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Knockout
#77
두꺼운 종이에 인쇄된 메뉴 중 지한이 읽을 수 있는 단어는 없었다. 굵은 글씨체로 쓰인 글자들은 분명 알파벳이었으나 영어가 아니었다. 각 메뉴 아래 달린 설명은 죄다 영어였다. 한국에서 장사하는 레스토랑 메뉴에 한국어가 없었다.
“헤어가 바뀌었나? 아닌데.”
메뉴 고르기를 포기한 지한은 종이를 테이블 위에 눕혔다. 몇 달 만의 만남에도 친한 친구 대하듯 스스럼없는 쇼핑몰 사장이 대뜸 지한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앞머리를 좀. 그래 이렇게. 이런 얼굴은 최대한 많이 까야지.”
다짜고짜 때리는 놈들엔 익숙해도 머리카락을 만지는 여자에겐 면역력이 없었다. 남자였으면 쳐내기라도 했을 텐데 하필 여자였다. 시우의 것보다도 확연히 작은 여자의 손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지한은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굳어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답장한 이유가 뭐예요? 난 나 차단한 줄 알았잖아.”
스튜디오에서 두 번째 촬영을 했던 날 잡지 화보 운운하며 지한을 붙잡으려다 실패한 쇼핑몰 사장은 포기하지 않고 메시지로 재차 의사를 물어봤다. 그것도 두 번이나. 거절을 할지 받아들일지, 거절 메시지로 적절한 말은 뭐며 수락할 땐 뭐라고 해야 하는지. 혼자선 도저히 모르겠어서 미루고 미루다 보니 한여름이 됐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씹은 게 아니라…….”
“어지간한 놈이었으면 나도 같이 차단해 버렸을 거야.”
계약서에 사인해 버렸으니 이제 어디 나가는 사진이든 지한 혼자선 결정할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묵혀둔 메시지에 뻔뻔하게 답장한 이유가 단순히 미안해서는 아니었다. 딱 한 번 본 여자에게까지 그렇게 마음 쓸 만큼 자애로운 인간은 못 됐다.
“아.”
“내가 예쁜 거에 좀 약하거든.”
“예쁜…… 거?”
음식을 먹는 중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뭔가를 씹어 삼키는 중이었다면 분명 사레가 들렸을 발언이다.
“보기 좋은 건 다 예쁜 거지. 우지한 씨 보기 얼마나 좋아. 그럼 예쁜 거야.”
고마워해야 할지, 대놓고 거, 거 하지 말라고 정색을 해야 할지. 일단 정색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쇼핑몰 사장이라지만 이 바닥 저 바닥 아는 사람이 많은 듯한 여자와 언제 어떤 식으로 다시 엮이게 될지 몰랐다. 게다가 오늘은 아쉬운 소리를 하러 나온 자리였다. 사람 대하는 법을 몰라 변변한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던 지한이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했다. 잘 되든 망하든 도경의 이름을 걸고 세상에 나갈 날이 멀지 않았으니까.
“감사합니다.”
미래가 관측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망하고 싶지 않았다. 나쁜 평가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연기에 자신이 없으니 행동거지라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럼 불쌍해서라도 조금은 너그러이 봐주지 않을까.
“감사한 건 됐고, 오늘 여기는 왜 나온 건지나 빨리 말해줘 봐. 나 보고 싶어서는 아닐 건데. 화보 찍을 마음 생겼어요?”
“아. 그. 프로필 사진을 찍어야 되는데.”
타인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대상이 되려면 어떤 부분부터 고쳐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세상 사람 모두를 도경이라 생각하고 대하면 좀 쉬워질지도.
“잘 찍는데 아나, 아시나 해서.”
“프로필 사진? 아는 사람 데뷔해요?”
“아니요. 다른 사람 말고…… 제 거.”
도경의 회사에서 지금까지 연예인 프로필 촬영을 맡기던 스튜디오가 작가 사정으로 당분간 휴업이라 새로운 스튜디오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다른 소속 연예인들이야 다들 데뷔한 지 오래됐으니 프로필 사진을 찍어야 하는 사람은 지한 하나였다.
눈 밑에 그림자를 달고 좋은 곳을 찾아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던 대리의 얼굴에서 곧 과로사할 조짐이 보였다. 싸가지 없을 때가 종종 있긴 해도 싫지는 않은 대리에게 짐이 된 기분이라 신경이 쓰였지만 촬영이나 스튜디오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한 입장이라 닥치고 있었다.
“뭐야. 우지한 씨 데뷔해?”
그러다 생각났다. 자기 스튜디오를 가진 쇼핑몰 사장. 그녀라면 도경의 비서 노릇도 하고 매니저들 관리도 해야 하는 대리보다 더 빨리 좋은 스튜디오를 찾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멀었는데. 올해 안일 거 같긴 해요.”
도경에겐 알리지 않았다. 쇼핑몰 사장이 알맞은 스튜디오를 알 것이란 확신도 없었을뿐더러, 쇼핑몰 촬영에 두 번 다 따라와 준 도경을 이딴 일로까지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사람 하나 만나는 일 정도는.
“완전 잘 생각했다! 그때 왜 자꾸 얼굴을 숨기려고 하나 했더니 다 깊은 뜻이 있었네. 어디? 누구야? 누구랑 같이 일해요?”
첫 만남부터 꾸준히 지한에게 호의적이었을지라도 쇼핑몰 사장은 무영의 친구였다. 잊지 않았다. 그 사실 때문에 연락하기 전에 엄청 고민도 했다. 무영의 귀에 들어가도 책잡힐 일이 아니란 판단하에 오늘 이 자리에 왔다.
“아. 친한…… 친한 사람이 해보라고 해서.”
“무영이가 소개해 줬어요?”
“아니에요.”
그래도 지한이 도경의 회사와 계약했다는 사실을 무영이 알게 되는 것은 싫었다.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쪽 인간들은 알면 뒤에서 자기들끼리 도경과 지한을 주인공으로 더러운 시나리오를 쓰고도 남았다.
“뭐로 데뷔해요. 영화야 드라마야? 무슨 역할인데? 나 벌써 기대돼.”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말하려던 지한은 입을 다물었다. 2층에 새로 올라온 손님을 본 쇼핑몰 사장이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구두 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갑자기 등줄기로 꺼림칙한 기운이 올라왔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쇼핑몰 사장은 아는 사람에게 인사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지한은 가만히만 있으면 됐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아직 홍보 제대로 안 해서 아는 사람 거의 없을 텐데.”
미리 긴장해 있던 몸은 옆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더 뻣뻣해졌다. 아는 목소리였다. 누구더라. 두 눈으로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보고 싶지 않았다.
“우리 스튜디오 이 근처에 있잖아. 무영이가 여기 아는 사람이 연 데라 그래서 와봤지. 스페인 음식 좋아해요?”
“저는 잘 몰라요. 제 동생이 여기 투자했거든요. 걔가 스페인 음식에 관심이 많아가지고…….”
알겠다. 누구인지.
지한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테이블 바로 옆까지 와서도 줄곧 쇼핑몰 사장만 보고 있던 에스더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느라 자연스레 맞은편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봤을 것이라 확신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몇 번을 다시 본들 쇼핑몰 사장의 앞에 앉아있는 지한이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하진 않았다.
“뭐야.”
에스더의 입에서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조금 전까지 쇼핑몰 사장에게 들려주던 사회적인 음성과는 사뭇 달랐다.
“왜 그래요. 무슨 문제 있어?”
“둘이 아는 사이에요? 어떻게?”
“우리 쇼핑몰 모델 해줬었는데. 두 번.”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접은 쇼핑몰 사장이 지한과 에스더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는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인데?”
“저희는…….”
말을 하다 만 에스더가 지한을 다시 보았다. 의도와 감정이 다분한 눈길이었다. 좋지 않은 감정이란 것은 알겠는데 그 감정을 숨기지 않는 의도는 파악이 안 됐다. 소현의 이름만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쇼핑몰 사장이 소현과 아는 사이였기라도 하면.
“……제 친구가 아는 사람이라서 어쩌다 보니까 알게 됐어요.”
그렇진 않았을 것 같다. 소현과 아는 사이였다면 지한을 대하는 태도가 지금처럼 호의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무영이?”
“무영이 말고 다른 친구요.”
“지한 씨 보기보다 발이 넓다? 그때 그 무영이 다른 친구랑도 친한 것 같더니. 누구지 그. 아 그래 도경이.”
에스더가 코웃음 쳤다. 쇼핑몰 사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내가 뭐 이상한 말 했어요?”
“아뇨. 도경이랑 우지한 씨, 친하죠.”
수습 불가능한 정적이 세 사람을 둘러쌌다. 지속되던 정적은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로 깨졌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 굽 소리, 그리고 그보다 둔한 소리. 최소 두 쌍의 발이 내는 소리였다.
“다시는 네 차 타나 봐라.”
에스더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와 같았다. 아는 목소리였다. 여자.
“아까 거기가 주차하기 어렵게 생겼다니까? 너였어도 똑같았어.”
그리고 남자.
“너 지난번에도 남의 차 범퍼 긁어서 오밤중에 경찰 왔다 그러지 않았어?”
“그때는 술 마셔서 그랬고.”
“자랑이야, 정말.”
일행들을 돌아본 에스더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으론 이미 2층에 올라온 일행들을 내려가게 하기 부족했다. 먼저 걸음을 멈춘 쪽은 여자였다.
“어?”
별장에서 봤고, 클럽에서도 봤던 여자가 지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곤 에스더와 비슷한 표정으로 뒤에 선 남자에게 눈짓했다.
“뭐야 이건.”
알아보고 싶지 않은, 그렇지만 알아볼 수밖에 없어 더 싫은 얼굴이었다. 도경을 오토바이에 태워 도망친 날 이후 더는 이름을 들을 일 없던 그 새끼였다. 지한의 뺨을 세 대나 때렸던 술집 진상. 도경에겐 별소릴 다 들어도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하다 지한에게는 쉽게 주먹을 날렸던 성호.
“이리 와. 우리 일 층에서 먹자.”
스튜디오가 있는 골목과 술집 골목이 가깝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자친구들과 호스티스가 있는 가게에 가려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한날 한 시간에 같은 식당에서 마주치다니 재수가 없어도 이리 없기 어려웠다. 성호에게 멱살을 잡혀 가게 밖으로 끌려나왔던 날 무영과 이안도 근처에 와 있다 우연히 끼어들었었다. 도경이 점심을 사줬던 카페도 그러고 보면 스튜디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앞으로 웬만하면 이 동네엔 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 봐도 소용없었다. 오늘은 이미 마주쳐 버렸다.
“야. 잠깐. 저거.”
“이성호. 그냥 오라고.”
다음에 또 뵐게요! 꾸며낸 목소리로 쇼핑몰 사장에게 인사한 에스더가 친구들을 계단 쪽으로 떠밀었다. 끝까지 진상 부릴 줄 알았던 성호는 두 여자의 등쌀에 밀려 지한에게 더 말을 걸지 못하고 내려갔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 쇼핑몰 사장이 어이없어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뭐예요, 저 남자는? 부모의 원수야?”
“아니……. 별거 아니에요.”
식은땀이 났다. 차라리 부모의 원수였으면 덜 더러운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부모가 없으니 부모의 원수와 스스로의 원수 중 누굴 더 죽이고 싶겠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쇼핑몰 사장이 주문한 메뉴들은 도경이 시켜줬던 이태리 요리들과 비슷했다. 누렇고 붉었으며 좋은 냄새가 났다. 뭐가 더 맛있는지 점수를 매기지는 못했다. 맛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혼자서 뭘 하겠다고. 역시 지한이 홀로 내리는 결정은 옳은 법이 없었다. 섣부르고 멍청해 도움이 되기는커녕 일을 그르치기만 했다. 그러니 시우가 이 나이 되도록 지한을 혼자 두기 불안해하는 것이었다.
반도 못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서는 지한을 쇼핑몰 사장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으나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1층에 있는 화장실 문을 열 때까지 지한은 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에스더와 성호가 어디 앉아있는지 보지 않기 위해서.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화장실에 들어온 지한은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휴대폰을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이어폰으로 통화 중이던 남자가 거울로 지한을 발견했다. 그가 성호란 것을 알았을 땐 다시 돌아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문고리도 잡았다. 그런데 문득 왜 그래야 하냔 반문이 들었다. 지한이 왜. 먼저 때려놓고 적반하장으로 나온 건 성호인데.
“잠깐 끊어봐. 어. 이따 얘기해줄게.”
전화를 끊은 성호가 이어폰을 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으론 거울 속 지한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나가버릴 수 있도록, 지한은 문고리를 꽉 잡았다. 그의 손이 문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본 성호가 허, 하고 웃었다. 당연하게도 웃겨서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권도경이 소개시켜 줬냐? 저 여자가 네 다음 지갑이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하는 말이었다. 지한은 차분해지려 숨을 골랐다. 도경이 덜 참고 살아야 하는 입장이라면 지한은 더 참을 줄 알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성호에게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 망설인 자신이 한심했다. 무시하고 나가버리면 쫓아와서 다른 사람들이 다 쳐다볼 만큼 크게 헛소리를 할까 봐 걱정되기 시작하는 속내는 한심을 넘어서 비참했다.
물을 튼 성호가 적신 손을 머리로 가져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너 같은 것도 먹고는 살아야지. 언제까지 술집 웨이터나 하고 있을 거야.”
어차피 성호는 나가기 직전이었다. 한두 마디만 더 참고 있으면. 그러면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정신을 차린 뒤 2층으로 올라가 그만 나가자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첫 남자랑 마지막 남자랑 죽이 잘 맞나 봐.”
지한은 거울을 쳐다보았다. 머리를 이리저리 넘기고 있는 성호는 2층에서 지한을 처음 봤을 때처럼 흥분하려는 기색이 아니었다. 지극히 태연하고 일상적이었다. 성호가 말한 문장에서 지한이 모르는 단어는 없었다. 다 아는 단어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긴 장소현이 보통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걔 상대하느라 둘 다 말 못 할 사정이 많았을 거야? 죽은 애 씹으면서 힐링하고. 좋네.”
문고리에 닿아 있는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냉방이 가동되고 있는 실내 온도를 무시한 지한의 몸에서 땀이 조금씩 나고 있었다.
“방금…….”
“도경이 말 잘 들어라. 걔 없으면 넌 내가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못 걸어 다니게 만들어 준다.”
휴대폰을 챙겨 세면대에서 물러난 성호가 문 앞에 서있는 지한에게 턱짓했다. 남의 몸짓을 해석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지한은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아 나 이 새끼가 진짜, 하고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성호가 지한의 어깨를 잡아 확 밀쳤다. 평소 같으면 버티고도 남았을 힘에 몸이 허무하게 밀려났다. 문이 열리며 성호가 화장실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지한은 텅 빈 세면대를, 건조된 꽃이 잔뜩 꽂혀있는 병을, 그 말곤 아무도 비추지 않는 거울을 하염없이 보며 서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품어 마땅할 의문이 그의 안에서 서서히 완성되었다.
저 새끼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지한은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창가를 등지고 앉은 성호는 지한과 눈이 마주치자 턱을 들며 몸을 뒤로 기댔다. 와볼 테면 와보란 태도였다.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널찍하게 떨어져있는 테이블들 사이를 헤치고 창가 자리로 갔다.
“화장실에서 나한테 뭐라 그런 거야.”
“아 깜짝이야 세상에.”
발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소스라치게 놀란 에스더가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이성호. 너 또 뭔 시비를 건 거야. 내가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라 그랬잖아.”
“뭔 시비를 걸어. 야. 내가 너한테 언제 시비 걸었어?”
성호의 옆에 앉은 여자가 휴대폰으로 타자를 치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져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숱한 얼굴들이 지한의 눈앞에 떠올랐다. 지한을 싫어한다던 사람들. 소현의 친구들.
“화장실에서 나한테 한 말 다시 해보라고.”
이름을 아는 얼굴들은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 이안. 무영. 눈앞의 에스더. 성호.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네. 어디서 반말을 찍찍 싸고 있어, 와인 잔으로 처맞을라고.”
“야! 여기서 이러지 말라고 내가 아까부터―.”
지한은 에스더 앞에 놓인 와인글라스 다리를 잡아 앞으로 가지고 왔다. 이쪽도 얼마든지 와인 잔으로 남을 때릴 수 있단 경고였다. 에스더가 영어로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대답만 해주면 꺼질 거니까,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라고.”
“이 새끼 진짜 해보자는 거야? 야 너희 봤지. 난 가만히 있었는데 이 새끼가 먼저 지랄하는 거.”
“도경이 형이랑 내가.”
화장실에서 들었던 말을, 지한은 차마 끝까지 옮기지 못했다. 스무 번 서른 번 되감기해도 모를 말이라 그랬다. 첫 남자와 마지막 남자.
“뭐. 내가 못할 말을 했어, 없는 말을 했어? 마지막이라고 해서 기분 나빴다 이거냐? 장소현 죽기 전까지 만나던 게 너니까 마지막 남자 맞잖아!”
“우지한 씨, 얘랑 말 그만 섞고 2층으로 올라가요. 여기 나 아는 사람이 하는 데라 싸움 나면 안 돼요. 이성호 너도 진짜 그만해. 창피하게 왜 이래?”
“내가 마지막인 건. 그건. 알겠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도경이 형이 왜.”
모르겠어.
가장 먼저 입을 닥친 사람은 에스더였다. 그다음은 그녀와 붙어 다니는 여자가, 그리고 마지막엔 놀랍게도 성호까지 조용해졌다. 그들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째서 지한보다 그들이 미궁 속에 빠진 사람들 같은 낯빛이 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나 확인하러 온 웨이터를 돌려보낸 에스더가 지한의 손에서 와인 잔을 빼앗아갔다.
“저기요. 기분 나쁠 수는 있어도 성호 말대로 없는 소린 아닌데 왜 이래요. 중학교 때부터 만났으니까 도경이가 소현이 첫 남자 맞잖아요. 초등학교 때 다른 남자 만났을까 봐?”
지한은 에스더의 입에서 나온 문장을 분해했다. 다 아는 단어들을 해석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차근차근, 하나하나씩. 소현과 도경이. 중학교 때부터. 만났다. 만났다…….
“그리고 어차피 우지한 씨는 사귀던 여자 전 남자하고도 잘만 지내면서 왜 지금 그런 걸 따져요?”
에스더의 음성이 격양되었다. 말할수록 지한에겐 그 무엇도 따질 자격이 없다고 여겨진단 듯이.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기다렸다. 누구 하나, 성호라도 제발 이제까지 한 말은 다 지한을 도발하려 지껄여본 거짓말이었다고 해주기를. 그러나 아무도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았다. 바람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자신이 뭘 바라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26년 인생에 걸맞은 결과였다.
돌아서지 않는 지한을 보는 눈들에 깃든 기운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혹시. 설마. 말도 안 돼. 진짜?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이 지한을 조준했다.
너, 정말 몰랐어?
***
평소 주량에 비하면 별것 아닌 양의 와인을 마시고 비틀거리던 소현이 그날 취한 척 연기를 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울적해 빨리 취해버렸던 것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몰랐다. 지한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녀를 부축해 침대로 옮기는 것 정도였다.
「내가 왜 널 찍었는지 알아?」
찍었다. 말인즉슨 지한을 콕 집어 원했다는 뜻이었다. 의외였다. 소현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망설이는 지한에게 그녀를 만나달란 남자들은 줄을 섰으니 병신처럼 굴 거면 관두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겠어.」
「그 새끼한테 보여주려고.」
「그 새끼?」
「너같이 생긴 남잘 옆에 달고 있으면 암만 그 새끼라도 불안해하지 않고는 못 배길 줄 알았지…….」
지한의 소매를 잡고 늘어진 손이 부들거렸다. 침대엔 마땅히 집어 던질 물건이 없었다. 뺨이라도 맞을 각오로 눈을 감은 지한에게 날아든 것은 손이 아니라 섬뜩한 소리였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곡하는 것처럼 음산하게 흐느끼던 소현은 그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주인의 손에 의해 잡아 뜯길 때마다 여자보단 남자에게서 날 법한, 그렇지만 어디서 맡아본 기억은 없는 독특하고 무거운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나 말고 누가 널 이해해줄 거야, 어? 아무리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는 이불을 구겨 던지며 소현은 보이지 않는 상대를 저주했다. 이 사지를 찢어버릴 건방진 새끼야, 세상에 나 말고 또 누가 너를 이해해줄 것 같아! 감히 네가 나를 안 붙잡아, 네가 뭔데 나를 무시해, 이 씨발 내가 널 죽여 버릴 거야.
베개부터 시트까지 몸에 닿는 것은 족족 망가뜨린 그녀가 말리지도 못하고 앉아서 지켜보던 지한의 부서트릴 것처럼 꽉 쥐었다. 그들의 손은 그 언제보다 빈틈없이 붙어 있었지만 소현은 지한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울다가 웃었다. 아니야. 그래도 우리한텐 우리밖에 없어. 도경아, 네가 사랑하는 건 나밖에 없지?
「맞아, 누나.」
지한은 깨끗한 피부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주고 상처 없이 하얀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누나 말이 맞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실존하는 인물이기는 한지, 소현과 어떤 관계에 놓인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되는 대로 지껄였다.
곧 죽을 듯 발작하는 그녀를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뭐든 말했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건 누나밖에 없을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
***
도경아, 네가 사랑하는 건 나밖에 없지?
***
어떻게 그곳을 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지한을 향한 눈빛과 표정들뿐이었다. 굳어버린 그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불편해하는 사람들. 가봐야겠다는 그를 말리는 대신 턱만 끄덕이던 쇼핑몰 사장. 놀란 얼굴.
눈을 깜박이고 코와 입으로 숨을 마셨다 뱉었다. 살아있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행위가 이어졌지만 감각은 없었다. 누군가가 무릎을 치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깨달았다. 지하철역 안 벤치에 앉은 그의 다리가, 손이,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살아있어. 그는 손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는 흉이 군데군데 난 손이 파들파들 진동했다. 살아 있구나. 그렇다면 뭐라도 해야 했다. 휴대폰을 꺼냈다.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손 때문에 무술감독의 연락처를 찾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어 지한아 웬일이야.
“물어볼 게 있어요.”
―어디 아프냐? 목소리가 왜 그래?
제 목소리가 평소와 어떻게 다른지, 지한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도경의 회사에 소속된 연예인 중 유일한 배우의 이름을 말했다. 지한을 출연시켜주는 조건으로 방송국에서 모셔간 주연. 연예계 종사자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을 들은 감독이 당황스러워했다.
갑자기 그 사람은 왜? 지한은 침을 삼켰다. 형님, 혹시, 저 대신 들어간 게, 걔예요? 더듬더듬 힘겹게 소리를 쥐어 짜낸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나 말고 누가 너한테 그새 흘렸냐?
지한은 다시 눈을 깜박였다. 숨을 쉬었다. 아직도 그는 살아 있었다.
축축한 손바닥이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액정에 길게 금이 갔다. 언제 종료 버튼을 눌렀는지 통화가 끝나 있었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옅어질 뿐이었다. 버림받은 기억들은 죽은 것처럼 희미하게 떠돌다 충격으로 갈라진 사고의 틈을 놓치지 않고 돌아왔다. 소현이 찢어버리고 싶어 했던 남자의 이름 세 글자가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다 그녀의 친구들 앞에서 불현듯 어제 들은 이야기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나버린 것처럼.
도경에게서 풍기던 향을 기억했다. 언젠가 맡아본 적 있는데 언제 누구에게서 났던 향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던 그 냄새. 얼마 안 가 바뀌어버려 잊고 지냈던, 그러다 도경의 욕실에서 다시 마주쳤던 그 냄새. 소현에게서 풍기기엔 너무 무거웠던 향.
지한은 다른 날들도 기억했다. 지한을 처음 조수석에 태웠던 날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보며 여자가 준 옷이냐며 잘 모르는 사이에는 과감할 수도 있는 추측을 쉽게 하던 도경. 음악을 제일 못했지만 A를 받았다던 도경. 소현의 차에서 항상 재생되던 클래식 음악. 대학에서 영화와 음악을 전공했다던 소현.
소현의 동생을 무너지게 만들었던 장례식장에서의 도경. 도경이 왔다며 부산스러워졌던 조문객들. 도경이 싫어한다며 이안이 치워버렸던 디저트 가게의 쇼핑백. 너희 둘이 진짜 같이 있냐며 혀를 내둘렀던 성호. 두 번째 만남까지도 웃으며 지한을 대하다 세 번째 마주쳤을 땐 묘하게 차가워졌던 에스더. 지한이 알려주기도 전에 소현이 때리고 물건을 던졌냐고 물어보던 도경.
그 많은 날들이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어떻게 몰랐지. 어떻게 여태 그걸 모를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이상한 구석이 많았는데…….
눈이 멀었었다.
지한은 셔츠 앞섶을 잡았다. 숨이 가빠졌다. 그렇지만, 그래도 끝까지 작정하고 지한을 속인 건 아니지 않을까? 제 여자와 놀아난 지한이 꼴 보기 싫었다면, 그래서 소현이 선물한 자리를 빼앗아갔으면 그대로 영영 눈앞에 보이지 않게 했어야 되는 것이었다.
키스하고, 섹스하고, 회사로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왜. 뭐 때문에 도경은 마치 자신이 지한을 원하고, 위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혹시, 너무 미워서?
뒤늦게 정체를 드러낸 날들이 비로소 설득력을 갖췄다. 그래. 어쩐지. 도경이 지한에게 욕망을 느끼고 더 나아가선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아 하루에도 몇 번이나 꿈속을 걷는 기분에 빠졌던 차다. 그러게 처음부터 본능이 경고하지 않았던가. 구질구질한 인생에 도경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우연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한은 숨 쉬는 것도 잊고 깨달았다. 흥분하기만 하면 인격이 바뀐 것처럼 거칠어지던 모습도 다, 차마 지한을 직접 죽여버릴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호흡하려는 본능마저 미약해졌다.
미워서. 괴롭히고 싶어서. 머리를 누르고 목을 졸라도 좋다고 하는 지한을 보는 것이 통쾌해서. 도경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지한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나 사실 너 안 좋아해. 넌 나한테 놀아난 거야. 그 말을 들은 지한이 어떻게 나올지 보고 싶어서.
그래서 계속 만난 거야?
시야가 이지러졌다. 개찰구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이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은 이내 비 오는 날의 창가처럼 젖어 들어갔다.
세상이 부식된다. 비보다 훨씬 더 오염된 고통으로.
#78
한 시간 전까지 직원들로 바글거렸던 사무실이 텅 비었다. 남은 사람은 야근하는 도경과 대리뿐이었다.
직원들이 사용하는 공간과 분리된 이사실은 고요했다. 컴퓨터 모니터를 채우고 있는 페이지는 미국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온 영문 제안서였다. 시선이 계속 한 문단에 머무른 지도 꽤 되었다.
도경은 키보드 옆에 놔둔 대본 커버를 매만졌다. 드라마 작가에게서 새로 받은 대본이었다. 아직 공식 대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장 최근에 만진 버전이었다. 마음에 든단 말이 진심이었는지 처음 받았던 버전보다 지한의 대사가 확연히 늘어나 있었다.
지한이 계약서에 사인하러 방문했던 날 박 실장과 짧게 마주쳤단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히는 실장이 담당하는 배우와 마주친 것이고 매니저인 실장은 옆에 서있었을 뿐이었겠지만. 사진으로나마 본 적 있는 지한을 기억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성질 더러운 담당 연예인을 신경 쓰느라 여유가 없었는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대리에 의하면 별일은 없었다고 한다.
무사히 넘어가 다행이었으나 언제까지고 실장의 금붕어 같은 기억력에 묻어가는 요행을 바랄 수는 없었다. 더는 미룰 시간이 없었다.
지한에게 다 털어놓지 않겠단 마음엔 변화가 없었다. 진실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 진실이란 것이 도경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기만 하고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한 계획이라면 그것은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결단이 필요한 부분은 언제, 어디서, 어디까지 지한에게 말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서두는 생각해두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랬어. 마른 가지 하나만 내놓은 채 이것이 나무라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가지도 나무의 일부이기는 했으니, 거짓은 아니었다. 접근한 이유를 밝힌 다음엔 도경과 소현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연인이었으나 연인이 아니었음을. 서로를 필요로 했으나 사랑하지 않았음을. 그런 다음엔.
항상 막혔다. 매일 밤 써 내려간 시나리오는 아침이 되면 번번이 무용지물이 되어 썩었다. 전날 밤엔 그럴싸했던 서두와 설명이 오물처럼 쓸모없고 해롭게 느껴졌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지한이 데뷔해 유명해지고 나서. 자기 힘으로 큰돈을 만져보고, 그만큼 도경을 지금보다 더 유일무이한 의지의 대상으로 느끼게 되고 나서였으면 이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러나 그 아쉬움마저 수시로 변했다. 지한이 도경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배신감도 깊어질 것 같았다가, 그 반대일 것 같았다가 오락가락하는 머릿속을 도경 자신도 종잡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점은 지한이 촬영에 들어가기 전이란 것이었다. 드라마고 뭐고 못 하겠다며 도망칠 시 수습은 도경의 몫이었다. 피디, 작가부터 재수 없으면 더 윗선에까지 빌러 다녀야 할 가능성을 점치다 보면 또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지한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면서 일 걱정을 하는 스스로가 너무 안일한 것 같아서였다.
희한하게도 도경을 건드리고 지나간 경우의 수 중 지한이 떠나버리는 가정은 없었다. 불안하기야 했다. 눈앞이 캄캄해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성을 다잡고 가늠하면 지한이 울고, 화내고, 욕하고 심지어는 도경을 때릴지라도 결국 떠나진 않을 거란 믿음이 기지개를 켰다. 그간 지한이 보여준 태도 덕이 적지 않았다. 도경의 편을 들고, 그를 칭찬하고, 우러러보며 감당하는 지한은, 어쩔 땐 충성스럽기까지 했다.
도경이 불안함을 가지는 부분은 소현과의 역사 그 자체와 지한을 상대로 세웠던 계획이었다. 그를 올라올 수 없는 곳으로 떨어트리고 싶어 했던. 그 계획대로였다면 진실을 알게 된 지한은 도경을 두 번 다시 안 본다고 나올 뿐 아니라 그대로 차도에 뛰어들겠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도경은 그 어려운 판을 멋들어지게 이긴 자신을 기특해했겠고. 그때야 숨김없이 다 말할 작정이었으니까. 나를 좋아한다고? 난 아닌데. 이거 안타까워서 어쩌지.
하지만 이제 지한이 다 알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괜찮지 않다면.
또, 막혔다. 생각이. 사고가. 머리가.
대리가 밖에서 노크했다. 도경은 대본을 멀찍이 밀며 들어오라고 말했다.
“이사님. 우지한 씨가 지금 저 회사냐고 물어봐서 그렇다 했더니 올라온다는데요.”
도경은 휴대폰 액정을 건드렸다. 일곱 시 반. 메신저 목록에 지한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혹시 몰라 부재중 표시가 떠있지 않은 통화 목록을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지한은 도경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대리님한테요?”
“네. 이사님도 회사에 계시는지 물어봤어요.”
지한이 집 앞으로 찾아온 적은 있어도 회사로 언질 없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집 앞에 왔을 때도 연락은 했었다. 알겠다고 했다. 대리가 나갔다.
도경은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알파벳들이 가득했다. 여전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후 대리가 문으로 걸어가는 발소리가 났다. 문 열리는 소리와 새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문이 열렸다. 지한이 이사실로 들어왔다. 인사하려던 도경은 반도 못 벌어진 입을 도로 다물었다. 닫힌 문 앞에서 더 다가오지 않고 멈춰선 지한이 도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바닥만 보던 지한이 작게 말했다.
“대리님 좀 나가라고 해요.”
원래도 갈라진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쉬어있었다. 인터넷 창을 닫고 일어난 도경은 지한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눈을 내리깐 지한의 눈가가, 그리고 뺨이 붉었다.
울었다.
지한이, 울었다. 울고 나서 도경을 찾아왔다.
울어? 왜?
도경은 휴대폰을 들었다. 두 번이나 지문 인식에 실패했다. 세 번의 시도 만에 배경화면이 떴다. 메신저로 들어간 그는 뭘 하려고 휴대폰을 들었는지 재깍 기억해내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는 지한을 보고서야 정지되었던 사고가 느슨히 풀렸다. 인사하러 오지 말고 그냥 지금 퇴근하라는 메시지에 바로 알겠다는 답이 왔다. 사무실 문을 열어주며 지한의 얼굴을 봤을 그녀도 눈치챘을 것이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얼마 안 가 사무실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단둘이 남았다. 지한은 문가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도경을 쳐다보거나 말을 걸지도 않았다. 생각을 해야 했다. 도경은 다시금 굳어가는 머리를 애써 굴러가게 하려고 애썼다. 지한이 오늘 뭘 한다고 했더라. 들은 바가 없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지한이 도경을 보고 있었다. 문고리가 지푸라기라도 되는 것처럼 붙잡고서. 정면으로 보니 눈과 뺨의 붓기가 더 잘 보였다. 도경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감은 시치미를 떼지 못했다. 주인이 부정하고 싶은 소식에도 지체 없이 알림을 보냈다.
설마.
“형.”
듣기만 해도 목구멍을 따갑게 하는 소리를 낸 지한이 침을 삼켰다. 침을 삼킨 그는 아랫입술을 이로 씹으며 주저했다. 망설임에도 소리가 있다면 지금 지한에게선 엄청난 굉음이 나고 있었을 것이다.
“형…… 소현이 누나랑 무슨 사이였어요?”
도경은 입을 벌렸다. 대답을 하려고. 그런데 막상 입이 벌어지고 나니 자신이 이미 대답을 한 것 같단 착각이 들었다. 지한의 질문에 답을 했던가. 안 했던가. 안 했다. 안 한 것 같았다. 소현과의 관계를 물었으니 답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소현이의.
도경은 입을 꽉 다물었다. 굳었던 머리가 이제는 거꾸로 팽팽 돌아 어지러웠다. 어디서 무슨 소릴 들었지. 박 실장? 그렇지만 그는 지한이 누구인지 기억도 못 했다. 기억한다 해도 도경이 지한의 역할을 뺏었다는 것까지밖에 모르는 인간이 소현을 들먹거렸을 리 없다. 대리는 소현의 존재만 알지 이름도 몰랐다. 방송국 관계자들도 당연히 몰랐다. 그럼 누구야. 누가. 이안, 이안인가.
“형이…… 그 영화감독한테 나 쓰지 말라고 했어요?”
감독. 영화감독은 소현과 지한의 관계를 알았다. 도경과 소현의 관계도 아마, 알았다. 그렇다면 그 감독이? 뭐 때문에? 누가 지한에게 도경과 소현에 대해 떠들었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어디까지 알고 왔는지.
도경의 침묵을 어찌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는 지한은 가슴을 들썩이는 것 같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책상으로 다가왔다. 지한의 손이 손님용 의자 등받이를 콱 잡았다. 의자가 들렸다.
쾅.
벽에 날아가 꽂힌 의자가 용케 부서지지 않고 쓰러졌다.
“내 말이, 안 들려?”
도경은 입술을 뗐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뇌에서 명령한 것처럼 입이 열렸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한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지한에게 어떻게 서두를 떼려고 했었는지, 어떻게 변명하고 설득하려고 했는지 하는 것들이 싹 날아갔다. 그의 머릿속은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았다. 색조차 없이 실종되었다. 통째로.
“설명할게. 내가 다…….”
“아니.”
지한은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말하는 도경을 중단시켰다. 가까이서 본 지한의 안색은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처럼 나빴다. 피부 곳곳은 달아올라 있고, 눈가는 아픈 모양새로 부어있었다.
“물어본 것부터 대답해. 소현이 누나랑 무슨 사이였냐고.”
그러나 지한의 얼굴에서 가장 죽을 때가 다 된 것처럼 보이는 부위는 바로 눈이었다.
“형이 소현이 누나 남자였어?”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지한은 도경의 침묵을 알아들었다. 의자에 이어 연필꽂이가 날아갔다. 잉크와 외관의 색이 일치하는 펜들이 허공에 흩뿌려져 블라인드와 문을 차례로 때리고 추락했다.
“아니면 아니다, 맞으면 맞다 말을 하라고!”
“맞아.”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구실을 못 할 것 같던 입이 마침내 살아났다. 의자와 연필꽂이를 던진 지한이 모니터도 뽑아 던질까 봐서가 아니었다. 도경에게 주먹을 날릴까 봐서도 아니었다.
“맞다고?”
더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분노는 쌓이면 슬픔이 되고 슬픔은 삶에 남은 미련을 강탈해갔다. 이미 눈물을 쏟고 온 지한을 감정적으로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지한에게서 더는 빼앗아오는 것을 만들지 않기 위해, 도경은 해가 넘어오고 계절이 두 번 바뀔 때까지 지켰던 비밀을 인정했다.
“둘이…… 진짜 사귀는 사이었다고?”
“우린 그런, 남들이 생각하는.”
“난 형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지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 연필꽂이를 던진 사람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 느껴질 만큼 목소리에 힘이 쭉 빠져있었다.
“난, 누나한테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아는 줄 알았어.”
입에서 뭔 소리가 나가는지, 그 소리를 함으로써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걔가 다 말한 줄 알았어. 너희 둘이 날.”
이때까지 가져본 적 없는 의문이 마구잡이로 나가던 말문을 틀어막았다. 소현과 지한이 도경을 뭐 어떻게 얘기했을 거라고 생각해 격분했던 것인지, 우습게도 모르겠다. 자존심이 상했었다는 것만 알겠다.
도경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소현이 그와 이어진 여자임을 알고 있었는데 거기 다른 놈이 끼어들었다는 게 차라리 죽고 싶어질 정도로 괴로웠었다. 친구들이 얼마나 더 그를 우습게 보고 무시할까 무서웠다.
“일부러…… 일부러 그런 줄.”
그게 얼마나 가당찮은 자존심이었는지 이제는 알았다. 소현을 사랑하지 않은 도경에겐 그녀가 그룹 손자를 만나든 고아를 만나든 그들에게 점수를 매기고 기준에 미달한다고 분통할 자격이 없었다. 이제야 알았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 둘이 뭐 했는지 그렇게 궁금하면 물어보지 그랬어. 그럼 그 고생 안 해도 내가 그냥 알려줬을 건데.”
지한의 가슴팍에 이어 어깨가 들썩거렸다. 군데군데만 남아있던 붉은 기가 그의 얼굴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뭐 했는지 알려줘? 나 누나한테 돈 받았어. 자꾸 아무 때나 불러내고 못 나간다 그러면 화내서, 소리 질러서 내가, 이러면 어떻게 일하냐고 했더니 돈 줬어. 현금으로.”
명치가 욱신거렸다. 돈. 이 지경까지 와서도 도경은 지한을 이해한다고 할 자신이 없었다. 돈 몇 푼 벌겠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가 발작하는 꼴을 견디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돈의 무게는 알 것 같았다. 그것이 대변하는 가치도 알았다.
지한이 지금처럼 가난하지 않았어도, 소현이 평소 잘 데리고 다니던 놈들처럼 머리가 비었든 말든 돈 하나는 억 소리 나게 많았어도 도경이 왜 하필 마지막에 제일 질 떨어지는 걸 골랐냐며 시체에 대고 이를 갈 일이 생겼을까.
없었을 것이다.
“내가 말했잖아. 누나랑은, 형이랑 한 거 안 했다고. 다 말해줬잖아. 우리 아무것도 안 했어. 누나가 던지면 맞아줬어. 누나가 발작하면 안 다치게 잡아줬어. 울면서 욕하면 들어주고! 웃어도 들어주고!”
명치에 이어 쇄골 아래, 어느 장기가 들어있는지 모를 피부 안쪽이 욱신거렸다.
“그럼, 내가 고아 새낀 것도 알아?”
내장이 한꺼번에 요동치듯 속이 덜컹거렸다. 그것만은 아니라고 거짓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지한의 입에서 고아란 단어가 나와버렸다. 도경이 모르고 있었다고 한들 지한이 자처해서 알려준 꼴이 되었다. 도경은 고개를 숙였다. 차마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알아.”
지한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도경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너 괜찮,”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걸 언제 말해야 되나 걱정하느라, 계약서에, 사인도 했는데. 빨리 말해줘야 되는데, 말 못 하겠어서. 내가, 얼마나.”
문장을 하나도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하고 더듬거리던 지한이 주저앉았다. 도경은 눈을 감지 않으려 노력했다. 눈꺼풀이 내려가는 순간 눈에서 뭔가가 쏟아져 나오리란 강한 예감이 들었다.
“네 친구들이 날 얼마나…… 아.”
지한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펴고 벽을 짚었다. 헐떡이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었다. 도경은 지한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지한아.”
“김무영도…… 다 알고 있었겠네. 이안 그 새끼도, 알고…….”
거짓말해. 도경은 절박하게 스스로를 다그쳤다. 빨리. 걔넨 그런 거 절대 모른다고. 나만 알고 있었다고.
“아니야, 걔넨 몰라. 걔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겨우 허리까지 펴고 일어선 지한이 잇새로 소리를 쥐어 짜내듯 띄엄띄엄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은 왜 시켰어. 데뷔시키고 나서. 그러고 나서 뭘 어떻게 하려고.”
“아무것도.”
너랑 같이 있으려고 그랬어.
“아무것도 할 생각 없었어…… 나는 그냥.”
“나랑 왜 키스했어. 왜 잤어.”
네가 좋아서 그랬어.
“나한테 왜 왔어.”
통째로 사라졌던 사고가 조금이나마 색을 되찾았다. 뚜렷하거나 맑지 못한 색이었다. 도경을 이루는 것 중 무엇 하나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입을 뗐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려고.”
진실이었다. 도경은 지한이 궁금했었다. 가진 것은 쥐뿔도 없는 거지새끼의 무엇을 보고 소현이 적절한 미끼라고 여겼으며 그 거지새끼는 무슨 자신감으로 죽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떳떳하게 살아있는지.
“소현이랑 네가 날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어. 사람들이 날 우습게 볼 거라고, 아니, 항상 우습게 봤으니까 이젠 상종도 안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얼마나 못났으면…… 날 두고, 바람을 피웠을까, 그렇게 비웃을까 봐.”
그것 역시 진실이었다. 소현과 지한의 소문은 도경을 바보가 된 기분에 빠트렸다. 차라리 정신병원에 갇혀버리고 싶어지는 그 기분.
“나 같은 새끼랑.”
그랬었다. 지한을 알기 전의 도경은.
“못 배운 고아 새끼랑 바람났다고 비웃을까 봐?”
그것마저, 진실이었다.
“아니야. 나는 너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형이나 형 친구들처럼, 미국에서 대학 나오고, 회사에서 한 자리 해먹는 인간이었어도. 그래도 그렇게 화났을 거 같아?”
“그래.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넌 그런 사람 아니었어, 그래서.”
“왜 말 안 해줬어?”
지한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은 곧 터질 것처럼 붉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말을 했어야지. 솔직하게 말하고 나서 꺼졌어야지. 왜 계속 나한테 붙어서 나를, 나를 가지고 놀아.”
“가지고 논 거 아니야.”
“가지고 논 게 아니면 뭔데.”
좋아해서 그런 거라니까. 그 쉬운 한 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상상에서도 곧잘 가로막히던 상황은 현실이 닥치자 상상에서보다 훨씬 더 무력해졌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도경에겐 보잘것없다 여겨졌던 자리를 빼앗은 것도, 거짓말한 것도 다.
“내가, 정신 못 차리고 니네 집 개새끼처럼 너 쫓아다니는 거, 그거 보면서 재미있었어? 그런 다음에 뭐 어떻게 하려고 그랬는데. 어?”
괜찮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재밌었냐고 씨발 새끼야…….”
지한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툭. 사무실 바닥에 작은 원이 맺혔다. 툭, 툭 지한의 눈에서 나온 방울들은 곧 한데 섞여 형태를 잃어버렸다.
울지 마. 그리 말해주려, 말할 수 없다면 눈물을 닦아주기라도 하려 손을 뻗었던 도경은 지한을 만지지 못했다. 지금 지한을 만지는 것은 사태에 도움이 아니라 해를 끼칠 선택이었다. 도경이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설명하는 것이었다.
“좋았어. 네가 나만 보는 게…….”
시작부터 거짓되어 다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중 진실만이라도.
“내 편 들어주는 게 좋아서…… 그래서 계속 만났어.”
30년을 살아오며 그런 상대는 만나본 적이 없어서 일찍 깨닫지 못했다 말하면 믿어줄까. 가만히만 있어도 세상에서 제일 진귀한 것 보듯 봐주고, 완벽하게 해내지 않아도 감탄해주고, 무엇을 해도 참겠다고 각오해주는 상대.
“너랑 계속 만나고 싶어서 말 못 했어. 말하면 네가…… 그만 만나자고 할까 봐.”
믿어주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말하는 수밖에. 그것만은 진짜였으니까.
“너랑 잔 건, 자고 싶어서.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런 거 아니야. 정말이야. 그래서 이안이도, 무영이도 나한테 화낸 거야. 내가 널 좋아하니까.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좋아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될 줄 진짜로 나도 몰랐어,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런 걸.”
도경은 후회했다. 후회는 나약한 것이고 그는 나약해지고 싶지 않아서 후회를 멀리하려 발버둥 쳐왔지만, 막을 수 없었다. 후회가 짙어졌다. 소현이 죽어 버렸으니 남은 지한에게라도 갚아주려 했던 과거가. 그 자존심이. 그 오기가. 그 어리석음이. 그 삶이.
“그런, 그런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나한테 할 말이, 정말 그거밖에 없어?”
뺨으로, 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내버려둔 지한이 물었다.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흉터가 열과 눈물로 더 진해졌다.
“미안해.”
더 빨리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잘못했어.”
더 빨리 인정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됐네. 그럼.”
한 번도 말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좋아해. 네가 나만 봐줘서 좋아. 네가 날 받아줘서 기뻐. 너랑 있으면, 내가 행복해.
“내가 어떤 놈인지 다 알았잖아. 난, 머리 나쁘고 배운 거 없어서. 네가 하는 말 그냥 다 믿어버리는 병신 새끼야. 너도 봤잖아. 알잖아.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 가만히 있었잖아.”
나를 살고 싶게 해.
“다 봤으니까 이제 그만 보면 되겠네.”
“안 돼.”
자존심이 뭘까. 그게 뭐기에 남을 없애버리고 싶어 했을까. 그게 대체 뭐라고 품지 않아도 좋을 악의를 품고 정작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게 도경을 뒤로 붙잡았을까. 그건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그래서 죽을 때까지 이고 가야 하는 짐일까. 그 어떤 전문가도 찾아주지 못했던 해답을 찾았다.
“지한아, 내가, 너한테……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도경은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닿은 바지가 지한의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알았다. 가지고 태어났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자존심은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깊은 곳에 묻혀 잠들어있던 진심을 끄집어낸 상대의 앞에서라면,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마음을 확인시켜준 상대에게 용서받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버려져 마땅했다.
“내가 몰라서 그랬어. 뭐가 맞고 틀린지 구분도 못 하고 살아서 그랬어. 내가 나쁘게 살아서, 잘못 살아서 그런 것도 몰랐어.”
손을 뻗었다. 어디라도 잡고 있어야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해진 바지라도 붙들었다.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릴게, 오래 기다릴게. 그러니까 한 번만.”
바지를 잡고 매달리는 도경을, 지한은 걷어차지 않았다. 다리를 움직여 손을 쳐내지도 않았다. 그는 딸꾹질에 묻혀 뭉개지고 끊어지는 발음으로 일격을 날렸다.
“내가, 이제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언제나 생각나는 말이 있으면 바로바로 해서 도경을 당황시키고, 때로는 웃게 했던 지한이,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이로 깨물어대며 울고 있었다. 무릎 꿇은 도경의 허벅지 위로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그 언젠가 보았던 유혈 경기가 벼랑 끝에 내몰린 시각과 청각을 침략했다. 하나뿐인 몸뚱이를 내걸고 링 위에 선 선수들. 날아드는 발을 피하지 못한 선수가 쓰러진다. 심판은 쓰러진 선수에게 달려가고 가격을 성공시킨 선수는 코치에게 달려가 안긴다. 눈도 뜨지 못하고 경련하는 선수를 두고 해설자들이 환호한다. 끝났습니다! 믿기지가 않는군요, 완전히 끝내 버렸습니다!
도경은 일어서지 못했다.
#79
퇴근 후 호텔 옆 편의점에 도착한 직후에만 해도 시우는 지한이 안 온 줄로 오해했다. 늘 지한의 뒤에 배경처럼 함께하는 오토바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소식 없이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는 있어도 전화를 수차례 걸어놓고 무소식인 것은 지한답지 않은 일이었다.
자주 보다 보니 통성명까지 하고 지내는 편의점 점주에게 지한을 봤느냐고 물어보려던 시우는 인기척을 느끼고 왔던 길을 몇 걸음 되돌아갔다. 불이 꺼진 옆 건물 앞에 덩어리처럼 웅크린 그림자가 눈에 익었다. 지한이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시우의 손에 잡힌 어깨가 흔드는 대로 힘없이 흔들거렸다. 시우는 당황했다. 지한의 몸은 시우가 웬만큼 힘을 실어 건드려도 끄떡없어야 정상이었다.
지한이 비척비척 얼굴을 들었다. 어둠이 최고조에 다다른 새벽. 호텔 주차장의 가로등과 편의점에서 새어 나오는 빛만으로도 지한의 상태를 알아차리기엔 충분했다.
“나 어떡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시우의 팔을 아프게 잡은 지한이 그대로 안겨들었다. 잡아당기는 힘에 딸려가 주저앉은 뒤에도 왜 그러냐고 묻지는 못했다. 가슴에 닿은 지한의 얼굴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나와 옷을 적셨다.
편의점 점주가 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았다. 시우는 품속에 들어온 지한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울음 속에서 띄엄띄엄 들리는 단어들이 새롭지 않았다. 어떡해, 도경이 형이, 도경, 권도경이, 시우야 나 어떻게 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어도 언젠가 오기는 할 줄 알았던 순간이다. 지한은 도경이 다르다고 했지만 아니었다. 무영이나 이안이나 도경이나. 시우와 지한에겐.
가진 것 없는 자들에게마저 버림받아 빈손을 뜯어먹으며 살아남아야 했던 그들에겐, 다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