는 박래현에게 화가 났다. 오메가가 골로 갈 정도로 더럽게 좆을 놀린 건 내가 아니라 자기면서 세상 고고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었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입니다.”
얇은 귀를 통해 남자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과 개의 관계인 두 사람이 작은 틈도 없이 몸을 붙이고 있는 이 상황이 어색해 미칠 지경이었다. 남자에게 박힌 채로 매트리스에 납작하게 눌린 내가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을 때 시트를 짚고 있는 손이 보였다. 길쭉한 손가락 끝에 있는 모양 좋은 손톱은 관리를 받은 것처럼 깔끔하고 단정했다. 커다란 손과 날씬한 팔목의 경계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금속성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남자의 차가운 성격에 딱 어울리는 시계였다.
“당신이 좋아하는 자세를 잡아 봐요. 그 정돈 봐줄 의향 있으니까.”
안에 들어차 있던 성기가 쑥 빠져나가면서 벌어졌던 구멍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 감각이 몸서리가 나게 섬뜩해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딱히 아는 자세도 없거니와 남자와 어색하게 얼굴 마주하며 박히고 싶진 않아서 나는 팔꿈치로 침대를 짚어 얌전히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박래현은 내 자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짧게 혀를 차더니 허벅지 사이를 잡아 양쪽으로 넓게 벌렸다. 성기가 드나들어서 민감해진 곳에 굵직한 선단이 와 닿았다. 한 번 벌어졌다고 두 번째 받아들이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이 개차반은 인정머리라곤 없어서 삽입을 수월하게 도와줄 페로몬을 싹 거둬들인 뒤 성기를 좁디좁은 내벽에 쑤셔 박았다. 뼈가 강제적으로 벌어진 것도 아팠지만 기둥이 파고들 때마다 칼로 속살을 얇게 포 뜨는 것처럼 섬뜩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공포 때문에 레몬 향을 풍기던 내 페로몬도 같이 희미해졌다.
첫 섹스에서 노팅까지 바라는 건 무리일 테고 기회가 왔을 때 아기집으로 가는 통로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걱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인공수정을 하더라도 통로가 있으면 성공 확률이 더 올라간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성기를 받아들이고자 나는 시트에 오른쪽 볼을 댄 채 팔을 뒤로 돌려 내 엉덩이골을 힘껏 잡아 벌렸다. 아파서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와 속눈썹과 시트를 적셨다. 한계치를 넘어선 주름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박래현은 한 손으로 내 양 손목을 잡아 허리께에 고정해 누른 다음 남은 손으로 허리를 아프게 틀어쥐었다. 박래현이 박아 주길 원해서 유도했지만 삭막한 첫 섹스는 내가 생각했던 섹스와 거리가 멀었다.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며 아껴두었던 내 지론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 연애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내 처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고 싶었다. 전쟁을 치르듯 비참하게 처음을 맞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연애도 해 보고 섹스도 해 봤을 것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사에서 뭐든 뒤로 미루면 안 된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지금 내 몸이 고통스러워서 더 후회하는 건지도 몰랐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나를 두 손으로 결박한 채 박래현은 몽둥이로 두들겨 패듯 자지로 내 안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자지에 강타당한 내벽과 점막을 들여다보면 퍼렇게 멍이 들었을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참다가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우는 소리가 나왔다.
“흐, 아파… 주인님, 아파요. 살살 해요!”
“언젠 좆대로 박으라면서요.”
“흐, 흐윽! 좆이 너무 커서, 흐, 흐읍, 저 찢어지면 어떡해요.”
성기가 속살을 짓이기며 끝까지 들어왔을 때 내 몸과 머리칼은 땀에 젖어 미끄러웠다. 남자는 흥분했는지 아니면 내가 힘들어해서 가여웠는지 페로몬을 조금씩 풀어 주었다. 숨이 막혀 죽어 가던 나는 산소를 들이켜듯 치자꽃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박래현은 내 손목을 허리에 내리누른 채 깊숙이 쑤셔 박은 성기를 내벽에 문질렀다. 긴장해서 굳어 있던 점막을 치대며 남자는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강간하듯 무식하게 처박다가 사정할 줄 알았는데 남자는 속살이 완전히 풀려 노곤해질 때까지 느리고 줄기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있어서 오감이 예민해진 내게 내장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이 또렷하게 인식되었다.
성기가 들락거릴 때마다 부드럽게 풀린 점막이 기둥에 쩍쩍 들러붙으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안이 펄펄 끓으면서 머릿속은 텅 비어 갔다. 박래현이 페로몬을 흩뿌리며 이상한 곳을 문지르면 신음이 나면서 몸이 비틀렸다. 처음 느껴 보는 생경하고 날 선 감각에 이따금 현기증이 났다. 박아 대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고통이 사라지고 저릿저릿한 감각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으, 으으응… 흐, 흐읍!”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린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내가 내는 소리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부정하기엔 너무나 또렷한 내 목소리였다. 박래현을 유혹하기 위해 시작한 섹스인데 등 뒤에선 호흡이 흐트러지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나만 느끼는 분위기임에도 박래현이 좆을 콱콱 박아 대는 곳에 거부할 수 없는 희열이 들이닥쳤다. 굵다란 살 기둥이 특히 어느 한 부분을 긁어내리면 지나친 쾌감에 배에 힘이 들어가고 장기들이 일제히 출렁거렸다.
“아, 아아앗! 흐, 으으읏, 으응….”
고자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듯 남자는 앞뒤로 몸을 움직이며 내가 느끼는 곳을 반복해 짓찧었다. 축 늘어진 사지가 힘에 밀려 위로 올라가면 남자는 허리를 잡아당겨 내 몸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손으로 매트리스를 짚어야 그나마 버틸 것 같아서 그에게 잡힌 손목을 흔들었다. 남자는 놔주기는커녕 더 세게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디 당신이 흔들어 봐요. 얼마나 기술이 좋아서 날 도발했는지 구경해 보게.”
철썩 소리가 나게 엉덩이를 얻어맞은 뒤 손이 자유로워졌다. 두 손으로 매트리스를 짚고서 나는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었다. 요령 없이 그저 본능에 따라 헉헉대며 허리를 움직여 안을 채우고 있는 좆을 조였다. 매트리스가 흔들렸고 땀에 젖은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날리다 볼에 들러붙었다. 내가 허리를 앞으로 빼자 커다란 성기가 밖으로 나갔다가 단번에 밀려 들어왔다.
성기가 물러날 때는 기둥에 붙은 속살이 쑥 빠져나갈 것처럼 아찔했다가 성기가 치고 들어오면 짜릿한 감각에 눈앞이 하얘졌다. 그렇게 정신을 쏙 빼놓은 다음 맥이 펄떡펄떡 뛰는 곳을 귀두 끝이 비집고 들어와 집중적으로 찍어 댔다.
“흐, 흐으읍, 하읏, 아아아!”
날카로운 비명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나를 놀라게 했다. 안에서 뭔가가 터졌는지 허벅지를 타고 뜨거운 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무릎 근처의 시트가 흠뻑 젖어 에어컨 바람에 금세 차가워졌다. 영문을 몰라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매서운 손바닥이 오른쪽 엉덩이를 내리쳤다. 계속해서 움직이라는 명령이었다. 나는 하얀 침대보를 움켜쥐고 울면서 허리를 흔들었다. 출렁이는 엉덩이 살을 뜨거운 손이 움켜쥐자 꼬리뼈 부근에 쾌감이 끓어올랐다.
“흐으, 으읏, 아, 으응….”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신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내 팔뚝을 꽉 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섹스의 목적을 기억하고서 남자의 표정이 궁금해 상체를 틀어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반듯하고 단정한 이마에 머리칼이 멋대로 흐트러진 것 빼곤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표정 없는 눈과 시선이 마주친 찰나 박래현은 내 뒤통수를 잡아 그대로 시트에 처박았다. 나랑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태도였다. 감정 없이 몸을 섞는 사이라 해도 서로 부드럽게 대해 줄 수는 있을 텐데, 그런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머리카락을 파고든 손가락이 두피를 깊게 문질렀다. 줄기차게 파고들어 안을 비벼 대는 성기와 널뛰는 페로몬을 보면 이 남자도 어느 정도 흥분한 상태일 것이다.
“패기 넘치게 유혹할 땐 언제고, 겨우 이 정도입니까? 이따위 수작에 내가 넘어갈 거 같아요?”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단단하게 부푼 성기가 빠르게 안을 드나들었다. 상체가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엉덩이 살이 남자의 허벅지에 부딪혀 뭉개졌다. 짙붉게 벗겨진 주먹 크기의 귀두가 내벽을 쿵쿵 망치질해서 나를 한계로 몰아갔다. 내가 움직이면서 느꼈던 쾌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박래현이 쳐올릴 때마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입이 벌어져 침이 뚝뚝 떨어졌다. 질척하게 젖은 밑에선 계속 끈끈한 물이 흘러내려 허벅지를 적셔 갔다. 내게서 나는 짙은 레몬 향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팔뚝에 묻힌 얼굴에서는 펄펄 열이 올랐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특히 박래현의 성기를 품고 있는 아랫배 안쪽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으, 으응, 주인님, 하, 하악! 잠깐만요!”
성기 박히는 소리가 비 온 날 찰박찰박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는 소리와 비슷했다. 내 몸 어디서 이렇게 차진 물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박래현은 내 외침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내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성감대를 살 기둥으로 비비고 문질렀다.
“흐, 으읏… 잠, 잠깐만요!”
안에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좆이 내벽을 긁고 짓뭉개며 안을 먹어 치웠다. 속살을 벌리고 들어간 육중한 자지가 어느 지점을 찍어 내리자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숨을 헐떡거렸다. 눈앞에서 별들이 무지개처럼 피었다가 덧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내벽이 멋대로 오그라들며 남자의 성기를 압박했다.
수축한 내벽을 봐주지 않고 짓이기자 나는 사지를 벌벌 떨며 그만하라고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멈추지 않고 흐물거리는 내벽에 좆을 쑤셔 박았다. 팔다리가 꺾여 몸이 매트리스에 납작 눌어붙었다. 좆을 물고 있는 구멍과 내 좆에서 질척한 액이 터져 나왔다. 강렬한 쾌락에 자지러지다가 너무 황홀해서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래현은 구멍에서 좆을 빼 성기에 묻은 애액을 내 엉덩이에 비볐다. 좆이 빠져나간 궤적을 따라 뜨거운 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내벽이 울렁거리고 구멍은 오므라들었다가 벌어지면서 혼자 움직였다. 치자꽃 향기 역시 한층 짙어져 나를 온전히 뒤덮었다. 온몸의 세포가 페로몬을 받아들이기 위해 분열하는 느낌에 왈칵 신음이 솟구쳤다.
“그동안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요? 매일 내가 박아 주길 기다리며 자위라도 했어요?”
“흐, 흐읏… 노팅, 노팅 해 줘요.”
아무래도 노팅까지 가야 통로가 만들어질 것 같아서 나는 숨을 헐떡이며 박래현에게 애원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노팅, 해 달라고 했어요. 이걸로는 흐윽, 부족해요.”
“섹스할 때마다 이렇게 천박하게 굴어요? 그렇다면 내가 노팅 할 마음이 들게 열심히 꼬셔 보든가. 혼자 좋다고 질질 싸면서, 노팅을 바랍니까?”
남자는 지나치게 자제력이 강한 알파였다. 그러고 보니 나 혼자만 오르가슴을 느껴 허덕였을 뿐 박래현은 아직 사정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붙들고 있던 손가락을 펴서 늑골과 아랫배를 꾹 눌렀다. 내 안을 점령했던 성기처럼 손가락 역시 늑골을 부러뜨릴 기세로 파고들었다. 뒤에선 비어 있던 곳을 빈틈없이 아우르며 단단한 살덩이가 푹 들어왔다.
남자는 손바닥으로 허리를 누르고서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극받았던 곳에 더 강한 자극이 주어지자 내벽에서 시작한 전율이 발끝까지 전달되었다. 박래현이 노팅하도록 그를 유혹해야 하는데 거친 움직임을 받아 내는 것만으로 벅차서 딴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내가 알파 좆에 반응하는 오메가라지만 다른 용도로는 써 본 적 없는 곳이 강제로 벌어져 좆이 들락거리고 있으니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다 박래현 성기는 보통 인간이 가질 만한 크기가 아니어서 한번 박힐 때마다 성감대와 내장, 등줄기까지 징징 울렸다.
한 번 더 사정한 뒤로 곤죽이 돼 젖은 시트에 몸을 붙인 채 헐떡이고 있는데 박래현이 성기를 뒤로 뺐다. 벌어졌던 살이 제 위치를 찾아가며 열기로 화끈거리는 내벽이 붙었다. 이제 끝났다고 안심한 것도 잠시, 박래현은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대번에 성기를 박아 넣었다. 다물렸던 살이 확 벌어지면서 성기가 내장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흐, 흐윽, 하, 아, 아윽!”
튕겨 올라가는 허리를 무거운 손바닥이 내리눌렀다. 내벽이 마비된 듯 움직임을 멈췄다가 핏줄이 툭툭 불거지는 성기를 일시에 짓씹었다.
말미잘 촉수처럼 하늘거리다가 먹이를 발견한 점막이 남자의 성기에 들러붙어 기둥을 압박했다. 박래현 입에서 낮게 신음이 번지면서 그의 성기가 두근두근 맥동했다. 좆 기둥의 박동에 맞춰 내벽도 같이 휩쓸리며 움찔거렸다. 나는 침대에 납작 엎드린 채 처음 맞이하는 감각에 집중했다. 이게 쾌락인지 고통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끔찍하면서도 너무나 좋은, 더 지독하게 박히고 싶다가도 멈췄으면 싶은 괴이한 감각이었다.
들이닥친 희락의 파고에서 허우적댈 동안 박래현은 거침없이 동작을 이어 갔다. 쾌락에 몸부림치다 견디지 못하고 나는 남자를 밀어내려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박래현은 내 손목을 교차해 두 손으로 내리누른 채 몸을 세워 더 깊이 성기를 삽입했다. 지나친 압박감에 시트에 얼굴을 묻고서 잠시 숨을 멈췄다. 이대로 계속 박혔다가는 몸이 조각조각 부서질 것만 같았다.
“하아, 그만! 이제 그만해요.”
시트에 묻혀 입 밖으로 나온 음절은 제대로 된 소리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텐데 박래현은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고 내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노팅 하고 싶다면서, 후, 이걸로 되겠어요? 내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음란하게 흔들어야지.”
거대한 성기가 점막을 뭉근히 비벼 올리자 쾌락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유성우처럼 무수하게 떨어지는 쾌락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무것도 붙잡을 게 없었고 누구도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공포에 나는 오른손을 비틀어 남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강인한 손에 내 손을 단단하게 깍지 낀 순간 이상하게 더는 떨어질 것 같지 않아 안심되었다. 박래현은 내 손을 잡은 채로 더 깊숙이 들어왔다.
지쳐서 끝내고 싶은데 박래현은 도무지 사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흉흉하게 일어선 성기를 뒤로 뺐다가 불두덩에 엉덩이 살이 부딪쳐 퍽 소리가 나게 성기를 욱여넣었다. 그의 움직임은 격렬했고 나는 쾌락에 빠져들어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그에게 붙잡힌 손목이 풀렸을 때 나는 체액으로 엉망이 된 시트에 도마뱀처럼 팔다리를 벌리고 늘어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전신이 피로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무릎을 세운 박래현은 두 손으로 허리를 꽉 누른 채 위에서 아래로 좆을 처박았다. 불덩이를 머금은 살 기둥은 쉬지 않고 속살을 헤집어 짓이기면서 성감대를 찍어 눌렀다.
“하, 씨발… 흐, 으윽…!”
욕을 짓씹으며 나는 손 관절이 불거지도록 있는 힘껏 시트를 쥐었다. 끈적끈적한 점막에 살이 쩍쩍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음낭이 볼깃살을 치는 소리, 허벅지 뼈와 근육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 등이 빗소리와 섞여 고막을 괴롭혔다. 살고 싶어서 이 방법을 택했는데 완전히 계산 착오였다. 섹스하다가 죽고 싶지 않아서 입에선 욕이 쏟아져 나왔다.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는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는지 분간할 정신은 없었다.
“저 존나 죽을 거 같아요. 흐, 흐읏, 이제 그만….”
성기 외곽을 따라 둥글게 벌어진 주름과 성기에 쿵쿵 찍히는 안이 찢어질 듯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꼬리뼈를 중심으로 번져 가는 쾌락은 또 대단해서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두 개의 감각이 서로 엉키고 부딪쳐서 나중엔 심지어 고통마저 쾌락으로 느껴졌다. 나는 시트에 쓸려 따가워진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려 빗방울에 얼룩진 테라스 창문을 보았다.
깨닫지 못한 사이에 온 침대를 돌아다녔는지 박래현과 나는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남자는 다리 한쪽을 침대 아래로 내려 체중을 지탱하고서 퍽 소리가 나게 안을 쳐올렸다.
“으, 으으응, 하, 으으윽!”
성기가 아랫배를 뚫고 밖으로 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아까 빨면서 확인한 바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길이였다. 내벽이 수축하면서 속을 가득 채운 성기를 꽉 조여 물자 박래현이 잠시간 동작을 멈췄다. 박래현과 내가 만들었던 모든 소리가 사라지면서 빗소리만 여름밤을 가득 적셨다.
흐려진 눈을 깜박였더니 테라스 유리창에 비친 유려한 몸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뿐만 아니라 군살이 없고 비율이 좋아 벗은 몸도 수려한 사람이었다. 거칠게 구멍에 박아 대고 있는데도, 속살에 파묻힌 좆이 벌떡벌떡 성을 내고 있는데도, 유리창에 비친 남자의 겉모습은 군무를 추듯 절도 있고 우아했다.
이제 끝낼 때가 다가왔는지 매트리스를 짚은 남자의 팔뚝에 파랗게 핏줄이 돋았다. 느리게 나갔다가 느리게 들어오던 좆이 뭉그러진 점막에 깊게 빗금을 그었다. 안이 움푹 팬 느낌에 벌어진 두 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울컥울컥 애액을 쏟아 내는 안은 성기가 닿는 곳마다 벌겋게 열꽃이 터져 나갔다. 내벽 가장 깊은 곳에 파묻힌 성기가 단단한 근육을 쳐올린 순간 뱃속이 너울너울 경련하며 사지가 마비되었다.
“윤준영 씨, 괜찮아요? 준영 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괜찮다고 대답하려는데 세상이 온통 붉어지더니 이내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
타오르는 사막을 맨발로 걸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달궈진 모래가 발바닥에 알알이 박혀 걸음마다 고통이 밀려왔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절망이 가득 찬 눈에 아득히 펼쳐진 모래 바다가 보였다. 한참을 더 걷다 보니 어디선가 시원한 물 냄새가 났다. 메마른 모래에 종아리까지 푹푹 빠져서 힘겹게 걷고 있던 나는 이마에 내려앉는 촉촉한 감촉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 차장이 물수건을 내 이마에 내려놓고 있었다.
“정 차장님, 지금 몇 시예요?”
말을 해 놓고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아서 흠칫 놀랐다. 어제 비명을 질러 댄 탓에 목소리는 거칠거칠하고 투박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시끄러워서 박영범이 제대로 잠을 잤을지 모르겠다.
“열두 시 다 돼 가요. 점심으로 전복죽 끓이고 있으니까 내가 방으로 갖다 줄게요.”
“상무님은요?”
몸을 벌떡 일으킨 탓에 이마를 덮고 있던 수건이 가슴팍으로 흘러내렸다. 허리께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져 작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아무래도 알몸인 것 같아서 나는 이불이 벗겨지지 않게 조심해서 몸을 가렸다.
“상무님 출근하셨어요. 오늘 준영 씨 힘들 거라면서 잘 돌보라고 했는데, 몸은 좀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상태 안 좋으면 주치의 보낸다고 전화하라고 하셨어요.”
“진짜 괜찮아요.”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내 목소리와 정 차장 목소리가 귓가에서 날아다녔고 주먹으로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박래현 손에 잡혔던 허리와 엉덩이가 뻐근했고 뼈마디가 저리고 쑤셨다. 육중한 성기에 뚫린 밑은 열상을 입어 쓰리고 화끈거렸다. 그 부분이 묵직해서 힘을 주었더니 욱신거리며 통증이 지나갔다. 안을 쥐어 파먹으며 긁어 대던 살덩이가 떠올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얼음 수건 해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저 먼저 씻고 싶어요. 씻고 나서 제가 나갈게요.”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박래현 얼굴 보기가 거북했는데 그가 출근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정 차장이 나가고 나서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허벅지가 벌벌 떨려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박래현 좆이 드나들었던 안은 지금도 거대한 성기가 박힌 것처럼 따갑고 얼얼했다. 거의 기다시피 엉금엉금 가느라 욕실까지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욕조에 입욕제를 풀고 물을 튼 다음 세면대를 짚고 서서 몸 상태를 살폈다. 목과 가슴팍, 옆구리에는 커다란 손자국과 보라색 멍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몸을 돌려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성기가 끔찍하게 커서 주름이 찢어진 줄 알았는데 거울에 비친 입구는 붓기만 했지 의외로 멀쩡했다. 대신 박래현의 단단한 몸에 부대낀 엉덩이와 허벅지가 푸르뎅뎅했다.
제발 한 번만 박아 달라며 굴욕적으로 매달렸던 내가 초라하고 수치스러웠다. 남자와 아예 계약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엄마가 죽어 가는 걸 지켜보면서 후회한 게 더 나았을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얌전히 지내다가 인공수정으로 임신할 걸 그랬나. 여러 생각이 휘몰아쳤지만 내가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자조하기엔 현재가 너무 버거웠다. 계약서는 작성됐고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도, 되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자며 향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서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대고 천장을 응시했다.
박래현은 어제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배우자에게 이야기할까?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뻔뻔한 남자지만 법적인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워서 상대에게 떳떳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행동이 부끄럽고 한심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박래현이 오메가들을 망가뜨렸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박래현이 내게 페로몬을 풀지 않았다면, 박래현이 계약 위반으로 나를 쫓아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면, 하다못해 인공수정 성공률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스스로 다리를 벌리며 알파에게 박아달라고 사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갖 가정 속에서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살기 위해 알파와 몸을 겹쳤다는 정당화는 나를 무기력하게 했다. 나는 아이의 법적인 부모가 될 사람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앞뒤로 흠뻑 젖어서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며 신음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첫 섹스는 천박하고 자극적이고 황홀해서 그에게 박혔던 안이 지금도 여운으로 저릿저릿했다. 어제 일을 몸에서 지워버리고자 밑으로 손을 내려 주름 밖을 더듬었다. 내벽에 붙어 있는 감각들을 다 파버리면 좆같은 기분이 좀 나아지리라는 희망에 손가락을 세워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지만 안이 퉁퉁 부어 있어서 손가락 마디 하나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저지르고 나서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은 박래현에게 깔려 미칠 듯이 쾌락을 느낀 데 있었다. 남자 성기가 살을 뚫고 들어와 고통만 주었을 때는 부끄러움 따위 느끼지 않았다. 박래현과 몸을 섞은 이유는 히트 사이클이 오기 전에 내 페로몬을 각인시켜서 페로몬의 농도가 가장 짙어질 때 그가 이성을 잃고 내게 달려들게 만들기 위한 것이지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박래현을 유혹하기는커녕 내 계획과는 반대로 그가 주는 쾌락에 잠식돼 본능만 남은 오메가가 되어 버렸다.
고통과 쾌락의 흔적이 새겨진 몸을 숨기고 싶은 마음에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세운 대의명분은 그럴싸하지만 나는 배우자가 있는 남자와 몸을 섞어 가며 몇 번이나 절정에 이른 싸구려 남창이었다. 성실하고 반듯했던 윤준영은 어젯밤 열대야에 녹아 사라지고 지금은 빈 깡통이 되어버렸다.
박래현이 나랑 계약한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 오리무중이어서 더없이 무력해졌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나는 피어싱이 박힌 귓바퀴를 힘껏 잡아 눌렀다. 나를 옭아매는 피어싱과 목걸이를 전부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숨이 막혀 폐가 터질 지경에 이르러서야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귀에서 피가 흘렀는지 물에 핏방울이 번져 있었다.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제의적 행위에 침잠해 나는 나를 버티게 해 줄 의지를 할퀴고 짓밟았다.
윤준영, 그래서 뭐 어떡할 건데? 여기서 혀 깨물고 뒤지겠다는 거야? 박래현이 망가뜨렸다던 오메가들처럼 너도 그렇게 맥없이 사라질 거냐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엄마와 신념까지 버려 가며 박래현과 몸을 섞은 내가 가여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해준도 없고 사기꾼도 사라졌으니 엄마 곁엔 나만 남았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박래현 뜻대로 일이 흘러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히트 사이클이 오기 전까지 기회가 오면 박래현을 유혹해 그가 내 페로몬에 익숙해지게 만들 것이다. 내가 발정기에 페로몬을 내뿜으면 박래현이 저절로 반응하게끔 그를 길들일 것이다. 내가 박래현과 한 행위는 섹스가 아니라 아이를 갖기 위한 교미였다.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 아이를 갖기 위해 흘레붙은 행위 이상은 아니었다. 그 남자와 난 성기를 결합하는 것 외에 애정에 기반을 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섹스할 때 흔히 따라붙는 키스나 애무, 다정한 눈빛의 교환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나는 침대에 엎어져 엉덩이를 든 채로 발기한 좆을 받아 냈고 박래현은 흥분한 내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움직이지 못하게 매트리스에 뒤통수를 내리눌렀다. 둘 다 알파와 오메가로서 본능에 충실해 그저 박고 흔들고 싸는 과정만 무한하게 되풀이했다.
나는 박래현과 섹스하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아간 원흉은 박래현이다. 유부남인 당사자는 정작 일말의 후회도 하지 않는데 나만 자책하고 힘들어하는 건 불공평하고 부당했다. 박래현에게 맞서 1년을 버티려면 나는 지금보다 독하고 강해져야 할 것이다. 패배 의식에서 겨우 빠져나와 기운을 차리고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배에 찌르는듯한 통증을 느껴 아랫배를 문지르다가 어젯밤에 박래현이 내 안에 사정했는지 안 했는지 궁금해졌다. 하반신 전체에 진저리를 느끼다 정신을 잃어버렸고 그 뒤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새벽에 잠깐 눈을 떴을 때 무드 등이 어둑어둑한 방 안을 밝히고 있었고 박래현은 곁에 없었다. 새것으로 교체된 시트에서는 내가 흘린 정액 냄새 대신 깨끗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박래현이 안에다 사정했다면 뒤척이는 새에 정액이 흘러내려 시트가 젖었을 텐데 시트는 보송보송했다.
내 안에 싸기 싫어서 체외 사정을 한 건가? 나는 샤워기를 잠근 뒤 부어서 잘 들어가지 않는 구멍 안에 억지로 손을 쑤셔 넣었다. 좆이 들락거렸던 입구와 안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부어 있어서 손가락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왼쪽 팔로 벽을 짚고 다리를 크게 벌리고 서서 다시 시도해 보았다. 부었다는 걸 참작해도 검지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비좁은 길에 그 거대한 좆이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혹시 꿈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가 잠시 의심했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저릿한 내벽, 옆구리에 찍힌 손자국을 보면 결코 몽상이나 꿈이 아니었다. 아픔을 참고 최대한 깊숙이 넣었다가 꺼내서 손가락을 확인해 보니 정액이 묻어 있지 않았다. 박래현은 내가 기절한 뒤에 화가 나서 그냥 나가 버렸나 보다.
야, 이 등신아. 좀만 더 참지! 박래현을 발기시키기까지 버텼던 시간을 보상받을 수 없어 억장이 무너졌고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앞날이 깜깜했다. 박래현은 내가 함락시킬 수 있는 알파가 아니었다. 당시 박래현 좆은 곧 터져 나갈 것처럼 팽창했는데 그걸 참아 내다니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바닥난 자신감이 끝도 없는 밑으로 곤두박이쳤다. 박래현을 내 페로몬의 노예로 만들어 히트 사이클 때 섹스하려던 계획이 와장창 무너졌다. 나는 알파가 주는 쾌락에 넋 놓고 휩쓸리는 바람에 박래현이 섹스를 즐겼는지 아닌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어젯밤 일을 곱씹을수록 나란 인간이 한심하다 못해 경멸스러워졌다.
음울한 기분으로 샤워를 마치고 몸이 무거워서 도로 침대에 누웠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허리께로 끌어 올리면서 누가 시트와 이불을 갈았을지 궁금해졌다. 박래현이 갈았을 리는 없을 테고 늦은 시간이라 이 차장을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영범만 남았다.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모습을 그가 봤으리라는 생각에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이 감옥에서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
첫 섹스의 후유증으로 정신과 육체가 무기력 상태에 빠져 이틀을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몸을 뒤척이면 아랫도리에 통증이 일렁여서 박래현과 몸을 섞었던 밤이 떠올라 괴로웠다. 속살에 비벼지던 단단한 기둥의 감촉과 기둥을 타고 오르던 핏대의 펄떡임, 거기에 반응해 자지러지던 내 모습 따위가 생생하게 기억나 얼마 남지 않은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미워하는 사람과 성교하면서 쾌락을 느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내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바닥난 자존감을 지키고 계획에 추진력을 얻기 위해 나는 모든 걸 박래현 탓으로 돌렸다. 경험이 많은 알파는 오메가가 쾌락을 느끼고 흥분하는 지점을 잘 알아서 끈질기게 공략했다. 키스나 애무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 교미만 했는데도 나는 몇 번이나 절정에 이르렀다.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오메가가 안 넘어가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추한 반응을 보인 건 순전히 박래현이 능수능란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몸과 마음을 추슬렀던 사흘간 박래현은 본가로 가서 배우자랑 함께 보냈는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배우자에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살갑게 굴었을 것이다. 남자의 이중성에 치를 떨면서 나는 혼자 저녁을 먹고 거실로 나가 박래현을 기다렸다. 찌뿌드드한 몸에 날씨마저 우중충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흘간 비가 계속 내려 텃밭에 나가지 못한 데다가 컨디션이 엉망이라 운동을 하지 않았더니 움직이고 싶어서 몸이 쑤셨다. 내일은 상추와 오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한 뒤에 체력 단련실에서 기필코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장 2층으로 올라가 근력 운동을 하고 싶지만 이 차장에게 오늘은 박래현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달받아서 꼼짝없이 그를 기다려야 했다.
시간은 흐르는데 박래현은 들어오지 않았다. 졸음이 찾아와서 몸이 점점 소파 등받이 쪽으로 기울어갔다. 오늘도 안 들어오면 4일째 집을 비우게 되는데 어렵게 몸을 섞은 결과가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박래현이 배우자와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하거나 반성하게 되면 몸을 던져 알파 좆을 받아들였던 나만 낭패를 보게 된다. 결과야 어찌 됐든 나를 더러운 남창 취급하던 박래현이 처음으로 내 페로몬에 반응을 보였었다. 빈틈을 조금씩 공략하다 보면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내는 것도 가능할 거라 여겼는데 점점 가능성이 작아지고 있었다.
박래현이 관계했던 오메가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의 배우자가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내 미래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오메가들도 살아남기 위해 나처럼 온갖 방법을 동원했을 텐데 그들이 왜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는지 알고 싶었다.
‘듣던 대로 오메가는 정말 털이 없네. 여기도 없어요?’
박래현은 신기하다는 듯 사타구니를 관찰하다가 내 팔을 들어 겨드랑이까지 들여다보았다. 남성 오메가든 여성 오메가든 오메가들은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 털이 나지 않는다. 수염도 나지 않아서 보통 남자들과 달리 인중과 턱이 매끈매끈하다. 내게 박아 대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박래현이 다른 오메가와 섹스하면서 그 사실을 확인 못 할 정도로 상대에게 몰두할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오메가는 내가 처음인가? 그가 오메가를 망가뜨렸다는 말을 분명 들었는데 앞뒤가 맞지 않았다.
박래현과 관련해 더는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빗소리를 들으며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며칠째 비가 내리는 걸 보면 장마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시간은 다른 곳보다 느리게 흘러가서 오늘이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 혹은 월요일인지 불분명했다. 엄마에게 원양어선을 탄다고 거짓말했는데 이곳은 태평양 한가운데보다 고립된 곳이었다. 생각이 엉키고 눈을 떴다가 감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면서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방에 들어가서 자야 하는데 뇌는 이미 잠속에 한발을 걸쳐 버렸다. 테라스 문이 덜 닫혔는지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자장가처럼 비슷한 박자를 반복했다.
그대로 깜박 잠이 든 나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서늘한 손길에 살며시 눈을 떴다. 대리석 탁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이마에 붙은 밴드를 확인하던 박래현이 손을 거두자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흩어졌다. 남자의 눈이 몸을 더듬어 내려가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 데서나 다리 쩍쩍 벌리고 자는 게 습관입니까? 이 집에 알파가 나만 있어요?”
오른손으로 소파를 짚어 몸을 일으키고는 헤벌어진 허벅지를 얌전히 오므렸다. 헐벗은 자세를 비난하기 전에 파자마 바지를 주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다.
“깜박 잠들어 버렸네요. 빗소리가 자장가로 들려서요.”
박래현은 정장 차림이었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긴 뒤 그는 드레스 셔츠 첫 단추를 열어 자연스럽게 목울대를 노출했다. 절제된 동작과 완벽한 껍데기에 홀려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깨는 떡 벌어지고 허리는 가파르게 깎여 들어간 데다 다리는 끝없이 길었다. 그리고 가운데 달고 있는 자지마저 존나 예쁘고 정갈하고 크고 튼실했다.
문제는 껍데기의 장점을 전부 상쇄하고도 남을 지랄 맞은 알맹이였다. 추잡하고 천박한 입버릇은 잘난 외모 때문에 더 단점으로 도드라졌다. 이 쓰레기가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은 있을까. 감정을 갖기엔 너무 메마르고 차가운 남자여서 연애 경험이 없다는 데 손가락을 전부 걸 수 있다.
“피곤하면 방에 들어가서 자야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담뱃불을 붙이면서도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였다.
“혹시 다리 벌리고 누워서, 내 자지만 기다렸습니까?”
“주인님 오시기 전에 자면 귀에 구멍 뚫을까 봐 겁나서요.”
조만간 귓바퀴와 귓불에 피어싱이 가득 차서 이제 다른 곳을 찾아 뚫을지도 모른다. 코나 입술 같은 곳은 더 아플 테니 이 남자 비위를 잘 맞춰서 몸에 추가로 구멍이 뚫리는 걸 막아야 한다.
“다음엔 자지에 하나 박아 줄까요? 그 백자지 쓸모도 없는데, 예쁘게 장식이라도 해 놔야지.”
“…그건 좀….”
귓바퀴가 뚫리는 건 이제 참을 만한데 고환이나 기둥에 피어싱이 박히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프기도 하겠지만 은밀한 부위마저 박래현에게 점령당하고 싶진 않았다.
“주인한테 꼬리 흔들었으니까 그만 들어가도 됩니다.”
“네, 전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냉큼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남자의 다음 말에 동작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남자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서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회색 연기가 새어 나오는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자못 긴장되었다.
“씻고 준비하고 있어요.”
“…….”
“내 아이 갖고 싶다면서, 그새 마음이 바뀌었어요?”
“아니요.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남자가 2층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자리에 망연히 앉아 방금 들었던 말을 곱씹었다. 내가 해석한 게 옳다면 사흘 동안 자기 배우자랑 뒹굴고 왔으면서 오늘 나랑 섹스하자는 말이었다. 박영범이 덜 마른 머리칼을 털며 1인용 소파에 앉았다. 박래현과 내 대화를 들었는지 그의 얼굴이 당혹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박래현 사생활을 다 꿰뚫고 있는 남자라 박영범은 박래현의 뻔뻔함에 더 기가 막힐 것이다.
“방금 래현이가 준영 씨랑 같이 자자고 했습니까?”
“네.”
이 남자가 내 알몸을, 그것도 알파와 관계한 내 몸을 봤다고 생각하니 창피해서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준영 씨, 설마… 그날 밤 래현이랑 정말 잤습니까?”
그날 시트를 갈면서 내 몰골을 봤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시트를 간 사람이 박래현이란 말인가? 무뚝뚝하고 오만한 박래현이 침대 시트를 가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가 갈았다면 섹스하다 기절한 모습을 한 사람에게만 보여 다행이었다.
“준영 씨, 대단하네요.”
“뭐가요?”
“래현이한테 달려든 오메가들, 다 어디 한 군데 부러져서 나가떨어졌거든요.”
박래현과 섹스하려면 맷집이 좋아야 한다는 소리인가? 그날은 운 좋게 그냥 지나갔는데 오늘은 무사히 넘기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날 박래현 성기가 입 안과 목구멍을 다 헐어놓은 통에 침을 삼키면 지금도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그 오메가들은 다 임신에 실패했나요?”
“뭐, 그렇다고 봐야죠. 심지어 히트 사이클에 접어든 오메가들이었는데….”
박영범은 더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다음 내용이 궁금했지만 나는 물어볼 처지가 아니었다. 박래현과 관련해 질문한 게 그의 귀에 들어가면 귀가 뚫리든가 어디 한 군데 부러지든가 할 것이다.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박 실장님.”
“그래요, 좋은 밤 보내요.”
내일 무사히 보자는 말을 완곡하게 돌려 말한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무드 등만 켜 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비가 와서 아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오후에 손발이 부르트도록 욕조에서 혼자 놀았다. 씻을 필요가 없어 유리창에 들이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어둠이 내린 밖을 내다보았다. 날벌레들이 날아다니던 외등 아래 굵은 빗줄기가 사선을 그으며 그것들을 대신했다. 열대야를 꼬박 새우던 날벌레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날벌레들처럼, 아니면 박래현을 유혹했다는 오메가들처럼 나도 이 집에서 곧 사라질 것이다. 문밖에서 박래현과 박영범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빗소리에 묻혀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문 여닫히는 소리에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유리창만 응시했다. 파자마 차림의 박래현이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내 앞에 선 그는 어깨를 가볍게 비틀어 나를 침대에 넘어뜨렸다. 파자마 자락이 옆구리를 스쳐 매트리스 위로 스르륵 벌어졌다. 윗도리를 벗기 위해 허리끈을 풀려는 내 손을 남자가 저지했다.
“그대로 입고 있어요. 박고 흔들었다가 싸면 끝나니까.”
박래현은 드로어즈를 벗기고서 내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 나름대로 키가 큰 편인데 종이 인형처럼 아무 저항 없이 엎어지는 몸이 신기했다. 박래현은 무릎 뒤쪽을 잡아 옆구리에 허벅지가 붙을 때까지 내 다리를 밀어 올렸다. 그러고 나서 내가 돌아볼 수 없게 커다란 손으로 오른쪽 뺨을 내리눌러 나를 모욕했다. 그가 얼굴을 누르지 않아도 남자 표정을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막 속에서 그저 박고 박히는 동물적 행위에 집중하는 것으로 족했다.
“오늘은, 안에 싸 주세요.”
“원래 이렇게 직설적입니까?”
등 뒤 어딘가에서 하는 말일 텐데 어둑한 분위기 때문에 오감이 예민해져서 바로 귀에 대고 질문하는 것처럼 들렸다. 마땅히 대답을 찾지 못해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하면 안에 질펀하게 싸 줄 테니까,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다 삼켜요.”
“네….”
“윤준영 씨는 알파 자지가 그렇게 좋아요? 며칠 전에 그렇게 하고도 또 박아 달라고 애원할 만큼?”
내가 어떤 심정으로 박래현을 받아들였는지 박래현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들키면 박래현이 어떤 심술을 부릴지 몰라서 나는 섹스에 환장한 사람인 척하기로 했다.
“네, 좋아서 죽을 거 같아요.”
서늘한 손이 엉덩이를 터뜨릴 듯 움켜쥐더니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거대한 살덩어리가 곧장 들어오리란 예상에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그런데 성기가 아니라 차갑고 끈적한 액체가 벌어진 엉덩이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어서 단단하고 기름한 손가락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젤 같은 액체를 엉덩이골과 주름에 펴 발랐다. 손가락은 주름 위에서 좌우로 움직이다가 구멍을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 뇌가 없는 멍청한 입구는 그게 맛있는 먹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축하며 손가락을 쭉 빨아들였다. 미끄러지듯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내벽을 섬세하게 문질러서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남자는 손가락 네 개를 구멍 사이에 밀어 넣으며 엄지로는 갈라진 틈을 꾹 눌렀다. 손바닥을 세웠는지 엉덩이골 사이에 손바닥이 밀착되었다. 손가락 네 개가 한꺼번에 들어와 민감한 곳을 짚어 대자 쾌락과 고통이 동시에 찾아와 허리가 움찔거렸다. 박래현은 손가락을 닻 모양으로 구부려 내가 느꼈던 부분만 골라 쿡쿡 찍었다. 그가 누르는 곳에서 유리창에 들치는 비처럼 물이 솟아올랐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것처럼 야속한 몸이 단번에 젖어 갔다.
“구멍이 발랑 까져서 풀어 줄 필요도 없겠네요. 그래도 용케 성병은 안 걸렸어.”
“흐, 흐으… 그걸 어떻게, 아세요?”
“당신 입원해 있을 때 PCR 유전자 검사 끝냈습니다.”
그게 무슨 검사인지 모르겠지만 박은수에게서 내 몸을 검사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의사가 환자 동의도 없이 멋대로 몸을 검사하다니. 유능하고 친절하던 박은수에게 화가 났다. 달리 생각해 보면 나를 걸레 취급하는 박래현이 성병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나를 안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럽다면서, 왜 저랑 섹스하세요?”
안을 메웠던 손이 빠져나가서 주름을 가볍게 문질렀다. 허벅지에 가슴을 붙인 채로 나는 테라스 유리창을 통해 남자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내 가랑이 사이에 자리 잡은 남자가 성의 없는 손길로 파자마 바지를 허벅지 부근까지 내렸다. 속옷을 입고 오지 않아서 성기가 곧장 밖으로 툭 불거져 내 궁둥이를 때렸다. 그는 딱딱해진 기둥을 잡아 엉덩이의 갈라진 틈에 대고 쓱쓱 비비듯 문질렀다. 빈틈이 채워지면서 연약한 살이 기둥에 쓸려 금세 뜨거워졌다. 학습한 바가 있어서 벌써 끈적끈적한 쾌락의 늪에 빠져든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내 좆을 빠는 모습에 꼴렸어요. 상스럽고 더러운데, 그게 또 버러지같이 귀엽고 야해서….”
골반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쿵 소리와 함께 단번에 내벽을 가르고 성기가 들어왔다.
“아, 아으윽!”
붙어 있던 뼈와 근육이 강제로 벌어지면서 혹독한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찾아와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꿈치가 꺾이며 매트리스 위로 무너졌다. 호흡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박래현은 허리를 잡아 나를 곧추세웠다. 준비도 없이 잔뜩 벌어졌던 근육이 관성에 따라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남자의 성기를 야무지게 압박했다.
“그래서 시커먼 구멍 속이 궁금해졌어요. 얼마나 음탕하고 찐득거리길래 알파들이 환장하는지.”
“그래서 흐읏, 궁금증은 다, 풀리셨어요?”
“…당신한테 박고 싶어서 들어온 거 보면, 그다지 궁금할 일은 없을 거 같은데.”
남자는 성기를 끝까지 쑤셔 박은 다음 두툼한 좆 대가리로 내벽 근육을 골고루 문질렀다. 남자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아픔이 서서히 가시고 그 자리에 하나의 감각만 남게 되었다. 그 후론 비좁은 곳이 굵은 성기로 가득 차서 그가 조금만 허리를 움직여도 온갖 곳이 다 눌려 신음이 절로 났다. 지난번 섹스할 때도 느꼈지만 특히 주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뭔가가 숨겨져 있는지 기둥이 그 부분에 비벼지면 번쩍번쩍 빛이 보이면서 허벅지가 후들거렸다.
“구멍이 꽤 쓸 만하네요.”
“…….”
“그래서 여러 알파를 후리고 다녔겠지만.”
남자가 손바닥으로 찰싹 소리가 나게 엉덩이를 때렸다. 맞은 곳이 아파서가 아니라 수치심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박래현이 나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따져 보았다. 나와 질펀하게 몸을 섞은 뒤 박래현은 본가로 들어가 배우자와 사흘간 함께 지내고 오늘에야 여기로 들어왔다. 본가로 들어간 남자는 내 구멍에 쑤셔 넣었던 좆을 배우자에게도 똑같이 사용하고 왔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남자 밑에서 쾌락에 겨워 바들바들 떨었을 상대가 가여웠다. 배우자를 두고서 남창을 끼고도는 남자가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파는 나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 배우자가 아닌 다른 오메가를 안으며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이 남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질 낮고 비양심적인 인간이었다.
하필 몸을 팔아도 이런 남자에게 판 내 운명이 비참하고 서러워서 왈칵 눈물이 났다. 나를 대놓고 깔아뭉개는 남자를 향해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흔들며 어쩔 수 없이 쾌락을 느끼는 이 좆같은 상황이 끔찍해서 박래현이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헛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안을 꿰뚫은 성기가 성감대를 깊게 문지르자 화끈한 감각과 함께 가랑이가 힘없이 벌어지면서 빗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나는 잡생각을 떨쳐내고 이루어야 할 하나의 목표에 집중했다.
***
순조롭게 회복 중이던 엄마에게 급성세포성 거부반응이 일어나서 엄마는 강도 높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면역 억제제를 과다 사용해 그에 따른 부작용이 꽤 심각하다는 정우의 문자를 받았다. 약값이 비싸서 엄마에게 들어가는 돈은 원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병원비와 약값을 충당하려면 학교를 그만두고 온종일 돈을 벌어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엄마를 살려줘서 박래현은 내게 귀인이면서 악인이었다. 나를 진창으로 처박는 남자가 원망스럽지만 그를 끝까지 미워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무사히 이 집을 빠져나가는 게 목표가 되면서 나는 박래현에게 받은 돈을 다 들고 여길 나갈 거란 꿈을 버렸다. 박래현이 위약금을 청구하지만 않으면 아이를 낳아 준 대가로 엄마 수술비와 병원비를 충당했다고 여길 수 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집에서 나갈 생각에 매일 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박래현과 침대에서 뒹굴었다. 우린 여전히 키스나 애무 없이 성기만 결합한 섹스를 이어 갔다. 파자마 윗도리는 벗을 필요도 없이 속옷만 벗고 엉덩이를 들어 올린 자세로 기다리면 박래현이 다가와 성기를 구멍에 쑤셔 박았다. 어쩔 땐 새벽녘까지 몇 번이나 자세를 무너뜨리며 부초처럼 쾌락에 떠밀려 다녔다.
이 동물적인 섹스에 익숙해질수록 히트 사이클을 대비한 예행연습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박래현이 내 안에 사정하게끔 섹스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 그를 꾀었다. 일주일 만에 허리를 능숙하게 돌리게 되었고, 속살로 성기를 꽉꽉 물어서 박래현을 흥분시키는 법을 깨우쳤다. 꾸준한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 덕에 보기 좋게 근육이 올라온 몸은 지구력까지 뛰어나 박래현을 잘 받아 냈다. 박래현은 늦게 올라오는 타입이어서 섹스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내가 오르가슴을 서너 번 느끼고 나서야 그는 사정하곤 했다. 거기다 절대 한 번으로 끝내는 일이 없어 섹스가 끝날 무렵에 나는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매일 밤 몸을 섞다 보니 나는 박래현의 섹스 습관을 낱낱이 꿰뚫게 되었다. 그는 후배위 외에 다른 체위는 시도하지 않았고, 허리를 붙들거나 가랑이를 벌리게 할 때 외엔 내 몸에 손대지 않았다.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내 안을 휘젓는 성기의 굵기나 핏줄의 불거짐, 혹은 허리를 틀어쥔 손의 힘 정도로 박래현의 상태를 짐작했다. 박래현은 내 표정과 몸짓, 신음까지 다 파악하면서 군림하는데 나는 흰 시트를 노려보거나 유리창에 비친 흐릿한 실루엣을 보는 게 다여서 이따금 억울했다.
문제는 섹스가 잦아지면서 내 의지와 무관하게 알파가 주는 쾌락에 몸이 길들어간다는 점이었다. 박래현은 섹스를 잘했고, 섹스는 무료한 일상에서 내게 허락된 유일한 유희였다. 굵디굵은 자지가 안을 휘저으면 내 몸은 불에 구운 마시멜로처럼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렸다. 섹스가 주는 날 것의 감각에 속수무책 빠져들어서 이젠 박래현을 보기만 해도 반사적으로 아래가 젖어 들며 섹스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다. 어느덧 나는 인간이 아니라 생식본능만 살아남은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나와 박래현이 가까워진 건 아니었다. 박래현은 섹스할 때는 잡아먹을 것처럼 열정적으로 굴다가도 섹스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가끔 자신에게 심한 욕설을 내뱉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그의 배우자가 떠올랐고 여러 이유를 들어 나를 합리화해야 해서 나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한참 전에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임신하고 나면 박래현과 몸을 섞을 일이 없을 테니 이번 히트 사이클에 임신하는 게 모두의 평화를 위한 길이었다.
섹스파트너가 되면서부터 박래현이 내게 심한 말을 쓰지 않아서 좋았다. 개 쓰레기 같은 인성을 지녀서 임신하기 전까진 계속 저급한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점잖게 행동했다. 나는 그가 부러뜨렸다던 오메가들처럼 폭력에 노출된 적도 없었다. 폭행에 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엄마를 못 만나는 것 빼고는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그러나 예전에 비교해 나아졌다는 거지 박래현에게 사람대접을 못 받는 건 여전했다. 박래현이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나면 나는 그가 침실로 가자고 할 때까지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 후에 섹스가 끝나는 새벽까지 계속 박래현 옆에 있어야 해서 좋든 싫든 내 관심사는 그에게 집중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박래현 곁만 지키고 있어서 간간이 주인을 지키는 개가 된 기분이 들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자의 성격이나 습관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박래현은 왼손잡이면서 시계를 왼손에 찼다. 커피보다는 차가운 음료를 즐겨 마시며 정리 정돈을 잘하고 청결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성격이었다. 술은 주로 위스키를 마시며 유머 감각이라곤 좆도 없어 자기 필요한 말만 했다. 남는 시간엔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원서나 책을 주로 읽어서 아직 취미는 파악하지 못했다.
난잡하고 화려하게 살 것 같은 분위기와는 달리 박래현은 오로지 집과 회사만 오가며 재미없는 삶을 살았다. 내가 박래현 외모와 부를 지니고 있다면 즐겁고 사치스러운 인생을 살 텐데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나라면 젊은 나이에 결혼해 아이를 낳을 생각 따윈 하지 않고 애인과 가 보고 싶은 곳에 여행 다니면서 내 마음대로 돈을 쓰며 살았을 것이다. 나와 달리 박래현에게 부와 외모는 날 때부터 쥐고 있던 특권이라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 듯했다.
그 외 박영범과의 대화를 통해 유추해 낸 사실도 몇 있었다. 박래현은 신약 연구 개발에 관심이 많아서 핵심 기술 개발에 전념하다가 올 5월에야 뒤늦게 경영에 뛰어들었다. 그가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 수출한 신약 후보 물질의 임상 결과가 올해 말에 확인 가능하다는데 수출 금액이 전부 조 단위여서 듣기만 해도 입이 쩍 벌어졌다. 내 돈이 아닌 남의 돈이라서 이제 억 단위를 들으면 시시하게 느껴졌다.
내가 제일 알고 싶은 건 그의 배우자, 즉 내 아이의 부모가 될 사람이지만 박래현과 박영범이 그 사람을 일절 언급하지 않아서 그 사람은 존재하는데 실체가 없는 페이퍼 컴퍼니를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내게 배우자를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두 분 다 잘 다녀오세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하는 두 사람을 배웅하러 여느 때처럼 현관까지 따라 나갔다. 내게는 월요일이든 일요일이든 별 의미가 없지만 박영범은 어서 오늘이 지나가면 좋겠다고 투덜거렸다. 돌이켜 보면 내겐 늘 주말이 의미가 없었다. 여기 오기 전까진 일주일 내내 일해야 해서 그랬고 여기 온 뒤론 매일 놀아야 해서 그렇다.
구두를 신는 박래현을 보며 나는 습관처럼 그의 외모를 평가했다. 내가 엄두도 못 낼 비싼 옷과 장식품이겠지만 나중에 취직할 때 저런 스타일은 괜찮겠다, 저런 스타일은 너무 양아치 같아서 지양해야겠어, 하고 속으로 품평회를 열었다.
가르마 없는 포마드 스타일과 평소보다 단정한 옷차림을 보며 오늘은 중요한 회의가 있거나 바이어와 약속이 있는 날일 거라고 짐작했다. 박래현은 워낙 화려하게 생겨서 눈에 띄게 입는 것보다 오늘처럼 정갈한 슈트에 넥타이나 넥타이핀으로 포인트를 준 차림이 더 어울렸다.
나중에 면접 보러 갈 때 이런 차림이면 점수를 얻겠다는 생각을 하며 신발까지 완벽하게 점검을 끝냈다. 이쯤에서 현관문이 열리고 박래현이 나가야 하는데 그가 움직이지 않아 의아한 눈을 들어 올렸다. 나를 보고 있던 박래현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패션이라곤 쥐뿔도 모르면서 네가 뭔데 날 평가하냐고 닦달하는 목소리가 귀에 쩌렁쩌렁 울렸다.
“형, 오늘은 별일 없으니까 형 먼저 출근해.”
“어,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박래현은 황망한 표정을 짓는 박영범을 지나쳐서 내 손을 잡고는 방으로 끌고 갔다. 곧장 나를 소파에 엎어뜨린 뒤 그는 드로어즈를 잡아 단박에 무릎 아래로 벗겨 내렸다. 항의하려고 발딱 치켜든 고개는 남자의 억센 손에 눌려 소파에 처박혔다. 은은한 가죽 냄새를 풍기는 베이지색 소파에 왼쪽 뺨이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매트리스보다 더 푹신해서 얼굴의 반이 가죽에 묻혔다.
바지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쪽 손으로 소파를 짚어 몸을 지탱한 남자가 내 엉덩이골에 성난 성기를 문질렀다. 눈으로 보지 않고 비벼지는 감촉만으로 단단한 살 기둥과 곤두선 혈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엉덩이골과 주름 사이를 조금의 틈도 없이 메워 가던 굵은 살덩이가 오므라진 주름을 밀고 들어온 순간 엉덩이에 힘을 주며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안 들어가니까 힘 빼요.”
남자는 아프지 않게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내가 긴장을 풀자 밤새 시달려 부어오른 살을 벌리면서 굵직한 귀두 끄트머리가 들어왔다. 대여섯 시간 전에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였던 곳이라 정액과 체액이 섞여 축축하고 미끈거릴 것이다. 박래현 좆에 나는 곧 달아오르겠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우린 저녁을 먹은 후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섹스했고 박래현은 그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다른 목적 없이 아이를 만들기 위해 몸을 섞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정해진 룰을 깨고 아침부터 내게 발정하는 건 반칙이었다. 기혼자와 몸을 섞는 나도 쓰레기지만 박래현은 우주를 활보하는,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한 우주 쓰레기였다.
“윤준영 씨 안은 늘 젖어 있네요. 가랑이만 벌려서 언제든 박아도 되겠어요.”
“새벽에 주인님이 쉬지 않고 채워 넣은 겁니다.”
“왜, 두 개씩 처먹다가 하나만 씹으니까 허전해요? 박 실장이라도, 후, 부를까요?”
아침부터 나한테 꼴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남자는 꼬인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박래현의 음담패설을 개소리로 치부한 나는 성기가 들어오는 방향으로 허리를 돌려 삽입을 도왔다. 쾌락과 생산을 위한 교미에 어떤 감정도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이미 뿌리 끝까지 삽입하고 남을 시간이지만 안이 부어 있어서 박래현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남자의 배려로 느리게 진행되는 삽입에 되레 조바심이 나서 주름과 내벽이 바짝 졸아들었다. 그게 박래현을 자극했는지 허리를 잡은 남자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아, 아아…!”
다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점막에 비벼지는 면적이 커지면서 자잘한 쾌락이 몰려왔다. 자세를 잡고서 힘을 응축시킨 나는 박래현이 성기를 뒤로 뺐다가 앞으로 진입한 순간에 맞춰 엉덩이를 쳐올렸다.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난 직후에 성기가 뿌리까지 삽입되면서 긴장하고 있던 속살이 움찔거려 의도치 않게 성기를 조여 물었다.
“흐, 씨발….”
도화선에 불을 붙여 주자 남자는 욕을 짓씹으며 허리를 움직였고 내가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움직임이 점점 거칠어졌다. 안에 고여 있던 정액과 새로 생긴 끈적한 액이 한데 뒤섞여 아침부터 음란한 소리와 냄새를 풍겼다. 두꺼운 내벽을 쑤시고 들어와 안쪽 깊숙이 처박힌 좆이 어제 내 문질러 닳아졌을지도 모를 성감대에 대가리를 비볐다.
“흐, 으윽… 아, 흐윽!”
꽃병에 탐스럽게 꽂힌 꽃들의 윤곽이 흐릿해졌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허벅지에 부드러운 천이 닿는 걸 보면 남자는 옷을 입은 채로 좆만 빼서 구멍에 철썩철썩 박아 대고 있는 듯했다.
“아까 질문에 왜 대답 안 하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나 보네.”
“아, 아흑! 아침부터 진짜….”
무슨 질문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대답을 못 했더니 엉덩이를 움켜쥔 손아귀에 무섭게 힘이 들어갔다. 잡아 찢듯 크게 벌려진 볼기짝 사이로 굵디굵은 성기가 거침없이 와서 박혔다. 성기끼리 이어진 곳에서 푹푹 살 박히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소파는 언제 흘렸는지도 모를 정액으로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매일 밤 몸을 섞는 횟수가 더해 갈수록 내가 느끼는 성감 또한 정비례로 커졌다. 이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쾌감을 느끼고 나면 다음번엔 그보다 더 큰 쾌락이 찾아와 나를 놀라게 했다.
“후, 박 실장이 싫으면, 다른 알파를 부를까요?”
이제야 박래현 질문이 생각나서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다가 박래현이 나를 안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헐떡이며 입을 벌렸다.
“흐으, 됐어요. 헉, 허억, 지금도 존나, 힘들어서, 흐윽, 죽을 거 같은데.”
살 박히는 소리가 다급해지면서 상체가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렸다.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엉덩이 살과 허벅지에 심한 경련이 일어 몸 전체가 떨렸다. 달리는 사냥감에게 작살을 꽂듯 박래현은 물컹해진 안에 성기를 내리꽂았고 묵직한 살 기둥이 살 속에 파묻히며 내벽을 자극했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붙들고서 나는 소파 팔걸이에 매달려 불규칙하게 호흡을 내뱉었다.
“으, 으윽…!”
성기를 품은 안은 금방 뜨거워져서 좆이 민감한 곳을 파헤치면 허리 전체가 들썩들썩 요동했다. 소파에 납작 붙은 상체가 흔들리면서 단발 길이가 된 머리칼이 왼쪽 뺨을 덮었다. 갈퀴처럼 벌어져 뒤통수를 누르던 손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귀 뒤로 넘기며 잠시 귓바퀴에 머물렀다.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뺨을 타고 내려간 손이 퍽 부드러워서 나는 상체를 틀어 박래현을 돌아보았다.
아침부터 발정해 나를 침실로 끌어들인 것보다 그가 내 뺨을 만졌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이었다. 재킷까지 갖춰 입은 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눈과 귀 끝에 발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박래현은 격렬한 섹스를 하면서도 절대 땀을 흘리지 않았다. 그래서 상기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그와 계속 시선을 맞추는 게 거북해 상체를 도로 소파에 바짝 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박래현은 내 허벅지 사이로 다리를 넣어 가랑이를 앞뒤로 벌린 다음 거칠게 움직임을 이어 갔다. 치대는 힘에 밀리면서 허리끈이 풀어졌는지 파자마 자락이 자꾸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라 그의 눈에 허리선이며 구멍이 훤히 보일 것 같아 낯가죽이 뜨거워졌다. 밤에 하느냐 아침에 하느냐 차이일 뿐인데 그 미묘한 균열에 괜히 기분이 으스스해졌다. 하지만 수줍음은 순간이었다. 내벽에 파고든 성기는 무작위로 분포된 성감대를 찾아내 비비고 짓이긴 다음 신경을 마비시킬 기세로 안을 쳐올렸다. 박래현은 달아오른 살을 헤집어 그 안에 든 뼈까지 다 만져 볼 심산 같았다.
소파 팔걸이를 잡은 손이 땀에 미끄러져서 나는 눈앞에 보이는 남자의 손목을 다급하게 움켜쥐었다. 그거라도 잡지 않으면 까무러칠 것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안이 뜨겁고 간지럽고 움찔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물렁물렁해진 안에서 잔뜩 곤두선 성기가 미쳐 날뛰며 맥동했다. 점막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성기를 품은 뒤에서는 뜨거운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결합된 곳으로부터 시작한 진동이 발끝과 머리끝까지 번져 몸뚱이가 파들파들 흔들렸다. 뇌를 뒤흔드는 강렬한 쾌감에 사고는 멈췄고 나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감각 안으로 떠밀려 갔다.
“으응, 흐으으, 으읏….”
오르가슴이 극에 달해 거친 숨을 내쉬며 힘줄이 불거진 남자의 손등에 볼을 눌렀다. 결합이 깊어져 까슬까슬한 음모가 엉덩이에 비벼졌다. 재킷이 소파 밑으로 떨어지면서 박래현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내 등을 내리눌렀다. 나는 한 치의 틈도 없이 소파와 박래현 사이에 끼어 버렸다. 얇은 드레스 셔츠 안에 감춰진 탄탄한 근육이 내 등에 밀착되었고 다리 네 개가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매일 몸을 섞어 왔지만 좆을 제외한 다른 부위는 내게 닿지 않았던 까닭에 나를 완전히 덮쳐 누르고 있는 단단한 몸이 낯설면서도 자극적이었다. 더운 숨을 귓바퀴에 뿌리며 박래현은 극성스럽게 내벽을 뒤집어 놓았다.
“흐, 흐윽, 읍! 흐으읏!”
내 안에서 새어 나온 물인지 내 좆에서 흘러나온 정액인지 구별할 수 없는 액체로 소파가 미끈거렸다. 박래현은 움직임을 멈추고 그대로 나를 짓눌렀다. 한껏 팽창한 좆에서 힘줄이 툭툭 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를 누르는 육중한 무게를 느끼면서, 남자가 내뿜는 열기와 향수 냄새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소파에 묻었다. 얼굴이 어찌나 뜨거운지 소파 가죽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것만 같았다.
내가 쾌락에 젖어 깨닫지 못한 사이에도 박래현은 잔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다. 완전히 부풀어 오른 성기가 구멍을 가득 채우며 한 번도 닿지 않은 곳으로 뻗어 나가려 했다. 내가 가 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가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불길하게 펼쳐졌다. 그곳에 발을 들이면 너를 파먹고 있는 이 남자에게 통째로 삼켜질 거라고 본능이 경고했다.
“회사 다녀와서 검사할 테니까,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안에 담고 있어요.”
“허억, 검사요?”
“내가 정확히 9ml를 쌀 테니까, 검사해서 부족하면 1ml당 엉덩이를 한 대씩 맞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농담이겠지만 박래현은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눈앞이 부옇게 번져 갈 무렵 내 안에서 뜨거운 기운이 몰아쳤다. 성기를 둔덕에 마찰하면서 박래현이 여러 번에 거쳐 사정할 때마다 안이 질척하게 젖어 가는 느낌에 몸서리가 쳐졌다. 구멍을 꽉 막은 채로 얼마나 싸질렀는지 살아 있는 정자들이 장기를 타고 역류해 입으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아, 아흑!”
내 안쪽에 완벽하게 자리 잡고서 사정 후에도 내벽을 유영하던 좆이 느릿느릿 밖으로 기어나갔다. 좆이 빠져나간 궤적을 따라 미지근하고 찐득한 액체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허벅지와 엉덩이골에서 메스껍고 불쾌하면서 자극적인 냄새가 퍼져 나갔다.
“주인 말 안 듣고 벌써 흘리네.”
볼깃살로 손바닥이 날아왔다. 엉덩이를 움찔거리면서 나는 소파에 얼굴을 대고 박래현 하반신에 눈을 주었다. 한 번의 사정으론 만족할 수 없다는 듯 불끈거리는 좆은 정체불명의 반투명한 체액으로 뒤덮여 번들번들 빛났다. 표정이 지워진 얼굴로 박래현은 겨드랑이 부근에 뭉쳐 있던 파자마에 좆을 쓱쓱 닦고서 내 몸뚱이에 젖은 파자마를 던졌다. 지퍼를 올리고 훅을 잠그고 넥타이를 정리한 다음 넥타이핀을 바로 잡는 일련의 과정이 능숙하게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떨어진 재킷을 주워 든 남자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장맛비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안이 화끈거리고 진정되지 않아서 그가 나가고도 한참을 엎드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손을 내려 물렁물렁해진 성기를 만져 보았다. 한 손에 쥐기 어려운 성기는 결코 작은 편이 아니었다. 흥분하면 빳빳하게 서고 오르가슴이 찾아올 땐 사정을 한다. 하지만 박래현과 섹스를 시작하면서 뒤를 쑤셔야만 서지, 혼자서는 서지 못하는 반쪽짜리 성기가 되어 버렸다. 베타와 섹스할 때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린 것이다.
그 사실이 슬퍼서 조심성 없이 몸을 일으키는데 나를 놀리는 것처럼 안에서 울컥 정액이 쏟아졌다. 파자마를 벗어 소파와 엉덩이에 뭉친 정액을 대충 닦아 내고 욕실로 향했다. 다리를 벌려 걸을 때마다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허벅지를 적셔 짜증이 났다. 씨발 이러고도 히트 사이클에 임신이 안 되면 박래현은 검사해 볼 필요도 없이 무정자증 확정일 것이다.
샤워 부스에서 엉망이 된 아래를 정리한 뒤 수건을 꺼내 미지근한 물에 빨았다. 쏟아지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다가 박래현 손길이 생각나 잠시 주춤했다. 박래현은 섹스할 때 매번 내 얼굴을 보고 있었던 건가? 그럴 리는 없을 테고 볼 데가 없어 피어싱에 눈길을 주고 있다가 피어싱이 가려져 머리칼을 치운 게 틀림없었다. 머리를 흔들어 이상한 생각을 털어 낸 나는 비틀어 짠 수건을 들고 소파로 갔다. 침대가 아니라 소파에서 관계한 게 다행이었다. 유부남과 붙어먹으면서 정사의 흔적이 남은 시트를 하루에 두 개씩 내놓는 건 민망했다.
그건 그렇고 박래현과 섹스하면서 중요한 뭔가를 놓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어 영 꺼림칙했다. 소파를 벅벅 문지르면서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처음부터 재구성하며 내가 놓친 부분이 있나 살펴보았다. 걸리는 부분을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나는 소파 구석에 끼어 있는 드로어즈를 꺼내 파자마와 함께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옷장 문을 열고 입을 파자마를 고르는데 별안간 이유가 생각났다.
박래현은 조금 전에 페로몬을 전혀 발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조건화된 자극에 발정하고 흥분해서 요란을 떨었다. 아까부터 날 괴롭히던 찝찝함을 해결하고 나자 기가 막혀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러다간 박래현 이름만 들어도 질질 쌀 기세였다. 아이를 낳아 주고 조용히 헤어지길 원하는 내게 그건 절대 바람직한 결론이 아니었다.
박래현은 통제력이 뛰어나서 내게 각인할 일이 없겠지만 나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알파 페로몬에 취약한 몸이 매일 밤 특정한 알파 페로몬에 노출되다 보니 그 향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가 상대에게 각인하는 데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지속적인 육체관계를 통한 유대감 형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육체를 단속할 수는 없으니 마음을 잘 단속해서, 계약이 끝난 뒤에 박래현과 얽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식스팩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복근을 내려다보았다. 임신과 출산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다니 우스웠다. 물론 임신을 하게 되면 나머진 박래현이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부인과 의사인 박은수를 주치의로 정한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속옷과 파자마를 입고 체력 단련실로 갔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운동이 최고라서 나는 러닝 머신의 속도를 빠르게 조절해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번 물꼬를 튼 생각은 몸을 혹사해도 멈출 줄 모르고 이어졌다. 아이가 태어나면 박래현 부부는 아이를 예뻐할까? 사랑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태어난 아이를 그들이 과연 얼마나 아껴 줄지 의문이었다. 그러다가 덜컥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내가 낳은 아이는 찬밥 신세가 될 것이다.
박래현이 스물여덟이면 배우자도 비슷한 나이일 텐데 다른 사람에게서 아이를 보려는 이유가 뭘까. 그의 배우자가 불임 판정을 받지 않은 이상 아이는 여러 방법으로 가질 수 있다. 박래현은 멀쩡한 배우자를 두고 여기서 매일 뭐 하는 짓인지, 그리고 그 개자식과 섹스할 때마다 좋아서 날뛰는 나란 인간은 대체 어디까지 타락할 건지, 생각할수록 답이 없었다.
아이를 가질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바닥만 기기로 해 놓고 먹고살 만해지자 내 사고는 또 나를 갉아먹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 신세를 한탄하며 전신이 땀에 푹 젖을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한참을 뛰다가 러닝 머신에서 내려온 나는 방으로 내려가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엄마의 심장이식 수술이라는 거대한 고비를 넘긴 내 앞에 더 높고 험준한 산이 가로놓였다. 그동안 고의로 아이 생각을 외면했는데 히트 사이클이 다가와서 이제 회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엄마는 나와 해준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했다.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꽤 많은 남자들이 엄마에게 프러포즈했다. 엄마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우리 둘을 키웠다. 엄마가 우리에게 쏟는 무한한 애정을 당연한 거로 여기며 살았는데 내 아이는 낳아 준 아빠에게 사랑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태어날 것이다.
강제로 균형을 유지하던 감정이 비틀어진 단면을 드러내며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폐허가 된 바닥에 말로 할 수 없는 조밀한 감정들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수면으로 튀어 오르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도로 가라앉혔다. 내 사랑을 받지 못하더라도 아이는 재벌 부모를 만나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모로 누워 창밖을 내다보았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유리창 너머 세계는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초록색과 회색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억세게 뻗은 가지에 촘촘히 열매를 매단 산수유나무가 빗줄기를 이기지 못하고 파르르 이파리를 흔들었다. 산수유 아래 심어진 수국은 비를 맞아서 못 본 사이에 더 탐스럽게 꽃을 피웠다. 비 오는 날 풍경이 아름다운 집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감성이 풍부해진 나는 아이가 정원에서 행복하게 뛰노는 모습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
잘게 부서지는 햇살을 손으로 쥐어 보다가 고개만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비가 내리던 정원에 햇볕이 반짝반짝 내리쬐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가 반가워 슬리퍼를 신고 정원으로 나갔다. 비에 젖은 잔디는 초록색 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짙은 색을 띠어 싱그러웠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상추들이 얼마나 컸을지 궁금해 곧장 텃밭으로 달려갔다. 장맛비를 맞은 상추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여느 때보다 이파리가 크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그 옆에는 받침대를 타고 오른 줄기 사이로 오이가 커다랗게 자라고 있었다.
“준영 씨, 여기서 뭐 해요?”
싱싱한 오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이걸 따 먹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내게 정 차장이 말을 걸었다. 박래현이 금지한 일인데도 그녀는 내가 퇴원한 뒤부턴 부쩍 말을 걸며 친절하게 대해 줬다. 오늘도 수박을 갖다 주면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만들어 주겠다고 해서 지나가는 말로 보쌈이 먹고 싶다고 했다.
“오이랑 상추가 잘 자라나 보러 왔어요. 운동만 하는 건 너무 지루해서요. 이거 정 차장님이 키우시는 거 맞죠?”
“그냥 소일거리로 하고 있어요. 땅이 좋아서 뭐든 잘 자라거든요.”
“저한테 말 놓으셔도 돼요. 저 스물셋밖에 안 돼요.”
“그랬다간 이 차장한테 한 소리 들어서 안 돼요. 지금 배 안 고파요? 너무 곤히 잠들어서 일부러 안 깨웠는데.”
“저 학교 다닐 땐 한 끼 거르는 게 일과였어요. 상추 따러 오셨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주인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잘 자란 상추와 오이를 골라 땄다. 약을 하지 않은 상추라서 달팽이 한 마리가 초록색 이파리 위를 유유히 기어 다녔다. 두 개의 더듬이를 쑥 내밀고서 달팽이는 상추를 맛보고 있었다.
“어휴, 빌어먹을 달팽이들! 이것들 때문에 약을 할 수도 없고.”
정 차장은 달팽이 집을 잡아 상추에 붙어 있던 달팽이를 먼 곳으로 집어 던졌다. 저기서 상추밭까지 엉금엉금 기어오려면 달팽이 걸음으로 한참 걸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상추 따는 일에 몰두했다. 싱싱한 이파리에 맺힌 물방울과 흙이 섞여 손끝은 엉망이 되었지만, 생산적인 일을 했다는 보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갖가지 채소로 가득한 바구니를 들고 일어설 무렵에야 허벅지를 다 드러내고 쪼그려 앉아 상추를 땄다는 자각이 들었다. 이런 꼴로 다니는 것마저 무뎌지는 내가 한심했다. 박래현이나 박영범, 정 차장 부부가 헐벗고 다니는 내 모습을 당연하게 여겨 더 조심성이 사라졌다.
이전에 살았던 오메가들도 나처럼 해괴한 모양을 하고 다녔을까? 그들은 왜 만신창이가 돼 여기서 쫓겨났을까. 정 차장이 틈을 보인다고 해서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섣불리 던질 수는 없었다. 나는 정 차장 보폭에 맞춰 집으로 향했다. 오랜 장마 끝에 받는 햇볕이 보송보송해서 기분을 좋게 했다.
“준영 씨, 몸은 괜찮아요?”
“네, 운동을 꾸준히 해서 완전 건강합니다.”
“그거 말고. 요즘 침대보가 계속 세탁 바구니에 들어 있던데, 뭐 좋은 소식 없어요?”
“좋은 소식요? 아, 아직 히트 사이클이 안 지났어요.”
“오메가들은 다른가? 우리 베타들은 배란기 전후로 가임 기간이 꽤 길거든요. 혹시 모르니까 내가 임신 테스트기 사다 줄까요? 준영 씨가 자기 애 가지면, 상무님이 아무리 개차반이어도 준영 씨한테 함부로 못 할 거예요.”
오메가들도 히트 사이클 이틀 전부터 임신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그럴 확률은 매우 낮고 거의 히트 사이클에 맞춰 임신하게 된다. 하지만 임신을 간절히 바라는 나로서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진짜 사다 주실 수 있어요? 이 차장님 아시면 괜히 곤란해지실 거 같은데.”
“걱정하지 말아요. 내일 마트 가서 이 차장 몰래 사다 줄게요.”
“네, 감사합니다. 제가 돈은 나중에 드릴게요.”
“에이, 됐어요. 그냥 내가 사다 줄게요.”
매일 희망이라도 품고 싶어서 정 차장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박래현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교를 해서 아기집으로 향하는 통로는 만들어졌을 터이다. 노팅을 한 적은 없지만 히트 사이클이 앞당겨져서 나도 모르는 새에 임신이 되었기를 절실하게 바랐다.
나는 주방 작업대 위에 채소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전기 레인지에 놓인 찜통에서는 고기 삶는 냄새가 났고 이 차장은 작업대에서 보쌈용 김치를 만들고 있었다. 엄마가 보쌈을 좋아하셔서 엄마 생각이 간절했다. 나중에 이 집을 나가게 되면 엄마랑 맛있는 보쌈을 먹으러 가겠다고 다짐했다.
“이 차장님,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아닙니다. 쉬고 있다가 상무님 오시면 저녁 먹으러 오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이 차장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욕실에 들어가 목욕을 즐겼다. 욕조 끝에 턱을 기대면 정원으로 향하는 커다란 유리문을 통해 바깥 풍경이 보였다. 처음엔 사람들이 볼까 봐 신경 쓰였는데 그쪽으론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서부턴 옷을 벗는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외떨어진 이 집에서조차 나는 혼자 딴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먹고 자고 운동하고 섹스하는 것 빼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 이 집을 나갈 때쯤엔 머리가 텅 비어 사고란 걸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뷔페식 레스토랑은 지금 한창 바쁠 시간이다. 대학가 근처라 주로 내 또래나 직장인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오래 일하다 보니 나를 보러 온 단골들이 생겼다. 종종 앞치마 주머니에 연락처를 적은 쪽지가 들어 있기도 했다. 손님들에게 싹싹하게 대하면서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해 레스토랑 사장과 매니저는 나를 예뻐했다. 돈이 필요할 때면 가불을 해 줬고 매출이 좋은 달엔 몰래 웃돈을 챙겨 주기도 했다. 레스토랑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그들은 엄마 수술이 끝나고 여유가 생기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나를 위로했다. 그러고 보니 늦기 전에 휴학계를 내야 하는데 박래현에게 부탁할 일이 걱정이었다. 어려운 조건에서 졸업장 하나 따겠다고 꿋꿋이 다녔던 학교라 어떻게든 무사히 마치고 싶었다.
욕조에서 더 뭉그적거리다가 박래현이 올 시간에 맞춰 샤워를 끝냈다. 속옷과 파자마를 골라 입은 뒤 머리칼을 말리며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심심하게 간이 된, 건강에 좋은 음식만 먹어서인지 피부에서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은 내가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만큼 근육이 멋지게 자리 잡았다. 여기서 더 신경 써 가꾼다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볼 것이다. 넓게 벌어진 어깨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빗장뼈 부근에서 반짝이는 목걸이에 눈이 닿았다. 이 집을 나가자마자 여기서 생긴 기억과 함께 목걸이와 귀걸이부터 처분해 버릴 것이다.
나는 거실로 나가 두 사람을 기다렸다. 아침에 박래현이 갑작스럽게 변덕을 부린 통에 오늘따라 박래현 얼굴 보기가 껄끄러웠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처럼 외박을 자주 하면 좋을 텐데 남몰래 꿀이라도 숨겨 놓았는지 요새는 꼬박꼬박 집에 들어와서 잤다. 그의 배우자는 박래현을 아예 놓아 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재벌가에 흔하다는 계약 결혼으로 묶여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문 열리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모레 회장님 생신인데 너 정말 본가 안 들어갈 거야? 정치헌도 온다고 너 꼭 데려오라고 하셨어.”
“무슨 얘기 오갈지 뻔히 아는 자리에 내가 왜 가?”
“그러니까 더 가야지,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피하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그래. 그 시간에 보고서 하나를 더 읽겠어.”
“너 안 가면 아버지랑 회장님한테 나만 깨져. 래현아, 가서 얼굴이라도 비치고 오자.”
두 사람의 대화가 잠깐 멈춘 틈을 이용해 나는 둘에게 잘 다녀왔냐는 인사를 했다. 나를 힐끗 쳐다본 박래현은 내 인사를 무시하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냉랭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녁 먹으면서 휴학계 얘기를 넌지시 꺼내 보려던 계획은 물 건너간 듯했다.
“준영 씨, 오늘도 운동 열심히 했어요? 갈수록 몸이 근사해져요.”
“네, 열심히 했어요. 얼른 씻고 나오세요, 오늘 저녁은 보쌈입니다.”
“와아, 보쌈 좋죠. 기다려요, 씻고 올 테니까.”
앞서가던 박래현이 걸음을 멈추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우릴 돌아보았다. 나를 노려보는 서늘한 눈길에 오른쪽 귓바퀴에 곧 구멍이 뚫릴 것을 직감했다. 성기에 뚫겠다고 언급한 적이 있어서 금세 불안해졌다.
“형 말이 일리가 있네. 이번 기회에 정치헌한테 확실히 해야겠어.”
“래현아, 그건 나중에 처리하자, 응? 회장님 생신 땐 가서 축하만 하고 오자고.”
날카로운 눈이 나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그가 폭탄선언을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목울대를 울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본가에 윤준영 씨 데려갈 거니까 형이 준비시켜.”
그는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둘이 나눈 대화 내용을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박래현 부모의 생일을 맞이해 나를 본가로 데려간다는 말은 똑똑히 접수했다. 기가 막혀서 나는 박영범 방까지 따라 들어갔다.
“저를 준비시키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박영범도 화가 난 듯 신경질적인 손길로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재킷을 벗은 뒤 소매 단추를 풀던 손을 멈추고 그가 나를 보았다.
“모레가 우리 회사 회장님 생신입니다. 식구끼리 저녁 먹는다고 래현일 본가로 불렀는데, 그 자리에 준영 씨를 데려간다는 말 같아요.”
“제가 왜 그런 자리에 참석합니까? 절대 싫습니다.”
나는 새파랗게 질려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 집안 행사에 참여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박래현 배우자가 오는 자리에 얼굴을 들이밀 만큼 뻔뻔하진 않았다. 자기 애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데 박래현이 내게 왜 이런 것까지 요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진담 아닐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박 실장님은 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죠? 하지만 박 실장님 말씀대로 된 건 하나도 없잖아요!”
“그렇긴 하네요. 요즘 저 자식이 이상해져서 나도 박래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모르겠습니다.”
“매일 붙어 다니시면서 어떻게 상사 마음을 그렇게 몰라요?”
“요즘엔 나보다 윤준영 씨랑 더 붙어 있을걸요? 붙어 있어 보니까 래현이 마음 알겠습니까?”
“아뇨.”
우스운 상황이 아닌데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박영범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나는 웃음을 멈추고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침에 래현이랑 뭐 했습니까?”
“…다 아시면서 뭘 물어보세요?”
“래현이랑 잘 맞습니까? 섹스할 때 래현이가 다정하게 잘 해 줘요?”
박영범이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몰라서 나는 그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소매 단추를 마저 풀었다.
“뭐 꼭 알고 싶은 건 아니니까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요.”
“…….”
“지금 옷 갈아입을 건데 계속 여기 있을 겁니까?”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와 거실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방음이 잘된 집이라 해도 바로 맞은편 방에서 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신음을 박영범이 못 듣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오메가 페로몬을 풀풀 풍기고 다니니 박영범이 괴로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관찰했다. 짧은 파자마 윗도리 아래로 단단하고 기다란 다리가 쭉 뻗어 있었다. 박래현을 유혹하기 위해 페로몬을 열심히 풀 때 알파인 박영범 역시 영향 받을 수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반나체인 상태로 페로몬을 내뿜으며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둔한 편이기도 했고 이 집에서 박래현 말고 다른 알파 페로몬을 맡아 보지 못해 그쪽으론 신경을 쓰지 않은 탓도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박래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크림색 피케이 티에 짙은 청색 면바지 차림이었다. 자기는 집이든 밖이든 단정하게 차려입으면서 나만 이 꼴로 두는 남자가 미워서 두꺼운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나를 본 체도 안 하고 지나간 남자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되게끔 식탁은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박래현은 내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뒤로 당겨 준 다음 자기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옆에 앉고 나서 박래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금껏 그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순종했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본가에 저 데려가시는 거 재고해 주세요. 제가 왜 거기에 가야 합니까?”
주인님 배우자가 그 자리에 올 텐데,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고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산 모양으로 꺾인 모양 좋은 눈썹이 각을 크게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내 뻣뻣한 태도에 화가 났는지 갈색 눈동자에 금빛 조각들이 잘게 부서지면서 박래현 표정이 험악해졌다.
“내가 윤준영 씨한테 이유를 말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내가 가자고 하면, 군소리 없이 가면 되는 겁니다.”
“식구들 모이는 자리라면서요. 저는 식구가 아니잖아요. 생신이면 좋은 날인데 저 때문에 다 망가질까 봐 그렇습니다.”
“아주 잘 맞혔어요. 그게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엔….”
더 나갔다간 성기에 피어싱이 박힐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보쌈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꺼운 질그릇에 적당한 크기로 썰어져 가지런히 담긴 고기는 그릇 아래 놓인 촛불에 의해 열이 식지 않게 데워지고 있었다.
“요즘 내가 윤준영 씨 너무 풀어 줬죠? 내가 안아 주고 예뻐해 주니까, 슬슬 본성이 기어 나오네요. 자지 몇 번 받아 줬다고 이제 내 위에 올라타도 될 거 같습니까?”
“아니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고가 어떻게 돌아가야 그 행위를 안아 주고 예뻐해 줬다는 표현으로 포장할 수 있는지 진심 궁금했다. 이런 사람이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새삼 사람들 사이에서 완충재 역할을 할 박영범이 가여워졌다.
“오늘 밤에 계약서 다시 숙지하세요. 나중에 나 원망하면서 질질 짜지 말고.”
“네.”
내가 무슨 말로 항의하든 이 남자는 한 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지 않을 테니 신경전을 벌여봤자 나만 손해였다. 부모님 생신이라면 이 남자 배우자도 올 텐데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암담했다. 아까 언뜻 이름을 들었던 거 같은데 배우자 이름이 뭐였더라? 전에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들어본 이름이었다. 나는 물 잔을 만지작거리며 내 기억 어딘가에 스며 있을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형, 정치헌 누구랑 만나는지 알아봤어?’
‘…나 장관 만나고 다니더라. 사진 받아놨는데 보여 줄까?’
대충 저런 내용의 대화가 오간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았다. 부부가 합의하고 쌍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 뒹굴기로 했나? 그래서 이 남자는 집에 안 들어가고 여기 머무는 걸까. 듣기엔 남자 이름 같은데 그가 남자라면 오메가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박래현은 자기 배우자 몸에 털이 없다는 걸 모를 정도로 무관심하단 말인가? 정치헌이란 사람과 박래현 배우자를 동일인물로 보기엔 연결이 매끄럽지 못했다.
“늦어서 미안. 배고픈데 얼른 저녁 먹자. 이 차장님,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
비누 냄새를 풍기며 맞은편 자리에 앉은 박영범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 차장은 물 잔과 와인 잔에 차례로 물과 와인을 따른 다음 와인 병을 식탁에 내려놓고 정 차장과 주방에서 나갔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보쌈김치에 수육을 싸 먹기 시작했다. 배와 무를 버무린 아삭아삭한 김치와 적당히 삶아서 쫄깃한 고기는 환상적인 맛을 냈다.
“준영 씨 정말 본가 데려갈 거냐?”
“내 아이를 낳을 사람인데 그분들도 만나 봐야지. 아직 본가엔 알리지 마.”
“래현아. 그래도 회장님껜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정치헌까지 부른 자리에 너무 무례하잖아.”
정치헌이 박래현 배우자라는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박래현과 몸을 섞었던 수많은 밤이 떠오르면서 눈앞이 노래졌다. 상대는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는다고 여길 텐데 난 박래현을 유혹해 직접 몸을 섞었다. 죄를 짓고는 못 산다고 갑자기 목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서 물 잔으로 손을 뻗었다. 어쩐지 요 며칠 조용히 지나간다고 했더니 태풍의 눈 속이라 그랬던 거였다.
비 오는 날 살아 보겠다고 기를 쓰고 아스팔트 위까지 기어 올라가서 지나가는 트럭에 치이는 지렁이가 된 기분이었다. 차가운 물을 삼키며 나는 휘청거리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지금껏 내가 걱정한다고 해결된 일이 있었던가? 나는 머리를 비운 다음 내게 돈을 주고 계약한 사람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뭔가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생각은 비참함을 확장해서 나를 우울과 절망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나는 볼이 미어지도록 보쌈을 밀어 넣었다. 미각을 만족시켰던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형, 모레 윤준영 씨 숍에 데리고 가서 전체적으로 손보게 해. 매장 매니저한테 연락해서 내 취향에 맞게 옷도 골라 놓으라고 하고.”
“준영 씨 지금도 잘생겼는데 꾸며 놓으면 인물이 훤하겠네.”
“빈말이지만 고맙습니다.”
“빈말 아닙니다. 준영 씨 처음 봤을 때부터 늠름하고 잘생겼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보쌈을 꿀꺽 삼키고서 내 외모를 칭찬하는 박영범을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칭찬을 받았는데 기분 나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사치레로 잘생겼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봤을 박영범에게 듣는 칭찬은 색달랐다.
“박 실장님도 정말 잘 생기셨어요. 여자들에게 인기 많으시죠?”
박래현과 같이 다녀서 눈에 덜 띄는 박영범 역시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이목구비가 잘 조화된 수려한 미남이었다.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던 박래현이 와인 한 잔을 다 마시고 빈 잔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형, 윤준영이 마음에 들어?”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마음에 들면 나중에 한 번 빌려줄게. 이놈 저놈 다 먹어 본 구멍인데, 형이라고 군침만 삼키란 법 있어?”
몰상식하고 상스러운 말에 불을 삼킨 것처럼 속이 뜨거워졌다. 요즘 험한 말을 듣지 않아서 박래현이 나를 걸레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나는 볼을 붉힌 채 박래현 대신 보쌈만 뚫어지게 노려 보았다. 남자는 자기만 보고 있으라는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박영범과 스스럼없이 말을 주고받아서 화가 난 듯했다. 걸레에 남창 취급이나 하는 오메가에게 정조관념이라도 바라는 건가? 남자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 역시 자기랑 몸을 섞은 오메가를 물건 취급하며 다른 알파한테 넘기겠다고 말하는 박래현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마침 준영 씨 페로몬도 마음에 드니까.”
뜻밖의 대답에 고개를 들어 박영범을 응시했다.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서 생각을 읽을 순 없지만 순식간에 배구공이 되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토스 되는 내가 불쌍했다. 두 사람 다 꼴도 보기 싫어서 나는 잡곡밥을 입에 가득 넣고 씹기 시작했다.
“뒤로 미룰 필요 없이 오늘 밤에 하면 되겠네.”
박래현은 말을 끊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응시했다. 시선을 피하면 어떤 보복을 할지 몰라서 불안한 눈으로 박래현을 마주 보았다.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대신 콘돔은 끼고 해. 애는 내 애로 낳아야 하니까.”
“그래도 준영 씨 허락은 받아야지. 준영 씨, 나랑 자도 괜찮겠어요?”
빈 술잔에 와인을 채우는 박래현을 보며 나는 대답 없이 물을 마셨다. 속이 울렁거려서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박래현에게 무조건 복종하겠다는 계약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박래현이 박영범과 자라고 하면 내겐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나는 갑이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하는 을이었다. 생각해 보면 박래현이나 박영범이나 내겐 똑같은 알파였다. 박래현과 애정 없는 성관계를 하고 있는데 상대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겠는가? 내가 박래현에게 그러하듯 자아를 버리고 알파 밑에 깔려 오메가로서 쾌락을 느끼면 그만이었다. 박영범과의 섹스를 거부하면 박래현과의 섹스가 특별하다는 걸 인정하는 꼴인데 그 모순을 박래현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1년간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그저 납작 엎드려 살자고 결심한 나는 침묵을 깨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녁 먹고 방에 들어가 준비하겠습니다. 박 실장님 편한 시간에 들어오세요.”
박래현이 젓가락을 소리 나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는 와인 두 잔을 연거푸 마신 다음 내 손을 움켜쥐고서 나를 거실 소파로 끌고 갔다. 입에 든 음식을 꿀꺽 삼키면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짚어 봤다. 딱히 박래현 신경을 거스른 행동을 한 것 같진 않은데 딱딱하게 굳은 얼굴엔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감정이 일렁거렸다. 굳이 원인이 없어도 이쯤에서 포악을 부릴 때가 된 듯했다. 나와 몸을 섞은 뒤부터 별안간 부드럽게 대해서 이상하다 싶었다.
나를 바닥에 무릎 꿇려 앉히고 일회용 피어싱 도구를 집어 든 박래현이 입에 뚜껑을 문 채 왼손에 도구를 들고 오른손으로 내 귓바퀴를 잡았다. 이어서 살이 뚫리는 극렬한 아픔에 나는 벌벌 떨며 눈을 감았다. 자기 꼴리는 대로 뚫고 박아 대는 게 취미인 미친 개새끼한테 거창한 명분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나는 눈물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귓바퀴에 피어싱을 박은 뒤 입에 물고 있던 뚜껑과 일회용 도구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편한 시간에 들어오세요? 내 앞에서 뻔뻔하게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네요. 알파 자지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환장해서 처먹을 겁니까?”
귓가에 떨어지는 음성이 나긋나긋해서 당사자가 아니라면 박래현이 다정한 밀어를 속삭이는 줄 알 것이다. 박래현 앞에서 내 입은 쓸모없는 도구이기에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심한 말을 듣는 것보다 침묵을 지키는 게 더 나았다.
“물어봤는데 왜 대답이 없어요? 박 실장이 자자는 소리엔 곧바로 대답이 나오더니.”
“저는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 대답했을 뿐입니다. 제 의견 같은 거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당신 방에 박 실장 들여보내 줄까요?”
“…주인님 알아서 하세요.”
“지금, 당신 의견을 묻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다리를 벌리라고 하면 벌리고, 붙이라고 하면 붙이겠습니다.”
눈치껏 박래현 기분을 맞춰 주려고 노력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박래현 얼굴은 처음보다 더 굳어 갔다.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박래현이 아니라 난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박래현이 두려워 나는 주먹을 쥐어서 관절이 하얗게 드러난 박래현 손으로 눈을 내렸다. 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두려움이 커다란 형체를 띠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조만간 주먹이 날아올 것 같아서 어금니를 깨물며 심호흡하고 있는데 박래현이 턱을 잡고는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얼굴에 빗금이 새겨질 정도로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분노가 너울거리는 눈이 내 눈에 가득 들어찰 때까지 나는 그에게 눈을 맞췄다. 남자는 얼굴을 부서뜨릴 것처럼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닳아빠진 남창한테 발정해 정신 못 차리다니, 완전히 돌았지.”
“…….”
“위험을 떠안을 땐 그를 상쇄할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당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지 알 수 없어서 한마디 대꾸 없이 남자를 응시했다. 이 남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기에 더 할 말이 없었다.
“입술은 왜 벌리고 있고, 눈은 왜 이렇게 뜹니까? 당신 머릿속엔 그저 알파를 유혹해서 섹스할 생각밖에 없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늘 무감하던 얼굴에 기묘한 감정들이 범람하는 것을 보며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내 목을 조를 것처럼 살벌한 눈빛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생각이 극단으로 치닫자 소금 알갱이 같은 것이 눈 안에서 굴러다녀 눈이 따끔따끔 아팠다. 눈을 비비고 싶은데 공포로 마비된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계속 눈만 깜빡거렸다. 남자는 조용하게 나를 보다가 한참 지나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영범 형 방에 들어가지 말아요. 알겠습니까?”
“네.”
“다른 알파 앞에서 꼬리 치는 것도 안 됩니다.”
“…….”
“방에 들어가서 옷 벗고 준비하고 있어요.”
격앙된 목소리에서 평소의 톤으로 돌아온 박래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꺼냈다. 나는 방으로 비척비척 걸어 들어갔다. 있는 대로 정기가 빨려서 박래현을 욕하고자 하는 욕구마저 자취를 감췄다. 솔직히 일관성 없는 박래현 말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박영범에게 나를 빌려주겠다고 한 건 자기면서 그러겠다고 한 내게 왜 화를 낸단 말인가. 거기서 내가 싫다고 했으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화낼 인간이었다. 그는 내게 발정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귀에 구멍을 뚫을 적당한 꼬투리를 고르고 있던 거였다. 박영범이 아니었어도 다른 핑곗거리를 찾아내 귀를 뚫고 말았을 것이다.
씨발, 개 호로 새끼. 욕실로 가서 이를 벅벅 닦으며 귓구멍에 소독약을 들이부었다. 상처에서 부글부글 작은 거품이 생겼다. 귓바퀴에 옹기종기 모인 보석들은 내 마음에서부터 자라난 분노와 슬픔의 결정체였다. 이 집을 나가자마자 남김없이 팔아 치운 뒤 그 돈으로 흥청망청 먹고 놀면서 박래현과 관련된 일들을 죄다 털어 버릴 것이다. 세수까지 해서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침실로 나갔다. 드로어즈를 벗고 침대로 올라간 나는 오른쪽 뺨을 매트리스에 대고 엉덩이를 위로 향하게 했다.
등허리로 흘러내리는 파자마 자락을 잡아 엉덩이를 가리려 했으나 성과가 없어 몇 번 시도하다 그만두고 가만히 밖을 내다보았다. 햇빛 아래서 파랗던 산수유 열매가 외등을 반사해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가을이 되면 열매가 빨간색으로 변해 멀리서 보면 꽃보다 더 예쁘다고 정 차장이 말했다. 그때까지 내가 미치지 않고 계약을 유지한 채로 이 집에 머물 수 있을까. 답은 박래현만 알고 있을 것이다. 문 열리는 소리에 이어 무겁게 깔린 침묵을 가르고 낮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
박래현과 섹스를 하면 아침에 그와 얼굴을 마주 보며 식사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나는 한참 전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일어날 기력이 없어 계속 누워 있었다. 박래현이 심하게 박아 댄 통에 조금만 움직여도 허리 아래에 저릿한 전류가 흘렀다. 내친김에 잠이나 더 자려고 눈을 감았더니 붉은 눈꺼풀 위로 어젯밤 일어났던 일들이 차례로 지나갔다.
조용히 다가온 박래현은 허리를 잡아서 나를 침대 가장자리까지 끌어당겼다. 침대 끝에 겨우 무릎을 걸친 나는 굴러떨어지지 않게 시트를 움켜쥐었다. 커다란 손아귀에 잡혀 넓적다리가 벌려진 뒤 주름 위로 젤이 떨어졌다. 주름을 따라 흐르는 서늘한 감촉에 엉덩이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박래현은 덩어리진 젤을 손가락과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여러 번 문지르고서 곧장 성기를 욱여넣었다. 서로 맞닿아 있던 살이 거침없고 흉포한 성기에 길을 내주며 활짝 벌어졌다. 허전한 곳을 채워 가는 이물질의 침입은 늘 살 떨리게 좋으면서도 묘한 거부감을 주었다.
박래현에게 길든 몸은 커다란 손이 허리를 짚은 찰나 이미 불타올랐다. 탄력 있는 주름은 막무가내로 파고드는 성기를 받아들여 한계까지 벌어지고 박래현은 핏줄이 흉흉하게 일어선 살진 기둥을 점막에 비벼 댔다. 그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굽이진 내장에 성기를 쳐올렸다. 안을 빠듯하게 채운 좆 기둥이 흥분으로 녹진해진 내벽을 쿵쿵 짓찧으면 아찔아찔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돌리면서 구멍을 조였다 풀어 가며 강약을 조절했다. 성기가 가장 깊은 곳에 처박힐 때면 기둥을 뽑을 것처럼 안과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가 밖으로 빠져나갈 때면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나중엔 절대 끝낼 의사가 없는 박래현 좆을 피해 침대 위를 기어 다녀서 새벽까지 길게 이어지던 정사가 언제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쾌락에 파묻혀 몇 번이나 오르가슴을 느끼다가 남자에게 박혀 흔들린 채로 잠들어 버렸나 보다.
나는 둔통이 느껴지는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주름진 점막 사이에 고여 있던 정액이 흘러나와 정사의 흔적으로 엉망이 된 시트를 흥건하게 적셨다. 나는 이불 사이에 처박힌 드로어즈를 찾아 두 다리에 꿰고 엉덩이를 들어 올려 속옷을 입은 다음 침대에서 내려와 테라스로 향하는 창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했다. 비를 머금어 눅눅하고 끈적해진 공기가 차가운 바람을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왔다. 흐트러진 침대는 씻고 나와서 정리하기로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이 차기를 기다리는 동안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 화면을 켰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하게 남아서 화면이 켜지길 기다리며 고민에 잠겼다. 박래현 방에 들어갈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하고 박영범 방에 충전기가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책상 위에서 충전기 비슷한 것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메시지를 눌러 정우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준영아,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지셨어. 계속 너만 찾는데 어떡하지?」
너무 놀라서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펄럭이는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 욕실 안을 서성이다가 결국 정우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자마자 정우가 전화를 받았다.
“정우야, 나 배터리가 없어. 용건만 간단히 말해. 엄마 어디가 어떻게 안 좋아?”
- 의사 선생님 말씀으론 약물 부작용과 무력감이 원인이래. 면역 억제제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감정 조절을 어렵게 한대. 환자들이 쉽게 예민해지고 우울해지는데, 어머니는 너까지 없어서 우울증이 심해지셨나 봐. 약물 부작용도 좀 심한 편이시고.
“…….”
- 환자가 나으려는 의지가 없어서 상황이 더 안 좋대.
“하, 씨발. 돌겠네. 정우야, 그럼 어떡하냐? 네가 옆에서 말 좀 잘 해 봐, 나 잘 있다고.”
- 간병인과 의사 선생님들이 옆에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는데, 효과가 없어.
“알았어. 길게 통화 못 하니까 일단 끊자. 정우야, 미안해. 내일 문자 확인하고 내가 전화할게.”
- 야, 넌 잘 지내고 있냐? 임신은 어떻게 됐어?
핸드폰 화면이 검게 변하면서 꺼지는 바람에 통화가 끊겼다. 나는 핸드폰을 밀폐 용기에 넣으려다가 고민에 빠졌다. 화요일은 청소가 없는 날이라 핸드폰을 충전하려면 오늘이 좋았다. 정 차장이 빨랫감을 거둬 가고 나면 내 방에 들어올 일이 없으므로 그때 몰래 충전하면 될 것이다. 고민하는 사이 물은 욕조를 가득 채우고 밖으로 넘쳐흘렀다. 나는 핸드폰을 세면대에 내려놓고 기계적으로 욕조 안에 들어가 몸을 담갔다.
의사와 코디네이터는 수술하기 전부터 우리에게 수술 후 부작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인지시켰다. 가장 큰 문제는 이식 후 거부반응과 약물 부작용이었다. 수술이 끝나면 억제제를 대량 투여해야 하는데 엄마는 세포성 거부반응이 생겨 더 많은 억제제를 투여해야 했고 그 때문에 약물 부작용이 심해진 듯했다. 수술은 수술받기 전보다 긴 삶으로 가는 과정이지 끝이 아니었다. 끔찍한 고통을 견뎌 내고 있는 엄마가 가여워서 가슴이 갈기갈기 찢겼다.
당장 여길 박차고 나가서 엄마에게 달려갈 생각에 나는 샤워 부스로 가서 미끈거리는 몸을 씻어 내렸다. 수술은 끝났고 수술 비용도 냈으니 박래현이 돈을 토해 내라고 하면 배 째라고 뻔뻔하게 대응할 것이다. 학교도 때려치우고 취직해서 매달 돈을 갚아 나가겠다고 하면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박래현은 내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낳아 줄 오메가를 쉬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물탱크에 숨기고서 욕실을 나와 전에 병원에서 입고 왔던 옷을 꺼내 입었다. 서랍에 넣어 두었던 돈을 다 쓸어 주머니에 넣고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았다. 발갛게 짓무른 눈가와 상기된 볼에 코끝마저 빨개서 거울에 비친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해 보였다. 현실을 깨닫고 사라졌던 이성을 되찾는 데는 몇 가지 질문만으로 충분했다.
지금 엄마를 찾아가고 나서 그다음은 어떡할 거지? 엄마 병원비와 약값은? 당장 살 곳은 있어? 생활비야 아르바이트로 충당한다 쳐도 엄마가 지금 병원에서 받는 치료나 보호는 다 포기해야 한다. 엄마는 퇴원한 다음 적어도 6개월은 요양 병원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셔야 한다. 내가 여길 나간 순간 박래현은 내 통장에서 돈을 다 뺏어갈 테고 엄마와 난 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다. 그것도 박래현이 최대한 관용을 베풀 때 가능한 일이다. 박래현이 마음만 먹으면 그는 사기죄로 나를 감방에 처넣을 수 있다.
기세가 꺾여서 나는 옷을 벗어 도로 옷장에 개켜 넣고 파자마 가운을 꺼내 입었다. 증상이 안 좋아졌다가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추이를 지켜보고 행동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나는 세탁 바구니가 빈 것을 확인하고서 도로 핸드폰을 꺼내 왔다. 그사이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를 보니 지저분했던 침대가 떠올라 얼굴로 열이 몰렸다. 내 사생활이 속속들이 까발려지는 모습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나는 베개 밑에 핸드폰을 감추고 주방으로 갔다. 이 차장은 보이지 않고 정 차장이 식사를 차려 주었다. 만들어진 반찬에 밥만 퍼서 먹으면 되는데 먹을 때마다 상을 차려 주는 그녀에게 미안했다.
“준영 씨, 내가 옷장 서랍 맨 위 칸에 테스트기 넣어 뒀어요. 결과 나오면 나한테 꼭 알려 줘야 해요.”
밥을 뜨다 말고 나는 물컵에 물을 따르는 정 차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게 다정한 눈빛을 보내며 방긋 웃었다.
“지금 당장 말고 둘이 잔 날에서 십 일정도 지나서 해 봐야 해요. 그래야 결과가 정확하게 나온대.”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요?”
“아니요, 별일 없어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이 차장이 들어와 그녀에게 눈치를 주는 통에 대화가 중단되었다. 정 차장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 차장을 주방에서 데리고 나갔다.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쌓여서 왕성하던 식욕이 사라졌다. 현미와 보리가 모래알처럼 입 안을 굴러다녔고,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들도 입맛을 돋우는 데 실패했다. 힘없는 손으로 밥알을 끼적대다가 수저를 놓고 주방을 나왔다.
나는 박영범 방문 앞에 서서 혹시 CCTV 같은 게 있는지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 콘센트에 꽂혀 있는 충전기를 뽑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방으로 달아났다. 누가 올까 봐 드레스 룸 안쪽에 숨겨 놓고 충전을 하면서도 불안에 떨며 방 안을 어슬렁거렸다. 핸드폰을 없애기엔 아무래도 시기상조인 듯했다. 엄마가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에 핸드폰을 없앴다가는 엄마 상황이 궁금해서 집을 뛰쳐나가고 말 것이다.
핸드폰이 충전되는 동안 나는 인터넷을 켜서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검색했다. 대략 짐작한 대로 병원 재단 설립자가 JS 제약의 이전 오너였고 지금 이사장은 박래현 모친인 현 JS 제약 대표이사였다. 박래현이 엄마 정보를 나보다 더 자세히 알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박래현은 병원에 입원한 환자 정보를 살펴보다가 우연히 나를 발견한 걸까? 약점이 많아서 정신적, 육체적 학대에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오메가를 찾고 있었다면 내가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충전기와 핸드폰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날카로운 바늘이 숨구멍을 하나씩 찌르는 것 같아서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머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구멍도 아프고, 새벽까지 기어 다니느라 무릎도 아팠다. 멀쩡한 곳은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느리게 뛰는 심장마저 쓰리고 아파서 깊게 잠들어 모든 걸 잊고 싶었다.
***
나뭇잎에 뚝뚝 비 듣는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듯 몸이 무겁고 시야가 흐릿했다. 양 볼이 뜨끈뜨끈하고 몸에 땀이 나서 손을 들어 목덜미를 만져 보았다. 몸과 마음이 극한에 이르러 더는 버티지 못하고 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몇 시지? 시계가 없는데 비까지 와서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이 퇴근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마침 퇴근하고 들어오던 박영범이 내 몰골을 보고 기겁을 하며 이마로 손을 뻗었다.
“준영 씨, 어디 아파요?”
“아, 괜찮아요. 열이 좀 나는데 오늘 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내가 내세울 만한 유일한 자산이 건강하고 튼튼한 몸뚱이다. 무리하면 감기 기운이 돌다가도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면 금세 회복하곤 했기 때문에 별걱정은 하지 않았다. 박래현은 미간에 힘을 주며 박영범의 손목을 잡아서 손을 떼어 냈다.
“형, 요즘 내 말 한 귀로 흘려듣는다?”
“야, 준영 씨 이마가 뜨거워. 한번 만져 봐.”
박래현을 따라 걷던 나는 그가 멈춰 서자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갈색 눈이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눈두덩 부근에서 멈췄다. 엄마 소식을 들은 후 울다가 잠들어서 눈이 퉁퉁 부었을 것이다.
“너 밤에 너무 심하게 구는 거 아냐? 아무리 좋아도 적당히 좀 해.”
“그러게. 나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내가 남창 뒤나 쑤시면서 시간을 낭비하다니.”
“준영 씨가 마음에 든 거 아냐? 도도한 박래현을 함락시킨 첫 정복자니까.”
커다란 손이 다가와 아직도 멍이 남은 목덜미를 쥐었다. 열을 재 보려고 한 행동에 반사적으로 물러서는 날 보며 박래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형, 개 듣는 데서 그따위 소리 하지 마. 아둔하게 말귀 못 알아듣고 설레면 곤란해져.”
농담이겠지만 박래현이 저런 생각을 한다는 게 충격이었다. 박래현이 내게 쏟아부은 폭언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박래현에게 설레겠는가. 그에게 정신적으로 학대당해 제정신이 아닐 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기가 막혀서 속으로 절규하고 있는 내게 서류 가방을 툭 던지고 박래현은 2층으로 올라갔다. 박래현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박영범이 나를 소파에 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준영 씨, 어젠 미안했어요. 래현이가 어떻게 나오나 궁금해서 장단을 맞춰 줬는데 준영 씨만 힘들게 했네요.”
“아니요, 특별히 힘들지 않았어요. 늘 듣는 말인데요, 뭘.”
나는 서류 가방을 탁자에 내려놓고 박래현이 했던 말을 곰곰 되씹었다. 생각할수록 열 받은 나머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남창이란 욕은 매번 들어 별 감흥이 없지만 내가 저한테 설렐 거란 말은 대체 뭘 근거로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섹스할 때 열심히 궁둥이를 흔들어 주니까 마음도 흔들린다고 착각한 걸까? 아니면 내가 깨닫지 못한 어떤 변화를 박래현이 감지해서 경고한 걸까. 그가 허투루 한 말이 아닌 것 같아서 불안함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몸과 기분이 다 안 좋은 상태로 두 사람과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려니 도저히 밥을 넘길 수 없었다.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차가운 냉수만 계속 들이켜다가 먼저 숟가락을 놓고서 두 사람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거실로 자리를 옮겨 박래현 발치에 얌전히 앉았다. 박래현은 느긋한 자세로 논문 비슷한 것을 읽었고 박영범은 핸드폰을 들고 뭔가를 확인했다.
“래현아, 시비티랑 그린스 측에서 답변 왔는데 그린스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본대. 시비티 측 마케팅 이사는 너한테 직접 프레젠테이션 받고 싶다는데, 어떡할까?”
“뭘 어떡해, 성사시켜. 이번 기회에 다른 제품들도 세계 시장에 선보여야지.”
“릴리프랑 누시티 말고 다른 제품으로 드럭 스토어 뚫을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너 하마터면 재능 썩힐 뻔했다.”
“릴리프 옆에 우리 제품을 배치해 두면 자연스럽게 노출돼서 판매가 늘 거야. 요나스가 그 전략을 써서 성공한 케이스잖아.”
두 사람은 이후 같은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대충 들어보니까 미국 드럭 스토어에 릴리프 외에 다른 제품을 입점시킬 계획인 듯했다.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라 내 머릿속은 어느덧 엄마 걱정으로 분주해졌지만 내일 이 사람들이 출근하고 나서야 엄마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니 궁금해도 참아야 했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볼에 닿는 이상한 감촉을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박래현이 나를 내려다보며 손등으로 내 뺨을 누르고 있었다.
“힘들면 방에 들어가 있어요.”
오늘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내색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박래현은 시시껄렁한 내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감기에 걸리든 아파서 앓아눕든 자기 욕구만 채우면 그만일 것이다. 더구나 섹스는 처음부터 내가 주도적으로 시작한 일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침대로 올라간 나는 속옷을 벗고 뺨을 시트에 묻은 자세로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어제처럼 했다간 몸져누워 내일 박래현 본가에 갈 수 없을 것이다. 돌연 그러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이어 박래현이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엉덩이를 띄운 채 박래현을 기다렸다. 박래현은 다가와서 내 어깨를 잡아 나를 가볍게 뒤집었다. 크게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박래현과 마주 보는 민망한 자세가 되었다. 서로 얼굴 보며 섹스한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무슨 변덕이 일어 이러는 걸까. 나는 불만을 가득 담아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박래현은 이불로 훤히 드러난 하반신을 덮어 주고서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내 왼팔을 잡았다.
“영양제랑 해열제 놓을 테니까 얌전히 있어요.”
험한 일이라곤 안 해 봤을 것 같은 길고 곧은 손가락이 혈관을 찾아 능숙하게 바늘을 꽂았다. 따끔한 감각이 지나간 뒤에 박래현은 영양제가 든 팩을 튜브에 연결했다. 그가 끌고 들어온 거치대엔 노란색 수액과 물 같은 수액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내 몸이 너무 뜨거워서 이걸 매달고 섹스를 하겠다는 건가? 생각 없이 움직였다간 팔이 아플 것 같아서 기절한 척하는 게 더 나을지 고민했다. 그랬다간 당장 귀에 구멍이 뚫릴 거란 예감에 나는 불안한 눈으로 튜브가 꽂힌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좀 살살 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윤준영 씨 대단하네요.”
“뭐가요?”
“섹스가 그렇게 좋아요? 오늘은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줄을 주렁주렁 매달고 박히는 모습도 나름대로 볼만하겠네요.”
“그게 아니라….”
링거 줄을 끈으로 묶어 정리한 다음 박래현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호흡이 섞일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남자의 눈이 내 눈가에 머물렀다.
“눈은 왜 부었어요? 울었습니까?”
“네.”
“어제 힘들었어요? 평소랑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 같은데.”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 꿈에 엄마가 나타났거든요. 온종일 엄마 생각만 했습니다.”
남자의 말투가 좀 부드러워진 탓에 나도 모르게 약한 모습을 보여 버렸다. 엄마가 걱정돼서 말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엄마를 만나지 못해서 괴로운 내 심정을 이 남자가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했다.
“그래서 어머니를 만나게 해 달라는 소립니까?”
“아니요. 보고 싶다고 했지 만나게 해 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왜 힘들었는지 물어보셔서 대답한 것뿐입니다. 주인님께 아량을 바랄 만큼 어리석진 않아요.”
남자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원래 기분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얼굴만 보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추궁당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뭐든 잘 참아요?”
“때에 따라서요.”
“내일은 아침부터 바쁠 겁니다. 얼굴 부으면 안 되니까 울지 말고, 편하게 자요.”
박래현은 거치대를 끌어당겨 침대 옆에 두고 방을 나갔다. 그가 섹스를 요구하지 않아서 마음이 놓이는 한편 내일부터 바쁘단 말에 한숨이 나왔다. 본가로 데려간다는 게 나를 괴롭히려고 괜히 던져 본 말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본가로 데려가 자기 부모 생일을 망칠 작정이었다. 배우자가 오는 자리에 나를 데려가서 뭘 어쩌겠다는 심산인지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자포자기에 빠졌다. 박래현 개니까 박래현을 따라가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분위기에 맞춰 꼬리 몇 번 흔들어 주다가 집으로 오면 끝날 일이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말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어색한 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왼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나는 팔뚝에 꽂힌 튜브를 보았다. 의사나 간호사가 아닌데 바늘을 꽂는 손길이 여유롭고 능숙했었다. 밑구멍을 파거나 귀를 뚫을 때도 시원시원하게 단번에 뚫는 걸 보면 어디든 뚫고 꽂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간이었다. 왼쪽 팔뚝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고 나는 오른팔로 베개를 끌어안았다. 영양제에 잠이 오는 성분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빗소리에 취했는지 오후 내 잤는데도 졸음이 찾아왔다.
***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었던 나는 이마를 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가벼워진 눈꺼풀을 꿈틀거렸다.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손은 내가 번쩍 눈을 뜸과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연두색 파릇한 숨이 좁은 거리를 비집고 들어와 내면의 어떤 감각을 일깨웠다. 붉은 속살의 한 지점을 긁는 간지러운 느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침 먹고 바로 움직일 겁니다. 가서 씻으면 되니까 샤워할 필요는 없어요.”
“일찍부터 어딜 갈 건데요?”
“가 보면 압니다. 옷은 콘솔 위에 두었으니까 갈아입고 바로 주방으로 와요.”
정장을 입고 벌써 출근 준비를 마친 박래현이 제 할 말만 하고 방을 나갔다. 튜브가 꽂혀 있던 팔뚝엔 캐릭터가 그려진 둥근 밴드가 붙어 있었고 열은 내려서 언제 아팠냐는 듯 몸이 멀쩡해졌다. 열이 더 올랐다면 그 핑계를 대고 침대에 누워 있을 텐데 건강한 내 몸이 이때만큼은 불만스러웠다.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던 나는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서 바닥으로 다리를 내렸다. 하필 발끝에 어제 벗어 던진 속옷이 걸렸다. 허리를 숙이기 귀찮아 오른발로 속옷을 차올려 손으로 잡아챘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간다는 소리일까? 박래현 의도를 추측하며 나는 새 속옷에 그가 갖다 놓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짙은 파랑과 노랑, 청회색이 뒤섞인 셔츠는 주머니에만 사선으로 체크무늬가 들어가서 눈에 띄었다. 거기에 검은색 슬랙스를 받쳐 입고 삐죽삐죽 솟은 머리칼을 정리했다. 거울에 비친 나는 화려한 셔츠를 입은 데다가 귀걸이와 목걸이를 줄줄이 달고 있어서 절대 얌전한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딘가 엇박자로 어긋난 화려함이 박래현 취향인 듯했다.
나는 주방으로 가 아침 식사를 하면서 박영범에게 오늘 일정을 들었다. 오전 여덟 시 반부터 두 시까지 스파에서 전신 마사지와 피부 관리를 받고 그 이후로 머리를 손질한 뒤 백화점에 갈 거라고 했다.
결혼할 새신랑도 아닌데 왜 피부 관리와 전신 마사지를 받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집에서만 뒹굴뒹굴하는 것보단 나은 일이어서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에 온 지 4주째 되어 가니 근 한 달 만에 바깥세상에 나가는 셈이었다.
한 달이라니! 느낌상 6개월은 훌쩍 지난 것 같은데 이제 겨우 한 달이라니! 내가 계산해 놓고도 믿을 수 없는 수치였다.
식사를 마치고 곧장 박래현을 따라 주차장으로 갔다. 맨발에 큰 운동화를 신어서 신발이 자꾸 벗어지려고 했다. 그게 이상했는지 자꾸 내 발을 내려다보던 박래현이 차 앞에 멈춰서 내가 탈 수 있게 차 뒷문을 열고 나를 따라 뒷좌석에 올라탔다.
“윤준영 씨는 발이 아직도 자라고 있어요?”
박영범이 다른 차에 올라타는 걸 보니 박래현이 직접 스파까지 데려다줄 생각인 듯했다. 박래현이 목적지를 말하자 차는 바로 출발했다.
“아니요. 신발이 꽉 끼면 불편해서 제 치수보다 큰 걸 신습니다.”
“치수 큰 게 더 불편하지 않습니까? 자꾸 벗어지려고 하는데.”
“양말이 없어서 안 신었더니 그래요.”
나는 박래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들이 차 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박영범 차가 먼저 출발했고 날 감시할 목적으로 경호원들을 붙였는지 우리 차 뒤로 검은 세단이 한 대 따라붙었다. 차가 도로로 진입하면서 나는 옆을 지나가는 차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박래현 집에서 무사히 나올 수 있을지 걱정했던 게 엊그젠데 지금 멀쩡하게 돌아가는 바깥세상을 보고 있자니 아직 잠에서 덜 깨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추자 차 문을 열고 엄마에게 달려가는 상상을 했다. 며칠 전 아픈 엄마를 지척에 두고 되돌아섰을 때 나를 관통했던 괴로움이 잊히지 않았다. 요즘 내게 좀 유해진 것 같은데 박래현에게 한번 사정해 볼까, 고민하는 사이에 차는 커다란 건물 입구에 정차했다. 박래현이 먼저 내려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차에서 내리자 앞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 뒤에서 경호원 두 명이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건물은 로비부터 이국적인 나무와 꽃 냄새로 가득했다. 열대 우림에 들어선 것처럼 네모난 기둥은 파란 담쟁이덩굴과 이끼로 뒤덮여 있었고 꽃잎이 넓은 화려한 꽃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로비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로 보이는 여자가 박래현을 발견하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대표님,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관리받으실 분 성함이 윤준영 씨라고 했죠? 이분이신가요?”
“네.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이분이 주인공입니다.”
“주인공답게 눈에 확 띄게 하겠습니다. 지금도 멋지신데, 관리받고 나면 얼굴에서 광이 번쩍번쩍 날 거예요. 예약하신 드리즐 스위트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은은한 향이 떠도는 복도를 따라 걷다가 매니저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갔다. 욕조와 침대, 베드 소파로 꾸며진 널따란 안은 최소한의 조명만 켜 둔 상태라 어둡고 안락했다. 분위기에 맞게 배치된 아로마 향과 잔잔한 음악에 벌써 마음이 차분해졌다.
“윤준영 씬 저쪽으로 가셔서 씻고 가운으로 갈아입으세요. 오신 김에 대표님도 가볍게 마사지 받으시는 게 어떻겠어요? 전엔 수현 씨랑 자주 오시더니 요즘 통 안 오셨잖아요.”
수현이란 이름에 문득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내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싱숭생숭해져서 매니저가 알려 준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박래현을 돌아보았다. 나를 보고 있던 박래현 눈이 날 찌르기 위해 날아든 독수리 부리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서 문틈에 귀를 갖다 댔다. 박래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내 동생 얘긴 듣고 싶지 않습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요즘 본사로 발령 나서 좀 바빴습니다. 윤준영 씨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또 데리고 오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차 내오라고 했으니까 차 한잔 드시고 가세요.”
“지금 가 봐야 합니다. 차는 윤준영 씨만 주세요.”
이후로 박래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샤워를 마친 뒤 속옷을 입고 그 위에 가운을 걸쳤다. 밖엔 아무도 없고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생강차와 하트 모양으로 찍어 낸 떡이 준비되어 있었다.
생강차를 반쯤 비울 무렵 매니저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을 데리고 들어와 그를 소개했다. 테라피스트의 이름은 아난다이고 태국에서 왔으며 한국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매니저는 박래현이 주문한 서비스와 서비스에 사용되는 재료를 자세하게 소개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라 귀에 쏙쏙 박혀 들지 않았다. 총 다섯 시간이 걸리고 중간에 차와 점심이 제공된다는 말을 전한 후 매니저는 아난다에게 나를 맡기고 방을 나갔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나를 베드 소파에 앉힌 아난다는 장미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대야에 내 발을 넣고 커다란 허브 주머니로 발을 마사지했다. 박래현이 내 페로몬 향을 기억해서 일부러 레몬 향을 고르진 않았을 텐데 따뜻한 물에서 내 페로몬 냄새와 비슷한 향이 나 마음이 편해졌다.
“아프진 않으세요?”
“네, 적당하고 좋아요.”
발바닥을 지압하며 문지르는 손길이 능숙해서 금방 피로가 풀렸다. 발 마사지를 끝내고 그는 내게 가운을 벗고 침대에 엎드리라고 했다. 아난다에게 가운을 건네고서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둥글게 구멍이 뚫린 곳에 얼굴을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머리맡에서 기분 좋은 향이 번져 나갔다. 테라피스트는 가벼운 천으로 내 엉덩이를 덮은 뒤 어깨와 등에 오일을 바르고 손가락과 손바닥, 팔꿈치를 이용해 마사지를 시작했다. 박래현에게 시달려 피로가 쌓였던 몸이 전문가의 손길에 나른하게 풀어졌다.
“손님, 이렇게 매끄러운 피부와 멋진 몸매를 지니셔서 애인 분이 정말 기쁘시겠어요.”
아난다는 연신 내 피부에 감탄의 말을 쏟아 내며 힘차고 나긋나긋한 손길로 뭉치고 아픈 곳을 시원하게 치료해 갔다.
“우리가 애인처럼 보여요?”
“드리즐 패키지 서비스는 저희 스파에서 최고입니다. 애인이 아니면 이렇게 공들이실 이유가 없잖아요. 게다가 그분은 손님이 쓸 오일과 방에 피울 아로마 향, 마사지 종류도 다 정해 주셨습니다. 보통은 그 정도로 섬세하게 신경 써 주지 않거든요.”
박래현은 돈이 많은 남자라 따지지 않고 가장 비싼 코스를 골랐을 것이다. 재료를 일일이 지정한 건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쥐이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나를 증오하고 싫어하는 남자가 나를 배려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박래현에게 동생이 있었던가? 동생 얘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 난 당연히 그가 외동일 것으로 생각했다. 궁금한 점이 생겨도 물어볼 위치가 아니어서 난 남자에 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았다. 그저 심심풀이로 혼자 추론해가며 남자를 파악할 뿐이었다.
동생 이름이 박수현이라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박수현이 떠올라 쓴웃음이 났다. 박래현이라면 모를까 박수현은 꽤 흔한 이름이라서 두 사람이 동일인일 리는 없을 것이다.
“등은 다 마쳤습니다. 이제 다른 곳 마사지 들어갑니다.”
아난다는 등 마사지를 끝내고 팔과 손, 다리로 마사지 범위를 넓혔다. 뜨겁게 열이 오른 테라피스트의 손끝을 통해 따스한 기가 몸으로 흘러 들어왔다. 나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박수현 얼굴을 찾아냈다.
“손님, 반듯하게 돌아누우세요. 이제 가슴과 복부 쪽 하겠습니다.”
내가 반듯하게 눕자 테라피스트는 수건으로 하반신을 가린 뒤 목덜미부터 지압을 시작했다. 축적된 피로가 녹아내리고 졸음이 찾아왔다. 현실과 수면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나는 박수현을 생각했다.
늦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뒤늦게 오메가로 발현한 내게도 어김없이 첫 히트 사이클이 찾아왔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려 밥 먹은 게 체한 줄 알았다. 회계학 수업을 듣던 도중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만 챙겨 화장실로 뛰어갔다. 열이 오르고 살갗이 타는 것처럼 예민해졌다. 다리가 여러 개 달린 애벌레들이 살갗 밑을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에 시달리면서 민감해진 후각으로 짙은 레몬 향을 맡았다.
나는 화장실 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안에 든 것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더는 나올 것이 없어 맑은 물까지 다 토해 낸 다음 물을 내리고 세면대로 가서 입을 헹궜다.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자신의 페로몬 향은 시트러스 계열이라고 했던 해준의 말이 생각났다. 히트 사이클 전조 증상임을 깨달은 순간 무서운 속도로 열이 올랐다. 식은땀이 흐르고 어지러우면서 화산을 품은 듯 아랫배 부근이 끓어올랐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정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몸이 후들거려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던 나는 한 손으로 세면대를 짚고서 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는지 그 새끼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서 강의실로 돌아가 지갑을 챙겨서 병원으로 가야 했지만 눈앞이 흐려지고 머릿속은 점점 비어 갔다.
‘선배, 괜찮아요? 어디 안 좋아요?’
누군가 내 팔을 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누구인지 확인할 기력도 없어서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속이, 속이 안 좋아요.’
‘말 놓으세요. 저는 같은 과 후배 박수현입니다. 옆자리에 있었는데 선배가 많이 안 좋아 보여서 따라 나왔어요.’
예의 바르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한 학년에 이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는 데다 나는 이번 학기에 복학해서 이름을 들어도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단정해 보이는 얼굴에 웃음을 띤 채 나직하게 물었다.
‘선배 혹시 히트 사이클입니까? 억제제 없어요?’
‘응, 지금 히트 사이클이 처음이라서….’
내 향을 맡은 걸 보니 박수현은 알파인 듯했다. 그가 알파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선배, 힘들면 저한테 기대요.’
‘아냐, 됐어.’
박수현이 내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긴 찰나에 남자의 하얀 목이 눈에 들어오면서 끓어오르던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싱그러운 삼나무 냄새가 내 몸 전체를 감싸 안으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야릇한 감각이 몸을 관통했다. 태어나서 처음 맡아 본 알파 페로몬에 나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속수무책 무너져 내렸다. 내 페로몬에 반응하는지 삼나무 냄새가 점점 짙어져 뇌가 샛노란 호박죽처럼 녹아내렸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한 히트 사이클이었다. 터져 나오는 본능을 누를 길이 없어 애액과 페로몬을 뚝뚝 흘리며 열기에 가득 찬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박수현이라고 했지? 하, 하아, 나 병원에 좀, 데려다줘. 제발, 흐윽, 부탁이야.’
‘알았어요. 내 차로 데려다줄게요.’
박수현 등에 업혀 그의 차로 옮겨지면서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고 박수현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도 걷잡을 수 없이 향이 짙어졌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이성을 잃고 박수현에게 안아 달라고 사정했다. 박수현이 흥분을 참을수록 차 안에 번지는 향이 지독해졌고 내 본능은 물 밖으로 튀어나와 팔딱거렸다. 유혹이 통하지 않자 나중엔 참고 있는 박수현이 원망스러워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졌다.
‘야, 씨발, 너도 존나 내 구멍에 박고 싶잖아. 대체 왜 참아.’
‘히트 사이클 끝나고, 그래도 나랑 자고 싶으면 찾아와요. 지금은 아쉽지만 안 돼요.’
주차장에서 병원으로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난 계속 박수현에게 몸을 치댔다. 내가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침대에 누워 수액과 억제제를 처방받는 순간까지 그는 꿋꿋하게 내 곁을 지켰다.
‘선배. 선배 향이 마음에 들어요. 선배 처음은 나랑 보내 줄래요?’
농담처럼 건넨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나중에 눈을 떴을 때 발정열은 가라앉은 상태였고 해준이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박수현과 나눴던 대화가 조각조각 흩어져 귓가를 돌아다녔다. 내가 알파 페로몬에 미쳐 좆도 모르는 알파와 어떤 일을 벌이려 했는지 떠올라서 감당하기 힘든 자괴감이 몰려왔다. 박수현과 같은 수업을 받으면서 학교 다닐 일이 암담했다.
‘윤준영, 아까 네 후배 완전 잘생겼더라.’
‘누구, 박수현?’
‘와, 존나 잘생겨서 영화배우가 영화 찍고 있는 줄 알았어. 혹시 너 걔랑 사귀냐?’
‘씨발 새끼야, 내가 연애할 시간이 어딨냐? 응?’
‘네 애인이면 눈요기라도 할까 했는데 아깝네. 여기 약이나 먹자.’
박수현에게 나를 인계받은 해준은 사후 피임약을 처방받아 미리 약을 구해 놨다가 내가 일어나자마자 약을 먹였다. 박수현과 별일 없었다는 내 말을 그는 믿지 않았다. 그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나도 백 퍼센트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강박적으로 억제제를 챙겨 먹었다. 마당발 정우에 의하면 박수현은 내성적이지만 잘생기고 부자여서 우리 과에서 제일 인기가 많다고 했다. 나에게는 기피 대상이지만 내게 했던 정갈한 행동만 봐도 그가 인기 있는 요인을 알 수 있었다. 내 향이 마음에 든다는 말 때문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다. 베타와 달리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의 페로몬이 마음에 들면 쉽게 몸을 섞곤 해서 괜히 인사했다가 같이 자고 싶다는 뜻으로 비칠까 봐 염려해서였다.
나는 수업 듣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열심히 그를 피해 다녔다. 고맙다는 말은커녕 자신을 공기 취급하는 내가 아니꼬웠는지 박수현은 종종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곤 했다. 욕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준 박수현이 고마웠지만 동시에 절대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박수현 앞에서 질척하게 젖은 다리를 벌려 가며 제발 박아 달라고 사정했었다. 가장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민낯을 박수현에게 다 보여 버려서 그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전신 마사지는 끝났습니다. 이제 바디 스크럽 시작하겠습니다.”
아난다는 작은 알갱이가 굴러다니는 물체를 내 몸에 펴 발랐다. 알갱이들은 적당히 거칠어 몸을 자극하고 활력을 주었다. 발가락 끝까지 정성스럽게 문지르고 나서 그는 내 몸 곳곳을 지압했다.
“조금 쉬었다가 차 한 잔 드시고 얼굴 마사지 들어가겠습니다.”
허브향이 응축된 가랑비가 천장에서 떨어져 몸을 씻어 내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빗속에서 혼자가 되었다. 박수현이 건넨 우산을 받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던 내 과거가 기묘하게 중첩되었다. 나는 비겁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끝내 건네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고 그 후로 박수현을 볼 수 없었다. 겨울 방학 끝 무렵에 그가 사고로 죽어 버려서 나는 그에게 고마웠다고 인사할 기회를 영영 놓쳐 버렸다. 내 첫 알파가 될 뻔했던 박수현은 그렇게 내 인생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