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Action (15/38)

  15. Action

#37

거울이 도경을 비췄다. 커다란 창문으로 쏟아지는 역광이 얼굴을 그늘로 어두컴컴하게 뒤덮었다. 머리가 미묘하게 엉성해 보인다고 생각하던 그는 거울에 가까이 붙어 섰다. 평일에만 오는 청소도우미가 전날 닦아놓고 간 유리에 하얀 개털 한 가닥이 붙어있었다. 어젯밤 본가에 들렀을 때 코트에 딸려 나온 듯했다.

개털을 떼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살살 매만지고 나니 눈에 거슬렸던 머리가 괜찮아졌다. 이제 향수만 뿌리면 모든 준비 단계가 끝났다. 탁상 위에 놓인 향수병은 딱 두 개였다. 도경의 손이 자연스레 더 작은 병으로 갔다. 스프레이에서 분사된 향수가 주위 공기를 달짝지근하게 바꾸었다.

몇 달 전이었다면 진부하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향이다. 지한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탔던 날 이후로 향수를 바꿨다. 도경과 똑같은 향수를 썼던 소현 때문이었다.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기억을 소환했다. 지한이 도경에게서 소현의 향을 떠올리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탄 도경은 시동을 걸기 전에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새로 와있는 메시지가 없었다. 그는 시동을 걸며 벨트를 맸다. 기다릴 일만 남아있었다.

자동차와는 확연한 차이를 가진 엔진 소리가 주말 오전 주차장의 평화를 깨트렸다. 굉음의 주인공은 불과 2, 3초 만에 도경의 차 앞에 도착했다. 한쪽 발로 바닥을 짚은 운전자가 헬멧을 벗고 머리를 털었다. 오늘 지한은 도경이 사진을 통해서도, 실제로도 본 적 없는 재킷을 입고 나타났다. 전에 입고 있는 것을 봤던 재킷과 달리 진짜 가죽 같았다.

시동이 걸려 있는 오토바이에서 내린 지한이 운전석 쪽으로 걸어왔다. 길이가 짧은 재킷은 달라붙는 바지를 입은 지한의 하체를 정직할 정도로 숨김없이 드러냈다. 길고 늘씬하면서도 허벅지에는 근육이 있어 움직일 때마다 자꾸 눈길을 끌었다. 허구한 날 쫙쫙 찢어진 바지를 입고 다니더니 웬일로 구멍이 하나도 안 난 것을 입었다. 도경은 주차장 공기로라도 정신을 맑게 하려 창을 내렸다.

“출입구에서 바로 들여보내 주셨어요?”

“이거 주면서.”

지한이 영수증처럼 생긴 종이를 도경에게 보여주었다. 어제 들어오면서 출입구 관리실에 미리 말해놓은 보람이 있었다. 경비는 도경이 몇 동에 사는지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었다. 관리인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작게라도 뭔가를 건넨 도경의 성실함 덕이었다. 잘 모르는 이들에게 환상을 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으르지만 않다면.

“엘리베이터 타러 들어가는 문 옆에 대시면 돼요. 그 종이 잘 보이게 두시고.”

어려움은 상대가 도경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찾아왔다. 업무적이나 금전적으로 엮이지 않은 이들은 대부분 도경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어디 가서 친구라고 소개할 수 있는 이들은 무영과 이안 정도가 다였다.

어쩔 땐 도경과 함께하길 원하는 것 같다가도 어쩔 땐 소현만큼 도경을 증오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무영까지 걸러내고 나면 이안밖에 남지 않았다. 인간 대 인간으로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뿐이란 뜻이었다.

아쉽지는 않았다. 덜떨어진 것들의 애정은 불필요했다. 이안이 도경에게 보이는 충성심의 본질을 굳이 파헤치지 않는 맥락과 동일했다. 성가셨다. 마음의 소리와 싸우기도 지치는 삶이었다. 남의 목소리에까지 일희일비하다간 명을 다 못 채우고 죽을 수도 있었다.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온 지한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몇 번 타봤다고 폼이 익숙했다. 도경은 히터를 한 단계 올렸다.

“시간이 딱 맞았네요. 저도 내려온 지 얼마 안 됐거든요.”

“밖에서 기다리다 왔는데.”

“지금 도착하신 게 아니에요?”

지한이 아차, 하는 얼굴로 도경의 눈치를 봤다. 어이가 없기에 앞서, 도경은 어리둥절했다. 눈치를 볼 거면 애초에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것을 조금이라도 하면 해결될 일이 아닌가? 소리 내어 하지 못할 말을 삼킨 그는 기어를 바꿨다.

“더 일찍 연락하지 그러셨어요. 날도 추운데.”

지한이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일도 어려워하는 멍청이든 말든 도경이 걱정할 거리는 아니었다. 그의 신경은 그를 대하는 지한의 태도 전반에 깔린 감정을 놓치지 않는 데에 쓰여야 했다. 도경을 싫어하지 않는 타인이 이안 하나뿐이란 말은 성급했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지금 당장은 이안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아무리 실전 경험이 부족한 분야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지한은 도경을 좋아하고 있었다.

“메시지 잘 안 보잖아요. 전화는, 준비하는 데 방해될까 봐.”

좋아한다. 그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충족해야 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까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도경이 지한에게 바랐던 발정과 애정의 차이도 문자론 서술 가능하나 진실로 안다고 할 자신은 없었다. 당장에 섹스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발정이 나보지도 않았고, 떠올리는 것만으로 배가 부르다는 상대를 만나본 경험도 전무하니 자신감을 가지기 어려웠다.

지한이 도경에게 가진 감정의 결을 꼭 알아야만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저 그 감정이 최고치를 찍을 때까지 착실하게 현재의 포지션을 유지하면 된다. 그런 다음…… 도경은 함정과 마주했다. 최고치의 기준이 모호했다. 도경이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할 때 이미 지한은 최고치를 찍고 내려가는 뒤라면?

지한이 ‘좋아하는’ 행위를 멈추게 되리라 짐작되는 시점은?

“제가 지한 씨 메시지에 답 안 한 적 있었나요?”

“같이 있을 때 보면 잘 안 하는 것 같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진실을 알게 될 때.

도경은 자신을 비웃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지금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툭하면 도경 앞에서 넋을 빼는 지한이지만 전말을 알게 되고 나서도 마취 덜 풀린 환자처럼 굴 리가 없는 것이었다. 추론이라고 하기에도 창피한 기정사실을 성찰이랍시고 하다니.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느라 뇌가 덜 깨어있었다.

“저 신경 써주신 거예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고마워요.”

꼭 야한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지한이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고 다리를 떨었다. 더 보고 있다간 가만히 좀 있으라고 잔소리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리고 단지 출입구를 막 통과한 차가 도로로 나온 참이라 도경은 어쩔 수 없이 정면을 보았다.

잘된 일이었다. 지한이 쉴 새 없이 다리를 떨어대는 꼴을 더 보고 있다간 제발 점잖게 좀 앉아있어 보라고 잔소리하고 싶어졌을 터다.

언제나와 같이 하고 싶은 말을 잘 참아낸 도경은 콘솔 박스를 열었다. 황 원장이 하도 가져가라고 성화를 해서 받아온 영양 주스 두 병이 넣어뒀던 그대로 눕혀져 있었다. 그중 하나를 들어 달달 떨리는 허벅지 위에 올려두자 지한이 즉각 다리 떨기를 멈추었다. 효과가 좋았다.

“저희 엄마 친구가 이번에 새로 출시하신 건데 몸에 좋대요.”

“이걸 왜 나한테.”

“피곤하면 촬영도 잘 안 될 거 아니에요.”

출시일로부터 일주일도 안 지난 주스의 효능은 입증된 바 없었다. 현경이 한 모금만에 몸서리를 쳤다는 후기만 건너들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지한은 도경의 말만 믿고 병뚜껑을 땄다.

“아 나 이게 뭐, 이거 맛이 완전 쓰.”

쓰레기란 단어가 채 완성하지 못하고 지한의 입 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도경은 애써 고개를 앞으로 고정했다. 보고 싶었다. 그가 준 주스를 차마 쓰레기라고 말하지 못하는 지한의 표정. 오른쪽 시야로 지한이 병을 입에서 떼는 동작은 보여도 표정처럼 세세한 부분까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요? 저희 형은 맛있다고 했는데.”

“맛있다고? 이거 직접 마셔봤어요?”

“네. 어제.”

현경은 남은 주스를 하수구에 쏟아 버렸고 도경은 애초에 맛도 보지 않았지만, 그 또한 지한은 모르는 사정이었다.

“별로면 그냥 뚜껑 닫아서 여기 넣어두세요.”

“아니, 못 마실 정도는 아니고…….”

지한이 부정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뒤로 갈수록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도경은 입 안을 깨물었다. 웃겨서 웃고 싶은 마음과 지한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했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리게 될까 봐 불안해졌다. 서둘러 안 웃긴 것들로 머릿속을 채웠다. 권 회장. 현경. 무영. 그리고 소현. 그들 덕분에 도경은 지한 앞에서 방정맞은 웃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촬영 스튜디오는 무영이 자주 드나드는 동네에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녀가 한국에 자주 들락거리던 시절엔 이안과 함께 가 러시아 음식을 얻어먹은 적도 꽤 있었다.

스튜디오가 자리한 골목 구석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비정상적인 고요함이 그를 반겼다. 방학을 맞이해 귀국한 학생 신분일 때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다녔던 골목이 새삼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지한이 성호에게 맞았다던 장소도 분명 근처일 것이다. 슬쩍 본 지한은 졸음기 있는 얼굴로 입김만 뱉어대고 있었다. 신경 쓴 도경만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스튜디오엔 사진사와 조수로 보이는 남자 둘만 있었다. 다 밀어버리고 싶게 생긴 수염을 단 사진사는 먼저 지한의 이름을 확인해가며 살갑게 인사했다. 살갑기는 조수로 보이는 남자나, 옷걸이 뒤에서 튀어나온 여자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인 비율이 아니라더니 진짜였네요.”

지한을 거울 앞으로 데려가며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쇼핑몰 촬영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도경이라도 스튜디오 사람들의 태도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직 계약서에 사인도 안 한 모델 후보에게 예의를 차리는 사진작가란 환상 속에서도 어색한 존재였다.

지하에 있는 스튜디오는 촬영이란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모델이 서게 될 배경 천 앞만 깨끗했고 카메라 뒤론 온갖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직원이 지한을 데리고 나올 때까지 앉아 기다릴 만한 데라곤 모자 여러 개가 겹쳐져 올라가 있는 의자뿐이었다.

모자를 테이블 위로 옮긴 도경은 티슈를 뽑아 의자 표면을 쓸었다. 묻어나는 먼지는 없었다. 그래도 그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최대한 덜 찝찝하고자 치르는 의식에 가까웠다. 지한이 데려갔던 고깃집 의자에 바로 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운을 쏟아부었는지는 돌이키고 싶지도 않았다.

입힐 옷을 고르기가 쉽지 않은지 직원과 지한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숙면과 연이 없다지만 주말만큼은 평일보다 한두 시간 늦게 침대에서 벗어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있자니 자꾸만 몽롱해졌다.

아침은 언제 먹자고 해야 적당할지, 테스트 촬영이 생각보다 길어지면 직접 음식을 사다 날라야 할지 등 쓸데없는 걱정이 도경의 정신을 그나마 유지시켰다. 덜그럭대며 굴러가던 의식은 힘차게 문을 밀어젖히며 들어오는 인물의 등장과 함께 정지했다.

“왜 네가 여기 와 있어?”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말투와 달리 선글라스를 벗는 무영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해가 다 뜨지도 않은 한겨울 아침에 선글라스는 왜 끼고 왔는지 몰랐다.

“그러는 너는 왜 와. 네가 쇼핑몰 사장이야?”

무영이 도경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듯 도경 역시 놀라지 않았다. 당연히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골프장에 갔던 날 도경과 지한은 바로 도망치지 못했다. 주차장으로 가려면 라운지를 반드시 통과해야 했는데 이안과 무영이 바로 그 라운지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도 나왔다. 밥도 안 먹고 가겠다고 했다간 겨우 잠재워놓은 이안이 다시 애처럼 굴 수 있었다. 적어도 식사까지는 한 다음 빠져야 안전했다.

주문한 음식이 거의 다 비어갈 무렵이었다. 이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무영이 지한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그거 잘 생각해봐요. 지한은 잠자코 턱만 끄떡였다. 새 음료수를 사들고 돌아온 이안 때문에 무슨 소리냐고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둘만 남게 되면 꼭 물어봐야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클럽 하우스를 나와 차에 타자마자 지한이 먼저 없는 말주변을 총동원해 털어놓았다. 도경이 이안을 따라 화장실로 사라진 직후 무영이 지한에게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느냐고 물어봤다는 것이었다. 제 명함과 아직 정식으로 오픈되지 않은 쇼핑몰 CEO의 명함을 지한에게 하나씩 주면서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이 어처구니없었다.

이안에게는 비밀이라고 했단다. 도경도 걱정하지 않는 부분을 염려하는 섬세함이 무영에게 있는 줄은 또 처음 알았다.

무영이 어떤 전개를 바라고 손을 내미는 척했는지는 몰라도, 도경을 향한 지한의 신뢰감은 절대 얕지 않았다. 무영에게 명함을 받은 과정을 쭉 설명한 지한은 망설이고 망설이다 도경의 의사를 물었다. 쇼핑몰 모델 같은 건 안 해봐서 어떨지 모르겠다면서.

조언자의 위치에 서게 된 도경이 당시 느낀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양쪽 다 위험해 보이는 갈림길 앞에 선 기분이라고 하면 적당할 듯했다.

별로 자신 없어 보이는 지한에게 보여야 할 바람직한 반응은 무슨 소리냐, 당연히 잘할 것 같다 따위의 응원이었다. 지한은 뭘 입혀 놔도 잘 소화할 것 같다는 것이 솔직한 의견이기도 했다. 문제는 소개한 인간이 무영이란 점이었다.

무영은 이유 없이 선의를 베풀지 않았다. 도경과 지한의 사이에 어떻게든 껴보려고 부리는 수작임이 뻔했다. 무영의 선의가 순수했다 하더라도 사실 도경은 지한에게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얼굴만 실컷 팔리는 일을 단발성으로 하겠다고? 왜?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안달 내는 것처럼 들릴 위험을 무릅쓰고 먼저 미끼를 던졌다. 억지로 지한의 입 안에 쑤셔 넣은 미끼나 다름없었다. 같이 갈까 묻는데 거기다 대고 어떻게 오지 말라 하겠는가. 양해 없이 대뜸 키스해도 도경에게 별말 못하는 지한이.

“나는 소개해준 사람이니까 왔지. 잘하나 궁금해서.”

바닥에 넘어져있던 스툴을 세워 털썩 앉은 무영이 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앉은 의자는 하필 까만색이라 스튜디오 안의 다른 물건들보다 한층 더 더러워 보였다. 보지도 않고 앉아버리는 비위가 존경스러웠다.

“너도 먹을래?”

무영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도경이 지난번에 사다 줬던 젤리였다. 뜯겨나간 틈으로 새콤한 냄새가 새어나왔다.

“일주일 전에 준 걸 왜 지금 먹고 있어.”

“이안이가 내 차에 두고 갔어. 뭔 맛으로 먹나 했는데 중독되네. 먹어봐. 자, 아―.”

젤리를 든 무영의 손이 가까워졌다. 차가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 도경은 손등으로 손을 쳐냈다.

“치워.”

웬일로 무영이 한 번에 밀려나 주었다. 그는 가끔 쓸데없는 힘자랑으로 진을 빼놓을 때가 있었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도경에게 그 짓을 할 때면 보는 사람들이 더 긴장하곤 했다. 거절당한 젤리를 자신의 입속에 넣은 무영이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매정한 남자.”

“매정한 게 뭔지는 알아?”

“그럼. 나 같은 미남이 먹여 주겠다는데 치우라고 하는 거잖아.”

“알았으니까 그만.”

무영에게서 떨어지고 싶다는 소망이 강해지고 있을 때, 지한과 직원이 함께 돌아왔다. 직원은 카메라 뒤에, 지한은 배경 천 앞에 섰다. 곧 사진사와 조수도 카메라 뒤로 왔다.

“좋네.”

“그죠?”

“옷이 거의 맞춤인데.”

뭐가 좋다는 것인지도 말해주지 않고 저들끼리 두루뭉술한 코멘트를 남발하는 동안 지한은 무표정하게 눈만 깜박였다. 스튜디오 안의 사람들은 지한이 어색해 죽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분위기였다.

신기하게도 도경의 눈엔 보였다. 별 노력 없이 바로 지한의 표정을 읽은 셈이었다. 그게 뿌듯하기까지 할 일인지는 헷갈렸지만, 어쨌든 기분 나쁘지 않았다.

지한이 두 번째로 갈아입고 나타난 옷은 계절에 비해 얇은 감이 있었다. 옷을 골라준 직원이 앞 단추를 두 개나 풀어놔서 취한 사람처럼 단정하지 못했다. 얼마 못 가 셔터 소리가 멎었다. 사진사와 직원이 다시 자기네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도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한에게 다가갔다. 거침없이 앞섶에 닿는 손을, 지한은 제지하지 않았다. 다 잠가버리면 직원이든 사진사는 다시 풀라고 할 것이 뻔했으므로 딱 하나만 잠갔다. 단추 하나 잠그는 데 최선을 다하는 도경의 손을 내려다보던 지한이 픽픽 웃었다. 뭐가 웃기냐고 물어볼까…… 막 잠근 단추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도경은 시선을 들었다.

보기 좋게 올라가 있던 지한의 입가가 도로 내려왔다.

“이거 뭐, 얼굴이 튀어서 옷이 묻힐지도 모르겠어요.”

지한은 또 직원의 손에 이끌려 옷걸이가 늘어진 공간으로 사라졌다. 컴퓨터 앞에 앉아 조수에게 지시 사항을 내리던 사진사가 도경을 돌아보며 농담조로 말했다. 그리 말하면 맞장구라도 쳐줄 줄 안 모양이었다.

“얼굴은 안 나갈 거라 상관없어요.”

“저 얼굴을 안 내보내면 섭섭하지 않을까요.”

“얼굴 내보내야 하는 거면 계약서에 사인 안 할 건데요.”

그제야 장난이 아니란 것을 알아들은 사진사가 당황스러워했다.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그럼 제가 사장님한테 연락해보고 나서.”

“사장님한텐 무영이가 연락할 거예요.”

갑자기 언급되는 자신의 이름에 무영이 그래? 하고 일어섰다.

“내가 연락한다고?”

“지금.”

옆에 있다 보면 1분에 한 번씩 소리 지르고 싶게 만드는 무영이지만, 동족으로서의 도리는 지킬 줄 알았다. 그는 지체없이 쇼핑몰 사장에게 연락을 넣었다. 나가서 하라는 눈짓도 알아듣고 밖으로 나가서 통화 내용을 보호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려주지 않으면 소문내 버리겠다고 진상을 부릴 미래가 훤히 내다보였으나 일단 지금 당장 지한의 얼굴부터 지키고 봐야 했다. 괜히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따라 나온 것이 아니었다.

테스트 촬영은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끝났다. 사장의 연락을 받은 직원과 사진사의 열의가 눈에 띄게 꺾인 탓도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도경이 가지 말라고 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지한은 남들의 식은 열정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의식에 오류가 난 것일까 봐 그렇게까지는 여기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었으나, 촬영 내내 지한은 도경이 있는 쪽만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튜디오를 빠져나온 지한은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무영도 전자담배를 꺼냈다. 냄새가 나는 연기든, 냄새 없는 연기든 그리 달갑지 않기는 비슷했으나 도경은 멀리 떨어지지 않고 두 흡연자 사이를 지켰다.

한 시간이 지난 아침 골목은 크게 달라져있지 않았다. 골목에 전체적으로 깔린 그늘은 여전했고 가게들은 닫혀있었다. 어쩐 일로 조용히 담배만 피우나 싶던 무영이 도경에게 이제 어딜 갈 거냐고 물었다. 대답하기 전, 도경은 지한을 힐끗거렸다. 건물 벽에 기대어 담배 연기를 뱉는 지한의 눈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또 보였다. 감흥 없는 얼굴 뒤에 감춰진 실상이. 지한의 신경은 무영과 도경에게로 잔뜩 쏠려 있었다.

“몰라. 넌. 다시 집에 가?”

“여기 사장 오면 만나고 가려고. 나는 누구랑 다르게 모든 사람하고 잘 지내.”

집안 출판기념회에서 남의 아들 코를 가격한 인간이 당당히 할 말은 아니었다. 반박하기도 귀찮아서 지한의 담배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훔쳐보고 있는데, 무영이 갑자기 벼락을 날렸다.

“심심하면 오늘도 뒤에 태워줄까?”

담배를 입가로 가져가던 지한의 손이 허공에서 갈 곳을 잃어버린 것처럼 멈칫했다. 갈 곳을 잃어버리기는 도경의 판단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강제 마비 상태에서 깨어난 도경은 무영의 팔을 잡고 무작정 걸었다.

“그 얘기 하지 마.”

무영은 스튜디오 건물로부터 두 건물을 지나쳐 멈춘 뒤에도 속삭이는 수준으로 읊조리는 도경을 뜨악하게 보았다.

“뭘 말하지 말라고. 네가 내 오토바이 뒤에.”

“죽여버린다.”

드디어 말귀를 알아먹은 무영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깜박이지 않는 눈도 그랬지만 벌어진 입은 더 바보 같았다.

돌아온 도경과 무경을 본 지한이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하얗던 담배는 지한의 발에 밟혀 지저분한 꽁초가 되었다. 도경은 그때까지도 얼떨떨한 빛을 지우지 못한 무영에게 따로 인사하지 않고 돌아섰다. 지한의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차에 도착해 운전석 문을 열려던 도경은 마음을 바꿨다. 그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내내 다소 쳐졌던 지한의 발소리가 거슬렸다. 그러나 그는 지한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지한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저기, 화났어요?”

화나지 않았다. 않았는데, 아니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굴고 싶지 않았다. 차를 사이에 두고 도경을 건너보던 지한이 웃었다. 마냥 신나서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어딘가 경직된 부분도 분명 있고, 한편으론 뭔가를 겁내는 빛도 살짝이나마 비치는, 웃음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는 애매한 표정이었다.

아무런 연습 없이 도심 한복판에 방생된 동물. 꼭 그렇게. 위험하고 위태로운.

도경은 뒤늦게 미소 지었다.

“아니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났다. 당장 큰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딘가가 갈라지고 찢어지기 시작했음을 알리기는 하는, 작고 하찮은 소리였다. 주변을 둘러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환청이었으니까.

#38

자정이 지난 지 한참 된 새벽의 술집 안은 에너지를 잃지 않았다. 갓 성인이 된 것처럼 어린 티가 나는 남녀 무리는 아까부터 자리에 없는 친구 욕을 하느라 목청을 아끼지 않고 있었고, 그들보다 딱 두 배쯤 더 오래 산 얼굴을 한 남자 둘은 1분 간격으로 웃느라 술 마실 시간도 모자란 듯했다.

시장판처럼 시끄러운 가게에 앉아 맛도 없는 맥주를 마시는 취미는 없었지만, 지한은 끈기 있게 자리를 지켰다. 술로 먹고 사는 시우가 돈 주고 남의 술을 사 마시려 드는 일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와 오토바이 시동을 끄자마자 시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 맥주 사줘. 시우가 지한에게 뭘 먼저 사달라고 하는 것 역시 일 년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손을 씻고 돌아온 시우가 맞은편에 앉아 지한을 보고 웃었다. 딱히 당장 해야 하는 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한은 점퍼에 팔을 끼워 넣으며 일어섰다.

“담배.”

어디 가냐고 묻기 전에 알아서 나가는 이유를 말하고 돌아섰다. 문을 밀자 찬바람이 가차 없이 들이닥쳤다. 얼굴이 찬물을 맞은 것처럼 싸해졌다. 재떨이가 놓인 간이 테이블 앞에 서서 담배를 꺼내는데 담뱃갑에 빳빳한 종이가 딸려 나왔다.

「꼭 사과하고 싶다고 너한테 이거 주라더라.」

지한은 몇 시간 전 마담에게서 전달받은 명함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종이에 찍힌 단어들이 한꺼번에 읽혔다. 건설사. 전략기획본부. 차장 그리고, 이성호. 회사 생활은 안 해봤어도 차장은 나이가 어느 정도 차야 오를 수 있는 자리인 줄 알았다. 성호란 이름을 가진 그 진상 새끼는 많아 봐야 30대 초반으로 보였었다. 하는 짓만 봐선 20대 초반도 아까웠다.

지한은 진상의 이름 세 글자를 소리 없이 발음해보았다. 어떤 이름들은 세 글자만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고 다른 이름들은 지극히 무난해서 다음날만 되어도 잊혔다. 지한에게 시비를 못 걸어 안달이다 결국 원하던 대로 뺨까지 날린 망나니의 이름은 평범했다. 몇 번을 발음해보아도 젊어서부터 돈으로 여자를 사는 데 익숙해진 한심한 놈이 연상되는 이름은 아니었다.

사람을 돈으로 살 것 같은 이름이 있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소현만 해도 그랬다. 장소현, 그 세 글자 어디에 돈 주고 남자를 산다는 운명이 적혀있던가. 아니었다.

도경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권도경. 일단 절대 거칠거나 막돼먹은 인성을 가졌으리란 느낌은 풍기지 않는 이름이었다. 예의가 바르고 조신할 것 같았다. 여자·남자 가리지 않아도 되는 이름이라 유한 분위기를 내지만 성씨까지 함께 말하면 인상이 강해졌다. 다 도경과 잘 어울리는 요소들이었다. 도경은 늘 지한에게 깍듯하게 말했다.

식당이나 술집 직원들에게도 매너가 좋았고 심지어는 나사가 여러 개 빠진 것 같은 무영이나 답답한 어린애처럼 구는 이안도 공평하게 친구로 대해주었다. 평생 집 안에서 우아한 취미생활이나 즐기며 살아왔을 것 같은 피부를 가졌으면서 각진 어깨와 큰 손도 가진 남자.

지한은 스물 몇 해 동안 그런 것들과 상관없는 생활을 해왔다. 예의, 격식, 우아함, 부드러움. 어쩌면 그래서 자꾸 보고 싶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것들을 빠짐없이 갖춘 도경이 신기해서.

빠짐없이 사는 기분이 어떤 것일지 지한으로선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공부를 죽어라 해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뚜렷한 꿈을 꿔본 적도 없었다. 하루하루를 버텨나갈 원동력도 부족한 처지에 꿈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네가 얼굴 말고 볼 게 뭐가 있다고 고민해? 대학만 못 나온 게 아니라 고등학교도 못 나왔어?」

오디션 없이 바로 단역 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는 지한에게 소현이 퍼부었던 말이다. 그녀는 애초에 그들의 연을 닿게 했던 오디션부터도 지한의 의지보단 남들의 참견 덕이 더 컸단 것을 몰랐다.

보육원 원장은 다른 졸업생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말든 내버려 두면서 지한의 삶에는 간섭했다. 지한을 특별히 예뻐해서가 아니라, 지한이 엇나가면 그 뒷감당을 고스란히 시우가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원장 부부는 시우를, 자식은 못되어도 조카 정도로는 예뻐했다. 체육관 관장 말 들어서 잘된 일이 뭐 있었느냐고 흉 아닌 흉을 본 원장은, 더 늦기 전에 얼굴을 써먹으란 희한한 조언을 했다. 지한더러 무섭게 생겼다고 했던 사모도 그때만큼은 남편의 말을 거들었다. 요샌 일단 튀고 봐야 돼. 넌 튀니까 분명 눈에 띌 거야.

「병신처럼 굴 거면 관둬. 한 번만 만나달라고 하는 남자들 줄 섰으니까.」

결과적으로 원장 사모는 틀리지 않았다. 지한은 튀어서 소현의 눈에 들었다. 그녀에게서 병신처럼 굴 거면 관두라는 소리를 듣고 난 지한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야망 비슷한 감정을 품었었다. 성공해야겠다, 그래서 아무도 저런 소릴 못하게 만들어야겠다. 야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습관이 되어버린 회의감과 의심이 기지개를 켰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로 성공할 수 있을까.

“아직 불도 안 붙였어?”

시우의 목소리가 지한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지한은 얼른 명함을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너도 하나 줘?”

“아니. 그냥 너 피우는 거 몇 모금만.”

술 마실 때만 담배를 피우는 시우는 한 개비를 혼자 다 피우지 않고 지한이 이미 피우고 있는 것을 나눠 피우는 편이었다. 10대 때부터 그래왔기에 거의 습관이었다. 지한은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번 빨아들인 뒤 시우의 입에 물려주었다. 두어 번 연기를 뱉은 시우가 다시 담배를 지한의 입에 가져다댔다.

“핸드폰 새로 샀어?”

하필이면 필터를 한껏 빨아들인 직후였다. 시우는 연기가 목에 걸려 콜록거리는 지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레들리라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타이밍이 재수 없었다.

“어.”

기침이 겨우 멎었다. 최대한 늦게 들키려고 시우가 보는 앞에선 휴대폰도 안 봤는데 다 소용없는 짓거리였다. 한집에 살면서 휴대폰을 안 들키겠다는 것은 헛된 바람이었다.

“그거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비싸지 않아?”

그냥 생각난 김에 물어보는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지한이 어느 날 갑자기 가지게 된 새 휴대폰에 대해 시우 또한 여러 가능성을 따져보았을 것이다. 가능성이야 무궁무진했다. 물건은 훔칠 수도 있는 것이고 남에게서 빼앗을 수도 있는 것이며 빚을 져서 그 돈으로 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시우라면 그 모든 가능성이 지한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결론에도 금방 이르렀을 것이다. 첫 주먹질이 일어났던 날부터 지금까지 지한의 죄목은 매번 폭행이었다. 절도나 갈취는 없었다. 사채도 지한의 합의금 때문에 시우가 썼지, 지한은 전무했다.

“나도 잘 몰라.”

도경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던 밤, 인터넷에 그 모델을 검색해 보았다. 출시가가 200만 원에 조금 못 미쳤다. 도경에게 한 말은 진실이었다. 태어나서 받아본 생일선물 중 제일 비쌌다. 소현에게서도 옷이며 신발이야 여럿 받아봤지만 그것들은 그녀 자신의 마음이 편하자고 준 것들이지 지한의 무엇인가를 기념하는 선물들이 아니었다.

“몰라? 어디서 났는데?”

“받았어.”

무시무시한 택시비를 내고 겨우 귀가한 지한은 또 다른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먼저 도착해있던 시우가 지한을 맞이했던 것이다. 취조하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피곤한 티를 냈다. 시우는 더 이상 지한을 더 귀찮게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날은.

“받아? 누구한테?”

“네가 잘 모르는 사람.”

시우와 레오의 나쁜 관계가 좋게 작용할 때도 있었다. 적어도 레오가 시우에게 입을 털지는 않을 테니까. 새 휴대폰 기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랐던 지한은 시우가 출근한 뒤 레오에게 연락해 다시 그가 아는 휴대폰 매장을 소개받았다.

거리에 널린 게 휴대폰 판매점이었음에도 지한은 굳이 서울까지 갔다. 그는 편의점 정도를 제외하곤 혼자서 뭘 구매하거나 처리하지 못했다. 늘 시우가 옆에서 결정해주었다. 하다못해 옷도 다 시우가 고르는 것만 입고 살았다.

레오의 친구라는 휴대폰 판매원은 심드렁하게 설명했다. 이거 그냥 유심만 바꿔서 끼시면 돼요. 약정 할부 이런 거 없이 기계만 사신 거라서. 지한의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꼬여갔다. 도경이 200만 원을 쓴 대가로 지한에게 뭘 바라는지 궁금해 펄쩍 뛰고 싶었다. 대체 지한에게 선물을 바쳐가며 요구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새 휴대폰 화면이 꺼지며 지한의 얼굴을 비췄다.

순간 몸 위로 올라와 지한의 아랫입술을 깨물던 도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클럽 사무실에서와 비슷했다. 언제나 사근사근하고 예쁜 남자가 돌변하듯 달려들어 밀어붙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꼬여있던 선들이 풀릴 기미를 보이는 것도 같았다. 지한은 어쩔 수 없이 자문했다.

나랑 자고 싶은가?

“내가 준 목도리 왜 안 하고 다녀?”

이번에도 시우가 지한을 다시 현실로 끌어냈다. 물고만 있는 사이 바람에 타들어 가 짧아진 담배가 뜨거웠다. 지한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불씨가 끈질기게 튀어 올랐다.

“그거, 놓고 왔어.”

“어디에?”

“일하던 가게.”

“무슨 일?”

휴대폰에 관련된 질문을 너무 쉽게 끝낸다 했다. 새롭게 시작된 취조를 견디려면 아무래도 그냥은 힘들었다. 지한은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바람이 세 라이터 불이 자꾸 꺼졌다. 시우가 손으로 보호막을 만들어주었다. 드디어 불이 붙었다.

“며칠밖에 안 했어. 이제 안 할 거야 그 일은.”

“그거 혹시 레오네 가게.”

“아니라고!”

연이은 질문들에 착실하게 답하느라 꾸준하게 끓어오르던 성질이 결국 고성으로 터져 나왔다. 시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핸드폰 새로 샀냐는 기습 질문을 던졌을 때처럼 지한을 빤히 보기만 했다.

시우가 조금씩 움찔거리기 시작한 것은 지한이 두 번째 담배를 다 피우고도 들어갈 생각을 않고 서있은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였다. 시우의 몸이 움츠러든 이유는 겨울바람이었다. 무슨 배짱으로 겉옷도 안 걸치고 지한을 따라 나와서 화 한 번 맘껏 못 내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한은 점퍼를 벗어 시우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지한에게 잘 맞는 점퍼가 시우에겐 다소 컸다. 시우가 점퍼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명함은 딸려 나오지 않았다. 지한은 시우가 했던 것처럼 손으로 라이터 위를 감싸 불이 꺼지지 않게 도왔다. 시우의 입을 빠져나온 연기가 허공에서 우왕좌왕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미아같이.

연기는 곧 위로 솟아올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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