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Take Down
#66
퇴근 시간이 지난 후에도 어둠에 잠식당하지 않은 하늘이 거실을 진한 빛으로 물들였다. 도경은 소파에 앉아 거실을 둘러보았다. 소파. TV. 테이블. 리모컨. 아침과 위치가 달라진 물건이나 가구는 없었다. 황 원장이 새로 보낸 방향제 병에 꽂힌 꽃의 색도, 아까 들여다본 욕실과 방도 다 그대로였다.
항상 도경에게 스케줄을 맞추는 지한이 오늘은 웬일로 약속 시간을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강남에서 친구를 만나고 오면 최소한 여덟 시는 될 거라면서, 그래도 괜찮으면 먼저 호텔에 가 있으라고 했다.
대체 어떤 대단한 친구를 만나고 오려고 그러나 신경이 살짝 긁혔지만 알겠다고 했다. 어차피 시우가 있는 공간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도경은 시우가 무영의 클럽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한이랑 같이 오세요. 인사치레인지 진심인지 헷갈리는 그 말을 지한도 들었다. 잊힌 척하기엔 그날 지한이 소모했을 감정이 결코 적지 않다 예상되었다. 물론 예상에 불과했다. 평생 함께해온 친구를 모르는 척하고 앉아있어야 하는 입장이 느껴 마땅할 감정, 도경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넘겨짚을 수밖에 없었다.
시우가 일하는 바에 가자고 도경이 먼저 제안했을 때 지한은 도경의 눈치를 살피느라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도경이 하나뿐인 친구를 적대시하는 것보다야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 여러모로 지한에게도 좋을 터였다.
하나뿐인 친구.
하나뿐인 것은 특별했다. 똑같은 대체품을 구할 수 없다는 특성은 물건도 생명만큼 소중히 다루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하물며 그 하나뿐인 것이 살아 숨 쉬는 데다가 말까지 통하는 인간일 때는 가치가 측정할 수 없이 뛰었다. 지한에게는 시우가 측정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는 의미였다.
도경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지한과 시우에 관한 생각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러면 뭘 생각해야 할까. 시간은 버리라고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휴식을 모르는 뇌가 재빠르게 시우를 제거한 자리에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은 대상을 끌고 들어왔다.
소현과 도경의 가장 두드러지는 공통점 중 하나는 외부에서의 언행이었다. 인당 몇십만 원을 지불해야 하는 레스토랑에서든, 오만 데서 모여든 인간들로 미어터지는 영화관 근처 카페에서든 그들은 깍듯한 말투를 잃지 않았다.
팁이 가능한 데에선 일당이 십만 원도 안 될 일꾼들에게 빳빳한 현금을 쥐여주었다. 신발부터 옷에 달린 버튼 색 하나까지 어디 하나 엇나가지 않는 차림새마저 닮았단 소릴 들었던 두 남녀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내부 사람들만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소현은 제 구역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공격성을 주저 없이 드러냈다. 내 편과 네 편의 구분이 확실했던 여자다. 그녀는 기회가 올 때마다 누가 자신의 편이고 누가 아닌지를 분명케 했다. 나를 적으로 돌리는 순간 너희도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될 거야.
대부분은 그녀의 편에 붙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업에서도 묻히지 않고 튀는 데에 성공한 인재였으니까.
계획적으로 살면 승리하는 것인 줄 알았다. 소현처럼 튀는 것보다는 적과 동료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며 살아야 끝까지 죽지 않는 승자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남들이 안 참을 때 그들의 몫까지 참으면 언젠가는 보상이 오리라고, 그러면 그땐 황 원장을 닮았다는 이유로, 밖에서 낳아 온 자식처럼 권 회장과는 닮은 데가 없다는 이유로 도경에게 쌀쌀맞은 친가 식구들부터 소현의 편을 들었던 새끼들까지 형체도 안 보이게 뭉개 버리겠단 목표 하나에 지탱해 살아왔다.
그런데 그 군상들은 소현이 죽은 뒤에도 도경을 미워했다. 나중에 생길 이득을 위해 참고 넘기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순간들이 독이 되어 도경의 생명력을 깎아먹었다. 소현에게 잘 보이려 최선을 다했던 인간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도경을 제 편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당하기만 하진 않았다. 소현에게만큼은. 참기만 하지도 않았다. 남들이 보는 데서 참은 만큼 남들이 없는 데선 그녀보다 더 발작할 때도 있었다는 것을 도경은 인정했다. 그러므로 피가 날 때까지 이마를 벽에 갖다 박고 싶어질 만큼 억울하지는 않았다. 살아 있었으면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테지만 이미 죽어 버렸으니 딱히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쪽에게 두 배로 돌려주려고 했었지.
아니었다고 했다. 소현과는 도경과 한 행위도 하지 않았고,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다고 지한은 고했다. 섹스도 키스도 안 했고 연인이 되자는 약속도 하지 않은 그 둘은 남들이 없는 공간에서 대체 무엇을 했나. 이별해있는 1년간 약 복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도경처럼, 소현도 대체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내세울 배경도 머리도 능력도 없이 하찮은 인생이라서, 그렇지만 동시에 가장 빼어난 겉가죽을 가지고 있어서 지한을 골랐다고 여태 장담해왔다. 그래야 다방면으로 도경의 혈압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서.
그런데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소현이 가방을 휘둘러도 지한은 도경처럼 똑같이 갚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한이 지금까지 손을 휘두른 대상들은 다 지한과 대등하거나 더 강해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유일한 예외인 이안은 먼저 지한에게 우산을 휘둘렀다. 고작 머리통 한 대 때리고 끝난 것도 아마 이안이 지한보다 작아서였을 테고.
도경을 만지기 전에도 허락을 구하는 지한이었다. 170cm도 안 되는 여자에게는 어떤 식으로도 반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현은 놔두면 놔둘수록 더 불이 붙는 여자였다.
도경처럼 같이 부수고 악을 써야 그 광기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의 몸속에도 일반적이지 못한 분노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스스로의 몸에 고통을 가하고 피를 봐야 점진적으로 가라앉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분기.
의사도 못 고치는 병을 지한이 고칠 수 있었을 리 없다. 고치기는커녕 그게 뭔지도 몰라 허둥댔을 테지. 저보다 작고 마른 여자에게 반격할 의지도 없이.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니까. 그러니까.」
지한의 뺨에 선명하게 남은 상처 자국이 눈물로 번들거리는 광경을 본 그 짧은 몇초 간 얼마나 많은 가정이 도경을 스쳐가던지. 왜 울지, 내가 너무 마음대로 했나, 혹시 학창 시절 곧잘 그랬던 것처럼 잠시 정신이 나가 있었나, 그래서 나는 기억 못 하는 엄청난 짓을 저질렀나.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안으로 마느라 바쁜 와중에도 지한은 할 말을 했다.
「빼지 마.」
얼굴이 온통 젖어 앞을 발딱 세우고, 뒤에는 팽창한 성기가 꽂힌 상태로도 원하는 바만큼은 확실히 전달하는 지한에게 도경은 차마 묻지 못했다. 너 장소현 앞에서도 그렇게 운 적 있어?
지한이 그 누구의 앞에서 무슨 짓을 해봤다 가정한들 그 상상만큼 강력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럴 리가 없지, 없었다. 소현이 남자도 아닌데, 게다가 둘 사이엔 그런 행위도 없었다는데.
그럼에도 소현을 언급할 때마다 누나 소릴 빼먹지 않는 지한의 목소리가 자꾸만 메아리쳤다. 소현이 휘두른 물건에 잘못 맞아서, 혹은 진짜 제대로 발작하는 환자를 본 경험이 없어서, 이유야 뭐가 됐든 간에 지한이 한 번쯤은 진심으로 겁먹은 적이 있지 않았을까?
누나 그만해요, 화내지 마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딴 순진해빠진 방법이 먹힐 줄 알고 빌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러면 소현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더 때렸을까? 마른 팔뚝을 휘두르며 가방을 휘두르고, 접시를 던지고, 병을 깨부수고.
도경은 벌떡 일어나 복도를 지났다. 손님용 욕실과 마주 본 복도 끝 방에 발을 들이기는 소현의 장례식 이후 처음이었다. 그녀가 죽은 뒤로 도경보다 도우미가 훨씬 더 자주 들어가 쓸고 닦았을 방의 벽에 붙은 문부터 낮은 서랍장까지 죄다 열어젖혔다.
깨끗하던 바닥이 금세 소현이 도경에게 준 물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넥타이핀, 커프스링크, 레터 오프너, 드레스셔츠, 바지, 코트, 목도리, 벨트, 시계, 서류가방, 휴대폰 케이스, 그리고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서적까지.
. 보기만 해도 화를 관리해주기는커녕 불씨만 키우는 제목 아래 소제목이 기름을 들이부었다. 8 steps to freedom from anger, stress and anxiety.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무 페이지나 펼쳐 나온 페이지를 찢었다. 한 페이지론 모자라서 두 페이지를, 그래도 모자라서 세 페이지를 그런데도 분이 안 풀려 집히는 대로 쥐어뜯어 구겼다. 네가 뭘 알아. 너네가 뭘 알아. 너흰 몰라. 너희는 모른다고.
휴대폰이 넥타이핀과 커프스링크 상자 뚜껑을 때리고 튕겨 나갔다.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책을 물건 더미 위에 내던지고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지한으로부터 새 사진이 도착해 있었다. 식당으로 추정되는 실내에서 유리창 밖의 강남 거리를 찍은 사진 아래엔 메시지도 와 있었다. 말하는 것보다 사진 보내는 것을 더 잘한단 소리가 마음에 걸렸는지도.
[호텔 갔어요? 10분 안에 출발]
호텔에 갔냐는 질문의 주어는 도경, 10분 안에 출발한다는 문장의 주어는 지한. 기본도 안 지킨 메시지를 알아들으려 머리를 싸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자마자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다.
[나도 지금 출발해]
짧은 답장을 보냈다. 친구와 대화 중인지 바로 읽지 않았다. 도경은 물건들을 밟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태풍이 휩쓸고 간 꼬락서니의 방을 봤다간 그것들을 모조리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직성이 풀릴 자신을 알아서였다.
견뎌보기로 했다. 지금 당장 그 물건들을 어찌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죽지 않아, 죽지 않아 나는 죽지 않는다.
그는 무사히 집을 떠났다.
***
빈 테이블이 둘이나 남아있는 것을 보고도, 도경은 바에 앉았다. 평소에 잘만 앉던 자리를 놔두고 테이블로 가면 제 발이 저린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피하거나 발이 저릴 까닭은 없었다. 시우가 지한과 같이 오라고 해서 왔을 뿐이다.
손님이 많을 때나 적을 때나 늘 인기가 좋은 시우는 오늘도 먼저 와있는 손님을 상대하느라 바빴다. 그래도 꾸준히 드나들었다고 그새 알아보는 손님이 생겼다. 시우에게 핸드크림을 선물했던 손님이었다.
손님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잔에 리큐르를 따르는 시우는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손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줄 아는 그라면 친구도 적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시우와 딱 붙어 자란 지한은 왜 남들을 패고 다녔을까. 말려볼 만도 했을 텐데.
중년의 바텐더가 내온 와인에선 맡아본 적 있는 향이 풍겼다. 그 언젠가 시우가 도경에게 내줬던 와인이었다. 진한 자두를 닮은 색의 액체를 하염없이 보고만 있던 도경의 코끝에 다른 향이 스쳤다. 신기했다. 지한이 도경을 만난 이후로 갑자기 안 쓰던 제품을 사용한 것도 아닐 터인데, 어째서 처음엔 맡지 못했던 향이 이제는 가까이 오기만 해도 바로 감지되는지.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나도 방금 도착했어.”
“다행이다.”
되지도 않는 축제를 보겠답시고 세 시간 거리의 지방에 다녀온 지 고작해야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반가웠다. 멱살을 잡아채 입 맞추고 싶을 만큼. 반가운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 스스로에게 적지 않은 문제를 느꼈다. 그냥 평범하게 반가워할 수는 없는 걸까. 부드럽고 다정하게.
“친구랑 무슨 얘기 했어?”
“아. 얘가 지난번에 도와준 거 있어서 내가 밥 사줬는데. 나보고 요새 놀고 있으면 소개시켜줄 일 있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무슨 얘길 했냐고 묻는 것이 너무 꼬장꼬장한 부모 같진 않았나 하는 우려는 기우였다. 지한은 도경이 친구와 어디에서 만났고 어디에서 헤어졌는지를 물어도 다 알려줄 기세였다.
“뭘 도와줘?”
“형이 준 폰 내가 처음에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가지고. 걔 아는 사람이 해줬어요.”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그때는 지금처럼…….”
거침없이 있었던 일을 보고하던 음성이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뭐라 그랬어? 안 들렸어.”
“아니, 지금처럼 안 편했으니까 그때는.”
지한이 수업 시간에 딴짓하다 걸린 학생처럼 턱을 안으로 넣으며 웅얼거렸다.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면 정말 발칙했다. 모르고 그러는 것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거슬렸다. 제발 그 얼굴을 하고 우물쭈물하는 본인이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를 계산하고 행동하면 좋겠는데.
“그때는 내가 불편했어?”
“그게 싫어서가 아니고, 내가 너무 긴장해서.”
“지금은 긴장 안 되고?”
헉. 기겁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든 지한이 자신 없게 말했다.
“방금 그거는…… 농담?”
“응.”
긴장했던 얼굴이 풀렸다. 그리 자주 올라가지 않는 지한의 입꼬리가 쭈뼛쭈뼛 위를 향했다. 도경은 와인글라스 다리를 꽉 쥐었다.
“오셨네요.”
단골과의 대화를 끝냈는지, 시우가 양주병을 라벨이 보이도록 도경의 앞에 내려놓았다. 병 옆에 얼음이 든 잔도 두 개 놓였다. 지한이 어, 하고 시우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안 추워? 그렇게 입고.”
“뭐가 추워. 아까 낮에 20도였어.”
“일교차 심해서 밤엔 안 돼. 얇은 거라도 가지고 다녀야지.”
옷차림을 가지고 잔소리하는 시우와 멋쩍게 긴팔 소매를 잡아당기는 지한. 가족의 풍경이었다. 부모와 자식. 혹은 부부.
시우가 한 잔에만 먼저 양주를 따라 도경의 앞에 놔주었다.
“이건 빌에 포함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드리는 선물.”
클럽에서 말로 시우에게 수치심을 준 당사자가 도경은 아니어도 그의 친구들이기는 했다. 시우에게는 방관하고 있던 도경도 똑같이 느껴질 것이라 예상했건만 오히려 제 돈을 지출해 선물을 주었다. 도저히 순수한 의도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우 씨가 왜 저한테 선물을.”
“지한이 친구는 제 친구죠.”
도경이 그리 물을 것을 뻔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재깍 대꾸한 시우가 양주병을 하나 더 꺼내 나머지 잔에 따랐다. 서늘한 기운이 뒷덜미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티 내선 안 됐다. 지한이 보고 있었다. 도경은 눈웃음쳤다. 마냥 고마워하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그러나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도경은 그대로 입 안에 든 것을 뱉을 뻔했다. 곡류를 원료로 한 증류주에서 결코 나선 안 될 맛이 났다. 혀를 홧홧하게 만드는 맛의 정체를 알아내려 몇 초간 술을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도저히 그 맛을 더 느끼고 싶지 않아 그냥 삼켜버렸다. 식도가 후끈거렸다. 시우가 준 양주에선 매운 맛이 났다.
곧 지한의 앞에도 잔이 놓였다. 콜라를 섞어 도경의 잔보다 확연히 진하고 양도 많았다. 도경은 시우가 나중에 꺼낸 병의 라벨을 확인했다. 도경에게 준 술과 이름은 같았으나 색이 달랐다.
“드실 만하세요? 평소에 여기 거 잘 드셔서 한정판으로 준비해 봤는데.”
지한은 시우가 준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바꿔 마셔보자고 하고 싶은 충동이 잠깐 일었다. 충동에만 그쳤다. 만약 바꿔 마셨는데 두 술에서 비슷한 맛이 났다간 도경만 이상한 놈이 될 상황이었다.
“정말…… 흔하지 않은 맛이네요.”
지한이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일어섰다. 벌써 3분의 1 이상 줄어든 지한의 술을 조금만 마셔볼까 하다 관두었다. 바로 앞에 시우를 두고 그런 짓을 하느니 그냥 직설적으로 나가는 편이 깔끔했다.
“저한테 주신 술, 지한이 술이랑 같은 건가요?”
“같은 데서 나온 술이고 맛은 약간 달라요. 지한이는 센 술 잘 안 마셔서 더 약한 걸로 줬어요.”
도경이 봐온 지한의 술 취향과는 약간 차이가 나는 설명이었다. 취향이라기보단 도경이 주는 대로 마시는 모습 위주로 봐왔지만, 어쨌든 술 앞에서 빼는 지한은 본 적 없었다.
“브랜디 잘 마시던데.”
“누가 주면 다 받아먹기는 하죠. 애가 거절을 잘 못해서.”
뒷덜미에 꺼림칙한 기운이 다시 감돌았다. 누가 주면 다 받아먹기는 한다, 라고 했다. 마치 지한이 싫은 데도 말을 못해서 도경이 주는 술을 꾸역꾸역 마셨다는 소리로 들렸다.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요?”
실은 듣기 싫었다. 듣기 싫은 정도가 굉장해서 당장에라도 시우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콜라랑 섞어줘야 그나마 잘 먹더라고요.”
“아. 콜라.”
“또 모르죠. 손님처럼 어른이 되면 그땐 잘 마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직은 지한이가 애라서.”
바 아래서 분주히 손을 놀리더니 안주를 준비하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종류와 크기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으로 썰린 과일 조각들이 긴 접시 위에서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누워 있었다.
“이것도 제 선물.”
다른 손님이 시우를 찾았다. 달라고 하지도 않은 선물을 둘씩이나 던져놓고, 시우는 쌩하니 가버렸다. 졸지에 도경 혼자 남았다. 오랜만이라며 시우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요란법석이 듣기 싫어 귀를 도려내고 싶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지한에게서 들은 이야기 때문에 예민해져서만은 아니라고. 시우는 분명 도경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시도했다. 메시지로 포장한…… 경고. 경고?
주제도 모르는 게 어디서 날 이겨먹으려고.
아니다. 아무리 시우가 손모가지를 꺾어버리고 싶게 군다 한들 그리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시우를 주제 모르는 새끼로 정의하는 순간 그와 평생을 함께한 지한도 동류가 된다. 게다가 지한을 알고 지낸 세월은 시우가 압도적으로 길었다. 지한에 관한 한 주제도 모르는 쪽은 도경일지도 몰랐다.
“웬 과일. 형 저녁 안 먹었어요?”
“시우 씨가 선물이래.”
돌아온 지한이 자리에 앉으며 슬쩍 웃었다. 도경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는 의도와 시우를 잘 봐달란 의미가 비슷한 비율로 섞인 웃음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 건데?”
“네?”
“아까 네 친구가 일 소개해 줬다며.”
“아. 그거.”
고개를 빼 들고 시우가 어디 있는지를 살핀 지한이 도경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닥거렸다.
“내가 걔한테 쇼핑몰 모델 한 거 말해 줬거든요, 얼굴 안 나오고 몸만 나왔다고. 그랬더니 한 번 해봤으니까 그럼 속옷 말고 수영복은 어떠냐고 그래서.”
“속옷?”
“쉿, 쉿.”
지한이 손으로 도경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작게 말해야 돼요. 시우가 완전 싫어해.”
도경은 허벅지에서 떨어지려는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리고 더 꾹 눌렀다. 지한의 상체가 움찔거렸다.
“속옷 모델 하는 건 나도 싫은데.”
“아 아니. 속옷은 다른 애가 예전에 말 꺼냈던 건데 내가 안 한다 그랬어요. 그리고 시우는 내가 오늘 만난 친구를 싫어하는 거예요. 속옷 그건 아예 몰라요.”
“그래서 지금 수영복 모델을 하겠다는 거야?”
“원래는 싫었는데…… 한 번 해보니까 뭐. 다 벗으라는 것도 아니고.”
허,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르쳐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도경은 시우가 보고 있진 않은지 재빠르게 확인했다. 시우는 여전히 다른 손님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솔직한 게 좋다고 했으니까 그냥 말할게.”
둘의 뒤로 손님 하나가 지나갔다. 지한이 도경의 손에 눌린 제 손을 빼내려고 했다. 어딜. 놔줄 때까진 가만히 있으란 뜻에서 손가락이 다 접히도록 힘을 줬다. 억지로 주먹을 쥐게 된 지한은 더 이상 손을 빼내려고 하지 않았다.
“앞으로 뭐 할 땐 나한테 다 말해.”
지한이 황망히 도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해서 도경을 화나게 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런데 화난 이유는 모르겠고, 그래도 일단 화는 풀게 하고 싶고. 감출 줄 모르는 속내가 와르르 쏟아져 도경에게 전해졌다.
“말, 다 했는데. 방금. 내가.”
“뭘 할지 말지 정하기 전에 나한테 먼저 물어보라고.”
손을 놔주었다. 지한은 잡혀있던 손을 문지르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럼 수영복, 그거는.”
“내일 시간 되지?”
듣기 싫은 소릴 또 하려고 들기에 말을 잘랐다.
“두 시까지 우리 회사 앞으로 와. 들어오지는 말고, 도착하기 10분 전쯤 연락해.”
“형 회사에……?”
“택시 타고 와. 결제는 도착하면 한다고 해.”
영문도 모르면서, 지한은 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원래는 그래도 한 시간쯤은 머무르려 했으나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래서 왔고, 선물이래서 쓰레기 같은 양주 맛도 봤다.
일어나려던 도경은 눈앞의 글라스 두 개와 과일이 잔뜩 올라간 접시에 주춤했다. 시우가 준 것들을 다 남기고 갔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심호흡한 도경은 고춧가루를 뿌린 것 같은 맛의 양주가 담긴 잔을 들었다. 코로 숨을 쉬지 않고 마셨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벌써 가세요?”
다른 바텐더가 도경의 카드를 가지고 간 사이 시우가 다가왔다. 도경은 시우의 손모가지를 비트는 상상을 했다. 기분이 나아지니 웃는 표정을 짓기도 한결 수월했다.
“내일 출근해야 해서. 잘 마셨습니다.”
“또 오세요.”
끝까지 그렇게 나오시겠다. 도경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카드를 받아 돌아섰다.
계단을 오르고 호텔 밖으로 나오면서도 잠잠하던 지한은 까만 택시들이 늘어선 구역에 들어서자 더 기다리지 못하고 도경을 불러 세웠다.
“형, 근데, 형 잠깐요.”
“응?”
왜 이렇게 빨리 가냐고도 묻고 싶을 테고, 바에서 손을 놔주지 않던 이유도 묻고 싶을 테지만. 입술을 씹어댄 지한은 결국 제 딴에 가장 덜 예민하다고 판단되었을 주제를 꺼냈다.
“나 내일 형 회사에 가서 뭐 하는데요?”
“소개해줄게. 일.”
“일?”
“그러니까 수영복은 안 돼.”
“……아?”
“알겠지?”
지한의 입이 바보같이 벌어졌다. 도경은 지한이 알겠다고 하기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곧 지한이 턱을 끄덕였다.
“네.”
도경은 지한의 팔뚝을 살짝 쥐었다 놓으며 인사했다. 이따 시우 씨랑 잘 들어가. 언제까지 입을 벌리고 있을 예정인지 모를 지한을 두고 돌아섰다.
할 일이 남아있었다.
***
아파트로 돌아가자마자 도경이 한 일은 종량제 봉투를 찾는 것이었다. 고용인의 성격을 잘 아는 도우미는 쓰레기통과 가장 가까운 서랍에 종량제 봉투를 사이즈 별로 보관해 두었다. 그는 100리터짜리 봉투 뭉텅이를 꺼내 들고 복도 끝 방으로 가 방바닥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쓸어 넣었다.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옷이 제법 되는지라 하나론 부족했다. 도합 네 개의 봉투를 썼다. 양손에 봉투를 하나씩 들고, 남는 두 봉투는 발로 차고 굴려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봉투들을 트렁크에 넣고 나서야 현실적인 걱정이 밀려들었다. 한밤중에 정장 차림으로 거대한 종량제 봉투와 씨름하는 모습이 CCTV에 찍혔을 것이라는. 어쩔 수 없었다. 그딴 것에 쓸 에너지는 아껴두었다 다른, 더 중요한 일에 써야 몸과 마음에 두루 이로웠다. 알면서도 어겨온 이치를 그는 비로소 지켜나가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가사도우미도, 기사도 퇴근한 야심한 밤에 인터폰을 받은 황 원장은 대문 벨을 누른 사람이 도경임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초간 아니, 얘가, 너 도경이 맞니, 하며 황당해한 뒤에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을 열어주면서도 얼떨떨한 빛을 지우지 못하던 그녀는 아들의 손에 들린 봉투를 보자마자 현실로 돌아왔다.
“일반 쓰레기 종량제 봉투? 이게 다 뭐야?”
“쓰레기 아니야. 아니, 버릴 건 맞는데.”
도경은 두 봉투를 신발장에 던지고 돌아 나와 남은 두 봉투를 마저 들고 들어왔다.
“회장님 모르는 데다 놔줘. 며칠만 맡아주면 내가 와서 처리할게.”
저택 안은 고요했다. 일평생 현관을 열어줘 본 적이 없다는 권 회장은 벨이 울려도 나와 보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아직 귀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도경을 황 원장이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너 설마 누구 찌르고 왔니? 저 안에 피 묻은 옷 들어있는 건 아니겠지?”
헛웃음이 났다. 도경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할 땐 언제고, 너무 스스럼없이 남을 찌르고 왔을 것이란 무서운 가정을 했다.
“찌르긴 누굴 찔러 내가.”
“무영이?”
도경은 황 원장을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무영을 찌르고 싶었던 순간들이 적지 않았음은 인정한다 해도, 그가 어디 찔리고만 있을 인간인가. 무영이 찔렸으면 도경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더러운 거 아니라고 했잖아.”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뒤늦게 2층에서 우다다 뛰어내려 온 개가 뒷발로만 서서 깡충거렸다. 그는 개를 안아 들었다. 개가 품 안에서 얌전히 있지 못하고 발버둥 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아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난 개도 그냥 못 만져?”
“네가 옷에 털 묻는 거 싫어하니까 그렇지. 왜 엄마한테 화내.”
개를 내려놓고 쭈그려 앉으려니 벌써 바지에 붙은 하얀 털 한 가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털이 묻은 바지를 털어내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식은땀도, 발작하기 직전 찾아오는 울렁임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 도경이 지난번에 현경이 안 내쫓고 리즈 잘 봐줬지. 착해.”
옆에 함께 쭈그려 앉은 황 원장이 도경의 등을 쓰다듬었다.
“리즈. 오늘 우리 집에 가서 잘까?”
개가 혓바닥을 내밀고 헥헥댔다. 작은 분홍색 혀. 그보다 훨씬 더 두껍고 큰 인간 남자의 혀를, 그 혀가 가진 촉감을 생각했다. 물컹하고 축축한. 그런데 왜인지 뜨겁게 느껴지는.
황 원장이 도경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희고 뾰족한 얼굴에 근심이 들어차 있었다.
“권도경, 너 무슨 일이야. 저건 다 뭐고,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 말해봐. 엄마한테 말 못 하는 게 어디 있어.”
“얘 있으니까 잠이 잘 오더라고.”
“엄마를 바보로 알아.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니?”
“진짜야.”
“정말?”
“정말.”
한때 배 안에 품었던 자식의 꿍꿍이를 파헤치는 눈빛으로 도경의 얼굴을 샅샅이 훑은 황 원장이 마침내 근심을 거두었다. 그녀는 개에게 필요한 용품들을 빠짐없이 챙겨 넣은 가방과 외출할 낌새에 신난 개가 자진해서 쏙 들어간 켄넬을 도경에게 건넸다.
“엄마만 믿어. 회장님은 절대로 못 보는 데다 꽁꽁 숨겨놓을게.”
쓰레기봉투들을 보며 다짐하는 말투가 결연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권 회장에게 들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도경은 순순히 황 원장에게 볼을 내주었다. 쪽. 권 회장이 있었으면 기겁했을 소리가 났다. 남편이 아무리 싫어해도 황 원장은 아들들의 뺨을 포기하지 않았다.
차로 돌아와 켄넬을 뒷좌석에 놓고 안전벨트를 맸다. 캄캄한 데다 도경의 냄새도 멀어져 불안했는지 개가 시끄럽게 굴었다. 조수석으로 옮겨놓으니 조용해졌다. 기어를 바꾸고 핸들을 돌렸다. 많은 이들이 잠들었을 시각의 골목을 비추는 빛이 드물었다. 가로등만이 묵묵히 길을 안내했다.
차가 도로에 진입한 지 10여 분쯤이 지나가면서부터 개가 창살을 긁었다. 꺼내달라고 끙끙거리는 개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알려주고 싶었다. 내일 실컷 놀게 해줄 테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솔직한 것이 좋단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가진 패를 홀랑 다 까는 짓은 도경의 사전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지한은 바에서 손 좀 세게 잡은 것 가지고 도경이 화났다고 오해했다.
천만에. 살짝 짜증이 났던 것뿐이다. 지한에게 진짜로 화가 난 상태의 자신을 보여줄 계획, 도경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제력을 잃어버린 지한이 상대를 때려눕히는 유형이었다면 도경은 상대로 하여금 구급차를 부르게 만드는 유형이었다. 전자는 일차원적인 공포지만 후자는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공포였다.
찢어진 머리가죽에서 나온 피가 이마로 줄줄 흘러내리는 도경을 구급차가 올 때까지 붙들고 있던 무영에게서 봤고, 그런 둘의 주위를 맴돌면서 가까이는 다가오지 못하던 이안에게서 봤다.
구제할 도리가 없는 친구를 보며 느껴야 할 안타까움보다 훨씬 더 강하게 그들을 뒤덮었던 감정. 저것은 우리와 종족이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어쩌면 그냥 두고 도망쳐야 우리라도 무사할 것이라는 거리감을 도경은 놓치지 않았다.
절대로 지한에게 다는 들키지 않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욕망도 걸러서 내보낼 것이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하나둘 내보내다 언제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까지 새어나갈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보이고 싶지 않았던 면모를 너무 많이 보였다. 괜찮으니 참지 말라던 지한도 언젠간 한계에 도달하게 되어있었다.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었다. 지한의 한계를 건드리지 않으려면 약간은 낮은 온도를 유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 도경은 항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나 너무 힘들었어, 우리 집에 와서 나랑 같이 잠들어주라, 내가 너를 마음껏 만지고 있게 해주라, 기절할 때까지 나를 끝없이 받아주라.
안락함에 젖어 그런 말을 해버리지 않도록.
#67
거울에 비친 지한은 어딘가 엉성해 보였다. 자세는 엉거주춤하고 표정은 굳었다. 까만 바지에 까만 재킷. 하얀 셔츠. 까만 넥타이. 그의 양옆에서 현미경에 눈을 댄 과학자처럼 거울을 들여다보던 남녀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고객님 비율이 좋으셔서 뭐든 잘 소화,”
“이건 너무 딱 붙어서 안 돼요. 같은 사이즈로 좀 덜 타이트한 건 없나요?”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말을 잘라먹는 고객은 익숙한지, 프로다운 미소를 잃지 않은 판매원이 고객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빠릿빠릿하게 돌아섰다.
“이사님이랑 사이즈가 똑같으시네. 키도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도경이 형이요?”
“네.”
여자가 지한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정장에 감싼 몸이 구석구석 해부당하는 기분에 지한은 괜히 주먹을 쥐었다.
“저기.”
“유 대리요.”
“아. 네. 유 대리님은 근데, 도경이 형 사이즈를 어떻게 아는.”
여자, 유 대리가 눈을 치켜떴다. 너는 대체 왜 그런 게 궁금하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한은 손가락을 더 안으로 말았다.
“예전에 부산 마켓 갔다가 급하게 옷 사다드린 적 있거든요. 누가 이사님 옷에 커피 흘려서.”
“마켓…… 마켓?”
“그런 마켓 말고요, 콘텐츠마켓이요.”
오늘 지한은 도경과 약속한 대로 택시를 타고 두 시까지 회사 건물 앞으로 갔다. 거의 다 와 간다는 지한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분명 도경이었건만, 멈춘 택시로 걸어와 결제를 한 사람은 처음 보는 여자였다.
자신을 도경이 보낸 유 대리라고 소개한 여자는 그 이상의 설명 없이 지한에게 손짓했다. 따라오세요. 도경이 보냈다니까 따라갔다. 여자가 모는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이건 이번에 새로 나온 라인인데, 활동성이 좋으면서 너무 올드하지는 않아서 한 번 입으면 또 찾으시는 고객님들이.”
“이리 주세요.”
이번에도 판매원의 말을 가차 없이 자른 대리가 지한의 품에 옷을 던지듯 안겨주었다. 터프한 여자였다. 누가 보면 도경이 아니라 그녀가 상사인 줄 알겠다.
“뭐 해요? 갈아입고 나와 보세요.”
낯선 사람은, 아니, 그냥 사람은 다 대하기 어려운 지한이었지만 그래도 더 불편한 성별을 고르라면 여자였다. 그 상대가 오늘 처음 보는 여자일 때는 난이도가 훨씬 올라갔다. 특히 유 대리란 여자는 왠지 모르게 선생님 같아서 자꾸 쩔쩔매게 됐다. 제발 이번 옷은 대리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며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까 거보단 이게 훨씬 나아 보이는데. 전문가가 봐도 그래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고객님 몸이 워낙 받쳐주셔서 다 잘 어울리십니다.”
“음, 막 잘 빠졌다 이런 느낌보다는 좀 더 센 게 좋은데. 보자마자 경호원이다 싶은.”
“아, 그러시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친절한 판매원이 다시 새 옷을 찾아 나섰다.
“저기, 저. 경호원?”
정장 브랜드를 네 군데 돌아다니는 동안 듣지 못했던 쇼핑의 목적이 예상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난 것이라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도경이 지한에게 경호원 자리를 주려고 한다는 소린가? 그런데 한 벌에 몇십만 원 하는 정장을 입힌다고? 지한의 상식으론 납득이 불가능했다.
“역이요. 경호원. 보디가드 역할.”
“역할?”
판매원이 빛처럼 빠르게 새 옷을 가져왔다. 대리는 판매원이 또 몸이 예쁘시고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기 전에 옷을 낚아채 지한에게 넘겼다. 어째 옷을 던지는 폼이 점차 과격해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입고 나와 봐요. 이번에도 아니면 다른 데 가게.”
지한은 옷을 갈아입으며 생전 해본 적 없는 기도를 했다. 진짜 이번에는 저 여자가 바로 이 옷이라고 말하게 해주세요. 어딘가 텁텁한 향기로 가득한 백화점에서 계속 고문당하느니 차라리 막노동을 하고 싶었다.
지한을 창조만 해놓고 내다버린 줄 알았던 신이 웬일로 기도를 들어주었다. 대리는 탈의실 문을 열고 나오는 지한을 보자마자 손가락을 튕겼다. 이거다, 이걸로 주세요.
대리가 계산한 옷을 들고 주차장으로 나오니 여섯 시가 훌쩍 넘었다. 장장 네 시간이나 함께 있었다. 이동 시간을 빼도 백화점에서 최소 세 시간은 넘게 보냈다. 밥도 못 먹고 주야장천 옷만 갈아입다 퇴근 시간대의 지하철에 올라탈 생각을 하자 피로가 몰려왔다.
“대리님은, 이제 회사로 돌아가요? 난 아무 데나 내려주면.”
“지한 씨 데려다드리고 나서 저도 바로 퇴근해야죠.”
“네? 그거는 너무 먼데.”
“뭐가 멀어요. 아무리 막혀도 20분 안엔 가요.”
서울에서 지한이 사는 동네까지 가려면 아무리 빨라도 40분, 길면 한 시간 반까지 걸렸다. 대리가 데려다준다는 곳은 지한의 집이 아니었다. 그럼 날 어디다 떨어트려 놓을 예정이냐고 물으려다 실패했다. 실장인지 뭔지 하는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은 대리가 엄청 버럭 했기 때문이다.
이사님이 지난번에 사고 친 거 수습해주신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여자예요, 걔는. 진짜 연예계 은퇴하고 싶단 소릴 돌려하는 거 아니에요! 지한은 몸을 어떻게든 웅크려 의자에 파묻혀보려 노력했다. 그런다고 시우처럼 작아지진 않았다.
야근하게 생긴 직장인에게 괜히 말을 걸지 않은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목적지가 명확해졌다. 시우가 일하는 호텔을 지날 때 예감했고 높은 아파트들이 늘어선 단지를 지날 때 확신했다. 차는 도경의 아파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카드는 내일 제가 직접 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엘리베이터가 보이는 출입구 앞에 차를 세운 대리는 그냥 내리려는 지한에게 쇼핑백을 챙겨주며 말했다.
“도경이 형 카드면 내가 지금 받아서…….”
“지한 씨 하는 거 보니까 올라가다 카드 흘릴 것 같아서 안 되겠어요.”
“아니 내가 뭐를 어쨌는데.”
“문 닫을 때 세게 좀 닫아 주실래요? 안 닫힐 때가 있어서.”
지한이 닫으란 문은 안 닫고 어버버하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대리가 상체를 조수석 쪽으로 빼 직접 문을 닫았다. 쾅. 지하를 울리는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차가 쌩하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지한은 자신이 대리에게 덜떨어진 놈 취급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싸가지 없어!
분한 기분과는 관계없이, 흘릴 것 같아서 안 되겠다는 대리의 말이 신경 쓰여 주위를 잘 살폈다. 떨어트린 물건은 없었다. 쇼핑백을 소중히 끌어안은 채 신중히 도경의 호수와 호출 버튼을 눌렀다.
마침 도경이 인터폰 근처에 있었던 모양인지 신호가 두 번도 안 가서 끊겼다. 양옆으로 열리는 문 사이를 통과하는 발걸음이 무겁지만은 않았다.
비록 대리가 싸가지 없긴 했어도 여태 만나본 도경의 다른 주변 인물들에 비하면 지극히 정상인이었다. 순하게 생긴 눈을 끔벅거리며 사람 속을 뒤집는 이안과 또 말을 섞느니 무서운 얼굴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대리와 몇 시간을 보내는 쪽이 훨씬 나았다.
현관 앞에 도착한 지한이 벨을 누르기도 전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안녕.”
들어올 공간을 내주느라 문에 붙어선 도경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욕실에서 맡고 여행 간 호텔에서도 맡았던 향이 물씬 풍겼다. 안녕이라니 뭔가 어색하면서도…… 설렜다.
도경을 지나 신발장에 들어선 지한은 운동화를 벗으며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안녕하세요, 라고 답하자니 너무 딱딱하고 안녕, 이라고 하자니 친구 먹자는 것 같았다. 지한이 무의식중에 말을 짧게 해도 개의치 않는 도경이라면 안녕이라고 해도 상관없으려나. 그럴지도.
“……네.”
무난하게 네, 로 결정했다. 남의 말에 에, 예 같은 흐지부지한 소리로 뭉개기 일쑤였던 지한은 언제부턴가 정확하게 네, 라고 발음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종종 놀랐다. 도경은 생각지도 못한 방면에서 지한에게 영향을 끼쳤다.
“배고프지 않아?”
지한을 먼저 들여보내고 신발장 문을 닫은 도경이 자연스럽게 쇼핑백을 가져갔다. 오늘의 그는 축축 늘어지는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의 집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그는 집에서도 최소한의 격식은 챙길 수 있는 복장을 고수했다. 심지어 잘 때도 잠옷처럼 생긴 옷은 안 입었다.
지한이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차라리 그런 것이었길 바랐다. 도경이 혼자 있을 때도 완전히 풀어져서 쉬지 못한다고 상상하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냥 뭐…… 어?”
배고프다고 말하긴 뭔가 창피해서 얼버무리며 거실에 들어선 지한은 소파 아래 엎드려 열심히 껌을 씹는 개와 눈이 마주쳤다. 용무가 있어 움직일 순 없지만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아는 척은 해야겠는지 개의 꼬리가 줄기차게 흔들렸다.
“쟤 왜 또 여기.”
“엄마가 맡겼어.”
여행 가서 물어봤을 때는 분명 가족과 사이가 안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엄마가 그새 개를 또 맡겼다니. 의문을 부르는 상황이었으나 그런가 보다 했다. 다른 식구들과는 사이가 나빠도 엄마와는 사이가 좋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쇼핑 잘했어?”
대리란 여자가 싸가지 없더라고 말할까 하다 그냥 네, 했다. 대놓고 도경의 친구들을 욕한 것만으로도 염치가 없는데 직원까지 안 좋게 말했다간 지한이 제일 나쁜 놈으로 보일 것이다.
“유 대리한테 전화 받았어. 네가 뭘 입혀놔도 잘 어울려서 고르기 어려웠대.”
“그 여자, 아니, 그분이, 그분께서 그랬다고요?”
“어떤 직원은 네 얼굴 쳐다보느라 자기 말을 하나도 안 듣는 것 같았다던데.”
“무슨.”
지한에게 찬바람을 쌩쌩 불어놓고 도경한테 전화해서는 그런 소리를 했다니,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싸가지 없다고 이르지 않길 잘했다.
순식간에 껌을 해치운 개가 소파에 앉는 지한에게 느지막한 인사를 하러 왔다. 인터넷 동영상에서 본 대로 배와 엉덩이를 받쳐 개를 안았다. 개의 꼬리가 부채꼴로 펼쳐져 흔들렸다.
“친구한테 못 하게 됐다고 말했어?”
“뭘. 아, 수영복?”
“응.”
“아직.”
지한의 옆자리에 앉은 도경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반쯤 지웠다. 이게 아닌데. 지한은 빠르게 말하려고 하면 할수록 꼬이는 스스로의 혀를 알면서도 급해졌다. 도경이 또 어젯밤처럼 낯선 얼굴을 할까 봐.
“아니, 할 건데, 그러니까 못 한다고. 네. 그렇게 말할 건데요. 일단 그전에 형이 나한테 무슨 일을 소개시켜 줄지는 알아야.”
“유 대리가 말 안 해줬어?”
“그냥 무슨, 경호원. 경호원 역이라고만.”
대리가 중요한 정보를 전하지 않았다고 짜증 낼 줄 알았던 도경은 오히려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자세히 알려주지 말라고 했어.”
“왜요?”
“직접 말해주려고.”
도경이 몸을 지한 쪽으로 기울였다. 스르륵. 그의 동작은 곧잘 그런 소리가 난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조용하고 빨라서.
“짧은 대사는 안 틀리고 읽을 수 있지?”
“대사요?”
“넌 말 많이 안 하면 엄청 세 보이니까.”
괜찮을 거야. 점점 줄어든 목소리가 끝에 가선 속삭임처럼 멎었다. 도경의 허벅지가 지한의 허벅지에 닿았다. 면바지와 청바지가 쓸리며 빳빳한 마찰음을 냈다. 허벅지를 세우자 그 위에 앉아있던 개가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움직이지 좀 말라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그럼, 말 많이 하면, 안 세 보여요?”
“글쎄.”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않은 도경이 싱긋거렸다. 그러고 보니 초반엔 이가 보이든 안 보이든 웃을 때마다 손등으로 입을 가렸던 그가 최근엔 통 그러지 않았다.
―아 지금 다시 케이지로 몰아주고 있습니다. 니킥! 목을 잡아주고 있죠, 역시 압박하려는 존스입니다.
관중들의 환호와 함께 격해지는 중계가 산통을 깨놓았다. 지한은 그제야 도경의 TV 화면에 격투기 경기가 나오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본인과 어울리지 않는 종목을 시청하는 도경을 본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의아하다 못해 걱정이 되려고 했다. 대체 왜 그가 종합격투기에 관심을 가질까.
“또 저런 거 보고 있어요?”
“그냥 돌리다 보니까. 왜,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좋지도 않아요.”
“싫은 거 같은데?”
딱히 좋다, 싫다 나눠서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하라니까 했다. 복싱이든, 연기든, 모델이든.
“그냥 옛날 생각나서 좀 그런 거지, 경기가 싫단 건 아니에요.”
“무슨 옛날 생각?”
남의 얼굴을 헬멧으로 갈기는 꼴까지 보인 마당에 못 말할 것이 뭐 그리 남았나 싶기도 했다. 소현에게 돈을 받았다는 건 영영 말 안 할 계획이고, 보육원 출신이란 점도 최대한 늦게 말하고 싶지만 그 두 가지 정도를 빼면 이제 지한은 도경에게서 감추고 싶은 비밀이 없었다. 애초에 비밀이 많은 인생도 아니었다. 가진 게 없을수록 숨겨야 할 것도 적었다.
“좀 배웠어요. 학생 때.”
“격투기를?”
“배운 거는 복싱인데. 어차피 저런 데 나가려고 배운 거니까.”
더 커진 환호소리가 대화를 방해했다. 중계에도 덩달아 속도가 붙었다. 레프트! 연타 치고 다시 케이지로 몰아줍니다. 펀치에 무게가 실리고 있어요. 저럴 때 좀 붙어줘야 돼요, 존스. 전진, 어퍼!
“그래서 싸움 잘하는 거였구나?”
“형도 배우면 나 정도는 해요.”
도경이 풋 하고 웃었다.
“과장이 심한 거 아니야?”
“진짠데.”
과장을 1g도 안 섞었다면 그야 거짓말이겠지만, 도경도 배우기만 하면 얼마든지 늘 수 있었다.
“형 팔다리 길어서 리치도 길 거고, 그리고.”
지한은 무릎쯤에 가지런히 놓인 도경의 손을 들어올렸다. 지난번처럼 개가 달려들까 봐 나머지 손으론 열심히 하얀 털을 쓰다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지한의 손길이 만족스러웠는지 개는 얌전했다.
“여기 힘도 약한 것 같지는 않고.”
약한 것 같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꽉 잡아선 안 된단 조바심이 수시로 들었다. 지한의 손바닥 위에 놓인 손은 그만큼 하얬다. 때에 따라서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을 발휘할 줄 아는 손이지만, 그럼에도 그 핏기 없는 색과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이 가진 귀함은 퇴색되지 않았다.
홀린 것처럼 도경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던 중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한은 불에 덴 듯 후다닥 손을 뺐다.
“나한테 격투기를 추천하는 거야, 지금?”
지한에게 손을 주물럭거려진 사람치곤 태연하기만 한 태도였다. 내가 막 만졌는데 아무렇지도 않은가 이 남자는. 엉뚱한 생각에 잠겨 도경의 질문을 그냥 넘길 뻔했다. 몇 초 만에 또 다른 데로 튀려던 정신을 겨우 다잡았다.
“미쳤, 아니. 아니요. 하지 마요. 난 그냥, 나 정돈 별거 아니라는 얘기를 한 거지.”
“왜 하지 마? 나도 잘할 것 같다며?”
“얼굴 맞으면 어떡하려고요. 형은 피부도 하얘서 흉 더 잘 날걸.”
괜한 소릴 해서 도경이 격투기를 배우겠다고 하면 어쩌나. 불현듯 오만 상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수영복 모델은 안 된다고 했던 도경의 심리에 공감이 되기 시작했다.
연습 도중 남에게 맞아서 입술이 찢어진 도경은 도저히 눈 뜨고 볼 만한 것이 못 됐다. 연습이고 뭐고 구경하던 지한이 대신 상대의 눈두덩을 가격해 버릴지도. 장난삼아서라도 도경이 글러브를 끼는 날은 오지 않게 해야겠다.
―아…… 지금, 맞았나요?
―골절은 참아도 저건 못 참죠. 로 블로가 나왔습니다.
관중석의 환호가 야유로 바뀌며 중계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TV에 짧은 눈길을 준 도경이 고개를 꺾는 것 같더니 갑자기 지한 쪽으로 풀썩 기울었다.
“뭘 했는데 저래?”
말도 없이 지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도경이 눈만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쓰러지기라도 하는 줄 알고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지한은 조금이라도 더 도경에게 붙어 있으려는 시선을 억지로 TV에 고정시켰다. 케이지에 기대 쭈그려 앉은 선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로 블로요. 벨트 아래 차면 로 블로라고 하는데, 그니까 쉽게 말해서…… 급소 차는 거.”
“그럼 이제 저 사람 아웃당해?”
“5분 쉬고도 회복 못 하면 노 콘테스트예요. 근데 보통 다시 올라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이기려면 계속해야 돼서.”
도경이 손으로 지한의 허벅지를 쓸었다. 허벅지를 방석 대용 삼아 편히 앉아있던 개가 파드득거리며 일어났다. 그렇지만 지한의 머리카락을 뜯었던 것처럼 도경의 손을 물거나 하진 않았다.
“반칙했는데 게임을 안 멈춰?”
“그래서 반칙하는 게 유리할 때도 있는데, 그렇다고 계속 반칙하면 선수 이미지 나빠지니까. 게임에선 안 해야지.”
지한은 어째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은 도경의 손을 너무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게임 아닌 데서는 해도 되고?”
“뭐 실전에선.”
“빗겨나가면 괜히 상대방 화만 더 나게 하는 거 아니야?”
그렇기는 했다. 도경이 왜 격투기에 이어 육탄전을 주제로 대화하고 싶어 하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다만 실제로 타인과 맞붙게 되었을 때의 주의사항 정도는 알려주고 싶어졌다.
도경이 남과 주먹다짐할 일은 드물겠지만 혹시 또 몰랐다. 무영 같은 놈을 주변에 두는 한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무영이 헬멧으로 도경의 차 보닛을 찌그러트렸던 날 만일 지한이 없었다면. 그래서 무영이 지한 아닌 도경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면 어찌 됐을지. 구체적인 상상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아찔했다.
“제일 좋은 기술은 사실 그냥 싸움을 피하는 거예요. 아무리 내가 이길 거 같아도 붙어보기 전에는 모르고, 그리고 걔가 무기를 옷 속에 숨겨놨는지, 무슨 짓을 할 건지 나는 모르잖아요. 그니까.”
이론과 실전은 달랐다. 애초에 싸움을 벌이지 않는 것이 최고의 기술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지한 본인은 그걸 못하고 매번 주먹을 휘두르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도경은 지한과 다르니까. 훨씬 더 똑똑하니까 다치지 않고도 위기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얼마든지.
“근데 만약에 꼭 붙어야 되는 상황이면, 급소 한 대 치고 빠지는 게 제일 빠르기는 해요. 대신 제대로 쳐야지. 헛발질하지 말고.”
“운동하는 사람들은 그런 짓 비겁해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실전에 비겁한 게 어디 있어. 내가 이기는 게 중요하지.”
실전에선 이기는 것만이 중요했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
“안 맞고 안 쓰러지는 게, 안 죽는 게 이기는 거예요.”
“너 지금 되게 전문가 같아.”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든 도경이 지한의 어깨에 턱을 괬다. 그의 손은 계속해서 지한의 허벅지 위를 오가고 있었다. 확실히 처음보다는 힘이 들어간 손길이었다.
“나중에 화나면 내 급소 때리고 도망갈 거야?”
“뭔 이상한 소리를 해요.”
도경의 관심을 격투기에서 멀어지게 하려, 그리고 그 김에 단단해진 아랫배도 진정시키고자 지한은 도경의 옆으로 팔을 뻗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자연스레 도경의 손이 지한의 허벅지에서 떨어져 나갔다. 어깨에 닿아있던 턱도. 차라리 잘됐다. 더 놔뒀으면 지난번처럼 냅다 입술을 비비고 싶어졌을 것이다.
“그만 봐요, 저런 거.”
되는 대로 채널을 막 돌렸다. 종목을 막론하고 스포츠 채널인 것 같으면 더 보지 않고 돌려대자 얼마 안 되어 다른 채널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도경이 보고 있던 채널을 너무 멋대로 바꿨나 싶어 슬쩍 눈치를 살폈다. 어느덧 자세를 똑바로 고친 도경은 그새 거기로 옮겨간 개의 목덜미를 만지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래, 보려면 어, 이런 거 봐요. 형이 좋아하는 거.”
마침 걸린 채널에서는 으리으리하게 생긴 피아노를 마주하고 앉은 피아니스트가 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허옇게 센 연주자는 눈을 감은 상태로 건반 위 허공에 손을 띄웠다. 분명 한 손가락만이 건반을 건드렸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한 번 깜박이자 보이는 것은 동시에 다르게 움직이며 각자에게 주어진 건반을 누르는 열 손가락이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형 차에서 나오는 음악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배경음악으로 틀어놓는 거지. 안 시끄러워서.”
“피아노 배웠다고 했잖아요.”
도경이 눈도 안 뜨고 연주를 이어가는 TV 속 남자에게 잠시 관심을 주었다. 그 틈을 못 참고 손을 긁는 작은 앞발 때문에 오래 가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제일 못하는 과목이 음악이었어.”
도경의 입에서 뭔가를 못한단 소리가 나오니 낯설었다. 도경도 인간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조용해질 때도 있고, 흥분하면 이성이 약해져 남의 사정을 배려하지 못할 때도 있는 인간. 그런데도 왠지 그는 모든 방면에서 우수하기만 할 줄 알았다. 학문적이거나 예술적인 분야에선 특히 더.
“못하는 게 뭐, 얼마나. 몇 등급 나왔는데요?”
“A.”
“……A면 높은 점수 아니에요?”
“A라고 다 같은 A는 아니니까.”
인간이긴 한데, 역시 보통 인간은 아니었다. 제일 못하는 과목이 A였다는 것은 즉 모든 과목에서 A가 나왔다는 말이었다.
“아니, 못하는데 어떻게 A가 나와요. 엄청 비싼 과외 받았어요?”
“친구가 가르쳐줬어.”
“형 친구 중에 그런 거 가르쳐줄 사람도 있어요? 다들 아가리 터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아차. 망할 놈의 주둥이가 또. 뒤늦게나마 지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을 안으로 말고 눈치 보는 지한을 보던 도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개가 깜짝 놀라 소파 아래로 뛰어내렸다.
“미안. 미안해요.”
“또 해봐.”
“뭘요.”
“내 친구들 욕.”
“아, 왜 그래요. 미안하다고.”
아까처럼 지한의 어깨에 턱을 댄 도경이 눈을 깜박였다. 눈이 감길 때마다 쭉 뻗은 속눈썹이 시선을 빼앗았다. 저렇게 생겨서 눈을 찌르면 어쩌지, 절로 걱정이 드는 길이였다.
“계속해 보라니까, 내 친구들 욕.”
도경이 얼굴을 들었다. 목덜미에 숨결이 와 닿았다. 그대로 올라올 줄 알았던 입술이 귀밑 턱을 찍고 다시 내려갔다. 목이 씹혔다. 따끔했지만 그럴 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몸을 거의 움찔거리지 않을 수 있었다. 개에게 머리카락을 뜯겼던 날도 도경은 한 군데만 집중적으로 씹어놨더랬다. 다음날이 되니 멍든 것처럼 진해져 있었다.
“걔네 얘기하기 싫어요.”
도경의 아파트는 어딜 가나 다 밝고 환했다. 똑같은 조명이 달린 침실에서 훨씬 더한 짓도 다 했는데 왜 이제 와서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인지 몰랐다. 그래도 지한은 끝까지 말했다.
“그런 인간들 얘기하기엔 형이랑 있는 시간이 아까워.”
남들이 자길 두고 잘생겼다고 했다는 말 하나도 선뜻 못 믿는 도경에게 아낌없이 좋은 말만 해주고 싶었다. 도경이 어떤 종류의 칭찬도 의심하지 않고 들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몇 번 더 잘근거린 뒤 허리를 똑바로 편 도경이 손을 지한의 등과 소파 사이로 불쑥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리가 도경의 팔 안에 갇혔다. 도경의 입술이 지한의 귀에 닿았다.
“너는 과일이면 다 좋아?”
“로션 냄새요?”
“응.”
“오렌지나…… 레몬 같은 거, 그런 게 좋아요. 코코넛은 느끼해서……!”
귓불을 씹힌 찰나였다. 대체 어찌 알았는지 혼자 돌아다니던 개가 소파 위로 점프했다. 손등이 긁혔다. 지한을 공격하려는 의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고, 작은 몸으로 높은 곳에 안전히 뛰어오르려다 보니 발톱에 힘이 들어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긴 했다. 그래도 배신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깡!
왕도 아니고 컹도 아닌 것이 딱 그런 소리였다. 깡깡. 손등을 긁어놓고도 꼬리를 내리기는 무슨, 오히려 지한에게 대놓고 짖기까지 했다. 배신감이 불어났다. 남의 목을 씹는 것도, 허벅지고 허리고 아무튼 마음껏 만지는 사람도 도경인데 왜 지한에게만 뭐라고 하는지.
지한의 허리에 감겨있던 팔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망치고 싶다고 느꼈던 조금 전의 과거가 무색하게, 아쉬웠다.
“얘가 밖에 못 나가서 이래. 너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도경에게 안긴 개가 갸웃거렸다. 지한도 인터넷에서 봤다. 산책을 안 시켜주면 스트레스가 쌓여 건강하지 못한 개가 된다고.
“그럼 지금 산책시켜요?”
개가 도경의 품 안에서 튀어 올랐다. 이번에야말로 한 줌도 안 되는 개에게 공격당하는 줄 알고 팔로 엑스 자를 그렸는데 그게 아니었다. 바닥으로 냅다 뛰어내린 개는 약이라도 맞은 것처럼 주방까지 다다다 달려갔다 다시 거실로 다다다 달려왔다. 장난감처럼 생긴 발이 안 보일 정도로 빨랐다.
“뭐야, 쟤, 개 왜 저래요.”
“네가 산책이라고 해서 그래.”
“산책이 왜.”
지한은 하려던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산책이란 단어를 연달아 들은 개가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며 야단법석을 떨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녁도 못 먹고 개 산책을 시키게 되었다. 식사 시간이라 돌아다니는 사람들보단 드문드문 보이는 식당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였다.
“이따 여기서 밥 먹으려고 했는데.”
개가 이끄는 대로 정해진 방향 없이 걷던 도경이 작은 건물 안쪽을 가리켰다. 영업이 끝난 수입 옷가게 옆의 문은 조그맣게 그려진 수저 그림이 없었으면 뭐 하는 데인지 감도 못 잡았을 만큼 시커메서 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뭐 파는데요?”
“이태리 요리. 안 좋아하면 차 끌고 좀 더 나가서.”
“풀만 아니면 돼요.”
“풀?”
“왜 지난번에 형이 시켜준, 아니, 그래서 싫었다는 거는 아니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지한이 말하는 풀의 정체를 알아차린 도경은 숨죽여 웃느라 개 목줄이 팽팽해졌는데도 움직이지 못했다. 기다리다 못한 지한이 팔을 잡아끌자 그제야 끌려왔다.
“왜 웃어요.”
“그날 속으로 내 욕하면서 먹었겠네.”
“아니에요!”
한 블록을 다 지날 때까지도 간간이 웃는 모습을 들킨 도경이 완전히 무표정을 되찾은 것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다음이었다. 바로 받지 않고 몇 초간 액정을 응시한 끝에 그는 전화를 받았다.
―리즈, 오빠 말 잘 듣고 있어요? 그랬어요, 응, 오빠가 잘해줘서 너무 좋아요?
도경이 개의 얼굴 앞에 들이댄 화면에선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나왔다. 화면에 뜬 허연 얼굴은 초면이었다. 도경에게 영상 통화를 건 사람은 ‘황 원장님’이었다. 그제야 지한은 도경이 어째서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는지 알았다. 지한과 함께 있어서 곤란했을 것이다. 잘못하다 화면에 잡히기라도 하면 뭐라고 소개할 것이란 말인가.
―어이구 리즈 벌써 지쳤어? 오빠한테 안아달라고…… 이건 우리 아들 몸이 아닌 것 같은데?
잘 서있던 개가 산책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처럼 우다다 달려와 지한의 다리를 긁어댔다. 어두컴컴해서 방심하고 있었다. 황 원장님은 리즈가 긁는 다리의 주인공이 자식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리즈 쟤 지금 외간 남자한테 저러고 있는 거니?
어찌해야 할지 몰라 굳은 지한에 비해 도경은 태연했다.
“응. 이번에 새로 들어왔어.”
―새로 들어오다니 어디에. 너희 회사에?
“응.”
모자의 대화를 듣다 사레에 들릴 뻔했다. 암만 생각해도 그들의 대화는 지한이 도경의 회사에 들어갔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새로 입사한 직원이라고 뻥을 치려 그러나. 도무지 그 속을 모르겠어서 숨죽이고 있는 지한에게 도경이 눈짓을 했다. 개를 안으란 것 같았다. 지한이 개를 안아들자 도경은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근데 그런 애가 이 시간에 너랑 뭘 하고 있어. 너 밤늦게까지 네가 이사라고 막 사람 부려먹고 그러니? 그러다 큰일 난다. 인터넷에 익명으로 고발당해.
“나랑 친해.”
―얘. 그렇게 치면 회장님도 사원들이랑 다 친하다?
“우리는 진짜로 친해. 맞지, 우리 친하지?”
도경이 또 지한에게 눈짓했다. 눈웃음도 눈짓이라고 할 수 있다면.
“네.”
화면을 자신의 얼굴 앞으로 가져간 도경이 손을 흔들었다. 엄마, 나 끊을게. 얼굴은 냉한데 동작은 어렸다.
“이제 들어가요. 리즈도 더 안 걷는대.”
“둘이 벌써 말도 통해?”
“아, 진짜.”
도경이 또 키득거렸다. 놀리는 데 아주 재미가 들렸다. 입으로는 툴툴거릴지언정, 지한은 하나도 불쾌하지 않았다. 도경이 웃을수록 지한도 즐거웠다.
주차장에 들어서 한 서너 걸음 정도 걸었을 무렵이었다. 얌전하던 개가 갑자기 지한의 주머니에 집착해 자꾸 코를 밑으로 처박고 킁킁댔다. 왜 그러나 했는데 주머니에 쑤셔 넣고 깜박한 간식 봉지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얘 간식 하나 더 줘도 돼요?”
간식이나 산책이나. 두 단어가 불러오는 효과는 비슷비슷했다. 두 개를 줘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개가 떨어지지 않게 팔 안에 잘 고정한 후 간식을 하나씩 주었다. 연한 색 혀가 날름날름 잘도 간식을 받아먹었다.
“혓바닥이 엄청 말랑말랑해요.”
마지막 조각까지 깔끔히 사라졌다. 날름거리던 혀의 촉감이 손끝에 감돌았다. 도경이 지한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지한은 손끝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모르지 않았다. 알 것 같았다. 도경이 왜 그렇게 쳐다보는지. 그래서 더 혼돈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차장에 있었고, 주차장에는 CCTV가 있었으며, 지한은 개를 안고 있었다…….
도경이 낚아챈 곳은 손목이나 팔이 아닌 셔츠 끝자락이었다. 손목을 낚아챘다 지한이 개를 떨어트릴까 봐 택한 차선책인 듯했다. 지한은 도경의 보폭에 맞춰 끌려가주며 안타까워했다. 그 와중에도 그런 것을 신경 쓰는 남자였다. 쓰지 말래도.
차에 당도한 도경은 조수석 문부터 열어젖혔다. 그러더니 어리둥절해 있는 지한의 품 안에서 개를 데려갔다. 개를 조수석에 앉혀놓고 문을 닫은 도경이 이어서 뒷좌석 문을 열었다.
“형 우리 지금 어디, 어어.”
개를 안고 있는 동안 하고 싶은 대로 못 한 것을 한꺼번에 풀려는 듯 손목을 잡아끄는 손아귀에 평소보다 두세 배 힘이 더 들어가 있었다.
도경이 뜬금없이 차로 끌고 온 목적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던지라, 지한은 훅 가까워지는 차체에 이마를 부딪치지 않으려 목을 움츠렸다. 덕분에 그는 아무 데도 들이박지 않고 안전히 엎어졌다. 도경의 차 뒷좌석으로.
지하에 주차된 차의 시트가 차갑게 식어있었다. 주차장이란 데에 생각이 미친 지한은 급히 돌아앉았다. 뒷좌석으로 들어온 도경이 차 문을 닫으며 리모컨을 눌렀다. 달칵. 차의 모든 문이 동시에 잠겼다.
왜 차에 타게 했느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러다 보았다. 지한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는 도경의 눈을. 뭔가를 잔뜩 참느라 씹히는 입술을, 그러다 다칠까 두려워질 만큼 힘이 들어간 턱을.
참지 말라고 한 사람은 지한이었다. 진심이었다. 도경이 지한의 앞에서라도 참지 않고 다 쏟아내길 바랐다. 그래서 이러는 것이라면, 집에까지 억누르고 갈 기력이 바닥난 것이라면.
“형.”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조금만.”
그렇게 말한 도경이 지한의 가슴팍을 누르며 입술을 비벼왔다. 비비는 줄로만 알았던 입술은 곧 넓게 벌어져 지한의 입술을 뒤덮었다. 급하고 숨찬 키스에도 많이 헉헉거리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이 도경의 방식이었고 지한은 어느새 그 방식을 익숙하다 여기기 직전까지 와 있었으니까.
지한을 시트 위에 눕히며 허벅지를 구부리게 한 도경이 말려 올라간 셔츠 아래로 드러난 허리를 쓰다듬었을 때도 지한은 놀라지 않았다. 맨살에 닿은 찬 손이 오한을 주었지만 얼마 안 가 지한의 입 안을 샅샅이 훑는 도경의 혀가 주는 끈적끈적하고 눅눅한 느낌에 덮여 잊어버렸다.
갈비뼈를 훑고 올라온 손이 가슴팍을 만졌을 때는 숨이 조금 차올랐다. 그러다 판판한 가슴에 솟아난 돌기가 눌렸다.
도경의 손가락 끝은 거칠지 않았다. 거칠기는커녕 매우 느긋한 속도로 작은 돌출부 주변에 원을 그렸다. 달렸다는 것도 거의 잊고 살아온 부위가 조금씩 솟아오르는 느낌에 지한은 몸서리쳤다. 도경이 왼손으로 다른 쪽 돌기를 꼬집었다.
지한은 힘껏 고개를 틀었다. 도경을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놀라서 그랬다. 시트에 뺨을 대고 숨을 골랐다. 제발 도경이 오해해서 굳은 얼굴만 하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형, 그, 방금은.”
“조용히 해.”
“아니요, 그게 아니고.”
도경이 이미 반 이상 말려 올라가 있던 지한의 셔츠를 확 위로 당겼다. 졸지에 쇄골까지 드러난 상체가 서늘했다. 더 올릴 곳이 없어지자 도경은 셔츠를 거칠게 구겨 지한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소리 나면 안 되지.”
과장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쑤셔 넣었다는 표현밖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얼결에 셔츠를 물게 된 지한은 머리통이라도 열심히 저었다. 아니야, 형, 내가 그게 싫어서 그런 게 아닌데……. 그러나 도경은 항변하는 지한의 몸짓을 보지 못했다. 지한의 손목을 움켜잡아 시트 위에 누르며 혀를 내밀어 딱딱하게 솟아오른 젖꼭지를 핥느라.
어디라고? 도경의 혀가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부위는 엉덩이보다 훨씬 더 지한의 사고를 얼어붙게 했다. 어디, 어디를 도경이 핥는다고? 아니, 그보다 도경이 그런 곳까지 빨아줄 거라고 기대도 안 했다.
수치스러워야 할지, 흥분해야 할지 아니면 둘 다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머리가 열기로 달아올랐다. 주인이 결정을 내리든 말든 몸은 착실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래는 이미 섰고 엉덩이는 알아서 들썩거렸다.
“아, 아아.”
도경이 이를 세워 유두를 콱 씹었다. 도리가 없었다. 지한의 입이 벌어지며 셔츠를 놓쳤다.
“혀, 형, 그게 아니고요, 그게…….”
“네가 싫다 그랬잖아.”
지한이 놓친 셔츠를 친절히 입 안에 다시 넣어주며, 도경이 말했다.
“나는 소리 내지 말라고 한 적 없어.”
그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지한이 입을 벌리려 들자 도경이 인상을 썼다. 그 이마에 주름이 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지한은 얼른 셔츠를 이로 꽉 물었다.
사탕을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 막대사탕에 첫 도전하는 것 같은, 노골적이고 민망한 소리가 이어졌다. 더 민망한 것은 타액과 함께 도경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아파하면서도 짜릿해하는 스스로였다. 시트에 닿아있던 등이 살짝 떴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에 다리고 팔이고 가만히 두기가 힘들었다. 도경이 손톱을 세워 지한의 손목을 긁어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거 뱉지 마.”
지한은 머리통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자신이 물려준 셔츠를 물고 있는 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도경은 지한의 바지를 내렸다. 속옷은 내리지 않았다. 근육이 선 허벅지 바깥쪽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손이 더 여린 살로 이루어진 안쪽으로 옮겨오며 급작스럽게 난폭해졌다.
사타구니 근처를 아프게 주무른 도경이 밭은 숨을 뱉으며 지한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팍을 핥고 씹었던 이가 이제는 그보다 더 살집 많고 두꺼운 허벅지에 마구잡이로 잇자국을 냈다.
맘껏 신음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도경에게 입 안을 잠식당한 상태에서 나는 소리라곤 목구멍에 갇혀 끙끙대는 소리가 전부였다. 처음부터 느긋하지 못했던 입은 급속도로 절제를 잃었다. 뾰족하게 간 것처럼 날카로운 이가 허벅지 안쪽 살을 물어뜯었다. 지한은 비명을 질렀다.
“아앗!”
침에 젖은 셔츠가 뭉친 채로 지한의 입을 탈출했다. 동글동글하고 작은 머리통이 조수석에서 배꼼 튀어나와 지한을 살폈다. 영문을 모르고 조수석에서 심심했을 개가 도경을 봤다, 지한을 봤다 하며 상황 파악을 하려고 했다. 할 수 있을 리야 없겠지만.
도경이 지한의 속옷을 내렸다. 자신의 버클도 내렸다. 더는 셔츠를 물고 있으라고 종용할 정신도 없어 보였다.
“형, 차. 뭐 묻으면.”
“닦으면 돼.”
지한의 중심부에 자신의 중심부를 비비며 도경이 말했다.
“그러면 되더라고.”
비슷비슷한 길이로 발기한 두 남자의 성기가 서로에게 쓸렸다. 도경이 손으로 두 물건을 한꺼번에 쥐고 쓸어 올렸다. 지한도 손을 뻗으려다 제지당했다. 지한의 손을 시트에 누르며 허리를 숙인 도경이 가볍게 키스했다.
“넌 가만히 있어.”
탁, 탁, 탁. 도경의 손과 성기, 그리고 지한의 것까지 한데 모여 마찰하는 소리가 차 안을 메웠다. 지한은 붙들리지 않은 왼손을 들어 도경의 뒤통수를 만졌다. 늘 누군가의 손길을 거친 것처럼 정돈된 머리카락을 잡아 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지한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애무하며 빠져나갔다.
감긴 줄 알았던 도경의 눈꺼풀이 파드득 떨리며 올라갔다.
“아……!”
물기를 짜낸 걸레처럼 말려져있는 셔츠를 당겨 펼친 도경이 그것을 지한의 얼굴에 뒤집어 씌웠다. 시야가 얼룩덜룩해졌다. 도경의 손이 셔츠에 가려진 눈, 코, 입을 다 뭉개 버리려는 듯 짓이겼다. 다른 손으로는 더 커질 것 없이 최대치로 부푼 아래를 터트릴 듯 쥐어 압박해왔다.
“지한아.”
눈앞이 트였다.
“좋아?”
셔츠를 내던진 손이 지한의 아랫배를 세게 눌렀다. 굴곡 없는 부위가 푹 꺼졌다. 장난스럽게 휘두른 주먹에 잘못 맞은 정도의 충격이 전해졌다.
“조, 좋, 좋아요.”
압박당하던 중심부가 풀려났다. 지한은 도경의 손안에서 그의 것과 함께 감싸여 사정했다.
살며시 접히는 도경의 눈이 덜 차오른 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