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reak
#68
「망하는 놈들이 왜 망하는 줄 알아?」
동급생을 반 고자로 만들어놓은 무영 때문에 미국까지 호출된 빅토리야는, 정학당한 자식을 고속도로 옆 벌판에 무릎 꿇려 놓고 말했다.
「돈이 없어서? 돈은 벌 수 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러면 운이 없어서? 운은 누구나 있다 없다 하는 거야. 그걸 얼마나 써먹느냐 아니냐는 자기 능력에 달렸지. 그럼 왜 망할까?」
교감은 무영이 같은 학년도, 겹치는 수업도 없는 학우에게 상해를 입힌 건에 대한 입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저희는 인종차별을 가벼이 다루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물리적 폭력도 결코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설령 그것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불거진 사고였다고 해도 말입니다.
「눈앞만 보고 사니까 망하는 거야. 지금 당장 내 손안에 들어올 몇 푼, 지금 당장 안 가지면 다른 놈한테 가버릴 것 같은 여자, 간발의 차로 경매에서 뺏긴 그림. 못 가지면 죽겠는 거야 끝도 없지. 세기 시작하면.」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오간 것은 맞았다. 하얗기만 한 네 XX보단 동서양 섞인 내 XX가 더 크다, 라는 말도, 그렇게 자신 있으면 어디 내 앞에서 까고 세워봐 이 정박아 새끼야, 라는 말도 무영이 먼저 하긴 했지만. 퇴학당하면 그냥 죽은 목숨이라 치고 러시아로 돌아가 사격부터 다시 배워야겠다는 마음의 준비도 마쳤더랬다.
「근데 그게 함정이거든. 지금 당장 못 가진다고 해서 그게 사라지는 게 아니야. 오늘 못 가지면 사라져 버리는 거, 그딴 건 애초에 욕심낼 가치가 없어.」
무영을 퇴학으로부터 지켜준 것은 다름 아닌 그 백인 놈이었다. 무영에게 고환을 뜯기기 직전까지 갔던 그놈은 일생일대의 원수를 퇴학시키기보다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둘 사이에 정확히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를 선생들에게 밝히느니 그냥 인종차별주의자 대 다혈질 유학생의 해프닝으로 끝내겠다는 의지가 아주 잘 느껴지는 선택이었다.
「넌 내 아들이지만 알렉산더 킴의 아들이기도 해. 그 남잔 십 년 치 돈에 발정 나서 이십 년 삼십 년어치 기회를 날려먹는 인간이야. 네 몸속에 그 피가 흐른다는 걸 잊었어?」
남자들은 그 뭣도 아닌, 끽해야 일시적으로 팽창해 남의 몸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쪼그라드는, 난자까지 도달하지 않고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자와 노폐물이나 배설하는 부위에 집착했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살덩이에 뇌를 지배당해 평생을 말아먹는 케이스가 적지 않았다.
「잘못했어요.」
무영은 김 회장의 다른 자식들처럼 순혈 한국인도 아니었고, 빅토리야의 조카들처럼 회색 눈을 가진 러시아인도 아니었다. 오롯이 혼자 잘 살아남으려면 그깟 욕정을 누르는 정도는 일도 아니어야 했다. 그래서 특히 더 노력했다. 찰나의 충동을 못 참아 유산을 덜 받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끔.
「난 내 피가 한심하게 구는 걸 봐줄 생각 없어. 그저 그런 남자로 키울 거였으면 그 못돼빠진 여자한테 널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빅토리야의 말대로 운은 누구에게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변덕스러운 놈이었다. 그해 무영의 운이 없었던 것뿐이다.
이안을 따라 도경의 아파트에 놀러왔던 그 백인 놈은 첫인상부터가 별로였다. 미식축구부 쿼터백의 친동생인 그놈이 필요 이상으로 이안의 팔이며 등을 건드리기에 너는 네 형에 비하면 아시아인들이 먹는 허브처럼 생겼다고 시비를 걸었다가 싸움이 붙었다. 무영에게 밟힌 과일이 카펫에 뭉개지면서부터 도경이 시체처럼 질려 손을 떨기도 했고, 그걸 본 이안이 그만 좀 하라고 징징거리기기도 해서 더 싸우진 않았다. 그 자리에서는.
「넌 그저 그런 놈이 될 수 없어.」
그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어느 스터디 시간이었다. 그놈이 건물과 건물을 잇는 복도에서 친구들과 떠들고 있었다. 한국인들 사이에선 결코 왜소한 편이 아니고, 귀엽단 소린 들어도 예쁘다는 소리는 안 듣는 이안이 서양인들에게 종종 여성스럽게 생겼다고 평가받는단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안이 같은 반 친구라고 소개한 그놈이 뒤에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시작은 다른 놈이 했다. 도경이 남자인지 아닌지 궁금하다면서, 그 새끼 사실 벗겨보면 키 크고 골격 좋은 여자가 아닐까 하는 친구에게 이안과 같은 반인 백인 놈이 말했다.
도경은 네가 옷 벗기면 칼로 자기 배를 찌를걸. 사무라이처럼. 걔보단 이안이 낫지. 얼굴만 보면 구멍이 앞에 달렸든 뒤에 달렸든 상관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고. 얼마나 대단한 집안 아들을 데려다놔도 동양인이라고 무시할 새끼들이 도경을 들먹거릴 땐 멀쩡했던 심장이, 이안의 이름을 들으면서부터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내 아들로 태어난 이상 너는 무조건 특별한 남자가 될 거야.」
그러고 나서 눈을 뜨니 다리 사이에 쓰러져 급소를 움켜쥐고 뒹구는 놈과 혼비백산해 흩어진 놈의 친구들이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라고 선생들에게는 말했지만 사실 무영은 그 어떤 기억도 잃지 않았다. 전 인종을 통틀어 몸싸움을 제일 못한다고 소문난 백인 놈들에게 다가가 네 하얀 XX, 라는 표현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순간부터 터지기 직전에 이른 불알을 놔주던 순간까지의 기억이 모조리 살아 펄떡이고 있었다.
「그래서 양키 새끼가 너한테 진짜로 한 말은 뭐지?」
물론 빅토리야 앞에선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물리적 폭력에 관해 특히 엄격한 교칙을 뻔히 알면서도 혈기를 참지 못한 머저리보다는, 오늘 못 가져서 죽을 것 같은 상대 하나 때문에 이성이 잠시 나갔다 돌아온 사나이가 그래도 비교적 덜 죽이고 싶지 않을까 해서.
「백인인 줄 알고 설치는 동양인이라고 했어요.」
빅토리야의 장지갑이 뺨에 날아들었다. 고개가 돌아갔다. 거짓말하면 뺨을 맞는 것은 그녀의 집안 전통이었다.
「다시.」
「……그 새끼가 이안을 나쁘게 말했어요.」
「지능이 떨어진다고 하기라도 했어? 들었을 때 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다 험담은 아니야.」
차 한 대가 지나갔다. 어느 인종을 몇 명 태우고 있었든, 눈이 쌓인 허허벌판에서 무릎 꿇고 있는 소년과 그 앞에 선 여자를 보고도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런 말이 아니었다고요. 그것보다 훨씬 더!」
「네가 누구를 생각하면서 밤을 지새우는지 까진 내 영역이 아니지만.」
빅토리야가 지갑으로 무영의 입을 쳤다.
「자꾸 널 네 아빠처럼 행동하게 만들면 내가 가만두지 않아. 남자든 여자든.」
무영은 빅토리야의 경고를 알아들었다.
그 뒤로 다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빅토리야가 바라는 대로, 그리고 앞으로 많이 남은 스스로의 인생을 위해서 무영은 타협과 친해졌다. 도경을 때려눕히고 싶은 날엔 아무 클럽에나 들어가 몸이 부딪히는 놈을 대신 팼고 이안과 자고 싶은 날엔 슈퍼카를 끌고 나가 키가 큰 여자를 태웠다. 한국 여자는 암만 커도 이안에 비하면 작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는 가능하면 서양 여자를 골랐다. 그 정도로 성에 안 찰 땐 남자를 찾아나섰다.
계속 그렇게만 살다간 언젠가 득도라도 할까 봐 걱정한 적 있거늘.
도경의 회사 앞이고, 대낮인 데다가, 도경은 아니더라도 그와 엮여있는 놈을 때린 것은 빅토리야보다 김 회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그 줘도 안 먹을 고아 새끼가 이안의 손등을 시뻘겋게 만들어놨지 않은가?
아마 빅토리야가 한국에 있었으면 지한보다 무영을 먼저 쏴버리려 들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아래 체급인 지한에게 선제 공격을 당하고 보닛에 처박히기까지 하다니. 만만하게 본 탓이었다. 상대를 잘못 판단했다. 지난 라운드는 무영의 실격패였다.
한동안 술은 입에도 못 댔다. 호텔 김 대표는 무영이 술을 마시러 올까 봐 식음료부서에 지령까지 내렸단다. 하여간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무영은 김 회장과 안 닮아 감사한 자신의 얼굴을 소중히 다뤘다. 보호대를 찬 상황에서 의사가 마시지 말란 술을 마시는 알코올중독자는 아니었다.
천만다행으로 대공사까진 안 갔다. 그래도 보호대며 밴드를 붙이고 있느라 죽을 맛이었다. 답답해서 밖에 한 번 나갔다 사람들 시선과 통증에 그 뒤론 쭉 두문불출했다.
오늘 욕실 거울로 멍이 다 빠진 얼굴을 보면서, 무영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도경이고 나발이고 그냥 지한을 납치해서 고문시켜 버려? 어디 털어놨다간 경찰에 신고당할 만큼 구체적으로 발전한 상상은 수술 당일 병원 복도에서 시작되었다. 간단한 수술이며 하루만 입원하면 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온 무영은 하얀 병원 벽에 발자국을 내지 않으려 닥치는 대로 머릿속을 바쁘게 만들었다.
지한을 패대기쳐 밟는 장면이 주를 이루는 상상 속에선 총도 등장했고 가위도 등장했다. 그 어떤 날고 기는 무기를 등장시켜 본들 마무리는 헬멧이었다. 무영의 코를 골절시킨 그 헬멧으로 지한이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후려치는 상상이 수술 전에도, 후에도,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다음날에도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영을 사로잡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새낄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나지. 러시아에서 한 열 명 귀국시킨 다음에 각자 다른 델 탈골시키게 할까. 너는 손가락, 너는 발목, 너는 갈비, 너는 팔꿈치, 너는 어깨.
“사장님.”
아니지. 무영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온 시우가 무영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섰다. 우지한 그 새끼를 직접 밟는 것보단 그냥 여기서 이 좆만 한 새낄 잡아버리는 게 더 효과적일지도.
“저 잠깐 여기로 나오라 그러셨다고.”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네. 사고회로에 전류가 흘렀다. 무영은 시우를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눈으로 훑고 올라왔다. 바지의 허벅지 부분이 꽤 남았다. 유니폼도 큰 사이즈가 아닌데 팔이 헐렁해 보였다. 그나마 살이 좀 붙은 얼굴은 통통함과 거리가 먼 계란형이었다. 몇 대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한 대면 바로 고꾸라지게 생겼다. 진짜 여기서 확 패버려?
“내가 네 선물 가지고 왔어.”
가만. 더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무영이 부른다고 제 발로 걸어 나온 이 새끼를 기절시켜 어디 3대 1, 4대 1로 놀 상대를 구하는 데다 보내버린다면? 그러고 나서 지한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풀렸다.
“선물이요?”
그러라고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는 것이었다. 실행으로 옮기기엔 너무 많은 인력과 시간과 공이 들어가 하기 싫은 일들. 웬만하면 상상력에 기대어 대리만족하라는 목적으로다가.
“자.”
“이게.”
“네가 우지한한테 준 선물.”
무영이 내미는 쇼핑백 안을 본 시우는 내용물을 꺼내보지도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지한이는 그 목도리 잃어버렸어요.”
그것참 대단한 신용이었다. 지한이 거짓말한 줄 알면 아주 까무러칠 만한.
“여기 이거, 네가 한 거 아냐?”
귀찮아서 쇼핑백째 넘기고 가려고 했는데 못 믿겠다니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목도리를 꺼내 펼쳤다. 전체적으로 부스스한 목도리는 끝부분만 일반 목도리처럼 얇아진다는 특징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자수가 놓아져 있었다. J, H. 무영도 이번이 아니었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만큼 작게.
“나는 돌려줬으니까 갈게.”
쇼핑백은 시우의 발치에, 목도리는 어깨에 던지고 돌아선 지 1초나 지났을까. 따듯한 감촉이 손목을 감아왔다. 설마 하고 손목을 내려다본 무영은 웃고 말았다. 시우가 겁도 없이 무영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 찾으신 거예요?”
별 힘들이지 않고 빼낸 손을 시우의 정수리에 얹고, 무영은 말했다.
“누가 내 몸에 손대라고 했어.”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항변하려는 것이었는지 사과하려는 것이었는지 모르겠고, 딱히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대로 옆머리를 잡아 벽에 가져다 박았다.
“야.”
질끈 감겼던 눈이 예상보다 빠르게 떠졌다. 멀쩡하게 대화하던 무영이 예고 없이 손을 올리면 보통 당하는 쪽은 제일 먼저 눈빛으로 기었다. 시우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속에서 뭔 난리가 나고 있든 겉으로 봐선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이것 봐라. 주먹 휘두르는 새끼 옆에서 보고 배운 게 있단 거야, 뭐야.
“너 같은 건, 정말, 진짜, 너무 입맛이 아니라.”
머리에서 손을 뗀 무영은 시우의 이마를 밀었다.
“놀릴 마음 안 생겨. 그걸 많이 고마워해.”
그쯤하고 돌아서려는 무영을 방해한 것은 시우였다. 무영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교훈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이번엔 비상구만 가로막았다.
“이거 어디서 찾으셨는지 알려주세요.”
어깨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목도리를 잡아채며 시우가 물었다. 여전히 놀릴 마음은 안 생겼다. 그런데 때릴 마음은 생길락 말락 했다. 계단으로 밀어버릴까. 안 된다. 친가 식구 중 유일하게 무영을 챙기는 김 대표의 구역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내일이 없는 놈에게나 어울렸다.
“우지한이 내 사무실에 놓고 갔어.”
“그럼 지난번에 제가 본 게 이 목도리에요?”
“그걸 이제 알았어?”
“이걸, 왜 하고 오셨던 거예요?”
봐주니까 건방지기가 하늘을 찔렀다. 무영은 표정을 굳혔다.
“도경이가 나한테 이거 버리라고 했어.”
시우가 미간을 좁혔다. 그 얼굴에 주름이 지는 광경은 아마 처음 보는 듯했다.
“권도경 씨요?”
“근데 내가 안 버리고 다시 줘. 넌 나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오늘 안에 감사하단 말을 듣긴 글렀다. 이제 정말 가보려고 문고리를 잡은 무영은 낮게 영어로 욕을 뱉었다. 시우가 비키지 않고 있었다.
“비켜, 나 나가게.”
“지한이가 사장님 사무실에 왜 들어갔어요? 그것만.”
“나도 몰라. 그건 네가 집에 가서 우지한한테 물어봐.”
비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손으로 팔을 잡아 밀었다. 가벼워서 그런지 몇 발자국이나 밀려났다. 무영은 비상구를 빠져나왔다. 오늘 집에 돌아간 지한이 시우에게 어떤 식으로든 추궁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니 수술받은 코가 잠시나마 잊혔다.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며칠 전 홧김에 새로 뽑은 차를 몰고 돌아가는 동안 잠시 정지되었던 상상이 재개되었다. 암만해도 시우를 족쳐서 그 꼴을 지한에게 보여주는 것만으론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역시 지한도 제대로 조져놔야 했다. 주먹 하나만 믿고 설치는 새끼는 살려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죽여달라고 빌게 해 마땅했다. 패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거기서 더.
지한은 시우보다 크고 맷집도 좋으니까 보통 놈들론 안 되겠다. 하드코어 영상에 출연한 전적이 있는 놈들만 골라다가 부르는 거다. 싹 다 무영만 하거나 더 큰 서양 애들로. 그리고 죽사발을 만든 다음에 의식만 간당간당하게 붙어있는 상태가 됐을 때 놈들이랑 돌아가면서 하라고 하면 그땐 제아무리 지한이라도 빌빌 기지 않을까? 부어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기는 지한을 볼 수 있다면, 몇억은 공중에 분해되어도 아깝지 않을 텐데.
어차피 상상이지만, 만에 하나 실현 가능하다고 해도 도경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한이 당해서 슬픈 게 아니라 제가 끼고 돌겠다고 공표한 대상을 무영이 기어이 건드렸다는 것에 더 거품을 물 인간이었다, 도경은.
공감 능력 떨어지는 새끼. 지 애비라면 치를 떨고 싫어하는데, 무영이 볼 때는 현경보다 도경이 더 권 회장과 비슷했다. 생긴 건 딴판이라도 하는 짓이 여러모로 겹쳤다. 남 약 오르게 하는 실력이나 기본적으로 사람을 성가셔하는 자세나.
기분이 좋다 말았다. 지한이 조져지는 상상에 푹 빠져 잊고 있었다. 그날 도경도 무영을 때렸다. 손 크기가 제법이라 그랬는지 딱 한 대만에 귀가 먹먹해졌었다. 부모 잘 만나서 천하에 제일 다행인 놈. 부모만 아니었으면 진작 누구에게라도 얻어터져 얼굴이 다 무너졌을 것이다.
전자담배를 꺼내 물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무영은 번호를 누르고 현관을 열 때까지도 방문객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며 이중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온 집 안에 퍼진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짜고 기름진 냄새.
“형 입에 그거 뭐야. 담배지!”
긴 빵조각을 입 안에 넣으려다 내린 이안이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무영의 입에서 나오는 증기부터 지적했다. 주인 없는 아파트에 들어와 음식을 시켜먹은 것에 대한 미안함은 쥐꼬리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안이 왔어? 온다고 말하지.”
“전자담배도 담배라니까, 내가 몇 번 얘기해야 기억할 거야? 건물 안에서 피우면 안 된다고.”
잔소리가 이어졌다. 담배가 무영의 재킷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이안은 빵을 씹었다. 멀리선 그냥 긴 빵인 줄 알았는데 피자와 함께 시킨 치즈스틱이었다.
“어, 맞다. 형 코 괜찮아? 러시아 누나가 그러는데 막 이만한 프로텍터 끼고 있었다며? 수술했어? 설마 부러진 거야?”
“지금 내 코 안 괜찮아 보여?”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수술 여파로 눈 밑까지 멍으로 시뻘게진 꼴을 보여주기 싫어서 일부러 말 안 했다. 무영이 왔는데도 안 나와 보는 니나가 그새 이안에게 입을 털었나 보다.
“왜 다쳤다고 말 안 했어. 연락했으면 내가 병원에라도 갔지.”
“하루 있다 나왔는데 뭘 와.”
봐주기 힘든 꼴의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아예 연락하지 않은 대상에 친구들 전부가 해당됐다면, 피부가 제 색을 되찾은 후에도 이안과 만나지 않은 데엔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현재 무영은 겉만 회복되었지 내상이 다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오늘만 해도 시우 앞에서 폭주할 뻔했다. 누가 옷깃만 건드려도 손부터 나가고 싶어 하는 상태로는 이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따금 패고 싶어질 때까지 우는 소리를 할 줄 아는 녀석이었으므로.
“형, 근데.”
“응.”
그렇지만 무영은 장난으로라도 이안을 때리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서른하나가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안은 한 대만 때려도 도망쳐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겁쟁이였다.
“뭐. 말을 하세요. 쳐다보지만 말고.”
“도경이 형이랑…… 화해 안 해?”
화해. 하나도 안 웃겼지만 웃음 비슷한 것이 비실비실 삐져나와서, 무영은 그냥 웃었다.
“걔가 기어와서 빌면 생각해볼게, 화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쫌.”
“아니. 그것도 안 충분해. 걔가 기어와서 내 거 빨아주면, 그러면 할 수 있어. 화해.”
비위가 상한다는 듯 스틱 꽁다리를 상자 뚜껑에 던진 이안이 콜라 캔을 따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형 이번에 한국 들어와서 이상한 소리만 엄청 배운 것 같아, 작년 봄에만 해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뭐가 이상해. 네가 도경이랑 하고 싶은 것도 그런 거잖아.”
컥! 콜라가 목에 걸렸는지 이안이 컥컥거렸다. 칠칠찮게 콜라가 턱이며 바지로 다 흘렀다. 피자집 로고가 새겨진 냅킨으로 닦아줄 땐 얌전히 있더니 다 닦자마자 큰소리가 났다.
“그런 거 아니야!”
“도경이 거 안 빨고 싶어? 아, 걔가 네 거 빨아주는 게 좋아?”
“형!”
시끄럽다. 조금만 힘을 잘못 줘도 아픈 코가 엄청나게 욱신거렸다. 무영 본인도 모르게 얼굴 근육에 힘이 들어간 듯했다.
“걔랑 하고 싶은 거 아니면 이거 다 뭐 하는 짓이야? 우지한 얼굴은 왜 긁고 내 앞에서는 왜 울어. 왜.”
빽빽대던 기백은 어디로 가고, 이안은 금세 울상을 지었다.
“왜 나한테 화내……?”
“화 안 냈어.”
그만하고 닥쳐야겠다. 코도 아프고, 코 때문에 편한 자세로 자지 못해 누적된 피로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안에게 논리를 바라느니 김 회장이 물려준 별장에서 무영만 기다리는 셰퍼드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편이 스트레스 지수는 낮을 것이다.
이안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축 처진 어깨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무영이 형.”
“왜.”
“도경이 형이랑 우지한…… 잤겠지?”
무영은 손마디로 눈두덩 위를 살살 눌렀다. 도경과 지한이 각각 다른 데서 만신창이가 되는 상상은 즐거워도, 그 둘이 붙어먹는 상상은 전혀 유흥거리가 못 되었다. 정신병자와 떨거지의 결합은 정말이지 머릿속에 넣고 싶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왜. 너도 껴서 셋이 하고 싶어?”
“도경이 형이 위에서 했을까?”
이토록 강렬하게 이안의 입을 봉쇄해 버리고 싶은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다른 덴 됐고 딱 주둥이만 한 대 때리면 조용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한숨 푹 자고 정신 차리게 침대에다 던져놓고 올까. 자란다고 자지도 않겠지.
“위에서…… 네 말은 걔가 넣었을까, 이거야?”
“우지한이 밑에서 했으면, 그러면 나 받아들일 수 있어.”
말해줄 수도 있었다. 무영의 코뼈가 골절됐던 그날 지한이 밀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하반신을 보닛에 세게 부딪치고 나서부터였다고. 신체 중 제일 살 많은 부위 좀 차에 갖다 박았다고 거시기를 차인 놈처럼 찡그리더라고. 그 둘이 섹스를 했다면 아마 이안이 원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라고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는 무영은, 그러나 입을 닫았다.
도경이 지한의 뒤에 넣었길 바라는 소망만큼은, 아무리 이안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도 동의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너는 그런 게 왜 궁금해?”
“형이 몰라서 그래. 남자끼리 하면 아래 있는 사람이 얼마나 고생하는데. 처음엔 좀만 잘못해도 피 보지, 그리고 자세도, 아니, 힘은 위에서 더 쓰는구나. 근데 어쨌든 하다 보면 좀 그렇단 말이야. 듣는 소리도 그렇고.”
“듣는 소리가 뭐야.”
“그런… 그런 거 있잖아, 뭐. 안에. 싼다. 만다. 이런 거. 몰라 다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건 별로. 기분 나빠.”
무영은 이안의 바지 앞섶을 힐끔 보았다. 도경과 하고 싶은 것을 참다 드디어 정신을 놔버렸나 했는데 일단 겉으로 봐선 전혀 선 것 같지 않았다. 이안이 얼마나 돌았든 대화 주제가 도경과 지한으로 돌아가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안에 싼다, 만다 하는 소리가 기분 나쁜 줄은 어찌 그리 자세히 아시는지도 캐물을 겸.
“너는 위였어, 아래였어?”
“나, 뭐? 나, 나는 안. 아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섹스를 안 해봤다고?”
“아니, 그게 그런 말은 아니지만 그런, 그런.”
“여자랑만 해봤다?”
“내가 왜! 그거를 말해야 돼, 안 말해.”
안 말해준다니 아쉬웠다. 첫 경험에 집착하는 취미는 없어도 어떤 놈과, 혹은 년과 했는지 알고 싶을 순 있는 것이었다. 안전하게 했는지, 몹쓸 짓은 안 당했는지 혹시 협박당하는 일은 없었는지도. 세상은 넓고 목을 따버릴 인간들은 널렸다.
“이안. 그렇게 힘들어?”
이안의 눈물겨운 순애보는 길을 잃어도 너무 잃은 데가 있었다. 그렇게 좋으면 직접 하고 싶어야 정상이지, 밑에서 하면 힘드니까 다른 놈이 밑이었어야 한다고 희망하는 것은 아무래도 돌아버린 사람의 결말이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도경이한테 주사도 놓을 수 있어. 비싼 것만 맞혀서 너한테 가져다줄게.”
“뭐라고?”
“대신 하루가 끝이야. 다음날 도경이가 너랑 나를 고소할 거 같아.”
“아아악!”
팔을 감싸며 일어난 이안이 무영의 방 쪽으로 도망쳤다. 다른 방에서 쓰레기통을 들고 나오다 이안에게 밀쳐진 니나가 이번에는 또 왜 저러냐고 러시아어로 혼잣말했다.
무영이야말로 알고 싶은 바였다. 빅토리야에게 보고 들은 것은 전부 일러바치는 러시아 여자는 피자와 치즈스틱으로 난리가 난 테이블에 한심한 눈초리를 던졌다.
무영은 손끝으로 콧등을 쓸었다. 욱신거렸다.
#69
입고 온 옷을 쇼핑백에 대충 구겨 넣고 문을 연 지한은 등 뒤에서 나는 휴대폰 진동음에 다시 돌아섰다. 선반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깜박하고 그냥 나갈 뻔했다. 화면에 자주 보기 힘든 이름이 떠있었다.
[지한아 요새 뭐 하고 사냐]
소현이 꽂아줬던 영화의 무술감독이었다. 형식적인 새해 인사를 주고받은 뒤로 연락이 끊긴 지도 어느새 반년이나 지났다. 미리 보기로 보이는 내용이 그냥 안부인사 같아 확인을 미뤘다.
무술감독에게 온 메시지 말고도 지한의 확인을 기다리는 메시지는 또 있었다. 몇 시간 전 시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점심시간이면 보통 시우가 기상하는 시간이었다.
뭐 그리 급한 할 이야기가 있어 일어나자마자 지한을 찾았는지 몰라도, 일찍 나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시우에게 붙잡혔으면 뭘 하러 나가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전엔 풀려나지 못했을 것이다.
백화점 거울 속에서나, 방송국 화장실 거울 속에서나 정장 차림의 지한은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자세도 이상하고 표정도 이상했다. 어딜 봐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헤매는 시선이 제일 볼썽사나웠다.
이제 와서 안 하겠다고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꾸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대충 넘긴 후, 지한은 화장실을 나섰다. 유 대리가 알려준 대로 리셉션에 가 팀장의 이름을 댔다. 확인 통화를 마친 직원이 지한의 신분증을 가져가고 ‘방문’이라고 쓰인 카드를 내주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몇 번이나 심호흡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자꾸 입이 벌어졌다. 호흡이 부족해지려는 낌새였다. 소현의 눈에 띄었던 오디션에서도 이 정도로는 긴장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오늘의 자리는 오디션도 아니었다.
유 대리는 지한에게, 가서 시키는 것만 안 튕기고 다 하면 된다고 했다. 도경은 그런 말도 안 했다. 웃지 말고 가만히만 있으면 돼. 그렇게만 말했다. 도경보단 유 대리의 조언이 현실적이었다.
지한은 마음을 굳게 먹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디션보다 더 긴장해 마땅했다. 도경이 옷까지 사 입혀 내보낸 자리였다. 잘은 못하더라도 도경이 욕먹지 않을 만큼은 하고 나와야 했다. 예의 바르게, 사람답게, 뭐 저런 걸 보냈냐는 소리는 절대 안 나오게.
코너를 돌자마자 엄청나게 긴 복도가 펼쳐졌다. 태어나서 발을 디뎌본 복도 중 가장 끝이 먼 복도였다. 복도 양옆으로 그리 넓지 않은 간격을 두고 난 문들에는 저마다 다른 드라마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복도를 절반 이상 걸어왔을 무렵, 포스터 대신 A4용지만 달랑 하나 붙여놓은 문이 나왔다. 아무리 봐도 1초 만에 지은 것 같은 제목 옆에 제작실이란 글자가 크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던 지한은 한 걸음 물러섰다. 노크도 없이 남의 작업실 문을 열어젖히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다. 혼자서 무사히 미팅을 마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또 다시 숨이 차려고 하던 중,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어우 깜짝이야. 우지한 씨?”
“아, 네, 아.”
“왔으면 노크를 하지 왜 그러고 서있어요. 들어와요.”
드라마 제작진보단 학생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차림의 여자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긴 테이블 끝자리에 앉아 제작실 안으로 들어서는 지한을 열심히 훑어보는 남자 또한, 여자보다 월등히 나이가 많아 보이기는 해도 입은 옷만은 대학생 같았다.
여자가 빨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종이도, 화이트보드도 그리고 천장까지 하얀 사무실엔 지한과 남자 둘만 남아있게 되었다. 남자는 줄곧 지한에게서 흥미로운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딴청은커녕 더 구석구석 보는 탓에 번번이 지한이 시선을 피해야 했다. 다리가 멋대로 떨리기 전에 여자가 빨리 돌아와 다행이었다.
“이번엔 권 이사한테 술 못 얻어먹겠는데.”
남자 옆에 앉아 똑같이 감상 시간을 가진 여자가 마침내 소감을 말했다. 남자는 단번에 알아들은 눈치였지만 지한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야, 너는 술 먹으려고 작품 하냐.”
“그 사람이 사주는 술이라면 동기 부여가 되고도 남지.”
여자가 낱장으로 흩어진 종이를 모으며 지한 쪽에 대고 턱을 까딱였다.
“이렇게 훌륭해 버리면 우리 쪽에서 로비해야 할 것 같잖아.”
멍청해 보일 것이라고, 그러니 당장 눈을 부릅떠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한은 눈이나 깜박이고 있었다. 뭐가 훌륭하다는 건지를 알아야 끄덕거리기라도 할 텐데, 그는 여전히 여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보니까 꽤 크던데 키가 몇이나 돼요?”
“어, 183인가. 4인가.”
“본인 키 몰라요?”
알아야 하는 것이었나 보다. 지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데 오면서 그 정도 준비도 안 했냐고 나중에 도경에게 싫은 소릴 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려는데, 여자가 검지로 지한의 옆을 가리켰다.
“그건 뭐예요?”
평소 시우의 헬멧을 담아 다니는 오토바이 가방이었다. 오늘은 헬멧 이외에도 갈아입을 옷을 담는 용도로 썼다.
“아, 이거. 옷, 옷이요.”
“옷?”
“오토바이 타고 와서. 이거 입고 오면 구겨질까 봐 갈아입었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눈짓했다. 남자는 재미있단 얼굴이 되었다.
“혹시 외국 살다 왔어요?”
“아니요.”
이번엔 여자도 픽 웃었다.
“나쁜 뜻은 아니고, 권 이사가 미국에서 데려왔나 해서 물어봤어요. 뭐 어차피 대사는 많지 않을 거니까.”
대사는 많지 않다는 말이 따라붙는 것으로 보아 나쁜 뜻이 맞는 듯했다. 발음이 이상했나. 또박또박 말한다고 했는데.
“얼굴에 그건 뭐예요? 무섭게 보이려고 메이크업 받고 왔어요?”
지한은 이제 만져도 그냥 맨피부와 다를 바 없이 평평한 상처 부위를 손등으로 쓸었다.
“어디 긁혀서.”
“어쩜 일부러 그은 것같이 상처가 났어. 위치도 그렇고.”
“근데 이거 더 기다리면 없어질 거라고 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또 남자에게 눈짓한 여자가 이번에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웃었다.
“말할 때는 느낌이 완전 다르다.”
“네?”
“아까 처음 들어올 때처럼 인상 써 봐요. 빡. 이렇게.”
여자가 눈썹을 인위적으로 찌푸렸다. 배우는 아니라지만 연기력이 형편없었다. 지한이 머뭇거리자 남자가 끼어들었다.
“내가 여자친구 뺏어갔다고 생각해 봐. 나 때리고 싶은데 못 때리는 상황인 거야 지금.”
여자친구. 지한에게 쥐꼬리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예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키는 건 다 하고 오라고 유 대리가 신신당부했으니까, 뭐라도 하고 봐야 했다. 지한은 여자 대신 도경을 떠올렸다. 남자가 도경을 뺏어갔다는 설정은 그다지 지한을 격양시키지 못했다. 남자와 마주 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저 사람은 도경에게 말도 못 걸어보고 걷어차이리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안 돼. 집중해.
지한은 남자가 급조한 설정에 막장 요소를 추가했다. 저 사람이 도경을 성추행했다고 생각하자. 그러니까 꼭, 무영처럼. 아닌 척, 친근하게 구는 척하면서 싫다는 도경을 끊임없이 건드리는. 귀도 만지고, 팔도 만지고. 끌어당기고.
그 미친 새끼 코가 아니라 손가락을 마디마디 다 꺾어놨어야 하는 건데.
“좋아요, 이제 우리 감독님 그만 째려봐도 돼.”
무영의 얼굴이 뇌리에 들어오자마자 지나치게 몰입해버렸다. 지한은 헛기침했다.
“우지한 씨가 저희 작품을 하게 되면 딱 방금처럼 나갈 거예요. 여기 이거 아직 정리 덜 된 거긴 한데 대사 느낌만 봐봐. 진짜 짧지? 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만두십시오. 거의 다 이런 거야.”
“아.”
“내가 왜 오늘 여기까지 오라고 했냐면, 이 역에 내가 나름 공을 많이 들였거든. 쓰다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주인공 아닌데도 괜히 예뻐서 장면 하나 더 주고 싶고 그런 캐릭터가.”
그래서 도저히 못 주겠다는 소린가. 지한은 여자의 표정을 읽어내려고 애썼다. 여자는 시종일관 밝았다. 적어도 지한에게 이제 그만 꺼지라고 말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원래 아이돌 중에서 고르려고 했는데 요새 애들 다 나보다 마르고 예뻐서 이 캐릭터랑은 영 안 어울리더라고. 어차피 주연들은 다 배우니까 그럼 모델 출신 중에 몸이 좀 좋은 사람을 고를까 그러고 있었는데 마침 권 이사가 신인이 있다네? 그래서 우지한 씨를 보자고 한 거지.”
“신인이 있다 그런 건 아니다, 솔직히. 신인 써줘야 주인공도 내주겠다, 이랬지.”
피디와 작가는 잠시 지한의 존재를 잊은 듯 둘만의 세계에 빠져 티격태격했다. 둘의 입에 지한도 아는 배우의 이름이 몇 번이나 올랐다.
도경이 이 드라마에 꽂은 것은 지한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연예 관련 회사를 하는 줄만 알고 있었지 그 정도로 유명한 연예인이 있는 회사일 줄은 상상 못 했다.
소현이 다니는 회사 이름을 들었을 때는 이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었다. 소현이 도경보다 더 잘나 보여서가 아니라, 도경이 소현과는 많이 달라서였다.
오토바이를 사주는 식의 현실감 떨어지는 짓을 할 때마다 도경에게 돈은 끊길 일 없으니 내키는 대로 써도 되는 물질임을 깨닫긴 해도, 도경은 지한이 데려가는 식당에서 싫은 내색을 한 적 없었다. 거꾸로 도경 본인이 장소를 고를 때 반드시 헉 소리 날 정도로 고급스러운 곳만 고집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통감했다. 도경의 세계가 얼마나 높이 있는지. 그가 얼마나 귀한지.
지한과는 비교할 수 없이.
미팅은 생각보다 짧았다. 지한을 일으켜 한 바퀴 돌게도 해보고 똑바로 서보게도 한 여자는 그가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구호처럼 인상! 이라고 외쳤다. 시키는 대로 인상을 쓰면 구경하던 남자가 자꾸 웃어서 집중력을 흩트려 놓았다. 어쨌든 끝까지 두 사람 다 웃는 낯이었다.
“저기 근데요.”
남자는 국장이 부른다며 다른 층으로 갔고, 여자 혼자 엘리베이터까지 나와 지한을 배웅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엘리베이터 오기 전에 물어보라는 여자의 말에 진심이 몇 프로 담겨 있었든, 지한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작가님 해봐.”
“아, 어…… 작가님.”
시키는 족족 바로바로 수행하는 지한을 여자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응. 왜. 뭐 궁금한 거 있어요?”
패기 있게 먼저 운을 띄웠건만 막상 저쪽에서 물어보란 식으로 나오니 망설여졌다. 여자는 지한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물어봐도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도경이 형이랑 술 자주 마셔, 마시세요?”
“도경이가 누구. 아, 권 이사 이름이 도경이었지. 두 번인가 같이 마셨을걸. 우리 감독님도 같이.”
왜? 되묻는 여자의 태도에서 의심스러운 구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냥요.”
“난 대답해 줬는데 지한 씨는 그냥이라고 하고 넘기는 거야?”
“아까 그, 동기 부여가 된다고 그래서. 아니, 그러셔서.”
“아― 그건 뭐냐면, 권 이사는 절대 싼 술 안 사주거든.”
“……아.”
기계적인 안내 음성에 뒤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질문한 의도를 들키고 싶지 않아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여자는 기어이 지한의 속마음을 끄집어내려 했다.
“내가 권 이사 벗겨먹을까 봐 물어봤구나?”
“아, 아니요. 절대 그런 거.”
아닌데. 야속하게 닫히는 문 너머로 보이는 여자의 입가가 씰룩였다. 도경이 호구이긴 했지만 돈을 뜯길까 봐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권 이사, 권 이사 하면서 잘 아는 사이처럼 말해서 알고 싶었을 뿐이다. 정말로 잘 아는지.
지한도 알았다. 도경은 아랫사람들이 있는 상사이자 거래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의무가 있는 이사였다. 유 대리가 도경의 옷 사이즈를 알 수도 있는 것이고, 드라마 작가가 도경과의 술자리를 좋아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째서 도경에 관한 일이라면 사소한 부분까지 참견하고 싶어지는지. 지한이 제일 환장할 것 같았다. 체육관 친구들에게 한 시간 간격으로 지한의 위치를 묻는 시우 때문에 잠적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숱하게 겪어본 지한이었다. 이러다간 그와 비슷한 짓을 해버리는 것도 영 무리는 아니었다. 도경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앞으론 궁금해도 적당히 참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도망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되긴 싫었다.
옷을 다시 갈아입고 주차장으로 나온 지한은 다른 메시지들을 놔둔 채 맨 위에 떠있는 도경과의 대화창을 눌렀다. [잘 끝났어?] 고작 네 글자로 이루어진 단출한 메시지에서 다정함이 풍겨났다. [네] 한 글자만 달랑 보내고 헬멧을 썼다. 답장이 왔다.
[나 아직 사무실이야. 배고프지?]
밥 먹잔 소릴 매번 다양하게도 돌려 했다. 지한은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고 헬멧 실드를 내렸다. 혼자서 실실대는 얼굴을 가려주는 헬멧에게 오늘따라 무한한 고마움이 느껴졌다.
퇴근 시간대라 마음처럼 빠르게 달리지 못했다. 도경의 회사 앞에 도착해 시간을 확인하니 예상보다 10분이나 더 지나 있었다.
설마 답장을 안 했다고 퇴근해버린 것은 아니겠지. 통화 버튼을 누름과 거의 동시에, 지한은 헬멧 실드를 올렸다. 얼마 전 유 대리가 서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도경이 지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 택시 타고 오라고 하는 걸 깜빡.”
“오늘은 여기 타요.”
지한은 가방을 매어놓은 뒷좌석을 가리켰다.
“나 사주고 나서 한 번도 안 타봤잖아요.”
“헬멧이 하나밖에.”
“헬멧 여기!”
고리를 풀고 가방을 열어 헬멧을 꺼내주었다. 헬멧을 받아든 도경이 심각하게 물었다.
“뒤에 타면 이 가방은. 나보고 매라고?”
“내가 매고 싶은데 그러면 형이 뒤에서 나를 못 잡아.”
가방 안을 들여다보는 도경의 표정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따위로 생긴 가방은 멜 수 없다고 외치는 듯했다. 지한도 도경에게 그 가방을 메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뒤에서 지한의 허리를 안으려면 도경이 메야 했다. 도경의 차나 사무실에 두든가.
“이 가방 중요한 거야?”
“아니, 뭐, 그냥 옛날에 산 건데. 왜요?”
“내가 다시 사줄 테니까 버릴래?”
황당 그 자체였다. 집어온 걸 무를 수 없다며 만두를 사서 호텔 냉장고에 처박아놓고 왔을 때보다 딱 스무 배 정도 놀라웠다.
“그걸 왜 버려요? 그리고 안에 옷이랑 구두는.”
“오늘은 필요 없잖아. 어차피 촬영 들어가면 옷 더 사.”
“아직 나 확실하게 된 것도, 아니, 아니. 촬영 안 해도 그건 안 버려요. 오늘 안 쓴다고 버리면 오토바이도 버려요? 내일은 안 탈 거니까?”
가방과 지한, 그리고 오토바이에 공평히 눈길을 준 도경이 말했다.
“그건 아니지. 지금 타고 있으니까.”
포인트를 맞추기 어려운 농담이길 바랐건만,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농담하는 빛이 아니었다. 지한은 침착하게 말했다.
“형 차에 놔두면 되잖아요. 주차장 바로 뒤에 있네.”
곧 지한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침착이라고? 시우도, 도경도 아닌 지한이?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었다.
“귀찮으면 내가 갔다 올게요. 키만 주든가.”
뒷좌석으로 손을 뻗은 지한은 가방을 드는 데 실패했다. 지한보다 조금 더 빨리 가방을 잡은 도경이 손에 힘을 있는 대로 줬기 때문이다.
“누가 싫대?”
기어이 지한의 손을 떨어져 나가게 한 도경이 가방을 들고 휙 돌아서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삐진 건가. 오토바이가 최대한 새것일 때 태워주고 싶었을 뿐이다. 손 닦을 땐 결벽증 환자 같고 장 볼 땐 호구 같다 흥분하면 약 맞은 사람처럼 돌변하는 도경은 종잡기 쉬운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한은 도경에게 가방을 빼앗긴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괜찮아.
도경이 돌아왔다. 삐진 것까진 아니어도 눈을 안 마주치고 자꾸 다른 데만 흘깃거리는 것이, 기분이 살짝 상하기는 한 눈치였다. 그래도 헬멧을 씌워주는 손길까지 거부당하진 않았다. 오토바이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도경의 팔이 지한을 세게 끌어안았다.
뒷좌석에 탄 사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수적으로 행하는 동작임을 알면서도, 지한은 입 안을 꽉 깨물었다.
한강 공원으로 가려다 부근에서 방향을 틀었다. 사람 많은 장소는 도경을 더 불쾌하게 만들기나 할 것이라. 낡은 주택들이 낮게 깔린 골목 언덕을 돌고 올라 정상에 도착한 오토바이가 멈추었다.
오토바이의 사이드 스탠드가 펼쳐지자마자 도경은 땅을 밟고 섰다. 비틀거리면 잡아주려고 지한도 오토바이에서 내려와 섰다. 가슴을 몇 번 들썩인 도경은 스스로 헬멧을 벗었다.
“여기가 어디야.”
주위를 둘러본 도경이 작게 말했다. 재개발을 앞둔 주택들과 높이 선 아파트 단지를 연결하는 구간에 남겨진 자리는 가끔 산책 나온 가족들이 숨을 돌리고 가는 휴식지로 쓰였다. 지한에게는 근처를 지나다 담배가 피우고 싶으면 한 번씩 내리는 곳이기도 했다.
“형 집이랑 별로 안 멀어요.”
저 보라색 간판 보여요? 저거 형네 집에서도 보이잖아요. 지한의 설명에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아까 상한 기분이 지금까지 안 풀려서는 아닌 것 같았다. 지한의 눈엔 시커먼 덩어리들로 보이는 주택가를 내려다보는 도경이 뭔가를 신기해하는 중으로 보였다. 신기할 게 뭐 있을까. 헬멧을 핸들에 걸어두고서, 지한은 시동이 꺼진 오토바이 운전석에 걸터앉아 도경을 구경했다.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가로등이 비추는 구역 안으로 여자 둘과 큰 개 한 마리가 들어왔다. 주택가 구경을 마치고 오토바이로 돌아온 도경이 행인들과 그들의 짐승에게 주택가에 주었던 것과 비슷한 시선을 주었다. 지루해하지 않는, 재미있어하는 눈빛. 반짝반짝.
“그만 봐요.”
도경이 아, 하고 지한을 쳐다보았다. 귀가 약간 붉어진 것도 같았다. 확실치는 않았다. 좀처럼 도경을 떠나지 않는 가로등 불빛은 눈속임에 뛰어났다.
“개가 특이하게 생겨서 쳐다본 거야.”
“그래도 싫어요.”
영화 포스터 앞에서 한 번 보여주고 오늘 두 번째로 보여준 눈빛에 이어, 도경은 아주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냈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눈이 힘을 풀며 항상 날을 세우고 있는 눈 끝이 가라앉는 얼굴.
“뭐가 싫어?”
어리둥절해 보이는.
“나 말고 다른 데 쳐다보는 거.”
시원한 밤바람이 앞머리를 가지고 놀았다. 뒤로 넘어갈 듯 말 듯 팔랑이던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도경의 눈이 조금씩 힘을 되찾았다. 눈매가 감췄던 날을 도로 세우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단단히 맞붙었다.
그 얼굴과 눈빛은 익숙했다. 터지는 폭죽을 담은 창 옆에서 봤고, 일부러 명도를 낮췄던 호텔 방의 침대 위에서도 봤다.
도경이 헬멧을 잔디 위에 던졌다. 그의 손이 지한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긴 손가락이 뒤통수를 감싸려다 이내 머리카락 속을 파고들었다. 지한은 지탱할 곳을 찾아 급히 뒤쪽을 더듬었다. 걸쳐두었던 헬멧을 쳐서 떨어트린 손에 핸들이 겨우 잡혔다.
“…….”
서로가 내뱉는 숨의 온도를 감지할 만큼 가까워진 두 얼굴은 부딪치지 않았다.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그런데도 괜찮았다. 이대로 숨이 막혀 죽으라면 그러겠다고 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지한은 생각했다. 도경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해버리겠다고.
언제 누가 지나갈지 모르는 밖이란 것을 비로소 깨달았을까. 도경이 서서히 지한의 머리카락 속에 파묻혀있던 손가락을 빼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70
때를 놓친 저녁 식사는 지난번에 가려다 못 간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다. 도경의 차는 여전히 회사 주차장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냥 지한의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로 왔다. 다음날 택시로 출근하면 그만이었다.
“형 이제 전보다 더 잘 타게 된 거 같아요.”
단지 근처라는 위치 특성상 연인보다는 가족 손님들이 더 많은 레스토랑 안을 두리번거린 지한이 상체를 숙이고 말했다. 목소리까지 낮추기에 무슨 비밀스러운 고백을 하려고 그러나 했더니 고작 그런 이야기였다.
도경이 한 것이라곤 뒷좌석에서 지한의 허리를 끌어안고 버틴 것이 전부였다. 잘하고 못하고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경은 굳이 지한의 오류를 짚지 않았다. 지한이 하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다행이네.”
“그래도 오늘 오래 탔으니까 또 타라고 안 할게요.”
“그럼 오늘이 마지막이었어? 나 태워주는 거.”
“어? 아니!”
크게 외쳐놓고 신경이 쓰였는지 지한이 실내를 살폈다. 늦은 시간임에도 손님이 제법 있어 그리 조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눈총을 주는 이는 없었다.
“또 타라고 안 할 거라며.”
“그거는, 형이 불편할까 봐 그런 거고.”
지한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오토바이 뒷좌석의 착석감은 타본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불편했다. 무섭기도 했다. 팔에서 힘이 조금만 풀려도 차도 위로 나동그라질까 봐.
가만히 듣고만 있는 도경의 반응을 불편하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했는지, 지한이 부정확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형이 좋다고 하면 맨날 태워줄 건데.”
도경은 등을 의자에 기댔다. 좋았다. 지한이 도경의 앞에서 부끄러워하느라 쭈뼛대는 것이.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것이.
싫었다. 그런 지한을 매일 밤 다른 사람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이.
“브루스케타부터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작게 썰린 바게트 위의 재료들이 흰 접시에 알록달록한 색감을 불어넣었다. 뭐든 잘 먹는다고 했고 실제로도 항상 잘 먹는 지한이지만 그런 그에게도 식전 메뉴로 먹기엔 많아 보이는 양이었던 듯하다.
“형 배고팠어요?”
도경에게는 늘 음식보다 수면이 훨씬 더 간절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욕심내어 음식을 많이 시키는 일은 결코 없었다.
“너 많이 먹으라고.”
눈이 휘둥그레져 도경을 보던 지한은 접시 위의 바게트들을 비장하게 쳐다보았다. 다 먹어 보이겠단 각오가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각오와 달리 지한은 색색별의 재료가 올라간 바게트들을 다 먹어치우지 못했다. 도경이 하나밖에 안 먹어서 양이 좀처럼 줄지 않은 탓도 있고, 얼마 안 되어 들이닥친 메인 메뉴들 때문이기도 했다. 해산물을 있는 대로 욱여넣은 스프와 보기만 해도 혀가 매운 색의 파스타에 이어 나온 스테이크는 지한의 얼굴에서 비장함을 앗아갔다.
혼자 표정으로 드라마를 찍는 지한이 어찌나 웃기던지. 도경은 몇 번이나 냅킨으로 입을 닦는 척하며 웃었다. 지한과 함께 있다 보면 불쑥불쑥 유치해지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먹히지도 않는 농담을 하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아까 오토바이 가방을 두고 그랬던 것처럼 지극히 사소한 일에 성질이 치솟을 때도 있었다. 경각심을 잃지 말아야 했다. 실수는 방심을 먹고 자랐다.
결국 지한은 단 한 메뉴도 깔끔하게 끝내지 못했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다 나가떨어졌다. 그래놓고 일어서면서는 도경의 눈치를 봤다. 왜 눈치를 보는지 몰랐다. 도경은 지한에게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강요한 기억이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황 원장의 개를 데리고 나왔던 날보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편한 복장의 부부들이 눈에 가장 많이 띄었다. 이 동네에 젊은 부부가 그토록 많았는지, 도경은 맹세코 모르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도경이 쳐다본 것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부부였지 그들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아니었다. 지한은 레스토랑에서 나온 뒤로 줄곧 도경을 힐끗거리고 있었던 듯했다. 그러니 도경이 어딜 쳐다보는지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왜. 사 주게?”
“네.”
지한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으냐고 묻는 이유는 도경에게 사주고 위해서이고, 도경의 시선이 너무 산만하면 대놓고 말했다. 다른 데 그만 보고 자길 보라고.
“그래.”
사 준다는데 먹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마음으로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간 도경은 자신이 그동안 아이스크림이란 간식에 대해 다소 안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군것질이라고 해봐야 어릴 적 황 원장이 공수해온 희한한 이름의 디저트들을 먹어본 기억이 다였다. 다시 말해 도경은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 뭘 고를지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온 세상의 맛이란 맛은 다 들어있는 냉장고는 혼란만을 가져다주었다.
“먹고 싶은 게 없어요?”
음료수 냉장고로 갔던 지한이 작은 콜라 캔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호텔 지하 바에서 들었던, 유하고 어린 목소리가 도경의 청각을 습격했다. 콜라랑 섞어줘야 그나마 잘 먹더라고요. 위험했다. 그는 냉장고 문을 옆으로 밀었다. 냉기가 끼쳤다.
“넌 원래 뭐 먹어. 이 중에서.”
“음……. 콜라 맛?”
그놈의 콜라. 온 세상 콜라병과 캔을 모아다 터뜨리고 싶어졌다.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힌 도경은 아이스크림을 계산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가 왜 갑자기 찬기로 가득한 냉장고를 열어젖혔는지 알지 못하는 지한에겐 묻는 말에 대답한 죄밖에 없었다.
“형이 콜라 마시는 거 못 봤는데.”
“네가 못 본 거 많아.”
계산을 마치고 한 발짝 먼저 나가 문을 잡고 있던 지한이 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차. 너무 정직하게 말해버렸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럼 하나 알려줘요. 내가 못 본 거.”
움츠러들어 눈치를 볼 줄 알았던 지한이 엉뚱한 요구를 해왔다. 못 본 것을 알려 달라. 그보다 더 포괄적인 요구도 드물었다.
“뭘 알려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못 본 거는 어려워요? 그럼 내가 모르는 거. 형이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무거나.”
지한의 말은 들리는 그대로 해석해야 맞출 확률이 높다는 것을 배웠기에, 도경은 숨겨진 의미나 의도를 찾아내려 들지 않았다. 순수하게 질문만 받아들였다.
좋아하는 것. 쉬워 보였던 항목은 첫 단계부터 도경을 가로막았다. 떠오르는 대상이 없었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시도 공부를 소홀히 한 적 없지만 그건 의무였지 좋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 성실히 일하는 것은 죽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고 상승하기 위해서였다. 높이 가야 지킬 수 있으니까. 위치, 체면, 명예 그리고 그것들이 대변하는 자존심을. 내가 너희들보다 더 높게 올라가면 반드시 갚아주겠다는 마음가짐은 좋아하는 것과 아주 다른 성질의 일념이었다.
유일하게 뭐라도 방출한다고 느꼈던 순간은 집어던지고, 찢고, 맞고, 휘두르던 순간들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 순간들을 좋다고 할 수 있을지.
“체육.”
싫어하는 것을 고르는 편이 훨씬 쉬웠다. 웬만해선 사람도, 물건도 도경의 마음에 차지 않았으므로.
“체육?”
“싫었어. 학교 다닐 때.”
지한이 아래를 힐끗 보며 걸었다. 밖에서 함께 걸을 때면 그는 종종 도경의 발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했다. 보폭을 맞추려는 것처럼.
“왜 싫었어요? 운동 재미없어서?”
“땀 나서.”
별로 숨기려는 노력 없이 웃던 지한이 갑자기 어, 하고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근데 그러면…… 땀 나는 거 다 싫어요?”
“그렇지.”
“어, 진짜?”
“왜?”
뛰지 말라는 엄마의 경고를 무시한 어린아이들이 도경과 지한의 사이를 가르고 뛰어갔다. 아이스크림이 떨어졌다. 어머,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사과한 엄마가 아들들을 잡으러 같이 뛰어나갔다. 아이스크림을 주워드는 도경의 귓가 근처에 대고 지한이 속닥거렸다.
“이따 집에 들어가서 말해줄게요.”
엿들을 사람은 없으니 그냥 말하라고 종용하고 싶다가도, 부모 몰래 작당을 모의하는 소년 같아 보여서 내버려두고 싶어지는 모습이었다. 도경은 더 말하지 않고 걸었다. 착실하게 따라붙는 발소리를 배경음 삼아.
막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발을 들였을 때 드라마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한을 소파에 앉혀놓고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을 던져 넣은 뒤 전화를 받은 도경은 컴퓨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나서야 통화를 제대로 시작했다. 나쁜 소리야 하겠냐만 혹시나 해서.
―어디서 그런 앨 찾았대? 권 이사님 하여튼 일 잘하신다니까.
혹시나 해서 지한을 떨어트려 놓은 선택이 무색해질 만큼, 작가는 칭찬 일색이었다.
“마음에 드셔서 다행이에요.”
―얼굴에 상처 난 것도 메이크업인 줄 알았잖아. 앞으로는 이사님이 단속 좀 해요. 넘어지고 긁히고 그런 거 안 된다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튼 마음에 쏙 들어. 대사도 좀 더 줄려고. 대본 리딩 때까지 발음 연습만 빡세게 시켜요. 그 비주얼로 대사 더듬으면 깨잖아.
강한 반발심이 일었다. 지한이 그 얼굴로 말을 더듬을 때마다 보는 도경의 속에서 얼마나 다양한 불길과 물길이 이는지 모르니 그딴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긴. 도경은 이성을 다잡았다. 말을 더듬고 우물쭈물하는 지한은 도경만 알면 됐다. 남들은 알아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얼른 좋은 소식을 지한과 공유하려 문고리를 잡은 도경은 새로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문을 열지 못했다. 퇴근 시간이 지난 후 걸려오는 업무 전화는 대부분 나쁜 뉴스를 동반했다. 전화를 받으니 역시나 신경질 나는 소식이 전해졌다. 솔로 가수 새끼를 협박하다시피 혼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엔 아이돌 그룹 멤버 하나가 술집에서 진상을 부렸다는 내용이었다. 매니저가 가서 사장은 진정시켜놨으나 목격담이 뜰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로봇 같은 말투로 사건 보고를 마친 대리는 지한의 미팅이 어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작가가 한 말을 과장 없이 전해주자 대리가 그럴 줄 알았다며 축하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축하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말투가 딱딱하다 못해 부러질 것 같았다.
대리와의 통화까지 끝내고 나니 2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약간 급한 기분이 된 도경은 문을 열고 나갔다.
“지한…….”
거실에 들어선 그는 지한의 이름을 다 부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팔짱을 끼려다 실패한 것처럼 두 팔을 잔뜩 구부려 가슴 앞에 모은 채로 소파 손잡이에 머리를 기댄 지한의 눈이 감겨있었다. 누웠다고도, 앉았다고도 할 수 없는 자세였다. 거기서 기다리랬다고 정말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입술 끝이 자꾸 위로 올라갔다.
웃음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난데없이 지한을 만지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라 속을 메슥거리게 했다. 침이 넘어가고 명치가 조여들었다. 깨우면 일어나기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앉은 도경은 잠든 지한의 얼굴을 관찰했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다리의 소유자인 지한은 잘 때 몸을 웅크리는 습관이 있었다. 한 침대에서 잠든 밤은 고작해야 두 밤뿐이고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로 세 번째에 불과했다. 그래도 세 번 다 똑같은 자세로 잠들었다면 습관이라 이르기 충분한 근거였다.
눈가에서 얼쩡거리는 앞머리를 넘겨주어도 꼼짝 않고 잘 잤다. 조금 더 만져도 깨지 않으리란 자신감이 피어났다. 이번엔 손가락 끝으로 눈 밑에서 시작하는 흉터를 쓸어내렸다. 단속 좀 하란 작가의 말에 알겠다는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우산을 휘두른 사람은 이안이었지만, 지한이 이안의 어딜 부러트려 놓지 못한 원인은 도경이었다. 생 식초를 삼킨 것처럼 속이 쓰렸다.
어디까지 보여주고 어디서부터 감춰야 하는지 기준이 모호했다. 어쩔 땐 너무 많이 보여줘버린 것 같아서 아찔했고 어쩔 땐 마스크를 몇 겹 쓴 것같이 답답했다.
이상하게도 언제부터 지한의 앞에서 연기한단 생각 자체가 흐려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드라마가 전파를 타면 많은 이들이 지한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많은 이들에는 소현의 친구들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진실을 각색하든 왜곡하든 너무 늦지 않게 선수를 쳐야 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막혔다.
뭘 어떻게 각색하고 왜곡해야 지한이 달아나지 않을지 모르겠어서.
지한이 눈을 떴다. 눈 앞머리보다 약간 위쪽에서 시작하는, 그래서 졸려 보이기 쉬운 쌍꺼풀이 두 겹으로 늘어났다. 남이 잠든 사이 마음대로 얼굴에 손댄 것을 사과하는 대신, 도경은 손을 지한의 머리로 옮겼다. 정수리를 쓰다듬어도 지한은 가만히 있었다. 사람의 손길을 타는 짐승 같았다. 아니, 길든 짐승보다도 한층 더 얌전했다.
“작가가 너한테 대사 많이 준대.”
잠이 반도 안 깬 것 같은 표정으로, 지한이 눈을 비볐다.
“대사…… 별로 없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추가할 거래. 네가 마음에 쏙 들어서.”
올라가려고 애쓰던 눈꺼풀이 도로 내려갔다. 도경은 지한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움찔대지도 않았다. 진짜 졸린 모양이었다.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축하 선물.”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지한이 띄엄띄엄 말했다. 보고 싶은 거는, 있는데.
“뭘 보고 싶어?”
“형 피아노 치는 거…….”
“피아노?”
“그리고, 형 옷장도…….”
지한의 눈꺼풀이 다시 내려갔다. 당분간은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피아노와 옷장의 상관관계를 밝히려다 에너지만 소진했다. 그는 거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마음이 목청을 높였다. 뭘 그렇게 겁내? 장소현보다 네가 훨씬 더 좋은 선물을 주면 되는 거야. 최고로 만들어놔. 평생 좋은 건 가져보지 못한 저 애를 아무도 무시 못 하는 자리에 올려놔 보라고, 일단.
그때 가면 뭐가 어떻게 됐다고 한들 얘가 널 떠난다고 할 수 있겠어?
도경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깜깜했다.
#71
눈이 번쩍 뜨였다. 꿈에서 지한은 높은 곳을 걷고 있었다. 옆에 도경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얕게 잠이 들면 으레 그렇듯 뒤죽박죽 엉터리인 꿈이었다.
아까까지 환했던 거실은 어두워져 있었다. 부엌에서 나오는 불빛이 넓은 집 안을 은은하게 밝혔다. 다리를 움직이려던 지한은 소파 끝에서 잠든 도경을 발견했다.
지한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최대한 손잡이에 몸을 붙인 도경은 잠이 든 상태임에도 자세가 곧았다. 고개는 한쪽으로 돌아가 있지만 소파에 닿은 등은 쭉 펴져 있었고 두 손은 허벅지 위에 겹쳐져 있었다.
눈 속에서 탄생한 사람처럼 하얀 도경은 얼어붙은 호숫가에 버금가는 고요한 숨소리를 냈다.
지한은 다시 손잡이에 기대 누웠다. 시우를 데리러 가려면 슬슬 일어나야 했건만 몸이 거부했다. 잠든 도경의 옆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침이 올 때까지. 내일까지. 모레, 다음 주, 다음 달.
오래오래 도경의 옆을 지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