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Shift(2권) (13/38)

  13. Shift

#31

차가 정체불명의 건물 앞에 정차했다. 임대 문의가 붙은 1층은 공사하다 만 상태로 방치되었고 2층은 창문이 죄다 가려져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사람이 있긴 한지 전혀 볼 수 없었다. 무영이 차를 멈춘 골목 인근엔 그런 건물들이 종종 있었다. 무엇을 위한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를 지키는 장소들.

“이래서 내가 그냥 안에서 얘기하자고 한 거야. 여긴 카페도 없다니까.”

다는 아니라도, 이안은 그런 식으로 은밀하게 숨겨진 곳 중 최소한 서너 군데가 특정 취향의 손님들을 위한 가게란 것을 알았다. 현금과 안목을 다 갖춘 업소들은 성매매도 글로벌하게 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입맛에 맞춰 국적부터 나이, 외모까지 폭넓은 옵션을 제공했다. 여러 가게를 찾아다닐 필요 없이 한 곳에서 모든 욕구를 다 충족할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였다.

“누가 형이 여기까지 올 줄, 아니, 그리고 그 안에서 무슨 대화를 해. 사무실이면 또 몰라. 거기는 왜 누나들한테 빌려줘 가지고.”

“너도 저번에 빌려달라고 했으면서? 나는 공평한 사람이라 너한테만 빌려주고 다른 사람은 안 되고, 그런 거 안 해.”

직접 가본 적은 맹세코 없었다. 사람을 돈으로 사고파는 문제에 대한 신념이 있어서라기보단, 원래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모두와 두루두루 잘 지내는 이안이지만 그래도 제일 자주 만나는 사람을 꼽으라 하면 역시 도경이었다. 도경은 대학 시절 그 흔해빠진 대마도 입에 대지 않는 별종이었다. 그와 친하게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유흥과 멀어지게 됐다.

“아, 어쨌든. 사람도 없으니까 그냥 여기서 좀 있으면 되잖아.”

비싼 만큼 고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들이 몰려 있는 골목들의 위치도 무영이 말해줘서 알았다. 아파트 단지들과 수입 자동차 매장들 말곤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동네의 골목은 확실히 버려진 명함과 전단들로 정신 사나운 보통의 술집 골목과 차이점이 있었다. 영업 중인 카페가 단 한 군데도 눈에 띄질 않는다든가.

“사무실이라고 하니까 말인데, 그날 네가 우지한 데리고 올라갔을 때 걔가.”

“지금 꼭 걔 얘기를 해야 될까? 나 지금 기분이 별로…….”

“그 얘기 하려고 나온 건데?”

이안은 무영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하고 싶다던 이야기가 지한에 관한 것인 줄 알았더라면 조용한 데로 가자며 클럽에서 무영을 끌고 나오는 일도 없었다. 도망쳐 나와서 집에 갔으면 갔지.

“알겠어. 우지한이 뭐.”

하지만 좋든 싫든 이안은 이미 무영이 모는 차의 조수석에 타 다른 동네로 건너왔다. 정신 건강에는 집념보다 빠른 포기가 훨씬 좋았다. 한 번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진 죽음도 불사하는 의지가 영혼의 안녕에 끼치는 악영향은 도경을 보는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걔 그날 목도리 하고 왔었던 거 기억나? 강아지 털같이 생긴 거.”

“강아지 털은 모르겠고 아무튼 목도리. 응.”

본사에서 쫓겨났던 날 도경은 일주일을 내리 앓았다. 저러다 쓰러져서 바닥에 머리라도 박으면 어쩌나 걱정돼 몇 날 며칠을 도경의 아파트로 출근했더니 돌아온 대가는 날아드는 비닐봉지였다. 도경이 공기를 다 빼고 접어 매듭까지 마무리한 다음 던진 비닐봉지는 이안의 이마를 맞추고 추락했다. 비닐로 백번 맞아봐야 타격이 있을 리 없었지만 그길로 도망 나왔었다. 생애 처음으로 좌천이란 걸 당한 도경 앞에서 더 버텼다간 타격이 있는 물건도 날아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바닥에 음식물을 흩뿌리느니 자결을 선택할 도경이 죽 그릇을 던지진 않았겠지만.

“그거를 놓고 갔더라고.”

“……그래서?”

“내가 며칠 전에 도경이한테 전화를 했어.”

“형. 아직 우지한 얘기 안 끝났는데 왜 도경이 형 얘기로 넘어가.”

“나는 우지한 번호 모르니깐 가져가서 걔한테 돌려주라고. 그랬더니 알겠다고 했거든?”

시답잖은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이안은 무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얼마 있다 다시 전화가 와서 그냥 그거 갖다 버리라는 거야. 내가 안 버리면 자기가 와서 버린다고 짜증 내면서.”

“그래서 버렸어?”

“처음엔 별로 안 이상했어. 너무 싫어서 걔 목도리도 만지기 싫은가보다. 그럴 수도 있잖아. 근데 생각을 더 해보니까.” 무영이 건반을 연주하듯 다섯 손가락으로 핸들을 건드렸다. “그날 내 사무실에서 둘이 뭘 했지?”

이안은 황급히 앞을 보았다. 몇 초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무영이 도경과 지한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결코 호락호락하게 손을 떼지 않을 것이다.

“어, 그 둘이 사무실에서 같이 있었대?”

“너는 거짓말을 못 하니까 그냥 하지 마. 그날 도경이 오자마자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2층으로 올라간 거, 네가 알려 줘서잖아. 사무실에 우지한 있다고.”

“그…… 거는.”

“이상한 거 또 있어. 내가 우지한 목도리 가져가라고 했을 때도 왜 자기한테 그걸 가져가라 그러냐고 안 따졌어, 도경이가. 소현이 심부름도 안 하던 앤데. 완전 이상하지?”

맞는 말뿐이라, 이안은 반박하지 못했다.

“소현이랑 도경이가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니었지. 알아. 사실 난 둘이 섹스도 안 했다고 생각해.”

“아 제발.”

실은 이안도 무영과 같은 의견이었다. 도경과 소현의 섹스란 마치 정치인들 간의 신의와도 같았다. 싫고 좋고를 따지기 이전에 상상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미개척 영역이었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소현이가 데리고 놀던 거랑 친해지는 건 도경이랑 안 어울려. 나는 크리스마스 때 걔가 소리 지를 줄 알았어. 에스더가 우지한 처음 불렀을 때 아무 일 없었다고 한 거, 그게 다 진짜였다는 말이지.”

“내가 뭐라고 대답하길 원해?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도경이 대체 무슨 짓 하고 다니는 거야?”

알았어도 함부로 입을 놀리진 않았을 테지만, 정말로 모르기도 했다. 도경이 지한의 신상을 알아오라고 했을 때만 해도 지금보단 상황이 한결 단순했다. 당시 이안은 도경이 가장 평범한 길로 굴욕을 갚을 것이라 추측했다. 지한이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뺏어오거나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 식으로.

그런데 해가 넘어온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뭐 하나 이안이 예상한대로 굴러간 것이 없었다. 지한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시우는 멀쩡히 똑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지한은, 매일 따라다닐 능력이 안 돼서 뭘 먹고 다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볼 때마다 추레해지기는커녕 더 잘생겨졌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지한은 도경이란 이름 하나에 진정제를 먹인 동물처럼 고분고분해졌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도경이 곤란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항상 지니고 사는 마음가짐이라 지한에 관해서도 똑같이 적용했던 것뿐이다. 크리스마스 하루 전날 도경에게 지한이 올 수도 있다고 알려줘 무영의 재미를 반감시켰던 것도,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지한을 사무실로 빼돌려놨던 것도 다 도경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안은 몰랐다. 도경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도, 무슨 짓을 했기에 지한이 충성스러운 개처럼 순해졌는지도. 도경이 지한 앞에서 가면을 쓴단 것밖에는. 엄청 정성을 쏟은 가면.

“싸움 났다.”

양팔에 이어 턱까지 핸들에 괸 자세로 무영이 무심히 말했다. 자칫 흘려들었다간 날씨 이야길 하는 줄 알았을 만큼 감흥 없는 톤이었다. 별 기대 없이 무영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안은 눈을 찌푸렸다.

차에서 불과 열 발자국도 안 떨어진 거리에 남자 셋과 여자 한 명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 남자가 유니폼 차림의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있었고 몸이 엉키지 않은 두 남녀는 싸움을 중재하려고 따라 나온 것처럼 보였다.

멱살 잡힌 남자가 상대의 팔을 붙잡았다. 차 안에서 보는 이안의 눈에도 공격하려는 의지보단 싸움을 그만두고 싶은 의지가 돋보이는 동작이었는데, 정작 붙잡힌 당사자에겐 달리 보이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보다 더 흥분한 남자가 다른 손으로 상대의 뺨을 날렸다. 두 남자의 몸이 서로에게서 떨어진 틈을 타 끼어든 여자가 맞은 남자를 뒤로 끌어내려 했지만 때린 쪽이 더 빨랐다. 여자를 밀친 남자는 기어이 유니폼 입은 남자의 뺨을 한 대 더 날리는 데 성공했다.

“어, 저거…….”

무영이 먼저 알아보았고, 이안도 뒤이어 바로 알아보았다. 상대의 뺨을 두 번이나 날리고도 진정할 줄 모르는 남자는 모 건설사 아들이었다. 비싼 신축 아파트가 몰린 지역에서 우연히 아는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으나 그 아는 얼굴이 가해자인 폭행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낯선 일임에 틀림없었다.

깡패들하고 친한 부친을 닮아 손을 함부로 휘두른다던 소문대로, 건설사 아들은 반격하지 않는 상대에게 기어이 새로운 공격을 가했다. 세 번째로 뺨을 내어준 남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헤드라이트가 세 번을 연속으로 맞아놓고도 이상하리만치 잠잠한 피해자의 얼굴을 비췄다.

무영과 이안은 일제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맞은 남자는 지한이었다.

#32

난생 처음 타보는 컨버터블 뒷좌석의 승차감은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가는 것처럼 불편했다. 고등학생 시절 막연히 상상했던 스포츠카의 승차감은 날아갈 듯 가볍고 편했다. 역시 현실은 늘 꿈을 실망시켰다.

“저, 우지한 씨. 피곤하겠지만 내가 이거는 꼭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

웬일로 잠잠하나 했다. 침묵을 지킨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그새 뒷좌석을 돌아본 이안이 말을 걸었다. 닥치라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한 번은 넘어가기로 했다.

“뭘.”

지난번에 호스티스들이 보는 앞에서 마담에게 제지당한 것이 분했는지 오늘 오자마자 작정하고 지한에게 시비를 건 그놈은 돈만 많지 주먹은 물러터진 애송이들과 달랐다. 돈도 많은데 주먹까지 단단한 재수 없는 새끼.

갑자기 튀어나와 그만하라고 외친 무영이 아니었다면 지한은 지금쯤 계속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갔든지, 아니면 못 참고 주먹을 날려 경찰차를 탔든지 둘 중 하나였다.

“영혼에 대고 맹세하는데 진짜 우지한 씨 뒤를 밟거나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무슨 말이냐면 오늘 우리가 도와줬단 얘기 도경이 형한테는.”

“……머리 아프니까 좀 이따 말해.”

크리스마스에 지한의 손맛을 맛본 이안은 더 개기지 않고 돌아앉았다. 무영은 차만 몰뿐 이안과 지한의 대화에 개입하지 않았다. 지한을 더 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새끼를 말 몇 마디로 물러서게 만든 이후 그가 한 말이라곤 차에 들어가 있어요, 가 전부였다. 안 그랬다간 진상 새끼에게 또 잡힐 것 같았는지 마담과 다른 웨이터도 얼른 가라며 지한의 등을 떠밀었다.

사람들을 다 들여보내고 차로 돌아온 무영은 지한에게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어디로 데려다주면 되냔 것도 이안이 물어봤다.

손목 부근이 갑갑했다. 딱 맞게 잠가놓은 소매 단추 때문이었다. 단추를 풀다 말고, 지한은 자신이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가게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왔다. 이안이 도착지를 물었을 때 지한은 습관적으로 시우의 호텔을 댔다. 바 안으로 들어갈 계획이야 애초부터 없었으니 그렇다 쳐도 웨이터 복장으로 길바닥에 죽치긴 싫었다.

하도 오랜만에 정통으로 얼굴을 맞아 울리는 골 때문에 미뤄졌던 상황 판단이 조금씩 되기 시작했다. 얻어맞기만 하다 무영에게 구출되어 차에 탔고, 그 과정을 이안에게 다 보여줬다. 쪽팔려서 뒈지고 싶어야 정상인 상황이란 것쯤은 지한도 알았다. 알았는데 별로 창피하지 않았다. 또 잘렸다는 자괴감도 다 감당하지 못해 팽창하기 일보 직전인 머릿속에 수치심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는 입 안을 씹었다. 계속 이렇게 사느니 20대가 끝나기 전에 죽어버리는 편이 세상에게도 더 이로울지 몰랐다. 퍼지기 시작하면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는 음습한 기운은 평소보다 이르게 물러날 준비를 했다. 그의 사고가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무영의 차가 통과 중인 동네는 방금 막 직업을 잃은 전직 웨이터와 그다지 연이 없는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였음에도, 지한은 확신했다. 와본 적 있는 곳이었다.

“여기.”

“음? 나? 나한테 한 말.”

“내린다고.”

차가 멈췄다. 지한이 원하는 대로 해준 무영은 별다른 말 없이 백미러를 힐끗거렸다. 이안만 당황해 운전석과 뒷좌석, 그리고 창밖의 아파트를 번갈아 보았다.

“너, 당신 여기 안 살, 아니지. 여기 살아요? 왜 여기서.”

지한은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인적 없는 거리를 울렸다. 이안이 따라 나오면 달리기라도 해서 따돌릴 각오로 한참을 기다렸다. 지한의 우려와 달리 그를 따라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눌린 고양이를 닮은 컨버터블 뒤꽁무니가 날쌘 속도로 지한의 시야를 벗어났다.

손목에 이어 목이 갑갑함을 호소했다. 맨 위의 단추를 끌렀다. 그래도 시원하지 않았다.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구면인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끝이 없을 것처럼 높았다.

겨울의 실외는 단숨에 체온을 떨어트렸다. 유니폼을 갈아입을 틈도 없었으니 집에서 입고 나온 점퍼는 당연히 탈의실에 그대로 두고 왔다. 어깨가 절로 떨려왔지만, 지한은 앞섶을 여미지 않고 맨살을 추위에 방치했다. 몸이 괴로울수록 정신도 빠릿빠릿하게 돌아갔다.

도경은 자존심이 상해서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먼저 입술을 비빈 쪽에서 내놓은 변명치곤 뻔뻔했다. 이기적이기도 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지키려 들지 않는다던 말이 생각났다.

열일곱 지한을 앉혀놓고 고리짝 속담보다 더 듣기 싫은 소리를 조언이랍시고 했던 사람의 직업이 아마 청소년 상담사였던 것 같다. 상담사란 사람이 그런 소릴 하더란 이야기를 들은 시우는 지한을 꼭 안아주었다. 돌팔이 새끼가 뭣도 모르고 하는 말은 담아둘 필요 없어. 그냥 잊어버려.

말은 주먹보다 훨씬 더 공격력이 셌다. 주먹에 맞아 부러진 뼈는 이어붙이는 것이 가능해도 기억에 남은 말은 지우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낄 것 없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이 힘들어 자꾸 타인의 의도를 넘겨짚는 지한과는 태어날 때부터 반대편에 있었을 사람이니까, 도경은 결코 자존심처럼 하찮은 것에 연연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에게도 상할 자존심이 있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소현이 그랬듯 도경도 완벽하지 않았다.

이제 깨질 차례인데.

여왕처럼 생긴 소현이 분노조절장애자였단 것을 알았을 때처럼, 비인간적으로 생긴 도경에게 지극히 인간적인 구석이 있단 것을 알았으니 환상이 조각날 차례였다.

지한의 얼굴에도 서슴지 않고 날카로운 물체를 던졌던 소현과 자존심이 상해서 먼저 키스해놓고 연락하지 않았다는 도경에는 물론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 해도 지한에게 환상 같은 것은 사치였다.

도경을 자꾸 이 세상 것이 아닌 경이로운 대상으로 착각해봤자 나중에 지한을 기다리는 종착지는 실망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색을 드러냈다. 도경도 언제든지 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환상이 깨지는 대신 자꾸만 엉뚱한 감정이 지한을 찾아왔다.

미안했다.

자존심 상했다는 말을 들은 뒤로 쭉, 지한은 도경에게 미안했다. 바텐더에게도, 택시 기사에게도 그냥 모든 이들에게 잘 웃어주는 그 남자를 얼마나 신경 쓰이게 만들었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어차피 오래 볼 사이가 아니라 미리 결론지은 지한이야말로 실은 도경을 하찮게 대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찮게 여겨지는 기분이 뭔지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처지인데도 그만.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감수성 넘치는 변명은 집어치워야 했다. 오늘처럼 일진 사나운 날 도경을 짧게라도 볼 수 있다면 덜 죽고 싶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지한의 심경이었다. 오만 잡생각들을 다 날려버리는 도경의 얼굴과 마주하는 것. 그 정도면 충분했다.

휴대폰을 꺼냈다. 갈래갈래 난 금이 거미줄을 연상시키는 액정 위로 손끝을 놀렸다. [지금 어디에요]. 전화하지 않은 것은 마지막 자존심 따위가 아니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과 있을지도 모르는 도경을 위한 배려였다. 돈과 인간관계를 다 가진 남자에게 주말 저녁보다 외식하기 더 적합한 시간대는 없었다.

전화가 걸려와 화면이 바뀌기까지 걸린 시간이 얼마나 짧았으면 지한은 메시지 옆의 1이 사라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바로 전화를 받았다. 하루치 자존심은 여러 사람 앞에서 뺨을 연달아 맞으면서 바닥난 지 오래였다.

“여보세요.”

―저는 집이에요.

어디냐는 메시지에 대한 답변이었다. 지한은 벌어져있던 입술을 최대한 오므렸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마저 춥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집.”

―지한 씨는요?

“밖에, 밖이요.”

―친구분들하고?

“혼자.”

―담배 피우러 나가셨구나. 맞죠?

벌어진 옷깃을 여몄다. 얇은 재킷 하나 없는 상태로 내려달라고 패기를 부린 업보가 돌아오고 있었다.

떠느라 간단한 대답조차 하지 못한 지한의 침묵을 긍정이라고 받아들였는지, 도경이 말을 이었다.

―가까이 살면 놀러 오시라고 할 텐데.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네?

암만 남은 자존심이 없다지만 방금 그 말은 속이 너무 빤히 보였다.

“아니에요. 그냥.”

―지금 어디세요?

“밖이라고 했잖,”

―그 밖이 어디냐는 뜻이겠죠. 제 말은.

신발 속 발끝까지 저릿해지는 추위에 정신머리도 얼어붙는 수준을 넘어서 대담해졌다. 버스 정류장 간판에 기댄 지한은 높게 치솟은 건물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경사진 언덕 위에 세워져 들쑥날쑥해 보이는 건물들의 공통점은 한겨울의 밤하늘 아래서도 따듯한 느낌을 잃지 않는 페인트 색이었다.

“아파트가 너무 많아서 110동은 안 보이고.”

오토바이에 도경을 태워 집 앞까지 데려다줬던 날 밤에 그런 인상을 받았더랬다. 단지 안에 죽 늘어선 가로등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깔과 겨울이라 작동이 중지된 분수, 호텔 로비 축소판처럼 생긴 공간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주민들. 어찌나 곳곳에서 계절과 동떨어진 온기가 배어나던지, 이런 곳에서라면 도경이 목을 휑하게 내놓고 다녀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수 있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101. 5동이랑, 저건 11동.”

―지한 씨 지금 저희 동네에 계세요?

이런 생각도 했다. 도경이 목도, 손도 감싸고 다니지 않는 이유는 미련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추워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어쩌면 도경에게는 남이 모는 오토바이 뒤에 타는 일이 일생일대의 도전 중 하나였을 수 있다.

얼굴이 시퍼레져서 비틀거렸던 것도 그리 생각하면 덜 놀라웠다. 굶다가 맞이할 죽음을 겁내는 생이 있으면 시속 두 자리로 달리는 이륜차가 공포로 다가오는 생도 있었다. 도경은 아마 죽고 다시 태어나도 지한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나가다가 보여서, 원래 시우한테 가려고 했는데, 근데 차가 이 앞을 지나서.”

어쩌다 그를 봐야 조금이라도 살고 싶어질 것 같다고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래서 내렸어요.”

잠시 대꾸가 없던 도경은 잠기운을 막 떨쳐낸 사람처럼 깬 목소리로 나갈 테니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놓곤 화면의 불빛이 나가기도 전에 다시 전화를 걸어와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다.

지한은 약간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도경에게도 상할 자존심이 있다는 것에 이어, 그도 당황할 줄 알았다. 원인이 전부 지한이라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도경이 허점을 보일수록 실망 아닌 웃음이 났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기분과 반비례한 체온이 점점 떨어져 코를 훌쩍일 힘마저 빼앗겨갈 무렵, 도경이 나타났다. 지한의 차림에 또 당황하는 기색이던 도경은 곧 망설임 없이 코트를 벗어 내밀었다. 거절하려 했으나 아예 지한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버린 도경이 더 빨랐다.

코트를 지한에게 벗어줘서 추울 법도 하건만, 도경은 걸음을 재촉하거나 뛰어가지 않았다. 지한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려 뒤를 몇 번 돌아본 것 말곤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설 때까지 바른 자세를 잃지 않고 똑바로 걸었다.

“여기, 옷.”

“집에 들어가기 전까진 그냥 입고 계세요.”

코트를 못 벗게 한 도경이 덧붙였다.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요. 밖에선 어두워 잘 안 보였던 도경의 셔츠가 진가를 드러냈다.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이는 신기한 재질의 셔츠는 푸른색이었다. 절대 무난한 색은 아니었는데, 도경은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그의 피부에 어울리지 않을 색이 있겠냐만.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색인지 금빛이 나는 엘리베이터 문에 도경과 지한이 함께 비쳤다. 집에 있다 나온 도경의 차림은 지한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외출복보다 훨씬 단정했다. 반면 코트를 도경이 걸쳐준 상태 그대로 어깨에 간당간당하게 매달고 있는 지한의 꼴은 그다지 단정하지 못했다.

도경의 성의를 봐서라도 집에 들어갈 때까지만 입고 있자고 결심한 지한은 코트에 팔을 끼워 넣었다. 쑥 들어갔다. 다른 쪽 팔을 집어넣으면서는 약간 걱정이 되었다. 안 맞을까 봐.

“안 타세요?”

그새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있었다. 도경이 버튼을 누른 채로 지한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한은 거울로 다시 확인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거 하나도 안 작…….”

망할 놈의 주둥아리. 육두문자가 튀어나오기 전 얼른 입을 다문 지한은 속으로 자신의 주둥이를 실컷 욕했다. 아무리 막말하고 사는 인생이라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말을 상대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반대편 벽에 붙어 서있던 도경이 거울 속 지한을 쳐다보았다.

“제 옷이 지한 씨한테 작을 줄 아셨어요?”

“아니, 왜냐하면. 뭐냐면 그게.”

“괜찮아요. 사람들이 절 좀 작게 봐요.”

“아니, 작게 본 거 아니고.”

“이래 봬도 제가 저희 식구 중엔 제일 큰데 말이에요.”

엄마 닮아서 그런가 봐요, 하고 도경이 살짝 미소 지었다. 아, 그렇지. 지한은 그 순간이 왔음을 감지했다. 친해졌다 싶으면 사람들은 가족 이야기를 했다. 꼭 대화의 주제가 가족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많이들 영화, 음악, 물건 음식 무엇이든 간에 가족과 관련지어 서술하고 추억하길 좋아했다. 우리 엄마가 보는 드라마에 나왔던 배우인데, 우리 아빠가 옛날에 몰던 차도 그건데, 우리 언니가 우리 오빠가 우리 동생이.

보통 그러고 나선 상대의 부모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알고 싶어 했다. 보통 저러고 나선 상대의 부모 얘기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너희 엄마도 영양제 드셔? 너희 아빠도 야구 보셔? 넌 엄마아빠 누구 닮았어? 악의가 있어야만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은 아니었다. 평균을 웃도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존재는 마치 사람의 팔다리처럼 일반적인 전제인 듯했다.

“지한 씨는 커 보여서 좋겠다.”

가족을 주제로 한 대화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도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커서 좋겠다는 것도 아니고 ‘커 보여서’ 좋겠단 소린 또 처음이었다. 엘리베이터란 제한된 공간에서 도경의 얼굴을 직접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전화해서 불러낸 주제에 할 생각은 아니었다.

차선책으로 거울에 비친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러고 보니 도경과 둘이 있으면서는 한 번도 누가 더 큰지를 따져보지 않았다. 이 사람과 꾸준히 맞닥트리게 될 것 같다 싶으면 보통은 지한보다 큰지 작은지 여부부터 측정했다. 이안이나 무영을 봤을 때처럼. 그런데 도경을 보는 지한의 초점은 완전히 다른 곳에 맞춰져 있었다. 피부라든가, 발목이라든가. 손등이라든가.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탈 때와 마찬가지로 도경은 지한을 먼저 내보내고 나중에 내렸다. 현관 번호를 누르는 도경의 뒤통수에 드디어 실감이 났다. 도경이 지한을 자신의 집까지 데리고 왔다.

“추우면 말씀하세요. 보일러를 좀 낮게 틀어놓는 편이라서.”

신발을 벗고 뜨끈뜨끈한 바닥으로 올라선 지한의 눈앞에 긴 복도가 펼쳐졌다. 여러 개의 문이 줄줄이 늘어선 복도 끝자락에는 한 벽면이 통유리나 다름없는 거실이 보였다. 코트를 벗기가 두려워졌다. 도경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이 깨끗했다. 남들이 술과 몸을 더 잘 팔 수 있게 도와주다 그 일마저 더는 못하게 된 지한에겐 과분한 곳이었다.

반쯤 걸어갔던 복도를 다시 돌아온 도경이 지한의 앞에 섰다. 도경의 집 안 복도에 달린 전등은 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보다 훨씬 밝기가 셌다. 도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이게 뭐야.”

“뭐, 아. 이거…….”

“이쪽 얼굴이 왜 이래요?”

도경이 불쑥 손을 뻗어 지한의 뺨을 만졌다. 제발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지한은 뒷걸음질 치고 싶은 것을 힘들게 참으며 바랐다. 웃을 때도 부채로 입을 가리는 귀족처럼만 굴든지, 뺨에 뽀뽀하는 것이 인사인 나라 사람처럼만 굴든지. 이랬다저랬다 하면 예측이 불가능해서 곤란했고,

뜬금없이 아랫배가 단단해져서 곤란했다.

“이거, 이거 그냥. 아무것도.”

“거짓말하지 말고.”

남들에 비해 음량이 적은 목소리는 조금만 힘이 빠져도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사무실에서 지한의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들었던 그때도 그랬었다. 도경이 속삭이듯 말할 때마다 지한은 자신이 그와 엄청난 비밀을 공유하는 중이라고 착각하게 됐다. 별거 아닌데. 그냥 작게 말하는 것에 불과한데. 남들 다 하는 행동인데 어째서 도경이 하면 가슴이 통째로 꺼지는 것 같은지.

뺨에 닿은 상태로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도경의 손을 치우지도 못하고, 지한은 더듬더듬 말했다.

“저, 알았어요. 말할 테니까, 우리 좀만, 그, 떨어져서.”

“떨어져서?”

지한의 끝말을 따라 한 도경이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른 놈이 그랬으면 지한을 비웃는 것이라고 장담해 턱주가리를 날리고 싶었을 테지만, 도경이 내니 그 소리가 마냥 순수한 웃음소리로 들렸다.

“아, 이렇게?”

도경의 기행은 평소 내지 않는 소리를 내며 웃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한의 뺨에서 손을 떼긴 했다. 그런데 거기서 뭘 더 하진 않았다. 즉 도경의 손은 뺨과 맞닿아 있지만 않을 뿐 그 바로 옆 허공에 뜬 상태를 유지했다.

바로 전 상황과 마찬가지로 다른 놈이 그랬으면 더 볼 것 없이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을 텐데, 아니, 애초에 가정이 틀려먹었다. 주먹을 주고받을 때 말곤 그 어떤 남성도 도경처럼 지한의 뺨을 만진 적 없었다. 그러니 비교도 불가능했다. 나한테 진짜 왜 이러느냐고 고함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랬다간 도경이 지한을 무식한 놈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렇게 말고, 이렇게.”

손을 잡아서 내린다. 그것이 지한의 목적이었다. 그 목적에 몰두한 나머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간과했다. 그는 도경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지한의 손바닥에 도경의 손등이 닿았다. 손을 잡아 내리겠다는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다. 도경의 손등이 가진 부들부들한 촉감에 한 번,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가버린 제 손에도 가만히 있는 도경에 또 한 번 지한은 놀랐다.

어째야 할지 몰라 굳은 지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도경이 손을 틀었다. 부드러운 손이 지한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적어도 지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도경이 지한의 손을 잡았다.

잡았다고 표현하기 미안할 정도로 섬세한 손길이었다. 조금 전과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이제 도경의 손바닥이 지한의 손등을 덮고 있었다. 도경은 손바닥도 부드러웠다.

“손이 차가워요.”

여전히 속삭이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지한은 자신의 손이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지한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린 뒤, 도경이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도경이 몇 걸음 앞서가고 지한이 그 뒤를 따랐다. 자연히 지한의 시야에 도경의 등이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흘러내리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재질의 셔츠가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의 선을 드러내며 몸에 들러붙었다 떨어졌다 했다. 도경이 날씬하단 거야 셔츠에 조끼에 다시 코트까지 걸쳐도 숨겨지지 않는 사실이라 놀랍지 않았다. 각진 어깨에는 조금 놀랐다. 어른 남자의 어깨에 각이 져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여태 도경을 동화 속 주인공쯤으로 취급해온 지한의 환상이 놀랍다면 놀라웠다. 도경은 지한보다 5년 먼저 태어난,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부드러울 뿐인 성인 남성이었다.

“따듯한 것 좀 드릴게요. 차 괜찮으세요? 아니면 물?”

지한은 넋 놓고 도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하의 온도에서 갑자기 따듯한 곳으로 들어온 여파가 뒤늦게 정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더 기다려도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는지 도경이 지한의 등을 거실 쪽으로 밀었다. 하도 살짝 밀어 거의 쓰다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아서 갖다 드릴게요. 잠깐 앉아 계세요.”

알아서 갖다 준다는데 계속 보고 서있기도 뭐했다. 시키는 대로 소파에 가 앉은 지한은 넓디넓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도경을 닮은 거실은 하얗고 깨끗했다. TV, TV가 올라가 있는 서랍장인지 받침대인지 알 수 없는 물체, 소파, 테이블. 있을 건 다 있는데도 허전하단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가구 수에 비해 면적이 무척 넓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도경의 거실엔 액자나 그림, 장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쉽기는 했다. 무의식중에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가족과 함께 있는 도경은 어떤 모습이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도경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었다. 무영의 사무실에서 본 한 장으론 부족했다. 게다가 그때 본 사진 속 도경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다 여름인데 혼자서만 가을 같았더랬다. 불퉁한 표정이 나름 애다워 귀여운 면도 있었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놓을 걸 그랬나. 후회하던 지한은 허벅지를 꾹 눌렀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사진의 사진을 찍어 놓았어야 한다고 후회하는 것은 지나가던 초등학생에게 물어도 징그럽단 소리를 들을 짓이었다.

도경의 코트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데 좋은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도경에게서 나는 향과는 달랐다. 달면서 씁쓰름해 오묘한 향의 근원지를 찾아 헤매던 시선 끝에 테이블 위의 병이 걸려들었다. 안이 들여다보이는 유리병 안에 새빨간 꽃들이 빽빽이 꽂혀있었다.

만개한 꽃들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가짜 같다가도 색이나 생김새를 보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라 믿기 힘들었다. 손끝으로 툭, 건드려 보았다. 부드러웠다. 도경의 손처럼.

지한은 눈을 감았다. 코끝에서 도경의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또 단전에 힘이 들어갔다.

#33

정수기에서 나올 때부터 김을 뿜던 90도짜리 물은 거름망에 담긴 꽃으로부터 색을 뽑아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른 잔으로 옮겨 담을 수 있었다. 당장 돌아서서 지한이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질 때마다 도경은 가슴팍을 손으로 꾹 눌렀다. 참는 것은 그의 특기였다.

조금만 방심하면 거실로 날아가려는 신경을 붙들어줄 것이 필요했다. 아까 이미 다 봤지만 그래도 덜 치워진 부분이 있나 하고 부엌을 샅샅이 훑었다. 치울 거리라도 있어야 정신이 덜 산만해졌다. 부엌은 깨끗했다. 갈 곳을 잃어버린 도경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본래 남색이었던 실내용 슬리퍼가 어느새 파란색으로 옅어졌다. 버릴 때가 되었다.

슬리퍼. 그 세 글자가 도경의 머릿속에 작은 벨을 울렸다. 지한에게 슬리퍼를 신으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신으라고 할까. 솟아났던 고민은 온전한 형태를 갖추기 전에 무너져 내렸다. 황 원장의 충고를 되새길 때였다. 도경의 행동은 대부분이 어미 눈에나 예뻐 보이지 남들 눈엔 안 예뻐 보였다.

그렇지만 지한은 예외일 수도 있었다. 지한과 대화할 때면 곧잘 연기자가 된 기분에 빠지곤 하는 도경이었으나 세세히 따져보면 지한에게 말해준 것 중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진실이었다.

지한에게 말한 대로 도경은 혼자 살았고, 황 원장의 뼈대와 피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며, 평생 예쁘게 생겼다는 칭찬은 들어본 적 없었다. 지한은 도경에게 예쁘게 생겼다고 육성으로 말한 최초의 남자, 아니, 사람이었다. 여자한테서도 그런 칭찬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한은 도경을 예쁘다고 생각하다 못해 직접 말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으니까. 도경이 뭘 하든 미워하거나 미친놈 취급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실 지한은 도경이 숨만 쉬고 앉아있어도 나사 빠진 놈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맥락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할 테고. 절대로 소통하기 쉬운 타입은 아니었으나, 도경은 지한과의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

지한에게 도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도경이 눈앞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보통 연인 아닌 상대가 말도 없이 입술을 부딪혀 오면 최소한 한 번쯤은 밀치고 봐야 정상이었다.

지한은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비정상적으로 얌전히 도경을 받아들였다.

자만은 위험했다.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논할 자격이 도경에게는 없었다. 언제 누군가를 작정하고 유혹할 시도라도 해본 적 있던가. 어떤 것이 정상적이고 어떤 것이 비정상적인 반응인지를 나눌 자격에 한해서라면 그보다 더 늦게 태어난 지한이 더 잘 알 수도 있었다.

추측에 불과했다. 도경의 혀에 무방비로 입 안을 내주던 지한이 딱히 그 행위에 능숙하단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 또한 도경이 확언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많은 타인과 입 맞춰본 사람이라면 어떻게 반응했어야 하나. 답이 정해져있지 않은 질문이었다.

차에서 올라온 김이 사방에 화한 향을 뿜었다. 언젠가 이안이 마셨다가 치약을 마시는 것 같다고 불평한 적 있는 차였다. 도경은 도자기 잔에 차를 따랐다. 김에 섞여 올라온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이안이야 나약해 빠졌으니 그 난리를 피웠던 것이고, 도경도 마시기 버거웠던 위스키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부었던 지한이라면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정확한 주량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어지간한 술 가지곤 지한을 쓰러트리기 불가능할 듯했다. 제일 독한 위스키를 한 다섯 잔 연속으로 먹이면 또 모르지…….

차가 잔의 절반 이상을 채웠다. 주전자를 똑바로 세우며 방금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을 구석으로 밀었다. 술을 마시게 해서 힘을 빼려는 계획엔 교양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정체를 밝히지 않고 접근한 데에서부터 교양이 없기는 했다. 도경은 두꺼운 손잡이를 꽉 쥔 채 마음을 다스렸다.

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도덕성에 너무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다시 지한을 마주 볼 준비가 되었다. 양손에 각각 컵받침과 잔을 들고 거실로 간 도경은 눈앞의 광경에 잠시 온몸의 기가 탁 막혔다. 코트를 벗어서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까지는 좋았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소파에 앉아 얌전히 기다린 것까지도 좋았다. 다 좋았는데, 지한의 눈이 감겨있었다.

설마. 농담이겠지.

도경은 허리를 굽혔다. 그래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지한의 고개는 올라올 줄 몰랐다. 진짜로 잠이 들었다고? 실소가 나왔다. 처음 와보는 남의 집 거실에서 몇 분 만에 잠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한에게 도경의 거실이 그렇게까지 편안하다는 것은 더 믿고 싶지 않았다. 잠이 들 만큼의 편안함은 긴장감이 부재하다는 소리였다. 결코 도경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야! 하고 외쳐서라도 지한을 깨워버리는 상상이 막 마무리되어갈 때였다. 지한이 눈을 떴다.

“허억.”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도경과 눈이 마주친 지한의 입에서 꾸며내지 않은 소리가 났다. 지한의 눈에서 잠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잠들어있던 것이 아닌 듯했다.

곧 지한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경의 눈도 자연히 지한을 따라 아래를 향했다. 지한의 바지 위에 큰 얼룩이 져 있었다. 천장에서 갑자기 물이 떨어지지 않은 한 그 얼룩은 도경의 손에 들린 잔에서 흐른 차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받침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죄송해요. 뜨겁지 않으셨어요? 잠드신 줄 알고 확인하려다가.”

“아, 잠든 게 아니라…….” 젖은 부분을 손바닥으로 누르던 지한과 그 앞에 앉은 도경의 눈이 또 마주쳤다. “생각하느라.”

무슨 생각을 하느라 발소리도 못 들었냐고, 도경은 묻지 않았다. 도경과 지한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온도가 바뀌고 있었다. 아주 익숙하지는 않아도 경험해본 적 있는 온도였다. 도경의 거실에 흐르는 공기는 무영의 사무실에서 들이마셨던 것과 매우 흡사했다.

알 수 있었다. 지한은 그때 도경과 나누었던 행위를 하고 싶어 하거나, 못해도 그날에 대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저기, 그. 있잖아요.”

“네.”

“그때 나한테 왜…… 왜 그렇게 했어요?”

역시. 혼자서만 시험 마지막 문제의 오답을 피해가 담임에게 칭찬받았던 열두 살 때의 교실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도경을 휘감았다. 그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렇게?”

“그때. 크리스마스. 그때 거기서.”

지한의 속을 완벽히 꿰뚫어 보았다는 기쁨에 우쭐해져선 안 됐다. 침착함을 잃지 말자 다짐하며 사고회로를 돌렸다. 왜 키스했냐고? 해야 할 것 같아서. 왜 해야 할 것 같았지? 기회였으니까. 지한이 헐떡거리고 있었으니까. 도경이 먼저 하지 않으면 지한이 달려들 것 같았으니까.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지한이 가슴팍을 들썩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섬세하거나 조심스럽지는 못한 주제에 경계심만 높은 부류였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으니 선택의 여지가 있진 않았을 터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갈고닦아왔을 경계심을 도경에게 사용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슨 연유로 도경이 급소나 다름없는 목에 손을 대고 숨통인 입 안을 침범하는 데도 방어는커녕 약 맞은 짐승처럼 늘어져 있었나.

저런.

“지한 씨는 왜 하셨어요?”

발정이 났나 보다.

바라던 대로 발정이 난 지한 앞에서 도경은 다음 단계를 생각했다. 머잖아 그는 딱히 다음 단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단계가 갖춰져있지 않은 판. 그런 판은 있을 수 없었다. 준비되지 않는 판을 벌이지 않는다, 그것이 도경의 철칙이었다. 그러나 이 판은 시작과 동시에 말이 바뀌고 규칙이 바뀌며 혼란스러워졌다. 도경은 그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던가를 차분하게 되짚어보려 애썼다. 공황에 빠질 이유는 없었다. 그는 하루치 약을 다 챙겨 먹었다. 그러니 공황은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다. 절대로, 오지 않는다.

도경은 지한의 무릎을 잡았다. 원인 모를 아찔한 느낌에 당장 앞에 있는 것으로 손을 뻗고 보니 그게 지한의 무릎이었을 뿐이다. 허벅지에 떨어트린 찻물이 그새 무릎까지 흘러 내려와 있었다. 공기에 노출된 물은 벌써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제 무릎을 눌러오는 손길에 바짝 얼었던 지한이 이내 도경의 손목을 잡았다.

“일부러 이래요? 나 놀리려고?”

눈을 여러 번 깜박이자 아득해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던 시야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도경은 입술 끝을 한껏 끌어올렸다.

“저는 지한 씨가 물어본 걸 똑같이 물어본 건데요.”

“왜 그걸 똑같다고.”

“달라요? 어떻게?”

“먼저 했잖아 나한테. 그러니까 나는. 나는, 계속하라는 건 줄 알고.”

힘겹게 말을 마친 지한이 눈을 피했다. 도경의 손목을 잡은 손에 들어간 힘까지는 빼지 않았다. 지한의 얼굴 군데군데로 점차 진한 색이 퍼졌다. 주제 파악 못 하고 건방지게 굴다 얻어맞았을 뺨이 유별나게 달아올랐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싸구려 바지의 질감을 느끼면서, 도경은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정신으로 의문했다.

발정이 났는데 왜 안 달려들지? 달려들면 나는 어떻게 할 계획이지? 발정나길 기다렸으면서 나는 그때 왜 저 입술에 먼저 내 입술을 갖다 댔지? 뭐가 무서워서? 무서워? 무엇이? 누가 나를 앞지르는 것이. 남에게 뒤지기 싫었다. 그게 무엇이든. 과제든. 시험이든. 인사고과든. 달려드는 순서든.

날 앞지르지 마.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지한의 입술이 벌어졌다. 뭐 하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을 수도 있고, 미쳤냐고 욕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든 당장은 알 수 없게 되었다. 붉은 입 안이 보이기 무섭게 도경이 그 입술을 씹어버렸기 때문이다.

뻣뻣해진 지한의 몸 위로 도경이 올라탔다. 지한은 어두운 사무실에서보다 훨씬 더 격하게 반응했다. 손바닥으로 소파를 짚고, 어떻게든 몸을 뒤로 빼려 어깨를 틀었다. 그러면서도 차마 도경을 밀진 못했다. 지한의 허벅지 위로 완전히 올라온 도경은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놔주었다. 지한이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도경은 점점 더 부푸는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가만히.”

들썩이던 지한의 가슴팍이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가쁜 호흡소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도경은 지한의 가슴을 세게 밀었다. 지한이 소파 위로 자빠졌다. 다시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한 상체를 누르고 앉은 도경은 잠시 숨을 골랐다. 하고픈 말이 있으면 지금 하란 뜻에서 준 시간이었다. 눈과 입을 다 벌리고 있느라 기회를 놓친 것은 지한이었다.

도경은 단정치 못하게 풀어져있는 앞섶을 잡아챘다. 그런 다음 벌어져있는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도경의 혀가 입 안의 연한 부위에 닿거나 자신의 혀와 얽혀들 때마다 지한은 맞는 사람처럼 움찔거렸다. 간간이 숨이 막히는지 식도를 긁어내는 것처럼 앓는 소리가 났다. 입술이 먹힌 채로 내는 신음마저 거칠었다.

결승점을 두고 다투는 육상선수처럼 지한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던 도경이 마침내 고개를 든 것은 그의 숨까지 차기 시작한 후였다. 지한은 물에서 구조된 사람처럼 다급하게 호흡했다.

도경의 아래에서 벗어나겠다거나 몸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은 할 겨를이 도저히 없는 듯했다. 소파에 뺨을 대고 못 쉰 숨을 한꺼번에 몰아쉰 지한이 풀어진 눈으로 도경을 올려다보았다. 맞아서 부은 부위보다 눈가가 더 붉어져 있었다. 쌍꺼풀 덕분에 그린 것처럼 뚜렷한 눈매 옆으로 찔끔 새어나간 액체가 짙은 색 피부 위에서 반짝였다.

오해 말아야 했다. 도경의 아래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지한은 여전히 다른 짐승들을 사냥해 먹고사는 과의 동물 같았다. 다만 아직 다 성장하지 못했다. 일반인의 눈에는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조련사에겐 한없이 어린 한 살짜리 맹수처럼.

지한이 딸꾹질을 했다. 그는 재빨리 입술을 깨물었다. 발동이 걸린 딸꾹질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이른 승리감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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