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Rabbit Punch (29/38)

  29. Rabbit Punch

#72

출장을 끝내고 부산에서 올라오자마자 집에도 못 들르고 호텔로 직행했다. 김 회장이 퇴원한 기념으로 막내아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장소부터 초대 가수까지 직접 골랐다고 했다. 오락가락하는 거 아니냔 소문에 보란 듯 건강하게 돌아온 유통업계 대부의 초대장을 거절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잔디와 조각품들이 내다보이는 건물 안에 앉아있는 손님 중 도경이 모르는 얼굴은 없었다. 김 회장의 부인과 그녀의 친자식들 정도를 빼면 무영을 아는 사람들은 다 온 듯했다.

“도경이 형.”

늦게 도착해 쓸쓸히 방치된 맨 구석 테이블에 앉아있는 도경을 굳이 찾아내 인사한 첫 인물은 기현이었다. 지한의 흔적을 찾으려 소현의 짐을 뒤졌던 날 이후 근 반년만의 만남이었다. 시간은 비밀스럽게 흘렀다.

“오랜만이다. 출국한다며.”

“한 9월쯤. 엄마가 더 쉬다 가래. 가면 또 시험 보고 그러니까.”

그 집안에서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한 손주는 기현뿐이었다. 외국 생활에 적응을 못 해서 부모가 1년 만에 귀국시켰다. 소현이 죽은 뒤 장 회장의 성격이 그렇게 더러워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듣기론 더 어린 손주들을 젖혀두고 막내 취급해온 이안에게도 툭하면 큰 소리를 낸다던데, 근거 없는 루머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못 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만나던 이안과 연락도 주고받지 않은 지도 벌써 꽤 됐다.

“졸업 선물 못 해줘서 미안하다. 일하다 보니까.”

무엇인가를 기념하기 위해 여러 집안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도경이 앉는 테이블의 구성원은 늘 비슷비슷했다. 소현이 살아 있었을 땐 그녀의 친구들 때문에 늘 자리가 모자랐고, 그녀가 죽은 뒤엔 무영과 이안 정도가 다라 빈자리가 많았다. 오늘은 무영도, 이안도 없었다. 무영은 김 회장 옆에서 효자 노릇 하기 바빴고 에스더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안은 어딜 갔는지 조금 전부터 안 보였다.

“선물은 무슨. 형은 잘 지내지? 형네 회사 잘 나간다고 인터넷에 올라오더라.”

무영이나 이안이 정말 친구라고 생각하느냐며 도경을 비웃었던 소현은 누구보다 진실을 잘 알았던 것일 수도 있다. 80점짜리인 줄 알았던 이안은 배우자의 불륜에 배신당한 피해자처럼 울었고 애초에 점수를 매기지도 않았던 무영은 아마 두 번 다시 도경의 테이블에 앉지 않으려 들 터였다.

도경 본인에게 슬프거나 억울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보통의 친구들은 서로에게 숫자를 매겨 점수로 평가하지 않았다. 보통의 친구들은 그 새끼 뭐가 나보다 더 좋았냐고 따지며 눈물을 쏟지도, 헬멧으로 보닛을 찌그러트려 놓지도 않았다.

“나야 잘 지내지.”

애초에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무엇이었나. 도경은 외면해왔던 속마음과 대면했다. 친구 하나 없는 놈으로 보이기 싫었다. 여자에 이어 친구들에게마저 버림받아 혼자 남은 놈. 그것보다 더 비참해 보이기 좋은 꼴은 없을 것이라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꼴만은 면하고 싶었다.

“시간 될 때 연락 한 번 줘. 할아버지가 형 보고 싶어 해.”

그렇게 면하고 싶었던 꼴이 된 소감은, 의외로 견딜 만하단 것이었다. 애들부터 노인네들까지 다 짝이 있는 자리에서 혼자 앉아있는 기분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다. 실은 누가 쳐다볼 때마다 그만 보라고 일갈하고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견딜 만했다.

「형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새끼들이 문제라고요.」

문제의 원인이 반드시 도경에게만 있지는 않으리란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강박이 물러났다. 포크로 허벅지를 찍어버리고 싶은 충동, 당장 찬물로 피부를 박박 씻어내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간지러움, 남들의 눈에 계속 바보로 보이느니 지금이라도 뛰쳐나가 조각품에 이마를 찧어야 한다는 압박감.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들은 아니었다. 실은 죽는 날까지 도경을 따라오리라 예감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잠잠해졌다. 잠시도 그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던 그림자들이 얌전해지기라도 할 수 있음에 그는 감사했다.

“그래.”

도경이 쉽게 승낙하리라 기대하지 않고 한 제안이었는지, 기현이 안심한 티를 팍팍 내며 웃었다. 누나를 닮지 않은 눈 그 어디에도 도경을 의심하는 빛은 없었다. 한때 도경은 소현보다 모든 방면에서 떨어지는 기현을 머저리 같은 놈이라고 생각했었다.

여전히 명석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 머저리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겉과 속이 칼로 자른 듯 선명히 나뉘어있지 않다고 해서, 상대를 금방 믿고 속을 보여준다고 해서 머저리는 아니었다.

그것을 도경은 30년이나 살고서야 깨우치게 되었다. 마음만 앞서 정리도 다 마치지 않은 생각을 소리로 내고 보는 지한이 어디 머저리 같던가. 재지 않고, 거르지도 않고 내뱉는 지한의 말들은 대체적으로 도경을 북돋는 효과를 냈다. 세상에서 도경을 가장 사랑하는 황 원장도 잘 내지 못하는 효과를, 지한은 금방금방 냈다. 도경에 대한 것은 뭐든 알고 싶어 하고, 도경이 사주는 것은 음식이든 물건이든 눈이 휘둥그레져 받음으로써.

도경과 어떻게든 더 붙어 걸으려고 보폭까지 살펴 가면서.

주위가 왁자지껄해졌다. 김 회장의 옆을 벗어난 무영이 자리를 옮긴 탓이었다. 친구들의 잔에 일일이 샴페인을 따라주는 무영은 자신이 김 회장의 자식 중 가장 젊은 피란 것을 홍보하려고 마음먹은 것 같은 차림이었다.

진한 색 바지엔 옷보다 카펫에 어울릴 법한 패턴이 들어가 있었고 날씨에 비해 다소 더워 보이는 재킷엔 통통한 엉덩이를 깐 천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현경이나 도경이 그런 차림으로 몇백 명의 손님들을 맞이했다면 권 회장은 화장실으로라도 두 아들을 끌고 가 귀가 떨어져라 고함을 쳐댔을 것이다.

“무영이 키가 컸어? 왜 오늘따라 더 커 보여?”

“나는 원래 커.”

“그건 그렇지.”

경쾌한 웃음소리가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이목까지 집중시켰다. 무영이 따라준 샴페인을 단숨에 비운 에스더가 도경의 옆에 앉아있는 기현을 불렀다.

“무영아, 기현이한테 한 잔 따라줘. 쟤 올해로 성인 됐어.”

도경을 봐놓고도 기현만 콕 집어 부르는 의도가 뻔했다. 무영이나 이안과 붙어있지 않은 도경에게는 인사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듯했다. 고분고분 일어나 그쪽으로 간 기현에게 무영이 제 자리를 내어주었다.

“여기는 형 자리…….”

“앉아, 앉아. 나는 좀만 이따 또 다른 테이블 갈 거야.”

기현을 앉힌 무영이 서서 빈 글라스를 샴페인으로 채워주었다. 본인 말대로 무영은 컸다. 큰 만큼 힘도 셌다. 밖에서 난 자식이 아니라고 둘러대지도 못할 외모 때문에 조직 내에서 요직은 못 맡더라도, 김 회장이 예뻐하는 덕분에 클럽, 레스토랑, 골프장 뭐든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 열 수 있었다. 한국을 뜨면 언제든 받아줄 러시아 식구들도 가졌다. 모자람이 없었다.

무영은 뭐가 아쉬워서 도경에게 붙어 있었을까.

“어, 권도경 와있었네.”

눈치 없는 놈 하나가 뒤늦게 도경을 발견하고 아는 체했다. 알고도 무시했던 에스더를 포함해 무영과 한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도경을 쳐다보았다. 눈치 없는 놈은 계속해서 눈치 없이 굴었다.

“너는 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왜 거기서 혼자 그러고 있어?”

에스더가 제 친구와 얼굴을 붙이고 속닥였다. 도경과 죽은 누나의 친구들 사이에 흐르는 이상기류를 감지했는지, 기현의 눈이 정착할 곳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수군대는 이들과 어리둥절해 보이는 이들, 끼어들지 않는 무영 그리고 그들과 떨어져 혼자 앉은 도경이 만들어내는 불균형한 공기는 테이블과 사람들을 헤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이안에 의해 깨졌다.

“기현아. 어른들이 너 찾아.”

“얘 이제 막 앉았는데 좀 더 있다가 가라 그래.”

“어른들이 찾는다니까?”

정말로 어른들이 기현을 찾고 있었든, 기현이 이상한 소리를 듣기 전에 보내 버리려는 수작이었든 사촌 동생을 일으키는 이안의 태도는 보기 드물게 단호했다.

기현을 데리고 돌아서던 이안과 도경의 눈이 마주쳤다. 인사하려는 듯 손을 들어 올린 이안은 도경이 미동도 않고 쳐다만 보자 소심하게 손을 내리고 돌아섰다. 이안의 재킷은 일부러 무영과 맞춘 것처럼 요란한 그림이 박혀있었다. 그 또한 권 회장은 절대 자식에게 허락하지 않을 옷이었다.

“뭐 해, 안 와? 와서 무영이가 주는 술 한잔 받아.”

“맞아. 무영이한테도 한잔 따라주고.”

도경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고 앉아버리는 무영에게서 이상한 점을 감지하지 못한 무지렁이들이 하나둘 합세해 시끄럽게 굴었다. 도경은 한숨을 삼켰다. 넓어서 아직은 못 찾았으나 어딘가에 현경이 앉아있을 것이다. 출판기념회에서와 같은 소란을 또 피워서는 곤란했다.

무영이 있는 테이블로 간 도경은 절망감을 느꼈다. 딱 하나 남은 빈자리가 하필 무영의 바로 옆자리였다. 테이블까지 왔다가 돌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눈 딱 감고 앉았다. 식기가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접시와 구겨진 냅킨이 도경을 반겼다. 1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경이 앉은 자리는 이안이 앉았던 자리였다.

내 뺨 날린 새끼한테는 술을 따라주기 싫다고 떠들어 모두에게 그날 일을 알리면 어쩌나 우려되었던 무영은 잠자코 새 잔을 세워 샴페인을 들이부었다.

어쩐 일로 평화롭게 넘어가나 했다. 몇 초 만에 잔을 가득 채운 샴페인은 이내 격하게 흘러넘쳐 접시와 식기를 적셨다. 소현과 친했던 여자들은 물론이고 눈치 없이 도경을 부른 사내놈들도 비로소 무영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알아차리고 조용해졌다.

도경은 무영이 세워놓은 병을 들었다. 샴페인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그만큼이라도 따라주려 병을 기울였다. 병 입구가 안정적으로 기우는 순간 무영이 잔을 옆으로 치웠다. 도경의 손에 들린 병은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에 얼마 남지 않은 샴페인을 쏟아 부었다. 괜찮아. 빈 병을 똑바로 세우며, 도경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까짓 거. 나한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해.

“나 이런 분위기 못 참아. 숨 막혀.”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아이돌과의 결혼을 포기하더니 이제는 배우 뒤꽁무니를 쫓아다닌다는 D그룹 손녀가 용감하게 폭탄을 끌어안았다.

“다들 입 다물고 있을 거야? 내가 말해? 한다?”

열 몇 쌍의 눈은 자연스레 주인공인 무영에게로 집중되었다. 무영이 약하게 웃었다. 사실상 말해도 좋단 허락이었다. 용감한 정도와 전혀 비례하지 않는 지능 지수를 가진 여자가 폭탄을 던졌다.

“권도경 너 요새 우지한 데리고 다닌다는 게 진짜야?”

폭탄은 도경의 발 앞에 떨어졌다. 단 한 사람도 그 폭탄으로부터 도경을 떨어트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왼쪽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무영이 겉으로나마 도경과 잘 지내는 척해 주었다면 두통을 유발하는 질문은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시작하는 자신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슨 상관이야.”

한심했다.

몇몇은 모르고 있었는지 숨을 들이마셨고 무영의 클럽에서 둘을 봤던 나머지는 더러운 것을 보는 눈빛으로 도경을 보았다. 전자든 후자든 우지한이란 이름 자체를 처음 듣는 이는 없는 듯했다.

너희가 소현이냐고, 왜 걔가 하던 스토커 짓을 이어받으려 그러냐고 따질 수도 있었으나, 도경은 침묵을 택했다. 얼마 후면 지한의 이름이 TV에 나올 예정이었다. 의심 살 짓은 줄여야 했다.

이제 네 임무는 끝났다는 듯 D그룹 손녀의 어깨를 두드린 에스더가 수저로 잔을 쳤다. 수저와 잔이 부딪쳐 맑은 소리를 냈다.

“나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오해하지 말고.”

일동의 시선을 끌어모은 에스더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네가 왜 걔를 데려가? 소현이 대신 네가 키워주려고?”

왼쪽 머리통 전체로 퍼지는 통증을 잊어보려, 도경은 눈앞의 접시에 시선을 주었다. 뭘 먹었는지 크림과 부스러기가 눌어붙은 위로 무영이 넘치게 따른 샴페인까지 섞여 더러웠다.

“아니, 그렇잖아. 너랑 소현이가 짧게 만난 것도 아니고, 솔직히 네가 뒤끝 없는 스타일도 아니고. 근데 소현이랑 만났던 애를 키워준다고? 네가 직접? 과거는 다 없던 걸로 하고?”

도경의 관심은 이제 샴페인 잔으로 옮겨 갔다. 샴페인 거품이 다 꺼진 유리잔 주위 테이블보가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역시 지저분했다. 그러나 이안이 더럽혀놓고 간 접시와 무영이 적신 테이블보를 걱정해야 할 까닭은 없었다. 그것들의 더러움은 유한했다. 세제와 물만 있으면 다시 새것처럼 깨끗해질 수 있었다.

“잠깐. 근데 그럼 우지한인가 뭔가 걔는 커플 양쪽한테 다 스폰을 받는 거야?”

“스폰이라니. 소현이랑은 사귄 거지.”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만약 도경이 뭣도 모르면서 멋대로 넘겨짚는 연놈들에게 일갈할 수 있다면. 너네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장소현은 우지한이랑 자지 않았어. 사귀지도 않았어. 우지한은 나랑만…….

떠오르는 문장 중 무엇 하나 당당하게 내보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한이 소현의 남자였어서, 지한이 그냥 남자라서, 아니, 그 모든 핑계 이전에.

“여자랑 사귀고 남자한텐 스폰받아? 걔도 참 보통 놈이 아닌가 보다.”

도경이 떳떳하지 못했다.

“너 걔 실물 못 봤지. 보면 알 거야. 걔 되게…….”

D그룹 손녀가 손으로 뭔가를 표현하려다 잘 안 되는지 포기했다. 뭘 표현하려고 했는지가 갑자기 미칠 듯이 알고 싶어졌다. 네가 걜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너네는 걔 몸이 진짜로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도 못했으면서, 아니, 아니.

도경은 이성을 다잡았다. 지한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고 말고는 요점이 아니었다. 지한을 경매대에 오른 물품 취급하는 것 자체가 모욕적이었다.

“나도 들었어. 잘생겼고 몸도 잘 빠졌고 그렇다며. 내 말은 그게 권도경한테 무슨 소용이냐고. 여자도 아닌데.”

“내가 궁금한 게 그거라고.”

지원군을 등에 업은 에스더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권도경 네가 걔를 어디다 쓰게?”

두통은 가시지 않았고 도경의 편은 없었다. 놀랄 것도, 기죽을 것도 없었다. 그의 세계는 평생 그래왔다.

“너희 나 좋아해?”

뭐라고? 쟤 뭐래? 쑥덕거리는 멍청이들 가운데서 에스더가 입을 쩍 벌렸다. 저 미친놈이 또 시작이란 표정이었다.

“왜 아직도 다들 나한테 관심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네. 너희 다 소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 만나는 거 아니었어?”

“야. 내가 짠해서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그랬는데 진짜 너 안 되겠다. 네가 그러니까 그 나이 먹고도 친구가 없는 거야. 싸가지가 없어서.”

“여기 앉아있는 사람 중에 싸가지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 다 싸가지 없어. 너야말로 그 나이 먹고도 그걸 몰라?”

어머. 경악의 의미를 담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도경은 쉬지 않고 공격을 이었다.

“네가 뭘 많이 안다고 착각하나 본데 넌 아무것도 몰라. 어리고 순진한 애 가지고 이상한 소리 하는 거, 그건 싸가지만 없는 게 아니라 몰상식한 거고.”

실은 공격도 아니었다. 방어였다. 점잖아야 해서, 감정을 감춰야 해서 체면을 지켜야 해서 할 엄두조차 잘 못 내고 살았던.

“쟤 지금 우리보고 몰상식하다고 한 거야?”

“다시 말해줘? 너희 다 싸가지 없어. 양심도 없고, 상식도 없어.”

“야, 너 말 다했어?”

“내 말 어디가 틀렸어!”

도경이 언성을 높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인간들의 만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연회 목적으로 지어진 단층 건물 안은 이백여 명 남짓한 인원의 대화소리와 사중주로 배경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방금 낸 소리는 너무 컸다. 가까운 테이블에는 다 들리고도 남았다. 권 회장이 얼굴도장만 찍고 나간 지 오래길 빌면서, 도경은 일어났다.

“생일 축하한다. 마음 맞는 친구들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

축하하란 생일은 내팽개치고 핏대 높여 싸우는 친구들을 지켜만 보던 무영이 드디어 도경의 눈을 쳐다보았다. 즐거운 눈빛은 아니었으나 다른 사람들처럼 놀란 빛도 아니었다. 도경에게 뺨까지 맞은 무영인데 뭔들 놀랐겠냐만.

나오는 길에 권 회장은 보지 못했다. 김 회장과 인사만 하고 떴든, 전화 받는단 구실로 다른 데 가 있든 둘 중 하나였다. 입구 쪽에서 현경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멈추지 않고 그대로 걸어 나왔다. 차에 두통약이 있었다. 주차장까지 걸어서 10분. 최대 15분.

“도경아.”

최대 15분이란 것은 물론 누군가에게 붙잡히지 않을 때의 계산이었다. 도경은 바깥 공기를 깊이 흡입했다. 아직은 후덥지근하지 않았다.

“왜 나와. 가서 친구들하고 놀아.”

“네가 내 파티에서 이렇게 나가면 안 되지.”

도경을 따라 나온 무영은 믿기지 않게도 웃는 낯짝을 하고 있었다. 이안이 따라 나가라고 시켰을까. 하지만 이안은 조금 전 그 테이블에 없었다. 무영에게 도경을 따라가 보라고 부탁할 조건이 안 됐다.

“왜 안 되는데.”

도경을 따라 나온 것은 전적으로 무영의 의지였다.

“내가 슬프잖아.”

문제는 왜냔 것이었다. 당최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해놓고도 태연한 무영은 도경을 헷갈리게 했다. 슬프기는 뭘 슬퍼, 너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내 인생에서 꺼져버려. 그리 내지르고 싶다가도.

“내가 가는데 네가 왜 슬퍼.”

소현과 헤어지고 난 후에도 도경의 생일을 챙겨줬던 주변인은, 식구들과 회사 사람들을 빼면 무영과 이안밖에 없었다. 무영은 과연 도경의 친구인가. 그러나 무영은 깨나 자주 소현만큼, 어쩔 땐 그녀보다도 더 도경을 증발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친구인가.

“그런 것도 몰라? 친구니까 슬프지.”

무영이 도경의 삶에 처음 등장했던 날을 기억했다. 초등학교 입학식. 어딜 봐도 한국인인 여자의 뒤에 서있던, 밝은색 눈동자와 염색한 것처럼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 하얘서 병약해 보인단 소리를 듣고 자란 도경보다도 더 창백한 피부색과 엉망진창인 한국어 발음을 가진 혼혈아. 그 어린 나이에도 시비가 붙은 상대는 협박이 아닌 진짜 주먹으로 날려버리던 무영을 무서워하면서도 멋있어하던 또래들.

영영 한 무리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던 무영이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도경의 학창 시절에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그것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는 뭐 때문에 지금까지 내 곁에 남아있지?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무영은 도경과 공유한 세월로 따지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것이나 다름없는 지한보다도 도경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이상했다. 무슨 생각을 해도 끝에 가선 지한으로 결론이 났다. 익숙하지도, 마냥 편하지만도 않은 현상이었다. 안 그래도 멀쩡하지 않은 정신이 더 위태로워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친구였어?”

그렇지만 지한이 아니었으면 오늘 같은 상황에서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참고, 참다가 그냥 일어섰겠지. 머리통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고통을 끌어안고서.

“도경아. 내가 웃어주니까 너희 집 메이드 같아?”

어차피 너덜너덜해진 정신이라면 지한 때문에 조금 더 이상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누가 지나가다 봤으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줄로 착각했을 것이다. 자기가 메이드 같으냐고 묻는 무영의 얼굴은 그만큼 아무렇지도 않았다.

“전혀. 우리 집에 너 같은 사람 들어왔으면 회장님한테 진작 쫓겨났어.”

무영이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번엔 누가 지나가다 봤으면 아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유쾌하게.

웃음을 멈춘 무영이 검지로 도경의 볼을 밀었다. 살을 누르는 손가락 끝엔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얼굴의 웃음기는 다 가시지 않았다.

“왜 자꾸 말을 안 예쁘게 해. 여기 구멍 나고 싶어?”

“해봐.”

무영이 쓸데없이 신체적 접촉을 해오거나 험한 소리를 할 때면 도경은 손을 뿌리쳤다. 혹은 비슷하게 듣기 싫은 말로 받아쳤다. 무영은 도경이 절대 물리적으로 반격하지 않을 것을 알았고 도경은 무영이 힘을 쓰고 싶어지게 될 때까지 자극하지 않았다. 세월과 경험을 통해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합의였다.

“구멍 내보라고, 네 얼굴에?”

오늘 도경은 합의를 깰 준비가 되었다. 설사 둘 사이에 유지되어온 합의가 지한을 위해 무영의 뺨을 때렸던 그날 이미 깨졌다 할지라도, 한 번쯤은 오늘의 지금 같은 순간이 필요했다. 무영도 알아야 했다. 더 이상 도경에게는 그들이 나고 자라온 세계의 모든 법칙에 순응할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자, 여기.”

도경은 무영의 손목을 잡아 조금 더 위쪽으로 옮겼다. 완전히 편 것도, 주먹을 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의 손이 도경의 광대에 닿았다. 무영이 도경의 뺨에 구멍을 내려면 그보다 더 적합할 수는 없는 환경이 갖춰졌다. 어딜 얼마나 아프게 때리든 피하지 않겠다.

경기를 앞두고 준비 운동 중인 선수처럼 무영이 목을 양옆으로 꺾었다. 그의 입에서 나는 불안정한 숨소리를 감지한 지 얼마 안 되어 팔을 콱 붙잡혔다. 안에서 보이지 않는 건물 옆쪽까지 한달음에 끌려갔다. 무영은 벽에 도경을 내던지듯 밀쳤다.

“너 미쳤어?”

“남의 얼굴에 구멍 내고 싶어 하는 너보다는 안 미쳤지.”

“아빠 있는 데서 내가 너를 때릴 것 같아? 맞고 싶으면 다른 놈 알아봐. 난 안 넘어가.”

뭐라도 쥐어 터뜨리고 싶은 손동작을 반복할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는 무영을 보며 도경은 확신을 얻었다. 무영은 도경을 못 때린다. 분명 무영은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분류를 극명하게 하는 인간이었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네가 왜 날 못 때리는지 알아.”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관람하기 일쑤인 무영이 지한을 잡으려고 도경의 회사 앞까지 찾아와 부렸던 난동도 그렇게 생각하니 쉽게 해석되었다. 이안이 먼저 때렸으니 사과도 먼저 해야 한다는 도경을 왜 그렇게까지 배신자 취급했는지도.

“이안이 때문이지?”

무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과학드라마의 해부대 위에 누운 시체들을 연상시키는 빛깔에 뒤덮였던 얼굴은 빠르게 혈색을 되찾았다. 이번엔 거꾸로 피가 너무 몰려 목까지 벌겋게 물든 무영이 바짝 다가섰다. 벽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도경의 뒤통수에 전해졌다. 무영이 때리면 꼼짝없이 맞을 미래를 직감했다. 그 어떤 암담한 미래라도 도경의 선택에 의한 필연이었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했다.

“You better think twice before you run your mouth.” 입 함부로 놀리기 전에 잘 생각하는 게 좋아.

“So do you.” 너도 마찬가지야.

누가 부서져라 두들겨 대는 것처럼 가슴 안쪽이 쾅쾅거렸다. 심장마비가 오면 이런 느낌일까. 무영의 앞에서 심장이 멎고 싶진 않았다. 도경은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 나서 20년 가까이 매일, 매시간 하고 싶었으나 한 번도 소리로 옮기지 못했던 말을 했다.

“Don’t talk to me like that ever again.” 두 번 다시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살가죽을 뚫어버릴 기세로 뛰어대던 심장이 서서히 정상 속도를 되찾았다. 무영은 도경을 걷어차지도, 벽이나 땅에 화풀이를 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몸을 물리며 도경을 노려보다가 돌아서 사라져 버렸다.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지한이 보고 싶었다.

***

아파트로 가는 30분 내내 얼굴 몸 할 것 없이 식은땀이 났다. 때 이른 에어컨도 정신력 미달로 나는 땀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무슨 힘으로 남의 차에 흠집을 내지 않고 주차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약통들을 꺼냈다. 차에서 먹은 진통제는 머리가 바스러질 것 같은 통증을 가라앉혔을 뿐 통째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속까지 진정시켜주진 못했다. 각 병에서 나온 약을 한 알씩 전부 삼키고 나서야 안정이 찾아왔다. 삼키자마자 나는 약효는 물론 없었다. 그저 습관처럼 삼킨 약이 그를 안심시켰다.

소파까지 갈 기력도 없어 식탁 의자를 겨우 빼 앉았다. 휴대폰이 담긴 주머니에서 잦은 떨림이 이어졌다.

[형 벌써 집에 갔어? 어디 아파?]

[아들 다음 주에 엄마 없어도 회장님이랑 싸우지 말고 그 인간…]

[아까 왔었다며 왜 말을 안 하고 혼자 나가. 아버지랑 다음 주…]

[이사님 귀가 잘하셨죠? 프로필 사진 관련해서 다른 스튜디오를…]

줄줄이 뜬 메시지 미리 보기 중 그가 원하는 발신자는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식탁에 내려놓았던 그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대화 목록까지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랬다가 또 들어갔다. 같은 행동을 무한 반복하던 그는 지친 나머지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누구에게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를 말이 소리 없이 호흡에 섞여 도경을 탈출했다. 나도 힘들어.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할지, 혹시 이게 내 자존심을 깎아먹는 짓은 아닌지, 이 말과 행동이 나중에 나의 약점으로 돌아와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시간이 아까워. 그냥 솔직해보고 싶다. 계산하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그냥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말만.

도경의 휴대폰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 밤 지한의 휴대폰이 떨어졌던 곳과 거의 일치하는 자리에 떨어져 있었다. 그날 도경이 일부러 휴대폰을 떨어트렸다고 의심했든 안 했든, 지한은 새로 사주면 괜찮지 않느냐는 소리에 아무런 반박 없이 한 글자로 답했다. 네. 도경이 무슨 말을 하든 곧잘 네, 네 하는 지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도경은 휴대폰을 주웠다. 대화 목록으로 들어가 아까부터 누르고 싶었던 대화창을 눌렀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썼다.

[보고 싶어]

쓰자마자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안 그랬다가는 또 망설이게 될 것이 뻔했다. 1분. 메시지 옆의 숫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2분. 숫자는 계속해서 메시지 옆을 지켰다. 3분.

전화가 걸려왔다. 도경은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시력에 의심이 갔기 때문이다. 몇 번을 봐도 화면에 뜬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우지한.

“여보세요.”

―형, 집이에요?

“응.”

―이따 어디 가야 돼요?

“아니.”

전화를 걸어놓고 뭘 하는지 자잘한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잠시 후 지한이 말했다.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꼭.

알았다고 말하며 확인한 휴대폰 화면엔 통화 시간이 찍혀있었다. 21초. 도경의 대답은 듣고 전화를 끊었는지 모르겠다.

도경은 손바닥을 가슴팍에 얹었다. 안에서 또 다시 누군가가 두드리는 것처럼 쿵쿵거렸다. 무영의 앞에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심장이 뛰는데 잠이 올 듯 몽롱했다. 곧 몸이 허공으로 떠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에 머리를 기대고 싶었다. 그러면 바로 잠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그러나 기댈 곳이 없었다. 그는 식탁에 엎드렸다.

차가웠다.

***

아주 깜빡 잠이 들었다. 진정제 효과였다. 당연하게도 처방받은 수면제보다는 훨씬 약했다. 엄밀히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흐려진 상태로 엎드려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다시 감기길 원하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린 도경의 시야에 거실이 들어왔다. 아직까지 낮에 가지고 있던 빛을 잃지 않은 해가 색을 바꾸기 전 마지막으로 힘껏 자신의 기운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나가지 말고 집에 꼭 있으라고 했는데.

때를 지키지 않고 복용한 약이 과한 진정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정신과 육신이 전부 다 필요 이상으로 느긋해졌다. 도경은 느리게 휴대폰 액정을 건드렸다. 지한과 통화한 지 한 시간이 조금 덜 됐고, 지한에게서 새 사진이 도착한 지는 5분가량이 지났다.

지한이 보낸 사진 속엔 사람이 없었다. 초점은 나가 있고 구도는 엉망일지언정 사진 속 장소를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도경의 아파트 단지 앞 버스 정류장. 그 언젠가 지한은 그곳에서 도경을 기다렸었다. 겨울밤이 무섭지도 않은지 싸구려 유니폼 하나만 입고서.

오늘 찍은 사진이란 말도, 지금 그곳에 있다는 말도 없었다. 전에 찍어둔 사진을 여태 잊고 있다 이제야 보냈을 뿐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는 도경의 메시지에 충동적으로 왔다가 답이 없어 그냥 가버렸을 수도 있다. 정상 속도로 돌아가는 도경의 두뇌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나머지 결단력이 부족했다면, 느려진 상태의 그는 평소처럼 많은 생각을 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행동이 빨라졌다.

뚜렷한 목표 의식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약간 정신을 차렸다. 엎드려 있는 동안 팔에 닿아있던 왼쪽 머리가 망가져 있었다. 평소였다면 다시 올라가서 물이라도 묻히고 나왔을 테지만,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냥 내렸다. 혹시라도 지한이 와 있다면 1초라도 덜 기다리게 하려고.

사실 지한의 위치를 알려면 전화하는 것이 제일 빨랐다. 그러나 모든 행위가 오로지 실용성을 위해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전화했다가 이미 떠나버렸다는 답변을 들으면, 혹은 애초에 그냥 사진만 보낸 것이란 답변을 들으면 실망할 스스로가 두려워서 전화하지 않는 마음. 차라리 그냥 뛰쳐나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가끔은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사진 속 장소에 아무도 없거든 그래, 그럼 그렇지, 하며 나간 김에 커피나 하나 사 들고 올라가면 그만이니까.

정류장 근처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애들이 몇 명 모여 있었다. 나머진 한데 모여 서서 휴대폰 게임에 집중해 있었는데 한 명만 떨어져 나와 인도 옆에 세워진 오토바이 주위를 얼쩡거렸다.

“우리 아빠 차도 이건데.”

비스듬히 기울어진 오토바이 위에서 한쪽 발로만 땅을 짚고 있던 운전자가 아예 두 발로 똑바로 섰다. 겨울에 주야장천 입고 다니던 점퍼나 가죽 재킷보다 훨씬 얇아 보이는 흰 재킷이 짧은 탓에, 까만 바지를 입은 하체 모양이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어째 허벅지가 전보다 좀 얇아졌다. 그래도 여전히 멋있는 다리였다.

“근데 이거 차 만드는 회사 아니었어요? 오토바이도 만들어요?”

헬멧을 벗으며 눌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헤집은 지한이 초등학생을 내려다보았다. 함께 있을 땐 늘 도경과 딱 붙어있는 지한에게 익숙해져 잊고 있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 언뜻언뜻 보였다. 지한보다 최소 6, 70cm는 작을 어린애에겐 무서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데.”

긴장하는 것 같았던 남자애의 얼굴이 금세 편해졌다. 도경은 생면부지의 어린애에게 공감했다. 타고 다니는 이동수단부터 차림새와 인상까지 어디 하나 순해 보이지 않는 지한이 막상 하는 말은 별로 안 무서웠기 때문이다.

“아저씨 이거 주인 아니에요? 왜 몰라요?”

“아저씨……?”

진심으로 충격받은 지한의 목소리가 너무 웃겨서 도경은 그만 웃어버렸다. 새로운 성인의 등장에 갑자기 겁이 났는지 지한에게 충격을 선사한 초등학생은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오토바이까지 가는 내내 웃음이 멎지 않았다. 지한은 도경을 배신자 보듯 뜨악하게 보았다.

“형. 뭐가 웃겨요?”

“아니, 나는, 네 목소리가 너무.”

“당연하지. 태어나서 아저씨라는 말 처음 들었는데.”

도경을 그만 웃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까지 억울한 얼굴을 해서는 안 됐다. 결국 도경은 흐느끼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소리를 한참 더 낸 뒤에야 조용해질 수 있었다. 웃고 싶은 만큼 웃고 나니 비로소 지한의, 그때까지도 억울한 빛을 지우지 못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쟤네한텐 교복 안 입으면 다 아저씨야.”

약간 미안해져 위로가 될 만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지한은 조금도 위로받은 기색이 아니었다.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 조카도 성인 남자한테 다 아저씨라고 해.”

“조카 몇 살인데.”

“이제 여덟 살.”

게임에서 이겼는지 단체로 함성을 지른 어린애들이 우르르 단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멀어지는 애들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지한이 도경에게 주의를 돌렸다. 얼굴에서 억울한 빛이 많이 사라졌다.

“자다 나왔어요?”

“아, 머리가. 미안. 머리를.”

실컷 웃는 동안 꿈꾸는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정신이 많이 깨어난 듯했다. 도경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보았던 제 모습을 기억했다. 아직도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나 보다. 왼쪽 머리로 올라가려는 도경의 손을 지한이 잡아 내렸다.

“피곤해 보여서 물어본 거예요. 형 머리 멀쩡해요.”

짧은 통화를 마친 후 바로 출발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선 한 시간도 안 되어 도경의 집 앞에 도착해 있을 길이 없었다.

도경의 손을 놔준 지한이 헬멧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위아래 다 멀쩡한 옷을 입었다.

멀쩡하다는 것은 도경의 눈에 싸구려로 보이지 않는 옷이란 뜻이었다. 소현이 선심 쓰듯 선물한 옷일까. 그런데 그녀가 과연 뭔들 선심 쓰듯 줬을까. 그녀는 주로 크게 싸우고 나면 선물을 줬다. 도경에게도 항상 그랬으니 지한이라고 다르지 않았을 터.

“봤으니까 갈게요. 올라가서 더 자요.”

말은 간다면서 지한의 두 발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 지한이 걸친 것 중 유일하게 멀쩡하지 않은 것. 신발. 신발만 낡았다. 대리를 붙여 백화점에 보냈을 때 신발도 닥치는 대로 사라고 했어야 하는 것을. 미처 거기까진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아까 그렇게 말해서 여기까지 왔어?”

“네?”

“내가 아까.”

보고 싶다고 해서, 라는 말까지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아까라고만 말했어도 지한은 잘 알아들었다.

“대놓고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좀.”

창피한데……. 말끝을 흐린 지한이 멋쩍은지 눈을 피하며 웃었다. 여태 꿈속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도경은 뜨거운 바람을 하나 품었다.

잃고 싶지 않아.

“네 뒤에 태워줄래?”

지한은 멍청한 낯짝이 되어 눈을 깜박였다. 태워달라는 뒤가 설마 이 뒤냐는 듯 몇 번이고 가방이 매어져있는 뒷좌석을 확인한 끝에, 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근데 그럼, 이 가방 메야 되는데.”

“멜게.”

지한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가방 안에서 여분의 헬멧을 꺼내어 도경에게 씌워준 지한이 재차 확인했다.

“이거 진짜 괜찮아요? 중간에 도로에다 내던지는 거 아니지?”

마침 속으로 어쩜 저렇게 내다 버리고 싶게 생겼냐고 감탄 아닌 감탄을 하던 중이었다. 어느덧 도경의 속마음까지 다 맞추는 수준에 이르렀다. 도경은 무식하게 생긴 만큼 튼튼한 가방을 멨다. 무겁기까지 하면 진짜 다리 위를 지날 때 확 던져 버리려고 했는데 다행히 내용물이 없어선지 가벼웠다.

“안 버려.”

진짜 무거웠어도 던져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깟 가방 생긴 게 뭐 대수라고. 그런 사소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데에 지금까지 쏟아 부어온 시간이, 에너지가 그리고 영혼의 일부가 아까웠다.

물론 고요한 단지 앞 도로에서 혼자 경주를 벌이듯 과속하는 지한의 운전 솜씨에 두 번 정도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다. 구불구불한 언덕을 오르자마자 옆으로 방향을 꺾은 오토바이가 도로에 옆면을 갈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낮게 기울었을 땐 내리자마자 가방을 던져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헉. 형. 얼굴색이.”

“괜찮아.”

실제로는 오토바이가 멈추자마자 내려서 헬멧을 벗어 던지느라 등짝에 가방이 붙어있는지 거북이가 붙어있는지 분간할 여력도 없었다. 오토바이가 가벼운 장난감인 것처럼 잔디 위에 내동댕이친 지한은 헬멧에 이어 가방을 벗어 던지는 도경을 따라오며 쉬지 않고 걱정했다.

“미안. 내가 너무 운전 막 했어요.”

“괜찮다니까.”

“내가 진짜 형 태울 때는 안 그러려고 하는데 오늘은 신나서…….”

뭐라도 지탱해야 똑바로 설 수 있을 것 같아, 도경은 그다지 잡고 싶게 생기지 않은 나무 울타리라도 잡았다. 울타리에 지탱해 호흡을 고르다 보니 오토바이에서 내린 후에도 핑글핑글 돌던 세상이 어느 정도 균형을 되찾았다.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게 할 거야. 괜찮아.”

허리를 숙이는 것으론 모자랐는지 아예 잔디에 주저앉아 도경의 안색을 살피던 지한이 지지 않고 반박했다.

“형은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할 거 같아서 그러지.”

아파트 단지 앞에서보다 더 엉망이 된 머리 꼴에도 개의치 않는 지한을 보고, 또 본 도경은 아마 더한 꼴일 자신의 머리를 상상했다. 상상만 하고 만지지는 않았다.

“진짜로 괜찮아.”

머리 모양이 좀 망가졌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으니까.

따듯한 기운이 뺨을 어루만졌다. 색을 바꾼 해가 완전히 빛을 거두려면 아직은 시간이 꽤 남았다. 도경은 경사진 언덕에 위태롭게 버티고 선 주택들을 알아보았다. 얼마 전 지한이 도경을 오토바이에 태워 데리고 온 적 있는 곳이었다. 도경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놀랐던.

“그때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는데.”

쨍한 초록색으로 칠해진 옥상이 가장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지붕들도 군데군데 끼어있었다. 무슨 색이든 모든 주택의 옥상엔 공통점이 있었다. 깨끗한 법이 없이 뭐라도 나와 있었다. 장독대, 식물, 빨래 건조대 그도 아니면 누가 쓰기는 하는 건지 의심되는 어린이용 자전거.

“다르게 생겼네.”

“형은 눈도 나보다 좋은가 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지한이 도경의 시선을 따라갔다.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데.”

도경의 옆에서, 그가 잡고 있는 것과 같은 낡은 나무 울타리에 팔을 걸친 지한이 노을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을 찡긋거렸다.

겨울에 만나 함께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고작 그 정도의 시간에 수십 년을 알아온 사람들 그 누구보다 지한이 소중해질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도경은 알지 못했다.

타인을 중요하게 여겨본 적은 있어도 소중하게 여겨본 기억의 유무는 뚜렷하지 않아, 그 말의 의미조차 다는 모르겠다. 아끼는 물건들을 대하는 자세와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으리라고 짐작했다. 망가뜨리고 싶지 않은 것. 자랑하고 싶은 동시에 남의 손에 넘겨주기는 싫은 것.

사람이라면 범위가 더 넓어지겠지.

“형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자주 보고 싶고.

“왜 그렇게 생각해?”

오래 보고 싶고.

“그런, 아까 같은 말 안 하잖아요. 원래…….”

못 보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하지 말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웃고 싶어지고.

“아니요.”

그러므로 그에게 화나고 슬프거나, 어둡고 습하거나 혹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감정은 일체 찾아오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붉고 푸르러 보랏빛이 되어버린 저녁 해를 이기지 못해 자꾸 찡긋거리면서도, 지한은 눈을 다 감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도경과 같은 풍경을 눈에 담으려고. 종종 깨달음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 찾아왔다. 도경은 울타리를 단단히 잡았다. 어떻게 하면 좋지. 진실을 알게 된 너는 절대로 웃지 않을 텐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나무껍질이 살을 찌른 것 같았다. 따가운 느낌이 강해질수록 도경은 손에 힘을 실었다. 피가 난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73

욕실이 조용했다. 시우가 샤워를 마쳤다는 뜻이었다. 지한은 떨던 다리를 멈추고 똑바로 앉았다.

이야기 좀 하자던 시우와 타이밍이 계속 어긋나 일주일 넘게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지한에게 스케줄이란 것이 생긴 탓이었다.

어제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러 갔다가 처음으로 연예인을 가까이서 봤다. 광고에도 자주 나오는 그 배우는 TV에서처럼 잘 웃거나 살가운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배우가 대리의 옆에 있는 지한을 보는 데 할애한 시간이라고 해봐야 일이초 남짓했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어찌나 눈썹을 가파르게 치켜뜨고 훑어보던지 대리가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오히려 지한은 별생각 없었다. 고작 그 정도는 그에게 악의로 다가오지 못했다.

같은 작품에 출연해 합을 맞출 미래를 생각하면 속이 갑갑해져도, 지한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가버린 배우의 태도는 낯설지 않았다. 소현이 선물했던 영화의 감독이나 작가도 처음엔 지한을 처치 곤란한 방해물 취급했었다. 시간이 지나며 어느 부분이 성에 찼는지 태도를 바꿨지만.

오랜만에 연락이 온 무술 감독과는 통화만 했다. 편집 마무리 단계라는 소식과 함께 원래 지한의 것이었던 역을 맡은 배우는 깜짝 우정 출연으로 기자 시사회 날 공개될 예정이라는 궁금하지 않은 정보도 들었다. 기성 배우라 연기는 잘했으나 그 역에는 지한이 더 어울렸을 것이라는, 진심인지 입에 발린 소린지 모를 말도 들었다.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히 받아들였다. 타인의 의도를 그만 왜곡할 필요가 있었다. 오래 보지 못할 사람이라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도경도 아직까지 지한을 만나고 있지 않은가. 만나기만 했나. 집에도 몇 번이나 부르고 침대에서 재워주기까지 했다.

“너 머리 잘라야겠다.”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나온 시우가 지한을 지나치며 말했다. 지한은 괜히 뒤통수를 만졌다. 도경을 만나고 다니느라, 또 최근에는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미용실에 가지 못했다.

세탁기에 옷을 넣고 나온 시우가 싱크대 앞에 서서 컵을 꺼냈다. 컵에 물을 따르는 뒷모습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지한과 붙어 다녀 학창 시절 내내 작다는 소릴 들었던 시우는 막상 혼자 세워놓으면 그렇게까지 작아 보이지 않았다. 지한은 말할 것도 없고, 시우보다도 훨씬 작은 여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커 보일지 가늠이 잘 안 됐다.

아마 어떤 여자들에게는 시우가 강하고 큰, 그래서 짝 삼고 싶은 상대로 느껴질 것이다. 지한이 시우 인생의 오점이라며 악담을 퍼부었던 여자도 악감정을 가져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을 터다. 시우와 가까워질 기회라도 만들어보려면 일단 지한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게 영 틀리기만 한 생각도 아니었다. 지한만 없었으면 시우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내 뒤통수 뚫리겠어.”

“어?”

시우가 컵을 싱크대 위에 내려놓으며 지한이 앉아있는 식탁을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물 줘?”

속마음을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해버리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우가 지한의 속에 오가는 생각을 알 리 없었다. 그럼에도 지한은 잘못을 들킨 것처럼 불안해졌다.

“아니.”

물이 담긴 잔을 가지고 식탁으로 온 시우가 맞은편에 앉았다. 지한을 보는 눈에서는 긍정적인 빛밖에 나오지 않았다. 불안감은 죄책감으로 발전했다. 서로가 없는 각자의 삶을 잠시라도 상상하다니. 말도 안 된다.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 둘은 서로의 인생에서 사라질 수 없었다.

식탁에 올려두었던 지한의 휴대폰이 새 메시지로 화면 밝기를 키웠다. 지한보다 시우의 눈길이 더 빨리 액정에 가 꽂혔다. 온순하기만 하던 눈에 냉랭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쟤 아직도 너한테 이상한 일 소개시켜 준다고 귀찮게 해?”

언제 싸늘하게 액정에 뜬 레오의 이름을 봤냐는 듯 도로 순해진 눈이 지한을 마주 보고 있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눈빛 하나로 시우의 감정을 판단하지 말아야 했다. 시우가 레오를 싫어한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지한을 걱정해서이지, 진심으로 남을 미워하는 성격이라서가 아니었다. 의도를 왜곡하지 말자고 결심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또 같은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다 안 한다고 했어.”

레오는 이미 지한의 드라마 출연 소식을 알고 있었다. 수영복 모델이고 뭐고 앞으로는 지한이 혼자서 결정할 수 없으니 소개시켜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면서 알린 소식에 레오는 절대 인터넷에 과거사를 올리지 않겠노라 설레발을 쳤다. 어쩌다 보니 시우에게도 말하지 않은 정보를 레오에게 먼저 알리게 된 셈이었다. 시우가 알면 당연히 섭섭할 만한 문제였다.

“나, 새로운 일 하게 됐어.”

“무슨 일?”

“드라마.”

그래서 더 미루지 않기로 했다. 레오에게 말하지 않은 정보까지 한꺼번에 다 시우에게 고백하기로, 지한은 마음먹었다.

“드라마? 오디션 봤어?”

“아니.”

방에서 혼자 수십 번 연습했는데도 실전에 옮기려니 절로 다리가 떨렸다. 그래도 해야 했다. 더 미뤘다 시우가 다른 경로로 눈치채게 된다면 섭섭한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도경이 형이…… 해줬어.”

꽂아줬다고 말하자니 어감이 안 좋아서 그냥 해줬다는 표현을 택했다. 말하고 나니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다닌다는 제작사가 드라마 만드는 데였어?”

“그게 제작사가 아니고 사실은 기획사야.”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알아서 줄어들었다. 시우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누굴 팬 적은 있어도 좋아한 적은 없었다. 시우에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털어놓을 일은 더더욱 없었다. 지금까지 지한의 세상은 시우와 시우가 아닌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기에.

지한은 정신 사납게 떨리는 허벅지에 한참 동안 박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짐작과 달리 시우는 무덤덤했다. 일단은 그래 보였다.

“둘이 짜고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아니, 아니야. 도경이 형은 내가 너한테 자기 직업 어떻게 말했는지 몰라.”

시우가 갸웃거렸다. 지한의 말에 틀린 점이 있다고 반박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시우는 말꼬리를 잡는 대신 핵심적인 질문을 했다.

“그런 거짓말은 왜 했어?”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첫 단계라면 거짓말한 이유를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두 번째 단계였다. 더 어려웠다.

“그때는 나도 형이 뭐 하는 사람인지 잘 몰랐어. 직업도 모른다고 하면 네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뭐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랑은 어떻게 친해졌는데?”

말투에 가시가 있다고 느꼈다. 느낌일 뿐이었다. 그리고 설령 진짜로 시우의 말투에 가시가 좀 돋쳤다고 해도 지한에겐 뭐라고 할 자격이 없었다. 거짓말한 쪽은 지한이었다.

“그, 예전에 원장님이 가보라고 해서 갔던 오디션. 거기서 내 연락처 받아간 사람 있었다고 했잖아. 그 사람…… 이랑 친구야, 형이. 그래서 어쩌다가 한 번 짧게. 진짜 그냥 짧게 인사했었는데.”

느리게 말하는 사이사이 지한은 자신이 의도치 않게 새로운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직하되 시우가 알아서 좋을 것 없는 정보는 잘 걸렀는지 체크했다. 아직까진 순조로웠다.

“얼마 안 돼서 또 만났어. 너희 호텔 옆에서. 약속하고 만난 게 아니라 그때는 진짜로 우연히.”

“우연히.”

마지막 말을 따라 한 시우는 지한이 말을 멈추자 신경 쓰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우연히 또 만났고. 그래서?”

그래서. 기세 좋게 시작했건만 벌써 할 말이 바닥났다. 그래서 어찌 됐느냐면, 어쩌다 보니까 술을 마셨고, 어쩌다 보니까 오토바이 뒤에 태웠고, 어쩌다 보니까 도경의 집에까지 갔고. 어쩌다 보니까.

“그래서 나.”

귀신에 씐 것처럼 넋이 빠져서. 어디선가 꼭 맡아본 것 같은 도경의 독특한 향을 잊기 힘들어서. 그의 피부가 부드러워 보여서. 일부러 끝을 올려 그린 것처럼 생긴 눈매가 신기해서. 그를 보면 사리 판단이 잘 안 돼서. 아니, 사실 사리 판단은 평생 잘 안 됐지만, 안 그래도 나쁜 머리가 도경과 있을 때면 복구 불가능한 고물로 전락해서. 그런데 가족과 집안과 돈과 능력을 다 가진 도경이 알면 알수록 쓸쓸하고 힘들어 보여서. 혼자 놔두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서 여기까지 와버렸다는 이야기를 시우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할 방법이란 없었다. 그 어떤 오해의 소지도 없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 형 좋아해.”

그 한 마디뿐이었다.

두근거렸다. 두근거림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지한이 현재 느끼는 두근거림은 좋은 종류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쁜 종류에 가까웠고 더 엄격히 말하자면 공포에 근접했다.

“이제 이해가 좀 가네.”

지한은 시우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너 그날 클럽에서 네가 미쳤다고 한 사람들한테 아무 말도 안 한 거, 거기 다 그 사람 친구들이라 그런 거였구나.”

그날 일을 안 잊었나 보다. 욕이 나올 뻔했다. 시우 때문이 아니라 그 미친 인간들과 그걸 보고만 있었던 스스로 때문에. 패진 못해도 욕은 해줄 수 있었던 건데. 하지만 거기서 지한이 욕을 했으면 무영이 중간에 시우를 내쫓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면 시우는 돈을 못 받았을 것이고.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우는 어려서부터 지한을 위해 안 해준 것이 없는데 지한은 망할 놈들에게 그만하란 한 마디도 못 해줬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변명이나 생각해내고 있었다.

“그날은 내가 정말 미안해.”

“뭐가. 나보다 권도경 입장을 더 생각한 게?”

시우는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말투가 약간 날카롭게 들릴 뿐 말하는 속도가 빨라지거나 언성이 높아지진 않았다. 거꾸로 지한이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우보다 도경의 입장을 더 생각해서 그날 아무 말도 못 했던 거라고? 정말 그런가? 지한은 시우와 도경을 비교한 적 없었다. 그 둘을 비교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나는 누구를 더 생각하고 그런 게.”

“괜찮아. 이제 와서 거짓말할 필요 뭐 있어. 이왕 그 사람 좋다고 말한 거, 다른 것도 다 솔직하게 말해봐.”

취조당하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유쾌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시우의 앞에 있는 컵부터 벽에 던져 깨트리고, 미안하다는데 뭔 말이 그렇게 많으냐고 퍼부으면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퍼부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는 이성적 판단을 하기에 앞서, 아예 그럴 마음조차 안 들었다. 무영에게 머리통을 잡힌 상태로 꼬박꼬박 대꾸나 하고 있던 도경이 생각난 덕도 있었다.

누굴 얼마나 패놔도 합의금 걱정할 일은 절대 없을 도경이 스스로를 너무 다스려서 문제라면 합의금 줄 돈도 없어서 남 빚지게 하는 지한은 그 무엇도 다스리지 못해서 문제였다. 그래놓고 지한을 위해 빚진 시우에게 화풀이까지 한다는 건 밑바닥이었다. 이안에게 쓰레기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바로 지한이 쓰레기였다. 20년간. 꾸준히.

“시우야 나는.”

다 말하려고 했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미 숨긴 게 너무 많았다. 죄를 저질렀다. 벌을 받을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고해성사하고 깨끗해지고 싶었다.

“그 사람도 너 좋대?”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나. 못 들었다. 그렇지만 계속 만나고 싶다고는 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계속 만나고 싶을 리가 없었다. 휴대폰도 사주고 오토바이도 사주고 정장도 사주고 오디션 없이 단번에 피디와 작가까지 만나게 해주었다. 단순히 나열해놓고 보면 도경에게 받은 것들은 소현에게 받은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지한에게는 달랐다. 왜냐하면 소현은 함께 있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사진으로 남기는 것 외엔 지한을 어떤 물건에 맞아도 끄떡없는 샌드백으로밖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도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현에게 받은 돈과 물건들이 대가였다면 도경에게 받은 것들은 선물이었다.

“그런, 그런 거 같아.”

시우만을 위해 살고 싶었던 시기가 있었고,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단 한순간도 모른 적 없었다. 그가 누굴 좋아하게 되어도, 무슨 일을 하게 되어도 시우와의 고리는 끊이지 않으리란 것을.

“내가 다른 사람 좋다고 해도…… 나랑 계속 같이 살 거야?”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는데도 못 꺼지고 시우에게 실시간 위치를 보고하며 살아왔던 것은 결코 지한이 자비롭거나 무뎌서가 아니었다. 연락을 무시하면 참고 참던 시우가 화를 낼까 봐. 지한이 어떤 사고를 치고 돌아와도 편을 들어주고 안아주었던 시우가 더는 못하겠다고 두 손 두 발 들고 지한을 포기해버릴까 봐, 그래서 버림받을까 봐 무서웠다.

보육원에서부터 뭐든 겁내지 않고 잘하는 아이였던 시우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받는 남자가 된 반면 지한은 시우가 없으면 옷 하나도 자신 있게 못 고르는 쓸모없는 남자가 되었으니까.

“네가 누구 좋아하는 거랑 우리가 같이 사는 게 무슨 상관이야.”

식탁에 마주 앉은 이래 처음으로 시우가 웃었다.

“우린 그런 거 하는 사이 아니잖아. 기억 안 나?”

기억했다. 한시도 그날을 잊은 적 없었다. 시우를 들먹이는 새끼의 멱살을 잡아 던지려다 그날따라 알맞은 타이밍에 나타난 시우에게 제지당해 화장실로 끌려왔다. 골치 아픈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던 아이들이 하나둘 화장실을 비워주었다.

아까 그 새끼가 나보고 너랑 이상한 짓 하는 거 봤다 그러잖아, 지한은 혈기를 주체 못 하고 씨근덕댔다. 좆도 아닌 새끼가 씨발 시우 너를……. 흥분하면 더 두서가 없어지는 지한의 말을 끊고, 시우가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나랑 그런 거 한다는 소리가 그렇게 기분 나빠?」

뭐? 황당해하는 지한을 바라보는 시우는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그냥 안 했다고 하면 그만인데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뭐가 그렇게 화나? 시우는 진심으로 지한이 화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재차 물었지만 지한은 오히려 그런 시우를 알 수 없었다. 지한이 시우에게 하도 집착한 나머지 어쩔 땐 엄마 취급하고 어쩔 땐 애인 취급한다는 소문이 얼마나 지한을 수치스럽게 하는지 모르지 않으면서.

“기억나.”

너를 더럽게 얘기하니까 그렇지! 시우를 걷어찰 수 없어 화장실 문을 대신 걷어찼다. 지한에게 하나뿐인 시우를 그렇고 그런 취급하는 새끼들이 증오스러웠다. 다시는 지한과 시우를 우습게 여기지 못하도록 교육시켜 주려던 것뿐인데 그 마음을 몰라주는 시우에게 화가 났다.

화장실에 있는 모든 도구를 걷어차려는 지한을 붙든 시우는 잠들지 못하는 지한을 안아주곤 하는 밤처럼 허리에 양팔을 감아오며 물었다. 나랑 그런 짓 하면 이상한 거야?

“난 너한테 그런 거 바라고 같이 사는 게 아니야.”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툭하면 수업에 빠지는 지한을 찾아오라고 시키는 선생은 없었다. 툭하면 지한을 진정시키느라 사라지는 시우를 찾아오라고 시키는 선생도 없었다. 지한은 잘 몰랐다. 어째서 그들이 구석 칸에 들어가 문을 닫게 되었는지. 언제 지한이 변기 뚜껑에 걸터앉게 되었는지, 어떻게 시우가 지한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되었는지도.

그들의 입술은 겹쳐져 있었고 입가로 미처 다 삼키지 못한 침이 흘렀다. 앞섶을 문지르다 자연스럽게 바지 안으로, 그리고 다시 속옷 안으로 들어오는 손길은 어디서 미리 배우고 온 듯이 능숙했지만 그런 것을 이상하게 여길 여유는 없었다. 누구에 의해서도 그렇게 만져진 적 없으며 누구를 그렇게 만져본 적도 없는 사춘기 소년의 몸은 주전자 속 물처럼 빠르고 요란하게 끓어올랐다. 들썩이는 몸을 따라 낡은 변기 뚜껑이 삐걱거렸다. 그만, 이거, 그만해, 그만할래, 제발. 효력 없는 애원이 헐떡이는 소리로 바뀌었다.

“알아. 네가 그런 걸 바란다는 소리가 아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었던 행위를 중단한 쪽은 지한이었다. 그는 사정한 지 몇 분 만에 다시 단단해지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 강렬한 의지로 멈추었다. 멈추지 않을 시 그들을 기다리는 종착지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발기한 성기를 꽂아 넣고 흔드는 경우밖에 없었다. 흥분한 남녀가 두 몸을 하나인 양 결합시키는 것처럼.

잘못됐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시우는 지한이 하고 싶어 하는 한 그 어떤 행위도 거부하지 않을 테지만 바로 그래서 거부감이 일었다. 시우에게 그런 짓을 할 순 없었다. 그랬다간 같은 학교 놈들이, 옆 동네 놈들이 그 외에 지한만 보면 시비를 걸고 싶어 하는 수두룩한 적들이 말하는 징그러운 새끼가 되고 말았다. 그는 시우를 밀어냈다. 우리, 우리 이런 거 하면 안 되잖아…….

“알면서 뭘 걱정해?”

손에 힘을 줘 밀어내는 지한을, 구겨진 셔츠와 벌어진 바지를 시우는 한동안 말없이 보기만 했다. 이런 걸 못 하는 지한은 전처럼 좋지 않다고 하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 났다. 그런 게 아닌데. 시우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인데. 억울한 마음이 커질수록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시우는 숨이 차려는 지한의 목을 끌어안고 그를 달래주었다. 맞아, 우린 이런 거나 하는 사이 아니지. 네가 나랑 안 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섭섭해서 그랬어. 내가 미안해.

“모르겠어. 그냥.”

“바보네.”

스물여섯이 되고 생각하니 10대의 지한에게 대체 그런 짓은 무엇이었는지 아리송했다. 가족끼리는 하지 않는 짓. 친구끼리도 하지 않는 짓. 그러므로 시우와는 하면 안 될 짓. 하지만 도경과는 할 수 있는 짓. 상대를 아프게 할까 봐 애초에 포기해 버렸는데 이제는 뒤집혀 지한이 아픈, 그런데 아파도 또 하고 싶은.

“아참. 네가 그 사람 얘기해서 생각났어.”

시우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쇼핑백을 가지고 나왔다. M호텔과 같은 이름을 가진 백화점 로고가 들어간 백이었다.

“이게 뭐야.”

“사실 이거 때문에 내가 계속 얘기 좀 하자고 그랬던 건데 오늘 네 말 듣고 나니까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오해?”

쇼핑백 안에는 하얀 털이 들어있었다. 도경과 키스하는 지한의 머리카락을 물어뜯어 놓은 작고 앙칼진 개가 잠시 의식 정중앙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김무영이 나한테 이거 갖다 주면서 그랬어, 도경이가 버리라고 한 걸 자기가 안 버리고 있었다고. 난 또 그래서 너랑 권도경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줄 알았지.”

지한은 쇼핑백 안으로 손을 넣었다. 하얀 털의 정체는 그도 이미 아는 것이었다. 시우가 작년 생일 선물로 줬던 목도리.

“근데 김무영이 뭘 잘못 안 건가 봐. 권도경이 왜 네 물건을 버리라고 하겠어?”

목도리를 두고 온 장소. 무영의 사무실이었다. 도경이 갑자기 지한을 문에 밀치고 키스했던 그곳. 숨이 턱까지 차서 목도리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아예 잊고 있었던 목도리를 언제 다시 기억했더라.

「참, 지한 씨 그날 하고 오셨던 목도리요. 중요한 물건인가요?」

그날 이후 처음 마주친 바에서 술을 얻어 마시고 나오던 길.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날씨에도 맨손과 목덜미를 드러내놓고 있던 도경이 먼저 물었더랬다.

「그런데 어떡해요. 그 목도리 누구 건 줄 몰라서 버렸다고 제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군데군데가 빨갛게 물든 도경의 피부를 만져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목도리 따윈 어디에 있든 궁금하지 않았던 새해 전야.

지한은 무영의 사무실에 목도리를 두고 왔다. 도경은 아마도 무영일 것으로 추정되는 친구가 이미 그 목도리를 버렸다고 했다. 근 반년이 지난 후 갑자기 무영이 버렸다던 목도리를 시우에게 돌려주었다.

도경과 무영 중 한쪽이 거짓말을 했다. 상식적으로도, 경험상으로도 무영이 거짓말을 했을 확률이 높았다. 지한이 마음에 안 들어서, 혹은 귀찮아서 도경에게는 그냥 버렸다고 둘러댔다.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가정하는 편이 그럴싸했다.

납득이 어려운 대목은 그다음이었다. 왜 얼마 하지도 않을 물건을 여태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와서 시우에게 그것을 돌려주며 도경이 버리라고 했단 사족을 덧붙인단 말인가. 사람 많은 대낮에 저를 보닛에 던진 지한에게 복수하려고?

고작 그런 엉성하고 타격 없는 거짓말로?

시우가 머리통을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지한이 시우에게 도경의 직업에 대해 한 거짓말을 도경은 모른단 이야기를 들은 직후 갸웃거렸던 것처럼.

“어쨌든 찾았으니까 잘 됐다. 그치?”

지한은 목도리를 움켜잡았다. 조금 전만 해도 작은 개를 연상시켰던 목도리가 갑자기 퍼즐 조각으로 보였다. 완성된 그림에서 어쩌다 운 없이 떨어져 나온 조각.

“그러네.”

손에서 목도리가 빠져나갔다. 목도리를 쇼핑백에 쑤셔 넣은 시우가 옷과 침구류를 넣어두는 방으로 들어갔다. 반년 만에 주인에게 돌아온 물건은 다시 반년간 어두컴컴한 방에 처박혀있을 운명이었다.

지한은 베란다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우와 부엌에서 짧게 대화를 나눴던 봄날이 문득 뇌리를 채웠다. 얼른 날이 따듯해졌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던 그날과 비교하면 덥다고 해도 무방한 계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이 더 따듯했던 것만 같다.

이상하게 오늘이 더 서늘했다.

로 블로(Low blow)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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