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Upper Cut
#55
이미 한 번 앉아본 적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반쯤만 붙이고 앉은 지한은 지난번과 전혀 달라진 것 없는 아파트 내부에 영혼 없는 눈길을 주었다. 깔끔하고 넓다는 점 외엔 딱히 특이할 것 없는 인테리어를 굳이 집요하게 감상하는 이유는 딱히 눈을 둘 데가 없기 때문이었다. 주야장천 도경의 등만 쳐다보고 있을 순 없으니까.
볼 것 없는 실내 구경은 길게 가지 못했다. 지한은 더 참지 못하고 아까부터 자꾸 고개가 향하려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싱크대 앞에 선 도경의 등이 곧게 펴져 있었다. 그가 찻주전자로 정수기 물을 받은 지 족히 5분은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5분이 뭔가. 10분이 지났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찻잔을 꺼내지도 않고 같은 자세로 서있는 도경에게선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걸까.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 큰 우산으로도 다 막아지지 않았다. 지한은 허벅지까지 다 젖은 상태로 도경의 차에 탔다. 차가 더러워질까 봐 걱정하느니 속 편하게 안 타고 싶었던 지한을 기어이 태운 사람은 도경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도경의 얼굴 여기저기에도 물방울이 튀어있었다. 차에 타자마자 마른 휴지로 물기부터 닦아댈 줄 알았는데,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꾼 뒤 핸들을 잡을 때까지 도경은 한 번도 휴지를 찾지 않았다. 의외였다.
의외의 일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거리로 빠지기 직전 말없이 인도 가까이에 차를 세운 도경이 기다리란 말만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우산도 없이 어딜 그렇게 가나 했는데 도경이 들어간 곳은 약국이었다.
잠시 후 그는 약국 이름이 적힌 비닐봉지와 함께 돌아왔다. 그새 더 거세진 비를 맞고 들어온 그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젖어서 힘을 잃고 처진 머리카락이 피부에 들러붙자 성가시다는 듯 옆으로 넘겼을 뿐, 그는 그때도 휴지를 찾지 않았다.
기대를 깨트리는 광경은 도경이 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와버린 그의 아파트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지한을 식탁 의자에 앉힌 도경은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약국에서 사온 거즈에 물을 묻혀 주위를 살살 닦아냈다.
상처가 점점 부어오르는지 따끔거렸다. 상처 부위의 주변을 닦아낸 다음 순서는 일반 밴드보다 훨씬 널찍한 밴드를 붙이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거울로 본 상처는 예상보다 더 길었다. 도경이 사온 밴드는 그 긴 상처를 다 덮을 만큼 컸다.
「형 왜 이런 걸 잘해요?」
우스꽝스럽게 들렸겠지만, 그럼에도 지한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경에겐 피아노와 차가 어울렸다. 상처를 능숙하게 치료하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도경은 온몸에 흉터 하나 없을 것처럼 생긴 남자였다.
아마 실제로도 그런 몸을 가지고 있을 테고, 설령 다친다 해도 다른 누군가가 병원에 데려가 치료받게 해주는 생활을 해왔을 것이다. 욕이 아니었다. 제때 병원에 가기만 했어도 깨끗하게 아물었을 상처를 방치해 여기저기 남은 흉을 가지고 살게 된 지한에게 있어 상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칭찬이었다.
「혼자 살면 이 정도는 다 하지. 어디 긁힐 때마다 병원까지 갈 순 없잖아.」
「형이 긁혀요? 어딜?」
그 질문에 도경은 말없이 지한을 바라보기만 했다.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 질문이 황당해서인지. 아마도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서인 것 같다고 혼자서 결론지었다. 고작 상처 하나 닦아주는 모습에 놀랍단 식으로 반응하다니. 생각할수록 지한은 도경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한때 그를 돈과 인간관계 둘 중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사람이라 여긴 적 있었다. 돈은 분명 넘쳤다. 그런데 인간까지 가졌는지는.
「남들 말대로야. 형은 남한테 관심 없어. 형 말고 다른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해.」
귓가에서 이안의 말이 떠나지 않았다. 도경과 제일 친한 줄 알았던 이안의 입을 통해 듣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말. 상대를 공격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언어 선택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워 충격적이기까지 한 대목은 따로 있었다.
형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소리 들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형 그런 사람 아니라고 했는지 알아, 이안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몇 번을 곱씹어도 그 말은 이안에게 도경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 조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소리로 들렸다. 뇌를 굳게 하는 문장이었다. 시우에게 백, 이백 거리던 사람들이 도경을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규정한다고? 암만 없이 살고 못 배운 지한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안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됐다.
도경의 등이 움직였다. 지한은 얼른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남의 뒷모습을 배경삼아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도경이 찻주전자와 받침을 가지고 식탁으로 왔다. 받침을 먼저 내려놓은 다음 그 위에 찻주전자를 올리는 동작이 느렸다. 답지 않게.
“아. 옷이 많이 젖었지?”
“뭐…….”
조금만 덜 집중하고 있었어도 혼잣말인 줄 알고 넘겼을 작은 소리였다. 다행히 지한은 정신이 얼마나 없든 간에 도경과 단둘이 남아있을 때면 집중력이 최고치를 찍었다. 옷이 젖었기는 도경도 지한과 다르지 않았다. 혹시 집 안을 그만 더럽히고 나가란 소린가? 지한은 축축한 무릎 부근을 손으로 꽉 잡았다.
“씻고 나와. 나도 씻고 나올게.”
“……어?”
연속적으로 예상을 엇나가는 하루에 정점이 찍혔다. 정말이지 씻고 나오라는 말을 들을 줄 몰랐던 지한이 놀라거나 말거나, 도경은 태연히 새로운 폭탄을 던졌다.
“머리 감겨줄까?”
“예? 아니. 아니요. 형이 왜, 아니, 네?”
“상처 때문에 불편하지 않아?”
“이거 붙였잖아요. 아니, 안 붙였어도, 아무튼. 내가, 내가 알아서.”
왼쪽 오른쪽 할 것 없이 양쪽 턱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 얼굴 전체로 확 퍼졌다. 피부가 도경처럼 하얗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래, 그럼. 복도 끝 왼쪽 문 열면 욕실이야.”
“근데, 씻으면, 옷이.”
“내 옷 입으면 되지?”
그럼 속옷은? 그것도 빌려준다는 소리는 아닐 텐데? 여기저기서 솟는 의문들을 속에 눌러 담은 채, 지한은 도경이 가르쳐준 욕실을 향해 복도를 걸었다. 사실 씻으란다고 바로 씻기엔 많은 것들이 마음에 걸렸다. 보통 남의 집에서 씻는다고 하면…… 아닌가.
자신 있게 장담하기엔 지한이 너무 그런 쪽으로 무지했다. 씻고 나오라는 도경의 얼굴이 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깨끗했기에 더 헷갈렸다. 어쩌면 빗물을 뒤집어썼을 때부터 씻고 싶었던 것을 참다 더는 못 참겠어서 지한에게까지 제안해 버렸을 수도 있다. 혼자만 씻기엔 민망하고 미안해서.
벽에 달린 버튼을 누르며 문을 연 지한은 욕실 풍경에 압도당했다. 우선 시야가 트였다고 표현하고 싶을 만큼 환했다. 환한데 눈이 아픈 색은 아니었다. 호텔 욕실 같은 조명을 가진 욕실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거실 테이블 위의 꽃병에서 났던 것과 비슷한 향이었다. 밝고 향기로운 공간. 도경과 어울렸다.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거울이 지한의 얼굴을 선명히 비췄다. 밴드가 커서 꼭 시술을 받고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화가 치밀었다. 지한의 손에 잡혀 꼼짝도 못 하던 새끼가 놔주자마자 우산을 휘두를 줄이야. 솟구치려던 분노는 얼마 못 가 한풀 꺾였다.
「이안아.」
이안을 후려 패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그 이름을 부르던 도경의 목소리가 너무 쓸쓸했다.
클럽 옆 골목에서 벌어졌던 일을 곱씹느라 빠졌던 얼이 돌아온 것은 머리를 감고 몸을 닦은 뒤 속옷까지 빤 뒤였다. 옷을 빌려주겠다던 도경도 씻으러 들어갔을 것 아닌가. 입을 옷이 없었다. 젖은 옷을 다시 입는다는 최후의 수단이 남아있어 그나마 절망적이진 않았다.
인테리어마저 호텔을 닮은 도경의 욕실은 세면대 아래 서랍이 있었다. 첫 번째 칸을 열자 돌돌 말린 수건과 드라이어가 나왔다. 아직 한 칸이 남아 있었다. 아래 서랍을 열었다. 왼쪽엔 새 칫솔과 치약이, 오른쪽엔 수건과 비슷한 모양으로 돌돌 말린 무엇인가가 있었다.
지한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꺼내 펼쳤다. 가운이었다. 부드럽다 못해 보송보송했다. 좋지만 익숙하진 않은 촉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잠시 어색하게 굳어있었다. 감각이 낯섦을 이겼다. 온몸을 섬세하게 감싸는 가운마저 도경의 피부를 연상시켰다.
젖은 옷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일단 매트 옆에 두고 부엌으로 갔다. 먼저 씻고 나와 옷까지 갈아입은 도경이 또 싱크대 앞에 서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지한이 부엌에 왔는데도 쳐다보지 않았다. 발소리를 아예 듣지 못한 듯했다.
“저.”
도경의 손가락이 일정한 속도로 싱크대를 때리고 있었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보였다. 누가 말해주기 전까진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 일쑤인 지한처럼.
“저기, 형.”
마침내 도경이 지한을 봐주었다.
“미안. 다른 생각 하느라.”
“거기 서서 뭐해요?”
“아, 잔. 잔 꺼내려고.”
찬장을 여는 도경의 앞, 몇십 분 전 찻주전자가 있던 자리에 작은 통들이 여럿 늘어져 있었다. 가까이서 봐야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정확히 알겠지만 일단 약통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차 같은 건 안 마셔도 된다고 하려다, 그새 잔 두 개를 찾아 식탁에 놓는 도경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그냥 앉았다. 앉지 않고 서서 찻잔을 만져본 도경이 식었네, 하고 중얼거렸다. 어디가 아픈 거라면 그만 가보겠다고 하고 싶었으나 도경이 눈 깜짝할 사이 찻주전자를 싱크대로 가져갔다. 식은 차는 그대로 버려졌다.
지한은 도경이 주전자 안에 새 찻잎을 넣어 다시 물을 받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 두껍지 않은 셔츠가 감추지 못한 어깨는 각진 모양이 뚜렷했고 움직일 때마다 옷이 들러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허리는 날씬했다. 얼마나 날씬할지는 만져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얼굴과 몸.
이안이 도경에게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잘 알겠다.
언제 주먹이 날아올지는 잘 맞혀도, 누가 누굴 좋아하고 말고를 감지하는 데에는 영 쓸모없는 촉을 가진 지한에게도 아까의 이안은 쉬웠다. 엿들은 대화 내용이라곤 이안이 악쓰는 소리밖에 없었지만, 지한에게 손을 잡혀서도 다른 때와 달리 꼬랑지를 내리지 않는 눈빛이 대충은 말해주었다. 이안은 도경 때문에 지한을 미워하는 것이었다. 도경을 빼앗기는 줄 알고.
새로 내온 찻주전자를 아까와 똑같은 자리에 내려놓은 도경이 지한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자신이 붙여준 밴드를 살핀 후 턱을 놔준 그는 작게 말했다.
“이안이한테는 내가 꼭 따로 사과하라고 할게.”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속이 찻물처럼 끓었다. 이안을 패는 데 썼어야 할 성질이 뒤늦게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지한은 순간 자신이 도경을 상대 중이란 것을 망각했다.
“걔가 사과하면? 그러면 뭐가 해결되는데.”
차에 목숨 건 사람처럼 앉지도 않고 주전자를 주시하며 서있던 도경이 아, 하고 지한을 보았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규칙 없는 모양새로 덮고 있었다.
“그럼 사과하지 말라고 할까.”
“그런 얘기가 아니야. 형 친구란 새끼들 다 맛이 갔다고.”
부엌에 결코 가볍지 않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되는 거였다. 도경을 비난하려고 한 말이 아닌데.
“방금은……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그래서 형한테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고.”
“알아.”
“근데 형 친구들은 이상해요. 그건 맞지.”
도경의 눈이 다시 찻주전자로 향했다. 친구들의 험담을 듣고 싶지 않아 딴청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가, 자신은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지한이 대신해주길 조심스럽게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안 걔한테 형이랑 놀지 말라 그랬다는 것도 다 친구들 아니에요?”
“나 듣는 데서 한 말이 아니라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도경이 주전자를 들어 잔 가까이에 댔다.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입구에서 김을 뿜는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괜찮아.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럴 리가. 지한은 차나 따르고 앉아 있는 도경을 황당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남이 하는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시우랑 그렇고 그런 사이란 소리, 시우 인생 그만 방해하란 소리 수백 수천 번을 들었어도 들을 때마다 새롭게 괴로웠다. 못 배웠다, 무식하다는 소리 평생을 들었어도 여전히 들을 때마다 분이 치밀다 못해 스스로의 머리통을 깨고 싶어지는데.
“나는 신경이 쓰인다고. 내가요.”
“고맙네.”
“고마우라고 하는 소리가…….”
“그런데 난 정말 괜찮아. 내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타입인 것도 알고.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순 없잖아.”
“형 진짜 몰라서 그렇게 말해요?”
“뭘?”
두 잔에 각각 차를 알맞게 따른 도경이 드디어 망할 놈의 주전자에서 손을 뗐다. 지한은 말문이 막혔다. 어떤 상황에서도 교양 있게 말하려는 병인지 습관인지를 지키려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형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새끼들이 문제라고요.”
도경은 단순히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할 수 없다고 여겨서 덤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이안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 소릴 들을 만해서 들었다고 믿고 있어서. 그래서 진심으로 괜찮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전달하고 싶은 생각과 마음은 넘치는데 그것들을 어떤 말로 옮겨야 적절할지 모르겠다. 아니야, 당신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아. 당신은 다정하고, 부드럽고, 잘 빨개지는 피부만큼 섬세한 것뿐이야. 그중에서 뭘 말하고 뭘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렇게 태어나서일까, 그렇게 만들어져서일까.
막막했다.
친구들이 이상하다는 의견에 그랬듯, 이번에도 도경은 침묵을 지켰다. 지한은 도경의 표정으로 속내까지 엿보려는 시도를 관두었다. 얼굴만 봐도 속이 보일 때가 있다 한들 결국 다 지한의 추측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다 맞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래 만난 사람 한 명 있다고 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물러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도경이 듣고 싶어 하든 말든 진실은 진실이었다. 많이 배웠을 그의 친구들은 지한이 아는 수많은 못 배운 놈들보다 훨씬 더 막말을 했다. 육두문자만 욕이 아니었다. 그들이 시우를 두고 지껄인 소리도, 이안이 도경의 면전에 대고 쏟아낸 말도 다 욕이었다.
“그 사람은 형 친구들이랑 안 친해요?”
도경과 오래 만났다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은 늘 한 구석에 숨어있었다. 다만 오늘 피어오르는 의문은 약간 결이 달랐다. 어떻게 생겼기에 도경을 오랫동안 가질 수 있었는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미친 새끼들이 도경을 괴롭히는 동안 연인으로서 뭘 했는지가 궁금했다.
“아니면 아까도 있었는데 모르는 척한 거예요?”
“없었어.”
“여자예요?”
아니. 이게 아닌데. 말해놓고 스스로도 당황했다.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 알고 싶지 않단 것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딴 거나 물어보는 놈이 될 생각은 없었다. 도경은 식탁에 기대서서 한 손으로 지한의 앞을 짚었다.
“그게 알고 싶어?”
창피해서 차마 그렇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한은 안 굴러가는 머리를 애써 굴렸다.
“싫으면 꼭 말 안 해줘도.”
“응. 여자.”
비교가 덜 되려면 남자보단 여자였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분명 있다. 막상 확인사살을 당하고 나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어느 쪽이든 답을 알게 된 후 기분이 좋을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근데 그럼 형은.”
이미 창피해져 버린 김에 물어보기로 했다. 도경을 만날 때마다 하도 말과 행동을 가렸더니 온몸이 근질거리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여자랑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왜 나랑. 내가 그 여자랑 비슷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어딜 봐도.”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지한은 솟아오르는 자괴감을 눌렀다. 얼마 못 가 도경의 머릿속에서 지한 같은 건 싹 잊힐 줄 알았는데. 도경은 왜 지한을 여태 놓지 않아서.
“지금 내가 너랑 걔를 비교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
기뻤다가, 비참했다가, 즐거웠다가, 화났다가 하며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걸까.
도경이 하얀 식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건반을 두드리듯 소리가 듣기 좋았다. 지한은 도경의 질문에 부정하지 않았다. 놀랍도록 정확히 맞췄다.
비교할까 봐 걱정됐다. 오래 사귀었다면 도경의 학창시절을 아는 여자일 테고, 그렇다는 것은 도경만큼 멀쩡하고 좋은 집안의 자식이라는 소리였다. 비교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한 번도 걔를…….” 식탁 위에서 머무르던 손이 올라와 지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렇게는 만져본 적 없거든.”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넘기는 그 단순한 동작이 지한의 심장을 무섭게 다그쳤다. 도경이 지한의 머리에 손을 댄 것이 처음도 아닌데.
“그렇게 만지는 게 뭔데요.”
“너 만지는 것처럼?”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지한은 힘겹게 침을 삼켰다.
“오래 만났다면서요.”
“오래 만났지.”
“근데 왜. 그럼, 둘이 뭘.”
지나치게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지한은 멈추지 못했다. 알고 싶었다. 대체 뭘 했기에 그 여자가 오랜 세월 도경을 독점하고도 끝내 떠나 버렸는지 낱낱이 알아내지 않고는 답답한 속을 고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는?”
“나?”
“생각해 보니까 나는 네가 지금까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몇 명을 만났는지 하나도 모르네.”
쉬지 않고 지한의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던 손이 뒤통수로 넘어갔다. 도경의 손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대신 그대로 뒷덜미까지 내려가, 목과 어깨뼈 사이의 피부에 닿았다. 몸 곳곳, 발끝, 손끝, 단전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없는데 그런 거.”
“한 명도?”
지한은 턱을 끄덕였다. 소리 내지 않고 웃은 도경이 지한의 어깨를 주무르듯 만졌다.
“그럼, 키스도 나랑 한 게 처음이야?”
중학생 같은 질문을 하는 도경이 묘하게 기분 좋아 보여서, 지한은 갈등했다. 거짓말해 버릴까. 거짓말해도 도경이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지한의 등엔 이미 큰 거짓말 하나가 업혀있었다.
맨 처음 지한을 불러냈던 에스더마저 소현과 지한의 사이에 돈이 오갔다는 건 몰랐다. 알았다면 진작 그 사실을 가지고 지한을 비꼬거나 깔아뭉개는 놈이 하나쯤은 나왔어야 한다.
“아니요.”
언제 거짓말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기분을 배로 늘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더는 거짓말하지 않아야 옳았다. 지한보다 수십 수백 배 똑똑한 사람들도 툭하면 TV에 나와 환기시켰다. 세상에 완벽한 거짓은 없다고.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진다고.
“만난 사람 한 명도 없다며?”
지한이 도경은 연인이 아니었다. 연인 사이였다 한들 과거에 다른 사람과 뭘 했어도 그 자체만으로는 죄가 될 순 없었다. 그러니 말하지 못할 까닭도 없었다.
“시우하고.”
쉬지 않고 지한의 어깨를 만지던 손이 동작을 멈추었다. 말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걱정도 잠시, 지한은 더 큰 의아함에 휩싸였다. 둘은 연인이 아니고 따라서 서로를 속박할 그 어떤 권한도 없었으나 만일 그런 권한이 있다고 쳐도 더 눈치를 봐야 할 쪽은 오래 사귀었던 연인이 존재하는 도경이었다. 26년간 연애 한 번 못해본 지한이 아니라.
“둘이 친구인 줄 알았는데.”
“친구 맞아요. 그때는 어려서.”
“난, 아무리 어려도 친구한테 키스하고 싶었던 적은 없어서.”
도경이 지한의 어깨 위에 놓인 손을 다시 조금씩 움직였다. 힘이 아까보다 더 들어가 있었다. 그래. 지한은 홀린 듯 도경에게 동의하고 있었다. 키스하는 친구 사이는 흔치 않았다. 옆 학교 새끼들이, 같은 학교 선후배들이 맞았다. 시우와 지한은 정상이 아니었다.
“어릴 때 많이들 그러긴 하지. 손으로 도와주고.”
말하지 말걸. 그냥 나중에 들키더라도 거짓말할걸.
“너도 그랬어?”
아니다. 지금 말하길 잘했다. 나중에, 도경이 지한과 시우를 정상적인 사이라고 믿어온 기간이 더 길어진 후에 알게 되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 모든 일은 숨기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여파가 커졌다.
“그랬구나. 둘이.”
“뭐를…….”
“누가 먼저 하자고 했어? 넌 아닐 것 같아. 보기보다 부끄러움 잘 타니까.”
어깨에서 앞쪽으로 손을 옮겨온 도경이 손끝으로 쇄골을 툭툭 간질이듯 건드렸다.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가슴팍이었다. 앉아있느라 느슨해진 가운이 신경 쓰였다. 도경의 손이 닿아있는데 여미면 그만 만지란 것처럼 보일까 봐 지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내가 부끄러움을, 잘……?”
“그래서 둘이 어떻게 했어? 만지기만 했어?”
“그건.”
“다 했어?”
도경이 갑자기 가운 앞섶을 꽉 쥐었다. 멱살을 잡는 것처럼 거칠진 않았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빗어 넘겨줄 때처럼 부드럽지만도 않았다. 심장박동이 거의 발길질해대듯 날뛰고 있었다. 그만 말해. 지한은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경고했다. 지금까지 떠든 것만 해도 아웃이니까 제발, 그만 털어놔.
“나는 창피해서 친구들한테도 말 못 한 얘기 너한테만 했는데, 너는 왜 이렇게 안 알려주려고 해?”
창피한 얘기란 정확히 뭘 가리켜 하는 말일까. 지한은 잠시나마 스스로에게 한 경고도 잊고 그게 뭔 소리냐고 되물을 뻔했다. 오래 만난 여자와 그런 식으로는 접촉하지 않았다는 것? 그게 창피한 얘기일까? 지한은 삼켜도, 삼켜도 자꾸 고이는 침을 식도로 넘겼다.
“그러고 나서는, 더 안 했어요. 그냥.”
“왜?”
“친구, 친구니까……?”
도경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다행히 거짓말로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꽉 쥐고 있던 앞섶을 놓았다. 당겨져있다 풀린 앞섶이 늘어져 한쪽 살을 다른 쪽 살보다 더 노출시켰다.
“너는 참 솔직해.”
식탁으로 돌아간 도경의 손을 보느라, 지한은 벌어진 가운을 치켜 올릴 생각도 못 했다. 안 돼. 나한테서 벌써 떨어지지 마. 다시 날 만져.
대화가 끊긴 부엌에 진동음이 작게 울렸다. 짧게 울렸다 끊어지고 다시 울리는 패턴은 전화가 걸려오고 있음을 가리켰다. 정신을 차린 지한은 의자에 걸어둔 재킷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받으려는 찰나 진동이 멎었다.
“누구야?”
“시우인데, 전화가 끊어졌어요.”
다시 전화를 걸기 위해 들었던 엄지손가락은 시우의 이름 대신 허공만 때렸다. 도경이 지한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간 탓이었다. 뭐 볼 게 있다고 화면을 한참 들여다본 그는 기기를 지한의 앞에 가지런히 내려두었다.
“이따가 해.”
“오래 안 걸려요. 무슨 일 있는지만.”
지한이 손을 다 뻗기도 전이었다. 도경이 손으로 휴대폰을 홱 밀었다. 워낙 동작이 빨라 그 뒤에 따라붙은 휴대폰과 바닥의 마찰음이 없었다면 두 눈으로 보고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을 것이다.
“옆으로 치우려고 한 건데…… 떨어졌네.”
지한은 바닥에 케이스 뒷면을 보인 채 엎어진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화면이 깨졌으면 아무리 도경이라도 뭐라고 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깨졌으면 다른 거 사줄게.”
도경에게 뭐라고 하고 싶어질 것 같다고? 꿈에서나 가능했다. 현실의 지한은 본인이 떨어트려 놓고서 깨졌으면 다른 걸 사주겠다는 도경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도경이 사준 거라서 더욱 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러면 괜찮지?”
기분 나빠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하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지도 않았고, 오늘은 지한에게만 고된 하루가 아니었다.
“……네.”
도경도 속이 말이 아닐 터였다. 게다가 예민하기는 지한보다 도경이 훨씬 더했다. 그래서 그런 거겠지. 지한은 처음 접한 도경의 낯선 면모를 과대해석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었다. 자신이 뭘 하고 있다는 자각 없이 행동부터 이루어지는 순간들.
진작 추슬렀어야 할 앞섶을 끌어올렸다. 뜨거운 물에게서 얻은 온기가 다 달아났는지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했다.
“형, 나. 옷 좀.”
도경의 얼굴엔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다듬은 것처럼 잘 뻗은 눈썹도, 날이 선 눈매도, 눈과 정반대로 항상 웃고 있는 것 같은 입매도 각자가 타고난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지한의 눈엔 다양한 표정이 보였다. 왠지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가,
“조금 기다려야겠는데.”
초조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왜요?”
그랬다가 다시 걱정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지한을 헷갈리게 했다.
거두어졌던 손이 다시 지한에게 돌아왔다. 밴드로 덮어놓은 상처 부위를 쓸어내리는 손끝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뺨으로, 턱으로 그리고 귀로 이동한 손이 귓불을 잡았다. 도경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지한의 귀와 뺨 사이에 숨을 뱉었다.
“나하고도 해.”
어느새 뒤에까지 옮겨간 손아귀에 뒷덜미를 잡혔다. 뭘 하자는 것이냐고, 지한은 묻지 못했다. 이미 도경에게 물려버린 입술을 움직여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뒤였기 때문에.
***
기다려주지 않는다. 틈을 주지 않는다. 호흡도 주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까지 지한이 겪어온 도경의 방식이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도경은 그답게 입 맞춰왔다.
식탁에 앉다시피 기댄 채로 의자에 앉은 지한의 입술을 씹는 것이 불편하고도 남았을 도경은, 본인이 자리를 옮기는 대신 가운 앞섶을 잡아당겨 지한을 일으켰다. 그마저도 도경다웠다. 지난번에도 도경은 지한을 일으켜 세워 벽에 기대게 했었다.
오늘도 벽에 뒤통수를 부딪치게 될 줄 알았던 지한은 몸이 밀려나는 엉뚱한 방향에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곧 오늘이 어떤 날인지를 되새겼다. 오늘은 의외의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날이었다.
일어나 움직이는 중에도 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지한은 못 쉰 숨을 몰아쉬었다. 도경이 미는 대로 밀려나느라 바삐 움직이던 발바닥에 딱딱한 물체가 밟혔다. 바닥에 떨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던 휴대폰이었다.
발에 차인 기기가 식탁 아래로 들어갔다. 지한이 휴대폰에 눈길을 준 시간은 불과 1, 2초에 지나지 않았다. 도경은 그 잠깐을 놓치지 않았다.
“아!”
도경이 지한의 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절로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가 났다. 남에게 고통을 들키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미안.”
하나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사과한 도경이 엉성하게 매어놓은 매듭 아래로 달랑이는 가운의 허리끈을 잡았다. 그리고 제 쪽으로 당겼다. 도경이 하는 요상한 짓을 보고만 있으려니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허리끈이 풀리면 가운 앞이 열리게 되어있었다.
“잠깐, 이거 끈, 끈 풀려요.”
운동했던 순발력을 끌어모아 풀리기 직전의 끈을 낚아챈 덕분에 가운 앞이 다 벌어지는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 대체 이 무슨 애 같은 짓인가 싶어 정색을 하려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끈을 잡은 채로 씩 웃는 도경이 진짜 어린 개구쟁이로 보여서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어느 종목이든 승패를 가르는 것은 찰나였다. 아주 잠시라도 흔들리는 쪽이 불리했다. 지한은 도경에게 계속해서 지기만 해왔다. 한시도 흔들리지 않는 순간이 없으니.
지한은 양손으로, 도경은 한 손으로. 도합 세 개의 손이 지한의 몸을 가린 가운 허리끈에 닿아있었다. 그들은 그 괴상한 자세를 유지하며 간헐적으로 입을 맞췄다. 지한을 밀기 바쁘던 도경은 허리끈을 잡으면서부터 자신이 먼저 앞서나가 이끌기 바빴다.
따라가지 않고 버티다가 가운이 벗겨지는 일은 죽어도 겪고 싶지 않았기에, 지한은 도경의 속도에 맞춰 착실하게 발을 움직였다. 이동 중에 이루어지는 키스는 사실상 입술 부딪히기 수준이었다. 도경의 입술이 지한의 입술에 짧게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쪽, 하는 소리가 났다. 지한은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터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공포를 느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방문 앞에서 예고 없이 멈춰선 도경이 한 손으로 지한의 머리를 헤집으며 입술을 핥아왔다. 도경의 눈꺼풀 끝에 매달려 파들파들 떨리는 속눈썹이 더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야릇했다. 지한은 눈을 감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불이 켜지는 소리도 들었다. 몸이 또 당겨졌다.
지한은 눈을 떴다. 도경이 지한을 데려온 곳은 침실이었다. 욕실을 보고 호텔 같다고 감탄했던 것이 우스워졌다. 도경의 침실이야말로 호텔이었다. 하얗고 까만 가구들. 큰 거울. 몇 명이 누워도 거뜬할 것 같은 크기의 침대. 무늬 없이 새하얀 이불보까지. TV만 가져다 놓으면 언젠가 가봤던 신축 호텔과 아주 많이 흡사한 정경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도경은 가운 허리끈을 계속해서 잡아당겼다. 침대 바로 앞까지 끌려간 다음에야 끈은 자유를 되찾았다. 얼른 다시 매듭을 지으려는 지한을, 도경이 제지했다.
“그냥 둬.”
크고 마른 손이 지한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지한의 손목도 누군가의 손아귀에는 그토록 쉽게 잡힐 수 있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기껏 매어놓은 매듭을 풀어헤쳐 놓을 땐 언제고, 도경은 가운 앞섶을 추슬러주었다. 지한은 어쩔 수 없이 TV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옷장이나 침대 앞에서 상대역의 옷매무새를 만져주는 배우들이 곧잘 놓이곤 하는 자세였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
급습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겪어온 다른 기습공격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도경은 지한을 아프게 하지 않았다.
지한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걸 꼭 말로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도경을 만난 이후 줄곧 지기만 해온 지한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좋아요.”
해야 할 말은 더 있었다. 정직한 답변을 들려줬으니 이쪽에서 물을 차례였다. 형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그런데 못 물어보겠다. 도저히 입이 안 떨어졌다.
시야가 빙그르르 돌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려 고개를 들기도 전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뒤통수에 푹신한 것이 닿았다.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땐 천장이, 두 번 깜박인 뒤엔 도경의 얼굴이 시야를 메웠다.
눈을 세 번 깜박인 후에야 지한은 상황을 완전히 인지했다. 그는 옷을 다 갖춰 입은 도경의 아래서 가운 하나만 걸치고 누워 있었다. 그건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를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불, 좀.”
문장을 다 마치기도 전에 도경의 손이 가운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밝은 불빛 아래서 도경에게 맨몸을 보여줄 자신은 아직 없었다. 어떻게든 앞을 가려보려 가운을 움켜잡자 도경이 손을 멈추고 지한을 쳐다보았다. 싫어? 꼭 그리 묻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싫지 않았다. 좋아서 부끄럽고 좋아서 창피했다.
또 졌다. 지한은 양손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곧장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도경의 손에 아래가 잡혔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부위는 도경이 만져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부풀었다.
도경의 예쁜 손가락 다섯 개가 전부 그곳을 세우는 데에 쓰이는 과정은, 한 열 번 겪으면 나아질지 몰라도 아직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버티기가 불가능했다. 아무리 입술을 깨물고 있으려 노력해도 어디론가 조금씩 듣기 싫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한은 어쩔 수 없이 손등으로 입을 눌렀다. 그마저도 도경이 잘 문지르던 성기를 갑자기 손가락으로 튕겼을 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지만.
“왜 가려?”
아랫배에 붙어선 성기로부터 분출된 액체가 명치와 가슴팍으로 퍼졌다. 도경이 지한의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 시트 위로 던지며 물었다. 방금 상대를 사정시킨 사람치곤 차분해도 너무 차분한 말투였다.
“이상한 소리…… 낼까 봐.”
“들어보고 싶은데.”
“싫어요.”
“그래, 그럼.”
도경이 지한의 배 위를 마사지하듯 문질렀다. 피부에 묻은 정액을 손으로 다 닦아낼 기세였다. 손바닥에 가슴이 쓸렸다. 또 이상한 소리를 낼 것 같았다. 지한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한이 사정한 액체를 맨손바닥으로 거의 닦아낸 다음, 도경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골반을 더듬으며 지나간 손이 허벅지 안쪽을 한 번 꽉 잡았다 놓았다. 지한은 반동으로 다리를 접어 올렸다. 그대로 도경이 지한의 허벅지를 눌렀다. 사정 후 늘어졌던 몸과 정신이 동시에 위기를 감지했다.
“잠깐만요, 형.”
지한이 허리를 벌떡 세웠다. 거의 동시에 도경이 얼굴을 맞대왔다. 입술이 삼켜졌다. 도경은 지한의 타액을, 혀를 그리고 입 안을 전부 다 앗아갈 것처럼 강한 힘으로 빨아들였다. 곧추섰던 허리가 점차 힘을 잃었다. 도경이 지한의 어깨를 누르며 몸 위로 올라왔다. 아까와 비슷한 자세였다. 단, 이번엔 다리도 함께 접혀 올라왔다.
엉덩이 부근이 서늘했다. 몸이 접히며 그곳이 어느 정도 들린 탓이었다. 도경이 들린 엉덩이를 매만졌다. 더 뜨거워질 부위는 남아있지 않은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얼굴과 목은 포기한 지 오래라지만 이제는 허벅지에까지 뜨끈한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들어왔다. 뒤로. 쑥.
“헉.”
“힘을 좀 빼야 할 것 같은데.”
직접 보지 않아도 뒤로 들어온 것이 손가락임을 알 수 있었다. 손가락 말곤 그 좁은 곳으로 그리 수월하게 들어올 만한 신체 부위가 없었다. 지한은 정신을 붙들려 눈을 있는 대로 세게 감았다 떴다. 도경이 방금 뭐라고 한 것 같았는데.
“지한아.”
뭐라고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힘을 빼라고.”
지한은 머리통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도 몇 초간 도경이 뭐라고 했는지를 생각하느라 용을 썼다. 힘을 빼라고 했다. 힘을 어떻게 빼더라. 숨을 되는대로 많이 들이마셨다가 한꺼번에 내뱉었다.
잠시 후, 꽂혀만 있던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뒤로 남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향과 속도를 감지하는 경험은 그 어떤 다른 경험을 들고 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좋고 말고를 떠나서 그냥 비교 대상이 없었다.
이따금 구조를 탐색하려는 것처럼 여길 눌렀다, 저길 눌렀다 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지한의 뒤에 들어온 손가락은 대체적으로 좁은 곳을 최대한 유연하게 넓혀 놓으려고 하고 있었다.
지한이 별다른 불만 없이 잘 견디자 도경은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불편했지만 찢어지거나 베였을 때의 통증과는 완전 달랐다. 무언가를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부위가 벌어지느라 필연적으로 전달되는 이물감이 꼭 고통과 연결되진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던 행위가 끝났다. 마지막엔 셋으로 늘어나 있던 손가락이 다 같이 지한의 몸을 빠져나갔다. 도경이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지한은 죽이고 있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천장을 보며 누워 있으려니 허전했다. 조금 전까지는 도경의 긴 손가락이 세 개나 들어와 있었는데. 다음 순간 지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원래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곳에 고작 그것 잠깐 도경의 손가락이 들어와 있었다고 벌써부터 허전함을 느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경이 독특한 향을 몰고 돌아왔다. 어지간한 향수보다 더 강한 향을 가진 로션으로 뒤덮인 손이 다시 지한의 뒤를 파고들었다. 남의 손에 의해 미끈거리는 로션이 엉덩이와 그 사이에 발라지는 기분은, 역시 마땅한 비교 대상이 없었다.
버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도경이 제 손으로 직접 버클을 푼 것이었다. 지한에게 풀어달라고 부탁하는 시늉도 없었다. 괜히 섭섭했다. 섭섭함은 길게 가지 않았다. 남을 다 벗겨놓고 뒤를 손가락으로 쑤시기까지 했으면서 본인은 아직 버클 하나 안 푼 상태였다는 것이 괘씸해지려고 했다. 조용히 있기라도 하려고 입을 가렸더니 왜 가리냐고 묻질 않나.
“힘주지 마.”
손가락을 넣기 전처럼 허벅지를 눌러오는 힘에 몸이 접혔다. 아까보다 더 서늘해진 하체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손가락과는 굵기도, 딴딴한 정도도 그리고 온도도 천지 차이였다. 지한의 손길 한 번 타지 않고도 도경은 이미 제대로 섰다. 그것에 섭섭함을 느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지한은 알 수 없었다.
“아, 윽…….”
뒤로 밀려들어 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지한은 손등을 입에 갖다 댔다. 소리를 막아야겠다는 생각 없이도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도경도 마냥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입을 벌리고 작게 호흡을 고른 그는 지한의 허벅지를 더 세게 눌렀다.
“아으!”
이물감이 고통으로 발전하는 순간 단순히 가리는 수준으론 입에서 나는 소리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앓는 꼴을 두고 보던 도경이 손을 벌려 지한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픈 와중에 놀란 지한은 눈을 크게 떴다.
“들려주기 싫다며.”
양손으로 각각 지한의 허벅지와 입을 누른 채, 도경이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식은땀이 났다. 틀어 막힌 상태에서도 입이 벌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경의 손바닥에 남은 로션에선 좋은 향과 쓴맛이 났다.
빠른 적응 같은 것은 없었다. 점차 드나드는 속도가 일정해지고 있었음에도 식은땀은 멈추지 않았고 입은 닫히지 않았다.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가 더 아팠다. 어쩌면 그 반대인데 구분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지한은 빳빳해서 잘 잡히지도 않는 시트를 손톱 끝으로 긁어내렸다. 영혼을 걸고, 지한도 다는 몰랐다. 왜 이런 순간에 와서도 도경의 몸에 함부로 손을 못 대겠는지. 소리를 내서라도 고통을 절감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일단 도경의 손부터 치워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지.
도경이 지한의 입에서 손을 치웠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앓는 소리가 너무 커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지한은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하는 데 집중했다. 도경이 손을 치워주지 않을 땐 어떻게 해서든 소리를 내고 싶더니 막상 치워주자 변덕이 생겼다. 소리를 내고 싶은 것과 소리를 내고 싶은데 손을 못 치워서 힘들었다는 사정을 고백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아무것도.”
참을 수 없을 지경에 다다르면 소리를 내보내겠다는 것이지, 참을 수 있는데도 마음껏 신음하겠단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거나 시트를 쥐어뜯는 방법도 얼마 안 가 먹히지 않게 되었다.
움직임이 영 쉽지 않았는지 잠시 몸을 물린 도경이 지한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엉덩이가 들리는 시점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허리를 잡아오는 손길에 흥분했다면, 좁디좁은 부위를 끝까지 통과해 들어오기 가장 적합한 자세에서 오는 감각은 오직 고통뿐이었다.
“아! 아파, 형.”
더는 창피하지 않고 싶어 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덜 아프고 싶었다.
“아, 아으, 으…… 흐.”
어깨가 자꾸 움츠러들고 허리가 뒤틀렸다. 점점 격해지는 반응에 반쯤 나갔다 도로 들어오던 도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뒷머리가 한 움큼 잡혔다. 고개가 들렸다. 도경이 윗입술 아랫입술 할 것 없이 지한의 입술을 통째로 씹어댔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흘렀다.
입술을 뗀 도경은 그대로 지한의 머리통을 베개에 냅다 갖다 박았다. 숨통을 죽게 만들려는 건가 싶으면 머리채를 잡아 올려 공기를 마실 수 있게 했고, 팔꿈치가 쓸려 몸이 무너질라치면 입구에서부터 깊숙한 안까지를 단숨에 뚫고 들어와 경련하게 했다. 호흡이 좀 안정되는 것 같으면 곧바로 다시 베개에 고개를 박게 했다.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나중엔 진짜로 기절해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형, 나, 저, 조, 조금만.”
“조금만, 뭐.”
“숨, 숨 못 쉬겠어요.”
도경이 지한의 머리카락을 고쳐 잡았다.
“그만할까?”
놀리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또 몰랐다. 워낙 남들보다 예민하게 발달된 구석이 있는 남자라. 지한의 머리를 실컷 베개에 눌러놓고는 숨쉬기 힘들다는 한마디에 멈춰버릴지도.
“아니, 아니요.”
언제부터 차올라 있었는지 모를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타고나길 건조한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나왔다.
“그만하지 마요.”
눈을 빠르게 깜박인 도경이 이내 아하하, 하고 경쾌하게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그의 것이 꽂혀있는 뒤도 잘잘하게 같이 떨리는 듯했다.
“알겠어.”
잔뜩 세워진 이가 지한의 목덜미를 씹었다. 도경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잡은 머리카락을 내리눌렀다. 지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숨통이 트였다 도로 막힐 때마다 점점 더 누르는 힘이 더 세졌다. 코가 짓눌리고 입마저 압박당해 스스로가 내뱉는 뜨거운 숨결에 갇혔다. 괴로웠지만 괴롭지 않았다. 고통스럽지만 고통이 아니었다.
지한은 덜덜 떨었다. 죽고 싶을 만큼 좋아서,
살고 싶었다.
#56
불이 꺼진 방 안으로 빛이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차단되어 있던 의식을 깨운 것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침범한 빛일 수도 있었고, 묘하게 답답한 공기일 수도 있었다. 책상, 의자, 벽장문. 눈으로 가구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안심하려던 도경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방 안이 한눈에 너무 잘 들어왔다. 암막 블라인드와 문을 다 가진 방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의 존재 때문이었다. 한 면이 통째로 개방된 거실에서부터 돌고 돌아 방 안까지 들어온 빛. 문이 열려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상체를 일으킨 그는 바로 옆에 누워있는 지한을 발견하자마자 튕겨 나가듯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불에 얼굴을 반쯤 묻고 옆으로 누워 잠든 지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 일어나려면 먼 듯했다.
이미 침대를 벗어난 마당에 지한이 깨버렸다간 잠든 척도 못 할 것이었기에, 도경은 뒷걸음질 쳐 방을 빠져나왔다. 지한의 잠귀가 도경처럼 예민할 확률은 낮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지한이 늦게 일어날수록 도경에게 주어지는 시간도 늘어났다.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별다른 소음 없이 문을 닫는 데 성공했다. 그런다고 평화가 찾아오진 않았다. 정리되지 않은 식탁이 어젯밤과 똑같은 상태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로 가득 찬 잔 두 개. 하도 오랜 시간 주전자 안에서 잎을 우려낸 나머지 물감을 탄 것처럼 진해져 버린 차. 치우지도 않고 잠들었단 말이지. 전날의 자신을 패대기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주전자와 잔을 비워 식기세척기에 넣고 돌아서는데 식탁 아래 누워 있는 까만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밀어서 떨어트린 휴대폰이었다. 도경은 휴대폰을 주웠다. 액정이 멀쩡했다. 액정 보호를 위한 범퍼 케이스는 과연 지한 본인이 고른 것일까. 지한이 휴대폰을 부숴먹고 올까 걱정한 시우의 선택이었을지도.
그딴 것을 궁금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도경은 꺼진 화면을 건드렸다. 시간과 날짜를 알리는 대기화면이 떴다. 암전된 화면과 그리 차이나지 않는 시커먼 대기화면을 손끝으로 밀자 바로 배경화면이 떴다. 보안에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란 거야 알았지만 아무나 손만 대면 넘길 수 있는 대기화면은 인간을 너무 신뢰하는 처사였다.
부재중 20통은 하나도 빠짐없이 시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예상보단 적었다. 한 100통은 찍혀있을 줄 알았다. 메시지 목록은 누르지 않았다. 실수로 대화창을 눌렀다가 시우가 말을 걸어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휴대폰을 식탁에 올려두고 돌아서 찬장을 열었다. 약통들을 꺼내 차례대로 늘어놓았다. 남들은 모르는 그만의 순서가 있었다. 규칙은 별거 없었다. 왼쪽부터 크기가 큰 순서대로. 똑같은 통일 시엔 이름이 표기된 스티커의 색깔이 진한 것 먼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을까?
도경은 일렬로 늘어선 약통들을 노려보았다. 소현은 다 알았다. 도경의 진단명부터 처방받는 약의 종류, 그리고 그에게 가장 잘 듣는 약은 사실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제품이 아니란 것까지 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만만해했다. 자기 말곤 아무도 도경을, 이백몇십 일 내내 배에 품고 있던 황 원장조차 진심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기우일지도 몰랐다. 도경이 지한을 때리거나 위험한 약을 먹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한은 끝까지 싫다고 하지 않았다.
그보다, 싫다고 안 했으면 된 거잖아.
틀렸다. 자기변명이고 합리화였다. 소현은 소현이고 지한은 지한이었다. 도경이 먹는 약의 용도는커녕 약을 챙겨 먹어야 한다는 점조차 모르는 지한에게 난 환자고 너는 나를 거부하지 않았으니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약부터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렸다. 대여섯 알이 한꺼번에 식도로 꾸역꾸역 넘어갔다.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어째서? 답은 빠르게 나왔다. 적정선을 넘어선 스트레스가 관자놀이를 조일 때마다 큰 도움이 되었던 마음의 소리가, 오늘만큼은 거꾸로 그를 다독이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너는 환자야. 게다가 어차피 우지한은 네가 뭘 요구해도 좋다고 했을걸. 쟤는 멍청해서 죽었다 깨어나도 네게 무슨 이상이 있는지 눈치채지 못해.
딱히 틀린 내용은 아니었는데 어째 곱씹을수록 반발심이 일었다. 일단 지한은, 골프도 칠 줄 모르고 모든 술을 원샷으로밖에 마실 줄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지능이 딸리진 않는 것 같았다. 멍청하긴 지한보다 이안이 더 멍청했다.
주인의 사고를 간파한 마음이 돌변해 다른 의견을 냈다. 네 침대에서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있는 남자는 너를 좋아하잖아. 그런 사람을 이용하는 게 나쁘다는 정도는 인정하라고. 그러면 훨씬 편해질걸.
그러나 그마저 틀렸다. 이용하지 않았다. 도경도 좋아서 했을 뿐이다. 좋아서.
좋아서?
쾅. 복도에서 조심성 없이 현관을 닫는 소리가 났다. 마음의 소리가 끊기며 현실이 펼쳐졌다. 어제가 월요일이었다. 즉 오늘은 화요일이었다. 조금 전에 지한의 휴대폰으로 본 시간은 열 시가 넘어있었다.
“어머, 오늘 출근 안 하는 날이세요? 연락 왔는데 제가 못 봤나 봐요. 어떡해.”
“아닙니다. 출근하는 날이에요.”
“오후에 출근하세요?”
어쩌다 휴가를 낸 날이 아니고선 마주치기 힘든 청소도우미가 반갑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도경은 약통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신속하게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도우미에게 지한의 존재를 들켰을 때 도경에게 올 수 있는 타격은? 황 원장이 소개시켜 준 에이전시에서 나온 도우미였다. 그 부분에서 이미 위험천만했다.
“오늘은 그냥 퇴근하셔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하죠. 제가 집에서 해야 하는 일이 좀 있어서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회사에다가는 일 안 했다 그런 말 하지 마시고요.”
“저야 상관은 없는데…… 그럼, 빨래만 돌려놓고 갈게요. 건조는 어떻게 하는지 아시죠?”
“네.”
빨래를 하겠다면서 세탁실이 아닌 복도로 사라졌던 도우미가 금방 돌아왔다.
“들어오는데 이게 바로 보여 가지고. 어제 비 맞으셨나 봐, 아직도 축축하네.”
나름대로 깔끔하게 개려고 노력했을 옷가지가 차곡차곡 쌓여 도우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도경은 기다 아니다 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
정말로 세탁기만 돌려놓고 신발장으로 향한 도우미가 현관을 열고 나가기 무섭게, 도경은 어제 지한이 사용했던 손님용 욕실로 갔다. 자고 일어났을 때의 몰골이 봐주기 힘든 편은 아니라고 자부해왔건만 오늘따라 머리가 상당히 뻗쳐 있었다. 그 꼴로 지한과 아침 인사를 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다 끼쳤다.
머리 꼴 하나에 절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물로 대충 머리를 가라앉힌 후 새 칫솔을 꺼내 치약을 짜다 말고 깨달았다. 침대 시트. 지한을 밀어 침대에 눕힌 순간부터 요동치는 어깨뼈를 깔아뭉개듯 눌렀던 순간까지의 기억이 다 살아있는데 시트를 간 기억만 없었다. 왜냐하면 두 번째까지 잘 견뎌낸 지한이 너무 숨을 몰아쉬어서 진정시키려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다가 같이 잠들어 버렸으니까.
다시 말해 도경은 자신과 남의 몸에서 나온, 투명하지만도 깨끗하지만도 않은 체액이 묻은 시트 위에서 푹 자고 일어난 것이었다. 한때 황 원장에게 끌려나갔던 교회에서 외웠던 것도 같은 구절이 어제 본 듯이 뚜렷한 글씨체로 눈앞을 지나갔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더러운 것에서. 더러운.
도경은 칫솔을 입에 넣고 천천히 잇몸부터 닦아 내렸다. 발작할 것 없었다. 시트에 묻은 액체는 죄다 지한과 도경의 몸에서 나왔다. 그것 좀 몸에 묻히고 잤다고 죽지 않는다. 죽을 것 같다는 기분이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들지언정.
무단지각에 대한 변명은 메시지로 대체했다. 본가에서 기르는 개가 갑자기 아픈데 병원에 데려갈 사람이 없어서 도경이 왔다는 변명을 급조했다. 개를 세 마리나 키운다던 대리는 잘 쓰지도 않는 이모티콘을 남발해가며 안타까워했다. 물론 도경이 아니라 개를.
급한 불씨는 껐다. 이제 침실에서 잠들어있는 불덩어리를 깨울 차례였다. 깨우려고 들어가는 것이면서도 문은 조심조심 열었다. 도경 스스로도 파악이 안 되는 심리였다.
문이 열리건 말건 지한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숨이 막힌다고 울 땐 언제고, 자진해서 코와 입을 다 이불 안에 처박은 채로도 잘만 잤다. 딱히 편해 보이는 자세는 아니었다. 덮을 것 없이 추운 허허벌판에서 어떻게든 체온을 유지하려다 겨우 잠든 것 같은, 어딘가 불쌍해 보이는 자세였다. 얌전히 감긴 눈꺼풀이 낯설게 느껴지려다 말았다. 지한은 도경의 앞에서 얌전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도경은 바닥에 앉았다. 침대에 팔을 걸친 다음 그 위에 다시 턱을 괬다. 그렇게 하니 고개를 숙이거나 들지 않고도 지한의 잠든 얼굴이 잘 보였다.
졸렸다.
#57
이안은 코를 훌쩍였다. 눈물은 잠들기 전에도 그친 상태였는데 코가 어디서 자꾸 나오는지 신경질이 나서 펄쩍 뛰기 직전이었다. 소현이 봤으면 질색을 했을 짓이다. 네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러고 있어, 당장 안 일어나! 그 소릴 들었던 게 한 십 년 전이니 스물여덟의 나이로 이불 안에서 훌쩍거리는 꼴을 들켰더라면 말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등짝이라도 한 대 맞고 끝났겠지.
소현은 물론이고 엄마아빠한테도 안 맞아본 머리통을 생전 처음 맞아봤다. 지한에게. 상처는커녕 혹도 안 났지만 지한의 손바닥이 두피에 닿던 순간의 얼얼한 감각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다음번에 지한에게 더 두들겨 맞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약간 들긴 했는데, 그보단 도경에게 차가운 눈빛을 받을 걱정이 훨씬 앞섰다.
형 내가 잘못했어. 20년 동안 질리지도 않고 해왔던 대로 빌면 이번에도 해결되려나. 도경이 다정다감한 스타일은 아니라도 냉혈한은 아니었다. 이안이 회사를 똑바로 다니는지 신경 써주는 사람도 도경뿐이었다.
이번엔 사태가 좀 심각하지만…… 안 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매달릴 각오까지 했다. 진짜 잘못했으니까, 절대 사귀어 달라거나 한 번만 자 달라거나 아무튼 구질구질한 부탁은 안 할 테니까 용서해줘. 그러면 결국 받아줄 것이다. 머리채를 잡고 흔든 소현도 용서해준 도경인데 안 받아줄 리가 없었다.
러시아어로 도우미에게 뭔가를 말하는 무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숨이 막혀 찔끔찔끔 얼굴을 밖으로 빼는 중이었던 이안은 후다닥 이불을 들어 머리끝까지 덮었다. 보나 마나 또 이상한 러시아 수프를 가져와서 먹으라고 할 게 뻔했다.
“이안이 계속 그러고 있어? 아침도 안 먹고.”
“회사 안 가.”
“누가 회사 가래? 밥 먹어야지, 밥.”
한 번 덥다고 느끼고 나니 더는 이불 아래서 못 버티겠다. 이안은 이불을 치우며 일어나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문을 닫는 무영의 오른손에 그릇이 들려 있었다. 역하다고 하긴 뭐한데 향긋하다고 하긴 더 애매한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형 한국 여권 필요 없다면서 왜 밥 타령이야? 한국인이세요?”
“나 하프는 한국 사람 맞는데요?”
말을 말아야 했다. 이안은 손사래를 쳤다. 뭐가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수프는 먹지 않겠다는 의사를 알아들었는지 무영이 그릇을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엎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몰랐다.
“자. 이제 하루 지났으니까 말해야지.”
“뭘.”
“어제 왜 울었어?”
한숨이 나왔다. 언제는 내키겠냐마는, 빗속을 쏘다니며 울다가 추워서 결국 클럽으로 기어들어 간 지 열두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인 시점에서는 특히나 구구절절 설명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얼마간 기다리던 무영이 책상 의자에 앉아 발로 바닥을 밀었다. 의자에 달린 바퀴들이 드르륵드르륵 열심히 굴러 무영을 이안의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내 침대에서 안 나올 거면 말해야 돼.”
비에 쫄딱 젖은 몰골로 귀가했다간 질문 공세에 시달릴 것이 뻔해 무영에게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한 전날의 선택이 후회되려 했다. 그렇지만 어제는 정말이지 혼자 있기 싫었다.
“안 말하면?”
“쫓아낼 거야.”
“……밖으로?”
“거실로.”
이안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맞잡았다. 괜히 손톱을 한 번씩 눌러도 보고,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겹쳤다 다시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에 겹쳐보기도 했다. 하루 지나면 회복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형 말이 진짠가 봐.”
“어떤 말?”
“도경이 형이 우지한…… 한테 관심 있다는 거.”
사람들이 시우에게 관심을 보이는 에스더를 놀리는 동안 이안은 지한을 유심히 봤다. 무영의 말이 진짜라면 지한이 성질을 참지 못하고 술이든 잔이든 몇 개는 깨먹어야 정상일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지한은 전혀 난폭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예 반응이랄 것도 별로 없었다. 남들이 시우에게 뭐라고 하든 듣고 있기만 할 뿐, 끼어들어 말리려는 흉내도 내지 않았다.
“도경이가 그래?”
지한이 무슨 말이라도 한 것은 오로지 도경이 말을 거는 순간뿐이었다. 이안은 지한이 시우를 안타깝게 보기만 하고 도와주지는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쟤 도경이 형 앞이라서 저러는 거구나. 지한이 도경의 앞에서 잘 훈련된 개처럼 군다는 것이야 전부터 느꼈다.
“아니.”
반전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자꾸만 시우와 지한을 번갈아 보는 도경을 봤을 때, 이안은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도경이 지한을 녹여 마실 것처럼 굴어도, 골프장에 이어 생일 당일에까지 옆에 달고 왔어도 다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지점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려니 하고 넘겼다.
그 과정에서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실은 지한을 볼 때마다 점점 그 작은 얼굴을 어디 처박아버리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지는 중이었기는 해도, 도경에게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이 가장 강했기에 참고 또 참았다. 얼마 안 남았겠지. 기다리다 보면 끝이 나겠지. 언젠간 지한을 비참하게 버려주겠지.
그런데 도경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카드를 두 장 주겠다는 농담에도 수락하겠다는 소리 한 번을 하지 않는 시우와 입을 꾹 다문 지한 그 둘의 눈치를 다.
“이안. 나 봐.”
무영이 두 팔로 이안의 허벅지 양옆을 짚었다. 원래 남과 몸이 닿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는 사람이긴 한데, 이번엔 너무 가까워서 고개를 뒤로 빼야 했다. 이안이 엉거주춤하게 불편한 자세를 취하든 말든 무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도경이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그게 뭔 소리야.”
“걔 지금 눈에 뭐 이렇게…… 이상한 껍질 쓴 거야. 상태가. 그래서 우지한만 좋아 보이고 다른 건 다 나빠 보이는 거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려 목에 있는 대로 힘을 주었다. 머리론 알았다. 일이 꼬여도 완전 미치게 꼬였다. 도경이 회까닥 돌았다. 돌았으니 지한이 이안을 밀어붙이는데도 손 놓고 구경만 한 것이었다.
“말이 안 되잖아.”
“뭐가 말이 안 돼?”
“걘 소현이 누나랑 만나던 앤데, 어떻게 걔랑…… 내 말은, 어떻게 걔를.”
“어떻게 같은 여자랑 한 놈들끼리 좋아하냐고?”
“보통…… 그런 거 싫어하지 않나……?”
“너는 내 말을 정말 안 듣지?”
무영이 손가락으로 이안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소현이랑 도경이는 섹스 안 했다니까.”
이안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했다. 도경과 소현은 10대에 연인이 되어 20대의 끝자락에 이별했다. 현실적으로 못 해도 수백 번은 했다고 봐야 했다.
“그건 형 생각이지.”
“아니야. 내 말을 믿어. 안 했어. 그러니까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도경이는 소현이랑 안 했으니까 우지한이 괜찮고, 우지한은 도경이가 소현이랑 결혼할 사이였는지 모르니까 괜찮고.”
그럴싸했다. 무영이 하는 말마다 다 진실 같았다. 도경과 지한이 쌍방으로 동일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의 결론은 단 하나였다. 키스하고, 섹스하고, 좋아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이제 어떡해?”
다급하게 묻는 이안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 후, 무영이 침대에서 손을 뗐다. 의자에 등을 기댄 그는 다리를 꼬며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우지한한테 말해. 도경이가 소현이 남자친구였다.”
“싫어.”
“왜?”
“그런 짓 하면 도경이 형이 진짜로 다시는 나 안 볼 거야.”
아하. 무영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내가 말해?”
“그랬다가 형이랑 도경이 형이 영영 안 보게 되면 어떡해?”
“음, 그렇다면 나는 슬프겠지만 그래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을…….”
“말하지 마. 형, 안 돼. 진짜로.”
확실하게 말해두지 않으면 또 언제 사고를 칠지 몰라서 손을 내젓는 것으로 안 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 바람에 손등을 잘 가려주고 있던 소매가 팔까지 내려왔다. 무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손에.”
“응?”
들킨 것 같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무영에게 왼쪽 손목을 붙들렸다. 손등에 여러 갈래로 얇은 상처가 나 있었다. 건물 외벽에 던져져 눌리면서 얻은 자국이었다.
“여기 왜 이래.”
“아, 이건 어제…….”
“권도경이 이랬어?”
“아니! 도경이 형이 무슨, 아니야.”
“그럼. 우지한이 이랬어?”
무영의 손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냥 잡는 것이 아니라 압박하는 수준이었다. 이안이 팔을 비틀었다. 무영은 바로 놔주었다.
“뭐 하다 이렇게 됐어.”
할 말 안 할 말을 가려야 할 순간이었다. 화내는 일이 드문 무영은 그만큼 한 번 화가 나면 경찰이 와도 어떻게 할 엄두를 못 낼 정도로 난폭해졌다. 친구들에게는 그런 적 없었다. 무영이 도경에게 그렇게 폭력적으로 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랑 도경이 형이랑 있는데, 내가 도경이 형한테 막 뭐라고 해서…… 밀기도 해서, 우지한이 그거 보고 나 밀었어. 나 못 움직이게 하려고 손을 벽에 이렇게 했는데 그때 긁혔나 봐.”
“이게 다야? 다른 데도 맞았어?”
이안은 망설였다. 지한에게 머리통을 맞았다고 하기에 앞서 이안이 먼저 지한의 얼굴에 훨씬 더 큰 상처를 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가도 한편으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도경은 때리지 않을 무영이지만 지한이라면 경찰차가 도착할 때까지 놔주지 않고도 남았다. 지한이 맞아서 어떻게 되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지한을 본 도경이 이안에게 탓을 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건 싫었다.
“머리도, 한 대 맞긴 했는데…….”
“도경인 너 맞는 동안 뭐 하고 있었어?”
이불 안에 숨어 눌러놨던 감정이 울컥하고 역류했다. 도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안보다 지한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처럼 지한의 뒤에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도경이 형은 벌써 걔가 나보다 더 중요한가 봐.”
이젠 모르겠다. 도경이 이안을 탓하게 된다 해도 참을 수 없었다. 이안이 어떤 심정으로 지금까지 도경의 곁을 지켜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도경에게 붙어있는 지한을 아프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몸. 마음. 다.
“나 맞았는데도 가만히 있었어. 걔한테 뭐라고도 안 했어. 나, 유치원 다닐 때부터 도경이 형 말 잘 들었는데.”
어제 다 쏟아낸 줄 알았던 눈물이 또 눈가를 적셨다. 한 번 나오기 시작하자 눈만 깜박여도 새롭게 퐁퐁 솟아났다. 눈가를 닦아내다 포기한 이안은 아예 엉― 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더 하얘질 것도 없는 무영의 얼굴이 하얗다 못 해 시퍼렇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