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Lucky Punch (9/38)

  9. Lucky Punch

#21

오늘로써 이번 달에 시우를 데리러 오토바이를 끌고 나온 것도 한 네 번째는 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다섯 번째. 네 번이든 다섯 번이든 횟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은 횟수의 날들이 지나가는 동안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접어든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추워졌다.

지한은 담배 필터를 씹었다. 밤바람이 알아서 불씨를 세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머잖아 필터로 다가오는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담배를 뱉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그는 또 한 번 필터를 씹었다.

기억하기로는 분명 일주일에 한 번쯤 온다고 했었다. 요새 일주일에 한 번은 오거든요, 그리 말하면서 도경이 지었던 표정은 더욱 또렷하게 기억났다. 입술 끝을 올린 듯 만 듯. 말투나 행동만 그런 것이 아니라 표정 하나에까지 조심성이 배어있었다. 웃을 때도 소리 없이 웃는 남자다웠다.

그래, 그 남자가 네 번인지 다섯 번인지 모를 날 중 단 하루도 호텔에서 나와 바로 택시를 잡는 대신 편의점으로 걸어오지 않았다는 점도 뭐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을 수 있었다. 어차피 지한은 도경과 마주치는 우연만을 목적으로 바람을 뚫고 호텔까지 오는 것이 아니었다. 차가 끊긴 후에 퇴근하는 시우는 영락없이 남의 차를 얻어 타거나 택시를 타고 귀가해야 했다. 하는 일도 없는 주제에 시우를 데리러 오고 가는 일쯤은 기꺼이 할 수 있었다. 그 정도 염치는 있어야 인간이었다.

뭐 어쨌든 크게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제 입으로 바에 일주일에 한 번은 온다고 했던 도경이 여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한들. 그게 거짓말이었든, 진실이었으나 갑자기 바빠졌든 그도 아니면 그저 지한과 시간이 안 맞았든. 이미 우연으로 두 번이나 마주쳤다. 세 번 네 번 이어졌으면 더는 우연임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을 것이다.

입술에 뜨거운 기운이 전해졌다. 그새 끝까지 타들어온 불씨가 필터를 위협하고 있었다. 지한은 담배를 뱉었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에 부딪힌 꽁초에서 작은 불꽃들이 부산스럽게 튀어 올랐다.

한계가 오고 있었다. 생각의 한계. 원래 지한은 매사에 신중한 성격이 아니었다. 침착함과도 거리가 멀었고, 이성적인 사고와는 어려서부터 연이 크게 없었다. 그런 그도 나이를 먹어 스물다섯 성인이 되었다. 화가 난다고 아무나 패고 아무거나 부수는 짓은 최선을 다해 참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인내심의 원천은 감옥에 가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였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으로는 힘들었다. 주먹은 사려도 말이나 행동까지 제어하기엔 아직 나이를 덜 먹은 모양이었다. 지한은 다리를 떨며 안쪽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런 것까지 따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도경에게 먼저 전화한다고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연락 횟수로 애정의 크기를 재는 고등학생 연인도 아니고.

아무도 지한에게 그 정도로까지 조심스러워지라고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펼쳐놓은 방어막에 깔려 호흡이 곤란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소현과는 서로 주고받는 관계란 방패막이라도 있었지, 도경에겐 지한이 딱히 줄 것도 없었다. 도경이 지한에게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 와중에 지한은 도경이 필요했다. 왜? 그야 그에게는 소현의 그 새끼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할 소명이 있었으므로.

그가 하루에 서너 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대여섯 번씩 도경에게 전화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그 소명 때문이었다. 분명히.

아마도.

지한은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내일도 또 이런 식으로 이랬다저랬다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며칠째 못 누르고 있던 통화 버튼을 눌러버리자 속이 시원해졌다.

통화 연결음이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걱정이 지한의 위를 조였다. 안 받으면 어떡하지? 그 걱정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깨닫자 헛웃음이 다 났다. 안 받으면 안 받는 거지 대비는 무슨. 지랄하고 자빠졌다.

―여보세요?

그리고 전화를 받는 도경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로 그 순간, 지한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헛웃음을 치고 있었는지 깜박 잊었다. 그의 머릿속은 도경에게 건넬 인사말을 고르느라 금세 포화 상태가 되었다. 예의를 하도 갖춰 온몸이 근지러워지는 방식으로 말을 건네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과, 그냥 다 집어치우고 하고 싶은 말만 하자는 충동이 팽팽하게 맞부딪혔다.

“날씨가 안 좋아져요.”

말하고 나서도 지한은 자신이 지금 뭐라고 했는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였는지를 몇 초간 되짚어보았다. 자기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곱씹어봐야 하는 것은 머리보다 입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무의식중에 나간 말임에도 존댓말은 잃지 않아 다행이었다. 와인바 웨이터에게도 존칭을 갖춰 쓰는 도경이 만일 지한의 평소 말버릇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네?

“날씨 좋아지면 연락하려고 했는데.”

지한은 왼손을 허공에 대고 쭉 뻗었다. 올 때보다는 바람이 기세를 살짝 꺾었다.

“안 좋아진다고요.”

도경에게선 바로 답이 없었다. 귓가로 어렴풋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주로 계단을 오르내릴 때 듣곤 하는 소리였다.

잠시 후 도경이 물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요?

지한은 입술을 벌리고 숨을 내보냈다. 담배 연기 못지않은 입김이 커다랗게 뿜어져 나왔다.

“뭐가요. 날씨가?”

―공기도 맑고, 눈도 안 오고.

날씨를 체크하려 창문을 열기라도 한 것인지, 도경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좋은 날씨 같아요. 오늘.

불현듯 지한은 도경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대화에 응하고 있는지를 인식했다. 예고 없이 연락해 앞뒤 다 잘라먹고 던진 이야기를 도경은 마치 조금 전까지 하다 만 대화처럼 부드럽게 받았다.

색달랐다. 왜 너는 네 할 말만 하냐, 왜 그렇게 멋대로 구냐, 사람하고 대화할 줄을 모르냐. 평생 들으면서 살아온 말들인데 도경에게서 그런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직까진.

“이게 좋은 날씨 같다고요?”

―아니에요?

그게 말이 되는 건가, 그런데?

“나오라면 나올 만큼?”

도경처럼 생긴 남자가 돈도 많고 착하기까지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럴 필욘 없을 것 같은데요.

가슴 안에 있는 뭔가가 살짝 아래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지한은 그 알 수 없는 기분을 애써 눌렀다.

“왜요?”

“벌써 나와 있어서요.”

도경의 목소리가 각기 다른 스피커에서 나오는 것처럼 겹쳐져 들렸다. 지한은 귓가에서 휴대폰을 뗐다. 호텔 주차장을 둘러싼 수풀 사이로 작게 난 길에서 막 나온 도경이 지한과 마찬가지로 귓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아래로 내렸다.

“지한 씨 안 추우세요?”

다가오는 도경을 바라보며 지한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고 많이들 말하듯이, 삶은 드라마틱한 우연과 우연의 연결로 전개되었다. 드라마는 반드시 좋거나 나쁘지 않았다. 개개인에게 주어진 장르가 달랐다. 누구에겐 코미디가, 누구에겐 액션이 주어졌다.

그리고 지한의 장르는 여태껏 신파에 가까웠다. 구질구질하기만 하고 눈물 쏟아지는 사랑 이야기는 없는 드라마를 분류하는 이름이 따로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없었다. 지한의 인생은 신파에 가깝지만 재미도 없고 교훈도 없는, 공짜로 보여줘도 별로 보고 싶지 않을 극이었다.

“별로…….”

이런 우연은 지한의 장르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편의점 안에서 나오는 불빛이 아니었으면 또 도경의 코트 색을 착각할 뻔했다. 오늘 도경은 붉은 기가 감도는 진한 색 코트를 입었다. 끝까지 잠근 드레스셔츠 위로 보이는 목은 역시나 휑했다. 여전히 추워 보이지는 않아서 신기했다.

두세 걸음, 아무리 많아도 다섯 걸음까지는 안 될 거리에서 멈춘 도경이 지한의 상체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추위를 안 타시나 봐요.”

지한은 도경의 눈이 담고 있는 자신의 상체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처럼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입고 나왔는데 이제 보니 지난겨울 소현이 준 점퍼였다. 뭘 집어도 거기서 거기인 지한의 옷장에서 몇 안 되는 고가의 상품이었다.

“이 옷 안 얇아요. 생긴 것보다.”

도경의 눈동자가 위로 움직였다.

“그래요?”

“예.”

도경의 눈길이 다시 지한의 상체로 옮겨갔다. 지한이 걸친 점퍼의 얇기를 측정해보려는 것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옷에 필요 이상의 관심이 쏟아지는 동안, 지한은 도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붉게 얼어있는 귀와 달리 어째서인지 얼굴에는 붉은 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얇은 김이 드문드문 도경의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꼭 다문 것처럼 보이는 입술 어딘가에 틈이 벌어져있는 모양이었다. 보기엔 전혀 틈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한은 침을 삼켰다. 언제 대상을 바꿨는지 모를 도경의 시선이 지한의 얼굴에 와 있었다.

“…….”

도경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입가에 남아 떠도는 최소한의 웃음기도 없었다. 점퍼에 줬던 것 이상의 관심을 지한의 얼굴에 쏟는 도경의 눈은 빛에 따라 가늘어지곤 하는 특정 동물들의 동공을 연상시켰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도경의 눈이 실제로 그 동물들처럼 동공의 형태를 바꾸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려는 찰나였다. 도경이 눈을 살짝 접으며 웃었다.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풀렸다.

“그런데 지한 씨, 제가 지난번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

“나한테요?”

“원래 그런 표정을 잘 지으시는 건가요?”

지한은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감촉으로 표정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내 표정, 표정이 왜요.”

“약간 졸린 것 같기도 하고.”

도경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지한은 가까워진 거리에 멈춘 도경의 발을 쳐다보았다. 발등을 덮는 갈색 구두가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 있었다. 바지와 신발 사이에 빈틈이 제법 있었으나 오늘은 양말을 신었다. 발목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독특한 냄새가 났다. 지한도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많아 봐야 두 발자국이었다. 냄새가 더 진해졌다. 확실했다. 언젠가 분명히 맡아본 적 있는 그것은 냄새가 아니라 향이었다.

하지만 언제 누구에게서 났던 향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안 취했는데.”

취한 것 같다는 도경의 말에 정말로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한은 단호히 말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는 무엇에도 취하지 않았다.

그런 식의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도경의 눈이 미세하게 크기를 키웠다. 곧 그가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숨죽여 웃었다. 곡선을 그리는 눈이 아니었다면 웃는지 어쩌는지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봤다고 벌써 지한은 도경의 습관을 하나 이상 파악해가고 있었다. 웃을 때 손등을 입술에 대는 것은 도경의 습관 중 하나였다. 그렇게 웃는 남자를 지한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조용히 웃은 도경이 손을 아래로 내렸다.

“알아요. 안 취한 거.”

도경이 한쪽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지한에게 더 가까이 오려는 것처럼.

“그래 보인다는 거죠.”

그리고 정말로 도경은 그렇게 했다. 해봐야 두 발자국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있던 지한은 도경이 왜 더 다가오는 것인지 몰라 당황한 나머지 영하의 기온을 자랑하는 실외에서 식은땀을 흘릴 뻔했다.

지한의 근본 없는 예측은 빗겨나갔다. 도경은 지한의 코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의 신체 중 조금이라도 스친 부위는 팔뚝이 전부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코트가 비닐 재질의 점퍼에 닿았다 떨어지며 내는 소리는 별로 듣기 좋은 것이 못 되었다.

지한은 도경의 동선을 따라 몸을 반쯤 돌렸다. 지한을 지나친 도경이 멈춰선 곳은 편의점과 연결된 레스토랑 건물의 벽 앞이었다. 그곳엔 지한의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 오토바이를 만져보기라도 하려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예측은 또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토바이를 등지고 선 도경이 운전석에 걸터앉듯 살짝 몸을 기댄 채 지한을 쳐다보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꼿꼿하게 밖에 내놓고 있었다. 추워 보인다, 고 지한은 생각했다. 모를 일이었다. 손과 똑같이 하얀 목덜미는 추워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손만 추워 보이는지.

“오늘 날씨, 정말 별로예요?”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부딪혀오는 바람에 시달린 뺨이 따끔거렸다. 아까 통화로 다 들어놓고 굳이 다시 물어보는 속내는 모르겠다만, 몇 번을 물어봐도 지한의 대답은 똑같았다.

“예.”

“전화 주셔서 저는 오늘 날씨가 좋다는 얘긴 줄 알았는데.”

도경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동작에 꼭 의미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다시 거세지기 시작하는 겨울 밤바람 속에서 똑바로 서있기가 힘들어서였을 수도 있다. 갑자기 피곤해진 것일 수도 있고, 그냥 별 이유 없이 몸을 움직인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한은 그 단순한 동작에서 왠지 도경이 아쉬워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었다는 거죠.”

그리고 얼마든지 아닐 수도 있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한 불안감에 조심스러워하는 데에 더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재지 않고 전화해서 되는 대로 대화했다. 그래도 도경은 불편해하지 않았다.

불편해선 친해질 수 없었다. 백날을 마주쳐봐야 친해지지 못하면 도경은 지한에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인연이 되고 말았다. 소멸 직전이었던 지한의 자신감이 꾸물대며 되살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통이 안 된단 평을 듣는 지한을, 도경은 이해하기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술 마셨어요?”

도경이 턱을 끄덕이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와인 한 잔.”

“어차피 위험해서 안 되겠네.”

“뭐가 위험해요?”

“술기운 때문에 몸에 힘 풀릴 수도 있으니까 안 된다고요. 타본 적도 없잖아요.”

그제야 지한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은 도경은 쭉 편 검지를 접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한 시간도 넘었는데, 마신 지.”

“한 시간 넘게 술도 없이 바에 앉아 있었다고요?”

“저는 그렇고. 일행은 제 몫까지 두 배로 마셨고.”

일행. 도경의 나이, 생김새, 성격 등 모든 면을 고려했을 때 그에게 함께 술 마실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사유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한은 몰래 놀라야 했다. 바 안의 도경을 머릿속에 그릴라치면 왜인지 항상 혼자 있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도경의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일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장례식 이후 처음 마주쳤던 별장에서 도경은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테라스에 나가 있었다. 함께 나가 있던 이안 말곤 거의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이안과 술을 마시다 온 것일까, 지레짐작하던 지한은 곧 자신의 추론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도경의 일행이 반드시 친구라고 단정 지을 증거는 없었다. 친구가 아니라 연인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도경 같은 남자에게 연인이 없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일행이 있는데 혼자 나왔어요?”

“아니요, 걘 자기 룸으로 올라갔죠.”

자기 룸. 도경과는 관계없는 그 사람만의 룸. 지한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기에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 여기 있는 줄 알고 나왔어요?”

“바는 호텔 지하에 있는데요.”

똑바로 세워졌던 도경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기울어졌다.

“거기선 밖이 안 보여요. 아시겠지만.”

지한은 시우가 일하는 바에 발을 들여놓은 적 없었다. 몇 모금이면 끝날 알록달록한 술을 몇만 원씩 주고 마실 마음도 없었고, 가봤자 시우의 상사나 동료들에게 둘이 무슨 사이냔 질문으로 시작하는 취조만 실컷 들어야 할 것이 뻔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지하에서 지상이 보이지 않으리란 것쯤은 꼭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식이었다. 하나 마나 한 소린 줄 알면서도 알고 나온 것이냐 물어본 이유는 타이밍이 심하게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도경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가 하필 지한의 전화를 받으며 호텔에서 빠져나온 것은 그저 우연이라는 이야기였다.

지한은 의심을 거두었다. 도경에겐 애써 그런 거짓 우연을 지어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는 김이 나왔고 바람은 맨얼굴을 점점 더 거칠게 할퀴었다. 궂은 날씨란 생각엔 변화가 없었다. 그렇지만 지한은 핸들 걸이에 걸쳐놓았던 헬멧을 빼 들고 물었다.

“안 놓칠 자신 있어요?”

“뭘 안 놓칠 자신이요?”

“나를.”

오토바이 뒷자리를 폭이 좁고 뚜껑이 없는 자동차쯤으로 착각하고 탔다가 발작하는 군상들을 10대 때부터 지겹게 봐왔다. 입으로 자신 있다고 말해놓고 1분도 안 되어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간들 역시 많이 봐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도경의 입으로 자신 있다는 말을 듣지 않고는 뒤에 태우지 않을 작정이었다.

“속도 내기 시작하면 멈추라고 해도 잘 안 들리니까.”

도경이 활짝 웃었다. 고른 이가 잠시 드러났다 입술에 가려졌다.

“멈춰달라고 안 해요.”

오늘 마주친 것 또한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을 믿었듯, 지한은 이번에도 도경을 믿었다. 멈춰달라고 안 한다는 도경의 목소리에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아무런 보호 장치도 쓰지 않은 지한의 머리통에 신경 쓰인다는 눈빛을 두어 번 정도 보내기는 했으나, 도경은 헬멧을 얌전히 받아들었다. 남의 오토바이 뒤에 타본 적은 없어도 헬멧을 써본 적은 있는지 착용하는 솜씨가 제법 깔끔했다.

지한은 주머니 안에 처박아놨던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사고 없이 밤거리를 달릴 자신은 있어도 맨얼굴로 바람을 다 맞아낼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둘의 첫 주행이 스타트를 끊었다. 옆으로도, 뒤로도 기댈 곳 없이 좁고 딱딱한 자리 위에 앉은 탑승자는 오로지 운전자에게만 의지할 수 있었다. 잡을 핸들마저 없는 탑승자에게 주어지는 선택권은 오직 하나, 앞사람의 허리에 두 팔을 최대한 단단히 두르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 사이로 달리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지한은 서너 번 정도 명치 부근에 둘린 도경의 팔이 숨쉬기 힘들 만큼 세게 조여 온다는 느낌을 받아야 했으나, 그럴 때마다 얼마 안 가 도경이 알아서 팔에 힘을 풀어준 덕분에 호흡곤란으로 사고를 내는 경험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등에 닿은 사람의 몸과 그 몸이 가진 온도가 많이 전달될수록 함께 핸들을 잡고 있다는 기분에 빠지기 쉬웠다. 그런 연유로 지한은 한 고층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기어를 한 단계씩 낮추다 마침내 완전히 멈췄을 때까지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영하의 온도가 실감 나기 시작한 것은 뒷좌석에서 내리다 말고 비틀거리는 도경의 손목을 가까스로 잡아챈 직후였다. 의도치 않게 체온이 뚝 떨어지는 체험을 한 지한은 사이드 스탠드를 펴 오토바이를 세웠다.

“괜찮아요?”

“아, 저 괜찮아요. 정말.”

헬멧을 벗은 도경이 눌린 머리를 정리하려다 또 한 번 발을 헛디뎠다. 지한이 다시 도경의 팔을 붙잡았다. 아무 데나 잡다 보니 이번엔 팔꿈치 윗부분이 손에 잡혔는데, 도경의 팔뚝은 지한이 상상했던 것만큼 가늘지 않았다. 하긴. 성인 남자의 팔이 한 손에 잡힐 만큼 연약할 리 없었다.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자꾸 넘어질라 그러잖아.”

팔뚝을 지한의 손에 붙들린 상태로, 도경이 입술을 살짝 열었다 도로 다물었다. 모든 창문이 빠짐없이 암전된 상가 건물 앞. 빛이라곤 가로등밖에 없었다. 어두침침한 불빛 속눈썹이 도경의 눈 밑에 그림자를 퍼뜨렸다. 아까 맡았던 향이 또 밀려들었다. 지한과 도경의 몸이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그들은 의도치 않게 수상한 자세를 연출하고 있었다.

지한은 도경의 팔을 손에서 놓았다.

“아. 그러니까 그…… 괜찮은 거 맞아요?”

눈을 느리게 몇 번 깜박인 뒤, 도경이 싱긋 미소 지었다.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 이제 안 그래요.”

목소리를 들으나, 표정으로 보나 도경은 정말 멀쩡해진 듯했다. 지한 혼자 과민 반응한 것 같아 민망했다.

“이만하면 합격인가요?”

입술만 깨물고 있던 지한이 예? 하고 되물었다. 도경은 한 손 위에 올려둔 헬멧 표면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 놓쳤잖아요.”

지한은 도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도경은 편의점 앞에서 지한이 품었던 의심을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안 놓칠 자신 있냐고 물었던 지한에게 도경은 오토바이가 달리는 내내 느슨해지지 않고 허리를 압박해오는 것으로 보답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머리에 입력되었음에도 지한은 좀처럼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안 놓쳤다는 그 말이 꼭 나는 너를 어떤 경우에도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성명처럼 들렸기에, 그는 이 상황 자체가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도경의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이, 지한은 가장 이해되지 않았다.

#22

모든 것은 안전했다. 물건들은 제자리에 있었고 유리창은 거울 대용으로 써도 손색없을 만큼 깨끗했다. 황 원장이 보내준 방향제에선 말린 꽃 냄새가 났다. 심장은 기분 나쁜 두근거림 없이 규칙적인 박동 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경은 유리로 된 벽 앞에 서서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웃거나 크게 숨을 쉬기 전 입 안을 보이지 않으려다 보니 생긴 습관이었다. 그 본인 말곤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서는 별로 실용적인 습관이 아니었다. 실용성과는 관계없이, 그는 한숨을 뱉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양쪽에서 머리통을 잡고 누르는 것처럼 관자놀이가 찌릿했다. 통증이라 부르기 미약한 그 느낌은 눈 깜짝할 사이 두피를 타고 뒤통수로 퍼져나갔다. 그의 몸이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웃고 싶어졌다. 도경은 손을 올리려다 말고 도로 내렸다. 불과 몇십 초 전 실용적이지 못한 습관이라고 생각했으면서 또 똑같은 짓을 할 뻔했다. 혼자 있을 땐 큰 소리로 웃어도, 배를 잡고 굴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가끔은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웃었다. 잇새로 바람이 빠져나갔다. 한 번으론 부족했다. 그래서 또 웃었다. 여전히 남들이 웃을 때 내는 그, 방정맞고 정신 사나운 소리는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남을 비웃기 위해서도, 남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웃겨서 웃는 중이었다.

한 30분 전까지만 해도 도경은 지한과 함께 있었다. 지한이 도경을 집까지 데려다주었기 때문이다. 지한에게 처음부터 그럴 의도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경은 지한의 주소를 알고 있지만 지한은 도경의 주소를 몰랐다.

주소를 알았더라도 지한이 밤늦게 호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이유는 시우였지, 도경의 운전수 노릇을 하고 싶어서였을 수 없다. 시우를 기다린단 핑계로 도경과 마주치고 싶어서였을 순 있어도.

여러모로 지한은 운이 없다고 하기 어려운 인간이었다. 심부름센터의 정보에 기대어 통계를 낸다면 지한이 시우를 직접 데리러 오는 날은 평균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

도경과는 벌써 세 번째로 마주쳤다. 지한도 도경처럼 마주치길 노리고 평소보다 더 자주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순전한 우연이었는지는 하늘만 알 노릇이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연속적으로 마주쳤다.

지한의 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경을 뒤에 태우고 달리던 지한은 조금 쉬었다 가야겠다고 느꼈는지 뭔지 뜬금없는 지점에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곳이 도경의 아파트 단지에서 100미터도 안 떨어진 곳이란 것을 알고 멈췄을 리가 없었다. 도경이 이제 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 지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며칠이 지나 떠올라도 웃길 것 같았다.

「여기서 집에 간다고요? 걸어서?」

「여기가 저희 동네니까요.」

뭐든 한 번에 그치면 우연이지만 두 번, 세 번 계속 이어지면 그것은 스스로의 운이었다. 지한은 날이 추우니 건물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도경은 거절하지 않고 두 번째로 지한의 오토바이 위에 올라탔다.

「저기.」

지한이 건물 앞에 멈춘 오토바이에서 내린 도경을 불렀을 때, 도경은 그의 아파트 동수까지 알게 된 지한에게 적합할 인사말을 골라야 한다는 것도 잊고 의아해했다. 그가 사는 아파트 동수는 가족을 제외하면 이안 정도나 되어야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이제까지 만난 횟수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지한은 단숨에 알아냈다. 별다른 시도 없이, 정말로 그냥 어쩌다가.

「네?」

그렇게 운 좋은 지한이 어째서 거지같이 살게 된 것인지가 의아했던 도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납득했다. 지한에겐 멀쩡하게 살아가려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가족, 집, 돈, 능력. 운만 있어 봐야 소용없었다. 알아보는 눈과 잡는 순발력이 있어야만 운을 키울 수 있었다. 아마 지한은 큰 기회로 발전할 수 있었던 수많은 순간을 그냥 보냈을 것이다. 아둔하게도.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

도경의 것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가려는 것 같더니, 결국 지한이 취한 행동이라곤 입을 다물고 도경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도경은 차분히 지한이 다시 말하고 싶어질 때를 기다렸다. 호텔 앞에서부터 지한은 정신없는 놈처럼 굴고 있었다. 원체 말을 유창하게 못 하는 유형 같기는 했다.

「아니요.」

다만 오늘의 지한은 특히 더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개차반처럼 굴지만 않는다면야 지한이 좀 더 정신없어지든 말든 도경은 개의치 않았다. 도경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그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지한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집중했다.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안 그래도 형편없는 지한의 말솜씨가 더 맥락 없어지는지. 어떤 요인이 지한을 당황하게 만들고 멍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지.

무엇이 지한의 정신을 앗아가는지.

도경은 넓은 창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시야가 넓어지며 더 많은 야경을 끌어왔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되새겼다. 잊지 않는 것. 용서하지 않는 것. 이기는 것. 그것들만이 가치 있었다. 가치 있는 것만이 그를 두근거리게 했다.

그는 가슴에 손바닥을 얹었다. 속도를 높인 박동이 피부를 뚫고 그의 손바닥에 부딪혔다 나가떨어졌다. 맨 처음부터, 겨울 산바람이 몸속까지 시리게 만들던 그 테라스 위에서부터 그의 감은 틀린 적 없었다.

지한은 도경에게서 눈을 떼기 힘들어 한다.

커피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진동하며 울었다. 이안이었다. 평소였다면 무시하고 넘겼을 늦은 시각이었으나 기꺼이 베푼다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관자놀이를 압박하는 증상도 순간적으로 날아갈 만큼 기분이 좋아진 덕분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어……. 안 자고 있었어?

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면 전화를 걸지 말았어야 정상이었다. 어렵사리 좋아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려 했다. 도경은 애써 미간을 폈다. 좋은 기분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안 자고 있었으니까 전화를 받았겠지?”

―아 그치. 미안.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고 내가 방금 물어본 것 같은데.”

―어! 어. 그게, 형 집. 집에 잘 들어갔어?

애써 펴놓은 미간이 도로 구겨졌다.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나? 그런 것 같지 않아서 더 불행했다.

“그걸 물어보려고 전화했다고?”

―아니, 왜냐면 형이랑 술 마셨다 그래서, 무영이 형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무영과 바에서 만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도경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도경의 잔을 채웠던 술은 무영이 통화하러 자리를 비우거나 화장실에 갈 때마다 착실하게 얼음통에 버려졌다. 무영 같은 인간 앞에서 취하는 것은 사기꾼 앞에서 통장 잔고를 읊는 것에 상응하는 바보짓이었다.

“잘 들어왔어. 집이야.”

―혼자서?

휴대폰을 귀에서 잠시 떼어낸 도경은 이안의 얼굴이 보이는 것도 아닌 화면을 노려보았다. 생각이란 걸 않고 사는 놈인 거야 아는 바인데 지금은 뭔가 달랐다. 그냥 생각 없이 하는 말이라기엔 목적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혼자지, 그럼.”

―아…… 혼자라고? 지금?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너 나 모르는 사이에 나랑 결혼했어?”

남의 목적에 맞춰 움직이는 일만큼 진저리나게 싫은 것도 드물었다. 늘 하던 대로 도경이 화살의 방향을 틀자 이안은 우당탕거리며 후퇴했다.

―무슨. 아니. 왜, 뭐라고?

“네가 그렇게 굴고 있잖아. 회장님 잡는 우리 황 원장님처럼.”

―아니, 아니. 알았어. 잘 들어갔으면 됐어. 끊을게. 잘 자!

횡설수설한 이안은 후퇴하는 것으론 모자라 아예 퇴장해 버렸다. 만족한 도경은 좋은 기분을 잃지 않은 상태로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씻고, 머리까지 탈탈 다 말린 다음 주방으로 간 그는 싱크대 옆 찬장을 열었다. 다양한 크기의 통들 맨 앞에 나와 있는 약통을 열어 손바닥에 대고 살짝 흔들자 통만큼 하얀 약 한 알이 툭 튀어나왔다.

손톱 절반만도 못한 크기의 알약을 잠시 내려다본 그는 통을 다시 흔들었다. 한 알이 더 튀어나왔다. 규칙 없이 그어진 손금들 위에 놓인 알약은 이제 둘이 되었다. 안심이 되었다. 오늘 밤은 절대 하나로 잠들 수 없을 테니.

수면을 도와줄 약 두 알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그는 물이 담긴 컵을 손에 든 채로 싱크대에 몸을 기댔다. 식탁 위에 달린 시계의 시침이 2에 거의 도달했다.

지한이 시우와 같이 집에 도착했을 만한 시간이었다. 시우의 퇴근이 늦었다면 아직도 도로 위를 한참 달리는 중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둘이 함께 있을 시간이란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도경은 남은 물을 마셨다. 느리게, 한 모금씩. 권 회장의 새 여자를 찾아낼 때마다 세상에 둘도 없을 난장판을 벌이는 황 원장처럼 굴어야 하는 인간은 이안이 아니라 지한이었다. 그래야 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될 것이다. 도경에게서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지한의 눈은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호기심, 경계심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제3의 감정. 도경의 팔을 붙들던 손아귀가 알려주고 도경의 얼굴에서 하염없이 머무르던 시선이 알려주었다. 그 감정이 어떤 결로 흐르는지. 다 그렇게 시작하는 법이었다.

발정 난 모든 생물은 판단력이 흐려졌다. 보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의 정체를 깨달은 지한이 이성을 잃어버릴 때까지, 도경은 열심히 가증을 떨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열심히.

영혼을 바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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