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 장마의 시간
01.
나는 생판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
온종일 그 생각이 머릿속에 머물러 떠나지 않았다. 내게 계속 말을 걸던 엄마는 며칠째 이어진 강도 높은 검사에 지쳐서 파리한 얼굴로 잠들었다. 나는 그녀를 두고 조용히 병실을 나와서 휴게실로 갔다. 사람들은 드문드문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TV나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자판기 옆 구석으로 간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명함을 만지작거리다가 결심을 굳히고 명함을 꺼냈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아 명함을 구깃거려 쓰레기통에 처넣었지만 일 분도 안 돼 도로 명함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명함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제시한 기한에서 십 분이 채 남지 않았다.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꿀 어렵고 힘든 선택 앞에서 머릿속은 텅 비고 가슴은 답답했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감았던 눈을 떴다. 하루가 다르게 엄마의 생명이 위태로워져서 그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약하게 뛰고 있는 심장이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꾹꾹 누른 다음 신호음을 들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두 번의 신호가 가는 동안 땀이 밴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에어컨 바람에 팔뚝엔 소름이 돋는데 손에는 땀이 진득하게 뱄다.
- 네, JS 제약 상무이사실 비서실장 박영범입니다.
“안녕하세요. 윤준영이라고 합니다.”
- 윤준영 씨?
“뵙고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 지금 어딥니까? 병원이면 그쪽으로 차 보내겠습니다.
“어머니가 주무셔서 그러는데, 병원 근처 카페에서 보면 안 될까요?”
- 계약하시려면 상무님을 직접 만나 봬야 합니다. 30분 안에 본관 입구로 나오세요.
“그러겠습니다.”
임무를 마치고 통화 종료를 누르는 검지가 달달 떨렸다. 잠시 후 까맣게 변한 화면 위로 초조한 얼굴이 비쳤다. 긴장한 채로 휴게실 벽에 기대서 있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맨 뒷줄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가슴의 두근거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엄마의 심장을 구하기 위해 나는 몹시 나쁜 짓을 할 작정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실체보다는 23년간 날 키워 주고 사랑해 준 엄마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고고한 양심을 지키느라 엄마를 잃느니 몸을 더럽히더라도 진흙탕을 구르는 게 더 나았다.
한참을 넋 놓고 앉아 있는데 손에 쥔 휴대폰이 진동했다. 병원 정문에서 기다린다는 전화를 받고 병동을 나서면서 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내가 세 시간 안에 전화를 걸지 않으면 문자로 보내는 전화번호와 차 번호를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우는 놀라서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나중에 설명해 준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병원 입구에서 검은색 세단이 깜박깜박 비상등을 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차 번호를 찍는 동안 뒷문이 열리고 단정한 차림새의 남자가 나와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이틀 전 엄마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초조해하던 내 앞에 뜬금없이 나타나 희한한 제안을 한 남자였다. 그는 오늘 저녁 일곱 시까지 대답해 달라고 기한을 주었다. 남자를 살피면서 나는 육중하고 우아한 몸체를 뽐내며 화려하게 빛나는 차에 겁 없이 올라탔다.
“친구한테 박영범 씨 전화번호와 차 번호를 보내도 됩니까?”
“제가 윤준영 씨 납치라도 할까 봐 걱정되세요?”
“네.”
“없던 일로 하고 싶으면 그러셔도 됩니다.”
엄마 상태와 내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 남자가 인신매매범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서 어제 JS 제약의 대표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낭랑한 목소리로 회사 이름을 말하는 직원에게 상무이사실 박영범 비서실장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JS는 잘나가는 제약 회사라 사람이 많을 텐데 직원은 박영범의 이름을 듣자마자 곧장 그에게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아무래도 박영범이 안내원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둔 듯했다. 이로써 남자의 신원은 확인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내가 문자를 보내지 않아 걱정됐는지 정우에게서 계속 전화가 왔다. 나중엔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연달아 들어오는 문자에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틀 전엔 절대 안 할 것처럼 굴더니 왜 마음을 바꿨습니까?”
“제 사정 저보다 잘 알고 계시잖아요.”
“…담배 한 대 태워도 될까요?”
“네.”
내 옆에 앉아 담배를 꺼내든 남자는 둥글게 말려 올라간 입술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자격지심에선지 입꼬리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어서 나는 관절이 하얗게 불거지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뭉텅이로 쏟아진 담배 연기가 넓은 차 안을 메워 가는 동안 나는 복잡한 머리를 비웠다. 온종일 안 좋은 상상에 시달렸던지라 나를 더 비참하게 하는 어떤 사고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둠이 내린 뒤라 밖을 내다보아도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차가 계속 밀리는 걸 보면 어디 한적한 곳으로 날 데려가진 않을 듯했다.
“이사님 만나러 가고 있습니다.”
“이사님?”
“음, 윤준영 씨랑 아이를 만들 사람 말입니다.”
날씨 얘기라도 하는 양 자연스러운 말에 열이 오른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나는 우습게도 나와 아이를 만들 사람의 이름과 나이조차 모르면서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내가 만날 알파에게 아이를 낳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말곤 아는 게 없었다.
“그분,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글쎄요. 직접 보고 물어보세요.”
이사라는 직책을 듣자 자연스럽게 40대 후반인 회계학 교수가 떠올랐다. 교수는 머리가 벗어지고 배는 약간 나온, 운동 부족에 고집만 센 전형적인 꼰대 스타일이었다. 자네한테 시간 충분히 줬는데 결과물이 이게 뭐냐며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급하게 눈을 깜박거려 잔상을 없앴다.
“아이가 필요한 거 보면 꽤 나이가 드셨을 것 같은데….”
박영범이 입을 열지 않아서 나는 멋대로 결론 내렸다. 어떻게 거금을 마련해야 할지 막막해 있던 내게 박영범의 제안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는 상사의 아이를 낳아 주면 내가 상상해 보지 못한 금액을 손에 쥘 거라고 했다. 그러나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금액을 묻자 남자는 내가 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야만 협상할 수 있다고 했다.
남자의 제안에는 큰 의문점이 있었다. 대개 아이가 없는 부부는 아이를 얻기 위해 대리모에게 부부의 수정란을 착상시키는 시술을 하는데, 이 사람은 히트 사이클에 맞춰서 내가 알파의 정자를 직접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꺼림칙해서 당장 거절했지만 남자의 제안에 힌트를 얻어서 나는 대리모 단체를 알아보았다.
심각한 결혼율 감소와 불임률 증가는 출산율 저하로 이어져서 국가는 3년 전부터 부부의 수정란을 대리모 몸에 착상시켜 태어난 시험관 아이를 친자로 인정했다. 그뿐 아니라 미혼이면서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여성에겐 정자은행을 통해 유전자가 우수한 정자를 제공했고, 미혼 남성은 계약을 통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이를 낳으면 국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서 아이만 낳는 사람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에 따라 건강한 여자나 남자를 회원으로 엄선해 일정 금액을 제공하고 아이를 원하는 사람과 계약을 맺어 주는 기관이 생겨났다.
병원비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나는 검색을 통해 알아본 곳에 전화를 넣었으나 남성 오메가는 수정란 착상 성공률이 극도로 낮아서 대리모로서 수요가 없다는 말을 듣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몇 군데 더 전화해서 허탕을 친 후에 박영범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박영범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상대가 어떤 의도로 이런 제안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히트 사이클에 알파의 정자를 직접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항은 섹스를 통해 아이를 갖겠다는 의도를 돌려서 한 말이었다. 대리모 기관과 상담하면서 알파의 배우자가 몸이 약해 난자 채취가 어려울 때 불법적으로 이러한 방법을 쓴다고 들었다. 합법이 아니다 보니 내게 지급하기로 한 액수가 큰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제가 어느 정도나 받을지 알고 싶습니다.”
“당신 어머니 병원비는 물론이고, 추가로 꽤 큰 액수가 지급될 겁니다.”
“…….”
“그런데 이사님 성격이 좀 까다롭습니다. 수정 방법도 이사님이 결정할 겁니다. 계약서 내용 꼼꼼하게 살펴보고 마음에 안 들면 계약하지 않아도 돼요.”
상대는 알파라고 했는데 수정 방법을 그 사람이 결정한다니 내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어떤 조건을 내걸든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접니까? 전 아이를 낳아 본 경험이 없는데.”
막상 알파를 만나러 가면서도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오메가로 늦게 발현한 나는 22년을 베타 남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다는 생각을 해 보기는커녕 좆을 달고 있는 남자와 사귈 마음조차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 몸에 아이가 생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자가 대답을 피하는 눈치여서 이번엔 다른 질문을 던져 초조함을 잊으려 했다.
“그 이사님이란 분, 뭐 하시는 분이세요?”
“이사님에 관해 깊이 아셔봤자 좋을 일 없을 겁니다. 위험한 호기심은 넣어 두세요.”
나는 박영범 말에 수긍했다. 아이를 낳아 주고서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에게 호기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새삼 구질구질한 내 처지에 짜증이 났다.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겨우 이거라니, 불행은 왜 순서를 지키지 않고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걸까. 나는 서러워서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내 초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릿느릿 앞차를 따라가던 차가 주택가로 방향을 틀었다. 10분 정도 더 달린 뒤에 차는 육중한 철제 대문 앞에 멈춰서 대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그 길을 통과해 둔덕으로 올라갔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긴장 속에 몸을 굳히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타고 온 차 옆으로 고급 승용차와 스포츠카 여러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급한 마음에 여기까지 따라왔지만, 상대를 모르면서 너무 무모하게 행동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원하시면 병원으로 차 돌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까?”
내 갈등을 눈치챈 남자가 정중하게 물었다. 내뺄 구멍이 있었다면 이 남자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차에서 먼저 내린 박영범은 내가 완전히 내린 걸 확인하고 나서 문을 닫았다.
짙은 초록색 잔디 위에 옹기종기 놓인 디딤돌을 따라 걷다 보니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커다랗고 웅장한 문이 나타났다. 지옥 입구에 들어가기 전 심호흡하며 날뛰는 신경을 진정시켰다. 오로지 엄마를 살릴 생각만 하자며 사라진 용기를 북돋웠다. 박영범이 문손잡이 위에 있는 센서에 엄지를 대서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벗은 신발을 현관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박영범을 따라 널따란 집에 발을 들였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 이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혼곤한 정신으로 박영범 뒤를 따라가 이사로 추정되는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래현아, 윤준영 씨 모셔 왔어.”
반원형으로 길게 늘어진 소파 한가운데 그림처럼 앉아 조용히 책을 읽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긴장한 내 눈에 빼어나게 화려한 이목구비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윤준영이라고 합니다.”
나는 남자에게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했다. 40대 후반에 들어선 중년이 아니라 남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이사라는 직책은 낙하산일 테니 이해할 수 있다 쳐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아이를 얻을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남자가 내 상대가 맞는지 아니면 이사라는 사람이 따로 있는지 궁금해서 박영범을 보았으나 그는 제 할 일을 하느라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능력과 재력을 갖춘 알파들은 그에 맞는 아름다운 오메가를 골라서 어린 나이에 결혼해 자식을 여러 명 낳는 게 유행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이를 키우기 힘든 세상이라 자식의 수는 암묵적으로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저 남자도 어서 자식을 봐서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어 마음이 급한 건지도 몰랐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혼란한 와중에도 상대의 외모가 눈에 들어올 정도로 남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자세가 곧았다.
“박래현입니다. JS 제약 상무이사입니다.”
남자는 선선히 자신의 이름과 직책을 밝혔다. 예측을 벗어난 남자의 행동에 저 이름이 본명일지 의심부터 들었다. 그러다가 본명이든 가명이든 내겐 아무 상관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돈만 주면, 내가 시키는 일은 뭐든 할 수 있다고 했던가요?”
남자는 수식어를 생략한 채 간결하게 요점을 치고 들어왔다. 시작부터 상하관계를 명확하게 하려는 의도를 눈치채고서 내가 우습게 보이지 않게끔 될 수 있는 한 또렷한 목소리로 질문에 대답했다.
“애를 낳아 주면 돈을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잘못 알고 있네요.”
“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쳐다봤다. 애를 낳아 주면 돈을 주겠다는 것 말고 다른 말은 듣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남자의 다음 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이 낳는 건 기본이고, 그 외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일인데요?”
“그동안 내가 시키는 짓은 다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물론 일이 힘든 만큼 보수는 합당하게 지급할 겁니다.”
“…….”
“할 수 없다면, 얘긴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남자는 아무 미련 없다는 듯 보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알파가 돈 주고 오메가를 사서 어떤 일을 시킬지 알 것 같아서 볼이 달아올랐다. 내가 짐작했던 대로 인공수정이 아니라 직접적인 성교를 통해 아이를 갖겠다는 선포로 들렸다. 애초에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수정을 생각했다면 이 일에 적당하지 않은 남성 오메가를 고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일면식도 없는 나를 선택했을까? 많은 환자가 엄마에게 이식될 심장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남자는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대의 의도가 중요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자존심을 포기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해 보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돌아갈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계약서 작성하고 나면 되돌릴 수 없을 텐데요.”
“무슨 일을 하든 되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빛을 반사한 투명한 눈동자가 내 이마부터 시작해 점점 아래로 움직였다. 몸 위를 날름날름 기어 다니는 무례한 눈빛에 그제야 내 몰골이 신경 쓰였다. 며칠간 병원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느라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교대해 줄 사람이 없어 제대로 씻지 못한 데다 이틀째 같은 옷을 입고 있어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속인 사기꾼을 향한 분노와 스트레스로 피부와 눈동자는 생기를 잃었고 입술은 버석하게 말라 보기 흉했다.
알파에게 나를 팔려고 왔으면서 정작 외모엔 신경 쓰지 못했다. 고상한 취향을 가졌을 것 같은 남자에게 개똥밭을 구르다 온 내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을 것이다. 병원에서 나오기 전에 거울을 봤다면 머리라도 빗고 왔을 텐데 정신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나와 대조적으로 고급스럽고 우아한 옷차림을 한 남자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어깨 너머 까맣게 물든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남자에게 몇 걸음 다가가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남자는 생각에 잠긴 채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겨우 눈빛 하나에 다리가 휘청일 정도로 긴장한 내가 바보 같았다. 배짱이 없는 편은 아닌데 남자의 시선이 신경을 갈기갈기 찢어 놓아서 똑바로 걷는 게 힘들었다.
“내가 윤준영 씨 데리고 좀 놀아 볼 생각이었는데….”
“…….”
“윤준영 씨 꼬락서니 보고 계약할 마음이 뚝 떨어졌습니다. 나랑 계약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계약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단정하게 차려입지 못한 불찰이 커서 나는 변명하듯 입을 벙긋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엄마 병간호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그러면 시간을 줄 테니, 내가 당신 고용주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노력해 보세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오메가는 지천으로 널렸으니까.”
불행히도 자존심을 깎아내린 남자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성교를 통해 아이를 가질 생각이라면, 자신의 아이를 낳을 오메가가 아름답고 건강하길 바랄 것이다.
멀뚱멀뚱 서 있던 나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자연스럽게 다리 사이를 벌리는 남자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그쪽 사정에 밝지 못해도 알파가 거액을 주고 오메가를 사는 까닭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옷을 벗고 뒤를 대 줘야 할지 아니면 좆을 빨아 줘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 남자에겐 배우자가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배우자는 인공수정을 통해 아이를 갖고 싶어 할 텐데 괜히 유부남 좆을 빨았다가 화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차라리 어떻게 해달라고 말을 하면 좋으련만 표정 없는 얼굴에서 남자의 의도를 읽는 건 불가능했다. 히트 사이클에 정자를 받아들여야 하고 원하는 대로 돈을 주겠다는 말에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기는 했다. 세상에 공짜란 없고 돈을 받은 만큼 어떤 형태로든 뱉어 내야 한다는 진리를 터득한 지 오래였다. 더구나 이 남자는 자기 꼴리는 대로 나를 데리고 놀겠다고 밝혔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남자는 눈썹 산을 추어올리며 반듯한 미간을 찌푸렸다.
무표정했던 얼굴이 살벌하게 변하자 그가 계약에서 발을 뺄 것 같아 다급해진 나는 남자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서툰 손길로 바지 훅을 열었다. 지퍼를 내려 양쪽으로 벌리고 속옷을 아래로 끌어내리자 비누 냄새가 섞인 체향과 더불어 곱실곱실한 음모가 나타났다. 나를 제외한 다른 남자 성기를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이라 당황해서 양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가 처한 현실이 비참하고 끔찍해 자꾸 감기려는 눈을 부릅떴다. 시선을 돌려 피하고 싶지만, 다가올 현실을 직시하고 준비해야 했다.
돈 때문에 남자 좆 대가리를 빨 생각에 행동으로 옮기기 전부터 현기증이 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성실하고 평범했던 지난 23년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남자 성기에 얼굴을 내린 순간 내가 발을 담그게 될 곳이 참혹한 지옥이 될 거라고 본능이 경고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공포로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혀로 적셨다. 엄마 수술이 내일이란 사실을 상기하며 남자의 성기를 혀로 핥았다.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정한 성기를 따라 입술을 내렸다. 정갈하게 벗겨진 귀두를 입에 물고 혀끝으로 요도구를 지그시 문지른 다음, 해준이 했던 말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성기를 입에 넣고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며 힘껏 빨아 준다던 말이 기억났지만, 남자의 성기가 너무 커서 도저히 입에 담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끝부분만 입에 물고 볼이 홀쭉하게 패도록 성기를 빨았다. 발기하지 않고 축 늘어져 있는데도 성기가 너무 커서 숨쉬기 힘들었다.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리면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코끝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별안간 얼굴을 다 감싸고도 남을 커다란 손이 내 턱과 볼을 아프게 틀어쥐었다. 입을 가득 채운 성기와 턱에 가해지는 힘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졌다. 내가 못해서 만족이 안 되는 걸까?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부끄러움도 다 내 던지고 성기를 깊이 삼키려는 찰나, 박래현이 우악스럽게 내 얼굴을 뒤로 꺾었다. 크게 벌어져 닫히지 않은 입에서 남자의 성기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양 볼과 턱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고 한껏 잡아당겨진 목이 늘어날 기세로 따끔거렸다.
그제야 멈췄던 숨을 터트리며 호흡을 골랐다. 이내 억센 손아귀에 턱이 들려서 증오가 일렁이는 싸늘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얼음보다 차가운 시선이 비난을 담고서 내 눈알을 얼릴 듯 맹렬히 파고들었다. 결혼한 사람에게 내가 지나치게 천박하게 들이댄 것 같아 볼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내 잘못만은 아닌 게, 오해하게끔 말을 해서 이런 행동을 유도한 사람은 박래현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 준 것 같은데 남자가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봐서 머릿속에 별생각이 다 지나갔다. 내가 펠라티오를 못 해서 짜증이 났을까? 아니면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상대를 원했는데 몸집 크고 건장한 오메가가 와서 심술이 났을까. 한참 동안 내 눈에 머물렀던 시선이 벌어진 입술로 향했다. 그러잖아도 꼴불견일 텐데 침까지 흘리며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을 내 모습이 그려져 부끄러웠다.
“윤준영 씨.”
“네.”
“내가 자지에 더러운 입을 갖다 대도 좋다고 허락했나요?”
“아, 아니요.”
“그러면 알파 자지를 입에 무는 게 평소 버릇입니까? 꽤 천박하게 굴러먹었나 봅니다.”
나보다 나은 오메가가 지천에 깔렸다고 나를 자극해 놓고서 남자는 딴청이었다. 남자 얼굴에 주먹을 몇 대 날린 뒤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남자는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싸늘하게 웃으며 쥐고 있던 내 얼굴을 뒤로 밀었다. 힘없이 밀린 몸이 대리석 탁자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났다. 어깨뼈가 조각나 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개뼈다귀 취급하는 남자에게 분노가 치밀었지만 요동하는 마음을 다독이며 이성적으로 내가 여기 온 목적을 되새겼다.
“상무님 마음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알려 주시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자세를 바꾸고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냉혹하면서 건조한 시선이 얼굴과 몸을 할퀴듯 지나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상대를 간파할 날카로운 눈이었다. 남자의 처분을 기다리며 나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틀 전에 박영범이 병원으로 날 찾아왔을 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마치 내가 고난에 부닥치길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박영범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내밀었다.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를 두 번이나 물었지만, 그는 답해 주지 않았다.
혼자 답을 찾아야 해서 박래현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봤다. 단연코 오늘 처음 본 남자였다. 박래현의 외모는 우연히 스쳐 가듯 만났다 해도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 수려하고 독특했다. 훤칠한 키와 청염한 이목구비를 차치하고라도 특이한 색으로 빛나는 갈색 눈동자는 내가 본 적 없는 빛을 띠었다. 만났다면 분명 기억의 한구석에 저 얼굴이 박혀 있을 것이다. 머리를 쥐어짜 봐도 생판 모르는 남자가 나를 선택한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불현듯 계약 후보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래현은 돈이 급한 오메가들 명단을 뽑아서 그중에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려고 면접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일찍 발현한 오메가들은 몸 선이 가늘고 얼굴이 아름다워서 알파들 대부분은 일찍 발현한 오메가들을 좋아했다. 그들과 달리 늦게 발현한 나는 키가 크고 몸이 튼튼해서 보나 마나 탈락이 확실했다. 내 프로필을 봤으면 대충 짐작했을 텐데 굳이 면접을 해서 나를 모욕한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내 처지를 유희의 도구로 이용한 남자가 미웠고 거기에 속아 넘어간 내가 한심했다. 무엇보다 내일 수술이 잡혀 있는데 어디서 수술비를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 사람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까, 아니면 내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해 동정심을 사야 할까 고민하던 중 남자의 냉랭한 눈을 보게 되었다. 무자비할 정도로 차가워 보이는 눈에 계약이 물 건너갔음을 직감했다. 그러자 감춰 뒀던 본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십니까? 처음부터 저랑 계약할 생각 없으셨죠?”
“형, 윤준영 씨한테 계약서 보여 줘.”
“알았어.”
대답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박영범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여기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래현한테 추한 모습을 보여 준 거로 부족해 생판 모르는 남 앞에서 더러운 꼴을 노출하고 말았다. 수치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가지 않아 다행이란 위로로 힘겹게 가라앉혔다. 결심을 다잡기 위해 엄마의 파리한 얼굴을 떠올리면서 내가 처한 현실에 초연해지려고 노력했다. 우리 상황을 사실대로 얘기하면 엄마는 수술을 거부하실 테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녀의 삶은 얼마 가지 않아 끝나게 된다.
“읽어 보고 수정할 부분 있으면 얘기해요.”
마지못해 나를 선택한 사람처럼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동아줄을 잡는 마음으로 계약서를 받아 든 나는 남자와 다소 떨어진 스툴에 앉아 내용을 살폈다.
-계약 기간은 20XX년 6월 30일 오후 7시부터 2년째 되는 날인 20XX년 6월 29일 오후 7시까지이다. 을(윤준영/이하 을)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안에 계약이 종료되며 아이를 갖지 못하더라도 2년이 지나면 계약은 종료된다. 단 을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갑(박래현/이하 갑)은 계약금의 70%만 지급한다.
2년이 지나서 무조건 계약이 종료되는 건 좋은데 계약 시작일이 내일이라 마음에 걸렸다.
“저기,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엄마가 내일 수술 들어가십니다. 수술 끝나면 일주일은 중환자실에 계셔야 하는데,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서 일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내 애를 낳을 사람이 머리가 좋았으면 하는데 너무 큰 바람입니까?”
“부탁드립니다. 히트 사이클이 다음 달이라 임신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일주일만 말미를 주셨으면 합니다.”
히트 사이클이 4주 정도 남아 있어서 당장 아이를 가질 상황은 아니었다. 상식과 측은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 사정을 듣고 양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윤준영 씨, 내가 말을 돌려서 하니까 못 알아듣겠어요? 직설적인 표현을 써서 떠먹여 줘야 하나?”
불행하게도 박래현은 상식을 가진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완고한 표정으로 내 사정을 봐줄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을 밝혔다.
개자식아, 다 알아들었어. 알아들었는데 너무 절박하니까 이런 거잖아.
속으로 남자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어도 억울함이 풀리지 않았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계약서에 쓰인 글씨가 흐릿해지더니 그 위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형, 윤준영 씨는 심지가 약해서 안 되겠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닐 텐데.”
“…죄송합니다.”
“말로 안 되니까 이제 눈물 작전입니까? 나한테 절대 안 먹힐 방법입니다.”
상대의 동정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닫기도 전에 눈물이 흘러내린 것이다. 나는 비벼서 따끔따끔한 눈을 부릅뜬 채 다음 조항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를 낳는 대가로 갑(박래현)은 을(윤준영)에게 30억을 지급한다.
30억? 비현실적인 금액을 본 순간 내 동공은 분명 좌우로 거칠게 흔들렸을 것이다.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액수라는 언질을 박영범에게 미리 들었음에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큰 금액이었다. 혹시 3,000만 원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나는 동그라미를 다시 세어 봤다.
“몸을 판 대가치곤 너무 작습니까? 더 올리고 싶어요?”
“…….”
“이번 기회에 한 몫 단단히 잡아 보겠다 이겁니까? 10억쯤 더 얹어 줄 수 있으니까, 40억으로 합의 보죠.”
30억이란 금액에 놀라서 대답을 못 했는데 남자는 멋대로 내 침묵을 판단해 10억을 더 올렸다. 나는 10억이 아무것도 아닌 남자를 멍청한 눈으로 응시했다. 어느새 남자의 손엔 끝이 주홍색으로 발갛게 타오르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희부연 연기가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는 각종 검사 비용과 수술 비용, 수술 후 검사까지 약 5,000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퇴원하고 나서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요양을 해야 하며 매달 약값과 검사 비용으로 최소 5-60만 원 정도가 들 예정이었다. 집이 없는 상태라 엄마를 모시려면 최소 6,000만 원 정도가 더 필요하고, 운이 나빠서 수술 후 거부반응이 심해지면 재수술 비용까지 고려해야 했다.
남성 오메가가 대리모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1억만 받아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40억을 제시했다. 자기가 알아서 돈을 더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40억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가 제시한 금액을 받아들였다. 내내 무표정하던 남자의 갈색 눈동자가 잠시간 이채를 띠며 반짝였다.
“윤준영 씨, 받을 돈이 클수록 위약금도 커진다는 걸 잊지 말아요.”
계약 시작일을 일주일만 미뤄 달라고 할 땐 무시하던 남자가 돈을 올릴 때는 속전속결이었다. 일 분이 채 안 돼 10억을 추가로 거머쥔 나는 급속하게 밀려드는 불안함에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40억은 복권에 서너 번 당첨되지 않는 한 내가 평생을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거액이었다. 돈이 생겨 기쁘기보다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러울 것 같아서 두려워졌다.
돈이 남아돌아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다른 꿍꿍이가 숨어 있을 것이다. 안개처럼 피어난 두려움 뒤로 남자의 가랑이 사이에서 좆을 빨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제대로 못 하는 내게 화가 나서 내 뺨을 지독하게 때리고 목을 졸랐다. 다음 장면에서 나는 수치심에 얼굴이 빨개진 채로 울면서 남자에게 다리를 벌렸다.
끔찍한 상상에 몸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박래현에게 변태 성향이 있다면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팔다리를 가죽끈에 묶인 채 살갗이 다 터져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을 당할 수도 있고 개목걸이를 찬 상태로 어딘가에 갇힐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남자의 배우자가 알게 되면 상황은 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질 것이다.
자꾸 부정적으로 치닫는 생각에 브레이크를 건 뒤 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바꿨다. 남자에겐 배우자가 있다. 그의 배우자가 아이를 갖기 힘든 조건이라 내게서 아이를 보려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확증 편향임을 알면서도 남자에겐 40억이 푼돈일 거라고 생각하며 의구심을 내리눌렀다. 가까스로 가슴을 진정시킨 나는 계약서의 다른 조항으로 눈을 내렸다.
-임신 방법은 갑이 정하는 바에 따르며 을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
- 을이 임신한 순간부터 아이에 관한 모든 권리는 갑에게 귀속된다.
- 보안상 이유로 계약 기간 내에 을은 갑의 허락 없이 거주지를 벗어날 수 없다. 외부인과 연락하거나 접촉하는 일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 갑은 계약 기간에 을에게 배타적 소유권을 지닌다. 갑은 을을 보호하고 을은 갑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나는 그 외 잡다한 생활 수칙에 관한 조항까지 다 읽어 내려갔다. 계약서만 읽었을 뿐인데 벌써 누군가가 내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배타적 소유권이 어느 범위까지입니까? 감을 못 잡겠네요.”
“내가 당신을 가두고, 학대하더라도 당신은 내게 순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엄마를 살리고 싶어서 여기 왔지, 제가 죽으려고 온 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죽이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실제 실행에 옮긴 적은 없으니까.”
남자는 태연한 얼굴로 소름 끼치게 무서운 말을 지껄였다. 죽지 않을 정도로 나를 학대하겠다는 선언에 진정되었던 가슴이 도로 두근거렸다.
해준 때문에 어려서부터 나도 모르는 싸움에 종종 휘말리다 보니 몸을 지키기 위해 나는 싸움의 기술을 익혔다. 그 결과 성인 남자 몇 명쯤은 제압할 실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이 이상한 계약 앞에서 내 기술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윤준영 씨, 다행히 이 터널엔 끝이 있습니다. 아이를 빨리 가질수록 지옥에서 빨리 벗어날 겁니다.”
“네. 해 보겠습니다.”
시험관 아기의 착상률은 낮을지 몰라도 히트 사이클에 맞춰 신체 건강한 알파와 오메가가 성교하면 임신 확률은 거의 85%에 육박한다. 박래현은 완전히 건강해 보이므로 나는 다음 달에 임신해서 1년 안에 여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돈은 임신 확정을 받은 날 50%를 지급하고 나머지 50%는 계약이 끝나는 날 지급한다고 되어 있었다. 11개월 동안 40억을 벌 수 있다는 얘긴데 너무 비현실적이라 신뢰가 가지 않았다.
“윤준영 씨. 마지막 조항까지 읽어 보고 결정하세요.”
박영범의 권유에 나는 계약서에 명시된 맨 마지막 조항을 읽었다.
- 계약과 관련한 모든 사항은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한다. 위 사항 중 어느 하나라도 어기면 을이 갚아야 할 돈은 지급액의 1.3배이다.
지급액의 1.3배면 52억이란 말인가? 조항을 어길 일은 없겠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금액이었다.
“한 가지만 빼고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제발 부탁인데 엄마와 연락은 하게 해 주세요.”
박래현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 아무래도 좋았지만 외부인과 연락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목에 걸렸다. 수술 후에 엄마의 상황을 점검하고 의사와 상의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 조항을 따르게 되면 나는 엄마와 일절 연락을 할 수 없게 된다.
“부탁드립니다. 수술도 중요하지만 수술 끝나고 회복기가 더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이 일을 수락한 의미가 없어집니다.”
“당신 어머니 담당의와 잘 아는 사입니다. 어머니는 담당의한테 맡겨서 특별 관리 들어갈 테니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
“윤준영 씨. 내가 자선사업 하는 거로 보여요? 대리모 계약 들어가면 다른 오메가들도 다 이런 계약서를 씁니다. 싫으면, 여기서 접죠.”
“이 계약에 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겠습니다. 엄마랑 통화만이라도 허락해 주세요.”
“말이 안 통하네. 형, 이분 택시비 줘서 보내.”
내 팔을 붙드는 박영범의 손을 뿌리치고 나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박래현을 보았다.
“잘 알겠습니다. 대신 수술 끝나고 나서 만일,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만이라도 알게 해 주세요.”
“만일 돌아가신다면, 그 소식은 전해 줄게요.”
눈물로 호소한다는 말은 듣기 싫어서 참으려 했는데 눈알이 벌써 축축해졌다. 나는 개털이고 남자가 엄마를 살릴 돈줄이란 이유로 무조건 그의 말을 따라야 했다. 내겐 대안이 하나밖에 없는 반면 남자는 나 말고도 대안이 여러 개가 있었다. 억울하고 분해도 남자가 내민 조건을 거부할 순 없었다. 심장이식 후 3년 생존율이 87%가 넘는다는 의사의 말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다른 요구 사항이나 궁금한 점은 없습니까?”
아주 짧은 대화를 통해 내가 어떤 요구를 하든, 어떤 의문을 갖든 남자는 들어줄 의향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 계약서에 불만을 표하는 순간 박래현은 두 번 봐주는 일 없이 나를 밖으로 내던질 것이다.
“없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 당신은 내 개가 될 테고, 주인 말을 안 들으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겁니다. 그래도 하겠습니까?”
두려운 마음에 남자 제안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대안을 마련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편으론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도 1~2년에 40억이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나머지는 박 실장과 해결하세요.”
고개를 기우뚱 기울여 나를 보던 남자는 포개진 다리를 우아하게 풀고 내 눈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숨을 짓누르는 무게감에서 해방되자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페로몬을 푼 건 아닌데 공기 속에 남자의 향이 떠도는 것 같아 속이 메스꺼웠다. 초조하게 손톱 끝을 물어뜯고 있던 내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컵이 불쑥 나타났다.
“이거 한 잔 마시고 계약을 진행할까요?”
“감사합니다.”
박영범에게서 컵을 받아 두 손으로 감아쥐었다. 따뜻한 코코아를 몇 모금 마셨더니 떨리던 속이 겨우 진정되었다. 내 맞은편에 앉은 박영범은 계약서를 다시 읽어 보라고 권한 뒤 내게 시간을 주었다. 다시 본다고 내용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서 대충 눈으로 훑고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앞으로 제 거처는 어떻게 되나요?”
“내일 알려 드릴게요. 어머니 수술 끝나고 일곱 시에 병원 정문으로 나오세요.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고 빈 몸으로 와야 합니다.”
“옷이나 전공 서적은 괜찮겠죠?”
“여기서 다 준비할 테니까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몸만 오세요. 핸드폰, 노트북 전부 안 됩니다. 전공 서적은 상무님이 허락하시면 제가 따로 준비하겠습니다.”
“핸드폰은 가져오고 싶은데요.”
“안 됩니다.”
곤란한 듯 안경을 추어올리는 제스처와 달리 박영범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박래현 상무에게 속한 사람이 그의 말을 어기고 내 말을 들어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제가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지막 히트 사이클이 언제였습니까? 주기는?”
“끝난 지 3일 정도 됩니다. 주기는 40일에 한 번으로 비교적 일정한 편이고, 한 번 오면 이틀 정도 지속합니다.”
“골격을 보아하니 오메가치곤 발현이 상당히 늦었겠네요.”
“네.”
오메가는 발현 나이에 따라 골격에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남녀 불문하고 오메가들은 대부분 열여덟 이전의 어린 나이에 발현하는데 일찍 발현할수록 골격이 작고 사랑스러우며 우아하다. 드물지만 나처럼 골격이 자리 잡은 뒤에 늦게 발현한 오메가들은 오메가로서 신체적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거기다가 나는 키가 크고 허우대가 좋아서 누구도 나를 오메가로 보진 않았다.
“그동안 히트 사이클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정기적으로 만난 알파는 있습니까?”
“그건 제 사생활이라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엄마를 돌보면서 학점 관리와 아르바이트에 허덕이던 내게 연애할 여유 따윈 없었다. 일찌감치 현실에 눈뜬 나는 첫 연애를 대학 졸업 뒤로 미뤘다. 겨우 스물셋의 나이에 청춘과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새도 없이 내 우선순위는 대학을 졸업해 빨리 취직하는 게 되어 버렸다.
“낙태 수술이나 출산한 경험은 있습니까?”
“제 신상 다 털지 않았습니까?”
슬쩍 떠본 말이었는데 박영범은 멋쩍게 웃으며 안경테를 추어올렸다. 어쩐지 두 사람은 우리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고 있는 듯했다. 이 남자라면 우리를 등쳐 먹고 사라진 사기꾼의 행방을 알지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그런데….”
“왜요?”
“선금이 필요해서요. 엄마 수술비를 당장 내야 하고, 제가 갇혀 있는 동안 요양 병원에 들어가셔야 하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흐음, 그렇겠네요. 잠깐 기다리세요. 상무님과 상의하고 오겠습니다.”
언젠간 받을 돈을 미리 요구한 건데 그 말을 입 밖에 내기가 어려웠다. 박래현처럼 재벌가가 아니라 부잣집에서만 태어났어도 나와 엄마가 이런 수모를 겪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손기호 그 사기꾼만 아니었어도 당장 수술비는 해결할 수 있었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나서 집주인에게 사정을 말해 집 보증금을 돌려받았다. 그 돈으로 수술을 한 뒤, 엄마와 나는 당분간 사기꾼 집에 얹혀살 계획이었다. 그런데 사기꾼은 내가 엄마 핸드폰에 깔아 준 폰뱅킹을 이용해 엄마 통장에 있는 돈을 빼돌린 뒤 홀연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잠적해서 쭉 연락이 안 되는 걸 보면 도망간 게 분명했다.
돈 걱정에 기증자를 한 번 놓친 엄마는 심부전증 말기에 접어들어 약이 듣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다. 심장이식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데 이식 수술을 거부한 전적이 있어서 엄마는 수술 대기자 순서에서 한참 뒤로 밀려났다. 거의 포기한 상황에서 운 좋게 두 번째 기증자가 나타났다. 이번 기증자마저 놓치면 더는 수술을 받지 못할 거라는 경고를 의사에게 듣고서 나는 엄마를 설득해 수술 날짜를 잡았고 검사를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사기꾼이 엄마의 목숨줄을 가지고 튄 것이다.
우리 식구에게 늘 다정하던 남자여서 처음엔 그의 야반도주를 믿지 않았다. 멀쩡하게 생긴 씹새끼가 엄마의 등골을 빼먹은 사기꾼이란 사실이 너무 억울해 나는 계속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새끼가 쓰고 남은 돈이라도 찾고자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의 성의 없는 태도로 보아 그 금수를 찾겠다는 희망은 버리는 게 나았다. 전국을 샅샅이 뒤져 인간 말종을 찾고 싶어도 아픈 엄마를 두고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외롭게 지낸 엄마에게 좋은 짝이 나타났다고 기뻐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엄마가 검사를 받는 동안 돈을 구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내가 구한 돈은 수술 전 검사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부족했다. 친가 쪽으론 손을 벌릴 데가 없었고 외삼촌은 엄마에게 빌려준 돈도 받지 못한 상황이라 더는 빌려줄 돈이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내 사정 뻔히 알면서 각종 보험에 들라고 권유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윤준영 씨, 통장 번호 제 핸드폰에 찍어 주세요. 계약서에 적힌 금액 내일 입금하겠습니다.”
2층으로 사라졌던 박영범이 새 계약서를 뽑아와 내 앞에 내밀었다. 졸지에 40억으로 금액이 바뀐 계약서 아래 날개를 활짝 편 매를 닮은 사인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선수금 25억, 임신 확정 시 10억, 아이를 낳은 뒤 5억을 통장으로 이체하겠다고 계약서는 수정되어 있었다. 내일 통장에서 25억을 볼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동시에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진득진득한 수렁에 발을 내디딘 것 같아 심장이 덜컹거렸다. 수렁 안에 도사리고 있던 굶주린 뱀들이 냄새를 맡고 깨어나 나를 낱낱이 해체해 버릴 것 같은 끔찍함이었다.
“위약금 얘기가 있던데, 혹시 제가 잘못하면 위약금은 얼마를 물어야 하는 건가요?”
“위약금은 준영 씨에게 입금된 돈을 기준으로 청구됩니다. 내일 25억이 입금될 테니까 임신하기 전에 조항을 어기면 원금까지 합해 32억5천만 원이 청구될 겁니다.”
전혀 현실감 없는 금액이라 박영범이 계산을 해 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 수술비에 만일을 대비해 약간의 여윳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기에 덜컥 겁이 났다.
“이사, 아니 상무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계약서에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인감 증명서 두 부 가져오셨죠?”
나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인감 증명서가 담긴 봉투를 꺼내 박영범에게 건넸다. 박영범은 구깃구깃한 인감 증명서를 손바닥으로 눌러 반듯하게 편 다음 내용을 살폈다.
“이 부분 다시 읽어 보고 그 아래 서명해 주세요.”
나는 박영범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내렸다.
- JS 제약 회사 법무실 변호사 박영범의 입회 아래 갑과 을은 본 계약서 두 부를 작성하여 이의 없음을 확인 서명, 날인한다. 계약서는 박영범이 지정한 은행 금고에 한 부씩 따로 보관한다.
계약서를 읽어 본 뒤에 계약서에 쓰인 박래현 나이를 확인한 순간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어려 보인 게 아니라 박래현은 실제로 어렸다. 만으로 따지자면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같은 20대인데 누구는 돈에 몸을 팔고 누구는 40억을 턱턱 지급하며 사람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회복하기 어려운 박탈감이 찾아왔다. 내 상대가 난쟁이 똥자루에 머리가 벗어지고 배가 불룩 튀어나왔더라도 40대 후반이면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을 것이다. 한 줌 남아 있던 이성과 자존심이 부슬부슬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한없이 작아진 나는 그 가루에 파묻혀 재투성이가 되었다.
“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계약서 세부 사항이 많아서 다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매뉴얼을 작성해서 따로 드리겠습니다. 계약과 관련해 다른 질문 사항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계약서 마지막에 있는 위약금 조항, 우습게 여기면 안 됩니다. 재벌들은 한번 계약하면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상무님은 윤준영 씨 사정 봐주실 분 아니니까 조심하세요.”
“네.”
박영범은 진지한 목소리로 허튼수작은 부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나는 위약금이 명시된 마지막 조항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뒤 박래현 사인 아래 사인을 했다. 아까부터 스멀스멀 기어드는 불길한 예감에 한여름인데도 체온이 떨어져 손끝이 차가웠다.
“이로써 계약서 작성은 끝났습니다. 계약서를 보관할 은행은 SHC 삼성동 본점입니다. 금고 번호는 내일 알려 드리겠습니다. 가시죠. 병원까지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내일 뵙겠습니다.”
“어머니 아프시다면서요. 지하철 타고 가면 너무 늦잖아요.”
“그렇다면 호의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박래현 씨한테 인사 안 드리고 그냥 가도 될까요?”
“네. 지금쯤 서재에서 책 보고 있을 겁니다. 방해받는 거 싫어하니까 그냥 갑시다.”
박래현 얼굴을 또 보고 싶진 않아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생명의 은인이니까 좋게 생각해 보려 했지만 역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말을 안 들으면 응당한 처벌을 받을 거란 경고가 떠올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저 남자와 몸을 섞어 가며 아이를 만들 장래가 막막했다. 첫 만남부터 오만하게 구는 남자가 날 얼마나 무시하고 경멸할지 안 봐도 훤했다.
박영범은 내가 탈 수 있게 조수석 문을 열었다. 나도 문을 열 손을 달고 있어서 이런 대접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내가 안전띠를 매는 동안 박영범은 조수석 문을 닫고 차를 빙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벨트를 맨 그는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당연히 박래현 씨 배우자께선 여기 동의하셨겠죠?”
부부의 수정란을 착상시키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서 나는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가 내 질문에 입을 연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계약서 효력은 이미 발생했습니다. 윤준영 씨는 위약금을 준비하셔야겠네요.”
“아, 전 그냥 궁금해서요.”
“제 경고 새겨들으시고, 앞으로 사적인 질문은 절대 입에 담지 마세요.”
박래현에 관한 어떤 질문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조항이 뒤늦게 떠올라 초조하게 손바닥을 비볐다. 박영범은 흘러내린 안경테를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밀어 올렸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이는 인공수정으로 가질 겁니다.”
“인공수정요? 그러니까 직접적인 성교 없이 아일 갖는다는 말이죠?”
내가 들어 봐도 꽤 미심쩍은 목소리였다. 갑의 요구에 따라 정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항을 읽으면서 박래현이 요구할 때마다 다리를 벌려야 할 거라고 짐작했다. 나를 벌레 취급하는 남자와 몸을 섞긴 싫었기에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말에 안도했다. 박래현 배우자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그가 내 몸을 열고 들어오는 끔찍한 상상을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네, 말 그대로 윤준영 씨는 아이만 낳아 주면 됩니다. 그리고, 아까 같은 일은 절대 하지 마세요.”
“아까 같은 일요?”
“상무님 몸에 손대는 거요. 상무님은 다른 사람을 만지는 것도, 다른 사람이 만지는 것도 싫어합니다. 아까 큰 사고 없이 조용히 넘어간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40억을 주고 절 사셔서 그런 걸 원하는 줄 알았어요. 제가 실수했네요.”
“아닙니다. 미리 주의시키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윤준영 씨가 두려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윤준영 씨는 위약금 물지 않게 얌전히 지내다 1년 뒤에 일상으로 복귀하면 됩니다.”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도 서러울 텐데 아이만 낳아 주면 될 사람이 주제넘게 행동했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나를 개라고 언급하던 남자의 눈빛이 마른 모래처럼 혓바닥을 굴러 입 안이 따끔거렸다. 내가 싫었던 이상으로 남자도 내 행동이 싫었을 것이다.
***
온갖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다가 JS 제약 박래현을 검색해 보았다. 일부러 막은 것처럼 그와 관련된 사적인 자료는 보이지 않았고 대외적인 기사만 몇 개 건질 수 있었다.
그는 JS 제약 오너 일가의 4세였다. 기사에 따르면 JS 제약은 매출 순위로 국내 5위 정도의 제약 회사였다가 재작년 하반기에 출시한 히트 사이클 억제제 릴리프가 전 세계적으로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단박에 글로벌 제약 회사로 발돋움했다. 국제 특허를 취득한 이 글로벌 신약은 갈수록 수요가 늘어 올 1/4분기까지 해서 4.5조에 이르는 누적 매출액을 올렸다. 특허권 존속 기간 동안 대체제가 없는 상품을 독점 공급할 수 있어서 수익은 더 큰 폭으로 증가할 거라고 전문가는 예측했다.
제약학과를 졸업한 뒤 박래현은 바이언스라는 작은 제약 회사를 설립해 짧은 기간에 릴리프를 비롯해서 다른 신약을 개발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그는 올해 초에 JS 제약 상무이사로 발령 났다. 신약 개발 회사인 바이언스는 다양한 신약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어서 박래현이 JS 제약 내에서 입지를 다지는데 주춧돌 역할을 할 거라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읽고 핸드폰을 껐다. 그 외 회사와 관련한 다른 기사가 있었지만, 정작 내 관심사인 박래현의 결혼 소식을 다룬 기사는 없었다.
박래현이 개발했다는 억제제는 나도 이용하는 약이라 이름이 친숙했다. 릴리프 이전의 억제제들은 복통과 메스꺼움, 어지러움 등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서 오메가의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었다. 그러나 JS 제약에서 출시한 릴리프는 기존 억제제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서 전 세계 오메가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박래현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게 40억을 지급하겠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국내 굴지의 제약 회사 후계자에게 40억은 강아지 껌값일 것이다.
돈이 없어서 겪어야 하는 서러움 따위를 아예 모르고 자랐을 남자가 부러웠다. 풍족하게 자랐으니 마음이 넓을 법도 한데 내게 하는 짓을 보면 싹수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개새끼였다. 그래도 절망에 빠진 내 앞에 나타나 엄마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경로로 다가왔는지 알 수 없지만 박래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수술비를 구하지 못해 절망에 빠져 있을 것이다.
머리맡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킨 나는 모포 위에 놓인 엄마의 손을 슬며시 내 손으로 감쌌다. 나와 마찬가지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힘겹게 잠든 엄마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내 손짓은 조심스러웠다. 엄마와 우리의 희로애락이 차곡차곡 쌓인 심장이 곧 다른 심장으로 교체된다. 심장은 단지 혈액을 펌프질하는 근육 덩어리가 아니라 심장의 60%가 두뇌의 신경세포와 똑같은 뉴런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을 의사에게 들었다. 그래서 심장이식 수혜자들에게 기증한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이 전이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엄마가 살 수 있다면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내가 낳을 아이와 맞바꾼 심장이니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만 바랄 뿐이다.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내가 어떤 짓을 하고 왔는지 알면 엄마는 수술을 포기할 것이다. 엄마에게조차 말할 수 없을 앞으로의 행적은 정우와 나만의 비밀이었다.
밤새워 뒤척이다 잠깐 노루잠이 들었다. 알람 소리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통장에 25억을 보냈다는 박영범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혹시 박래현 마음이 변해 계약을 해지할까 봐 불안했던 나는 스마트 뱅킹으로 들어가 생전 본 적 없는 커다란 액수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엄마가 차질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뻤다가, 남자에게 팔아 버린 2년이 어떤 형태로 채워질지 몰라서 두려워졌다. 2년간 내 인생의 운전대를 박래현에게 넘겼으니 그가 중앙 분리대에 나를 처박거나 중앙선을 넘어 내 인생을 전복시켜도 나는 그를 저지할 권리가 없었다.
“준영아.”
“엄마 깼어? 기분은 좀 어때?”
“응, 괜찮아. 그런데 내 새끼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요즘 나 때문에 너무 무리했지? 엄마 수술 들어가면, 여기 누워서 한숨 자.”
“잠이야 아무 때나 잘 수 있어. 엄만 수술 잘 받을 생각만 해.”
“이럴 때 해준이가 있으면 네가 덜 힘들 텐데….”
“나 열 받으니까 그 새끼 얘긴 하지 마.”
“밥은 잘 먹고 다니겠지?”
“걔가 어디 가서 굶을 애야? 전에도 한 번씩 가출했잖아. 자기 기분 내키면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어디서 저 좋다는 알파랑 뒹굴고 있겠지. 씨발 새끼. 내 손에 잡히기만 해 봐. 다리를 부러뜨려 집에 가둬 둘 테니까.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화장지를 뽑아 엄마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침대 시트보다 창백한 얼굴과 최근 들어 희끗희끗하게 샌 머리칼을 보자 코끝이 쨍하니 아팠다. 수술 끝나면 내가 더 보고 싶어질 텐데 최소 1년이 지나야 엄마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비밀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위약금을 보고도 계약을 어길 만큼 강심장이 아닌데, 박래현은 엄마와 만나는 걸 허락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알려 주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 나 1년간 휴학할 거야.”
“…….”
“그래서 말인데, 배 타고 멀리 나가서 학비랑 생활비 좀 벌어올게.”
“배라니? 무슨 배?”
“배 타고 태평양 나가서 참치 잡을 거야. 캔에 든 참치 알지? 내가 잡은 참치, 엄마 밥상에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너 미쳤니? 안 돼. 그런데 가서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나는 태평양 한가운데보다 더 위험하고 고립된 곳에 발을 디뎠다. 그래도 엄마 얼굴을 오래 볼 수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엄마를 안심시키려고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나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건장한데 누가 나한테 덤비겠어? 나 주먹질 잘하는 거 엄마도 알잖아.”
“그래도 안 돼. 준영아, 엄마 수술 안 받아도 돼. 그 돈으로 너 납부금 내고 대학 졸업해서 좋은 데 취직하자.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수술을 받아.”
“나한테 대학이 중요해, 엄마가 중요해? 나 서운하게 그런 말 하지 마. 이미 계약 끝났고 계약금까지 받았어. 무를 수 없어, 엄마.”
“준영아.”
“수술 끝나고 나 안 보이더라도 씩씩하게 회복해. 코디네이터 선생님이랑 간병인이 시키는 대로 다 하고 밥도 잘 드셔야 해. 정우가 틈나는 대로 찾아올 거야.”
“너 왜 이래, 당장 떠날 사람처럼….”
“언제 자리가 날지 몰라서 오늘 밤 떠나는 배에 타야 해. 엄마 수술 무사히 끝나는 거 보고 갈게.”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1년 동안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과 선배 삼촌의 무용담을 떠올리며 배를 탄다는 핑계를 댔다. 사업에 실패한 선배의 삼촌은 빚쟁이들을 피해 남해안에서 조기 잡는 배에 탔다가 일이 힘들어 일주일 만에 탈출했다고 들었다. 남해나 서해는 연락할 수 있는 위치라 원양어선을 택했다.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엄마를 끈질기게 설득해 수술실로 들여보낸 다음 대기실 의자에 앉아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원했다.
“야, 어머니 수술실 들어가셨냐?”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내가 잘 아는 운동화 코끝이 눈에 들어왔다. 정우는 옆에 앉아 내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나 머리 안 감았어. 냄새나니까 만지지 마.”
“야 인마, 그래도 머리는 감아야지. 병원에 씻을 데 있잖아.”
“아침부터 수술 안 받겠다는 엄마 설득하느라 정신없었어.”
“왜 갑자기 수술을 안 받으시겠대?”
“내가 원양어선 탄다고 했거든. 참신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더라고.”
정우는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와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 내가 받을 생각을 않자 그는 친절하게 샌드위치 포장지를 벗기고 우유에 빨대를 꽂아 내게 내밀었다.
“내가 여기 지킬 테니까 빵 먹기 싫음 가서 밥이라도 먹고 와. 이러다간 어머니보다 네가 먼저 쓰러지겠다.”
참치와 양상추로 속을 채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 늦은 점심을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러고 있었다. 배는 고픈데 입이 써서 바나나 우유가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우는 내 옆모습을 빤히 지켜보다가 할 얘기가 있는지 입을 달싹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서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 두었다.
“윤준영, 정말 다른 방법은 없냐? 꼭 그런 좆같은 방법을 써야 해? 씨발, 연애도 제대로 안 해 봤으면서 애부터 낳는 게 말이 되냐고.”
내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새끼가 또 내 속을 뒤집으려 했다. 어제 통화하는 내내 정우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며 날 설득했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내게 알려 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야, 나도 존나 더러운 짓인 거 다 아니까 그만 갈궈. 씨발, 내가 당장 어디서 그 많은 돈을 구해. 네가 좀 구해다 줄래? 학교 관두고 좆 빠지게 일해서 5년 안에 갚을게.”
“새끼야, 나도 답답해서 그런다. 내가 구할 수 있으면 진작 구했지.”
“그럼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나라고 애 낳고 싶어 낳는 거 아니니까.”
“후, 진짜 돌겠다. 근데 너 정말 괜찮겠어?”
어제 병원에 돌아와서 정우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그에게 무작정 엄마를 부탁할 수 없어 상대가 누구인지만 빼고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가감 없이 말했다. 수술이 끝나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엄마와 돈을 믿고 맡길 사람이 정우 말고는 없었다.
“변태 같은 새끼한테 걸려서 이상한 짓 당할까 봐 걱정돼.”
“시간 금방 가겠지, 뭐.”
계약서를 읽었을 땐 박래현이 나를 성적으로 착취하려고 계약한 줄 알았는데 박영범 말을 들어 보니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타인과 접촉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배우자와 한 약속을 깨면서 나와 성교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조항은 왜 넣은 걸까? 박래현이 쓸데없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을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1년 동안 나를 다른 용도로 부려 먹을 계획인 것 같은데 40억을 주고 말 잘 듣는 개를 사다니, 제정신이 아닌 사람인 듯했다.
“오전에 코디네이터랑 상담했는데, 엄마는 수술 끝나고 한 달 정도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어. 한 달 지나면 요양 병원에서 1년 정도 보내기로 하고. 요양 병원은 이따가 목록 줄 테니까 네가 좋은 곳으로 골라 봐. 여기 병원비는 얼추 계산해 놨는데 혹시 플러스 될 경우엔 너한테 연락하라고 했어. 내가 네 통장에 1억5천 입금해 놓을 테니까 요양 병원 병원비랑 나머지 계산은 네가 알아서 해 줘.”
“너 그 사람한테 돈 얼마 받았어? 수술비도 계산 끝났다면서 1억5천이나 남아?”
믿을 수 없게도 통장엔 아직 23억이 남아 있다. 계약상 보안을 지켜야 하기에 정우에게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말해 줘도 정우는 믿지 못할 것이다.
“엄마 재수술하게 될지도 몰라서 그래. 만일 의사가 재수술을 권유하면 네가 엄마 설득해서 꼭 재수술받게 해 줘.”
지금도 몸이 안 좋은데 재수술을 하게 되면 생존율은 현저히 낮아진다고 했다. 엄마를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나를 봐서라도 엄마가 바로 건강을 회복하길 바랐다.
“야, 그 알파 새끼는 부모도 없대? 어떻게 아픈 부모한테 연락을 못 하게 해? 씨발 개 호로자식.”
차가운 남자였다. 을씨년스러운 갈색 눈동자엔 혐오를 제외한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남자에겐 동정심 같은 고귀한 감정이 자리할 공간이 없어 보였다.
“아주 개새끼야. 존나 얼굴이랑 몸 빼곤 다 갈아엎어야 해.”
“얼굴 반반해 봤자 뭐해, 나이 먹은 유부라며. 행여 너 딴맘 먹지 마라.”
“딴맘?”
“알파가 오메가랑 붙어먹으면 무슨 일 생길지 뻔하잖아. 떡치다 정들어서 나중에 정부 같은 거 되지 말고.”
“야, 씨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 남자랑 같이 안 자고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는다더라.”
“그래? 알파가 너 보고도 그런 소릴 하든?”
“내가 뭐.”
“우리 과에 너한테 군침 흘린 애가 한둘이 아냐. 오메가인 거 알려졌으면 알파 새끼들도 거기 가세했을걸?”
“미친, 너 그런 소리 한 번도 안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그러냐.”
“소개해 봤자 너 바빠서 만나지도 못할 건데 그 뒷감당을 내가 어떻게 하냐?”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돈 버느라 바빠서 조별 과제를 제외하곤 학과 일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정우가 때때로 아르바이트 끝날 시간에 동기들이 모여 있다고 불러내면 참석해 잡담을 나누는 게 다여서 사람들이 내게 관심 있는 줄 몰랐다. 연애도 안 해 보고 애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에 원통했는데 애인을 두고 이런 짓을 하지 않게 되어 되레 다행이었다.
“그 좋은 섹스 한번 안 해 보고 인공수정으로 애부터 낳아야 한다니, 내가 다 억울하다.”
“김정우, 나 위로하고 있냐, 긁고 있냐?”
당연히 위로하는 거지, 하고 대답하며 정우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더 듣고 싶지 않아서 말을 돌렸다.
“내가 매달 70만 원씩 알바비 지급할 테니까 엄마한테 매일 전화해서 상태 좀 물어봐 줘. 이상 있으면 나한테 문자 하고. 나중에 엄마 요양 병원 가시더라도 네가 챙겨 줘야 해. 퇴원한 뒤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정기 검진을 해야 한대.”
“돈은 됐고, 어머닌 내가 알아서 돌볼 테니까 너는 몸조심이나 해.”
“해준이 돌아올 때까지만 부탁해. 너 취업 준비로 바쁜데 알바비라도 지급해야 내가 편해.”
계약이 끝나서 돈을 다 받게 되면 정우에게 더 크게 답례할 생각이었다. 자기 부모도 아니고 친구 어머니를 선뜻 돌봐 준다는 그가 너무 고마웠다. 정우가 없다면 막막해서 지금 울고만 있을 것이다. 친구가 고마워서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사실 나도 두렵고 힘들어. 정우야, 나 잘하겠지? 엄마 살릴 수 있으면 뭐든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왜 이렇게 무섭냐?”
“준영아, 아무런 도움도 못 줘서 미안해.”
“씨발, 너 뒤질래? 지금 나한테 가장 힘이 돼 주는 사람이 넌데.”
“진짜 이럴 때 해준이 그 새끼만 있어도….”
“그러게, 그 새끼 생각하면 열 받아 미치겠다. 근데 너, 내가 부탁한 건 가져왔냐?”
정우에게 내가 신는 운동화보다 두 치수 큰 운동화와 정우 동생 명의로 된 핸드폰을 부탁했다. 엄마에게 정말 큰 일이 생겼을 때 정우랑 소통하기 위해서다. 만일 일이 최악으로 치달아 엄마가 위독해지면 마지막 가시는 길은 내가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럴 일이 없길 간절히 바라며 나는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바라보았다.
***
열두 시에 시작한 수술은 여섯 시에 끝났다.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수술이 매우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수술이 끝난 뒤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엄마를 지켜보다가 나는 뉘엿뉘엿 지는 해를 등지고 박영범 차에 올라탔다. 얼굴과 손이 퉁퉁 부어서 자식인 나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던 모습을 떠올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병원이 조금씩 멀어지다가 박영범이 방향을 틀자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머니 수술 잘됐다면서요. 축하해요, 윤준영 씨.”
“고맙습니다.”
관계자도 아닌 사람에게 환자 정보를 넘겨주는 병원에 엄마를 계속 맡겨도 되나 회의감이 들었다. 엄마 담당의와 박래현이 잘 아는 사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보호자나 본인 동의 없이 환자 정보를 넘기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왼쪽 다리는 왜 절고 있습니까?”
“어제 계단을 헛디뎌서 발목을 삐었어요.”
“윤준영 씨. 당신은 아이를 낳기로 계약한 몸입니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회사 일 안 바쁘세요? 이런 사소한 일을 왜 직접 하세요?”
박영범이 내 발목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운동화 속에 든 핸드폰이 깨지지 않게 걷느라 나도 모르게 왼발을 절었나 보다. 이 예리한 남자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칼이 쭈뼛 서며 몸에 식은땀이 돋았다.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니라서요. 래현이한테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박영범은 좌측을 살피다가 오른손으로 핸들을 부드럽게 꺾어 우회전했다. 어디로 가는지 묻는 대신 표지판들을 눈여겨보았다. 서울을 벗어나 교외의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 가둘 줄 알았는데 박영범은 어제 박래현을 만났던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서 그는 안전띠를 풀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김정우란 사람한테 혹시 계약과 관련해 얘기했습니까?”
“아니요, 엄마를 돌볼 사람이 필요해서 제 친구한테 부탁한 겁니다. 그것도 계약 위반입니까?”
핸드폰을 깔고 있는 발바닥에 홧홧하게 불이 일었다. 이 정도 정보력이면 정우가 동생을 시켜 새로 핸드폰을 개통한 사실을 다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박래현은 자존심이 강해요. 약점을 드러내는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나는 왼쪽 다리를 절뚝이며 차에서 내렸다. 앞서가던 박영범이 현관 앞에 멈춰 서서 나를 관찰했다. 나는 현관에 들어갈 때까지 잔뜩 긴장한 채로 걸음에 신경 썼다. 박영범이 먼저 들어간 걸 확인한 다음 신발을 벗는 척하며 핸드폰을 커다란 화분 뒤에 숨겼다. 그리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태연한 얼굴로 박영범을 따라 들어갔다.
집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대낮처럼 환한 거실에서 박래현을 발견했다. 막 샤워를 마쳤는지 남자의 머리칼과 얼굴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다리를 포갠 자세로 보고서 비슷한 것을 읽고 있던 그는 서류에서 천천히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는 이틀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옅은 갈색이었다. TV나 영화에서 숱하게 미남들을 봐 왔지만, 박래현은 좀 특이했다.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사람처럼 그는 이질적 아름다움과 독특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남자의 주변만 묘하게 공기의 질감이 달랐다. 손으로 만지면 빛나는 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여기 온 이유도 잊고 우두커니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시선이 부닥치자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오늘 돈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엄마 수술 무사히 마쳤습니다.”
남자가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 이 남자 덕에 엄마의 생명이 연장되었다. 절망에 빠진 나와 엄마를 구해준 은인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걸음걸이가 왜 그 모양입니까? 어디 다쳤어요?”
“어제 계단에서 다쳤습니다.”
“칠칠찮기는. 벗어요.”
“네?”
“속옷까지 다 벗으라고.”
박영범을 힐끗 쳐다보자 그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다른 일을 하는 척했다. 박래현은 나를 산 사람이라 내게 어떤 명령도 내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누르며 시간을 끌다가 남자의 재촉하는 눈빛에 양손을 교차해 티셔츠 끝자락을 잡았다. 쉽게 벗겨진 반팔 티가 러그 위로 떨어졌다. 남자는 읽고 있던 문서를 무릎에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내 상체를 빤히 응시했다.
얼굴과 귀 끝에 산불이 번지듯 열이 번졌다. 남자의 눈이 닿는 곳마다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가 살을 지지는 느낌이 들었다. 레스토랑에서 알바할 때 같이 일하는 남자애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벗어젖혔던지라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지만, 삼지창이 되어 나를 쿡쿡 찌르는 남자의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다. 노골적이고 모욕적인 눈길에 남자가 내게서 의도적으로 수치심을 끌어내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저의대로 행동하기 싫어서 나는 느긋하게 손을 내려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열었다. 바지와 드로어즈를 벗어 티 옆에 내려놓자 박영범이 내게 지갑을 건네주고 내 물건을 모두 가져갔다. 이제 이 집에 내 것이라곤 지갑과 헐렁한 운동화, 그리고 화분 뒤에 몰래 숨긴 핸드폰뿐이었다.
아이를 낳아 줄 사람이 어떤 몸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듯 남자의 시선은 내 몸 위를 무례하게 돌아다녔다. 수치스러워 손바닥으로 성기를 가리고 싶지만 이죽거림을 들을 게 뻔해서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멀리 벽에 붙은 그림에 눈을 주었다. 다행히 어디다 내놓기에 부끄러운 몸은 아니었다. 힘이 세다는 이유로 알바하면서 온갖 무거운 짐을 들어 나른 데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이동한 덕에 내 몸은 꽤 멋지다는 평을 들었다.
“잘 어울리는 옷으로 골라 놨으니 입어요.”
남자는 직사각형 탁자 위에 곱게 개켜진 옷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광택이 나는 검은색 천에 다양한 크기의 별이 점점이 박힌 파자마 가운은 허벅지 위쪽을 겨우 가릴 정도의 길이였다.
씨발 변태 새끼. 나한테 이런 걸 입으라고? 더없이 청순하고 출중한 얼굴로 입만 열면 깨는 소리를 하는 것도 훌륭한 재주였다. 그래도 알몸으로 있는 것보다는 나아서 서둘러 파자마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 파자마 아래 속옷이 있어 드로어즈를 입고 파자마에 두 팔을 꿰었다. 감정이 끓어올라서 단추를 잠그는 손끝이 자꾸 엇나갔다.
“앉아 있어요.”
스툴에 엉덩이 끝을 걸치고 앉으며 속옷이 보이지 않게끔 허벅지 위로 파자마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40억짜리 계약에 이 정도는 약과란 생각으로 무안함을 가라앉혔다.
“지갑 확인해 봐도 되죠?”
남자는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지갑을 열어 안을 살폈다. 그는 내 주민 등록증과 학생증을 꺼내 들여다보더니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 박영범을 불렀다. 이상하게 박래현보다 박영범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더 수치스러웠다.
“이것도 버려.”
박래현은 박영범에게 내 지갑을 휙 던졌다. 저기 내 돈과 체크카드가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박영범이 독심술이라도 쓰는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내게 건넸다. 차마 카드까지 달란 말은 할 수 없어서 돈만 받아 탁자에 내려놓았다.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박래현은 주민 등록증과 학생증을 챙겼다.
“지금부터 윤준영 씨는 내 개고 나는 윤준영 씨 주인입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의 위치를 밝힌 남자는 위로 포개어진 무릎에 두 손을 깍지 끼운 채 내 쪽으로 비스듬히 상체를 수그렸다. 유난히 동그랗고 투명한 눈동자가 내 눈을 꿰뚫을 것처럼 응시했다.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 나는 박래현의 개가 될 거라고 그랬다. 남자가 원하는 건 뭐든 해야 한다는 게 계약 조건이어서 나는 남자가 말한 대로 개가 되어야 한다. 개밥그릇에 밥을 먹고 네발로 기어 다니며 없는 꼬리라도 만들어 흔들어야 할 것이다. 재벌들은 어려서부터 돈 굴리는 법을 철저하게 배워서 절대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고 교수한테 들었다. 남자가 내게 40억을 준 이유는 임신과 더불어 자신의 변태 성향을 실현할 도구로 날 사용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왜 대답이 없어요? 계약할 때는 내 발바닥도 핥을 것처럼 굴더니, 이제 위기를 넘겼다 이겁니까?”
“아, 아니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내가 휘파람을 불면, 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앉아요.”
박래현은 자신의 말을 실험이라도 하듯 붉은 입술로 봉우리를 만들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미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버린 상태라 나는 재빨리 남자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뇌리에 여러 잡념이 출몰했지만, 작살 같은 시선에 꽂혀 어느 것 하나 건져 낼 수 없었다.
어렸을 때 우리 식구 사랑을 받았던 고양이, 보리의 눈처럼 알이 크고 매끄러운 눈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바싹 말라 건조해진 입술을 혀로 적시며 독기 어린 시선을 받아 냈다. 박래현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서 내 무릎부터 시작해 허벅다리 쪽으로 발을 이동시켰다. 서늘한 파충류가 살갗으로 스멀스멀 파고드는 느낌에 진저리가 났다. 내 몸에 손대지 않을 거라던 말에 방심하고 있었던 나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두리번두리번 박영범을 찾았다. 그 남자는 나를 안심시켜서 여기 데려오려고 거짓말을 한 걸까? 사기꾼을 통해 말과 행동만으로 상대를 파악해선 안 된다는 걸 배워 놓고 나는 또 시행착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알았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뒤통수를 맞아서 기분이 참담했다.
내가 본능적으로 물러나려 하자 커다란 발이 내 허벅지를 꾹 내리눌렀다. 생선 비늘을 벗기듯 깊게 문지르던 발이 파자마 자락을 들치고 늑골과 가슴, 빗장뼈를 지났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와 옆구리를 스쳐 엉덩이로 향했다. 서늘한 발이 지나가는 길마다 나를 보호하고 있던 비늘이 벗겨져 살갗이 따갑고 아팠다. 내 자존심은 비린내를 풍기며 한 겹씩 떨어져 나가 바닥에 수북이 쌓여 갔다.
“억제제는 어떤 종류를 썼습니까?”
“릴리프 위크리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페로몬 억제제에는 일주일에 한 번 먹는 약과 매일 먹는 약, 히트 사이클에만 먹는 약이 있는데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약을 먹었다. 알파 페로몬에 전혀 반응하지 않게 해서 오메가를 베타로 만들어 주는 고마운 약이지만 알파 페로몬에 면역력을 키울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히트 사이클 기간에만 억제제를 먹는 오메가들은 평소 다양한 알파 페로몬에 단련돼서 상대가 페로몬을 방출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의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첫 히트 사이클을 제외하고는 알파 페로몬을 맡아 보거나 내가 페로몬을 흘린 적이 없어서 알파 페로몬에 취약했다.
“오늘부터 억제제는 먹지 말아요.”
“네.”
첫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 크게 덴 이후로 한 번도 빼지 않고 매주 토요일에 억제제를 먹었다. 원래대로면 내일 약을 먹는 날이다. 박래현이 억제제부터 챙기는 걸 보면 몸을 준비시켰다가 히트 사이클에 맞춰 인공수정을 할 모양이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내 몸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걱정스러웠다.
“래현아, 방금 해외 사업부에서 연락 왔는데 KEB-C27 FDA로부터 조만간 승인 떨어질 거 같대.”
어디선가 나타난 박영범이 들뜬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내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박영범에게 화가 나서 나는 박영범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박영범은 박래현을 보느라 분노에 찬 내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 조만간이면 내년 4월경에 발효 일자 부여받겠네.”
“언론에 터트리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하네.”
“아직 안 돼. 확정되면 터트려도 늦지 않아.”
“같은 적응증 대상으로 EMA에도 신약승인허가서 제출해.”
“알았어. 나 아버지 생신이라서 본가에 들어가 봐야 해. 오늘은 본가에서 자고 올 거야.”
“삼촌한테 안부 전해. 그리고 아침에 집에 들러. 같이 출근하게.”
“그래. 내일 보자.”
박영범과 시선이 마주치려는 찰나, 커다랗고 억센 손아귀가 내 턱을 틀어쥐고 억지로 방향을 바꿨다. 냉기가 흐르는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충직한 개가 되려면, 주인을 앞에 두고 다른데 눈 돌리면 안 되겠죠, 윤준영 씨.”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서 그러잖아도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데 남자는 비겁하게 지위를 이용해 나를 내리눌렀다. 이 오만한 남자에게 내가 느낀 치욕을 되돌려 줄 날이 올까. 계약이 끝나는 날 저 못된 주둥이를 지근지근 밟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봐주겠지만 다음부터 말 안 들으면 혼날 겁니다. 알겠어요?”
나를 혼내겠다는 말에 놀라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무거운 침묵 사이로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왼손을 뻗어 내 턱을 잡아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내 입술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엄지가 입술 한가운데 이르러 아프게 살을 내리눌렀다. 다른 사람 만지는 걸 싫어한다고? 박영범 말을 믿은 내가 등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개가 주인한테 해야 할 일이 뭐라고 생각해요, 윤준영 씨?”
“복종하고 잘 따르는 겁니다.”
입술이 움직이자 입술을 누르는 남자의 손이 같이 움직였다. 남의 손을 타 본 적 없는 입술에 이물감이 느껴져 난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남자의 손을 밀어냈다. 박래현은 당황한 표정으로 내 얼굴에서 손을 거뒀지만,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주인을 즐겁게 해 줘야죠. 매일매일 새로운 방법으로.”
“뭘 어떻게 해야 즐거워지실 건데요?”
“그건 돈을 받아먹은 당신이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설마 40억 먹고 튈 생각은 아니겠죠?”
남자는 물티슈를 꺼내 나를 만졌던 손을 꼼꼼하게 닦았다. 기다랗고 촘촘한 속눈썹이 공작의 깃털처럼 화려하게 팔랑였다. 잠시 현실을 접어 두고서 나는 남자의 수려한 얼굴을 눈으로 좇았다. 가파르게 치솟은 콧날 아래로 모양과 색이 뚜렷한 입술이 양쪽으로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나 날렵한 턱선 때문에 자칫 냉정하고 비열해 보이는 얼굴을 올라간 입꼬리가 중화시켰다.
남자가 갑자기 상체를 숙여 입술이 닿을 것처럼 거리가 가까워졌다. 따뜻한 호흡이 뺨 위로 흩어지면서 박래현이 내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왼쪽으로 꺾었다. 다음 순간 귓바퀴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남자는 내 귀에 입술을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개라는 증거니까 아이 낳을 때까진 빼지 말아요. 뺐다간 계약 위반으로 고소할 겁니다.”
귀가 얼얼해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이 남자는 내 귀에다 뭘 꽂아 넣은 걸까. 너무 아파서 만져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지면 감염됩니다. 함부로 만지지 말아요.”
“…….”
“소독약 줄 테니까 틈틈이 소독하고,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씻고 나와요.”
박래현은 일회용 주사기 같이 생긴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약품이 든 상자에서 소독약과 거즈를 꺼내 내게 건넸다.
“어디서 씻어야 하는데요?”
“따라와요. 당신이 쓰게 될 방 안내해 줄 테니까.”
내내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일어서려니 두 다리가 저릿저릿해 몸이 휘청거렸다. 몇 걸음을 옮기던 나는 오른쪽 발에 감각이 없어져서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고 말았다. 파자마 상의가 말려 올라가 엉덩이가 다 드러났다. 이대로 쓰러져 고이 잠들고 싶은 마음만 내 머리를 지배했다. 진심으로 쪽팔려 귀가 아픈 것도 잊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엄마가 미치게 보고 싶었다.
“윤준영 씨. 지금 나 유혹해요?”
비아냥이 섞인 말투에 나는 고개를 힘껏 저으며 일어났다. 나체도 다 보여 줬는데 속옷에 가려진 엉덩이쯤이야 하고 대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방 쓰도록 해요.”
“네.”
“맞은편은 박 실장 방이니까 헷갈리지 말고. 씻고 식당으로 와요.”
퇴근하고 나서까지 성질 더러운 상사의 비위를 맞춰야 하다니 박영범도 불쌍했다. 세상엔 불행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나는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다.
잠깐! 박영범이 이 집에 산다고? 내가 지금 위안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반은 헐벗은 모습을 박래현뿐만 아니라 박영범에게도 보여 줘야 한다는 말이었다. 박래현이 휘파람을 불면 그 앞에서 개처럼 네발로 기어 다니는 모습도.
나는 자괴감에 몸부림치며 남자가 안내해 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괴롭고 충격적인 일이 연달아 일어난 탓에 방어기제가 작동했는지 금방 포기 상태가 되어 버렸다. 박래현은 이 집이 아니라 주로 자기 집에서 지낼 테니 일주일에 한두 번만 그 수모를 견뎌 내면 될 것이다. 내가 땅 판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박래현이 퍼붓는 정신적, 육체적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방어막을 견고히 세우는 게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보며 의도적으로 정신을 분산시켰다. 내가 거주할 방은 우리 식구가 살았던 공간을 다 합한 것보다 커 보였다. 정원을 내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장정 다섯이 누워도 될 만큼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고 침대 왼쪽에는 기다란 카우치와 일인용 소파가 있었다.
나는 유리문 쪽으로 걸어갔다.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온 통유리 너머로 화분과 나무를 이용해 정성스럽게 꾸며진 테라스가 보였다. 그 뒤쪽 정원에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여름밤의 열기에 취해 내 손바닥 크기의 이파리들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집을 갖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벽에 걸린 이상한 그림들을 지나 침실 안쪽에 난 통로를 따라가 욕실 입구에 도착했다. 욕실 전등을 켜고 반투명한 유리문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 역시 내 상상을 벗어난 크기였다. 무슨 복을 타고나면 이런 집에서 살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나는 소독약을 거즈에 묻혀 피어싱이 박힌 곳을 살살 눌렀다. 귀 소독을 끝낸 다음 소독약을 세면대 아래 서랍에 넣어 두고 파자마를 벗어 수건걸이에 걸었다.
귀가 욱신거려 세면대 위 거울에 왼쪽 귀를 비춰 봤다. 예고도 없이 무식하게 뚫린 귓바퀴는 통증 때문에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 사이로 별 모양의 보석이 박혀서 조명에 따라 색색으로 빛났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피어싱 때문에 내 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울적한 기분을 안고 욕조 맞은편에 있는 샤워 부스로 들어가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욕실을 나간 순간 1년이 훌쩍 지나 있어서 곧장 엄마 곁으로 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수술은 잘됐다고 했지만 그 뒤로 엄마가 괜찮은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정신이 돌아오면 나부터 찾을 텐데 꼭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마음 아팠다.
샤워를 끝내고 수납장에서 커다란 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으며 욕실 밖으로 나왔다. 속옷을 찾기 위해 옷장을 뒤지던 나는 서랍에서 새 드로어즈를 발견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속옷을 꺼내 볼에 비볐다. 이따위 작은 천 쪼가리가 뭐라고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걸까. 기쁨도 잠시, 옷장에 파자마와 셔츠 윗도리만 즐비하게 걸려 있음을 알게 된 나는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속옷이라도 건진 게 어디야, 혼잣말하며 그나마 길이가 길어 보이는 파자마를 골라 입었다. 이 파자마는 단추가 없어 허리끈을 묶어야 했다. 가슴팍이 보인다는 단점이 있지만 허벅지를 가린다는 장점이 단점을 상쇄했다.
더 늦어지면 박래현이 화낼 것 같아서 나는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정우가 사 온 샌드위치와 바나나 우유로 하루를 버틴 위장이 밥을 달라고 아우성이지만 박래현과 나란히 앉아서 저녁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우려와 달리 박래현과 나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쳤고 박래현은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그가 배우자에게 오늘 일을 보고하러 갔으리라 추측했다. 박래현이 거기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침대에 누워 박래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박래현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들었다. 저택은 2층 건물이고 조금 떨어진 별관에 집을 관리해 주는 이 차장 부부와 그들의 자녀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본채 1층엔 내 방과 박영범 방이 있고 2층은 자신의 공간이므로 절대 접근하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경비원들이 집을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으므로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란 말도 덧붙였다. 엄마가 병원에 있고 위약금이 걸려 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도망을 시도할 까닭이 없다.
‘배우자 되시는 분은 다른 데서 사시나 봐요?’
이 엿 같은 호기심이 언젠간 나를 죽이고 말 것이다. 이 집에선 말하기 전에 꼭 두 번은 생각해야 하는데 나는 원래부터 신중한 성격이 아니었다. 다행히 남자는 내 질문을 일축하고 경고를 이어 갔다. 내겐 TV, 컴퓨터, 핸드폰이 허락되지 않았다. 관리인 부부나 그들의 자녀들과 말 섞는 것도 금지되었다. 내가 이 집에서 할 일이라곤 하루 세끼 꼬박꼬박 먹으면서 박래현을 즐겁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 남이 차려 준 밥을 먹으며 일주일을 빈둥빈둥 보내는 건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 꿈을 이런 방식으로 이룰 줄은 몰랐다. 수능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나는 매일 시간에 쫓기며 살았다.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날 보며 학점 관리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줄이라고 정우가 충고했다.
학비는 학자금 대출로 어떻게든 막고 있지만, 뭉텅뭉텅 들어가는 생활비를 무시하고 아르바이트를 줄일 순 없었다. 재작년 2학기엔 생활비를 비축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휴학계를 내고 닥치는 대로 돈을 모았다. 그리고 작년 2학기에 복학해서 낯선 후배들과 수업을 들어야 했다. 너무 힘들어서 학교를 때려치우고 취직을 고려한 적도 있었지만, 번번이 엄마 반대에 부딪혔다.
모아 뒀던 돈을 엄마 검사비와 약값으로 다 써 버려서 다음 학기에 또 휴학계를 낼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 휴학계를 내야 하는데 어제 정신이 없어서 해결하지 못했다. 박래현에게 부탁해 볼까 고민하다가 당장 급한 문제는 아니어서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정우와 의기투합해 경영대에 원서를 내면서 나는 공인회계사가 되기로 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직장을 잡은 뒤 틈틈이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는 게 내 원대한 목표였다. 그런 꿈이라도 있어야 힘든 현실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시간이 넘쳐 나는 지금, 사람이 아닌 개로 살아야 해서 공부할 여건이 안 됐다.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1차 시험에 합격하면 졸업하기 전에 자격증을 딸 가능성이 있는데 박래현이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이다.
계약이 끝나면 15억이 더 통장에 입금될 테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경영대에 다닌 덕에 나름대로 돈 불리는 법에 관해 고민하고 주워들은 게 많았다. 그러니 종잣돈만 있으면 돈을 벌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금액이 황당하게 커서인지 40억이란 돈이 내 수중에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통장에 남은 23억도 무사히 들어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어디론가 증발해 버릴 것처럼 불안했다.
나는 새하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최근 들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사고의 실타래가 점차 엉키기 시작했다. 엄마가 보고 싶고, 같이 있을 땐 서로 다투고 싸움질만 했던 동생 해준이 그리웠다. 우리 세 식구가 오순도순 모여 살 날이 오긴 올까. 하찮게 여겼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베개를 끌어안은 채 정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테라스 철망을 타고 오른 덩굴장미가 핏덩이 같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엄마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내 손엔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이 피를 철철 흘리며 뛰고 있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나는 구멍 난 가슴에 새 심장을 밀어 넣었다. 엄마, 눈 좀 떠 봐, 엄마! 온통 피투성이가 된 엄마의 몸을 흔들며 나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양손이 피에 젖어 축축한 것 같아 눈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가 피가 아니라 땀인 걸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간호사가 와서 엄마 혈압을 잴 시간인데 뭔가 이상했다. 나는 6인용 병실의 좁디좁은 간이침대가 아니라 풀 냄새가 밴 푹신하고 깨끗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기억나지 않아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렴풋이 어제 일이 떠올랐다. 여긴 박래현 집이다.
엄마가 의식을 회복해서 날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아침부터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이쳤다. 꿈 때문에 긴장한 탓에 눈이 아프고 머리가 무겁고 어깨가 결렸다. 악몽에서 깨어나 나는 박래현이 속한 더 무서운 악몽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맨다리에 감긴 얇은 이불을 걷어 내고 뭉개진 잠을 떨치며 유리문 쪽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초여름의 아침은 내 의사와 무관하게 청량하고 선명했다.
기분을 끌어 올리려고 애쓰며 나뭇가지에 모여든 새들을 응시했다. 옛날에 비둘기를 메신저로 사용했듯 새들의 발에 나는 잘 있다는 쪽지를 적어 엄마에게 보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개를 펴고 날아가자 초록색 이파리들이 몸통을 흔들어 고여 있던 햇살을 떨어트렸다. 색색의 빛이 화려하게 산란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한발 내디디려다가 윗도리만 걸친 내 몰골이 생각나 욕실로 들어갔다. 얼른 씻고서 착한 개가 되어 주인이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어제 나간 박래현이 돌아왔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 남자에게 돈을 받은 이상 나는 역할에 충실할 작정이었다.
세면대 앞에서 이를 닦으며 거울 속의 나를 관찰했다. 어젯밤부터 화끈거리던 귓바퀴는 부어서 발개졌다. 욕실 조명 탓인지 아니면 묘한 빛으로 반짝이는 보석 탓인지 얼굴이 화려해진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내 처지가 달라져 그렇게 보인다는 걸 깨닫고 슬퍼졌다. 샤워를 마치고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대충 걷어 낸 뒤 회색 드로어즈에 체크무늬 파자마를 골라 입었다. 보들보들한 천이 팔뚝과 몸을 휘감았다. 어젠 밤이라 그나마 괜찮았는데 아침부터 이상한 옷차림으로 박래현과 박영범을 볼 생각에 뒷골이 땅기고 불쾌한 기운이 상승했다.
까놓고 말해서 박래현 앞에선 괜찮았다. 박래현 주장대로 그는 주인이고 나는 그에게 고용된 개인 척하는 인간이라고 여기면 된다. 하지만 박영범이나 어제 식탁을 차려 줬던 사람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키지 않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계약이 끝나면 어차피 서로 얼굴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나체로 춤을 추며 돌아다닌다 한들 소문 퍼질 일은 없을 테고 몇 년 지나면 저들 머리에서 내 존재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엄청난 출연료를 받고 영화에 캐스팅됐다고 여기면 그만이었다. 이상한 꼬락서니의 나는 윤준영이 아니라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는 배우일 뿐이다. 용기가 솟아올라 도란도란 얘기 소리가 들리는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박래현과 박영범이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단에서 오 부장님 몇 시에 만나기로 했지?”
“열 시 반에 공단 3층 회의실에서 보기로 했어.”
남자는 드레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시계를 확인했다. 몇 시쯤 되었을까? 이 넓은 집에 내게 시간을 알려 줄 시계 하나가 없다니 기가 막혔다.
“약가 협상은 오늘로 끝낼 거야. 4차 협상은 없어.”
“그게 제일약품에서 당뇨 표적 치료제를 너무 저렴하게 제시해서….”
“제일약품 측 전략은, 자기네가 못 먹을 거 같아서 아예 판을 흔들자는 거야. 내가 공단 측과 직접 협상할 테니까 오 부장은 옆에서 장단만 맞추라고 해. 감당하기 어려우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어야지, 자기가 해결할 것처럼 큰소리쳐 놓고 결과가 이게 뭐야.”
박래현의 얼굴과 목소리에선 여유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타고난 외모에 재력까지 갖췄으니 저 남자는 아쉬울 게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상대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나? 분명 박영범이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박래현은 말끝마다 반말이었다. 박영범 아버지에게 삼촌이라고 한 걸 보면 사촌지간 같은데 싸가지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사업 얘기를 하고 있는데 끼어들 수는 없어 나는 조용히 어제 앉았던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나를 발견한 박영범이 대화를 나누다 말고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준영 씨, 어젠 편하게 잘 잤어요?”
“네. 덕분에 잘 잤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박영범에게 보이지 않는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며 욕을 날렸다. 박영범이 내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박래현의 질 나쁜 행동에 충격을 덜 받았을 것이다. 박영범은 목이 타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물을 줬다가 도로 뺏어 갔다.
“우린 아침 먹었는데, 준영 씨 배고프면 식사 차려 달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전 시간 많으니까 이따가 천천히 먹겠습니다.”
박영범을 보며 예의상 웃어 준 순간 귓가로 낮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박래현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박영범도 보기에 거북할 테니 주인과 개 놀이는 둘이 있을 때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입도 벙긋 못하고 위압적인 눈빛에 눌려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그 앞에 얌전히 앉았다. 남자는 손을 뻗어 구멍이 뚫린 내 왼쪽 귓바퀴를 진득하게 쓸어 올렸다. 귀걸이가 박힌 곳에서 아릿하게 통증이 올라왔다.
“주인보다 다른 사람이 더 반가워요? 아니면 당신 주인이 누군지 아직 잘 몰라서 이래요?”
부드러운 말투 속엔 파랗게 날이 선 칼이 숨어 있었다. 남자가 내 쪽으로 상체를 수그려 산뜻한 향수 냄새가 코로 밀려 들어왔다. 이내 남자의 커다란 손이 불안에 떨고 있을 얼굴을 틀어쥐어 옆으로 꺾었다. 기시감이 채 느껴지기도 전에 같은 쪽 귓바퀴에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갔다.
“으윽, 흑!”
생살을 뚫는 아픔에 저절로 눈물이 맺혔다. 그는 귀 뚫은 도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 피어싱을 새로 채웠다. 태연자약한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욕구가 폭발했다. 면상에 대놓고 온갖 상스러운 욕을 퍼부어 주고 싶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요동하는 감정의 파고를 갈무리할 즈음 건조한 눈이 나를 쏘아보았다.
“윤준영 씨. 말해 봐요, 당신 주인이 누군지.”
“박래현 상무님입니다.”
“상무님? 내가 당신 상삽니까? 그쪽 내 직원으로 두고 싶지 않은데, 주인님이라고 부르세요.”
“네….”
“지금 불러 봐요.”
“…주인님.”
미치광이가 주관하는 놀이에 참여하려니 스물셋의 나이가 무색해서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다.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남자는 성격 자체가 뻔뻔한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주인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주인이 누군지 잊어버릴 때마다 귀에 구멍이 뚫릴 겁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뻗대 봐야 나만 손해란 판단을 내리고서 나는 최대한 처연한 표정으로 남자의 동정심에 호소했다. 턱을 쥐고 있던 남자가 엄지를 움직여 피어싱이 박힌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털이 숭숭 달린 무서운 애벌레가 피부 위를 기어가는 것 같아 팔뚝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몸을 파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실감 났다. 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무조건 상대에게 맞춰 주며 상대의 뜻에 따라야 했다.
“래현아, 출근하자. 오늘 일정 빡빡해.”
박래현은 내 볼을 손등으로 툭툭 두드린 뒤 물티슈를 꺼내 꼼꼼하게 손을 닦았다. 안 만지면 될 텐데 만져 놓고 더럽다는 듯 손을 닦는 모습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주인 나가는데 배웅 안 해요? 발가벗겨서 채찍으로 좀 때려야겠네.”
난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박영범 있는 데서 철퍼덕 넘어져 속살을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나란히 서 보니 내 키가 꽤 큰 편인데도 두 사람은 나보다 한참 더 컸다. 거기다 둘 다 고급스러운 정장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 짧은 가운 하나만 달랑 걸친 내가 더 초라해 보였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거실 테이블 아래 소독약 있을 겁니다. 어제 준 약 다 썼으면 갖다가 써요.”
“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비꼬는 듯한 말투가 되어 버렸다. 박래현이 눈썹 끝을 추어올리자 나는 얼른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잠시 후 현관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 거실로 달려가 두 사람을 실은 차가 지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 뒤로 20분을 더 기다렸다가 화분 뒤에 숨겨 놓은 핸드폰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수납장을 뒤져 밀폐 용기를 찾아낸 나는 방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켜고 문자를 확인했다.
「어머니 중환자실로 옮기셨음. 회복은 순조로운 편.」
정우 문자를 확인한 순간 긴장이 풀려서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정우에게 전화해서 더 자세히 물어보려다가 마음을 돌려 핸드폰 전원을 껐다. 하나씩 허용하다 보면 누군가에게 들킬 위험도 커질 것이다.
나는 핸드폰과 밀폐 용기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 밀폐 용기가 새는지 안 새는지 확인한 뒤 물기를 제거하고 그 안에 핸드폰을 넣었다. 그리고 변기 물탱크 안에 밀폐용기를 감췄다. 일사천리로 일을 끝내고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찬물에 세수했다. 침대에 앉아 겨우 한숨 돌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줬더니 어제 저녁 식사를 차려 줬던 남자가 밖에 서 있었다.
“윤준영 씨, 식사하셔야죠. 지금 준비할까요?”
“저 먹고 싶을 때 차려 먹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상무님께서 식사 꼭 챙겨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십 분 후에 주방으로 오세요.”
“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상 차리고 치우는 데 익숙해져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날 위해 상을 차려 주는 게 어색했다. 욕실로 들어간 나는 커다란 수건을 찾아 하반신에 두르고 수건 귀퉁이를 단단히 동여맨 뒤 식당으로 갔다. 식탁에는 입이 딱 벌어지게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남자는 밥그릇 옆의 잔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물을 따랐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에 사라졌던 식욕이 마구 솟구쳤다. 나는 잡곡밥을 수저 가득 떠서 입에 넣고 빨갛게 볶아진 낙지요리부터 맛봤다. 보기보다 싱거웠지만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요리를 준비해 준 남자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윤준영 씨. 저는 이 집을 관리하는 이재호입니다. 편하게 이 차장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제 아내는 정 차장이라고 부르면 돼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상무님께서 윤준영 씨랑 개인적으로 대화 나누는 걸 금지하셨습니다. 우리 부부나 애들이 윤준영 씨한테 개인적으로 말 걸지 않아도 서운하게 여기지 말아 주세요.”
“…….”
“아침 식사는 일곱 시 반, 점심 식사는 한 시, 저녁 식사는 일곱 시입니다. 저녁 식사는 상무님 일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식사 끝나시면 우리가 치울 테니 그대로 두고 할 일 하시면 됩니다. 월, 수, 금, 토 아홉 시부터 열두 시까지 청소 시간입니다. 그리고 세탁물은 욕실 앞 세탁 바구니에 넣어 두세요.”
“할 일도 없는데 제 방과 욕실은 직접 청소하겠습니다.”
“안 됩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손님을 대하듯 공손한 태도로 말을 마쳤다. 그는 질문할 시간도 주지 않고 편하게 식사하라는 말을 남기고 주방에서 사라졌다. 식욕을 자극하던 밥과 반찬이 순식간에 색채를 잃고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수저를 놓으려다 오기가 생겨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몸을 튼튼하게 가꿔 얼른 아이를 가져야 박래현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아이만 낳아 주면 병원비 걱정 안 해도 되고 졸업할 때까지 공부에 전념할 수 있으니 아이를 갖는 게 급선무였다.
피상적으로 여겼던 아이라는 단어가 체한 것처럼 가슴에 얹혔다. 박래현 나이로 봐서 그의 배우자도 아직 젊을 텐데 무슨 연유로 아이를 못 낳는지 궁금했다. 인공수정을 시도한다는 걸 보면 박래현 정자에는 별 이상이 없고 상대에게 문제가 있는 듯했다.
그러면 내가 낳은 아이가 JS 제약의 후계자가 되려나? 나중에라도 박래현 부부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내 아이는 배다른 형제자매들에게 밀려 뒷전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기 아이니까 박래현이 조금은 챙겨 주지 않을까. 엄마가 눈물 흘려 가며 시청하던 주말 드라마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더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내 아이는 저를 낳아 준 아빠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다른 사람을 부모로 여기며 자랄 것이다. 나는 아이와는 거리가 먼 판판한 배를 만져 보았다. 여기에 아이가 생긴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미묘해졌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망상에 빠져 있던 나는 그릇을 챙겨 습관적으로 개수대에 갖다 놓았다가 이 차장 말이 생각나 도로 식탁에 올려 두었다. 상대에게 부담 주는 행동을 사서 할 필요는 없었다.
커피가 당겨서 수납장을 살펴보다가 낱개로 포장된 드립 커피를 발견했다. 포장지를 뜯어 드립 커피를 컵에 걸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커피 가루에 부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황홀할 정도로 깊이가 있었다.
커피가 내려진 머그잔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허리에 둘렀던 수건을 풀어 버리고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그윽한 향과는 달리 쓰고 신맛이 촌스러운 내 입에 영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설탕을 타러 가긴 귀찮아 테이블에 두 다리를 올리고 반쯤 누운 자세로 커피를 마셨다. 파자마 자락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기다란 종아리와 흰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메가들은 알파와 발정기를 보낼 때 특히 아름다워진다고 했다. 달콤한 페로몬과 빛나는 외모를 이용해서 자신과 관계한 알파를 각인시키려는 생존 전략이었다. 나처럼 늦게 발현한 오메가도 예외는 아니라는데,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해준은 나보다 1년 4개월 먼저 오메가로 발현했다. 평소 알파들과 잘 어울려 다녔던 해준은 오메가로 발현해서 기뻐했지만 나는 해준의 발현이 달갑지 않았다.
해준이 오메가라면 일란성 쌍둥이인 나 역시 오메가로 발현할 확률이 높았다. 나는 베타로 사는 데 익숙해져서 오메가로 발현하는 게 싫었다. 오메가는 페로몬을 조절하기 위해 억제제를 먹어야 하고 언제 알파와 붙어먹을지 몰라서 이성에게 연애 상대로 인기가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던 내게 발현은 지뢰와 같았다. 의지대로 형질을 바꿀 수 있다면 난 베타로 사는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커피가 삼분의 일쯤 남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귀를 뚫었다는 사실을 깜박한 채로 돌아눕다가 극심한 통증에 벌떡 일어났다. 귀찮아서 내버려 뒀는데 귀를 소독하지 않으면 귀가 썩어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박래현에게 트집 잡히고 싶지 않아서 나는 새 소독약과 거즈를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손을 씻은 뒤 거즈에 소독약을 묻혀 발갛게 부어오른 귀에 바르자 상처에서 거품이 일며 따끔거렸다. 소독을 마치고 나는 귓바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작은 보석들로 이루어진 피어싱은 하나는 별 모양이고 하나는 상현달 모양이었다. 보석의 종류가 뭔지 알 수 없지만 둘 다 번쩍번쩍 빛났다.
피어싱은 언제든 뺄 수 있지만, 피어싱 때문에 생긴 상처는 언제쯤 없어질까. 이 집을 나가고 나서도 한참 지나야 없어질 상흔이었다. 감상에 젖으려는 나를 경계하면서 나는 빈 통과 거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핸드폰이 숨겨진 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욕실에서 나왔다.
***
박래현과 박영범은 그날 나가서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엔 나 혼자 지내는 게 퍽 좋았다. 일어나자마자 문자로 엄마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아침을 먹고 널따란 방에서 뒹굴었다.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서 뛰어 보기도 하고 방 전체를 덮은 표범 무늬 러그 위에서 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배웠던 태권도 동작을 취해 보기도 했다. 그래도 심심하면 정원에 나가 7월의 열기 속을 무작정 내달렸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달리고 나서 샤워로 땀을 씻어 내면 잠시 내 처지를 잊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멀리서 저택의 철문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는 팔굽혀 펴기를 했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여러 가지 잡생각으로 밤에 잠들 수가 없었다. 엄마는 회복이 순조로워서 어제 오후에 개인 병실로 옮겼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가 6인실을 달라고 버텨서 한참 실랑이가 벌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면역 억제제 때문에 감염 위험이 커서 일반 병실은 위험한 데다가 박래현과 계약한 이유가 엄마 때문이라 엄마에게 돈을 아끼고 싶진 않았다. 여기에 오기 전 반드시 1인실을 사용해 달라고 정우에게 부탁해 놓은 이유였다.
모든 게 순조로워서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는데 임신 걱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따금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뚫고 아이의 작은 손과 발이 불쑥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 저택에 고립된 내가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밤에 악몽을 꾸지 않으려고 정원에 나가 지칠 때까지 뜀박질했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외로움이었다. 나 홀로 무인도에 갇힌 것처럼 사방이 적막하고 쓸쓸했다. 책이나 노트북 또는 TV가 있다면, 혼자 지내는 게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며칠을 내리 무료하게 지내다 보니 누구라도 붙잡고 말을 걸고 싶었다. 어쩔 땐 박래현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어쩔 땐 핸드폰을 꺼내 정우에게 전화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때마다 박영범의 충고를 떠올리며 이성을 되찾았다. 엄마 상태가 궁금해 어쩔 수 없이 가져왔지만 핸드폰이 들통나면 나는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평생을 박래현에게 저당 잡혀도 갚을 수 없는 돈이다.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저택 관리인 부부는 나를 그림자 취급해서 말을 붙일 수 없었다. 하체가 다 드러난 민망한 모습을 그들 부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조심했는데 그들이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하자 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맨다리로 집 안을 돌아다녔다.
여기 온 지 10일째 되는 날도 저녁을 혼자서 저녁을 먹었다. 그사이 두 사람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박래현은 자기 집에서 지내다가 히트 사이클에 맞춰 여기에 들를 계획인 듯했다. 아니, 그 남자는 정자만 제공하면 되므로 내가 임신에 성공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얼굴 마주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런 일을 허락하지도 않겠지만, 내가 박래현 배우자라면 박래현이 이 집에 머무는 게 끔찍하게 싫을 것이다. 마음이 없어도 의지와 무관하게 붙어먹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알파와 오메가이다. 발정기에 접어든 오메가를 무시할 정도로 자제력이 강한 알파는 극소수라고 들었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관계한 상대에게 빠져서 각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각인하면 적어도 5년을 그 오메가에게만 집착하여 다른 이들에겐 전혀 애정이나 성욕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오메가는 상대에게 각인할 확률이 약간 낮아서 오메가와 알파 사이에서만 생기는 각인 메커니즘은 알파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한다. 모든 점을 고려했을 때 박래현이 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박래현이 나를 개 취급할 때만 해도 퇴근한 남자 앞에서 매일같이 다리가 저리도록 무릎을 꿇고 앉아 귀를 쫑긋거려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대답해 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이 차장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갔다. 밥을 먹으면 곧장 내 방으로 직진했는데 오늘따라 무료해져서 거실로 갔다. 이 집이 몇 평이나 될지 내가 살았던 집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려다가 포기했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집 내부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은은한 파스텔 톤의 벽과 흰색의 높은 천장, 바닥에 깔린 기이한 문형의 러그와 화려한 색의 소파는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감각적이었다. 거실에 배치된 가구나 조명, 회화와 조각들은 문외한인 내게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여기에 푸르른 이파리를 잔뜩 매단 키 큰 나무들과 작은 화분들이 적재적소에 놓여서 집 안에 청량한 기운을 더했다.
나는 계단 두어 개를 내려가 열두 명 정도의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커다란 직사각형 테이블과 의자를 지나 거실 벽에 걸린 그림으로 향했다. 벽에 줄지어 선 그림들을 비추는 조명 때문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갖춘 미술관에 온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따라 걷다가 기괴한 인물이 그려진 유화 앞에 멈춰 섰다. 그림 속 인물은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 같은 얼굴로 울고 있었다. 나는 초상화에 그대로 투영된 나를 보았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모호한 경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 여자를 사귀고 싶은데 남자에게서 쾌락을 얻어야 하는 남성 오메가. 다른 오메가들처럼 일찍 발현했으면 내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덜 고민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그림 속 남자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우리 친구 할까요? 전 윤준영입니다.”
“…….”
“그쪽 이름은 음, 라일리가 좋을 것 같네요.”
상대가 내 말을 들어 준다고 생각하니 숨통이 트였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탓에 녹슬어 말을 더듬을 줄 알았는데 내 목소리는 의외로 매끄러웠다.
“물어볼 게 있는데 대답 좀 해 줄래요?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손기호, 그 사기꾼, 지금 어디 있을 거 같아요? 씨발, 내가 이 집 나가면 그 개새끼부터 찾아서 감방에 처넣을 겁니다.”
그 남자만 아니었어도 내가 여기 갇힐 일은 생기지 않았다. 간병인을 쓴다거나 개인 병실을 사용할 순 없겠지만 내 눈으로 직접 엄마 상태를 확인할 수는 있었다. 가슴에 한차례 울분이 지나갔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갑작스럽게 침묵을 깨는 목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뒤돌아본 내 눈에 다소 피곤해 보이는 박래현이 들어왔다. 박래현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나는 몸을 벽 쪽에 바짝 붙인 채 남자를 마주 보았다. 긴 속눈썹에 짙게 음영 진 눈이 가만히 내 눈을 응시했다. 그림을 비추는 조명이 남자의 왼쪽 뺨에 쏟아지면서 높은 콧대가 유독 돋보였다. 남자의 더러운 성격을 덮고도 남을 훌륭한 외모였다. 나는 40대에 머리 벗어진 알파가 더 낫다고 했던 말을 조용히 취소했다. 기왕 아이를 낳는다면 박래현의 훌륭한 껍데기에 내 성격을 물려받은 아이가 훨씬 좋을 것이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는 잘 지냈는데….”
“…….”
“윤준영 씨는 잘 못 지냈나 봐요? 왜 살이 더 빠진 것 같지?”
“저 그대론데요.”
“아니 빠졌습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
“아주 잘 맞아요. 빠졌다면, 놀고먹는 게 체질이 아니어서 그런가 봐요.”
“10일만에 주인을 봤는데 전혀 반가운 표정이 아니네요. 꼬리도 멈춰 있고.”
“갑자기 나타나셔서 놀라서 그랬습니다.”
남자의 시선이 뺨을 지나 내 귀에 박힌 귀걸이로 떨어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서 박래현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박 실장과 술 마실 건데, 거실에 대기하고 있어요.”
“저도요?”
인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기쁨에 내가 너무 씩씩하게 질문했는지 남자가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긋나긋한 말투와 달리 남자의 눈은 서늘했고 입매는 쌀쌀맞았다.
“개새끼가 옆에서 꼬리를 흔들어 줘야 술 마실 기분이 들지 않겠어요?”
순식간에 내 처지를 깨닫고서 나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고운 말만 쓰게 생긴 사람이 말본새가 더러웠다. 그래, 난 40억짜리 개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개. 남자는 나를 스쳐 계단을 올라갔다. 키가 커서 몸무게가 꽤 나갈 텐데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준영 씨, 시간 되면 와서 나 좀 도와줄래요?”
박영범이 주방 입구에 서서 내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는 하늘색 면바지에 흰색 티를 입고 있어서 정장을 입고 있을 때보다 어려 보였다.
“박 실장님, 오랜만이네요. 뭘 도와드릴까요?”
“우리 술 마시게 냉장고에서 과일하고 치즈 좀 꺼내 줄래요? 그런데 살이 좀 빠졌네요. 뭐 힘든 일 있었습니까?”
집에서 하루 세끼 거르지 않고 다 먹은 데다 몸을 안 움직여서 살이 찐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었다. 아무래도 엄마를 걱정하느라 잠을 못 자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 일 없어서 힘들었어요. 얘기 나눌 사람도 없고.”
박래현과 박영범이 10일간 어디서 뭘 하다가 왔는지 궁금했다. 박래현은 본가에 들어갔다 쳐도 박영범은 여기서 산다고 했으니 집에 들어와서 자야 정상이었다.
“여기 청포도와 딸기는 찾았는데, 치즈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술잔과 술을 챙기던 박영범이 냉장고 안을 살피는 내게 다가왔다. 그는 한 손으로 냉장고 문을 잡은 채 다른 쪽 팔을 쭉 뻗어 포장된 덩어리를 꺼냈다. 따뜻한 숨결이 잠시 목덜미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박 실장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호기심이 많아서 엉뚱한 걸 물어보고 말았다. 나는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 걸까. 내가 박영범에게 질문한 걸 알면 박래현이 길길이 날뛸 것이다.
“래현이보다 네 살 많습니다.”
“네 살이나 어린 사람이 말 놓으면 열 받겠네요.”
“샐러리맨의 애환이죠. 밖에 나가면 반말도 못 합니다. 상무님으로 깍듯이 모셔야 해요.”
“저한테는 말 내리셔도 됩니다.”
“래현이가 허락하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청포도와 딸기를 씻는 동안 박영범은 치즈를 잘라 나무 도마에 가지런히 배열했다. 탱글탱글한 청포도가 맛있어 보여 씻다 말고 몇 송이를 떼어 껍질째 입에 넣었다. 혓바닥에 달콤하고 싱싱한 향이 번져 나갔다. 청포도를 삼키기 직전 거실 쪽에서 공포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포도와 딸기를 접시에 담아서 들고 빠른 걸음으로 박래현에게 다가갔다. 박래현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테이블에 과일을 내려놓고 박래현 발치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천장에서 길게 내려온 조명에 파자마 밑으로 드러난 허벅지가 희게 빛났다. 10일을 망아지처럼 지내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던 수치심이 되살아났다. 기척이 없어서 슬쩍 박래현을 쳐다보니 그는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박래현. 준영 씨 그만 놀리지?”
“내 개한테 신경 끄고, 형은 술이나 따라.”
핸드폰을 뒤집어 테이블에 내려놓고 박래현은 내게 술잔을 건넸다. 장미 꽃잎을 술에 넣어 숙성시킨 것처럼 신기하게도 술에서 짙은 장미 향이 났다. 향긋한 술 냄새에 마시기 전부터 취하는 기분이었다.
“10일 동안 집 잘 봤어요? 그런데, 얼굴이 왜 까매졌죠?”
“밤에 잠이 안 와서 낮에 정원을 뛰어다녔습니다.”
“팔팔한 나이에 왜 잠을 못 자지? 더운데 밖에서 뛰지 말고 2층 맨 끝방에 운동 기구 있으니까, 앞으론 거기서 운동해요.”
“2층은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다른 방은 들어가지 말고 그 방만 이용하세요.”
“네.”
나도 모르게 대답에 기쁨이 듬뿍 묻어났다. 정원을 달리는 것도 괜찮지만 운동 기구를 이용해 다양하게 운동하면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갈 것이다.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박래현이 얼굴에서 빗장뼈를 지나 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파자마 가운에 허리끈 하나만 동여맨 상태라 가슴 일부와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난 상태였다.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에 쐐기풀이 날아와 쿡쿡 살갗을 찔러 대는 듯했다.
“이 반반한 얼굴과 몸뚱이로, 알파들을 몇 명이나 꼬셨을까?”
딱히 내게 질문하는 투가 아니어서 입을 다물었다. 괜히 사실대로 말해서 미숙한 오메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박래현은 교만한 시선으로 내 몸을 훑다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집 지키느라 고생했으니까 우리 개도 한 잔 마셔야지.”
“전 술이 약해서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주인 말을 안 듣겠다는 겁니까? 그 잔 다 비워요.”
한두 잔 정도면 괜찮을 거란 생각에 나는 박래현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꿀 색으로 빛나는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혓바닥에 달고 짙은 과일 향이 배어들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지금껏 마셔 본 술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맛있었다.
“한 잔 더 마셔요.”
빈 잔에 술이 채워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술이 다 채워지자 잔을 비웠다. 속이 따뜻해지면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잘 마시네.”
박래현이 계속 술을 따라 줘서 연거푸 네 잔을 마셨다. 다섯 번째 잔이 채워질 무렵 어디선가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꽃향기가 났다. 점차 짙어지는 치자꽃 향기에 이상하게 몸이 풀리고 현기증이 났다. 내 몸에 조금씩 열이 오른 후에야 박래현이 흘리는 페로몬 냄새라는 걸 깨달았다. 몸 전체가 홧홧해져서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정원을 열 바퀴쯤 뛰고 싶었다. 알파 페로몬에 면역이 안 된 나는 옅은 향기에도 열렬하게 반응했다.
“어디 아파요? 왜 땀을 흘립니까?”
박래현은 내 잔에 술을 따르면서 모양 좋은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나를 비웃는 듯한 웃음이어서 나는 흩어진 정신을 다시 모으며 술잔을 꽉 쥐었다.
“옆에 와서 앉아요.”
나는 박래현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생각 없이 편하게 앉았다가 맞은편 박영범의 시선이 신경 쓰여 다리 사이를 붙였다. 이 사람들과 같이 있느니 외롭더라도 혼자가 천 배는 나았다. 나는 울렁울렁한 속을 다스리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쳤다.
“래현아, 우리 독일에 가 있는 동안 주가 엄청 올랐다. 이번 주 내내 52주 신고가 갱신했네.”
“글로벌 임상 재개하면 그럴 거라고 했잖아.”
“본가는 안 들어가도 되겠어? 회장님이 귀국하면 바로 본가부터 들르라고 하셨잖아.”
“내가 언제부터 그 양반 말 들었다고. 술이나 마시자.”
두 사람 대화로 유추해 보니 그동안 박래현은 자기 집에서 출퇴근한 게 아니라 독일 출장을 다녀온 듯했다. 출장을 다녀왔으면 배우자가 있는 집으로 가지 왜 이리 온 걸까? 혹시 아이 문제로 부부 사이가 안 좋아진 걸까? 내가 박래현 배우자라고 해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긴 힘들 것 같았다.
“올 초 계약 해지에 임상 중단까지 겹쳐 조마조마했어. 회장님도 네가 이렇게 빨리 새 판로를 찾을지 모르셨을 거야. 너 이쯤 되면 정말 신의 손 아니냐? 원래 경영엔 관심도 없었고. 너 경영권 전부….”
“형, 술맛 떨어지는 얘기 그만하지? 피곤한데 얼른 마시고 들어가 자자.”
박래현은 내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치며 어서 술을 마시라고 눈으로 종용했다. 꽤 독해 보이는 술을 계속 들이켰더니 몸이 속수무책으로 느슨해졌다.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맛을 음미하던 박영범이 내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정중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급하게 마시지 말고 코로 천천히 향과 함께 마셔 봐요. 그러면 배는 맛있어요.”
박영범 충고에 따라 천천히 술을 마셨다. 장미 향이 녹아든 술에서 내가 맛본 적 없는 과일 맛이 났다. 입에 착 감기는 맛이 좋아서 나는 금세 술잔을 비웠다. 주저리주저리 읊는 술버릇을 생각하면 여기서 그만 마시는 게 정답이지만 나는 박래현이 따라주는 대로 술을 비웠다.
“준영 씨, 안주도 먹으면서 마셔요.”
“아, 네, 그러겠습니다.”
포크로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를 콕 집어 입에 넣었다. 치즈는 짭짜름하면서 밀도 높은 향을 풍겼다. 이번엔 박래현이 내 잔을 채워 주었다. 그의 움직임에 치자꽃 향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입에 흥건히 침이 고였다. 내가 알파 냄새를 맡은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 페로몬은 싱그럽고 상쾌한 향이었는데 박래현 향은 농염하고 달콤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끼며 술잔을 비웠다. 결혼한 알파가 내뿜는 페로몬보다는 차라리 술에 취하는 게 더 나았다.
“형, 정치헌 요즘 누구 만나는지 알아봤어?”
“어, 최근에 나 장관 만나고 다니더라.”
“미친 새끼 돌았네.”
“둘이 호텔 들어가는 사진 받아 놨는데, 보여 줄까?”
“일단 내 메일로 보내 놔. 송림병원 이번에 연구중심병원으로 선정됐지?”
“응.”
두 사람 다 내 빈 술잔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나는 스스로 빈 술잔을 채워 나갔다. 나와 상관없는 대화를 들으면서 어느덧 술 한 병을 내가 다 비웠다. 주량을 한참 전에 넘어섰지만, 마셔도 마셔도 술이 달았다.
“저, 술 더 마셔도 돼요?”
“준영 씨,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많이 마셨으니까 들어가서 자요.”
“주인도 안 자는데 왜 개가 먼저 자? 위스키 한 병 더 따.”
박영범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얼음통에서 새 술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는 내 잔에 술을 따라 주며 적당히 마시라고 눈치를 줬다. 색은 비슷한데 종류가 다른 술인지 이번 술엔 단맛이 없었다. 두 사람은 전문적인 용어를 써 가며 임상 실험이 어쨌다는 둥 계약이 어쨌다는 둥 이야기를 이어 갔다.
두 사람 목소리가 갑자기 멀어지더니 기분이 좋아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얼굴에 슬슬 열이 올라오면서 인간들의 대화에 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원을 지키는 나무와 꽃들하고만 일주일 넘게 대화를 나눴던 나는 피드백을 받으며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독일 갔다가, 오늘 오신 거예요? 근데, 왜 집으로 안 가고 여기로 오셨어요?”
네 개의 눈알이 동시에 나를 주목하자 나는 눈꼬리를 접으며 활짝 웃었다. 기회를 놓치면 또 둘이서만 대화를 할 것 같아서 곧장 말을 이어 갔다.
“독일 좋아요? 아니면 다른 데라도 추천해 주세요. 전, 신혼여행은 유럽으로 갈 생각이에요.”
나를 동정하는지 두 사람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두 사람의 말 없는 위로에 힘입어 나는 슬픈 속내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근데 돈 받고 애 낳아 주는 나 같은 인간이랑, 결혼해 줄 사람이 있을까요? 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어요.”
나는 박래현 앞으로 빈 술잔을 내밀었다. 그는 눈동자를 빛내며 조용히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짙은 속눈썹에 내려앉은 빛이 속눈썹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하늘 흩어졌다. 내 눈은 남자의 반듯한 이마에서 곧게 뻗은 콧날을 따라 붉은 입술로 향했다. 복숭아색으로 빛나는 뺨이, 윤기가 흐르는 매끄러운 피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술에 취한 나는 박래현이 흘리는 치자꽃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술과 페로몬에 푹 잠겨서, 관능이 넘실거리는 붉은 입술에 입 맞춰 보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갑자기 눈알이 타는 듯 뜨거워지고 입 안이 말랐다. 사고가 정지되고 소금 알갱이처럼 정제된 정염이 입 안을 아프게 굴러다녔다. 그에게서 나는 향이 내 살갗을 긁고 몸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본능을 건드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징징 울리는데 박래현은 미동 없이 나를 보기만 했다. 잔을 내려놓은 나는 열기를 식히고 싶어서 박래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준영 씨, 그만 마시고 들어갑시다.”
나를 저지하는 박영범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박래현의 서늘한 몸이 신열을 가라앉힐 줄 알았는데 남자와의 접촉은 되레 나를 뜨겁게 달궜다. 호기심을 가득 담은 동그란 눈동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페로몬과 알코올의 조합에 무기력해진 나는 그림 같은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찍어 누르려 했다.
그러나 차가운 입술에 닿기 전 억센 손아귀가 내 뒤통수를 잡아 얼굴을 뒤로 꺾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나는 남자를 말똥말똥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나를 소파에 던지듯 밀어 넣고 내 하반신에 올라탔다. 페로몬 향이 더 짙어져 내 숨구멍까지 박래현의 페로몬으로 가득 차올랐다. 아랫배가 저릿저릿 아프면서 속옷이 젖어 가는 느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언뜻 본 남자의 눈은 차가웠지만 끓어오르는 열기를 눌러 주지는 못했다.
“지금 나한테 입 맞추려고 했습니까? 내가 허락했어요?”
“페, 페로몬 때문에….”
“나한테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주인 말이 말 같지 않아요? 말도 안 듣는 개를 어떻게 해야 하지? 응?”
나는 비로소 남자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무서운 눈에 놀라서 심장이 벌떡벌떡 뛰고 땀이 솟구쳤다. 일단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몸부림쳤지만, 내 하반신을 내리누르는 힘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했다.
“비, 비켜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리를 벌려주며 꼬시던 습관이 나한테도 통할 줄 알았습니까?”
남자의 갈색 눈동자가 살의를 띠고 노랗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을 태워 죽일 것 같은 무서운 눈빛이었다.
“뒷구멍에 내 자지 쑤셔 박아 줄까요? 지금 그걸 원하죠?”
“아니요! 아닙니다. 전….”
내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손이 거침없이 내 파자마 단추를 쥐어뜯었다. 툭툭 단추가 굴러떨어지며 옷깃이 벌어지자 남자에게 잡아 먹힐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어버린 나는 덜덜 떨며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하느라 나는 손에 잡힌 물건이 뭔지도 확인하지 못하고 박래현의 귀뺨 부근에 그대로 물건을 들이박았다. 유리잔이 와장창 깨지면서 남자의 관자놀이를 타고 술과 피가 흘러내렸다. 내 양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아 머리 위에 고정한 남자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눈을 들여다보았다.
술인지 피인지 모를 끈적끈적한 액체가 뺨으로 뚝뚝 떨어졌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의지와 상관없이 종종 패싸움에 말려든 적이 있었고, 식당에서 술 취한 손님에게 별 같잖은 이유로 맞은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두렵진 않았다. 지금 남자 눈에서 번득이는 광기는 내 신경을 마비시키고 공포를 증폭시켰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처럼 남자는 그렇게 한참을 내 눈에서 헤매다가 핏물에 젖은 입술을 열었다.
“난 당신 구멍에 관심이 없는데 어떡하지? 이 새끼 저 새끼 다 박아 댄 더러운 구멍에 내 깨끗한 자지를 박을 순 없잖아요. 그러다 추잡한 병이라도 옮기면, 낭패잖습니까.”
남자는 손등으로 내 볼을 툭툭 쳤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남자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면 당신한테 꼭 어울리는, 걸레 같은 알파 새끼들 불러서 접붙여 줄까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 입에서 나온 말은 전부 빈말 같지 않아서 무서웠다.
“잊었어요? 당신은 내 말을 거역할 권리가 없을 텐데?”
치자꽃 향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사지가 축 처지면서 이성을 말살하던 성욕과 술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박래현은 얼굴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생각도 없이 오로지 내 눈에 날카롭고 육중한 닻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감히 눈을 피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어 그에게 두 손을 결박당한 채 가만히 있었다. 40억을 준다고 했을 때부터 일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박래현이나 박영범이 너무 멀쩡하고 지적으로 보여 잠시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
“내가 윤준영 씨를 만지는 건 괜찮지만 당신은 안 됩니다. 앞으로 나한테 달려들면, 앞발 뒷발 다 수갑 채워 놓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네.”
“일어나요. 벌은 받아야지.”
“준영 씨 그만 재우자, 래현아. 나도 피곤해서 들어가 쉬고 싶어.”
내 몸에서 내려간 남자는 멀쩡한 얼굴로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몸을 일으켜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소파와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이 굴러다녀 조심스러웠다.
“준영 씨, 내가 데려다줄게요.”
내 팔을 부축하는 박영범의 손등을 박래현이 라이터로 쥐어박았다. 박영범은 더는 어떻게 하지 못하고 내게서 한발 물러섰다.
“내 거 손대지 말고 형은 가서 술이나 한 병 더 가져와.”
“나도 모르겠다. 난 들어가 잘 테니까 네가 알아서 해.”
박래현은 담배를 빨아들인 뒤 내 쪽으로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연기를 피해 고개를 돌리며 숨을 참았다. 양쪽 뺨에 욱신욱신 열기가 몰려왔다.
“윤준영 씨, 고개 돌리지 말고 나 봐요.”
씨발 미친 또라이 새끼. 짙은 회색빛 연기가 흩어지면서 빙그레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일회용 피어싱 도구가 어떤 아픔을 줄지 잘 알아서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담배를 끼운 손으로 내 얼굴을 틀어쥔 남자는 오른쪽 귀에 박힌 보석을 엄지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움직이면 살 타니까 가만있어요. 잘생긴 얼굴에 흉터 남기고 싶진 않거든.”
새빨갛게 달아오른 담배 끝에서 연기가 구불구불 피어올랐다. 얼굴을 살짝만 틀어도 담뱃불에 뺨이 지져질 위치여서 차라리 눈을 감았다. 지독한 침묵에 남자가 숨을 쉴 때마다 뺨으로 가볍게 숨결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한참을 기다려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서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시선에 눈을 주었다.
“말을 안 들어서 아이 낳기 전에 온몸에 구멍이 뚫리겠네요.”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왼쪽 귓불에 날카로운 아픔이 지나갔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란 걸 알기에 나는 주먹을 틀어쥐면서 혹독한 고문을 견뎌 냈다.
“이제 들어가 자도 좋아요.”
느긋한 자세로 담배를 피우는 남자를 뒤로하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벽에 걸린 그림들과 반듯한 모서리가 곡선으로 휘어지며 휘청거렸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곧장 침대에 몸을 던졌다. 구멍 뚫린 귀가, 깨진 유리에 베인 손이 아파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욕실에 가서 차가운 물수건으로 찜질을 하려다가 만사가 귀찮아 그만두었다. 손이 다치든 말든 귀에 상처가 나 고름이 생기든 말든 상관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고꾸라져 죽고 싶었다. 2년에서 고작 10일 지났는데 내게 쏟아지는 모욕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게 시작이라면 앞으로 펼쳐질 일은 어떠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공포가 잦아든 건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였다. 내 처지가 서글퍼서 목 놓아 울고 싶지만, 이 집을 나갈 때까지 절대 눈물 흘리지 않기로 했다. 나를 노려보던 박래현 눈빛엔 증오와 환멸이 담겨 있었다. 문득 남자가 내게 원하는 게 아이가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를 원한다면 그렇게 많은 돈을 써 가며 나를 사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는 내 인격과 자존심을 짓밟으며 나를 능멸하고 있다. 남자가 했던 더러운 말들이 귓가에 윙윙거리며 고름처럼 차올랐다.
닥쳐, 씨발, 좆같은 새끼야. 개씨발 새끼. 사이코 패스에 악마 같은 새끼.
나는 베개로 내 머리통을 덮은 뒤 양쪽을 힘주어 눌러 바깥세상과 나를 격리했다. 다 피지 못한 슬픔이 어둠 속에서 깜박깜박 가라앉았다.
***
숙취와 눈물 탓에 욕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가관이었다. 안색은 어두웠고 눈두덩은 부었고 뺨은 거칠어서 형편없었다. 나는 거울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 부어오른 귓바퀴를 검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어제 일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면서 유리컵으로 박래현 얼굴을 때렸던 장면이 생각났다.
“씨발, 윤준영 미쳤어, 미쳤다고!”
취기에 두려움이 더해져서 순간 이성을 잃어버렸다. 나는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을 맹세하면서 계약서에 사인했는데 벌써 계약을 어긴 꼴이 되어 버렸다. 당장 위약금을 물고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성질 사나운 주인을 물었으니 그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아픈 척 침대에 누워 있을까 여러 번 고민했지만 박래현이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나는 수납장에 넣어 뒀던 소독약을 찾아 귀와 손바닥을 소독했다. 쓰리고 따끔한 감각에 나를 노려보던 눈이 떠올라 심장이 납작해졌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신비하고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겉만 보고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되는 거였다.
약을 수납장에 넣고 욕실에서 나와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박래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거울 속 남자에게 집중했다. 짧게 잘랐던 머리칼이 눈썹 위까지 내려와 나는 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 나는 늘 머리칼에 펌을 넣었다. 사장은 음식만큼이나 서버들의 외모 관리에 신경을 썼다. 내겐 펌을 넣어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을 추천했고 나는 사장의 의사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시키는 대로 따랐다. 학교가 끝나면 레스토랑으로 가서 음식을 주문받고 나른 게 20일 전 일인데 아주 먼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기억에서 가물가물했다. 내 사정을 잘 봐주던 사장과 매니저,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보고 싶었다. 함께 일한 시간이 쌓이면서 나는 과 동기들보다 레스토랑 알바생들과 더 친하게 지냈고 이따금 자취하는 알바생 집에 몰려가서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시면서 놀기도 했다. 내 전화기엔 아마도 그들로부터 온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을 것이다. 내가 알파의 애를 낳아야 하고 그의 집에서 개 취급 받고 있다는 걸 알면 다들 놀라 자빠질 것이다.
나는 옷장 문을 열고서 줄무늬 셔츠와 하트 무늬 파자마 윗도리 중 뭘 입을까 고민했다. 결국 길이가 더 긴 파자마 윗도리를 선택했다. 거울 속에서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박래현을 보고 싶지 않다는 강한 거부감이 얼굴 전체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를 도발하는 그 남자가 싫고 두려웠다.
페로몬으로 나를 자극한 건 박래현이었다. 오메가들이 돈을 들여가며 억제제를 먹는 이유는 발정기를 무사히 넘길 목적도 있지만, 알파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게 이성이나 의지로 제어 가능하다면 미쳤다고 돈 들여 억제제를 사 먹겠는가? 내가 억제제를 끊었다는 걸 알고서 박래현은 은근히 페로몬을 풀었다. 남이 만지는 걸 싫어한다던 남자는 묘하게 내가 그에게 달려들게끔 유도했다. 술잔으로 남자 얼굴을 치지 않았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 몸이 떨렸다.
아이는 인공수정으로 갖는다고 했으니 남자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게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파자마 단추를 잠갔다. 어제 같은 일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노크 소리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방문을 열었다.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이 차장은 엉망진창인 내 얼굴을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걸까? 이 차장의 능숙한 태도에서 내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 갔다. 박래현은 자기 배우자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할 수 없으니 자기를 만족하게 해 줄 샌드백을 따로 두는 것이다. 누구는 수술할 돈이 없어 쩔쩔매며 몸을 파는데 누구는 40억짜리 샌드백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턱턱 사들이는 현실에 아침부터 좌절감에 시달렸다.
“윤준영 씨, 나와서 아침 식사하세요. 상무님과 박 실장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정을 가라앉힌 나는 이 차장을 따라 주방으로 갔다. 넓은 식탁 위엔 소갈비 찜과 배추겉절이, 해물파전과 맑은 조갯국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던 박영범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박래현은 옆자리 빈 의자를 끌어당겨 내게 앉으라는 의사 표시를 했다. 그의 뺨에 남아 있는 상처와 흐릿한 멍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처가 또렷해서 남자가 흠결을 볼 때마다 날 심하게 괴롭힐까 봐 두려워졌다.
“어제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
“앞으로 술은 절대 입에 대지도 않겠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제 내게 퍼부었던 폭언을 사과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내가 먼저 키스하자고 달려들어서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내 뺨에 흉터가 남으면 윤준영 씨는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네….”
남자는 자기가 내 귓바퀴에 한 짓은 생각 않고 나를 비난했다. 무자비하게 뚫린 귓구멍이 지금도 욱신거리는데 이 남자에게 내 귀를 뚫는 일은 심심한 유희 이상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를 책망하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면서 나는 고슬고슬한 밥에 고개를 처박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루 세끼 다 챙겨 먹고 열심히 운동해서 이번 히트 사이클 때 반드시 임신할 것이다. 이 집을 최단시간에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 차장님. 당분간 저녁은 집에서 먹을 테니까 저희 것도 같이 준비해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마지막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있던 나는 박영범 말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박래현은 유부남이면서 자기 배우자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귀국하자마자 이리 온 것도 존나 예의 없는 짓인데 당분간 여기서 저녁을 먹겠다니 평범한 쓰레기가 아니었다. 이걸 봐주는 그의 배우자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엄마가 무사히 수술을 받았지만, 나라면 이혼을 하면 했지 절대 내 배우자를 다른 사람한테 내돌리진 않을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남자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박래현은 소파에 걸쳐 둔 재킷을 입고서 넥타이 매듭을 단정히 정리했다. 소매를 들어 올려 시계를 흘긋 확인한 그는 내게로 몸을 돌렸다. 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윤준영 씨. 그런데, 당신 어머니 소식은 안 궁금합니까? 계약할 땐 결과라도 알려 달라며 피를 토하더니, 그 뒤로 안 물어보네요?”
몸을 순환하던 피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윤준영, 정신 차려! 빨리! 얼른 핑계를 생각해 내!
부어오른 귓바퀴를 손으로 매만지며 나는 일부러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면서요. 전 위약금을 드릴 만큼 부자가 아닙니다.”
“어디 다른 데서 소식 듣고 있어요?”
“아니요! 제가 물어보면 엄마 소식 알려 주실 수 있어요? 아니면서 괜히 희망 고문하지 마세요.”
“내 개가 귀여우면 그 정돈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귀여워질 것 같지 않네요.”
남자는 광택이 나는 행커치프를 멋스럽게 정리한 뒤에 서류가방을 들고 출근 준비를 마쳤다. 남자에게 잘 보이면 정말 엄마를 만나게 해 줄까? 나는 박래현에게 귀염받고 싶지 않았다. 개도 주인 인격 보고 좋아하는 거지 밥 준다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을 배웅하러 현관까지 따라온 내게 박영범이 연고를 건넸다.
“어제 손바닥 베인 데 발라요. 오늘 하루도 잘 보내고, 저녁 먹을 때 봅시다.”
“네, 잘 다녀오세요.”
두 사람이 출근한 뒤 이 차장 부부가 일을 마치고 집을 나간 것까지 확인한 나는 방으로 들어가 욕실 앞에서 서성거렸다. 다른 데서 소식 듣고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던 목소리가 귀에서 안 떨어져 차마 핸드폰을 확인할 수 없었다. 혹시 박래현이 알고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욕실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어디에도 카메라처럼 보이는 물건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핸드폰을 버려서 증거를 인멸해야 할지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남자는 내가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10일 동안 집을 비웠다. 엄마를 미끼로 나를 떠보려는 심리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나를 타일렀다. 일단 욕실은 안전한 곳 같으니 며칠 더 지켜보다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욕실에서 나와 박영범이 준 연고 뚜껑을 열었다. 박래현과 관련해 몸에 상처나 흉터를 남기고 싶지 않아 손바닥에 꼼꼼하게 약을 발랐다.
오늘은 뭘 하고 지낼까. 2층에 체력 단련실이 있다는 말이 떠올라 오늘은 거기서 보내기로 했다. 마음먹은 김에 2층으로 향하던 나는 두 얼굴을 가진 그림 앞에 잠깐 멈춰서 라일리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이 사람은 어제 내게 벌어진 일을 다 지켜봤을 것이다. 씨발,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엔 박래현 강요로 마셨다가 나중엔 술이 너무 맛있어서 계속 마셔 버렸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박래현이 페로몬을 풀어도 키스 시도까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래현에게 입 맞추려고 달려들던 내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충동을 참지 못한 내게 실망이 컸다. 문제는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사고를 친 이유는 박래현이 은근하게 내보낸 페로몬 때문이었다. 히트 사이클을 알파와 보낸다거나 히트 사이클에만 억제제를 먹는 오메가들은 알파 페로몬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알파 향을 걸러 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술이야 안 마시면 그만인데 치명적인 알파 페로몬은 내 재량 밖의 일이었다.
나와 반대로 해준은 페로몬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다. 알파를 꼬시면 되지 몸에도 안 좋은 억제제를 왜 먹냐며 그는 나를 타박했다. 그때 해준이 한 말을 무시하지 말고 잘 들을 걸 그랬다. 문어발식 연애를 하는 해준이 못마땅해서 나는 그 애가 하는 말을 대충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곤 했다.
해준인 지금 잘 있을까. 해준이 실종됐을 때, 애인이 생기면 종종 집에 안 들어오던 전적 때문에 막연하게 새 애인이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주가 지나도록 연락이 안 되자 그제야 뭔가 수상하다고 느낀 나는 뒤늦게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하지만 경찰은 범죄 연관성이 없다고 판단된다며 단순 가출로 처리하고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다. 어른이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해서 집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엄마 건강이 부쩍 안 좋아져서 늘 대기 상태였던 나는 무책임한 해준을 원망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영리한 아이라서 어디서든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좋았다.
2층으로 올라간 나는 난간에 기대어 1층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술 마셨던 자리가 반은 보이고 반은 보이지 않았다. 2층은 널따란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네 개가 있었다. 맨 끝방이 체력 단련실이라고 했는데 문 두 개가 서로 마주 본 형태여서 어떤 게 체력 단련실인지 알 수 없었다. 내 감을 시험해 보기 위해 오른쪽 문을 선택해 손잡이를 돌렸다. 육중한 나무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책 냄새에 여기가 서재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얼굴만 쑥 집어넣어 안을 살폈다.
문 옆쪽 커다란 책상 위에는 컴퓨터와 읽다 만 책, 흐트러진 필기도구가 박래현의 흔적을 보여 주었다. 서재 한가운데엔 나무로 짠 낮은 탁자와 안락해 보이는 미색 소파가 있었다. 그리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맞춤형으로 짜인 서가에 빽빽하게 꽂힌 책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이 가운데 내 전공 관련 교재도 있을지 궁금했다. 청개구리 심보인지 학교에 다닐 때 보다 공부를 할 수 없는 지금 학구열이 더 불타올랐다. 몰래 들어가 한 권 빼 오고 싶은 충동이 일어서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혹시 몰라 파자마 자락으로 손잡이를 닦아 지문을 없애고 체력 단련실로 들어갔다.
***
박래현과 박영범이 일곱 시 반에 집에 들어와서 우린 여덟 시에 저녁을 먹었다. 체력 단련실에 있는 기구를 이용해서 오후를 보냈던 나는 배가 고파 허겁지겁 밥그릇을 비웠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길 바라며 식사가 끝나자 급하게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내 바람을 무시하고 거실 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박래현은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서 소파 한가운데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잡지를 읽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처럼 남자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박래현은 잡지에 눈을 고정한 채 내게 물었다.
“방금 망설였어요?”
“아니요.”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뛰어옵니까? 주인 말이 우스워요?”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해서 근육이 뭉쳤습니다. 죄송합니다.”
박영범은 이 차장 부부가 준비해 준 안주와 술을 탁자에 내려놓고 잔에 얼음을 담았다. 그는 술을 부어서 한 잔은 박래현에게, 그리고 한 잔은 내게 건넸다.
“저는 됐습니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아직도 속이 안 좋아서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서 술을 거부했다. 어젠 술과 페로몬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지만 오늘은 페로몬 공격만 잘 막아 내자는 전략이었다. 잡지로 향해 있던 눈이 느릿느릿 내게로 움직였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알이 내가 시선 돌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속이 안 좋은 사람치곤 식욕이 상당히 좋아 보이던데요.”
“메스꺼운 걸 꾹 참고 열심히 먹었습니다.”
“이유라도?”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서 이번 히트 사이클에 꼭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남자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는 내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쳐 마시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쩔 수 없이 금색으로 반짝이는 술을 한 모금 마시자 독하고 강한 향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나랑 섹스하자는 말을 돌려 하는 겁니까?”
“섹스 없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는다고 들었습니다.”
“인공수정? 누가 윤준영 씨에게 그런 말을 했어요?”
박래현이 찢어발길 듯한 눈으로 내 등 뒤를 노려보았다. 보나 마나 눈을 부라리며 박영범을 닦달하고 있을 것이다.
“당사자에게 그 정돈 말해 줘도 된다고 판단했어. 너한테 필요한 건 아이지 오메가가 아니잖아.”
박영범이 솔직하게 내 편을 들어주어서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나는 술 사이를 굴러다니는 얼음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박래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 입에서 어떤 핵폭탄이 떨어질지 긴장으로 침이 고였다.
“생각을 바꿨어. 내 오메가가 무슨 수로 알파를 꼬시는지 좀 궁금해졌거든. 비싸게 사서 그냥 놀리기엔 아깝잖아.”
이봐요, 박래현 씨. 댁은 유부남이잖아요. 아이를 다른 사람한테서 보는 것도 존나 비윤리적인 행위인데 배우자 두고 다른 사람과 섹스까지 하는 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박래현이 내 쪽으로 해사한 얼굴을 기울였다.
“당연히 나한테 다리고 구멍이고 다 벌려 줄 거죠?”
“…….”
“몸뚱이고 자존심이고 다 팔아 놓고, 비싸게 굴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남자에게 어긋나면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에 나는 재깍 대답을 내놓았다. 40억짜리 계약서에 사인하면서 애초에 이런 그림을 예상해서 실망하지는 않았다. 인공수정을 한다기에 마음을 놓으면서도 박래현이 내게 지불한 대가가 커서 약속대로 할지 의심이 남아 있었다. 나는 올 것이 온 것뿐이라고 체념하며 무너져 내리는 감정을 가다듬었다.
“래현아, 삼일 화학 인수 건 때문에 확인할 게 좀 있어서 나 먼저 들어갈게.”
박영범이 일어나는 소리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가 같이 있어 주면 미치광이가 덜 날뛸 텐데, 안전띠를 풀고 시속 180km를 역주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박영범이 방으로 들어가자 박래현이 내 술잔과 자신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어제 일이 생생하게 그려지면서 오장육부에 한기가 돌아 식은땀이 났다. 나를 흥분시켰던 치자꽃 향기가 나는 것 같아 벌써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윤준영,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너만 버티면 박래현이 널 먼저 건들 일은 없어! 박래현이 슬슬 수작을 시작하는 낌새에 나는 필사적으로 주문을 걸었다.
“올라와서 앉아요.”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서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박래현과 멀찍이 떨어져 앉아 저릿한 다리를 주물렀다. 양쪽 다리에 쥐가 내리면서 감각이 사라졌다. 박래현은 술잔을 내 손에 쥐여 주며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내가 윤준영 씨 뭐죠?”
“주인님이십니다.”
“말을 안 듣기에 난 또 잊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내가 채워 준 술 다 비워요.”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서 술을 다 비웠다. 아찔하고 풍부한 과일 맛에 눈을 가만히 감았다가 떴다. 남자는 술잔을 든 채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코코아 가루가 잔뜩 묻은 초콜릿을 집어서 내게 건넸다. 말랑말랑한 생 초콜릿이 혀끝에 녹아들면서 금세 몸이 따뜻해졌다.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다 마셔요.”
박래현은 내 잔에 술을 한잔 더 따라 주고서 탁자에 내려놓았던 잡지를 집어 들었다. 차라리 적막이 더 반가워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홀짝홀짝 술을 마셨다. 잔을 다 비우고 할 일이 없어진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관찰했다. 매끈한 외피와 고급스러운 색깔이 박래현에게 잘 어울렸다.
체력 단련실에 있는 운동 기구를 모조리 섭렵한 결과인지 얼마 가지 않아서 졸음이 찾아왔다. 졸았다간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서 나는 무릎에 왼쪽 뺨을 대고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옆모습도 말할 수 없이 근사했다. 성격이 생긴 것의 반만 따라가도 어디서든 인기를 끌 타입이었다.
훌륭한 낯가죽을 가진 이 남자가 돈 주고 사람을 사서 폭행과 폭언을 일삼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기자들 앞에서 박래현의 숨겨진 본성을 폭로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더니 답답한 가슴이 확 뚫렸다. 잡지를 읽고 있던 박래현이 시선을 느꼈는지 갑자기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고개를 돌릴 기회를 놓쳐 버려서 하는 수 없이 갈색 눈을 응시했다. 남자에게서 신경을 교란하는 치자꽃 향이 쏟아져 나왔다. 향이 짙어서 알파 페로몬에 취약한 내 몸이 거부할 수준이 아니었다. 넘어가지 않으려고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힘껏 주먹을 쥐어 봤지만, 작정하고 나를 유혹하는 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습니까?”
“주인님한테 좋은 향기가 나서요.”
“좋은 향기? 예를 들면?”
“짙고 화려한 꽃향기가 나요. 치자꽃 냄새하고 비슷한 거 같아요. 음, 그런데 삼나무나 편백 냄새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남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내가 했던 말을 곱씹어 봤지만 박래현이 화낼 만큼 잘못된 점을 발견하진 못했다.
“당신 알파들한테선 나무 냄새가 났나 봅니다?”
내 말을 오해해서 비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 나는 박래현 말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박래현은 반듯한 미간에 신경질적인 주름을 잡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가 숨 막히게 농밀한 향을 쏟아 내자 그에 반응해 내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너울거렸다.
남자가 페로몬을 흘리는 이유는 나를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능욕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알고 있는데도 속이 울렁거리면서 남자의 몸에 코를 박고 냄새를 깊이 들이켜고 싶은 욕구가 강렬해졌다. 알파에게 밑을 비벼서 이 생경한 감각의 틈을 채우고 싶어 안달이 났다. 격렬한 반응에 적응할 수 없어서 식은땀이 나고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한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저, 너무 졸려서 그러는데, 들어가서 자도 될까요?”
“내가 잡지 다 읽을 때까진 안 됩니다.”
박래현은 술 한 잔을 비우고 나서 잡지로 눈을 내렸다. 허벅지와 팔뚝 안쪽 살이 패도록 꼬집으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절제할 수 없는 본능 앞에서 다 수포가 되었다. 음험한 욕망은 급기야 남자가 옷을 벗겨서 내 알몸을 만지는 상상으로 발산되었다. 욕구를 담은 음란한 손이 정말로 나를 만지는 듯한 강렬한 감각에 눈앞에서 불꽃이 터지며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하아, 정신 차려, 윤준영! 어제 일 기억 안 나? 이 남자 잘못 건드렸다간 눈알이 터지는 수가 있어. 절대 박래현 농간에 넘어가선 안 돼. 게다가 이 남자는 유부남이야.
온갖 이유에도 불구하고 노련하지 못한 오메가의 브레이크는 강렬한 페로몬 앞에서 의지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치자꽃 향기가 농염해질수록 박래현을, 이 잘생긴 알파 좆을 품고 싶다는 욕망만이 나를 지배했다. 가볍게 부유하다 사라질 욕망이 아니었다.
“주인님, 만져 봐도 돼요? 저 만지고 싶어요.”
박래현은 잡지를 내려놓고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입가에 웃음을 걸고서 그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를 주시했다. 남자의 부드러운 표정에 가슴에 떠돌던 살얼음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알파들도 처음엔 이렇게 꼬셨습니까?”
“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이 음탕한 구멍에 좆이 몇 개나 드나들었어요? 열 개? 스무 개? 한 번에 몇 개까지 넣어 봤습니까?”
강렬한 알파 페로몬이 내 몸의 세포를 활짝 열어 젖히며 위압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꼭꼭 닫아 두었던 감각이 폭력적으로 개방되면서 정신이 몽롱해진 나는 페로몬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숨을 헐떡이며 박래현에게 기어갔다. 그의 손에서 술잔을 뺏어 남은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고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알파의 향긋하고 단 숨결이 뺨에 난 솜털을 간질였다.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척추를 따라 찌릿찌릿한 감각이 꼬리뼈까지 쭉 줄달음쳤다. 안에서 흘러내린 물이 허벅지를 타고 내려오는 감각이 선연해 눈을 뜨고 있기가 버거웠다.
“주인님, 저 섹스해 본 적 없어요. 그게, 제가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 버느라 바빠서 그랬어요.”
“…….”
“저기… 지금 해 보고 싶어요.”
“해 보고 싶다니, 뭘요?”
꿀을 발견한 곰처럼 막무가내로 박래현의 입술에 내 입술을 비볐다. 탄력 있는 입술이 부드럽게 짓이겨지면서 치자꽃 향기가 작열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입맞춤에 황홀해져서 한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다른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감아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관능적인 입술 안쪽은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해서 입술을 붙인 채로 혀를 밀어 넣었다. 박래현이 고개를 틀어 내게서 입술을 뗐을 때 나는 진짜 개가 되어 남자의 뺨을 길게 핥았다. 거세게 뛰는 심장이 거추장스러워 잠시 뚝 떼어 두고 싶었다.
“이 천박한 얼굴로 유혹해서, 알파를 홀린 뒤 버리는 게 취밉니까? 무척 교만하네요.”
“그런 적 없는데요.”
“그런 적 없다니, 정말 내가 처음입니까?”
“네….”
남자의 입가로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왠지 조급해져서 나는 알파의 머리칼을 양손으로 틀어쥔 채 입술을 물어뜯듯이 달려들었다. 은밀하게 벌어진 입술 틈으로 혀를 넣어 뭉클한 살덩이를 문질렀다. 도톰하게 살진 혀를 비비고 빨며 신음하다가 탄탄한 허벅지를 타고 올랐다. 흠뻑 젖어 있던 뒤를 허벅지 근육이 압박하자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시야가 뭉개졌다. 혀를 더 깊이 삽입하려고 고개를 튼 순간 커다란 손아귀에 어깨를 붙잡혔다. 치자꽃 냄새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면서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제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한 짓을 깨달은 뒤 먼지가 되어 당장 남자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서슬 퍼런 얼굴을 보는 게 두려워서 나는 무작정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어디서 거짓말을 해요? 순진한 얼굴로 들이대면, 내가 속아 넘어갈 줄 알았어요?”
잇새로 느릿느릿 잘려 나간 언어들이 내 귀를 아프게 들쑤셨다. 박래현은 팔 속에 묻힌 내 얼굴을 억센 손으로 틀어쥐어 시선을 맞추면서 나를 소파에 밀어 넘어뜨렸다. 그는 왼손으로 가슴을 눌러 내 몸을 고정한 채 드로어즈 밴드를 잡아 거침없이 허벅지 아래로 속옷을 벗겨 내렸다. 겨우 성기만 가리고 있었는데도 속옷이 벗겨져 나가자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성병이 우글거릴 씹창 난 구멍에, 내 자지 박아 줄까요? 내 자지가 먹고 싶어서 지금, 구멍 들이미는 거죠?”
박래현은 내 무릎을 잡아 양쪽으로 찢듯이 벌렸다. 알파 앞에서 무방비하게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로 나는 구멍으로 향하는 혐오스러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을 보는 눈빛에 마지막 자존심마저 박살 날 위기에 처했다. 나를 남창 취급하는 남자로부터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면 이성이 남아 있을 때 여길 벗어나야 한다. 이 남자가 도로 페로몬을 풀면 나는 남자 앞에서 엉덩이를 벌리며 좆을 박아 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내가 결론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남자의 손이 무례하게 구멍을 벌리고 안으로 침입했다. 어떠한 이물질도 들어와 본 적 없는 곳에 들어와 놓고서 남자는 거만하게 손을 움직였다. 본능에 이끌려 무턱대고 저지른 행동의 결과가 부끄럽고 참담했다.
“그, 그만! 흐, 그만해 주세요!”
“좋아 죽겠으면서 뭘 그만해 달라는 거죠? 이렇게 더러운 물을 질질 흘리면서 말이지. 당신처럼 질 나쁜 남창은, 씹질 못하게 구멍을 다 찢어 버려야 해.”
내 옆구리를 무릎 사이에 가두고서 박래현은 바지 단추를 열고 지퍼를 내렸다. 남자의 동작을 지켜보던 나는 똬리를 틀고 있던 묵직한 성기가 지퍼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숨을 멈췄다. 발기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남자의 성기는 흉흉하고 무서운데 비좁은 구멍에 바로 딱딱해진 성기가 들어오면 박래현 말대로 주름이 다 찢어져 병원에 실려 가야 할 것이다. 두려움에 호흡이 가빠지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박래현 팔뚝을 움켜잡았다.
“주인님, 저 방에 들여보내 주세요, 네?”
“언제는 하고 싶다면서요. 소원 들어주겠다는데 왜 망설입니까?”
“하, 하으, 아직 준비가 안 돼서….”
죽을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남자는 두 손으로 어깨를 누른 채 내 밑구멍에 성기를 비벼 댔다. 아직은 부드러운 살덩이지만 구멍을 파고들 즈음엔 단단하게 발기될 것이다.
“사, 살려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이 뭘 잘못했는데?”
박래현의 냉소에 절망한 나는 내 다리에 얽힌 단단한 다리를 떼어 내면서 남자의 가슴팍을 두 팔로 밀어냈다. 남자는 내 반항에 꿈쩍도 하지 않고서 축축하게 젖은 밑에 살덩어리를 비볐다. 밑으로부터 이상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물에 잠긴 것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장면이 느리게 흘러가는데 유독 내게 쏟아지는 멸시의 눈길은 선명했다.
“다, 다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당신한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음에, 다음에 준비를 좀 하고….”
어깨를 누르는 힘이 약해진 틈을 타 허겁지겁 달아나던 나는 소파에서 굴러떨어져 그만 대리석 탁자에 이마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아, 아윽!”
이마를 타고 귀뺨으로 뜨뜻한 물이 흘러 내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왔다. 온몸에 기력이 빠져나가면서 엄마보다 먼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한 찰나 암전이 찾아왔다.
잠깐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탁자에 부딪힌 이마가 욱신욱신 아파서 손으로 만져 보니 다친 상처가 무언가로 덮여 있었다.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상기하면서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자고 박래현에게 반항했을까. 박래현이 무섭다고 피할 처지가 아니었다. 위약금을 물지 않으려면 구멍이 찢어지든 살이 패든 박래현이 원하는 대로 대 줬어야 했다. 아이를 갖는 방법은 박래현이 결정한다고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 그가 원하면 언제 대 주더라도 대 주게 되어 있는데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대 줄 걸 그랬다. 나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던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실밥이 터져 너덜너덜해졌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열이 오른 눈을 감았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어금니를 악물고 참기로 했다. 잠이 안 와서 몸을 뒤척이고 있는데 열린 문틈으로 박래현과 박영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래현아, 준영 씨 이마 다친 것 같던데 괜찮을까? 진통제라도….”
“지금 병원으로 옮길 생각이야. 다른 데도 아니고 이마를 부딪쳐서 정신을 잃었으니까 정밀 검사를 해 봐야지. 그런데 내 개한테 왜 형이 신경 써? 혹시 저 오메가한테 눈독 들이고 있어?”
“너 이러다 일 벌일 거 같아서 그래. 지난번에도 너 오메가 때문에 골치 아팠잖아. 네가 골로 보낸 그 오메가들 뒤처리하느라….”
“저 오메가를 죽이든 살리든 내가 알아서 해. 형이 윤준영 뒤처리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맡길게.”
“그러라는 게 아니라, 일 안 복잡해지게 좀 조심히 다루란 소리야.”
박래현이 골로 보낸 오메가라고? 내 뒤처리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다고? 마치 들으라는 듯 조심성 없는 그들의 대화를 피해 덜덜 떨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탁자에 부딪힌 곳이 터졌는지 이마가 이불에 쓸려 시큰시큰 아팠지만 두 사람 대화에 충격을 받아서 상처엔 신경도 쓰지 못했다.
아무래도 난 이상한 사람을 만나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든 것 같았다. 이곳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소리를 질러도 들어 줄 사람이 없는, 내가 묻힐 무덤이었다. 침묵과 폭력 속에서 팔이 없어지고 다리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머리가 잘려 나갈 것이다. 엄마랑 해준이, 정우를 다시 볼 날이 올까. 아니야, 법치주의 국가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 없잖아.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좋은 쪽으로 사고하려고 해도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떠올라 쉽지 않았다.
박래현은 나처럼 돈이 필요한 오메가를 꼬드겨 계약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로 보내 버린 걸까? 내가 처음이 아니라면, 거액을 미끼로 오메가를 끌어들인 다음 제멋대로 강간과 폭언을 일삼다가 그 오메가가 만신창이가 되면 새 오메가를 구해 같은 일을 반복했을지 모른다. 박래현은 아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기 꼴리는 대로 가지고 놀다가 버릴 사람이 필요해서 나와 계약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박래현이 재벌이라고 해도 데리고 놀다 버릴 사람에게 40억을 준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모르게 어딘가에 함정을 파 놓았을 것이다. 급한 마음에 박래현이 내민 계약서에 사인했지만, 그가 마음만 먹으면 트집을 잡아 계약 위반으로 몰아갈 소지는 있을 것이다. 저 지독한 냉혈한은 내게 준 25억을 토해 내게 할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40억은 너무 허무맹랑한 금액이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불안에 떨고 있는데 누군가 이불을 잡아당겼다. 서늘한 손이 땀에 젖은 머리칼을 걷어 올리고서 열을 재듯 이마를 만졌다. 박래현이 즐겨 쓰는 향수 냄새에 눈을 뜨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잠든 척 가만히 있는 내게 솔잎처럼 뾰족뾰족한 시선이 느껴졌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흉곽 때문에 박래현은 내가 잠들지 않은 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내 왼팔을 뒤로 당겨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고통이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길고 지루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넓고 아늑한 병실에 혼자 누워 있었다. 집에 있을 때처럼 사위는 고요했다. 어찌나 조용한지 거치대에 걸려 있는 팩에서 노란색 수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퀴 달린 거치대를 끌고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 보이는 풍경이 눈에 익었다. 여러 색으로 칠해진 벤치, 줄지어 선 은행나무와 무당벌레 모양의 쓰레기통. 여긴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의 특실이 분명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급한 걸음으로 달려가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단정한 옷차림을 한 경호원 셋이 내 앞을 정중하게 가로막았다. 차라리 꿈이라면 좋을 텐데 꿈이 아니었다. 나는 발을 질질 끌면서 소파로 돌아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원양어선을 탄다고 거짓말을 한 상태라 어차피 엄마 앞에 나타날 수는 없었다. 그저 멀리서나마 엄마 얼굴이라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날 괴롭히려고 박래현은 일부러 이 병원에 입원시켰을 것이다. 남의 상처를 오락으로 소비하는 남자가 치 떨리게 밉고 싫었다. 미움 받을 이유가 있다면 덜 억울할 텐데 박래현과 난 이전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였다. 재수 없게도 나는 오메가 혐오증을 앓는 남자에게 걸려든 것이다.
이마를 치료하고 수액을 맞으며 이틀을 더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 담당의는 다친 곳이 심하지 않아서 내일이면 퇴원해도 된다는 소견을 밝혔다. 박래현은 자기 집으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출장을 갔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 반질반질한 얼굴을 본다면 공포로 경기를 일으킬 게 뻔하지만 나를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는 남자에게 맹렬한 분노가 솟구쳤다. 박래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감이 약해진 게 아니라 더 화가 났다.
‘너 같은 건 씹질 못 하게 구멍을 찢어 놔야 해.’
박래현의 음산한 목소리가 이명이 되어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그 남자는 대체 왜 저런 말을 했을까? 좋아했던 오메가가 바람나서 박래현을 버리고 다른 알파에게 가 버렸나? 그래서 다른 오메가를 잡아다가 화풀이를 하는 걸까? 막말로 내가 자기를 배신한 것도 아닌데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이 말이었다. 나는 어제 들었던 끔찍한 말을 털어 버리고자 고개를 흔들었으나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가 다른 오메가들을 망가뜨렸다면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내 목숨을 방관하면서 이대로 당해선 안 된다. 죽음의 공포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박래현으로부터 목숨을 지킬 방법을 고심했다. 맨손으로 사지에 뛰어든 나는 박래현과 비교해서 지나치게 약했다. 이 비루한 몸뚱이로 어떻게 그 막강한 남자에게 맞설 수 있을까. 돈과 권력으로 중무장한 박래현에게 맞서 난 두 주먹 말고는 가진 게 없다. 승산 없는 정면대결보다는 무사히 빠져나가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첫 번째 방법은 계약을 해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벌써 선수금 중 일부를 써 버린 데다 위약금이 걸려 있어서 내가 먼저 계약을 깰 수는 없었다. 자존심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병원에 입원까지 했는데 위약금까지 내는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내 처지에 당장 돈을 갚을 방법이 없다.
두 번째는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남자가 시키는 대로 죽은 듯 지내는 것이다. 이땐 목숨을 건지더라도 집을 나갈 무렵 정신에 이상이 생기거나 몸에 이상이 생길 가능성이 컸다.
세 번째는 물불 가리지 않고 서둘러 임신하는 것이다. 쓰레기에 개 후레자식이라도 자기 새끼를 밴 몸에 함부로 해코지는 못 할 것이다. 세 가지 방안을 두고 고민하던 나는 내 몸을 지킬 가장 안전하고 좋은 방법이 세 번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이번 히트 사이클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번에 실패하면 박래현에게서 벗어나기는커녕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생겼다.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병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간호사도 없이 담당의가 혼자서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윤준영 씨, 기분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저 퇴원해도 될 거 같은데요.”
“몸에 이상이 없어도 내일까지는 영양제 맞으면서 쉬래요.”
의사 이름은 박은수였다. 나는 친절한 그녀를 박 씨라는 이유로 경계했다. 산부인과 의사인데 나를 담당하는 걸 보면 박영범처럼 그녀도 박래현 친척일 가능성이 컸다. 그녀는 직접 수액을 갈고 나서 빈 팩을 둘둘 말아 카트 밑 칸에 내려놓았다.
“씻을 때 방수 패드 사용해서 상처에 물이 안 들어가게 조심해서 씻고, 하루에 두 번 이 밴드를 붙이세요. 그래야 흉터가 안 남습니다.”
박은수는 이마에 새 밴드를 붙여 주고서 밴드가 떨어지지 않게 손끝으로 꾹꾹 눌러 마무리한 다음 내 귀를 소독해 주었다. 일을 마친 그녀가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꼰 채로 나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이 오랫동안 내 귀에 머물렀다.
“귀걸이 되게 화려한데, 준영 씨 취향이에요?”
“아니요. 박래현 씨 취향입니다.”
그가 왼쪽 귓불에 박아 넣은 피어싱은 초승달 끝에 작은 별이 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초승달과 별에는 알알이 보석이 박혀 조명이나 햇볕이 비치면 색색으로 빛났다. 귓바퀴에 꽂힌 피어싱은 익숙해져서 괜찮은데 귓불에 꽂힌 피어싱은 무게감이 있어 영 낯설었다.
“준영 씨 귀가 둥글고 쫑긋해서 잘 어울려요. 나도 확 뚫고 싶네.”
“선생님도 피어싱 하면 예쁘실 거 같아요. 그런데 내일 저 몇 시에 퇴원해요?”
“내일 오전 열한 시에 퇴원할 건데 래현이가 데리러 온대요.”
박은수는 박래현도 아니고 래현이라고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다. 성을 떼고 이름을 부를 정도면 박래현과 친척이거나 가까운 지인인 게 확실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박래현은 대리모에게 아이를 얻는다는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자 할 테니 박은수는 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일 것이다.
“선생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사방이 꽉 막혀 있어서 나는 임신과 관련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웠던 게 다인데 그때도 임신이 되는 과정을 배웠지 시험관 아기나 인공수정을 배우진 않았다.
“뭔데 그래요?”
“오메가가 알파 정자로 인공수정을 하면, 성공률은 어느 정도나 될까요?”
“수정 성공률이 가장 높은 건 히트 사이클에 맞춰 직접 성교하는 거겠죠? 준영 씨도 알고 있겠지만 알파는 대게 오메가의 페로몬 강도에 따라 러트가 올 확률이 높아요. 러트가 온 상태에서 노팅까지 하면 거의 85%의 확률로 임신을 하게 됩니다. 정말 엄청난 수치죠.”
나를 모욕해 궁지로 몰 생각만 하는 박래현과 성교하느니 여기서 뛰어내리는 게 나았다. 나를 남창 취급하면서 온갖 더러운 말을 일삼는 인간과 어떻게 몸을 맞대고 관계할 수 있겠는가. 박래현도 나와 섹스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날 페로몬을 흘리며 그에게 달려들었을 때 밑에 문질러지던 성기는 전혀 발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인공수정은요?”
“남성 오메가의 인공수정 성공 확률은 19%에서 21% 정도 됩니다.”
“확률이 그렇게 낮아요?”
“네. 발현 시기가 꽤 늦어 보이는데 알파랑 성관계한 경험은 있죠?”
“…없는데요. 그게 중요한가요?”
“흠, 아무래도 검사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검사요? 무슨 검사요?”
“간단하게 내 진료실에서 초음파 검사만 해 보면 돼요. 같이 갑시다.”
내 몸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며 나는 의사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내려갔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진료실까지 나를 따라왔다. 박은수는 오늘 진료가 없는 날인지 그녀의 이름이 붙은 진료실 앞엔 사람들이 없었다. 단지 날 봐주기 위해 쉬는 날인데도 출근한 듯했다. 경호원들을 밖에 세워 두고 그녀는 나를 진료실 안쪽 공간으로 안내한 뒤 포대처럼 생긴 치마를 건넸다.
“바지랑 속옷 다 벗은 다음, 치마 입고 침대 위로 올라가 반듯하게 누워 봐요.”
그녀가 뭔가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치마를 입은 상태에서 바지와 속옷을 벗고 침대에 올라가 반듯하게 누웠다. 박은수는 무릎 안쪽에 손을 넣어 무릎을 직각으로 세우고서 막대처럼 생긴 기다란 기계를 집어 들었다.
“불편하고 조금 아플 수 있어요. 몸에 힘 빼고 긴장하지 말아요.”
밑에 기계의 차가운 끝이 닿았다. 뭉툭한 기계가 안을 헤집는 느낌이 불쾌해 인상을 찌푸렸지만 박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계를 삽입한 뒤 모니터를 살폈다.
“아, 이런….”
“왜요? 제 몸에 이상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이상이 있는 건 아니에요. 남성 오메가 중 준영 씨처럼 늦게 발현한 오메가들은 좀 유니크한 구석이 있어요. 준영 씨는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에 남성적 특성이 고착돼 버렸어요. 그래서 아기집은 있는데 아기집까지 정자를 인도할 통로가 없어요.”
“즉, 제가 임신하기 힘들다는 말씀인가요?”
“뭐라고 해야 하지? 이런 경우 파트너와 꾸준한 성교를 통해 정자가 아기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먼저 만들어야 해요.”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는 소리였다. 의사는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 없는 궤변을 줄줄이 늘어놓았고 나는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래현인 인공수정을 원하니까 둘이 통로를 만들긴 어려울 것 같고 인공수정 전에 기계로 길을 뚫을 수밖에 없겠네요. 인공으로 길을 만들면 호르몬 분비가 잘 안 돼서 첫 시도 때엔 임신 확률이 10% 미만으로 낮아져요.”
“10% 미만요?”
“두 번째부터는 20% 정도로 올라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왕 검사한 김에 몇 군데 더 살펴볼게요.”
10% 미만이라니. 성공할 확률이 너무 낮아서 나는 절망에 휩싸였다. 그녀는 삽입한 기계를 꺼낸 뒤 환자복 상의를 위로 올리고서 내 배에 시원한 젤을 잔뜩 발랐다. 이번에는 다른 기계로 젤을 펴 바르며 오장육부를 구석구석 검사했다.
“장기들 모양이 참 예뻐요. 아기집은 위치도 좋고 매우 튼튼해요. 여기 화면 봐 보세요, 여기가 아기집입니다.”
임신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른 아이를 낳아 주고 그 집에서 나와야겠다는 계획이 재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일은 자꾸 꼬여만 가는데 돈은 고사하고 멀쩡하게 그 집에서 걸어 나올 수는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알파 경험이 없는 데다 억제제를 끊었으니, 알파랑 같이 있기 괴롭겠네요.”
“네.”
“래현인 향기만 좋지 독이 있는 꽃이에요. 겉모습에 홀려 꺾으려 들었다간, 인생 망치는 수가 있어요.”
“충고 감사합니다.”
“검사 끝났어요. 옷 입고 나오세요.”
박은수는 물티슈로 내 배에 묻은 젤을 깨끗하게 닦아 낸 다음 마른 수건으로 한 번 더 닦았다. 나는 속옷과 바지를 입고 치마를 벗어 바구니에 넣었다.
“오늘 있었던 일, 래현이에겐 말하지 말아요. 그 새끼 은근 통제광이라 자기 허락 없이 준영 씨 검사한 거 알면 난리 날 거예요. 래현인 급할 거 없다고 했으니까, 인공수정 시도할 때 다시 검사하는 척합시다.”
급할 게 없다고? 그 남자야 부모님이 건강할 테고 누군가에게 망가질까 봐 두렵지 않을 테니 당연히 느긋할 것이다. 천천히 갖고 놀면서 숨통을 조인다 한들 나 외에는 괴로울 사람이 없었다.
“박래현 씨가 아이를 가질 마음은 있대요?”
“그러니까 저를 윤준영 씨 담당의로 지정했겠죠?”
“네….”
그가 망쳤다는 오메가들은 다 아이를 갖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학대당하다 망가졌다는 소리일까? 결혼까지 한 사람이 어린 나이에 왜 이런 미친 짓을 반복하는 걸까. 별안간 박래현이란 인간이 몸서리쳐지게 무섭고 섬뜩해졌다. 고대 신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범상치 않은 미모마저 내 두려움을 확대하는 데 한 몫 차지했다.
“내가 주도하는 연구 모임에서 준영 씨 같은 사례를 모으고 있는데, 준영 씨 자료 익명으로 사용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고마워요. 나중에 내가 맛있는 식사 한번 대접할게요.”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에 박은수는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내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박래현 목소리가 들렸다.
“어, 래현아. 준영 씨 점심 잘 먹고 지금 수액 맞고 있어. 넌 점심 먹었어?”
나는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들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탈주를 시도할 것이다. 답답한 마음을 삭이고자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상상했다. 먼저 오른발로 경호 A의 가슴을 걷어차고 돌려차기로 경호 B의 턱을 날린다. 그리고 경호 C의 이마를 내 이마로 들이받은 다음 숨도 안 쉬고 달려가 엄마를 만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이 날개를 접을 무렵 경호원들은 특실 입구에서 멈춰 나만 안으로 들여보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뚝뚝 떨어지는 수액을 응시하며 고민에 잠겨 들었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건강한 몸으로 박래현을 벗어나야 한다. 박래현과 계약한 오메가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살아서 그 집을 나갈 것이며 박래현에게 약속을 어길 구실도 주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빨리 아이를 낳아 주고 그 남자와 안전 이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성공률이 가장 높으면서 가장 최악인 방법, 바로 박래현과 직접 성교하는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 인공수정은 성공확률이 10%밖에 안 되는데 수정에 실패하면 40일을 기다려야 한다. 만일 한 번 더 실패하면 석 달을 훌쩍 날리게 된다. 그 기간을 박래현에게 묶여 비참한 끝을 기다리며 지낼 수는 없다. 박래현은 날 한계까지 몰아갈 것이고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스스로 계약을 파기할 때까지 나는 일정한 궤도를 돌며 미쳐 갈 게 뻔했다.
박래현은 나를 실컷 가지고 논 다음 내게 빚을 씌워 쫓아내고 다른 먹잇감을 찾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박래현은 아이를 급하게 가질 나이가 아니었다. 아이는 단지 계약서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오메가를 현혹하고 그의 배우자를 속이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망가졌다던 오메가들이 전부 나와 같은 절차를 밟았을 거란 생각에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엄마가 계신 입원실로 달려가 박래현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함께 달아나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탁탁 쳐서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었다. 절대 그 남자 장단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나는 그에게 아이를 낳아 주고 1년 안에 엄마 곁으로 돌아가 내가 꿈꿔 왔던 삶을 살 것이다. 끔찍하게 싫지만 이번 히트 사이클에 박래현과 섹스를 해서 아이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박래현과 섹스할 수 있을까. 내가 박래현 페로몬에 흥분해 몸을 들썩였을 때 내게서도 페로몬이 흘러나갔다. 그러나 박래현이 내 페로몬에 흥분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내 유일한 무기가 통하지 않는 알파를 무슨 수로 유혹해야 할지 암담했다. 섹스에 성공하기 전에 남자에게 맞아서 병원 신세를 지는 게 먼저일 것이다. 그날 나를 노려보던 서늘한 눈이 생각나서 한참을 떨다가 정신적 피로에 지쳐 침대로 올라갔다.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당기고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윤준영. 나랑 섹스하겠다고? 키우는 개 따위랑 내가 섹스할 것 같아?’
박래현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를 함락시킬 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혹시 알파 킬러인 윤해준은 박래현을 유혹할 수 있을까. 박래현을 다루는 데는 나 같은 숙맥보다 해준이처럼 능수능란한 오메가가 적임자이다. 그 새끼라면 벌써 박래현 혼을 쏙 빼놓았을 것이다. 해준인 나랑 체격과 얼굴이 똑같은데 묘하게 요염하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자기가 꼬시면 죄다 넘어올 수 있다는 자신감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윤해준. 씨발 알파들 좀 그만 후리고 다녀! 너 그러다 미친 새끼한테 잘못 걸리면 인생 좆 되는 거야.’
‘야, 윤준영, 모르는 소리 그만 지껄여. 네 구멍에 좆 한번 박아 보겠다고 납작 엎드리는 알파들 보면, 그런 소리 안 나올걸? 나만 사랑하겠다고 밑구멍까지 싹싹 빨아 대는데 그걸 어떻게 포기해?’
‘…….’
‘내가 알파 새끼들 각인시키는 노하우 전수해 줄까? 혹시 알아, 나중에 유용하게 써먹을지. 이거 어디 가서 배우고 싶어도 못 배워.’
‘야, 닥쳐라. 말도 안 되는 개소리 듣고 싶지 않아.’
각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해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람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데 난 왜 해준의 입을 틀어막았을까. 그때 해준이 전해 주는 방법을 들었어야 했다. 박래현을 내게 각인시키면 임신 문제와 다른 문제들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박래현이 경멸해 마지않는 오메가에게 각인해 사랑받고 싶어 매달리는 꼴을 상상해 봤다.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모습에 좋아서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박래현이 깨달을 날이 올까. 하늘이 두 쪽 나도 절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오만불손한 박래현이 내게 각인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쩔쩔매는 모습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각인은 고사하고 히트 사이클에 박래현을 유혹해 임신에 성공하는 것마저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박래현이 내게 각인한다고 해서 꼭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박래현이 내게 각인하면 목숨이 안전해지는 대신 그가 배우자와 섹스할 수 없게 돼 문제가 복잡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자세가 불편해 돌아눕는데 치렁치렁한 링거 줄이 눈에 보였다. 찢긴 이마가 베개에 닿는 순간 내 알량한 양심에 비웃음이 났다. 내 코가 석 잔데 박래현 가정을 걱정하는 내가 우스웠다. 그 부부 사정까지 고려해 주다가 내가 먼저 죽게 생겼다. 부부 사이의 일은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결할 테고 나는 내 목숨을 보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알파와 오메가가 섹스한다고 다 각인하지는 않는다. 간혹 상대의 육체가 마음에 들면 섹스만으로 각인하는 예가 있지만, 97% 이상은 상대에게 몸과 마음을 다 열어야 각인이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여러 방법을 고민해 봐도 각인 없이 섹스만 해서 아이를 갖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잘 찾아보면 박래현에게 빈틈이 있을 것이다. 본능을 억누르고 있을 뿐 그 사람도 한계치를 넘어서면 오메가 페로몬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알파이다. 그에게 본능만 남을 때까지 간격을 두지 않고 밀어붙이면 어떨까? 얌전히 미쳐 가는 것보다는 결과가 불투명할지라도 코뿔소처럼 들이받아 박래현을 함락시키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박래현이 퇴근하면서 데리러 오겠다고 해서 퇴원 시간이 오후 일곱 시로 늦춰졌다. 여기에 경호원이 세 명이나 있는데 뭐가 불안해서 직접 데리러 온다는 걸까. 그가 병실에 올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겁을 먹고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를 각인시켜 내 노예로 만들면 좋겠다던 상상은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여러 오메가를 거쳤을 박래현이 페로몬 조절도 제대로 못 하는 내게 마음을 줘서 각인할 확률은 마이너스에 가까웠다. 그를 유혹한다고 다가갔다가 나만 만신창이가 되어 자포자기 상태가 될 게 뻔했다.
시곗바늘이 일곱 시를 가리키자마자 문이 열리고 박래현과 박은수, 박영범이 들어왔다. 박영범이 몸은 어떠냐고 물어왔지만 내 눈은 기계적으로 박래현에게 고정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보내면 개새끼가 말을 안 듣는다고 지랄할 것 같아서였다.
“이마 부딪친 덴 좀 어때요.”
“어지럽고 토 나올 거 같고 상처가 욱신거립니다.”
포마드를 발라 훤히 드러난 이마 아래서 무심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몸에 딱 맞아 떨어지는 슈트 차림의 남자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서 내게 다가왔다. 안락하던 병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짙푸른 바다 밑으로 수장되었다.
일렁일렁 이는 물살에 숨이 막혀 이불을 위로 당겨 꽉 그러쥐었다. 빈틈이라곤 없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을까? 이 남자에게 당한 다른 오메가들도 살아남기 위해 페로몬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들이 실패해서 내가 여기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어제 오후부터 나를 지배했던 결심과 각오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은수 누나한테는 아주 좋다고 했다면서요.”
침대 옆에 선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키 어려운 눈으로 나를 살폈다. 태연자약한 얼굴이 얄미워 작은 파장이라도 보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요즘 좀 살 만한가 보지? 남자는 그런 표정으로 입술 끝을 올려 싱긋 웃더니 박은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나. 내가 들어야 할 주의사항 있어?”
“들어야 할 주의사항이 산더미야. 래현아, 육체에 든 멍이 문제가 아니야. 정신에 멍이 들면 시간이 지날수록 새파래져서 절대 지워지지 않아. 폭력은 그래서 무서운 거야. 손찌검하지 말고 다음부턴 말로 해.”
“윤준영이 스스로 탁자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내가 어떻게 말려?”
“그 과정에서 넌 잘못이 하나도 없니?”
“그런 말 말고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야지, 누나.”
“이마에 흉터 안 남기려면 일주일은 밴드 꼬박꼬박 붙여 줘야 해. 약 때문에 술, 담배 안 되고 환자 놀라게 하지 마.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해.”
“그 정도면 됐어. 윤준영 씨 옷 갈아입게 두 사람은 나가 있어.”
박래현은 박영범에게 종이가방을 받아 그 안에서 옷과 속옷을 꺼냈다. 그가 가격표를 떼느라 씨름하는 동안 박영범과 박은수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병실을 나갔다. 박래현 씨는 왜 안 나가요? 제일 먼저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싶은 말을 안으로 삼키며 나는 쭈뼛쭈뼛 환자복 단추를 풀고 윗도리를 벗었다.
“이건 퇴원 선물입니다.”
남자는 종이가방에서 직사각형 모양의 보라색 상자를 꺼냈다. 내 눈은 안에서 나온 화려한 물건을 따라갔다. 나뭇잎인지 깃털인지 모를 모티브에 보석이 줄줄이 매달린 정교하고 아름다운 펜던트였다. 박래현이 무슨 짓을 할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얇고 차가운 금속이 목덜미에 닿았다. 시선은 내 눈을 향한 채 그는 팔을 뒤로 돌려 목걸이 고리를 채웠다. 목에 닿는 서늘한 손과 차가운 펜던트가 숨통을 끊어 놓을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이건 목줄의 상위 버전인가? 인형을 장식하듯 남자는 내 몸에 보석을 하나씩 매달았다. 이러다간 온몸을 보석으로 치장한 채 관속에 들어가 묻힐 것 같았다. 무서운 예감이 들어 작은 움직임에도 흠칫거리는 나를 보면서 박래현은 뒤로 물러섰다. 나는 연두색과 초록색이 섞인 반팔 티를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내가 벌벌 떨수록 박래현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알기에 침착하려 했지만 남자가 다가오면 반사적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구멍을 찢겠다고 웃으며 얘기하던 얼굴이 중첩되어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렸다. 나를 갉아먹는 분노와 고통의 감정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마모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집요한 시선을 감내하며 차분하게 속옷과 베이지색 팬츠를 입었다. 옷은 직접 입어 보고 산 것처럼 꼭 맞았다. 오랜만에 정상적인 옷차림을 하니까 비현실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넘어온 것처럼 기분이 묘해졌다.
“집에 갑시다.”
“저기요….”
남자는 한쪽 눈썹을 세우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병원을 떠나려고 하니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밟혔다.
“엄마 한 번만 보고 가게 해 주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바닥에 깔린 용기를 쓱쓱 긁어모아 엄마를 먼발치에서나마 보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지난 4일간 엄마의 소식을 확인하지 못해 답답했기에 내 심정은 절박했다.
“윤준영 씨. 지금 야유회 온 걸로 착각하고 있습니까? 며칠 밖에 나와 있더니 자기 처지를 다 잊어버렸네.”
“그냥 멀리서 엄마 얼굴만 보고 갈게요. 부탁드려요.”
“박 실장한테 목줄 사 오라고 지시할까요? 목줄을 걸고 나랑 같이 어머니를 만나겠다면, 만나게 해 주죠.”
“…정말 지독한 분이시네요.”
“알았으면 한번 말할 때 무슨 말인지 알아 처먹으세요.”
나긋나긋한 말투가 역겨워 속이 드세게 끓어 올랐다. 집에 있다가 엄마를 만나러 병원에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엄마가 계셔서 얼굴 한번 보고 가겠다는데 남자는 그 쉬운 부탁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비열한 처사에 화가 나서 사라졌던 전의가 맹렬히 솟아올랐다. 병실을 나서면서 이 싹수없는 남자가 내 페로몬에 취해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은수는 박래현을 배웅하기 위해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 내려왔다.
“준영 씨. 히트 사이클 시작되기 전에 병원에 입원할 거예요. 검사할 것도 있고 준비도 해야 하니까. 래현이 넌 시간 날 때 미리 연락하고 와서 정액만 채취하면 돼. 그리고 인공수정 할 때 알파 페로몬이 있으면 일이 더 수월하거든? 바쁘더라도 준영 씨랑 같이 와.”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 페로몬이 필요하면 누나가 알아서 알파 한 명 섭외해.”
“미친 새끼야, 네 새끼 수정시키는데 왜 다른 알파를 불러?”
“정자만 내 거면 되지. 안 그래?”
박래현을 유혹하지 못해 인공수정을 하게 되면 이 남자는 내게 정자만 제공해 주면 된다. 수정할 때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이용하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는 의견이 다른지 박은수는 화난 표정으로 내 약이라며 박래현에게 흰 봉투를 던지듯 건넸다. 박래현이 받지 않아서 약 봉투는 그의 발밑으로 떨어졌고 내가 봉투를 집으려고 허리를 숙이기 전에 박영범이 먼저 약 봉투를 주웠다. 박래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잡아 차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차 밖에서 박은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아이 낳을 사람이야. 준영 씨가 건강하고 마음 편해야 네 아이도 건강하고 착하게 태어나. 성격이라도 준영 씨 닮아야지 너 같은 또라이 새끼 나오면 네가 어떻게 감당할래?”
“누나, 윤준영이 착해 보여? 겉보기와 달리 천박한 데다 아주 미친개야. 허락도 안 했는데, 더럽게 물고 핥아 대더라고.”
“어휴, 말이 안 통해. 아무튼, 준영 씨 또 다쳐서 입원하면, 나 말고 다른 사람으로 담당의 바꿀 테니까 그렇게 알아.”
“현수 형으로 바꾸면 되겠네. 은수 누나, 그래도 돼?”
“야, 박래현!”
박래현은 박은수의 대답을 듣지 않고 내 옆자리로 올라타 차 문을 닫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나는 유리에 비친 박래현 얼굴을 노려봤다. 같은 박 씨인 박영범이나 박은수는 정상인데 박래현만 저 집 안에서 돌연변이인 듯했다.
“은수 누나, 우리 가 볼게요. 다음에 술 한잔해요.”
박영범은 조수석 창문을 올리고서 차를 출발시켰다.
‘너 같은 또라이 새끼 나오면 네가 어떻게 감당할래?’
박은수의 날카로운 말이 가슴께를 쿡쿡 찔렀다. 그녀의 저주대로 박래현을 닮아 겉모습은 완벽한데 성격이 이상한 아이가 태어날까 봐 걱정이 산더미였다. 내가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영리하고 성격 좋은 아이가 태어나서 누구에게든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랐으면 좋겠다.
다른 생각들로 경황이 없어 그냥 지나갔는데 별안간 어제 봤던 아기집이 눈에 어른거렸다. 엄마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박래현이 무서워서 벌벌 떠느라 현실로 다가오지 못했던 임신이란 명제가 아기집을 본 순간부터 현실이 되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체에게 미안해져서 지난밤엔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불행을 막기 위해 더 커다란 불행을 끌어다 쓴 멍텅구리가 나였다.
“준영 씨. 병원에 혼자만 둬서 미안해요. 그동안 좀 바빠서….”
“전 괜찮습니다.”
“이 차장님께 준영 씨가 좋아하는 갈비찜과 낙지볶음 준비하라고 했어요. 병원 음식 먹느라 힘들었죠?”
“아니요, 병원 음식도 잘 먹었어요.”
박영범이 부탁한 갈비찜이나 낙지볶음보다는 간장양념 치킨과 치즈가 길게 늘어지는 피자가 그리웠다. 라면과 짜장면, 엄마가 만들어 준 떡볶이가 당장은 제일 먹고 싶었다. 이 집에 들어온 뒤로 구경 한번 못 해 본 음식들이다.
“어제 은수 누나랑 진료실에 내려갔다던데, 거기서 뭐 했어요?”
자기가 말할 땐 눈을 쳐다보라던 말이 생각나 나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래현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던 모습 그대로 내게 눈을 맞춰 왔다. 지나가는 자동차 조명에 시시각각 변해 가는 남자 얼굴이 기괴하고 무서워서 눈 밑 근육이 추하게 떨렸고 그걸 감추기 위해 눈을 여러 번 깜박여야 했다.
“왜 대답 안 하죠?”
“배가 아파서 잠깐 검사받으러 내려갔습니다.”
“그런 말 없었는데, 배가 아팠단 말이죠?”
“네. 별 이상은 없대요.”
의외로 침착하게 거짓말을 했다. 박래현이 계속 몰아붙였으면 거짓이 탄로 났겠지만 그는 손에 쥔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손바닥에 맺힌 땀을 바지춤에 문지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남자와 같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 피곤해졌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등받이에 뒷머리를 기댔다. 박래현을 유혹하려면 남자에게 느끼는 거대한 공포부터 없애야 할 것이다. 두렵고 끔찍하기만 한 상대에게 어떻게 내 매력을 어필할 수 있겠는가. 박래현은 유부남이고 배우자 외에 다른 오메가들과도 관계를 맺어 왔다. 나처럼 경험 없는 오메가가 무작정 달려든다고 해서 넘어올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보고서를 읽는 박래현을 힐끔 곁눈질했다. 박래현과 몸을 섞으려면 온 신경을 집중해서 남자의 약점을 찾고 남자가 무너질 때까지 그 부분을 끈덕지게 공략하는 게 제일 나아 보였다.
***
저녁을 먹고서 오늘 밤까지 계약서 검토를 마무리해야 한다며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욕실 수납장에 입욕제가 있다던 말이 생각나 욕실로 향했다. 수납장 맨 위 칸에 입욕제로 보이는 물건이 개별 포장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중 아무거나 하나 꺼내 사용 설명서를 읽었다. 포장을 벗겨 욕조에 넣고 물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포장 안에 든 둥근 알맹이를 욕조에 담고 따뜻한 물을 받았다.
옷을 벗어 세면대 아래 서랍에 넣어 둔 뒤 물이 삼분의 일 정도로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욕조에 걸터앉아 오른발을 먼저 담갔다. 생각보다 물이 뜨거웠지만 왼발을 차례로 담그고서 발이 물 온도에 익숙해지자 물속으로 몸 전체를 주저앉혔다. 미끌미끌한 물이 긴장과 피로에 지친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어찌 된 일인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던 과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요즘이 몇 배는 피곤했다.
그때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밀린 리포트와 과제를 하느라 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나도 모르는 새에 책상에 엎드려 잠든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면 피곤함이 싹 가셨는데 요즘은 늘어지게 잠을 자도 머리가 무거웠다.
늑골까지 찼던 물이 가슴을 지나 빗장뼈 위로 올라왔다. 나는 다리를 쭉 뻗어 물을 잠그고 곧장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길어진 머리칼이 물속에서 지느러미처럼 너울거렸다. 숨이 막혀 눈앞이 노래지고 나서야 물 밖으로 머릴 내밀고 얼굴에 묻은 물을 쓸어내렸다. 입욕제가 녹아든 물에서 아카시아꽃 향기와 꿀 냄새가 났다. 나는 팔다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페로몬을 서서히 풀어 보았다.
귀동냥으로 들었던 말에 의하면 상대와 자고 싶은 욕구가 강할수록 페로몬이 짙어진다고 했다. 박래현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그를 유혹하는 거라서 나는 충분한 페로몬을 풀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을 감고 이성을 앗아 갔던 치자꽃 향기를 떠올렸다. 짙고 농염해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향이었다. 경험치나 나이, 다른 조건을 따졌을 때 박래현이 내게 넘어오기 전에 내가 그에게 넘어갈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페로몬을 풀어 알파를 유혹하는 방법은 내게도 치명적이어서 양날의 검을 쥐는 것과 같았다. 목숨을 건 이 전쟁에서 내가 무사할 리는 없을 테고 그저 덜 다치길 바랄 뿐이다.
목욕을 마친 나는 일부러 시간을 들여 몸을 닦고 속옷을 꺼내 입었다. 이 집에 온 이래로 처음 입었던 정상적인 옷에 미련이 남아 계속 흘깃거리다가 작은 고양이가 그려진 풀색 실크 파자마를 꺼내 팔을 꿰었다. 허리끈을 단단하게 동여맨 다음 거울 앞에서 머리칼을 말렸다. 펌을 넣어 풍성한 머리칼이 이마와 귓바퀴에서 곱실거렸다. 이렇게 긴 머리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거울을 볼 때마다 얼굴이 낯설었다.
나는 얼굴에서 시선을 내려 비싸 보이는 피어싱과 펜던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박래현이 나를 위해 준비하지는 않았을 테니 나보다 먼저 계약한 오메가들이 착용했던 보석들 같았다. 박래현은 나를 망가뜨리고 나서 새 오메가를 물색해 이 보석들을 재활용할 것이다. 나를 비웃듯 깃털 모양을 가득 채운 보석들이 전등 빛에 반짝였다. 빗장뼈 부근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 백금 줄은 잡아채면 금방 끊어질 정도로 얇았다. 씨발, 재수 없어! 목걸이를 잡아 뜯으려는 순간, 거울 속에 박래현이 비쳤다. 환영인 줄 알았는데 거울 속에서 시선이 얽혀 들었다.
“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니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제 방엔 웬일이십니까?”
질문을 끝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남자에게 질문하면 안 되는데 며칠 병원에 있었더니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돼 버렸다. 어깨를 움츠리는 날 살펴보던 박래현이 몸을 돌려 침실로 나갔다. 내가 세탁 바구니에 빨래를 던져 놓는 새를 못 기다리고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 퇴원했다고 예외는 없었다. 나중에 계약 끝나면 기필코 한판 뜨겠다고 다짐하며 침대 끝에 걸터앉은 박래현에게 달려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이 무성하게 고개를 들며 서서히 타오르다가 남자의 어둑한 눈길에 사그라들었다.
“나는 관용도 참을성도 제로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내 심기 거스르지 말아요.”
남자가 입 털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계약 관계가 아니라면 사실대로 대꾸했을 테지만 지금 남자는 내 주인이라 순종해야 했다.
“요즘엔 개 함부로 대하는 주인은 없습니다. 욕하는 대신 칭찬해 주고 예뻐해 주면, 성심성의껏 따르겠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부드러운 말로 남자를 회유했다. 단단히 굳어 있던 눈동자가 약간 풀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눈과 입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 어느 쪽을 믿어야 할까요?”
상체를 숙인 남자가 왼손을 쭉 뻗어 내 오른쪽 귀와 뒤통수를 감싸고선 손에 힘을 주었다. 아파서 고개를 흔들었지만 남자는 악력을 줄이지 않았다. 여기서 더 힘이 들어가면 두개골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남자는 한껏 공포감을 조성한 뒤에 손에서 힘을 풀었다. 약학과 출신에 연구원인 박래현은 사람을 죽일 때 원초적인 방법보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고 교묘하게 죽이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어둠마저 흐물흐물하게 녹이는 열대야 한가운데서 나 혼자만 추위에 달달 떨고 있다. 엄마는 아파서 누워 있고 윤해준은 행방이 묘연해서 내가 사라져도 나를 찾아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내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즐기면서 남자는 살갗을 한 꺼풀 벗길 기세로 엄지를 움직여 귀 옆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귓바퀴를 타고 오르던 손이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피어싱 가리지 말아요. 마치 내 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잖아.”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렇습니다. 집 밖으로 못 나가니까 제가 직접 자를게요.”
“누구 맘대로 당신 몸에 손을 댄다는 거지? 자기 털을 직접 깎는 개도 있습니까?”
“…….”
“테이블 위에 약 놔뒀으니까 먹고, 이마에 밴드 붙이고 자요. 내 물건에 흠집 있는 거, 참을 수 없거든요.”
“네.”
엄밀히 따지면 자기가 상처 입혀놓고 남자는 내 탓을 했다. 억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내색할 수 없으니 내 속만 곪아 갔다. 남자가 방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무릎을 꿇고 있던 나는 그가 완전히 나간 걸 확인한 후에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매트리스에 팔다리를 댄 채 위아래로 움직여 몸의 긴장을 완화 시켰다. 박래현이 나쁜 인간이라 해도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닐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금부터 나를 위축시키는 극단적인 판단은 보류하기로 했다. 긴장을 다 풀고 나서 고개를 뒤로 꺾어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약봉지를 보았다.
흠결 있는 물건을 제발 1년만 사용하고 버려 주길 바라며 풀 냄새가 물씬 밴 베개를 끌어안고 유리창 너머 어둠을 응시했다. 엄마를 지척에 두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돌아온 게 못내 서러웠다.
엄마, 많이 보고 싶다. 엄마 곁으로 돌아가면 내가 착한 말만 하고 효도하면서 살게. 설거지도 내가 하고 빨래도 내가 하고 밥도 내가 차려 줄게.
그동안 엄마에게 내뱉었던 막말과 생각 없이 저질렀던 불손한 행동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래도 너밖에 없다고, 착하다고 어깨를 다독이던 손이 그리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스물셋의 여름에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추억의 등을 하나씩 켰다. 환해진 머릿속에서 엄마와 해준이 함께했던 과거를 되새김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