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Walk Out (36/38)

  36. Walk Out

#90

이안은 한때 하루걸러 드나들던 사무실을 처음 와보는 곳처럼 낯설게 두리번거렸다. 안 온 지가 한참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몇 달 만에 연락해 불러놓고 입을 다문 채 앉아만 있는 도경을 더 기다려주지 못하고 이안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어, 형, 잘 지냈어? 살 빠진 것 같네…….”

“그럭저럭.”

두 번도 주고받지 못하고 대화가 끊겼다. 이안은 도경의 눈치를 보며 재차 시도했다.

“걔, 우지한은 잘 지내? 인기 많은 것 같더라.”

지한의 안부를 묻는 말에는 아무래도 조금 더 고민하게 됐다. 지한은 과연 잘 지내고 있는가. 그동안 지한은 무사히 데뷔해 주연보다 더 임팩트 있는 조연이란 칭찬을 받았다. 드라마 방영 중 첫 광고 제의가 들어왔고, 인터뷰는 말할 것도 없이 밀려 있었다.

“걔도 그럭저럭.”

도경의 두루뭉술한 답변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이안이 눈치를 보다 말했다.

“그럭저럭? 왜? 둘이 뭐…….”

엄청 잘 지낸다고 대답하지 않은 것을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소리로 받아들인 듯했다. 도경은 헛웃음 쳤다.

“너 같으면 가족이 죽었는데 금방 잊어버리고 잘 지내겠어?”

“아. 맞아. 그. 이시우. 걔. 응.”

이안이 고개를 움츠렸다. 너무 부정적으로 말한 것 같았다. 도경은 자신의 말을 정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한이 마냥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니까.

“그래도 괜찮아. 나랑 매일 보니까.”

“매일? 걔 촬영하느라 바쁘지 않아?”

“촬영해도 잠은 집에서 자잖아.”

턱을 끄덕이려던 이안이 의아하게 물었다.

“그럼 형이 걔 집에 매일……?”

“아니. 걔가 매일 우리 집으로 퇴근해.”

아. 턱을 제대로 끄덕인 이안이 그럼 둘이…… 하고 말끝을 흐렸다.

“말을 끝까지 해.”

“아. 어. 아니, 그게 그럼. 둘이, 사귀는 거야?”

도경도, 지한도 서로에게 관계의 정의를 확인받은 적은 없었다. 그저 떨어져있을 땐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매일 밤이면 한 집에서 재회했다. 한 침대에서 잠드는 밤들도 있었다. 둘은 남들이 연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행위들을 했다.

“응.”

“잘, 잘됐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안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같은 표정으로.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너랑 제대로 얘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이제라도 하려고.”

“무슨 얘기?”

도경은 맞은편에 앉아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이안을 쳐다보았다. 첫 만남을 기억하기도 힘들 만큼 오래전부터 봐온 얼굴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동그란 눈. 높은 코. 뚜렷한 선을 가진 턱. 벌어진 어깨. 언제나 덜떨어진 어린애로만 생각해온 이안은 누가 봐도 성인 남자로 보이는 생김새를 갖추고 있었다.

“아직도 나 좋아해?”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잘났단 평가를 받곤 하는 낯이 물감을 뒤집어쓴 것처럼 붉어졌다. 어깨를 들썩이고, 엉덩이를 들썩이고 그래도 안 되겠는지 입술을 여러 번 깨문 이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아니, 형. 내가 말했잖아. 무영이 형이 뭔가 말을 이상하게 한 것 같은데 내가 형을 좋아하는 건, 그렇게…….”

“그렇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큰 소리를 내던 입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삽시간에 다물렸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이안은 그래봤자 해결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하나 마나 한 거짓말을 포기했다.

“귀찮게 안 할게. 형이 걔랑 잘 만나고 있는 거 알았으니까, 방해 안 해. 걔한테 뭐라고도 안 해. 절대. 나는 그냥.”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아.”

이안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도경이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듣겠다는 듯 넋을 놓고 있던 이안의 얼굴이 서서히 충격으로 물들었다.

“나를, 내가, 싫다고?”

“우린.”

친구잖아. 그러니까 너를 인간적으로 미워한다는 말은 아니야.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한 말을 겨우 삼켰다. 희망을 주기 싫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결정이기도 했지만, 이안과 도경은 서로에게 썩 좋은 친구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동족이었다. 부모들이, 혹은 조부모들이 구축해놓은 세계에서 어쩌다 이웃으로 태어나 서로의 주변을 맴돌며 살 수밖에 없었던 동족. 애초에 선택권이 없이 맺어진 관계에서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내 감정이 어떻든 그건 내가 하려는 얘기랑 상관없어. 너는 지한이를 싫어하잖아.”

진실만을 택해 말했다. 도경에겐 더 이상의 새로운 거짓말이나 계획을 꾸며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안 돼.”

“나…… 아니야. 내가 걔한테 그때 그랬던 거는, 맞아. 그땐 싫었어. 근데 형이 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거 알았으니까 이젠.”

“내가 걔랑 헤어져도 넌 안 돼.”

울다 지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은 도경에게 무영이 도와주겠다고 말했을 때, 도경은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네가 바라는 건 뭔데? 뭘 바라고 날 도와주겠다는 거야?

“혼자 늙어 죽는 한이 있어도 너랑은 안 해. 아무것도.”

무영은 그때까지 들어본 적 없이 작은, 속삭임보단 숨결에 가까운 소리로 말했다. 이안을 버려. 무영이 왜 답지 않게 비밀스러운 소리를 내는지 도경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이안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나한테…… 왜 이런 얘길 하는 거야?”

“네가 나를 좋아하니까.”

혼란스러웠다. 이안이 지한에게 맞았던 다음 날 헬멧으로 도경의 차 보닛을 찌그러트린 무영은 그랬었다. 이안의 앞에서는 서는 척이라도 하라고. 그날의 무영은 분명 이안에게 무심한 도경의 태도에 분노했다. 그래놓고 이안을 버리라니. 그건 상실이 뭔지 모르는 이안에게 일생일대의 고통을 안겨주란 지시였다.

“나도 알아. 네 마음, 너도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겠지.”

시우가 하필 운전에 미숙한 스무 살짜리가 모는 차가 달려오는 도로에 서있었던 바람에 결과적으로 무영이 도경을 도울 기회는 날아갔다. 그럼에도 도경은 무영과의 약속을 이행했다. 무영이 한 일이라곤 휴대폰 몇 대를 훔친 게 다지만, 블랙박스에 찍힌 시우는 주머니를 뒤지느라 차가 오는 것을 한발 늦게 알았다.

누군가에겐 재수 없는 우연의 연속일 뿐일 그 장면이 누군가에겐 악한 필연이었다. 도경은 알았다. 지한이 그 휴대폰의 행방을 안다면 무영이, 더 나아가서는 무영에게 도움을 바란 도경이 시우를 죽게 만든 원인 제공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보자.”

마지막 계획, 아니 그건 계획도 아니었다. 맹세에 가까웠다. 죽어도, 말 그대로 도경이 차도에 뛰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지한의 귀에 무영과의 약속이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했다. 무영이 그토록 갈망하는 바를 들어준 대가로 도경은 약점을 잃었다. 도경이 이안을 버림으로써 무영에게도 절대 이안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되는 비밀이 생긴 것이었으므로.

이안은 화를 냈다. 도경에게 욕은커녕 따지지도 못했지만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변하며 얼굴로 피가 몰렸다. 끓어오르는 화를 맘껏 방출하지 못하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슬퍼하기 시작했다. 지한이 곧잘 그러는 것처럼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이안의 눈에서 샘솟는 눈물을 보았다.

타인의 눈물을 버거워했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지한이 흘려대는 눈물을 매일 옆에서 보고, 듣고 끌어안은 날들이 도경을 단련시켰다. 그는 이제 웬만한 슬픔 앞에서 의연할 줄 알게 되었다.

도경은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주지도, 그만 울라는 입에 발린 말을 하지도 않았다. 딸꾹질하며 앉아있는 이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한 마디만을 건넸다.

“그동안 고마웠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함께한 세월에 비하면 단출하기 짝이 없는 작별인사였다. 이안은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도경을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인사말은 없었다.

***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막 세운 직후 전화가 걸려왔다. 시동을 끄지 않은 상태라 디스플레이에 수신자가 바로 떴다. 지한이었다.

“끝났어?”

―네. 지금 대리님 차 탔어요. 곧 도착할 거 같아요.

방금 첫 인터뷰를 마친 지한의 목소리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도경은 조용히 웃었다. 대리가 개중 괜찮은 기자를 고르느라 첫 인터뷰 날짜를 잡는 데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대리가 동석한다는 조건도 물론 잊지 않았다.

지한을 혼자 기자와 대화하게 놔두느니 20년 전에나 먹히던 신비주의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 대리의 의견이었다. 공감하는 바였기에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지한의 매니저는 그녀였다.

“인터뷰는 어땠어? 기자가 곤란한 질문 안 했어?”

―아. 중간에 여자친구 얘기 나왔는데.

“그래서 뭐라고 했어.”

―대리님이 갑자기 커피 쏟아서 그 얘기는 그냥 넘어갔어요.

보통 매니저가 되면 호칭을 바꾸기 마련이건만 지한은 대리를 계속해서 대리라고 불렀다. 그것도 도경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설마 일부러 쏟은 거야?”

―그런 거 같은데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뭘 일부러 쏟아요! 운전하는 중에도 자기변명은 잊지 않는 대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이번에는 굳이 웃음을 참을 필요가 없었다. 도경의 웃음소리를 들은 지한이 작게 따라 웃었다.

“알았어. 빨리 와.”

통화가 끊겼다. 조금 전까지 덥게 느껴졌던 차 안 온도가 급속으로 떨어졌다. 오한이 드는 것 같기까지 했다. 도경은 차에서 내렸다. 지한이 도착하기 전에 집에 들어가 있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집안으로 들어온 도경은 각 방부터 확인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방을 확인하는 루틴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문을 닫아두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생기기는 했다.

지한은 문이란 문을 다 열어젖히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새벽에 몰래 나가 일일이 닫고 다니길 한 달이 넘어갈 무렵 지한이 지나가는 말로 그랬다. 문을 닫고 방 안에 있으면 집에 혼자 있는 것 같다고.

그 말의 뒤에 생략된 결론이 무엇인지까지는 몰랐다. 외롭다. 무섭다. 두렵다. 그중 하나일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날부터 도경은 문을 닫지 않았다.

현관을 잠그지 않은 것처럼 찝찝한 기분은 어쩌다 도경이 더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저 쓰라고 준 방을 놔두고 남의 침대 위에서 잠든 지한을 볼 때마다 일시적으로 휘발되었다. 그렇게 도경의 본성은 멎어 들었다가도 불쑥 튀어 오르고, 그랬다 다시 멎어 들길 반복했다.

세탁실까지 확인하고 거실 소파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현관이 열렸다. 거실 불 켜두는 것을 잊었다. 복도 불만 켜져 있으면 지한이 집에 아무도 없다고 오해하기 좋았다. 불을 켜려고 일어선 도경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온 지한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아. 형 없는 줄 알고…….”

달려오다시피 거실로 와 불을 켠 지한이 멋쩍어하며 괜히 뒷머리를 만졌다. 기자를 만나기 전 미용실에 들렀다더니 머리가 말끔했다.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얼굴의 이목구비가 한층 더 뚜렷해 보였다. 뺨에 나있던 상처의 흔적은 깨끗이 없어졌다. 따로 치료받진 않았다. 놔두면 피부가 알아서 재생할 거라던 의사의 말이 맞았다. 상처는 스스로 아물고 새살이 되었다.

“수고했어.”

전문가가 만져준 머리는 삐져나와 있거나 헝클어진 부분이 없었으나, 도경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척 지한의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지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민망하단 표시였다. 그러면서도 피하진 않았다.

“저녁 집에서 먹을까, 밖에서 먹을까?”

“아. 어, 밖에서?”

“그래.”

둘 다 외출복 차림이라 바로 집을 나섰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분수대나 놀이터 근처에 나와 노는 어린애들과 부모들로 늦게까지 북적이던 단지 내가 그새 추워진 날씨의 여파로 휑했다. 경비원과 인사하며 출입구를 지나던 지한이 깜박했다는 듯 아, 맞다, 하고 도경의 팔을 건드렸다.

“리즈 스케일링 잘했대요?”

“별 얘기 없었으니까 잘된 거 아닐까.”

“그거 다 마취하고 해야 되는 거라던데.”

“이따 엄마한테 물어볼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개의 근황을 묻는 지한 때문에 털이 덜 빠지는 견종을 구해볼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반나절 이상 비어있는 집을 혼자 지키고 있으라는 건 개에게 못할 짓이었다. 황 원장의 개를 데려와 하루 이틀 재우는 것도 지한이 예정보다 더 많은 촬영 분량을 받으면서는 끊겼다. 드라마 종영이 코앞이었다. 도경의 머릿속에 새 스케줄이 추가되었다. 조만간 개를 며칠 데리고 있겠다고 황 원장에게 허락받기.

“안녕하세요.”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누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학원 가방을 멘 남자애를 알아보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지한의 오토바이가 자기 아빠의 차와 똑같은 브랜드라고 했던 애였다.

“아저씨.”

지한을 아저씨라고 불렀던 녀석이기도 했다. 도경은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꼬맹이는 지한의 얼굴이 일그러지든 말든 용감무쌍하게 자기 할 말을 했다.

“제가 TV 보고 엄마한테 아저씨 우리 아파트 산다고 했더니 엄마가 뭐라고 했어요.”

“왜.”

“저게 아저씨면 너희 아빤 할아버지라고 막 그랬어요.”

인상을 풀긴 했지만, 지한은 당돌한 초등학생에게 다정하게 대꾸해줄 용의가 없어 보였다. 어른의 도움을 바라는 눈길로 도경을 힐끗거렸던 남자애는 도움의 손길이 오지 않으리란 것을 눈치채고 씩씩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형이라고 하면 같이 사진 찍어줘요?”

어린애를 내려다보는 지한의 옆얼굴이 뚱해 보였다. 그러다 무시하고 가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제 얼굴을 막 알린 참에 어린애한테 쌀쌀맞게 굴었단 일화가 퍼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 지한에게 맞았던 사람들을 다 찾아내 부르는 대로 돈을 주고 인터넷에 올리지 않겠단 약속을 받아내느라 고생한 직원이 여럿이었다.

“네가 찍어야 돼. 난 사진 잘 못 찍어.”

“그건 괜찮아요. 저 사진 완전 잘 찍어요.”

패기 있게 휴대폰을 꺼내든 남자애는 세 번의 시도 끝에 도경에게 카메라맨 역할을 넘겼다. 초등학생의 키에 맞춰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은 지한과 꼬마의 얼굴이 둘 다 선명하게 잡히는지 확인한 뒤 버튼을 눌렀다.

도경의 사진에 만족한 어린애는 또 꾸벅 인사하고 단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경은 그 자리에 서서 작아지는 어린애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빠르게 작아진 인영이 무사히 건물 안으로 진입해 자취를 감추었다.

“형, 안 와요?”

“가.”

바람에 섞여 콧속으로 들어오는 냄새가 달라져 있었다. 지한을 처음 만난 계절로부터 한 바퀴를 돌아왔다. 다시 원점이었다. 겨울.

도경은 지한을 따라잡았다. 그들은 보폭을 맞춰 걸었다.

#91

오랜만에 클럽에 들른 에스더가 무영의 책상에 줄줄이 놓인 전자담배들을 구경하다 불쑥 이안을 언급했다. 걔 요새 뭐해? 한국에 없어? 무영만 보면 이안을 언급하고 싶어지는 건지, 책상에 놔둔 사진을 보고 문득 떠올린 건진 에스더만 알 사정이었다.

“한국에 있어.”

“근데 왜 이렇게 안 보여? 저번에 B사 S/S 컬렉션에도 안 오고. 걔 거기 건 꼭 오잖아. 무슨 일 있대?”

무슨 일이 있긴 있었다. 이안이 약이란 약은 다 꺼내서 술이랑 섞어 먹고 토하다 쓰러진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다. 그를 발견한 가사도우미는 고용주의 아들 친구 중 유일하게 연락처를 아는 무영에게 전화해 울부짖었다. 공부는 못했어도 사회적 물의 한 번 일으키지 않고 20대를 마무리해가던 이안이 자살 시도에 가까운 짓을 벌였단 소식은 온 집안을 뒤집어 놓았다.

지방 별장에 내려가있어 바로 달려오지 못하는 부모를 대신해 장 회장부터 고모 큰아빠 이모 삼촌 하여튼 어른이란 어른은 줄줄이 다 들이닥쳐 휩쓸고 간 뒤 꼴찌로 도착한 이안의 부모는 진정제를 맞고 잠든 아들이 시체라도 된 양 통곡을 해댔다. 어찌나 요란스럽게 울어댔는지 옆 병실 간병인이 들여다보고 가기까지 했다.

이제부터 자기네가 돌볼 테니 가서 좀 쉬라며 무영을 돌려보냈던 강 사장 부부는 12시간도 안 되어 다시 무영을 찾았다. 병실에서 쫓겨났다는 강 사장은 무영의 손을 붙들고 울먹거렸다. 무영아, 쟤 진짜 왜 저러는 거야. 우리하곤 말하기 싫대. 보기도 싫으니까 나가래. 네가 말 좀 해봐. 응? 쟤 네 말은 잘 듣잖아.

강 사장은 도경과 무영을 혼동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들의 인간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안은 딱히 무영의 말을 잘 들은 적 없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패륜아가 되어 염병하는 아들 걱정에 눈물을 쏟는 부모의 앞에서 사실을 바로잡지는 않았다. 무영이 그 정도로 예의범절 없진 않았다. 주로 없긴 하지만 적어도 이안의 부모 같은 사람들에게는, 기본은 지켰다.

“아무 일도 없어. 사춘긴가 보지.”

“열여덟도 아니고 스물여덟인 놈한테 사춘기는 양심이 너무 없다고 생각 안 해?”

무영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가 별로 이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린 에스더가 화제를 전환했다.

“권도경은 어떻게 지내?”

새로운 주제를 꺼낸 것까진 좋았는데 그게 하필 도경인 것은 나빴다. 무영은 또 어깨를 으쓱했다. 도경을 마지막으로 본 지도 근 한 달이 다 됐다. 이안의 근황을 알아내려다 포기한 것과 달리 이번엔 에스더도 금방 물러나지 않았다.

“잘 지낸다는 거야, 뭐야.”

“걔 뭐. 똑같겠지. 요새 바빠서 안 만났어.”

“우지한 TV 나오더라. 봤어?”

진짜로 알고 싶었던 것은 도경이 아니라 지한의 근황이었나 보다. 무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보려고 본 것은 아니고, 니나가 배경음처럼 틀어놓은 중국 드라마 소리가 시끄러워 채널을 돌리다 걸린 재방송을 우연히 봤다.

“난 걔가 도경이랑 인연 끊을 줄 알았어. 네가 못 봐서 그렇지, 진짜 그날 소현이 얘기 듣고 나서 우지한 표정만 보면 사람 몇 명 죽일 것 같았다니까.”

“원래 성질 더럽게 생겼잖아.”

“근데 드라마 보니까 아주 권도경이 뼈와 살을 갈아 넣었나 봐. 다른 애들이랑은 입고 나오는 것부터가 다르던데. 눈에 안 띌 수가 없게 해놨더라고.”

확실히. 발음은 아직 어설펐지만 대사가 다 딱딱한 문장들이라 그런지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그리고 일단 지한은 카메라가 잘 받았다. 연예인들은 보통 실물이 훨씬 더 낫단 평가를 듣기 마련이었다. 지한은 딱 그 반대였다. 카메라로 촬영된 모습도 실물과 비슷했다. 어쩌면 화면에서 조금 더 괜찮아 보일지도.

내가 왜 그 새끼 카메라빨 잘 받는단 생각 따위나 하고 있어야 하지. 무영은 머리통을 흔들었다. 같은 주제로 대화를 더 이어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에스더 머리 잘라야겠네.”

“왜. 지저분해?”

“그건 아니고. 너는 뭘 해도 예쁘지.”

키득거린 에스더가 책상에 기대고 있던 엉덩이를 뗐다.

“그런 소린 저기 밖에서 춤추고 있는 애들한테나 해.”

그녀가 아까부터 눈독 들이던 전자담배 하나를 집어 흔들었다. 나 이거 가져 간다? 무영이 그래라, 라는 세 글자를 다 내뱉었을 때 에스더는 이미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 중이었다.

에스더가 나가자 무영은 혼자가 되었다. 쿵쿵거리는 베이스가 사무실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 회장이 방음벽으로 설치하랄 때 말을 들을 걸 그랬다.

에스더에게 간택당하지 못한 담배를 아무거나 집어 입에 물었다. 올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각종 행사와 모임으로 쉴 날이 없어진다는 뜻이자 생사가 궁금하지 않은 인간들을 매일같이 만나고 다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에스더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모두가 무영에게 물어볼 것이다. 도경이는? 이안이는? 오늘은 모르는 척 발뺌했지만 앞으로 계속 그럴 순 없었다.

「네가 하란 대로 했어.」

이안을 정신병동에 입원시켜야 하니 마니 하는 강 사장 부부를 뜯어말리느라 기가 다 빨렸던 날, 도경이 찾아왔었다. 제 발로 만나러 와놓고 사람을 못 믿어서 클럽 안으론 들어오지 않으려 했다. 결국 무영이 도경의 차에 탔다.

「너 이안이가 지금.」

「대신 우리가 했던 얘긴 죽을 때까지 너랑 나만 아는 거야.」

이안이 어떤 소동을 벌였는지는 알기나 하느냐고 물으려던 무영의 말을 도경은 다 듣지도 않고 잘랐다. 도경의 의도는 분명했다. 알고 싶지 않으니 말하지도 말란 것이었다. 정말 인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새끼였다.

「당연히 너랑 나만 알지. 누가 또 알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한 글자 한 글자를 신중히 발음하던 도경이 말하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시점까지만 해도 무영의 머릿속은 온통 싸가지 없는 도경의 면상을 한시 빨리 치워버리고 싶다는 열망으로 꽉꽉 차 있었다.

「그러면, 이안이한테 다 말할 거야. 네가 나한테 뭘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

그 대목에서부터 무영은 도경을 다시 봤다. 끽해야 죽여 버리겠단 씨알도 안 들어 먹힐 협박이나 할 줄 알았던 도경이 진정한 협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언제 우지한한테 말한대? 나도 머리 아픈 거 싫어. 안 말해. 됐어?」

「내 말 안 끝났어.」

도경이 차 밖으로 나가려는 무영의 팔을 콱 잡았다. 뿌리치려던 무영은 생각처럼 쉽게 올라가지 않는 팔에 약간 당황했다. 도경은 협박에 이어 손에도 힘을 제대로 주고 있었다.

「다 말한 다음엔 걔한테 사랑한다고 할 거야. 사랑하지만 네가 시켜서 일부러 더 못되게 잘라냈다고 말할 거야. 더할 수도 있어. 뭐든.」

잡힌 팔뚝에서 손까지의 감각이 무뎌졌다. 혈류를 방해하는 도경의 손 때문이었다.

도경은 진심이었다.

「도경아. 잘 들어. 넌 어차피 몰랐어. 내가 뭘 할 건지. 그리고 내가 뭘 하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어디 가서 누구한테 할 말도 없어. 뭐라고 해? 넌 아무것도 몰랐고 나도 별거 안 했는데. 안 그래?」

시우가 갑자기 나타난 차에 치였단 전화를 받자마자 꺼두었던 호스트의 휴대폰과 고려인들에게서 넘겨받은 시우의 휴대폰은 도경에게 협박을 듣기 한참 이전에 이미 폐기했다. 유심카드는 당연하고 마더보드까지 다 뜯어내 태우느라 오밤중에 별장에 내려가 쇼를 했더랬다. 석·박사 과정을 밟은 깡패들과 피를 나눠가진 덕에 자연스레 습득한 상식들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그날만큼 절실히 실감한 적 없었다.

무영은 담배 주둥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전자담배 흡입구는 일반 담배 필터처럼 씹히지 않고 이에 불편한 느낌만 전했다. 그는 담배를 책상에 내던졌다. 모서리에 부딪힌 담배가 쓰레기통으로 알아서 골인했다.

아마 도경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친구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일은 이제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손해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안만 아니었으면 무영 혼자선 장장 20년이 넘도록 도경 같은 놈을 견디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한에게도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차 없는 도로에서 사고가 나기도 힘들었다. 길을 건너려고 도로로 내려온 직후 주머니를 뒤지느라 차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한 것 같다는 후일담은 고려인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게 왜 도로에 내려가서 휴대폰을 찾느라 뭐가 달려오는지도 못 보냐고. 러시아에서 사람들을 불러오기까지 했는데 허탕을 친 것부터 무영을 무슨 대낮에 차로 사람 치는 머저리 취급하던 도경의 눈빛까지, 패대기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그래도 다 뒤로했다. 끝난 일이었다. 도경이 협박하지 않았어도 무영은 알아서 입을 봉쇄했을 것이다. 게다가 어찌 보면 무영이 정말 휴대폰을 빼돌리는 데까지만 개입했다는 점이 잘 된 것 같기도 했다.

사고 없이 계획이 성사되어 시우를 지한에게 돌려보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살아있는 지뢰가 되었을 것 아닌가. 만약 무영이 시우에게 뭘 할 작정이었는지를 지한이 알게 된다면 그냥 시우가 그렇게 죽어버린 게 훨씬 재수 있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안 죽고 살아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고.

도경과 지한을 기다리는 결말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동화 엔딩은 아닐 것 같지만, 그들이 그런 엔딩을 맞이한다 해도 생판 남의 일인 양 못 본 척하는 연습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요새 돌아가는 꼴로 봐선 딱히 대비할 필요도 없을 듯했다. 사랑하는 외동아들의 거동이 불편한 것도 아닌데 강 사장 부부는 입주 간병인에 경호원까지 팀으로 고용했다. 자신들도 그 좋아하는 여행을 포기하고 집에 딱 붙어 이안을 24시간 감시했다.

당분간이야 자살한다고 설치기 어려울 테지만 강 사장 부부도 계속 그런 미친 짓을 할 순 없을 것이다. 언젠가 자유로워진 이안이 성공하지도 못할 자살 쇼를 또 벌이지 않게 잘 구슬릴 방도를 찾기에도 무영의 시간은 모자랐다.

일단은 지금쯤 약에 취해 자고 있을 이안이 앞으로 도경보다 더 정신병자같이 굴어도 무조건 참아줄 계획이었다. 도경에게 이안을 버리라고 한 장본인은 무영이니까. 고작 자살 소동 정도에 지칠 순 없었다.

뭔 지랄 염병을 해도 굴하지 않고 보살펴주면 아무리 멍청한 놈이라도 조금은 배우는 것이 있을 터였다. 무영만큼 자길 챙겨주고 생각해주는 주변인은 없다는 점이라든가. 도경보다 무영이 제게 훨씬 더 이득이란 깨달음이라든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못 알아 처먹고 또 도경 타령을 하면 그땐 무영도 지금까지처럼 어울리지도 않는 인내심을 키우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것까지 걱정하기엔 벌여놓은 클럽들을 관리하는 척이라도 하랴, 김 회장과 러시아 식구들의 비위를 동시에 맞추랴 이안을 걱정하기까지 하느라 정신이 쏙 빠지게 바빴다. 그러니 지한과 도경 따위에게까지 갈 신경이 남을 리 없었다. 둘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든, 징그러우리만치 오래 붙어먹다 죽든.

이제 정말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92

“이거 내 얼굴 너무 크게 나왔어. 한 번만 더 찍을게요?”

“이사님한테 허락받고 올려.”

“아우 대리님이 안 그러셔도 허락받으려고 그랬거든요.”

짧은 추가 촬영분을 위해 방송국에 들렀던 지한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 말고 처음 보는 남자에게 붙잡혔다. 초면이긴 한데 이상하게 낯익은 남자가 동창을 만난 사람처럼 반가워하는 바람에 누구시냐고 물을 타이밍을 놓쳤다.

방송국에 몰래 침입한 미친놈이라기엔 치렁치렁한 귀걸이와 시퍼런 머리가 너무 연예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기다리던 유 대리는 지한의 옆에 딱 붙어서 조잘거리는 남자를 알아보고 왜 혼자 화장실에 왔냐며 혼냈다. 다른 장소도 아니고 화장실에서 지한을 잡고 방방 뛴 남자는 도경의 회사에 소속된 아이돌이었다.

“어? 천 실장이다.”

누가 같은 그룹 멤버 아니랄까 봐,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와 대기실에 들어오던 빨간 머리 남자가 지한을 가리키며 똑같은 소리를 했다. 마지막 화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그냥 천 실장. 드라마 속에서 다른 인물들이 지한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나 왜 이렇게 계속 대갈장군으로 나오지.”

“봐봐.”

매니저와 멤버들로 추정되는 사람들 외에도 대기실 안에 웬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지한은 정신이 사나워 사진이 언제 찍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동료의 휴대폰 화면을 진중하게 들여다본 빨간 머리가 혀를 찼다.

“네 얼굴이 좀 더 커서 그런 거네.”

“야!”

“나도 사진 찍을래. 잠깐, 대리님 저 거기 그 종이 한 장만 줘보세요.”

2개월 넘게 진행된 촬영 기간 중 지한이 나오는 장면의 90프로 이상을 함께 찍어놓고도 쌀쌀맞은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배우에 비하면 회사에 제일 많은 돈을 벌어다 준다는 아이돌 그룹이 훨씬 살가웠다.

지한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신나 하는 모습이 의문스럽긴 해도, 귀 좀 따갑고 정신 좀 사나운 대기실이 같이 있는 내내 벗은 몸을 스캔당하는 기분이었던 드라마 촬영장보다는 백번 견딜 만했다.

“이거 종이 들고, 네, 그렇게. 이제 됐어요. 야, 우리 사진 좀 찍어줘.”

“뭐라고 쓴 거야. 이정옥?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우리 엄마 이름이다.” 불만 있냐는 듯 턱을 치켜든 빨간 머리가 지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저희 엄마가 형 보면 회춘하고 싶어진대요.”

“뭔 소릴 하고 있어 미친놈이.”

“진짜야.”

사진을 찍으려고 자세를 잡던 파란 머리가 깔깔댔다. 빨간 머리도, 소파에 앉아서 그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던 다른 멤버들도 다 따라 웃었다.

대기실을 들썩이게 만드는 그 소리는 소녀들을 연상시켰다. 빼빼 마른 체격이나 화려한 메이크업 때문은 아니었다. 지한이나 그의 주변 남자들에게선 들어본 적 없는 밝고 가벼운 소리여서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다. 더 생각하니 그의 주변 여자들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이긴 했다. 그의 주변이라기보단 시우의 친구들이었지만, 어쨌든.

“형 다음에 저희랑 술 마셔요! 대리님 왜 우리 회사는 환영 파티 같은 거 안 해요? 식구 됐으면 조촐하게라도 뭘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너희가 바빴잖아. 연말 회식 땐 다 모일 거야.”

“형 술 잘하세요?”

“나중에 얘기해, 나중에. 우리 바빠. 저희 이만 가보겠습니다!”

놔두면 하루 종일 붙잡혀있을 것 같았는지, 큰 소리로 모두에게 인사한 대리가 지한의 등을 문 쪽으로 떠밀었다. 대기실 안이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복도로 나와서도 환청이 들렸다.

“쟤네한테 끌려다니면 안 돼요. 술 마시고 사고 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아. 네.”

마시자고 할 것 같지도 않았고, 만에 하나 마시자고 제안한다 한들 응할 생각도 없었다. 지한이 남들에게 끌려다니는 타입도 아니었고…… 그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며 자문했다. 끌려다니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하지?

친구라고 부를 만한 대상이 시우밖에 없는 상태로 평생을 보내 잘 몰랐던 것 같다. 본인이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어떤 유형의 인간으로 비칠지. 어쩌면 지한은 상대에게 쉽게 끌려다니는 유형일지도 몰랐다. 대리나 작가, 끝끝내 자신이 아는 잡지가 지한의 첫 화보를 가져가게 성사시킨 쇼핑몰 사장에게도 그렇고. 도경에게도 그렇고.

운전대를 잡은 대리는 목적지를 따로 찍지 않고 도로에 진입했다. 다른 스케줄이 있지 않은 한 지한의 목적지는 도경의 아파트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촬영이 끝난 지한을 매번 도경의 아파트 주차장에 내려주면서, 대리는 단 한 번도 그들의 관계에 대해 묻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지한과 아무리 긴 시간을 붙어있어도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안 했다. 그녀가 지한의 앞에서 업무 외의 일로 감정을 드러낸 유일한 순간도 지금까지 단 한 번뿐이었다. 도경이 지한을 태우고 다니라고 뽑아준 새 차를 처음 몰던 날, 대리는 오토바이를 처음 샀던 날의 지한만큼이나 신나서 도로를 질주했다.

지한의 소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자신의 출연료에 맞지 않게 비싼 차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차피 운전대를 잡는 사람은 지한이 아니라 대리였다. 운전자가 좋다면 지한도 불만 없었다.

도경의 동네에 가다 보면 열에 아홉 시우가 일하던 호텔을 지나치게 됐다. 다른 길로 돌아가면 보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시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대리에게 그런 귀찮은 부탁을 하기엔 지한의 낯짝이 아직 덜 두꺼웠다. 처음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해 대리에게 어디 아프냔 질문을 받았다. 수십 번 지나다 보니 이젠 아무렇지 않은 척 반대편으로 눈길을 돌리는 기술이 생겼다.

물론 방해물은 호텔만이 아니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들 사이에 하나씩 껴있는 낮은 아파트 건물들은 한 번만 피해서 될 풍경이 아니었다. 차를 타고 서울을 돌아다니다 보면 시커멓게 건물 벽을 타고 내려온 자국이 귀신같은 아파트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쳤다.

오래된 아파트들을 보면 또 어쩔 수 없이 시우 생각이 났다. 보육원을 나온 시우와 지한이 처음으로 정식 계약하고 얻었던 공간. 낡고 좁은 아파트.

시우와 다달이 월세를 내고 살았던 그 집은 도경이 매입했다. 처음 그 얘길 들었을 때 지한은 진심으로 도경의 머리 뚜껑을 열고 그 안을 해부하고 싶어졌다. 지한의 싸한 반응에 도경은 그 듣기 좋은 목소리로 차분히 설명했다. 그 집을 정리하려면 하루 이틀 가지고는 안 될 텐데 당장 정리하기엔 지한이 추스를 시간도 필요하고 앞으로 바빠지기도 할 테니 일단 사두었다, 그러니 여유가 날 때 가서 천천히 정리해라, 원한다면 아예 명의를 넘겨주겠다.

도경을 용서했다고 해서 그에게 받은 내상까지 순식간에 다 아문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조금은 복수한다는 기분으로, 지한은 솔직하게 말했다.

「가끔 형은, 내가 형한테 빚진 기분 가지고 살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도경은 바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뜸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설마 진짜 그런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 내려앉을 데도 없이 닳아버린 줄 알았던 속은 수시로 잘도 푹푹 꺼졌다.

「난 그냥 너 편하라고 그런 건데. 싫으면 다시 팔게.」

타인의 속을 한구석도 놓치지 않고 꿰뚫어 볼 수 있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으려는, 스스로가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의지가 지한을 자꾸만 현실로 이끌었다.

도경은 지한과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 몇십 년을 살았다. 지한을 위해 양보하는 일은 가능해도, 그를 진실로 이해하는 일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지한이 도경을 위해 많은 것들을 참을 순 있어도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래서 지한은 도경에게 화내지 않았다. 지한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하니까. 위한다는 것은 애정이 있어야만 지속 가능한 개념이었다.

화내지 않고 넘어가긴 했지만, 지한은 도경이 산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았다. 도경의 말대로 언젠간 가서 버릴 건 버리고 가져올 건 가져와야 했다. 언젠가는. 집마다 고유의 냄새가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옷가지를 가지러 잠시 들렀던 집은 사방이 시우의 흔적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시우가 쓰던 물던, 가구, 세제, 로션, 수건, 지한이 부숴버리고 싶어 했던 액자, 그들의 사진이 함께 담겨있는 졸업 앨범. 아직은 그것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도경이 그 집을 산 덕분에 급하게 이사하느라 시우의 냄새가 남아 있을 물건들을 함부로 처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 점은 고마웠다.

시우를 잊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묻어둔 것이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밤이 금세 가버리고 아침을 지나 점심이 찾아와도 멈춰지지 않았다.

시우에게 잘못했던 것, 성공하면 보상해주고 싶었던 것, 그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넘어갔고, 그 사실을 알려버렸던 것까지 다 돌이켜도 숨이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괜찮아지면 그때는 그 집으로 돌아가 정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전까진 시우의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할 기미가 보이는 즉시 뇌를 강제적 코마에 빠트릴 필요가 있었다. 또 도경에게 끌려 병원에 가느니 조금 답답해도 그편이 나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차가 멈추었다. 대리가 벨트를 푸는 지한에게 당부했다.

“내일 푹 쉬고, 내일모레 화보 잊지 말고요. 데리러 오는 거 아침 여덟 시예요. 저녁이 아니라.”

“안 잊어버려요.”

“지난번에 잊어버려서 내가 지한 씨 깨우려고 이사님 집에를 다 들어갔잖아?”

할 말이 없었다. 그날 도경의 침대에서 안 자고 있길 천만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아무리 남의 사생활에 관심 없는 대리라도 대체 둘이 무슨 사이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리를 보내고 올라온 지한은 불이 켜져있지 않은 거실을 보고 서둘러 복도를 지났다. 이제는 눈 감고도 위치를 아는 거실 버튼을 건드렸다. 불이 들어왔다. 도경은 없었다. 연말이 다가오며 도경이 지한보다 더 바빠졌다.

혼자 자길 무서워했던 건 열 살도 되기 전의 얘기였다. 절대로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다만 단지 깊숙이 위치해 있어 차도의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건물의 꼭대기 층에 감도는 고요함이 온몸을 저릿저릿 아프게 하는 밤들이 종종 찾아왔다.

그럴 때면 도경의 침대에 누웠다. 도경의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만 해도 뻔뻔하게 주인 없는 침대에서 잘 엄두는 못 냈다. 잠깐씩 누워 있다 일어나는 것에 그쳤었다. 그러다 하루는 깜박 잠이 들어버렸었다. 새벽에 눈을 뜨니 옆에서 도경이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다.

그 뒤론 종종 도경이 없어도 그의 침대에서 먼저 잤다. 지한의 침대에서와 똑같은 섬유유연제 향이 나는 도경의 침대에만 누우면 이상하게 잠이 잘 왔다.

재킷을 입은 채로 드러눕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복도 끝의 욕실로 들어갔다. 도경은 온몸을 씻기 전까진 이불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 남자의 침대를 빌리려면 지한도 깨끗해야 했다. 도경의 아파트에 있는 두 욕실은 변함없이 호텔 같았다. 지한이 아예 들어와 지내게 된 후로도 늘 손님용 가운이 마련되어 있었다. 새 칫솔과 개성 강한 향의 샤워 제품들도 여전했다.

단, 샤워 젤은 바뀌었다. 읽을 수 없는 외국어가 써있다는 점은 같았으나 이제는 무겁고 독한 향 대신 과일 향이 났다. 시우의 장례식을 마치고 왔던 날 이미 바뀌어 있었다. 샤워 젤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도경의 향수 서랍을 몰래 열어본 적 있었다.

소현과 맞춰서 샀는지, 한쪽이 먼저 산 걸 다른 쪽이 나중에 따라 샀는지 모를 그 독특한 향수도 사라지고 없었다. 소현의 흔적을 깔끔히 없애줬다는 점에 안심해야 할지, 어쨌거나 도경이 소현의 남자였단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좌절해야 할지는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것 역시 시우처럼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 생각만 해도 호흡이 불편해지지 않을 수 있을 때가 되면 다시 생각하고 싶었다.

씻고 나와 옷을 세탁기에 넣었다. 외투는 세탁기 옆 벽에 걸어두었다. 그렇게 해놔야 다음날 가사도우미가 와서 세탁실에 맡겼다. 집주인인 도경이 한 번 입은 외투는 무조건 세탁소에 맡기니 지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지한과 자주 마주치는 도우미가 한 번은 그랬다. 이 집 사장님은 엄청 깔끔하시죠. 다른 집들도 다 이러면 얼마나 좋아. 칭찬이 담긴 평에 지한은 편히 웃지 못했다. 도경이 먹는 약의 종류가 몇 가지나 되는지 알았다면 도우미도 그리 쉽게 칭찬하진 못했을 것이다.

세탁실에서 나온 뒤에도 지한은 도경의 침실로 향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우려면 머리가 다 말라야 했다. 드라이어 바람을 쐬기 싫어 그냥 식탁 의자에 앉았다. 식탁 끝의 달력이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원래 도경의 식탁엔 달력이 없었다. 지한이 자꾸 날짜 개념 없이 굴어 대리의 성질을 돋우자 어느 날 도경이 가져다 놓았다. 아침 촬영, 오후 촬영, 저녁 촬영 그리고 새벽 촬영까지 다 다른 색으로 표시해둔 달력을 보면서 지한도 점차 날짜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몇 달 전 시우의 생일에는 보육원 동기들과 다 같이 모여 술을 마셨다. 장례식에서 가장 크게 통곡했던 분식집 딸은 오지 않았다. 동기들은 지한에게 건투를 빌었다.

「너 잘 되면 우리 보육원 TV 나오는 거 아니야? 원장님 엄청 좋아하겠다, 야.」

「안 그래도 자주 못 봤는데 스타 되면 이제 영영 못 보겠다. 오늘 얘 술 많이 먹이자.」

장례식 마지막 날 찾아왔던 원장 부부는 납골당까지 따라왔다. 시우의 팀장보다 더 높은 액수를 내고 간 조문객은 원장 부부 말고 없었다.

예전엔 고아란 사실이 부끄러웠다. 지금도 그리 밝히고 싶은 사정은 아니었다. 그래도 고아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좋은 분들이 잘 보살펴주셔서 힘들지 않았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양심은 생겼다. 보육원이 유명해지면 고아들이나 더 몰리지 무슨 다른 좋은 일이 생길까 싶었지만 또 몰랐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지.

드라마 첫 회가 방영되자마자 연락이 쏟아졌다. 원장은 거보라며, 그쪽으로 나가길 잘했다며 자신이 더 우쭐댔고 정비소 동기는 연예인 디씨해줄 테니 언제든 오토바이 수리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레오는 자랑하고 싶은데 참느라 입이 근질거려 죽겠다며, 잘 닥치고 있을 테니 나중에 자기가 일반 술집을 차리면 꼭 와서 인증샷을 남겨달라는 협박 같은 부탁을 했다. 연이 끊기다시피 했던 다른 체육관 친구들도 다들 연락해왔다.

지한의 일상에 새로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졸지에 사무직에서 매니저로, 그것도 남자 배우를 담당하는 여자 매니저가 된 소감을 대리는 간단히 정리했다. 이사님이 지한 씨를 엄청 아끼세요. 의미심장한 한 마디였다.

쇼핑몰 사장은 예능에 나가면 꼭 데뷔 전에 쇼핑몰 모델이었다고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드라마 작가는 다음 작품의 서브 역할을 줄 테니 또 한 번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가 대리를 정색하게 만들었다.

이미 개봉해 800만 관객을 돌파한, 소현의 회사가 만든 영화의 감독도 드라마를 보고 메시지를 남겼다. [앞으로 더 잘되길 바랄게.] 지한에게 하차 통보를 했던 막내 감독은 데뷔 축하드린다는 메시지를, 끝까지 나름대로의 의리를 지켰던 무술 감독은 다시 같이 일할 날을 고대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벅찬 수의 사람들이 지한의 삶으로 돌아오고 등장했다.

여전히 지한은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렀다. 그렇지만 긴장해서 존댓말을 잘라먹거나 남의 의도를 넘겨짚고 방어적으로 구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호의에 둘러싸여 살아본 적이 없어 모르고 있었다. 악의 하나만 감췄을 뿐인 세상이 그의 언행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마르려면 한참 남은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이 어깨를 적셨다. 그는 거실 창가로 걸어갔다. 사람 없는 단지 내를 지키고 있는 것은 물이 끊긴 분수대와 잎을 잃은 나무들뿐이었다. 적응하고 타협하며 살다 보니 겨울이 되어있었다. 계속 그렇게 지내다 보면 또 금세 해가 바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끝난 줄도 모르게 겨울이 끝나있을 것이다.

***

학창 시절을 통틀어도 상이란 것을 받아본 기억은 없었다. 따라서 방송국이 선심 쓰듯 여러 명에게 나눠주는 신인상이 지한에게는 생애 첫 상이었다.

상을 받는 것만으로도 긴장되는데 무대에 올라가 수상소감까지 말해야 한다니, 시상식은 지한에게 망신살이 뻗치라고 마련된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걱정을 모르지 않는 대리가 미리 수상 소감을 써서 도경에게 보여주었다. 깔끔하게 써내려간 소감을 다 읽은 도경은 종이를 지한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 그냥 응원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고.」

도경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생애 첫 수상을 전국에 중계되는 방송국 무대에서 해야 하는 지한의 긴장도는 일반 신인들보다 몇 배 더 심각했다.

―감…… 감, 사합니다.

무대에 올라간 지한은 도경이 알려준 그 짧은 소감에서도 앞뒤를 다 잘라먹었다. 시상식이 끝난 뒤 방송국 복도에서 마주친 박 실장은 감사하단 말이라도 한 게 어디냐며 지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 뒤에 선 배우는 인사 대신 한심함과 동정심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한없이 모자란 놈을 보며 저걸 진짜 얻다 써먹어야 하는지 걱정하는 사람이 낼 법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함께 드라마를 촬영할 때 고수했던 태도에 비하면 한결 누그러진 것 같아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지한의 세상에서 고작 그 정도 가지고는 악의의 축에 낄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도경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운 대리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도경도 주차장이라며 만나서 같이 만나서 올라가라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문을 열려던 지한은 조수석 핸들에서 손을 뗐다. 늘 지한보다 먼저 일어나고 늦게 퇴근하느라 홀쭉해진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묻는 듯했다.

“저기. 그. 대리님.”

“네?”

“그……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갑자기 뭔 소리냔 듯 지한을 빤히 보던 대리가 풋 웃었다.

“왜. 왜 웃으세요.”

“아니, 지한 씨가 그런 말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서요.”

“네? 왜요.”

“자식 다 키워놓으면 이런 기분인가.”

“대리님 나랑 나이 차이 별로 안.”

“어휴. 비유를 한 거지, 비유를. 지한 씨도 수고하셨어요. 저희 새해에는 더 열심히 해봐요.”

대리가 손을 내밀었다. 지한은 얼른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짧은 악수가 끝났다. 왠지 부끄러워져서 얼른 내렸다.

대리의 차가 주차장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지한은 도경을 발견했다. 근처에 차를 댔는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오는 도경의 목에 빨간 목도리가 둘려있었다. 지한은 흐트러지지 않는 박자로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도경을 기다렸다.

“시상식 봤어.”

“아, 그거 다 외우고 갔는데 무대 올라가니까 진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서.”

“잘했어.”

도경이 목도리를 풀었다. 그의 손에 들린 채로 집안까지 들어갈 줄 알았던 목도리가 지한의 얼굴 근처로 다가왔다. 부드러운 감도가 지나쳐 간지럽게까지 느껴지는 직물이 뒷덜미를 덮었다.

“왜 형 거를.”

“네 거야.”

지한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준 도경이 한 발짝 물러났다. 지한은 아래로 길게 늘어진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개인적으로는 자신과 빨간색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싫지는 않았다. 빨간색은 도경과 어울리는 색이었다. 그와 어울리는 색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면 떨어져있을 때도 가까이에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도경의 코트 주머니에서 나온 작은 물체가 지한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지한의 손가락을 잡은 도경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게 했다. 도경의 뒤쪽에 세워진 차 하나가 비상등을 깜박였다.

“저게.”

다소 날렵한 편에 속하는 오토바이와는 고르는 기준을 달리했거나 아예 제3자가 골라줬으리라 예상되는 디자인의 까만 SUV가 지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유명한 차종이었다. 비싸서. 남자들이 살면서 한 번쯤은 몰아보고 싶은 차로 많이들 꼽아서. 도심보단 사막에서 끌어야 할 것처럼 전투적으로 생겨서.

“형이 골랐어요?”

“응. 왜, 별로야?”

부담스럽다거나 왜 말도 없이 사오는 선물의 값이 점점 더 비싸지냐고 따지지 말아야 했다. 도경은 지한에게 부담을 주려거나 돈 자랑을 하고 싶어서 자꾸 이것저것 사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밖에 선물할 줄 몰라서 그러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어른이 된 과정을 고려하고 넘어가 줄 수는 있었다.

다시 태어날 수는 없으니까.

“아니요. 좋아요.”

알게 모르게 긴장되어 있던 도경의 얼굴이 편히 풀렸다. 그는 지한에게 다가섰다. 달콤한 향이 풍겼다.

“축하해.”

방송국에서 준 상. 며칠 남지 않은 생일. 도경이 그중 무엇을 축하한다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아래로 숙일 때마다 턱이 목도리에 닿았다.

“예쁘다.”

목도리가 예쁘다는 것인지, 그것을 한 지한이 예쁘다는 것인지. 역시 알아듣지 못한 그는 마냥 끄덕이지 않고 도경을 마주 보았다.

불안하고, 슬프고, 외로우며 괴로운 감정들이 꽁꽁 숨었다. 그것들이 영영 증발하지 않았음을, 당장 오늘 밤에라도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지한은 또한 알았다. 눈앞의 도경이 지한에게 그 어떤 악의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것으로 이 순간만은 불안하거나, 슬프거나, 외롭거나 괴롭지 않았다.

#93

그 드라마 봤어? 나도 봤어. 우리 회사 여자애들 난리 났잖아. 주인공보다 우지한 얘길 더 많이 하던데. 벌써 다음 작품이 정해졌어? 걔 진짜 로또 맞았다. 소현이 쫓아다니던 애가 이렇게 단방에 뜨네.

권도경도 로또 맞은 거지. 아니, 누가 돈이 문제래. 거기 지 아빠한테 쫓겨나서 간 거라 눈에 불을 켜고 회사 키우려고 난리였잖아. 다른 애들은 원래 있던 애들이니까 따지자면 우지한이 권도경 첫 작품인 거 아니야. 근데 그걸 터뜨렸으니 얼마나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까. 상상만 해도 짜증 난다.

걔? 나도 몰라. 요새 권도경 본 사람? 무영이 생일 때 마지막으로 보고 그 뒤론 못 봤어. 연예인 바쁘다고 지도 바쁜 거야 뭐야? 아주 매니저 다 되셨어. 대학 다닐 때 누가 상상이나 했어, 권도경이 연예인 키운다고 자기네 집안 행사도 빠지고 그럴 줄.

권도경은 그렇다 치고, 이안이는 요새 왜 잘 안 보이는 거야? 병원? 왜, 젊은 애가 어디 아프대? 뭘 하려고 했다고, 뭐? 우울증? 거짓말하지 마, 걔가 무슨. 진짜로? 왜? 이안이 걔 아무 생각 없잖아. 너희 다 몰라? 무영이도 모른대? 아, 그래? 걔가 예전부터 이안이를 좀 싸고돌긴 했지. 내 생각엔 강이안 아마 죽으려는 시늉만 좀 한 걸 거야. 아마 수면제도 한 다섯 알 먹고 토했을걸. 얼마나 겁이 많은데.

그래도 놀랍긴 하다. 쇼라도 자살 같은 건 권도경이 할 줄 알았는데. 그치, 걔는 진짜 자존심 상하면 뛰어내릴 수도 있을 것 같잖아. 여태 살아있는 게 신기해. 근데 생각할수록 무섭네. 어떻게 소현이 남자를 데려가서 지가 키워? 정말 보통 놈이 아니야. 아 뭘 불러내. 됐어. 사이코는 멀리할수록 좋아. 그런 소름 끼치는 새끼 우지한이나 실컷 가지라 그래.

그래야 세상에 널리 이로워.

로 블로(Low blow)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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