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Infighter
방 다섯 개짜리 아파트가 평소보다 배로 넓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도경은 회사에 있었고 가사도우미는 퇴근했다. 혼자 남은 집에서 머리를 말리지 않은 채로 식탁 의자에 앉는 것은 어느새 지한의 습관이 되었다. 도경이 있을 땐 감추는 습관이었다.
도경의 집에 들어와 지낸 지도 반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가 한 번이라도 지한에게 이 집에선 뭘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해선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었다. 지한 혼자서 하는 검열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적어서 그런 면도 있었다. 배우란 직업에는 예상보다 훨씬 더 들쑥날쑥한 스케줄이 따라붙었다.
새해를 맞이해 바뀐 탁상용 달력은 도경이 전해에 가져왔던 것보다 컸다. 메모할 거리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각 날짜 아래 깨알같이 들어찬 글자들이 지한의 눈길을 붙들었다. 도경의 필체로 써진 것은 지한의 일과였다.
두 번째 작품에서 분량이 확 늘어난 데다가 촬영 아닌 일정들도 상당해 이제는 일일이 손으로 적기 귀찮을 법하건만, 도경은 기어이 정해진 스케줄을 빼놓지 않고 달력에 표시해 놓았다. 그는 오로지 지한을 위한 달력에만 열성적으로 글자들을 남겼다. 그가 제 스케줄을 글씨로 남기는 것은 본 적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도경처럼 꼼꼼하게 챙겨주는 상대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그만큼 좋아해준단 증거라 판단해 기뻐할까.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 지한으로선 넘겨짚을 뿐이었다. 그도 물론 좋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왜 싫겠는가. 도경이 지한을 하나하나 챙겨준다는 게. 확실히 좋아해야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지한이 맘 편히 호의를 받기만 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딱히 자신이 성욕 넘치는 타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첫 드라마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에야 처음 해보는 일에 그가 워낙 긴장해 있었고, 꼭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전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의식할 여유조차 없었다.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해가 바뀌고 나서부터였다. 차기작 촬영이 들어가기 전까지 약간의 여유가 생긴 지한은 매일 저녁, 어떨 때는 밤이나 되어야 돌아오는 도경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생활을 의도치 않게 경험했다. 그렇다고 지한이 집안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시간을 통해 그는 인간이 많은 시간을 얻으면 머리를 안 써도 될 데까지 쓴다는 이치를 배웠다.
말하자면 바쁠 때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들을 끄집어내 따지게 된다는 소리였다. 퇴근한 도경이 밥을 먹었냐며 그 마르고 큰 손으로 귓바퀴를 쓸거나 더 나아가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듯 쓰다듬을 때마다 지한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서로의 맨몸을 본 지 반년이 더 되었단 사실을 상기했다. 어쩌다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볼 때면 도경은 지한의 팔에 기대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예전처럼 목을 깨물거나, 허리에 팔을 두르거나 하다못해 허벅지를 만져오지도 않았다.
마음이 간사했다. 도경의 집으로 막 들어왔을 땐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고 첫 작품 촬영이 들어가면서는 주연 배우와 스태프 눈치를 보느라 피곤해서 까무러칠 지경이더니 좀 살 만해졌다고 도경이 어디까지 만지다 마는지를 일일이 측정하고 있었다. 간사한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풀었다.
정확한 수치로 몇 달이나 됐는지 알고 싶어 달력을 넘겨가며 센 적도 있었다. 6개월이 넘어가면서부턴 더 세길 포기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1년이 되어있을까 무서웠다. 비록 지금까지도 도경과 지한의 관계는 말로 깔끔하게 정리된 적 없을지언정 사실상 연인 비슷한 것이라고 여겨온 믿음마저 옅어지게 될까 봐.
현관 잠금이 해제되고 있음을 알리는 전자음이 상념을 깨트렸다. 지한은 긴장하지 않았다. 도어록을 누르고 들어올 만한 후보는 도경과 도우미밖에 없었다. 아직 도경이 퇴근할 시간은 아니었으니 아마 도우미가 소지품을 두고 갔다가 돌아온 듯했다.
태평하게 앉아있는 지한의 귀로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가 작았다. 도우미의 걸음소리와는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등 뒤를 본 지한은 때마침 복도를 다 지나 부엌에 도착한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어머나.”
주인 없는 집의 잠금을 알아서 해제하고 들어온 방문객은 입으로만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나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고 가는 여자. 지한은 첫눈에 여자를 알아보았다. 도경의 엄마였다. 황 원장님.
가는 팔뚝에 걸린 케이지 안에서 캉캉 짖는 소리가 났다. 복도를 지나올 때처럼 소리 없이 식탁으로 다가온 황 원장이 지한의 옆 의자에 켄넬을 올려놓았다. 입구가 열리기 무섭게 바닥으로 뛰어내린 개가 거실로 튀어갔다.
“사람이 있는 줄 알았으면 벨을 눌렀을 텐데.”
켄넬에 이어 핸드백도 의자에 올려놓은 황 원장이 미소 지었다. 웃지 않을 땐 밀랍 같았던 인상이 입술 좀 움직였다고 바로 사람다워졌다. 시야에 들이닥친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뇌가 가동을 시작했다. 어른이 왔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있는 무례를 저질렀단 자각에 급히 일어나다 의자를 넘어뜨렸다.
“힘도 좋아.”
인사하려다 말고 넘어진 의자를 세우는데 머리 위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동을 재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지한의 뇌가 금세 다시 갈 길을 잃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
“나한테 왜 죄송해요? 여기 있는 거 다 도경이 건데.”
허리를 세운 지한은 황 원장과 마주 보게 된 상황에 그냥 바닥에서 조금 더 미적대다 일어났어야 한다고 후회했다. 암만 코를 박고 돌아다녀도 도경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부엌으로 돌아온 개가 지한에게 달려와 다리를 긁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광경이야.”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 개의 목덜미를 만지던 지한은 얼른 부드러운 털에서 손을 뗐다.
“네, 네?”
“우리 리즈가 아무 다리나 긁는 애 아니거든요.”
아무 다리나 긁는 것 같던데. 지한이 기억하기로 황 원장의 개는 첫 만남에서부터 크게 낯을 가리지 않고 만져달라고 했었다. 그랬다가 머리카락을 물어뜯기도 했지만. 그거야 어찌 됐든.
“혹시 도경이랑 같이 있을 때 내가 영상통화 건 적 있나?”
황 원장의 기억력은 정확했다. 도경이 없는 자리에서 마음대로 그렇다고 말해버려도 좋을지 모르겠어서 망설였다. 하지만 딱히 거짓말할 까닭도 없었다. 그게 뭐라고.
“네, 작년에…….”
“그때 그 다리가 이 다리였구나.”
혼자 말하고 끄덕인 황 원장이 지한을 지나쳐 싱크대로 갔다. 찬장에서 커피 캡슐과 잔을 꺼내는 손길이 지한보다 더 도경의 아파트에 익숙해 보였다.
“커피 한 잔?”
“전 괜찮아요.”
“모르는 사람이 타주는 건 안 마셔요?”
“그게 아니라. 커피 못 마셔서.”
“커피를 못 마셔요?”
캡슐을 기계에 넣고 버튼을 누른 황 원장이 코웃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이 냈으면 비웃음으로 들렸을 소리마저 황 원장이 내니 우아하게 들렸다.
“아직 애기구나.”
태어나서 낯 뜨거운 말은 도경에게 제일 많이 들어봤지만 그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그의 친엄마에게서 들었다. 따지고 보면 도경과는 낯 뜨거운 짓을 많이 했지 정작 말로는 많이 들어봤다고 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도경이 지한에게 했던 말 중 가장 노골적이었던 것은 아마, 뒤로 집어넣은 손가락이 어쩌고 하는…… 지한은 머리통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도경을 낳아준 여자 앞에서 하기 적합한 회상이 아니었다.
“얘길 들으니 여기서 같이 지낸 지 좀 됐다고?”
“네. 형이 저…… 도와주느라고.”
황 원장에게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녹고 있는 빙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지한이 도경의 아파트에서 지낸다는 것은 누구에게 들어서 아는지도 걱정이 됐다. 도경에게 직접 들었다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대체 어찌 알았을까.
커피로 찬 잔을 들고 지한이 앉아있던 자리의 맞은편에 앉은 황 원장이 앉아보라는 듯이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엄마를 닮았다던 도경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마저 도경을 연상시켰다.
“도경이랑 같이 지내기 어때요?”
의자에 다시 앉기가 무섭게 가볍지 않은 질문이 들어왔다. 황 원장이야 가볍게 지나가듯 던진 질문일지 몰라도 지한에겐 함부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덥석 좋다고 하자니 이상하게 볼 것 같고, 그렇다고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싫지 않으니까.
“어…….”
“걔가 가족 말고는 누구랑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미국에서도 주소는 가디언네 집으로 해놓고 그 옆집에서 혼자 살았어요. 도경이가 깔끔하긴 한데, 같이 있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그런가. 도경을 낳아준 여자가 하는 말이니 없는 소린 아닐 텐데도, 지한은 반박하고 싶어졌다. 도경에게 잘 보이고 싶은 스스로의 욕심으로 인해 불편했던 순간들은 많았어도 도경이 지한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한 기억은 없었다. 있었다 해도 당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불편하진 않은 것 같은데.”
“그래요?”
“같이 있는 시간이 별로 안 많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이 없어서 불편하지는 않다?”
“아니, 아니요. 절대 그런 게.”
“농담이에요.”
외모만 닮은 것이 아니라 전혀 웃기지 않은 농담만 골라 하는 센스도 도경과 닮았다.
“어쨌든 우리 도경이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집에서 잘 안 재우는데 아예 같이 산다니까 너무 신기해요. 언제 한 번 꼭 보고 싶었어요. 아, 드라마도 잘 봤고.”
“감사합니다.”
“거기 입고 나왔던 옷들은 코디가 골라준 거예요? 솜씨가 아주 좋더라. 그 코디 자르지 말고 계속 같이 일해요.”
“거의 다, 도경이 형이 고른 거기는 한데.”
“어쩐지. 우리 아들 눈이 보통은 아니지.”
도경을 언급할 때마다 목소리와 눈빛의 온도가 달라졌다. 자식 둔 부모를 처음 본 것도 아니고 자식 자랑하기 바쁜 부모를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도경을 향한 황 원장의 애정은 그 수치가 훨씬 높게 느껴졌다.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시죠? 이렇게 멋진 아들이 TV에 나오니까. 나 같아도 자랑하고 싶어서 못 참지.”
나왔다. 가족 얘기. 이번에야말로 기다 아니다 말할 수가 없어 시선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그새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알아차리자마자 곧장 멈추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그렇지만 특히나 도경의 엄마 앞에서는 못 배운 놈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과묵한 스타일인가 봐요. 도경이랑 같이 있으면 걔가 더 말이 많겠어.”
“아.”
못 배운 놈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만큼이나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야속하게도 입은 자꾸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다행히 황 원장은 빠릿빠릿하게 대꾸하지 않는 지한을 답답해하거나 버릇없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지한의 태도가 거슬렸다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앉아 새로운 주제로 말을 걸진 않았을 테니.
“둘이 식사는 어떻게 해결해요? 매일 사 먹나?”
“거의. 네. 사 먹어요.”
“걔가 통 먹는 거에 관심이 없어서 걱정이거든요. 좋다는 거 암만 갖다 줘도 썩혀서 버리고. 요즘도 그래요?”
“밖에서 많이 먹긴 하는데, 안 먹진 않아요. 음, 그러니까, 일 인분은 다 먹는 거 같고.”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사람다운 화법을 갖추게 되었다고 자신했는데 어째 황 원장 앞에서는 첫 드라마 촬영 때보다 더 떨고 있었다. 자신이 뭐라는 줄도 모르고 더듬더듬 말하는 지한을 빤히 본 황 원장이 픽 웃었다. 이번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한을 비웃었다.
“먹는 거 같다는 말이에요, 진짜 다 먹는다는 말이에요?”
“아. 다. 다 먹어요.”
지한의 발치를 떠나지 않던 개가 황 원장으로 표적을 바꿨다. 개 간식을 꺼내느라 황 원장의 주의가 돌아갔다. 지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식탁 위에 엎어져 있던 휴대폰을 잽싸게 무릎 위로 가져왔다. 언제 황 원장이 다시 말을 걸지 몰라 휴대폰 화면을 거의 보지도 않고 타자를 쳤다.
전송하고 나서 바로 화면을 끄려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지 싶어 대화창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형 엄마 오셯는데] 마구잡이로 친 것치곤 꽤 알아들을 만한 메시지가 완성되었다.
개가 작은 간식을 두 개 얻어먹고도 양심 없이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오며 가며 많이 듣는 기본 벨소리가 울렸다. 지한의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으므로 황 원장의 것에서 나는 소리였다.
“응, 아들. 엄마가 집에 와있는 건 어떻게 알고.”
지한은 터져 나오려는 숨을 간신히 삼켰다. 도경이 벌써 메시지를 읽은 모양이었다. 해봐야 답장이 오거나 지한에게 전화가 걸려올 줄 알았지, 바로 황 원장에게 전화를 넣으리라곤 생각 못 했다.
“내가 내 아들 집에도 편하게 못 와? 너 엄마가 지난번에 보낸 버섯 얼마나 먹었는지 확인하려고 왔어. 그러면 안 돼?”
도경이 황 원장에게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황 원장의 휴대폰 볼륨이 꽤 크게 설정되어 있었던 덕분에 짜증을 낸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왜 엄마한테 화를 내고 그래? 나 네 친구한테 이상한 말 안 했어, 정말이…….”
말하던 중 휴대폰을 귓가에서 뗀 황 원장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도경이 전화를 끊어버린 모양이었다. 지한의 시선을 눈치챈 황 원장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도경이 절로 떠올랐다. 웃을 때마다 소리를 내지 않는 것으로는 모자라 손등을 입술에 붙이고 웃던. 지금도 남들 앞에서는 그러고 웃을지도 몰랐다. 지한의 앞에서야…… 글쎄. 저와 단둘이 있을 때에 한해 편히 웃는다고 자신하려던 속마음에 급격히 의구심이 드리웠다. 도경이 가장 최근에 지한의 앞에서 활짝 웃었던 적이 언제더라.
“그새 도경이한테 나 왔다고 일렀어요? 보기보다 잽싸네.”
도경이 지한에게 언질도 없이 황 원장에게 연락할 줄 알았다면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했을 것이다. 웃지 않는 낯으로 돌아간 여자에게 어떤 표정으로 응대해야 할지 모르는 지한의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아니요, 이른 게 아니라.”
“이름이 지한이었나요?”
“네.”
“지한 씨는 음식 뭐 좋아해요?”
조금 전에도 느꼈지만 황 원장은 한 주제가 끝맺음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능숙하다고 해야 할지, 제멋대로라 해야 할지.
“저 그냥 아무거나 다.”
“하나만 골라 봐요.”
“어, 음. 고기?”
“고기.”
지한의 마지막 말을 따라 한 황 원장이 커피잔 손잡이를 감싸 안듯 부드럽게 쥐었다.
“안 바쁠 때 나랑 고기 먹으러 갈까요? 도경이도 불러서 같이.”
번번이 도경에게 무참하게 휘둘려 버리는 이유는 좋아하는 마음이 커서이기만 한 줄 알고 지내왔다. 도경보다 더 마르고 하얀 여자로 인해 지한은 새롭게 깨달았다. 그는 가늘고 위태롭게 아름다운 것 앞에서 무력해지는 천성을 타고났다. 그렇지 않고서는 황 원장에게까지 휘둘리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말해 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커피 한 잔만 마시고 퇴장한 황 원장과 한 시간 간격을 두고 도착한 도경은 보고 있던 배달 책자를 덮으며 일어서는 지한을 도로 앉히며 웬만한 랩보다 빠르게 변명했다. 미안해, 엄마가 이상한 소리 안 했어? 나 혼자 살 땐 가끔 그냥 와서 뭐 놓고 가고 그랬거든. 지금은 혼자 안 산다는 거 알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앞으론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속도가 너무 빨라 반 이상은 듣자마자 잊어버렸다.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진짜로. 이상한 소리 안 하셨고…… 아, 원래 리즈 미용시키던 분이 일 그만둬서. 이 아파트에 있는 덴 어떤지 오늘 한 번 맡겨보시겠다고.”
지한에게 사과와 변명 중간쯤 되는 항변을 늘어놓느라 여태 벗지 않고 있던 코트를 벗으려 세탁실로 향하려던 도경이 다시 발길을 틀어 돌아왔다.
“그럼 내가 데리러 가야 돼?”
“아니요. 오늘은 직접 미용하는 거 보고 나서 데리고 간다고 하셨고, 괜찮으면 다음부터는 여기다 맡긴다고 그러시던데.”
도경의 눈이 빠르게 두어 번 감겼다 열렸다. 그는 분명 짜증을 내기 직전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썹은 끝을 올리는 대신 곡선을 그리며 내려갔다. 진심으로 웃을 때의 도경은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웃는 척할 때만 눈을 반쯤 떴다. 황 원장이 앞으로 개의 미용을 아파트 단지 내 동물병원에 맡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도경이 지은 웃음은 가짜였다.
“만약 우리 아파트 병원에 맡겨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
도경이 세탁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도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향수가 구비되어 있는 그는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풍기는 향에 차이가 없었다. 작년까지 꽃 냄새를 풍기고 다니던 그는 올해부터 누구도 한 번에 맞추지 못하는 향을 뿌리고 다니게 되었다.
기발한 아이템을 생각해내지 못한 지한은 도경에게 주는 두 번째 생일 선물로 진부하기 그지없는, 하지만 정성이 들어간 향수를 택했다. 작년에 이어 똑같은 품목을 골랐으면서 웬 정성 타령이냐 묻는다면 올해엔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기성품이 아닌, 직접 제조한 향수를 선물했다.
도경이 향을 마음에 들어 해 보람은 있었으나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못 할 짓이었다. 평생 자의로 걸어 들어갈 일은 없으리라 장담해온 양초 가게의 길지 않은 계단을 오르며 지한은 거의 1초 간격으로 고민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냥 돌아나갈까.
직원들과 조향사가 다 여자라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향기로운 것들과는 연 없게 생긴 놈이 향수를 만들겠답시고 찾아와 징그러워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저 새끼는 지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고 저런 짓을 하고 앉아있냐고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라 상상하면 목이 다 화끈거렸다.
그래도 지한은 꿋꿋하게 상냥한 조향사가 시키는 대로 폼을 체크하고 향을 골랐다. 뛰쳐나가고 싶어질 때마다 귓가를 떠나지 않는 대리의 말 하나만 되새겼다. 이사님 같은 부자한테 선물은 무조건 정성과 개성이에요. 공을 들여서 만든, 세상에 몇 개 안 되는 거. 괜히 돈 쓸 생각하지 말고 그런 걸 생각해봐요. 조향사가 내온 오일을 골라 몇 방울 넣었다고 수제품 자격이 생기진 않겠지만, 어쨌든 속이 메스꺼워질 때까지 향을 맡고 신중히 고른 것은 사실이었다.
세탁실 문이 열렸다. 식탁을 지나쳐 침실로 들어가는 도경의 등을 보며 지한은 고민했다. 황 원장의 말을 전할까, 말까. 말까. 지한이 말하지 않아도 황 원장이 도경에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도경이 섭섭해할지도 모르니 어떻게 되든 일단 말은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저, 형네 엄마가 고기 먹으러 가자 그랬는데 그거는.”
“뭐?”
우뚝 멈춰선 도경의 눈빛을 받은 지한은 저절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잠들고 일어나는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구성하는 면모들을 불가피하게 자세히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도경은 지한이 알던 것보다 훨씬 더 예민했다. 최근에는 레오와 점심을 먹고 그냥 귀가하기 아쉬워 회사에 들렀다가 사무실 안에서 도경이 박 실장에게 쏘아붙이는 소리를 듣고 그대로 돌아 나왔다. 여태 도경이 지한에게 직접적으로 짜증 낸 적 없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엄마한텐 내가 됐다고 할게.”
시간을 주자 스스로 가라앉힌 도경이 다시 인위적인 웃음기를 되찾았다.
“너는 걱정하지 말고 너 할 거 해.”
걱정하지 말고, 신경 쓰지도 말고 할 걸 해라. 쓸데없는 일은 처리해줄 테니 중요한 일에만 집중하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면 누구나 듣고 싶어 할 지시였다. 좋아해도 모자랐다. 지한은 침실로 들어가는 도경을 더 붙들지 않았다.
씻고 나온 도경은 그때까지 식탁을 떠나지 않고 있는 지한을 발견하고 다시 멈춰 섰다. 황 원장이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무슨 일 있어?”
도경에게서 과일 냄새가 풍겼다. 오렌지. 처음엔 도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향은 도경처럼 틈 없고 날렵하게 생긴 어른 남성보다는 조금 더 어리고 허술하게 생긴 쪽에게 어울린다고도 생각했었다. 실은 지금도 생각이 아예 바뀌지는 않았다.
“아니요.”
지체하지 않고 부정하는 지한을 빤히 쳐다보던 도경이 재차 물었다.
“우리 엄마랑 고기 먹고 싶어?”
“내가 형 엄마랑 밥을 먹고 싶다는 게 아니고요. 거절하면 예의 없어 보일까 봐…….”
“너는 신경 쓰지 말라니까. 내가 싫다고 할게.”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를 한 번만 더 들으면 지한도 짜증이 날 것 같았다. 퇴근한 지 얼마 안 된 도경의 피로를 키우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리를 뜰 필요가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은 지한은 TV를 틀었다. 도경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알아서 리모컨을 만지는 데 익숙해진 지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다.
첫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집 안에 붙어있는 시간이 생긴 지한은 잘 보지 않던 TV를 틀어두는 습관이 생겼는데, 도경과 함께 있을 땐 왠지 선뜻 리모컨을 만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매번 물어봤다. 형, TV 켜도 돼요? 열흘 넘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동일 질문을 들은 도경은 지한의 손바닥에 리모컨을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평소보다 더 나긋하게 읊조렸다.
「이런 것까지 나한테 물어볼 필요 없어.」
그 말을 하는 도경의 얼굴은 평소와 그리 다를 것 없었지만, 지한의 눈에는 순식간에 바뀔 듯이 아슬아슬한 구석이 엿보였다. 지한이 한 번만 더 같은 질문을 하는 즉시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핏기없이 식어 내릴 것 같았다. 식어 버린 도경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다음날부터 지한은 도경에게 묻지 않고 리모컨을 눌렀다. TV를 딱히 보고 싶지 않을 때도. 매일.
아무 생각 없이 화살표 버튼을 누르다 보니 어느새 음악 프로그램 재방송을 하는 채널까지 왔다. 채널을 더 위로 돌리려 움직이던 엄지손가락을 멈추게 한 것은 ‘1위 후보’라는 문구와 함께 카메라에 잡힌 얼굴들이었다.
방송국 화장실에서 지한을 반가워하던 빨간 머리는 갈색 머리로, 자기 엄마가 팬이라며 사진을 찍어갔던 파란 머리는 흑발로 바뀌었다. 지한은 이제 그들의 머리색과 관계없이 멤버 전원의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킬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러고 보니. 지한은 부엌을 살폈다. 도경이 식탁 위에 놓인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잔업 중이거나 외국어 뉴스를 보고 있을 것이다. 방해하지 않으려 다시 TV로 고개를 반쯤 틀다 말고 멈칫했다. 노트북을 보고 있다 해서 그 너머의 지한이 도경의 시야에 아예 잡히지 않은 것은 아닐 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간 도경이 물어봐 올 확률도 높아졌다. 할 말이 있느냐고. 혹은 왜 쳐다봤느냐고.
“형.”
“응.”
역시 지한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는지 답변 속도가 로봇처럼 빨랐다. 눈은 계속해서 노트북에 가 있었다.
“까먹고 있었는데, 혹시 한이가 형한테 사진 올려도 되냐고 물어보지 않았어요?”
언제까지고 노트북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눈이 대상을 바꿨다. 스르륵. 지한은 아직도 도경의 눈동자나 몸이 움직이는 순간에 그런 환청을 들을 때가 있었다.
“한이?”
“쟤. 갈색 머리. 한이요.”
멤버들이 장난처럼 하니, 허니 하는 갈색 머리(전직 빨간 머리)의 본명은 한, 외자였다. 그룹에 속한 다섯 명 중 지한이 제일 먼저 이름을 외운 멤버였다. 비록 한 글자지만 지한의 이름과 겹치는 글자가 있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음악 프로듀서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자신이 모든 기획의 최종 결정을 내린 그룹에 속한 남자애의 이름이 세상에서 제일 낯선 단어인 마냥 눈을 깜박이던 도경은, 급기야는 노트북을 닫았다. 첫 만남에서 찍었던 사진의 행방이 뒤늦게 궁금해졌던 것뿐이지 도경이 일도 멈추고 관심 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다.
“저런 데 관심 있었어?”
“네?”
적당한 표현을 찾으려는 듯 도경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음악. 저런 음악에 관심 없는 줄 알았어.”
“관심 없어요.”
지한은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침을 삼켰다.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났다. 당황함만 증가했다.
“쟤가 나랑 사진 찍었거든요. 몇 달 전에. 대리님이 형 허락받고 올리라고 해서 쟤가 알았다 그랬는데 어떻게 된 건가 지금 갑자기 생각나서. 근데 그냥 내 앞이라 한 말이었나 봐요, 형한테 안 물어본 거 보면.”
“내가 올리지 말라고 했어.”
지한이 말한 멤버의 이름을 굳이 되물었던 것은 아무래도 못 들어서가 아니라 듣기 싫어서였던 듯하다. 이번엔 의지와 무관하게 침이 꼴딱 넘어갔다.
“왜요?”
“쟤네 사고치고 다녀서. 네 이미지 나빠질까 봐.”
“사고?”
“술 먹고 클럽에서 여자 낀 무리랑 시비 붙기. 예능에서 10년 선배한테 막말하기. 팬한테 반말하기.”
막힘없이 말한 도경이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노트북이 닫혀 있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는 행동이었다.
“진짜요?”
도경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한은 손사래를 쳤다.
“난 어차피 잘 모르기는 하는데 그래도. 그렇게 안 보였는데.”
“착하다는 말에 멍청하단 뜻이 포함되어 있으면 착할지도 모르지.”
회사에 드나들며 목격한 몇몇 장면들과,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통해 예민한 줄만 알았던 도경이 남을 공격할 줄도 안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중이기는 했다. 그래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것은 본 적 없었다. 어떤 반응을 원하고 한 말인지나 알면 맞장구라도 칠 텐데 그것도 아니라 막막했다.
지한의 무반응에 도경이 작게 말했다.
“미안.”
지한은 안쪽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가 원했던 대화의 방향은 이게 아니다. 잊고 있었던 사진의 존재가 문득 기억나 도경에게 확인 차 물어봤을 뿐인데.
“뭐가요?”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도경이 깎아내린 대상은 지한과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도경과 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지한은 사과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올리라고 할까. 너랑 찍은 사진.”
도경의 입에서 딴소리가 나왔다.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사진이 올라갔기를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기에 할 말이 더 없었다.
“……형이 이미 안 된다고 했으면. 뭐. 그냥.”
잊어버려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린 지한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무대가 이미 끝나 있었다. 1위 후보에 오른 두 그룹이 MC들의 양옆에 서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위를 결정하는 각 항목의 그래프가 좌우로 쭉쭉 뻗어 나갔다. 1위가 발표되었다. 갈색 머리가 방방 뛰었다. 그룹에서 가장 키가 작은 그를 다른 멤버들이 합심해 위로 들어 올렸다.
―먼저 권도경 이사님 감사드리고요!
하필 수상 소감도 갈색 머리가 했다. 방송으로 듣는 도경의 이름에 놀라서 그다음 이름들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끝났다. 지한은 보험 광고가 나오는 TV에서 차마 눈을 돌리지 못했다. 도경의 눈빛이 비정상적으로 잘 느껴져 뺨이 다 따끔거렸다.
***
작년에 대기실에서 찍었던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다. 최초로 업로드된 경로는 아이돌의 SNS 계정이었다. 드라마를 봐서 얼굴은 알고 있었는데 그 그룹과 같은 소속사인 줄은 몰랐다며 반가워하는 반응들이 많다고 대리가 알려주었다.
혹시라도 나쁜 반응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한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연초에 그녀가 차 안에서 지한을 언급한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읽어주다 말고 스크롤을 급히 내릴 때 알았다. 안 좋은 소리가 달렸다는 걸.
나중에 집에 가서 기사를 찾아봤다. 이 사람은 잘생겼는데 왠지 모르게 양아치 느낌이 난다는 평가에 공감하는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약간 싼 티 나게 생김.’ 그 뒤로는 아무리 궁금해도 자신의 이름이 나온 기사를 누르지 않았다. 세상엔 모르고 사는 편이 나은 진실도 있었다.
“주문하신 아이스티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음료를 받아 돌아선 지한은 막 카페 안으로 들어온 손님들과 부딪히지 않으려 살짝 옆으로 물러났다. 아리송해하던 여자들의 얼굴에 묘하게 들뜬 기색이 퍼졌다. 서둘러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등 뒤에서 작게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봤어? 눈 완전 커.”
전국으로 방송되는 시상식 무대에 올라가 상도 받아봤고, 지한보다 훨씬 더 유명한 아이돌에게서 먼저 사진 찍어달란 요청을 받는 진귀한 경험도 해봤다. 그런데도 가끔 누가 그를 알아보면 줄행랑치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아이스티를 들고 카페 밖 테라스로 나온 뒤에야 오늘은 그를 집까지 데려다줄 차가 없단 것을 상기했다. 원래 대리와 함께 회사에 들렀다 이른 퇴근을 할 계획이었으나 팀장이 다른 업무로 대리를 붙잡는 바람에 지한 혼자만 나왔다. 회사에서의 도경은 이따금 너무 차가운 사람처럼 보였다. 일할 때와 일하지 않을 때의 온도 차 자체는 이해했다. 그렇지만 지한이 꼭 다 봐야 할 필요는 없었다.
테이크아웃 잔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3월. 얼음이 들어간 음료를 맨손으로 들고 다니기 적합한 계절은 아니었다.
“어머나.”
최근에 들었던 것 같은 목소리와 최근에 들었던 것이 분명한 감탄사. 지한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코트와 가방, 구두를 검은색으로 통일한 여자가 테라스 계단에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른 손을 감싼 적갈색 장갑. 겨울에도 주머니로 숨지 않아 빨개지는 도경의 손이 떠올랐다. 이목구비부터 몸매까지 도경에게 다 물려준 여자가 왜 장갑 끼는 습관만은 물려주지 않았을까. 소소한 원망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이런 우연이.”
첫 만남에서도 그랬는데, 황 원장은 전혀 놀라지 않았으면서 놀란 척하는 취미가 있었다. 도경의 회사 건물 앞에서 황 원장과 지한이 마주친다. 누가 봐도 우연이 아니었다. 지한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테이크아웃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의문했다. 지한이 오늘 회사에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회사에 스파이를 심어뒀나.
남 뒷조사하는 짓을 도경이 어디서 배웠나 했더니 미친 친구들이 아니라 부모한테서 배웠던 모양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곧잘 하는 말도 있잖은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으면 이 모양 이 꼴이야! 아마 부모 있는 아이에게는 친구보다, 선생보다 부모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가 보다.
“지한 씨, 퇴근하는 길?”
애초에 출근한 것도 아니었지만, 지한은 그냥 끄덕였다.
“네.”
“도경이도 곧 퇴근할 텐데 왜 같이 안 나오고?”
이상한 질문이었다. 황 원장의 질문에선 도경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온 지한을 힐난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보통은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 따로 다니라고 해야 정상이었다. 대표이사와 일개 신인이 직원들 보는 데서 지나치게 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못하니.
“대리님 빼고 다른 직원들은…… 저희 그렇게 친한 거 모를걸요.”
“대리면, 유민아 대리?”
“네.”
“그 아가씨 혹시 도경이랑 만나요? 예전부터 되게 잘 지내는 것 같더니.”
솔직히 당황했다. 황 원장은 정말로 도경과 지한이 끈끈한 우정으로 맺어진 사이라 같이 살기까지 한다고 믿는 눈치였다. 둘 사이에 그 이상의 것이 오간다고는 죽어도 상상하지 못하리라. 어쩌면 그게 당연했다. 다행이기도 했다. 그런데 왠지 명치가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미친 척하고 말해버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까. 아니요, 원장님. 형은 나랑 만나요…… 뭐, 요샌 그마저도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실현될 수도 없었던 충동이 무력하게 사그라졌다.
“아니요.”
“근데 왜 다른 직원들 모르는 걸 유 대리만 알아?”
“제 매니저라서……?”
“매니저를 한다고?”
황 원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한은 입 안을 너무 세게 깨물지 않으려 의식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유 대리 얘기할 때가 아니잖아.”
“아?”
“지한 씨가 도경이한테 나랑 밥 먹기 싫다고 했어요?”
연타를 맞았다. 당황스러운 정도로 따지면 대리와 도경이 만나냐는 질문보다 두 번째 질문이 훨씬 더 심했다. 부정했다간 도경의 거짓말이 들통 날 테고, 긍정하자니 앞으로 황 원장의 눈 밖에 날 위험이 있었다. 머잖아 지한은 마음을 굳혔다. 도경의 친모에게 미움을 받느니 일시적으로 도경을 곤란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도경이 질색해서 가만히 있었을 뿐, 지한은 황 원장과 밥 먹기 싫다고 한 적도 없었다.
“안 그랬는데요.”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아들이 다른 건 다 잘해도 거짓말은 못하거든.”
거짓말을 못한다. 부모의 눈에 자식은 과연 얼마나 과하게 포장되고 부풀려져 보이는 존재인지, 지한은 죽을 때까지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나랑 고기 먹을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죠?”
망설여졌다. 도경의 거짓말을 탄로 나게 한 것은 그렇다 쳐도 그가 없는 자리에서 냉큼 같이 밥을 먹겠다고 해버려놓고 뒷감당이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다.
“그거는.”
“이상하네.”
지한의 말을 자른 황 원장이 중얼거렸다.
“우리 아들 원래 양반인데.”
“……네?”
“오늘은 아닌가 봐.”
장갑에 덮여서도 길고 가는 모양을 숨기지 못하는 손가락이 지한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도경이 카페 안을 가로질러 테라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달음에 문까지 온 그가 유리문에 달린 손잡이를 확 잡아당겼다.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만 들어도 도경의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가 짐작 가능했다.
“대체 여기서 뭐하는.”
“얘 좀 봐. 엄마 온 줄 어떻게 알았어? 일 안 하고 창밖만 보고 있었니?”
“왜 왔어.”
“추운데 그러고 나오면 어떡해? 얼른 위에 가서 코트 입고 와.”
뭘 하러 나왔든 황 원장의 지적을 듣는 순간 도경은 자동반사적으로 자신의 옷차림부터 살폈다. 드레스셔츠와 바지. 춥긴 해도 눈총을 받을 만한 차림은 전혀 아니었다. 난데없는 옷차림 지적이 주의를 흩뜨려놓으려는 시도에 불과했단 것을 깨달은 도경은 한층 더 날카롭게 말했다.
“뭘 내려와.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닌데.”
“지한 씨가 배고프대.”
저한테 왜 이러세요. 그리 따질 용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지한은 입술만 달싹였다. 도경이 놀라 지한을 쳐다보았다. 하얀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황 원장에게 밉보이느니 도경을 곤란하게 하는 편이 낫다고 결론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지한은 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도경의 얼굴을 찡그려지게 한 쪽이 무조건 잘못했다. 그런 것 같았다.
“엄마가 여기까지 왔는데 오늘은 30분 먼저 퇴근하면 안 돼?”
“안―.”
“원래 금요일엔 윗사람이 눈치껏 일찍 퇴장해줘야 하는 거야.”
“안 돼.”
“그럼 엄마랑 지한 씨가 먼저 가 있을까?”
도경의 눈길이 빠르게 지한에게로 옮겨왔다. 놓치면 안 되는 기회였다. 지한은 절대 황 원장과 단둘이 식당에 가 있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눈짓으로 전달하려 애썼다.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안 하던 짓을 하는 지한을 황 원장과 둘이 놔뒀다 골치가 아파질 것 같았는지, 도경은 말을 바꿨다.
“기다려. 차 가지고 나올게.”
도경이 카페 안으로 사라졌다. 다시 지한과 황 원장 둘만 남았다. 지한은 낮은 기온 때문에 얼음이 하나도 녹지 않은 아이스티를 꾸역꾸역 마셨다.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황 원장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어색해 죽겠을 뿐이었다.
손이 시리다 못해 아플 지경임에도 굳이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빨대를 입에서 떼지 않았던 까닭은, 그 짓이라도 하고 있어야 가까이서 닿아오는 시선을 모르는 척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처음은 지한의 상체, 그다음은 바지 어딘가, 마지막은 신발.
길고 곧은 속눈썹에 주의를 빼앗겼던 지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 원장이 주의 깊게 본 부분은 지한의 몸이 아니라 그 위에 걸쳐진 것들일지도 몰랐다. 도경이 사준 셔츠. 그가 사준 재킷. 그가 사준 바지, 그가 사준 벨트에 그가 사준 신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한은 빨대를 더욱 세게 빨았다.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까만 차가 건물 주차장을 빠져나와 카페 앞 도로에 섰다. 황 원장은 당연하게 조수석 문을 열었다. 다행이었다. 그녀가 빨리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지한이 습관적으로 조수석에 타려고 했을 것이다.
도경은 황 원장이 식당의 이름을 말하자마자 신속히 핸들을 돌렸다. 식당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간간이 대화가 이어졌다. 정말로 도경이 명절에도 출근했는지를 묻는 황 원장의 질문에는 괜히 지한의 양심이 찔렸다.
실제로 도경은 명절 연휴 기간 내내 회사에 나갔다. 가족들과 만나봤자 피곤하기만 해서 가지 않겠다는 핑계를 댔지만 덥석 믿기엔 꺼림칙했다.
혹시라도 명절에 갈 데 없는 지한을 생각해 그런 것이면 제발 가족들을 보러 가라고 하고 싶었다. 연휴에도 마냥 놀지 못하고 스케줄을 소화했던 지한이 부릴 오지랖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잊어버렸었다.
“응. 정말로 출근했어. 바빴다니까.”
신호에 걸려 브레이크를 밟은 도경이 인사이드 미러로 지한과 눈을 맞췄다. 날렵한 모양의 눈이 아주 잠시 안정적인 빛을 보내왔다. 초조해졌던 지한은 일시적으로나마 진정되었다.
황 원장이 지한과 도경을 데려간 곳은 문자 그대로의 고깃집이었다. 비록 매니저가 그들을 소음 차단이 잘 되는 룸으로 안내했다는 점에서 일반 고깃집과 다르기는 했어도.
메뉴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도경이 자주 가는 곳들의 메뉴는 아직까지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지한을 기함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었다. 황 원장이 고른 곳은 더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따 엄마 집에 데려다줘야 해?”
“올 땐 뭐 타고 왔어.”
“택시 타고 왔지. 회장님이 결국 정 기사 내보냈거든.”
끄덕이는 도경을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황 원장의 얼굴 위로 천장에 달린 조명 빛이 쏟아졌다.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환해졌음에도 아들을 향한 눈빛만큼은 잘 보였다. 대본에서 보았던 지문이 생각났다. ‘꿀 떨어지는 눈빛’.
조용하던 룸 안에 기본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 원장이 백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를 받는 사이 도경도 휴대폰을 꺼냈다. 곧 지한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미안해. 빨리 먹고 나가자]
지한은 도경을 힐끗 살폈다. 바로 옆에 앉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짓 같은 것은 생각도 해본 적 없다는 듯 고고히 앉아있었다.
[괜찮아요]
황 원장은 누가 대놓고 말해주지 않는 한 절대로 도경과 지한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어색한 몇 시간쯤 참을 수 있었다. 어려운 거지 싫은 건 아니니까.
“아들. 미안하지만 엄만 너희 아빠랑 같이 밥 먹은 지도 몇 달이 됐는지 모르겠어.”
길게 이어지는 통화 상대의 말을 들어주던 황 원장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지한은 도경의 아파트에서 짧게 마주쳤던 남자를 떠올렸다. 도경과 비슷한 점이라곤 날씬한 체형 하나뿐이었던. 그게 벌써 근 일 년 전이었다.
“서율이 공연 끝날 때까지야 당연히 있을 거야. 회장님하고 밥 먹고 싶으면 나는 포기하라는 말이야.”
서율 엄마랑 얘기해보고 알려줘, 끊는다, 사랑해. 할 말만 하고 끊으면서 사랑한다는 말은 빼먹지 않고 붙이는 태도가 재미있었다. 도경도 똑같은 수법에 당한 적 있었다.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이 창문으로 영화관 화면처럼 생생하게 잡히던 호텔. 그날 역시 얼마 안 있으면 일 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도경이 너도 올래? 일요일이 서율이 리사이틀이야.”
사진 한 장 본 적 없는 서율이 도경의 조카란 것쯤 지한도 알고 있었다. 도경의 아파트엔 이상하게 사진이 없었다. 과거가 아예 없는 사람처럼. 한때 도경의 어릴 적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워했던 적도 있었다. 이젠 아니었다. 어린 도경 옆엔 다른 얼굴들이 있겠지. 그중엔 지한이 알아보는 얼굴들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는 또 다시 상기할 것이다. 그들을.
“나는 못 가.”
“그래 그럼.”
애초에 왜 올 거냐고 물어봤는지가 의아해지는 빠른 포기였다.
“대신 다음에 서율이 따로 불러서 밥이라도 사줘. 설날에도 너만 안 와서 걔가 얼마나 권도경 씨를 찾았는데.”
“알겠어.”
황 원장은 음식보다 도경에게 말을 거는 데에 훨씬 더 많은 정성을 쏟았다. 반강제로 끌려온 도경도 별로 배가 고파 보이지 않았다. 지한이 배고프다고 했다는 거짓말까지 들어놔서 그런가, 도경은 종업원이 새로 자른 고기조각을 놔주려고 할 때마다 지한의 그릇을 가리켰다. 지한마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느라 속도가 안 났다. 스테이크처럼 두꺼운 고기 조각들이 작은 산을 이루며 쌓여갔다.
성실하게 황 원장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사이, 도경은 몇 번이나 지한을 곁눈질했다. 평소답지 않게 깨작거리는 모습이 영 보기 거슬렸을 수도 있다. 갑자기 다급해져 되는 대로 고기를 입에 넣었다. 씹다 보니 진짜로 배가 고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의무적으로 고기를 씹고 있는데 황 원장이 대뜸 지한을 가리켰다.
“보기 좋다.”
지한은 다 씹지도 않은 고기를 삼켜버렸다.
“저한테 한, 하신 말이에요?”
“맞아요. 여기서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참 좋네.”
말하는 도중에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입을 벌리고 있으면 구축해놓은 이미지에 해가 가니 의식하란 주의를 대리한테서 그렇게 들었는데도 소용없었다. 지한은 양옆과 등 뒤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왼쪽엔 도경이 있었고 오른쪽과 뒤는 벽이었다.
“뭐가 보기 좋아요?”
“혹시 한국어를 잘 못해요?”
회사 건물 앞에서 황 원장과 지한을 발견한 이래 쭉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도경이 처음으로 표정을 풀었다. 웃음소리는 나지 않았어도 지한은 분명 보았다. 망설임 없이 접히는 눈 끝.
“한국말 잘, 하는데.”
“지한 씨가 보기 좋다는 말이잖아요. 어쩌면 그렇게 생겼어요? 보고만 있어도 안 지루하네요.”
첫 드라마 출연 후 지한은 외모에 관련해 마냥 고마워하기만은 힘든, 때로는 놀리려고 저러나 싶을 정도로 과한 찬사를 숱하게 들어왔다. ‘여심을 관통하는’ ‘길들지 않은 한 마리 늑대 같은’ ‘웃는 순간만큼은 덜 자란 소년의 얼굴로 돌아가는’ ‘한 번 눈이 마주치면 다른 곳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그 외에도 대리가 읽어주다 말고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게 만드는 수식어들은 많았다.
그럼에도, 도경이 있는 자리에서 그의 모친에게 듣는 칭찬이 가장 견디기 괴로웠다. 얼굴과 귀, 목이 사이좋게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만해. 얘 체해.”
끝없이 지한을 괴롭힐 기세이던 황 원장은 도경이 제지하자마자 즉각 조용해졌다.
더는 이상한 주제로 말을 걸지 못하게 하려고, 지한은 입 안에 끊임없이 음식을 집어넣었다. 줄어들 것 같지 않던 고기 산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사실 마지막 몇 점은 도저히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먹었다. 비싼 돈 주고 사준 음식을 보기 싫게 남기는 놈으로 평가받기 싫었다.
도경이 업무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비운 직후였다. 고기를 거의 먹지 않은 황 원장은 디저트로 나온 과일 차도 맛만 보고 내려두었다. 그녀는 등부터 목까지 어디 한 부분 구부정하지 않은 자세로 지한을 바라보았다.
“지한 씨 같이 생긴 사람 눈에도 우리 아들이 잘생겨 보여요?”
오늘 황 원장이 도경의 회사 앞으로 찾아온 목적은 지한을 곤경에 빠트리는 데 있다고 해도 믿기 쉬울 것 같았다. 하는 말마다 지한을 당황시켰다. 그는 그냥 그렇다고 대답해 버리고 싶은 욕구를 삼켰다. 솔직해야 할 때와 연기해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은 어른의 기본 조건이었다.
“갑자기 그런 거는 왜…….”
“도경이 얼굴에서 눈을 못 떼길래.”
지한은 급히 식은 불판으로 눈을 내렸다. 도경의 얼굴에서 눈을 못 뗐다고? 아무리 되짚어 봐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틈날 때마다 표정을 한 번씩 살피기는 했어도.
“아닌, 아니, 그러려고 한 게.”
차라리 그냥 꺼지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내 귀한 아들 옆에서 너 같은 게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했으면, 스물일곱이나 처먹은 게 눈치 없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냐고 신랄하게 비난했으면. 그랬으면 지금보다는 덜 난감했을 것이다.
“왜 얼굴이 빨개져요?”
황 원장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지한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이.
룸으로 돌아온 도경이 계산서를 들고 일어나려는 황 원장에게 말했다. 계산 내가 했어. 계산서를 내려놓은 황 원장은 과장된 어조로 감탄했다.
“오늘따라 엄청 멋있다, 아들. 키도 더 커 보여.”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리고 사실은 조금 웃긴 듯 도경이 피식거렸다. 황 원장이 제일 먼저 룸을 나서고, 그 뒤로 도경이 나섰다. 정확히는 한 걸음 나갔다 돌아서서 지한을 기다렸다. 황 원장이 도경까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겁이 난 지한은 얼른 머리통을 가로저으며 앞쪽에 대고 손짓했다. 황 원장과 지한을 번갈아 본 도경은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뗐다.
식당이 있는 건물의 복도는 까맣고 반짝였다. 흠집을 낼까 무서워져 조심스레 걷게 됐다. 황 원장과 도경의 뒤에서, 지한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걸음걸이로 엉성하게 걸었다. 도경이 뒤를 돌아보기에 고개를 내저었다. 두 번째에도 똑같이 반응했더니 그다음부턴 도경도 지한을 쳐다보지 않았다.
모자의 말소리는 높낮이가 적고 볼륨 자체도 작아 소음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주로 황 원장이 말하는 쪽이었고 도경은 듣는 쪽이었다. 둘 중 어느 쪽도 과하게 들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루해 보이지도 않았다.
한 단어로 어떻다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그 공기는 아마 피를 나눈 사람들 사이에서만 자연스레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지한은 추측했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일정하고 편안한, 그러나 너무 사랑해서 언제라도 최고조로 끓어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기운.
정신없이 사느라 한동안 잠잠했던 증상이 지한을 미약하게 두드렸다.
가슴 안쪽이 답답했다.
***
지한은 도경의 차 뒷좌석에 타지 않았다. 가 볼 데가 생겼으니 알아서 귀가하겠다고 둘러댔다. 황 원장이 있어서인지 도경은 별말 없이 지한을 보내주었다.
기껏 거짓말을 해놓고 아파트로 먼저 돌아온 지한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오토바이에 먼지가 쌓여있었다. 도경에게 받은 SUV 트렁크에서 헬멧과 장갑을 꺼냈다. 오토바이가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던 시절엔 차가 생기면 오토바이는 덜 타고 다니게 될 줄 알았다. 남이 모는 차만 타고 다니다 보니 정작 선택이 가능한 상황에선 거꾸로 오토바이를 택하게 됐다.
몇 개월 만에 지하를 벗어난 오토바이는 거침없이 익숙한 경로로 주인을 이끌었다. 익숙한 호텔 앞을 지날 때도 지한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보호막이라곤 헬멧 하나뿐인 이륜차에 목숨을 걸고 내달리는 것은 남이 모는 차의 조수석보다 훨씬 더 높은 집중력을 요구했다. 기억 속에 묻혀 있다 갑작스레 소환되는 얼굴이 있어도 길게 매달려 있을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수없이 지나친 건물들과 주유소를 지나온 오토바이가 드디어 멈추었다. 낙후된 경비실 안에 있어야 할 경비원은 어딜 갔는지 없었고, 놀이터엔 어린아이들 대신 개를 데리고 나온 노부부 한 쌍만 있었다.
헬멧과 장갑을 벗은 지한은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폰을 꺼냈다. 몇 분 전에 도착한 메시지가 있었다. 미리 보기와 함께 상단에 뜬 이름은 도경도, 대리도 아니었다.
[비행기 타느라 사진 올린다고 말하는 거 깜박했어]
‘한이’. 지한과 찍은 사진을 계정에 올린 장본인의 프로필 사진이 텅 비어있었다. 메시지는 더 오지 않았다. 지한이 답장할 차례였다.
[대리님이 말해줬어]
[형 실검 오른 거 봤어?]
메시지 옆의 숫자가 바로 사라지더니 곧바로 답변이 왔다. 지한은 고민했다. 그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몇 위를 차지했는지는 못 봤지만, 봤다고 해야 대화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와 함께 일한 몇 개월은 이십몇 년간 지한이 터득하지 못했던 많은 수단들을 한꺼번에 가르쳐 주었다. 무조건 솔직하게 말하려 들지 말고 적당히, 대충 넘어가는 법도 그중 하나였다.
[어]
[팬들이 나랑 형 잘 어울린다고 함]
배를 잡고 웃는 이모티콘이 딸려왔다. 가족 다음으로 가깝다는 멤버들끼리 팬들의 반응을 보며 놀리느라 시끄러웠을 대기실 풍경이 영상으로 다 보이는 것 같았다.
[이사님한테 형이 말했지 사진 올리게 해달라고]
할 말이 없어서 대화창만 보고 있으려니 또 메시지가 왔다. 이번에도, 사진을 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한 적은 없고 그냥 언급만 했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한 글자만 완성해 보냈다.
[어]
[형이 이사님보다 서열 높은 거 진짜인 듯]
자꾸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들었다. 지한이 답하지 않자 저쪽에서도 메시지가 더 오지는 않았다. 어차피 얼마 안 가 끊겼을 대화다.
지한은 오토바이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18층짜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도경의 아파트와 비슷한 층수였음에도 훨씬 낮아 보였다.
정신없이 내달리느라 모르고 있었던 추위가 휑하게 드러난 목을 습격했다. 대리가 집까지 데려다줄 줄 알고 가볍게 입고 나온 여파가 뒤늦게 몰아쳤다. 목을 내놓고 다니기엔 겨울의 기세가 굳셌다.
반년 넘게 들어가지 않는 아파트 안에서 지한을 기다리고 있을 한 목도리가 눈앞을 스쳤다. 그런 게 있었지. 지한은 기억했다. 무영이 그 목도리를 버렸다고 하던 도경의 목소리와 표정을. 다시 일 년쯤 지나고 나면 물어볼 수 있을까. 형, 그때 왜 그랬어요?
없을 것이다. 일 년 뒤의 지한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단을 아는 사람일 테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서론은 실컷 건드리도록 놔두면서 요점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숨기는 수단. 돌리고 뭉뚱그려 회피하는 수단. 현상을 유지하는 수단.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는 시도는 하지 않아도 됐다. 소리를 낸 주인공이 알아서 나타났다. 하얀 털에 까만 무늬를 가진 고양이가 지한을 보고 멈칫거리는 듯하더니 쏜살같이 차도를 지나 쓰레기통 뒤로 사라졌다. 뒤이어 고양이 한 마리가 더 나타났다. 앞의 고양이와 똑같은 무늬를 가졌지만 몸집만 더 작은 두 번째 고양이는 멈칫거리지 않고 곧바로 쓰레기통을 향해 움직였다.
지한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18층 건물 위로 펼쳐진 하늘이 시커멨다. 돌아가야 했다. 밤마저 잠들어 버리기 전에.
과속해 평소보다 10분 이상 빠르게 도착한 주차장엔 아까보다 많은 차들로 빈자리가 없었다. 도경의 차도 지한의 차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한은 헬멧과 장갑을 SUV 트렁크에 되돌려 놓았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니 그때까지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 심정이 들었다.
“어디 갔다 와?”
불이 켜진 복도를 지나 나타난 지한에게, 도경이 물었다. 식탁 의자에 앉은 그에게서 매일 맡는 향기가 풍겼다. 머리카락은 물기 없이 말라있었다.
“전에 살던 데.”
지한은 도경의 맞은편에 앉아 대답했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정한 적은 없으나 사실상 둘의 자리는 고정되어 있었다. 도경은 거실이 보이는 자리. 지한은 거실을 등진, 싱크대가 보이는 자리.
“거기 가서 뭐 했어?”
도경이 식탁에 펼쳐져 있던 책을 덮었다. 표지를 꽉꽉 채우는 영어 제목이 아주 잠시 지한의 눈길을 끌었다. 어떻게 읽는지 아는 단어가 한 세 개 됐다. 나머진 뜻도, 발음도 잘 모르겠다.
“동네까지만 가고 집엔 안 들어갔어요. 번호가 뭔지도 모르고.”
“번호 안 바꿨어.”
동요하길 바란 것은 아니지만, 도경의 말투는 예상보다 더 담담했다. 그 동네에 갔다 왔다는 것을 사실대로 말해도 될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엘리베이터 버튼을 늦게 눌렀던 지한 자신이 우스워질 정도로.
“그럼 예전 번호 그대로예요?”
“그렇겠지. 네가 안 바꿨으면.”
“……그 집, 청소해야 될 텐데.”
오랜만이었다. 닥쳐야 할 때를 놓치고도 계속 떠드는 주둥이를 때리고 싶다고 느낀 것은. 회피하는 수단을 잘 알게 됐다고 생각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해놓으라고 할게.”
이번에도 도경의 대응은 담담하다 못해 평온했다. 지한은 떨리려는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어쩌면 몇 개월째 잘 단련시켜 왔다고 여겼던 입이 불쑥 반항한 까닭은 도경이었다. 조금은 동요해도 좋을 순간에까지 멀쩡한 모습은 오기를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아하게 된 것이었다. 언제나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조용하게 말하는 그 태도가 뭘 하든 귀해 보여서. 지한과는 태생부터가 다른 몸짓과 표정과 말투와 눈빛이, 발단이었다.
본인이 읽다 말고 덮어둔 책 표지에 눈길을 주고 있는 도경의 얼굴을, 지한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남자는 내가 보는 걸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진짜 다른 데 집중해서 모르는 걸까.
“언제 잘 거예요?”
한없이 책 표지에만 붙어있을 것 같던 시선이 지한에게로 옮겨왔다. 남에게 잘 치대지 않는 도경은, 남이 치댔을 때 딱히 성가셔하지도 않았다.
“아직 모르겠는데. 졸려?”
“조금.”
결코 타인을 귀찮게 않는 도경이지만 딱 한 경우에 한해서만큼은 늘 지한보다 먼저였다. 서로의 몸에 욕정을 풀었던 순간들을 곱씹을수록 분명해졌다. 먼저 키스한 쪽도, 옷을 벗기고 눕힌 쪽도 다 도경이었다.
그랬던 도경이 갑자기 모든 것을 중단했다. 둘 사이에 어떤 접촉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지한은 처음부터 도경이 하는 대로만 끌려갔으니까.
“아까 진짜로 네가 엄마한테 배고프다고 한 거야?”
다른 종류의 오기를 솟아오르게 하는 질문이었다. 황 원장이 연락도 없이 아파트에 와 지한과 마주쳤던 날 도경이 보였던 반응의 연장선이었다. 정말이지 혼자서도 품고 싶지 않았던 의문이 지한의 속에 새겨졌다. 황 원장과 지한이 한자리에 있길 원치 않는가?
유치하기도 하거니와, 앞뒤가 안 맞는 감정이었다. 지난번에 도경에게 황 원장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알렸던 사람은 지한이다. 오늘 식당에서도 어색해서 억지로 고기를 다 처먹어놓고, 그래놓고 이제 와서 도경은 마냥 그 상황이 편했길 바라는 것은 논리가 없는 소망이었다.
“네.”
그러니 이번 거짓말은 절대 오기의 부작용이 아니었다. 도경이 황 원장한테 가서 또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느냐고 따지면 안 되니까. 모자를 싸우게 만드는 원인이 지한이어서는 더더욱 안 되니까.
황 원장에게 배가 고프다는 말을 했다고 인정하는 지한에게, 도경은 더 질문하지 않았다. 턱을 살짝 끄덕인 그는 덮었던 책을 다시 펴며 말했다.
“내 방에 먼저 가서 자.”
두 가지 기분이 동시에 지한을 감쌌다. 하나. 도경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침대를 내줘서 기쁘다.
“형은?”
둘. 하루쯤은 같이 들어와서 눕는 날이 있어도 좋을 텐데.
“난 안 졸려.”
지한은 일어나 의자를 집어넣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에도 도경의 눈썹은 꿈틀거리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후, 지한은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귀가 멍멍해질 때까지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남이 해주는 것을 받고 앉아있을 때도 힘든 과정을 직접 하려니 그 짧은 몇 분간 드라이어를 내동댕이치고 싶단 충동이 열 번은 넘게 들었다. 그래도 잘 참았다. 결과물은 훌륭했다. 두피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바싹 말랐다. 머리 모양은 형편없었지만.
옷을 세탁기에 넣은 지한은 세탁실 문 앞에서 주춤했다. 도경의 침대에 누워야 잠드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건 도경이 없을 때나 편히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었다.
오늘은 멀쩡히 깨어있는 도경을 두고 혼자 그의 침대에 눕게 생겼다. 도경이 먼저 제 방에 가서 자라고 했음에도 엎드려 절을 받은 것처럼 찝찝했다. 혼자 쓰는 방으로 가버리자니 도경의 호의를 거절하는 짓으로 오해받기 딱 좋았다. 그들에게 오해는 사치였다.
지한은 세탁실 문을 열고 나갔다. 책에 집중한 도경의 뒤통수가 오늘따라 동글동글해 보였다. 순전한 착각이었다. 도경만큼 둥그런 부분이 없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었다.
“나 잘게요.”
식탁 옆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지한의 목소리에 도경이 얼굴을 들었다. 지한은 저도 모르는 사이 도경의 얼굴 근처까지 뻗어져 있던 손을 잽싸게 식탁으로 내렸다. 하마터면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도경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조차 안 됐다.
식탁 위에서 목적 없이 머무르다 거둬지려는 지한의 손등 위로, 도경의 손이 올라왔다. 부들부들한 손바닥이 오늘따라 차갑지 않았다. 따듯했다. 어쩌면 약간은 뜨거웠다. 몸이 찬 도경에게는 흔치 않은 현상이었다.
“잘 자.”
부드러운 손끝이 손등과 손가락을 잇는 뼈를, 손마디를 그리고 손톱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의도가 없다고 믿기엔 너무 대담하고 진득한 손길로 지한을 만지는 도경은, 믿을 수 없게도 책을 보고 있었다.
“네.”
지한은 손을 빼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로 도망치듯 피신했다. 아랫배가 무거워지려는 낌새를 보였다.
지한이 요청해 꽉 닫아두지 않게 된 방문을, 오늘은 지한의 의지로 닫았다. 캄캄해진 방 안을 아예 암전시키지 않는 것은 문틈으로 기어들어 오는 빛이었다.
그는 넓은 침대 끝에 누워 문틈의 빛을 주시했다.
내가 좋다고 했지. 좋아서, 원해서 나랑 잤다고 했었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밖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도경이 의자에서 일어난 듯했다. 지한은 이불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
생애 첫 포스터 촬영을 했다. 그래봤자 가운데 자리는 아니었지만, 홍보물에 얼굴이 실린다는 것만으로 첫 작품과는 다른 차원의 긴장감이 들었다. 지난밤엔 잠까지 설쳤다.
“주말에 잠 많이 자둬요.”
다른 배우들은 당장 다음 주부터 촬영 시작이었다. 4화부터 등장하는 지한에게만 다소 여유가 있었다. 마음 놓고 있다 보면 코앞으로 다가와 있으리란 것을 알았기에, 지한은 대리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머리 깜박했다.”
엘리베이터 입구 근처까지 와 급정거한 대리가 자신의 이마를 딱 소리 나게 때렸다.
“머리요?”
“지한 씨 머리! 다음 주 화보 촬영 전에 이사님이 다시 자르라고 하셨는데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네. 아아.”
도경이 지한의 스타일에 훈수를 두는 것에는 이미 적응했다. 첫 드라마의 촬영이 후반부에 들어섰을 즈음 메이크업 담당자가 갑자기 바뀐 적 있었다. 대리에게 이유를 물으니 도경이 바꾸라고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떤 장면에 나온 지한의 얼굴이 도경의 눈에 거슬렸는지는 몰랐다. 화장에 대해 아는 게 쥐뿔도 없는 지한은 그냥 입 다물고 새 사람을 받아들였다.
그 후에도 하루아침에 환경이 변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도경은 결코 지한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다. 대리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면 그들이 알아서 머리를, 옷을, 대사를 그리고 사람을 바꿔주었다.
“지한 씨 오늘 다른 일정 있어요?”
“없긴 한데. 형이, 이사님이 집에 있어서.”
“이따 이사님이랑 어디 가기로 했어요?”
“그런 것도 아니기는 한데.”
“그럼 좀 늦게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봐요. 괜찮다고 하시면 바로 숍에 전화하게.”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느니 할복할 성격의 대리가 지한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지라, 지한은 휴대폰을 꺼내 도경의 이름을 눌렀다.
1분이 경과했다. 지한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도경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집에 있다고 얘기까지 해놨건만. 미용실에 가기 싫어 거짓말했다는 오해를 살까 봐 조바심이 났다.
“안 받으세요?”
“다시 한번만 해보고, 안 되면 올라가서 물어볼게요.”
“어디 잠깐 나가신 거 아니에요?”
연결되지 않은 통화를 종료한 지한은 재차 수화기 아이콘을 눌렀다. 첫 번째 시도와 똑같았다. 신호만 가고 받는 사람은 없었다.
신호음이 빨리 끊기길 바라던 지한의 시야에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대상 하나가 포착되었다. 그는 휴대폰을 다른 쪽 귀로 옮기며 엘리베이터 입구 바로 옆에 주차된 차의 무엇이 부자연스러운지를 뜯어보았다. 보닛이 유난히 길었다. 가늘고 촘촘한 앞면의 그릴은 빗을 연상시키기도 했고, 고래의 이빨도 닮아있었다.
지한은 자신이 왜 그 차를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지 알아차렸다. 일단 그 차는 도경의 아파트 주차장에서도 보기 드문 차종이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외제차보다 가격이 네다섯 배는 높았다. 지한이 평생 살 일 없을 차의 가격을 기억하는 이유는 작년에 출연했던 드라마에서 그 차가 나오는 장면이 있었던 덕분이다. 극 중 제일 사회적 위치가 높은 회장님의 차로.
“대리님. 저 잠깐 올라갔다 올게요.”
“이사님 전화 안 받으시잖아요?”
“그러니까요.”
지한은 벨트를 풀며 대리에게 당부했다.
“10분 지나도 저 안 내려오면 전화 한 번만 해주세요.”
“그게 뭔.”
“올라오지는 말고요.”
지한을 황당하게 쳐다보긴 했어도, 대리는 곧 알겠으니 빨리 올라가 보라고 해주었다.
아마 틀린 예감일 것이다. 그 차를 꼭 회장들만 타란 법도 없고, 주차장에서 처음 본 차의 주인이 회장님이라 불리는 사람이라 한들 꼭 도경과 연관된 인물이란 법도 없었다. 지한의 감은 평생 숱하게 틀려왔다. 이번에도 그렇길 바랐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남자는 지한이 보기에도 멀끔했다. 화장을 안 지우고 온 것이 신경 쓰였다. 눈 화장을 한 것도 아니니까 크게 걱정할 거리는 못 되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비비자 옅은 분홍색이 묻어났다.
영 좋지 못한 그의 감이 어쩌다 맞아드는 날이 오늘이어야 한다면. 도경의 집에 권 씨 성을 가진 회장님이 와 있는 것이라면, 조용히 나오면 그만이었다. 실수로 들어간 척하고. 그런데 실수로 남의 집 도어록을 해제하고 들어가는 것도 과연 실수인가. 친한 사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 그쯤은 친구 사이에도 충분히 교환 가능한 정보였다.
엘리베이터 화면에 뜬 숫자가 휙휙 바뀌었다. 잠깐. 첫 만남에서 황 원장은 이미 도경과 지한이 함께 산다는 정보를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남편도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하나. 설마 그녀가 집에 가서 걱정했을까, 아무래도 둘이 수상하다고?
지한은 입술을 한 번 더 세게 문질렀다. 드라마 대본만 들여다보느라 뇌가 망상에 절여졌다. 아무래도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한은 현관 앞에서 서성거리는 정장 차림의 남성을 발견하고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어떤 드라마가 와도 현실을 앞서진 못했다.
중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젊었다. 도경보단 위로 보였다. 실제로 몇 살이나 먹었든, 중요한 것은 도경이 사는 공간의 문 앞에서 지한을 보고 놀란 남성이 너무나도 ‘비서’에 어울리는 행색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물어봤다.
“누구세요?”
남자는 별로 지한을 상대하고 싶은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할 필요도 없었다. 꽉 닫힌 현관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등신 같은 자식!
비서로 추정되는 남성이 지한의 시선을 피해 눈을 굴렸다. 그러니까. 지한은 남들보다 느리게 타고난 머리를 최대한 빨리 굴리려 애썼다. 그러니까, 진짜란 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녹아들기 위해 대본을 닳도록 들여다본 지한의 뇌가 오작동을 한 것이 아니라.
―누굴 닮아서 이렇게 나약해 빠졌어!
주차장에서 본 차는 회장님의 것이었고, 그 회장님은 도경의 아버지이며, 비서를 밖에 세워두고 들어간 그 아버지는 도경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이 상황이 다 진짜라고.
30년이 채 안 되는 세월을 살아오며 가지게 된 확신이 있다면, 지한의 판단력은 그의 감만큼이나 신뢰할 수 없단 점이었다. 일방적인 고성이 터져 나오고 있는 문 너머의 상황에 지한이 개입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알면서 손을 뻗었다. 형편없는 판단력이 지한을 부추겼다. 빨리 들어가서 뭐라도 하라고, 하다못해 도경이 멀쩡한지만이라도 보고 나오라고.
“어어,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누구냐고 물어도 뻣뻣하게 서있기나 하던 남자가 지한의 손목을 잡아챘다. 지한을 유령 취급한 것보다, 안에서 나는 험한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데도 태평하게 기다리고나 있던 모습이 훨씬 더 주먹을 불렀다. 지한은 남자의 팔을 잡아 꺾었다. 공부는 잘했을지 몰라도 운동은 안 하고 살아온 것이 확실한 남자의 입에서 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몸에 또 손대면 계단으로 던져버린다.”
지한에게 밀려난 남자가 벽에 딱 붙어 섰다. 고작 팔 좀 꺾인 것 가지고 귀신을 본 사람처럼 안면이 질려 있었다. 같잖은 놈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지한은 신속하게 여섯 자리 번호를 누르고 현관을 열었다.
“누가 죽인대? 네가 앞으로 그 새끼를 데리고 뭘 할 건지 지금 여기서 내가 알아듣게 설명하라고.”
도경의 아파트는 평수가 워낙 넓어 거실에서 TV 볼륨을 높게 해놓으면 문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오늘은 TV 소리 대신 사람의 말소리가 도어록의 전자음을 묻었다.
“몇 년을 키워서 뭐에다 쓸 건지 말해보라니까? 어디 사모한테 갖다 바칠 거야? 아니면 누구야, 지 새끼도 안 챙기고 서방질하러 다니는 D엔터 회장 년한테 갖다 바치려고? 내가 언제 너더러 그 구멍가게 상장시키래?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다녀!”
“아버지는 누구 키워서 그런 데 써먹으실지 몰라도 전 아니에요.”
“뭐야?”
대화 내용은 정상적이지 못할지언정 방금 들은 도경의 목소리는 비교적 일상적이었다. 지한은 문을 닫았다. 안심하긴 일렀다. 도경은 목소리를 높여야 할 상황에서도 조용히 말하는 남자였다.
“제가 왜 열심히 키운 애를 남한테 갖다 바쳐요? 저희 회사 애예요. 커도 저희 회사랑 같이 클 거라고요.”
“네가 왜 그놈을 키우냐고, 걔가 네 여자랑 놀아나던 놈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걔네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
지한은 숨을 죽였다. 도경이 소리를 질렀다. 지한이 사무실 의자를 던져 부쉈을 때도 큰소리를 내지 않았던 그 도경이.
“누가 그렇대. 그 새끼가 그러든? 너는 그 새끼 입에서 나온 말을 믿어?”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걔를 본 적도…….”
“시끄러워! 입 안 다물어?”
전에도 딱 한 번 있긴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회사 건물 앞에서, 지한이 당장 내일 죽는다 한들 누가 신경 쓰겠냐는 무영의 뺨을 날리며 도경은 큰소리를 냈었다. 너희 집에 너 죽으면 기뻐할 사람들 많잖아. 그러면서 네가 누구를 걱정해? 도경도 그런 소리를 할 줄 알았단 것이 놀라우면서 고마웠었다. 물론 가장 큰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지한 때문에 도경이 어울리지 않는 짓을 저지르게 된 것 같아서.
“이래서 내가 너한테 뭘 마음 놓고 못 맡겨. 이렇게 정신머리가 약해빠져서 무슨 큰일을 하겠어.”
어차피 형편없는 판단력, 이제 와서 발전시켜보려고 발버둥 치느니 그냥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는 편이 나았다. 지한은 어른스럽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어른이 못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도경에게 온갖 못된 말만 골라 하는 인간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1초도 더 편히 숨 쉴 수 없으리란 예감이 지한을 밀고 또 밀쳤다.
덜 닫혀 있던 신발장 문을 옆으로 힘껏 열어젖혔다. 쾅! 문이 반동으로 찔끔 되돌아왔다. 침실 문 앞에 서 있던 도경이 복도로 들어서는 지한을 발견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한은 그리 큰소리를 내가며 숨을 들이마시는 도경도 여태 본 기억이 없었다.
“뭐야, 저건.”
전혀 닮지 않았다. 도경과 대치하다 복도를 돌아본 남자는 창백하지도, 갸름하지도 않았다. 눈썹은 진했고 턱은 단단했다. 회장이라고 불리기엔 너무 젊게 느껴지는 길쭉한 몸 하나만이, 그를 도경에게 연결시키는 약한 증거였다.
“잠깐. 저거…… 맞지?”
말끔한 차림새를 한 권 회장의 입에서 교양 없는 말씨가 생성되었다. 저거, 라고 한 것으로 모자라 검지로 지한을 가리키기까지 한 회장이 도경에게 화살을 돌렸다.
“저걸 네 집에까지 마음대로 드나들게 해?”
도경의 눈이 커졌다. 지한은, 그렇게까지 눈이 커진 도경 또한 처음 보았다. 도경이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해온 순간들을 한꺼번에 목격하는 기분은 결코 깨끗하지 못했다.
“권도경, 왜 대답이 없어? 저 새끼가 여기도 마음대로 왔다 갔다거리냐고!”
“말씀드렸잖아요. 친구라고.”
도경의 목소리에서 약한 떨림이 감지되는 것 같다고 느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부엌 쪽으로 팔을 뻗는가 싶더니, 권 회장이 컵을 들고 와 도경에게 던졌다. 흰 머그잔이 도경의 가슴 정중앙을 맞췄다. 퍽. 사람의 주먹으로 때리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고 떨어진 잔이 바닥에 부딪힐 때는 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깨진 손잡이가 부엌으로 날아갔다.
“다시 말해봐, 저 새끼가 네 뭐라고?”
정말 모르겠다. 도경에게 커피가 담긴 잔을 집어던지고도 미안해하지 않는 남자와, 맞고도 아픈 시늉조차 하지 않는 도경. 둘 중 누구에게 더 충격을 받아야 할지.
도경을 닥치게 함으로써 일차 목적을 달성한 권 회장이 지한 쪽으로 아예 몸을 돌렸다.
“넌 뭐 잘났다고 거기 그러고 서 있어?”
“아버지.”
“저 새끼 눈 똑바로 뜨고 있는 거 봐라. 어디서 꼬여도 저런 게 꼬여서…… 야! 너 이리 와.”
지금까지 도경은 지한에게 권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 일말의 힌트도 준 적이 없었다. 입에 올리는 일 자체가 전무했다. 그렇지만 지한은 알아보았다. 다가올수록 길게 뻗은 몸 이외에도 날카로운 인상이 어느 정도 아들과 닮은 것 같은 회장이 바로 도경을 아프게 만든 범인이었다. 도경의 주변에 정신을 챙기고 사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뼈저린 경험을 통해 익힌 바였음에도 장담할 수 있었다. 바닥에서 태어난 지한에게도 버거울 정도의 악의를 흩뿌리는 회장이 도경에게 가장 큰 악영향을 끼쳤다.
지한은 뒷걸음질 쳤다. 가만히 서있다간 곧 권 회장과 부딪히기라도 할 것 같았다. 등에 벽이 닿았다. 더 물러설 데가 없었다. 그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경의 아빠를 때려버리는 사고만은 일으키지 않으려고.
“너 뭐야? 오라면 와야지, 네가 뭔데 내 아들 집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눈을 부라리고 있어?”
자신이 복도를 중간이나 지나왔는데도 눈을 내리깔지 않는 지한의 존재가 당장 눈앞에서 치워버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권 회장의 발이 움직이는 속도를 높였다. 한 2초 후면 정말로 주먹이 날아올 수도 있겠다고, 피하는 것보단 그냥 맞아주는 게 일을 크게 만들지 않겠다는 계산까지 마쳤을 때.
“건들지 마.”
지한에게 가까워지는 제 아버지를 보고만 있던 도경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한의 귀에 들렸으니 권 회장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뭐?”
“건들지 말라고.”
권 회장은 순간적으로 기가 막힌 나머지 윽박질러야겠다는 생각도 안 드는 듯했다. 단번에 권 회장의 앞까지 걸어온 도경이 멈칫했다. 복도 끝까지 뒷걸음질 쳐 간 지한을 눈에 담은 도경은 다시 두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는 자신의 몸으로 지한과 권 회장 사이를 막고 있었다.
“권도경, 너 지금 나한테, 네 아빠한테 뭐라고 한 거야?”
“받아달라고 안 할게요. 다 형 주세요. 전 아버지가 구멍가게라고 부르시는 회사 하나 가지고 살게요. 나중에 저한테도 나눠달라고 안 해요. 절대로 아버지 귀찮게 안 할 테니까.”
도경이 주먹을 쥐었다.
“얘는 그냥 모르는 척하세요.”
도경의 마지막 말에서, 지한은 묘한 뉘앙스를 감지했다. 해주세요, 가 아닌 하세요. 부탁하는 어조가 아니었다. 도경은 권 회장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지한을 모르는 척하라고.
지한이 감지한 바를 권 회장이라고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이마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는 이를 악문 발음으로 말했다.
“네가 나 없었으면 뭐라도 됐을 거 같아?”
“저는.”
“넌 나 없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물려준 것들 아니면 네가 지금 이렇게 큰소리치면서 살아있었을 줄 알아? 빌빌대다 어디서 밥도 못 얻어먹었을 놈이.”
지한의 시야에 잡히는 것은 권 회장과 마주 보고 있는 도경의 등뿐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도경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빠에게 저렇게 잔인한 소릴 듣고도 괜찮은 아들이 있을까? 건방진 우려였다. 부모에게서 가치 없는 존재로 판정받은 자식을 걱정할 자격이 지한에겐 없었다. 부모도 없으면서 뭘 알고 걱정한다는 건지.
“귀찮게 안 한다고? 바라던 바야. 넌 이제부터 너 알아서 살아. 네가 키우는 연놈들이 뭔 사고를 치든, 뒤통수를 맞든 나한테 도와달라고 할 생각하지 마.”
말을 끝내자마자 돌아섰던 권 회장은, 아무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다시 돌아와 도경의 어깨를 잡아 밀쳤다.
“그렇게 잘났으면 다 너 혼자 책임지면서 살아 봐, 어디.”
신발장으로 나가 욕설을 내뱉은 권 회장은 그대로 현관을 열고 나갔다. 밖에서 회장님,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서의 말은 닥치라는 일갈에 곧바로 사그라졌다.
밖이 잠잠해졌다. 괜찮으냐고 물어보려 도경을 쳐다본 지한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권 회장이 언제 다시 올지 몰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도경의 손등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하도 하얘 핏줄 색이 도드라지는 손등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기억력이 주인을 돕겠답시고 엉성히 가동했다. 도경은 작년에도 손등만 빨개져 귀가한 적이 있었다. 조금만 더 찬찬히 생각해보면, 장례식장에서도.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있던 손가락.
“형.”
복도 벽에 몸을 기댄 도경이 허리를 숙였다. 지한처럼 숨이 차서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도경이 먹는 약의 가지 수를 아는 지한은, 그 약들이 다 무엇인진 여전히 몰랐다. 그가 파악한 약 종류라고 해봐야 진통제와 수면제 정도에 그쳤다.
“머리 아파요?”
지한의 입에서 아프냐는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도경이 상체를 일으켰다. 볼에 붉은 기가 올라와 있었다.
“약, 약 갖다 줄게요. 뭐 갖다 줘야 돼요?”
“내가 알아서 할게. 방에 들어가 있어.”
방에 들어가라고 말하는 투가 워낙 강경해 물러설 뻔했다. 그러나 고분고분히 물러서기엔 도경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형 손 떨리잖아요. 움직이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요. 내가 물이랑 약 가지고 올 테니까 무슨 약을 가지고 와야 되는지만.”
“넌 몰라도 돼.”
속에서 욱하고 올라오려는 것을 겨우 다잡았다. 아픈 사람과 말싸움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성과, 여기서도 참았다간 지한까지 아파질 것 같단 이기심이 한데 엉켜 다퉜다. 이기심이 이성을 쓰러트렸다. 넌 몰라도 된다고? 지한은 찡해지는 코끝을 무시하려 숨을 몰아쉬었다.
“몰라도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지금 형이 상태 안 좋으니까 내가 도와주겠다는 건데.”
“하지 마.”
뭘 하지 말라는지 알아들을 수나 있었으면 지금보다는 덜 성질이 났을 것이다. 거칠어지려는 숨소리를 가다듬으며 지한은 생각했다. 뭘 하지 말라는 건데. 애비란 작자한테 어떤 취급당하는지 다 봤으면 지금이라도 고분고분하게 좀 있으라는 건가? 하지만 지한은 도경에게 늘 고분고분했다.
믿기지가 않았다. 도경이 지한을 보호하려다 친부와 척지는 상황을 목격한 직후였다. 죄스러움과 고마움에 헤어 나오지 못해도 모자랄 판에, 지한은 도경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물론 어찌 보면 시작은 도경이 했다. 똑바로 서있지도 못하면서, 손이 덜덜 떨리는 주제에 약을 가져다주겠다는 지한에게 한다는 말이 뭐, 몰라도 된다고?
그래도.
지한은 도경이 원하는 대로 했다. 언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도경을 두고, 방으로 들어왔다. 화야 나지만 그래도, 도경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권 회장이 지한에게 준 모욕은 여태 살아오며 들은 말들에 갖다 대면 별것도 아니었다. 내상이 아예 없진 않아도 고작 그 수준으론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그런데 도경은 아닐 테니까. 미친 친구들한테서야 뭔 소릴 들으며 살아왔든 적어도 자기 친아빠한테는, 매일 저런 취급을 받은 건 아닐 테니까. 오늘 일로 치명상을 입고도 남았다.
가슴 안쪽이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단순히 숨이 차는 평소의 증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팠다. 지한은 가슴을 눌렀다. 치명상을 입은 도경이 들어가란다고 진짜로 방 안에 틀어박혀 가슴이나 치고 있을 순 없었다.
방문을 연 지한은 그때까지 벽에 몸을 지탱하고 있는 도경의 앞으로 돌아갔다. 울긋불긋하던 얼굴이 어느새 하얗게 식어있었다.
“형은…… 나를 왜 데리고 살아요?”
조금 더 뒤로 미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루다 보면 끝이 없었다. 도경이 피곤해서, 지한이 졸려서, 도경이 아파서, 지한이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해서는 언제가 되어도 말할 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얌전히 있으면 돼요?”
도경이 눈을 깜박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점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나 여기서 같이 사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도 알아야 되는 거 아니야? 형은 병원까지 나 데리고 갔으면서, 의사한테 진단명이랑 약까지 받아오게 했으면서. 나는 형이 먹는 약 하나도 가져오면 안 돼요?”
“넌 나랑 달라.”
“뭐가 다른데요? 나 봐준 의사가 형 의사잖아요.”
“넌,” 도경이 짧게 숨을 뱉었다. “아파도 보기 싫지 않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도경이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지한은 아파도 보기 싫지 않다고? 그러면 도경 본인은 아플 때 보기가 싫다는 이야긴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뭔 소릴 해요? 아픈데 보기 좋고 싫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싫어.”
“그니까 뭐가 싫다고? 알아듣게 좀 말해봐요.”
“싫어. 싫다고. 싫으니까 그만 물어봐.”
복도가 정적에 휩싸였다. 지한은 눈을 마주치려 들지 않는 도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요, 그럼.”
나를 지키기 위해서 뭐든 내려놓을 것처럼 굴었다가 금세 또 이렇게 짐짝 취급하면, 나는 알 길이 없잖아.
“나는 꺼질 테니까 엄마를 부르든지, 형을 부르든지. 아니면 친구들을 부르든지 마음대로 해요.”
대체 당신한테 내가 뭔지.
“어디 가.”
도경을 두고 나가려던 지한은 딱 한 발짝 만에 멈춰 섰다. 무시하고 나가면 그만인데 그건 또 안 됐다. 마음먹고도 냉정하게 굴지 못하는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었다.
“나도 말하기 싫으니까 물어보지 마.”
“어디 가냐고.”
도경은 지한의 말이 아예 안 들리는 사람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다고 지한에게 매달리는 투도 아니었다. 어디 가냐고 반복해 묻는 도경의 말투는 잘못을 추궁하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들렸다.
“왜? 어차피 나한텐 형이 먹는 약 하나도 안 알려주잖아. 나랑 하는 것도 없잖아. 난 형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예뻐해주면 고마워하는 개가 아니야. 물건도 아니고요, 나도 궁금한 게 있고 화나는 게 있는 사람이라고. 진짜 궁금하긴 해? 내가 어딜 가는지?”
말하는 도중에도 실시간으로 변하는 도경의 얼굴색이 신경 쓰였다. 다른 부위보다 유달리 진하게 붉어지는 눈가가 지한의 입을 다물렸다. 도경이 우는 얼굴은 본 적 있던가. 없었다. 지한 앞에서 무릎 꿇고 빌던 당시, 빨개진 눈가를 하고서도 도경은 끝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다.
“내가…… 어디 가냐고 물어봤잖아.”
지금도 도경은, 울고 있지는 않았다. 달아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도, 귀도, 목도. 부끄러워서가 아닌, 흥분해서도 아닌, 아마도 매우 분노해서.
“말하기 싫다고. 형이 싫은 것처럼 나도―.”
지한은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도경이 갑자기 멱살도 아닌 지한의 목을 잡은 탓이었다.
“왜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해?”
욕실 문에 지한을 밀친 도경이 눈을 쉴 새 없이 감았다 떴다. 뒤통수를 문에 박은 채 목이 눌린 지한은 대답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말 못 들었어? 어디 가냐고. 무슨 뜻인지 몰라? 어디 가서, 누구랑, 뭘 하다, 언제 올 거냐고. 내가 어려운 말을 했어? 아니잖아. 내 말이 너는 이해하기 어려워?”
코끝이 더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찡해졌다. 눈으로 열이 몰렸다. 목울대가 눌리며 마땅히 일어나야 할 증상인지, 도경의 말에 서러워 울컥하는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지한에게도 잘못이 없진 않았다. 몇 시간이라도 도경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에 차분하게 할 말을 했어야 하는데 감정적으로 대처했다.
억울한 면도 물론 있었다. 먼저 못되게 말한 쪽은 도경이었다. 지한의 죄라면 똑같이 받아친 것뿐이었다. 받은 만큼 갚아준 것이 목까지 눌릴 일이었는지 모르겠다가도, 일단은 가만히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도경을 때릴 자신이 없었기에. 지한의 목울대를 누르고 있는 도경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갈 시 어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놓지도 않았다. 도경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도경이 지한의 목을 놔주었다. 눌려있던 식도가 트이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이 멎자마자 지한은 도경의 질문에 대한 답부터 했다.
“대리님, 대리님이 밑에서 기다려요. 주차장에 가려고 한 거예요. 나 머리 다시 해야 된다고 해서…….”
목이 자유로워졌음에도 지한은 하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도경이 이상했다. 지한에게서 물러나 다시 벽에 기댄 그는 주먹이 하얘지도록 손가락을 안으로 말았다가 펴는 동작을 반복했다.
“형 지금 뭐 하는.”
순식간이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던 손이 위치를 바꾸었다. 도경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지한이 눈앞의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도경이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그의 뒤통수가 벽에 부딪히며 엄청난 소음을 냈다. 그것은 어쩌다 부딪친 사고가 아니었다. 일부러 갖다 박은 자해였다.
“형!”
상상으로도 본 적 없는 광경이 경악스러웠지만, 그보다는 도경을 다치게 놔두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이 더 강했다. 도경의 팔을 잡았던 지한은 너무 세게 잡은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곧바로 손을 풀었다. 그러자마자 도경이 또 주먹을 쥐었다 폈다. 가만히 두면 이번엔 어디다 뭘 갖다 박을지 몰랐다.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했다.
지한은 도경이 움직이지 못하게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도경이 몸을 뒤틀었다. 허리에 감긴 팔이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은 그는 목표물을 바꿨다.
도경의 팔꿈치에 명치를 찍힌 지한이 헉, 하고 비틀거렸다. 도경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멱살이 잡혔다고 인지했을 땐 이미 둘이 함께 바닥으로 자빠지는 중이었다. 바닥과 부딪힌 등뼈가 고통을 호소했다. 목에 힘을 줘 가까스로 뇌진탕은 모면했다.
허, 허억, 헉…… 고요한 복도를 작게 울리는 숨소리는 지한의 것이었다. 지한을 깔고 앉은 도경은 가슴팍도 들썩이지 않고 있었다.
“도경이 형.”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도경부터 불렀다. 덜컥 겁이 났다. 머리를 쥐어뜯고 아무 데나 몸을 들이박는 이상행동의 끝이 혀를 깨물거나, 뛰어내리는 무서운 것이면 어떡하지. 도경의 병명도 모르는 지한으로선 생각해낼 수 있는 비책이 없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지한의 숨소리가 사라진 복도에 새로운 소리가 등장했다. 젓가락으로 급식판을 긁으면 나는 것과 비슷한 꺼림칙한 소리였다. 지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경의 손톱이 바닥을 긁고 있었다. 다 뒤집힐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로.
지한은 용기를 내 도경의 손을 잡았다.
“형, 내가, 잘은 모르지만…….”
소름끼치는 소리가 멎었다.
“그래도, 그러지 마.”
다행히 도경은 지한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지한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지한은 도경의 손을 가져와 자신의 목을 덮게 했다.
“그렇게 힘들면. 그럼 그냥, 나한테 해.”
그 해야 되는 것이 뭔지는 몰랐다. 도경은 피를 보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고, 통증을 느끼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으며 그냥 보이는 족족 찢고 부숴버리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다. 무엇이 도경의 궁극적 목표이든 지한은 역시 도경이 자해하는 꼴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왜일까. 도경은 지한과 키도, 체격도 엇비슷한 성인 남자인데. 그보다 작고 연약한 생명체들은 온 세상에 널려 있는데.
“너한테?”
온몸에 성한 부분이 남지 않게 두들겨 패 주고 싶었어도, 확 죽여버리고 싶었어도 결국은 손 한 번 대지 못했다.
“난 몸에 상처 좀 나도, 형처럼 티도 안 나고. 맞아도 별로 안 아파. 형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때릴 수 없다면 맞기라도 해야 속이 좀 시원해질 것 같았다. 숨겨놨던 원망을 끄집어내 사방에 뿌리는 꼴이 날까 봐 미루기만 하는 이야기를 끝끝내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치고받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힘들면 차라리 나한테.”
나한테 다 풀어. 지한은 뒷말을 혼자 삼켰다. 아프게 해도 좋아. 난 뭐든 참을 수 있으니까.
혼자라는 기분에 빠져서 허우적대지만 않을 수 있게 해줬으면.
이성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마저 도경은 지한보다 침착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손톱으로 바닥을 긁는 과정에서 한 번도 격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의심이 들었다. 즐거울 때 내 마땅한 소리. 슬플 때 나올 법한 소리. 행복하거나 괴로울 때 절로 나오는 소리를 도경은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도경이 지한의 얼굴에 손을 댔다. 광대를 누를 때는 뼈를 박살 낼 것처럼 힘이 들어갔던 손이 뺨을 쓰다듬으며 내려올 때는 난생 처음 남을 만지는 사람처럼 부드러웠다. 왔다 갔다 하는 손길에서 자기 자신을 제어하려는 도경의 시도가 느껴졌다. 지한은 숨소리를 죽였다. 그렇게 통제한 순간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것들은 정말 그대로 증발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못 배우고 아는 것 없는 지한도 알았다.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대리였다. 안 받으면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올라올 것이다. 받아야 했다. 지한은 도경을 자극하지 않으려 느리게 손을 움직였다. 휴대폰을 귓가에 대기까지, 도경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한참 지났는데도 안 내려와서 전화했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근데 오늘은 그냥 가셔야 할 것,”
지한의 턱 부근을 감싸고 있던 도경의 손이 휴대폰을 뺏어 화면을 한 번 눌렀다. 그러고는 뒤로 내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한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적어도 대리가 올라오진 않을 것이다.
도경이 지한에게 키스했다.
갑작스레 부딪혀오는 입술이 지한은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했다. 도경은 혀가 닿는 곳이라면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지한의 입 안을 구석구석까지 빼놓지 않고 훑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연약한 혀가 마치 발기한 신체 부위처럼 단단하고 뜨겁다 느껴졌다.
그것이 얼마나 우스운 착각이었는지는 도경이 앞섶을 비벼오자마자 알게 되었다.
바지 안에서 크기를 키운 성기의 단단한 정도와 열기는 그 어떤 부위와의 비교도 불가했다. 앞섶끼리 맞닿은 상태에서 도경이 허리를 빠르게 위쪽으로 움직였다. 이미 삽입한 성기를 더 밀어 넣는 듯한 동작에 지한의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하아, 하.”
도경의 혀가 지한의 입 안에서 빠져나갔다. 헐떡이는 지한에게 쉴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한의 양어깨를 바닥에 눌러 고정시킨 도경이 목을 씹었다. 빨거나 잘근거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물어뜯는 행위에 근접했다.
“아, 으…….”
그렇게 힘들면 차라리 나한테 풀라고 해놓고서 이제 막 시작한 도경을 멈출 마음은 없었다. 비록 자해가 성행위로 변형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전자보다야 후자가 당연히 나았다.
지한의 귀 뒤에서부터 어깨까지를 다 씹어놓는 사이사이 도경은 한 번씩 앞섶을 강하게 부딪혀 왔는데, 그럴 때마다 잔뜩 팽창한 부위가 아팠다. 마지막으로 부딪혔을 땐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거부 의사는 결코 아니었고 본능적인 반응이었을 뿐이다.
일순간 도경이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타액으로 색이 진해진 입술과 달리, 도경의 눈은 건조했다.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서도 아니고 멈추란 뜻도 아니었으니 오해하지 말아달란 청이었다. 알아들어 주길 바랐으나,
“악,”
전달되지 못했다.
도경이 지한의 턱을 잡아 밀었다. 힘에 밀린 턱이 치켜 올라가자 고개를 젓느라 살짝 떠있던 머리통은 자연히 바닥에 처박혔다. 도경과 엉켜 넘어질 때 겨우 보호했던 뒤통수에 충격이 가해졌다. 거꾸로 뒤집힌 시야에 침실 문과 부서진 머그잔이 들어왔다.
턱을 밀던 손이 위로 올라와 입술을 짓눌렀다. 잇새를 뚫고 들어온 손가락은 혀보다 더 격하게 지한의 입 안을 벌리고 헤집었다. 도경의 손가락을 더럽히고 있다는 생각에 혀가 자꾸 안으로 말려 들어가려 했다. 도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 속을 휘저었다.
다물라치면 더 벌리게 하는 도경 때문에 줄곧 팽팽해져 있던 입가가 따끔거리기 시작할 무렵,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지한의 침으로 젖은 손이 재킷도, 셔츠도 벗지 않은 상체를 지나 바지 안으로 쑥 들어갔다. 버클이 풀리고 지퍼가 내려갔다. 부풀어 오르다 한풀 꺾인 앞이 도경의 손에 속옷째로 잡혔다.
“아―.”
허리가 들썩이며 엉덩이도 함께 들렸다. 도경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지한의 속옷을 내렸다. 무거운 겨울 바지와 속옷은 무릎보다 조금 더 아래에 걸쳐졌다. 혼자만 아래가 벗겨져 누워있는 꼴이 불현듯 창피하다 못해 수치스러웠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는 지한의 어깨를 도경이 잡아 밀쳤다. 턱을 밀 때보다 훨씬 더 세게. 몸이 돌아갔다. 한쪽 팔이 바닥에 닿은 채 옆으로 눕게 된 지한은 다시 일어나려 다른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헉.”
젖은 손가락이 엉덩이에 닿았다고 느끼는 순간 살과 살 사이의 골을 파고들었다. 바닥을 짚은 지한의 손이 금세 힘을 잃고 미끄러졌다. 지한은 마지막으로 몸을 섞었을 당시 도경이 어땠는지 기억해내려 사력을 다했다. 처음보다는 부드러웠던가? 처음처럼 정신이 없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사실 지한은 도경이 만진다는 것만으로도 번번이 죽고 싶을 만큼 좋았으므로.
싫은 것은 없다고 믿었으므로.
손가락이 뒤로 들어온 이상 자세를 바꿔보려는 노력은 부질없었다. 일단 도경이 손가락을 뺄 때까진 가만히 있는 편이 서로에게 좋았다. 지한은 손가락이 뒤를 벌릴 때마다 들어오는 찬 기운을 불쾌해하지 않으려 입 안을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위기감을 느꼈다. 눈치 빠른 대리는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 해도, 권 회장은? 아무래도 지한을 족쳐야겠다며 중간에 되돌아오지 말란 보장이 없었다. 복도에서 이러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소리가 나면 그땐 이미 늦는다.
“형, 잠깐만, 우리 방에.”
지한이 입을 열자마자 도경의 손목도 더 빨라졌다. 의도적일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손가락이 어찌나 깊숙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나가는지, 그때마다 엉덩이에 닿았다 떨어지는 손바닥이 꼭 지한을 때리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도경을 저지하려 손을 뒤로 뻗었던 지한은, 나갔다 다시 들어온 손끝이 누른 한 지점에 몸을 떨었다.
“아……!”
더 들어오나 싶던 손가락이 다시 똑같은 곳을 눌렀다. 지한은 목을 젖혔다. 어쩌다 건드리고 지나간 적은 있어도, 의도적으로 한 곳만 건드린 적은 없었다. 도경의 손가락은 더 이상 좁은 통로를 최대한 많이 파고드는 데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 방향을 바꿔 건드리기만 해도 지한이 요동치는 부분을 마구잡이로 눌렀다.
“그만, 안, 아, 어, 으.”
해봐야 사람의 손가락에 불과한데도, 여린 살을 끝이 뾰족한 무기로 찔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건드려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감당하기 힘든 압박감이 앞쪽에까지 퍼졌다.
지한은 몸부림치며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몸이 완전히 돌아가며 도경의 손가락도 절로 지한의 뒤에서 빠졌다. 자신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일시적으로 점멸되었다. 이윽고 정신이 돌아왔다. 지한은 옷을 반만 벗은 상태로 복도에 엎드려 있었고, 뒤엔 도경이 있었다. 정신이 맑아진 후에도 하체가 움찔거리는 현상은 멎지 않았다.
도경이 뒤에서 지한의 재킷 깃을 잡아당겼다. 후들거리던 팔이 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바지도 제대로 다 벗기지 않았듯, 도경은 재킷도 한쪽 팔만 벗기고 내버려 두었다.
어깨를 붙잡아오는 손이 뜨거웠다. 등 아래쪽부터 엉덩이까지 문질러지는 살은 더 뜨거웠다. 지한은 손과 무릎에 힘을 실었다.
“아!”
잡힌 어깨는 뒤로 당겨지는데 채 절반이 삽입되지 않은 성기는 더 전진할 일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밀리려는 하체와 당겨지는 상체가 상충해 호흡을 앗아갔다.
어깨를 당기고 있던 손이 앞으로 와 목을 감쌌다. 뒤이어 다른 쪽 손도 앞으로 왔다. 양손으로 지한의 목을 쥐어 얼굴을 내릴 수 없게 한 도경이 단숨에 밀고 들어왔다.
한쪽 팔에만 걸쳐져 있던 재킷이 스스로 벗겨졌다. 끝을 찍고 살짝 빠지는 듯했던 도경이 더 세게 집어넣었다. 식도에서 헛구역질이 일었다. 도경에게 잡힌 목 때문에 그마저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의도치 않아도 헉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게 하는 반동과 함께 들어왔던 기둥이 나갈 때면 쓸렸던 안쪽 벽도 함께 딸려 나갔다. 입구에 끝만 간신히 걸쳐져 있던 성기가 그새 들러붙은 속살을 파헤쳤다. 함께 딸려 나갔던 안쪽 벽이 도로 속절없이 쓸려 들어왔다. 여린 살이 바깥으로, 안쪽으로, 바깥으로. 그랬다 다시 안쪽으로 끌려나가고 들어왔다.
최대치로 부피를 키운 부위와 무른 살이 점차 낮은 빈도로 마찰했다. 속도를 줄인 도경이 한쪽 손을 뒤로 가져갔다. 옆구리를 쓰다듬고 지나간 손이 아랫배를 올려쳤다. 동시에 지한의 뒤에 들어와있는 성기가 느리지만 약하지 않은 힘으로 움직였다.
지한은 처음으로 도경과 하는 행위가 두려워졌다. 도경 자체에게 가지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여기서 도경이 마음만 먹으면 지한은 꼼짝없이 혀를 늘어뜨리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상황을 향한 공포였다.
“으, 흐아…….”
나머지 한쪽 손도 지한의 목을 떠났다. 고개가 앞으로 떨어지며 억지로 펴고 있던 팔도 무너졌다.
“아, 아― 악!”
끝이었다. 더 들어오면 그땐 내장이든 뱃가죽이든 어디 하나가 찢어질 것이란 말 같지 않은 두려움이 지한을 사로잡았다. 신음보단 비명을 닮은 소리는 도경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라지게 했다.
도경의 신체 부위가 지한의, 잘 벌어지지 않는, 좁고 건조한 곳을 드나드는 소리가 점차 진득해졌다. 몸이 앞으로 밀릴 때마다 지한의 입가로 침이 새어나갔다. 바닥을 더럽히지 않으려 입술을 꼭꼭 깨물었다. 암만 꽉 깨물어도 한 번 몸이 흔들리면 무용지물이 되곤 했지만.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은 무릎으로 겨우 지탱 중인 지한의 등에 도경의 몸이 겹쳐졌다. 약한 숨결이 목덜미를 데웠다.
“지한아…….”
도경의 몸 일부가 지한의 몸 안에 들어와 있어서가 아니었다. 뒤를 꽉 메운 성기가 벅차서도 아니었다. 지한을 부르는 도경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의 조용한 목소리가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칠 정도로 좋아서, 지한은 몸을 떨었다. 뒤가 멋대로 수축했다. 발끝이 오그라들고 손끝이 저렸다.
“나를 죽이려고 그러지.”
“아니, 아, 아니.”
“맞잖아.”
너, 나를 죽이려고…… 속삭인 도경이 지한의 귀를 깨물었다. 지한은 더 버티지 못하고 엎어졌다. 도경이 지한의 뒷덜미를 눌렀다. 바닥에 밀린 뺨이 화끈거렸다.
아랫배와 엉덩이를 잇는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퍼졌다. 도경의 것에 딸려나갈 때 이미 미지근해져 있던 액체는 허벅지로 흘러내리며 차갑게 식어버려 지한을 움츠러들게 했다.
***
지한은 허리에 둘러진 도경의 팔을 낯설게 내려다보았다. 지한이 도경을 끌어안고 잤던 적은 있어도, 도경이 지한에게 팔을 두르긴 처음이었다.
“나도 알아. 내가 이상한 거.”
처음인 것은 더 있었다. 도경이 지한의 안에 토해놓은 정액은 허벅지로만 흘러내린 것이 아니라 바닥에도 흔적을 남겼다. 사정하고 난 지 얼마 안 되어 오한이 들었던 지한은 도경이 덜 벗긴 옷을 도로 입었다. 그나마도 바지는 버클도 못 잠갔다. 도경이 뒤에서 지한을 끌어안아 눕히는 바람에.
섹스한 뒤 정액이 묻은 바닥 위에서 도경에게 안겨 누워있는 것. 말할 필요도 없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널 안 만지려고 했어.”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등 뒤에서 안은 자세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한은 굳이 도경을 마주 보려 하지 않았다. 도경이 일부러 그 자세를 택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평범하게 널 만지고 싶어. 기분 좋게…… 아프지 않게.”
도경이 셔츠 위로 지한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근데 그게 안 돼.”
지한은 눈을 감았다. 도경은 과연 알까. 바로 이 순간 본인이 지한을 기분 좋게 하고 있음을.
“내가 무슨 약을 왜 먹는지, 넌 몰랐으면 좋겠어.”
더 위쪽으로 올라온 도경의 손이 끝을 세워 지한의 쇄골을 쓰다듬었다. 지한은 도경에게 묻고 싶었다. 날 아프지 않게 만지는 방법, 이미 당신은 알고 있지 않느냐고.
“너한테 보여주기 싫은 것들이 있어.”
묻고 싶은 열망이 강해질수록, 지한은 턱에 힘을 주었다.
“내가 몰라도 된다고 하는 건 그냥…… 쭉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어.”
말이 상대에게 모든 것을 전달해 주지는 않았다. 바람처럼 가벼워 진심을 태우고 날아가 버리기 쉬웠다.
“안 돼?”
어떨 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상대에게 더 많은 것을 정확하게 전달했다.
“내가 모르면.”
지금 도경이 지한에게 오차 없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내보이는 데 성공했듯이.
“내가 몰라야 형이 덜 아파요?”
지한은 바닥에 깔린 도경의 팔을 누르며 돌아누웠다. 왼팔을 잠시 들었던 도경이 다시 지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더 아프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까맣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입 맞춰주고 싶은 속눈썹.
지한은 약속했다.
“알았어요.”
도경이 지한의 뒤통수를 감싸 당겼다. 지한은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도경의 쇄골이 닿았다. 뼈가 딱딱했으나, 지한은 도경의 품 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
도경의 침대에선 곧잘 잠들고 또 푹 자는 편이었는데 오늘따라 바깥 소리가 잘 들렸다. 지한을 깨운 소리의 주인공은 커피머신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서둘러 욕실로 간 지한은 얼굴에 물을 끼얹고 입을 헹궜다. 머리도 대충 가라앉혔다. 보나 마나 먼지 하나 허락하지 않을 모습일 도경의 앞에 나서서 인사하려면 최소한 갖춰야 할 예의가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물을 맞고서도 잘 안 떠지는 눈에 힘을 준 지한의 등장에 도경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오늘도 도경은 흠잡을 데 없이 말끔했다. 남색 정장과 하얀 셔츠.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딱 그런 색의 옷을 입고서, 지금 같은 자세로 앉아 지한을 쳐다보던 그 언젠가의 도경.
“형한테 인사, 배웅하려고요.”
도경이 환하게 웃었다. 꾸며낸 미소가 아니었다. 진짜로 즐거워서 웃는 얼굴이었다.
깨진 머그잔보다 약간 더 작은 잔에 담긴 커피가 줄어드는 동안 지한은 딱딱한 의자에 앉아 졸았다. 앞머리를 넘겨주는 손길이 아니었더라면 지한은 도경이 나가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졸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더 자.”
출근하는 도경에게 인사한 뒤 복도를 되돌아온 지한은 부엌과 침실 사이에서 멈춰 섰다. 하얀색과 회색,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부엌. 그중에서도 제일 하얀색으로 칠해진 찬장들.
몇 번째 찬장에 약이 보관되어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평소 지한이 보는 데서는 찬장을 잘 열지 않는 도경이 간혹 다급하게 열어젖히는 세 번째 문. 도경은 출근했고 가사도우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약통에 붙은 영어 단어들을 찍어둘 최적의 기회였다.
시간이 흘렀다.
지한은 침실로 돌아갔다. 도경이 원하는 대로, 더 자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