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Clinch (16/38)

  16. Clinch

#39

“도경이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꿨어.”

황 원장이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흔하게 생긴 잔이었으나 왠지 그녀의 손 안에선 사연 있는 작품으로 보였다. 그녀에겐 그런 재주가 있었다. 세 남자가 밥을 먹고 있는 식탁에서 혼자만 디저트 카페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내는.

“그 구멍가게 같은 회사가 언제 이런 리스트에 오른 적 있어, 지난 10년간? 이래서 리더가 중요한 거야. 도경이가 가니까 이렇게 바로 결과가 나오잖아.”

시발점은 유명 문화평론가가 쓴 한 특집 기사였다. ‘올해 주목해야 할 기업 5’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도경이 이사로 있는 기획사 이름을 발견한 황 원장은 즉시 링크를 복사해 도경에게 보냈다. 오늘 저녁은 집에서, 라는 명령문이 뒤따랐다. 도경이 월요일부터 퇴근하자마자 본가로 차를 틀게 된 이유였다.

“직원 몇 되지도 않는 회사 운영이 뭐 그렇게 힘들다고.”

권 회장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상상과 현실의 차이는 적지 않았다. 평정 유지를 위해 도경은 아까부터 그의 허벅지를 긁고 있는 개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황 원장이 키우는 포메라니안은 개만 보면 만지고 싶어 하는 현경보다 늘 뒤로 물러나 있는 도경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화장실 못 가리던 새끼 시절부터 쭉 그래왔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여태 왜 그 모양 그 꼴이었지?”

혼자 있을 때도 습관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는 도경이 여섯 쌍의 보는 눈앞에서 고작 애완견을 만지느라 구부정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식사 시간에. 오냐오냐 자라서 사람을 우습게 보는 개는 포기하지 않고 도경의 허벅지를 긁어댔다. 의지 하나만큼은 높이 살만했다.

압박에 못 이긴 권 회장이 마지못해 도경을 격려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앞으로? 언제까지 애를 직원 몇 안 되는 기획사에 처박아 두려고?”

“제발 밥 좀 평화롭게 먹자.”

황 원장의 얼굴에 서늘한 빛이 돌았다. 상대를 패고 싶을 때에 한해 나오는 표정이었다. 불륜 상대를 부인에게 들킨 현경이 본가로 도망쳐 왔던 날도 그녀는 딱 그런 표정을 지었었다. 현경 대신 화분이 두 개 깨지고 끝났더랬다.

평정을 되찾은 황 원장은 가사도우미를 불렀다. 이모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간드러졌다.

“제 거 먼저 다 치워주세요. 밥맛이 떨어져서 더 못 먹겠네요.”

“오늘 반찬이 입에 안 맞으셨어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섭섭하게. 음식은 잘못이 없어요. 식탁에서 밥맛 떨어지게 하는 인간 잘못이지.”

도우미는 더 묻지 않고 황 원장의 식기와 밥그릇을 가져갔다. 물을 홀짝인 황 원장이 현경과 도경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아드님들은 많이 드세요. 도경이 왜 이렇게 못 먹어.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그것으로 권 회장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테이블을 깨트릴 기세로 수저를 내려놓은 그는 나머지 세 식구에게 뭐 어쩌란 말도 없이 다이닝 룸을 나가버렸다. 원래부터 권 회장의 다혈질은 유명했다. 황 원장을 어미로 두지 않았더라면 현경과 도경은 두들겨 맞으며 자랐을 것이다.

“너희 얼른 밥 다 먹어. 오늘은 내가 직접 과일 깎아 줄게.”

권 회장을 내쫓아내 속이 시원해 보이는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넘어갔다. 고개를 빼고 그녀가 어디까지 갔는지를 확인한 후, 현경이 작게 말했다.

“내가 완전 헛소문을 들은 거야, 아니면 네가 이상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뭐.”

“무영이가 건설사 아들이랑 싸운 거, 너 때문이었다며.”

그날 일이 화질 좋은 영상처럼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두고두고 곱씹어도 속이 뻥 뚫리는 장면이었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네. 둘이 나 때문에 싸울 이유가 뭐 있겠어.”

“네가…….” 현경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소현이랑 관련된 남자 얘기를 했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 남자 얘기는 왜 하고, 싸우긴 왜 그 둘이 싸워?”

“싸움 났을 땐 아는 척도 안 하더니 이제 와서?”

“내 나이가 몇인데 애들 싸우는데 껴.”

도경은 숟가락을 젓가락 옆에 가지런히 눕혔다. 어차피 곧 치워질 테지만 그래도 그렇게 했다. 1초라도 흐트러진 모양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복귀하고 싶으면 얌전하게 좀 지내.”

“내가 복귀하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하네.”

“당연하지. 나라고 네가 평생 연예인 뒤치다꺼리나 하다 은퇴하길 바랄 것 같아?”

“바라는 거 아니었어?”

현경도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는 아예 도경 쪽으로 몸을 틀고 앉아 말했다.

“도경아. 말했잖아. 난 진짜 아버지한테 너 쫓아내라고 한 적 없어. 안 그래도 돈 날린 거 창피해 죽겠는데 내가 무슨 낯짝으로 그런 부탁까지 해? 내 아이큐가 두 자리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은 도경은 불굴의 의지로 안아달라고 어필 중인 개를 들어 올렸다. 무릎에 올라온 개가 앞발로 도경의 가슴을 짚고 섰다. 풍성한 꼬리가 정신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아무튼 다른 건 몰라도 소현이 남자랑 엮이는 건 절대 안 돼. 걔랑 엮여서 뭘 어쩌게.”

꼬리만큼 털이 풍성한 목덜미를 슬쩍 건드리고 관두자 질세라 개가 코로 도경의 손바닥을 밀었다. 도경은 개를 도로 바닥에 내려주었다. 얼마나 안고 있었다고 그새 바지에 하얀 털이 묻었다. 개가 왕! 하고 날카롭게 짖었다.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나 위협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까마득하게 모르고.

“정말 죽일 것도 아니잖아?”

까마득하게 모르기는 개보다 그리 나을 것 없는 지한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그래도 그가 개보다는 조금 더 알았다. 정말 개와 비슷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도경이 두 번이나 허락 없이 입술을 비벼도 가만히 받아내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겁도 없이 도경을 누르려고 들기나 했겠지. 지한은 적당히 겁낼 줄 알았다. 도경을 이기려 들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지만 줄행랑칠 만큼 엄살이 심하지도 않았다.

“내 걱정 말고 형 걱정이나 해. 나도 아이큐 두 자리는 아니니까.”

황 원장이 과일을 쟁반에 담아 들고 나타났다. 도경은 성심성의껏 사랑스러운 아들의 표정을 지었다. 도경을 포기한 개가 현경의 허벅지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개를 만지면서도 현경의 눈은 도경을 향해 있었다. 코웃음 치고 싶어졌다. 정말 죽일 것도 아니지 않냐고? 너무 지당한 소리는 안 하느니만 못했다.

「둘이 또 싸웠어? 누나가 형 죽이고 나서 자기도 죽고 싶대.」

그는 지금껏 살아오던 자세로 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늘 상대가 알아서 죽고 싶어 했다. 죽고 싶으면 죽으라지. 죽겠다는데 뜯어말릴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가 두 손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날은 오지 않으리란 이야기였다. 전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피는 뜨겁고 진하니까. 진한 것은 얼룩을 남기니까. 얼룩은 더러우니까.

그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

마지막 배 한 조각을 받아먹고 나서야 본가를 나설 수 있었다. 황 원장이 또 영양 주스를 챙겨주려고 하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그 근본 없는 맛의 액체를 꾸역꾸역 다 마시는 사람은 지한 하나로 족했다.

운전석에 올라타기 무섭게 주머니에서 진동이 전해졌다. 무시해 버릴까, 도경은 고민했다. 물론 찰나였다. 한국의 어느 회사가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특히 연예 관련 직종에서 퇴근 이후 연락이 오지 않길 바라는 것은 허황된 꿈이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게 제가 봐도 좀 그런 대사들이 있거든요. 다음 주 부산 촬영 전까지만 해결되면 좋을 것 같아요. 통화 가능하실 때 연락주세요]

책임감을 가지고 확인한 메시지는 피로만 증폭시켰다. 촬영이 시작된 이후 과장 없이 열 번은 받아본 것 같은 변명이 늘어져 있었다. 도경은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한동안 못 들었던 이명이 귓속을 먹먹하게 울렸다. 이명 자체는 그리 놀랄 것이 없었다.

다만 오랜만에 찾아온 현상의 음량만은 각종 신경성 신체 증상에 익숙한 도경에게도 큰 감이 있었다. 환청 아닌 환청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휴대폰을 주웠다. 꺼지지 않은 화면에 메시지창이 그대로 떠있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아, 이사님. 제가 먼저 전화 드리려다 시간이 이래서 혹시 하고…….

“바꾸세요.”

―네?

“같이 계신 거 아니에요? 전화 바꾸시라고.”

도경의 상태를 어느 정도 알아차렸는지 박 실장은 재깍 요구받은 바를 이행했다.

―여보세요.

“그 배역 원래 우리 거 아니었어요. 알죠?”

청량한 생김새와 상반되는 인성을 가진 아역 출신 배우는 지한보다 딱 한 살이 어렸다. 하는 짓만 보면 한 열 살은 어렸다. 별것도 없는 그 단역, 그냥 지한이 하라고 내버려 두는 편이 모두에게 널리 이로웠을지도 모른다.

“그 작품 이미 판권 팔린 나라만 열 개가 넘어요. 다 독점으로. 그것도 알겠고?”

시간은 되감을 수 없고 과거의 결정은 번복할 수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애초에 지한에게 접근하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란 후회도 가능했다.

“그 배역 원래 주인이 개봉된 영화 보고 억울해했으면 좋겠어요? 돈 없고 줄 없어서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인터넷에 글 올리면 좋겠냐고.”

―……아니요.

“그러니까.”

후회는 나약했다. 도경은 나약하지 않았다.

“뺏긴 사람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찌그러지게 만들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죄송해요.

매니저고 배우고 강하게 말해야 알아듣는 척이라도 하는 점은 똑같았다. 죄송하단 소리 말곤 더 할 말도 없는 것 같아서 통화를 종료시켰다. 알아서 어두워져 가던 화면이 도로 밝아졌다.

[안 가고 차 안에서 뭐 해? 무슨 일 있어?]

CCTV로 담벼락 옆에서 떠나지 않는 도경의 차를 보고 있었을 황 원장의 메시지였다. 도경은 휴대폰을 조수석에 엎어놓았다. 겨우 사라진 이명이 돌아오기 전에 주의를 돌려놔야 했다. 어디로든.

정확히 31분 뒤, 그는 완전히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2층 저택 앞을 떠날 때만 해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일념이었으나 그의 차가 들어와 있는 장소는 눈에 익은 호텔 주차장이었다.

시동이 꺼진 차 안에서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 떴다. 오늘은 월요일이었다. 출근길에서부터 오늘은 바에 가는 날이라고 되새긴 여파가 부작용을 일으켰다.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았으니 그대로 나가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핸들을 잡았다 뗐다 한 끝에 그는 시동을 껐다. 계획은 이행하라고 세우는 것이지, 내킬 때만 지키라고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멋지시네요.”

초반에 다른 사람들하곤 분위기가 다르다느니 깔끔하다느니 했을 때만 해도 단골로 만들려고 듣기 좋은 소리를 골라 하는 줄 알았는데, 월요일마다 방문하길 석 달째에 접어든 후에도 시우는 도경을 볼 때마다 비슷한 칭찬을 했다.

어려서부터 황 원장의 손에 끌려다닌 미용실 원장이 날리는 립서비스도 시우의 칭찬보단 덜 직설적이었다. 생전 안 듣던 소릴 면전에서 들으려니 자꾸 의식하게 되었다. 그래도 곤혹스러움이 지한에게서 예쁘단 소릴 들었을 때만큼은 아니라 견딜 만했다.

도경은 예의상 웃어 보이곤 의자에 앉았다. 평소 시우가 곧잘 추천하는 단 계열의 와인은 사양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취기가 간절했다.

“피곤할 땐 바로 취하는 게 더 나아요.”

다리 없는 와인글라스처럼 생긴 유리잔 바닥에 연한 호박색 액체가 가라앉아 있었다. 잔잔한 표면이 자잘하게 반짝였다. 침침한 색의 병이 눈에 익었다. 새해로 넘어오던 날 밤 지금과 같은 자리에 앉아 지한에게 시켜줬던 술이었다. 위스키를 처음 마셔보는 것인지, 아니면 별생각이 없는 것인지 그 독한 술을 한꺼번에 들이켜서 내심 놀랐었다.

“제가 피곤해 보이나요?”

“평소보다 늦게 오셔서 피곤하실 줄 알았어요. 아니었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하실 것까진 없고요.”

기계적으로 대꾸한 도경은 검지 끝으로 잔을 쓸어내렸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펑퍼짐해지는 잔의 굴곡을 따라 움직이던 손가락은 머잖아 받침에 닿았다. 자꾸 빠져나가려는 영혼을 억지로 붙들고 있으려니 새삼스럽게 상황이 파악됐다. 그는 현재 자의로 취하고 싶어 하는 중이었다. 그를 오래 봐온 이라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제작사에도 바쁜 시즌이 따로 있어요?”

시우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이 한 글자 한 글자 분해되어 귀를 통과한 뒤에도 도경은 딱히 응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리는 단어들이 그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귀로 흘려보낸 단어들이 죽지 않고 되돌아왔다. 제, 작, 제작, 제작……. 도경은 위스키 라벨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그대로 들었다. 울퉁불퉁한 병목과 검붉은 색 유니폼을 지나자 부드러운 선의 얼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경이 쳐다보는 것을 눈치챈 시우는 영업용 미소로 화답했다.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이상과 혼란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 섞여들지 못하고 충돌했다.

“갑자기 제작사 얘기는 저한테 왜.”

“아, 지한이랑 그래서 알게 되신 거라고 들었는데 제가 뭘 잘못 알았을까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정말로 자신이 뭘 잘못 알았을까 봐 걱정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보단 도경이 불쾌해할까 봐 신경 쓴다는 느낌이 강했다. 혼란이 가중되었다. 시우는 도경이 지한에게 확인만 하면 바로 들킬 거짓말을 할 만큼 아둔한 유형이 아니었다. 따라서 지한이 도경과 만나게 된 계기에 대해 시우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납득할 만했다. 있는 그대로 털어놓자니 소현이 걸렸을 터.

아니, 가만히 생각하면 거기서부터 이상했다. ‘같이 사는 친구’에게 만나던 여자의 존재를 숨겨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 보통은 자랑을 해야 정상이지 않나? 정상의 범주를 논할 자격이 없는 도경에겐 품어봐야 쓸모없는 의문이었다.

“아니요.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조급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짜증이란 표현도 너무 약했다. 분통. 분통이 그나마 도경의 전신으로 퍼지고 있는 기류를 실제에 근접하게 전달했다.

“지한 씨가 제 얘기를 하셨어요?”

“많이는 안 했어요. 그냥.”

“그냥?”

“음. 뭐라고 했지, 아. 손님 자주 오시는지 궁금해했어요.”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었다. 의사는 몰라도 몸과 마음의 주인인 도경은 알았다. 그는 까슬까슬한 컵받침을 손끝으로 눌렀다. 뭣 때문이든 시우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해도 의문스러운 사항은 남아있었다. 도경을 제작사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둔갑시켜야만 했던 까닭이라든가. 하고많은 회사 중 왜 하필.

“그래서?”

“주기적으로 오신다고 했어요.”

소현이 생각나서?

“그랬더니?”

“글쎄요. 별말 안 했던 거 같은데…….”

그럴 수도 있나?

“손님.”

그럴 수도 있겠지.

“손님?”

손으로 낮지 않은 온도가 전해졌다. 시야를 메우는 화면이 채널 바뀌듯 전환되었다. 조금 전까지 지한과 소현의 단편적인 모습들로 뒤죽박죽이던 세상은 조명이 어두운 호텔 바로 돌아와 있었다.

당황한 빛을 다 숨기는 데에 실패한 시우의 표정. 도경의 손을 반쯤 덮고 있는 시우의 손. 도경은 자신이 조금 전까지 컵받침을 너무 세게 두드린 것 같다고 추측했다. 10대 때까지만 해도 도경은 꽤 자주 그런 식으로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이상행동을 반복해 옆에 있던 사람이 억지로 멈춰줘야 하는 경우(주로 이안이었고 아주 가끔 무영이었다)를 겪었다. 20대에 넘어와선 거의 없었고 입사하면서부턴 아예 물리친 증상이었다. 설마 다섯 살 어린 바텐더 앞에서 그 증상이 재발할 줄은 몰랐다.

“괜찮으세요?”

도경의 손가락을 모조리 덮은 것으로 모자라 손등에도 살짝 올라와 있는 시우의 손은 움찔거리거나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평소 시우가 어떤 바텐더인지를 생각하면 죽어도 손님에게 신체적 접촉은 하지 않을 것 같지 않았는데, 어지간히 놀랐는지 꿈쩍도 않았다. 괜찮다는 말을 들어야만 놔주겠단 의지가 돋보이는 손을, 도경은 말없이 주시했다.

시우의 손은 도경의 것보다 작았다. 하얗기는 도경이 더 하얬지만 이상하게도 촉감이 더 부드러울 것 같다고 여겨지는 쪽은 시우의 피부였다. 도경이 살면서 만난 남자 중 누구도 시우만큼 여려 보이는 외모를 가지지 않았다. 그래, 너무 여려 보여서 도경의 손아귀로도 꺾어버리기 충분하리라 예상되었다. 손가락도, 손목도.

모가지도.

“괜찮아요.”

도경은 시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괜찮다고 말한 뒤엔 방긋 웃기까지 했다. 설득당했는지, 아니면 설득당한 척하는 것인지 모를 시우가 손을 거두었다. 타인의 체온이 남아있는 손으로 잔을 든 도경은, 못 배워서 아는 것도 없는 인간처럼 그 안의 액체를 단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불이 붙은 듯 뜨거워진 식도가 고통스러워했다. 그 정도론 부족했다.

더 뜨거운 것이 필요했다.

***

대리기사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도경은 조금도 쉬지 못했다. 얼음도 넣지 않은 위스키를 연달아 들이부은 보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머릿속은 평소보다 두세 배 바쁘게 돌아갔다. 차가 아파트 출입구를 통과할 때쯤엔 이미 멀쩡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그는 코트도 벗지 않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소파에 앉기 위해 거실로 갈 힘도 없었다. 최소한의 에너지가 충전되기를 기다린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손을 씻는 것이었다. 그리 세게 문지르지도 않았건만 금세 손가락 마디가 발개졌다. 색이 밝은 피부는 미세한 자극에도 쉽게 티를 냈다.

물이 멎었다. 손 닦은 수건을 세탁기에 넣고 나와 부엌 찬장에서 약통들을 꺼냈다. 술과 약은 시간 차를 두고 복용해야 하며 먹는 약이 많다면 되도록 술은 멀리하는 것이 좋다. 병원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알아야만 하는 상식이었다.

규칙을 어긴 적이 아예 없진 않았다. 술과 약을 10분 간격으로 섭취한 경험도 있긴 있었다. 도경이 하지 말란 짓을 했던 순간은 죄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약을 먹지 않으면 혈관이 터지든 골이 터지든 뭐 하나는 반드시 터질 것 같은 상황들이었다.

무영이 이안과 같은 반이었던 백인 남자애와 싸우다 과일을 바닥에 다 쏟은 것으론 모자라 그것들을 밟기까지 해 도경의 아파트 카펫을 다 들어내야 했을 때. 소현에게 처음으로 머리카락을 잡혔을 때. 권 회장이 던진 꽃병이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 벽을 때렸을 때. 그리고 오늘은……

도경은 손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솔직히 오늘은 잘 모르겠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의사가 말릴 짓을 하고 싶게 밀어붙이는지.

약통 뚜껑을 만지작거리던 중, 그때까지 코트를 입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방금 갔다 온 세탁실로 다시 들어가서 코트를 벗었다. 코트 한쪽이 묵직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이 폰으로 처음 찍은 사진]

지한에게서 온 메시지는 간단하고 불친절했다. 사진이라고 했으면서 사진도 없었다. 세탁실에서 부엌으로 돌아오는 내내 새 메시지나 사진은 뜨지 않았다. 다시 앉으려 식탁 의자를 조금 더 뒤로 뺐을 때였다. 대화창 배경색으로 인해 연하던 화면의 색감이 확 어두워졌다.

잠깐 봐선 도통 뭘 찍은 사진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도경은 사진을 눌렀다. 크기를 키워도 알아보기 힘들기는 비슷했다. 지한이 제 얼굴을 찍어서 보내줄 것이라고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뭔지 하나도 안 보이는 사진을 찍어서 보낼 줄 알았던 것도 아니다.

이게 무슨 사진, 까지 메시지를 쳤다 지웠다. 글자 하나하나를 일일이 손가락으로 치고 있기엔 그의 상태가 양호하지 못했다. 지한에게 전화를 거는 동안 문득 색다른 걱정이 들었다. 도경이야 메시지가 귀찮아서 통화 버튼을 더 자주 누른다지만 통상적으로 먼저 전화하는 쪽이 아쉬운 놈 아니던가. 그러면 지한은 도경이 과하다고 생각할까? 해본 적 없는 고찰은 더 깊어지지 못하고 끊겼다. 전화를 받은 지한 덕분이었다.

―내가 너무 늦었는데 사진 보냈어요?

지한은 단순히 언어능력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늘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몇 발자국 먼저 나가 있었다. 올바른 길로나 가있으면 문제가 아니었겠으나 지한은 늘 헛다리를 짚었다. 그러면서도 항상 도경의 의도를 내다보려고 애썼다. 번번이 틀리면서도 멈출 수 없다면 습관일 텐데, 결벽증만큼이나 소모적이기만 하고 효율은 없는 습관이었다.

“아니요. 안 자고 있었어요. 그건 괜찮은데.”

―근데?

“무슨 사진인지 안 보여요. 너무 어두워서.”

지한이 조용해졌다. 보나 마나 다리를 떨고 있을 것이다. 입술을 씹거나 핥는 등의 정신 사나운 짓도 함께 하고 있겠고.

“방금 찍으셨어요, 사진?”

―화질이 좋아서 보라고 보낸 건데. 그럼 잠깐 기다려 봐요. 내가 다시 찍으면.

화질을 강조하기엔 사진 자체가 너무 어두웠지만, 도경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핸드폰 마음에 드세요?”

또 조용했다. 역시 안 봐도 보이는 것 같았다.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여기저길 봤다가 결국은 아래로 고개를 숙여버리는 모습.

―내 옛날 폰이 너무 좆같은 거라 그거랑 비교하면 좀 그런데.

“뭐 같은 거요?”

―……내가 쓰던 건 너무 오래된. 어, 오래된 거였다고. 요.

도경은 휴대폰을 식탁에 눕히고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죽 늘어선 약통들 앞의 전자기기가 다른 별에 떨어진 이방인처럼 튀었다.

―생일 언제예요?

지한이 호기롭게 주제를 바꿨다.

“다음 달 14일이요.”

―생일이 2월 14일이에요?

“네. 그래서 초콜릿 선물 싫어해요.”

―아, 진짜요.

“농담이었어요.”

웃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경은 농담에 소질이 없었다.

―그런, 무슨 날이 생일인 사람 나 말고는 못 봤는데.

“잘됐네요.”

―왜요?

“이제 제 생일 못 잊어버리실걸요.”

지한이 다시 조용해졌다. 연속으로 당황시켜 버린 듯했다. 실수였나 싶다가도 우스웠다. 이쯤 됐으면 그만 당황할 때가 되고도 남았다. 지한은 확실히 도경보다도 이런 쪽에 서툴렀다.

“저도 지한 씨 생일은 절대 못 잊어버릴 것 같아요.”

상대의 마음에 들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과정. 그런 과정들로 이루어진 어떤 것.

가봐야 한다며 전화를 끊은 지한은 곧바로 메시지를 하나 보내왔다.

[생일선물 뭐 가지고 싶어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패기가 넘친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뭘 가지고 싶다고 하면 사줄 돈은 있고? 라고 되묻는 자신을 상상하다 그만둔 도경은 왼손 중지로 느릿느릿 키보드를 눌렀다.

[생각해 볼게요]

메시지 옆의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도경은 지한이 보낸 사진을 확대했다. 갑자기 어둠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것인지 도경의 눈이 아까는 감지하지 못했던 사진 속 풍경의 윤곽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주차장과 외부 공간을 분리하는 수풀. 위쪽에서 희미하게 쏟아지는 빛. 지한이 사진을 찍은 장소는 M호텔 옆 편의점이었다. 시간상 시우를 데리러 온 것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버티다 나왔으면 마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제 도경은 더 이상 지한과 우연히 마주치는 요행을 바랄 필요가 없었다. 지한은 도경의 말만 듣고 쇼핑몰 사이트에 얼굴이 노출되지 않는 조건으로 계약했다. 만나고 싶을 때는 시우가 일하는 호텔에서 얼쩡거리는 대신 만나자고 하면 끝이었다. 도경이 부르면 지한은 온다. 기꺼이. 흔쾌히. 기쁘게.

그러면 시우와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도경은 어두워진 휴대폰 액정을 건드리며 생각했다. 그냥 그 바에 발길을 끊으면 간단히 끝날 고민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도경의 손등에 닿았던 체온과 촉감이 갑자기 현재 겪고 있는 감각인 듯 생생히 떠올랐다.

부드러운 말투와 유순한 눈매를 가졌지만 지한을 볼 때에 한해 그 눈매에 강한 기운이 스며드는 시우. 지한에게 접근하기 위한 매개체로 쓰려고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무시하면 되는 남자. 그런데 무시가 안 되니 강제로 치워버리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도경은 싱크대로 가 물을 틀었다. 높은 수압의 물이 손등을 때렸다. 이미 씻어서 깨끗한 손을 재차 씻었다. 예민한 피부에 금세 붉은 기가 퍼졌다. 수도에서 쏟아지는 물도, 빨개진 살을 문지르는 손도 멈추지 않았다. 그 둘이 멈춘 것은 손에 이어 팔목까지 빨개지기 직전이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컵에 물을 받고 약통들을 다 열었다. 한 통에서 한 알씩 꺼낸 약들이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그것들은 물을 타고 한꺼번에 도경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물에 닿는 즉시 녹아내리는 약이 젖어있는 손바닥에 하얗게 흔적을 남겼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무작위로 떨어진 물방울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퍼져 있었다.

#40

무영은 새 메시지가 쌓여있는 휴대폰을 러그 위에 던졌다. 병원에 입원해 심심하니 늙은 아비를 보러 놀러 오라는 메시지라니. 그것도 열 개씩이나. 어쩌면 김 회장은 소문대로 정말 오락가락하는 상태일지도 몰랐다. 유서는 멀쩡한 정신으로 작성해 놨어야 할 텐데. 진심으로 걱정이 되려 했다.

얼마 못 가 걱정을 멈춘 무영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타고나길 진중함과는 동떨어진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열다섯 살 차이 나는 장남이 명절에 대놓고 그런 적도 있었다. 혼혈은 다 열성인 거야, 아니면 너만 떨어지는 거야? 배다른 형제들에겐 미안하게도, 그 정도 급의 언어로는 무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무영의 외가를 ‘러시아 깡패’라고 싸잡을 줄은 알면서 그 깡패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공격력은 고려할 줄을 몰랐다. 똑똑하고 독하다고 소문난 한국인들이 이상하게 자식은 잘 못 키웠다. 김 회장 부부가 좋은 예였다. 그들의 자식들은 샴푸 하나도 직접 사러 가지 못하는, 멍청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란 무엇인가로 자랐다.

「내가 열성이면 나보다 못생기고 키도 작은 형님은 사람이 아니겠네?」

반격에 나가떨어진 이후로 첫째는 매해 명절만 되면 무영과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 꼴이 지겨워서 몇 년 전부턴 한국보다 러시아에 더 오래 있었다. 올해도 연말에만 마음을 다잡고 견뎠으면 지금처럼 마당 없는 아파트에서 처량하게 누워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진동으로 바꾸는 것을 깜박하고 식당 같은 곳에 갔다 전화가 오기라도 하면 이목을 집중시키곤 하는 시끄러운 노래가 넓은 거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감히 아빠 문자를 씹느냐는 분노의 전화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무영은 러그에 파묻혀있는 휴대폰을 주웠다. 발신자는 김 회장이 아니었다. 액정엔 무영이 한국 국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원흉의 이름이 떠있었다.

“응, 이안이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야한 생각하다 내가 보고 싶어졌어?”

―형. 도경이 형 생일에 선물 뭐 줄 거야? 벌써 샀어?

인사도 없이 용건부터 말하는 태도보다도 대화 주제가 더 후졌다. 머리카락을 다 쥐어뜯어 놓고 싶은 놈한테 생일선물은 무슨. 그러고 보면 소현은 참 멋진 여자였다. 체급 차가 심한 상대를 맨손으로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급소 공격이었다. 따라서 몸싸움이 벌어져봐야 도경의 중심이나 걷어찰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멋진 여자는 공격 방식도 남달랐다. 소현은 도경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무영이 보는 앞에서. 무영은 진심으로 소현을 애도했다. 도경과 결혼해서 노망날 때까지 살았어야 하는데 너무 빨리 죽어버렸다.

“아직 몰라 뭐 줄지. 왜, 내가 도경이한테 줬으면 좋겠는 거 있어?”

―아니? 그런 게 있으면 내가 주지 왜 형한테 주라고 해.

“그러네. 내가 멍청해서 몰랐다.”

―내일 같이 사러 갈래?

인터넷도 있고,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는 회사에 깔린 신입들도 있는데 편한 길들은 다 놔두고 직접 사러 가겠다는 발상은 귀여워해 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무영은 싫다고 하지 않았다. 원래 마음은 논리정연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내가 데리러 갈 거니까 택시 타고 출근해. 회사 몇 시에 끝나?”

―여섯 시. 오토바이 말고 차로 와야 돼.

“아이고 알겠습니다.”

―꼭이야. 형 맘대로 오토바이 타고 오면 나 혼자 갈 거야.

“왜 이렇게 사람을 못 믿어. 도경이한테 병이 옮았어? 안 되겠다, 너 걔랑 한 달 놀지 마.”

―나 이제 잘 거야. 끊는다!

“그래 굿…….”

나잇. 전해지다 말고 잘린 인사말이 혀 위에서 사그라졌다. 휴대폰을 다시 러그 위에 던지고 누웠던 무영은 억지로 일어났다. 내일은 밤까지 이안과 있게 생겼으니 오늘이라도 클럽에 들렀다 와야 할 것 같았다.

재킷 하나만 걸치고 나가려다 창을 때리는 바람소리에 발이 묶였다. 겨울 골프도 쳐본 몸이라지만 밤 기온은 차원이 달랐다. 뭐라도 더 걸치면 낫겠는데 딱히 걸칠 것이 없었다. 무영의 옷장엔 목도리나 모자가 없다시피 했다.

외가가 러시아 내에서는 따듯한 축에 속하는 도시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국과 러시아가 제일 추워지는 시기엔 아예 지구 반대편에서 돌아다니느라 싸매는 습관이 들지 않기도 했다.

바람을 힘겹게 막아내는 창가에서 한 발 떨어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구입한 지 일주일 만에 옷걸이로 전락한 실내자전거였다. 손잡이와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지고 널브러져 있는 시커먼 옷들 위로 새하얀 것 하나가 누워 있었다. 도경이 버리라고 한 지한의 목도리였다. 아직까지 집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줄은 무영도 몰랐다.

그는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 손에 조금만 힘을 빼면 바로 흘러내릴 듯 부들부들했다. 딱 오늘과 같은 의식의 흐름을 거쳐 목도리를 하고 나갔던 날이 있었다. 호텔 바에서 이안을 만났던 날이기도 했다. 멀쩡하던 이안은 무영이 전화를 받고 오자 갑자기 똥 마려운 강아지가 되어 엉덩이를 들썩거리더니 나가자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말이 없더니 주차장에까지 내려가서 한다는 말이 아리송했다.

「제발 그거 갖다 버려.」

내용은 아리송할 것이 없었다. 거의 비는 사람처럼 말하는 이안의 말투가 이상했다. 도경이 버리라고 했는데 안 갖다 버려서 짜증이 났다고 하기엔 너무 절박했던 것이다.

그 뒤로는 한 번도 목도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 없었다. 이안이 공부를 못하긴 했어도 지능까지 막 심각하게 떨어지진 않았다. 그렇게 간절히 버리라고 말한 물건을 하루아침에 까먹은 것은 아닐 테고, 뭔가 말하기 껄끄러운 부분이 있으니 모르는 척하고 있는 중일 터였다. 내일 만나서 은근슬쩍 떠볼 수도 있었겠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이안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고, 묻는다 한들 속 시원한 답변이 돌아올 리도 없었다. 이안은 도경의 말이라면 부모 말보다 더 신봉했다. 도경이 지키라고 한 비밀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켰다.

무영은 목도리를 원래대로 시커먼 옷들 위에 눕혀놓고 돌아섰다. 왜 다들 얼마 하지도 않을 목도리에 신경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버릴 생각이 깨끗이 사라졌다. 재미있는 건 다 같이 알아야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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