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The Mount
#44
진료실 벽에 걸린 그림들의 피사체는 하나같이 인간이 아닌 것들이었다. 첫 진료 때만 해도 도경은 그 비인간적인 그림들이 환자를 시험하기 위한 도구라고 의심했다. 해가 세 번 바뀌는 동안 진료실 주인이 도경에게 그림에 관한 질문을 간접적으로라도 던진 횟수는 0. 없었다. 결백한 사람을 의심해 미안하다고 생각한 횟수는, 역시 0이었다.
“잠자는 건 좀 어떠세요. 약 바꾸고 나서도 계속 새벽에 깨세요?”
“네.”
전문의들의 진단에 따르면 도경은 꾸준한 관리를 요하는 환자였다. 남을 의심하여 망상하고 그 망상 속에서 의심의 근거를 찾는 것이 가장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도경이 결백한 사람 백 명을 의심하고 벽을 쳐 고립된다 해도 그건 다 병 때문이지 그가 악하거나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지금 보면 수면 패턴이 깨진 게 작년 겨울부터거든요.”
담당의는 머리 길이를 늘 어깨 위로 유지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도경을 맡게 된 두 번째 의사였다. 첫 담당의는 대학병원 과장을 지냈던 중년 남성으로, 황 원장처럼 의사가 많은 집안 출신이었다. 항상 여유가 넘치던 그는 도경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해에 돌연 귀향했다.
10년 넘게 도경을 봐준 의사가 교체된단 소식은 권 회장의 본색을 끄집어냈다.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주둥아리로 통하는 그는 의리 없는 새끼라며 의사를 욕하다 말고 갑자기 도경을 비난했다. 백날 치료해도 병이 안 낫는 게 다 도경의 탓이라고 했다. 남자답지 못한 새끼한텐 처음부터 여자 의사를 붙였어야 한다는, 어디서부터 정정해줘야 할지 몰라 정정할 엄두 자체가 나지 않는 논리도 펼쳤다.
권 회장이 물건을 집어던지기 시작하면 식구들은 물론이고 가사도우미와 기사까지 들러붙어 말려야 했으므로, 도경은 알아서 조용히 거실을 빠져나왔다. 평화를 위해 빠져주겠다는 뜻도 모르고 따라 나온 현경은 도경이 유난을 떤단 식으로 말했다. 아버지한텐 내가 잘 얘기할 테니까 빨리 들어와, 너 이렇게 가면 더 난리 나. 난리가 나든 말든 그건 남은 사람들 몫이었다. 현경은 나이 차 많은 동생이 상처받아 눈물이라도 글썽이길 기대하고 나왔을지 모르겠지만, 도경은 정말 권 회장이 시끄러워서 나온 것이었다. 권 회장에게 남자답다고 평가받든 아니든, 의사의 성별이 남이든 여이든 아니면 자웅동체든 관심 없었다. 어차피 도경은 정신과 의사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매번 처방만 받고 가셔서 한 반년 이상 상담 기록이 거의 없는 상태인데…… 올해 1월부터는 두통도 심해지셨고. 혹시 11월에서 1월 사이에 무슨 일 있으셨어요?”
도경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예의 바른 자세로 앉았다. 그는 소파처럼 푹신하고 큰 환자용 의자에 편히 기대어 앉아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선생님.”
몸이 늘어지면 마음도 긴장을 풀기 마련이라.
“사랑하세요? 남편.”
피사체가 인간 아닌 그림들만 걸려 있는 진료실엔 당연히 사진도 없었다. 가족관계 유추가 가능한 사진의 부재와 관계없이, 도경은 담당의의 결혼 유무를 알고 있었다. 첫 담당의가 현재의 담당의를 황 원장에게 소개하며 그랬다고 한다. ‘시집가지만 않았어도 며느리 들이고 싶었을’ 제자라고. 세상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자신감을 가진 인간들이 많았다.
“사랑하죠.”
다른 환자였어도 묻는 말에 대답은커녕 지극히 사적인 질문이나 던지는 꼴을 참아줬을지는 미지수였다. 속으로야 도경의 질문을 어찌 느끼고 있든, 담당의는 불쾌한 내색 없이 응대했다. 스승에게서 넘겨받은 데다 뉴스에도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권 회장의 친자식인 환자는 일반 환자와 같을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의사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아직까진 도경의 질문을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듯했다.
“처음엔 아니었어요. 절대.”
“그럼 뭐였어요? 처음에는.”
재깍 답변이 돌아왔던 첫 질문에 비해 두 번째는 곧바로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의사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은 아니었다. 평소엔 바쁘다는 핑계로 상담에 단 몇 분도 소비하지 않으려 드는 도경이 사랑이라는 비실용적인 주제로 대화를 시도하자 순수하게 놀란 것 같았다.
“그냥 친구였는데, 잘 맞았어요. 학교도 같고, 전공도 같고 거기다 취미도 비슷해서 둘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고.”
겹치는 반경과 분야가 많아서 자꾸 어울리다 보니 사랑하게 되었다는 소리로 들렸다. 즉시 공통분모가 많은 사람들을 꼽아보려던 도경은, 의식이 소현을 필두로 이안을 거쳐 무영까지 소환하자 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냥 친구하고도 할 수 있잖아요. 지금 말씀하신 것들 다.”
“그렇지만 친구하고는 같이 시간 보내면서 즐거워하고 끝이잖아요, 보통.”
“아. 친구랑은 섹스를 안 하니까.”
의사는 긍정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않았다. 성기능 문제로 내원한 환자도 아닌 도경이 섹스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하게 받아들여지기 좋았다.
“이런 얘기 불편하시면 그만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도경 씨가 방금 하신 말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하느라. 계속 말씀하세요.”
혹시 몰라서 의사의 표정을 몇 초 더 살피긴 했지만, 사실 여자들은 도경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황 원장은 도경이 소현 때문에 기가 눌려 모르는 것뿐이라 일축했다. 소현의 눈치만 보며 사느라 이성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부모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180cm 근처에만 가도 크다는 평가를 듣는 나라에서 그보다 몇 센티는 더 큰 키를 가졌음에도 이상하게 도경의 앞에서 말을 가려 하거나 행동을 조심하는 여자는 드물었다. 도경에게 피부과 타령을 하던 여자가 무영 앞에선 돌변해 다음 휴가지 추천을 해달라고 하는 식의 태세 전환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었다.
“친구랑 안 하는 걸 하는 게 사랑이면.”
여자들이 무영에게 성적으로 얼마나 끌려 하든 말든, 도경으로선 당장에 의사가 그와의 대화를 피하려 들지만 않으면 만족이었다. 섹스란 단어를 입에 올린 환자가 무영이었더라면 의사 역시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계속 말씀하시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성욕도 감정이에요?”
“음, 그렇다기보다도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라 제가 딱 잘라서 뭐라고 정의를 내릴 수는.”
“저는 지금 선생님 의견을 묻고 있는 건데요.”
처음 접하는 도경의 적극적인 태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던 의사는 프로답게 금세 태연한 얼굴을 되찾았다.
“저는 정말로 둘 다 가능하다고 믿어요. 저희가 살다 보면 몸이 닿으면서 없던 감정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 반면에, 감정으로 인해서 파생되는 욕망도 있잖아요.”
살다 보면. 도경은 전문의가 되기 위해 10년 넘는 세월을 투자해 의사의 말을 곱씹었다. 살다 보면 그렇다니. 누구나 응당 알아야 하는 것을 도경만 모르고 살았다는 말이 아닌가. 가장 참기 힘든 기분이 몰아쳤다. 바보가 된 기분.
“도경 씨가 지금 이야기하신 것들이 11월에서 1월 사이에.”
“아니요.”
도경은 최대한 부드럽게 의사의 말을 잘랐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그냥 궁금해서…….”
“요새 로맨스 영화를 많이 봤더니.”
진료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도경은 손가락을 눕혀 셔츠 소매를 털었다. 의사의 시선이 도경에게 오래 머물렀다.
***
생기 돋는 피부색을 가진 손이 빵을 세로로 찢었다. 먹물에 담가졌다 나온 것처럼 까만 빵은 올리브유 표면에 둥둥 떠있는 식초를 살짝 찍으려다 실패해 그대로 빠지고 말았다. 미련 없이 빵을 놔버리는 손에서 흉터나 그 비슷한 것을 찾기는 힘들었다. 손톱까지 깨끗한 손.
“짜증 나.”
현재 도경의 앞에서 빵가루를 털고 있는 손과는 톤부터 크기까지 상이한 지한의 손이 갑작스레 의식에 끼어들었다. 이안의 손이 얼마나 매끄럽게 생겼든 지한의 손만큼 뜨겁진 않을 것이다.
“아빠가 나 시말서 쓰래.”
오일에 빠진 빵을 건지지 않고 손을 거둔 이안이 투덜거렸다. 올리브유 종지는 도경이 뭐라고 할 것임을 너무 잘 아는 무영이 대신 테이블 가장자리로 밀어두었다.
“시말서? 왜?”
“자꾸 말 안 하고 지각한다고. 누가 일렀지? 아빠는 나랑 건물도 다르단 말이야.”
“때려치우고 나한테 와. 월급 더블해줄게.”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그들의 주변에 월급이 필요해서 일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 월급이 얼만지는 알아, 형이?”
“뭐 한, 삼백?”
무영이 이안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 밑으로 오면 하루에 삼백 벌 수 있어.”
“그렇게 말하지 좀 마. 변태 같아.”
“이래서 어른들이 자식새끼 열심히 키워 봤자 소용없다고 하는 거였어.”
도경은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티격태격하는 둘에게서 시선을 거둬 창밖을 내다보았다. 커피를 들고 걷는 회사원들, 백팩을 매고 학원으로 향하는 수강생들, 어째서 남들은 일하는 대낮에 데이트 중인지 모르겠는 연인들. 맑은 겨울 낮의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넘치는 활력을 뿜었다.
혹시 11월에서 1월 사이에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슨 일이 있었다. 소현이 죽었고, 지한을 만났다. 소현이 지한에게 선물한 것을 빼앗았다. 하나씩 다 뺏어 버리려고 했다. 직업도, 사람도 그리고 마침내는 볼 것 없는 삶을 이어갈 의지도.
“도경이 형.”
고작 100여 일이 지난 시점에 다다라 지금까지 온 길을 돌아보면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까지 화가 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응.”
그렇게까지는.
“어딜 그렇게 봐?”
도경은 말없이 이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부는 좋고 표정엔 그 어떤 근심 걱정도 없었다. 뺀질거린다는 인상마저 주었다. 몇 살이 되어도 또래보다 주름이 덜 생길 얼굴인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 걱정도 없으니까. 스트레스라곤 아빠가 쓰라는 시말서 정도가 끝이며 매일 밤 눈만 감으면 잠드는 인생.
조금은 부러웠다.
“그냥. 밖에.”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메시지 미리 보기로 거의 도경의 비서처럼 일하는 대리의 이름이 떴다. 목록으로 간 그는 직원과의 대화창을 지나쳐 스크롤을 내렸다. 일주일이 지나가는 사이 저 밑으로 내려간 대화창엔 새 메시지가 와있지 않았다. 새 메시지가 있었으면 상단으로 올라와 있었을 테니 당연했다.
잠을 푹 자지 못해 그런지 정신이 산만했다. 산만한 정신으로도 도경은 꾸역꾸역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메시지는 도경이 지한의 휴대폰으로 찍은 향수 사진이었다. 찍자마자 전송한 것이니 벌써 5일째였다. 장장 13일간 연락이 끊겼을 때보다야 나았지만 뭐가 뭔지 보이지도 않는 사진을 주야장천 보낼 땐 언제고 주말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는 것은 약간 괘씸하게 여겨졌다.
자꾸 흐려지려는 문제의 본질을 되새겨야 했다. 어째서 계속 자존심을 세우지 못해 고통받는단 말인가? 도경은 지한과 달콤한 연애를 하는 중이 아니었다. 나중에 가서 뭘 하든 일단 지금 당장은 지한이 도경에게 흠뻑 빠져 탈출할 시도도 않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므로 며칠째 소식 없는 지한에게 먼저 연락을 넣는 일은 필수였다. 지난번처럼 지한이 먼저 연락해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스트레스받는 초보의 실수를 되풀이할 필요가 없었다.
도경은 휴대폰 카메라를 켜 테이블을 비췄다. 아직 샐러드도 나오지 않아 찍을 만한 것이라곤 빵 바구니뿐이었다. 각도를 어떻게 틀어도 이안의 손이 나왔다.
“손 치워봐.”
“손? 어떻게. 이렇게?”
“카메라에 안 나오게 치우라고.”
촬영은 한 번에 그쳤다. 전시 목적으로 찍은 사진이 아니니 흔들리지만 않았으면 됐다. 이안의 손이 나오지 않은 사진을 건진 도경은 대화창으로 돌아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도경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난 뒤에도 이안은 손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꾸물거렸다. 이안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친 무영이 도경을 수상쩍은 눈초리로 보았다. 창밖 풍경을 구경하다 대뜸 식전 빵 사진을 찍는 흐름이 뜬금없을 만도 했다.
“취미가 사진 찍는 걸로 바뀌었어? 이제 오토바이는 굿바이야?”
“취미 아니야. 둘 다.”
“너 프로필 사진 바꿨던데. 그거 향수 맞지?”
“어.”
“네가 샀어?”
도경의 프로필 사진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무영과 딴청을 피우는 이안. 안 물어봐도 어떻게 된 것인지가 뻔했다. 이안의 궁금증을 무영이 대신 해소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안이 물어봤다간 도경에게 면박을 들을까 봐.
“아니.”
“그럼? 누가 줬어?”
“알아서 뭐하게.”
“친구한테 그런 것도 말 못 해줘?”
무영이 대신 물어봐 준다고 해서 도경이 순순히 다 대답할 것이라 예상했다면 완전히 틀렸다. 무영의 마지막 질문을 무시한 도경은 또 다시 밝아지는 화면에 휴대폰을 재빨리 집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새 메시지가 왔다. 발신자는 지한이었다.
[내 사진이나 이 사진이나 비슷한 거 같은데]
지루한 안부 묻기 대신 사진씩이나 보내줬건만 답변으로 사진에 대한 비판이 돌아왔다. 도경은 자신이 보낸 사진을 눌러 확대했다. 크게 보니 초점이 나가있기는 했다. 잘 찍은 사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지한이 괘씸하단 생각은 여전했다. 그런데 웃겼다. 사진마다 잘 안 보인다던 도경의 평가를 여태 마음이 담아두고 있다가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한 지한이, 그리고 그 유치한 짓에 발끈해서 사진을 확대해본 도경 본인도 웃겼다.
입 밖으로 소리가 나가는 줄도 모르고 웃던 그는 그대로 굳었다. 어느새 티격태격하는 것을 멈춘 무영과 이안이 도경을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체격도, 생김새도 닮지 않은 두 사람이지만 도경이 살짝 맛이 갔다고 의심하는 눈빛만큼은 쌍둥이처럼 일치했다.
도경은 헛기침을 하며 휴대폰을 엎어놓았다. 잠을 못 잔 탓이었다. 수면이 부족하면 피곤하고, 피곤하면 능률이 떨어졌다. 얼마든지 안 하던 짓을 해놓고도 몇 박자 늦게 자각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자고 나면 없어질 증상이었다. 분명히…… 아마도, 어쩌면.
제발.
#45
오토바이 시동을 끈 지한은 헬멧을 벗었다. 눌린 머리를 손으로 대충 털던 중 마침 옆을 지나가던 행인과 눈이 마주쳤다. 지한이 째려본다고 착각이라도 한 건지 화들짝 놀란 여자는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다 진짜 넘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했기에, 지한은 얼른 다른 곳을 보았다. 여자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아침 일찍 와본 적 있는 골목은 저녁이 다 된 시간에도 인적이 적고 조용한 편이었다. 약속 시간까지 5분가량 남아있었다. 며칠 못 일하고 관둔 술집이 옆옆 골목이었다. 지한을 회유하고 싶어 했던 마담과 마주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다. 먼저 스튜디오 안에 들어가 있을까 하다 그냥 도경이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마담이 힘으로 지한을 어쩔 수 있는 남자도 아니고, 마주칠 경우 반갑게 인사해주면 그만이었다.
며칠 전 무영의 친구라던 쇼핑몰 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바빠서 이제야 연락한다며, 지난번에 촬영한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 일회성으론 아쉬우니 혹시 정장으로 추가 촬영해줄 용의가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도경의 생일로부터 한 3일, 아니, 정확히는 4일째 되던 날 밤이었고, 그래서 확답 대신 조금만 생각해 보겠다는 거절 같은 답장을 보냈다.
현실적으로 판단하자면 한 번 더 촬영해달라는 제안에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짧은 술집 웨이터 경력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서비스직에 종사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게 만든 계기였다. 그 외의 일거리까지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런 데 쓰긴 얼굴 아깝잖아요.」
다만 도경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얼굴은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이 추가된 새 계약서에 사인하게 한 도경은 촬영이 끝나고 아침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그렇게 말했다. 얼굴을 이런 데 쓰긴 아까우니 아껴두라고. 딱히 심각하게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지나가듯 한 말이었을 텐데, 지한만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벌써 스물여섯이나 먹었는데 뭘 얼마나 더 아끼란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지한의 얼굴을 대단히 진귀한 명품 취급하는 느낌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도경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 설득력을 더하는 훌륭한 능력이 있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믿고 싶어졌다.
쇼핑몰 사장의 제안을 보류한 지 꼭 하루 만에 마치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도경에게서 연락이 왔다. 휴대폰 화면에 도경의 이름이 뜨자마자 반가워서 눌렀는데, 대화창으로 들어오고 나니 조금 기다렸다 눌렀어야 뭐라고 답장할지를 떠올리기에 더 적합한 선택이었을 것이란 깨달음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미 행동해버린 뒤였다. 메시지 옆의 1은 사라졌을 테고 도경은 답장을 기다릴 거였다. 성질대로라면 휴대폰을 확 집어던져야 했다. 실제로 아무 데나 집어던져 깨먹은 기기가 여럿이었다. 지한은 꾹 참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경이 사준 물건이었다. 부숴먹었다간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집중한 대화창에 뜬 것은 달랑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뭐가 더 올 줄 알고 기다려 봐도 대화창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웬 바구니에 담긴 빵 사진은 지한으로 하여금 어떤 기분을 가져야 할지 헷갈리게 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 다른 사람 같았으면 새끼, 로 끝났을 머릿속 문장은 대상이 도경이란 이유로 흐지부지 허물어졌다. 메시지보단 통화를 선호하는 남자가 직접 사진씩이나 보내준 걸 고맙게 여기기로 마음먹은 지한은 더 늦기 전에 답장을 보냈다. 그가 항상 그렇듯, 의식이 흐르는 대로.
[내 사진이나 이 사진이나 비슷한 거 같은데]
1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기에 바쁜가 보다 했다. 도경은 한 30분 후에 짤막한 네 글자로 답장해왔다. [너무하네]. 지한은 다시금 빵 사진을 받았을 때처럼 아리송한 기분에 빠졌다.
너무하다니. 화가 난 건지, 농담을 하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다른 문제였다면 친구 많은 시우에게 조언이라도 구했을 텐데 이건 그러기도 불가능해 더 답답했다.
도경의 심사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도움을 요청하는 데엔 깨나 많은 용기가 요구되었다. 도경이 퇴근해 이동하고도 남을 시간을 충분히 기다린 뒤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도경이 한 번만 더 스튜디오에 함께 가준다면 세 번째부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처음 보게 될 사장이 얼굴까지 나오게 촬영하자고 할 경우 지한보다는 도경이 훨씬 더 훌륭하게 에둘러 거절할 터였다.
뭐가 됐든 지한은 혼자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잘 안 됐다. 술집이야 계약서도 없고 하는 일도 빤하지만 촬영은 완전 다르지 않은가. 사인. 조항. 계약. 백날 들여다봐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해도 좋다는 허락, 혹은 하라는 지시가 있어야 의지가 생겼다.
[당연히 같이 갈 수 있지]
흔쾌히 함께 가주겠다고 해서 기뻤는데, 막상 도경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도둑질한 놈처럼 두근거렸다. 도경을 볼 마음의 준비가 아직 다 되지 않았다.
지랄. 마음의 준비 같은 소리. 그와 링에 올라 글러브 낀 주먹을 휘둘렀던 체육관 친구들이 알면 역겨워할 속마음이었다. 어차피 시우와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는 놈들이라 하나둘 나가떨어져서 이제는 호스트 업계의 큰손을 꿈꾸는 레오 정도밖에 안 남았지만.
「왜 말을 안 해.」
뒷머리를 세게 잡아당기던 손길이 생생했다. 손길과 닮지 않은, 나긋하게까지 들리던 음성도 똑똑히 기억났다. 확실히 그 순간의 공기는 편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았고, 어떤 면에선 약간 거칠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폭력은 아니었다.
폭력에 관한 한 지한은 무지하지 않았다. 폭력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기준은 고통의 여부였다. 도경은 지한을 아프게 하지 않았다. 비록 당겨진 머리카락이 불편했고 벽에 부딪친 머리통이 얼얼해지긴 했어도 그걸 고통이라 부르긴 힘들었다. 지한이 그만하라는데 도경이 억지로 계속한 것도 아니었다. 일단 지한 자체가 싫은 걸 참고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너는 뭐, 어쨌다는 거야.」
아무래도 도경은 스킨십할 때 자기 맘대로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그와 연인들 간에 이루어지는 행위를 주고받게 된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세 번이었다. 세 번 다, 도경은 지한을 자꾸 어디로든 밀거나 누르려 들었다.
평소엔 그렇게 다정하면서. 오히려 그래서일 수도 있었다. 하도 모두에게 방긋거리면서 잘해주며 살다 보니 본인의 스트레스를 풀 데가 마땅히 없어서. 스트레스가 많을 만도 했다.
첫인상에서부터 감지하지 않았던가. 그 정도로 틈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속이 일반인의 열 배쯤 미쳐 있기 쉬웠다. 소현의 물건 집어던지는 습관에 비하면 도경의 성벽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도경이 지한을 때리려 든 것도 아니니까, 조금씩 거칠게 구는 것 정도는 받아줄 수 있었다.
문제라면 다른 데 있었다. 지한만 못 볼 꼴을 보였다. 버클은 물론이고 지퍼까지 내려간 지한의 앞에서 어디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차림으로 서있는 도경을, 그리고 그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을 봤을 땐 사정한 직후의 여운이고 나발이고 까무러칠 뻔했다. 결벽증 환자처럼 손을 씻어대던 도경이라 더했다.
지한은 급히 식탁 위의 티슈를 뽑아 도경의 손을 덮었다. 그 와중에도 도경의 손에 꼼짝없이 공간을 내줬던 속옷이 제대로 되어있는지 확인할 정신머리는 남아있는 자기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바지.」
대충 닦아낸 휴지를 손안에서 구기는 지한에게 도경이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다. 바지? 지한은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속옷이 입혀져 있는지만 확인하고 지퍼를 잠글 정신머리까진 없었던 탓에 앞이 다 열린 채였다. 옷을 헐렁하게 입는 편이 아니라 그나마 바지가 흘러내리는 없었다.
도경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직접 지한의 지퍼를 올려주었다. 지퍼가 다 올라간 다음엔 버클도 잠가주었다. 쪽을 줘서 죽이려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지한의 앞섶을 다 잠가놓은 도경은 만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낯빛으로 웃었다. 희고 갸름한 얼굴에 연한 분홍빛이 돌았다. 혼돈 그 자체였다.
이럴 땐 많은 사람들과 연애하고 섹스해보지 못한 여태까지의 삶이 원망스러웠다. 그랬다면 도경이 그냥 특이한 성벽을 가졌을 뿐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지 점치기 조금은 더 수월했을 텐데.
그런데 도경은 몇 명과 자봤을지.
가장 그럴싸한 답은 한 명이었다. 다른 사람이 좋아져서 도경을 떠났다는 그 상대가 유일한 연인이었다고 했으니까. 오래 사귀었으니 당연히 잤다고 봐야 했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목을 누르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을 이미 체험해봤음에도, 침대 위에서의 도경이 어떤 모습일지는 100프로 확신이 안 갔다. 누가 아는가. 침대에 갈 때까진 실컷 밀어붙이다 막상 누워선 부끄러워할지. 자긴 이제 모르겠으니 너 알아서 하라고 할지.
볼이 확 뜨거워졌다. 보는 이는 없다지만 밖인데 너무한 상상을 해버렸다. 아무렴 좋았다. 도경이 점점 더 격해지는 섹스를 좋아하든,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에게 바통을 넘기는 타입이든. 지한의 위에 올라타든 아래에 눕든 괜찮으니까.
또 만져줬으면 좋겠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도경의 환영을 겨우 떨쳐내고 휴대폰을 봤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사이 5분이 다 지났다. 운전 중엔 조수석으로도 눈길을 잘 안 주는 도경이 메시지를 보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대화창을 눌렀다. 역시나 새 메시지는 없었다.
대화창을 나가려던 지한은 바뀐 도경의 프로필 사진에 시선을 빼앗겼다. 지한의 휴대폰으로 찍은 향수 사진이었다. 몇 번을 봐도 놀라웠다. 고작 몇만 원짜리 향수가 양옆으로 문이 열리는 양주 박스와 반지르르한 가죽 신발을 젖히고 채택되다니.
뒤쪽에서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번호까지 외운 도경의 차가 능숙한 솜씨로 비좁은 주차구역에 들어갔다. 까만 자동차 표면이 반질거렸다.
“안에 들어가 있지 왜 밖에서 기다렸어.”
차에서 내린 도경이 지한에게 걸어왔다. 회색 바지에 감싸인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코트 자락이 살짝살짝 펄럭였다. 오늘은 와인색 코트였다. 두 번 가본 도경의 집엔 방이 엄청 많았다. 볼 때마다 바뀌는 옷을 다 수용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큰 옷장을 가져야 하는 건지 짐작도 안 갔다. 언젠가 한 번쯤 구경하고 싶었다.
“별로 안 추워서…….”
“그래?”
도경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살폈다. 추운 겨우내 훤히 드러나 있던 목이 꼭 사슴 같았다. 사실 사슴 목이 어떻게 생겼는지 진지하게 탐구해본 적은 없었다. 흔히들 도경처럼 목이 가늘고 예쁜 사람을 가리켜 사슴 같다고 하니까. 일종의 세뇌 효과로 떠오른 비유였다.
“진짜네. 오늘 날씨 따듯해.”
한 사람이 다정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존댓말과 반말은 그리 큰 영향력을 가진 부분이 아님을, 지한은 도경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말만큼, 아니, 어쩌면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태도였다.
입으로 내뱉는 말에 어떤 눈빛과 손짓이 따라붙느냐에 달렸다. 무슨 말을 하는 순간에든 도경은 예의 바르고 나긋했다. 그냥 숨만 쉬고 서있어도 똑같겠지 싶었다. 흥분했을 때 빼고는.
스튜디오 안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너저분한 상태였다. 첫 방문 때와 같은 멤버에 한 명이 추가되어 있었다. 지한을 보자마자 악수부터 청해온 여자는 자신을 사장이라 소개했다.
“김무영이 끝까지 안 한다고 해서 아쉬웠는데, 지한 씨 사진 보니까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어. 진짜로. 놓친 게 아니라 겟한 느낌. 뭔지 알지.”
무영의 친구라더니 진짜 그 또래로밖에 안 보였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그 나이에 벌써 스튜디오까지 따로 있는 쇼핑몰 사장이라고 하니 초면부터 몇 년 알고 지낸 사이 대하듯 친근하게 구는 것도 수긍이 갔다. 온 세상이 제게 호의적이라면 단지 모르는 사람이란 이유로 경계하는 습관이 들어있지 않을 테니까.
“거봐요, 사장님. 실물은 더 좋죠. 머리만 좀 정리하면 바로 화보 찍어도 될 것 같지 않아요?”
“맞아, 맞아. 표정이랑 시선 처리는 좀 연습해야겠지만.”
“얼굴 나가면 안 해요.”
당사자를 세워둔 채 품평회를 여는 사장과 직원에게 도경이 찬물을 끼얹었다. 사장은 전혀 민망해하지 않았다.
“알아요. 그냥 넘어가기 아쉬워서 떠본 거야. 그쪽이 도경이?”
도경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랬다 곧바로 펴지긴 했지만, 결코 심기가 편해 보이진 않았다.
“어우, 죄송. 도경이래. 무영이가 하도 도경이, 도경이 그래서.”
풀리는 것 같던 도경의 표정이 도로 냉해졌다. 사장이 도경의 표정을 더 굳혀놓기 전에 직원이 끼어들었다.
“근데 오늘은 김무영 씨가 안 보이시네요, 그때는 같이 오셨었는데.”
“내가 몇 번을 말해? 걘 한국 여자한테 관심 없다니까. 지한 씨는 여자친구 있어요?”
“아니요.”
“남자친구는?”
여자친구가 없다는 남자에게 연달아 남자친구의 여부를 묻는 흐름, 한국에서는 결코 쉽게 접할 수 없었다. 어쩌다 주제가 무영에서 지한으로 흘러왔는지 모르겠다. 지한은 작게 말했다.
“어……. 없어요.”
“그럼 지금 FA야?”
“계약서 볼 수 있을까요?”
사장의 말을 자르는 도경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몰랐다.
“네, 여기. 지난번 계약서랑 같은데 금액만 좀 바뀌었어요. 무영이가 자기 아는 사람이니까 좀 더 주라 그래서.”
도경이 조용히 웃었다. 억지로 웃네,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하던 지한은 놀랐다. 독심술사도 아니면서 남이 진심으로 웃는지 억지로 웃는지를 확신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하지만 아무리 낯설어도 보이는 걸 안 보인다고 우길 순 없었다. 무영을 언급하는 쇼핑몰 사장에게 도경은 분명 억지웃음을 지었다.
첫 촬영과 비슷한 절차가 이어졌다. 사장이 보고 있어 그런지 셔터 소리가 곱절은 더 들렸고 옷매무새를 만지는 직원의 손길은 훨씬 더 꼼꼼했지만 지한은 딱히 더 할 것이 없었다. 사장과 직원이 사진을 확인하느라 촬영이 잠시 멈출 때면 멀찍이 앉은 도경이 뭘 하는지 볼 틈이 생겼다. 도경은 매번 휴대폰을 보거나 자판을 치느라 바빠 보였다. 어떤 때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럴 때마저 허리는 곧게 펴져 있었다. 잘 때도 정자세로 잘 것 같은 남자라 웃겼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고 옷을 갈아입으며 중간중간 도경이 잘 있는지를 훔쳐보는 과정이 되풀이된 끝에,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가뿐히 마쳤다는 느낌이었으나 막상 시간을 확인하니 여덟 시가 넘어있었다. 계약서에 사인할 때 말곤 줄곧 혼자 떨어져 앉아있어야 했던 도경에게 미안함이 들이닥쳤다. 저녁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지한이 사줄 수 있는 메뉴는 도경의 취향과 동떨어져 있을 것이란 문제가 존재하기는 했어도.
어떤 수단으로 보답하든 일단 데리고 나가려 후딱 옷을 갈아입고 나왔더니 도경이 사라지고 없었다.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갔다고 직원이 알려주었다. 듣고 나서 생각하니 스튜디오 사람들의 말소리 틈에 문 여는 소리가 났던 것 같기도 했다.
“쇼핑몰 말고 잡지 화보 생각은 없어요? 내가 아는 사람이.”
“감사합니다. 근데 가야 돼요.”
“꼭 생각해보고 연락해요, 알았지!”
끝까지 신난 사장을 겨우 떼놓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온 지한은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랐다. 업무 전화를 받느라 밖에 나갔을 뿐이란 걸 머리로는 알았다. 게다가 도경이 지한에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설령 화가 났더라도 혼자 가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아는 데도 간이 쪼그라들었다. 먼저 가버렸을까 봐.
유리로 된 건물 문 한 짝이 열려 있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말하는 도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물 밖으로 나간 지한은 뜻밖의 광경에 주춤했다. 도경은 혼자가 아니었다.
“뭐야, 진짜 둘이 같이 있었잖아.”
도경의 앞에 모르는 남자 셋이 있었다. 뒤쪽에 서있는 두 남자는 확실히 오늘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는데 맨 앞에 서있는 남자는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적 있었다. 어디였냐면.
“얘네 골 때리네.”
그 남자였다. 지한과 서비스직의 악연을 뼈에 새겨준, 사과하고 싶다면서 마담에게 명함을 남기고 갔던 진상. 무영과 아는 사이였더랬다. 도경과도 아는 사이일 거라곤 미처 생각 못 했다.
“성호야.”
도경이 한숨 쉬듯 나지막이 성호를 불렀다. 지한의 눈에 또다시 도경의 표정이 읽히기 시작했다. 지금 도경은 엄청 참고 있는 중이었다. 뭐든 간에.
“똑같은 말 하게 하지 말고 그냥 가라고.”
“아니, 근데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권도경 네가 쟤랑 대체 둘이 만나서 뭐해? 무슨 납골당 카풀이냐?”
“너 고등학교 졸업장도 돈 주고 샀어?”
“뭐?”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 대화가 하고 싶으면 약속을 잡으라고. 무식하게 굴지 말고.”
도경의 언어 선택이 격해졌다. 무식이라는 단어를 도경의 발음으로 직접 들을 날이 올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지한은 도경의 옆쪽으로 가 섰다. 도련님들끼리 격해져봤자 지한의 친구들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에 그칠 터였다. 그래도 지한의 뺨에 날아들던 성호의 손맛은 만만하지 않았으므로.
“너― 지난번부터 자꾸 학교 어쩌고 하는데.”
성호의 말끝이 떨렸다. 도경을 때리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는 넌 좋은 대학 나와서 뭐 하냐. 연예인 시중들잖아.”
연예계에 종사한단 소릴 참 어렵게도 돌려서 깎아내렸다. 그러고 보니 지한은 여태 도경의 직업도 모르고 있었다. 감정 조절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듯한 성호와 반대로, 도경은 차분함을 유지했다.
“한 번만 더 말할게. 오늘은 그냥 가.”
“난 쟤한테 볼일 있어서 온 거거든?”
성호가 지한을 턱으로 가리켰다. 애꿎은 도경에게 헛소리하는 꼴을 더는 못 봐줄 것 같던 차였다. 욕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만 그때처럼 또 때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사람을 치면 경찰서에 가고, 경찰서에 가면 지한은 무조건 불리했다.
도경이 보고 있어서 더 망설여졌다. 겁 없이 브랜디를 주는 대로 받아 마시다 잔뜩 취해 10대 1로 싸웠단 개소리를 해놓은 마당에 뭔들 못 보여주겠나 싶다가도, 아무리 그래도 남을 패는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절반도 마치지 못했을 때, 도경이 성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두 사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상대와의 거리가 근접할수록 기본기 실력이 중요했다. 중거리인들 도경에게 딱히 묘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도경의 앞에서 누굴 때리고 싶진 않았지만, 만에 하나 성호가 못 참고 손을 휘두를 경우 도경이 딱 한 대만 잘 피해주면 그다음부턴 지한이 해결할 수 있었다.
“네가 여기 와서 나한테 이러는 거 너희 아버지도 아셔?”
성호가 입을 벌렸다.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화가 난 나머지 절로 벌어진 듯했다. 지한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성호의 친구들로 추정되는 남자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네킹 노릇이나 하는 중이었다.
“아, 참. 지난번에 무영이한테 맞아서 코피 터진 건? 그것도 아직 안 들켰어? 너희 집은 잘못하면 야구 배트로 맞는다던데…….”
도경의 표정이 읽히는 데에 이어 이제는 목소리까지 자동으로 분석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표정과 다르게 이번엔 지한이 틀린 듯했다. 그의 귀는 도경이 성호의 화를 돋우려 얄미운 말만 골라 하는 것이라 왜곡해 듣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마침내 성호가 손을 움직였다. 기세에 비해 실제 동작은 의외로 약했다. 성호는 도경을 밀쳤다. 그나마도 넘어질 정도로 세게 밀진 않았다. 어쨌거나 도경의 몸이 밀려날 정도의 힘은 들어갔고, 실제로 도경은 뒤로 밀려났다. 언제 맞을지 몰랐으므로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지한은 성호의 팔을 붙잡았다.
“손대지 마.”
성호의 얼굴이 도경에게서 코피 어쩌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구겨졌다.
“이게 어디서 끼어들어. 너 내 명함은 어디다 갖다 버렸어, 어?”
팔을 휘둘러 지한의 손을 쳐낸 성호가 몸을 완전히 돌려 다가왔다. 태세 전환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성호는 도경보다 지한이 한 50배쯤 만만한 모양이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린 지한은 성호가 바로 앞으로 다가오자마자 멱살을 잡아 건물 벽에 밀쳤다.
“내가 너 무서워서 맞아준 줄 알아? 가게 다 때려 부술까 봐 참아준 거야. 너 같은 새끼들 꼭 나중에 다시 찾아가서 진상 피우니까.”
뒤에서 어어, 하는 남자들의 음성이 들렸다. 소리만 나고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경이 있으니 성호의 친구들도 함부로 뭘 어쩌려 들진 않을 것이다.
“근데, 나 이제 거기서 일 안 해.”
자신이 술이나 갖다 주는 놈한테 멱살을 잡혀 벽에 밀쳐졌다는 사실이 겨우 인지되는지, 성호가 지한의 손목을 꽉 잡았다. 결코 약한 악력은 아니었다.
“놔라.”
“나 이제 거기서 일 안 한다니까? 그래도 계속할 거야?”
“내 몸에서 손 떼라고!”
주먹이 날아들기에 얼른 뒤로 피했다. 허공에 주먹을 내지른 성호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그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준 사람은 도경이었다.
“하지 마. 그만해.”
뭔가를 참는 표정이긴 했어도 줄곧 차분함은 잃지 않던 도경이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성호는 듣는 시늉도 않았다. 오히려 더 날뛰었다.
“어, 이제 알겠다. 권도경 네가 이 새끼한테 시켜놓고 시치미 떼는 거지 지금. 지난번에도 네가 김무영한테 시켰지? 여우 같은 새끼.”
도저히 못 참겠다. 얼굴 뼈가 다 내려앉을 때까지 갈긴 다음에 옆구리를 걷어차 갈비뼈에 금이 가게 해주고 싶었다. 인간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염원을 담은 손으로, 지한은 성호의 얼굴을 때렸다. 퍽. 영화의 효과음과는 상당히 다른 둔탁한 마찰음이 고요한 골목을 짧고 굵게 울렸다.
“어, 야, 괜찮아?”
망했다. 새해 들어 더 어른스러워졌다고 자위하면서 지내던 중인데 다 틀렸다. 잘 판단해야 했다. 성호와 도경은, 친구까진 아니더라도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것 같았다.
호스티스들에게 써대는 액수로 보통 집안 자식이 아니라고는 예상했다. 도경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면 단순히 돈만 많은 것이 아닌 사람의 아들일 확률이 높았다. 한 대 맞은 이상 성호는 절대 물러서려 들지 않을 것이고 지한은 맞고만 있을 자신이 없었다. 어떡하지.
도경은 뺨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성호와 지한을 번갈아 보고만 있었다. 많이 놀란 기색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가장 본능적인 해결책이 최고였다.
지한은 도경의 손목을 낚아채 냅다 오토바이로 달렸다. 먼저 운전석에 앉아 도경을 반강제로 뒤에 앉히며 시동을 걸었다. 느슨하게 풀어져있던 도경의 팔은 오토바이가 튀어나감과 동시에 알아서 지한의 허리를 바짝 옭아맸다.
인간의 달리기론 절대 따라오지 못할 거리를 벌렸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브레이크를 밟았다. 도경의 팔이 허리를 하도 세게 조여서 더 달렸다간 남의 갈비가 아니라 지한의 갈비에 금이 갈 지경이기도 했다. 사이드 스탠드를 발로 차 오토바이를 비스듬히 세운 지한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 새끼 근데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온 거예요?”
뒷좌석에서 내려 땅을 밟고 선 도경이 머리통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뭔가, 그러니까…… 헬멧이 없었다. 급히 출발하느라 걸어뒀던 헬멧이 어디로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헬멧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는 것은 다른 말로 개판 나는 머리 꼴을 뜻했다.
“응, 그렇지 않을까.”
머리를 어떻게든 정돈해 보려고 노력하던 도경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평소에 워낙 잘하고 다녀서 그렇지, 지금도 전혀 너저분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흐트러진 머리가 그를 어려 보이게 했다.
“누가, 아까 그 쇼핑몰 사장이 말해준 거 아니야?”
“그 사람은 무영이랑만 친구지 다른 애들하곤 아는 사이 아닐걸.”
도경이 반복해서 흔들어댄 머리통을 똑바로 세웠다.
“아니, 그럼 우리가 거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
“잠깐. 가만히 있어 봐.”
남의 행색에 참견할 정신이 이제 좀 드는지, 도경이 지한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서너 번 지한의 머리카락을 빗으며 지나간 후에도 영 마음에 안 드는지 도경의 손은 계속해서 이마 위를 오갔다.
“됐다, 이 정도면 그래도…….”
말을 하다 말고 도경이 갑자기 풋,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몇 번 그러고 말 줄 알았던 도경은 어깨까지 들썩이더니 급기야는 눈이 안 보이도록 본격적으로 웃기 시작해 지한에게 걱정을 안겼다.
“왜, 왜요. 뭐. 왜.”
“너 머리 사자 같아.”
당신 머리나 걱정하라는 말로 현실을 일깨워줄 수도 있었지만, 지한은 애꿎은 머리만 헤집었다. 평소에 이를 드러내기는커녕 소리도 잘 안 내고 웃는 도경이 그토록 마음껏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줄어들기만 하고 멈추진 않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지한은 겨울의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날이 풀렸다고는 해도 계절에 마침표가 찍히긴 일렀다. 맨살을 때리는 바람이 하나도 따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