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Parring (12/38)

  12. Parring

#28

테이블도, 식탁보도, 의자도 그리고 찻잔과 받침마저 모조리 하얀 카페에 그나마 색감을 불어넣는 것은 바로 그곳에서 판매되는 디저트였다. 황 원장은 단 것을 좋아했다. 단 것을 판매하는 예쁜 장소는 더 좋아했다.

신문사 수장 아들로 태어나 태자 취급받으며 자란 권 회장과 달리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황 원장은 소시민적인 취미를 즐길 줄 알았다. 그녀가 한 달에 한 번씩 가지는 카페 투어의 파트너는 동료 의사나 친구가 아닌 둘째아들이었다. 그 누구보다 아들과 소통이 잘 되어서는 물론 아니었다.

입맛이 제각각인 남들과 달리 도경은 엄마가 주는 음식이라면 무조건 입 안에 다 넣었다. 도경 아닌 다른 사람과 가면 재미가 없어 금방 일어나게 되더라고 했었다. 도경만큼 잘 받아먹는 사람이 없다나.

“이거 먹어봐. 아몬드를 좋은 걸로 썼다고 하더니 진짜 다른 데서 판매하는 것들하고는 맛이 아주 달라.”

황 원장의 손가락에 집힌 이태리 과자가 도경의 입술 바로 앞까지 대령되었다. 찌그러진 계란처럼 생긴 비스킷 표면에 하얀 가루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씹는 동시에 가루가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도경은 황 원장이 들고 있는 비스킷을 반쯤 베어 물었다. 예상대로 남색 바지 위에 하얀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생김새와 달리 부드러운 식감의 비스킷을 씹으면서, 도경은 물티슈로 바지를 닦았다. 사용한 물티슈를 곱게 접어 빈 접시 위에 내려놓은 다음에는 새 것으로 손도 한 번 닦았다. 그 과정을 쭉 지켜본 황 원장이 이마를 짚었다.

“너 소현이 앞에서도 이랬니?”

또 그 이름이었다. 도경은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목을 양옆으로 꺾었다. 황 원장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그녀는, 80점짜리 이안을 제외하고선 아마도 온 세상에 유일할 도경의 편이었다.

“이러다니, 뭘.”

“걔랑 같이 있을 때도 지금처럼 깔끔 떨었냐고.”

대꾸는 하지 않았다. 황 원장은 도경과 소현이 단둘이 남았을 때 벌어지곤 했던 상황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황 원장만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 누구도 다는 몰랐다. 격리된 공간에서의 도경과 소현이 할 수 있었던 것들을.

“나야 엄마니까 네가 뭘 해도 예뻐 보이지. 다른 사람들 눈에도 다 예뻐 보일 거라고 착각하면 안 돼.”

그래서 걔가 바람피운 게 내 탓이냔 소리냐고 따져 물을 뻔했으나, 이번에도 도경은 손마디만 꺾었다. 뚜둑, 뚜두둑. 원초적인 소리가 났다.

“가만, 가만. 너 속눈썹.”

황 원장이 도경에게로 손을 뻗었다. 비스킷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도경의 광대 부근을 쓸었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지만 도경은 의연히 견뎌냈다. 언제 마지막으로 소독되었는지, 아니, 소독 자체가 된 적은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고깃집 의자에도 바로 앉지 않았던가. 그뿐인가. 지한이 뿜는 담배연기를 쭉쭉 들이마시면서도 숨만 잘 쉬었다. 근래 얻은 경험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강한 면역력을 얻게 해주었다.

“요새도 눈에 속눈썹 들어가? 어려서 쌍꺼풀 수술을 시켜줬어야 하는데 권 회장이 사내자식한테 무슨 성형수술이냐고 난리를 쳐서 못 시켰지.”

속눈썹을 떼어주고 나서도 황 원장의 손가락은 도경의 뺨이며 이마를 쓰다듬었다. 간격이 먼 옆 테이블에서 대놓고 수상쩍은 눈초리를 보내왔다. 도경은 황 원장이 알아서 손을 뗄 때까지 잠자코 앉아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도경의 머리까지 기어이 건드린 뒤, 황 원장이 손을 거두어갔다.

“어쨌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뭐가. 아까부터 왜 말을 하다 말아.”

“네가 소현이한테 차인 거든, 아니든. 회장님하고 다르게 이 원장님은 아무렇지 않다 이 말이야.”

지금은 절대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미지가 도경을 급습했다. 소현의 휴대폰 배경화면을 차지한 지한. 깊게 파인 쌍꺼풀. 높이 솟은 콧대. 이미지는 빠르게 전환되었다. 이제 도경의 머릿속은 심부름센터가 찍은 사진 속 지한으로 들어찼다. 긴 다리. 사나운 표정. 형형한 눈빛. 담배. 지한의 담배를 나눠 피우는 시우.

달갑지 않았다.

“왜 자꾸 걔 얘기해? 다른 얘기해.”

“왜긴. 사람들이 나만 보면 걔 얘길 하니까 그렇지. 네가 싫어할까 봐 여태 말은 안 했지만, 나는 사실 너희 둘이 진작 헤어질 줄 알았어.”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황 원장의 입에서 별로 우아하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걔는 네 기를 눌렀어. 난 내 자식들 기 눌리는 거 못 봐.”

도경의 기분은 사고가 흐르는 방향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달갑지 않으니 그만 생각하고 싶다는 염원에도 불구하고, 지한은 계속해서 도경의 의식을 차지했다. 소현의 휴대폰 배경화면에 쓰인 사진은 누가 먼저 찍자고 했을까? 그러고 보니 소현이 죽은 이래 어떻게든 지한에게라도 앙갚음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외의 것들은 아예 신경 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 둘의 관계는 어땠는지. 뭘 하느라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를 만났는지. 지한과 단둘이 남았을 때도 소현은 못된 소리만 골라서 했을지. 아니면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어느 정도는 서로를 진정으로 좋아했는지.

도경은 마른 입 안을 혀로 쓸었다. 만에 하나, 둘이 정말 그런 사이였다면, 섹스도 했나?

했겠지.

“그래서 요새 만나는 애는 없고?”

없다고 하려 했다. 그러나 도경의 입술은 달싹거리기만 하다 도로 닫혔다. 하필이면 황 원장의 신경이 도경에게 쏠려있는 이 때에 가장 최근의 지한이 멋대로 의식을 비집고 들어왔다. 무영의 음흉하기 짝이 없는 사무실 안에서 숨을 헐떡이던 그 지한이었다.

맹세컨대 그 새빨간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만 해도 신체적 접촉을 할 계획은 일절 없었다. 파티 전날 이안이 고해성사하듯 사실은 지한도 온다는 정보를 털어놨을 때부터 도경의 목표는 남들과 지한을 떨어트려 놓는 것 하나였다. 잘 구슬려 어디로든 끌고 나갈 심산이었다.

계획을 바꾼 요인은 다름 아닌 지한이었다. 도망쳐 왔다는 도경의 말에 실망한 빛이 역력한 지한을 정확히 어떻게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더 안달내 보란 심정이 제일 컸고 그 아래엔 단순히 놀려먹고 싶단 심정도 깔려있었던 것 같다. 도경을 무슨 유리성 안에서 구출해내야 할 공주 대하듯 조심스러워하는 지한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엿 먹이고 싶어지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지한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이었다. 흥분해서 그런 것이라기엔 혈색이 좋지 않았다. 원인이 무엇이든 가쁜 숨소리는 청각적으로 일관된 자극을 주기 마련이었고.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다.

도경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식어서 신맛이 더욱 고약해진 커피 향이 입 안을 점령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아들을 본 황 원장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누구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 본데, 아들?”

“없어.”

“정말 없어?”

“없다니까요.”

“그럼 얼른 하나 만들어. 현경이 재혼하기 전에 네가 먼저 장가가야지.”

황 원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알았다. 바람피우다 걸려서 이혼당한, 자식까지 하나 있는 현경은 어느 그룹 직계 손녀와도 재혼하기 글렀다. 한때 소문난 플레이어였던 권 회장이 여태 이혼당하지 않고 가정을 지킬 수 있었던 근원은 철저한 입막음 덕분이었다. 그는 컨트롤이 가능한 여자들만 만나고 다녔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 황 원장의 모토였다.

현경은 온 동네에 소문이 다 날 정도로 확실하게 들켰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권 회장은 도경을 더 못마땅해 하지만 어쨌든.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좋은 집안의 멀쩡한 여자와 결혼해 권 회장을 풀어주란 제의에 일리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황 원장은 도경을 9까지만 알고 10까지는 몰랐다. 도경은 현경보다 똑똑했다.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권 회장은 도경을 불러들이게 되어있었다. 그러므로 존재하지도 않는 상대와의 결혼을 계획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도경은 그의 생명력이나 다름없는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되찾기 전까지 다른 일은 의미 없었다. 원래 무엇이든 그렇게 해야 쟁취할 수 있었다. 오로지 거기에만 매달리느라 눈이 뒤집히는 집중력 없인 큰일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현재 도경에겐 지한이 가장 큰일이었다.

“결혼은 나 혼자 해?”

“이번 주부터 당장 애들 만나서 새로운 사람도 소개받고 좀 그래. 이왕이면 말 잘 듣는 애로 고르고. 너 고마운 줄 아는 그런 애로.”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너 혼자서 못 찾겠으면 바로 나한테 말하고. 내 눈 믿지?”

도경은 대충 턱을 끄덕였다. 권 회장이 둘째 자식에게 자존심을 물려주었다면 황 원장은 집요함을 물려주었다. 원하는 답변을 듣기 위해서라면 고문도 불사할 여자였다.

저녁이 되어서야 하얀색에 미친 사람이 디자인한 것처럼 생긴 카페를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아직도 몇 달 전 그 카페에서 찍은 디저트 사진임을 기억했다. 황 원장이 보내준 사진이라 바로 바꾸기 뭐해서 두다 보니 벌써 계절이 바뀌었다. 스스로에게 조금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장례식 이후로 단 하루도 편하게 쉬어본 날이 없었다.

아파트에 도착한 도경은 곧바로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얼마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남들은 남의 집 소파에서도 잘만 드러누워 과자를 먹거나 TV를 보고 심지어는 잠에도 빠지던데, 그는 혼자 있는 거실에서도 좀처럼 늘어져있질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소파는 앉는 곳이지 자는 곳이 아니었다.

아마 그의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을 잊고 편하게 쉬는 날은 영영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슬프지 않았다. 끊임없이 행동하고 생각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요새 드는 걱정이 하나 있다면 그런 운명을 타고난 그 역시 인간이기에 과부하가 올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기계든 생물이든 과부하가 오기 시작하면 빠른 조치가 필수였다. 시기를 놓치는 순간 데미지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궤양이 암으로 발전하고 암이 다시 1기, 2기 3기 말기까지 퍼지면 그때 가서 치는 발버둥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끝이었다.

「숨, 숨 막혀…….」

또. 도경은 손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효과는 없었다. 한 번 시작된 회상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나, 숨이 너무.」

그들의 입맞춤은 짧았다. 짧은 만큼 격했다. 입 안을 헤집는 도경의 혀에 별다른 대응을 못 하고 있던 지한은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헐떡거렸다. 도경의 팔을 붙잡아오는 손길에서 느껴지는 다급함이 아니더라도, 지한이 정말 호흡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도경은 그렇게까지 겁에 질린 지한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병원에 갈까요?」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묻는 도경을, 지한이 말없이 쳐다보았다. 밖에서 들어오는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음에도 도경은 지한의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다 들을 수 있었다.

잡힌 팔이 아프다 못해 무뎌질 때쯤, 지한이 손에서 힘을 뺐다. 아주 잠시 도경은 문에 겨우 지탱해 서있던 지한이 쓰러지기 직전에 다다른 줄 알았다.

도경의 예상은 산산조각 났다. 지한은 도경의 목에 매달리듯 양팔을 감았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도경은 중심을 잡으려 손바닥으로 문을 짚었다. 지한의 손에 머리카락이 잡힌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다시 키스했다.

도경은 벌떡 일어섰다. 거실이었다. 몇 초 만에 잠에 빠져 꿈을 꾼 것도 아니고, 망상도 아니었다. 단지 회상이 너무 생생했다.

부엌으로 달려가 물도 없이 항불안제 두 알을 삼켰다. 박동이 가라앉지 않았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 그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 일을 그르치지도 않았지. 단지 나를 우습게 만든 남자에게 혼돈을 준 게 다라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한 것뿐.

그뿐.

#29

지한은 망연자실하게 발치에 떨어진 담배를 바라보았다. 불을 붙이기도 전에 떨어트리다니 재수가 없어도 엄청 없었다. 새 담배를 꺼내기도 귀찮아 벌어진 입술을 다물 생각도 않고 있었다. 입 안으로 찬바람이 가차 없이 들이닥쳤다.

오늘 하루가 전체적으로 재수 없게 흘러갔다. 레오의 말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려다가도, 협박당한 것이 아니니 넘어갔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어제 저녁 끈덕지게 메시지를 해오는 게 성가셔서 전화를 걸었더랬다. 잘 아는 호스티스네 가게에서 갑자기 웨이터가 두 명이나 빠지게 됐는데, 말도 없이 그만두거나 결근하는 놈들에 질린 마담이 몇 다리 건너서라도 아는 사람을 채용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서비스직과는 인연이 없는 지한의 역사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제안을 하는 게 어처구니없어 거절했지만 레오는 끈질겼다.

―걱정하지 마. 거기 손님들 다 매너 좋대. 룸 안에서는 더럽게 놀아도 술 갖다 주는 애한텐 행패 잘 안 부려. 마담이 경찰들이랑 친해서 만만하게도 못 본다니까? 정 못 믿겠으면 가보고 나서 결정하든지.

두 번이든 세 번이든 횟수에 관계 없이 매몰차게 거절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한이 망설이는 틈을 타 레오는 그럼 한 번 가보는 걸로 알고 있겠다며 확답을 유도했다. 결국 싫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통화를 끝냈다. 돈을 벌기는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목숨 걸고 오토바이 스턴트를 하던 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유명 학원 출신도 아니고 대회 수상자도 아닌 지한이 두 번씩이나 스턴트를 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소현의 공이었다. 레오가 소개해준 가게에 가보기로 했다. 시우에게는 비밀이었다. 일단은.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마담은 지한을 보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한도 영업 전의 가게를 구석구석까지 몸소 보여주는 마담 자체는 싫지 않았다. 오픈 시간이 가까워지며 하나둘 들어오는 여자들도 딱히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살짝 안심했던 것 같다. 술장사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인물들은 그곳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아니었음에도.

당연하게도 지한의 첫날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 자신의 책임도 있기는 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딜 가나 평균 이상의 이목을 끌었다. 모르는 사람과는 되도록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눈이 한 번 마주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상대를 지나가는 배경 이상으로 인식하기 마련이었다.

지한은 자신의 눈빛이 별로 부드럽지 않다는 것도 잘 알았다. 특히 남자들은 그와 오래 눈을 마주칠수록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 그의 탓도 약간은 있었다. 그가 조금만 덜 튀었다면. 조금만 더 남들 틈에 쉽게 섞여 들어갈 수 있었다면.

「너도 얘랑 놀고 싶냐? 솔직하게 말하면 한 번 만지게 해줄게.」

그렇다고 그의 탓으로만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레오 새끼, 매너가 좋기는 지랄. 어금니가 아파오도록 이에 힘을 주며 속으로 레오를 저주했지만, 사실 룸이 떠나가라 고성을 지르며 잘 놀던 남자 손님이 지한을 보고 근본 없이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은 레오의 탓도 아니었다.

돈으로 여자를 사는 남자들은, 매너는 고사하고 일단 제정신일 가능성부터가 희박했다. 매너가 좋다는 말을 털끝만큼이라도 믿었던 지한이 멍청했다. 치솟는 짜증을 다스리는 데에 집중하느라 지한은 그만 남자 손님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쳤다는 소리다.

첫날이라 마담이 문밖에서 듣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경찰들과 친하단 말이 허풍은 아닌지 서비스 안주와 함께 등장한 마담이 지한을 끌고 나가도 반발은 없었다. 안 하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마담은 뜯지도 않은 담배를 지한에게 주며 달랬다.

질투 나서 그래. 이렇게 젊고 멋진 남자 옆에 있으면 자기네가 더 못나 보일까 봐.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늘은 그만 가 봐도 되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나와 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나왔다. 잡힌 약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갚아야 하는 돈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억지로 출근할 필요는 없었다. 결정은 지한의 몫이었다.

시우는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호스티스들이 있는 가게란 것도 그렇지만 레오가 소개해준 자리라 더더욱 반대할 것이다. 레오와 만났던 날 시우를 그 가게로 괜히 불러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안 그랬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귀찮게 굴었을 테니까. 왜 죄지은 것처럼 부채감을 느껴야 하는지가 의문이었다. 지한은 몸을 파는 게 아니라, 남들이 몸을 더 수월하게 팔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담당하면 됐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더 꺼림칙했다.

편의점 파라솔 테이블 위에 못 보던 재떨이가 나와 있었다. 하도 꽁초를 버려대서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뜨끔했다. 지한도 시우를 기다리며 꽁초를 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재떨이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며 마지막 연기를 뱉었다.

도경은 지한의 담배 냄새가 괜찮았다고 했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한 소리일 것이 뻔했다. 알면서도 자꾸 진짜라고 믿게 되었다. 지한이 담배를 피워도 기침은커녕 인상 한 번 쓰지 않았다.

지난주만 해도 그랬다. 도경이 가르쳐준 뒷문으로 먼저 나와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나온 도경은 장초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길이로 변할 때까지 옆에 서서 기다렸었다. 담배 냄새를 맡고 싶어서가 아니라 안에서 호흡곤란이 온 지한의 상태를 걱정해서였겠지만, 연기가 얼굴로 가든 옷으로 가든 미동 없이 서있었단 점엔 변함이 없었다.

왜 하필 그때 그렇게 돼서. 지한은 눈치 없는 자신의 호흡기를 탓했다.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과로하면 숨쉬기가 버거워지는 증상이야 평생 달고 살아왔다. 그런데 도경과 둘만 남은 공간에서 그 증상이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다. 도경이 입을 맞춰오고 나선 약간 나아지나 싶었다가,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또 턱까지 숨이 찼다.

낯선 말투로 지한을 몰아세웠던 도경은 다시 평소처럼 다정해졌다. 병원에 데려다줄까요, 묻는 그에게 거기까지 가다가 죽을 것 같다고 말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어디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까무러치고 말 것 같아서. 도경의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본능적으로 도경을 끌어안았다.

그냥, 처음부터 그러고 싶었다.

처음부터라고? 지한은 망연자실했다. 일, 이 초도 안 되게 눈이 마주쳤던 장례식에서부터? 자신이 그렇게 욕정 넘치는 놈이었던가? 도경 때문이었다. 죽음을 애도하는 장소에서까지 빈틈없이 완벽해 보인 탓이었다. 나지도 않는 향을 풍기는 중이라 착각하게 생기지만 않았어도. 꼭 한 번은 만져보고 싶은 피부를 가지지만 않았어도, 하다못해 친절하지만 않았어도.

하지만 도경은 그 모든 것에 해당됐다.

지한은 호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집히는 대로 입고 나온 차림새가 신경 쓰였다. 곁을 스친 호텔 직원들이 인사하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일부러 더 눈에 힘을 줬다. 그러면 알아서들 갈 길을 갔다. 세 명의 직원들과 셀 수 없는 투숙객들 옆을 지나쳐 지하로 내려온 지한은 드디어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시우의 일터 앞에 섰다.

긴장할 것 없었다. 집에서부터 행동으로 옮겨야 할 순서를 다 정리해왔다. 바에 앉는다. 지한을 발견한 시우가 놀라거든 너무 추워서 들어왔다고 둘러댄다. 시우 몰래 도경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없으면 그냥 시우가 끝날 때까지 술이나 한잔 시켜놓고 기다린다. 있으면, 있어도 술을 시킨다.

도경은 지한이 바에 나타난 연유를 미심쩍어하지 않을 것이다. 별장에서 통성명한 이후 처음으로 호텔 근처에서 마주쳤던 밤, 지한도 이 가게를 안다는 티는 냈었으니까.

설령 지한이 도경과 마주치고 싶어서 온 것이라 생각한다 한들…… 괜찮았다. 오해도 아니었고, 이제 와서 그딴 걸로 부끄러워할 사이도 아니었다.

단순히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실내는 히터 바람과 상관없이 서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속도감 있는 기타곡이 그나마 전체적인 공기를 너무 차가워지지 않게 붙들고 있었다.  복도로 들어가던 직원 한 명이 지한을 보고 정중히 인사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바 끄트머리 쪽에서 닦은 잔을 막 내려놓은 시우가 지한을 발견했다. 어, 하고 시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우의 손님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듯 직원은 다시 갈 길을 갔다.

“지한아.”

“밖에 너무 추워서.”

“아, 응. 내 말은, 왜 벌써 왔어. 추운데.”

시우는 너무 작아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지한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다른 손님들을 배려해 그러는 것이었다. 알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늦는 것보다는 낫잖아.”

“어……. 아니, 잘했어.”

잘하기는 뭘 잘했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말꼬리나 잡으려고 일찍 온 것이 아니었다. 중년 바텐더가 시우를 불렀다. 시우가 잠시 앞을 비운 사이, 지한은 맨 끝자리에 앉아 내부를 살폈다. 월요일이라 빈자리가 눈에 많이 띄었다. 도경으로 보이는 남자는 없었다. 바에도, 테이블에도.

속이 쓰렸다. 오래 굶은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장기에 고통을 가하는 원인은 실망이었다. 한숨을 삼키며 똑바로 앉았다.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나아지겠지 싶었는데, 바 안쪽에 진열된 리큐어 병들은 거꾸로 알고 싶지 않은 현실만 일깨웠다.

끌고 나온 오토바이는 어쩌려고 술 마실 계획을 세웠지?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시우가 일하는 호텔 바는 절대로 화를 내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지한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 냄새를 맡았다.

단 냄새. 솜사탕에서 나는 설탕 내가 아니라, 사과 속에 맺힌 꿀을 연상시키는.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무겁지 않고 가벼운 향. 혹시, 아니, 기대하지 말자, 기대는 더 큰 실망을 불러올 뿐이니까. 복잡한 심경을 안고서, 지한은 옆을 보았다.

“지한 씨?”

사람은 없고 반쯤 빈 글라스 하나와 휴지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자리에 도경이 서있었다. 월요일 밤 호텔 안에서 마주친 도경은 평소의 숨 막히는, 그렇지만 그래서 의미 있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단추는 끝까지 잠겨있고 단색 타이 위엔 다시 조끼를 입었다. 남의 사무실 안에서 보았던 도경은 온데간데없었다.

“아.”

정신이 들었다. 그날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날이라 해봐야 일주일이 채 안 되긴 했다. 느낌상으론 한 달도 더 된 것 같았다.

“멀리서 보고 지한 씨 같아 보인다 했는데 진짜여서 놀랐어요. 아, 그러고 보니까 지한 씨도 여기 와 본 적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맞아요?”

대화에 열중한 시우는 아직 이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지한은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의자에 올라앉은 도경이 지한 쪽으로 아예 상체를 틀었다.

“혼자 오신 거예요?”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빨리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목을 누르며 내 말에 기분 좋았냐고 묻잖아, 라고 묻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가고, 이제 도경은 다시 예절학교 졸업생 같은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지한은 도경보다 한두 살도 아니고 다섯 살이나 어렸다. 한국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한참 이전에 말 같은 건 놓고도 남았어야 정상이다.

그래서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문장에 경어를 넣는 남자가 양해도 없이 갑자기 험한 말을 하는 것은 단순한 반전 이상의 효과를 냈다. 지한의 생일날에도 그랬다. 남들이 했으면 그렇게까지 들리지 않았을 말도 도경이 하자 어딘가 모르게 위압적으로 들렸다. 지한으로 하여금 알아서 네, 네 하게까지 만들었다. 폭소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위압적이라니, 도경이?

“네.”

“잘됐다.” 도경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저도 혼자 왔어요.”

전에 나던 향이 무엇이었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을 만큼 익숙해진 단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더 가까이 오면 안 될 것 같다, 지한은 생각했다. 생각만 하고 자신의 몸을 뒤로 빼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그의 속에서 오가는 잡념들을 알지 못하는 도경이 얇은 입술을 바삐 움직였다.

“요새 제가 안 가리고 다양하게 마셔보고 있거든요, 지한 씨가 잘 마실 거 같은 술을 찾았어요.”

도경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에 넋을 놓고 있던 지한은 어느새 앞에 와 선 시우를 보고서 상체를 들썩였다.

“오늘 말고 지난주에 제가 마셨던 거 기억하시나요? 위스키였던 것 같은데 이름을 잘 모르겠어서.”

“혹시 이번 와인은 입맛에 잘 안 맞으세요?”

“아니요, 저 말고 여기 이분이 드실 거예요.”

프로답게 지한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도경하고만 눈을 맞추고 응대하던 시우는 어쩔 수 없이 지한을 쳐다보게 되었다. 도경이 지한의 술을 대신 시켜주는 상황에서도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가 펴졌을 뿐, 시우는 일상적인 표정을 유지했다. 물론 입까지는 프로답지 못했다.

“너 술 마시면 좀 이따 집에 어떻게 가려고.”

“네?”

“아, 손님께 한 말이 아니라. 얘, 아니, 이 사람한테.”

얘, 이 사람 등 호칭을 정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던 시우가 결국 문장을 다 마치지 못하고 말을 멈췄다. 도경은 의외라는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웃었다.

“지한 씨 정말 여기 단골이신가 봐요. 바텐더랑 거의 친구시네요.”

도경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나오는 지한의 이름이 시우가 아까보다 더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하지 않으려면 미리 돌려보았던 시뮬레이션을 되짚어봐야 했다. 시우가 도경과 지한의 인연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자고 다짐했었는지.

“친구 맞아요.”

사실 지한은 시뮬레이션 같은 것에 전혀 소질이 없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한 번, 그리고 진상 덕분에 일찍 빠져나올 수 있었던 가게를 나서면서 또 한 번. 시우가 보는 앞에서 도경과 말을 섞게 될 경우 취해야 할 태도나 변명을 떠올리느라 애썼던 지한은 두 번 다 골이 아파와 이렇다 할 결론 없이 때려치웠다.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있었기에 생긴 배짱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도경이 입을 함부로 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가령 시우가 둘이 어떻게 아느냐고 했을 때 대뜸 소현의 이름을 꺼낸다거나 할 리는 절대 없으리라는 그런.

“진짜요? 지한 씨랑 친구세요, 시우 씨?”

“……네. 맞아요.”

시우 씨, 하고 부르는 도경의 목소리에서 전혀 어색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부르는 게 처음이 아니란 소리였다.

“언제부터요?”

“음, 한, 다섯 살 때부터요.”

“와.”

줄곧 시우에게로 향해 있던 눈길을 지한에게 준 도경이 감탄했다.

“듣고 나서도 안 믿겨요. 두 분 정말 닮은 부분이 하나도 없어서. 친구끼리 꼭 닮아야 한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왜.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네.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그렇죠? 저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죠?”

“그럼요.”

위스키를 가지러 가려고 자리를 뜨기 전까지 시우는 도경과 영양가 없는 말을 몇 번 더 주고받았다. 영양가는 없되 도경의 얼굴에 웃음기를 퍼지게는 하는 말들이 오가는 동안 지한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기분에 빠졌다. 그는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보려고 애썼다. 왜일까. 왜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가.

10대 시절 지한이 싸움에 휘말리게 했던 원인의 8할 이상은 시우였다. 시우는 그 자리에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자꾸 시우를 언급했다. 시우보다 지한과 더 가까운 사람은 없다는 것을 전교생이 알았다. 옆 동네 양아치 새끼들도 알았다. 태울 집도 없고 모욕할 부모도 없고 하다못해 뺏을 돈도 없는 지한에게 남은 약점이라곤 시우밖에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들먹여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수법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먹혀들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지한은 시우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과하게 촉을 세우기 시작했다. 누가 자꾸 남들에게 시우와 지한의 관계를 과장해 흘리고 다니는지, 누가 둘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는지 누가 그들을 미워하는지 누가 시우에게 쓸데없이 말을 걸어대는지.

갈수록 지랄 맞게 구는 지한의 태도는 사태에 불만 지폈다. 남을 때려 입원시켰던 해쯤 되어선 이미 주변에 시우가 다른 사람에게 말 한마디만 걸어도 지한의 눈이 뒤집힌다는 식의 소문이 퍼져 있었다.

성인이 된 지도 5년이 꽉 찼으니 이제 친구들이 시우에게 말을 건다고 해서 호흡 곤란이 오는 일은 없었지만, 여전히 타인이 시우와 호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은 불안했다. 오히려 시우가 상대에게 날을 세우고 있을 땐 괜찮았다. 시우가 레오를 밀쳐가며 언성을 높였던 날 전혀 불안하지 않았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지한을 불안하게 만드는 순간은 그 아닌 다른 사람이 시우에게 웃으며 접근할 때였다. 도경이 수없이 불러본 듯 익숙하게 시우를 부르고 농담하는 바로 지금처럼.

“제가 한 말 때문에 시우 씨가 기분 나쁘셨을까요?”

시우가 자리를 뜨자 도경이 지한 쪽으로 몸을 숙이며 작게 말했다. 급작스럽게 현실로 소환된 지한은 말을 골랐다. 도경과의 물리적 거리가 필요 이상으로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쟤가 왜요.”

“안 닮았다고 했잖아요, 제가.”

“안 닮은 게 뭐. 같이 산다고 꼭 닮는 것도 아니고.”

“같이…… 아, 그때 말했던 친구가 시우 씨였구나.”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혀가 없으면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서 곤란한 상황도 없을 테니. 시우와 같이 사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굳이 도경에게 알려주고 싶은 정보는 아니었다. 이미 알려준 뒤였고 도경은 별로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지한만 불편했다.

한편으론 어차피 알게 될 거 자연스럽게 말함 셈이 돼서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도경과 마주치는 요행을 바라고 여기까지 오기로 결심했을 때 시우가 없을 줄 알았던 것은 아니니.

“좋으시겠어요.”

지한은 점점 더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도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좋긴 뭐가 좋다는 것인지, 웃기는 또 왜 그렇게 잘만 웃는 건지 몰랐다. 남은 짜증이 나 죽겠는데.

“뭐가요.”

“지한 씨한테 좋은 것만 해주고 싶어 하는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그 친구. 근데 그게 시우 씨라서 더 좋겠다구요.”

지한은 시간을 들여 도경이 한 말을 곱씹었다. 좋은 것만 해주고 싶어 하는 친구가 시우라서 더 좋겠다. 다섯 번 다시 생각해도 어떤 논리로 하는 소린지 알아낼 수 없었다.

“뭔 말인지 모르겠는데.”

“시우 씨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많이 좋아해줘서 더 좋겠다 그 말이에요.”

“왜……?”

“귀엽잖아요, 시우 씨. 착하고. 인기도 많고. 거기다 술도 잘 만들고.”

제 이야기를 하는 줄 어떻게 알고 시우가 귀신같이 나타났다. 도경이 주문한 위스키가 다 떨어져서 창고에 갔다 오느라 늦었다며 사과하는 시우를, 지한은 색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도경이 ‘귀엽다’고 표현한 포인트를 지한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평생 함께해온 얼굴은 객관적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시우가 지한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을 가졌단 것만 강제로 확인 사살당했다.

“아드벡 코리브레칸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술보단 꽃을 꽂아두기에 더 적합하게 생긴 유리잔 바닥에서 소량의 금색 액체가 반짝거렸다. 지한의 앞에 놓인 잔을 힐끗거린 도경이 시우에게 말했다.

“얼음은 없네요.”

“그때 드셨던 대로 준비해 드렸는데 아이스볼 필요하시면 바로.”

“아니에요. 이대로가 좋아요.”

자기들끼리만 아는 농담인지 뭔지, 대화를 끝낸 두 남자가 눈을 맞추고 동시에 웃었다. 새로 들어온 손님들이 도경과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앉자 시우가 반갑게 인사하며 그쪽으로 이동했다.

멀어지는 시우를 보는 도경의 입가에 웃음기가 남아있었다. 그는 잘 웃는 남자였다. 이는 잘 보이지 않아도 입가는 위로 올라가 있는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니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짜증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한은 도경이 주문한 위스키를 냅다 입 안에 들이부었다.

해봐야 두 모금이나 될 양의 위스키는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며 지한의 식도에 불을 붙였다. 10대 때부터 소주나 처마시고 다니느라 위스키가 얼마나 뜨거운 놈인지를 이제야 알았다.

타들어 가는 목을 손으로 잡은 지한은 또한 알게 되었다. 도경이 발음하는 시우의 이름을 들은 이래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던 까닭을. 시우를 대하는 도경의 태도가 너무 다정했다. 어릴 적 시우에게 친절한 척 접근하는 놈들을 쫓아내 버리던 때와 지금 상황의 차이점이라면, 이 순간 지한은 도경이 시우를 이용하려 들까 봐 촉이 곤두선 것이 아니라…… 아니라?

“어. 그걸 벌써 다 드셨…….”

아무한테나 방긋방긋 웃어주고 다니는 도경이 보기 싫어서 울화가 치민다는 것이었다.

“지한 씨 괜찮아요?”

“예?”

“그때처럼 또 그런 거 아니에요? 숨.”

위스키를 한꺼번에 마셔서 그렇단 소리는 차마 할 면목이 없어서, 지한은 조용히 목을 잡고 있던 손만 내렸다. 도경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끊어질라 치면 새로운 주제를 꺼내는 도경 덕분에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내내 둘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 탓에 타고나길 말주변이 없는 지한은 도경이 1차만 하고 연말 회식에서 빠졌다는 이야기나 조카에게 줄 선물을 샀는데 아직도 전해주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뚝뚝 잘린 답변만 내놓았다.

사그라질 줄 모르는 도경의 향도, 조명을 아래에서 반들반들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도 지한의 사고를 방해하기만 했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한을 의식해서인지 시우는 도경과 지한이 앉아 있는 자리를 잘 쳐다보지 않았다. 도경 혼자였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으리란 것쯤은 지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섭섭하진 않았다. 시우와 도경이 서로에게 말을 걸고 웃는 장면은 상상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꺼림칙했다. 길게 볼 것이 못 됐다.

지한이 도착했을 때가 열한 시를 넘은 시각이었기에, 도경의 잔이 비었을 땐 열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도경은 사 주겠다 어쩐다 하는 말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시우가 와 도경의 카드를 받았다. 그게 지한의 카드도 아니었건만 왠지 민망해진 지한은 영수증과 카드를 들고 오는 시우에게 인사하지 않고 먼저 일어났다.

도망치듯 먼저 나오고 나서야 도경에게 고맙단 말도 안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후 바에서 나온 도경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갈까요, 했다. 지한은 도경이 어딜 가자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따라나섰다.

서너 계단 위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도경의 발에 목적 없는 시선을 둔 채, 지한은 고맙다고 말할 타이밍을 쟀다. 감사합니다. 잘 마셨어요. 그 정도가 적당한 문장일 것이다. 입에 참 안 붙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에게 고맙단 말을 한 것이 대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살면서 그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린 없다. 안 하고 살았을 뿐. 얼마나 안 하고 살았으면 계단으로 2층을 오르고 나서도 되살아나는 기억이 없었다.

“참. 지한 씨 그날 하고 오셨던 목도리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목이 움츠러들었다. 지한은 뒷덜미를 쓸었다.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중요한 물건인가요?”

목도리의 행방은 아예 잊고 있었다. 시우도 그날 이후 목도리를 언급하지 않아 더더욱 떠올릴 기회가 없었다.

“시우가 선물한 거긴 한데.”

와, 하고 도경이 웃었다. 그의 입에서 김이 빠져나왔다. 입김마저 그에게서 나오면 연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같이 살면서 선물 같은 것도 줘요? 시우 씨 정말 좋은 친구다.”

“생일이라 준 거예요.”

“지한 씨 생일이었어요? 언제?”

“크리스마스.”

도경이 줄지어 선 모범택시들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날 생일이었어요?”

“네.”

“특별한 날 태어나셨네요.”

지한은 도경이 눈치채지 않도록 입을 최소한만 벌려 찬 공기를 마셨다. 속이 이상했다. 술을 많이 마셔 토기가 치밀 때와도, 호흡이 과해질 때와도 전혀 다른 제3의 울렁임이었다.

“그런데 어떡해요. 그 목도리 누구 건 줄 몰라서 버렸다고 제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아.”

“제가 똑같은 걸로 사다드릴게요.”

“그건 됐으니까.”

내보내야 했다. 그의 속을 조였다가, 잡아당겼다가 하며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말 덩어리를. 당장 뱉어내지 않으면 온몸이 꼬여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왜 그날 이후로 나한테 연락 안 한 건지 알려줘요.”

말하고 나니 시원했다. 허탈하기도 했다. 그리 쉬운 말을 왜 여태 망설이고 있었나, 자조하게 됐다.

줄곧 지한 쪽을 보고 있던 도경이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서로에게 향해 있던 시선도 자연스레 어긋났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비겁해 보였을 행동이었다. 도경은 비겁해 보이지 않았다.

“자존심 상해서요.”

지한은 시간이 정지되었다고 착각했다. 착각하는 와중에도 그것이 착각임은 잊지 않았다. 택시 기사들 몇 명이 모여 서서 웃음을 터뜨렸다. 올해에는 더 벌고 더 건강합시다! 덕담이 오가는 사이 도경이 코트 안에 숨겨져있던 손목을 뺐다. 그의 손목에 둘러지기엔 다소 무거워 보이는 시계가 호텔 건물 외관에 설치된 조명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새해네요.”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준 도경은 다시 손을 내리고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아까보다 조금은 더 진해진 것 같은 입김만이 그의 호흡이 멈추지 않았음을 알렸다.

지한은 혀로 아랫니 안쪽을 눌렀다. 그 어떤 한파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을 기세로 훤히 드러난 도경의 목덜미 군데군데가 빨갛게 얼어있었다.

만져보고 싶다. 눌러보고 싶다. 쓰다듬은 다음 깨물어보고 싶다.

모르는 척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 마음대로 내달리는 욕망들보다 훨씬 더 강한 소망이 있었다. 지한은 자신의 소망과 마주 보기로 했다. 더는 뒷걸음질 칠 곳도 없었다.

“지한 씨, 해피 뉴 이어.”

어차피 그들에게 긴 미래는 없을 것이다. 도경이 뭐에 눈이 돌아간 건진 몰라도 지금만큼은 지한을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허락되는 동안만이라도 그를 자세히 보고 싶었다. 그것이 지한의 소망이었다. 도경을 볼 수 있는 것. 가능한 한 오래.

“……해피 뉴 이어.”

귀한 저 상태 그대로.

***

30분도 안 되어 나온 시우는 까만 택시 앞에 서있는 지한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택시를 타고 집에 가게 될 것이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는지 지한이 손짓하는데도 한참을 멈칫거렸다.

“그 손님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시우를 제 발로 택시에 올라타게 한 것은 이미 택시비가 다 계산되었다는 기사의 말이었다. 타고 나서도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냔 눈빛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까 그 사람’이 내줬다는 지한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의심을 거두었던 시우는 얼마 안 되어 새로운 의심을 제기했다. 어떻게 아는 사이냐는 질문은 의심보다 의문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지한은 시우의 목소리에 의심이 묻어있다고 느꼈다.

“나 예전에 오디션 본 적 있잖아.”

“영화 일 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안 생겼어.”

“제작사 직원.”

“그렇구나.”

보육원에서 나온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연락을 끊지 않은 원장 부부의 성화에 준비도 안 된 채로 오디션 현장에 갔던 것은 진실이다. 그때 지한을 보고 번호를 물어본 사람이 있었던 것까지도 사실이다. 그 사람이 도경이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돈 많이 벌게 해줄까, 라는 대사를 설득력 있게 만들었던 대단한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고, 도경이 아니라 소현이었다.

“오토바이는 어디다 놨어?”

“터미널 주차장에.”

그것마저 거짓말이었다. 멋대로 택시비를 선결제해 버린 도경은 황당해하는 지한에게 오토바이를 밤새 거기다 두면 위험하니 지난번처럼 사람을 시켜 보안 좋은 주차장으로 옮겨 주겠다고 제안했다. 누가 그 철 지난 고물을 탐낼까 싶었지만, 지한은 도경의 과한 친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고물이라도 지한에겐 하나밖에 없는 애물단지였다.

지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경을 주제로 한 대화가 길어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시우도 막 일을 마쳐 피곤한 상태니 가만히 두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잠들 기세였다.

“아까 그 사람, 자주 와? 너희 바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져버렸다. 시우가 도경과 지한의 인연에 관련해 품을 수 있는 의심보다, 도경이 시우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게 된 계기가 지한에겐 더 중요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처음 왔던 날 이후로 안 빼먹고 꼬박꼬박 오더라. 맘에 들었나 봐.”

“술이?”

“그럼 바에서 술 말고 맘에 들 게 또 있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속마음만 들킨 것 같아 입을 다문 지한의 어깨에 무게가 실렸다. 좌석 시트 대신 지한을 받침대로 택한 시우가 잠꼬대처럼 말했다.

“저번에 호텔 대표 조카가 일주일 넘게 숙박한 적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둘이 친구인 것 같더라고.”

혹시 그 대표 조카가 건강하게 생겨서 입만 열면 살짝 모자라 보이는 남자는 아니었냐고 묻고 싶은 것을, 지한은 잘 참아냈다. 만에 하나 도경과 함께 바에 왔던 인물이 정말로 이안일 경우 그 사람은 또 어찌 아느냔 질문을 받아야 할 터였다.

“근데 의외다.”

“뭐가.”

“아니, 그 손님 말이야. 올 때마다 집에서 막 나온 것처럼 상태 멀쩡해 보이는 손님 진짜 없거든. 거기다 그 사람 냄새도 좋은 냄새 나. 항상 주변에만 가도…….”

“그래서 어쨌다고.”

택시 안이 조용해졌다. 시우는 여전히 지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지만, 말을 자른 지한에게서 변명이 나오지 않는 한 다시 말을 이어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한은 연한 입술 안쪽 살을 아까보다 더 세게 깨물었다. 조금만 더 이에 힘이 들어가면 피를 볼 것이다.

“방금 그건 화낸 게 아니라, 뭐가 의외냐고. 그런 뜻이었어.”

잠자코 있던 시우가 고개를 똑바로 세워 지한을 쳐다보았다. 지한도 시우를 보았다. 공격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순한 눈이 깜박거렸다.

“일 안 해도 되는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회사원이라 의외란 말이었어.”

그 싱거운 말을 끝으로 시우는 다시 지한의 어깨에 머리통을 뉘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나지 않았기에, 지한은 시우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꾸역꾸역 말을 거는 대신, 지한은 서리가 낀 창문에 머리를 댔다. 도로를 달리는 차의 창문으로 끊임없는 진동이 전해졌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몸이 조금이라도 아파야 속이 아파할 시간을 줄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방편도 별 소용이 없었다. 머리통을 몇 번이고 축축한 창문에 찧어도 속은 나아지지 않았다. 죽어도 시우를 상대로는 가지고 싶지 않은 감정이 뱃속 저 깊은 바닥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요사이 시우와 함께 있을 때마다 긴장하게 됐던 연유는 죄스러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시우가 지한의 연인은 아니더라도, 그냥 친구 역시 아니라서. 특정 인물에게 감정을 품는 것만으로도 왠지 시우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어서.

지한은 모르는 연유로 서로에게 눈을 맞추고 웃는 도경과 시우를 봤을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죄책감은 시우가 도경의 향을 언급하면서 단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도경 때문에 평생을 함께해온 시우에게 가지게 된 감정은 낯설고도 기가 막힌 것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었다. 도경과 시우가 서로를 보며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을 섞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그냥 그 둘이 다시는 한 공간에 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유치한 만큼 본능적인 바람에 시달리는 마음속에 시우를 향한 부채감은 더 이상 머무를 구역이 없었다.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30

평일 새벽의 호텔 로비엔 사람이 몇 남아있지 않았다. 낮엔 빈자리가 없는 리셉션을 지키는 직원도 두 명이 다였다. 지나다니는 투숙객이 없는지, 청소부는 없는지 어디선가 나타난 직원은 없는지 주위를 둘러본 도경은 그에 이어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입구를 마지막으로 내다보았다.

호텔에서 잠깐 볼일이 생겼다는 도경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지한은 아무 의심 없이 시우를 기다렸다. 시우가 나온 뒤엔 거의 즉시 도경이 미리 값을 지불한 택시에 올라타 호텔을 빠져나갔다. 그 과정을 호텔 안에서 다 지켜본 도경이 또 다시 호텔 밖을 살핌으로써 얻는 실질적 이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심리적 안정감이 다였다.

지한은 떠난 지 오래였고 고요한 로비엔 남의 통화를 엿들을 불청객이 없었다. 숨을 고른 도경은 아까부터 화면에 떠있던 번호를 눌렀다. 오늘이 첫 오픈이라던 클럽은 남한테 맡기고 노는 모양인지 신호음이 세 번 만에 끊겼다.

―올해 첫 통화가 너라니 믿을 수 없어.

“네가 찾으러 오라고 했던 물건 있지.”

오후에 무영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제 사무실에서 뭘 하느라 지한이 소파 위에 목도릴 버리고 간 건진 안 물어볼 테니 찾으러 오라고. 황 원장의 이른 새해 전화를 받고 온 사이 바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지한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곱게 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오토바이를 가져온 지한에게 술을 먹이고 싶지 않아 하는 시우의 눈빛을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암만 생각해도 그 하얗고 복슬복슬한 목도리는 지한이 고른 물건처럼 생기지 않았다. 도경의 질문들이 목도리의 출처를 캐내려 던진 미끼인 줄은 전혀 모르고, 지한은 성실하게 답변했다. 늘 머리보다 입이 먼저 움직이는 그의 습관은 도경에게 유익한 도움이 되었다.

“그거 지금 당장 갖다 버려.”

―걔가 갖다 버리래?

“내가 방금 갖다 버리라고 했잖아. 스피킹만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젠 리스닝도 안 되는 거야?”

―도경이 왜 이렇게 화났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백인 가족이 로비를 지나갔다. 도경은 꽜던 다리를 내리고 똑바로 앉았다.

“그 간단한 일이 그렇게 어려우면 그냥 놔둬. 내가 내일 가서 직접 버릴 테니까.”

―왜 그래. 알았어. 지금 갖다 버릴게. 아, 그리고 새해 복―.

대체 어디서 전화를 받는 중인지 온갖 잡소리가 다 끼어들어 왔다. 더는 귀를 고문시킬 수 없었다. 도경은 통화를 종료했다. 짧은 통화 시간이 깜박이던 액정은 얼마 못 가 암전되었다.

그는 다시 다리를 꽜다. 화가 나다니. 화나지 않았다. 분노는 소모적이기만 했다. 그딴 데 쏟을 기운은 없었다. 얼떨결에 생일을 털어놔 버린 지한에게 줄 선물을 궁리하기도 바빴다. 물론 도경은 지한의 주민등록 사본까지 봤지만 지한은 그 사실을 몰랐으므로 당사자가 말해주기 전까진 선물도 줄 수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목도리 같은 건 싹 잊어버릴 수 있는 선물이어야 했다. 그 뭉친 털처럼 생긴 직물은 정말이지 지한에게 걸쳐놓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다섯 살 때부터 함께 살았다면서 왜 그런 것도 모르지?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도경의 신경을 건드리다 못해 쿡쿡 쑤시고 있는 얼굴은 놀랍게도 지한이 아닌 시우의 것이었다. 거슬렸다. 거슬리기가 도를 지나쳤다. 이건 마치.

비유가 불가능했다. 견주어 비교할 데이터가 없는 기분이었으니까.

로 블로(Low blow)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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