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No Contest (35/38)

  35. No Contest

#88

죽음에도 계급이 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느끼는 동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지한은 높고 귀한 계급의 죽음이 다뤄지던 한 장소를 떠올렸다. 키 큰 나무들이 장수처럼 우뚝 솟아 있는 주차장과 유럽 어딘가의 성을 닮은 건물. 로비 천장에서 번쩍이는 샹들리에. 휴식 공간, 식사 공간과 분향소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어 어디가 끝인지도 알기 쉽지 않은 빈소.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

소현의 가는 길이 하얗고 깨끗하며 반짝였다면 시우는 모든 것이 그 반대인 장소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 2층짜리 장례식장 건물은 어지간한 아파트 단지 상가보다 낡고 추레했다. 좁은 주차장에 서면 보이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옆에 위치한 카센터였다. 오래된 전등으로 인해 침침한 화장실엔 비누도 없었다.

유일하게 소현의 장례식에 견줄만한 건 조문객들뿐이었다. 그마저도 머릿수로 따지면 소현에게 비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시우를 애도하러 온 사람들은 진심으로 슬퍼 보였다. 보이는 모습과 속마음이 어디까지 다를 수 있는지를 몸소 겪고 난 후에도 지한은 또 타인을 넘겨짚었다. 소현의 장례식에서 본 사람들보다는 시우의 영정을 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비통하다고.

시우 없이 보육원 동기들을 대면한 지한은 자신이 그들 중 누구와도 친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이란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시우 없는 지한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슬픔이 그들 사이의 공기를 중화시켰다.

“지한아.”

그들에게 갚아야 할 돈이 얼마나 남아있었고 지금 사는 집의 보증금과 월세가 정확히 얼마인지를, 지한은 시우가 죽고 나서야 제대로 알았다. 사망보험금이 나오면 남은 이자와 원금을 다 갚고도 남는단 것도, 그 사망보험금이 세간에서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되는 액수의 돈이 아닌 것도 그런데 그들은 몇 년간 고작 그걸 한꺼번에 못 갚아서 이자를 허공에 뿌리고 있었단 것도.

“어.”

네가 양심이 있으면 그 보험금에 어떻게 손을 대. 누군가 한 명쯤 그런 소리를 해도 듣고만 있겠다는 각오는 이미 마친 후였다. 지한이라고 그 돈을 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안 쓰고 남에게 주려 해도 줄 대상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시우에겐 가족도, 애인도 숨겨놓은 자식도 없었으니까.

“힘내라.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지한을 끌어안으려다 그건 어색한지 팔을 두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한 남자는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입소했던 동기다. 사교육 한 번 못 받은 처지에 그래도 꽤 공부를 잘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문신이 손등까지 삐져나와 있었다.

“안 해.”

이상한 생각 따윈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으나 뱉고 나니 예의 없는 대답이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보육원 동기들은 지한의 언행에 익숙했다. 불퉁한 대꾸에도 개의치 않고 돌아서려는 동기의 팔을 잡아 세웠다.

“와줘서…… 고마워.”

놀라 굳었던 동기의 얼굴이 풀어졌다.

“무슨 그런 말을 해. 시우인데. 당연히.”

애써 웃으려던 동기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고였기 때문이다. 지한은 잡은 팔을 놔주었다.

눈물을 삼키거나 몰래 나가서 우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던 탓에 큰 소리가 나지 않던 빈소를 확 시끄럽게 만든 조문객은 보육원과 같은 동네에 있었던 분식집 딸이었다. 보육원 동기들보다 조금 더 늦게 도착한 그녀는 영정 앞에서 절을 하려고 엎드린 자세로 일어나지 못하고 울었다.

들썩이는 등을 보며 그녀가 언젠가 지한에게 했던 용감한 발언을 되새겼다. 이시우 인생의 오점은 부모가 아니라 너야, 너.  이제야 알겠다. 그 소릴 들었을 때 왜 그렇게 숨통이 분기로 꽉 막혀 죽어버릴 것 같았는지.

맞기만 한 소리라 그랬던 것이다. 지한은 엎어져 오열하는 여자의 등을 내려다보기만 하고 일으켜 세울 시도는 않았다. 함께 울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보험금 운운해도 듣고 있자고 다짐했을 때보다 열 배는 더 굳게 각오했다. 너 같은 거 때문에 시우가 재수 없게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도 들어주기로.

그러나 빈소가 떠나가라 크게 울고 난 그녀는 빨갛게 부은 눈을 억지로 뜨고 지한의 앞에 섰다. 다른 동기들과 달리 포옹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수십 분처럼 느껴지는 수십 초가 지나는 동안 지한의 발 근처만 보던 여자는 다른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먼저 와 앉아있던 고등학교 동창들이 우르르 일어나 그녀를 토닥였다. 다들 지한에게 뻣뻣한 위로를 건넬 때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야, 나 핸드폰 잃어버려서 몰랐어. 알았으면 바로 와서 도와줬을 텐데. 다른 애들이 말 안 해줬으면 계속 모르고 있을 뻔했네.”

저녁 시간을 넘겨 나타난 레오는 보자마자 지한에게 급히 변명부터 했다. 시우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언쟁을 벌였고, 그전에도 딱히 사이가 좋았던 적 없는 레오마저 식당 쪽으로 돌아설 땐 눈이 약간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지한은 마른 눈가를 문질렀다. 상주를 제외한 전원이 우는 장례식이라. 응급실 도착하자마자 시우가 죽었다는 소릴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었다.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소현의 장례식에서 눈물은커녕 콧등도 시큰거리지 않았던 원인은 그녀와 애틋한 사이가 아니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시우의 장례식에서 상주 노릇을 하면서도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문제는 지한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무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도 나사가 빠져 있다든가. 감정을 너무 함부로 쓰고 다녀서 정작 써야 할 땐 못 쓰게 되었다든가.

비현실적인 망상에서 지한을 끄집어낸 것은 갑자기 평온해진 귓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몇십 명이 한꺼번에 내는 소리로 시장바닥 같던 빈소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다른 빈소에서 나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었으니 완전한 정적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우를 애도하러 온 조문객들은 거의 다가 대화를 멈춘 상태였다. 그들은 대부분이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입구.

지한은 눈을 똑바로 떴다. 영정사진이 있는 상은 최대한 시야에 담기지 않도록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입구로 향해 있던 조문객들의 시선이 단체로 지한에게 옮겨왔다. 순식간에 빈소의 소음을 제거해버린 조문객의 정체를 시각보다 후각이 먼저 알아차렸다.

달짝지근하지만 식욕을 돋우진 않는 향. 꽃 냄새. 알아차렸음에도 입구와 빈소를 가르는 벽 앞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발을 움직인 것은 그럴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시우의 장례식에 나타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얇은 벽을 지난 지한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낮은 신발장은 물론이고 면적이 얼마 안 되는 바닥까지 꽉꽉 매운 신발들 너머에 서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인물은 남자였고, 키가 컸으며.

도경이었다.

제일 먼저 든 의문은 어떻게 알고 왔느냔 것이었다. 지한은 매해 시우의 생일을 챙겨주던 동기들에게만 메시지를 보냈다. 나머지는 그들에게서 부고 소식을 듣고 찾아온 조문객들이지 지한이 직접 연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한은 곧 추측하기를 포기했다. 도경이 시우의 죽음을 알게 된 경로는 중요하지 않았다. 에스더가 레스토랑에서 했던 말이 맞았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시야 끝에 걸리는 얼굴들을 아예 안 보이는 척하기란 불가능했다. 조문객들은 단순히 도경이 모르는 얼굴이라 조용해진 것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지한이나 시우의 친구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상가에 찾아와놓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를 지한만은 알아보는 것 같아서. 도경 자체가 보면 볼수록 눈에 콕 박히는 인간인 탓도 얼마쯤은 있을 터였다. 비단 생김새나 차림새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현의 장례식장에서도 도경은 혼자 다른 그림에서 옮겨진 것처럼 눈에 띄었었다.

저 사람 누구야? 입구에서 멀지 않은 테이블에 앉은 동기 하나가 의아해하는 소리를 들었다. 와놓고 선뜻 들어오지 못하는 도경을 마주 보고 선 지한은 자문했다. 그러게, 누굴까. 이름은 권도경. 작은 개를 키우는 엄마와 하나도 닮지 않은 형, 그리고 잘은 몰라도 최소 어디 회장 자리 하나는 꿰차고 있을 아빠로 이루어진 네 식구의 막내.

손 씻기에 몰입하면 피부가 빨개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흥분하면 어울리지 않게 과격해지는 성향이 있다. 그 외에도 도경에 대해 말해보라면 자신 있게 읊었을 사소한 것들이 많았지만 지한은 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다 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지한은 도경을 몰랐다.

허리도, 다리도, 팔도 다 쭉 편 도경이 유일하게 숙이고 있는 부위는 고개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세마저 남들처럼 기가 죽었거나 창피해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장례식장이란 장소에 맞게 예를 갖추는 자세로 보이기까지 했다.

지한은 바지의 허벅지 부분을 꽉 쥐었다. 긴장한 몸과 달리 머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도경이 눈앞에 있단 현실은 지한의 감각을 뚫고 들어오는 데 실패했다. 시우가 죽었다는 사실이 그랬던 것과 다르지 않게.

아. 그래. 그렇지.

시우가 죽었다.

지한은 쥐고 있던 바지를 놨다. 도경은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았다. 목을 쭉 펴고, 시선은 앞으로 둔 채 지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그 얼굴에 드러나는 속마음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착각해 우쭐했던 적이 있다. 이제 와 돌이키니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을 감히 깨지 못하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 동기가 용감히 나섰다. 정비소에서 일하는 동기였다. 오토바이를 맡기러 온 지한에게 철이 들었다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했던.

“너 아는 분이야?”

지한의 옆으로 다가온 동기가 물었다. 한껏 낮춘 목소리였지만 도경이 듣지 못하기엔 그들 사이의 거리가 너무 짧았다. 지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경도 꽉 다물린 입술을 열지 않고 있었다. 지한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엔 소리도 내지 않고 얼어있겠다는 듯이.

들어오라고 하든지, 꺼지라고 하든지. 상주인 지한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없진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이번엔 또 누굴 시켜서 시우가 죽었다는 걸 알아냈냐고 따지고 싶었다. 당장 꺼지라고 일갈하고 싶었고, 그래도, 처음엔 어쨌건 나중엔 좋아져서 계속 만났단 얘기가 진짜냐고 확인받고 싶었다. 도경에게 하고픈 말은 죄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우가 가는 길에 도경과 말싸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어차피 죽은 시우는 지한이 뭘 하든 보지 못하겠지만. 망자에게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귀신은 안 믿으면서 망자에게 지켜야 할 예의는 있다고? 어쩌면 도경에게 말을 걸지 않으려는 시도는, 망자를 위하는 마음보다는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발악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지한은 인정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시우의 귀신을 배려해서 도경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를 누르는 죄책감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고자 도경과 직접적으로 말을 섞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시우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빠져버렸던 것이 미안해서. 지한과 시우는 부부도 연인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사실은 오랜 세월 그들을 지탱해 주었던 금기를 깨버리고도 모르는 척 그냥 살고 싶었던 자신이 미안해서.

꼭 죄책감 때문이 아니더라도 항상 지한보다 시우를 더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도경과 대화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도경이 침묵하든, 변명하든 아니면 위로부터 건네든 지한은 결국 폭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었다.

“놔둬.”

아는 분이냔 질문에 맞지 않는 다소 엉뚱한 대답이었다. 지한의 언행에 익숙한 동기는 무리 없이 지한의 말을 알아듣고 물러났다.

지한은 도경을 두고 돌아섰다. 영정사진이 올라간 상 앞을 지나면서, 그리고 상주의 자리에 돌아와 서며 기능을 잃어버린 머리로 걱정했다. 만일 도경이 진짜로 빈소에 들어오면 그땐 어쩌나. 도경이 시우의 사진 앞에 향을 꽂고 절하면. 그런 다음에 지한의 앞에 서면 그때는 어떤 표정으로 있어야 하지.

그러나 지한의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도경은 빈소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조문객과 지한의 대치에 조용하던 조문객들이 하나둘 다시 대화하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시끄러워지려면 한참 먼 잔잔한 말소리들은 복도에서 나는 구두 굽 소리를 완전히 묻지 못했다. 바닥이 유독 힘겹게 튕겨내는 소리. 시우의 시체가 누워 있는 건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으리으리한 건물 로비에서도 묻히지 않던 그 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발소리의 주인공이 복도를 벗어나 아예 밖으로 나갔음을 뜻했다.

지한은 입구 옆의 벽을 넋 놓고 관망했다. 도경이 떠났다. 지한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고. 시우를 위한 향도 하나 꽂지 않고.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또 보나.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이것이 마지막이란 얘긴가.

여기서 이렇게 끝.

“지한이 너도 뭐 좀 먹어야지. 내가 여기 보고 있을 테니까 좀 앉아서…….”

동기 하나가 와서 지한을 식당 쪽으로 이끌려 했다. 팔을 잡아당겨도 꿈쩍 않자 얼굴 가까이에 손을 대고 흔들어왔다.

“지한아. 지한아?”

그래. 수치스러웠다. 도경이 무슨 계획을 품고 접근한 줄도 모르고 만날 때마다 좋다고 꼬리 흔드는 개처럼 굴었던 과거를 돌이키면 과장 없이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세세히 생각할수록 자괴감이 깊어져 도경과의 기억은 전부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헤집어 잘게 분해한 다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모든 순간이 수치스럽진 않았다.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이 아니었다. 늘 알고는 있었다. 무영과 싸우던 도경은 절대로 연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 확신만큼이나 진심이었다고 믿고 싶어지는 다른 기억의 조각들도 있었다. 그 조각들까지 다 묻어두려 노력했던 까닭은 무서워서였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이상한 점을 새로 발견해 버리면? 사실은 그것들마저 죄다 거짓이었다면?

도경과 관련된 기억 자체를 차단하려는 시도는 자기방어였다. 처음엔 아니었더라도 최소한 지한의 맨몸을 만지던 무렵부턴 도경도 진짜 좋아서 한 행동이었을 거란 위태로운 믿음에마저 균열이 가면, 지한도 더는 자신의 다음 선택을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언제나 얄팍했던 그의 이성에 미약한 고삐 역할을 했던 시우도 더는 없었다.

그러면 지한은 뭘 할 수 있을까.

도경과는 끝났고 시우는 죽었다. 지한에게는 이제 끝까지 믿을 상대도, 들끓는 욕망을 배출할 상대도, 싸울 상대도 모조리 잃었다. 그는 혼자 남았다.

혼자였다. 혼자다. 혼자.

숨이 안 쉬어진다.

“어, 지한아. 너 어디―.”

부의함을 지키고 앉아있던 다른 동기가 발에 밟히는 신발을 아무거나 신고 뛰쳐나가는 지한에 놀라 일어섰다. 어디 가냐는 문장이 완성되는 속도보다 지한의 달리기가 더 빨랐다.

니코틴에 혹사당한 폐는 복도가 다 끝나기도 전부터 고통을 호소했다. 무시하고 내달렸다. 가만히 서있어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에 비하면 숨이 턱에 차는 고통은 고통도 아니었다.

개방된 유리문과 낡아빠진 자판기 두 대를 지나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후에야, 지한은 달리기를 멈추었다. 보였다. 후줄근한 차들 사이에 껴서 혼자만 고고히 번쩍이는 까만 차로 걸어가는 뒷모습. 어울리지 않아서 부르고 싶지도 않았던 동네까지 제 발로 와놓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망치려는. 밉고 원망스러워 때려주고 싶은 남자.

“야!”

재떨이 쓰레기통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다른 빈소의 조문객들이 흠칫해 주위를 살폈다. 규칙적으로 울퉁불퉁한 주차장 바닥에 닿았다 떨어지던 구두 한 쌍이 우뚝 멈춰 섰다. 도경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지한은 손바닥으로 가슴팍 중앙을 퍽 쳤다. 그렇게라도 해야 살가죽 안에서 요동치는 심장과 그 외의 장기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효과는 미미했다. 몇 번을 쳐도 귓가와 골에까지 전해지는 박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뛰려던 건 아니었다. 스스로의 발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지한은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도경의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밝은 실내에선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얼굴이 어두운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피부는 만지기만 해도 흠집이 날 것처럼 깨끗했고 길게 찢어진 눈매엔 날이 서있었다. 강박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머리 모양과 옷차림새, 풍겨나는 향까지 변함이 없었다. 뭘 어쩌다 다쳤는지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손가락만이 눈에 거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한 앞에 무릎 꿇고 빌었던 날 이후 처음 보는 도경은 여전히 귀하고 아름다웠다.

“권도경.”

그렇다면. 절박하게, 지한은 알고 싶었다. 자신이 뭘 어쩌고 싶어서 도경을 쫓아 나왔는지. 진흙탕에 던져놔도 그 귀한 기운은 잃지 않을 남자라서, 죽는 순간까지 지한보다 값진 인간일 것이라서? 그래서 인생 제일 비참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매달리고 싶어졌을까.

“나한테 잘못했다며.”

당연히 벗어나고 싶었다. 고인 구정물이 마르지 않는 밑바닥을 탈출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하지만 소현과 시우의 죽음은 지한에게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가르침을 주었다.

돈, 출신, 지위. 그런 것들은 죽고 나면 다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스포츠카를 몰다 죽든, 맨몸으로 서있다 죽든. 궁전같이 생긴 건물에서 입관하든 무너지게 생긴 건물에서 입관하든 숨이 끊어지면 끝이었다. 30년을 더 살다 죽을지, 3일 뒤에 죽을지 모르는 삶의 단 한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더 높은 계급으로 끌어올려 주지 않아도 좋았다. 값진 것들을 안겨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기다린다며. 오래 기다린다면서……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지한이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아니야.”

무슨 말이든 듣고만 있을 것 같던 도경이 곧바로 반박했다. 목소리는 살짝 떨리는 것 같았으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거짓말 아니야.”

믿고 싶었다. 언제였더라, 가장 마지막으로 맨살을 맞댔던 밤. 평소처럼 지한을 격하게 다루다 말고 대뜸 화나지 않느냐고, 너도 똑같이 해주고 싶지 않으냐고 물어와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더랬다. 화나지 않는다는 답변에 태도를 바꿔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빌다시피 말했던 그 밤의 도경이 설득력을 얻어 돌아왔다.

용서받은 뒤 지한과 계속 함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따위로밖에 사죄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간절히 믿고 싶었다. 형도 날 좋아하잖아. 미친 사람들만 보고 자라서 어떻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는지 몰랐던 거지. 그렇지. 지한은 정말로 믿고 싶었다. 강한 염원은 곧잘 믿음으로 둔갑했다. 그는 믿게 되었다.

당신은 용서받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근데 왜 벌써 가?”

그러면 나를 두고 가지 말아야지.

그의 바람은 어마어마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거나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과거의 실수를 지우는 공상은 애초에 품어지지도 않았다. 그의 바람은 아주 사소하고 현실적이었다.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눈과 코로 온몸의 열기가 몰렸다. 이탈했던 슬픔이 돌고 돌아 마침내 제 경로에 들어섰다. 빈소를 지키는 내내 코 한 번 훌쩍이지 않았던 지한은 시우가 싫어했을 남자의 앞에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죄의 말을 삼키고 또 삼켰다. 시우야, 날 한 번만 용서해줘. 남들 다 몰라도 넌 알잖아, 나 정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겠어.

그만 버려지고 싶어.

묽고 뜨끈한 액체는 손바닥에 닿자마자 차게 식었다. 눈과 코는 터질 듯 뜨거운데 거기서 나온 눈물은 야속하게 차가워졌다. 그 냉정한 속도가 아무리 곱게 화장시켜놔도 체온만은 돌아오지 않는 시체를 연상시켜서, 지한은 식도부터 입안까지 꽉꽉 차오른 슬픔을 밖으로 내보냈다.

작지도 않은 사내새끼가 울고 자빠져있는 꼴을 보기 좋아할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해보려 애써도 한번 터져 나온 소리는 들어가지 않았다. 참을 줄 몰라서 더 고난스럽게 살아온 일생에 걸맞게, 그는 참지 않고 울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는 소리가 마치 악쓰는 어린애처럼 들려 낯설고 귀가 따가웠지만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눈과 뺨에 비벼진 손등이 미끄러워져 더는 아무것도 닦아내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언제 끝날지, 끝나기는 할지 장담할 수 없는 울음을 듣고만 있던 도경이 지한을 끌어당겼다. 긴 팔이 지한의 등과 허리를 품 안에 가뒀다. 지한은 도경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로 젖은 드레스셔츠가 도경의 살에 들러붙었다. 상체를 속박하는 팔 힘이 너무 강해 고통스럽기 직전이었다. 지한은 벗어나지 않았다. 혼자가 된다는 공포로부터 도망칠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았다.

#89

잔이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처럼 김을 뿜어 올렸다. 검은색과 갈색의 경계에 있는 액체는 그 색깔이 일반 커피와 같았으나 카페인이 거의 들어있지 않았다. 카페인을 뺀 커피에선 미묘하게 텁텁한 맛이 났다. 수면제를 늘이지 말고 커피를 줄이라는 당부와 함께 황 원장이 준 것이었다. 절대 도경의 자의로는 들여놓을 일 없을 맛이었다.

도경은 가짜 커피를 마셨다. 덜 식힌 액체에 입천장이 벗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몇 모금을 연달아 마셨다. 식도까지 덴 듯 따가웠다.

시우의 장례식은 당장 무너트리고 재건축해야 할 것처럼 생긴 건물에서 치러졌다. 장지는 그나마 바로 허물어 버리고 싶게 생기지 않은 곳이었다. 양쪽 다 썩 발을 들일 마음이 드는 장소는 아니었다. 하나 몇 날 며칠을 보내도 좋을 만큼 깨끗하고 넓은 곳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소현보다 시우가, 시신이 화장될 때까지 자리를 지킨 친구들의 숫자는 훨씬 더 많았다.

차로 버스를 따라간 도경은 납골당 주차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화장 시설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사람들이 납골당에서 두 배로 우는 광경은 똑똑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그 사이에서 혼자만 멀끔한 낯으로 있는 것은 못 할 짓이었다.

빈소에 나타난 도경에게 쏟아지던 조문객들의 경계심과 호기심 섞인 눈빛을 생각하면 지한을 위해서도 더더욱, 도경은 빠져있는 편이 옳았다. 스물여섯에 난데없이 혼자 상주 노릇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정신이 다 혼미할 텐데 친구들에게 도경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까지 받았다간 지한의 머리가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내가 친 거 아니야.」

회사로 찾아와 사무실 문을 잠근 무영이 대뜸 시우가 차에 치였단 소리를 했을 때, 도경은 그것이 질 나쁜 농담인 줄 알았다. 사람이 차에 치였다. 웃음을 유발하는 단어는 한 개도 들어가 있지 않은 문장이었으나 무영이라면 더한 소리도 농담이랍시고 할 놈이었다. 그런데 무영은 웃는 대신 반응 없이 빤히 보기만 하는 도경에게 뭘 그렇게 쳐다보냐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기가 친 게 아니라면서.

「뭐?」

「앰뷸런스 오는 것까지 보고 나한테 연락 온 거야. 응급실 실려 갔다고.」

그래도 믿을 수가 없어서 한참을 더 쳐다봤다. 깜박일 때를 놓친 눈이 아렸다. 무영은 농담하고 있지 않았다.

도경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오만 가지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오갔다. 시우가 차에 치였다고? 구급차에 실려 갔다고? 무영이 친 게 아니면 누가 쳤다는 말인가, 그의 지시를 받고 시우를 데리러 갔던 사람들이? 뭘 어떻게 하다가? 그럼 도망치려는 시우를 쫓아가다 차로 쳤단 소린가?

「왜. 아니, 누가. 누가 차로 쳤는데?」

「야, 너 내 말 안 믿지 지금.」

무영이 도경의 눈앞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내가 미쳤냐? 그렇게 뻥 뚫린 데서 사람 치게. 내가 한 것도 아니고, 시킨 것도 아니야. 라이선스 딴 지 며칠 안 된 놈이 아빠 차 몰고 나왔다가 사람 죽일지 누가 알았어.」

「죽어?」

「죽은 것 같다던데.」

멍청해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도경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죽었다고? 지한에게 하나뿐인, 절대 어디 가서 헛소리 안 하고 지한의 마음을 돌리는 데 협조하게 만들어 놓겠다고 무영이 약속했던 그 시우가?

두뇌가 가야 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이 길 저 길을 헤맸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김무영 이 새낀 왜 이렇게 차분하지? 이 새끼가 죽인 거 아니야? 아무리 무영이라도 한국에서도 사람을 막 죽였다간 엄청나게 골치 아픈 사태가 벌어진단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정말 무영은 아무 관계도 없는 게 맞을까? 도경의 머릿속에 솟구쳤다 꺼지는 의혹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무영이 책상을 쾅 쳤다.

「너 나 그렇게 그만 쳐다봐. 내가 뭐 걔한테 차도로 내려가서 폰을 찾으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폰?」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는 빛이 무영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넌 알 거 없으니까 됐어.」

「아니, 그럼, 누가 쳤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왜. 내가 거짓말했는지 알아보게?」

짜증을 낸 무영이 덧붙였다.

「장례식장 가서 우지한한테 물어보든가.」

죽은 것 같다던데. 무영은 그 말을 마치 오는 길에 모기 한 마리를 죽였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이 일상적으로 했다. 도경은 최선을 다해 이성을 붙들었다.

무영이 사고에 개입한 것 같진 않았다. 그런 짓까지 할 인간은 못 되어서가 아니라, 시우가 죽어버리면 지한을 설득하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무영이 도경에게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면 시우가 살아있어야 했다. 뜬금없이 시우를 죽여서 무영이 얻을 이득은 없었다. 생각할수록 무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우는 정말로 그냥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시체로 돌아온 소현처럼.

무영이 떠나고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도 도경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무실에 혼자 남아 앉아있었다. 황 원장에게 온 전화 덕분에 저녁 시간을 지나 밤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에서야 그의 사고는 제일 중요한 지점에 닿았다.

지한. 의자와 연필꽂이는 던져도 끝내 도경은 내던지지 못했던 지한이 혼자서 시우의 죽음을 감당하고 있을 것이었다. 혼자서 휴대폰 개통할 줄도 모르는 애가 장례식은 무사히 치를 수 있을까. 비로소 도경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지한을 보러 가야 했다. 그가 혀 깨물고 죽어버리진 않았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수면제 한 통을 먹어도 잠들 수 없었다.

바닥을 빼곡하게 메운 신발들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있는 도경에게, 지한은 꺼지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친구로 보이는 조문객에게 놔두란 한 마디만 던지고 돌아서는 뒷모습에 도경은 더 버티지 않고 물러났다.

끝일까. 끝이 아닐까. 우리에게 나중이 있을까. 없을까. 있다. 없다. 담배 냄새가 빠지지 않는 주차장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 비명 같은 고함이 도경을 붙잡았다. 왜 벌써 가? 빈소에서는 잘 감췄던 표정을 들킨 지한이 온 얼굴로 절규했다. 이제 그만 보자던 그가 도경을 두 발로 따라 나오게 된 연유를, 본능으로 어렴풋이 감지했다. 혼자라서. 시우가 없으면 지한에게는 정말로 집도 가족도 없어서.

현관 밖에서 누군가가 도어록을 해제하고 있었다. 도경은 김이 계속해서 피어나는 잔을 들고 일어섰다. 더 마시지 않을 액체를 개수대 안에 들이부었다. 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빛나던 싱크대 안이 순식간에 더럽혀졌다.

“아들 집에 있었어? 전화를 계속했는데 안 받아서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식탁에 파우치를 내려놓으려던 황 원장이 변명하듯 다급하게 방문 이유를 설명했다. 조용히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는 도경의 행동에 얼른 말을 멈춘 그녀는 아파트 안을 두리번거렸다. 일단 부서진 식기나 가구가 없다는 점에 안심하던 뾰족한 얼굴은 이내 도경 혼자 사는 집에서 조용히 해야 할 이유를 궁금해하는 기색으로 뒤덮였다.

“근데 왜 조용히 하라는 거야. 방에 누가 있어?”

“응.”

조용히 하라니 속닥거리면서도 당최 그래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투로 물었던 황 원장은 도경이 바로 긍정해 버리자 당황스러워했다.

“누가 있다고? 어디?”

도경은 턱으로 침실을 가리켰다. 굳게 닫힌 문을 본 황 원장의 얼굴에 서린 당황함이 더 진해졌다.

“누가 네 방에서…….”

뭘 하기에 우리가 조용히 해야 하느냐고 묻고 싶었을 테지만, 그녀는 용케 뒷말을 삼켰다. 집착 면에선 권 회장을 가뿐히 이겨먹는 황 원장이었지만 도경이 진성 환자답게 발작했던 날 이후론 어떤 쪽으로도 예민한 둘째아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키우는 애.”

키운다는 표현에 들어간 뜻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반이라도 짐작하면 다행일 황 원장은 어설픈 미소를 입에 달고 끄덕였다. 편애하는 자식의 입에서 나온 말을 머릿속에 똑바로 입력시키려고 사력을 다하는 표정이었다.

조금도 이해한 것 같진 않았다. ‘키우는 애’라는 호칭이 본인도 주워듣기는 한 그 예비 배우인지, 만나는 여자인지, 그도 아니면 요즘 것들의 되바라진 성적 취향을 나타내는 은어 중 하나를 뜻하는 말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그 속이 다 전해졌다.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키우는 애의 정체가 뭐든 도경이 원해서 그의 침실에 있는 것이니 더 알아내려 하지 말란 통보였다. 그 말만은 정확하게 알아들은 황 원장이 얼른 동의했다.

“맞아. 맞아, 그 말이 맞아. 도경이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응. 그럼 어, 엄마는 이만 가야겠지? 그, 네 방에서…… 남잔지 여잔지가 자는 것 같으니까?”

노력한다고 다 이루어지진 않았다. 황 원장도 마찬가지였다. 도경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와중에도 기어이 방 안에 있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 들었다. 본성은 그런 것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죽는 날까지 바뀌지 않는 경우가 많은 징그러운 것.

본성은 집요해도 도경을 오래 살게 하고픈 소망이 훨씬 더 강한 엄마인지라, 황 원장은 아들의 침대 위에서 잠들어있는 인물의 정체를 더 캐묻지 않았다. 현관을 열고 나간 그녀는 차마 도경을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돌아서서 당부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새벽에도 상관없으니까 꼭.”

“알았어.”

황 원장이 도경의 뺨에 입 맞추었다. 쪽. 부끄러운 소리가 났지만 예전처럼 부끄러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고작 입술이 살에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를 가지고 부끄러워하기엔 너무 나쁜 생각과 결정, 그리고 행동으로 이루어진 길을 달려왔다. 아마 그는 앞으로 웬만한 것에 부끄러워지지 않을 것이다.

황 원장을 보내고 들어온 도경은 커피 자국이 말라붙기 시작한 싱크대 수도를 틀었다. 덜 마른 자국들이 빠르게 씻겨 내려갔다. 주방을 원상태로 복구시켜놓은 다음엔 손에 세정제를 묻혀 문질렀다. 물줄기를 맞은 비누 거품이 강류에 휩쓸린 낙엽보다 더 빠르게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가락을 만져보았다. 거품이 덜 씻긴 듯 미끄덩했다. 조금만 더. 손가락을 세워 살을 문질렀다. 그래도 미끈거렸다. 더 세게.

그는 정신을 차렸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빨개지고 있었다. 살갗이 벗겨지기 전에 수도를 잠갔다.

침실 앞으로 가 문에 귀를 댔다.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래야 정상이었다. 3일간 울다, 말하다, 졸다 다시 울기를 반복한 지한은 서울로 올라오는 도경의 차 안에서 핏발이 선 눈을 한순간도 오래 감고 있지 못했다. 도움이 될까 싶어 도경의 수면제 반 알만 먹여봤다. 처방 수면제는 지한을 10분도 안 되어 기절시켰다.

「너…… 이시우를 어떻게 설득시킬 생각이었어?」

사무실을 나가려는 무영에게 도경이 물었었다. 도와줄 테니 너도 내가 하란 대로 할 테냔 제안을 받았을 때는 차마 묻지 못했던, 하려면 진작 던졌어야 하는 질문에 무영은 실소를 흘렸다.

「진짜로 알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도경은 대답하지 못했고 무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진짜로…… 알고 싶지 않았다. 무영이 시우를 어떤 방식으로 설득할 예정이었는지는 이미 과도하게 잘 그려지고 있었다.

빅토리야와 그녀의 집안사람들이 말 안 통하는 상대를 어떻게 협박해 원하는 답을 끌어내기로 유명한지 모르지 않았다. 그 소문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과장인진 몰랐다. 계속해서 모르려면 듣지 말아야 했다. 무영의 육성으로 확인받지 않는 한 모든 것은 상상력을 동원한 예측에 불과했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무영이 내미는 손을 잡아버렸던 찰나의 자신을 조금이라도 덜 뚜렷하게 기억하려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 도경은 침대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약 기운에 취해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기절한 상태임에도, 지한은 본인이 잘 때 곧잘 취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쪽으로 돌아누워 이불 안으로 코를 파묻고 웅크린 지한의 속눈썹이 화장품을 잘못 바른 것처럼 뭉쳐 있었다. 손끝으로 건드려보았다. 축축했다. 젖은 것은 속눈썹만이 아니었다. 부은 눈가와 관자놀이에도 눅눅한 기운이 퍼져 있었다.

길게 자란 앞머리가 눈꺼풀을 찌르려고 하기에 살살 쓸어 넘겨주었다. 지한의 눈이 움찔댔다. 잠에서 깬 것은 아니었다. 슬픈 꿈이라도 꾸는지 움찔거린 눈 끝이 새롭게 젖어 들어갔다. 도경은 눈물이 지한의 피부 위에서 영역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손마디로 훔쳐냈다.

지한의 눈에선 그 이상의 새로운 눈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 뒤로도 한동안 도경은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 거실을 점령해 침실까지 흘러들어오는 빛의 색채가 달라지고 뒤이어 명도가 낮아진 후에도 계속해서 쭉. 지한의 피부에 남은 눈물의 흔적이 증발해 하나도 빠짐없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밤의 아귀가 그들을 씹어 삼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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