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Wide Open
#64
“첫날은 여섯 팀, 두 번째 날은 일곱 팀, 세 번째 날은 아홉 팀 해서 총 스물한 팀 맞죠? 이사님은 첫날만 가시는 거고요.”
“네.”
파일로 최종 확인이 끝난 리스트를 다시 프린트해 온 대리는 손님용 의자에 앉아 이번 연도 콘텐츠마켓에서 만날 업체들을 수기로 재차 확인했다. 하도 업무 태도가 칼 같아 거래처 남자들이 꺼려 한다는 소리는 들었다. 칼 같기는 했다. 빠릿빠릿하고 매사에 단호했다. 도경에겐 최고의 부하지원이었다.
“저 그리고 이사님. 제가 지난번에 실수를 한 것 같아요.”
리스트를 책상 위에 내려둔 대리가 하이라이터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실수를 고해하는 순간에도 냉한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무슨 실수요?”
“이사님 친구라는 분이 찾아오신 적 있거든요. 한 달인가 정도 전에.”
대리의 시선이 연필꽂이에 가 꽂혔다. 몇 년을 붙어 일하다 보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되기 마련이었다. 잉크와 몸통 색이 같은 펜만 수집하는 상사의 괴이한 수집벽이라든가.
“강이안 씨랑도 아는 사이라고 하셔서 제가 사무실에는 들어오게 해드렸는데, 박 실장님이 그냥 이사님 방에서 기다리셔도 된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예전에 M호텔 인천지점 오픈 기념행사에서 뵌 적 있다고 하시면서요.”
이번에는 도경이 연필꽂이를 쳐다보았다. 단색으로 이루어진 펜들 사이에서 저 혼자만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펜. 남의 공간에 기어들어 와 흔적을 남기고 간 범인은 이안이 아니라 무영이었나 보다.
“제가 이사님한테 연락드리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서프라이즈라고 하셔서 그냥 안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제가 확인을 했어야 하는 건가 싶어서요. 그분 이사님 친구 맞으세요?”
“맞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왜 친구냐고 여쭤봤냐면.”
사무실에 남아있는 직원도 몇 안 되는 데다가 문이 닫혀있어 누가 엿들을 걱정은 없었다. 그럼에도 대리는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실은 아래층 과장님이 말해 주셨어요.”
“뭘.”
“이사님 강아지 아파서 오후에 잠깐만 출근하셨던 날이요. 요 앞에 웬 미남 둘이 붙어있어서 설렜는데 더 자세히 보니깐 싸우고 있더래요. 한 명은 외국인 같았다고 하시는데 갑자기 그 이사님 친구라던 분 생각이 나더라고요.”
한낮에 회사 앞에서 막장드라마를 찍었던 그날 도경에게 인사하려다 물러선 아래층 직원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들어간 줄 알았는데 지한이 차에서 나올 때까지 구경들을 한 모양이었다.
“잘생기긴 했죠.”
“이사님 방금 본인보고 잘생기긴 했다고 하신 거예요?”
도경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대리를 마주 보았다.
“저 말고. 제 친구랑 싸우던 사람이요.”
“아래층 과장님은 이사님이랑 친구분 얘기한 건데요.”
어처구니없긴 자기가 더하다는 듯 대리가 바로 받아쳤다. 별 웃기지도 않은 건으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직원과 논쟁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도경은 대충 대리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그 과장님 취향 특이하시네요.”
“왜요?”
“저보고 미남이라고 하셨다면서요.”
“그게 왜 특이 취향이에요?”
도경 딴엔 장단에 맞춰 주겠다고 내놓은 답변이 왜인지 대리의 고집을 건드린 분위기였다. 도경은 몇 초 전의 자신을 되돌아봤다. 아무리 잡담 중이었다지만 너무 되는 대로 말했다. 속으로 한 생각을 거르지 않고 배출하는 것은 도경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별로 대중적인 취향은 아니란 뜻이었는데 제가 말을 이상하게 했나 봅니다. 잊어버리세요.”
“제가 이런 오지랖 부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모르겠으면 부리지 않는 게 어떨까요, 이번에도 속마음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해버릴 뻔했다. 식은땀이 났다. 머리에 떠오르는 즉시 입을 놀리는 경거망동은 지한의 말버릇이었다.
“새로운 사람 만나볼 준비가 됐다, 그러면 다른 데 말고 저한테 제일 먼저 말씀하세요. 이사님한테 관심 있는 여자들 이 건물에 깔렸어요.”
“네?”
“지금 당장 누구 만나보시란 거 절대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요. 편하실 때요. 사람마다 회복하는 기간이 다 다른 거잖아요.”
A미디어의 수많은 계열사 중 하나인 기획사에도 도경에게 오래 만난 여자가 있었다는 소문 정도는 퍼져있었다. 그 여자가 죽었다는 것도.
“저 신경 써주시는 건 유 대리님밖에 없네요. 고마워요.”
“듣기 좋으라고 드린 말씀 아니니까 꼭 알려주셔야 돼요.”
“뭘 알려드려요?”
“소개팅하고 싶을 때요!”
의자는 딱딱하고 실내는 너무 어두웠던 와인 바에서 나오자마자 옆 테이블 남자들이 도경더러 잘생겼다고 했다던 지한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진짜예요?”
“그럼 제가 거짓말로 소개팅시켜 드리겠어요?”
“아니, 진짜로 여자들이…….”
“저 입사하고 나서 총 몇 명한테 이사님 여자친구 있냐는 질문받았는지 아세요, 이 건물에 들어와 있는 업체 직원 중에서만?”
빈말하지 않는 성격이란 것은 알고 있었는데 도경이 보는 앞에서 손가락으로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여자들의 수를 하나하나 세리라곤 기대 안 했다. 도경은 급히 대리를 말렸다. 안 세셔도 돼요, 알겠어요. 굴하지 않고 손가락을 접던 대리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지 이내 포기하고 리스트를 챙겼다.
“아, 그리고 어제 부탁하셨던 거 찾아봤는데 날짜가 촉박해서 일단 남은 곳 중 제일 괜찮은 데로 예약해놨어요. 링크 보내드렸으니까 확인하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알려주세요. 서울이 아니라 선택의 폭이 좁다는 건 염두에 두시고요.”
대리가 나가며 문을 닫았다. 문 닫는 솜씨까지 칼 같았다. 한숨 돌린 도경은 에어컨 온도를 낮췄다. 식은땀으로 뜨끈하던 두피가 어느 정도 시원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간 대화창의 링크를 클릭한 그는 대리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경우를 가정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밝고 따듯한 색감의 룸은 깨끗해 보였지만 좁았다. 그 정도 크기의 방을 써야 했던 적은 유학생 시절 계약할 아파트를 찾지 못해 한 달간 호텔에 머물렀을 때 이후로 없었다. 게다가 이번엔 혼자도 아니고 둘이었다. 남과 함께 쓰려면 못해도 디럭스는 되어야 한다는 도경만의 기준을 절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이즈였다.
지한과 한 침대에서 잠들었던 날을 떠올리면 안 될 것도 없긴 했다. 중간에 깨는 일 한번 없이 잘 잤다. 아무리 그래도 좁은 룸 하나만 예약해놓고 가기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룸을 추가로 하나 더 예약해놓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자기 전까진 같이 있을 텐데, 누가 다른 방으로 옮겨야 하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경우의 수들이 머릿속을 포화 상태로 만들었다.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간 또 두통에 시달릴 것이다.
대화창을 나온 도경은 직접 호텔 예약 사이트로 들어가 동일 호텔을 눌렀다. 다행히 빈방이 남아있었다. 예약이 완료되었다는 페이지를 보자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대리와의 대화창으로 돌아갔다.
[대리님 혹시 저 지역 가보셨어요?]
고향이 가까워서 일 년에 몇 번씩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존심과 효율 사이에서 흔들리던 저울이 곧 효율 쪽으로 기울었다.
[저긴 뭐가 맛있어요?]
실시간으로 도경의 메시지를 읽은 대리에게서 답변이 없었다. 검색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모니터 하단의 날짜를 눌렀다. 작은 달력이 떴다. 기온이 급격히 올라간 탓에 다소 급하게 잡은 일정이었다. 아직 지한에겐 말도 안 했다. 기껏 예약해 놨는데 못 간다고 하는 일은 없겠지. 때늦은 걱정이 안정되었던 마음을 도로 들썩이게 할 뻔했다.
그럴 일은 없었다. 도경은 자기최면을 걸었다. 다른 스케줄이 잡혀있다 해도 지한은 도경을 따를 것이다.
링크들이 쏟아졌다. 혼자 가는 것이라고 못박아 두었건만 대리가 보낸 링크들은 죄다 데이트코스였다. 이미 도경이 연인과 축제에 놀러 간다고 확신한 사람처럼. 소개팅해 주겠다고 큰소리칠 땐 언제고.
도경은 대화 목록을 훑었다. 빨간 알림 표시를 단 대화창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었다. 중간쯤에 이안의 사진도 보였다. [형 이따 올 거야?] 지한에게 엉터리로 사과해 용서받지 못한 이안은 이제 설설 기는 것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 듯했다.
이안의 메시지는 무시하고 스크롤을 내렸다. 새 메시지가 안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지한과의 대화창을 눌려보려던 순간이었다. 도경의 엄지에 닿기 직전이던 대화창이 목록 맨 위로 올라가며 새 사진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지한이 보낸 사진은 평소보다 훨씬 보기 편했다. 사진 실력이 늘어서가 아니라, 피사체가 이상한 각도나 나간 초점을 잡아내기 힘든 하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려니 하려던 도경은 사진을 다시 주의 깊게 보았다. 설마 날씨가 좋아졌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건가. 그런 것이라면 정말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참지 않고 당장 지한을 불러다 하고 싶은 것들을 차분히 생각으로 나열하자 손에 잡히는 뭐라도 구기고 접어서 던져야 가라앉을 것 같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온 세상 사람들 다 홀리고 다닐 것처럼 생겨서 귀여운 짓을 하는 지한에게 잘못이 있었다.
싫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지만, 다른 데서도 의도치 않게 그러고 있을까 봐 짜증이 났다. 오늘만 몇 번째 거는 자기최면인지 몰랐다. 아닐 것이다, 절대로 지한은 남들 앞에서도 도경에게 하듯 허술하고 순종적으로 굴지 않을 것이다. 쇳소리에 가깝게 갈라진 목소리로 그만하지 말라고 매달리던 지한을 회상하면 더욱 안정감이 찾아들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한은 도경 아닌 다른 사람과 그런 행위를 해본 적이 없었다.
시우만 없었으면 더 수월했을 것을.
[날씨 좋네]
괜찮았다. 앞으로가 더 중요했다.
간단명료한 답장을 끝으로, 도경은 휴대폰을 책상에 던졌다. 도경의 답변에 전전긍긍할 지한을 상상하니 갑자기 모든 짜증이 싹 제거되며 배 속이 찌릿찌릿했다.
***
“요새 다시 골프 치신다더니 젊어지셨어요.”
“젊어지긴 무슨.”
“진짜예요. 현경이 오빠랑 나이 차이 좀 나는 큰형 같으신데요?”
친할아버지의 80번째 생일이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손녀 배역을 훌륭하게 연기해낸 에스더는 지루한 자리에 참석해준 손님들의 기분을 띄우는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가 불과 몇 주 전 클럽 지하에서 어린 바텐더를 희롱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에스더와 대화하는 내내 등신처럼 실실거리던 권 회장은 그녀가 돌아섬과 동시에 나타난 이안을 보자마자 삽시간에 얼굴을 굳혔다. 도경에게 말을 걸 목적으로 다가왔을 이안이 권 회장에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부모님은 같이 안 오셨나?”
“엄마아빠 스페인 갔어요.”
한심한 것들. 구겨지는 권 회장의 이마에 다섯 글자가 새겨지는 것 같았다.
“요새 회사는 잘 다니고?”
“네? 네.”
“네가 잘해야 너희 할아버지도 편히 쉬실 거 아냐. 그 나이 드신 양반이 우리 아들한테까지 전화해서 널 부탁해야겠어?”
나왔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주둥아리 솜씨. 도경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황 원장만 없었으면 진작 가정폭력범으로 뉴스에 나왔을 인간이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을 때에는 잘도 아들, 아들 거렸다.
“아, 할아버지 이제 도경이 형한테 전화 안 해요. 제가 절대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야 인마. 전화하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네가 회사에 똑바로 다녀야지.”
“저 요새 회사도 안 빠져요!”
소시오패스와 바보 천치의 대화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려고 했다. 도경은 비우지 않은 잔을 웨이터에게 넘기고 돌아섰다.
아직 그리 늦지 않은 시각이라 발코니에 나와 있는 사람이 몇 없었다. 그나마 나와 있던 한 팀도 도경이 나오고 얼마 안 되어 실내로 들어갔다. 그는 난간을 잡았다가 바로 후회했다. 발코니의 모든 부분은 바람에 실려 오는 온갖 먼지를 맞기 딱 좋았다. 청결하려야 청결할 수가 없었다.
“도경이 형.”
따라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나오긴 했다만 진짜로 따라 나오니 신경이 곤두섰다. 1분이라도 기다렸다 따라 나올 것이지.
“뭐.”
발코니 문을 닫고 도경의 옆에 와 선 이안이 눈치를 봤다. 지한이 눈치를 볼 땐 하루 종일 그러고 있어도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안이 그러고 있는 꼴은 1초도 못 견디겠다.
“뭐냐고. 뭐. 왜.”
“나 걔한테 사과하고 왔어.”
“그래서.”
“형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도경은 몸을 틀어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이 급히 눈을 깔았다. 그것 역시 지한이 할 땐 속이 뜨거워졌던 행동이다. 이안이 할 때도 속이 뜨거워지기는 했다. 성욕이 아니라 분통으로.
“미안하다.”
헉, 하고 어깨를 들썩거린 이안이 눈을 들어 도경을 쳐다보았다. 도경은 팔을 난간에 기댔다. 먼지고 뭐고 두통과 현기증이 같이 밀려와 어쩔 수 없었다.
“형이 왜…… 뭐가.”
“남들 다 아는 거 나만 지금까지 모르고 너 써먹어서.”
“뭘, 뭐를 남들 다 아는데 형만 몰라?”
무영이 했던 말을 고대로 다시 읊을 생각은 없었다. 황 원장 없이 권 회장 옆을 지키느라 정신력이 고갈되어 그럴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어쩔 줄 모르던 이안이 더듬더듬 알아듣기 힘든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그거, 그거. 아니야. 내가 그날은 많이 흥분을 해서, 말을 막 하느라고 막 이상한 소리도 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고…….”
“양심이 있으면 네 앞에서 서는 척이라도 하라던데.”
이안은 사색이 되었다.
“누, 누가 그런, 소리를. 무영이 형이 그래? 아니야. 내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거 아니야. 나는 무영이 형한테 그냥, 그래 우지한이 나 때렸다고 말하긴 했는데 나, 나도 걔 때렸다고 나중에 말했어. 근데 형이 내 말 듣고도 그냥 뛰쳐나갔어. 그게 다야. 난 정말.”
“나한테 뭘 바라?”
발코니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오려던 에스더가 심상치 않은 공기를 읽었는지 도로 들어갔다. 두 손을 맞잡았다가, 허벅지에 비볐다가 하며 산만하게 군 끝에 이안이 말했다.
“바라는 거 없어.”
“그래? 정말?”
도경은 이안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말할 기회. 말하면 들어준단 보장은 물론 없었다. 바닥에 눈을 박고 있던 이안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우지한이 왜 좋아?”
고작 그딴 것이나 물어볼 줄 알았으면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이십 년 넘게 붙어있어 놓고도 모른단 말인가. 도경이 그런 질문에 답변해주지 않으리란 것을.
난간에서 팔을 내리며 돌아서는 도경을 본 이안이 실내로 통하는 문 앞을 막아섰다. 지한의 것만큼이나 크고, 그보다 훨씬 더 둥그런 모양의 눈이 그렁거렸다.
“비켜.”
“나 형한테 아무것도 해달라고 안 하잖아. 형이 하래서 걔한테 사과도 했잖아, 그러니까 이것만 말해주면 안 돼? 걔 뭘 보고 마음이 바뀌었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유리창 안에서 샴페인 잔을 든 에스더가 발코니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경보다 무영을 훨씬 더 좋아했다. 이안을 울렸단 소리가 무영의 귀에 들어갔다간 드라마 2회차를 찍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도경은 재킷 안주머니에 담아온 펜을 꺼내 이안의 재킷 앞주머니에 꽂았다.
“김무영한테 꼭 전해. 나도 사과했다고.”
붙잡으려는 이안의 손을 피해 홀 안으로 들어왔다. 지각한 현경과 인사를 나누던 에스더가 발코니 쪽을 힐끔거렸다. 이안은 발코니에서 뭘 하는지 한참이 지나도 실내로 돌아오지 않았다.
항상 보는 얼굴들이 흠잡을 데 없는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채 웃고,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그를 낳고 키워온 세계의 중심에서 도경은 지한을 생각했다.
그러자 아무 데도 아프지 않다는 착각이 들었다.
#65
지한은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로비 구석에 서서 도경의 슈트케이스 손잡이를 꽉 잡았다. 시우가 일하는 호텔 로비에 비하면 귀여운 사이즈라 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큰 키가 이럴 땐 유용했다. 별 노력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만으로 도경을 찾아낼 수 있었다. 카운터에서 체크인하는 도경의 옷차림이 낯설었다. 코트 없이, 정장도 없이 셔츠와 바지만 입은 그를 바깥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흰색이라고 하기엔 뭔가 진한, 케이크에 얹어진 크림을 연상시키는 빛깔의 셔츠가 언뜻언뜻 도경의 몸을 드러냈다. 어깨. 등. 허리. 그것들을 이루는 뼈대.
호텔 안엔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만큼이나 친구끼리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의외로 연인들이 제일 적었다. 남들 눈에 도경과 지한은 무엇으로 비칠까. 절대 형제로 보이진 않을 테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로 정반대인 친구쯤으로 보이려나.
시우에겐 도경과 놀러 간다고 정직하게 말하고 왔다. 다른 친구와 간다고 둘러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함께 여행을 다닐 친구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둘러댔을 것이다.
26년째에 접어드는 인생이 무색할 만큼 지한에겐 거짓말에 동원할 만한 친구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자주 연락하는 놈이라곤 레오였는데, 그와 놀러간다고 하느니 그냥 진실을 털어놓는 편이 나았다. 하룻밤 자고 올 거란 통보에 시우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연락하면 꼭 받으라는 말 외엔 딱히 다른 당부도 없었다.
언젠가는 말해야 했다. 사실 시우가 도경을 들먹였던 날 밤에 물어볼 수도 있었다. 만약 너 내가 그 남자 좋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물어보기 직전까지 갔다가 결국은 실패했다.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시우가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거냐고 물었다간 할 말이 없어질 테고, 그랬다간 시우에게 빌미를 주는 셈이 됐다. 도경을 싫어할 빌미. 지한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되는 상대에 한해서는 관용이 없는 시우였다.
“가자.”
사람들을 뚫고 지한이 있는 구석까지 비집고 온 도경이 슈트케이스 손잡이를 잡아 뺐다. 목소리가 약간 지쳐있었다. 도경도 키가 커서 다행이었다. 작기까지 했으면 인파에 묻혀 괴로워하다 탈진했을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는 로비보다 덜 붐볐다. 벽에 등을 대고 선 지한은 도경이 쥐고 있는 카드 개수를 셌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둘이 아니라 넷이었다. 룸 두 개를 예약했다는 뜻일까?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함께 놀러 가서 방을 따로 쓴다는 이야기는, 대규모 단체여행이 아닌 이상은 못 들어본 것 같았다. 따로 잘 거냐고 물어보긴 죽어도 싫었다. 예약도 지불도 다 도경이 했다. 지한은 그냥 닥치고 하자는 대로 따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도경이 지한과 같은 방에 들어옴으로써 지한의 걱정 아닌 걱정은 일단락되었다. 큰 침대 이외에도 작은 침대가 하나 더 있는 방은 두 사람이 사용하기에 충분히 넓었다. 지한에게는 그래 보였다. 그 넓은 아파트를 혼자서 쓰는 도경에겐 아닐 수도 있겠다.
익숙하게 냉장고에서 물을 꺼낸 도경이 하나를 지한에게 주었다. 물을 따 마시는 도경의 목울대가 생동감 넘치게 움직였다. 길고 예쁘기만 한 줄 알았던 목이 물을 마실 때는 굉장히 역동적이었다. 도경이 물병을 입에서 떼며 젖혀져있던 고개를 바로 했다. 눈이 마주쳤다. 남이 물 마시는 것을 넋 놓고 보다 들키는 기분은 그리 상쾌하지 못했다. 지한은 얼른 창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팔 안 아파요?”
“괜찮아.”
“올라갈 때는 내가 운전할,”
“됐어.”
도경이 물병 뚜껑을 닫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물병 표면에서 묻어난 물기가 크고 하얀 손 곳곳을 적셨다. 남의 신체부위에 너무 노골적인 눈길을 주지 말자고 스스로를 꾸짖어 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 운전 잘해요. 차 안 망가뜨릴 건데.”
지한을 내려다본 도경이 조용히 웃었다. 비웃는 표정은 아니었다. 약간 하찮은 것을 본 표정이긴 했다. 나 술 잘 마신다고 자랑하는 스무 살을 보는 주당이 지을 법한.
“사고 낼까 봐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지한은 입 안을 씹었다. 그래, 도경이 남을 하찮게 볼 리 없었다. 수없이 타인의 의도를 왜곡하며 살아온 지한이라지만 도경의 의도만은 곡해하고 싶지 않았다. 지한의 삶에 도경 같은 사람이 언제 또 나타날 줄 알고.
저녁을 먹기 전 룸 창가로 내다보이는 공원에 들르기로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물뿐이라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 것인데, 그게 도경의 눈엔 가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보인 듯했다.
한강과 비스무리하게 생긴 강변은 미리 나와 자리를 잡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왜 폭죽 터뜨리는 축제에 가면서 돗자리 가져오란 소리가 없나 했는데 비로소 납득이 갔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서 폭죽을 구경할 생각이 도경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서울보다 여기 날씨가 더 좋네.”
최대한 사람들을 피해 주차장 쪽에 붙어 걷던 도경이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도경의 그 손짓을 살랑거리는 간지러운 동작으로 받아들일 때가 있었다. 지금도 도경의 손은 보기 좋게 생겼다. 다만 이제는 그 손에 돋은 핏줄이, 그리고 거기 달린 긴 손가락이 소환하는 특정 순간들을 무조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어버렸다.
“사진 안 찍어?”
“뭔 사진. 사진 찍어줘요?”
“너는 말하는 것보다 사진 보내는 걸 더 많이 하잖아.”
날씨가 좋아졌다고 말하기 겸연쩍어서 맑은 하늘 사진으로 대체한 속셈이 들통났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지한을 돌아본 도경이 크게 웃었다. 오늘따라 어찌나 어리고 길쭉해 보이는지, 지한은 자꾸 그의 옆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상상하곤 위축됐다.
밴드를 뗀 볼엔 선명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의사는 연고만 꼬박꼬박 바르면 서서히 옅어질 것이라 했다. 예전의 지한이었다면 흉이 지든 말든 귀찮아서 연고도 바르지 않았을 것이나 이번에는 달랐다. 도경과 비교되어 험상궂어 보이면 어쩌나 신경이 쓰였다. 실은 내려오는 내내 신경이 쓰여 하도 입 안을 씹어댄 탓에 볼 안쪽이 너덜거리는 중이었다.
“리즈는 잘 있어요?”
도경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할까 봐 겁이 나서 말을 돌렸다.
“잘 있겠지. 왜, 보고 싶어?”
지한은 엘리자베스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개의 몸집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보고 싶을 것까진 없어도 다시 만나면 좀 더 편한 자세로 안아줄 의향은 있었다. 개를 키울 기회가 없었던지라 앞다리로만 들어 올리면 안 된다는 것도 몰랐다.
“뭐 걔가 형 집에 또 오면.”
“걔가 네 머리카락 뜯어서 정들었어?”
그런 일이 있었더랬다. 거실 바닥에 지한과 나란히 앉은 도경의 입술이 뭘 바른 것처럼 진해 보여서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던 그날. 지한의 소심한 입맞춤을 받아준 도경이 어깨를 잡아 밀며 위로 올라왔을 때부터 머리맡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난다 했다.
불안해하던 개는 도경이 지한에게 키스하기 무섭게 그 조그만 입으로 머리카락을 물고 늘어졌다. 넘어뜨린 것도, 올라탄 것도 도경인데 왜 뜯기기는 지한의 머리카락이 뜯겼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검색해 봤는데, 개들이 원래 그런대요. 사람끼리 붙어있으면 싸우는 줄 알고.”
“그럼 그냥 보고 싶어도 참아.”
“살살 물어서 아프진 않았는데.”
“걔 있으면 우리 아무것도 못 해.”
뭘 못한다는 건지는 몇 초가 지나 알아들었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도경이 하도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지한만 배로 부끄러웠다.
강가에서 맞는 바람이 시원했다. 어느덧 멀지 않은 곳에 공원 출구가 보였다.
“너 왜 저 오빠한테서 눈을 못 떼? 오빠 멋있어?”
앞쪽에서 걷던 부부가 품에 안긴 아이의 집요한 시선을 따라가다 도경을 발견하곤 웃었다. 서너 살쯤 먹었을 아이는 너무 맑아 속이란 것이 따로 존재하기나 할까 싶은 얼굴로 말똥말똥 도경만 쳐다보았다.
아이와 도경. 강아지와 도경보다 더 이질적인 그림이었다. 아이가 팔을 버둥거렸다. 짧아서 암만 뻗어도 도경에게 닿지 못했다. 젊은 부부가 멈춰 섰다. 아이가 다시 팔을 뻗었다. 통통하고 작은 손이 도경의 팔을 스치는 데에 성공했다. 고등학생 무리와 부딪혔을 때처럼 격렬하게 팔뚝을 털어대진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웬걸. 도경은 한 번도 옷을 털지 않았다. 뒤에서 부부가 폭소했다. 자식의 대담한 행동을 봤나 보다.
“애 좋아해요?”
“별생각 없어. 왜?”
“그냥.”
도경은 모르는 것 같았다. 어리고 작은 생명을 대하는 자신이 웃지 않아도 얼마나 무한하게 안전해 보이는지. 짐작도 못 하는 눈치였다. 본인이야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고사하고 친형이라는 사람도 도경을 하루 종일 개를 가둬놓을 사람 취급했던 것은 석연치 않았다.
머리론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양친이 멀쩡히 살아 있고 형까지 있는 도경은 넘치는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자라왔을 것이다. 앞으로도 넘치기만 하는 삶을 살다 갈 도경이었다. 무엇 하나 넘치게 가져본 적 없는 지한이 왜.
자꾸 도경을 안타까워하고 싶어지는지.
공원 출구에서 시간을 확인한 도경이 리모컨 키를 꺼냈다.
“차로 한 20분이면 된다니까 거기서 밥 먹고 시간 맞춰서 돌아오면 되겠다.”
가는 데 20분. 오는 데 20분. 도합 40분. 호텔까지 가서 차를 타고 어쩌고 하면 결국 한 시간 이상을 길바닥에 버리는 셈이었다. 시간이 아까웠다.
“여기서 먹으면 안 돼요?”
“여기서?”
미리 찾아보고 골랐을 장소를 귀찮아서 거부하는 놈으로 보이긴 싫었다. 그냥 지한답게 나갈 때였다. 솔직하게.
“왔다 갔다 하면 시간 뺏기잖아요. 나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그냥 형이랑 이렇게 있는 게 더 좋아요. 지금처럼, 얼굴 보면서.”
도경의 표정이 약간 멍하게 변했다. 한참 만에 그는 대답이랄 것도 없는 답을 내놓았다.
“그래 그럼.”
그러고는 다른 곳을 쳐다보는데, 아무래도 지한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어째 도경은 노골적인 행동보다 이런 이야기를 더 부끄러워했다. 애 같다거나, 예쁘다거나,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
미리 식당을 알아보고 예약한 도경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놨으니 새로운 메뉴는 지한이 정할 차례였다. 식당마다 줄이 길어 포장이 된다고 써 붙여놓은 가게를 골랐다. 들어와서 보니 산 주꾸미 전문 식당이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뭐 드릴까! 하는 사장에게 얼결에 2인분을 포장해달라고 한 지한은 보고 말았다. 철판에서 탈출할 기세로 팔딱거리는 주꾸미들의 향연을. 그는 정신없는 가게 안을 둘러보느라 아직 철판에까지 눈길을 주지 않은 도경을 돌려세웠다. 도경은 왜 그러냐며 의아해했지만 제발 그냥 밖에서 기다리란 간청을 들어주었다.
주꾸미를 받아 들고 향한 다음 행선지는 근처 마트였다. 매운 맛을 중화해줄 음료만 사려던 계획은 주류 섹션에 도착하자마자 허무하게 폐기되었다. 술맛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도경은 좋았다.
사케, 청주와 한 코너에 진열된 증류식 소주를 두어 병 카트에 담았다. 도경은 지한이 뭘 고르든 간섭하지 않았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마트에서 길이라도 잃어버릴까 걱정했는데 카트 뒤에 딱 붙어 잘만 따라왔다.
잘 따라오던 도경이 사라진 것은 다음날 마실 물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몇 병을 사야 하겠느냐고 의견을 구했는데 답이 없어 뒤를 돌아본 지한은 당황했다. 도경이 안 보였다. 바로 옆의 정육 코너에도, 과자 섹션에도 없었다. 카트도 내버려두고 헤매던 지한은 황당한 광경을 목격했다.
드셔보시지 않고 뭐하냐는 시식대 직원. 이쑤시개에 꽂힌 물만두를 어쩌지 못하고 뻣뻣한 자세로 서있는 도경. 지한은 성큼성큼 걸어가 도경의 팔을 잡아끌었다. 카트로 돌아오고 나서야 알았다. 그때까지도 오른손으로 만두가 꽂힌 이쑤시개를 들고 있는 도경의 왼손에 만두 봉지가 들려 있음을. 2+1 묶음으로.
“만두가…… 먹고 싶었어요?”
“아니.”
“근데 그걸 왜 들고 있어.”
본인이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지, 도경은 딱 붙은 입술을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이리 줘요. 그거 다시 갖다 놓게.”
“아니, 그건 좀.”
“그걸 먹을 거예요? 호텔에 요리할 데도 없는데?”
“그래도 내가 들고 온 걸 어떻게 다시 갖다 놔?”
충격이었다. 도경이 호구였다니. 지한은 더 말씨름하지 않고 카트를 끌었다. 인스턴트 만두를 얻다 써먹겠다고 똥고집인지 미스터리였으나 지한에게 이래라저래라할 자격은 없었다. 실온에 해동시켜 먹든, 욕조에 담가 먹든 도경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계산대에 와서까지 도경은 그놈의 이쑤시개를 들고 있느라 카드 지갑을 수월히 못 꺼냈다. 학력도 좋고 직함도 높은 남자가 가끔 그렇게 나사 두 개는 빠진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귀여울 때도 있지만 오늘은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지한이 이쑤시개를 뺏어서 쓰레기통에 던진 후에야 무사히 계산이 끝났다.
“형은 절대 혼자서 장 보면 안 되겠다.”
“안 봐. 집에서 뭐 안 해 먹으니까.”
“잘됐네. 평생 사 먹어요 그냥.”
습관적으로 제일 무거운 봉지를 들려던 지한은 도경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남은 봉지에 든 것이라곤 해봐야 과일과 치즈가 전부였다. 술과 음료 등 무게가 나가는 물품은 죄다 도경이 든 봉지에 들어있었다.
“그거 내가 들게요.”
“왜?”
“무겁잖아요.”
도경이 그래서 어쩌라는 거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봉지를 든 도경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호텔로 돌아왔다. 지한이 즉흥적으로 아무거나 먹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밖에서 식사 중일 시간이었다. 땀을 뺀 것도 아닌데 진이 다 빠졌다. 도경과 함께 있을 때면 지한은 항상 체력이 달렸다. 온몸에 남은 기운이란 기운은 다 끌어다 쓰느라 그랬다. 그에 반해 도경은 여유가 넘쳤다. 예고 없이 빨개지는 귀마저 없었으면 얄미울 뻔했다.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를 배경 삼아 한숨 돌리고 있는데, 도경이 손을 씻으러 가느라 테이블 위에 두고 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황 원장님.’ 범상치 않은 이름이었다. 주기적으로 다니는 병원의 의사일까.
마침 손을 다 씻고 나온 도경이 전화를 받았다. 의사일 것이라던 예측은 바로 조각났다. 도경이 상대에게 반말을 했던 것이다. 상대의 정체는 통화 중 도경이 사용한 호칭을 통해 밝혀졌다.
“엄마, 나 지금 서울 아니라니까.”
엄마를 성씨까지 붙여 원장님이라고 저장하는 사람, 지한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나본 적이 없었다. 길게 통화하지 않으려는 도경을 타박하는 상대의 목소리가 지한에게까지 다 들렸다.
―너는 엄마가 외국에 나갔다 왔는데 안부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그렇게 쌀쌀맞아서 장가는 어떻게 가?
황 원장님은 상상 속에서보다 훨씬 높은 톤으로 빠르게 말하는 여자였다. 도경이 엄마를 닮은 부분은 외모뿐인 듯했다.
아들이 주꾸미 포장을 뜯고 나무젓가락을 뜯느라 조용할 뿐이란 것을 모르는 원장님은 실컷 잔소리 폭격을 퍼부은 뒤 사랑한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다 큰 성인이 부모한테서 사랑한단 소리를 들으면 민망해할 줄 알았다. 사랑한다는 엄마에게 인사하는 도경의 반응에 감흥이라곤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형네 가족은 사이좋은가 봐요.”
역시 지한이 잘못 짚은 것이었다. 친구 새끼들은 몰라도 도경의 가족들은 모를 수 없었다. 도경이 결코 개를 가둬두거나 아이에게 차갑게 굴 사람은 아님을.
“엄마랑 말하는 게 친구 같아요. 그때 그 큰형이랑도…….”
“사이 안 좋아.”
“아.”
“네가 나한테 말하고 살라 그래서 한 번 솔직해져 봤어.”
도경이 휴대폰을 창틀에 엎어두었다.
“그냥 거짓말할 걸 그랬지?”
어안이 벙벙했다. 주제도 모르고 지껄인 건방진 지한의 조언을 도경이 여태 마음에 담아뒀다가 실천에 옮기기까지 했다고? 말도 안 됐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도경이 직접 밝힌.
“아니에요. 좋아요. 그니깐, 형이랑 가족이 사이 안 좋은 거 말고 솔직해지는 거. 그게 좋다는… 말.”
축제 기간이라 강가에서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룸 안 공기를 얼어붙지 않게 녹여주었다. 갑자기 룸 안이 너무 밝게 느껴졌다. 옷을 다 갖춰 입고 있는데도 나체로 도경의 앞에 앉아있는 것처럼 창피했다.
“불, 눈 아프지 않아요?”
“불편하면 몇 개 꺼.”
얼른 가서 버튼을 눌렀다. 룸 안의 모든 등이 다 꺼졌다가, 침대 옆에 붙은 등만 켜졌다가 세 번째에 비로소 TV 위의 등이 켜졌다.
룸이 어둑어둑해졌다. 한결 마음이 편해져 자리로 돌아갔다. 도경이 마트에서 사온 플라스틱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마트에선 색을 보지 않고 집히는 대로 골랐는데 호텔로 돌아와 꺼내 보니 그렇게 촌스러울 수가 없는 주황색이었다. 못생긴 물건에는 손도 안 댈 것 같았던 도경이 잔을 지한의 앞에 놓아주었다. 지한은 자신이 도경을 너무 경외하다 그만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인정했다.
“오토바이는 어때. 타기 괜찮아?”
“아, 네. 완전. 시우가 저랑 어울린대요.”
술이 목구멍을 넘긴 지 10초도 안 되어 눈치 없는 발언을 했다. 도경에게서 받은 선물의 첫 소감이 시우의 의견이라니. 한참 망설이다 슬쩍 앞을 보았다. 시뻘건 볶음 속에서 건져낸 것의 정체를 알기 전엔 입 안에 넣을 수 없다는 듯 주꾸미(로 추정되는 물체)를 들여다보던 도경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그러고 있어?”
“그때 그거 형한테 괜히 얘기한 거죠, 내가.”
“그때 그게 뭔데.”
“시우랑…….”
“첫 키스 시우 씨랑 했다는 거?”
지한은 턱을 끄덕였다.
“내가 너무 나 편한 대로만 한 거 같아서요. 형은 불편해할 수도 있는데.”
“그것 때문에 불편해하는 것 같아, 내가?”
“아니에요?”
찰나였다. 도경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잘못 봤을 확률이 더 높았다. 왜냐하면 눈을 감았다 뜬 다음 순간 보이는 것은 다시 다정해진 도경의 얼굴이었으니까. 잘못 본 것 같았다. 분명히 잘못 봤다.
“그 사람 너한테 좋은 것만 해주고 싶어 하는 친구라며.”
“그렇기는 한데.”
“너한테 좋은 것만 해주면 나한테도 좋지. 내가 왜 불편해?”
“나한테 좋은 거 해주는 게 형한테도 좋다고?”
“응.”
“……왜요?”
도경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지한도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향이 없다시피 한 술이라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넘김이 가볍다고 해서 얕보다간 골로 가기 좋은 술이었다.
“헷갈릴 수도 있는 거지. 형 같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혼자 장담하긴 그렇다고요.”
“나 같은 사람?”
“형은.”
돈 운운하자니 속물 같고, 외모를 칭찬하자니 낯이 뜨거웠다. 예민한 만큼 세세하게 다정한 성격을 설명할 말주변은 없었으며 애 같아질 때마다 나오는 귀여운 면은…… 생각하면 할수록 면전에 대고는 도저히 못 할 소리들만 산처럼 쌓였다.
지한은 작전을 변경했다. 직진하지 말고 우회해 돌아가기로. 얼마나 돌아가든 상관없으니 오늘이야말로 이 관계를 정의내리자고.
“나요, 소현이 누나 처음 봤을 때 진짜 깜짝 놀랐어요. 완전히 만든 것처럼 생겨가지고.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그런 생각 했는데.”
뜬금없이 나오는 소현의 이름에도 도경은 잠자코 지한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형 처음 봤을 때 소현이 누나가 생각났어요.”
“왜?”
“둘이 닮았어요. 그런 소리 안 들어봤어요? 눈이랑, 피부랑, 얼굴형이랑…….”
어느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겠다는 강박적 자세까지 닮았다는 말은 차마 덧붙이지 못했다. 도경은 소현과 닮았다는 말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듣는 소린 아니란 증거였다.
“형은 누나가 날 왜 만났는지 알아요?”
“모르지.”
“남자 때문이었던 거 같아요. 그 사람 엿 먹이려고 나 만났던 거 같아.”
이번에도 도경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간간이 지한을 쳐다보는 것으로 자신이 듣고 있음을 알리기만 했다.
“자세히는 몰라요. 누나가 술 못 마시진 않았잖아요. 그날은 되게 빨리, 엄청 취해서 어떤 남자 얘기를 했어요. 원래도 나한테 욕을 많이 하긴 했는데 그날은 나한테 하는 욕이 아니었어. 그 남자 얘길 하면서 막, 평소에 쓰는 말보다 훨씬 심한…… 그런 욕을 썼어요.”
도경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잔을 들었다. 빈속에 마시기엔 센 술인데. 잠시 들었던 걱정이 희미해졌다. 도경과 술을 마시면 매번 지한이 더 취했다. 도경이 만취해 쓰러질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누나가 하도 욕을 해서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누나 죽고 나서, 누나가 나한테 줬던 걸 가져가더라고. 진짜 별것도 아니었어요. 영화에 몇 장면 나오는 단역이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누나가 욕했던 그 남자밖에 없어요. 그걸 가져갈 사람.”
지한은 남은 술을 한꺼번에 마셨다.
“실은 형이랑 친해지면 꼭 물어보려고 그랬어요. 그 남자 혹시 누군지 아냐고. 형은 누나랑 잘 지냈던 것 같아서.”
도경의 입이 벌어졌다.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땐 그 남자를 꼭 찾아내서 따지고 싶었거든요, 근데…… 이제 별로 안 궁금해요. 화도 안 나요.”
식도는 멀쩡한데 배 속이 뜨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빈속에 너무 무식하게 마셨나 보다. 도경의 잔은 아직 빌려면 먼 것 같았다. 그러니 매번 지한만 취하는 것이었다.
“소현이가 너한테 잘해줬어?”
돈 받았다는 얘길 하느니 그냥 지금 바로 10층 룸에서 뛰어내리는 편이 나았다. 지한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자꾸 형 친구들 나쁘게 말하는 거 같아서 미안해요. 근데…….”
“걔가 너한테 뭐 집어던지고 그랬어?”
소현이 지한에게 뭔가를 집어던졌는지 묻는 도경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자세로 앉아있었다. 취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걸.”
“때리고?”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술병을 든 도경이 멈칫했다가, 이내 지한의 잔을 채워주었다.
“걔가 원래 어려서부터…… 화를 잘 냈어.”
확실히. 남들하고 치고받는 데 이골이 난 지한이 봐도 소현의 분노는 일반인이 감당할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그때는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은 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해요.”
사실 지한이 소현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도경이었다. 그녀도 겉보기엔 도경처럼 완벽해 보였었다. 소현처럼 남에게 화풀이하지 않는 대가로 도경은 병원에 다니고 약을 챙겨 먹었다. 지한이 알기로 소현은 병원에 다니지 않았다. 치료를 받지 못해서 더 맛이 가버렸던 것 아닐까.
“나한텐 많이 소리 지르고 화내기는 했지만 뭐, 누나가 남자애들처럼 나한테 주먹질을 한 것도 아니고. 화 풀 데가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하니까 괜찮아졌어요.”
지한은 도경이 따라준 술로 찰랑이는 잔 표면을 잡고 꾹 눌렀다. 플라스틱은 종이가 아니었다. 누른다고 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헷갈려요.”
밖에서 나던 음악소리가 멎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곧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방송이 좋지 못한 음질로 끊겼다 들렸다 했다.
“형은 누나보다 화나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은데…… 나한테 잘해주기만 하잖아.”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라도 가짜 용기를 쥐어짜야 할 순간이 왔다. 지한은 언뜻 봐도 다 마셨다간 단숨에 취해버릴 양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형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대포를 쏘는 듯한 굉음이 룸 안까지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색깔들이 폭발했다. 도경이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고 정갈한 얼굴에 색깔들이 퍼졌다. 빨간색. 초록색. 보라색.
“솔직하게?”
파란색. 주황색. 노란색.
“네.”
다시 빨간색.
“너하고 계속 만나고 싶어.”
읊조리듯 작게 뱉어진, 폭죽 터지는 소리에 묻힐 뻔한 그 말은 무사히 지한의 귀에 들어왔다. 도경의 중지와 약지, 그리고 새끼손가락 끝이 빠르게 테이블을 내려치고 있었다. 지한은 도경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다쳐요.”
지한의 손에 감싸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도경이 눈을 들었다. 지한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도경의 눈동자가 다른 영혼을 흡수한 것처럼 번뜩였다.
도경이 지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일으켜진 몸이 테이블에 부딪쳤다. 빈 잔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잔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써먹을 데 없는 안도를 했다.
“어딜 봐?”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난 도경이 지한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떨어진 바닥에 가 있던 시선이 자연스레 도경에게 향했다. 말 그대로 코앞에 도경이 있었다. 코끝이, 닿았다. 둘 사이엔 거리랄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 데도…….”
도경이 지한의 목을 누르며 입술을 맞대왔다. 몸이 밀렸다. 지한은 전신에 힘을 뺐다. 등이 푹신한 매트리스에 파묻혔다. 혀가 얽혔다. 호흡을 방해하는 기세는 여전하지만, 뭔가 달랐다. 오늘의 도경은 지한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다. 함께할 기회.
볼에 상처를 단 채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혔던 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고, 개에게 머리를 뜯겼던 날에 비해도 확연히 여유로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일방적이지 않은 행위가 주는 감각에 홀려 침 삼키는 것도 잊고 있던 지한은 불현듯 아주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지금까지 이런 상황에서 지한이 도경을 밀어낸 적은 없었다. 도경을 함부로 만지지 못하겠단 생각은 아직도 유효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예외는 있었다. 지한은 도경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리즈를 쓰다듬을 때만큼이나 살며시 얹었다. 도경을 멈칫거리게 한 동작이 그를 멈추게까지 하진 못했다. 거꾸로 조금이나마 지한에게 맞춰 움직이던 혀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그냥 있을까. 유혹이 잠시 찾아왔으나 꿋꿋하게 물리쳤다. 아침에 씻고 나왔다지만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경과 맨몸을 섞으려면 깨끗해야 했다.
“형, 형. 도경이 형.”
손에 힘을 실어 가슴팍을 밀었다. 마침내 도경이 입술을 뗐다. 침에 젖은 입술이 색을 입힌 듯 붉었다. 안 돼. 지한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도경의 입술이 어떻게 보이든 지금은 흔들릴 때가 아니었다.
“씻고 나와도 돼요?”
작게 한숨을 뱉은 도경이 지한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너 과일 냄새 나.”
“그건 아침에 바른 로션, 아니, 그래도 계속 밖에서 돌아다녀서.”
도경이 지한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지한은 눈을 내리깔고 도경이 비켜주길 기다렸다. 조마조마했다.
잠시 후 도경이 지한의 위에서 내려갔다. 지한은 도경의 마음이 바뀌기 전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호텔이니 가운을 입고 나오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발을 바닥에 대고 일어선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뒤에서 도경이 또 손목을 잡아왔다. 이번엔 넘어가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힘을 줬다. 쉽게 끌려와 주지 않는 지한의 결심을 읽었는지, 도경도 침대에서 내려왔다.
“나 진짜 빨리 씻을 수 있…….”
알겠다는 말도, 안 된단 말도 없었다. 어떻게든 침대 쪽으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속을 다 들여다본 듯 도경이 지한을 반대편으로 밀쳤다. 간신히 벽에 걸린 TV를 피했다. 엉덩이가 먼저, 그다음은 등이, 마지막으론 어깨가 벽을 들이박았다.
뒤통수를 박는 일만은 피했다. 도경이 미리 손으로 지한의 머리를 감싼 덕분이었다. 입술이 겹쳐졌다. 안 되는데. 이성이 볕 아래 놓인 얼음처럼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끌려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경의 침실이었던 때와 비슷한 흐름이었다. 양손에 머리통을 잡힌 상태라 도경이 한 발 뗄 때마다 지한도 자연히 그에 맞춰 발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발바닥에 닿는 촉감이 카펫에서 차갑고 딱딱한 것으로 바뀌었다. 시야가 밝아졌다. 지한은 찡그렸던 눈을 크게 떴다.
“씻어.”
도경이 지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지한은 숨을 몰아쉬었다. 농담이겠지.
“형 농담을 내가 또 못 알아듣는 거예요, 지금?”
하하. 도경이 거리낌 없이 웃었다. 치아도 예쁘고 얼굴도 예쁜 도경. 또렷한 입매도, 기다란 목도, 불거진 목울대도 어디 하나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는 남자가 지한을 샤워 부스 안으로 떠밀었다.
“농담 아닌데?”
그래도 믿지 못하는 지한에게 몸소 진담이란 것을 보여주려는지, 도경이 높이 걸려 있는 샤워기를 빼냈다. 작동 방법을 몰라 손잡이처럼 생긴 것은 다 눌러보는 도경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지한은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거 지금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꿈인가? 실은 도경과 놀러온 것부터 죄다 꿈이었나?
눈앞이 번쩍했다. 지한의 얼굴을 정통으로 강타한 물줄기가 알려주었다. 꿈이 아니라고.
“씻고 싶다며.”
샤워기를 내린 도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씻고 싶대서 물을 뿌려줬다 이 말이었다. 지한은 계속해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샤워기를 뺏어 들었다. 똑같이 굴려던 것은 아닌데 둘의 눈높이가 비슷하다 보니 샤워기로 도경의 얼굴을 조준하는 꼴이 됐다.
“형 괜찮아요?”
지한은 샤워기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놓진 않았다. 행여나 도경이 채갈까 봐. 손등으로 물기를 닦아낸 도경이 작게 말했다.
“차가워.”
“나, 나도, 차가웠거든요?”
화났나. 주먹에도 숱하게 맞아본 지한이야 물줄기쯤은 거뜬히 맞아낼 수 있었지만 평생 싸워본 적도 없다던 도경은 놀랐겠단 걱정이 찾아왔다.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시작한 사람은 도경인데 왜 지한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 하다 말고 씻는다 그래서 기분 나빴어요? 나는 형이 찝찝할까 봐.”
소매로 얼굴을 몇 번 더 문지른 도경이 지한을 쳐다보았다. 얼굴만 젖은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도 젖어있었다. 깊게 파인 쇄골에 물방울이 맺혔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왜. 왜 쳐다봐요. 나 뭐 얼굴 이상해요?”
성인 남자 둘만으로 가득 찬 느낌이 나는 부스는 지한의 목소리를 메아리처럼 들리게 했다. 남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낯설었다.
“너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지.”
“내 얼굴인데 왜 몰라요.”
“아니.”
너는 몰라. 선전포고 같은 한 마디를 끝으로 도경이 달려들었다. 샤워기를 놓쳤다. 모르겠다, 이제 더는. 지한은 부스 벽을 더듬더듬 짚었다. 넘어지지 않고 버텨야 오래 할 수 있었다. 키스든. 그 이상의 것이든.
도경과 지한의 앞섶이 서로에게 서로를 비볐다가 떨어지고, 그러다 다시 맞닿으면 더 세게 문지르기를 되풀이했다. 어느 쪽이 더 단단한지를 가늠하기란 불가능했다. 무의미하기도 했다. 양쪽 다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있었다.
도경의 손이 축축한 셔츠 안으로 침입했다. 오한이 들었다.
“형, 나도…….”
입술이 맞붙은 채로 말하려니 발음이 잘되지 않았다. 도경이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뭐.”
“만져도 돼요?”
표정과 다르게 정직한 도경의 귀가 불꽃처럼 뜨거운 색으로 달아올랐다.
“어디를.”
만지고 싶은 부위야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지한은 벽을 짚고 있던 손으로 도경의 앞섶을 건드렸다. 꽉 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건드렸을 뿐인데 도경이 심하게 들썩였다. 싫었으면 아예 물러났을 것이고, 좋으니 물러서지 않는 것일 터였다. 자신감이 생겼다. 조금 더 과감하게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꼭 직접 풀어보고 싶었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긴박하게 숨을 토해낸 도경이 지한의 허리 근처에 머무르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왼손이 물을 먹어 어떻게든 피부에 들러붙으려는 바지 안으로 비집고 들어옴과 동시에 오른손은 앞으로 왔다. 조금 전 지한이 한 행동을 배로 갚아주겠다는 듯 버클을 풀고 속옷 위를 문지르는 손길이 억셌다.
뒤로 들어온 손은 더했다. 거침없이 맨살을 주무른 손이 살과 살 사이에 숨은 구멍을 기어이 찾아내 쑤시고 들어왔다. 경험상 손가락만으론 그리 아프지 않고, 해봐야 이물감만 느껴지리란 것을 알면서도 긴장이 됐다. 자동으로 수축하는 근육까지 지한이 통제할 수는 없었다.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은데.”
“뭐, 왜. 뭐…….”
“일부러 힘주고 있어?”
어지간해선 열이 올라도 티 나지 않는 피부색이, 이 순간만큼은 아무 소용없으리라 직감했다. 양 볼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니에요. 미안.”
“미안해하라고 한 말 아니야.”
“그럼.”
“손가락에 피가 안 통하는 기분이라.”
웃지도 않고 사람을 놀릴 거면 나가라고 하고 싶었다. 실제로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려 입을 벌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파고들기만 하고 움직이지는 않던 손가락이 어딘가를 눌렀다. 알고 누른 것 같진 않았다.
둘은 마주 보고 서있었다. 도경이 지한의 뒤를 보면서 건드리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우연히 누른 것에 불과했다. 정확히 어디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타구니와 중심부 사이, 엉덩이도 아니고 성기도 아닌 그 중간지점 어딘가가 압박당하는 느낌이었다. 힘을 풀고 말고 할 종류의 감각이 아니었다.
“아, 거기, 거기 그만.”
“너무 세?”
“그런 게 아니,”
뒤에서 다시 꿈틀대는 손가락에 지한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같은 곳을 찔린 것이 분명했다. 하반신 전체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으응.”
두 눈으로 도경을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지한은 결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고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히도 지한의 시야는 도경으로 꽉 차 있었다. 도경의 입술은 벌어져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 뭉개진 비음은 지한이 낸 소리였다.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굳었다. 부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샤워기가 열정적으로 허공에 물을 쏴댔다. 살아오면서 지금보다 더 물방울이 되어 하수구로 쓸려 내려가고 싶은 적은 없었다.
“조용히… 할게요.”
지한을 배려해 태연한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별생각 없는지 모를 표정의 도경이 높낮이 없는 어조로 물었다.
“누가 조용히 하래.”
“아니, 내가 그냥. 그러니까 하지 마. 손 빼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애원했다. 도경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왜? 싫어?”
“아니!”
“그럼 좋은 거잖아.”
지한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놔준 도경이 속삭였다.
“좋은 걸 왜 그만하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말은 그렇게 해도 간청을 들어주려는 줄 알고 안심하려던 지한은 팔뚝을 잡아 돌려세우는 손길에 당황했다. 유리에 부딪힌 코가 아파 옆으로 얼굴을 돌리자마자 뺨이 눌렸다. 뒤통수를 누르는 도경의 손 때문이었다.
가벼운 것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지한은 시선만 내려 부스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의 정체를 확인했다. 여행용으로 보이는 작은 통들이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샴푸인지 린스인지, 아니면 샤워 젤인지 모를 액체가 도경의 손에 의해 지한의 하반신을 뒤덮었다.
미끈거리는 손이 엉덩이 사이의 구멍을 더듬다, 그 옆의 살을 문지르다 하며 마사지하듯 유하게 지한을 만졌다. 힘을 빼라는 의미에서 제공한 서비스였다면 도경은 뭘 몰라도 너무 몰랐다. 도경의 손이 닿아있는 한 지한의 신경은 몇 시간이고 바짝 서있을 운명이었다. 그 어떤 것을 갖다 바르고 마사지해도 그 현상을 완화시키긴 어려웠다.
도경의 욕실에서 맡았던 것과 거의 똑같은, 어쩌면 똑같을지도 모르겠는 향이 부스 안에 퍼졌다. 강하고 독특해 좀처럼 희미해지지 않는 향.
바지와 속옷이 내려갔다. 마른 상태였어도 수월하게 벗기기 힘들었을 청바지는 결국 허벅지 중간쯤에 걸쳐졌다. 발기한 성기가 삽입되는 순간을 주인보다 더 생생히 기억하는 몸이 자꾸 위기를 피하려 들었다. 도경은 의지와 상관없이 틀어지려는 허리를 붙들었다.
“지한아.”
지한은 눈을 감았다.
“네.”
손가락들이 머리카락 속을 파고들었다. 두피가 눌리다, 이내 머리카락이 잡혔다. 그 손길이 마치 눈을 감지 말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한은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머리카락을 단단히 잡고서, 도경이 지한에게 키스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잡지 않아도 지한은 도경이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눈을 맞추고 있을 텐데 도경은 자신이 억지로 잡고 있어야만 지한이 말을 들어줄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아프게 잡아당겼다.
손가락 두세 개론 흉내 낼 수 없는 굵기의 살덩이를 받아내느라 뒤가 벌어졌다. 밀어 넣는 대로 벌어지는 속살에 섞여 들어오는 미끄러운 액체와 물이 보지 않아도 보이는 듯 생생했다.
도경은 느리지만 끈기 있게 지한의 뒤를 파고들었다. 성기 하나도 벅찬 구멍이 물에 섞인 액체를 내보냈다. 마치 그곳에서 거품이 나는 것 같은 질감에 지한은 몸서리쳤다.
“아, 으…….”
그러나 그 엄청난 질감도 뒤이어 나기 시작한 소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로션만 바른 살과 물에, 또 다른 액체에 조금 더 길게 적셔진 살은 판이하게 다른 소리를 냈다. 도경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 다시 돌아올 때마다 진짜 거품을 짜내는 소리가 났다.
“어, 아, 혀, 혀…….”
흔들리는 몸이 두 사람의 입술을 좀처럼 붙어있게 두지 않았다. 혀가 만날라치면 치고 들어오는 힘 때문에 고개가 꺾였고, 입술이 붙을라치면 도경을 내보내며 벌어지는 부위의 통증 때문에 입이 한계를 모르고 벌어졌다.
“응, 왜.”
모르겠어. 지한은 헐떡이는 것으로 하고픈 말을 대신했다. 모르겠어, 왜 계속 당신을 부르고 싶은지. 졸린 것도 아닌데 자꾸 눈꺼풀이 내려갔다.
“감지 마.”
목이 확 뒤로 꺾였다. 지한의 턱을 아프게 씹은 도경이 속도를 높였다. 살과 살이 마찰하며 나던 찰싹이는 소음은 더 버티지 못한 지한의 몸이 유리에 통째로 쿵, 하고 부딪히는 소리에 묻혔다. 울음도 웃음도 아닌 신음이 물소리에 섞여들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았다.
***
씻는다는 목적은 사라지고 행위만 이루어진 욕실에서 빠져나온 둘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침대에서 다시 한번 맞붙었다. 단정한 무늬의 이불은 금세 물과 땀으로 더럽혀졌다.
도경의 아래에 눕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한의 상체를 덮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두어 개 정도만 남았다. 어깨와 가슴이 드러날 정도로 벌어진 다음엔 제대로 벗기지 않고 그냥 무작정 옷을 밑으로 끌어내린 도경 때문이었다. 침대에 누우면서 바지를 벗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위아래가 다 벗다 만 꼴이었을 것이다.
도경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 쳐올릴 때마다 몽땅 젖어 제 색을 잃어버린 크림색 셔츠가 거슬렸다. 벗기고 싶다. 언뜻언뜻 보이는 도경의 가슴팍이 지한의 시선을 좀처럼 놔주지 않았다.
이 남자가 가지고 태어난 색을 가리는 건 뭐든 다 찢어버리고 싶다. 지한은 한껏 벌어져 흔들리던 다리로 도경의 하반신을 감쌌다. 도경이 멈칫했다. 지한은 남김없이 잠긴 셔츠 앞섶을 붙들었다.
“형, 이 옷, 또 입을 거예요?”
도경은 들어오다 만 성기를 깊게 박아 넣었다. 도경의 골반이 지한의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네 마음대로 해.”
지한은 손에 잡힌 셔츠를 있는 힘껏 잡아 뜯었다. 단추들이 투두둑 떨어져 나갔다. 일부러 어둡게 불빛을 낮춰놓은 방 안에서도 예민한 피부 곳곳에 퍼져나간 붉은 기가 보였다. 얼마나 하야면. 지한은 자꾸 양옆으로 벌어지려는 다리를 최대한 옭아매며 도경의 옆구리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형, 아, 여기.”
“응, 뭐?”
“여기가, 빨개요.”
도경이 지한의 허벅지를 잡아 억지로 벌리게 했다. 더는 도경의 허리를 감싸고 있을 수 없게 된 다리가 접히며 엉덩이가 들렸다. 접합부 주위의 살을 약하지만은 않게 내려친 도경은 숨을 고르며 웃었다.
“여기도 빨개.”
두 사람이 자기에 부족하지 않은 침대는, 두 사람의 격한 동작을 받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조금씩 밀려올라 가다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았을 때에서야 더는 올라갈 데가 없음을 알았다.
샤워 부스 유리를 들이받았을 때만큼 큰 소리가 났다. 아무리 몸을 함부로 굴리며 사는 지한이라지만 연속으로 딱딱한 곳에 머리를 박고 싶진 않아서, 자세를 바꾸려 손으로 침대를 짚었다. 상체를 반쯤 일으키자 지한의 의도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도경이 엉덩이 밑을 받쳤다. 머리 대신 어깨가 헤드에 부딪혔다.
“아니, 그게 아니, 아!”
앉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세가 된 지한의 몸이 찌그러지듯 접혔다. 도경의 어깨에 걸쳐졌던 다리는 얼마 못 가 미끄러졌다. 눈과 코에 열기가 몰렸다. 몸이 갑자기 접혔기로서니 눈물까지 고일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런데 그것은 아파서 나는 눈물이 아니었다. 물론 남의 신체 일부분을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열 번째가 되어도 마냥 편하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울 정도의 고통도 아니었다.
“흐으, 흑.”
체육관 선배에게 꼴 보기 싫은데 눈에 띄었단 이유로 얻어맞아 입 안이 다 터졌을 때도 나지 않았던 눈물이다. 지난번 도경의 집에서는 숨이 막혀 그랬다지만 이번엔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눈물이 막 났다. 방울도 아니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던 물줄기처럼 끊임없이.
모든 동작이 정지했다. 도경이 지한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아파서 우는 거야?”
“아니, 흐, 아니.”
“그러면 왜 울어.”
“몰라, 나도. 모르겠어.”
얼이 빠져 우는 지한을 보던 도경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쪽 눈에서 나는 눈물을 닦으면 저쪽 눈에서, 저쪽 눈에서 나는 눈물을 닦으면 다시 이쪽에서 새로 나자 나중엔 아예 손등으로 뺨 전체를 닦아내 주었다. 한 번 앉은 자리에서 손 닦는 데에만 물티슈를 몇 장이고 써재끼는 남자가.
“아파서 그런 거 진짜 아니니까, 그러니까.”
도경이 물러설까 두려웠다. 지한은 도경의 목에 팔을 둘렀다.
“빼지 마.”
지한의 팔 안에 갇힌 도경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곧게 뻗은 속눈썹이 창백한 피부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경이 지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또다. 테이블에서 지한의 손목을 잡아 일으키기 직전 번뜩였던 안광.
지한의 어깨를 내리찍듯 눌러 다시 침대에 눕게 한 도경이 손을 뻗었다. 커다란 두 손이 지한의 목을 빈틈없이 감쌌다. 힘만 주면 그대로 목을 조르는 행위까지 이어지기 적합한 자세였다. 지한의 숨통을 손아귀에 넣은 채로, 도경은 끝까지 뚫고 들어왔다. 그보다 더 찌릿할 순 없어서, 그 이상 깊게 들어올 수는 없어서. 그래서 끝.
지한은 턱을 치켜들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몸이 떨렸다. 도경을 받아냈다는 것만으로 아찔했던 지난번과는 달랐다. 도경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뭐라고 하는지조차 들리지 않았다. 뜨끈한 액체가 뒤를 메우는 느낌만 났다.
떨림은 오래도록 멈추지 않았다.
검푸른 하늘 위로 불꽃들이 터졌다.
***
사방에 어둠과 침묵이 깔렸다. 지한의 몸을 받치고 있는 침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경이 지한에게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지한은 잠결에 도경의 팔을 붙잡았다.
“같이 자면 안 돼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오늘 치 용기가 바닥난 지한은 내일 치 용기를 미리 가져다 썼다.
“같이 자.”
침대가 조금 전보다 더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경은 어디로도 가지 않고 지한의 옆에 누웠다. 지한은 다시 잠들었다.
***
지한이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은 손으로 옆자리를 더듬어보는 것이었다. 눅눅한 시트만 만져졌다. 도경이 없었다. 숨이 턱 막히려다 말았다. 도경은 없었지만 그가 들고 온 슈트케이스는 문 옆에 그대로 있었다.
[일어나면 연락해]
도경에게 메시지가 온 시간은 무려 두 시간도 더 전이었다. 마음이 급해 샤워 부스로 뛰어 들어가다 미끄러질 뻔했다. 부스는 언제 그 난리를 쳤냐는 듯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한은 거울로 몰골을 확인했다. 지난밤엔 울기까지 해서 그런지 어째 씻고 나왔는데도 도경의 욕실에서보다 더 볼썽사나웠다. 로션을 바르려 세면대 옆을 본 지한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용품들이 개봉되지 않은 상태임을 깨달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지한의 몸을 매끄럽게 해준 용품들은 다 도경이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카드키로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머리를 대충 턴 지한은 욕실 문을 열고 나갔다. 어제와는 다른 새하얀 셔츠를 입은 도경이 일어났어? 하고 인사를 해왔다.
“어디 갔다 왔어요?”
“너 깰까 봐 다른 방에서 씻고 왔어. 일어날 때 된 것 같아서 와봤는데.”
겉보기엔 멀끔한 도경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있었다. 지한에 비하면 맑디맑은 음색이었지만. 지한이 미안해서 조용해진 줄 알았는지 도경이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어차피 두 개 예약해놔서 안 써도 돈은 똑같이…….”
지한은 도경을 끌어안았다.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요. 나랑 있을 땐.”
“어?”
“편하게 있어요.”
심장이 괴롭게 뛰었다. 지한과 맞닿은 도경의 가슴에까지 미쳐 날뛰는 심박이 전해질까 창피했다.
“아무것도 참지 말고.”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두렵진 않았다.
“난 다 괜찮으니까.”
강가 위로 떠오른 해가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딱 붙어선 두 남자를 내리쬈다. 안겨있기만 하던 도경이 천천히 지한의 어깨와 허리에 팔을 둘렀다. 느슨하던 팔은 점차 간격을 좁혀와, 종국에는 숨을 참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
그렇게 대답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