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Stepping (8/38)

  8. Stepping

#19

도경은 어느덧 여섯 번째 방문하는 바의 내부를 훑었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었다.

오늘도 시우는 도경에게 와인을 추천했다. 추천해주는 대로 받아 마신 와인은 약간 묽었다. 근처 와인 바에서 지한에게 마시라고 내주었던 와인과 살짝 비슷한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시우는 언제나와 같이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고,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았으며, 따라서 도경과 몇 마디라도 진득하게 나누려면 아직 멀었다.

시우가 한가하지 않다는 것이 꼭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일단 도경은 ‘이시우가 일하는 바에 찾아와 단골로 눈도장을 찍으며 친해진다’는 계획 자체에 오점이 있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지난번 지한과 술을 마셔본 뒤로 확실하게 알았다. 시우보다 지한이 훨씬 도경을 덜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덜 긴장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도경이 되는 대로 떠들어도 지한의 반응이 한결같아서 대화가 끊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시우가 사석에서 어떻게 구는지는 몰라도, 도경과 만날 때는 늘 바텐더였다. 바텐더는 손님에게 불친절하게 굴 수 없었다. 아무리 도경의 말을 관심 있게 듣는 것처럼 보여도 그게 진심일진 당사자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생글거리는 낯짝과는 별개로 그다지 호락호락한 성격도 아니었다. 이안이 가장 최근에 들고 온 심부름센터의 보고로는 지한이 대낮에 한 호스트바 안으로 들어갔는데, 나올 땐 시우의 손에 이끌려 나오더라고 했다. 어째 보충설명 없이도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가 잘 그려지는 상황이었다. 빤하지 않은가. 정신 빠진 지한이 똑같이 정신 빠진 누군가의 유혹에 넘어가기 직전 정의로운 시우에 의해 구해지는 시나리오.

이안에게 이제 그 심부름센터와는 그만 일하자고 했다. 함께 일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약점도 많아졌다. 나중에 다른 델 알아보더라도 더는 같은 곳에 의뢰를 넣고 싶지 않았다. 이안이 있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딱 하루 만에 미행은 못 할 짓이라며 때려치웠다. 굳이 지한의 동선을 쫓지 않아도 다시 만날 핑계가 생겼으므로, 도경은 일단 한발 물러섰다.

어쨌든 시우를 아예 포기할 수는 없었다. 웬만하면 시우가 도경에게 호감을 넘어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신뢰를 가지게 만들어야 좋았다. 그래야 나중에 원하는 대로 지한을 굴리기 편리했다. 굴린다? 떨어트린다. 내친다.

도경은 반드시 지한을 밀어버릴 것이다. 보호막 없는 구렁텅이 속으로.

“이게 누구야.”

어딘가 어눌한 발음으로 건네진 인사말엔 인사를 받는 대상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경이, 혼자야?”

불길한 예감이 맞아 들었다. 사촌인지 오촌인지가 하는 호텔이라고 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짧은 마음의 준비를 마친 도경은 입가에 미소를 단 채 몸을 돌렸다. 한눈에 국적을 짐작하기 어려운 남자가 양팔을 펼쳐 도경을 끌어안았다. 도경도 예의상 등을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진한 남성용 향수 냄새가 후각을 찔렀다.

“그런데 너 더 어려졌네? 좋은 일 있었어?”

도경, 이안뿐 아니라 소현과도 아주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온 무영은 외국인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피 때문에 생김새 이외에도 발음이나 말투가 원어민이라기엔 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한국에서도 툭하면 영어로 떠들곤 했는데 그 내용이 영 정상적이지 못했다. 누가 알아들을까 봐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했더니 그다음부터는 한국어로 이상한 소리를 당당하게 했다. 문제는 언어가 아니라 무영의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다.

“좋은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 말 잘못했어. 소현이가 죽었는데 좋은 일이라니 나빴다. 많이 걱정했는데, 내가.”

소식을 너무 늦게 접해서 못 왔다는 변명은 건너 들었다. 장례식도 안 온 주제에 입은 아주 싱싱히 살아있었다.

“누구를 걱정해.”

“누구기는, 너지. 그럼 내가 죽은 사람을 걱정해?”

가끔 도경은 무영이 순수하게 걱정될 때가 있었다. 정신과는 이런 새끼가 가야 하는 거 아닐까? 알 바 아니긴 했다.

“난 괜찮아.”

“그래, 너 진짜 괜찮아 보여. 난 네가 소현이 따라 죽는다고 할까 봐 진심으로 걱정했어.”

바로 옆자리라 한계가 있었지만, 도경은 무영에게서 몸을 최대한 떨어트렸다.

“걱정은 고마운데, 안 죽어.”

“너 또 말 안 되는 소리 하네.”

남의 속도 모르고 도경이 멀어진 만큼 가까이 다가온 무영이 눈을 깜박였다.

“아직 안 죽은 거지. 우리 다 죽어.”

잠시, 도경은 무영에게 부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확 나가버려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눈을 부산스럽게 깜박이며 부담스러운 자세로 도경을 한참 쳐다본 후, 무영이 몸을 뒤로 물렸다.

“미안, 미안. 내가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어두운 말만 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해맑았다. 무영은 그렇게 착각하기 딱 좋은 유형의 인간이었다. 못 본 지 좀 됐다고 망각할 뻔했다. 밀림에 던져놔도 살아나올 놈인 것을.

이미 아는 사이인지, 중년의 수석 바텐더가 무영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무영은 호텔 바를 거의 안방 취급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바텐더와 무영이 삼촌과 조카쯤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어제 먹었던 거랑 똑같이 주고, 얘는 그냥 클럽 소다.”

“아뇨. 전 이거 다 마시고 주문하겠습니다.”

와인글라스를 본 무영은 그제야 도경이 술을 마시고 있었음을 알고 놀라워했다. 도경으로선 바에 와서 술을 안 마시고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린 무영이 더 놀라웠다.

“이제는 술 좋아하게 됐어?”

“원래도 싫어하진 않았어.”

무영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시작하면 끝도 없었다. 그래서 준비된 상태로 만나려고 했던 것인데.

“그럼 크리스마스에 너도 파티 와. 술 좋아하는 사람 다 부를 거야.”

도경은 손톱만큼의 진심도 들어가지 않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쪽에서 술병을 꺼내 바에 올려놓던 시우가 마침 이쪽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보고 지은 미소라고 여겼는지 시우도 눈매를 접어 웃었다.

“왜 대답 안 해. 온다고?”

“시간 되면. 봐서.”

“저녁에 여기서 혼자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시간 없는 거 아니잖아.”

“일행 없어?”

계속 헛소리만 늘어놓을 거면 사라지란 말을 돌려 했다. 못 알아들을 만큼 아둔한 두뇌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무영은 못 알아들은 척 술을 마셨다.

“없어. 나 한국 온 거 가족들 빼면 이안이밖에 몰라, 아직.”

도경은 소현의 달력에서 본 무영의 귀국 날짜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거짓말하는 솜씨만큼은 보고 배울 필요가 있었다.

“아, 도경이 너도 알고 있었지? 이안이 아는 건 너도 다 아니까.”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무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말하고 다녀도 돼. 근데 어차피 너 친구 없어서 그런 걱정 안 해.”

무영의 면상에 남은 와인을 뿌리고 싶어질 때마다 도경은 생판 모르는 사람의 오토바이 뒤에 탄 자신을 떠올려보았다. 무서운 것은 둘째 치고 신뢰할 수 없었다. 사고가 나서 아스팔트에 몸을 가는 일만큼은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무례하고 영악하긴 하지만, 무영은 타는 것이라면 차부터 오토바이, 사이클까지 다 잘 몰았다. 국내 모터사이클 대회에서 2등을 한 적도 있었다. 그 뒤에 잠깐 탄다고 날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보단 지한이 더 걱정이었다. 그 낡아빠진 물건 뒤에 탔다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작동을 멈추기라도 한다면? 있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너무 걱정하다 잠까지 설치는 도경을 황 원장이 처음 병원으로 끌고 갔던 것이 벌써 20년 전 일이다.

당시 열 살 초등학생이었던 그를 괴롭혔던 망상은 권 회장이 매일 출근하는 고층 빌딩에 누가 폭발물을 설치해놨으면 어쩔 것이냔 식이었다. 일찍이 자식을 전문가들에게 데리고 다닌 부모 덕분에 도경은 정신과에서 받아먹을 수 있는 약을 모조리 섭렵하며 자랐다. 그 결과 그는 큰 소리를 치지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얼굴도 붉히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뭐든 속으로 혼자서만 하는 어른이 되었다.

위스키를 무슨 주스 마시듯 홀딱 다 마셔버린 무영이 아, 맞다, 하고 도경의 주의를 끌었다.

“너 레이싱에 관심이 생겼어?”

그새 이안이 나불거린 모양이었다. 도경이 이안에게 이 이야기를 발설하지 말라고 했던가? 하지 않았다. 도경이 별말 없었으니 괜찮을 줄 알고 미리 말한 것이었다. 당최 어디까지 멍청한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레이싱에 관심이 생긴 게 아니라.”

“그냥 뒤에만 타고 싶은 거야? 나는 그게 더 좋아. 기대하고 왔으니까 제발 맞다 해줘.”

“뭘 기대해.”

“권도경이 오토바이 뒤에 타는 거 죽기 전에 보고 싶어.”

시우가 이쪽으로 오려는 것 같았다. 도경이 첫 주문을 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 듯했다. 시우가 오토바이나 레이싱 같은 단어를 듣는다고 별 일이야 생기겠느냐 만은, 그래도 찝찝했다.

급한 마음에 무영의 허벅지를 잡았던 도경은 이내 그게 일반적으로 잘 만지지 않는 부위란 것을 깨닫고 얼른 손을 뗐다. 무영은 도경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댔다는 것 자체에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왜 그래?”

도경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시우가 바로 앞까지 와서 멈추었다. 도경의 글라스가 비지 않은 것 때문에 입맛에 맞지 않느냐고 묻고 싶은데, 그렇다고 손님들의 대화를 방해할 순 없으니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도경은 나오자마자 비어버린 무영의 유리잔을 들어 보였다.

“같은 걸로 한 잔 더 주시겠어요?”

도경의 와인을 힐끗거린 시우는 군소리 없이 새 잔을 꺼냈다. 무영의 메뉴는 와인만큼이나 세팅이 간단했다. 얼음을 넣고 그 위에 정해진 양만큼의 위스키를 부으면 끝이었다. 새 잔이 무영의 앞에 놓였다. 빈 잔은 소리 없이 거둬졌다. 그 모든 과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다른 손님이 시우를 불렀다. 시우가 자리를 옮기자마자 무영이 도경을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왜 내 술을 네가 대신 시켜?”

“더 마실 거잖아.”

“쟤한테 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어. 나 쟤가 만든 거 마셔보지도 않았는데.”

“똑같은 술인데 무슨 상관이야. 그냥 마셔.”

어차피 무영이 있으니 시우와 대화를 나누긴 글렀다. 2주 연속 헛걸음을 했다. 없던 피로감이 훅 밀려들었다. 남은 와인만 마시고 자리를 뜨는 편이 심신에 이로울 것 같았다.

시우가 내놓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무영은 순수하게 위스키와 얼음으로만 이루어진 메뉴의 맛이 거기서 거기란 것을 깨달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쭉 그렇게 앉아 있기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도경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방금은 뭐였어. 왜 그랬어?”

도경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와인을 마셨다. 무영에게 시우에 대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지한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다 설명해줄 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 얘기는 다른 데서 하자.”

“뭐. 무슨 얘기.”

“네가 하던 얘기.”

“내가 하던…… 아, 오토바이?”

그 이야기는 다른 데서 하자는 말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굳이 큰 소리로 그 이야기를 꺼내는 심보가 고약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도경은 눈을 깜박이는 척하며 시우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바 끄트머리에 앉은 손님을 응대하는 중이었다. 이쪽 대화에 신경 쓸 겨를은 없어 보였다.

“그래.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

“왜? 누가 들을까 봐? 괜찮아, 여기 사람들 다 입 무거워.”

“알아. 그런 문제가 아니야.”

도경을 빤히 쳐다보던 무영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정확하게 시우가 있는 쪽으로. 그러더니 받은 지 몇 분 되지도 않은 위스키를 단숨에 입 안에 털어 넣곤 손을 번쩍 들었다.

손님에게 막 칵테일을 만들어 내놓은 시우가 무영의 손짓을 보고 다가왔다. 도경은 곤혹스러운 심정을 들키지 않으려 와인글라스의 얇은 다리를 만지작거렸다.

“얘 마시는 거 뭐야?”

무영이 도경의 와인을 가리키며 시우에게 물었다. 삼촌뻘인 수석 바텐더에게도 세상 편하게 말하는 무영이니 그 아래 직급인 시우에겐 더했다. 시우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와인의 원산지며 당도 같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시우가 결코 말을 늘어지게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도, 무영은 중간에 말을 잘랐다.

“알겠으니까 나도 하나 줘.”

“같은 와인으로 한 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시우가 글라스를 세팅하고 병을 꺼내는 과정을 유심히 바라보던 무영이 물었다. 몇 살? 도경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이번에도 시우는 웃음을 잃지 않고 대응했다.

“스물다섯입니다.”

“오, 스물다섯.”

“네.”

“얘 여기 자주 와?”

무영이 도경을 가리켰다. 시우의 시선이 도경에게 와 닿았다. 무해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잊지 말아야 했다. 시우는 만만하지 않은 남자였다. 같은 편으로 못 만들면 도경에게는 유해할.

“그런 걸 왜 물어봐.”

“왜, 물어보면 안 돼?”

시우가 무영의 글라스에 와인을 따랐다. 검은색과 섞인 보라색에 가까워 보이는 액체가 깊숙한 잔 아래를 채웠다. 소명을 다한 와인 병이 똑바로 세워졌다. 그때까지 무영의 질문에 대한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답은 안 하는 거야?”

“그냥 가셔도 됩니다.”

도경의 말을 듣고도 시우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무영이 호텔 대표의 조카란 정보 정도는 미리 들었을 것이다. 호텔 직원에겐 단호한 태도를 취할 권한이 없었다. 이럴 땐 도경이 더 세게 나가야 했다.

“가세요, 진짜로. 제가 알아서 할게요.”

몇 초간 도경과 무영을 번갈아 본 시우는 곧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곤 돌아섰다. 어이없는 기분으로 옆을 본 도경은 더 어이가 없어졌다. 자신이 부린 진상 짓을 다 잊은 무영이 글라스 안의 와인 향이나 맡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래. 그거 마시고 취했어?”

“너 쟤랑 뭐 있지?”

도경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무영이 맞는 소릴 해서가 아니었다. 벌써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속도 때문이었다.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있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으면 왜 그렇게 쟤 눈치 봐? 너 남들 기분 신경 쓰고 그런 사람 아니잖아.”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안 돼? 왜?”

그놈의 왜, 왜 소리 한 번만 더 들었다간 하루치 약을 다 토해내고 싶어질 것이 분명했다. 와인을 벌컥 들이마신 도경은 아직도 다 비지 않은 글라스를 바에 내려놓았다.

“이번 주말에 시간 빼놔. 일요일이면 더 좋고.”

지금 도경을 건드렸다간 아름답지 못한 꼴을 보게 되리라고 판단했는지, 무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곧바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짜증을 돋웠다.

“레슨비는 뭐로 줄 거야?”

“뭘 원하는데.”

“음…….”

눈을 내리깔고 고심하는 척하던 무영이 도경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생각해보고 그때 말해줄게.”

시우가 무영과 도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까 스치듯 눈이 마주쳐 눈웃음쳤을 때와는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가 궁금해 던지는 의도적인 시선이었다.

도경은 무영의 손을 쳐냈다. 무영이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일반 동양인의 것보다 훨씬 밝은색 눈동자를 마주한 채로, 도경은 생각했다. 머릿속에 새겨 넣듯 천천히, 한 글자씩.

이 새끼도 우지한이랑 같이 묻어버리고 싶다.

생각을 마친 도경은 한 모금도 안 남은 와인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20

도경은 언제나 튀었다.

언제나. 한시도 묻히지 않았다. 사회적 위치나 비싼 옷, 세팅된 머리 같은 이점이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대상이었다. 정작 그 자신은 딱히 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인 적 없고, 실은 타인들의 지나친 관심이나 시선을 극도로 성가셔하는 부류로 보였다. 그러나 삶의 방향이 반드시 주인의 편의를 위한 쪽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왔다. 곱다는 말은 부모 세대도 잘 쓰지 않는, 조부모의 입에서나 들을 법한 표현이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이상한 가짜 머리를 뒤집어쓴 여자들이 그런 소릴 종종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서 배웠는지 기억은 잘 안 나도 하여튼 도경을 보고 있자면 곧잘 그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곱다. 피부도, 목덜미도, 손도, 발도, 손목, 발목…… 까지 가면 약간 스스로에게 변태적 성욕이 있는 것 같아서 자제하게 됐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어쩌다 바지 아래로 드러난 도경의 발목을 보게 되면, 그리고 자연스레 튀어나온 뼈와 핏줄의 위치가 보이는 살가죽의 색깔에 감탄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도경은 공부도 잘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부터 논술에서 과학, 수학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분야가 없었다. 미국으로 가선 남들이 낯선 땅과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울거나, 너무 일찍 술을 입에 대거나 그도 아니면 불법적인 루트로 구한 약을 몸뚱이에 집어넣는 동안 도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 과목씩 해치웠다. 마치 게임 스테이지를 하나씩 깨나가듯.

물론 도경도 인간이라 다 잘하지는 못했다. 그가 특히 약세를 보인 과목은 예체능, 그중에서도 음악이었다. 하늘은 그에게 음악성을 주지 않은 대신 음악에 소질이 있는 여자를 붙여주었다. 소현은 예체능이라면 다 잘했다.

도경과 소현은 열다섯 즈음부터 사귀기 시작했으므로 그 무렵부터 도경의 음악 성적도 오르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안 될 짓이라는 정설이 있었건만 그 둘은 개인 과외나 다름없는 행위를 몇 년 이상 지속한 후에도 헤어지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은 그 둘이 애초에 살가운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남들은 진작 헤어졌을 일을 그냥 넘긴 것일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그랬다.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도경이 본격적으로 미친놈 소리를 듣게 된 데에는 소현의 공로가 컸다. 소현도 도경처럼 튀는 인간이었다.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인간관계였다. 도경과 달리 소현은 친구가 많았다. 일단 한 번 친해진 사람이라면 생일을 잊는 법이 없어 매번 거한 선물을 안겼다. 주인공 대신 파티를 도맡아 열어주기도 했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소현을 좋아하게 됐다.

오해 말아야 했다. 소현은 절대 착하거나 자비로운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똑똑한 만큼 남을 살살 약 올리는 말솜씨도 일품이었고, 가끔 크게 싸울 일이 있으면 갖은 방법으로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친구가 많았다. 상대편에겐 내다 버리기도 아까운 쓰레기처럼 더럽게 굴었지만 같은 편일 땐 그만큼 믿음직스러운 전력을 지원했으니까.

그렇다면 상식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도경은 소현의 편이었다. 연인보다 더 가까운 편은 가족 말고 없었다. 따라서 소현이 친구들보다 도경에게 더 최선을 다했으리라 짐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아니었다. 도경과 소현은 친구들끼리 모일 때마다 싸웠다. 나이를 더 먹고 나선 아예 친구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둘 중 하나만 나오는 경우가 잦아졌다. 나오는 쪽은 주로 소현이었다. 소현이 아름다워지고 어른스러워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풀 안으로 들어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경을 미쳤다고 여겼다.

편견을 거두고, 소현에 대한 애도의 마음도 잠시 뒤로 젖혀 두고 나서 완전한 제3자의 시각을 가지고 다시 보면 어떨까. 도경은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오기나 고집으로 그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도경은, 미치지는 않았다. 범법을 저지른 적도 없고, 소현과 그렇게 매일 싸워댔어도 뉴스에 나오는 놈들처럼 미쳤다고 판단되는 짓은 무엇 하나 저지르지 않았다. 남들이 저를 두고 떠드는 소리를 다 알아도 단 한 번을 그들에게 찾아가 따지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 미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의 성격이 평범하지 않은 것은 맞았다. 때때로 도경은 너무 지나치게 청결에 집착하거나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과일이 조금 뭉개졌다는 이유로 카펫 전체를 다 드러내 교체한 일이라든가, 소현의 근본 없는 시비(도경은 여자보다 더 피부가 고우니 남성복 말고 여성복을 입으라면서 여성용 의류가 진열되어 있는 명품관을 가리킨다든가)에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일 등을 떠올리면 확실히 모두와 잘 지낼 수 있는 유형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도경이 먼저 시작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일반적이라 여겨지는 수준을 넘어 과민하게 반응할 때가 있었을 뿐, 시작은 다 남들이 했다.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데 가만히 맞고만 있을 이가 있으면 나와 보라지. 그런 놈은 이 세상에 없었다. 누구든 자기 일이 되면 과하게 기뻐하고 슬퍼했다.

고로 이날 이때까지 도경은 튀는 운명을 타고났지만 결코 미치지 않았고 어쩌면 피해자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이안은, 오늘 처음으로 그 믿음에 약간의 균열이 가는 것을 느꼈다.

까만 오토바이 한 대가 이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급정거했다. 자동차가 급정거했을 때처럼 듣기 싫은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텅 빈 주차장으로 뛰어내리자마자 헬멧을 벗어젖힌 도경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고성이 튀어나왔다.

“왜 사람이 말을 하는데 제때 못 알아들어?”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도경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치곤 단연 고성에 속했다. 그는 어느 경우에도 한결같은 톤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엔진 소음이 멈췄다. 헬멧 실드를 위로 올린 무영이 뭐? 하고 되물었다. 정말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도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멈추라고 한 거 못 들었냐고.”

“멈추라고 했어? 못 들었지. 들었으면 멈췄,”

“어떻게 그걸 못 들어, 네가 인간이면 귀가 두 개 달렸는데.”

완공이 되려면 아직 먼 호텔 주차장 부지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혹시 잘못 들은 걸까 봐 한 다섯 번 곱씹었으나 역시 이안의 귀는 잘못되지 않았다.

방금 도경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그렇게 타지 말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더니 오토바이 뒷자리에 처음 타본 경험이 강렬했던 모양이다. 웃고 싶어졌으나 꾹 참았다. 여기서 웃었다간 도경이 한 달간 안 만나주고도 남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귓구멍을 더 열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제 다시 타시겠어요?”

기분을 풀어주려는 농담이었다면 완전 실패였다. 도경은 무영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돌아서 가버렸다. 외곽이라 딱히 갈 데도 없을 텐데 멀어지는 속도가 엄청났다. 멀어지면서도 옆구리에 헬멧은 소중히 끌어안고 가는 도경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무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 저래? 오늘 약을 안 먹고 나왔나?”

“도경이 형 요새 기분 안 좋아서 그래.”

“언제는 좋았고?”

“그거랑은 다르지. 소현이 누나 죽은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도경이 욕먹는 걸 듣기 싫어 일단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뒤로 갈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 도경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소현이 죽은 뒤로 딱히 더 안 좋아진 줄도 잘 모르겠다. 안 좋아지기는커녕 최근엔 한참 상태가 좋아 보인다고 느꼈다. 인간이면 귀가 두 개 달렸다는, 어쩌란 것인지 모를 소리를 하기 전까진.

이안이 오토바이 옆으로 다가가자 무영이 헬멧을 벗었다. 까맣게 염색한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눌려 있었다. 한국인들과는 정반대로 무영의 두피에선 갈색 뿌리가 자라나고 있었다.

“이안이 너라도 탈래?”

“됐거든요. 그 뒤에 다신 안 탈 거라니까. 난 오래오래 살 거야.”

“아이고, 그래요? 옛날엔 마흔 되기 전에 죽겠다 했는데 이제 다 커서 오래 살고 싶어요?”

“형 아이고 하지 말라니까. 할아버지 같다고.”

무영이 이안에게 가까이 와보라고 손짓했다. 더 가까이 갈 것도 없어서 얼굴만 좀 더 들이밀었더니만 머리통에 난데없는 헬멧이 올라왔다.

“이거 너 쓰면 되잖아. 한 번만 같이 타자. 여기까지 와서 권도경 지랄 때문에 그냥 돌아가면 슬퍼.”

“내가 뒤에 타면 더 재밌어져?”

“당연하지.”

“그냥 형 혼자 타. 여기 서서 봐줄게.”

헬멧을 도로 품안에 안게 된 무영이 과장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키워놓으니까 막말하고 형은 진짜 죽고 싶다.”

행여나 도경이 듣는 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는단 소리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려던 이안은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소현이 죽자마자 새로운 일이 너무 많았다. 심부름센터를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데다가 지한과 시우란 새로운 인물들에까지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도경의 상태에 대해선 깊게 걱정해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간과할 일이 아닌 것이었다. 소현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지한을 찾아내느라, 그다음엔 만나고 다니느라 바쁜 요사이의 도경이 오히려 상태가 좋아 보였다는 점이.

온갖 심부름은 다 하고 다니면서 정작 도경이 뭘 하려는 건진 하나도 모르고 있다니. 이안은 스스로를 쥐어박고 싶어졌다. 멍청이같이.

도경이 사라진 쪽에서 작은 점이 나타났다. 빠르게 크기를 키워나가며 돌아오고 있는 점은 바로 도경이었다. 무영이 도경의 취향에 맞췄다며 특별하게 준비해온 빨간색 헬멧은 여전히 옆구리와 팔 사이에 안겨 있었다.

“오, 와, 도경이 벌써 사과하러 온 거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걸 바꿔야겠어.”

오토바이 뒤꽁무니 앞에 선 도경은 무영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제 할 말만 했다. 도경이 이거, 라고 하면서 턱으로 가리킨 것은 무영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였다.

“뭐. 오토바이를 바꿔야겠다고? 왜?”

“이거 얼마 주고 샀어.”

“오천인가? 그 정도였을걸.”

“그러니까. 안 돼.”

무영은 당최 도경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불행히도 이안은 도경이 왜 무영의 5천만 원짜리 오토바이를 거부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심부름센터 측에서 찍어다 준 사진을 통해 처음 봤던 지한의 고물 오토바이가 눈앞에 파팟 하고 찍혔다 사라졌다.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의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머릿속을 울렸다.

하지만 인간은 냉정해질 줄도 알아야 했다. 머리카락 한 올 흩어지는 것도 싫어하는 도경이 자다 봉창 두드리는 놈처럼 오토바이에 탈 결심을 할 만한 이유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난 한 백만 원짜리가 필요한 거라고.”

지한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

무영이 황당하다는 듯이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 바람에 그의 한 손에 들려있던 헬멧이 이안의 발 부근으로 떨어졌다.

“백만 원짜리 없어?”

“처음부터 말을 했어야지, 그럼. 그랬으면 내가 아까 별장에서 이거 말고.”

“그래서 없냐고.”

무영이 도경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그 정도면 많이 참은 것이었다. 도경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헬멧을 주워 무영의 손에 돌려주며, 이안이 끼어들었다.

“형은 여기 있어. 내가 무영이 형이랑 가서 제일 비슷한 걸로 찾아올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한의 오토바이가 얼마나 후지게 생겼는지를 아는 사람은 셋 중 도경과 이안 둘이었는데, 도경이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무영의 별장까지 갔다 오는 수고를 하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이안이 무영을 끌고 갔다 오는 수밖에.

별장에 먼저 도착해 있던 무영은 이안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분통을 터뜨렸다. 기껏 도와준답시고 제일 좋은 걸 골라 끌고 나왔더니 뒤늦게 한단 소리가 백만 원짜리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단 부분에서 한 번, 이안은 차로, 무영은 오토바이로 별장까지 왔다 갔다 하는 수고를 하는 동안 도경 혼자 편하게 기다린다는 부분에서 또 한 번.

“아니, 그리고 백만 원짜린 무슨 소리야.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한정판 자가용들을 모셔두는 용도로 지어졌던 별장은 무영의 부친이 장기간 입원하면서 무영의 것이 되었다. 사실상 첩인 외국 여자 밑에서 태어난 무영은 정실의 자식들에게 양아치 같은 취미란 소릴 들어가면서 꿋꿋하게 별장 안을 오토바이들로 채웠다. 매일 손질한 티가 팍팍 나는 오토바이들을 지날수록 이안은 희망의 크기를 줄이게 됐다. 아무리 비슷한 것을 찾으려 해도 무영의 별장에서 그 정도로 후진 물건을 찾을 순 없었다.

그나마 크기가 제일 작아 보이는 오토바이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이안에게 무영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권도경한테 무슨 일 있지?”

“……몰라.”

“무슨 일인데 저렇게 미쳤어?”

일단 도경이 미쳤다는 전제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만일 미친놈처럼 보인다 해도 오래 사귄 여자의 죽음 때문일 거라 추측해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영은 도경이 소현 때문에 슬퍼서 미쳤다는 가정을 아예 후보에도 올려놓지 않은 듯했다. 이안은 도경의 역성을 들지 않기 위해 오토바이를 더욱 열심히 보았다.

“지금은 안 되고 내가 봐서 나중에… 도경이 형 허락받고 얘기해줄게.”

“넌 너무 착해.”

아니다. 이안은 착하지 않았다. 그냥 도경의 편인 것에 불과했다.

이안이 고른 모델은 산 지 1년이 좀 안 된 일본산이었다. 한 5백쯤이었던 것 같다고 해서 도경에겐 그냥 더 낮춰서 거짓말하기로 합의했다. 이안이 보기엔 가격이 똑같다고 탔을 때의 느낌까지 똑같을 리가 없었지만 도경은 그런 디테일들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를 위해 하는 거짓말이니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또 중간에 멈추라고 소리 지르고 나서 못 들었다고 나한테 화내고 그러면 진짜.”

“멈추라고 안 해.”

먼젓번 것보다 훨씬 아담한 흰색 오토바이가 두 남자를 태우고 내달렸다. 주차장 방지턱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이안은 콩알만 하게 멀어진 오토바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슬퍼졌다. 아무래도 도경이 살짝 미쳐버린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 이유가 소현도 아니고, 다른 여자도 아닌 지한이라면 조금 더 슬퍼질 것 같았다.

조금? 엄청. 엄청 많이.

지한은 잘생긴 만큼 무식하고, 근본 없고, 돈도 없는데 빚만 있었다. 잃을 게 전무한 놈이었다. 생김새도, 집안도, 능력도, 돈도 남들보다 우월해 튀는 도경은 가진 것이 몽땅 다 잃을 것들이었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불리했다.

도경이 자존심을 목숨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잘 아는 바였다. 도경이 왜 지한을 그냥 무시할 수 없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걸 다 떠나서라도 이안은 도경이 미쳤든 말든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만에 하나 지한이 도경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거나, 그를 화나게 하거나, 더 나아가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해를 입힌다면, 이안은 정말 보고만 있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한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이안이 늘 도경에 한해서는 준비되어 있을 뿐이었다.

짧은 탈주를 마친 오토바이가 이안에게로 되돌아왔다. 첫 시도 후와 별 차이 없는 속도로 빠르게 땅을 밟고 선 도경은 헬멧을 힘겹게 벗어냈다.

“토할 것 같아.”

원래도 환한 피부가 허옇게 질려 있었다. 이안은 도경의 헬멧을 끌어안으며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불안하니 지한을 감시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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