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Straight (18/38)

  18. Straight

#43

택시가 지한을 내려준 곳은 높은 담벼락이 제일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 건물 앞이었다. 집보다는 저택이란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에스더의 별장에 이미 한 번 가봐서 그런지 아무리 담벼락이 높아봤자 압도당한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보단 역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단 점이 불만이었다. 택시 뒷좌석에 타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 타는데도 그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지한이 헛짓거리를 할 때마다 잊지도 않고 찾아오는 목소리. 돈도 없는 게 어디서, 하고 비아냥대는 것인지 꾸짖는 것인지 모를 말투로.

도경이 대신 돈을 내줬던 택시는 그래도 한결 편했다. 시우나 지한의 주머니에서 나갈 돈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깟 몇만 원쯤 도경에겐 정말 무게 없는 액수일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풍스럽게 생긴 초인종 앞에 선 지한은 버튼을 누르는 대신 집에서 들고 나온 쇼핑백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집에 굴러다니는 쇼핑백 중 제일 깨끗해서 가지고 나온 백 안엔 도경에게 조금의 의미도 없을 그깟 몇만 원으로 산 선물이 담겨 있었다.

항상 좋은 냄새가 나는 남자니까 향수를 좋아할 것이란 추론에는 자신이 있었다. 지한의 자신감을 갉아먹는 걱정은 누구나 살 수 있는 향수를 과연 도경이 써줄까 하는 것이었다. 입고 다니는 옷만 봐도 취향이 도장을 찍어놓은 듯이 뚜렷하니 향에는 오죽 까다로울까.

어차피 뭘 골랐어도 도경을 만족시킬 순 없었을 것이다. 이안이나 무영 같은 도경의 친구들은 가능할지 몰라도 지한에겐 애초부터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그런 주제에 굳이 생일선물로 뭘 가지고 싶으냐고 물어본 이유는 휴대폰 기계값을 알게 된 순간부터 줄곧 도경에게 뭐라도 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지한을 눌러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없고 어쩌고 해도 몇백만 원짜리 기기를 받아놓고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원하는 선물을 묻는 질문에 생각해 보겠다던 도경은 그냥 밥이나 같이 먹자는 배려 넘치는 답장으로 지한의 기분을 더 거지같이 만들었다. 불쾌함을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구걸하는 거지가 된 것 기분.

혼자서 백화점을 가긴 처음이었다. 한 층이 통째로 화장품 코너인 백화점 1층에서는 건조하고 텁텁한 향기가 났다. 호흡을 수월하게 하는 냄새는 결코 아니었음에도 향기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신기한 공기였다. 도경과 잘 어울리는 공기로 꽉 막힌 공간에서 지한은 생애 최초로 돈 주고 향수를 샀다.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지금이라도 선물을 어디 숨겨놓고 빈손으로 들어가는 선택지가 존재하기는 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지한은 정신을 다잡았다. 남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빈손으로 가는 놈은 거지같은 게 아니라 거지 그 자체였다. 바로 버려질 운명이 점쳐지는 선물이라 해도 일단 들고 들어가는 것이 나았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속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도경이 지한의 선물을 써보지도 않고 버릴 것이라는 추측엔 신빙성이 없었다. 평생 궁전에서 나이프질만 하고 살았을 것처럼 생긴 남자일 뿐, 도경은 지한의 후진 오토바이 뒤에도 탔고 삼겹살 가게의 스펀지가 삐져나온 의자에도 털썩털썩 잘만 앉았다. 지한의 앞에서 재수 없게 군 적 없는 도경이 부정적으로 반응하리라 예측하는 것이야말로 재수 없는 짓일 수 있었다.

대문이 열렸다. 문턱을 넘은 지한은 주춤했다. 담벼락 안으로 들어오자 조금 전까지 막연하던 저택의 크기가 와 닿았다.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철창 닫히는 소리와 흡사했다. 괜찮아지는 줄 알았던 기분이 다시 처졌다. 혼자 오지 말 걸 그랬다.

―너무 멀면 같이 가요. 제 차 타고.

선물을 들고 무영의 저택까지 오는 과정에 강요는 없었다. 지한도 데리고 오라고 했다는 무영의 말을 전한 도경은 지한이 싫다면 친구들은 다른 날 만나겠다고 했다. 지한이라고 딱히 무영이나 그 옆에 세트처럼 딸려오는 이안을 보고 싶진 않았다. 다만 이번엔 도경의 생일이었다. 지한은 도경이 친구의 초대를 거절해야 하는 이유가 되고 싶지 않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

도경이 모는 차의 조수석에 편히 앉아 오는 길을 택하지 않은 데에도 다 나름대로의 변명거리가 있었다.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그렇지 도경의 생일을 축하하러 오면서 그의 차를 얻어 타고 오긴 좀 껄끄러웠다. 도경은 괜찮다고 할지 몰라도 지한이 싫었다. 순전한 자격지심이었다.

지푸라기처럼 생긴 겨울 잔디가 삭막해 보이는 마당을 지난 지한이 현관에 도착하자 알아서 문이 열렸다. 안에서 문을 열어준 사람은 웬 백인 여자였다. 젊어 보이는 여자는 말없이 머리만 까딱이고 돌아섰다. 여자가 사라진 거실에 혼자 남은 지한은 도경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경이 있었다면 지한에게 인사를 하러 와줬을 것이다. 집주인이 나타날 때까진 돌아다니지 않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거실은 썰렁했다. 사람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가구가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가구는 도경의 아파트보다 훨씬 많았다. 담벼락에서부터 나던 오래된 느낌은 실내가 더했다. 소파, 벽시계, 벽난로, 카펫, 테이블, 옷걸이 등 없는 것이 없는 거실을 저온으로 만드는 요인은 전체적인 색감이었다. 거실에 있는 모든 가구가 재를 뒤집어쓴 것처럼 흐린 색이었다. 테이블이나 소파 손잡이의 나무가 그나마 살아있는 색을 띠고 있었다.

붉은 기가 도는데도 회색으로 보이는 벽난로를 관찰하다 무심코 그 주변을 본 지한은 욕을 할 뻔했다. 벽 앞에서 모가지를 낮춘 채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엄청난 솜씨의 장인이 빚어낸 인형 아니면 박제된 진짜 동물이었다. 개라기엔 너무 컸고 늑대쯤 되는 것 같았다.

“오. 미안, 오래 기다렸어요? 개 줄 매놓고 오느라.”

현관 맞은편 방향에서 불쑥 등장한 무영이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로 던졌다. 언젠가 도경이 끼고 있다 벗는 것을 본 가죽 장갑과는 전혀 다른 작업 장갑이었다.

“아니요. 어떤 여자가 문 열어줘서.”

“나보다 잘생긴 사람한테만 열어주라고 했는데 안 되겠네.”

“예?”

지한이 반응하거나 말거나 신나게 킥킥거린 무영은 따라오란 말도 없이 거실을 빠져나갔다. 웃으라고 한 소리에 웃지 않는 상대 앞에서 나올 법한 민망한 기색은 잘린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만 황당해하던 지한은 무영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 전에 급히 따라나섰다.

“도경이 아직 안 왔어요. 뭐 무슨 전화 때문에 휴게소에 잠깐 들렀다고 아까.”

“회사 전화.”

“아. 그래, 회사 전화.”

앞마당과 다를 바 없이 황량한 뒷마당을 내다볼 수 있는 테라스와 연결된 방 안에는 예상대로 이안이 있었다. 창가 자리에 편히 앉아 무영의 말을 정정한 이안은 지한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고 허리를 폈다.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안의 경계심을 무시한 지한은 의자를 빼 앉았다.

“마실 거 뭐, 맥주? 와인?”

“아니. 됐어요.”

“필요한 거 생기면 이안이한테 부탁해요.”

테라스로 나간 무영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전자담배였다. 끝날 듯 말 듯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에 시선을 빼앗긴 지한에게 갑자기 이안이 말을 걸었다.

“프랑스 가서 마카롱 먹었어요?”

지한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어떻게 세우는지도 모르는 가시를 억지로 세우려다 일시적으로 돌아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 와중에 착실하게 대답할 준비도 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딱 한 번 타본 비행기의 목적지는 제주도였다. 국제선은 아직 타보지 못했다.

“아니.”

“그럼 네가 이게 어디서 났어요?”

겁을 먹은 것인지 비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화법을 구사한 이안이 손가락으로 쇼핑백을 툭 쳤다. 도경에게 어울리길 바라며 고른 향수가 담긴 바로 그 쇼핑백. 잠깐 테이블에 올려놓는다는 것이 담배연기를 구경하느라 아예 잊고 있었다.

“샀는데.”

“그러니까 이 마카롱을 어디서 샀냐고― 요?”

이안은 쇼핑백의 내용물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 자꾸 마카롱 타령을 하나 했다. 연한 파스텔 톤의 쇼핑백에 그려진 금박 그림이 뭔가 했더니 마카롱 가게의 로고였던 모양이다.

“그냥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가지고 온…….”

“네가 루브르에 갔었단 말이야?”

루브르라고 하니까 없던 기억이 되살아날 기미를 보였다. 파리에 다녀온 소현이 지한에게 뭔가를 가져다주면서 그 쇼핑백에 담아왔던 것 같기도 했다. 마카롱은 아니었다. 어쩌면 현금 다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아니고.”

100프로 확실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그 가설이 제일 유력했다. 시우가 지한 몰래 프랑스까지 갔다 왔을 수는 없으니.

백화점에서 준 백이 너무 작아 다른 쇼핑백으로 바꿨던 오전의 자신을 패고 싶어 하느라 지한이 잠잠한 것을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중이라 오해했는지, 이안이 머리통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아…… 루브르가 뭔지 모르나?”

지한은 허벅지 위에 놓인 주먹을 말았다. 암만 무식해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 이름 정도는 알았다. 그 안에 눈썹 없는 여자의 그림이 걸려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안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지한을 마주 보았다. 맑아 보이는 눈이었다. 뇌는 그보다 더 맑고 깨끗한 것이 틀림없었다.

접이식 문이 열리며 무영이 들어왔다. 그는 쇼핑백을 가운데 두고 대치 중인 이안과 지한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둘이 뭐, 눈싸움해?”

“두 살이나 어린 애랑 무슨.”

스물일곱, 해가 바뀌었으니 스물여덟이나 먹어놓고도 저렇게 초등학생처럼 군다니. 지한은 주먹을 느슨하게 풀었다. 초등학생과 싸우는 어른이 될 생각은 없었다.

무영이 스피커를 손보러 가느라 테이블에서 멀어졌다. 이안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이거 소현이 누나한테 받은 거지.”

그 말을 듣자마자 든 생각은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소현이 그 안에 담아서 줬던 현금의 액수를 들키기라도 한 듯이 수치스러웠다. 그런데 몇 초 더 버티고 있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돌아가는 꼴로 봐선 다들 소현과 지한이 남녀로 만난 줄로만 알지 돈이 오간 것까진 모르는 눈치였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법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소현이 줬던 선물을 재활용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다른 물건을 담아왔을 뿐이다. 비정상적으로 굴고 있는 쪽은 이안이지 지한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워. 속 편해서 좋으시겠어요.”

“너 왜 존댓말 했다 반말 했다 그래, 헷갈리게?”

“지금 나한테 너라고 그랬어?”

“뭐라 그래 그럼.”

형 소리 듣고 싶냐? 되묻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방엔 이안과 지한 말고도 무영이 있었다. 볼륨을 높였다 줄였다 하며 스피커와 씨름하느라 이안과 지한이 작은 소리로 나누는 대화를 듣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무영은 붙으면 피곤해질 상대였다. 첫 만남에서 파악 완료된 사항이었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지한처럼 무영이 있는 쪽을 살핀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속닥거렸다.

“솔직히 말해봐. 마카롱은 뭔지 알아?”

뭐라고 하든 맞받아쳐 줄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정작 지한의 입술을 타고 나간 것은 짧은 숨소리뿐이었다. 지한이 주먹을 잘 쓰게 된 데에는 부족한 말주변도 큰 몫을 했다. 말로 안 되는 사람들은 주먹이 평균보다 더 성급히 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야 상대를 빨리 닥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른다고 해도 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골프도 칠 줄 모르고 루브르도 모르고 예의도 모르니까 마카롱도 모를 수 있는 거지.”

거기까지였다. 지한은 벌떡 일어나 방을 두리번거렸다. 방 한편에 방치된 1인용 소파가 포착됐다. 그는 소파로 걸어가 그 위에 놓인 쿠션을 집어 들었다. 사이즈와 두께 모두 적당했다.

“그럼 너는. 훅이 뭔지 아냐?”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도경보다 더 살갑게 굴었던 이안이 왜 자꾸 지한에게 시비인지 아직까지는 다 알 수가 없었다. 도경의 친구고 뭐고 더 듣고 있다간 맨주먹으로 때려눕히고 싶어지리란 것만 알았다.

지한은 이안의 손에 쿠션을 억지로 들려준 뒤 얼굴 높이로 들고 있게 했다. 이게 뭔 미친 짓이냐는 속마음이 이안의 얼굴에 숨김없이 드러났다. 어쩔 수 없었다. 알아듣게 하려면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이안이 쿠션을 제대로 들고 있는지 확인한 지한은 바로 주먹을 날렸다. 반원을 그리며 옆으로 나간 주먹이 쿠션 정중앙을 때렸다.

“이게 훅.”

악 소리도 못 내고 떨어트린 쿠션을 내려다보던 이안이 황급히 시선을 들었다.

“훅은 이제 알고. 그럼, 스트레이트는 뭔지 알아?”

“알지.”

순간이동이라도 한 줄 알았다. 순식간에 이안의 뒤에 와 대답까지 대신 해준 무영이 쿠션을 주웠다. 스피커에선 더 이상 음악소리가 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는 우지한 씨는 복싱 배울 때 일반인한테 주먹 날리면 어떻게 되는지 안 배웠나 봐?”

지한은 갈등했다. 그냥 둘 다 패버리고 도경이 오기 전에 도망쳐 버릴까.

“형, 형. 아니야. 그런 거.”

주먹으로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얼빠져있던 이안이 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다.

“그냥 내가 혹이 뭔지 보여달라 그랬어. 그래서. 응, 그래서.”

유치원생도 안 믿을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정신이 다 돌아오진 않은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맨정신으로도 그따위 거짓말밖에 못 만들어 내거나. 이안의 어설픈 해명에 무영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혹?”

“응. 아니, 아니지 혹이 아니고 훅.”

“그런 거야?”

쿠션을 털어 빈 의자에 내려둔 무영이 지한을 향해 웃는 척했다. 어째서 웃는 척이라고 느껴졌느냐면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이제 지한은 도경이 오기 전에 무영과 이안을 패고 싶지 않았다. 도경이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단 생각만 간절해졌다.

“나는 둘이 진짜 싸우는 줄 알고.”

무영은 아무 일 아니었다는 듯 다시 스피커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제3자의 개입으로 지한을 더 상대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이안이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댔다. 지한은 지하철과 택시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여기까지 온 목적을 상기했다. 도경의 생일을 축하하러. 주인공이 오기도 전에 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정도 참을성은 있었다. 없으면 가짜로라도 만들어내야 했다. 스물여섯이나 먹었으니까.

덜 닫힌 문을 옆으로 젖히고 나왔다. 테라스는 추웠다. 점퍼를 벗지 않은 상태여서 버틸 만했다. 지한은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계단 중간에 걸터앉아 찬바람이나 맞다 들어가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이안이 나와서 볼까 봐 참았다. 마카롱 하나 가지고도 혈압을 오르게 하는 놈에게 계단에 앉는 꼴을 보였다간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랐다. 너는 그렇게 더러운 데도 앉으세요? 하는 음성이 절로 재생되었다.

도경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덜됐다. 왜 그런 친구들만 둬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원망스럽다가도, 어쨌든 친구들과 지한을 어울리게 하는 데 있어 거리낌 없는 자세에는 고마워해야 할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누군가를 소개시켜줄 때는 그만큼 그 누군가를 좋게 보고 있다는 속뜻이 숨겨져있지 않나…… 도경이 이안과 무영에게 지한을 소개시킨 것은 아니지만. 대충 그런 상황이긴 하니까.

테라스에서 내려온 지한은 황량한 뒷마당을 구경했다. 겨울이라 죽은 잔디색은 그렇다 쳐도 무영의 뒷마당엔 그 흔한 정원의 흔적이 없었다. 나무와 잔디를 제외하면 마당에서 보이는 물체라곤 돈 주고 앉으라고 해도 앉기 싫게 생긴 낡은 벤치 하나가 다였다. 벤치를 지나면 마당이 끝날 줄 알고 걸었는데 건물 옆에 계단이 나 있었다. 건물 자체가 언덕 위에 있기는 했다만 뒷마당에서 앞마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가진 구조는 특이했다. 지한이 저택의 구조에 대해 뭘 알겠냐마는. 적어도 상상과는 달랐다.

계단을 중간쯤 내려왔을 때부터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무영이 줄에 매어놨다는 개겠거니 하고 끝까지 내려오자 개의 목청도 덩달아 커졌다. 개 짖는 소리는 저택과 분리되어 있는 차고 안에서 나고 있었다. 셔터가 활짝 열린 차고 안엔 지한에게 달려들려다 실패한 개 이외에도 오토바이가 있었다. 열 대. 열다섯 대. 아니, 어쩌면 스무 대. 오토바이 개수보다 미니 전시장이 따로 없는 차고의 면적이 더 놀라웠다.

띵, 동. 대문 초인종이 외양과 어울리는 고전적인 소리를 내며 새 손님의 도착을 알렸다. 곧이어 철창 같은 소리를 내는 대문이 열렸다. 안 그래도 흥분해있던 개는 아예 펄쩍펄쩍 뛰어대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보폭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도경일까? 지한은 일부러 눈을 내리깔았다.

“지한 씨.”

고개를 들었다. 아까 지한이 밟고 지나간 잔디 위에 선 도경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 동작이 꼭 살랑거리는 무엇인가를 연상케 했다. 바람에 날려 흩날리는 가벼운 무언가.

“벌써 와 계셨어요?”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도경이 앞마당과 차고 앞을 잇는 짧은 계단을 내려왔다. 오늘은 캐러멜색 코트를 입고 나타났다. 무슨 색이든 다 잘 어울렸다. 도경이 지한의 눈앞에 대고 손을 저었다.

“지한 씨?”

또다. 살랑살랑.

“아. 어.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래도 저보다는 일찍 오신 거니까.”

그러면서 웃는 도경을 보고 있으려니 이안이 뜬금없이 물고 늘어지던 마카롱이 떠올랐다. 그 돈 주고 먹을 만큼 맛있단 느낌은 아니어서 두 번 사 먹진 않았지만 독특한 식감만은 기억에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바삭하게 생긴 뚜껑과 달리 씹자마자 폭신하게 부서지는.

미쳤나 보다.

지한은 난리 법석인 대형견에게 겁도 없이 손을 뻗는 도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카롱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미친놈들하고 시간 좀 보냈다고 그새 옮아서 정신이 어떻게 됐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성인 남자를 보며 마카롱이나 떠올리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 향도 아니고, 색깔도 아니고 식감에 비유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얘는 아직도 애기 같네.”

도경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짖기를 멈추고 꼬리만 흔들던 개가 하얀 손을 핥으려 들었다. 도경은 빨간 혀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개의 목덜미를 만져주었다. 개를 애기 같다고 표현하는 도경이라니. 신선했다. 도경과 동물을 주제로 대화해본 적은 없지만 털이 날려서 싫어할 줄 알았다. 지한은 도경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추운데 왜 나와 계셨어요? 담배?”

“아니, 그냥 안에 너무 더워서.”

“더워요? 마지막으로 왔을 때는 이 집 좀 추웠는데.”

당신 친구들이 열 뻗치게 해서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지한은 애써 입술 끝을 올렸다.

“이제 안 더워요.”

“그럼 같이 들어갈까요?”

이따 또 놀자, 얌전히 있어. 개에게 인사한 도경이 상체를 폈다. 지한과 들어맞는 눈높이가 새삼 놀라웠다. 식구 중 제일 크다고 했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도경은 컸다.

지한을 들여보내 줬던 백인 여자가 다시 나타나 문만 열어주고 사라졌다. 지한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무영이 올 때까지 기다렸었지만 도경은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러 걸었다. 도경을 따라간 지한은 무사히 조금 전 도망쳐 나왔던 방 앞에 도착했다.

도경이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뚝 멈춰 서리라 예상치 못했던 지한은 그만 도경의 뒤통수에 코를 박을 뻔했다. 도경을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원인은 금세 밝혀졌다. 경고 한마디 없이 무영이 터트려버린 폭죽이었다. 케이크에 딸려오는 수준의 작은 폭죽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터뜨린 폭죽을 아무 데나 집어던진 무영은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생소한 언어를 나불댔다. 그러더니 대뜸 도경의 양쪽 귀를 잡아당기며 해맑게 말했다.

“우리 도경이 올해에는 조금 더 착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주먹을 부르는 행동의 예시라고 해도 좋은 짓거리를 도경은 비폭력적으로 넘어갔다. 그가 보인 반응이라곤 무영의 손을 내치며 만지지 좀 말라고 쏘아붙이는 정도에 그쳤다. 지한이 도경의 뭐라도 됐다면 대신해서 손 떼라고 윽박지르는 일이라도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한은 도경의 뭣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닥치고 있었다.

“만지지 말라 그러면 내가 변태 된 거 같잖아. 나는 절대 그런 생각 안 했는데, 도경이는 내가 만지면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야?”

“지랄한다.”

무영, 도경 그리고 미처 터뜨리지 못한 폭죽을 손에 쥔 이안까지. 방 안의 이목이 일제히 지한에게로 쏠렸다. 이런. 도경의 맨살을 조몰락대는 무영을 스트레이트로 KO 시켜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냥 닥치고 있는 방식이 지한과는 영 맞지 않다는 근거였다.

거친 발음의 외국어 노래만이 네 남자 사이의 공기를 간신히 얼어붙지 않게 돕고 있던 그때, 유쾌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경이 웃는 소리였다. 평소엔 웃을 때도 조심하느라 손등으로 입까지 가리더니 하필 오늘따라 고른 치열이 보이도록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썩어들어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이안도 신경이 아주 안 쓰이진 않았지만 그보단 역시 지한을 물끄러미 보기만 하는 무영의 반응이 더 꺼림칙했다.

지한은 도경의 코트 소매를 잡아끌며 귓속말했다. 너무 웃지 마요. 거짓말처럼 웃음을 멈춘 도경이 고개를 반쯤 틀었다. 귓속말하느라 도경의 어깨 근처까지 와있던 지한의 얼굴과 도경의 얼굴이 최소한의 간격만을 유지한 채 근접해 있었다. 자칫하다간 코가 맞닿기 직전이었다. 고개를 더 뒤로 뺀 도경이 지한에게 귓속말로 화답했다.

“웃긴데 어떡해요.”

지한의 귀에서 멀어진 도경이 또 픽픽거렸다. 이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다. 무영은 자세부터 표정까지 별 변화가 없었다. 한국인의 표준과 많이 다른 색 눈동자가 이질적인 느낌을 증폭시키는 원인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됐든 도경이 보는 앞에서 볼썽사납게 굴어야 하는 빌미는 차단하고 싶었다. 지한은 도경의 소매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도경은 쉽게 끌려와 주었다.

거의 거실까지 뒷걸음질 쳐온 뒤에야 소매를 놨다. 목소리는 계속 낮췄다. 언제 누가 따라 나올지 몰랐다.

“그니까, 웃지 말라는 게 아니고 저 둘이 기분 나쁜 거 같은데. 계속 웃으면…… 아니, 근데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웃겨요?”

“귀여워서 웃은 건데요.”

“아?”

“귀여워서 웃었다고요. 지한 씨가.”

누가 입을 틀어막은 것도 아니건만, 지한은 할 말을 몽땅 잊었다. 양심에 손을 얹고 고백건대 귀엽다는 말은 시우한테서도 들어보지 못한, 그러니 앞으로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지한과는 상관없을 소리로 여기며 살아왔다.

“못 들으셨어요? 웃겨서 웃은 게 아니라 귀여워서.”

“알았어요. 알아들었어.”

식은땀인지, 아니면 정말로 체온이 올라가 나는 땀인지 모를 액체로 머리카락 속이 미지근해졌다. 귀엽단 소리가 좋고 싫고를 따질 겨를은 없었다. 내장이 일렁이는 기분을 감당하기에도 모자랐다. 예쁘게 생겼다고 하자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며 귀만 빨개져서 찬물을 마셔대던 고깃집에서의 도경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업보였다. 두 번 다시는 칭찬한답시고 주둥이를 함부로 털지 않기로 다짐했다.

도경에게서 그만 웃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둘은 방으로 돌아갔다. 무영은 제가 언제 표정 잃은 사람처럼 굴었냐는 듯 변죽 좋게 웃으며 커튼을 쳤다. 백인 여자가 케이크를 테이블에 내려두고 나갔다. 라이터 어디 뒀더라, 하는 무영의 중얼거림을 들은 지한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꺼낸 김에 초에 불도 붙였다. 이안의 표정이 또 썩은 과일처럼 문드러졌다. 묘하게 좋은 기분이었다. 누구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치고받는 경기엔 익숙해도 오직 눈치와 말, 그리고 행동으로 결정되는 승부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벌써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경이 소원 정해 빨리.”

무영이 불을 끄자 방 안이 동굴 안처럼 캄캄해졌다. 촛불이 도경의 얼굴에 명암을 드리웠다. 하는 말마다 싸가지 없는 새끼도 친구라고, 도경은 수줍게 웃어주었다.

수줍게, 라는 것은 당연히 지한의 망상이었다. 실제론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서 웃은 것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지한은 도경의 모든 동작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릴 필요가 있었다. 촛불이 꺼지며 방 안이 순간적으로 완전히 깜깜해진 틈을 타 허벅지를 세게 긁어내렸다. 아프기만 하고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멈추었다. 곧 국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아는 곡이 연주되었다. 다 큰 남자 셋이 어린애들의 영어 합창으로 녹음된 생일 축하 노래에 맞춰 박수 치는 시간은 딱 생각만큼 어색했으나, 직접 노래까지 부르는 것보다야 손만 움직이는 편이 훨씬 수월했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자마자 음악 재생을 멈춘 무영은 기어이 폭죽 하나를 더 터뜨렸다. 불을 켜고 나선 샴페인을 따겠다고 설치다 뚜껑으로 천장 조명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맞추는 상황도 연출했다. 그가 진짜로 하고자 하는 일이 생일 축하인지 분노 유발인지 헷갈렸다.

케이크를 자르기 전에 손을 씻고 오겠다며 사라졌던 도경은 꽤 긴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들려고 할 무렵 돌아온 그의 손이 빨개져 있었다. 손 닦는 데 무슨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나 했더니 내도록 손만 닦다 온 듯했다.

엉성하게 갈라지는 케이크를 보며, 지한은 도경이 손을 그토록 닦아대야만 했을 이유를 추렸다. 아무래도 개를 만져서 그랬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역시 털이 묻을까 봐 신경 쓰였던 것이다. 아무도 맞추라고 한 적 없는 이유를 맞췄다는 만족감이 지한을 뿌듯하게 했다.

몇 번째 등장인지 세기도 힘든 백인 여자가 생소한 음식들을 카트에 올려 방까지 대령했다. 한 명이 옮기기엔 수가 꽤 됐다. 접시라도 대신 받아 내려놓으려던 지한은 자신이 촌스럽게 굴었음을 깨닫고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무영과 이안은 여자를 아예 못 본 사람들처럼 무반응이었다.

차고에 묶여있던 개가 들어왔어도 그것보단 더 성의 있게 반응했을 것이다. 식기 세팅을 다 마친 여자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짤막하게 말한 도경이 유일하게 반응이랄 것을 한 사람이었다. 지한더러 예의를 모른다고 씨불이던 이안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놈이었다.

처음부터 넷이 먹기엔 넘치는 양이었다. 잘 안 먹는 남자가 둘이나 껴 있으니 더했다. 그나마 무영이 일반 사람만큼 먹었다. 도경과 이안은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사온 것이든 직접 만든 요리든 간에 준비한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더 먹어야 할 것 같았지만 지한은 그들을 따라서 일찍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 이거 구하려고 3일 동안 서울 투어했어.”

“맞아. 나까지 괜히 고생―.”

상황 파악 못 하고 입을 털려던 무영이 이안의 팔꿈치에 찔려 잠잠해졌다. 이안이 테이블 아래서 꺼낸 상자는 크기가 딱 신발 상자만 했다. 얼마나 귀한 물건을 사느라 3일이나 고생했다는 것일까. 보기도 전에 기가 팍팍 죽었다.

“열어 봐, 얼른.”

그러고 보니 테이블에 올려뒀던 지한의 쇼핑백이 자취를 감추었다.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봐도 지한은 손대지 않았다. 정황상 무영 혹은 이안이 어디다 옮겨놓은 것이었다.

“나 혼자 있을 때 열어볼게. 고마워.”

도경은 이안이 서운해할 틈도 주지 않고 상자를 발 부근에 놓았다. 멋대로 죽었던 지한의 기가 소심하게 고개를 들었다. 도경이 지한을 배려해서 선물을 열지 않은 것이야 아니겠지만, 그래도.

지한은 의자를 뒤로 빼는 척하면서 테이블 아래를 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들고 온 향수 상자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쇼핑백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누가 저걸 저기 뒀냐고 추궁할지 말지 고민하는데 도경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금 불러 세워 선물을 줬다간 지나친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크기부터 이안의 것과 비교가 안 됐다. 관심은 원치 않았다.

“나도 너한테 줄 거 있어. 보여줄게, 이리 와 봐.”

어딜 가려고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영이 다짜고짜 도경의 팔을 잡아끌었다. 약간 짜증 나 보이긴 했지만 도경은 무영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도경이 짜증 내려다 마는 모습을 오늘만 몇 번이나 봤다. 평소엔 생긋생긋 웃기만 하는 남자인데.

도경의 연적이 무영이라면 지한의, 연적이라고 하기엔 터무니없이 모자라고 아무튼 쉴 새 없이 성질을 건드리는 상대는 이안이었다. 김빠진 샴페인을 홀짝거리던 이안은 지한과 둘이 남겨진 자리를 피하려는 듯 일어섰다. 어딜. 지한은 이안을 앞질러 문가를 가로막고 섰다.

“너지.”

“뭐. 왜 이래. 뭐가.”

“내 선물 아래에다 처박아놓은 거.”

“그게 무슨 처박아놓은 거야? 내 선물도 거기다 놔뒀었는데.”

“너야, 아니야. 대답이나 해.”

이안이 주춤거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래봤자 도와줄 이는 없었다. 그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 나다. 왜. 뭐.”

“왜 남의 거에 손대.”

이안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도경이 형이 싫어하니까 그렇지.”

“뭘 싫어해. 쇼핑백을?”

“그 마카롱 가게를.”

한 번 들어서 이해하기 힘든 소리는 두 번 들어도 쭉 헛소리였다. 지한은 한쪽 다리에 힘을 빼고 팔짱을 꼈다. 겁 없이 깝죽대는 놈 중 대략 60프로 정도는 슬금슬금 물러나게 만드는 자세였다.

“왜?”

“더 물어보지 마. 도경이 형한테도 물어보지 말고 그냥…… 너는 입 닫고 있어.”

그리고 이안은 한 판 붙으려 드는 나머지 40프로에 속했는데, 그런 것치곤 전투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주먹에 자신이 없으면 욕이라도 잘해야 하건만.

“말은 못 해도 말 안 하는 건 잘할 거 아니야.”

전투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공격이 들어왔다. 어디까지 갔는지 무영과 도경은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지한은 이안의 가슴팍을 퍽 밀었다. 주먹으로 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손바닥에 힘을 실어 밀었을 뿐이다. 한 방에 테이블까지 밀려난 이안에게 바싹 다가선 지한이 말했다.

“계속 깝치면 아가리 찢어버린다.”

이안은 사색이 되어 더듬거렸다.

“아, 알겠어, 미안해, 알겠으니까 진정해.”

“그냥 하는 말 같으면 계속해봐.”

“아니야. 그냥 하는 말 안 같아, 안 같아요.”

참고 또 참은 지한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 향수 상자를 집어 들었다. 저 새끼는 때리면 안 돼, 절대 안 된다, 수없이 되새겼다. 이안은 있는 집 아들이자 도경의 친구이니까. 그래, 도경의 친구니까.

말소리가 들려왔다. 떠드는 목소리는 주로 무영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도경의 품 안에 긴 상자가 들려 있었다.

“내 말 믿고 이따 저녁에 한번 먹어 보라니까. 저 사람이 우리 엄마보다 훨씬 잘 만들어. 비린내 안 나.”

“나 이제 갈 거야.”

“벌써?”

왜 벌써 가, 자고 가. 무영이 덩치에 맞지 않게 콧소리를 내며 도경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무영에게서 벗어나는 도경이 하도 익숙하다는 얼굴이어서 오히려 지한이 내색을 하고 싶어졌다. 싫다는 사람을 왜 계속 만지는지 보는 지한이 더 스트레스였다.

“진짜 바빠. 회사에서 전화도 계속 오고.”

“여기서도 전화는 받을 수 있잖아. 같이 자자고 안 할게. 너 잘 방 많아.”

같이 자고 어쩌고 하는 말만은 비위가 상했는지 미간을 좁히며 옆으로 더 떨어져 선 도경이 지한에게 턱을 까딱거렸다. 제 쪽으로 오라는 동작 같았다. 지한은 반신반의하며 도경이 선 쪽으로 갔다.

“선물은 고마워. 네 생일엔 내가 저녁 살게.”

“정말 저녁도 안 먹고 간다고?”

“같은 말 그만 시켜.”

“그럼, 우지한 씨라도 더 놀다 갈래요?”

곱지 않은 눈초리로 친구를 쏘아본 도경이 홱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 향수 상자만 든 채로 도경을 따라나서려던 지한은 되돌아와 도경의 코트와 자신의 점퍼를 챙겼다. 밖으로 나가니 도경은 이미 대문까지 가 있었다. 운동과 거리가 멀게 생겨서는 걷는 속도가 엄청났다. 운동하던 시절에 비하면 반토막 난 폐활량으로 옷가지까지 들고 따라잡으려니 수월하지가 않았다.

지한의 도착에 맞춰 조수석 문이 열렸다. 결단코 그 차에 올라타려는 마음으로 따라 나온 것은 아닌데, 기다렸다는 듯이 열리는 문 때문에 타버렸다. 하지만 타고 나서 생각하니 차에 올라타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헐레벌떡 따라 나오진 않았을 것이란 자각이 들었다.

지한의 품 안에서 마구잡이로 구겨진 코트를 본 도경은 그제야 달랑 드레스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 자신의 상체를 보고 실소했다.

“어쩐지 춥더라.”

코트에 이어 지한의 점퍼까지 도경의 손에 의해 뒷좌석에 처박혔다. 데려다주겠다는 뜻이냐고 물어보기도 뭐했다. 지한은 괜히 벨트를 만졌다. 도경이 먼저 벨트 안 하고 뭐 하냐고 물어봐주면 편하겠다는 뻔뻔한 기대를 품고서. 차가 움직이며 벨트 미착용 알림음이 시끄럽게 울렸을 땐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 소리라도 나지 않았으면 끝까지 망할 벨트를 만지작대고 있었을 것이다.

후진한 도경의 차가 내리막길 위로 미끄러져 내릴 준비를 마친 바로 그 순간, 대문이 열리며 이안이 튀어나와 운전석으로 달려왔다. 도경의 입이 짧은 숨을 뱉었다. 창이 내려갔다. 창틀 위로 상자가 들이밀어 졌다. 도경이 나중에 뜯겠다며 보류한 이안의 선물이었다.

“선물 놓고 가면 어떡해.”

“아. 어. 그러네. 고맙다.”

“형 잘 들어가. 남은 생일 잘 보내고.”

“너도 출근하려면 너무 늦지 않게 올라가.”

“응. 아 그리고! 내일 점심 같이 먹을래?”

도경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고개가 완전 이안을 향하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든지.”

원하던 답을 얻었는지 빠르게 물러난 이안이 손을 흔들었다. 차가 언덕을 내려왔다. 창밖으로 허허벌판이 펼쳐졌다. 유치원생도 아닌 주제에 율동처럼 손을 이쪽저쪽으로 흔들어대던 이안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다 말고 흩어졌다. 싹수없는 새끼. 지한에겐 고갯짓으로도 인사하지 않았다.

안 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으리란 것쯤은 알았다. 도경을 자주 만날수록 딸려오는 새끼들도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꼴도 보기 싫으면 도경부터 안 봐야 했다. 그건 싫었다. 버티는 길밖에 없었다. 자존심 챙기자고 지하철에 택시까지 타가며 혼자 왔던 길이 다 부질없어졌다.

“그건 뭐예요?”

시내로 나온 차가 신호에 걸렸다. 조수석을 힐끔거린 도경이 물었다. 코트와 점퍼가 사라진 자리엔 향수 상자만 덩그러니 남아 지한의 무릎 위를 지키고 있었다.

“아, 이거…… 선물, 인데.”

“제 거?”

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경이 환하게 웃었다.

“지한 씨 얼굴 본 걸로 다 됐는데 저는.”

“진짜 별거 아니니까. 안 써도 되고. 그냥.”

“쓸래요.”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좋은데 부담스럽기도 했다. 도경의 태도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막상 뿌렸다 향이 도경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돼서 부담스러웠다. 그만큼의 의미나 있을까. 없어야 정상이고, 없을 것이 뻔했다.

신호가 바뀌며 차가 앞으로 나갔다. 도경의 시선이 정면에 꽂혔다. 저택에서부터 지한의 신경을 긁어대는 궁금증도 해소할 겸 질문을 던지기 좋은 기회였다. 적어도 차가 움직이는 동안은 도경의 시선을 받아내지 않아도 되니.

“저기 그 있잖아요.”

“네.”

“저 사람이랑 둘이 술도 마시고 그래요?”

“이안이요?”

“아니, 말고 외국인같이 생긴. 무영. 김무영?”

“아 무영이. 저희 둘이 술, 글쎄. 잘 안 마시는 것 같은데요.”

도경이 히터를 최저로 낮추었다. 아파트 보일러도 낮게 틀어놓는다고 했었다. 도경과 어울리는 습관이었다. 그는 추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

“지난번에 같이 술 마셨다고 했잖아요.”

“제가요? 무영이랑?”

“내가 전화했는데 호텔에 있었다고 그런 날. 술 마시다 나왔다 그랬는데. 그거 저 사람 아니에요?”

“아아, 그건 무영이 맞아요. 걔 귀국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아.”

“왜요?”

이상하게 들릴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물어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지한은 입 안을 세게 씹었다. 지금만큼은 도경이 히터를 아예 꺼버려도 상관없었다. 춥기는커녕 얼굴이 화끈거릴까 봐 걱정이었다.

“그 사람은 원래 그렇게 다른 사람을 잘 만져요?”

놀란 도경이 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쳐다보았다. 금방 다시 앞을 보긴 했지만, 쳐다봤다는 자체만으로도 그가 진짜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무영이 지한 씨 만졌어요?”

“아니, 나 말고…….”

그쪽이라고 하면 안 되는데. 도경 씨라는 소리도 하기 싫은 지한의 말끝이 절로 흐지부지 뭉개졌다. 상황을 이해한 도경이 별거 아니란 듯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걔가 친한 사람들한텐 원래 좀 그래요. 더 어렸을 땐 인사할 때마다 볼에 뽀뽀했어요.”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지한의 의구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친해서 한 짓이라기엔 도경을 대하는 무영의 태도가 이안을 대할 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지한은 말을 아꼈다. 그의 의구심이 증폭되든 말든 무영은 도경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다. 생일 축하해 준다고 불러서 케이크와 국적 모를 요리를 대접하고 선물까지 안겨주는.

지한이 입을 다물자 대화가 끊겼다. 새로운 주제로 곧잘 대화를 시작하는 도경이 오늘은 말을 걸지 않고 음악 크기를 높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피아노곡이었다. 마지막으로 도경의 차를 얻어 탔을 때 들은 곡일지도 몰랐다. 제목이 뭐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이제부터라도 좀 제대로 닥쳐보겠다 결심했다. 클래식 곡 제목 알아봐야 써먹을 데도 없었다.

꼴에 그래도 도경을 조금 더 잘 안다고 방해꾼들이 사라지자 긴장이 풀렸던지, 닥치는 데에 집중하던 지한은 그대로 깜빡 졸았다.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눈을 뜨자 창밖 풍경이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와본 적 있는 주차장이었다.

“지한 씨 어디 사시는지 몰라서 저희 집으로 왔어요.”

지한이 깬 것을 본 도경이 시동을 끄며 말했다. 이따 태워다 드릴게요. 지한은 조수석에 올라탔을 때처럼 일단 도경을 따라 내렸다. 이따 태워다 준다고, 그럼 지금은 집에 같이 올라가자는 건가? 멍한 상태로 느리게 머리를 굴리던 지한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잠이 깼다. 작은 상자 하나만 달랑 들고 있는 지한과 양팔로 외투 두 벌과 상자 두 개를 각각 든 도경.

“안 타세요?”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주저하는 속마음과 달리 몸은 이미 도경의 손짓에 따라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탄 후였다. 안 타냐고 묻기까지 했으니 아무래도 도경 역시 지한이 같이 집 안에 들어가길 바라는 듯한데, 문제는 왜냐는 것이었다. 지한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벌써 가냐는 무영에게 도경은 분명 바쁘다고 했다. 도경이 친구들과 빨리 헤어지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왜?

“이거 안에 뭐가 들어서 이렇게 무겁지.”

지한과 있으려고?

“……술?”

“역시 그런 것 같죠?”

그런 말도 안 되는.

다신 올 일 없을 줄 알았던 도경의 아파트는 두 번째로 방문하는 지한을 처음보다 조금은 더 따듯하게 맞이해주었다. 기분 탓이란 것을 알면서도 지한은 넓디넓은 아파트 바닥이 먼젓번보다 확실히 따듯하다고 느꼈다.

도경의 팔에서 쏟아지듯 내려온 상자 두 개가 아일랜드 식탁 위로 넘어졌다. 이안의 선물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무영이 준 선물은 식탁 위에 남았지만 포장을 하다 만 것인지 상자가 넘어지며 윗부분이 뜯어지는 바람에 내용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지한 씨가 맞았네요.”

포장지를 벗겨낸 도경이 허무하게 웃으며 지한을 쳐다보았다.

“한 잔 드릴까요? 위스키 잘 드시잖아요.”

그때는 당신이 주문해줘서 마신 거지 그게 뭔 맛이 있냐는 말이 나와 버릴까 봐, 지한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경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같이 마실 거면 줘요.”

그렇게 말하면 그냥 다음에 마시자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도경은 순순히 그래요, 하며 상자를 식탁 중앙으로 끌어다 놓았다. 다시 보니 일반적인 박스보단 가방에 가까웠다. 재질이 종이가 아니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해낼 능력까진 없어서 모르겠고, 어쨌든 가죽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위로 열리는 뚜껑 대신 금박 버튼을 중심으로 나뉜 형태의 가방은 도경이 버튼을 누른 상태로 밀자 여닫이문처럼 양쪽으로 열리며 진짜 주인공인 술병을 공개했다.

단번에 여는 방법을 알고 연 도경 앞에서 티 내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지한은 놀랐다. 감탄과는 거리가 있는 놀라움이었다. 참 별의별 것에 시간과 능력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배움이었다.

위스키가 아니고 브랜디네. 혼잣말한 도경이 잔과 받침을 내왔다. 위스키가 담겨져 나오는 잔과는 또 다르게 생겼다. 짜리몽땅한 다리 위에 붙은 잔의 모양이 꼭 꿀단지 같았다.

“브랜디는 희석하지 않고 마시는 거래요.”

“이거 준 사람이 그래요?”

“무영이요? 아니요. 걘 이게 뭔지도 안 말해주고 그냥 줬는데요.”

병을 기울이다 엎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가뿐히 배신한 도경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술을 따랐다. 깨끗하게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잔에 채워진 양에도 차이가 없었다.

“그럼 누가 알려줬어요.”

“시우 씨요. 잔이 이게 맞아요? 이것도 예전에 선물로 받았던 거라 잘 모르겠네.”

“나도 몰라요.”

“아, 죄송해요. 시우 씨랑 같이 사니까 아실 줄 알고.”

술을 다 따른 도경이 바닥에 떨어진 이안의 선물을 주워 브랜디 옆에 내려놓았다. 지한은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기댔다. 대화의 주제가 시우로 바뀌게 된 연유를 알고 싶어졌다.

“그래도 바텐더랑 살면 집에서 가끔은 술 만들어 먹고 그러지 않아요?”

“집에선 잠만 자요.”

“그래요? 의외다.”

“뭐가요.”

“지한 씨가 예전에 그러셨잖아요. 시우 씨는 좋은 것만 해주려고 하는 친구라고.”

그리고 알기 싫기도 했다. 아직 개봉되지 않은 상자에 짧게 눈길을 주는 도경의 얼굴이 말끔하기만 했다. 도저히 다른 꿍꿍이를 가진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한이 뭘 알겠는가. 그가 읽어내는 타인의 의도는 완전 틀렸거나 상당히 어긋난 경우가 들어맞는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도경은 자기네 주먹 서열을 올리기 위해 지한을 때려눕힐 기회만 노리던 새끼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니까 시우까지 끌어들여 어떻게든 지한을 속박해 보려던 남자 고등학생들과 달랐다. 지한을 때려눕히거나 굴복시키고 싶어 할 까닭이 도경에겐 없었다. 뭐 하러. 애쓰지 않아도 이미 좋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런데 집에서 잠만 자면……,”

이안의 선물에서 눈길을 거둔 도경이 브랜디 잔을 지한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외롭지 않나.”

펑퍼짐한 잔 아래를 받치듯 든 손이 지한의 잔 가까이로 다가왔다. 카랑. 소리에도 형체가 있다면 브랜디 잔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분명 날카롭고 깨끗하게 생겼을 것이다. 깨끗한 생김새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몰랐다. 어렴풋이, 도경이라면 깨끗하게 생겼다는 수식어의 표본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한은 향에서부터 강한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 브랜디를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위스키를 한방에 다 털어버렸을 때도 느꼈지만, 양주는 식도 건강에 좋을 것 같은 술이 전혀 아니었다.

지한의 잔이 먼저 받침 위로 돌아갔다. 뒤이어 도경의 잔도 입술과 떨어졌다. 한 모금이라도 마시기는 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양이 줄지 않았다. 거의 다 비어버린 지한의 잔과 대조되었다.

“그래도 혼자 사는 것보단 덜 외로울 것 같은데.”

“그건 아니에요. 혼자 있어서 외로운 거랑 옆에 누가 있는데도 외로운 건 종류가 아예 다르잖아요.”

지한의 말을 부정하는 도경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었다. 다른 사람과 동거해본 경험이 있다고 넘겨짚고 싶어질 만큼.

억측하지 말자니까.

지한은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마저 다 마셔버렸다. 왜 도경이 하는 말마다 이상하게 들리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예를 들어 방금 도경이 한 말은 마치 자신도 누군가와 살아봐서 아는데 하나의 외로움과 둘의 외로움은 다르며, 시우는 지한을 외롭게 두는 상대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고독의 종류에 대한 의견은 맞는다고 해도 뒷부분은 아니었다. 도경도 그런 의도로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상하게 들은 지한이 문제였다.

도경이 술병 옆의 긴 상자로 손을 가져갔다. 이것도 뜯어볼까요? 새로운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시도였다면 주제 선택이 적절하지 못했다. 본인 선물 뜯는 데에 남의 허락을 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안이 생색을 냈던 선물은 신발이었다. 반지르르하게 광택이 나는 갈색 표면에 비하면 브랜디 가방의 가죽은 천 쪼가리만도 못했다. 가는 끈으로 조였다 풀었다 할 수 있는 신발의 디자인 자체는 특별하지 않았으나 도경의 발과 어울리게는 생겼다. 깔끔하고 매끈해서.

눈으로만 신발을 확인한 도경이 상자를 닫으려 했다. 이안은 패고 싶은 새끼였지만 신발엔 죄가 없었다. 뭔가 아쉬웠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잘 빠진 가죽 신발을 신은 도경이 보고 싶다고 속닥이는 것도 같았다.

“신어 보지.”

속사정을 털어놓자면 이랬다. 새 신발을 신은 도경의 모습이 보고 싶은 만큼이나, 막상 신어본 신발이 도경의 발에 맞지 않아 신고 다닐 수 없다는 결말을 바라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지한의 속에서 시작되어 끝났어야 할 소망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덜 끝난 채로 말부터 해버리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으므로 실은 오늘따라 재수 없다는 원망을 하기에도 뭐한 감이 있었다. 무영에게 지랄한다는 말을 해버렸을 때와 동일한 성찰이 지한을 일깨웠다. 그는 입을 닥치고 있을 체질이 아니었다.

지한의 경솔한 입버릇을 이미 파악하고도 남았을 도경은 못 들은 척하거나 미소로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신발 두 켤레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식탁 옆 바닥에 신발이 놓였다. 신고 있는 줄도 몰랐던 실내용 슬리퍼를 벗어난 도경의 발이 신발 안으로 쑥 들어갔다. 미리 신겨보고 제작한 것처럼 잘 맞았다. 신발과 바지 밑단 사이로 발목이 보일락 말락 했다.

신어보라고 해서 신었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도리였다. 잘 어울린다고 해주기는 싫고, 그렇다고 안 어울린다는 코멘트를 남길 수도 없어서 망설이는 동안 도경이 신발을 벗어버렸다.

“그것도 지금 열어볼래요.”

눈치를 볼 겨를도 없었다. 도경이 지한의 무릎 위를 가리켰다. 지한은 차에서부터 줄곧 한 몸처럼 지니고 온 선물을 들었다.

“이거?”

“네.”

그러고는 가져가려고 하기에 손에 힘을 주었다. 의도치 않게 강탈하려는 자와 사수하려는 자의 대결 비슷한 구도가 되었다. 지한은 입 안을 부풀렸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문이 열리는 상자에서 등장한 술과 일자무식의 눈에도 좋아 보이는 가죽 신발에 이어 개봉하기엔 너무 초라한 선물이니까 나중에 혼자서 봐달라고?

“제 거라면서요.”

“어, 아, 그렇긴 한데.”

“그럼 주세요.”

옆으로 길쭉한 모양이 특징인 도경의 눈이 그렇게까지 동그래지는 광경은 본 적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이유 없이 압수당한 물건을 돌려받지 못해 억울해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딱 그쯤에 견줄 만한 얼굴을 한 도경이 지한의 손에서 선물을 빼 갔다. 화가 난 건가 싶었는데 포장을 뜯는 손길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얌전해서 혼란스러웠다.

상자에 밀착된 투명 비닐이 잘 안 뜯기고 애를 먹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도경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 기운 빠져. 선물도 초라해서 미안한데 뜯다가 기운까지 빠트리다니 도저히 손 놓고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지한은 상자를 끌어왔다. 낚아채듯 손에서 빼갈 땐 언제고 옆으로 온 도경이 잠자코 지한의 손톱에 뜯겨나가는 비닐을 지켜보았다.

“와.” 향수를 꺼내 손목에 뿌려본 도경의 눈가가 접혔다. 입가는 올라갔다. “꽃 같다.”

“어울리는 것 같아서, 향이.”

그쪽이랑, 이라고 하려다 입을 닫았다. 이제 그만 그쪽 같은 소리를 집어치우고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불러줄 때가 왔다. 생일이기도 하고. 생일이 아니더라도 더 편해지면 형이라 부르겠다고 했던 그날보다 훨씬 편해진 사이긴 하니까.

“형…… 이랑.”

잠시 멈칫했던 도경이 이내 싱긋 미소 지었다.

“맞아요, 제가 형이었죠.”

그가 다른 쪽 손목에 향수를 한 번 더 뿌렸다. 그러고는 지한의 얼굴로 그쪽 손목을 들이밀었다. 향을 맡아보라는 것 같았다. 지한은 창백한 피부 아래 숨은 핏줄의 선명도에 흠칫했다. 핏줄 색이 그렇게까지 뚜렷하게 보일 필요는 없었다.

지한은 도경의 손목에 코를 가져다 댔다. 사기 전에 한 다섯 번은 맡아본 향이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꽃 같다는 도경의 감상은 정확했다. 백화점 직원이 장미향이라고 하는 순간 구매를 결정했더랬다. 도경과 한 쌍처럼 어울리는 꽃이었다.

코 주변을 맴돌던 향이 사라졌다. 팔을 내린 도경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자세만 본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지한의 기선을 제압하려 들던 10대 소년들을 떠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럼 이제 저는 지한 씨를 어떻게 불러요?”

물론 말하는 투나 목소리는 그들과 하늘과 땅 차이였다. 도경의 자세는 그만 분석해도 좋았다. 그것보단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도경의 질문에 알맞은 대답을 찾는 일이 더 시급했다.

“뭐 아무렇게나.”

“그러지 말고 빨리. 정말 모르겠어서 그래요.”

모르긴 뭘 모른단 말인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지한이야 도경이 윗사람이니 정해진 호칭이 따로 있는 것이지만 도경의 경우는 아니었다. 한잔 마신 지한도 안 취했는데 도경이 취했을 리도 없었다. 차라리 원하는 답변을 알려주면 그대로 따를 텐데 그것도 아니라 더 당황스러웠다.

“그냥, 이름으로. 지한이라고……?”

“알았어요.”

도경의 고개가 들렸다. 손으로 향수 뚜껑을 닫고, 눈으로는 끊임없이 지한을 바라보면서,

도경이 말했다.

“지한아. 선물 고마워.”

숨이 막힌다.

더 늦기 전에, 지한은 시선의 대상을 도경에서 식탁 위의 빈 유리잔으로 바꾸었다. 얼굴이라도 안 보면 좀 나아질까 해서.

도경의 반쪽 같은 향기가 죽지도 않고 되살아나 지한의 후각을 자극했다.

***

“진짜? 그럼 여러 명하고 싸워서 이긴 적도 있고 그래?”

웃음기 섞인 음성이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지한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지한이 처음 앉았던 의자는 이제 도경의 차지였고 그 옆의 빈 의자는 더 이상 비어있지 않았다. 도경에게 자리를 내어준 지한이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명이 있긴 했는데, 걔네랑 다 싸운 건 아니라.”

“몇 명 있었는데?”

“한…… 열 명.”

꿈속에서 불현듯 그곳의 비현실성을 인지하는 순간과 흡사했다. 어쩌다 도경이 옆에 앉았고 지한의 10대 시절 무용담이 화두에 오른 것인지, 그 길지 않은 과정이 수백 피스짜리 퍼즐의 완성형처럼 한꺼번에 맞춰졌다.

향수를 상자에 집어넣으려다 도로 꺼낸 도경이 대뜸 향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지한의 사진이 알아보기 힘든 이유는 항상 밤에만 찍어서라는 가르침과 함께. 그래서 열심히 찍은 사진 스무 장은 모조리 불합격을 받았다. 도경은 혹시 카메라가 잘못된 것은 아니냐는 의심을 표출했다. 그게 발단이었다. 지한의 휴대폰으로 그와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의자를 내주게 되었다.

“열 명이랑 싸워서 이겼다고?”

“아니요. 나랑은 한 셋 싸웠고, 나머지는 쫄아서 도망간 거.”

그런 다음에는, 술을 마셨다. 과음하고 있다고 자각한 순간은 없었다. 완벽하게 빈 잔을 본 기억이 나지 않을 뿐.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땐 바닥이었던 잔이 다시 보면 원상 복귀되기를 되풀이했다.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빈 잔을 채우는 도경의 솜씨는 가히 대단했다. 누가 보면 술 따르는 경력만 몇 년 됐다고 오해할 수준이었다.

“열 명 중에 세 명이랑 싸웠으면 일곱 명이나 남았는데? 한꺼번에 덤비지 왜 도망가?”

몇 잔을 마셨는지까지는 모르겠다. 많이 마셨다는 확신만 들었다. 지한은 유리 안에 담긴 술의 양을 가늠했다. 맨 처음 도경이 따랐던 양보다는 확실히 더 많았다. 술자리에서 맥주병을 깬 전적은 있어도 필름이 끊긴 역사는 없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마시는 취미도 없었다.

“앞에 세 명이 맞는 거 보고…… 무서워서?”

그러니 쓰러지거나 토할까 봐 하는 걱정은 아니었다. 아직까진 말도 똑바로 나오는 편이었다. 물리적인 문제보단 당장 하고 있는 말이 걱정이었다. 머리로는 그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싸웠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남을 때린 일화를 들려주는 중이라니, 그럴 바엔 차라리 고아라고 고백하는 편이 나았다.

“치사하다. 맞은 친구 놔두고 도망가는 거.”

쓰러지거나 토할 위험이 없다고 해서 정신이 아주 맑으리란 법은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중이었고, 허리를 펴고 있기가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졌다. 취할수록 눈이라도 크게 뜨고 있어야 했다.

“안 맞는 게 이기는 거니까.”

“그렇구나.”

도경이 바로 수긍했다.

“난 싸워본 적이 없어서.”

지한 또한 도경의 말에 바로 수긍했다. 타인과 몸을 부딪치고 주먹을 내지르며 싸우는 도경은 아무리 애를 써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작은 덩치는 아니라지만, 누구와 붙어도 도경이 밀릴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거꾸로 털면 한두 방울 나오고 끝날 자신의 잔을 본 도경은 술병을 잡기에 앞서 물티슈 봉지부터 집었다. 집 안에 들어온 이래 그가 흐르는 물에 손을 닦은 횟수는 총 2회였다. 세 번째엔 제 생각에도 과하다고 느꼈는지 서랍에서 물티슈를 꺼내왔다. 가정집에 일회용 물티슈가 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그보단 성분이 순하지만은 않을 티슈에 비벼질 때마다 점점 더 빨개지는 손등이 안타까웠다. 평소에 그렇게까지 손을 자주 닦아대진 않았던 것 같아 의아했다.

지한은 도경의 손에 들린 봉지 끝을 잡았다. 마지막 남은 물티슈였다. 봉지 끝을 잡은 지한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던 도경이 손을 놨다. 개인적으로 물티슈에서 나는 냄새는 지한의 취향이 아니었으나 도경이 쓰려던 것을 뺏었으니 영락없이 사용해야 했다. 대충 문지르고 버리려다 왠지 도경이 지켜보는 느낌에 하는 수 없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닦아 올렸다.

자신의 잔을 채운 도경이 그대로 술병 입구를 지한의 잔에 대고 기울였다. 원래 따라져있던 술과 합쳐지자 지한의 잔은 거의 반이나 차올랐다.

“그만 따라도 될.”

“마지막 잔.”

같이 마셔줄 거지? 도경이 눈웃음치며 덧붙였다. 그렇게 웃으면 한 잔 아니라 다섯 잔은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도경이 지한의 잔에 자신의 잔을 살짝 가져다 댔다. 지한은 잔을 들었다. 차가운 유리잔에 눌렸던 아랫입술은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술에 금방 열기를 되찾았다.

도경이 술을 대하는 자세는 지한과 180도 달랐다. 지한이 모든 술을 소주처럼 단숨에 털어버린다면 도경은 모든 술을 와인처럼 마셨다. 와인도 음미하면서 마시는 술이라는데 그보다 도수가 몇 배 센 브랜디를 느긋하게 마시는 것은 어쩌면 상식일 지도 몰랐다. 가죽 못지않은 광택을 자랑하는 액체가 도경의 붉은 입술 새로 느리게 흘러들어갔다. 긴 목에 툭 불거진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잔을 받침 위에 되돌려놓은 도경이 몸을 돌려 앉았다. 마주 본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도경의 상체가 지한 쪽으로 기울었다. 도경은 몇 잔이나 마신 것인지, 비슷하게 마셨다면 왜 혼자서만 멀쩡한지를 따져보려던 지한의 머릿속이 작동을 멈추었다.

“안 돼.”

“뭐가 안 돼?”

도경의 눈이 또 동그래졌다. 오늘따라 진귀한 광경이 자주 펼쳐졌다. 동그래지는 도경의 눈이라든가, 심술 난 애처럼 선물을 낚아채 가는 도경이라든가. 지한은 머리통을 털 듯 내저었다. 골이 띵했다.

“너무 가까워.”

“가까워서 싫어?”

방금 전까지는 왜, 왜 거리며 어른들을 귀찮게 하는 어린애 같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풀죽은 소년으로 전환되었다. 지한은 헛소리를 하지 않으려 눈을 여러 번 감았다 떴다.

“싫은 거, 아니고. 아닌데.”

사람을 상대하는 기분보단 스크린 속 캐릭터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지한에게는 식탁에 팔을 괴고 살짝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있는 도경이 게임 캐릭터처럼 비현실적이라서 그랬다. HP를 깎아먹지 않을 수 있는 선택지가 무엇인지 몰라 미치겠는 점도 당장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게임 같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큰 요소였다.

“너무 가까이 오면 내가 모르겠으니까, 그러니까.”

“몰라? 뭘?”

알면서 일부러 말꼬리를 잡는 것이 틀림없었다. 지한은 입술을 핥았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담배를 피우면 억눌려있던 취기가 한꺼번에 전신을 돌며 세상을 핑글핑글 돌아가게 할 것이다.

“자꾸 가까이 오면 나도 내가 뭘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만 좀 오라고.”

정적이 흘렀다. 이런 씨발. 지한은 욕이 나오지 않게 입술을 콱 씹었다. 포르노 영화 대사보다 구린 소리를 해버렸다. 드릴로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 들어가고 싶어졌다.

도경이 박장대소했다. 박장대소라고 해봤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웃을 때 내는 소리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다.

“너 진짜 웃기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자꾸 웃더니 급기야는 웃기다고까지 했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욱했다.

“내가 뭐가 웃겨.”

“그냥 웃겨. 다. 그런 말 안 들어봤어?”

도경이 식탁에 기대듯 몸을 기울였다. 아까보다 더 흐트러진 자세였다. 지한만큼은 아니라도 확실히 취하기는 했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웃기다고 해서 기분 나빠?”

“아니. 안 나빠요.”

“근데 왜 표정이 화났어?”

깨달으리라 기대치 않았던 것을 갑작스레 깨닫는 순간은 항상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그냥 그렇게 갑자기. 지한은 도경이 외로워 보인다고 느꼈다. 직접적인 증거도 없었고 근본도 없었다. 심증만 있었다. 본인이 외로우니까 지한에게도 외롭지 않느냐 물은 것 아닐까. 쓸쓸해서 자꾸 지한에게 잘해주는 것 아닐까. 지한은 도경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잘 모르겠어요. 왜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갔는지는.」

이런 남자를 두고 어떻게 다른 데로 눈이 돌아갔지.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 멍청한 여자였다. 그런데 도경이 그 한 사람의 성별을 밝힌 적 있었나, 없었다. 그러면 남자일 수도 있나. 있었다. 도경에게 선택받았던 단 한 사람이 여자였길 바라야 할지, 남자였기를 바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여자였어야 한다. 지한과는 닮으려야 닮을 수 없는 여자여야 나중에 비교당해도 덜 비참했다.

왜 표정이 화났냐는 질문 이후 도경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있었다. 지한은 도경이야말로 웃기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몇 달 내내 경어에 가까운 존대를 하더니 형 소리를 했다고 평생 존댓말은 쓴 적이 없는 사람처럼 물 흐르듯 말투를 바꿔버렸다. 이질감이 들어차야 할 마음에 엉뚱한 호기심이 자리했다.

입술, 만져보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난데없는 호기심일까? 지한은 스스로에게 조금 더 정직해지기로 했다. 도경을 향한 호기심은 장례식에서 스치듯 봤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선상에 있었다. 무게가 더해졌을 뿐, 그 줄기 자체는 한 번도 끊긴 적 없었다.

하지만 안 돼. 만일 또 머리보다 입이 먼저 움직여 도경에게 입술을 만져보고 싶단 소리까지 들려주게 된다면 그땐 진짜 그냥 일어나서 뛰쳐나가야 했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입술 만져보고 싶다는 말, 하지 마.

주문이 먹혀들었다. 지한은 도경의 입술을 만져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과정 없이 바로 행동에 옮기기는 했어도.

입술을 눌러오는 지한의 손끝에 도경은 불쾌해하거나 당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한이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덕분에 지한은 곧잘 위로 올라가는 입가에서부터 가장 도톰한 입술 가운데 부분까지를 천천히 쓸어내릴 수 있었다. 거친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이 보들보들했다. 누르면 푹 들어갈 듯한 촉감이었다.

도경이 지한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프라고 문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갈이 중인 새끼 짐승의 이처럼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도경의 손이 지한의 손목을 감쌌다. 손이 커 손등까지 덮였다. 도경의 입술이 더 크게 벌어졌다. 지한의 손가락을 자유로이 풀어준 도경이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이 닿았다.

“잠…….”

깐. 완성되지 못한 말은 도경의 혀에 눌려 지한의 목구멍으로 밀려났다. 조금도 방해받지 않고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여린 살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몸이 뒤로 밀렸다. 등과 손등이 동시에 딱딱한 것에 부딪혔다. 도경이 지한의 손목을 벽에 밀어붙인 것이었다.

도경은 지한을 숨 쉬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처럼 키스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무영의 사무실 안에선 갑작스럽기도 했고 지한도 충동적으로 응한 행위였던 만만큼 상대의 속도에 맞춘단 개념이 없었다. 두 번째로 키스했던 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다소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던 행위에서도 도경은 지한의 호흡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작스럽지 않았던, 둘 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측한 뒤에 입술이 닿은 오늘도 여전했다. 둘 중 하나였다. 도경이 지한을 질식시키고 싶은 것이든지, 입을 맞춘다는 행위의 목적을 잘못 배웠든지.

입술이 벌어진 채 식도에 무리를 줘 겨우 침을 삼킨 지한은 오른손으로 도경의 어깨를 잡았다. 내려가 있던 눈꺼풀이 파들거리며 올라갔다. 빈틈없이 입술을 붙인 두 사람의 눈동자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주시했다.

도경은 평생 한 명의 연인이라도 가져봤지만 지한에겐 그마저도 없었다. 성적인 행위에 능숙하지 못했고, 도경보다 더 잘 안다고 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둘 다에게 적당한 속도를 찾으려는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 가능한 한 더 오래도록 도경과 타액을 섞고 싶었다.

그보다 더한 것도 해보고 싶었다.

어깨를 잡아오는 손길에 굳었던 도경은 그것이 자신을 밀어내려는 동작이 아님을 감지한 듯 눈을 깜박였다. 지한의 입 안을 휘젓던 혀가 느려졌다. 입술과 입술 사이로 약간의 틈이 생겼다. 시원한 공기가 들이닥쳐 지한의 숨통을 틔웠다.

도경의 혀가 지한의 입에서 빠져나갔다. 축축한 입술은 지한에게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지는가 싶으면 다시 와 닿고, 이번에야말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진득하게 붙었다.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낯 뜨거워지려고 할 무렵, 줄기차게 지한의 손목을 벽에 밀고 있던 도경의 손이 스르륵 팔을 타고 내려와 팔뚝에서 멈추었다.

계절감 없는 셔츠 위로 팔뚝을 만지는 손길은 입술과 그 느낌이 상당히 달랐다. 흥분은 흥분이었는데 단순히 지한을 만지겠단 성욕이 아니라 뭔가 다른 기운이 전해졌다. 운동을 그만둔 지 오래돼 근육이라고 내세울 것이 별로 남지 않은 팔을 세게 잡았다 놔주는 동작은 무언가를 가늠하려는 시도로 느껴졌다. 한 손에 얼마나 잡힐지, 버티는 힘은 얼마나 될지. 그런 것들을 알아내려는.

그렇게 느끼자마자, 도경의 입술이 완전히 떨어졌다. 지한의 속을 들여다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팔뚝을 만지던 손은 다시 손목으로 내려갔다. 한쪽 어깨를 지한의 손에 잡힌 채 한쪽 손으로는 지한의 팔목을 잡은 도경이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희고 긴 목덜미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그 기이하고 묘한 자세로, 도경은 한숨을 쉬었다. 지한의 입 안에 퍼진 것과 똑같은 브랜디 향이 풍겼다. 지한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아무리 봐도 도경은 자신의 목을 만져보라고 내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아니라면. 아니다. 아닐 리가. 지한이 만지길 원치 않았다면 먼저 세 번씩이나 키스하지는 않았을 터다.

미약한 자신감이 손을 움직였다. 지한은 다섯 손가락을 차례대로 도경의 목에 올려두었다. 도경은 전혀 움찔거리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 가지고는 꿈쩍도 않는다는 공표 같았다. 도경의 목에 잇자국을 내고 싶다는 욕망을 담아, 지한은 손끝을 세웠다.

바로 그 순간 도경이 지한의 손을 잡아 밀치며 목을 눌러왔다. 쿵. 지한은 뒤통수를 벽에 세게 박았다. 도경의 손바닥에 울대뼈가 눌렸다. 혀가 밖으로 밀려나가며 자동적으로 입술이 벌어졌다. 인간은 목이 눌리면 의지와 관계없이 개처럼 혀를 빼물었다. 남의 목을 수없이 눌러본 지한이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약한 헛구역질이 났다.

지한은 도경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었다. 억지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물로도 쉽게 빨개지는 피부에 흠집을 낼까 봐 무서웠다.

“이것, 좀…….”

졸린 것도 아니고 살짝 눌렸을 뿐임에도 목에서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이윽고 도경의 손이 지한의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목에서만, 떨어져 나갔다. 지한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은 손이 쇄골을 문지르며 내려가다 멈추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도경과의 키스를 다 합친 것보다 더 규칙 없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도경은 지한의 셔츠 앞섶을 잡아채 당겼다. 셔츠에 목덜미가 쓸려 엉덩이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리를 펴고 서자마자 머리가 핑 돌아 벽에 기댔던 지한은 쉬지 못하고 곧바로 얼굴을 들어야 했다.

도경이 지한의 턱을 잡아 올렸다. 절로 머리통이 벽에 부딪혔다. 이렇게 계속 벽에 부딪히다간 안 그래도 별로 든 것 없는 머리가 더 비어버리겠다는, 아무도 웃어주지 않을 농담을 떠올렸다.

도경의 손이 지한의 턱과 목 사이를 덮듯 감쌌다. 이번엔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혀를 빼물며 헛구역질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까보다 지금이 더 숨쉬기 힘들게 느껴지는지. 알았다. 긴장감이 지나쳐 부담스러웠고 부담스러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치는 방법은 간단했다. 도경을 밀치고 뛰쳐나가면 끝이었다. 하지만 지한은 도경을 밀치지 않았다.

도경의 얼굴이 다가왔다. 입술을 깨물렸다. 따끔했다. 다시 목울대로 내려간 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몇 번을 겪어도 평온하게는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은 혀가 입천장을 훑었다. 사람의 혀끝에 날카로운 물체가 달릴 수 있을 리 없는데도, 지한은 도경이 혀끝으로 입 안을 마구 할퀴는 느낌이 들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움츠러들어 있던 지한이 몸을 펴자 도경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셔츠가 밀려 올라가며 허리에 도경의 손이 닿았다. 유리잔보다 더 차가운 손끝이 빠르게 옆구리를 타고 올라왔다. 도경은 손과 혀를 동시에 놀리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듯했다.

벽에 지탱해 받아내기만 하는 지한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꽉 막힌 입 안으로 인해 공기가 부족한 와중에도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없는 숨까지 끌어 마시느라 순간적으로 도드라진 갈비뼈를 매만지는 손길은 셔츠에 가려진 팔뚝을 만지던 손길과 현저한 차이가 났다. 어깨나 옆구리만이 아니었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맨살을 만지는 정도에도 바짝 긴장했던 몸은 그다음 이어진 행위에 스프링처럼 팔짝거렸다. 도경의 무릎이 지한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던 것이다. 한 박자씩 늦게라도 열심히 도경에게 반응하던 혀마저 동작을 멈추었다.

지한의 변화를 알아차린 도경이 고개를 뒤로 뺐다. 깨나 길게 붙어있던 두 입술이 끈적이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지한은 도경의 입술에 집중력을 빼앗겼다. 원체 남들보다 혈색 좋은 입술이 번들거렸다. 술보다, 가죽보다 더.

“아, 아.”

하반신에 전해지는 느낌은 상상이나 기분이 아닌 실제 감각이었다. 입술 따위에 정신 팔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허벅지를 밀착하는 줄 알았던 동작은 점점 비벼대는 쪽으로 바뀌었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낯 뜨거운 꼴을 보이게 될 것이란 이성이 아주 잠시 감도를 이기는 듯했다. 옆구리를 지나 등허리까지 갔던 손이 되돌아와 가슴팍을 스쳤다. 눈가로 열기가 몰렸다. 이성이 아스러지며 제각기 다른 감각들이 앞다퉈 달려들었다.

“아, 이거, 이건 그만.”

목을 눌렸을 때 신체적 반응으로 고였던 눈물과는 다른 현상이었다. 지금 그의 눈을 빠져나가 흐르고자 하는 눈물은 몸이 아닌 기분의 결과물이었다. 뇌가 울고 싶다는 기분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만?”

그렇게 되물었을 뿐, 도경은 지한의 셔츠 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지한의 하반신과 맞닿아 있는 다리를 물리지도 않았다. 반도 안 올라간 눈꺼풀 끝에 달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흥분했는지, 화가 났는지, 아쉬워하는지 슬퍼하는지. 더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지한은 온몸을 뒤틀고 싶어졌다. 싫거나 괴로워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였다. 낯선 감각은 언제나 배로 버거웠다. 주먹질이라면 자신 있지만, 발길질에도 자신 있지만.

“아니……, 난. 나는.”

이런 종류의 공격에 반격하는 법은 몰랐다. 숨 막히게 입을 맞추고 차가운 손으로 맨살을 쓸며 신체 부위로 급소를 누르는 일련의 행위들도 공격이라 할 수 있다면.

그래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응, 넌?”

도경이 셔츠 안에서 손을 뺐다. 목 언저리에 머무르던 손은 뒷덜미로, 셔츠에서 빠져나온 손은 바지 앞섶으로 내려가 청바지 위를 문질렀다. 바지와 속옷, 두 겹의 보호막에 가려진 중심부가 격하게 반응했다. 그 어떤 두께의 직물도 그 손길을 차단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친 바지 표면이 도경의 손에 의해 위아래로 문질러지며 건조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당기는 배와 딱딱해진 아래는 조금도 건조할 것이 없었다. 지한의 입에서 밭은 숨소리가 났다.

“말해봐.”

말에 반하는 행동이 이어졌다. 지한의 앞섶에서 손을 떼는 줄 알았던 도경이 버클을 풀었다. 놀랄 새도 없이 바지 안으로 들어온 손을 이기지 못한 지퍼가 저절로 내려가며 공간을 내주었다. 대번에 부풀어 오른 살덩이를 쥐는 손이 아까보다는 조금이나마 미지근해져 있었다.

“아, 헉.”

도경이 꽉 잡았다 놓은 곳은 반응을 자제할 수 있는 부위가 아니었다. 허리를 튕긴 지한은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헤매다 그만 도경의 어깨를 잡고 말았다. 몇 시간 전처럼 느껴지는 몇 분 전 도경의 목을 잡았다가 배로 당한 기억을 벌써 잊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불에 덴 것처럼 후다닥 떨어지는 손을 본 도경이 지한의 뒷덜미에 닿아있던 손을 더 위로 올렸다.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온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다고 느꼈고, 그렇게 느끼자마자 뒷머리가 확 잡혔다. 머리통이 통째로 젖혀졌다.

“왜 말을 안 해.”

옷에 눌려 괴로워하던 부위가 밖으로 완전히 튕겨져 나왔다. 못난 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하얗고 깨끗한,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가장 원초적인 부위를 쓸어 올렸다. 더디게 움직이던 손은 점차 일정한 간격으로 피가 몰린 피부 위를 오르락내리락했다.

도경의 손에 잡힌 채 발기하는 자신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지한은 눈을 감았다가 일 초도 안 되어 곧바로 다시 떠야 했다. 느슨해졌던 도경의 손가락이 정신 차리란 듯 머리카락을 다시 콱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눈을 조금이라도 피할라치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손가락 때문에, 지한은 벽과 도경 사이에 갇힌 상태로 자신의 성기가 하얀 손안에서 꼿꼿이 서는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아야 했다. 아, 으, 아아. 자꾸 목구멍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기어 나왔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아무리 세게 입술을 깨물어도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 벌어져있곤 했다. 차선책으로 지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일부러 감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감긴 것이었음에도, 도경은 여지없이 지한의 뒷머리를 잡아챘다.

“너는 뭐, 어쨌다는 거야.”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지한의 급소를 가지고 노는 손은 그렇지 못했다. 탁, 탁 하는 마찰음과 함께 팽창한 성기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손에 가속이 붙었다. 말해. 지한의 귓불을 씹으며 속삭인 도경이 민감해진 끝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지한은 창피함도 잊고 헐떡거렸다.

“놔…… 줘. 놔주세요.”

도경이 손끝을 뗐다. 머리카락도 놔주었다. 뒤에서 당겨대는 손가락이 사라졌음에도 지한은 얼굴을 한껏 뒤로 젖히고 사정했다. 덜덜 떨리던 몸이 축 처졌다. 지한의 아랫배를 닦아내듯 부드럽게 문지른 도경이 그 손을 들어올렸다. 이제 막 배출되어 낮은 점도를 가진 정액이 핏줄 위로 솟아난 힘줄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한은 눈을 감았다. 뭐든 처음 할 때가 가장 힘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남의 손에 몸을 맡겼던 순간보다 도경의 손에서 자유로워진 지금이 훨씬 더 힘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그런데 알 것도 같아서. 앞으로 둘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두려워서.

좋아서. 너무.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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